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도심에 살면 한 번쯤은 들를 법한 체인 카페였다. 장소는 처분했던 오피스텔의 근처. 2층의 구석 자리로 안내한 조인휘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때? 익숙해? 뭔가 기억나는 것 같아?”
‘음…’ 하고 뜸을 들이던 고정원이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해.”
대답을 들은 조인휘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럴 줄 알았어. 우리 툭하면 여기 왔었거든.”
실상 가장 유명하고 흔한 체인점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쪽이 오히려 이상했지만 별다른 언급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머리… 짧게 자른 것도 잘 어울린다.”
조인휘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옅은 미소를 띤 고정원은 형식적인 인사로 답했다.
“고마워.”
달라진 것은 머리 모양뿐만이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신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산에서 조인휘를 찾아낸 이후부터 급격하게 진행된 일들이었다.
휴학계를 낸 것이 첫 번째였고, 조인휘의 본가 근처에 방을 얻은 것이 두 번째였다. 이 두 가지 변화로 인해 생활 반경과 패턴이 확연히 달라졌다.
처음에 조인휘는 왜 자신을 따라 휴학했냐며 기겁했다.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기억 찾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는 대답에는 내심 반기는 기색 또한 숨기지 못했다.
물론 찾는다는 것은 말뿐이었다. 어떠한 시간적 물질적 노력도 기울일 생각이 없었다. 증발된 기억은 냉정히 표현하자면 타인의 과거와 같았다. 자신에게는 무관하고 무감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너 그렇게 시원하게 깎은 거 처음 봐.”
만난 지 몇십 분이나 흘러 있었다. 아직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에 고정원은 멋쩍은 것처럼 목을 문질렀다.
“좀… 과감해지고 싶어서.”
이마가 드러날 만큼 짧은 길이는 의도한 것이었다. 지난 삼 년간의 사진을 통해 이런 모습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옷도, 뭔가 평소랑 다르네.”
그 말에 고정원이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티셔츠에 블루종 점퍼, 아래로는 무릎 부근이 살짝 드러나는 디스트레스드 진으로 단정한 걸 선호하는 평소 취향과는 거리가 먼 옷들이었다.
“어떤 것 같아?”
“뭐… 어떻긴. 멋있지.”
그 말이 그렇게 듣고 싶냐. 쏘아붙이는 조인휘의 발음이 웅얼웅얼 뭉개졌다. 공연히 본인의 뒷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
어떻게 봐도 수줍음을 감추려는 행동으로 보였다. 그 생각을 끝으로 몸집만큼이나 커다랗게 융기한 고정원의 목울대가 들썩였다. 웃음기를 삼킨 고정원은 조용히 테이블 아래에서 다리를 옮겼다. 무릎끼리 교차되도록 얽자 그 사이로 더운 기운이 고여 들었다.
조인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했다. 낯빛은 상승하는 온도를 나타내는 온도계로 바뀌어 점점 색이 진해졌다. 냅킨을 만지작거리거나, 컵에 꽂힌 빨대를 씹는 불안정한 태도도 동반되었다. 보기에 애처로울 정도로 안면 전체가 붉어지고 나서야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 쳐다보지 말고 딴 데 봐.”
명령의 말에 고정원은 순순히 눈길을 돌렸다. 시시각각 변하던 안색이 겨우 가라앉았을 즈음에야 물었다.
“어색해, 갑자기?”
“…….”
말없이 컵에 담긴 얼음을 입 안에 넣어 굴리는 입술이 축축하게 젖었다. 으드득 깨물어 먹은 조인휘는 어색해 못 견디겠다는 듯 말했다.
“그냥… 몰라.”
얼버무리던 대꾸는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상해. 따른 사람 같아서.”
“…….”
가만히 마주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눈동자가 흔들린 조인휘가 먼저 피했다.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꺾고서 한쪽 다리를 떨었다. 목이 마른지 컵을 끌어당겼고, 걸쳐져 있던 빨대가 튕기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씨….”
긴장감이 배어나는 몸짓은 모든 게 어설펐다. 막 성에 눈을 뜬 남자애가 이성을 의식하는 행동과 유사하게 비쳐지기도 했다.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고정원은 입 끝으로 조용히 웃었다. 오늘 아침, 밖으로 나서기 전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을 때 느꼈던 위화감은 어느새 배 속까지 완전한 충족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제보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서늘한 가을 공기가 피부로 느껴졌고, 기온은 야외 활동을 하기에 적당한 정도였다.
주차된 차를 향해 걷던 중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조인휘가 전화를 받으면서 자연스레 통화 내용이 들려왔다.
“아, 네. 맞아요. 아아…, 네, 감사합니다! 아, 다음 주부터요? 예, 가능해요!”
지원했던 곳에서의 연락인 듯했다. 조인휘는 자리에 멈춰 서서 공손한 목소리를 냈다.
“1시까지요? 예, 알겠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며 통화를 끝내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와, 다행이다. 여기 안 될 줄 알았는데.”
“…어딘데?”
“독서실 총무 자리. 주말 파트타임.”
고정원은 설핏 이마를 구기며 물었다.
“평일에도 일 구하지 않았나?”
“아, 응. 평일에는 카페 알바 하고, 주말에는 이거. 독서실 총무는 일 거의 없어서 엄청 편하거든. 공부도 할 수 있고. 암튼 진짜 경쟁률 빡셌던 데라 안 될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았어.”
계속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건 알았다. 조금도 달갑지는 않은 사실이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늘게 되면 휴학계를 내고 따라온 수고가 무의미했다.
“…덕분에 나도 공부 많이 하겠다.”
중얼거리자 조인휘가 무슨 뜻이냐는 얼굴을 했다.
“카페랑 독서실. 앞으로 나도 매일 거기로 출퇴근할 거니까.”
“…아아.”
입이 벌어진 조인휘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꼭, 안 그래도 되는데….”
다소 거북해하는 내색이 비쳤다.
“가능한 매일 보는 게 기억 자극에 도움될 것 같아서.”
떨떠름했던 얼굴은 그 한마디로 화색을 띠었다.
“아, 그렇네. 생각해 보니까 최대한 맨날 보는 게 확실히 도움 되겠다.”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태도에 고정원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흘렸다.
“근데… 주말에는 뭐, 잘 쉬었어? 어땠어? 뭐 새로운 게 기억나거나, 떠올랐다거나… 혹시 있었어?”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는 두 눈에 기대감이 어른거렸다.
“…어떤 장면이 떠오른 것 같기는 했어.”
“진짜? 뭐, 어떤 거?”
“그냥… 바다가 있는 장면.”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연인들끼리 흔히 가는 장소였기 때문에 깊게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흘린 것이다. 하지만 조인휘는 생각 없이 흘린 그 한마디에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바다에서 뭐, 어떤 걸 했는데? 또 뭐가 보였어?”
“글쎄, 그렇게 구체적으로 떠오른 건 아니라.”
“…그래….”
실망감은 잠시뿐이었다. 조인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희망으로 급격하게 들떴다. 어찌나 들떴는지 걷다가 뜬금없이 손을 붙들기까지 했다. 겨우 손톱만 한 기억의 파편을 들이댄 것으로 경계가 누그러진 모양이었다.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고정원은 헐렁하게 얽힌 손가락들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어 깍지를 끼웠다. 잠깐 그 매듭을 의식하는 듯하던 조인휘도 이내 기분 좋게 웃을 뿐이었다.
거짓말 덕에 허물어진 경계였지만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어차피 기억을 찾으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모든 건 스쳐 가는 과정이고, 과정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데에 있었다.
차에 올라 가장 먼저 조인휘의 안전벨트를 매어 주었다. 벨트를 끌어오느라 가까이 다가갔을 때 조인휘는 놀란 것처럼 굳어졌지만 아까와 같이 금세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우리 어디 가지 오늘은?”
들떠서 실실거리는 얼굴로 묻고 있었다.
“오늘은 좀 먼 데까지 가볼까. 너 일 시작하면 앞으로는 시간 없을 것 같은데.”
“아… 그럼 거기 가면 되겠다!”
조인휘는 신이 나서 네비게이션의 목적지를 설정했다. 설정된 곳은 차로 몇 시간 떨어진 거리의 해수욕장이었다. 쑥스러움을 감추며 창밖을 내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너랑 나랑 사귀게 된 곳인데…. 암튼, 가서 말해줄게.”
‘바다’라는 단어에 격렬히 반응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 하고 대답한 고정원은 출발하며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차는 막힘없이 미끄러지며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고정원은 얼마 전 일을 회상했다. 조인휘의 거처를 간신히 찾아낸 날, 종일 함께 보냈던 하루에 대한 회상이었다.
그날은 용건도 없이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조인휘는 이따금씩 불편한 내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눈앞에 둔 것만으로 고문 같던 시간이 편하게 흘렀고, 그때부터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환경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기억 찾는 것을 명목으로 정기적인 만남을 제안하자 조인휘는 기다렸다는 듯 수락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만남이 이어지고 있었다. 조인휘의 주도 아래 남산을 방문했던 것처럼 추억이 있는 장소들을 둘이서 하나씩 다시 찾고 있었다.
옆자리를 힐끗 쳐다본 고정원은 오디오를 재생시켰다.
“주로 어떤 음악 들어?”
지금 막 궁금해진 것을 물었다.
“나?”
조인휘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플레이리스트에 든 곡을 하나씩 읊었다. 정직한 영어 발음을 들으며 고정원은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실상 그 웃음에는 아무래도 상관없던 타인의, 그것도 또래 남자애의 취향을 기억해 두기 위해 경청하는 스스로를 향한 조소도 어느 정도 섞여 있었다.
얼마 전까지 마지못해 적선처럼 해주었던 데이트였다. 그 데이트를 이제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주도하게 된 상황 또한 우습다면 우스웠다.
강한 햇살이 차창을 뚫고 들어왔다. 선바이저의 케이스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자 조인휘가 쳐다보았다.
“와….”
“…왜?”
“아니, 머리가 짧아져서 그런가… 느낌이… 또 달라서.”
또다시 멍하니 홀린 듯한 시선을 받아 내며 고정원은 시원한 입매로 웃었다.
휴가철이 아닌 바닷가는 한산했다. 모래사장에는 커플이나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생각보다 더 휑하네.”
해변에 선 조인휘는 예상과 다른 풍경에 살짝 놀란 듯했다.
“어차피 뭐, 바다 풍경은 거기서 거기니까…. 차라리, 그때 갔던 식당이랑 묵었던 리조트를 가보자.”
조인휘는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 가겠냐고 물으며 초조하게 굴었다. ‘시간이 많으니까 천천히.’ 하고 느긋하게 답하자 그제야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체시킨 일정을 여유 삼아 그대로 천천히 연안을 따라 걸었다. 조인휘의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차분해진 조인휘는 진지하게 바다를 감상하고 있었다. 흰 포말들이 와르르 밀려들었다 넓게 퍼져 나가는 광경을 매료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
한참 걸어가던 중이었다. 불현듯 소리친 조인휘가 홀로 저만치 달려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주인 없는 축구공 하나를 발끝으로 몰고 왔다.
“이거 봐.”
반가운 표정이었다. 양쪽 발에 이리저리 패스하며 가지고 놀더니 제자리에서 볼 리프팅을 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고 연속으로 튕기는 폼이 의외로 능숙했다.
“잘하네.”
칭찬하자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중학교 때까지는 날라다녔는데. 밥 먹고 축구만 하던 시절도 있었어 한때는.”
“남자 형제 있어?”
고정원의 물음에 순간 리듬이 깨졌다. 공이 밖으로 튕겨 나갔다. 집중력이 사라졌는지, 제자리에 선 조인휘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누나 한 명.”
“…닮았어, 너랑?”
타인의 가족 관계 같은 건 늘 관심사 밖이었다. 하지만 조인휘의 가족 관계는 그것보다 더욱 자세한 사항들을 포함하여 흥미가 있었다.
“별로….”
무성의하게 대꾸한 조인휘는 튕겨 나간 공을 쫓았다. 발을 사용해 공을 띄우는 기술을 선보이고 다시 리프팅에 열중했다. 더 이상 어떤 설명도, 혹은 질문도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궁금한 건가.
불쑥 솟은 반발심은 곧 상황을 자각함과 동시에 사그라들었다. 고정원은 단단하게 굳은 제 목줄기를 쓸어내렸다. 이미 저에 대해 다 알고 있는 조인휘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것을 무관심으로 받아들이고 기분이 저조해진 스스로의 예민함이 황당했다.
“우리 누나 너랑 만난 적도 있어.”
튕긴 볼을 잡아 낸 조인휘가 말했다.
“…그래?”
“…어. 사실 그때 기억은, 잊어줬으면 했는데….”
어떻게 진짜 잊어버렸네.
덧붙인 조인휘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잊어줬으면 하는 이유가 신경 쓰였다. 왜 저렇게 울적한 얼굴을 하는지, 보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조인휘는 입을 다물어버리고 공을 튕기는 하찮은 일에만 집중했다.
근육이 뭉친 것처럼 흉부가 갑갑해졌다. 서로가 가진 정보의 차이와 서로를 향한 관심의 차이,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균형이 거슬렸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에는 불쾌감이 지나치게 비대했다.
“게임 할래?”
물으며 다가가자 조인휘는 공을 패스했다.
“무슨?”
“글쎄. 이걸로 아무거나.”
고정원은 조인휘가 했던 것처럼 발등으로 볼을 튕겼다.
“이기는 사람 부탁 들어주기. 괜찮아?”
균형을 맞추고 싶었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뭘 좋아하고, 또 뭘 싫어하는지. 지리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들을 들어보고 싶었다.
“재밌겠다.”
적극적으로 수락한 조인휘에게 공을 패스했다. 리프팅을 누가 더 많이 하는가 하는 것으로 내용이 합의되자 조인휘는 성질 급하게 공을 띄웠다.
기선제압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과도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무릎과 가슴팍을 이용해 리프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여 주기 식의 안정적이지 못한 자세가 이어지며 오래 못 가 바닥에 공을 떨구었다.
실수했다며 불평하는 걸 뒤로하고 고정원이 공을 튕겼다. 낮게 튕기는 리프팅은 길고 안정적으로 이어졌다. 결국 빠른 시간 내에 조인휘보다 훨씬 많은 개수를 달성했다.
“뭐야. 얍삽이 같아, 너. 나도 그런 식으로 하면 하루 종일도 하는데? 너 무릎 리프팅 할 수 있어? 아니다, 이번엔 헤딩으로 리프팅 해볼래?”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조인휘가 정색했다. 고작 이런 유희거리에 눈을 세모꼴로 치뜨고 달려드는 게 귀여워서 고정원은 꽤 길게 웃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조인휘는 자존심이 더 상했고, 그리하여 대결이 몇 번쯤 더 반복됐다. 서로 방해하는 장난이 끼어든 이후에는 역시나 순수한 시합이 아니게 됐다.
“아, 안 돼!”
무릎으로 공을 튕기는 조인휘에게 몸을 밀착했다. 성적인 접촉으로 보일 만큼 바짝 달라붙자 조인휘가 공을 떨어뜨렸다.
“야, 이러면…! 이건 아니지.”
조인휘가 억울한 표정으로 항의했다. 고정원은 심술궂게 일부러 공을 발로 차서 바닷물에 빠뜨렸다. 다급하게 소리친 조인휘가 바다로 달려들었다. 파도에 휩쓸린 공을 줍고 있는 뒤로 다가가 그대로 어깨에 들쳐 업었다.
“우악!”
매달린 조인휘는 놓으라며 호들갑스럽게 반항했다. 안아 든 몸뚱이를 물에 빠뜨릴 목적으로 내려놓았다.
“악, 차거!”
종아리의 반이 잠겼다. 깊은 곳은 아니었지만 주저앉으면 완전히 젖기에는 충분했다. 조인휘는 자기만 젖었다면서 물을 끼얹었다. 물을 정면으로 맞은 탓에 고개를 털자 그게 웃겼는지 손가락질을 하며 하하하, 청량하게 웃었다.
“작년 생각났어. 너랑 별장에 딸린 수영장에서 수영했던 적 있거든. 그 왜, 너네 집 풀빌라….”
