21화.
사전협의나 안내가 전혀 되지 않은 부분이었다. 인상을 쓰고 있으니 지운이 내 표정을 보며 깔깔 웃었다. 의외로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동진은 덩치에 맞지 않는 조막만 한 반짝이 스티커에 홀려 신난 상태였다.
의자를 준비한 보람이 없게 지운과 동진 모두 내 다리를 둘러싸고 바닥에 털퍼덕 앉아서 어떻게 꾸밀지 각을 쟀다.
“근데 동진아, 너 어렸을 때 꿈이 미술 선생님이었다고 했잖아. 왜 하필 미술 선생님이야?”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기도 했고. 어렸을 땐 미술 선생님이 다른 과목보다 꿀 빠는 것처럼 보여서.”
“와, 생각보다 세속적인 이유네.”
이야기를 나누며 동진이 매직으로 깁스에 선을 슥슥 그었다.
“근데 솔직히 나이츠에서 탱커가 꿀 빠는 포지션은 아닌데 탱커가 된 이유가 있어?”
솔직히 거의 모든 게임과 같이 나이츠에서도 탱커는 노잼 클래스로 유명했다. 버퍼가 놓친 시야 봐주기, 팀원 보호, 어그로 관리. 적팀 주요 스킬 빼놓기, 군중 제어 스킬로 이니시에이팅 등 할 일은 더럽게 많은데 어지간하게 잘해서는 티도 잘 안 난다. 자칫 잘못하면 도구나 인간 시야 토템으로 거듭나는 버퍼보다 개노잼이라는 평도 있었다.
“탱커 하는 데 이유가 왜 필요해. 그냥 하는 거지.”
“전형적인 탱커 답변 잘 들었고요.”
“나이츠에서 꿀 빠는 포지션이 어딨어.”
“그건 그래.”
지운도 내가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따로 말을 시킨다거나 하지 않아 편안했다. 가만히 앉아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옛날 생각도 나고 나름 재밌었다.
어느새 깁스에 알록달록하게 그라피티와 그림이 채워졌다. 이야기에 정신 팔려 지운이 내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는 줄도 몰랐다. 엄지발톱에 야무지게 삼각형도 그려 놨다.
“여기에 그 노래 틀어 주세요. 따라다랏따.”
“아, 형 요즘 애들은 그 노래 몰라.“
“아니, 이걸 왜 모르지?”
러브하우스 BGM을 불렀다가 동진에게 면박을 받는 지운이었다. 한껏 화려해진 깁스와 발톱이 부담스러웠다.
“아무튼, 메이크 오버 성공!”
***
촬영은 짧게 끝났다.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목발을 갖다 달라고 그렇게 얘기했지만, 동진이 배고프다며 빨리 가자고 나를 업었고 지운이 내 목발을 챙기더니 옆구리에 끼고는 복도를 우다다 달리는 중이었다.
그사이 복도 모퉁이에서 제현과 문은영 아나운서가 나타났다.
“어, 혀니혀니 안녕.”
언제 저런 애칭을 또 붙였는지 지운이 반갑게 인사했다.
“오신다는 소리 들었어요. 촬영 끝나셨어요?”
“엉, 은영이도 안녕.”
“저희 지금 ‘기사님 부탁해요’ 촬영하러 가거든요. 오빠는 언제 나와 주실 거죠?”
“어허허, 불러 주면 무조건 나가야지.”
“진짜요? 약속하신 거예요.”
은영의 화사한 웃음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KKL 대표 미인답게 주변 공기를 밝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깁스가 화려해졌네요. 예쁘다.”
“동형이 그려 줬어.”
“발톱도?”
“그건 지운이 형이.”
동진에게 업힌 채로 짧게 대화를 나누고 지나쳤다. 지나치던 제현이 내 등을 두드려 고개를 돌리자 입 모양으로 ‘그런 거 아니에요’ 한다.
“진짜 조만간 열애 기사 뜨는 거 아닌가?”
내가 미처 제현에게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타이밍 좋게 동진이 말했다. 지운이 관심을 보였다.
