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7/30)

2.

늦은 밤, 미리 알아둔 학교 근처의 고시원으로 입실했다.

배정된 방으로 들어서며 느낀 첫인상은 ‘생각보다 청결하다’는 것이었다. 좁은 건 예상대로였지만 다행히 청결도가 만족스러웠다.

입실 후에는 가장 먼저 청소부터 했다. 물티슈로 바닥을 닦아 낸 조인휘는 책상이나 선반 같은 개인 시설도 꼼꼼히 닦았다. 관리자가 청소한 티는 났지만 청결할수록 좋은 법이었다.

청소 후 땀으로 젖은 전신을 씻고 나오자 긴 한숨이 터졌다. 안도인지 불안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한숨이었다. 풀썩, 침대에 주저앉은 조인휘는 비어 있는 책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전 사람은 얼마나 머무르다 갔으려나. 불쑥 든 궁금증은 곧 자신은 이곳에 얼마나 있게 될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

끊어 내듯 생각을 그만두고 긍정적인 사고를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전혀 나쁘지 않았다. 보증금 없이 입주할 수 있다는 메리트 하나로 선택한 것치고 쾌적한 주거공간이었다. 개인 화장실, 냉장고, 에어컨 등 갖춰질 건 다 갖춰진 방을 보니 막연한 긴장과 불안이 가라앉는 듯했다.

일어나서 남은 짐 정리까지 끝내고 나자 자정에 가까운 야심한 시각이었다. 허기진 느낌이 있어도 식욕은 느껴지지 않아 어떡할지 고민하던 조인휘는 일단 방을 나섰다.

공동 시설도 구경할 겸하여 발걸음을 옮긴 곳은 주방이었다. 밥, 김치, 라면. 무료로 제공되는 음식은 세 가지였고, 손에 닿는 대로 컵라면을 선택했다.

수저와 젓가락을 꺼내던 중,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서랍 안쪽에 봉지라면 다른 종류로 몇 개 더 있어요.”

옆으로 다가와 있는 남자는 또래로 보였다.

“…아, 고맙습니다.”

“온 지 얼마 안 됐죠?”

남자가 냄비에 물을 받으며 붙임성 좋게 물었다.

“네. 오늘….”

“왠지, 못 보던 얼굴이더라.”

같이 라면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어 보니 남자는 자신과 같은 학교였다. 사학과에 나이는 한 살 위. 모르는 사람과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잡생각이 드는 것도 싫었기 때문에 성실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끝냈다.

“여기 한 달 전쯤에 사람 죽었던 거 알아요?”

“…그래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서 되물었다.

“40대 아저씬데, 한동안 복도에서 냄새 좀 났었어요. 으….”

몸서리친 남자는 ‘그럼 쉬어요.’ 하는 인사를 끝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왔을 때, 무슨 이유에선지 아까보다 방이 협소하게 느껴졌다. 두 평 남짓한 공간이 주는 압박감 속에서 조인휘는 멍하니 책상 의자에 걸터앉았다.

전공책과 노트북을 꺼내고, 과제를 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놓았다. 하지만 단 한 글자도 입력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간만 흘러갔다. 조인휘는 후우, 눅눅한 숨을 내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도저히 집중이 될 것 같지 않아 결국 백지 상태로 노트북을 닫았다.

사람이 죽었었다니.

그 말을 들은 이후로 기분이 뒤숭숭해졌다. 쾌적하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한순간 차고 습한 냄새를 풍기는 듯했다.

써늘해진 팔뚝을 문지르다 자리를 박찼다. 방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간 조인휘는 무작정 세수를 하고 나왔다.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고 고개를 들자 시야가 흔들리며 현기증이 일었다. 이상하게도 멀쩡하던 방이 갑자기 지나치게 좁은 느낌이 들었다. 벽이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깝게 다가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헉….”

호흡이 힘든 느낌을 못 참고 뛰쳐나가자 좁은 복도가 길게 이어졌다. 우두커니 선 채로 그 기나긴 통로를 바라보았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나서야 조인휘는 팔다리를 무력하게 늘어뜨린 채 방으로 돌아왔다.

‘갈 곳은 있어?’

묻던 얼굴.

‘받는다고 고마운 기분이 드는 것도 아니라서.’

말하던 목소리.

오피스텔을 나오기 전 마주했던 고정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빛, 말투, 심지어 체취까지 모든 것이 다른 사람 같았다. 아니 이제는 다른 사람이라고 보아야 했다.

“후….”

체한 것처럼 속이 갑갑했다. 인위적으로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다 책상 앞에 앉았다.

“빨리 와… 정원아, 빨리 와.”

양 손바닥에 눈을 파묻고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텔레파시 보내듯 되풀이하다 고개를 든 후에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재생시켰다.

‘우리 관계 정리하자는 말이야.’

‘우리가 연애하는 게 정상은 아니잖아.’

“…….”

넋을 빼고 앉아 있던 조인휘는 점점 숨통이 좁아지는 것을 느꼈다. 더듬더듬, 발치에 있는 가방을 뒤적여 꺼낸 것은 커다란 사이즈의 홈웨어였다. 꺼내자마자 조인휘는 그곳에 얼굴을 박고 숨을 들이켰다. 산소를 공급받듯, 옷에 밴 애인의 체취를 맡았다.

도둑질이란 것은 알았다. 알면서도 고정원의 옷을 몰래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사고 당일 벗고 나갔던 옷이라 체취가 가장 진하게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냄새를 맡으며 시큰하게 눈물이 고였다. 옷에 남은 체취는 그날 이후로 하루가 다르게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 냄새마저 곧 사라진다고 생각하자 끔찍한 두려움과 두통이 찾아들었다.

“끄….”

차라리 나도 기억을 잃어버리면 좋을 텐데.

생각하자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든 조인휘는 이마를 책상 끄트머리로 가져다 박았다. 커다란 소리가 울리고 이마에서부터 뒤통수까지 진동이 번졌다. 어쩐지 두통이 나아지는 걸 느끼며 한 번 더 머리를 돌진시켰다.

쾅!

쾅!

쾅!

연달아 내려치고 얼마쯤 뒤였다. 똑똑똑똑. 신경질적인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닫혀 있던 목구멍에서 헉, 하고 마른 숨이 넘어갔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며 처박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문을 힘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허둥거리던 조인휘가 다가가 문을 열었다.

“아니 뭐 하는데 자꾸 쾅쾅….”

목청을 높이던 남자의 기세가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상대의 시선은 눈이 아닌 조금 위를 향해 있었다. 빨개졌겠지 싶어 이마를 가린 조인휘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조용히 할게요.”