또 모르는 얘기였다. 추억 타령을 듣는 게 지겨웠기 때문에 다시 목전에 둔 몸뚱이를 들쳐 업었다. 맞닿은 부분이 한순간에 젖었다. 요란하게 버둥거리는 조인휘를 데리고 좀 더 안으로 들어갔다.
난폭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도록 거칠게 놀았다. 서로 물을 먹이고 밀치고 끌어당기고…. 조인휘는 힘이 빠져 넘어질 뻔했다. 붙잡아 세운 고정원은 허리를 잡아당기며 마침내 끌어안는 자세로 밀착했다.
“그때도 여기에서….”
“…….”
“우리 이런 장난 쳤어?”
겁먹은 것처럼 커다란 눈이 코앞에 있었다. 젖은 속눈썹을 깜빡이던 조인휘가 웅얼거렸다.
“…물놀이를 하긴 했는데….”
“옷 입고?”
“…아니.”
“공 가지고 대결하다가?”
연달아 묻는 말에 조인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얕게 고개를 저으며 아니, 답했다. 그게 만족스러웠다. 이건 이전의 추억에 대한 답습이나 재현 같은 게 아니었다.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기억이 된 것이다.
닿은 부분이 온통 축축했다. 따끈하기도 했다. 눅눅한 숨결을 느끼던 고정원이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완전히 겹쳐지기도 전에 마주한 턱이 어긋났다.
“…….”
들러붙어 있던 체온이 떨어져 나갔다. 조인휘는 물 밖을 향해 나갔다. 맞닥뜨린 상어를 피해 도망치는 사람처럼 헐레벌떡 움직였다. 지켜보고 서 있던 고정원도 육중해지는 물의 저항을 느끼며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와, 미쳤다. 진짜 완전 다 젖었어 우리. 어떡하냐.”
티셔츠에서 물을 짜내며 조인휘가 웃었다. 개구진 표정에서 조금 전의 야릇한 기운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물먹은 옷은 피부에 무겁게 달라붙었다. 흡수된 바닷물이 모래밭으로 뚝, 뚝, 떨어졌다. 음산하게 낮아지는 체온을 느끼며 고정원은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비수기인 만큼 리조트는 예약 없이 방을 잡을 수 있었다. 둘은 물을 짜냈지만 여전히 축축한 옷을 입고서 입실했다. 손에는 벗은 점퍼와, 편의점에서 산 속옷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으, 춰….”
조인휘는 양쪽 어깨를 부여잡고 문질렀다. 고정원은 포장을 뜯은 속옷 하나를 조인휘에게 건넸다.
“먼저 씻어.”
“아냐, 됐어. 너 먼저 씻어.”
고정원의 손가락이 파리한 입술을 건드렸다.
“하얘. 여기.”
“…아. 헐, 그래? 입술까지 하얘진 줄은 몰랐네.”
어조가 알아차릴 수 있는 정도로 딱딱했다. 조인휘는 서두르는 몸짓으로 휴대폰을 충전시키고는, 빨리 씻고 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욕실로 직행했다.
나란한 두 개의 싱글 베드가 눈에 들어왔다. 하얀 침구에 의미 없이 시선이 달라붙었다. 타일 바닥에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두커니 한가운데 서 있던 고정원은 젖어서 달라붙는 옷가지를 하나씩 벗었다.
10분쯤 지났을까.
샤워 가운을 걸친 조인휘가 머리를 털며 나왔다. 어지간히 뜨거운 물로 씻었는지 뺨이 복숭아 껍질처럼 발그레했다.
지체 없이 교대로 들어갔다. 짓이기듯 느린 한숨을 토해 내며 고정원은 하나 남은 속옷을 벗었다.
욕실 한 면은 완전한 노출형이었다. 탁 트인 오션 뷰가 조잡하지 않고 깨끗하게 펼쳐졌다. 하지만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운치 있는 풍광이 아닌 욕실 바닥에 떨어진 체모였다.
가느다란 털은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음모임이 확실했다. 알아본 것은 기억 속에 조인휘의 나체가, 그중에서도 특정한 부위들이 인상 깊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드랑이부터 음부까지, 흰 피부를 뒤덮은 체모라는 게 남성의 것이라기에는 가련할 정도로 엷었었다.
“…….”
쓸데없이 오래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고정원은 손에 쥔 것을 버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부스로 들어서자 수증기와 함께 달콤한 향이 짙게 났다. 방금 전 조인휘를 스칠 때 났던 그 향이 샤워부스 안을 빈틈없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씻는 동안 성기가 홀로 발기했다. 물줄기를 흡수하듯 홀로 무럭무럭 팽창했다.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겠다 싶은 순간 고정원은 맥동하는 그것에 손을 댔다.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준비된 것처럼 상상됐다. 상상 속에서 자신은 방금까지 서 있던 방에서 조인휘와 뒹굴고 있었다. 과감하게 얽히는 전희는 바다에서 서로 몸을 얽어가며 치던 과격한 장난과도 비슷한 듯했다.
조인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달라붙었다. 밀착하고, 비비고, 조르고…. 축구공이나 튕기며 천진하게 굴던 남자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음란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아…!”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신음이 터졌다. 이를 악물었다. 손을 떼자 성기가 홀로 흔들리며 정액을 토했다. 하얗게 터뜨려지며 끝도 없이 씻겨 내려갔다.
고정원은 벽에 팔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차가워진 물줄기가 거세게 후두부를 때렸다. 젖어서 달라붙은 짧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전신을 뒤덮은 찌릿찌릿한 쾌감이 불쾌하고 허무한 무언가로 바뀔 때까지, 그대로 쏟아지는 물속에 서 있었다.
씻고 나온 뒤에는 룸서비스를 시켰다. 조인휘가 고른 메뉴는 고기를 위주로 한 기름진 음식들이었다. 함께 다니면서 조인휘의 입맛이 담백한 음식을 선호하는 자신과 달리 전형적인 또래 남자애들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맛있어. 이거 먹어 봐.”
얼마 뒤 배달된 음식들은 시설의 규모에서 예상되었던 수준을 상회했다. 한 입 크게 넣느라 볼을 부풀린 조인휘가 접시를 가리켰다.
권해진 대로 고정원은 스테이크를 한 조각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안심을 어금니 안쪽으로 씹으며 슬몃 눈살을 찌푸린 것은 눈앞의 광경 탓이었다.
소파에 앉아 책상다리를 하고 있는 조인휘에게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 이유가 유독 휑하게 드러나 있는 고간 때문임을 눈치챘다. 가운이 갈라지며 허벅지와 함께 보이면 안 될 것이 보이고 있었다.
조인휘가 이쪽을 보았다. 그리고 곧, 고정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눈길이 닿은 위치를 파악하고는 화들짝 몸을 떨었다. 벌떡 일어나 가운을 여미고는 방금과는 다르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얌전한 자세로 앉았다. 이마와 광대 부근이 뙤약볕에 덴 것처럼 벌겠다.
“뭘 그렇게 봐.”
“…속옷, 안 입었어?”
“자고 가게 됐으니까, 내일 아침에 씻고 입으려고 했지.”
고정원은 꽉 메는 목구멍으로 물을 넘겼다.
“밥 먹고 나면 입어. 내려가서 더 사 올 테니까.”
“…괜찮은데.”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의식하지 않으면 어느새 눈길이 한쪽으로 머물렀다. 입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알아서인지 윤곽이 보다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대화는 거의 오가지 않았다. 음미할 여유도 없이 해치우는 것에 가까운 형태로 식사는 끝이 났다.
식후에는 근처의 편의점에서 여분의 속옷을 샀다. 넉넉히 10장 정도를 더 사 오자 조인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가운만 입고 다니는 거 안 민망했어?”
묻는 말에는 그저 가볍게 웃어주었다.
이후로는 갈 곳도 할 것도 없었다. 옷이 젖은 관계로 멀리 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그대로 잠을 자기에는 아직 시간이 한참 일렀다.
사귀는 사이였다면 고립된 방 안에서 할 게 넘쳤겠지만….
“…….”
거북한 기분에 사로잡힌 고정원은 가만히 눈썹을 모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아까의 물놀이로 젖은 담뱃갑을 건드렸다. 정면에 걸린 거울을 통해 조인휘와 눈이 마주친 것도 그때였다.
조인휘는 빠르게 눈길을 피했다. 마찬가지로 지금 상황을 거북해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꽉 막힌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고정원은 테라스로 나갔다. 경치를 내려다보고 있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따라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등줄기가 굳어졌다. 조인휘는 어딘가 눈치를 보는 느낌으로 다가섰다.
“…여기, 우리한테 엄청 의미 깊은 곳인데.”
또 그런 얘기인가.
상대의 행동이 갑자기 지겹게 느껴졌다. 엄밀히 따지자면 여행의 목적 자체가 이런 것이고, 애초에 이 리조트도 둘만의 그 거창한 사연 때문에 방문한 것이었다. 전부 알고 이해하는 상태에서 느닷없이 짜증스러운 기분을 참기 힘들었다.
조인휘는 이곳에 얽힌 추억들을 늘어놓았다. 유창하지도 못한 말솜씨로 구구절절 쏟아 내고 있었다. 여기서 어떤 일이 있었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사귀게 되었는지 따위의 일화들이었다. 흥미 없음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귀에 들어왔다. 그런 유치한 짓을 했었어, 내가? 이따금씩 끼어들어 비꼬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그래서…, 고백은 인휘가 먼저 한 거네.”
조인휘는 쑥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자랑을 하는 사람 특유의 뿌듯한 얼굴을 했다.
“그렇지…. 남자답게 내가 먼저 했지, 그건.”
미안하지만 조금도 박력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있는 대로 부추겨져서 고백한 것으로 반강제나 다름없었다. 듣고 나니 솔직히 기가 막혔다. 고백까지 먼저 시켰을 줄이야.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확정의 형태로 굳히려는 마음도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조인휘의 성격과 언행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납득되는 부분이었다.
그 뒤로도 들뜬 상태가 계속됐다. 조인휘는 눈앞에 있는 상대가 추억 속 당사자라는 걸 잊은 듯 과시에 가까울 정도로 심취해서 떠들어댔다. 때때로 ‘혹시 기억나? 어때?’ 하며 반응을 살피기도 했다. 그럴 때만 정확하게 두 눈을 맞추었다.
고정원은 이야기를 듣다 말고 가운을 풀어 헤쳤다. 더워서 참을 수 없었다. 벗겨 낸 천을 한쪽으로 던지자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왜…, 더워?”
“할 것도 없는데 수영이나 할까 싶어서.”
테라스에는 프라이빗 풀이 있었다. 커플 타깃인 듯, 야외에서 분위기를 즐기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같이 할래?”
돌아서서 가볍게 물었다.
“…아니…? 수영복도 없고.”
“속옷 입고 들어가지 뭐. 여분도 많은데.”
조인휘는 자기는 괜찮다며 어설프게 거절했다.
“왜, 의식돼서?”
그 말에는 파르르 반응했다.
“그런 게 아니라.”
같이 들어가면 큰일이라도 나는 건가. 이제 와서 내외하는 것처럼 벽을 치는 게 우스웠다. 그래서 얼마 전 식당에서 들었던 말을 들먹였다.
“나는 싫다며.”
“…….”
“기억도 없는 나는 네 애인도 뭣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의식할 필요 있어?”
흘리듯 부드러운 어투였다. 언중유골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조인휘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정말 그런가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설득당한 모양새로 주섬주섬 가운을 벗었다.
풀장은 두 사람이 몸을 담그기 좋은 크기로 제법 넉넉했다. 그러나 입수한 조인휘는 편하게 즐기지 못하고 어딘가 경직되어 있었다. 소극적인 움직임은 마치 살이 닿을까 봐 조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계하는 건 그 일 때문이겠지, 생각했다. 바다에서 맞닿기 직전 입술을 피했던 상황을 떠올린 고정원은 젖은 얼굴을 문질렀다. 주시하고 있던 행동을 그만두고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그런 분위기’가 될까 봐 지레 겁먹은 상대를 보고 있자니 빈말로라도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대로 물속에 잠수했다. 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있었다. 물 밖에서 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일부러 반응하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참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인휘가 억지로 몸을 일으킬 때까지 물속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정원아, 괜찮아? 야, 고정원!”
안겨서 몸을 축 늘어뜨렸다. 이것 또한 일부러였다. 당황한 조인휘는 흔들며 이름을 불러댔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을 보이며 인공호흡이라도 할 기세였다. 어떻게 할지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오래 끌 장난도 아니라 그쯤에서 눈을 떴다.
“뭐야!”
등허리를 덥석 잡자 노성이 날아들었다.
“죽을까 봐 무서웠어?”
화가 난 조인휘가 품에서 주먹을 휘둘렀다. 미간에 잔뜩 주름을 만들고 필사적으로 씩씩거리는 얼굴을 보고 그만 웃음이 터졌다.
“재밌냐 이런 게?”
위협적으로 휘둘러진 팔을 붙들었다. 앙상하게 느껴질 만큼 납작한 팔뚝이었다. 빼내려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꽉 붙들어 내렸다.
반항이 사라지고 나서야 악력이 느슨해졌다. 고정원의 굵은 손이 팔뚝에서 손목을 향해 미끄러졌다. 스르르, 손과 손이 겹쳐지자 스킨십이랄 것도 없는 그 접촉에 찌릿함이 번졌다.
조인휘가 잽싸게 손을 빼냈다. 같은 느낌을 받은 건지, 아니면 그저 불편한 건지 알 수 없었다.
“…….”
멀찍이 거리를 둔 조인휘는 딴청을 피웠다. 고정원은 손바닥을 한 번 쥐었다 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넋을 뺀 사람처럼 자리에 서 있었다. 전에 없이 기분이 들쑥날쑥한 것을 느꼈고, 변덕스러운 스스로의 상태가 이해되지 않았다.
원래 이렇게 어수선한 느낌이었던가. 일일이 반응을 살피고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내내 성적으로 고조되어 입 안이 말랐다. 지금껏 경험한 데이트의 순간들을 떠올렸으나 이러한 감각에 대해서는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아래로 피가 몰려 있었다. 조인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물속에서 조금 더 가깝게 거리를 좁혔다. 흥분한 상태를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반대로 보여주고 밀어붙이고 싶은 기분도 분명히 있었다.
“…멍, 많이 빠졌네.”
고정원은 손을 들었다. 얼룩덜룩해진 뺨을 스치듯 만지자, 고작 그 정도의 접촉에 조인휘는 입가를 굳혔다.
“응.”
대꾸를 끝으로 또다시 알기 쉽게 피했다. 어색해하며 물장구를 쳤다. 그 물장구도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럼 난 먼저 좀…, 나가서 쉬고 있을게.”
조인휘가 돌아선 순간 반사적으로 붙들었다. 불편한 자세로 움직임을 멈춘 조인휘는 어정쩡하게 돌아보았다.
고정원의 두 눈이 천천히 위에서 아래를 향했다. 해가 저무는 시각이었고, 자연의 조명은 실시간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저녁놀을 등진 조인휘의 얼굴과 몸 선이 아련하게 물들어 묘한 분위기를 띠었다.
“…….”
흔히들 말하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드물게도, 그러한 분위기에 자신이 몹시 취하고 있었다.
나만 좋은 거야?
묻는 대신 지그시 쳐다보았다. 조인휘는 어찌할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눈썹 끝이 내려가 있었다.
“아… 맞다!”
조인휘가 입을 크게 벌렸다.
“아까 바다에서 너 나한테 리프팅 이겼잖아. 원하는 거 하나만 들어줄 테니까 말해봐.”
돌파구를 찾은 것처럼 눈이 빛났다. 대충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몰아가려는 듯했다. 머리를 굴리는 게 보이는데도 짜증스럽다기보다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맞추고, 그대로 입까지 맞추고 싶을 만큼.
고정원의 입술이 벌어졌다. 궁금했던 것들을 물을 타이밍이었다. 충동처럼 키스하고 싶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아서 목구멍을 조였다. 그러나 잠시 후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머릿속으로 가늠하던 것들이 아니었다.
