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게임이 곧 시작됩니다. ]
우리 팀의 경우 제현이 생존력이 한없이 낮은 기사를 기용하기에 상대 팀들은 보통 초반부터 제현을 집요하게 압박해 성장을 방해하는 전략을 쓰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 KJ 스노우는 철저하게 나를 타깃으로 잡은 것 같았다.
레벨링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준이를 호출해 성장을 도모하려 했으나 KJ 스노우는 이미 우리의 생각을 눈치채고 맵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그대로 나를 지원하러 온 준을 덮쳤다.
“아, 저 물렸다. 이거 안 되겠는데. 형이라도 빼세요.”
“아냐, 내가 몸 댈 테니까 뒤로 쭉 빠져 봐.”
어차피 누구 하나 죽어야 한다면 초반부터 착실하게 망해 가고 있던 내가 죽는 게 나았다.
“저 가는 중이에요.”
“오지 마. 비었을 때 동형이랑 공성 들어가.”
제현과 동진의 위치가 가깝기는 했지만, 이럴 땐 차라리 경로를 변경해서 인원이 대거 이탈한 상대 팀 진영을 공성하는 게 나았다.
“둘이서 공성해 봐야 미미해요. 형이 이 상황에서 한 번 더 죽으면 게임 끝날 때까지 답 없어요.”
“어차피 망했어. 조금이라도 이득 봐야 할 거 아니야.”
“아…….”
제현이 도착하는 순간 상대 딜러의 폭딜이 쏟아져 내가 죽었고 뒤이어 준이까지 다시 물렸다. 제현이 스킬을 모두 퍼부어 딜러를 잡았지만 상대 팀 힐러가 합류하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차례차례 죽어 나갔다. 혼자 남은 동진이 상대의 공성을 막다가 죽었고 전멸 표시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 아!!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전멸입니다!
- 트릭스 게이밍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 게임 초반부터 KJ 스노우가 집요하게 체크메이트 선수를 억제하고 있었거든요! 그 집요함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부활 시간을 기다리며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버릴 건 버려야 할 거 아냐.”
“형 콜 때문에 동형이 합류하다가 방향을 틀었어요. 합류했으면 이겼을 거예요.”
입술을 짓씹으며 부활 후 마지막 기회일 전투에서 고군분투했지만, 성장으로 너무 밀려 버린 상태에서 전투는 다시 한번 전멸로 이어졌고 게임을 패배했다.
[패배]
오랜만에 보는 패배 표시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감독님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가왔다. 재정비가 시급했다.
“얘들아, 분위기 왜 이렇게 처졌냐. 정신 차리자!”
직전 경기는 분석이랄 게 필요 없을 정도로 대참패였다.
“저쪽이 이번에 찬희를 물고 늘어졌잖아. 보통 버퍼한테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굴지는 않는데. 하, 허를 찔렸네. 찬희야 2세트에는 아예 버틸 수 있게 드러눕자.”
감독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
- 아,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이번 세트도 좋지 않은데요. 지원이 늦어요.
- 저번 세트 때와는 달리 버티긴 하는데 버티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너무 부족한데요!!
-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2라운드 들어서자마자 이게 무슨 일이죠?
- 이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 숨이 다 막히네요. KJ 스노우, 이번 세트도 게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 역시 운영 명가 KJ 스노우!!! 이번에도 운영의 진수를 보여 주네요!
1세트가 빠른 속도로 격파당했다면 2세트는 타이태닉처럼 천천히 침몰했다.
“…….”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 이어지고 있었다. 보통 경기가 끝나면 다시 보기를 이용해 중계된 경기를 보던 김준도 모자를 눌러쓰고 가만히 있었다. 1라운드 내내 이기고 한 번의 패배였지만 두 판 연속으로 완패해서 그런지 흉흉한 분위기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핸드폰만 보고 있던 동진이 못 참겠다는 듯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얘들아, 고작 한 번 진 거잖아. 다음에 더 잘하면 돼.”
