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behind (1)
오후 3시쯤 잠에서 깼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방을 나섰다. 잠기운이 남아 있는 시야는 흐렸고, 유난히 긴 통로가 나타나자 아득해졌다. 복도식 구조는 넓은 평수까지 더해져 이따금씩 까마득한 느낌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정원아.”
이름을 부르며 복도를 따라 걸었다. 고개를 기웃거리며 하나씩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작은방, 욕실, 베란다, 중간방, 드레스룸까지. 그러나 고정원은 그중 어디에도 없었다.
“…고정원.”
부르면서 초조해지고 있었다.
“너 어딨어?”
목소리에 조금씩 떨림이 스며들던 때였다.
띠, 띠, 띠…. 도어락 버튼 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잠금이 해제되는 멜로디가 잇따르고 드르륵, 중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이를 향해 뛰어오르자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귓가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지금 일어났어?”
묵직한 존재감을 만끽하며 조인휘는 끄덕였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산소 보충하듯 냄새를 맡았다. 울고 싶을 만큼 좋은 냄새가 코를 통해 들어왔다. 안정제나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몸이 순식간에 이완되었다.
“너 어디 갔다 와.”
울음기를 숨기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고정원은 말없이 조인휘를 안아 든 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거실의 테이블에 다다라 그곳에 조인휘를 올렸다.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메모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인휘야 나 병원 다녀올게.
일어나면 연락하고,
배고프면 냉장고 열어 봐.
사랑해.
자는 사이에 고정원이 사라졌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 판단력이 흐려졌다. 예전부터 종종 메모를 남기고 외출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황한 나머지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전화를 해봐야겠다는 단순한 절차조차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쉽게 공황 상태가 된 것이다.
“…깨워서 같이 가지.”
“푹 자길래. 그사이에 빨리 갔다 오려고 했지.”
고정원은 요즘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팔의 상처 때문에 다니는 정형외과, 혹시 모를 기억 문제의 재발 방지를 위한 신경외과였다.
“…그래도…. 담엔 꼭 깨워서 같이 가.”
“응, 꼭 그럴게.”
대답하며 고정원은 포옹을 해주었다. 조인휘는 고정원의 양쪽 겨드랑이에 딱 맞물리도록 제 팔을 밀어 넣었다. 접착된 것처럼 밀착하여 양다리로 허리를 감았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매번 이런 식이었다. 심지어 고정원이 쓰레기를 버리고 오거나, 코앞 편의점에만 다녀와도 그랬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오랫동안 떨어진 기분이 들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이렇게 끌어안고 있어야 직성이 풀렸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입술끼리 맞붙고 있었다. 키스하느라 고개가 꺾인 채로 고정원의 겉옷을 벗겼다. 고정원의 손길 또한 촉박하게 조인휘의 잠옷 바지를 끌어 내렸다.
몸이 돌려지고, 대뜸 볼기 사이로 젖은 성기가 문질러졌다. 굵은 귀두부터 천천히 들어오던 음경은 중간쯤에서 뿌리째 박혀 들었다.
“헉….”
뜨거운 점막을 빽빽이 메운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아….”
고정원의 손가락이 벌어진 입을 파고들었다. 난잡하게 혀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손가락은 벌어진 잠옷의 가슴팍으로 내려가 뾰족해진 유두를 둥글렸다. 단추가 풀리며 헐렁한 파자마는 어깨 밑으로 주륵, 흘러내렸다.
“읏….”
조인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을 메운 것이 아주 더디게 왕복하고 있었다. 길고 굵은 성기의 시작과 끝, 그리고 빠듯하게 벌어졌다 다시 좁아지는 자신의 뒤가 여실히 느껴졌다.
빠르게 드나들 때보다 몇 배로 감각이 선득했다. 어느덧 조인휘의 음경에서부터 흘러내린 프리컴이 샅으로 고였다. 느린 움직임에 맞추어 흔들거리다 떨어졌다.
“이렇게, 느리게….”
속삭이는 소리가 탁하게 들렸다.
“몇 시간이고 계속 비벼주는 거 좋아하잖아.”