“…어, 예. 좀 조용히 좀 합시다, 같이 사는 덴데.”

“죄송합니다….”

조아리는 사과를 끝으로 탁, 문이 닫혔다. 바깥과 차단되면서 별안간 익숙한 정적이 깔렸다. 육중하고 컴컴한 정적. 갑자기 속이 부대끼다 못해 뒤집히는 걸 느낀 조인휘가 화장실로 향했다. 웩, 게워 내는 소리와 함께 조금 전 먹었던 것들이 쏟아졌다.

“욱…, 켁….”

옆방에 들릴까 봐 최대한 소리를 참았다. 전부 비워 내고 나서는 일어나서 양치질을 했다.

한 차례 더 세수를 하다가 통증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거울을 보자 충돌했던 이마의 부어오른 면적이 꽤나 컸다. 엉망인 꼴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너무 감정적이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자해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아….”

조심스레 만져보자 따끔거렸다. 어떻게 처치할 길이 없어 그대로 화장실을 나온 조인휘는 사지가 쭉 늘어지는 것을 느끼며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무릎이 가슴에 닿도록 웅크리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이게 정상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이게 맞는 거고…. 이제 겨우 제자리로 돌아온 거야.’

목소리가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그건 고정원이 아니라고 납득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상처받지 않아도 되고 상처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 사람은 제가 알던 고정원이 아니고 자신과는 남과 다름없는 사이일 뿐이었다. 게다가 큰 사고를 겪고 예민해진, 자신보다 훨씬 배려받아야 할 환자였다.

이해하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헤어지는 것도 사실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테고, 어차피 모든 것은 고정원이 돌아오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으니 자신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정리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걸 느꼈다. 솔직히 지금 상황이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모든 걸 버티게 해주는 믿음이 있었다. 언제가 됐든 결국에는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힘들었지.’

말하며 안아주는 고정원을 상상하다 잠들었다. 새벽녘에 금방 눈이 떠지고 나서는 도저히 다시 잠이 들지 않아 책상 앞에 앉았다.

스탠드의 고적한 불빛만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조인휘는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책상 위에 올려놓은 인형 한 쌍을 만지작거렸다.

토끼와 거북이 인형.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함께 뽑은 것으로 몇 년간 자신들의 방을 지키고 있었다. 덩그러니 두고 나오자니 발이 떨어지지 않아 함께 챙겼는데 그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만진 탓에 인형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확인하듯 매만지는 사이, 어느덧 고시원에서의 첫 아침이 밝고 있었다.

거울 앞에서 볼캡을 눌러썼다. 이마에 난 혹을 가리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사실 고정원의 사고 이후론 매일같이 눌러쓰고 있었다. 울어서 부은 눈 때문에 차마 모자를 벗을 수 없었다.

“…….”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조인휘는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고 있는 옷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가지고 나온 옷은 몇 벌 되지 않았고, 그것마저 후줄근한 것들이었다. 고정원이 선물해 준 고급스러운 옷과 물건들은 차마 가져오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고정원이 기억을 잃고 나니 그것들에 대해 더 이상 소유권을 주장하면 안 될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강의실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남다르게 커다란 등이 시야로 들어왔다. 조인휘는 그 등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오른쪽 끝, 외진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 공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로부터 신경을 차단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넓지 않은 강의실 중앙에서부터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정원의 주변에 앉은 여자 후배들이 내는 소리였다. 고정원이 대꾸하는 말들은 길이도 짧고 소리도 낮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보지 않으려 했지만 어느새 눈으로 쫓고 있었다. 후배의 손이 고정원의 팔을 터치하는 게 유독 확대되어 시야에 들어왔다.

“…….”

정원이 아니니까.

어차피 저건 정원이 아니니까.

되풀이하던 조인휘는 일어나 강의실을 나갔다. 자판기로 가서 물을 뽑아 꿀꺽꿀꺽 넘겼다. 숨도 쉬지 않고 비우고 나서는 볼일도 없는 화장실에 들렀다. 손을 씻고 또 씻고… 나와서도 바로 들어가지 않고 강의실 문밖을 서성거렸다. 아슬아슬해질 때까지 시간을 끌다가 더는 버틸 수 없을 때가 돼서야 안으로 들어섰다.

발을 내딛기 무섭게 나오던 사람과 부딪쳤다. 체격 차로 인해 충돌한 순간 넘어갈 뻔했으나 상대가 붙들어 준 덕분에 사고를 면했다. 고개를 들자 서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완벽한 외형의 남자가 보였다.

“…….”

하필이면 가장 피하고 싶은 인물이었다. 미안하다거나 고맙다거나 인사치레를 할 겨를도 없이 잡힌 팔을 빼낸 조인휘는 서둘러 피했다. 혼비백산하여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자 심장이 불쾌하게 두근거렸다. 나가지 말고 가만히 있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수업이 끝난 뒤에는 고정원의 움직임을 살폈다. 쉬는 시간 때처럼 우연히라도 마주치는 것을 피해야 했다.

금방 일어날 기색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빨리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은 조인휘는 사람들이 몰린 입구를 비집고 들어섰다.

하지만 그런 부산을 떤 게 무의미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스치던 사람과 이어폰의 줄이 얽히는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1차적으로 뒤에서 툭, 어깨가 밀리며 귀에서 이어폰이 빠졌고, 2차적으로 옆 사람의 이어폰 줄에 감기면서 매듭이 생겨나 버렸다.

조인휘는 멈추어 서서 크게 당황했다. 뒤에서 나오려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떠밀렸다. 줄이 꼬인 탓에 상대방과는 밀착한 상태였고, 밀리는 대로 자신 또한 상대를 가슴팍으로 밀게 되며 한층 민폐를 끼쳤다. 결국 붙은 채로 나와 함께 입구 옆으로 비껴 섰다.

“죄송합니다.”

신음하듯 사과하며 줄을 풀었다. 어서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에 손놀림이 바빴다. 매듭은 만지면 만질수록 어째 이상하게 엉키는 느낌이었다.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대뜸 얼굴로 손이 다가와 고개를 젖히자 남자가 웃었다. 다가온 손은 조인휘의 왼쪽 귀에 꽂혀 있던 남은 이어폰을 빼내어 갔다. 남자는 마찬가지로 자기 귀에 꽂혀 있던 이어폰 또한 빼내며 이후로는 손쉽게 엉킨 매듭을 풀었다. 귀에 꽂은 채로 딱 달라붙어 해결하려 했던 자신의 멍청함을 깨달은 조인휘가 얼굴을 붉혔다.

