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10화 (10/100)

10화.

1라운드 대진 추첨 결과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은 KKL 스프링 시즌 개막전을 열게 되었다.

리빌딩이 이루어진 팀이 꽤 많아서 전력 파악이 쉽지 않은 스프링 시즌이었다. 거기다 개막전 첫 경기는 주목도도 높아서 데뷔전을 치르는 제현이 긴장하면 어쩌나 다들 걱정이 많았다.

팬들에게 첫인사를 하던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 혼자 리허설을 해 본 사람처럼 청산유수로 말을 하고서는 떨었다고 너스레를 떨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에 잠겨 있는데 화장실에서 제현이 칫솔을 문 채로 나왔다. 핸드폰을 들고 무슨 날씨 뉴스를 보고 있었다. 오늘 데뷔전을 치르는 사람이 어쩜 저렇게 여상스러울 수 있는지.

“어에 눈오어니 어늘 더 춥대요.”

“어…….”

물고 있는 칫솔 때문에 약간 뭉개진 발음으로 오늘 날씨를 요약해 주었다. 그 평온한 모습에 내 데뷔전의 추억이 떠오르자 등골에 소름이 다 끼쳤다.

지금보다 낯선 상황을 더 못 견디던 때라 날 선 신경에 위장약을 들이붓고 안색이 파리해져 손을 덜덜 떨며 용케 게임을 끝마쳤었다.

경기는 다행스럽게도 승리했고 데뷔전에 MVP까지 따냈지만, 경기가 끝나자마자 동형이 건네준 비닐봉지에 토하기 바빠서 MVP 인터뷰도 진형이 대리로 진행해야 했다.

상쾌한 얼굴로 제현이 옆에 붙어 앉았다. 30분 뒤면 경기장으로 출발해야 했다.

“안 떨려?”

“음, 글쎄요.”

떨리면 떨리는 거고 안 떨리면 안 떨리는 거지, 글쎄는 도대체 무슨 대답이냐 싶었을 때 제현의 입술이 내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가 쪽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

“이제 안 떨려요. 국내 톱급 버퍼 옆에 두고 떨면 프로 하면 안 되죠.”

허……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헛웃음이 다 났다.

“도대체 뭘 먹고 크면 너같이 자라냐.”

“저희 아버지 중국집 하시는데요. 다음에 드시러 오세요.”

“허허, 안 어울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게 말하며 상큼하게 웃는다.

***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경기장에 도착해 배낭에서 장비를 꺼냈다. 제현도 옆에서 장 패드를 깔고 있었다.

“어?”

뭔가 빠뜨리고 온 것 같더니 항상 들고 다니던 텀블러를 두고 온 모양이었다. 배낭을 휘적거리며 한 번 더 찾다가 한숨을 푹 쉬자 제현이 나를 쳐다보았다.

“혹시 이거 찾아요? 두고 가시길래 제가 일단 챙겨 봤는데.”

제현이 손에 텀블러를 들고 딸랑딸랑 흔들어 보였다.

“어, 어. 챙긴 줄 알았는데.”

“저는 형이 이렇게 인간미 보일 때마다 진짜 너무 설레요.”

“시끄러워.”

동진과 준도 차례로 입장해 장비를 연결했다.

“어떡해, 심장 터질 것 같아.”

데뷔전 치르는 놈은 따로 있는데 김준이 더 호들갑을 떨며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아 댔다. 제현이 외투를 뒤져 핫팩을 꺼내 준에게 건네줬다.

“땡큐, 야 너는 어떻게 안 떠냐. 난 시즌 시작할 때마다 이 모양인데.”

“떨리긴 떨리는데 그보다는 좀 신나.”

“미친.”

그렇게 무대 체질이면 프로게이머 하지 말고 아이돌을 하라며 툭툭 치다가 결국 둘이 투닥거리며 장난스럽게 다퉜다. 동갑내기들 특유의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제현과 장난을 주고받으며 준의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자, 다들 이제 준비하자.”

명진욱 감독님이 수첩을 주머니에서 꺼내며 말하자 다들 진지한 얼굴로 변했다.

- KKL 스프링 시즌 리빌딩이 이루어진 팀이 참 많았는데요.

- 네, 맞습니다. 그중에 특히나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은 리빌딩이 이루어질 때마다 화제를 몰고 다니는 팀 중에 하나죠.

- 탱커 ‘Guri’, 힐러 ‘Darling’ 탱힐 듀오는 항상 든든하게 큰 실수 없이 안정적인 실력을 보여 주었죠.