아니야? 물으며 고정원이 귓속에 혀를 넣었다. 진저리가 나며 절로 뒤가 조였다. 압박감을 느끼는지 아, 탄식을 터뜨린 고정원이 양팔로 구속했다.
“어 좋, 아… 나, 해줘, 몇 시간이고, 해, 줘….”
부탁하며 뒤로 겹쳐진 고정원에게 제 몸을 문질렀다. 닿는 몸도, 이어진 곳에서 느껴지는 열기도 모두 기꺼웠다.
함께 침대로 옮겨 갔다. 조인휘는 엎드려서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그 뒤로 고정원의 성기가 점막을 꾸준히, 천천하게 문질렀다. 숨이 헐떡헐떡 넘어갈 듯했다. 정말로 몇 시간이나 느리게 비비기만 하는 자극이 이어졌고, 소름과 몸서리가 한시도 쉬지 않고 내달렸다.
총 세 번의 사정을 거치고 나서야 식사가 시작됐다. 조인휘는 흐물흐물해진 몸으로 고정원의 다리 사이에 들어가서 앉았다. 다른 곳은 싫고 오로지 그 자리가 좋았다. 지정석에 앉아 고정원이 가져오는 음식을 군말 없이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이거 줄까? 아니면 이거?”
“…그거.”
누구도 저희가 이러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여기는 둘뿐이고, 섹스를 포함해 별짓을 한들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깨달은 뒤로 조인휘는 남사스러운, 남들 눈에 흉이 될 만한 행동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마음이 편한 게 우선이었다. 이래야 안심이 되면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어쩌겠는가. 비단 식사뿐 아니라 생활 전반이 마찬가지였다. 고정원의 기억이 돌아온 이후로는 보호와 시중에 가까운 보살핌이 조금도 부담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과도한 밀착 생활로 인해 정상적인 활동이 가능했고, 이제는 지극히 당연한 일상으로 수용할 뿐이었다.
식사 후에는 소파에 마주 앉아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조인휘는 마주 안은 고정원의 단단한 목덜미를 안마해 주며 물었다.
“이제 완전히 걱정 없다고 그러지? 후유증 같은 거, 더 없다고 그러지?”
“이제는 괜찮대.”
“…정말?”
“정말.”
몹시 익숙한 눈빛이 자신을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느낌’이 그곳에 있었다.
눈시울이 뜨끈해지면서 조인휘는 고정원을 끌어안았다. 고정원이 마주 안아 주자 울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날, 고정원의 기억이 기적적으로 돌아왔던 날.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달려온 고정원에게 이런 식으로 안겼었다. 강한 힘으로 품에 안기자마자 장소도 잊고 목 놓아 울었다. 주체가 되지 않아 통곡에 가깝게 울다가 실신했고, 눈을 뜨자 병원이었다. 제 손을 잡은 고정원이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고정원의 눈은 지독할 만큼 충혈돼 있었다. 안광은 평소의 몇 배나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고, 이마와 턱 곳곳으로 푸르게 혈관이 돋아 극심한 통증을 참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떻게 봐도 아픈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시간이 흐른 뒤에도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조인휘는 고정원의 앞에서 되도록 울지 않으려 노력했다.
“부모님께 언제 인사드리러 가지?”
묻는 말에 온기를 내뿜는 가슴팍에서 떨어졌다.
“굳이, 바로 안 가도 될 것 같긴 한데.”
고정원은 빠른 시일 내에 부모님을 찾아뵙고 싶다고 했다. 하필 머리에 이상이 있을 때에 만나 뵙게 되어 신경이 쓰인다는 뉘앙스로 말했던 게 며칠 전이었다.
“가고 싶어. 인사도 드리고, 같이 식사도 하고.”
조인휘가 비시시 웃으며 고정원의 뒷목을 쓸었다. 짧아서 까슬한 머리카락의 감촉을 즐기듯 손가락으로 문질문질했다.
“생각해 보니까 급할 거 없어. 너 병원 다니는 것도 있고, 회복도 해야 되기도 하고… 일단 인사는 전에 드렸으니까 천천히….”
“그건 내가 아니었잖아.”
“…어?”
말이 끊긴 조인휘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 응 알았어. 그럼… 일단 엄마한테 시간 언제 되냐고 물어볼게.”