“이러니까 다들 블루투스 쓰죠.”

남자가 풀어진 이어폰을 건네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 자신도 블루투스형 이어폰이 있었지만 그것 또한 고정원에게 받은 거라 오피스텔에 두고 나온 사정이었다.

미안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까딱 숙인 남자는 반대편을 향해 걸어갔다.

홀로 남겨지자 조인휘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쓸었다. 서둘렀던 것이 무색하게 주변은 썰물이 빠져나간 것처럼 한산해져 있었다.

이동하기 위해 발길을 돌린 순간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통로 한쪽에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

융기된 눈썹뼈 아래로 눈두덩이 깊게 들어간 서구적인 얼굴형이 보였다. 눈썹과 눈이 가까이 붙어 있는 데다 눈에 음영이 잘 드리워지는 탓에 고정원은 무표정할 때면 쉽게 화난 것처럼 보이곤 했다.

지금도 응시하는 표정이 꼭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놀라서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서 있자 곧 시선이 거두어졌다.

처음부터 보고 있던 건지, 아니면 우연히 마주친 것인지 알 길이 없었으나 곧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움켜쥔 조인휘는 수업 중간에 부딪쳤을 때와 같이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거리가 벌어지며 점점 다리에 힘이 빠졌고, 종국에는 너털거리는 발걸음으로 걸었다.

들른 곳은 편의점이었다. 먹고 싶지 않아도 점심이었기 때문에 김밥과 음료수로 빈속을 채웠다. 식후에는 볕이 잘 드는 곳에서 휴식을 취하다 다음 강의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강의실 앞에서 조인휘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번에도 겹치는 수업이라 아까처럼 마주치는 상황이 벌어질까 우려되었던 까닭이었다.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재차 마음의 중심을 다잡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 얕은 한숨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전방만을 보며 걸어 들어간 조인휘는 비어 있는 앞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으로 과제를 하던 중 누군가 옆으로 앉았다. 좋은 냄새가 나서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몸의 잔털들이 곤두섰다. 옆자리에는 눈을 내리깐 고정원이 노트북을 꺼내고 있었다.

“…….”

대체 왜?

의문밖에 들지 않았다. 티 나지 않게 살짝 돌아보자 강의실 뒤편으로 빈자리들이 속속 눈에 띄었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덤덤하게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던 일에만 열중했고, 교수님이 들어오며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도 화면에만 시선을 박았다.

그런 부자유함이 수업의 종반까지 이어졌다. 목이 뻣뻣한 것을 느끼며 언제 끝나는지에만 집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교수님의 마지막 말이 막혀 있던 귀를 뚫고 들어왔다.

“…2인 1조, 지금 앉은 대로 옆 사람하고 짜면 됩니다.”

이끌리듯 고개를 들었다. 팀플에 관한 설명이라는 게 확실했지만 제대로 듣지도 못했을뿐더러 마지막 말에는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옆 사람과 조를 짜라니. 암담해져서 굳어 있자 바로 옆에서 평이한 어조가 들려왔다.

“주제는 당장 생각나는 게 몇 개 있긴 한데…. 자세한 건 수업 끝나고 카페에서 얘기하는 걸로 할까?”

무척이나 태연하게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의 감정적 동요도 없이 두껍기만 한 낯을 보며 조인휘는 목구멍에 힘이 서렸다. 그리고 새삼스레 깨달았다. 고정원에게는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조인휘는 상대와 같은 온도로 덤덤하게 답했다.

자리를 정리하며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과 동기일 뿐이라고 곱씹자 술렁이던 가슴이 진정되며 정말로 그렇게밖엔 여겨지지 않았다.

* * *

일찍 도착한 카페의 내부는 예상외로 붐비고 있었다. 정문 근처라는 이유로 가볍게 잡은 장소였지만 조용한 곳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 생각하며 고정원은 자리에 앉았다.

약속한 시간에서 3분쯤 경과했을 때 조인휘가 나타났다.

“늦어서 미안.”

고작 3분 늦은 것으로 사과하는 얼굴에는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불안정한 호흡,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보아 여기까지 뛰어온 모양이었다.

“…내가 좀 일찍 왔어.”

고정원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후우, 숨을 내쉰 조인휘가 맞은편으로 앉았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어 놓고는 커피를 시키겠다며 일어섰다.

“밥 먹었어?”

질문을 던지는 고정원의 시선은 상대를 향해 있지 않았다. 조인휘를 보고 있는 것은 맞지만, 정확히는 얼굴이 아니라 팔뚝을 보고 있었다.

“…어, 대충 먹고 왔지.”

꾸물거리는가 싶던 조인휘가 마지못한 투로 물었다.

“…너는?”

고정원이 눈을 들어 답했다.

“나는 아직.”

그리고 대화의 간격이 붕 떴다.

조인휘는 제 뒷머리를 매만지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태도였다.

“그럼 어떻게… 밥부터 먹어?”

기다렸다는 듯이 고정원이 답했다.

“그럴까, 그러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조인휘도 자리로 돌아와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

고정원은 눈앞의 깡마른 몸을 쳐다보았다. 눈길은 곧 아까와 같이 앙상해 보이는 팔뚝으로 옮겨 갔다. 소매가 팔오금까지 내려오는 오버사이즈 핏의 상의를 입은 조인휘는 유독 말라 보였다. 옷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체중 감소가 있는지 얼굴도 해쓱한 느낌이었다.

“…왜 그래?”

메마른 목소리가 응시를 방해했다. 노골적으로 보고 있던 눈길을 거둔 고정원이 일어나 웃는 낯을 만들었다.

“아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글쎄. 밥 먹을 줄 알았으면 차라리 학교 안에서 볼 걸 그랬네. 대충 학식 먹으면 되는데.”

고정원이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굳어진 기류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조인휘는 한시라도 빨리 해치워야 할 목적이 생긴 사람처럼 무신경하게 앞서 나갈 뿐이었다.

뒤따르던 고정원이 성큼 거리를 좁혔다. 출입구에 다다르면서 긴 팔로 문을 열어젖혔다. 문고리에 조인휘의 손이 막 닿으려던 참이었다.

저절로 문이 열리자 조인휘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시선을 모른 척 마저 문을 열어 주었다. 상대가 여자일 때나 필요한 매너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무심결에 한 행동에 어떤 의미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왜?”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오히려 민망함을 느낀 듯 조인휘 쪽에서 시선을 떨구었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갈까?”

묻는 말에 조인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얕은 한숨이 함께 들린 듯도 했다.

