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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마이 트로피-12화 (12/100)

12화.

KJ 스노우와의 경기를 앞두고 갑자기 준이 복통을 호소했다. 같은 음식을 똑같이 먹은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 것으로 봐서 혼자 어디서 이상한 걸 주워 먹었거나 스트레스성인 듯했다.

KJ 스노우와의 경기에서는 늘 두 배로 긴장하는 준이라서 아무래도 후자의 가능성이 컸다. 최상의 컨디션이어도 모자랄 판에 큰일이었다.

“너는 KJ랑 붙을 때마다 배탈 나는 것 같은데 꾀병 아니냐?”

“아, 꾀병 아니에요. 쟤네랑 게임 할 때마다 거대한 벽에 돌진하는 계란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어떡해요.”

“그래 놓고 사전 인터뷰 때 트래쉬 토크는 잘만 했잖아.”

“입 터는 것 빼고는 시체인데 이빨 까기라도 잘해야죠. 그러면 거기서 쫄아 있어요? 가오 떨어지게.”

동진이 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볍게 툭툭 쳤다. 동진은 나름대로 힘을 빼고 쳤다고 쳤을 테지만 준이 옆구리를 붙잡고 뒹굴었다.

뒹굴고 있는 꼴만 봐서는 참 얕잡아 보기 쉬운 녀석이지만 어제 진행한 사전 인터뷰에서는 매운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한 녀석이었다.

‘저희 딜러는 갓 데뷔해서 신선하거든요. 아, 거기는…… 이제 그만 은퇴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

준이 워낙에 깐죽대기를 잘하는 성격인 데다 필터를 거치지 않고 쏴 대는 막무가내라서 저거 어디다 쓰나 했는데 이럴 때는 참 유용하게 썼다. 준이 들어오고 나서 우리는 경기 결과와는 상관없이 사전 인터뷰의 트래쉬 토크만큼은 항상 이겼다는 평가를 받는 편이었다.

“그래도 약 먹었더니 좀 괜찮은 거 같아요. 근데 제현아, 너는 왜 그렇게 신났냐?”

“어? 그냥…… 근데 기분 나쁠 이유도 없지 않아?”

“어휴, 그래 너라도 행복해야지.”

준이 우울한 얼굴로 가방을 챙겼다. 제현은 방긋방긋 웃으며 준을 따라 나갔다.

***

- KJ 스노우의 오늘의 상대. 최근 기세가 무서운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입니다.

-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은 현재까지 1라운드 전승에 빛나고 있습니다. 이번 시즌에 데뷔한 조커 선수는 패배를 모릅니다! 패배한 적이 없으니까요!

- 네, 맞습니다. 신인 딜러 조커 선수를 영입하면서 팀 성향이 완전히 바뀌었죠. 이번 시즌 가장 완벽하게 리빌딩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팀입니다.

- 파괴적인 전투력으로 경기 시간이 가장 짧은 팀입니다. 천적인 KJ 스노우에게도 대항할 수 있을지 너무나도 기대되면서 저희의 희망 사항인 조기 퇴근도 함께 기대해 봅니다.

- 경기 준비가 끝났다고 하는군요! 스프링 시즌 1라운드 KJ 스노우와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의 첫 번째 경기 함께 만나 보시죠!

[게임이 곧 시작됩니다.]

“자, 자. 긴장하지 말고 가 보자고.”

“나 빼고 다 좆밥이다. 개조빱들이다.”

준이 자기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아, 자존심 상하네.”

제현이 인상을 쓰다가 가볍게 준의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달링, 왜 나 같은 딜러를 옆에 두고 겁을 먹지?”

“헐…… 나 방금 조금 설렜어. 기분 나빠.”

제현의 어설픈 정극 연기가 지나가고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하여간 저 바보들은 가만 놔두면 콩트를 찍고 있다.

“집중해. 시시덕거리다가 실수하면 가만 안 둬.”

“넵.”

게임은 의외로 쉽게 끝났다. 우리도 시작 전에 가지각색으로 잔뜩 쫄아 있긴 했지만, 저쪽 신인 탱커가 더 바싹 긴장한 모양이었다.

1세트 초반에 프로 레벨에서 어지간하면 등장하지 않는 초보적인 실수가 나왔다. 제현이 빠르게 눈치를 채고 상대 탱커만 집요하게 공격해 계속해서 멘탈을 뒤흔들었다.