“그래, 그렇게 해줘. 편하신 시간에 내가 맞추면 되니까.”
“응….”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니. 전에도 이런 식으로 구분 지어 말했었나.
일전에 물어본 적이 있었다. ‘기억을 잃었을 때의 일들을 기억하냐’는 물음에 고정원은 ‘띄엄띄엄’ 하고 답했다. 어쩐지 그때 일을 화제에 올리는 것을 원치 않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후로는 묻고 싶어도 일부러 피해 왔는데….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으며 속이 상했다. 그때 자신이 했던 행동들이 지금에서야 다소 부적절하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당시 자신이 취했던 선택들은 모두 어쩔 수 없는 대응이었다. 기억을 잃은 고정원과 잃기 전의 고정원을 구분 짓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고,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면 모든 게 끝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거의 본능적으로 분리시켰던 것인데….
“…있잖아.”
“응.”
손가락이 고정원의 짧은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네가 기억 잃었을 때…. 그, 나는 그게 절대 너 아니라고 생각했었거든? 너도 띄엄띄엄 기억이 난다고 했으니까 아마 알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거든. 덧붙이며 조인휘는 짧게 한숨을 토했다. 그리고 고정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근데 니가 다시 기억 찾고 나니까, 모든 게 다시 정상이 되니까 이제야… 그니까, 그것도 너였었구나… 새삼 정원이 너 맞았구나 싶고…. 음, 나도 내가 뭔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
“그냥, 어차피 다 너였고, 나는 고정원 너라면 다 좋고… 그러니까….”
요지는 기억 잃었을 때의 자신을 너무 그렇게 부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부정할수록 다른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괴로울 테니까.
“개명하고 너한테서 내 존재 지우겠다는 게, 그게 나야?”
고정원의 말이 나직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눈이 바짝 뜨였다. 워낙 예상 밖의 말들이었기 때문에 내용이 즉각 머리에 들어오지 못했다.
“…뭐?”
쳐다보자 고정원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갑자기 빨라지는 속도에 눈이 반사적으로 감겼다. 이어서 쪽, 소리가 갔다.
“데이트 가자.”
아직 대화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갑자기?’ 하고 묻자 단단한 입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응. 갑자기.”
“뭐… 어디로?”
묻는 말에 따뜻한 손이 뺨을 어루만졌다.
“우리한테 중요한 곳.”
* * *
남산을 다녀온 뒤로 쭉 이런 상태였다. 품에서 꾸벅꾸벅 조는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코로 한숨을 내쉰 조인휘는 뒤척이며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점점 뒤로 꺾이는 고개를 지켜보던 고정원은 조용히 안고 일어났다.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에는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어렴풋이 웃음이 났던 건 데이트 내내 좋아하던 얼굴이 떠올라서였다. 입 안의 목젖이 다 보일 만큼 커다랗게 웃는 얼굴이 귀여웠다.
남산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사진도 꽤 많이 찍었다. 내려와서는 잘 가지 않던 노래방에도 다녀왔다. 조인휘는 뭘 해도 넘어갈 듯이 웃었고,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간만에 보는, 한 점 흐림 없이 밝은 모습이었다.
내려다보는 고정원의 눈과 입매가 그윽해졌다. 몸이 느슨하게 기울어지며 고정원은 협탁 위로 팔을 올리고 다리를 꼬았다. 턱을 괸 자세로 얼마간 그대로 지켜보았다. 단순히 지켜보는 것을 넘어 관찰에 가까운 감상이 끝난 후에는 약한 조명만을 남겨두고 방을 나섰다.
고정원의 눈앞으로 긴 복도가 이어졌다. 올바르게 자리하고 있던 시야가 돌연 이지러졌다. 벽에 등을 기대며 고정원은 고개를 숙였다. 참아내듯 발치까지 온 근육에 힘을 주었다.
불쑥 치민 감정에 강렬하게 압도되며 급작스런 이명이 찾아들었다. 머릿속에서는 많은 장면들이 빠르게 스치고 있었다.
“하….”