“…기억 찾기 싫어.”
“뭐?”
뱃속 가장 깊은 데 깔려 있던 본심이었다. 이렇게 되면 만날 구실이 사라지게 된다. 천천히 가려고 했던 계획이 전부 무너져 버린다. 알면서 조종당하는 것처럼 입이 움직였다.
“너랑 사귀고 싶어.”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기억, 찾기 싫어, 왜?”
얼굴만 보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흐려진 눈망울을 하고서 조인휘는 쏟아 내듯이 물었다.
“네가 나를 안 보니까.”
“…무슨 소리야. 보고 있잖아. 억지 부리지 마.”
서서히 눈살을 구기며 뒷걸음질 쳤다.
“돌아오고 있다고 했잖아. 이번에도 바다 생각 났다면서. 그래 놓고 왜 갑자기 찾기가 싫어? 말이 안 되잖아.”
“…기억 상관 없이, 그냥 지금 네 눈앞에 있는 나를 봐 줬으면 좋겠다는 뜻이야.”
고개를 숙인 조인휘는 젖은 손으로 얼굴을 학대하듯 심하게 문질렀다. 말릴 엄두도 나지 않게 문지르다가 어느 순간 돌아서서 풀장 밖으로 나갔다.
팍, 물이 튀어 오르며 고정원이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조인휘의 뒷모습을 무서운 기세로 쫓았다.
테라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선 순간, 조인휘는 고정원에게 붙들렸다.
“헤어지자며 니가!”
고함을 터뜨리며 조인휘는 옭아매는 몸을 밀어 냈다. 고정원은 육중하게 버티고 서서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묘한 정적이 흐르던 중 갑자기 숨을 들이켠 조인휘가 고개를 쳐들었다. 서로의 눈과 눈이 일직선으로 부딪쳤다.
“너… 나 좋아진 거야? 진심으로?”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이번에는 혼란이 아닌, 의미를 알 수 없는 폭발적인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저번에는 우리 관계 비정상이라고… 니 입으로 그랬잖아.”
“…그때는 그랬어. 기억에 없는 건 뭐든 부정하고 싶었어.”
“그럼… 지금은 그렇다는 건, 나하고 사귀고 싶다는 건, 기억 돌아오고 있는 거 맞는 거 같은데? 아무리 봐도 그래서 다시 나 좋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냐?”
고정원은 진심으로 신물이 난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에도 없는 과거의 일부가 언제까지고 끈질기게 제 뒤를 물고 늘어질 것 같았다.
“기억 돌아오지 않으면 너랑 만날 자격도 없는 건가 나는.”
혼잣말처럼 낮게 깔린 말에 타올랐던 눈동자가 한순간 꺼졌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나중에 얘기해….”
기운 빠진 투였다. 계속해서 눈길을 피했고, 그런 태도가 고정원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잘못했어.”
“…….”
“변명 안 해. 초반에 실수한 거 나도 인정해. 앞으로도 두고두고 만회할 거야.”
진심이었다. 이제부터 제대로 만회하며 만나고 싶었다. 지난 삼 년보다 더 잘해줄 자신도 있었다. 더욱더 다정하게. 진저리 칠 만큼 몇 배는 더 극진하게 대해줄 수 있었다.
“아냐, 난… 그런 문제가 아니라….”
조인휘의 태도가 뒤집혀 있었다. 그 경계가 뚜렷했다. 자신이 기억을 찾고 싶지 않다고 말한 뒤부터였다. 실망감과 거부감이 맨살에 닿는 살얼음처럼 뚜렷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나한테도….”
고정원은 뜨겁게 치민 것을 삼켰다. 울컥 토해 내려던 것을 한 번 더 가다듬고, 최대한 완곡하게 말을 이었다.
“나한테도 기회라는 걸 좀 줄 수는 없는 거야?”
조인휘는 눈조차 맞추어주지 않았다. 마주할 수 없어서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이리저리 배회시키더니 툭,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
“지금 복잡하게 이럴 필요 없잖아. 어차피 기억 돌아오면 다 해결될 일인데….”
돌아와?
그게 해결이야?
반복되는 상황에 신경줄이 끊겼다.
“아니.”
부정하자 조인휘가 눈을 들었다.
“돌아올 일 없어.”
짧은 단언에 훅, 숨을 들이켠 조인휘의 목에는 굵은 핏대가 잡혔다.
“뭐?”
“어떡하겠어, 그럼.”
터지기 일보직전의 감정을 바닥까지 억누르며 말했다.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고, 그건 이제 네가 제일 잘 아는 것 같은데.”
싸늘해진 낯빛으로 완전히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젖은 몸을 닦아 내고 마른 속옷으로 갈아입은 뒤 가운을 걸치는 모습 또한 시야에 들어왔다.
성큼성큼 걸어 나간 조인휘는 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마침내 문고리를 젖히기 전 한마디를 남겼다.
“…꼴도 보기 싫다 너.”
이후 한 시간이 넘도록 조인휘는 돌아오지 않았다. 휴대폰도 없이 나갔으니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맨몸에 가운만 걸친 상태로 먼 곳까지 가진 않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의 기미는 짙어졌다.
남겨진 뒤로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한 시간이 경과하자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것조차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차라리 직접 찾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고정원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 차림으로 갈 만한 곳들은 한정돼 있었다. 리조트 내부에 쉴 만한, 혹은 들를 만한 장소들을 물색했다. 나가면 있는 근처의 편의점도 살폈다. 하지만 찾아볼 수 없었다.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찾지 못하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프론트에서 방으로 전화를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불통이었다. 휴학하고 사라졌을 때의 상황과 겹쳐지며 점점 신경이 곤두섰다.
몇 시간이나 주변을 반복적으로 헤맸다. 몇 번이나 프론트를 오가며 묻기도 했다. 씻었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꼭 이런 식으로 굴어야 했는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화가 났다. 머리 꼭대기까지 솟은 분기는 육체가 지치는 탈력으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혹시 몰라 방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이 잡듯이 찾아다녔던 사람을 그곳에서 마주했다. 조인휘는 말간 얼굴로 침대에 기대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어디 갔었어?”
묻는 말에 대꾸가 되돌아오지 않았다. 무시라는 생각이 들 때쯤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여기저기 다녔다는 불친절한 설명이었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젖은 가운을 벗어 던진 고정원은 실소했다. 프론트에 부탁해 사람 찾는 방송을 요청했으나 ‘미아’만 가능하다며 거절당했던 걸 떠올린 것이다.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몸보다는 정신이 몇십 배로 지쳐 있었다. 그나마 숨이 턱턱 막히던 아득한 불쾌감은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야 좀 숨 쉬는 것 같았다.
“나갈 거면 휴대폰은 들고 가.”
욕실로 들어가기 전에 나직하게 부탁했다. 물론 조인휘로부터 대답은 없었다.
찬물로 긴 시간을 씻고 나오자 돌아누운 등이 보였다. 취침하려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늦은 밤은 아니지만 자려면 잘 수 있는 시각이었다. 주변을 정리한 고정원은 조명을 소등시키고서 나란히 붙어 있는 제 몫의 침대에 누웠다.
당연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돌리자 이불을 덮고 있는 등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그 등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면 늘수록, 잠은 더욱더 멀리 달아나는 듯했다.
그리고 느리게 아침이 밝았다. 취하지 못한 수면과 상관없이 하루가 시작되었다. 간밤에 이어 서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조식으로 룸서비스로 시켰으나 조인휘는 거의 손대지 않았고, 고정원도 그에 맞추듯 식사를 짧게 끝냈다.
체크아웃을 마치고 나와 차에 오르자 겨우 둘 사이에 소리가 생겼다. 고정원이 오디오로 클래식 피아노를 재생시킨 덕이었다.
운전 내내 조인휘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접착시켜 놓은 것처럼 완고하게 방향을 지켰다. 잠을 자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자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다 조수석을 보면 고집스럽게 돌린 뒷모습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날카롭고 팽팽한 공기 속에서 이따금씩 조인휘가 한숨을 토했다. 그 소리가 꼭 숨 쉬기 괴로운 사람 같아서 들을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고정원은 어느 순간 갓길에 차를 세웠다. 나가서 담배를 피웠다. 그동안 조인휘는 조수석에서 웅크리고만 있었다. 짧게 피우고 돌아온 고정원은 시동을 걸면서 창문을 조금 내려주었다.
일산에 도착하고 이내 골목으로 진입한 차가 멈추었다. 조인휘의 집 앞이었다. 그때까지도 시위와 같은 침묵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분간 보지 말자.”
가라앉은 음성으로 한마디를 남긴 조인휘가 내렸다. 탁, 소리와 함께 차문이 닫히자 운전대를 잡은 손등이 불끈 솟아올랐다.
고정원은 시트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당분간 보지 말자는 목소리, 그리고 방을 나서며 꼴도 보기 싫다고 말하던 전날의 목소리가 귀를 맴돌았다.
무거운 팔을 뻗어 오디오를 껐다. 피아노 선율이 사라지자 죽음 같은 정적만이 남았다.
* * *
“여자친구 정말 없어?”
진짜? 정말로?
끈질기게 물어 오는 사람은 두 학번 위 선배였다. 맞은편에 앉아 몇 번이나 캐내듯이 묻고 있었다.
“없어요 정말.”
대답하며 애매한 미소를 띠었다. 착석하고부터 이어지는 소모적인 대화가 슬슬 지겹게 느껴지고 있었다.
언제 빠지는 게 적당할지를 가늠하며 고정원은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눈썹의 앞머리가 스치듯 구겨진 것은 특유의 뒷맛이 오늘따라 역하게 느껴진 탓이다.
“근데 얘 진짜 연예인 상이다. 얼굴 입체적이고 여백 없고. 사람 콧대가 이렇게 높을 수 있는 거 처음 알았어.”
“그니까. 나 여기로 고개 돌릴 때마다 놀라잖아.”
“얘가 요즘 연예인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외모에 관한 피상적인 칭찬들이 쏟아졌다. 끊길 만하면 어느새 되풀이되고 있었다.
“너무 띄워주지 마세요. 진짜로 믿으니까.”
고정원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틀에 박힌 대응에 주변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귀엽다며 누군가 과장되게 앓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너 밴쿠버 잠깐 있었다고 했나?”
“네.”
“나 어학연수로 캐나다 생각 중인데. 토론토보다 밴쿠버가 나아? 어때?”
“…토론토가 낫지 않을까요.”
“진짜? 왜?”
‘그냥, 그럴 것 같아서?’ 하는 성의 없는 대꾸에 상대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인 줄 알았는지 팔뚝을 가볍게 때리는 터치와 함께 진지하게 대답해 달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몇 번 가봤을 때 좋았어요. 즐길 거리도 많구요.”
“…어? 잘 안 들려. 뭐라고?”
주점 안은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떠드는 소리로 어수선했다. 그것과 상관없이, 여자는 일부러 안 들리는 척을 하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귀에 입술을 붙여줄 수도 있었지만 그럴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아닐뿐더러, 눈앞의 상대와는 어떤 식으로든 얽히고 싶지 않았다. 가볍게 무시하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여자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고정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연스럽게 사람들 틈으로 이동해 시끄러운 테이블로부터 이탈했다. 주점의 출입구 계단을 내려가 아예 밖으로 향했다.
오염되지 않은 바깥 공기는 깨끗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어 불을 붙였다. 연기를 뱉어 내고, 가만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후….”
술자리는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했다. 신입생 환영회라는 점에서부터 기대는 없었지만 말 그대로 시간 낭비였다. 판에 박힌 듯한 사람들, 똑같은 가이드를 읽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서든 비슷하게 이어지는 대화는 이미 몇 번이나 겪어본 것처럼 새로운 부분이 없었다.
두 대를 연달아 태우고 귀가 결정을 내렸다. 돌아가면 적당한 핑계를 대고 나와 택시를 부르면 될 것 같았다. 비좁은 통로에 들어서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계단을 오른 고정원은 지체 없는 걸음으로 입구에 들어섰다.
가게 안에서 유난히 소란스러운 자리가 있어서 보니 자신이 앉았던 그 테이블이었다. 떨어진 곳에 서서 응시하는 고정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툭툭, 팔뚝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건드림이라기보다는 미약한 스침에 가까워 처음에는 무시할 뻔했다.
한 박자 늦게 돌아보자 웬 남자가 서 있었다. 피부가 희고 눈매가 또렷하다는 게 첫 번째 인상. 그리고 다음으로 눈에 띈 건 염색모에 피어싱이었다.
“…….”
알지는 못하지만 요즘 아이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골격이 가느다랗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지나가며 볼 수 있는 화장품 광고 포스터 속 남자들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저기….”
불러세운 주제에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떤 용건인지 짐작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학과 사람인 것은 분명해 보였으므로 고정원은 잠자코 기다렸다.
“그….”
심하게 망설이는 모습에 아, 하고 나직한 외마디가 터졌다. 자신에게 번호를 물으러 왔다는 것을 눈치챘다. 작게 실소가 터진 것은 이런 자리에서 번호를 주고받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이렇게 떠나 싶어서였다.
휴대폰을 꺼내려는데 작게 내뱉는 세 음절의 단어가 들렸다.
“키홀더…요.”
“네?”
“스파이더맨 달려 있는 건데요.”
생긴 것과는 다르게 꽤 낮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스파이더맨, 아시죠? 거미줄 발사 모드 때 손모양… 아세요? 이렇게, 이렇게 하고 있는 스파이더맨인데….”
남자는 조리 없이 지껄였다. 중지와 약지를 접은 손모양으로 어설픈 모션을 취하기도 했다.
“…혹시 보셨어요? 떨어진 거.”
고정원은 재킷의 주머니 안에서 붙든 휴대폰에서 손을 뗐다. 어이없는 착각을 뒤로하고 짐짓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못 봤어요. 이쯤에서 잃어버렸어요?”
“아,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서…. 주머니에 넣어놨는데 휴대폰 빼다가 떨어진 거 같거든요. 대체 얻다 떨군 건지를 모르겠네….”
남자는 산만하게 두리번거렸다. 고정원은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 지나지 않은 곳에서 멈추어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순한 변덕이었다. 소란스러운 자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남자가 초조한 듯이 기웃거리는 게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두리번대던 남자는 바닥에 이마를 붙였다. 사람들의 발치를 살피고 싶은 듯, 더러운 곳에 아무렇지 않게 엎드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곁눈으로 지켜보던 고정원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등을 낮추고, 바닥을 함께 살펴주었다.
그러나 살피던 눈길은 어느새 바닥이 아닌 남자에게 향했다. 어쩐지 남자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보고 있었다. 행동에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느낌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눈길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확실히 이전에는 만나보지 못한 타입이었다.
일어선 남자가 입구 주변을 살폈다. 고정원은 빠르게 남자의 팔을 끌어당겼다. 바닥에만 정신이 팔린 남자는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과 충돌할 뻔했다.
“엇, 죄송.”
상황을 파악한 남자가 크게 당황했다. 얇은 귓바퀴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고정원은 핏발이 서서 얼룩덜룩해진 피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고정원이라고 하는데.”
주변의 왁자한 소음이 어쩐지 멀게 들렸다.
“…….”
망울이 큰 눈을 보며 다시 입을 벌렸다.
이름이 뭐예요?
묻기 직전, 공기 막이 찢어지듯 소리가 침범했다.
“조인휘!”
부르는 소리에 남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너 찾던 거 이거 아냐?”
멀찍이 테이블에 서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캐릭터가 달린 키홀더를 흔들고 있었다.
“어어어, 맞아 그거!”
손아귀에 붙들려 있던 팔이 빠져나갔다. 그대로 가는가 싶던 남자는 몇 발자국 앞선 곳에서 불쑥 돌아보았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다시 멀어졌다.
“…….”
고정원은 얼마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목뒤를 한 번 쓸고 나서야 천천히 걸어서 원래 자리하던 테이블로 돌아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묻는 선배의 물음을 가볍게 웃어넘겼다. 이제 보니 남자와는 대각선으로 마주 보이는 자리였다.
“뭐야, 술 마시고 왔어? 혈관 터질 거 같은데? 야, 얘 얼굴 봐 봐.”