식사 후 카페로 되돌아왔다. 사람들이 빠지면서 제법 조용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먼저 주문했던 커피 두 잔을 받으러 가면서 고정원은 디저트를 추가로 계산했다.

“…얼마였어? 반 낼게.”

트레이 위를 살피며 조인휘가 지갑을 뒤적거렸다. 식사 때부터 이런 식으로 돈 계산을 철저히 하려고 들었다.

“서비스라고 주시던데.”

툭 내뱉으며 내려놓았다. 아…, 하고 조인휘가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눈을 몇 번 끔뻑거리고는 지갑에서 손을 거두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조각 케이크는 직접 산 것이었고 나머지 스콘과 쿠키들은 서비스 명목으로 받은 것이었다.

“먹어.”

“…어.”

손대지 않을 듯한 분위기라 어쩔 수 없이 먼저 스콘을 베어 한 입 먹었다. 그러자 조인휘도 쿠키부터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일단, 주제에 적합한 기업들은 이렇게 추려 봤는데….”

대화 내용은 당연하게도 전부 과제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며칠 전 주제를 정하고 헤어진 뒤라 진척은 수월했다. 메신저로 자료나 의견 교환이 짧게 짧게 오갔고, 생각보다 훨씬 사무적인 분위기가 유지되는 중이었다.

“방금 보낸 자료 봤어?”

“응. 참고할 만한 거 꽤 있겠다. 근데 여기서….”

조인휘는 제대로 눈을 맞추지 않았다. 카페로 돌아온 뒤부터였다.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중에도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노트북 화면을 보며 타자를 두드리거나 자료를 찾는 일에만 몰두했다. 마주 보고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마주치는 일이 전무한 것은 다분히 고의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

한창 집중하고 있는 조인휘에게 접시를 내밀었다.

“나는 단 건 별로라.”

타자 소리가 뚝 멈추었다. 조인휘는 앞에 놓인 케이크를 쳐다보았다.

“알아.”

뭘 안다는 건가. 의문이 듦과 동시에 그 뜻을 파악한 고정원이 시선을 돌렸다. 먹지 않을 것처럼 무시하던 조인휘는 조금 뒤, 케이크를 건드렸다. 층층이 크림이 발린 얇은 크레페 케이크의 단면을 조심스레 잘라 먹고는 맛있다,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많이 안 달고 맛있는데. 너 진짜 안 먹어?”

반쯤 먹어놓고 묻기에 짧게 대꾸했다.

“너 먹어.”

말하자 그제야 허락이 떨어진 것처럼 빠르게 먹어치우는 모습이었다. 볼캡을 쓴 탓에 눈이 가려지고 코와 입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 입씩 먹을 때마다 가볍게 포크를 무는 입술에 시선이 머물렀다.

“근데 너가 조사한 사례, 빼지 말고 비교용으로 넣어도 좋을 것 같아.”

조인휘가 고개를 들면서 그제야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럼 자원 관리 사례도 비슷한 형식으로 할까.”

시선을 노트북으로 가져오며 고정원이 호응했다. 대꾸가 없음에 이상함을 느끼고 보자 뜻밖에 놀란 표정이 보였다. 눈을 크게 뜬 채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몸짓으로 맞은편 누군가와 인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정원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편을 확인했다.

전공책과 노트북을 펼쳐놓은 테이블에 앉은 한 남자가 보였다. 굉장히 유쾌하다는 듯 웃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낯이 익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누군지 알아차렸다.

“…누구, 아는 사람?”

묻는 말에 조인휘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니, 그냥 저번에 잠깐… 같은 수업 들어서 얼굴만 아는데….”

변명하듯 말하다 말고 미간을 구겼다. 파르르, 아랫입술을 떨고는 최종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노트북만 쳐다보는 모습이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변화에 고정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리에서 한 번 더 뒤돌아보았다.

시야로 들어온 남자는 책을 훑고 있었다. 혼자서 아직도 기분 좋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고개를 들면서 눈이 마주쳤다. 허공에서 잠시 건조한 관찰이 오가고 이내 자신이 먼저 고개를 되돌렸다.

관조하는 시선이 이번에는 조인휘를 향했다. 의도적인 건지 무의식적인 건지, 가만 보면 동성과 묘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 잦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강우와도 그랬고 며칠 전, 뒤에 앉아 있는 저 남자와도 마찬가지였다.

스치는 두 사람의 이어폰 줄이 엉키는 같잖은 상황을 회상했다. 남자에게 바짝 붙어 시시덕거리던 모습까지 떠올린 고정원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왜 그래? 설마 파일 날라갔어?”

헛소리를 하는 조인휘에게 아니, 대꾸한 고정원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곧장 밖을 향했다.

나와서는 앞서 말했던 대로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뱉어 내자 창가에 앉은 조인휘가 보였다. 과제에 몰두하는 옆모습을 보며 몇 번 연기를 뱉어 내다가 입끝을 올려 비식 웃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 조인휘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보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내가 자리를 비울 때까지 기다렸나 보지.

필터를 빨아당기며 가만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남자가 무어라 농담을 했는지 조인휘가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남자는 마찬가지로 웃으며 귀를 가리키는 제스처를 취했다. 몸짓까지 동원하여 말하는 얼굴에서 과하게 들뜬 기색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 즐거운 표정이 남자 둘이 연출할 만한 광경으로 보여지기 힘든 어떤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번호 교환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남자는 곧 자리를 떠났다. 담배를 끝까지 태운 고정원이 다시 카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인휘는 어떠한 내색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나가거나 들어오거나 마치 일행이 아닌 것처럼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별일 없었어?”

조인휘는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어… 통계 자료들 찾아놨어. 지금 정리해서 보낼게.”

무신경한 입술을 쳐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자리에 앉은 고정원은 긴 팔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아이스 음료를 가져다 마셨다. 조인휘의 것이었다. 자기 것이라고 항의하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하나 더 시킬까’ 묻는 말에 조인휘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착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자놀이의 쑤시는 통증과 목의 뻐근함이 느껴졌다. 상당한 강도였기에 등받이로 고개를 젖혔다.

괜찮은지 한마디 정도는 물을 줄 알았던 조인휘는 그러나 아무런 말도 없었다. 조금 뒤 고개를 세운 고정원이 단단하게 뭉쳐 있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넌지시 물었다.

“밤에 잘 자?”

“…뭐?”

화면에서 눈을 뗀 조인휘가 이쪽을 보았다.

“궁금해서. 밤에 잠이 잘 오는지.”

“…….”

시비처럼 들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응시해 오는 눈길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았다.

