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11화 (11/100)

11화.

뒤에서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던 준과 제현도 뭔 일이 있나 궁금했는지 슬금슬금 나와 동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옛날 생각나지 않냐며 동진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빨리 올라가라고 내 등을 퍽퍽 쳤다. 그때는 그래도 시간을 정해 놓고 재서 물을 잔뜩 마신다든가, 주머니에 몰래 무거운 물건을 집어넣어 놓는다든가, 옷을 좀 껴입는다든가 하는 꼼수도 부렸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올라가라니 뜻하지 않게 몸무게가 정직하게 공개되게 생겼다.

“…….”

“50, 3?”

제현이 경악한 얼굴을 했다. 머쓱한 기분에 머리를 긁는데 동진이 제법 심각한 얼굴을 했다.

“왜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늘었잖아요.”

동진을 처음 만났을 때는 18살이었는데 키는 그때도 변함없이 175cm였지만 거의 걸어 다니는 해골에 가까웠다. 먹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딱히 좋아하는 음식도 없어서 더 그랬다. 심지어 신인 시절에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먹은 것이 없어도 변기를 붙잡고 내장까지 토해 낼 기세로 토하기 바빠서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졌다. 초등학생들과 몸무게를 나란히 했으니 말 다 했다.

제현은 허리를 굽혀 체중계를 유심히 한 번 더 보고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가 다시 숫자를 보는 것을 반복했다. 진짜 부끄럽네.

“형은 무슨 여자 아이돌 스펙을 갖고 계세요?”

“김준, 네가 할 말은 아니야. 너는 나보다 가볍잖아.”

“아 저는 키가 작……진 않지만, 형이랑 비슷하거든요?”

동진이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눈을 부라리며 입을 열었다.

“김준, 너도 올라가.”

“아, 형 때문에 저까지 공개해야 하잖아요!”

김준이 찡얼거리며 도망치다가 동진에게 잡혀 와 강제로 체중계 위로 올라섰다.

“49?”

“너나 나나 도긴개긴이네.”

“비율로 보자면 형보다 양반이거든요? 전 살이 안 붙는 체질일 뿐이라고요!”

“나도 체질이야.”

“저 형이 뭐 찾아 먹는 거 본 적 없거든요? 형 헌혈도 못 하죠?”

“할 수 있어. 네가 못 하는 거겠지.”

싸한 정적이 방안을 채웠다. 서로 눈알만 굴리며 아무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극한의 멸치 두 명과 운동부 스타일의 두 명 사이에 미묘한 기운이 흘렀다.

“제현아.”

“네.”

“저거 오늘 잡아 놓고 먹여라.”

“네!”

제현은 마치 보스에게 명령을 전달받은 조직폭력배처럼 깍듯하게 대답하더니 그대로 나한테 달려와 번쩍 들고서 배달 음식이 줄줄이 차려져 있는 책상으로 데려갔다. 무게를 알고 나니 더 가볍게 느껴진다며 웃었다.

제현이 나를 자기 무릎에 앉힐 기세로 바싹 붙어 앉아서 내 앞에 치킨 닭 다리를 놔줬다. 차례차례 의자를 빼고 앉는 세 명의 눈동자들이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정말 사는 건 너무 피곤하다.

내가 먹기 전까지는 다들 멀뚱멀뚱 나만 보고 있으려는 심산인 것 같아 내키지 않는 티를 푹푹 내며 한입 베어 물자 그제야 다들 치킨을 하나씩 입에 물고 뜯기 시작했다.

***

워낙에 배달된 음식의 양이 많아 꽤 오랜 시간 먹고 마시며 떠들다 보니 시간이 늦었다. 배가 더부룩했다. 조금이라도 안 먹고 핸드폰을 보고 있으면 제현이 옆에서 음식을 들고 시위하듯 버텨서 먹는 것 외에는 좀처럼 다른 짓을 할 수가 없었다.

먹을 수 있는 양의 최대치를 찍은 몸은 너무나도 무겁고 불쾌했다. 원체 많이 먹지 못하는 타입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렇게 음식을 잔뜩 먹었을 때의 몸이 무거운 기분이 너무 싫었다. 오만상을 하고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데 제현은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속이 느글거려 잠깐 앓는 소리를 내자 제현이 다가와 내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이게 많이 늘었던 거면 데뷔 초에는 도대체 몇 킬로였어요?”