“꺼져.”
맞은편의 대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 정도로 거리가 가까운데 한 번도 눈이 마주치지 않은 게 이상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흥겹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조금 더운 것 같아 내내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건너편을 응시했다.
남자는 그새 자리에 녹아들어 있었다.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니 2박으로 진행된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는지도 몰랐다. 이미 무리가 형성되어 분위기가 상당히 친밀해 보였다.
소심해 보였던 건 낯가림 때문이었을까. 장난스럽게 웃고 떠드는 모습은 또래 여느 남자애들처럼 평범해 보였다.
“정원아, 네가 자취한댔나?”
질문이 끼어들면서 시선을 거뒀다.
“아뇨.”
“아, 자취할 것 같은 이미지라 자꾸 까먹네. 자취는 할 생각 없어?”
“글쎄요… 아직은.”
대답을 하면 다시 또 다른 질문이 던져졌다. 쳇바퀴처럼 반복하는 사이 피로감이 진해졌다.
오티에 참석했었다면 어땠을까. 불현듯 그런 뜬금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서 오늘 이곳이 아닌 맞은편의 저 테이블에 앉았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힐끗 건너편을 살폈다. 맥주를 꿀꺽꿀꺽 넘기는 모습이 보였다. 얼마 안 가 탁, 잔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남자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고정원은 시선을 피했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레 동석한 사람들과의 대화에 끼어들어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맞은편을 살피자 남자는 더 이상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부산스러운 손짓을 곁들여 가며 옆 사람과의 대화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
잔에 입을 대면서 차가운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여전히 맛은 나빴으나 취기가 도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뭐야. 무슨 생각 하길래 그런 표정으로 웃어? 좋아하는 여자?”
옆자리에 앉은 선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뇨.”
내가 웃고 있었나. 생각하며 손에 들린 잔을 느리게 흔들었다.
조인휘.
독특한 이름을 조용히 혀끝에 올려보았다.
차 안에서 눈을 떴다.
“하….”
긴 숨을 내뱉으며 고정원은 지긋한 힘으로 눈가를 눌렀다. 운전석에 앉아 의식도 못 한 사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얕게 취한 수면은 잔상까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덕분에, 조인휘와의 첫 만남이 방금 막 겪은 일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이제 보니 제법 인상적인 첫 만남이었지만 그동안은 거의 잊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지워진 이유는 첫 만남 이후의 모습이 워낙 강렬했던 탓이다. 소심하고 순해 보였던 첫인상은 잇따른 언행에 의해 잘못된 판단으로 분류된 듯했다.
고정원은 코끝으로 웃었다. 기괴한 언행을 일삼고 다니던 조인휘를 떠올리면서 웃음이 참아지지 않았다.
허풍처럼 연애에 관해 떠들고 다니는 행동. 사이사이로 풍기는 부조화. 계속해서 눈길을 끄는 이유가 그런 것들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아주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
짓누르듯 얼굴을 문질렀다. 사흘이나 면도를 하지 않아 턱 주변이 까슬했다. 선바이저를 내려 거울을 확인하자 비친 얼굴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못했다.
조명을 꺼둔 차 안에서 얼굴은 더욱 위험한 인상으로 비쳤다. 누적된 피로로 인해 눈이 깊게 들어가 있었고, 그 안에 눈동자는 핏발이 선 채로 침잠되어 있었다.
시계를 보자 30분 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30분 뒤면 조인휘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시간이었다.
“…후….”
사이드미러에는 인적 없는 좁은 골목이 비치고 있었다. 골목에 차를 세워두고 끈질기게 대기하는 잠복과 같은 행위는 벌써 일주일째였다. 딱히 이런 과정이 지겹거나 힘들지는 않았으나, 지속적인 무시가 신경을 무너뜨리는 것은 확실했다.
조인휘는 꽤 단호하게 무시하는 중이었다. 당분간 만나지 말자고 했던 말을 착실히 지키려는 것처럼 말을 섞지 않는 건 물론이고 얼굴조차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뜬 발신인을 내려다보던 고정원은 몇 초간의 침묵 끝에 전화를 받았다.
“네.”
반대편에서 낮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노기를 억누르는 음성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집으로 들어오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한 추궁이 이어졌다.
-또 그 조인휘란 애야? 다시 만나는 거야, 그래?
시선은 사이드미러를 향했다. 골목을 지켜보며 고정원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게 아버지의 화를 돋우리라는 걸 알았지만 어떤 말도 쉽게 꺼내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너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이 얼마나 황당하고 더러운…!
말은 중간에 끊겼다. 터진 한숨에서 거친 감정의 결이 느껴졌다.
-…당장 집으로 와.
“…….”
-내일 참석해야 될 중요한 모임 있으니까 자세한 건 와서 들어.
고정원은 그제야 입을 벌렸다.
“죄송해요. 안 될 것 같아요.”
침묵으로 메워진 공백 끝에 아버지의 물음이 나왔다.
-…네 엄마 생일 다가오는 건 알고나 있어?
“그땐 얼굴 비치겠습니다.”
기가 차서 내뱉는 탄식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거 알아? 너 연애질에 정신 빠져서 발인식 날 뛰쳐나갔을 때도 나는 너 이해하려고 애썼어. 이제야 좀 정신 차리나 했더니 뭐, 죄송해? 안 될 것 같아? 너 대체 네 아버지 얼마나 더 우습게 만들래?
처음 듣는 얘기였다. 발인이라는 중대한 예식 자리를 뛰쳐나가는 자신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가 조인휘가 되면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듯했다.
-연애가 전부가 아니야.
“…….”
-세상이 그렇지가 않아. 슬슬 정신 차릴 나이 됐어, 너.
현실 감각이 있으면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객관적으로 연애는 삶의 전부가 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생각이 어쨌든 자신에게도 연애가 전부는 아니었다.
-정원아.
부름에 답했다.
“네.”
-너도 알겠지만 나는 강압적인 거 싫다. 서로 가족답게 해결할 수 있을 때 말 들어.
“…….”
-믿는다.
뚝, 전화가 끊겼다. 신뢰를 가장한 강요의 말에 거북함을 느끼며 고정원은 시트에 등을 기댔다.
이 정도로 격정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 보는 듯했다. 어찌 되었든 부모의 감정적인 대응은 자식으로서 난처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입장과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 또한 이 관계가 비정상적이고 도착적이며 안팎으로 어떤 유익도 가져오지 못하는 관계라고 생각했었다. 기억이 없어진 걸 좋은 기회로 헤어지려고까지 한 마당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만두고 싶지 않아졌다. 그만두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강력한 형태로 가능한 한 오래 지속시킬 생각밖에 없었다.
지이이잉-.
진동이 다시금 울렸다. 저장명을 내려다본 고정원의 동공이 금세 위를 향했다. 받고 싶지 않았으나 어쩌다 한 번씩 걸려오는 전화인 만큼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네, 어머니.”
-집에 못 오는 거야?
용건부터 떨어졌다.
“…….”
고정원은 말없이 차창에 팔을 괴었다. 눈은 여전히 사이드미러를 향한 채였다.
-정원아, 너 진지하게 생각해.
그때 거울에 무언가 비쳤다. 골목 끝에서부터,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너 지금 과해지고 있어. 지금 너 하고 있는 일들이 가족들 다 저버리고 아프게 할 만한 일이야? 정말로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
물먹은 솜처럼 처진 고개. 목적지가 없는 듯한 느린 걸음.
“네.”
닫혀 있던 입술이 벌어졌다.
-…뭐?
“죄송합니다.”
통화를 종료시킨 고정원은 차 문을 열어젖혔다.
돌아서서 성큼, 발을 내딛자 조인휘가 이쪽을 보았다. 상황을 파악한 조인휘는 망설임 없이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걸음에 속도를 붙인 고정원이 기민하게 거리를 좁혔다. 도망가려는 상대의 팔을 낚아챘다.
“오지 말라니까 왜 이래!”
냉랭한 일갈이 골목으로 울렸다. 붙들린 조인휘는 악착같이 반대편만 보고 있었다.
고정원은 잡고 있는 팔을 내려다보았다. 지나치게 마른 팔뚝의 굵기를 확인하듯 주무르자 팩, 뿌리쳐졌다. 신경질적으로 내친 조인휘는 거칠게 호흡했다. 불쾌한 것처럼 만져진 부위를 문지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진정되기까지 기다렸다. 가파른 호흡이 완만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 내릴 때 챙겼던 봉투를 내밀었다.
“생각나서 샀어.”
자꾸 마르는 게 신경 쓰여 산 것이었다. 단 걸 좋아하기에 그러한 입맛에 맞춘 케이크나 마카롱, 쿠키 따위의 디저트였다.
“받을 이유 없어. 가져가.”
조인휘는 곁눈으로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어머니 드려, 그럼.”
그 말에는 홱, 고개를 틀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받을 이유 없어. 니가 왜 우리 엄마를 챙겨.”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 고정원은 대답했다.
“내가 너 좋아하니까.”
마주한 눈자위가 젖어 들었다. 노려보듯 쏘아본 조인휘가 고개를 떨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
“그건 아닌 것 같다.”
부정적인 결론이 무엇에 대한 답인지 알았다.
“나는 그냥, 기억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지금은 그거 하나만으로도 벅차서….”
미안.
작게 사과의 말이 뒤따랐다.
“사귀지 않아도 돼. 그때처럼 주기적으로 만나주기만 하면 돼.”
부탁조로 말했다. 허튼소리는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만남을 갖는 것으로 충분했다. 당분간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너 병원 치료 다닐 거면. 기억 찾는 거,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면… 그런 시간은 나도 얼마든지 같이 보낼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 말이었다. 과거의 애인을 되찾는 용도 외에는 필요 없다는.
“…싫다면?”
말하자 조인휘가 주먹을 쥐었다.
“연락하지 마.”
기억 돌아올 때까지, 하고 덧붙이는 단언에서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빈틈없는 거절을 마주한 고정원이 소리 없이 웃었다.
슬프지 않았다. 그런 감정은 아니었다. 다만 피부의 살점이 강제로 찢기는 것처럼 불쾌할 뿐이었다.
역겨운 고통과, 처음 겪는 혼란 속에서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돼?”
“…….”
“어떻게 해야… 네가 나를 봐?”
질문은 공허한 울림처럼 흩어졌다.
“…이러지 마.”
조인휘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나, 갈 데가 남아 있어서…. 미안.”
핑계를 남겨 놓고 도망치려 했다. 그걸 붙들자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밀쳐 낸 조인휘의 손길에 봉투가 떨어지며 내용물이 쏟아졌다. 포장된 색색의 디저트가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었다.
조인휘는 어쩔 줄 모르고 굳어졌다. 고정원이 고개를 숙이고 떨어진 것을 수습하자 미안했는지 가지 않고 함께 줍기 시작했다. 어쩌다 손이 겹쳐지자 조인휘는 불쾌한 것처럼 팟, 떼어 냈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느닷없이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고정원은 주워 담은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뒤쫓았다.
달려 내려간 조인휘를 몸으로 막아 세웠다. 어느새 대로변까지 나와 있었다.
“제발 좀…. 더 할 말 없어.”
조인휘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할 말이 없는 것은 쫓아온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을 바꿀 만한 말이라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차라리 기억이 돌아온 척을 해볼까. 작정하고 연기하면 알아차리지 못할 터였다. 순간적으로 생각이 들끓었지만 금방 냉정해졌다. 어떻게 해도 그건 하고 싶지 않았다. 병원에 다니며 협력하는 것 이상으로 역겨울 게 뻔했다.
누군가의 대신이 되어 섹스하는 건 이미 경험해 보았다. 달라붙고, 흠뻑 젖고…. 활짝 열어서 나가지 못하게 조이던 몸의 반응에 완전히 넋을 뺐었다. 하지만 다음 날 모든 게 조인휘의 착각에서 비롯된 걸 알았고, 이어진 낙차는 몰아쳤던 절정에 비례했다. 양극을 오가는 감각은 장난이라도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바아아앙-.
지나치는 오토바이가 굉음을 냈다. 언제 도망갈지 모르는 상대를 보며 고정원은 숨을 죽였다. 더 이상 아무것도 미룰 수 없게 된 순간 질문이 터져 나왔다.
“우리 처음 만났던 술자리 기억해?”
묻는 말에 커다란 눈이 자신을 향했다. 길목으로 늘어선 조명들이 눈동자를 화려하게 비추고 있었다. 오밀조밀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오자 이유 없이 가슴이 내려앉았다. 발치가 땅 밑으로 쿵 꺼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처음부터 끌렸어.”
“…….”
“네가 내 이름 알기도 전부터.”
조용히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날, 그 당시처럼.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을 보고 있자 거리의 소음들이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눈가를 이지러뜨린 조인휘가 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얼굴에 스친 혼란을 놓치지 않은 고정원이 빠르게 뒤를 쫓았다.
네온사인이 쏟아지는 밤거리를 거닐었다. 눈앞에는 연약한 피식자처럼 곤두선 뒷모습이 있었다. 바로 붙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앞서가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예민함 때문이었다. 잡히면 당장에라도 까무러칠 것 같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조인휘는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아다녔다. 돌고 돌다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린 먹거리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잠시만요.”
고정원은 무리 지은 사람들 틈으로 커다란 몸을 구겼다. 눈은 도망가는 뒷모습으로부터 한시도 떼지 않았다.
고깃집 앞에서 멈추어선 조인휘는 뒤를 돌아보았다. 살피듯 기웃거리고 있었다. 몇 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쫓고 있던 고정원과 눈이 마주치자 기겁하며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결사적이었다. 조인휘는 뭉친 학생들 사이로도, 손잡고 있는 커플 사이로도 양해를 구하듯 연신 꾸벅거리며 앞질러 나갔다. 그렇게까지 해서 도망쳐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 싶을 정도였다.
겨우 인파를 벗어났을 때 뒷모습을 놓쳤다. 두리번거리는 고정원의 이마와 목으로 굵은 핏대가 섰다. 일찌감치 잡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맹렬하게 일었다.
조금 뒤 주변을 살피던 눈이 찌푸려졌다. 건너편, 공사현장으로 접근하는 뒷모습을 발견한 직후였다. 골조가 버젓이 드러난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조인휘!”
부르자 겁먹은 뒷모습이 화들짝 소스라쳤다. 조인휘는 건물 안으로 황급히 모습을 감추었다. 실수했음을 깨달은 고정원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신호를 무시하고 횡단했다. 재빠르게 공사 현장 안으로 향했다. 어둑한 건물의 입구로 발을 내딛자 탁, 발소리가 울렸다. 사위가 확 어두워지며 여러 냄새가 풍겨 들었다. 습기 찬 판자 냄새, 시멘트 냄새, 먼지 냄새 따위였다.
사방이 쓰레기 천지였다. 폐자재뿐만 아니라 담배꽁초, 음료수 병, 과자 봉지 등이 즐비한 공간은 창고와 같은 혼잡함이 느껴졌다. 게다가 노출된 골조들로 인해 상당히 위험했다. 한창 진행 중인 현장이라기보다 중단되어 방치된 현장에 가까웠다.
“…….”
주위를 살피며 다가갔다. 인기척에 귀를 기울이며, 소리를 듣고 도망가지 않도록 조용히 접근했다. 밖에서 대기하는 편이 유인하기는 더 쉬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해서 진입했다. 위험한 곳이었고, 범죄 장소로도 악용되기 좋은 환경인 만큼 혼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나아갈수록 사고로 이어질 만한 요소가 많이 보였다. 골조 공사 단계의 내부는 모든 게 허술한 상황이었다. 위층으로 이어진 계단도 뼈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현재의 층에 조인휘가 없음을 알아차린 고정원은 곧장 계단을 올랐다. 소리를 죽여 조용히 올랐지만 발소리가 들린 모양이었다. 지척에서 탕탕탕탕,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가!”
위에서부터 내지르는 소리였다.
“쫓아오지 마. 가!”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과격해져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가라고 좀…!”
절박한 외침을 들은 고정원이 우두커니 섰다. 조인휘가 현재 지나치게 감정적인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보다 훨씬 더 감정적인 상태일지도 몰랐다.