“…그런 걸… 왜 묻는데 지금.”

나는 너 내 방에서 울던 거 생각하면 잠이 안 오거든. 실제로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참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길래.”

부드러운 선을 그리던 뺨이 일순 굳어졌다. 창백해진 안색은 점점 상기되고, 내리깐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알기 쉬운 동요를 보며 느껴지는 만족감이 스스로도 괴이했다.

“그만 가봐야겠다.”

말한 조인휘가 급하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일이 있어서. 자료는 정리되는 대로 보낼게.”

“같이 나가.”

말하며 뒤따라 자리를 정리했다.

“난 이쪽으로 가면 돼. 가볼게.”

밖으로 나오자마자 조인휘는 돌아섰다. 골목 쪽으로 황급하게 사라지는 뒷모습이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지켜보고 서 있던 고정원은 이내 자리를 벗어났다.

오는 길에는 피트니스 센터에 들렀다. 웨이트 기구 중심으로 근력 운동량을 늘려 고되다 싶을 만큼 시간을 빡빡하게 채웠다. 샤워까지 마치자 뻑적지근하던 통증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귀가해서 간단히 저녁을 먹은 이후로는 과제에 매달렸다. 개인 과제를 하나 끝내고 시계를 보자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등받이로 상체를 젖힌 고정원은 높아져 있는 안압을 느끼며 미간을 짓눌렀다.

‘밤에 잘 자?’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길래.’

했던 말이 떠오르자 신경의 다발이 한꺼번에 조여들었다. 집중할 대상이 사라질 때마다 어김없이 조인휘가 떠올랐다. 찝찝하던 그 마지막 분위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들어 올린 고정원은 메신저를 열어놓고 가만히 정지되었다. 그저 화면 속 ‘조인휘’ 이름 석 자를 들여다보는 게 행동의 전부였다.

오늘 있었던 일들 중 몇 가지가 장면 장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조인휘에게 접근하던 남자의 모습도 그중 하나였다. 여자에게 작업하듯 다가오던 모습이나 불필요하게 호감을 드러내는 표정과 행동 같은 것들은 확실히 비위를 거스르는 구석이 있었다.

남자를 떠올리면서 사고의 흐름이 멋대로 전개되었다. 조인휘와 남자에 대한,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을뿐더러 절대 일어날 리 없는 일이 상상되면서 고정원이 자리를 박찼다.

담뱃갑을 들고 나가려는데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

화면에는 내용 없이 파일명만 떠 있었다. 정리하는 대로 보내겠다더니 정말 자기 전에 정리해서 자료를 보낸 모양이었다. 이어서 조인휘가 보내는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늦게 보내서 미안]

고정원은 담뱃갑 대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대로 방에서 이어지는 테라스로 나오자 낮은 온도로 스치는 바람결이 느껴졌다. 난간의 한편에 자리를 잡고 통화를 시도하자 단조로운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 혹시 파일 잘못됐어?

연결된 즉시 성미 급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아니.”

대답한 고정원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어져야 할 말이 나오지 않으면서 상대가 기다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의미가 불분명한 정적이 이어지고 난 뒤에야 입술이 열렸다.

“…뭐 하고 있어?”

평소보다 한 톤 낮게 깔렸다. 이런 걸 물을 생각은 없었지만 불시에 말이 나왔다.

-…뭐, 과제하고 있지 당연히…. 자료 부탁할 거 있음 그냥 톡으로 말해주면 되는데…. 나 오늘 늦게 잘 거라서.

통화의 용무를 과제로만 국한시키는 태도에 할 말이 없어졌다. 잠시나마 휩쓸렸던 기분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 느꼈다.

“오피스텔에, 네 이름으로 온 택배가 하나 있던데.”

-…아, 그거….

무엇인지 짐작이 되는 눈치였다.

-미안한데 그럼 혹시, 내일 받을 수 있을까?

“알겠어. 가져갈게.”

고맙다는 인사가 들려오며 대화가 형식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걸 끝으로 더는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잘 자.”

차단하듯 통화를 종료시킨 직후였다. 비웃음도 한숨도 아닌 애매한 것이 터져 나왔다. 잠이 잘 오냐고 비꼬듯 물었던 사람이 몇 시간 뒤에 잘 자라는 말을 하는 게 얼마나 우습게 들릴지에 대해 생각했다. 휴대폰이 아니라 담배를 가지고 나왔어야 했다는 후회가 뒤늦게 스쳤다.

“…….”

손에 쥔 기기를 다시 들어 올렸다. 몇 번의 터치로 화면에 뜬 것은 위치 추적 어플이었다.

아이콘으로 간단하게 특정인의 현재 위치가 잡혔다. 어렴풋이 예상했던 대로, 주소지는 학교 근처의 고시원이었다.

약속된 팀플 장소로 향하는 중 누군가 ‘선배’라 부르며 인사를 해 왔다.

“안녕.”

모르는 사람을 향해 고정원은 적당히 인사를 돌려주었다. 기억이 날아간 공백만큼 낯선 얼굴들이 늘어나 있었고, 요령껏 아는 척을 하는 게 근래 일상이었다.

학생회관 건물로 들어서다 멈추어 섰다. 아는 얼굴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옆으로 스쳐 지나가려는 남자에게 고정원이 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돌린 남자가 놀란 얼굴을 했다.

“…아, 어제….”

“카페에서도 봤었죠. 같은 수업 듣는 분이라 인사하고 싶어서요.”

“아아, 깜짝 놀랐네요.”

고정원은 ‘죄송해요. 놀라게 해드렸나 봐요.’ 하고 겉치레를 했다.

“아뇨, 유명한 분이잖아요. 나한테 말 걸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인가 하고.”

낮게 웃은 고정원은 남자와 통성명을 했다. 그리고 소소한 화제를 서두로 대화를 이어갔다.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 끝에 남자가 자신과 같은 학년이지만 두 살 위이며 정외과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다음부터 보면 인사해요.”

웃으며 남자를 떠나보낸 뒤에는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에서 어느새 5분이 지나 있었다.

서둘러 도착한 세미나실의 문을 열자 역시나 조인휘가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널찍한 테이블의 가운데에 앉아 과제에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늦어서 미안.”

사과하는 말에 응, 하는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고정원은 음료와 샌드위치, 어제 부탁받았던 택배 상자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먹고 해.”

말해도 조인휘는 대충 끄덕일 뿐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몰두하는 얼굴은 눈 밑 그늘까지 더해져 어제보다 몇 배로 피곤해 보였다. 한 번 더 권하자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제대로 먹는 게 아니라 대충 구겨 넣고는 우물거리며 타자를 두드렸다.

