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안자고 뭐 해요?”
“어……?”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왜 안 자고 있어요.”
제현이 후드 모자를 벗고 머리를 흔들어 털어 냈다. 의자를 끌고 와 내 침대 옆에 앉았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제현의 뒤로 쏟아졌는데 이 상황 자체가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했다.
“어떻게…… 왜 왔어?”
“잠이 안 오더라고요. 형은 잘 때 소리도 하나 없이 얌전하게 자는데 이상하게 형 없으니까 잠이 안 와요.”
“그렇다고 이 밤중에 여기까지 오면 어떡해.”
“형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어요. 차 끌고 와서 금방 가요.”
나를 도로 눕히더니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어 주었다.
“형은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아까 봤는데 뭘 또 보고 싶어.”
“저는 또 보고 싶었는데.”
어둠 속에서도 제현이 웃는 것이 보였다.
“빨리 자요. 자는 거 보고 가고 싶어요.”
속삭이듯 말하는 낮은 목소리가 나긋하게 들렸다. 제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이후로 그토록 신경 쓰였던 은근한 고통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야 진통제가 효과를 보는 것인지 제현 덕분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리고 다정하게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을 즐기며 어느새 이 손길에 익숙해져 버린 나를 발견했다.
***
이런저런 검사를 마지막으로 마치고 오후에 퇴원할 예정이었다. 감독님은 바로 숙소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지만 KKL 경기장 근처이기도 했고 시간대도 얼추 맞아서 경기장에 들러 경기를 보고 팀원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오른쪽 새끼손가락에는 부목을 대고 발목에는 통깁스를 했다. 그래도 검사 결과 손가락 부상은 가벼운 편이라 다행이었다. 병원에서 양쪽 다 최대한 사용하지 말고 안정을 취하라 해서 프런트에서 준비한 휠체어를 탔다. 병실에서 혼자 한쪽 팔로 엉금엉금 휠체어를 밀어 보고 있으니 감독님과 팀원들이 우르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팀 패딩을 입고 있는데 정말 언제 봐도 백곰무리들 같다.
“헐, 진짜 휠체어 탔네. 형, 제가 밀어도 돼요?”
“씁, 김준. 찬희 아픈데 장난칠 생각 마. 무슨 쇼핑 카트 밀고 싶어 하는 여섯 살도 아니고.”
동진이 준의 뒤통수를 가볍게 쳤다. 맨 뒤로 들어온 제현이 가방을 뒤적이더니 안대를 꺼냈다.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굿즈라서 대문짝만하게 TGT가 프린트되어 있는 수면 안대였다.
“제현이가 기똥차게 이걸 생각해냈다. 장하지 않니.”
“이거 하고 헤드폰도 챙겨 왔어요. 노이즈 캔슬링 잘되는 거라 노래 몇 곡 듣다 보면 바로 경기장일 거예요.”
“어…… 고맙, 다?”
헤드폰을 씌우자 팝 록 밴드의 경쾌한 반주가 바로 시작되어 주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곧바로 제현이 수면 안대를 씌워 주었다.
눈을 감고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며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휠체어가 움직이니 눈도 귀도 막혀 아무것도 느껴질 게 없는데도 긴장으로 몸이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손잡이를 콱 쥐고서 이를 악물었다. 인생 참 편하게 산다, 서찬희.
노래가 두 곡쯤 지났을까 움직임이 멈추고 누군가가 나를 안아 올렸다. 갑자기 몸이 붕 뜨는 기분에 놀라서 상대의 어깨를 움켜쥐자 괜찮다는 듯 등을 토닥거리며 다시 앉혀 주었다. 더듬거리자 익숙한 차 시트가 느껴졌다.
“이쯤이면 괜찮지 않나?”
“혹시 모르니까 경기장 도착하면 빼 주려고.”
“근데 찬희 형 손발만 묶으면 어디 납치당하는 사람 같지 않아? 나 지금 좀 범죄자 된 기분.”
“김준, 너 오늘 자꾸 헛소리한다.”
밖이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노래 가사를 곱씹으며 시간이 조금 더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어 곡이 더 흐르고 슬쩍 안대를 들자 눈이 부셔 잔뜩 찡그렸다. 익숙한 거리가 보이기에 이제 괜찮겠다 싶어 헤드폰을 벗으려는데 옆자리에 앉은 제현이 헤드폰 위에 손을 올려 벗지 못하게 막았다.