초조함이 기어올라 손아귀를 꽉 움켜쥐었다. 여기서 다가갔다가는 모든 게 극적으로 악화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조인휘는 이런 곳까지 도망 올 정도로 대면하는 상황을 원치 않고 있었고, 그걸 헤아리기에는 자신의 상태가 이미 극단으로 치달아 있었다.
해결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임을 알았다. 쫓는 행동을 멈추고 감정을 가라앉히려면 긴 시간이 필요했다. 눈이 돌아 쫓아온 만큼 한곳만 향하던 집념이 쉽게 죽여지지 않았다.
“…….”
그 상태로 오랜 시간을 서 있었다. 버티는 형태로 자리를 지키고 있자 어느덧 등줄기부터 손바닥을 오르내리던 열기가 가라앉았다. 한자리에서 습한 먼지 냄새를 맡고 서 있던 고정원은 사나운 집념으로 올랐던 계단을 다시 천천한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탕,
탕,
탕.
소리가 울리며 문득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골이 드러난 층계를 밟으며 내려가는 동안 지나간 기억들이 역행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강렬하게 떠오른 기억은 조인휘가 본가로 찾아왔을 당시였다.
‘이게 정상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이게 맞는 거고….’
‘이제 겨우 제자리로 돌아온 거야.’
‘누가 봐도 우리가 연애하는 게 정상은 아니잖아.’
무분별하게 던진 말들이 되살아났다. 형태 하나 무너뜨리지 않고 되돌아와 신랄하게 꽂혔다.
쉴 새 없이 부들거리던 턱.
몇 번이나 말아 물던 입술.
자제력을 잃고 경련하던 몸뚱이.
그대로 터지거나 증발해 버릴 것만 같던, 감정의 응고체 그 자체였던 조인휘.
그것들이 오늘 일처럼 생생했다.
“…….”
긴 통로에 서 있었다. 어느새인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눈이 보였다.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아 살피러 내려온 모양이었다.
“먼저 나가. 안 쫓아갈 테니까.”
말하자 조인휘는 경계하는 것처럼 주춤거렸다. 아무런 모션을 취하지 않자 그제야 믿어지는지 멀찌감치 거리를 유지하며 출구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돌아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고정원이 쳐다보았다. 지나치게 서두르는 움직임은 조심성이 없었고, 그 바람에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러다 다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기 무섭게 통로를 스치던 조인휘는 철근 뭉치가 얹어진 자재 더미를 건드렸다.
부딪친 것은 부실하게 쌓여진 탑이었다. 충격이 가해진 자재물의 상층부가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무너질 시 도미노처럼 앞에 쌓인 것들까지 연쇄적으로 붕괴될 수 있는 배치였다.
다칠 가능성이 눈에 보인 순간 빠르게 다가갔다. 자재들이 무너져 내리기 직전, 팔을 뻗은 고정원은 등 전체로 붕괴를 막았다. 콘크리트 바닥으로 얇은 철근 기둥 하나가 떨어지며 째앵,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등으로 밀어 자재들을 제자리로 세웠다. 간신히 되돌려 놓고서 점퍼를 벗었다. 드러난 티셔츠의 한쪽 소매는 온통 젖어 있었다. 떨어지는 철근에 왼쪽 팔뚝이 찢겼음을 깨달았다.
혈량이 꽤 많았다. 금세 하완까지 적신 피는 계속해서 아래로 흘렀다. 선홍색 줄기가 손등과 손바닥을 거쳐 손톱 끝으로 뚝, 뚝, 떨어졌다.
“…어….”
다가온 조인휘가 중얼거렸다.
“안 돼…. 안, 피, 그만….”
혼비백산하여 질린 얼굴이었다. 양손을 벌벌 떠는 게 보였다. 피로 칠갑된 팔 주변을 차마 만지지는 못한 채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
고정원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관찰하듯, 긴장시킨 두 눈으로 주시했다. 순식간에 커진 동공이 산만하게 움직이는 조인휘를 따라 이동했다.
이 순간에도 떠오른 장면은 무료하기만 하던 그날의 술자리였다. 눈 깜짝할 사이 다가와 숫기 없이 말을 붙이던 남자가 겹쳐졌다. 대단할 것도 없는 첫 만남이 또다시 복원되고 있었다.
고정원은 입 안에 고인 단침을 삼켰다. 살이 무척 뜨거웠다. 다친 건 팔인데 전신이, 눈 속의 안구까지 뜨끈했다.
손을 들자 핏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걸 본 조인휘가 패닉에 빠진 것처럼 눈물을 쏟았다. ‘구급, 구급차…!’ 소리치며 움직이지 말라는 듯 피로 물든 손을 붙들었다.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와서 지탱하듯 허리춤을 감쌌다.
“…나한테 왔잖아.”
고정원의 목소리가 낮게 파고들었다.
조인휘가 얼굴을 밀착했다. ‘뭐? 뭐라고? 아퍼?’ 되풀이해서 물었다. 올려다보는 눈에 끊임없이 눈물이 방울지고 있었다.
“그날….”
다쳐서인지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끈적해진 손으로 조인휘의 목을 감았다. 부드러운 덜미부터 뺨을 한꺼번에 감쌌다.
“인휘 네가 나한테 왔잖아.”
정신이 뜨겁게 흐려지고 있었다.
가까운 정형외과에서 처치가 이루어졌다. 다행히도 상처는 쏟은 혈량에 비해 깊지 않았다. 다만 면적이 넓었고, 팔뚝을 가로질러 두 개의 기다란 줄이 생겨 있었다.
간단한 수술 후 파상풍 주사를 맞았다. 치료실에서 나오자 대기하던 조인휘가 뛰어왔다. 안색이 여전히 희게 질려 있는 꼴이 보였다.
“괜찮아?”
“괜찮아.”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때도 조인휘는 도리어 자기가 병자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독히 창백한 안색으로, 지독히 초라하게 떨고 있었다.
마주한 얼굴에 불쑥 눈물이 흘렀다. 고개 숙인 조인휘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
눈꺼풀이 내려오며 빛이 사라진 눈동자는 무감한 기운을 풍겼다.
눈물을 보이는 게 자신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다른 누군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직설적인 물음을 삼킨 고정원은 목덜미로 시선을 내렸다. 씻어 내기는 한 모양인데 마른 핏자국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군데군데 남은 붉은 자국은 아직 손자국처럼 보였고, 어쩐지 지워지지 못한 범죄의 흔적처럼 섬뜩해 보였다.
고정원은 쳐다보던 눈길을 떨궜다. 피로 젖은 손바닥에 감기던 부드러운 감촉을 머릿속에서 몰아내고 데스크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치료비를 지불한 뒤 조인휘와 함께 출구로 향했다.
밖으로 이어지는 자동문 하나를 앞에 두고 고정원은 텅 빈 로비에서 멈춰 섰다. 벽에 등을 기댄 채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자, 조인휘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을 집어넣고 나서도 둘은 그대로 서 있었다. 이따금씩 눈이 마주칠 뿐 미묘한 눈치만 오갔다.
“왜 그래.”
조인휘가 벌게진 얼굴로 이마를 짚자 고정원이 다가가 고개를 기울였다. 조인휘는 입술을 우물우물했다. 몇 번이나 머뭇거린 뒤에야 가까스로 내뱉었다.
“…미안해.”
알 수 없는 사과에 고정원은 눈높이를 되돌렸다. 가만히 옆에 서서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그만 가자는 한마디만을 남기고 출구로 향했다.
병원을 나와 길목으로 들어서서 걷던 중, 조인휘는 또다시 이상한 기색을 비쳤다. 고정원은 가만히 멈추어 서서 먼저 말을 꺼내기까지 기다렸다. 어지간히 하기 어려운 말인 듯, 통행인이 몇이나 지나갈 때까지 조인휘는 머뭇거렸다.
“내가….”
“…….”
“전부 다…, 정말로 미안해.”
가까스로 나온 말이었다. 그만큼 단순한 사과처럼 들리지 않았다.
“왜?”
묻는 고정원의 입술이 비틀렸다.
“나하고는 죽어도 안 되겠어?”
물음에 조인휘가 고개를 쳐들었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좁은 턱을 흔들어댔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되는 문제였다.
“아니면 됐어.”
빠르고 낮게 뇌까리고는 그대로 조인휘를 끌어안았다. 조인휘는 안기자마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달싹거렸다. 빠져나가고 싶은 것처럼 버르적댈 때마다 신경줄이 튀어 오르는 듯했다. 놓아주지 않고 끈질기게 잡아두면서 고정원은 깨달았다. 조인휘는 그저 붕대 감긴 상처에 닿을까 봐 신경 쓰고 있을 뿐이었다.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갈라진 음성을 귓속으로 밀어뜨리며 허리를 바짝 당겼다.
“…….”
자세가 고착되면서부터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골목의 구석이라고 해도 이따금씩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렀다. 고정원은 끌어안은 제 팔에 힘을 빼지 않았고, 조인휘 또한 순응한 것처럼 가만히 안겨 있었다.
“…너는.”
고정원의 입에서 막힌 숨이 터져 나왔다. 너는…, 하고 또 한 번 반복한 뒤에도 더듬어 올라가는 것처럼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너는 내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겠지만….”
“…….”
“어쩌겠어. 나는 다 잊어버렸고, 그래도 널….”
사랑하게 됐고.
은밀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조인휘는 숨 쉬기를 잊은 것처럼 굳어져 있었다.
“네가 예전 기억에만 매달려 있으면 나는 불안해져. 언제까지고 옛날 일만 그리워할 것 같아서 숨이 막혀.”
옷자락을 쥐는 손길이 느껴지자 몸을 감싼 고정원의 손가락이 움찔 움직였다. 매 순간 달라지는 조인휘의 숨소리마저 자극처럼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미안해.”
시간을 끌던 조인휘가 억눌린 소리로 말했다. 더는 어떤 사죄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던 고정원이 뭐가, 하고 인내하듯 대꾸했다.
“그냥…, 다. 오늘, 나 때문에 너 많이 다친 것도….”
“…….”
고정원의 눈썹에 다시 한번 골이 생겼다. 아직도 쓸데없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답답했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고 말해준다면 그나마 편해질 테지만.
“…책임져 줘 그러면.”
구걸을 했다.
“나만 봐줘.”
속삭이면서 바닥까지 드러냈다. 네 애정을 원하고 있음을 드러내놓고 빌었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메스꺼울 만큼 밀도가 높았다.
안겨 있던 조인휘를 품 안에서 떼어 내자 섬세하고 유약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딱 한 번이면 되니까.”
부탁을 했다. 연인들 밀어처럼. 혹은 그것보다 간절하게.
“믿어봐.”
지독한 확신을 가지고서 말했다.
“나는 앞으로 절대 너 실망시키는 일 없어.”
마주한 눈동자가 어지러울 정도로 흔들렸다.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망설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끝끝내 밀어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요동이 잦아들 때쯤, 조인휘는 들이받는 것처럼 와락 안겨 들었다.
가슴팍을 때린 이마가 꾸물거렸다. 끄덕이는 움직임이었다는 건 대답으로 알았다.
“…어.”
마침내였다.
“기억 안 돌아와도 돼.”
허락의 말이 입김과 함께 뜨겁게 닿았다.
“그냥…. 지금 그대로여도 돼.”
고정원은 눈꺼풀을 내렸다 떴다. 가만히 선 채로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그것만으로 머리가 꽉 찼다.
지금 이 순간이 제게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자 불시에 모든 것이 완전해졌다.
어쩐지 깊은 곳에서부터 숨이 찼다. 조인휘가 제 품에 안겨 있다. 그 사실을 강하게 인지한 순간 참지 못해 목덜미로 얼굴을 묻었다.
애틋한 냄새와 촉감이 느껴지며 눈이 감겼다. 여기에 파묻혀 죽어도 아무런 불만 없을 것이라는, 다소 과격한 생각을 끝으로 얼굴을 떼어 냈다. ‘근데 우리 안 가?’ 묻는 조인휘를 그대로 구석으로 몰아가 입을 맞추었다.
빌라의 입구로 들어서기까지 5분이었다. 거기서 엘리베이터에 오르기까지 5분. 또다시 현관 앞에서 미적거리느라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비슷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화장실은 저쪽이고…. 여기, 소파에 편하게 앉아.”
겨우 들인 손님이었다. 고정원은 나긋한 목소리로 화장실의 위치와 앉을 곳을 안내했다. 적응되지 않는 눈치로 서 있던 조인휘는 으응, 대꾸했다. 거실 한쪽에 놓인 긴 가죽 소파 쪽으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편하게 여기서 먹을까?”
오는 길에 포장한 음식을 소파 테이블로 내려놓으며 물었다. 조인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씻으러 간 조인휘는 테이블 위로 설렁탕 두 그릇과 반찬이 세팅된 직후 돌아왔다.
‘지금 나는 싫구나.’
‘아무래도 좀… 그럴 수밖에 없잖아. 솔직히, 다시는 보기 싫지 나는. 그러니까 얼른 기억 찾아 바보야.’
설렁탕의 하얀 국물을 보고 있자니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입맛이 떨어져서 도저히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일부러 싫어할 짓들을 해놓고 면전에서 싫다는 말을 들으니 불쾌했다. 불쾌함을 넘어 아득하고 숨이 막혔다. 하지만 오늘 이후로 ‘다시 보기 싫다’는 그때의 말이 더는 속을 뒤집지 않게 되었다.
이 설렁탕은 조인휘가 직접 선택한 메뉴였다. 다쳤으니 이런 걸 먹어서 몸을 뜨끈하게 데워야 한다며 고른 것이다. 평소 선호하는 음식이 아니었으나 오늘따라 입에 맞았다. 바닥이 보이도록 비우고 나자 조인휘의 말마따나 몸이 뜨끈해져 있었다.
“너 처방받은 약 있잖아. 얼른 그거 먹어.”
식후 정리를 끝내자 조인휘가 물을 건네며 말했다. 챙김받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 소리 없이 웃자 조인휘는 무안한 낯빛을 했다.
“방금 그 말이 왜 웃긴 거야.”
“…아니.”
“아니, 왜 웃기냐니까….”
시시한 말대꾸가 오간 끝에 고정원이 웃으며 약을 복용했다.
거실로 돌아와 영화를 볼까 생각하며 조명을 어둡게 낮추려던 때였다. 조인휘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드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 가?”
“응? 시간도 너무 늦었고…. 너도 이제 쉬어야지.”
“…….”
말 그대로 분위기를 깨는 행동에 기가 찬 한숨이 터졌다.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런 식이었다. 왔다 갔다 태도를 번복하는 탓에 안달을 내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애초에 여기까지 들인 것도 반쯤은 강제였다. ‘네가 있어야 밥이 넘어갈 것 같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나서야 들일 수 있었다.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조인휘는 지금쯤 제 부모님 댁에 있을 터였다.
같이 있기 싫은 건가?
생각하자 무언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오늘 길에 벌어진 일들을 떠올렸고, 조인휘의 허용에서 비롯된 관계의 재정의를 생각했다. 자신과 조인휘는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앞으로 달라질 많은 것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사소한 것들은 무시할 수 있었다.
“조금만.”
“…….”
“그냥, 조금만 더 있다 가.”
고정원은 내리깐 눈을 들어 올리며 조인휘를 보았다. 표정과, 은근한 몸짓을 이용해 알기 쉬운 미련을 흘렸다.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보일지 알고서 취하는 행동이었다.
“…그래도… 우리 부모님도, 늦으면 걱정하실 수 있고….”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에 허술한 핑계를 대고 있었다.
“지금 연락드리면 어때?”
“…으음….”
고민하는 것처럼 얼굴을 문질렀다. 어찌나 세게 문질렀는지 얼굴에 손자국이 생기고 있었다. 조인휘는 불그스름해진 얼굴을 드러낸 채 툭,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까 지금 주무시고 계시겠다.”
그리고 사선으로 메고 있던 가방을 풀었다. 손가락으로 머쓱하게 이마를 문지르는 것을 보아 변덕스럽게 굴고 있다는 자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여기… 되게 넓고 좋다.”
