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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마이 트로피-8화 (8/100)

8화.

“아니, 어제는 취해서 분위기 타는 바람에 한 번 그런 거 아니야?”

“형, 지금 저 먹고 버려요?”

“야, 넌 무슨 말을 그렇게 상스럽게 해?”

“형이 지금 그렇게 말하게 만들잖아요.”

제현이 이를 갈며 짓씹듯 말했다. 조금 전까지는 어린 동생 대하는 큰형 같더니 순식간에 짐승처럼 거칠게도 말한다.

“어, 아니. 근데 아닌 게 아닌데. 어, 아니야. 근데 아니야?”

내가 고장이 난 사람처럼 떠듬떠듬 말하는데 제현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 갔다.

“형이 이렇게 가벼운 사람인 줄 몰랐어요.”

허, 가볍단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소리에 기가 찼다. 제현은 상처받았다는 티를 푹푹 내면서도 죽을 떠서 숟갈을 내밀었다.

“너…….”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는데 뭐가 됐든 그건 안 듣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 말하지 말고 먹기나 해요.”

딱딱하게도 말한다. 죽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

어색하다. 동진과 준이 스프릿 코리아에서 주관하는 KKL특집 [탱힐해듀오]라는 프로그램을 촬영하러 가서 연습실엔 나와 제현뿐이었다.

“…….”

둘만 남겨지면 숨 막히는 침묵과 어색함이 은은하게 감돌았는데 이게 벌써 며칠째였다. 내가 무슨 말만 하려고 하면 제현이 어물쩍 자리를 피하거나 대화를 막아 버리는 이유를 모르겠다.

“야.”

마침 게임이 끝나 그간 쌓인 답답함을 조금 풀어야겠다 싶어 불렀는데, 게임할 때 호응은 잘만 하더니 못 들은 척을 했다.

“…….”

더 말을 걸어 봐야 별별 구실을 다 대며 자리를 피할 테니 나도 더 이상 말을 거는 건 그만뒀다.

우리 사이는 영 어색해졌지만, 게임 합은 차근차근 잘 맞고 있었다.

제현은 신인치고 충분히 잘하고 있고 연습량도 무럭무럭 자라 내 연습량도 얼추 따라왔다. 순위표 끝자락에 있던 랭킹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올라오더니 어느새 10위권 안으로 안착했다.

그래도 곧 개막할 스프링 시즌은 걱정이 많았다. 무던하게 잘하던 진형도 순간의 판단 미스나 컨트롤 실수로 팬들이 저거 던진다며 ‘쓰로잉킹’으로 조롱하곤 했는데 워낙 화제성이 좋은 선수라서 어느새 게임 내에서 던지는 행위를 ‘잉킹한다’ 라고 부르며 밈처럼 쓰이기도 했다.

특히나 제현은 자신의 피지컬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어서 불리한 싸움도 피하지 않는 편이었고 이는 슈퍼플레이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게임을 말아먹는 악수가 되기도 했다.

시즌 중에 이런 장면이 반복해서 나온다면 어떤 조롱을 들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지나친 오버 플레이는 내가 제지한다지만 오히려 상황에 따라 제현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경우도 더러 있어서 판단이 어려웠다.

나이츠 게임에서 버퍼란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딜러의 도구같이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프로 씬에서는 상황을 넓게 보고 모든 팀원의 상태를 체크해 적절한 지원을 통해 전체적인 게임을 만드는 사령탑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판단이 어려운 상황일수록 빠른 판단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자리였고 나는 그게 버퍼가 다른 포지션보다 좋은 이유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나이츠를 함께해 온 진형의 경우에는 아 소리만 내도 지금 저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떻게 하겠구나, 하는 게 눈앞에 그려졌는데…. 제현은 같이 게임을 많이 해 봐도 가끔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모르겠는 순간이 더 많았다.

성장의 한계치도 진형보다 좁고 높아서 가늠이 안 됐다. 완전한 파악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폼이 조금만 떨어져도 퇴물 소리를 듣는 치열한 프로계에서 열심히 구른다고 굴러서 나름 노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나 시간이 모자랐다.

어떻게 하면 저 천방지축의 거친 신인 딜러를 더 잘 써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오늘 함께 플레이한 게임 리플레이 영상들을 돌려보고 있었다.

