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과는 달리 2세트는 초반부터 제현의 성장이 심하게 말리는 바람에 속전속결로 패배했다. 빨리 끝내고 온다는 말을 지킨 셈이 되긴 했지만, 제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민망한 듯 뒷머리를 쓸면서 들어왔다.
“영화야, 시야 체크를 하라고, 하라고 내가 그렇게 말을 해도 몸부터 나가잖아.”
“죄송합니다.”
“제현이 너도 뻔히 적팀 위치 파악이 안 되는데 싸움 걸어온다고 바로 나가면 어떡해.”
지난 경기의 피드백이 급하게 오갔다. 이번에 지면 5위로 내려간다. 플레이오프에는 4위까지만 진출할 수 있기에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내 부재중에 연패의 고리를 끊은 것은 좋았으나 다음 경기를 패배한다면 얼마 남지 않은 경기들의 부담감이 눈덩이 구르듯 불어날 게 분명했다. 아까와는 달리 표정이 좋지 않은 영화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버퍼는 전체적인 맵 상황을 대충이라도 예상할 수 있어야 해. 그게 안 된다면 안 되는 거 하려 하지 말고 반 잘라서 내 진영이라도 완벽하게 파악해서 신중하게 움직여.”
“넵,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현이가 안 될 싸움에 뛰어드는 것 같으면 무조건 따라가지 말고 퇴각 콜을 넣어. 너는 KKCL 윈터 시즌 뛰어 봤잖아. 경기해 본 횟수는 제현이보다 네가 더 많아. 네 판단을 믿어.”
감독님이 영화에게 하는 나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게임 씬에서 버퍼는 어디까지나 도구로 움직여서는 안 됐다. 영화는 게임 머리가 좋은 편이라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들었을 거로 생각했다.
짧은 회의가 끝나고 다시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어쩐지 풀이 죽어 보이는 제현이었다. 항상 자신만만하던 애가 어쩌다 저렇게 됐지. 혀를 한번 차고서 제현의 귀를 끌어다 속삭였다.
“야, 오늘 너랑 같이 못 가겠는데, 나 혼자 가도 돼?”
제현의 눈이 커졌다. 뉘앙스로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걸 너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내가 말한 의미가 자기가 이해한 뜻이 맞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제현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자 제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치사해요. 당장 경기 들어가야 하는 사람한테.”
“분하면 이기고 오든가.”
아까보다는 자세가 펴진 제현이 몰래 내 목 언저리를 쓰다듬다가 빠르게 팀원과 합류했다. 사람한테 장난칠 때 무슨 재미로 그러는지 지금껏 이해하지 못했는데 제현 덕분에 그 재미를 알아가고 있었다. 이거 재밌네.
제현과 영화가 아까보다는 조금 더 신중하게 초반을 시작했다. 1, 2세트는 무슨 싸우지 못해 한이 맺힌 광인들처럼 굴더니 이제는 제법 견적을 내는 시늉이라도 하며 원래의 제현이라면 자기 피지컬을 믿고 뛰어들었을 싸움에서도 후퇴를 선택했다.
- 아, 퇴각 콜이 나왔어요. 지금 조커 선수와 볼드 선수가 지난 세트들의 모습과는 다르게 사리는데요?
- 아쉽지만 영리한 판단입니다. 지금 엘리엇 엘리트의 아이템 성장이 더 잘된 상태라서 방금 전투를 열었다면 무조건 탱커와 힐러의 지원이 필요했어요. 만약 전투에서 이겼더라도 손해 없이 이득만 볼 수는 없었을 겁니다.
- 대치하는 동안 구리와 달링 선수가 공성을 통해 소소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죠. 엘리엇 엘리트 점점 전선이 밀리고 있습니다.
- 이대로 조커 선수가 죽지 않고 성장을 마치면 엘리엇 엘리트 조합으로는 승산이 없어요. 뭐라도 해야 해요!
엘리엇 엘리트가 급하게나마 매복과 급습을 시도했지만, 제현이 쉽게 당해 주지 않았고 초중반 내내 몸을 사렸던 제현이 그 시간을 보상받겠다는 사람처럼 맵을 종횡무진 쏘다니며 킬을 만들어 내 상대방은 제현을 피해 다니느라 바빴다. 선 고구마, 후 사이다와 같이 속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경기력으로 3세트를 승리했다.
