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15화 (15/100)

15화.

지운의 말에 제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도 아니고, 제삼자가 손 떼라고 한다고 바로 뗄 손이었으면 진작 뗐죠?”

“음, 대답이 시원시원한 게 조금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좋아, 일단 임시 합격 줄게.”

“감사합니다. 반의반쯤 장인어른.”

“그건 좀 일러.”

아주 사람을 두고 둘이서만 쿵짝이 맞아서는 뭐 하는 건지. 더는 못 봐주겠기에 벌떡 일어나 패딩을 옆구리에 끼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열받아서 춥지도 않았다.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껏 해야지, 당사자 쏙 빼놓고 자기들끼리 기 싸움하지를 않나, 합의를 보지 않나. 누굴 일일드라마 여주인공을 만들어 놓고 사람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찬희야, 우리가 미안하다. 화는 내도 좋은데 오늘 진짜 춥다. 옷은 입고 가자.”

“형, 감기 걸려요. 안 그래도 커피 때문에 젖었는데. 형, 제발요.”

지운과 제현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황급하게 내 뒤를 졸졸 쫓아오다가 결국 둘 다 자기 패딩을 벗어서 날 감쌌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양옆에 패딩으로 샌드위치처럼 감싸진 채 제현과 지운을 노려봤다.

“진짜 둘 다 뭐 하냐? 둘이 잘 맞는 거 같은데 그냥 둘이 살림을 차려. 괜히 사람 바보 만들지 말고.”

“아니, 나는 너 걱정해서 그런 거란 말이야.”

“제가 잘못했어요.”

길바닥에서 성인 남자 셋이 옹기종기 모여서 이러고 있는 게 너무 눈에 띄어 창피할 지경이었다. 하필 셋 다 팀 패딩이라 하얘서 더 눈에 띄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두 사람을 밀어내고 내 패딩을 챙겨 입자 그제야 제현과 지운도 자기 옷을 주섬주섬 다시 입었다.

“둘 다 떨어져서 와. 진짜 짜증 나니까.”

내 눈치 보기 바쁜 두 남자를 내버려 두고 빠른 걸음으로 숙소 쪽으로 향했다. 떨어져서 오랬더니 자기들끼리 있기 어색했는지 왼팔에는 제현이 오른팔에는 지운이 팔짱을 껴 왔다. 내 키보다 10cm가량 차이 나는 둘이 양옆에 서자 외계인에게 납치당하는 지구인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혹은 연행당하는 범죄자 같기도 하고. 어느 쪽도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

‘찬희야, 나중에 또 올게. 너무 화내지 말고 어? 형 마음 알지?’

지운이 늦은 시간인데도 할 일이 많아서 가 봐야 한다고 아주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빌다가 갔다.

저 형이야 원래 자기 사람 케어하는 게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늘 과보호 성향이 있었으니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 줄 수 있었다. 문제는 얘지.

삐뚜름한 눈으로 흘겨보자 제현이 쭈뼛거렸다.

“너 저번에도 그러더니 지운이 형한테 왜 그렇게 시건방지게 구는 거야? 아무리 저 형이 선수 생활은 짧다고 해도 너보다 먼저 이 바닥 굴렀던 사람이야. 동형이 봤으면 개인 상담 들어가.”

“죄송해요.”

저번에 봤을 때도 분명히 이러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제현에게만 이럴 게 아니고 지운에게도 그러지 말라고 할 걸 그랬다.

“됐어. 다음에 보면 사과드려.”

“그럴게요.”

저렇게 꼬박꼬박 대답 잘할 때는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아서 혼을 내려다가도 어물쩍 넘어가게 된다.

***

-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전승으로 1라운드를 마무리 짓습니다!

- 원래도 강팀이었지만 이번 스프링 시즌에는 압도적인 강팀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요즘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팬분들이 이런 말을 자주 하신다고 하더라고요.

- 어떤 말이죠?

- 진다는 건…… 어떤 기분이지?

방송에 자기가 나오는 걸 좋아하는 김준이 헤벌쭉 웃으며 오늘 경기를 핸드폰으로 한참 보고 있었다.