“40…… 몇이더라. 기억 안 나.”

데뷔전 때도 마른 편이었지만 시즌 끝날 때쯤엔 온몸에 뼈가 드러나 무슨 지병이라도 있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트릭스 게이밍에서 SNS를 통해 체크메이트 선수는 지병이나 식이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렇다. 점차 회복 중이니 악성 루머를 퍼트리지 말아 달라는 성명서도 냈던 것 같다.

내 꼴을 참다못한 진형이 간식 주머니를 만들어 따로 챙겨 다니며 이것저것 먹여서 그다음 시즌에는 그래도 사람 꼴은 갖췄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그 시절 영상들을 다시 보자면 ‘음, 해골이 잘도 걸어 다니는군.’싶긴 했다.

“왜 그렇게 주변 사람들이 형을 챙기려 드는지 알 것 같아요.”

“나는 모르겠는데.”

제현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형이랑 같이 지내다 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신경이 쓰여요. 본능적인 제 안의 보호 본능 같은 걸 깨우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의외로 챙겨 주면 또 안 받아 주는 게 아니고 받아 주니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욕심이 안 생기려 해도 안 생길 수가 없잖아요.”

“내 말은 안 듣는 거지?”

발로 등을 밀자 제현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늘 형이랑 경기해서 좋았어요.”

“새삼스럽게.”

“다르죠. 데뷔전은 살면서 딱 한 번만 할 수 있잖아요.”

“포지션 변경하면 몇 번 더 할 수 있잖아.”

“싫어요. 저는 형 옆자리가 좋아요.”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말끝을 늘이며 내 옆에 드러누웠다. 순식간에 침대가 꽉 찼다.

“너 말이야. 혹시 내가 탱커였으면…….”

“당연히 힐러 했죠.”

미친놈. 나도 모르게 욕을 해 버렸는데 제현은 맞는 것 같아요, 한다.

***

KKL은 시즌당 1라운드와 2라운드로 나뉘어 있고 2라운드 최종 성적으로 1위부터 4위까지 플레이오프로 진출할 수 있었다.

TGT은 스프링 시즌 개막전의 승리 이후 기세를 탔는지 1라운드 전승 가도를 이어 가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승리를 이어가는 데에는 제현의 역할이 매우 컸다. 나도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할 만큼 변칙적인 플레이에 능한 제현은 적팀의 허를 찌르는 것을 정말 잘했다.

팀 스타일이 공격적으로 완전히 바뀐 만큼 예전보다 대처가 어설플 때도 있긴 하지만 승패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기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때가 더 많았다. e-스포츠는 이런 기세가 주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오늘은 전적이 처참해 우리의 천적이라고 볼 수 있는 KJ 스노우와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나이츠 KKL 게시판] 팀 트라이앵글 시절부터 팬 오늘 직관간다ㅋ

(울고 있는 오타쿠 짤)

쳌렐루야 쳌멘 하던 나인데 요즘 종교 조커로 개종했잖아ㅠ

이번에야말로 진짜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음

나 지금 천안에서 서울 올라가는 중 직관 다녀온다ㅋ

댓글 2개

ㅋㅋ : 시즌 초마다 저러다가 3등 하죠? 만년 3등이죠? 월드 시리즈도 못 가죠?

└ㅅㅅ : 아 이번엔 다르다고ㅡㅡ

[나이츠 KKL 게시판] ㅅ1발 개같음

(랭킹전 연패 스크린 샷)

나 버퍼 유저인데 요즘 좆커 픽 따라 하는 애들 때문에 미쳐버리겠어; 고객님 그건 좆커고요ㅅㅂ

오늘 또 무슨 픽으로 랭킹전 조지려나 ㅅㅄㄲ

댓글 39개

ㅇㅇ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삼각이들 경기하는 날에는 랭킹전 하지 말라고

ㅅㅅ : 좆커라니 욕임 칭찬임?