조인휘는 집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금세 집 구경으로 태세를 바꾼 조인휘에게 구태여 다른 말은 보태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일부러 큰 곳으로 계약했어.”
설명해 주며 나란히 움직였다. 실제로 같이 살 생각으로 선택한 집이었다. 장기 거처가 되지 못할 가능성을 감안해 욕심을 버린 결과가 이 정도였다.
둘이 지냈던 오피스텔에 비해 10평 가까이 컸다. 비교하여 우위를 차지하고 싶은 심리가 분명히 작용한 선택이었다. 이전의 오피스텔보다 훨씬 쾌적해 보였으면 했고, 실제로 조인휘가 지내면서 ‘전에 살던 데보다 더 좋다’고 느끼길 원했다.
“오, 여기 중간방 맞지? 근데도 크다. 그새 별거 별거 다 갖춰놨네…. 인테리어도 그렇고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
조인휘는 입을 벌리고 구경했다. 그 모습을 살피며 말했다.
“이 방은 인휘 너 공부할 때 써.”
“…근데, 가구들이 신기하게 생겼다.”
“…….”
“처음부터 벽에 설치돼 있는 것처럼 생겼어. 소파도 그렇고 책상 위에 여기, 간이침대도….”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을 하고 있는 게 보였지만 그러려니 했다. 굳이 한 번 더 언급하지 않았고, 안방으로 이동하고 나서야 재차 운을 띄웠다.
“여기가 우리 같이 쓸 안방이고…. 저기 안으로 이어지는 드레스룸은 인휘가 쓰면 돼.”
“…….”
껄끄러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곧바로 한 톤 낮게 덧붙였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조인휘는 헛기침을 했다. ‘생각해 볼게.’ 작은 음량으로 내뱉고는, 그 이상의 진행을 차단하려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전부 인테리어에 대한 피상적인 감상이었다.
“여기 나무 가림막 있는 거 좀 멋있어 보인다. 어, 여기 침대 밑에서도 조명이 나오네. 대박이다. 와, 저기 거울 주변에서도 조명 나오고 완전 조명 천국이네. 밤에 불 끄고 저런 조명들만 켜놔도 분위기… 음, 근데 저기 벽에 붙은 조명은 뭐야?”
생각 없이 내뱉다가도 어떤 화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회피하려는 게 보였다.
“무슨 사람 고개가 꺾인 것처럼 생겼어. 하핫.”
보이는 대로 주워섬기는 조인휘의 뒤에서 고정원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간접 조명이 은은한 맛이 있어. 한번 볼래?”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팟, 꺼지는 소리가 잇따랐다. 안방이 어두워지면서 간접 조명들만 남자 방 안의 분위기가 은근해졌다. 고정원은 가만히 침대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조인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게. 멋있다.”
조인휘가 고개를 돌렸다.
“나 아까 거실 구경을 제대로 못 했는데. 보러 가도 되지?”
그러고는 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따라 나가자 거실의 한구석, 커다란 선반 앞에 서 있는 조인휘가 보였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채 장식물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옆으로 다가서자 서로의 팔뚝이 지그시 밀착됐다. 진짜인지 아니면 그런 척하는 것뿐인지, 상당히 골똘하게 구경하는 모습이었다. 장식물 중에서도 오브제 캔들에 관심이 가는 듯 그걸 유심히 보고 있었다. 지켜보던 고정원이 캔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장식 겸해서 이것저것 샀어. 이런 건 어때? 괜찮아?”
“어 그러게, 멋있네. 향도 좋고, 이런… 디테일이 좋다. 건축물 같아서.”
캔들의 표면은 계단처럼 조각돼 있었다. 울퉁불퉁한 표면을 조인휘가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러나 칭찬하는 투는 어쩐지 책을 읽는 것처럼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정원은 캔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말끝을 늘였다.
“긴장할 거 없는데.”
“어?”
조인휘가 즉각 반응했다.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그게 다야.”
치부가 건드려진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입술을 한 번 꾹, 깨문 조인휘는 고개를 되돌렸다.
“…알어 나도.”
말투가 상당히 방어적이었다. 어린애들이 하는 말싸움처럼 들려 반사적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자각이 있었는지 조인휘도 따라서 싱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좀 재수없었다 말투가.”
멋쩍게 웃는 옆얼굴에 두 눈이 박혔다. 시선은 얼굴에서 점차 목덜미로 내려갔다. 그리고 깨끗한 피부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붉은 자국에서 멈추었다.
조인휘가 별안간 어깻죽지를 떨었다. 고정원의 뜨겁고 메마른 손이 닿은 탓이었다. 고정원은 다부지지 못한 목덜미 전체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듯 감쌌다.
“…….”
눈이 마주치고 어느 순간이었다. 등을 숙이며 빨아당긴 점막은 약간의 물기와 함께 따끈하게 감겼다. 마찰음과 함께 머금었던 입술을 놓자 다시금 눈과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에는 혼란한 기색이 비쳤지만 거부감은 없었다. 거기서부터 모든 걸 뒤로하고 오랫동안 게걸든 사람처럼 돌진했다.
“음….”
의식하지 못한 신음이 샜다. 양손으로 마른 몸뚱이 곳곳을 성급하게 더듬었다. 불이 붙어 허겁지겁 입술과 턱을 삼키고 빨아댔다. 육중한 무게를 버티지 못해 휘청거리는 조인휘의 몸을 붙들었다. 맨살에 닿는 것에 방해가 되는 옷가지들을 잡히는 대로 벗겼다.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그게 다야.’
바로 직전에 내뱉은 헛소리였다. 귓가에 스쳤지만 문자 그대로 스쳤을 뿐이었다.
“읏!”
티셔츠를 벗기자마자 맨살에 코를 박았다. 덜미를 빨아당기자 땀내 섞인 살내가 났다. 씻지 않은 살을 입에 넣는 게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기실 환장하게 좋았다. 노폐된 역한 냄새가 아닌 야한, 사타구니에 얼굴을 처박고 싶어지는 냄새가 풍겼다. 살짝 맡은 것만으로 바지에 짓눌린 성기가 들썩였다.
“읏, 헉…. 야, 안… 돼, 정원….”
밀착한 탓에 목소리가 귓속에 번졌다. 애무처럼 느껴졌다.
“안… 돼, 그만….”
헐떡이는 호흡이나 진동까지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청각으로 스미는 자극이 의외로 강력했다. 계속 저 야릇한 목소리로 제 귀에 지껄이게 만들고 싶었다.
“으, 흣…!”
“…하….”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 말랑거리는 귓등으로 코와 입술을 붙였다. 거기에 고인 것들을 들이켜고 있자 생각지도 못한 타격이 가슴팍을 밀어 냈다.
“…잠깐, 잠깐만, 좀!”
안 돼. 그만. 잠깐.
거부의 말들이 겨우 머리에 들어왔다. 한 발자국 뒤로 몸을 물리며 고정원은 젖은 입술을 훔쳤다. 숨을 몰아쉬는 제 입술이 몹시 홧홧해진 게 느껴졌다.
“…실수, 했어.”
스스로 생각해도 위험해 보이는 게 아닌가 싶게 헐떡이고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면서 고정원은 상대의 기색을 살폈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혹시 이대로 가버릴까 하여 경계하고 주시했다.
“…나도….”
“…….”
“나도 싫은 거는, 아닌데….”
전부 벗겨지고 속옷만 남은 꼴이었다. 그런 꼴로, 조인휘가 말했다.
“나도 다 알고 남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들러붙어 입술을 모조리 삼켰다. 두 번째로 시작된 키스는 기어이 조인휘를 울릴 때까지 지속되었다.
눈꼬리에 흐르는 물기를 닦아주었다. 힘이 빠진 몸을 받치고서 각도를 바꾸어 가며 맛보았다. 입술은 살이 오른 것처럼 퉁퉁해져 있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머금어 단물을 빨아 삼켰다. 그것을 빠는 게 어떤 음식을 먹는 것보다 맛있게 느껴졌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손이 등허리를 지나 드로즈 안으로 들어갔다.
“씻, 고…! 씻으면, 씻으면 해, 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미 한창 섹스 중이었다.
“제발…, 나 안 씻으면 안 해.”
“…….”
“그냥 하는 말 아니고 진심으로 안 할 거야.”
조인휘가 엄포했다. 속옷에 반쯤 침입한 손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음란하게 살을 움켜쥐었다. 조인휘는 그 손을 붙든 채 어르기와 부탁, 협박을 모두 내놓았다. 뜨거운 숨을 내쉬던 고정이 마지못해 신음처럼 대꾸했다.
“…알았어.”
만류하던 조인휘의 손에서 겨우 힘이 빠진 순간이었다.
교대로 씻고 나오자 어색하게 침대에 걸터앉은 조인휘가 보였다. 가운을 입고서 초조한 사람처럼 한쪽 다리를 떨고 있었다. 앞으로 시작될 일을 의식해서인지 이쪽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와인, 한잔 마실래?”
묻는 말에 그제야 고개를 든다.
“…괜찮아.”
대답한 조인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과감하게 가운을 풀어 헤쳤다. 수동적으로 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
은은하게 조명이 감돌고 있었고, 서로의 몸이 구석구석 보이기에 충분한 조도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마주하자 벌써부터 힘을 받은 성기가 끄덕끄덕 맥동했다.
이대로 사흘 밤낮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걸스러운 흥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숨을 고르며 고정원은 보다 가깝게 거리를 좁혔다.
“아, 잠깐만, 그냥 한잔 마실래.”
서로의 몸이 닿기 직전이었다. 양팔로 밀어 내며 조인휘가 말했다.
“주문 끝났어.”
거슬거슬해진 숨결로 말하자 몸을 반쯤 돌린 조인휘가 다급하게 지껄였다.
“잠깐만, 나는 그냥 옷 입고, 입고 할래.”
새삼스럽게 벗은 몸을 의식하며 가운을 집어 들고 있었다. 손에 들린 천자락을 빼앗으며 귓불을 물어뜯었다.
“입으로….”
귓바퀴부터 귓구멍까지 혀를 내어 빨면서 말했다.
“빨아줄 거니까….”
“아….”
“입지 마 아무것도.”
흥분감을 이기지 못해 한쪽 유두를 물어뜯는 것처럼 강하게 잡아당겼다. 튕겨 오르듯 경련한 조인휘가 밀치며 떨어져 나갔다.
그새 빨개진 제 가슴을 손으로 가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흥분하여 기세등등해진 고정원의 몸 상태를 외면하는 것처럼 조인휘는 고개를 숙였다.
“낯설어?”
“…….”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오히려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을 낯설어하고 있다는 게 전해질수록 단전이 억세게 조였다.
“나도 낯설어.”
횟수로 세자면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흥미 본위의 섹스였고, 두 번째는 정신없이 빠져서 했으나 그 뒤가 참혹할 정도로 불쾌했던 섹스였다. 지금부터 할 섹스는 그때와는 다른, 어떤 의미로는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조인휘 또한 오늘을 제대로 된 처음으로 여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새롭게 받아들이고 새롭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낯설어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서 했을 섹스였고, 두 번째는 기억이 돌아왔다고 생각해서 했을 섹스였다.
그리고 지금은….
거기까지 생각한 고정원이 힘껏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지금부터는 어떤 것에도 방해받을 일이 없었다. 모든 상황이 정리가 되었고, 조인휘는 자신을 받아들였다. 이제부터 이 입술을 빠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머리 꼭대기까지 치민 성적 고양감으로 온몸이 터질 듯했다.
“내가 너 만져도 돼?”
떨어진 입술 틈으로 물었다. 이미 만지고 취하고 있으면서 입으로만 허락을 구했다. 키스 중에 양팔을 목에 둘렀던 조인휘가 급박한 애무에 다시금 겁을 먹은 것처럼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무서워?”
“그, 천천히, 살살 좀….”
“…이렇게? 이렇게 하면 좀 나아?”
둔부 사이의 샅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만지는 제 입에서 하아, 숨결이 뜨겁게 새어 나갔다. 옴폭한 곳에서 튀어나온 곳까지, 보기 좋은 골격에 얇게 달라붙은 살을 전부 쓰다듬었다. 이제부터 질리게 만질 수 있는 몸이라는 것을 되새기는 손끝이 저릿하게 조였다. 침대를 옆에 둔 채 한참이나 그렇게 서서 애무를 되풀이했다.
“만지고 싶은 대로 만져.”
조인휘의 손을 이끌어 제 몸에 가져다 대며 고정원이 속삭였다.
“내 머리 만져봐.”
어설프게 근육을 쓰다듬던 조인휘가 시키는 대로 머리통을 만졌다.
“짧으니까 느낌이 달라?”
묻자 조인휘는 어딘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어떻게 달라?’ 묻는 말에 조인휘는 헐떡이며 모른다고만 답했다. 처음에는 그저 더듬거리던 손길이 심취한 무엇으로 바뀌자 고정원의 숨결도 다급하고 가쁜 것으로 변했다. 쪼아먹듯이 조인휘의 입술을 삼키는 고정원의 귓등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흣, 음…!”
숨을 쉴 수 있도록 간간이 각도를 바꿨다. 허리를 끌어당겨 오래도록 혀와 혀를 얽으면 조인휘의 목에서 ‘아…’ 끓는 신음이 울렸다. 호흡이 힘들어서 신호처럼 버둥거리면 그제야 고정원은 조금의 틈을 만들어주었다.
살짝 떨어뜨려 주면 참았던 숨이 거세게 터졌다. 고정원은 그 터지는 숨결을 면전에서 고스란히 받았다. 기침을 하면 등허리를 쓰다듬고, 위로처럼 잘게 입을 맞추어주었다. 고문처럼 호흡을 강제로 조절당하는 입맞춤에 조인휘는 괴로워서 매달리고 힘이 빠져서도 매달렸다. 버거워하는 것을 달래가며 몇 번이나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어떤 의미로는 삽입보다 좋았다.
“아, 음…!”
꼿꼿해진 성기가 서로의 몸에 부딪쳤다. 서로의 쿠퍼액과 언제 사출한지 모를 정액으로 얽혀 거미줄처럼 끈적해져 있었다. 짓누르고 치대는 난잡한 움직임이 더해지며 찌릿한 사정감이 몇 차례나 지속되었다.
고정원이 손을 아래로 뻗었다. 막 사정한 조인휘는 어디를 만져도 민감하게 몸을 뒤틀어 댔다.
“좋아?”
끄덕끄덕, 조인휘가 고갯짓으로 대꾸했다. 도톰한 둔부 사이로 손가락 두 개를 미끄러뜨린 고정원이 깊숙한 곳을 문질렀다.
“…이건?”
“…지, 마.”
무어라 하는 건지 들리지 않았다. 뭉개진 발음은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응?’ 하고 제대로 된 답을 요구하자 짜증 섞인 대거리가 떨어졌다.
“…으니까, 묻지 좀 마.”
좋으니까 묻지 말라는 말이었다. 고개를 숙인 고정원이 귀에 입술을 문질렀다. 냄새, 살결, 체온까지 구석구석 느끼며 성기가 달아올랐다. 시작과 끝이 모두 묵직한 둔기와 같은 형태로 발기해서는 번들거리며 분비액을 흘려댔다.
이대로 조인휘를 눕히고 짓누르고 싶었다. 자신의 무거운 몸으로 마른 몸을 뭉개고 싶었다. 성기를 깊은 곳까지 넣고, 흔들어서 더없는 한계치의 쾌락을 느끼게 주고 싶었다. 본능만 남아 울고 소리치는 얼굴을 가장 가까운 데서 보고 싶었다.
더는 미룰 수 없어 침대에 눕힌 순간, 조인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돼.”
거부의 말에 등줄기가 굳었으나 이어지는 말은 예상과 달리 걱정이었다.
“너 그러다 상처 터져. 가만히 있어, 내가 할 테니까.”
“…….”
자세를 전복시킨 조인휘는 고정원을 앉히고 그 위로 올라탔다. 적극적인 태도에 고정원의 가슴팍이 커다랗게 씨근거렸다. 치부끼리 맞닿아 비벼지자 자제력을 잃은 고정원이 그대로 삽입을 위해 둔부를 움켜쥐었다.