“뭔데. 은영이랑 둘이 뭐 있어?”
“둘이 요즘 분위기 좋아 보이거든. 인터뷰 끝나고 한참 동안 대화하고 있더라니까.”
“이열, 은영이 진형이한테도 관심 없었던 애인데.”
지운이 휘파람을 불며 내 눈치를 봤다.
***
밥을 먹고 영화와 준이 동진에게 뭘 좀 봐달라며 양쪽으로 매달려 끌고 가서 지운과 둘이 카페에 와 있던 참이었다.
“찬희야, 너 언제까지 진형이 무시할 거야?”
“예?”
“너 부상 기사 뜬 거 보자마자 너한테 연락하고 있는데 무시한다고 요즘 나한테 난리야.”
“차단해요.”
“너도 걔 차단 못 하면서 나한테 하라 그러냐.”
나나 지운이나 둘 다 진형을 차단할 수 있는 성격이 못되었다. 그나마 나는 무시라도 할 수 있지 연락이 오는 족족 다 받아 주고 있을 지운에게 미안했다.
“걔도 너 다쳤다는 소리에 걱정해서 그러는 거니까 이따 전화라도 한번 해. 시즌 중이라 바로 오지도 못하고 오죽 답답했으면 나한테까지 그러겠냐. 동진이랑 준이는 진작에 진형이 차단했다더라.”
“알았어요.”
진형이 차단당할 정도로 귀찮게 굴었는데 다들 별말이 없었던 것 보면 나를 배려해 준 것 같았다. 생각에 잠겨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휘휘 젓고 있으니 지운이 턱을 괴고서는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너 나한테 뭐 말할 건 없어? 업데이트?”
“딱히?”
“먹버에서 진전이 없는 거야?”
“풉, 콜록.”
지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커피를 뿜으며 사레가 들려 한참 동안 기침했다.
“먹버가 아니고…….”
“그럼 뭐야. 정기적인 먹버? 아니 그건 섹스 파트너 아닌가? 너도 참 인생 복잡하게 사는데 뭐 있다니까.”
지운이 건네준 휴지로 입을 닦아 냈다. 제현에 대해 딱히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어서 정확한 대답이 어려웠다. 제현도 이 상태에서 더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생각거리에 말이 없어지자 지운이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둘이 지내는 거 보니까 너도 맘에 안 드는 건 아닌 것 같던데.”
“형, 걔 얼굴 본 적 없어요?”
세상천지에 걔가 들이대는데 안 받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지운도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상대가 진심인 거면 너도 제대로 생각해 줘야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미뤄놓는 성격이 아닌데 유독 사람 사이 관계에 대해서는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 놓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진형도…… 생각이 진형에 다다르자 빨대를 휘젓고 있던 손짓을 멈췄다.
‘이럴 수가. 그러고 보니 내가 권진형이다.’
완전히 받아 줄 것도 아니면서 상대가 원하면 어중간하게 받아 주고 서로를 속박할 생각도 없다. 어중간한 관계가 주는 편안함이나 이점은 다 챙기면서 복잡한 것은 고민조차 하지 않는, 감정이 있는 사람만 손해를 보게 하는 진형의 전략을 내가 그대로 제현에게 하고 있었다.
아무리 배운 게 도둑질이라지만 그렇게 진형에게 진절머리를 냈으면서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여태 몰랐던 게 신기할 노릇이었다.
“왜 또 그렇게 심각해.”
“형, 저는 쓰레기인가 봐요.”
얘가 아프더니 정신 상태가 안 좋아진 것 같다며 지운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지운과 헤어지고 감독님에게 다음 주 병원 진료받기 전까지 며칠 동안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어차피 그때까지는 마우스도 쥐지 말라고 한 상태여서 연습도 못 하니 숙소에 있으나 마나였다.
짐가방을 싸면서 제현을 기다리려고 했는데 가져갈 짐이 딱히 없어서 시간이 너무 남았다. 가방을 끌어안고 옆으로 웅크려 누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집이 아니고 전 숙소였다. 팀 트라이앵글 시절에 숙소 용도로 썼던 빌라를 이후 내가 구매했다. 아직도 대출 이자를 착실하게 갚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주 오가지는 않았다.