1라운드 전승이라는 역대급 성적을 거둔 터라 감독님은 입이 귀에 걸렸다. 제현이만 보면 금덩이라도 보듯 흐뭇하게 보면서 내 어깨를 두드려 주시곤 했다. 저 죽창 같은 딜러가 다른 팀에 갔다고 생각하면 나도 소름이 다 끼쳤다. 어느 팀에 들어갔어도 강력한 무기가 되었겠지.

어느새 제현이 준이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경기를 보고 있었다. 괜히 다가가 제현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기자 고개를 젖혀 나를 쳐다봤다.

“왜요?”

“아니야.”

우리 팀에 와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말하려고 보니 새삼스럽고 쑥스러워 말았다. 제현이 뒤쫓아와 내 어깨 위에 제 머리를 얹었다.

“왜요. 뭐 할 말이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제현이 뭔데 말을 안 하냐며 턱으로 내 어깨를 꾹꾹 눌렀다.

“아파.”

제현이 아쉬운 듯 얼굴을 치웠다. 어쩐지 요즘 어깨가 좀 한쪽으로 기운 것 같다.

***

1라운드를 전승으로 마무리 짓고 2라운드까지는 텀이 있었다. 설날도 끼어 있는지라 설 연휴 휴가도 받은 참이었다. 휴가를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돌아갈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찾아갈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 혼자 연습실로 들어와 나이츠를 켰다.

[MVP King : 찬희야]

[TGT Checkmate : ?]

접속하자마자 진형이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진형이었다. 지난번에 한국에 왔다 간 후 며칠간은 정기적으로 연락을 시도하더니 요즘엔 또 잠잠했던 터라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었다. 시간을 보니 LA는 저녁쯤이었다.

[MVP King : 새해 복 많이 받아]

[TGT Checkmate : 어 형도]

생각보다 싱거운 인사에 맥이 빠졌다. 언제부터 이런 인사를 주고받았다고.

[MVP King : 요즘 성적 좋더라 경기 챙겨봤어]

[TGT Checkmate : ㅇㅇ]

[MVP King : 오랜만에 같이 게임할까?]

[TGT Checkmate : ㄴ]

[MVP King : 왜?]

사실 게임을 같이 돌리지 않을 이유도 없는데 손이 먼저 맘대로 쳐 버려서 궁색한 변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참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데 진형이 자꾸 재촉해와 뭐라도 쳐야 했다.

[TGT Checkmate : 형 VPN 써서 핑 느리잖아]

[MVP King : 게임에 영향 줄 정도는 아닌데]

[MVP King : 아냐 알겠어]

[MVP King : 요즘 밥은 잘 먹지?]

[TGT Checkmate : ㅇㅇ]

도대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어서 내 행동을 곱씹다가 게임은 한판도 하지 못하고 점심때가 되었다.

동진이 휴가 동안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떠났다. 매 끼니 인증샷을 보내라고 성화라서 일단 식당으로 내려가는데 계단에서 짐을 잔뜩 들고 있는 제현과 마주쳤다.

“어? 너 집에 간 거 아니었어?”

“다녀왔어요.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타이밍 좋네요.”

오늘 아침 일찍 나갔는지 일어나 보니 이미 제현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아무리 일러도 내일 오거나 적어도 며칠 뒤에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너무 빨리 돌아왔다.

“그래도 명절인데 벌써 와도 돼? 며칠 있다가 올 줄 알았는데.”

“우리 집은 원래 명절 같은 거 잘 안 챙겨요. 밥만 한 끼 같이 먹고 다들 자기 할 일 해요. 집에 있는다고 딱히 할 일도 없고요. 형, 아직 밥 안 먹었죠?”

“응.”

부스럭거리는 짐을 보니 음식 재료들인 것 같았다. 집에 다녀온 것인지 장을 봐 온 것인지 모르겠다.

“제가 가서 밥해 줄게요. 주방 써도 된다고 허락은 받아 놨어요.”

“요리도 할 줄 알아?”

“저희 아버지 중국집 하신다니까요.”

아버님이 요리를 업으로 삼고 계신 거랑 본인이 할 수 있는 거랑은 다르지 않나. 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하자 제현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저 학교 다닐 때 중식 조리기능사 자격증도 땄는데 보여 드릴까요?”

“너는 진짜 별걸 다 잘하네.”