모든 증상은 어떠한 전조도 없었다. ‘그 기간’의 일들이 떠오를 때면 매번 이런 식이었다. 주고받았던 말들이 쏟아지고, 장면들이 세세하게 되살아나며 쏟아졌다. 셔터를 내리듯 갑작스레 들이닥쳐 일상을 통제하고 중단시켰다. 육신과 정신이 좀먹힐 동안 가만히 서서 호흡하는 일조차 고역이고 고통이었다.
“…….”
눈시울이 벌게지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증상과 감정을 간신히 가라앉힌 고정원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스스로에게 짧은 말미를 준 뒤에는 식은땀을 훔쳐 내며 거실로 향했다.
긴 복도로 인해 동선이 길었다. 이사 온 곳은 이전 오피스텔과 비교해 약 20평 정도 넓어진 상황이었다. 일부러 넓은 곳을 택했다. 조인휘가 잠시 스쳤던 ‘그 집’과 비교하는 심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조인휘는 공간 낭비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지만 곧 적응하리라 생각했다. 이전 오피스텔도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으니 이곳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형 디스플레이와 서라운드 스피커를 갖춘 홈시어터 공간은 벌써부터 좋아하고 있었다.
‘그 집’은 기억을 찾은 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정리를 마쳤다. 처음에 조인휘는 그 집의 처분을 반대했었다. 번거롭게 이사할 것 없이 그냥 살아도 된다고 했지만 제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찝찝해서 싫다는 말로 설득시킨 후 빠르게 이사를 준비했다.
해당 공간에 있던 물건들도 물론 깨끗하게 폐기했다. 가구는 물론이고 드레스룸을 채우고 있던 옷가지, 향수, 시계, 신발 등, 모조리 처분시켰다. 정리 직전 살펴보았을 때 마치 역할극을 위해 마련된 물건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의 취향과 동떨어진 옷들과 향수는 그 목적이 분명한 만큼 구역질이 났다.
후, 소리 내며 고정원이 웃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웃음이 났다. 조인휘와의 미래를 계획하며 마련한 거처에 간신히 조인휘를 들이자마자 무산된 꼴이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묘한, 승리감과 비슷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
고정원은 꺼낸 양주를 식탁에 앉아 따랐다. 천천히 세 잔쯤 비웠을 때 등으로 예상치 못한 무게감이 얹혔다.
“…벌써 일어났어?”
푹 잠든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새 나온 조인휘가 온기를 찾는 것처럼 안기려 들었다. 팔을 뻗은 고정원은 적극적인 몸을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아예 들어서 제 무릎에 앉혔다. 이런 식으로 자다가 깨서 찾는다거나 불안해하고 있다는 게 전해질 때면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혼자 술 마시고 있어?”
고정원의 양쪽 뺨을 만지며 조인휘가 눈을 맞추었다. 이리저리 보더니 부딪치듯 입술에 뽀뽀를 했다. 술맛이 난다고 불평하면서도 좋아 죽겠다는 듯 웃는 얼굴에 두 눈이 박혔다.
“그렇게 좋아?”
“…어. 좋지.”
솔직하게 굴고 있었다. 최근 들어 표현이 더욱 솔직해졌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 달라진 태도가 마냥 좋은 게 아니라 아프고 애틋하기도 했다.
고정원은 조인휘의 입술에 제 입술을 찍었다. 쪼는 소리가 나도록 뺨에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입맞춤을 받은 조인휘는 집중력 없는 어린애처럼 몇 번이고 무릎 위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고정원의 두꺼운 몸통 곳곳을 만지작거렸다.
주무르고, 쓰다듬고, 깨물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졌다. 말 그대로 열렬한 애정표현이었다. 유일하게 자신에게밖에 주어지지 않는 특권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곱씹으며 고정원은 또다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가서 같이 잘까?”
“아니…. 잠 다 깼어.”
“안 좋은 꿈 꿨어?”
“…아니? 너가 노래방에서 걸그룹 노래 부르는 꿈 꿨는데.”
오늘 있었던 데이트를 말하는 듯했다. 노래방에서 ‘제발 해달라’는 조인휘의 부탁에 모르는 노래를 따라 불렀었다. 웬 아이돌 그룹, 그것도 여자 아이돌 그룹의 노래였다.