“잠깐, 바로 할게, 바로. 넣을 테니까, 어? 기다려 봐….”
조인휘는 단단하게 당겨진 하악을 어루만지며 진정시키려 들었다. 달래느라 간지러운 말투까지 모두 사람을 뒤흔들었다.
힘이 빠진 고정원의 등이 침대 헤드에 닿았다. 조인휘는 고정원의 어깨에 손을 짚어 편한 자세를 찾았다. 적신 손가락을 뒤로 가져가 비좁은 뒤를 늘리기 시작했다. 자극받은 고정원의 성기가 복부까지 올라붙어 움찔거렸다.
“흣….”
삽입은 시도만 몇 차례 반복되었고, 구멍은 귀두를 겨우 삼킬 뿐이었다. 조인휘는 허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버거워했다.
내내 괴로울 정도로 참아내고 있던 고정원이 결국 상체를 일으켰다. 팔을 들어 조인휘의 등을 받치고, 그대로 돌려서 엎드리게 만들었다. 그 사이로 몸을 낮추며 고생하느라 벌게진 구멍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엇.”
볼기를 벌려 상태를 보는가 싶더니 혀를 밀어 넣었다. 주위를 샅샅이 적시고 안을 벌린 뒤에는 흡입력을 더해 빨아주었다. 사실 내내 이걸 하고 싶었다. 적신다는 목적조차 잊고 한참을 심취해 있자 조인휘가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입술을 떼자 봉긋한 둔부 사이로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거기서부터 겨우 제대로 된 삽입이 진행되었다.
“…하….”
고정원은 살집 하나 없는 허리를 움켜쥐었다. 천천히 삽입하려 애쓰는 손등으로 정맥이 불거졌다.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팔뚝부터 시작해 모든 혈관이 확장되어 있었다.
들추어 올린 엉덩이에 흉기처럼 부풀어 오른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뻑적지근한 쾌감이 척추부터 두개골을 때리며 허리가 끊임없이 움직였다. 움직이면서 더욱 면적을 부풀린 성기가 끈적한 점막에 감겼다 빠지기를 반복했다.
철썩!
소리가 나도록 힘껏 찍어 내렸다.
“흐윽!”
조인휘가 시트를 움켜쥐는 게 보였다. 고정원의 입에서도 큿, 하고 목 긁는 신음이 터졌다. 뿌리까지 잡아먹으려 드는 안쪽의 흡입력을 느낄 때마다 더 강하게 찧을 생각으로 눈이 벌게졌다. 그대로 폭주하려는 것을 조인휘가 소리치며 겨우 말렸다. 안 할 거라고 소리치는 말에 가까스로 성기를 빼낸 고정원의 위로 조인휘가 올라탔다.
“가만히… 가만히 있어.”
명령받은 고정원은 애꿎은 근육만 부풀렸다. 기다리는 동안 먹이를 앞둔 개처럼 귀두에서 분비물이 흘렀다.
“음….”
더욱 부피가 커진 성기를 어떻게든 삼켜낸 조인휘는 홀로 고군분투했다. 어설프게 앞뒤로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던 고정원이 허리를 붙들어 주며 좀 더 편히 문지를 수 있도록 도왔다. 점점 안이 젖더니 어느새 조인휘는 허리를 뒤로 젖혔다. 성기에서 끈적한 물을 흘리며 훨씬 유연해진 몸짓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찰팍.
엉덩이가 근육으로 조인 단전에 내려앉았다. 그때마다 야릇한 살소리와 더불어 신음이 달게 터졌다. 찧는 게 더 잘 느껴지는지 한참을 들썩거리다 이내 다시 휘저었다.
“아…!”
얼마나 느끼는지 안이 끈적했다. 의식이 살아 있던 표정도 녹을 것처럼 허물어졌다. 상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이 체위를 좋아해서 고집한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좋아?”
“하, 아… 좋, 아 ….”
흥분으로 무너진 얼굴을 보며 고정원은 몸 안에서 불을 지피는 감각을 느꼈다. 뜨거워서 정신이 다 몽롱하게 날아가는 듯했다.
“아흑, 으, 아…!”
어리숙한 남자의 모습은 더 이상 어디에도 없었다. 리듬을 갖고 흔드는 허리짓이나 원하는 곳에 찧고 문지르는 행위, 커다란 걸 뒤에 넣고도 발기해서 물을 흘리는 성기는 능숙한 어른의 것이었다.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것처럼 야한 냄새가 갈수록 진하게 풍겼다.
“아…!”
행위는 너무나도 몸에 익어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익힌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왔다.
“정원, 아, 아…! 정원아…!”
신음이 낮게 튀었다. 흥분이 극에 달한 조인휘가 단단한 어깨를 붙들며 이름을 불러댔다. 그 부름에 고정원은 일일이 몸이 조여드는 걸 느꼈다. 치달으며 고조되는 성감의 한편으로는 과연 부르고 있는 상대가 자신이 맞는지 의심했다. 진지하게 개명에 대한 욕구가 치밀었다.
끌어당겨 입을 맞추며 고정원은 가느다란 손을 제 머리로 이끌었다. 조인휘는 시키는 대로 한 손으로는 고정원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는 고정원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뽑아낼 것처럼 조여대는 점막이 느껴졌다. 머지않은 사정을 예감하고 손을 뻗었다. 제 복부를 끈적하게 때리는 성기를 붙잡았다. 엄지손가락으로 요도구를 빈틈없이 틀어막자 조인휘가 전신을 수축했다.
“으읏!”
입술이 떨어졌다.
“나올 거 같아?”
안을 죄는 압박감을 느끼며 물었다. 목소리는 어느새 잠겨 있었다.
“으으, 응…, 나, 와…!”
조인휘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듯 보였다.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며 목까지 벌겋게 물들였다. 고정원의 손 위로 겹쳐진 손은 절박했지만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둔부만 꼭꼭 조여대고 있었다.
“내 입술 깨물어 봐. 해줄 테니까.”
해결책을 알려주자 조인휘가 입술을 깨물었다. 겉을 살짝 무는 정도였다. ‘더 세게’ 하고 속삭이자 그제야 아픔이 느껴지는 세기로 물었다.
요도구를 짓누른 손가락을 치우며 허리를 거세게 들추어 올렸다. 움직임에 맞추어 손으로 음경을 자극해 주는 것은 덤이었다.
“으아, 아아…!”
분출하며 조인휘가 자지러졌다. 정액뿐 아니라 마른 몸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물이 나오나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의 분출액이 뒤따랐다. 고정원의 손과 상체가 젖고, 시트 또한 흠뻑 젖었다. 그것을 보며 고정원도 지독한 사출을 이어갔다. 싸지른 것들이 조인휘의 배 속을 흠뻑 적셨다.
힘이 다 빠진 조인휘가 뒤로 넘어갔다. 그것을 받쳐주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대로 두 사람의 몸뚱이가 함께 털썩, 무너졌다.
사정감이 계속해서 전신에 들끓고 있었다. 고정원은 등과 허벅지를 뒤덮은 근육들이 단단하게 조이도록 힘을 주고 젖은 몸 안에 몇 번 더 자신을 밀어 넣었다.
“아, 아…!”
“음…!”
취한 느낌 속에서 끝까지 여운을 갈취했다. 기진맥진한 조인휘는 흐물거리는 팔로 악착같이 고정원을 안고 있으려 했고, 그게 싫지 않아 얼마 동안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성기를 빼내고 얼굴을 살피자 조인휘는 여전히 넋이 빠져 있었다. 불과 몇십 분 전까지 알몸인 게 부끄러워 옷을 입고 하겠다던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음부를 드러낸 채 다리를 벌리고도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엉덩이 사이로는 주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정액이 비어져 흐르고 있었다.
“…이젠 안 낯설어?”
부드럽게 물으며 고정원은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받쳐주었다. 풀린 눈을 한 조인휘가 흐느적하게 손을 뻗었다. 몽롱한 얼굴로 고정원의 얼굴, 그리고 그 위로 짧아진 머리카락을 더듬었다.
씻겨 주고 쉬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 더 하면 좋겠지만 벌써 상당히 지쳐 보였고,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있었다. 물론 씻으면서 좀 더 스킨십을 하거나 가벼운 패팅을 이어갈 수도 있었다. 키스는 횟수를 상관하지 않고 양껏 할 생각이었다.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고정원은 등과 다리오금에 손을 넣어 조인휘를 들어 올렸다.
목재 파티션으로 분리되어 있는 파우더룸 바로 옆이 욕실이었다. 지나치기 위해 파우더룸에 발을 들였을 때 고정원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직사각형의 거울 앞에 잠시 멈추어 서서 들고 있던 조인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
환한 조명 아래 두 사람이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밝기가 강한 빛을 받아 낱낱이 드러난 나체가 서로 대비되는 것이 보였다. 새삼 대단한 차였다. 고정원의 팔뚝에 매달린 조인휘 또한 그 차이를 의식한 듯 거울을 보며 몸을 움츠렸다. 응시하는 고정원의 시선을 피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수치심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뭐 해… 안 들어가?”
거울을 통해 눈을 맞출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인휘는 굳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고정원은 그런 조인휘를 내려다봤다가 다시 거울을 보았다.
가만히 조인휘의 상반신을 가로지르고 있던 제 팔뚝을 치웠다. 건조하게 마른 손으로 가느다란 옆구리, 그리고 부드러운 선을 띠는 복부를 잇따라 쓰다듬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과 조인휘를 주시하며 매만지는 행동을 이어갔다. 처음으로 포르노에 중독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 해, 간지러….”
클라우드에 남아 있던 영상을 볼 때와는 달랐다.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조인휘의 상대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 달랐다.
“이름을 바꿔 볼까 싶어.”
갑작스런 발언에 조인휘가 놀라서 거울을 보았다. 그곳에서 눈이 마주쳤다.
“…뭐?”
“그냥.”
“…….”
“새로 시작하는 의미로.”
조인휘는 혼란하다 못해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싫어?’ 묻는 고정원의 말에 고민하는 내색을 보이다 이내 끄덕였다.
“왜?”
“…아니, 정원이 넌 정원인데…. 갑자기 다른 이름으로 바꾸겠다고 하니까….”
웅얼웅얼하며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정원이 가만히 숨을 삼켰다.
‘…아니야, 넌 정원이 아니야… 넌 아니야….’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하던 장면이 겹쳐지며 기분이 형용할 수 없이 묘해졌다. 그때는 아니라 해놓고, 지금은 또 맞다고 한다. 부정이 긍정으로 변했지만 유쾌한 변화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쾌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야릇한 불쾌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앞에 봐.”
거울을 향해 조인휘의 턱을 가볍게 받쳐 들었다.
“너는 나 보고 있어.”
“…….”
“나는 너 볼 테니까.”
말하며 부피감을 갖기 시작한 성기를 등 뒤로 문질렀다. 턱 주변을 입술로 애무하자 조인휘가 눈길을 피했다. 나 안 할래…. 소심하게 중얼거리며 벗어나려 했다.
“머리를 더 짧게 자를까.”
“…갑자기 무슨….”
“어떨 것 같아, 저기서 더 짧아지는 건.”
거울을 통해 지그시 주시하며 물었다. 대답이 나오지 않는 사이 늘어져 있는 조인휘의 성기를 만지작거렸다.
“아, 그만 좀….”
“털이 엷어.”
교묘하게 옮긴 손으로 가지런한 음모를 쓰다듬었다.
“…엉덩이도 그렇고.”
“뭐…?”
“그래서 빨기 좋아. 부드러워.”
조인휘가 거울 속 자신을 쏘아보았다. 얼굴에 열이 올라 있었다.
“전에는 이런 말 안 했나 봐, 내가?”
‘전’에 해당되는 시기를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고작 그 정도의 말에 감정이 상한 것처럼 눈을 그렁그렁하게 적시고 있었다.
“혀로 쑤실 때마다 간질거리던데. 털이 간질거리니까.”
웃음기 섞인 품평에 조인휘가 다시금 눈을 들었다. 미친 사람 보듯 흘기는 것이 보였다.
“…진심으로, 좋아서 하는 소리야.”
고정원은 부드럽게 목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애무를 시작했다. 후희이자 전희가 길게 이어졌다.
결국 침대로 이동하여 행위가 후속되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조인휘는 고정원의 부상을 지적했다. 상처가 터지면 안 되니 자기가 올라가겠다고 했다. 누운 고정원에게 올라타 성기를 삼키고는 엎드리는 자세를 취했다.
앞서 거울 앞에서 한 차례 더 사정한 뒤였다. 조인휘는 지쳐 있었고, 고정원은 겨우 진정되어 있었다. 덕분에 보다 느리고 부드러운 삽입이 가능했다. 몰아치지 않고 감각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교감은 더욱 짙어졌다.
고정원이 멈추면 조인휘가 움직였다. 그러면 고정원은 만족스럽게 엉덩이를 주무르며 귀와 뺨을 애무했다. 조인휘가 고개를 똑바로 하자 입술끼리 맞닿으며 뽀뽀하는 소리가 났다.
“흣, 쪽, 흡…!”
조인휘의 입에서 중간중간 짜증 섞인 신음이 터졌다. 고정원은 아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문지르는 움직임이 반복될수록 그랬다. 안이 들러붙으며 젖고 있었고, 분을 삭이는 듯한 신음이 자꾸 터지고 있었다. 흥분에 못 이겨 허리를 마구 움직이면서도 스스로를 짜증스러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가 그렇게 억울해.”
고정원이 물었다. 입술을 뗀 조인휘가 마찬가지로 짜증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품에 안기며 시근거렸다.
“음, 으….”
흥분이 고조된 듯했다. 조인휘의 허리가 무절제하게 이리저리 튀어댔다. 일어나 앉으려 하기에 고정원이 붙들었다. 교차시킨 팔로 꽉 끌어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젖은 두피에 입술을 문지르며 슬슬 움직여 주기 시작했다.
“아흣, 흣, 흣….”
손톱이 어깨에 박혔다. 움직임이 거세지자 벼랑에 매달린 것처럼 신음했다. 고정원은 양 무릎을 세웠다. 조그만 엉덩이를 움켜쥐고 세게 쳐올렸다. 철퍽, 메우고 나서는 완만하게 문질러 강약을 조절했다. 입술은 예민한 귓가에 가져다 붙였다.
“…그때 왜 나한테 말 시켰어.”
“으…?”
조인휘는 흔들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말귀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스파이더맨 키홀더…, 찾아달라고 나한테 말 걸었잖아.”
“아, 흐으….”
움직이며 호흡이 거칠게 흐트러졌다.
“내가 마음에 들었어?”
내키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헛소리인 줄 알면서도 흥분해서 어떻게 된 상태였다.
“그때… 나랑 계속 눈 마주치는 거 너 알았어?”
말하며 고정원은 허리를 들었다. 깊은 곳으로 자신을 푹, 쑤셔 박았다.
“응? 인휘야….”
좋아서 미칠 거 같아. 속삭이면서 움직임을 늦추었다. 한 손으로 엉덩이를 잡고 느리고 얕은 드나듦을 반복했다. 남은 손으로는 조인휘의 등과 허벅지, 부드러운 몸 곳곳을 배회했다. 흥분한 손길이 무언가를 덧바르는 것처럼 끈질기게 오갔다.
“처음부터 이럴걸. 응?”
“으….”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다고.”
“아음…! 흐음…!”
정신없이 느끼느라 조인휘는 울기만 했다. 확 치미는 흥분을 느끼며 고정원은 자세를 전복시켰다. 경황이 없어진 조인휘는 위로 가겠다느니 고집부리는 일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다. 오히려 벌린 다리를 교차시켜 고정원을 더 가까이 조였다.
흥분한 숨이 거칠게 긁혔다. 고정원은 하고 싶었던 대로 체중으로 짓눌렀다. 육체끼리 부대끼도록 묵직하게 박았다. 철퍽, 철퍽, 살 부딪는 소리가 울렸다. 젖은 살이 부르르, 떨렸다. 강한 마찰은 공기를 찢는 것처럼 소리가 컸다.
“앗…! 하앗…! 아윽…, 흐윽…!”