- 달링 선수의 경우 꾸준한 성장을 보여 주고 있어서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선수입니다.

카메라 앵글이 동진부터 시작해 부드럽게 이동해 김준을 지나쳐 제현에게서 멈췄다. 그저 제현의 얼굴이 화면에 잡힌 것만으로 경기장이 관객들의 탄성으로 채워졌다.

- 지금 KKL에서 가장 핫한 신인이죠?

- 데뷔전을 치르는 신인 딜러 ‘Joker’ 선수입니다.

- 어휴,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정말 잘생겼네요.

- 하하하 신인 선수를 영입한 만큼 지금 팀의 전력이 미지수인 상태인데요. 어떻게 보시나요?

-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하면 무조건 안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보니까 파훼법도 뻔하다고 해야 할까요? 조커 선수가 닉네임처럼 와일드카드 같은 느낌을 줬으면 좋겠네요.

제현이 카메라를 보더니 방긋 웃었다.

- 신인 선수라면 떨기 마련인데 긴장하지 않은 모습 보기 좋네요.

카메라가 이동해 내 쪽으로 넘어왔다.

- 나이츠의 버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 Checkmate!

- 데뷔 이후로 시즌 랭킹 1위를 놓친 적이 없는 바로 그 전설적인 선수입니다.

- 버퍼의 한계를 재정의한 선수이기도 하죠.

- 체크메이트가 가는 곳까지가 버퍼의 한계다, 라는 말도 있죠!

-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하는데요. KKL 스프링 시즌 개막전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과 와일드캣 문즈의 경기 지금 시작합니다!

“황제현, 빠져.”

“이길 수 있는데 왜 빠져요?”

“나 지금 멀어. 지원 제때 못 가.”

안 그래도 유리 죽창으로 유명한 기사를 잡아 개복치보다 생존력이 낮은 주제에 공격적으로 플레이하는 제현을 초반부터 제지하기를 여러 번이었다.

제현은 전방에 혼자 고립되어 있었고 동선을 예측해 보건대 적팀 두 명이 제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둘러 후퇴를 지시했는데 제현이 고집을 부렸다.

“안 와도 돼요.”

허벌템을 들고 있으면서 혼자서 2:1을 어떻게 이겨. 인상을 지으며 동진 쪽을 지원하다 말고 후퇴하지 않은 제현 쪽으로 급하게 선회하는데 더블킬 표시가 떴다.

“?”

“이긴다고 했잖아요.”

“대박 대박, 제현아 나 지금 가는 중. 템 뽑고 바로 공성 들어가자. 나 끼고 싸우면 셋이 와도 이긴다.”

김준이 신나서 손뼉을 짝짝 치고 마우스를 다시 잡았다.

아이템 차이도 있었고 어찌 됐든 전투에서는 쪽수가 제일 중요한데 혼자 두 명을 잡고 알아서 무럭무럭 크더니 후반부에는 거의 게임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게 되네?’

제현과 게임을 하면서 자주 하는 생각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이게 되네?’와 ‘이건 안 되네?’ 였다. 오늘은 ‘이게 되네?’ 버전의 제현인가 보다.

1세트에 아주 파괴적인 속도로 후루룩 승리해서 그런지 적팀은 2세트에도 우왕좌왕하다가 빠른 속도로 침몰했다. TGT의 완벽한 승리였다.

“야, 진짜 어디서 이런 복덩어리가 굴러왔냐.”

동진이 승리감에 취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서 제현을 안아 들고 둥개둥개했다. 감독님이 무척 감동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찬희야, 우리 이번 시즌 우승하자.”

“감독님, 울어요?”

감독님이 코를 훌쩍이며 수첩으로 얼굴을 가리는 게 아무래도 진짜 우시는 듯했다.

워낙에 안정적으로 운영을 통해 게임을 풀어내는 게 팀 스타일이었다 보니 이렇게 일방적이고 파괴적인 게임은 해 본 적 없긴 했었다.

“조커 선수, MVP 인터뷰 준비해 주세요.”

“넵.”

“이야, 데뷔전에서 MVP라니 대단한걸. 아, 맞다 찬희도 MVP였는데. 인터뷰는 못 했지만…….”

동진이 내 데뷔전을 떠올렸나 보다. 내장까지 토할 기세로 비닐봉지에 토하고 있는 내 등을 두드려 줬던 기억일까. 감정 없이 허허 웃었다.

“다녀올게요.”

