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진형의 한국 도착 시각은 이른 아침이었지만 숙소에서 인천 공항 직행버스가 있어서 나름 편하게 도착했다.
마스크 사이로 입김이 부스스 퍼져 나갔다. 작년 월드 시리즈 진출 결정전이 진형과 함께한 마지막 경기였다.
3위로 서머 시즌을 마무리하고 진행한 월드 시리즈 진출 결정전에서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은 가을 월드 시리즈행에 실패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막연한 후회와 절망이 몸을 뒤덮는 것 같아 기분이 처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그 시간을 돌이켜 생각해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 손으로 우승컵을 든다면 달라질까.’
월드 시리즈 진출 실패 후 진형은 데뷔와 창단을 함께한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을 떠나 북미팀 MVP로 이적했다.
진형이 숙소를 떠나고 자꾸 진형의 이름을 부르며 찾다가 이젠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바보짓을 한동안 반복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동진이 형이나 준이도 그랬다. 두 달 전에 잠깐 한국 들어왔을 때 보고 못 봤는데 이번에 보면 또 언제 볼지 모른다.
또 3등을 했던 우리와는 달리 MVP는 북미 리그인 NKL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으니 우리가 운이 좋다면 월드 시리즈에서 상대 팀으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입국장에서 나오는 진형이 멀리서 보였다. 몇 명의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었고 팬들도 이른 아침부터 기다렸는지 선물과 편지를 주고 사인을 받고 있었다.
‘저게 아이돌인지 프로게이머인지.’
나는 인파에 휩쓸리기 싫어 근처 카페에 가 있을 생각으로 뒤돌았던 순간이었다. 인파가 정리될 때쯤 알아서 연락하겠거니 하면서.
“서찬희!!!”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오만 시선이 나에게 꽂히는 것을 느꼈다.
아 진짜 왜 저래.
“찬희야!!!”
진형이 캐리어는 팬들 사이에 놔두고 한걸음에 달려와 나를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았다.
“아, 찬희 냄새난다. 이제 좀 한국 온 것 같다.”
“!!”
당황한 와중에 뒤에서 기자들과 팬들이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번 주는 커뮤니티 들어가면 안 되겠다.’
“체크메이트 선수가 킹 선수를 데리러 오신 건가요? 저번에 귀국하셨을 때도 마중 오셨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한 기자가 웃으며 마이크를 진형 쪽으로 건넸다. 가만히 두면 날 안아 든 채로 인터뷰가 이어질 것 같아서 어깨를 몇 번 내리치자 그제야 내려 주는 진형이었다.
내가 틈만 생기면 어떻게든 인파를 뚫고 도망가리라 결심하고 있는 것을 눈치챈 건지 진형이 내 어깨에 자기 팔을 둘러 감싸 안았다. 탈출은 글렀다.
“저희 엄마가 아시면 슬퍼하시겠지만, 이번에 한국 들어온 이유가 찬희 보고 싶어서 온 거라서요, 하하.”
“사이가 정말 좋으신가 봐요. 팀 이적 후에도 자주 연락하시나 보죠?”
“그렇게 자주는 못 하는데 그래도 될 수 있으면 하려고 하죠.”
“국내 팬들은 킹 선수를 국내 리그에서 못 보게 되면서 아쉬움이 많았는데요. 이번 시즌…….”
진형에게 단단히 붙잡힌 채로 인터뷰가 계속 진행됐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고 나는 뚱하게 서 있는 채로 눈알을 굴렸다. 몇 번씩 기자가 내게도 질문을 던졌고 말이 잘 나오지 않아 어버버하면 진형이 능숙하게 마이크를 채가 인터뷰를 이끌었다.
기자들과의 인터뷰가 끝나고 팬들에게도 한참을 인사하고 나서야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택시에 올라타자 벌써 모든 기운이 다 빠진 기분이라 그냥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 게임이나 하고 싶었다.
“표정이 왜 그래.”
“그럼 내가 지금 기분이 좋겠어?”
“나는 기분 좋은데.”
어련하시겠습니까. 손바닥에 턱을 괴고서 창밖만 죽어라 쏘아봤다.
깜빡 잠이 들었는지 일어나 보니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텔에 도착해 있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숙소로 오라고 하거나 호텔에서 기다릴 걸 그랬다.
‘오는 시간에 얘기라도 더 나누려고 마중 온 거였는데 잠들어 버리다니.’
원래 자고 있을 시간에 공항까지 온다고 힘들었나 보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체크인하고 키 받아 올게.”