- 3세트 승리의 주인공은 정말 시원하게 휘몰아쳤던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이었습니다.
- 이번 3세트의 MVP는 과연 누구일까요.
- 조커! 네 이 선수가 아니라면 누가 MVP입니까! 1라운드에서 MVP와 나이츠 위클리 레전드 하이라이트의 단골손님이었는데 2라운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죠. 오랜만에 MVP 인터뷰를 볼 수 있겠군요!
- 정말 오랜만이라 빨리 보고 싶은데요. 준비되었나요?
- 인터뷰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만나 보시죠!
“네, KKL 스프링 시즌 2라운드의 열기가 점점 더 오르고 있는데요. 오늘도 아주 화끈한 경기가 펼쳐졌습니다. 긴 연패의 고리를 끊고 승리를 거머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승리의 주역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딜러 조커 황제현입니다.”
“안녕하세요. 버퍼 볼드 박영화입니다.”
“단독 MVP가 유난히 많았던 조커 선수인데 오늘은 딜러 버퍼 듀오가 함께 인터뷰를 올라오셔서 저는 기분이 조금 어색한데요. 조커 선수 어떠세요?”
“제가 너무 오랜만에 와서 어색하신 게 아닐까 싶네요.”
“하하, 여전히 재치 넘치는 조커 선수네요. 아무래도 체크메이트 선수의 부상으로 전력이 아쉬울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는데 1세트에서 그 예상을 박살 내고 괴물 신인 타이틀을 차지하신 볼드 선수는 오늘 데뷔전 어떠셨나요?”
“네, 네. 매우 떨렸지만, 찬희 형이 좋은 말씀도 많이 해 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더 힘낼 수 있었습니다. 어, 음…… 덕분에 MVP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껏 여유로운 제현과 마이크를 두 손으로 꼭 쥐고 간간이 말을 더듬는 영화가 대비되어 보였다.
“체크메이트 선수의 쾌유를 바랍니다. 명진욱 감독님께서 체크메이트 선수가 볼드 선수에게 조언과 따뜻한 격려를 많이 해 줬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우리 조커 선수도 체크메이트 바라기로 유명하신데 질투가 나진 않으셨나요?”
“아, 많이 났죠. 원래 제가 독식할 케어를 나눠 받다 보니까…… 농담입니다.”
저거 눈이 안 웃는데. 농담이 아닌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다음 경기는 천적으로 완벽히 복귀한 것 같다는 KJ 스노우인데 두 선수 모두 각오 들어 볼 수 있을까요?”
“KJ 스노우의 천적이 트라이앵글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출전하게 된다면 조커 선수의 데뷔전 인터뷰를 인용하고 싶습니다. 팀의 천적이라도 제 천적은 아닐 겁니다.”
“역시 사전 인터뷰의 제왕 트릭스 게이밍인가요? 최연소인 볼드 선수마저도 거침없이 당차네요! 다시 한번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카메라 앵글이 페이드아웃 되고 다시 중계석으로 돌아왔다.
인터뷰 스테이지로 동진과 함께 제현의 마중을 왔는데 인터뷰를 진행한 아나운서와 이야기를 한창 나누고 있느라 이쪽이 온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제현이 혹시 문은영 아나운서랑 썸 타나.”
“썸이요?”
“왜 중계하시는 분도 탱커로 선수 뛰실 때 MVP 인터뷰 자주 하셨는데, 그때 1대 아나운서분이랑 썸 타다가 지금은 결혼하셨잖아.”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아나운서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해맑게 웃었다.
“쟤가 드디어 얼굴값을 하긴 하는구나.”
“그러게요.”
동진이 방해하지 말고 가자며 휠체어를 다시 대기실 쪽으로 트는데 제현이 나를 발견했는지 서둘러 대화를 마치고 내 쪽으로 뛰어왔다.
“동형, 제가 밀게요.”
“됐어, 찬희는 내가 잘 데려갈 테니까 가서 연애 사업 기반이나 잘 다져.”