‘뭔데?’ 입 모양으로 말하자 제 귀를 몇 번 두드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에 뭔가를 열심히 썼다. 다 썼는지 핸드폰을 뒤집어 화면을 보여 주며 싱그럽게 웃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틀어 줄 테니까 이거까지만 듣고 벗어요.]
여태까지는 쟈가쟈가 쟝쟝거리는 경쾌한 노래만 나오더니 이번에는 통기타 반주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분위기는 달랐지만, 어딘가 제현의 취향이겠구나 싶은 감미로운 발라드였다. 음악 취향도 참 자기 같은 거로 잘도 선정했구나 싶었다.
차가 멈추자 제현이 평생 해 온 일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 다리 아래로 팔을 쑥 집어넣어 번쩍 들고 차에서 내렸다. 얘 분명히 막내라 그랬는데 방금은 진짜 누가 봐도 동생들 많이 키워 본 맏형이나 병간호를 오래 해 온 사람 같아 보였다.
“이게 왜 안 펴지냐.”
“동형, 그거 힘으로 하면 안 돼요. 제가 할게요.”
동진이 접어 두었던 휠체어를 펴는데 잘 안 펴지는지 한참 끙끙거리자 제현이 나를 동진에게 넘기고 휠체어를 손쉽게 폈다. 그런데 나를 어딘가 내려놓는다는 선택지도 있지 않나.
제현에게 안겨 있던 포즈 그대로 동진에게 넘겨져 들려 있으니 민망함에 얼굴이 다 달아올랐다.
휠체어에 앉은 나에게 담요를 덮어 주던 제현이 내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이 왜 그래요.”
“네가 이 나이에 공주님 안기 돌아가면서 당해 봐.”
“기꺼이 당해 드리고 싶은데 전 형이랑 다르게 무거워서.”
휠체어에 앉아 마른세수를 연거푸 하는 모습을 보고 김준이 쭈뼛쭈뼛 다가와 위로랍시고 속삭인다.
“걱정하지 마세요, 찬희 형. 저는 형 못 들어요.”
전혀 위로가 안 됐다.
대기실에 함께 있다가 모니터링 실에서 감독님, 코치님들과 함께 모니터링하게 될 것 같았다.
KKL 측에서 관객석 쪽에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카메라에 얼굴을 비추는 것은 어떠냐고 권했지만 거절했다.
대기실로 들어서자 안에서 오늘 경기로 KKL 데뷔전을 치르게 될 박영화가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제대로 합 맞춰 본 게 어제 하루라서 영 부족하긴 한데, 그래도 꽤 괜찮아. 영화야, 찬희 빈자리 채우는 거 쉬운 일 아니다. 팬들한테 욕먹을 준비 됐지?”
“다쳐서 게임도 못 뛰는 사람을 왜 그렇게 띄우세요.”
“아닙니다. 찬희 형 치료에 전념하실 수 있도록 제가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혹시 애를 하루 동안 해병대 훈련이라거나 극기 훈련지 같은 곳에서 구르고 왔나 의심이 될 정도로 영화는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연령대가 비교적 더 어린 트릭스 게이밍 스퀘어에서도 제일 어린 편이었다. 가끔 스퀘어와 게임을 할 때마다 사람들에게도 깍듯하게 대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매 게임에 열심히 하는 애라서 저렇게 겁주지 않아도 됐을 텐데. 표정을 보아하니 1군 데뷔전이 떨리는 모양이었다.
충동적으로 왼손으로 주먹을 내밀었다. 영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기도 주먹을 쥐어 내 주먹에 살살 부딪혀 왔다.
“데뷔전 떨지 말고 잘하고 와.”
“네, 네네! 형 감사합니다!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뭐야, 왜 저는 안 해 줘요. 저도 해 줘요.”
제현이 질투라도 났는지 입이 삐쭉 나와서는 자기 주먹을 가볍게 부딪쳤다.
“이기고 와.”
“왜요. 지면 숙소까지 걸어갈까요?”
“응.”
내 대답에 제현이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혼자 킥킥 웃었다.
“자, 이제 가서 도열 준비하자. 영화 잘 데려가라.”
“감독님도 참 별걸 다 걱정하시네.“
영화가 주춤하다가 날 보고 ‘형,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외치고서 뛰어나갔다.