호텔 로비에 마련된 의자에 나를 주차해 놓고 프런트로 달려갔다. 직원이 나이츠 리그 팬인지 진형을 보자마자 별안간 얼굴이 밝아졌다.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고 사인까지 해 주는 모습을 보다가 테이블에 엎드렸다.
‘졸리고 눕고 싶은데 빨리 좀 오지.’
진형은 사람을 좋아했다. 일단 저 좋다는 사람이면 다 좋아해서 누구든 잘 받아 주고 제 품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
‘같이 해 줄까?’
화장실에서 자위하다가 들켜서 돌처럼 굳어 있는 날 가만히 보던 진형이 건넨 말이었다.
터질 것 같이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있으니 다가와 자신의 것과 내 것을 같이 움켜쥐고 흔드는데 정신 나가는 줄 알았다. 거의 동시에 사정을 마치고서 절정의 여운에 떨면서 먼저 입을 맞부딪힌 건 나였고 이번에 당황한 것은 진형이었다.
‘키스는 할 생각 없었는데.’
‘…….’
‘나쁘진 않네.’
그 뒤로 종종 숙소에 둘만 남게 되면 우물쭈물 다가가 들이밀면 웃으며 받아 주는 진형이었다.
아무래도 전 여자 친구들로 숙소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사람이다 보니 키스나 내가 해 주는 펠라는 좋아하지만, 그 이상은 좀 버거워하는 것 같아 나도 바라지 않았다.
형 물건을 입에 머금은 채로 뒤를 손가락으로 애타게 쑤시고 있을 때면 가끔 어쩔 수 없다는 듯 안아주기도 했다.
“하아…….”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기억밖에 없어서 벌떡 일어나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새 졸았어?”
볼에 옷 주름이 남았는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
얌전히 엘리베이터에 탔다. 큼지막한 캐리어에 기대어 진형을 보았다. 만나자마자 사람들 속에 파묻히고 토라져 있느라 여태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무래도 미국 가더니 피부가 좀 탔다. 여기서도 운동을 챙겨서 하는 편이었는데 근육도 더 붙은 것 같고. 해외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나 보다. 숙소만 옮겨도 온갖 탈이 나는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역시 조금은 보고 싶었나 보다.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있는 진형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적당히 탄 피부는 잘 구워진 빵 같아서 냄새를 맡으면 햇빛 냄새가 날 것만 같았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리자 나는 손을 거두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캐리어 굴러가는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호텔 방 안에 들어서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진형을 붙잡아 입을 맞췄다. 잠깐 당황하던 진형이 뭐가 그리 급하냐며 웃으며 날 떨어뜨리려 하길래 부러 더 달라붙으며 외투를 벗어 던지고 침대로 끌고 갔다.
주저앉아 진형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기대고 올려다봤다. 진형이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제 입술을 한번 핥았다.
차가운 것이 볼에 닿아 흠칫 몸을 떨었다. 못 보던 팔찌였다. 내가 아는 한 진형의 취향은 아니었다.
“못 보던 거네?”
“어, 응.”
말을 흐리는 모습에 날뛰던 욕망이 차분하게 사그라졌다. 또 다른 사람이 생겼구나.
“왜 그래?”
“아니야.”
일어나 들어오면서 급하게 벗어 던졌던 외투를 다시 주워 들었다.
“어디 가?”
“숙소.”
진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손목을 붙잡았다.
“갑자기 왜 그래?”
이 상황이 당연히 이해가 안 될 만도 했다. 나도 이런 내가 웃겼다.
한국에 있을 때도 매번 여자 친구가 바뀌던 사람이니 미국에 갔다고 해서 없을 리가 없는데도 우습게도 매번 속이 상했다.
‘나는 도대체 뭘 바란 걸까.’
우습다는 말이 참 잘 어울렸다. 그나마 진형이 이렇게까지 받아 주는 남자는 나뿐이라는 것에 특별함을 느끼는 것도 이젠 지쳤다.
사실 진형에게 질척거리는 남자가 나뿐이어서 나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저 좋다는 사람이면 어지간하면 내치질 못하는 성격이니 나만큼 매달리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특별함은 덧없이 사라지겠지.
호텔에서 숙소는 걸어서 충분히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나는 마치 숙소에 도착하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처럼 절실하게 숙소에 가고 싶었다. 진형이 언제 뒤쫓아왔는지 날 다시 붙잡았다.
“진짜 왜 그래? 이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거 알잖아.”