재밌을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조인휘는 노래 부르는 자신을 보며 웃다가 눈물까지 비쳤다. 배를 움켜쥐고 자지러지던 모습이 귀여웠고, 그게 유일하게 재밌는 일이었다.
간지러운 기분이 든 고정원은 마른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보드라운 목덜미에 코를 문질렀다.
좋은 순간에 불길하게도 다시 서서히 두통이 밀려오는 듯했다. 눈을 감자 관자놀이가 지끈, 울렸다. 눈꺼풀로 뒤덮인 시커먼 시야로 불쑥 어떤 장면과 어떤 모습이 떠올랐다. 떠오른 두 사람이 곧 자신과 조인휘라는 걸 알았다. 둘은 거울 앞에서 보란 듯이 성교를 하고 있었다. 보란 듯이, 달라진 자신을 모습을 인식시키려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
이러한 증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실상 이런 기억의 일부분을 마주할 때마다 타인의 경험을 목도하는 것 같았다. 이질감과 구역감이 부작용처럼 따라왔다. 이런 것을 과연 ‘기억을 잃었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차라리 ‘육체를 빼앗겼던 경험’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적합했다.
조인휘가 그때의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주지 않았던 것.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노력했던 것을 전부 알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어떻게 거부했고, 어떻게 허용했는지 알고 있었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합법적인 외도를 낱낱이 지켜본 심정이었다. 그런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결책은 없고 혼자서 삭이고 안고 가야 할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조인휘가 했던 선택과 행동에 대해 책망할 마음 같은 것은 조금도 추호도 없었다. 그럴 자격은 더더욱 없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기억 안 돌아와도 돼.’
‘그냥…. 지금 그대로여도 돼.’
그건 마지못한 허용이지 사랑이 아니었다. 어떻게 봐도 불가피한 승낙에 가까운 것이었다. 알면서도 떠올릴 때마다 손끝이 싸늘하게 조였다. 당장 어떻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격통이 느껴졌다.
“아, 맞다. 그거 다용도실에 내놔야겠다. 택배 온 거.”
외친 조인휘가 다짜고짜 품에서 벗어났다. 힘이 잔뜩 서려 있던 손아귀가 머물 곳을 잃었다. 남은 온기를 느끼며 멍하니 앉아 있던 고정원은 벌떡 일어나 뒤를 쫓았다.
다용도실 한편에서 조인휘는 택배 상자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며 등 뒤로 가만히 문을 닫았다. 좁은 공간은 몇 걸음 다가간 것만으로 거리가 훌쩍 가까워졌다. 막 허리를 일으키고 나가려는 상대에게 고정원은 고의적으로 몸을 부딪쳤다.
“…왜, 무슨….”
나아가려는 앞을 가로막았다. 몸을 이용해 지그시 누르고 밀어붙였다. 뒷걸음질 치던 조인휘의 등이 어느새 빈 벽에 닿았다.
세탁기와 보일러, 화분 몇 개가 놓인 공간이었다. 문 하나를 두고 베란다와 이어져 온도가 서늘했다.
“…넌 머릿속에 그 짓밖에 없냐….”
“응. 너랑 그 짓 할 생각밖에 없어.”
말하며 가슴팍으로 지그시 압박했다.
“여기서는 안 해봤잖아 우리.”
이사 오고 며칠 동안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했다. 거실, 부엌, 침실, 작은방, 중간방, 휴게실, 드레스룸, 화장실 등 온갖 곳에서 흔적을 남기듯 해댔다. 하지만 문 하나를 두고 밖으로 이어지는 이 다용도실에서는 아직이었다.
“아….”
뜨거운 손이 헐렁한 옷가지를 벗겨 내렸다. 뼈대에 얇게 달라붙은 피부 구석구석을 만지는 동안 고정원은 흥분으로 헐떡였다. 조인휘가 귀찮아할 만큼 옆얼굴에 입을 맞추어댔다.
3.5kg이 찐 몸에서는 약간의 살집이 잡혔다. 날마다 보양식을 해 먹인 보람이 있었다.
“다행이다. 살 붙어서.”