“…오늘 중으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뭐?”

되묻자 조인휘가 여전히 기계에만 신경을 쏟은 채 말했다.

“보고서는 일단 정리했고… 오늘 다 가능할 거 같아.”

눈 밑이 어둡다 싶더니 새벽까지 한 모양이었다. 기한도 여유 있을뿐더러 각자 맡은 부분만 진행해도 문제없을 과제였다. 갑자기 혼자 폭주해서 끝내려는 걸 보니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적어도 두세 번은 더 만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나직한 물음에 조인휘가 하던 걸 멈추고 눈을 들었다.

“나는 무임승차 같은 거 부탁한 적 없는데.”

덧붙인 말 뒤로 침묵이 깔렸다. 고정원은 멀뚱멀뚱 올려다보는 조인휘에게서 노트북을 빼앗았다.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까 눈이라도 붙여.”

팔을 뻗은 조인휘가 노트북을 사수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잠 안 와. 그냥 같이 해.”

“일단 파일 보내 지금.”

제 귀에도 다소 강압적으로 들리는 명령조였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뭉그적거리던 조인휘가 조금 뒤 파일을 전송했다. 그것을 확인한 고정원은 팔을 뻗어 맞은편의 노트북을 아예 닫아버렸다.

“눈 감고 좀 쉬어.”

“…….”

그리고 그때부터 홀로 작업했다. 조인휘가 정리한 파일들을 훑는 것부터 시작해 정리에 들어갔다.

조용한 공간에 달칵거리는 마우스 소리, 두드리는 타자 소리만 울렸다. 자료를 취합하고 정리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단 한 차례 맞은편을 살피는 일 없이 집중했다.

시간의 흐름에 점차 둔해졌다. 무심코 앞을 보았을 때는 황당하게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표정을 굳힌 고정원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나서야 아래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인휘는 나란히 붙인 의자를 침대 삼아 잠들어 있었다. 불편하지도 않은지 가방을 베고 숙면 중이었다.

곯아떨어진 얼굴을 본 순간 입에서 탄식이 터졌다. 웃음 섞인 한숨을 내뱉은 뒤 다시금 의자에 앉아 과제를 이어갔다. 조인휘가 정리한 보고서를 고치고, PPT를 제작하며 남은 샌드위치를 먹어 치웠다.

몇 시간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신경을 쓸수록 차이가 확연한 결과물인 까닭에 디테일까지 공을 들이면서 밝았던 창밖이 어느덧 어둑해져 있었다.

완성된 PPT의 점검을 끝내고 일어난 고정원은 양팔을 위로 뻗었다. 뻐근하게 굳어진 근육을 늘어뜨리며 창가로 향했다.

창밖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자니 흐릿하게 숨소리가 들려왔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테이블을 경계로 안쪽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영역을 향해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갔다.

“…….”

모로 누워 있던 조인휘는 이제는 정자세로 누워 있었다. 안구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간헐적으로 떨리는 눈꺼풀이 보였다.

깨울 생각은 없었으므로 조용히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숨소리만으로 깊이 잠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찌나 곤한지 애들처럼 색색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자는 거의 벗겨져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 사이로 이마에 난 시퍼런 혹이 보였다. 앞머리를 들추어 확인해 보려 했지만 인상을 찌푸리기에 손을 거두었다.

“응….”

끙끙대며 뒤척인 조인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고정원의 한가한 눈길이 숙면에 빠진 얼굴에서부터 그 아래로 늘어져 있는 몸을 느릿하게 오갔다.

관찰 아닌 관찰은 꽤 오래 이어졌다. 어젯밤 정리를 목적으로 들어간 클라우드에서 확인을 위해 모든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재생시켰던 것처럼.

느닷없이 벌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적으로 손을 들어 조인휘의 얼굴을 덮은 고정원이 뒤돌아보았다.

“…아, 누가 있네. 죄송합니다.”

들어오려던 사람은 뒷걸음질을 치며 나갔다.

“…….”

둑….

둑….

그리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동이 무겁게 울렸다. 느리지만 평소보다 거센 박동을 느끼던 중 손바닥에 간지러운 것이 닿았다.

“음….”

깜빡거리는 속눈썹이 손바닥에 비벼지고 있었다. 작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고정원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구태여 가릴 필요가 있었나. 밖에서 보일 거라는 생각에 무심코 가렸으나 행여 보인다고 해도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조인휘가 더듬거리며 붙든 손을 시야에서 치워 냈다. 상반신을 일으키며 모자가 벗겨진 탓에 머리는 더욱 엉망이 되었다. 풀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조인휘는 바로 앞에 앉은 고정원과 눈을 맞추었다.

“…….”

얼굴에 스르르 웃음이 번졌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술에서 흐, 하고 엷은 소리가 났다. 고정원의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간지러운 감촉이 입술께를 스치면서 어깨는 더욱 경직되었다.

“…뭐냐, 이거.”

상대의 입에서 뿌리까지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방금 제 입술께를 스쳤던 조인휘의 손가락에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아마 샌드위치를 먹을 때 묻었으리라 예상되는 흔적이었다.

“너 뭐 묻히고 먹는 거 처음….”

말을 맺기도 전에 한껏 접혔던 눈매가 되돌아왔다. 웃음기가 사라지면서 경직된 눈초리가 드러났다.

“…미안.”

확 달라진 목소리로 사과한 조인휘가 시선을 피했다. 조금 전의 부드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얼어붙어 버린 안면이 보였다. 그 변화가 어찌나 극단적인지 한순간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벌떡 일어나 모자를 쓰고 주변을 정리하는 몸짓에서 당혹스러워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시계를 한 번 보고 일어난 고정원은 허둥지둥하는 조인휘를 향해 말했다.

“PPT까지 끝냈어. 배고픈데 나.”

짐을 꾸린 조인휘가 앞만 보며 대꾸했다.

“미안, 이제부터 들를 데 있어서….”

정리가 끝난 테이블 위로는 몇 가지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고정원의 노트북과 택배 상자였다.

상자를 집어 든 고정원이 출구로 향하는 상대의 뒤로 바짝 붙었다. 문밖으로 나가려는 조인휘의 팔을 부드럽게 붙들어 세웠다.

“이거 네 거야.”

돌아본 조인휘가 받아 들며 어물쩍 인사했다.

“아… 고마워.”

그러고 나서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

조인휘가 사라지고 난 통로는 순식간에 인적이 끊겼다. 쏜살같이 가버린 탓에 허무한 정적만이 맴돌고 있었다. 낮은 키에 맞추었던 등을 세우며 고정원은 하…, 더운 숨을 터뜨렸다.