집착에 가까운 제현의 집요함에 신인 탱커는 제대로 된 탱커 포지션을 잡지 못하고 고립되거나 혹은 제때 지원을 오지 못하는 상황이 여러 번 펼쳐졌다.

이건 뭐 거의 4:3으로 경기를 치르는 거나 다름없었다.

[승리]

상대가 천적이라고 불리는 KJ 스노우라서 끝나기 전까지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 2세트의 승리 표시를 보자 바로 긴장이 풀려 깊은숨을 내쉬었다.

김준의 말대로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던 KJ 스노우를 무력하게 무너뜨린 느낌은 말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라운드는 이대로만 간다면 전승도 가능할 것 같았다.

짜릿함에 손끝이 저릿저릿한 기분이 들어 손을 주무르면서 옆을 보자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한 동진과 준 그리고 제현이 함께 어깨동무하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저렇게 좋을까.’

잔뜩 신이 난 팀원들을 두고 경기 결과를 뒤적이다 장비를 챙겼다.

“조커 선수 MVP 인터뷰 준비해 주세요!”

“또 너냐, 황제현! MVP 상금 타면 한턱 쏴.”

“당연하죠.”

대회 우승 상금도 당연히 모든 선수가 탐내는 상금이지만 선수 개인에게 수여되는 MVP 상금을 더 탐내는 선수도 많았다.

매 세트 가장 우수한 선수에게는 MVP 타이틀과 MVP 포인트 100점을 주는데 우리 팀은 전승 행진 중이라 MVP 포인트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제현이 거의 독식해서 MVP 등수는 단독 1위로 2위와의 차이도 컸다. 이대로만 가 준다면 MVP 상금은 제현의 몫이었다.

제현이 인터뷰하러 가면서 자기 가방을 나에게 안겨 줬다. 내 가방을 뒤에 메고 있어서 앞뒤로 커다란 배낭 사이에 서 있는 행색이라 보기에 조금 웃길 것 같았다.

제현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인터뷰하러 스테이지로 쓱 가 버렸다. 아니, 자기가 챙길 것이지 가방을 왜 나를 주고 난리야.

“네! 많은 분이 KJ 스노우의 승리를 점쳤지만 화끈한 경기력으로 단시간에 승리를 쟁취한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입니다. 오늘도 단독 MVP로 선정된 조커 선수 만나 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너무 자주 오셔서 이제는 조커 선수가 MVP 인터뷰에 안 오시면 어색할 정도예요. 팀 천적이라고 불리는 KJ 스노우와의 첫 경기였던 만큼 많이 떨리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음, 좀 건방진 소리지만 팀의 천적이지 제 천적은 아니라서요.”

제현의 대범한 말에 관객석에서 환호가 쏟아졌다.

“와우, 사전 인터뷰도 살벌했는데 MVP 인터뷰도 참 살벌하네요. 오늘도 특색있는 기사를 기용하셔서 벌써 팬분들이 랭킹전을 못 하겠다고 원성이 자자합니다. 대국민 사과 기자 회견을 열어 달라는 말도 나오고 있는데, 책임감을 좀 느끼시나요?”

“이 자리를 빌려 고통받고 계신 버퍼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딜러분들께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현이 마이크를 쥐고 비장하게 카메라와 눈을 맞췄다. 관객들의 집중력을 끌어내는 눈빛에 자연스럽게 경기장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제현의 말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자 뜸을 들이던 제현이 진중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여러분들의 버퍼가 체크메이트가 아니라면 저를 따라 하지 마세요.”

“하하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렇게 무게를 잡으시는 건지 저도 모르게 긴장했는데 정말 재치 있고 의미 있는 말씀을 해 주셨네요. 저 또한 요즘 랭킹전에서 고통받는 한 명의 나이츠 유저로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Do not try this at home (집에서 따라 하지 마세요) 같은 경고 문구가 끝에 붙을 것 같은 답변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늘 소감 한번 여쭤볼게요.”

“사실 제가 오늘 꼭 이기고 싶었어요. 내기를 하나 했거든요.”

“어떤 내기를 하셨나요?”