울면서 조인휘가 매달렸다. 어느새 다리를 풀었다. 다리로 어떤 의사를 표현하는 것처럼 고정원의 허벅지를 탁탁 때렸다. 더 빨리, 더 세게 해달라는 보챔의 의미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깨물어. 싸게 해 줄 테니까.”
얼굴을 밀착시킨 고정원이 말했다. 헐떡대던 조인휘는 용케 알아듣고 곧장 입술을 맞댔다. 아랫입술을 콱, 세게 깨물었다. 그걸 기점으로 고정원의 허리가 힘차게 움직였다.
드나드는 왕복이 점점 격렬해졌다. 침대 전체가 뒤흔들렸다. 육중한 무게를 실은 피스톤 운동에 맞추어 조인휘가 목청을 높였다.
“아으…! 아으…! 아…!”
붕대를 감은 팔에 통증이 일었다. 전신에 몰아치는 쾌감이 그 위를 덮었다. 울부짖는 조인휘를 부둥켜안았다. 몰아붙이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강하게 뭉개고 격렬하게 찧을수록 환희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쾌감의 극치를 향해 달렸다.
곧, 전신으로 벼락같이 극렬한 쾌락이 들이닥쳤다. 넓은 등이 거센 자극에 떠밀리듯 한 차례 크게 들썩였다. 목구멍이 좁아지고, 그 틈으로 고통에 가까운 신음이 터졌다.
“아…!”
온몸이 뒤집히는 감각이 지나치게 강렬했다. 전부 토해 낸 고정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고개를 숙이자 입에서 침이 흘렀다. 정액처럼 늘어진 그것은 끈적한 선을 그리며 조인휘의 목덜미로 떨어졌다.
“하아…, 하….”
고정원은 젖은 입술로 헐떡였다. 아직까지 뒷덜미로 아찔한 소름이 오갔다. 조인휘 또한 아직까지 아래를 수축하며 경련하고 있었다. 턱을 뒤로 젖힌 채 이마에서 목까지 핏대를 세운 모습만으로 극단에 치달은 쾌감을 짐작게 했다.
꾸준히 몰아치는 파도처럼 만족감이 계속해서 들이치고 있었다. 헐떡이며 감상하던 고정원이 자세를 낮추었다. 조인휘의 턱과 뺨, 귓전에 제 얼굴을 짓뭉개며 애무했다. 입술끼리, 코끝끼리 문질렀다.
“사랑해.”
행위 내내 목구멍을 옥죄던 말을 내뱉었다. 내뱉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
쾌감에 잠긴 조인휘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눈이 마주쳐도 끔뻑끔뻑 혼몽해 보일 뿐, 비슷한 말조차 되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사랑해.”
“…….”
“사랑해, 인휘야….”
속삭일수록 애닳는 기분을 느꼈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갔는지 눈자위가 시큰거렸다. 고조된 기분을 다스리며 고정원은 말 없는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느껴지는 숨결이 들뜨고 날뛰는 심신을 안정시키는 듯했다.
삽입은 그 뒤로 몇 번 더 반복됐다. 침대뿐 아니라 바닥에서도 했다. 삽입 내내 다양한 체위를 시도했지만 사정은 입술을 깨무는 행위 뒤에만 허용했다. 마지막에 조인휘는 제대로 된 정액을 내뱉지 못해 그저 히뜩히뜩 허리만 젖히며 절정을 느꼈다.
“싫…어, 이제….”
조인휘는 부드럽게 안아주려는 손길을 거부했다. 울면서 엎드렸다.
“응, 이제 그만. 절대 안 해, 절대로….”
고정원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처럼 저자세로 조인휘를 달랬다. 실제로 바짝 말라 우는 꼴을 보니 애틋하고 가엾게 느껴져서 속이 탔다.
“물 줄까, 응?”
끄덕이는 조인휘를 품에 안았다. 물을 먹인 뒤에는 또 뭘 해줄지 필요한 게 있는지 물었지만 조인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고 싶다고만 했다.
뒤치다꺼리가 이어졌다. 시트를 갈아주고, 몸을 닦아주고, 깊숙한 곳에 지저분하게 뭉친 정액을 닦아주었다. 보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나자 ‘목말라…’ 중얼거리기에 이온음료를 가져와 먹였다.
숙면을 위해 간접 조명마저 없앴다. 암막 커튼으로 새까매진 방 안에서 고정원은 가만히 서 있다가 잠든 애인의 옆으로 앉았다.
“더…워….”
조인휘는 이불을 걷어 내고 있었다. 바로 얇은 이불로 교체를 해주고 나서 안색을 살폈다. 이마를 짚어 보니 몸에서 열이 나는 듯하여 그 길로 지체할 것 없이 차를 몰고 나가 근처 약국에서 해열제를 사 왔다.
“잠깐만 일어나 봐. 인휘야, 약 먹고 자.”
조용히 말하자 웅크리며 싫어했다. 자꾸 깨운다며 칭얼거리는 조인휘의 비위를 맞춰가며 입에서 입으로 약을 먹이는 것에 겨우 성공했다.
조인휘는 30분 뒤에 깊이 잠들었다. 그동안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씻지 못한 자신의 몸에는 여전히 두 사람분의 체액이 묻어 있지만 조금도 찝찝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옷을 벗고 다시 나신으로 침대에 올랐다.
“…….”
몇 시간에 걸쳐 뜬눈으로 잠든 얼굴만 보았다. 동이 터 올 즈음에야 고정원은 침대를 벗어나 조용히 방을 나섰다.
거실의 베란다로 나가자 바람이 제법 찼다. 드로즈 위에 대충 후드티만 걸치고 나온 고정원은 새벽바람을 맞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행위가 끝난 뒤부터 두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는 관자놀이를 찌르는 통증으로 인해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고역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두통보다 불쾌한 것은 형체 없는 불안감에 정신적으로 휩쓸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극도의 불안감이 수면을 방해했고, 그 탓에 지독한 피로감이 뒤따랐다. 그 피로가 다시 불안감을 부추기는 악순환이었다.
짧아진 담배를 끄고 이어서 새로운 것을 꺼내 피웠다. 어느 순간 고정원은 눈을 감는 동시에 입술에서 담배를 빼냈다. 손가락 사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원인 모를 이러한 불쾌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건가. 만족스럽게 섹스한 뒤였고, 원하던 것들이 전부 수중에 있었다. 불안감을 느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므로 생각이 연기처럼 모호하게 번졌다.
어쩌면 이전의 경험에서 비롯된 불안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잠들면 조인휘가 일어나서 누군가를 찾을 것만 같은, 그날 새벽처럼, 몰래 손을 붙들고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불러댈 것만 같은 불안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지도 몰랐다.
고정원은 사그라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양새로 웃었다. 느슨하게 필터를 물고 뱉어 낸 연기가 공중으로 형체 없이 사라져 갔다. 이 지경으로 몸을 섞고 나서도 이러한 생각들로부터 헤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기억 안 돌아와도 돼.’
‘그냥…. 지금 그대로여도 돼.’
다른 무엇이 아닌 그 말이 제게는 현실이었다. 필요한 만큼 몇 번이고 조인휘가 했던 말과 안아주던 감촉을 떠올렸다. 가까스로 신경증을 진정시킨 고정원은 연달아 태우던 담배를 갈무리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질러진 건 딱히 없었지만 정리를 했다. 하나하나 만지고, 제자리에 배치하며 조인휘와 지내게 될 공간을 재정비했다. 조인휘가 개인 서재로 쓸 방은 불을 밝히고 들어가 더 필요한 게 없는지 살펴보고 하나씩 점검하며 더욱 신경을 썼다.
정리를 마친 후에는 안방으로 돌아왔다. 조인휘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잠든 얼굴을 보고 서 있던 고정원이 이불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손을 집어 들었다. 길고 매끈한 손가락은 야무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매만지다 이불 속으로 넣어주고 자신도 옆으로 누웠다.
암막 커튼 덕분에 방 안은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꿈을 꾸는지 조인휘가 뒤척이면서 시야에는 뒤통수와 등만 보이게 되었다. 육중한 무게로 들썩이며 보다 가깝게 다가간 고정원은 감싸듯이 마른 몸 뒤로 제 몸을 겹쳤다.
입술이 부드럽게 올라가며 소리 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이내 끊어지듯 뚝 멎었다. 그런 행동이 정신병처럼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
지금까지 세 번. 조인휘와 맺은 관계의 횟수였다. 고작 그 세 번의 관계에 한 사람이 제 인생에서 갖는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범위가 전면적으로 달라지게 되었다.
오늘에서야 지난 삼 년이 완벽하게 이해되었다. 그 정상적이지 않은 모든 행적들이 지금에 와서 보면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우습게도 쌍둥이 형제를 둔 것처럼 기억에 없는 지난 삼 년 동안의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어찌 되었든 상관없다. 이제는 자신의 것이었다. 그 그림자를 지우는 게 앞으로 자신이 할 일 중 하나였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몰랐다.
눈앞에 있는 목덜미로 다가가 코를 짓눌렀다. 안락한 체취가 구원처럼 밀려들었다. 지독하던 두통이 나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고정원은 눈을 감았다. 그제야 고단하게 지탱되고 있던 온몸의 근육이 느슨하게 이완되었다.
긴 꿈을 꾸었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흰 천장이 보였다.
“…….”
위화감, 그와 동시에 묘하게 맑아진 머리를 느꼈다. 상체를 일으킨 고정원은 습관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손바닥에 감기는 감촉이 상당히 낯설어 동작이 멈추었고 반사적으로 왼편을 내려다보았다. 느껴지는 압박감은 상완에 감겨 있는 붕대 탓이었다.
시선이 내부를 한 바퀴 돌았다. 마찬가지로 위화감이 강했다. 의아한 상태로 장소를 파악하기 위해 침대에서부터 내려왔다. 대충 눈에 보이는 옷가지들을 주워 입었다.
홀린 것처럼 방문을 열고 나가자 빛이 쏟아졌다. 햇볕을 정면으로 받으며 고정원은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그저 긴 다리로 성큼 걸어 거실의 중앙에 섰다.
“…조인휘.”
눈을 뜬 직후부터 찾고 있었다.
“…인휘야.”
불렀지만 기척은 잠잠했다. 계속해서 이름을 부르며 내부 전체를 둘러보았다. 모조리 둘러보고 나서야 이곳에 저 홀로 남아 있음을 확신했다.
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익숙한 듯 불쾌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긴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억하고 있는 어제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려 애썼으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거실을 한 번 더 훑은 고정원은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휴대폰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난감했다. 혹시나 하여 집 안에 있는 유일한 기기인 침대 옆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인식부에 손가락을 올리자 지문이 통과되며 화면이 열렸다. 제 것이 분명한 기기는 그러나 기종이 바뀌어 있었다.
“…….”
화면으로 시간과 날짜가 표시되었다. 늦은 오후를 가리키는 시간도 예상 밖이었지만 그보다 날짜에 눈길이 머물렀다. 날짜가 긴 생각에 잠기게 할 만큼 위화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곧장 불어 들어 피부를 스치는 바람이 차가웠다. 내려다보이는 거리의 계절, 지나치는 사람들의 옷차림에 시선이 머물렀다. 모든 게 위화감투성이였다.
고정원은 재차 휴대폰을 체크했다. 메시지, 통화 내역, 메신저 등. 급하게 조인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이 이어지는 사이 자신이 먼저 끊었다.
제 몸의, 무엇보다 뇌의 이상을 확신하고 밖으로 향했다. 당장 병원으로 가서 검사부터 받아볼 생각이었다. 빠르고 큰 보폭으로 거실을 지나치던 고정원은 그러나 우뚝 멈추어 섰다. 지나치려던 식탁 위로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푹 자길래 안 깨우고 나간당.
아 그리고 된장찌개 좀 해봤는데…
간이 좀 짜게 됨 ㅠ 쏘리
너무 짜면 물 좀 넣어서 먹어.
밥 먹으면 약 꼭 챙겨 먹고
난 일 좀 보고 부모님 댁에 들렀다 올게.
일어나면 연락 줘.
메모지의 글씨체는 조인휘의 것이었다. 적힌 내용대로, 인덕션 위에는 된장찌개로 예상되는 냄비가 보였다.
“…….”
메모지를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글자를 해독하는 것처럼 보고 또 봤다. 그러다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거실에서 이어지는 베란다였다.
강렬한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곳으로 걸어갔다. 잠금장치를 열고 창문을 열어젖힌 고정원은 난간 옆으로 놓인 재떨이 하나를 발견했다. 예정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여 집어 들었다. 재떨이 안에는 세 대의 꽁초가 짧게 구겨져 있었고, 그것이 예전에 자신이 피우던 브랜드의 담배라는 것을 알았다.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닌 응시는 계속되었다. 떨어뜨리려 해도 도무지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온전한 제 의지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선 채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한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던 고정원이 하, 숨을 뱉었다.
“하….”
한 번 더 뱉었다.
짧아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고통스럽게 질끈 감긴 눈이 쉽게 뜨이지 못했다. 감각을 억누르는 오장육부로 극심한 통증이 스몄다. 결국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감각에 집어삼켜진 뒤였다. 팔의 근육이 부풀며 고정원은 손에 움켜쥐고 있던 것을 최대치의 힘으로 내던졌다.
콰장창!
거대한 소음이 빈집을 울렸다. 깨진 재떨이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거실은 순식간에 처참한 꼴이 되었다.
죽여야 할 상대는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고정원은 그대로 엉망이 된 공간을 지나쳤다.
뛰쳐나온 밖에서 찬 공기를 들이켜며 성큼성큼 걸었다. 빠른 걸음으로 골목에서 대로변으로 들어설 즈음 손에 든 휴대폰이 울렸다. 눈앞으로 가져오자 화면에 뜬 이름 석 자가 보였다. 저장명은 너무도 익숙한 동시에 낯설었다.
“…….”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융기된 목울대가 가만히 울렸다. 꽉 틀어막힌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정원아. 너 이제 일어났어? 미안, 나 딴 거 하느라 폰 지금 봤어.
들려오는 목소리로 온 신경이 쏠리다 못해 쏟아질 듯했다. 목소리는 피부에 닿는 찬 공기와 더불어 유난히 청량하게 들렸다. 구역감이 생길 정도로 집중해서 듣고 있던 고정원은 간신히 한마디를 토했다.
“…어디야.”
-어, 나? 나 지금 부모님 댁 나와서 어제 그, 니네 집 가고 있는 중인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길을 돌렸다. 사거리의 횡단보도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집에서 여기로 오기까지 어떤 길을 통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너 지금 밖이야?
묻는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묵묵히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횡단보도가 나타났다.
-여보세요? 정원아. 야아, 너 내 말 안 들려? 왜 대답이 없어.
홀로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사람들과 나란히 횡단보도의 맞은편에 서 있는 조인휘가.
“…들려.”
대답한 고정원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뭐야, 지금 밖에 나온 거야?
그렇게 찾던 상대가 불과 몇 미터 앞에 있다.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작게 흔들리는 고갯짓 하나 놓치지 않았다.
-엥? 뭐야….
바람이 뺨을 스쳤다.
-…저거 너 맞아?
이제야 눈이 맞았다. 조인휘는 얼떨떨함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이쪽을 발견한 직후부터 팔다리가 응고된 것처럼 굳었다. 고정원은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서서 그새 더 마르고 작아진 제 애인을 마주 보았다.
-…뭐야.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는 게 보였다. 그 안의 눈동자가 무르게 흔들렸다. 다른 곳을 향했다가도 금세 이쪽으로 돌아오고 마는 혼란함이 다 보였다.
-…정원아.
“…….”
부르는 목소리가 달라졌다. 알면서 고정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맞은편에 서 있는 조인휘를 한시라도 놓칠세라 바라볼 뿐이었다. 눈자위가 욱신거렸다.
-야… 고정원, 너 지금….
기어이 말이 떨리고 뭉개진다. 울먹임이 새어 나오는 동시에 신호등의 불이 바뀌었다. 마주하고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반대편으로 걸어 나갔다. 거기서 단 한 사람만이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으려 하고 있었다.
무너지는 가슴으로 숨을 삼켰다. 고정원은 건너편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