“알아. 형한테는 나도 아무것도 아니잖아.”
“왜 말을 그렇게 해?”
잡힌 팔을 뿌리치고 다시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늘 아무 생각도 없이 불쑥 보고 싶다고 통화를 걸고 오직 나를 만나러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도 하겠지만 그게 전부일 것이다.
급한 내 발걸음을 부단히 뒤쫓는 모습에 또 어물쩍 넘어가 버리기 전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내가 우뚝 서자 뒤쫓다 미처 멈추지 못한 진형이 부딪쳤다.
“나, 형 좋아해.”
“어? 알아, 나도 너 좋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부대끼면서도 단 한 번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이제 겨우 말하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그저 허망하다. 나는 헛웃음이 절로 흘렀다.
“나는 형이 다른 사람 만나는 거 싫어.”
“찬희야 우리가 무슨 사이도 아니고…….”
맞다. 여자 친구도 정식으로 사귀지 않는 사람에게 남자끼리의 관계에서 무슨 구속력이 있겠는가. 입술을 꾹 깨물다가 뒤돌아 진형의 가슴팍에 주먹을 날리며 버럭 소리 질렀다.
“그래, 형 말대로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보고 싶다고 할 때마다, 키스 받아 줄 때마다 혹시나 하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해.”
“찬희야.”
“아니다. 내가 잘못한 거야. 애초에 내가 형 좋아한 게 문제니까…….”
힘껏 때린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뒤에서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 뒤돌자 음료수병을 떨어뜨린 제현이 있었다.
온몸에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이긴 했지만,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 굳어 있다가 무작정 숙소로 달렸다. 범죄 현장에서 도망치는 범죄자처럼 마냥 도망쳤다.
도망치면서 머릿속을 꽉 채우는 생각은 단 하나, 아무래도 나는 좆된 게 분명했다.
***
연습실 의자에 앉아 짧은 인생을 되돌아보자 남는 것은 한 줌의 프로 경력뿐이었다.
‘우승컵을 한 번쯤은 들어 보고 은퇴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프로 생활을 접으면 나는 뭐로 먹고살아야 하지.’
그때 연습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이 펄쩍 뛰어올랐다.
탁.
그대로 굳어 있는데 제현이 자기 자리에 음료수병을 놓더니 앉았다.
“…….”
끔찍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손에 절로 땀이 차 축축해졌다. 숨 쉬는 것마저도 신경 쓰여 미칠 노릇이었다.
“같이 게임 돌릴래요?”
“뭐……?”
혹시 대화 내용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아, 게임을 하긴 좀 그런가요? 아까 그런 일 있으셨으니까.”
희망은 빠르게 나를 그냥 스쳐 지나갔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어디까지 들었어.”
“그게 중요해요?”
고개를 틀어 옆을 슬쩍 보자 여유롭게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제현이 보였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아주 혐오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TV에 나오는 동성애자만 봐도 구역질 시늉하는 김준에게 걸렸더라면 난리가 났을 텐데. 혹시 나 은퇴 안 해도 되는 건가?
“그게…… 미안하다.”
“왜 사과해요?”
내 사과에 오히려 미간을 좁히며 묻는다. 눈치를 보며 침을 삼켰다.
“형, 있잖아요.”
목덜미를 긁적이던 제현이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나한테는 겁먹지 마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형 편이니까.”
“…….”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이 긴장이 풀리자 의자를 타고 주르륵 흘렀다. 제현이 나를 보고 웃으며 마우스를 잡았다.
“그래서 게임 할래요, 말래요?”
“……할게. 근데 있잖아.”
“네?”
“그, 비밀로 해 줬으면…… 좋겠다.”
나름대로 절박하게 말하는데 내 말이 끝나자 제현이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아 진짜 절 뭐로 보시는 거예요.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시는 것도 어쩔 수 없지만, 저 입 무거운 편이거든요. 어디 가서 함부로 남의 개인사 말하고 다니는 그런 애 아니에요.”
“미안.”
“참 나,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자꾸 사과해요.”
세상이 다 무너진 줄 알았는데 상황이 너무 쉽게 풀리니 얼떨떨했다. 오래 알던 사이에도 이렇게 수월하게 넘어가기는 쉽지 않을 텐데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이렇게 다독여 주기까지 하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렇게 착한 애를 부담스럽게 느끼다니 내가 나빴다. 다음에 밥이라도 한번 거하게 사 줘야겠다고 다짐하며 마우스를 쥐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