“오랜만에 져서 그런가, 정신 못 차리겠어요.”
“김준, 멘탈 꽉 잡아. 처음 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동진의 멘탈도 좋지 않아 보였다. 이럴 때 진형이라면 동진에게 은근한 장난이라도 걸었을 텐데 셋 다 무너진 멘탈을 동진에게 케어를 받으면 받았지, 그럴 여유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겨우 2라운드 첫 경기였을 뿐이었다. 단판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서 하루쯤 경기력이 좋지 않았어도 만회할 기회는 많이 남아 있었다. 단독 1위로 2라운드에 진입한 만큼 여유도 있었다. 연습량도 한계치까지 늘렸고, 상대 팀 분석도 꼼꼼하게 했다. 하지만 그 뒤로 처참한 연패가 이어지고 있었다.
상위권 팀들에게는 질 수도 있다지만 하위권 팀에게마저 계속된 패배는 팀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결국 1라운드의 자신만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어디서 꼬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꾸 서로 손발이 엇나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흡연실에서 마지막 담배를 꺼내 물고 빈 담뱃갑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원래 술 마셨을 때나 가끔 피웠는데 요즘 게임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흡연량도 늘었다.
답답한 심정에 벽에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지난 경기를 떠올렸다.
‘형……! 아니, 아니. 제현아, 지원 와 줘.’
‘……네.’
실수였다. 진형과 워낙 오래 합을 맞췄기에 종종 딜러를 찾을 때 형형 거리기는 했다지만 요즘 실수가 잦아졌다.
불리한 상황이 많으니 경기 중에 제현과 의견이 갈리는 일이 자주 벌어졌고 그때마다 진형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쓸모없는 논쟁이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스쳤던 탓도 있었다.
경기 끝나고 표정이 좋지 않았던 제현이 떠올라 속이 씁쓸했다. 담뱃불을 짓눌러 끄며 흡연실을 나서려는데 문이 열리고 제현이 들어왔다.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슬쩍 나가려는데 손목을 턱 붙잡혔다.
“형, 저한테 하실 말씀 없어요?”
“없어.”
잡은 손이 뜨겁게 느껴져 떨어뜨린다는 게 너무 강하게 뿌리쳤다. 둘 다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다가 내가 서둘러 흡연실을 나왔다.
자꾸만 작년 윈터 시즌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대로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익숙한 쪽을 향해 돌아가려 했다.
[패배]
연패가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의 패배로 순위는 4위까지 곤두박질쳤다. 이대로라면 플레이오프 진출도 불투명했다.
장비를 챙기고 있으니 숨이 막혀 왔다. 대기실에 가방을 두고 비상계단으로 나왔다.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는데 바깥 공기를 쐬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비상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제현이었다.
“저랑 얘기 좀 해요.”
“숙소 가서 하자.”
“또 저 피할 거잖아요. 요즘 계속 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도망치면서.”
“돌아가서 얘기하자고.”
가라앉은 눈동자에 시선을 피하자 제현이 팔을 덥석 붙잡았다.
“형, 제가 모를 것 같아요? 게임 안 풀릴 때마다 그 사람 찾는 거?”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팀 딜러는 나지 킹이 아니에요. 날 봐요. 왜 자꾸 허상을 봐요? 말 안 하면 모를 줄 아는 거예요? 그 인간이면 이렇게 해 줬을 텐데, 그런 생각 하는 거 다 보여요. 형이 그럴 때마다 도대체 제가 어떻게 해야 해요?”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묵묵하게 제현의 시선을 받아 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제현이 오기 전 딜러로 함께했던 성환이 팀을 나가면서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킹이랑 매 순간 비교당하는 거 같아서 기분 나빴어요. 그래도 팬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내 버퍼가 그러는 건 못 견디겠더라고요. 다른 사람이랑은 다 해도 형이랑은 게임 못 하겠어요. 세상에 킹 빼고 어느 딜러가 형이랑 게임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속이 쓰렸다. 그 당시에는 그렇구나, 하며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 일이 왜 이제 와서 제현의 말과 오버랩되며 늪에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뜀박질이라도 한 사람처럼 숨이 거칠어져 정신이 혼미했다.