그렇게 말하며 쓰다듬어 달라는 듯 얼굴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저기 뒤에 카메라 돌고 있는데….’

생각하면서도 홀린 듯 제현의 머리를 털듯이 쓰다듬어 주고 빨리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장비를 마저 챙기고 인터뷰 스테이지 옆에서 제현이 인터뷰하는 것을 단체로 구경하게 됐다. 아나운서와 스몰토크를 자연스럽게 주고받고 있는 제현이 보였다.

“들어갑니다. 3, 2, 1 큐.”

“네, 성공적으로 데뷔전을 마치고 MVP로 선정된 조커 선수입니다! 신인선수답지 않은 엄청난 경기력이었습니다. 경기 전부터 굉장한 인기를 얻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특히 닉네임에 대해 팬분들의 추측이 많던데, 배트맨의 팬이라는 의견도 있었어요. 혹시 보셨나요?”

“하하 네, 정말 추측들이 다양해서 재밌게 구경했습니다.”

“혹시 맞추신 분이 계셨나요?”

“제가 알기로는 없었던 것 같아요.”

“닉네임에 특별한 이유가 있긴 있나요?”

“음, 그게…….”

제현이 나를 슬쩍 봤다가 다시 카메라로 눈을 돌렸다. 쑥스러워하며 볼을 살짝 긁적이며 웃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

“트럼프 카드의 조커를 생각하고 지었어요. 역시 왕을 잡으려면 광대가 되어야 하지 않나, 해서 조커입니다.”

아나운서가 놀란 듯 토끼 눈이 되어서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밝게 웃었다.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의 딜러라고 하면 역시 킹 선수의 기억이 짙은데 그걸 저격한 닉네임이었군요?”

“네, 제가 2대 욕받이 무녀다 보니까 의식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관객석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경기 명장면에 관한 내용과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소감 및 앞으로의 각오를 물어보고 인터뷰가 종료됐다.

***

숙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나는 게임 커뮤니티를 구경 중이었다.

제현의 데뷔전 관련 글이 게임 커뮤니티를 도배하고 있었다. 보통 던지는 픽으로 유명한 유리 죽창으로 1세트를 파괴했다 보니 [오늘 랭킹전 하지 마세요]라는 글이 제일 많았고 닉네임 유래 인터뷰가 인상 깊었는지 [킹잡이 조커]라는 글도 많았다. 제현의 별칭은 ‘2대 욕받이 무녀’가 대세였는데 이번 인터뷰로 대세가 뒤집힌 모양이었다.

“너보고 킹잡이래.”

“맘에 들어요. 킹잡이.”

“너 그런데 데뷔 전부터 닉 조커 아니었어?”

“네, 맞아요.”

내 질문에 제현이 씩 웃었다. 이래도 헤실, 저래도 헤실 잘도 웃는 애지만 이번 웃음은 정말 능글맞았다.

‘저는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형을 오랫동안 좋아했어요.’

‘나는 킹을 밀어내고 형 안에 자리를 잡을 거예요.’

그 능글맞은 웃음에 언젠가 했던 제현의 말들이 갑작스럽게 연결되어 덜컥 뇌리에 꽂히자 순식간에 민망함이 몰려왔다.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핸드폰에 고정했다.

“아, 긴장 풀렸더니 배고프다. 감독님 저희 치킨 시켜 주세요.”

“치킨?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오늘 내가 다 사 줄게.”

준의 말에 조용하던 차 안이 시끌시끌해지며 온갖 배달 음식 메뉴들이 던져졌다.

***

오늘 경기력에 감동해 눈물도 찔끔 흘리신 감독님은 네 명이 먹기 충분하다 못해 과할 정도로 음식을 시켜 주셨다.

조그만 주제에 대식가라서 동진보다 많이 먹는 김준이 제일 신이 났다.

“찬희야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네.”

내 대답에 동진이 뼈밖에 남지 않은 손주를 보는 할머니 같은 얼굴을 했다.

“야, 맞다. 그게 있었지. 생각난 김에 올라가 봐.”

급기야 구석에 세워져 있던 체중계를 가져왔다. 예전 숙소에서부터 쓰던 것인데 여기까지 가져온 줄도 몰랐다.

예전엔 지운, 진형, 동진이 모여서 매주 내 몸무게를 재며 식단이나 운동 루틴 같은 걸 짠다고 극성이었다. 요즘엔 잊은 지 오래였는데 이렇게 갑자기?

“싫어요.”

“씁, 말 안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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