“연, 뭐요?”
분위기 좋던데 발뺌하지 말라며 동진이 제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찔렀다. 제현의 흔들리는 동공이 내 쪽으로 향했다.
“제가 언제, 아니, 동형 무슨 그런 소리를 해요?”
“팬들이 1라운드 때 뭐라 그랬더라. 맞아. 와꾸 합이 잘 맞는다고 그랬잖아. 잘 어울리던데 안 그러냐 찬희야?”
“네, 잘 어울리던데요.”
제현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자 동진이 저거 부끄러워한다며 웃었다.
***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누가 뭐래?”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동진이 제현과 아나운서가 얼마나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늘어놓았고 준이 합세해 시끌벅적하게 놀림이 계속됐다. 제현은 거의 반쯤 미쳐갔다.
방으로 돌아와 당연하게 나를 안아 들어 자기 침대 위로 앉혀 주면서도 신경이 쓰이는지 저 말부터 먼저 꺼냈다.
“진짜 아니라니까요?”
“누가 뭐랬냐고. 그걸 왜 자꾸 나한테 해명해.”
누가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왜 저렇게 죽어도 아니라고 어필하니 오히려 의심스럽다. 아니, 의심스러워할 필요도 없었다. 진형도 가만히 두면 어디서든 새로운 사람을 구하고는 했는데 제현의 얼굴로 못 구할 건 또 뭔가.
‘썸이든 뭐든 제 마음대로 하라지.’
제현이 애타는 눈으로 나를 보다가 잠깐 무슨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사뭇 표정이 굳었다.
“형, 혹시 그 인간 추잡하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녔어요?”
“왜 또 대화가 거기로 튀어.”
“아니, 형 반응이 그렇잖아요.”
제현이 내 턱을 들어 올려 자신에게 향하도록 했다.
“딱 봐도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그러면 그렇지, 하는 반응이잖아요.”
“그럼 내가 거기서 뭐라고 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경기 전에 잘도 사람을 유혹해 대던 사람이 어떻게 눈 하나 깜짝 않고 저랑 다른 사람이랑 잘 어울린다고 해요?”
잘 어울리는 걸 잘 어울린다고 하지 그러면 거기서 아, 저 녀석은 이제부터 저랑 질척하게 뒹굴 예정이라 유감이네요. 이렇게 말하나?
뭐라 말을 하려다가 그대로 삼키고 제현의 손을 치워 냈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제현이 내 어깨를 눌러 다시 앉힌다.
“뭐야.”
“의사 선생님이 걷지 말라고 했잖아요. 어디 가시려고요.”
“내 침대로 갈 거야.”
허. 제현이 헛웃음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더니 나를 들어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내 침대로 옮겨 앉혔다. 그리고 대뜸 입고 있던 후드티를 벗어젖혔다.
“너 뭐 해?”
“왜요. 사람 홀려서 내내 형 생각만 하게 했으면서 이제는 싫어요?”
형 지금 저 먹고 버려요? 라고 말하던 때와 비슷한 톤이었지만 투정 부리는 느낌이 강했다. 내 허벅지에 자기 얼굴을 기대고 나를 올려다봤다. 제현이 이렇게 애타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볼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자극을 느꼈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뒤흔들어 버리고 싶어졌다.
입 안이 마르는 느낌이 들어 마른침을 삼키자 제현이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슬쩍 눈을 반으로 접어 웃었다.
“싫으면 싫다고 해요.”
어디 싫다고 한번 해 보라고 도발이라도 하는 말이었지만 도발에 넘어가 눈앞에 떨어진 쾌락을 거부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읏.”
당장 키스하지 않으면 제현이 그럼 오늘은 그만하자고 말할 것처럼 서두르다가 다친 손가락을 부딪쳐 짧게 신음하자 제현이 더 놀라서 머리를 뒤로 뺐다.
미간을 좁힌 채 뭘 생각하는 모습이 불길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평소와는 반대로 오늘만큼은 내 쪽이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멀쩡한 왼손으로 제현의 머리를 끌어와 내 다리 사이에 놓았다.
“하기 싫어?”
말꼬리가 자연스럽게 늘어졌다.
“싫으면 혼자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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