귀에 대고 말하자 조인휘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 틈에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렸다.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는 굵은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구멍은 몇 시간 전의 섹스로 아직까지 푹신했다. 손가락을 빼고 성기를 가져다 대기 무섭게 움푹 삼켜졌다.
“하, 읏….”
마주 선 채로 삽입하는 내내 팔과 손으로 차가운 벽이 닿았다. 발바닥에 닿는 타일마저 차가웠다. 온도의 대비로 이어진 곳은 더욱 뜨거웠다.
왕복할수록 조인휘는 느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분비액이 불투명하고 끈끈한 점액질로 변해 있었다. 드나드는 성기로 끈적하게 달라붙어 자극제 역할을 했다. 감도가 한층 좋아지며 서로의 입에서 뜨건 숨이 샜다.
접합부로 고인 체액이 마르지 않고 떨어졌다. 투닥, 투닥, 소리를 내며 타일 바닥에 얼룩을 만들었다. 화초 잎에도 튀어 있는 것을 본 고정원이 작게 한숨을 토했다.
조인휘는 고정원의 어깨나, 자기 손등을 물어가며 쾌감을 참으려 했다. 그래 봤자 밑은 경련하듯 조였고, 얼굴은 무너지고 있었다.
어느새 조인휘의 손이 고정원의 팔뚝을 꽉 움켜쥐었다. 힘이 서려 긴박해진 손가락은 시트를 움켜쥐던 모습을 연상시켰다. 강하게 색정을 자극했다. 긴 손가락들과 붉어진 얼굴을 번갈아 보던 고정원이 허리를 세게 몰아붙였다.
“아!”
조인휘의 한쪽 다리가 완전하게 벌어졌다. 접힌 채로 벽에 닿았다. 그대로 육중한 무게를 밀어붙였다. 지그시 밀어붙일 때마다 아, 아, 끝이 올라가는 신음이 자극적이었다. 섹스에 환장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하고 있어도 어떻게든 하고 싶어서 머리가 돌 것 같았다. 짐승처럼 목을 긁기 시작하며 고정원의 입술이 벌어졌다.
“음…!”
신음하며 고정원이 얼굴을 파묻자 빽빽한 점막이 기둥을 조여 왔다. 흥분해서 잔뜩 붓고 커진 살들이 서로를 짓누르고 비벼댔다. 너무 좋아서 화가 치밀었다. 붙든 상태에서 몇 번이고 강하게 쳐올렸다.
철퍽, 퍽, 철퍽!
때리듯 폭력적으로 살과 살을 부딪쳤다. 못 참겠어서 분내 나는 목덜미를 깨물었다. 잇새로 질근질근 물며 허리를 마구잡이로 치대었다. 조인휘도 흥분이 극에 달했다. 양손을 고정원에게 둘렀다. 가까이 당기고, 목덜미와 머리칼을 헤집으며 더 해달라는 듯이 졸랐다.
고정원이 조인휘를 안아 들었다. 다용도실을 나가 삽입된 채로 걸었다. 혀를 섞으며 지저분하게 입을 맞추었다. 아래로는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쥔 채 흔들어대며 연결부를 자극했다. 걷는 반동을 따라서도 매달린 몸이 거세게 들썩였다.
침실로 갈 것도 없이 소파에서 본격적인 행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조인휘는 그때부터 정신을 못 차렸다.
“흣, 읏…! 아, 좋, 아…!”
이성이 사라지는 과정이 눈에 보였다. 눈이 흐려지고 입에서 침이 흘렀다. 허리가 옴폭해지도록 상반신을 한껏 젖히고, 광대와 뺨 언저리를 앓는 사람처럼 붉혔다. 벌어진 입 속이 선홍색으로 젖은 것까지 눈살이 찌푸려지도록 음란한 광경이었다.
“…….”
그동안의 스트레스 탓일까. 조인휘는 섹스할 때 전보다 더 몰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쾌감에 최대치로 집중하다가 이성이 나가는 어느 경계가 있었다.
“하, 으, 빠리, 다시….”