└ㅁㅁ : 미친놈ㅋ

└└ㄷㄷ : 아 좆이 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게임 커뮤니티를 보는데 여전히 제현에 관한 게시글이 많이 보였다. 제현이 데뷔전을 치른 후 나이츠 KKL 게시판 톱 토픽이 제현인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 관심과 주목이 많은 만큼 2대 욕받이 무녀, 킹잡이를 이어 별명도 다양하게 붙었는데 저열한 것 중 제일 많이 불리는 건 역시 좆커였다.

“뭐 봐요?”

“어…….”

제현이 내 화면을 보더니 큭큭 웃었다.

“아, 저는 킹잡이가 더 맘에 드는데 요즘 좆커라고 더 많이 불리는 것 같아요. 데뷔전 이후로 온 세상 버퍼들이 다 절 미워해요.”

“안정적인 메타픽을 안 하는 네 탓이지.”

안 그래도 나 역시 랭킹전 할 때 제현을 따라 한다고 설치는 애들 만나서 애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욕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최상위 랭커층에서도 애를 먹이는데 아래쪽 티어라면…… 비단 버퍼뿐만 아니라 다른 클래스들의 혈압도 걱정스럽긴 했다.

“그래도 먹히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무난한 메타픽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연승행진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제현이 내 어깨에 머리를 박치기하듯 기댔다. 무슨 말 못 하는 짐승도 아니고 제현은 종종 이렇게 머리를 등이나 어깨에 아프지 않게 박는 등의 동물적인 스킨십을 하곤 했다.

“KJ 스노우한테도 먹힐지 걱정이네.”

“걱정을 왜 해요. 절 데리고 있으면서? 아, 이거 자존심 상하네.”

우리 팀 딜러지만 요즘 들어 부쩍 콧대가 너무 높아졌다. 자신감이 붙은 것은 좋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초반부터 말려서 경기 시간 내내 힘겨운 게임이나 일방적으로 무너지는 게임을 경험해 본 적 없다 보니 저러다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지는 않을지 두려웠다.

인상을 쓰며 이 천방지축에 자신감이 가득 찬 딜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제현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내 미간을 쭉쭉 펴 줬다.

“형은 인상 쓰면 섹시하니까 어디 가서 그러지 마세요.”

“뭐래.”

“진짜 어디 가서 하지 마요.”

제현의 헛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다시 핸드폰 화면에 집중했다. 승리 예측 페이지를 보니 KJ 스노우 76%,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24%로 KJ 스노우의 승리를 예측한 사람이 더 많았다.

우리의 천적이라고 불리는 KJ 스노우는 완벽한 육각형의 팀이었다. 어느 포지션을 골라도 약점이 없고 무엇보다 운영을 정말 숨 막히게 잘했다.

별다른 전투 패배나 실수가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면 점점 밀리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정도로 촘촘한 운영을 잘하는 팀이었다.

우리로서는 씁쓸한 말이지만 팬들 사이에서는 TGT의 상위호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번에 KJ 스노우도 탱커가 중국팀으로 이적해 아카데미 출신 신인 탱커로 리빌딩을 마쳤다고 들었다.

됐다. 걱정을 아무리 해도 부딪혀 봐야 아는 일인데 걱정해 봐야 뭐 하나.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었다가 뱉었다. 신인인 우리 팀 딜러도 안 떠는데 내가 떨어 봐야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늘은 텀블러, 형이 챙기실 거예요?”

늘 똑같이 짐을 꾸리는 편이라 뭔가를 숙소에 두고 온 적이 없었는데 제현의 데뷔전에 딱 한 번 두고 간 텀블러였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제현은 경기장에 가기 전에 꾸준히 물어보고 있었다.

“넌 내가 실수하는 걸 좋아하더라.”

“실수라니요. 인간미죠.”

저놈의 주접은 어떻게 멈출 수 있는 건지.

“오늘 게임지면 넌 차 타지 말고 숙소까지 걸어와.”

“이기면요?”

그건 생각하지 않고 말했는데. 뭘 해 줘야 하나 난감해 고심하고 있으니 제현이 생각해 뒀던 게 떠올랐는지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더니 방긋 웃었다.

“이기면 하루 동안 제가 형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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