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더니 새하얀 패딩 무리가 우르르 연습실로 쏟아졌다. 팀 컬러가 화이트라서 저렇게 단체로 회사 옷을 입은 걸 보면 한 무리의 백곰들 같았다.

“어?”

동진과 준의 뒤로 백색에 가까운 금발이 보이자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차니차니!”

“형!”

한걸음에 달려가자 와락 끌어안는 품에서 찬 기운이 훅 들이쳤다.

트릭스 게이밍의 후원이 있기 전 팀 트라이앵글 시절에 힐러로 함께하다가 현재는 은퇴해 지금은 인터넷 방송 스트리머로 활동 중인 백지운이었다.

팀 트라이앵글 이전에는 옆집 살던 동네 형으로 날 잘 챙겨 줬던 형이기도 했다. 원래도 자기 관리가 철저했던 사람이지만 방송일을 하니 한층 더 반짝반짝해져 연예인 같았다.

“형도 탱힐해듀오 찍고 왔어요?”

“엉, 오랜만이네, 어디 보자. 살이 좀 붙었나? 살 만한가 보네.”

“언제는 죽상이었나요.”

“그런 편이지?”

지운이 웃으면서 확실히 지난 시즌보다 살이 붙은 것 같다며 내 허리춤이며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제현아, 이리 와 봐. 너는 초면이지? 트라이앵글 소속 스트리머인데 예전에 우리랑 같이 게임하던 형이야.”

“안녕하세요.”

동진이 기껏 소개해 주는데 제현은 답지 않게 무뚝뚝하게 인사를 했다.

‘어디 가서 낯가리는 성격이 아닌데 오늘 기분이 영 아닌가.’

지운이 활짝 웃으며 먼저 다가가 제현과 악수했다.

“아, 이번에 데뷔전 치르시죠? 같은 소속팀을 넘어서 완전 응원하고 있어요. 역대급 전력이라고 기사 많이 뜨던데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사근사근하게 잘만 대하던 애가 오늘따라 영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어색하게 제현이 손을 붙잡고 허허 웃던 지운이 내 팔을 잡았다.

“동동아, 나 찬희 데리고 커피 좀 사 올게.”

“다녀오세요.”

나오는 등 뒤로 동진이 제현에게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구냐고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지운이 커피를 마시다 말고 컥, 하며 사레가 들렸다.

“컥, 어억, 어…… 그래서 아까 걔랑 자, 잤다고? 그러면 지금 둘이 사귀는 거야?”

“그건 아닌데…….”

내가 진형을 좋아하는 것을 먼저 알아차리고 다가와 상담도 해 주고 위로도 해 줬던 터라 그런지 제현에 대해 궁금해하기에 그간의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지운답지 않게 당황했다.

“와, 진짜 내가 살다 살다 서찬희가 어린애한테 먹버한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소리를 다 듣네. 나는 너 저번에 진형이 왔다 간 거 보고 상태 영 별로일 줄 알고 걱정했는데 지금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잖아?”

“그런데 원래 남자 만나던 애도 아니고 거기다 계속 얼굴 보며 경기 뛰어야 하는데…….”

지운이 제현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너는 저번 시즌에는 뚜루랑 그렇게 기 싸움하더니. 어떻게 만나는 딜러마다 이 모양이냐.”

“그게 제 잘못이에요?”

지운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과실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지. 아무튼, 그래서 진형이는 아예 접은 거야?”

“그게 접는다고 접히는 거면 진작 접었을걸요.”

그건 그렇다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아마 저게 가장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진형이 새로운 여자 친구를 만날 때마다 혼자 침대에 처박혀 앓아누워 있으면 약을 사 들고 와 주던 지운이었기에 궁금해할 만도 했다.

“나는 진형이 보다는 걔가 더 맘에 드네.”

“아무 사이 아니고 그렇게 될 일도 없어요.”

“쟤는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지운이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내 뒤로 턱을 들며 고갯짓했다. 뒤돌아보니 제현이 성큼성큼 카페로 들어서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까 인사했는데 또 해요? 참 예의 바른 친구네?”

제현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같이 앉아도 되죠?”

이미 앉아 놓고 부러 묻는 게 뻔히 보였다. 내가 다 지운의 눈치를 보는데 지운은 오히려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 그래도 좀 더 이야기 나누고 싶긴 했는데 잘됐네요.”

“말 놓으셔도 됩니다. 한참 형이시잖아요.”