종종 지운이 시간이 빌 때 찾아와 청소해 준다고 듣기는 했다. 솔직히 진짜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이 숙소는 그 집보다 더 진짜 집같이 느껴져서 다른 사람이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진형과 지운의 사비로 식비를 충당하고 경기 날이면 감독님의 고물 밴을 타고 경기장으로 향하던 날들이 생각났다. 그때는 생활이 지금보다 단순하고 행복했다. 바닥이 차서 슬슬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누운 몸이 안락하고 편해 일어나기 싫어 버티다가 그대로 깜빡 잠들었다.
어쩐지 몸이 따뜻하게 느껴져 눈을 뜨자 제현이 나를 안고서 잠들어 있었다. 맞닿은 살이 뜨끈할 정도로 따뜻했다. 사시사철 체온이 그리 높지 않은 나로서는 한겨울 날씨에도 언제나 뜨거운 제현이 신기했다.
“황제현, 일어나.”
“어…….”
제현도 아침 일찍부터 나갔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아직 잠에 취해 흐릿한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왔으면 깨우지 같이 드러누우면 어떡해.”
“잠깐만 이러고 있다가 깨우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잤나 봐요.”
“침대 놔두고 왜 바닥에서 자.”
기지개를 쭉 켜길래 나도 일어나는데 몸을 굴려 다시 나를 껴안아 왔다.
“형도 바닥에서 자고 있었으면서. 근데 왜 가방을 끌어안고 있어요?”
“어, 어.”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제현을 기다리면서 뭐라고 말을 할지 정리해 두려 했는데 한숨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백지장같이 하얗게 변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있잖아, 우리 그만하자.”
대뜸 튀어 나간 내 말에 제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뭘 그만해요?”
제현의 팔 안에 가둬진 채로 나는 가방을 좀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러는 거.”
“이러는 게 뭔데요.”
제현의 시선이 내려앉을 때마다 나는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너랑 잘 생각 없었다고 했잖아.”
“후회하지 않는다고도 했잖아요. 또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래요?”
얼굴이 시선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웠다.
“너 이용하는 것 같아서 싫어.”
“하, 제가 그러라고 한 거 기억 안 나요? 이제 와서 저 생각해 주는 척 발 빼려 하지 말고 진짜 이유가 뭐냐고요.”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화를 억누르듯 말하는 제현이 낯설었다.
“어떻게 사람을 자기 좋을 때만 찾는 대피소로 써.”
“제가 괜찮다니까요?”
“내가 그러기 싫어.”
제현이 좋은 애라는 건 진작 알았고 좁디좁은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이니만큼 좋은 사람은 더더욱 오래 곁에 두고 싶었다. 그렇다고 나 좋을 대로 곁에 두는 건 옳지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형, 동생 하자고요?”
“응.”
“이제 와서?”
제현이 작게 웃으며 날 가두고 있던 팔을 거뒀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안고 있던 가방을 내려놨다.
“어디 가요?”
“어, 며칠 집에 다녀오려고. 너도 그렇고 나도 생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제현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다시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정리는 형이 많이 하고 오세요. 저는 정리할 거 하나도 없으니까.”
제현이 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드러난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방긋 웃었다.
“저한테서 실컷 도망쳐 보세요. 얼마나 가나 보게.”
생각했던 반응과는 영 다른 반응에 뻣뻣하게 굳은 채 입을 벌리고 제현을 보고 있으니 내 가방을 자기 어깨에 들쳐 멨다.
“뭐 해요. 집에 간다면서요. 안 가요? 힘자랑해 줘요?”
“어, 알았어. 내가, 내가 갈게.”
당장이라도 나를 안아 올릴 포즈를 취하기에 급하게 근처에 뒀던 목발을 짚어 일어났다. 마른침을 삼키며 열심히 방을 나서는데 제현이 고개를 숙여 귓가에 나긋하게 속삭였다.
“형은 형 좋을 대로 해 보세요. 나도 나 좋을 대로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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