체위를 바꾸는 잠깐을 못 참고 조인휘가 졸라댔다. 움직임이 멈추자 스스로 엉덩이를 리드미컬하게 움직여 댔다. 고정원의 입에서 하, 하고 숨이 터졌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모를 과격한 발정이 일어나며 등 전체가 뻐근하게 굳었다.
그대로 조인휘를 들어 올려 앉히며 정상위였던 자세를 전좌위로 만들었다. 삽입이 깊어진 순간 귓가에서 야릇한 탄성이 터졌다. 살짝 들어 올리자 둔부에 붙은 살이 파들파들 떨렸다. 만족스럽게 느껴지는 모양인지 또 멋대로 움직이며 조인휘는 고개를 젖혔다.
“아으, 으, 으….”
음란한 리듬이 이어졌다. 앞뒤로 움직이는 모습은 거의 무아지경이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잊은 것처럼 보였다.
기구를 넣어도 이랬을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였어도 끝내는 이렇게 되는 걸까. 그래서 기억을 잃은 자신과도 그렇게 느꼈던 건가. 흥분으로 온몸이 절절하게 끓는 와중에도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입술이 헤벌어질수록, 허리가 빠르게 움직일수록, 안이 더 꽉 조일수록 그랬다. 좋은 만큼 의구심이 열기를 띠며 일었다.
“흐앗, 윽! 윽!”
탁, 탁, 살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문지르던 움직임이 찧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유두를 뾰족하게 세운 조인휘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정 직전의 징후를 드러내며 엉덩이 안쪽이 있는 대로 조였다.
“나 봐.”
고정원이 낮게 명령했다. 조인휘는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움직였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양손으로 허리를 움켜쥐고 한 번 더 명령했다.
“이쪽 봐.”
“으…!”
괴로운 듯이 조인휘가 몸을 들썩들썩했다. 고정원은 꽉 틀어쥔 손에 일말의 여유도 남기지 않은 채 턱에 힘을 주었다. 사정이고 뭐고 이대로 벌을 주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마음껏 움직일 수 없도록, 원하는 때에 박히거나 원하는 때에 사정하지 못하도록 밑바닥에서부터 모든 권리를 내맡기게 만들고 싶었다.
과격한 욕구를 억누르며 고정원이 소리를 낮추었다.
“인휘야, 나 봐.”
“으….”
“나 좀 봐. 응?”
…내 얼굴 봐. 속삭이며 뺨을 붙들었다. 눈을 보게 만들었다.
“해, 해… 줘, 얼른….”
조인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약에 취한 상태 같았다. 복부에 비벼지는 성기는 흠씬 젖어서 물을 흘리고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손으로 성기를 자극하려는 행동을 저지했다. 그리고 부푼 귀두부터 음경 전체를 한 손으로 꽉 틀어쥐었다.
“헉…!”
안이 험악하게 조였다. 가쁘게,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탄식이 터졌다.
“아흣, 나, 놔, 어, 르, 놔, 아…퍼, 바보, 야…!”
울면서 화내고 있었다. 그래도 바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상대가 누군지는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얼른 내 얼굴 봐.”
뒷목을 붙들어 코끝을 마주 댔다. 바르작대던 조인휘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끙끙거리던 신음을 멈추었다. 완만히 호흡하며, 축축하게 잠긴 눈동자를 위로 향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조인휘는 그대로 고정원의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
냉수를 뒤집어쓴대도 이처럼 차가워지지는 않을 듯했다. 억센 힘으로 붙들던 손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반대로 조인휘의 뒷목은 뻣뻣하게 굳었다.
입술을 깨무는 행위.
그것이 언제부터 어떻게 비롯된 것인지는 명확했다. 자신과 조인휘, 둘 다 또렷이 기억하는 일이었다.
초점이 흐린 눈동자가 흔들렸다. 쾌락에 잠겼던 눈초리가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실수를 깨달은 사람처럼 서늘해진 조인휘의 얼굴이 보였다.
“어, 나는 그냥….”
훅, 막이 씌워지는 듯했다.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시야를 컴컴하게 덮었다.
* * *
“정말 이거면 되겠어?”
물으며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좁은 테이블은 햄버거 세트와 햄버거 단품, 치킨 몇 조각, 그리고 너겟으로 꽉 찼다. 조인휘는 음식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콜라부터 한 모금 들이켜더니 허겁지겁 햄버거의 포장을 벗겼다.