“내 나이 말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아요?”

“동형이 말해 줬어요.”

둘은 평온한 얼굴들로 나누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화인데 왜 이렇게 듣는 사람 속이 불편해지는지 모르겠다.

“그럼 그냥 편하게 말할게. 같은 방 쓴다고 들었는데 어때? 찬희랑 좀 잘 맞아?”

“네.”

“오, 찬희 예민한 편이라 즉답 나오기 쉽지 않은데. 어지간히 잘 맞나 봐?”

제현이 대답 대신 빙긋 웃는데 눈이 웃지 않는다.

“이제 슬슬 가 봐야 하는데 아쉽네. 너랑 유튜브 영상 각 한번 뽑고 싶었는데.”

“영광이죠.”

“자주 보자? 찬희 너도.”

지운이 가기 전에 나를 잡아당겨 끌어안고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숱이 많은 머리는 신경 쓰지 않으면 금방 산발이 되는데 엉망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형이 시간 안 되는 거면서.”

“아, 그러게나 말이야. 요즘 왜 이렇게 바쁘냐. 제현아, 우리 차니차니 좀 부탁할게.”

“네, 잘 챙길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왜 다 큰 사람을 여기저기서 챙긴다, 만다, 거리는 일이 이렇게 자주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누가 보면 다들 날 혼자 두면 돌연사라도 할 것처럼 대했다.

매니저가 데리러 온 듯 차에 올라타서도 연신 팔을 흔들어 인사하는 지운에게 나도 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차니차니라니 귀엽네요.”

“놀리냐.”

“형은 여기저기서 챙겨 주라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러게나 말이다. 그런 말 들어도 신경 쓰지 마.”

“싫어요.”

왜 또 퉁명스럽게 저러는지 모르겠다.

“형, 혹시 저 사람이랑도 잤어요?”

“……!”

별안간 떨어진 개소리에 오만상을 하고 제현을 쳐다봤다.

‘사람을 가벼운 사람 취급해도 정도껏 해야지.’

주변에 사람이 없어 내겐 손에 꼽는 사람인데 그중에서도 제일 믿을 수 있는 사람인 지운에게 너무나 실례인 소리였다.

뭐라고 쏘아 주려다가 말해 봤자 제대로 듣지도 않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말하는 사람만 피곤하지.’

제현을 지나쳐 숙소로 향하자 내 팔을 붙잡는다.

“형, 잠깐만요.”

“이거 놔.”

제현은 아까와는 다르게 한껏 기가 죽은 얼굴이었다.

“잘못했어요. 제가 잠깐, 잠깐 미쳤나 봐요.”

아무리 제현과 가볍게 원나잇을 했다지만 억울했다. 진형까지 쳐도 짧은 인생 살면서 자 본 사람은 딱 둘인데 사람을 얼마나 문란하게 보는 건지.

내 소매 끝을 붙잡고 꼬리 내린 강아지처럼 풀죽은 꼴을 보니 잘못한 건 아는 눈치였다.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오만 남자들이랑 다 자는 건 아니야. 그래 주지도 않고.”

“알아요. 그렇게 본 거 아니에요.”

“지운이 형한테도 실례야.”

“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눈도 못 마주치면서 잡은 소매는 꼭 잡고 놓지 않고 있는 모습에 올라왔던 화가 은근슬쩍 풀렸다.

그런 애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지운에게 틱틱 댄 것도 그렇고 오늘 내내 상태가 안 좋기는 했다.

무슨 말만 하려 그러면 피하더니…. 어쨌든 말이라도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너랑도 잘 생각 없었어.”

“…….”

제현이 잡고 있던 소매를 놓길래 돌아보자 땅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끌어 올려 눈을 맞춰 왔다.

“그래서 나랑 잔 거 후회해요?”

그렇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고 있자 제현이 손가락으로 그만 깨물라는 듯 입술을 톡톡 쳤다.

“먼저 들어가 볼게요.”

질문은 던졌으나 대답이 절실하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그냥 눈 딱 감고 후회한다고 대답했다면 깔끔하게 마무리될 일이었는데 제현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그 짧은 한마디가 나오지 않았다. 제현과의 섹스는 정말 좋았을 뿐 후회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늘 거짓말이 서툴렀다. 숙소로 돌아가면 어떤 얼굴로 제현을 마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주변을 한참 서성거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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