“내가 미안하다. 미안한데…… 가서, 가서 다시 얘기하자. 진짜 안 피할 테니까.”
“형, 잠시만요.”
“……!”
제현이 부른 것과 거의 동시에 나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다. 잠시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다가 그대로 추락했다. 시야가 깜깜하게 변했다가 돌아오자 오른쪽 다리에서 고통이 밀려와 눈물이 다 쏟아졌다.
“형!!!“
오른쪽 다리를 끌어안고 벌벌 떨고 있으니 제현이 계단을 서너 칸씩 우당탕 뛰어 내려왔다.
“형, 괜찮아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숨을 겨우 내뱉고 있자 제현이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자기 허벅지에 눕히고 어딘가 전화를 걸려고 했다. 다급하게 제현의 손짓을 막았다.
“왜 그래요?”
“아니, 아니야.”
“뭐가 아니에요. 병원 가요.”
힘겹게 고갯짓하다가 고통이 몰려와 제현의 티셔츠를 잡아 뜯을 듯이 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태가 병원을 가야 할 것 같긴 한데 병원을 생각하니 눈앞이 다시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구급차를 타고 싶지는 않았다. 억지로라도 일어서 보려고 했는데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 일단 가서 동형 좀 불러와…….”
제현이 답답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그대로 나를 안아 올려 비상문을 열고 한걸음에 대기실까지 뛰어갔다.
“뭐야, 찬희 왜 이래?”
동진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다가왔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다 났다.
“계단에서 넘어졌어요.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119에 전화하려니까 자꾸 막아요.”
“형, 나, 나 못 가.”
“하 씨…… 인마 그래도 가야지 어떡해.”
동진이 급한 대로 코치님의 차를 빌려 차 키를 들고 왔다.
“제현아, 너 운전할 줄 안다고 했지?”
“네.”
“일단 가자.”
움직일 때마다 다리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너무 오랜만의 강렬한 고통이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눈물이 저절로 쏟아졌다.
제현이 차 뒷자리에 나를 조심스럽게 눕히고 엉망일 내 얼굴을 자기 소매를 끌어 올려 닦아 주었다.
“조금만 참아요.”
동진이 뒤이어 뒷자리에 탔고 제현이 운전석으로 뛰어가 앉았다. 급하게 출발하는 차 뒤로 감독님이 ‘우리도 곧 따라갈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경기장 근처에 대학 병원이 있어서 응급실로 바로 도착한 모양이었다. 때마침 구급차가 들어오는지 옆에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손을 겨우 옮겨 동진의 손을 꽉 잡았다.
“형, 나, 갈래…… 나, 나 그냥 숙소. 숙소로 갈래.”
발작하듯 몸이 떨리고 고통보다 두려움이 앞서 두서없이 말이 튀어 나갔다. 흐느끼며 더 절실하게 동진의 손을 잡아 흔들자 동진이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졌다.
“제현아, 너 이어폰 있냐?”
“네? 이어폰이요?”
이 상황에 그게 왜 필요하냐는 듯이 되묻던 제현이 동진의 표정을 보고 주머니를 뒤져 이어폰을 꺼내 동진에게 건네자 동진이 서둘러 내 귀에 끼웠다. 심장이 울렁거려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싫, 싫어…….”
“괜찮아, 잠깐만 있어 봐. 제현아, 아무거나 노래 제일 크게 틀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다 죽어가는 생선처럼 헐떡이다가 무슨 힘이 솟아나는지 발버둥을 치며 일어나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려 하는데 동진에게 붙잡혔다.
동진의 손이 눈을 덮었고 동시에 이어폰에서 노랫소리가 점점 켜져 사이렌 소리를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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