-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입장합니다! 새로운 얼굴이 보이죠?
- 저한테는 그렇게 새롭지 않은데요. 하하하!
- 하하, KKCL을 중계하고 계셔서 익숙하신가 봅니다. KKCL을 챙겨 보지 않았던 시청자분들은 ‘아니, 트릭스 게이밍인데 왜 버퍼가 체크메이트가 아니지?’ 하고 계실지도 몰라요!
- 네, 체크메이트 선수가 며칠 전 사고 부상으로 트릭스 게이밍 스퀘어에서 메인 버퍼로 있던 ‘Vold’ 박영화 선수가 콜업되었습니다!
- 볼드 선수는 KKCL에서 날카로운 판단과 호전적인 성격으로 호평받고 있던 선수입니다.
- 아주 어린 선수죠?
- 네 올해 17세로 KKL에서 가장 어린 선수입니다.
영화의 프로필 사진과 함께 옆에 포부의 한마디가 자막으로 나왔다.
[가장 존경하는 선수는 체크메이트입니다. 폐가 되지 않도록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 하하, 죽을힘을 다한다니 17살이 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말이 아닌가요.
- 그만큼 열심히 하겠다는 거죠.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그동안 연패로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요. 죽을힘을 다하겠다는 볼드 선수로 반전을 꾀할 수 있을까요?
- 전승으로 1라운드를 마쳤지만 2라운드에서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딜러 조커 선수와의 합이 기대되는데, 어떻게 보시나요?
-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전투 지향! 싸움을 피하지 않는 선수들이라 화끈한 전투가 기대됩니다!
괜히 내가 다 긴장돼서 엄지손톱을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밴픽이 끝나고 감독님이 모니터링 실로 돌아오셨다. 웅장한 BGM이 흐르며 현재 3위인 엘리엇 엘리트 팀과의 경기가 시작됐다.
소규모 전투가 경기 초반부터 이어졌고 중반부에는 거의 마주치면 난투가 벌어졌다. 시야가 없는 곳에서 잠복하고 있던 상대에게 무력하게 한번 잘린 것을 제외하면 영화는 적절한 화력 지원으로 전 지역에서 소소하게 점수를 따냈다.
그리고 1세트는 마지막 4:4 화려한 혈전 끝에 혼자 살아남은 제현이 상대방 성을 무너뜨리며 승리했다.
- KKL은 유독 안정적인 운영을 통해 게임을 풀어나가는 편이라 노잼이라는 오명을 받기도 하는데 오늘만큼은 아무도 그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정말 화끈한 경기였죠? 이번 스프링 시즌 중 가장 전투가 활발한 역대급 경기였습니다!
- 이번 1세트 MVP는…… 역시 볼드 선수입니다!
- 전체적인 시야 장악력 면에서는 확실히 부족한 부분이 있었어요. 하지만 순간의 판단이 아주 훌륭합니다.
- 어느 누가 데뷔전에서 이렇게 자신감 있게 상대방을 시종일관 물어뜯을 수 있나요? 정말 대단했습니다.
-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이번 시즌 변화하는 모습을 끝없이 보여 줍니다!
간만에 승리에 짜릿해져 주먹을 꽉 쥐려 했다가 다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손을 붙잡고 있으니 잔뜩 신이 난 준과 제현이 모니터링 실로 들어왔다.
“어? 왜 그래요. 아파요?”
손을 움켜쥐고 있는 날 보더니, 제현이 후다닥 뛰어와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내 표정을 살폈다.
“아냐, 아까 경기 보다가 흥분하는 바람에 잠깐 힘줘서 그래.”
“조심해요. 경기 봤어요?”
“응, 잘하더라. 숙소까지 걸어가기 싫었나 봐?”
제현이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사람들이 감독님과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손을 모아 내 귓가에 몰래 속삭였다.
“형이랑 같이 가고 싶어요. 혼자 가는 건 좀 별로라서.”
평범한 말인데 능글맞은 웃음이 말끝에 붙은 걸 보니, 간다는 말이 내가 아는 간다는 뜻으로 쓴 게 아닌 것 같았다.
‘뭐라는 거야 진짜.’
등짝을 손바닥으로 때리자 오버액션을 하며 아픈 시늉을 했다. 마침 감독님이 제현을 찾았다.
“빨리 끝내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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