식당은 개방형 주방으로 되어 있어 앉아서 제현이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칼을 잡는 자세부터 요리할 줄 아는 사람의 티가 났다. 생닭에 칼질 몇 번, 손길 몇 번을 거치니 해체가 완료됐다.

“형은 소고기나 돼지고기보다 닭고기를 잘 드시더라고요. 치킨도 잘 먹고.”

벌써 내 입맛까지 파악한 모양이었다. 닭 다리뼈에 칼을 가볍게 통통 치더니 쥐어뜯자 순식간에 순살이 되었다.

무슨 요리 방송을 직관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제현이 분주하게 움직일 때마다 쓱싹쓱싹 요리가 완성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요리 하나가 뚝딱 나오자 너무 신기했다. ‘대체 얘는 왜 프로게이머를 하지?’ 같이 생활하면서 꽤 자주 드는 생각이 또다시 들었다.

“이거 이름이 뭐야?”

“궁바오지딩, 궁보계정이라고도 불러요. 매운 거 좋아하시니까 아마 형 입맛에 맞을 거예요.”

가방에서 전이나 잡채 같은 설음식 말고도 김치랑 나물, 장아찌, 젓갈류가 든 반찬통이 끊임없이 나왔다. 순식간에 구첩반상과 같은 상이 차려졌다. 입을 벌린 채로 굳어 있는데 밥공기를 건네주며 웃었다.

“아, 국이 없네. 계란국 정도는 금방 해 줄 수 있는데 해 줄까요?”

“됐어. 충분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제현이 자기 밥은 고봉밥으로 떠 오더니 내 맞은편에 앉았다.

“맛있게 드세요.”

“어, 어. 잘 먹을게 고맙다.”

“제 버퍼 제가 챙겨야죠.”

보통은 반대라고 호통치는 동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닭고기를 집어 들어 입에 넣자 매콤하니 맛있었다.

“어때요?”

“맛있어.”

“매일도 해 줄 수 있어요. 먹고 잠깐 산책하러 갔다가 저랑 게임 좀 돌려요.”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제현의 랭킹은 5위였는데 정말 무서운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제현의 기량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점은 팀에게는 좋은 소식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러다가 데뷔 후로 놓친 적 없던 랭킹 1위를 내려놓게 생겨 마음이 복잡했다. 한판 한판에 정신력이 너무 쓰여 금방 지치는 바람에 개인 랭킹전 플레이 시간이 줄어든 탓이었다.

요즘 랭킹 권에서도 조커 신봉자가 늘어 생존력이 떨어지고 쓸모가 한정적인 기사를 자주 쓰는데 그런 딜러들을 데리고 게임을 하는 건 정신력 소모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피지컬이 제현처럼 좋은 것도 아니고 안정적으로 가면 이길 것을 불나방처럼 날아드는 딜러들이 한 트럭이니 내 힘만으로 매 게임을 유리하게 이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번에 네가 한 인터뷰 때문에 버퍼가 체크메이트니까 꼴픽해도 된다고 하는 애들이 많아졌어.”

“풉.”

웃어? 숟가락으로 한 대 때리려다가 직접 요리까지 해서 밥을 차려 준 사람을 때리는 건 양심에 걸려서 얌전히 내려놓았다. 어휴, 남은 고생하는 줄도 모르고 어깨까지 떨며 웃는다. 이래서 딜러들이란.

***

KKL 스프링 시즌의 2라운드가 시작됐다. 1라운드에서 KJ 스노우에게 세트 패배 1번을 제외하면 전승으로 마친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은 단독 1위였고 그 뒤로 KJ 스노우가 바짝 뒤쫓고 있었다.

- 스프링 시즌 개막전을 열었던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이 2라운드의 첫 경기 또한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KJ 스노우와 맞붙게 되었는데요.

- KJ 스노우가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의 천적이라는 말이 이번 스프링 시즌에는 무색한 느낌이었죠?

- 네, 2라운드는 어떻게 진행될지 기대가 됩니다.

-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하네요. KKL 스프링 시즌 2라운드 지금 시작합니다!

원래도 게임 시작 전의 긴장감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장비 세팅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개인적인 감정 따위로 경기를 망쳐서는 안 됐다. 뺨을 가볍게 치며 정신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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