“…….”
고정원은 햄버거를 우물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너무 울어서 눈두덩이 뚱뚱해진 탓에 먹는 모습조차 처량했다. 먹고 싶다고 해서 가까운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 데려오긴 했지만 여러모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맛있어. 행복하다.”
오물오물 씹으면서 웃는 모습이었다.
“행복하다니까 내가 더 행복하네.”
입에 든 것을 꾹 삼킨 조인휘가 얼굴을 붉혔다. 그럴 만한 흐름이 있었던가.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갔다. 심하게 부푼 입술은 윗입술까지 퉁퉁하여 맞물린 소시지의 형태에 가까웠다. 귀엽다고 웃어넘기기에는 조금 과한 상태였다.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조인휘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봐?”
지적에 눈을 내리깐 고정원이 감자튀김을 가리켰다.
“…이거, 먹어도 돼?”
“당연하지. 햄버거도 먹어. 이거, 너겟도 먹고.”
조금도 먹음직스럽지 않은 음식물 중에서 집히는 대로 하나를 입에 넣었다. 씹어 삼키고, 사람이 몇 되지 않는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고개를 되돌렸다.
“…….”
조인휘는 빨대로 음료수를 빨고 있었다. 밝은 조명 아래 더욱 부각된 붓기를 보고 있자니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만들어놓은 당사자가 뻔뻔스럽게도 그랬다.
그 ‘실수’ 이후로 누가 봐도 심하게 몰아붙였다. 몇 번이나 사정을 막았고, 새로운 습관이 들 때까지 학습시켰다. 말이 학습이지 성적 고문에 가까웠다. 조인휘는 몸부림도 많이 쳤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잘못했다고, 사랑한다고, 애원하면서 존댓말까지 썼다. 그렇게까지 몰아붙인 게 자신이었다.
억지로 익히게 만든 지저분한 습관을 떠올리자 하반신이 뜨거워졌다. 생각을 멈춘 고정원은 테이블로 시선을 내렸다.
음료수 통을 감싸 쥐고 있는 마른 손이 보였다.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늘어뜨렸던 팔을 위로 올렸다.
잡으려 했을 뿐인데 생각지 못하게 음료수를 건드리게 되며 팍, 엎어졌다. 선득함이 느껴진 순간 굳어진 채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멍하니 보고 있는 고정원 대신 조인휘가 먼저 움직였다. 음료를 세우고, 엎지른 곳에 휴지를 받쳤다.
“웬일이래, 이런 실수를 다 하고.”
뒤처리를 하며 웃는 조인휘는 어쩐지 만족해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매번 챙김을 받던 상황이 바뀐 것이 못내 뿌듯한 모양이었다.
“야 정원아…. 너 괜찮아? 왜 이렇게 멍해? 설마 머리 아파?”
“…아니.”
안 아파.
대꾸하며 고정원은 문득 홀로 직감했다. 이 불안은 죽을 때까지 떨칠 수 없다는 것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죽고 없는 자아를 상대로도 마음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평생 스스로 좀먹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아프면 곧장 말해야 된다? 알았지?”
“…그래.”
살면서 어떤 일도 지금과 같은 고통을 주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정말로 그러했다. 사고할 수 있는 무렵부터 대개 모든 것이 평이하고 쉬웠다. 삶의 많은 부분이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것에 불만을 갖기에는 주어진 것들이 너무 많았다. 만족했다. 혹은 불만족스러울 이유가 없었다.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고마워.”
“…뭐야. 갑자기 뭐가 고맙대.”
“그냥. 기다려줘서.”
“…….”
사랑하다.
충만하다.
행복하다.
사전적 의미로서 끝났던 표현들이었다. 그것들이 완벽하게 구체화되던 매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한 구체화는 진행되고 있었다.
“…뭐, 아이스크림 먹을래? 맥플러리?”
쑥스러워서 말을 돌리는 게 보였다. 변함없이 서투른 애인을 앞에 두고 고정원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사랑스럽다. 생각한 순간 아까는 잡지 못했던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