긴 드라이브 끝에 집으로 돌아왔다. 허기를 느끼지 못해 저녁은 건너뛰었고, 대신 평소보다 오래 욕조에 몸을 담갔다.

씻은 후에는 공복감이 느껴지는 듯했으나 비스듬히 앉아 있기만 했다. 오늘따라 식사를 챙기는 일이 유독 번거롭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하는 일 없이 그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몸은 늘어지는데 머릿속만은 바쁜, 한가하지만 복잡한 시간이 이어졌다. 하루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일들, 특히 몇 시간 전 일들이 편집증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빈번하게 떠올랐다.

“…….”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입술을 한 번 매만진 고정원은 소리 없이 웃었다. 다른 생각에 잠길 때는 서서히 웃음기가 걷혔다. 그런 식으로 지나간 일들을 음미하다 어느 순간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 향한 곳은 테라스였다. 그곳에서도 의미 없는 행동들이 연속되었다. 홀린 듯 걷다가 벤치에 앉고, 다시 일어나 우두커니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한곳만 지긋하게 응시하던 시선이 위를 향했다. 차가운 빗방울이 어깨로 떨어진 후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고 서 있던 고정원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큰 보폭으로 테라스를 벗어났다.

빠르게 방으로 돌아와 현재의 시간을 확인했다. 그런 다음에는 일말의 지체 없이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휴대폰과 차키를 챙겨 들었다.

머릿속에 설정된 목적지는 다름 아닌 고시원이었다. 트렁크에 보관돼 있는 파란색 우산을 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으로 고정원은 방을 나섰다.

간헐적으로 떨어지던 빗방울은 빗줄기로 변해 추적추적 내렸다. 도착한 고시원 앞, 우산을 접은 고정원은 건물의 유리문을 젖혔다.

잠깐 사이에 머리와 어깨로 빗물이 스며 있었다.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나자 짧게 숨이 터졌다.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연결 화면으로 넘어갔다. 귀에 가져다 대는 고정원의 목울대로 침이 넘어가며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뚜르르르….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연달아 두 차례 더 시도했으나 모두 기계음으로 연결되었다.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단순한 불발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어지기 직전의 분위기와 그때 보여주었던 조인휘의 태도가 ‘고의적인 무시’라는 가능성에 힘을 실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과 피하려 하는 몸짓 같은 게 근거로서 떠올랐다.

“…….”

조명 센서가 작동하지 않는 입구는 어둑했다. 덩달아 짙어진 시선이 계단 위로 이어졌다. 잠시 위층을 올려보던 고정원이 조용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시원은 건물의 3층부터였다. 꼭대기 층이 남자들이 사용하는 층이라는 것은 이미 사전 검색을 통해 파악한 바였다.

4층으로 오른 고정원은 들어서기 전 입구를 살폈다. 유리문에는 도어락과 같은 출입 제한 장치조차 없이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적힌 허술한 안내판이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 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서자 길고 좁은 복도가 이어졌다. 미관상 갑갑한 건 둘째 치더라도 화재에 취약한 구조였다. 골라도 이런 곳을 골랐나 생각하며 한 바퀴 둘러보았다.

미색으로 통일된 내부는 신축인 듯 보였다. 그러나 곳곳에 붙은 경고문 및 안내문들로 인해 묘하게 조잡한 인상을 풍겼다. 실내의 조명은 일부만 불이 들어와 있어 전체적으로 침침했다.

주방 같은 공동 시설은 다수가 사용하기에는 열악해 보였다. 미간을 굳힌 고정원이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설마 샤워 시설도 공용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파악을 대강 끝내고 나서는 출입구 근처로 섰다. 몇 번을 봐도 조악한 공간이었고, 막연했던 내부의 이미지가 구체화되자 혹평밖에는 남지 않았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고 있는 사이 달칵, 문소리가 들렸다. 바닥으로 깔려 있던 고정원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방에서 나온 건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주방 쪽을 향하는 와중에 고정원을 발견하고는 힐끔거리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고정원이 먼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남자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 네.’ 하며 얼떨떨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새로 오신 거예요?”

선 채로 묻는 남자를 향해 고정원이 답했다.

“아뇨. 사실 친구 부탁받고 온 건데….”

목뒤를 매만지며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연락을 안 받아서 지금 좀 난감하네요.”

“왜요? 방에 없어요?”

남자는 외부인 출입 금지라는 규칙을 들이미는 대신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호수를 잊어서. 이 우산 돌려주려고 왔거든요.”

“어… 나 여기 사람들 대강 다 아는데. 여기 대학생은 몇 명 안 돼요. 한대생 맞죠?”

“맞아요. 한국대생.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던데.”

그 말을 들은 남자가 눈을 확장시켰다.

“아아, 누군지 알겠다. 415호 같은데? 그 사람 경영학과 아니에요? 피부 하얗고 눈 크고. 저때 인사하고 같이 밥 먹었거든요.”

“…맞아요. 그 사람.”

고정원이 새삼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한 번 스치면 기억나지 않을 흐릿한 인상이라는 평이 내려졌다.

“덕분에 수고 덜었네요.”

“아뇨, 뭐….”

남자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대화가 이어지기 전에 인사로 끝을 맺은 고정원은 곧장 415호로 향했다.

문 앞에서는 잠자코 서서 뜸을 들였다. 얼굴을 마주하기 직전 해야 할 말들을 한 차례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문득 스치듯 입술 끝으로 비웃음이 걸렸다. 어떻게 찾아왔냐고 묻는 조인휘에게 ‘위치를 추적했다’ 답하는 스스로가 상상되면서였다.

뭐 하러 왔냐고 묻는다면 더욱 할 말이 없다. 우산을 찾아주러 왔다고 답했을 때 조인휘가 지을 얼빠진 표정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똑똑.

손가락등으로 문을 두드렸다. 어떻게 말할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행동이 앞섰다.

“…….”

문 너머로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 번 더 두드려도 기척이 없는 걸로 보아 자고 있거나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잠자리에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므로 외출 중이라는 쪽으로 판단이 기울었다.

세미나실에서 나가기 전 들를 데가 있다던 조인휘의 말이 떠올랐다. 어째서인지 조인휘와 이어폰 줄이 엉켰던 남자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통화는 이번에도 불발이었다. 꺼졌던 화면으로 곧 위치 추적 어플이 실행되었다. 위치를 알리는 스팟 아이콘은 여기서 지하철로 몇 정거장 떨어진 곳에 찍혀 있었다. 그걸 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던 고정원은 뒤늦게 자신이 선 장소를 깨닫고 집어넣었다.