“찬희 형, 그러니까 체크메이트 형이 오늘 경기 지면 숙소까지 걸어오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오늘따라 집요하게 한 우물을 파신 건가요. 보는 제가 숨이 다 막혔는데 그래도 결국 게임을 승리로 이끌어 주셨죠! 이겼을 땐 어떻게 하시기로 했나요? 반대로 체크메이트 선수가 숙소까지 걸어가나요?”

관객석 어딘가에서 ‘그러다 쓰러져!’ 하는 포효가 들려서 잠깐 아나운서와 제현 모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이었다.

“그건, 큽, 좀, 좀 잔인한 일인 것 같고요.”

“풉, 네, 넵. 그렇죠?”

“하루 동안 제가 형 하기로 했습니다. 찬희야, 형이야.”

제현이 능글맞게 웃었다. 동진과 준이 제현의 말에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저거 MVP 선정 안 되었으면 인터뷰에서 저 말 못 하고 얼마나 분했을까, 나이가 몇 갠데 형 소리 하나 듣고 싶어서 저렇게 벼르고 있었을까.

아주 그냥, 오면 제대로 형 대접해 줄 생각이 만만했다. 보통 저런 경우 정작 깍듯하게 형 대접해 주면 민망해서 그만하라고 할 게 분명했다.

***

차에 타서 기다리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제현이 차에 올라탔다.

“형님 오셨습니까.”

동진이 선수를 쳤다. 제현이 놀란 토끼 눈이 되었고 준이 뒤로 넘어가며 웃었다. 나도 웃음이 터져 창문에 머리를 박으며 웃었다.

“아, 동형이랑은 내기 안 했잖아요.”

“네, 형님. 기분 나쁘셨나요?”

너무 웃어서 광대가 다 아팠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떨고 있으니 제현이 옆자리에 바싹 붙어 앉았다.

“찬희야, 형이 곤란한 게 웃겨?”

“…….”

웃느라 대답도 못 하고 제현의 가방에 얼굴을 파묻고 웃자 제현도 같이 웃으며 체중을 실어 나한테 기댔다.

***

“진짜 이게 아닌데.”

제현이 침대로 몸을 던져 넣으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경기에서 이긴 기쁨보다 형 소리를 제대로 못 들어 실망스러운 게 큰 것 같았다.

가끔 보면 한없이 어린애 같았다가 또 갑자기 어른스럽기도 했다. 제현의 게임 스타일과 같이 성격 또한 종잡을 수가 없다.

침대 곁으로 다가가 끝에 앉자 제현의 등 근육이 움찔 놀랐다.

“형이라고 어지간히 듣고 싶었나 보네?”

“…….”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을까, 타이밍 좋게 제현이 베개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옆으로 돌려 얼굴이 닿을락 말락 한 위치에 놓였다.

제현의 동공이 흔들렸다. 마치 내가 아주 거대해지고 제현이 조그마하게 변해서 겁이라도 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자 한없이 짜릿했다.

“대답해 봐.”

“형, 오늘 이상해요.”

내가 좀 더 다가가자 제현이 몸을 벽으로 바싹 붙였다. 원래라면 제현이 다가올 때마다 내가 뒷걸음질 쳤는데 뒤로 물러서는 나를 볼 때 제현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처럼 자연스럽게 추격하고 싶어지는 느낌이 신선하고 재밌게 느껴졌다.

“왜 형이라고 불러. 오늘은 네가 형인데.”

벽에 바짝 붙은 채로 얼어붙은 제현을 구경하는 건 꽤 즐거웠다.

“제현이 형.”

바짝 귀에 대고 말해 주자 내 말이 총알이 되어 날아가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움칠 떨었다. 이거 맛 들이면 안 되는데, 너무 재밌다.

바보처럼 킥킥 웃으며 몸을 일으키자 제현이 날 붙잡아 감싸 안고 침대를 뒹굴었다.

앗 하는 사이에 제현의 품 아래에 깔려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또 불러 줘요.”

잡아먹을 것처럼 내려앉는 시선에 입이 마르는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형…….”

“하, 이게 뭐라고 이렇게 좋지.”

완전히 내 위로 포개져 버리는 제현이었다.

“무거워.”

“잠깐만요.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요.”

칭얼거리듯 잔뜩 뭉개져 나오는 말에 팔을 끌어 올려 제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특이한 놈. 정말 별걸 다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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