잠시 후 복도의 중간에서 문이 열렸다. 안에서는 반바지 한 장만 걸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보기 거북한 상체를 노출시킨 남자는 이쪽으로 힐긋거리는 시선을 던지며 공동 시설 쪽으로 사라졌다.

고정원은 벽으로 비스듬히 등을 기댔다. 하…, 기가 막힌 듯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없겠어 내가 갈 곳이.’

조인휘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불쾌감은 한층 강해졌다. 굳이 지내보지 않아도 어떤 환경일지 뻔히 알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런 데서 살겠다고 아득바득 오피스텔을 나갔다는 사실이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피로한 몸짓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고정원이 바닥을 응시했다. 이대로 돌아가려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그러는 동안 이따금씩 사람들이 출입구와 방을 들락거렸다. 고시원의 관리자로부터 나가라는 경고를 받는 상황도 염두에 뒀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휴대폰은 내내 울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며 생각은 더욱 깊숙한 무의식으로 잠겨 갔다. 집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머릿속에선 특정 얼굴과 특정 장면들만 빈번하게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고정원은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얇은 재질의 깃 없는 셔츠였으나 실내가 후텁지근하게 느껴지면서 이것도 거추장스러웠다. 욕조에 몸을 담갔던 영향인지 전신에 도는 열기가 금방 가라앉지 않았다.

눈을 감자 피부를 스치는 공기가 습했다. 복도에서는 언제부턴가 희미하게 표백제 냄새가 풍겼다. 복도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잡음에서 조잡한 생활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기다림은 무료함에 길들여질 만큼 오랜 시간 이어졌다. 어느 순간 고성이 귀에 꽂혀 들며 고정원은 눈을 떴다.

“아니, 그럼 누군데!”

유리문 너머 층계참에서 들려오는 소리인 듯했다. 카랑카랑한 중년 남자의 음성과 낮고 웅얼대는, 나이를 예측하기 힘든 남자의 음성이 번갈아 울렸다.

“아니라잖아, 거긴 내가 확인했대잖아! 야, 너 내가 병신으로 보여?”

히스테릭한 폭언이 쏟아져 나왔다. 욕설을 제외한 말들로 미뤄보면 없어진 물건에 대한 문제인 듯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애꿎은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중재가 들어왔는지 불쾌한 소음은 겨우 사라졌다. 조용해지고 나서야 고정원은 손목을 감싼 시계를 확인했다. 서서 기다린 시간이 두 시간 반이었다. 그걸 확인하자 다른 무엇보다 스스로의 끈기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벽으로부터 등을 떼어 냈다. 입구를 향해 한 발짝 내디딘 순간 복도의 끝이 보였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이 쏠렸다.

고개를 떨군, 유독 왜소해 보이는 남자가 거짓말처럼 시야를 가득 채웠다. 지극히 당연한 순서처럼 방금까지 폭언을 당하던 상대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조인휘가 걸어오고 있었다. 스스로의 부피를 최대치로 줄이려는 것처럼 쪼그라든 채로.

“…….”

다가올수록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놀랍도록 상한 얼굴 곳곳으로 고정원의 눈길이 샅샅이 머물렀다. 낮에만 해도 쓰고 있던 모자는 없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맞은 사람처럼 뺨이 부풀어 있었고 입술은 한쪽이 터져 있었다.

고정원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인휘가 바로 문 앞까지 다가오면서 비로소 둘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서로 앞뒤로 서게 되었지만 넋이 나간 듯, 조인휘는 고정원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열쇠를 찾으려는 건지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한 손에는 싸구려 비닐우산을 들고서.

헤어진 지 몇 시간 만에 일어난 변화였다. 완전히 엉망이 돼버린 모습을 보며 얼이 빠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조차 불가능했다.

열쇠는 곧 문고리에 꽂혔다. 뒤에 서 있던 고정원이 바로 옆으로 다가섰다. 눈앞이 그늘지자 마침내 조인휘가 고개를 들었다.

“…….”

흐리멍덩한 눈은 깜빡일수록 점점 초점이 맺혔다. 입 안이 마르고 손바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고정원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정면에서 마주한 얼굴 상태가 워낙 처참하여 믿기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올라간 손이 부어오른 뺨을 감쌌다. 탁, 하고 우산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얼굴에서부터 몸 전체가 굳어졌다. 조인휘가 와락 안겨 들었기 때문이었다.

“…원아, 정원아, 정원아….”

갈라지는 음성이 귓속으로 스몄다. 끌어안는 온기와 무게가 느껴졌다. 인지하지 못한 사이 입맞춤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끊어졌던 정신이 다시 연결되었다. 조인휘의 허리를 받친 고정원이 다급하게 열쇠를 돌렸다. 문을 열어젖히고, 그 안으로 입을 맞추며 들어갔다.

사방이 어두웠다. 캄캄하다는 걸 한참 뒤에야 인식했다. 불을 켤 정신도 없이 입을 맞추다 푹신한 곳으로 풀썩 넘어졌다.

“하…. 음….”

끓어올랐다. 뜨거워서 당장 벗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찢어발기듯 벗고 손에 닿는 대로 옷을 벗겼다.

사고의 과정이 생략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벗은 뒤고 또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젖은 몸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입술이 맞붙기를 반복했다. 뜨거운 신음이 입 속에서 뭉개졌다.

끼익, 끽.

침대라고도 하기 힘든 침대가 삐걱거렸다. 느리게 움직여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고정원은 조인휘를 안고 일어섰다.

“흣.”

가벼운 몸이 매달려 왔다. ‘힘 빼’ 속삭인 고정원은 마른 허벅지를 양팔에 하나씩 끼웠다. 그리고 빠진 성기를 움켜쥔 엉덩이 사이로 문질렀다.

한 번 벌어졌던 구멍은 큰 것을 잘도 삼켰다. 음경이 뿌리 근처까지 미끈하고 촘촘하게 박혀 들었다. 그 감각이 자극적이다 못해 도취될 지경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인휘에게 쥐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큭….”

소리를 참느라 짓씹은 턱이 울끈 튀어나왔다. 사방으로 뻗은 무수한 힘줄을 붙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양껏 박아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쩍…. 쩍….

결합된 음부에서 소리가 났다. 끈적해진 살끼리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머리가 뜨거워졌다.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서로를 찾듯 갈급하게 맞붙었다.

입술이 붙은 채로 눅눅한 숨을 토해 냈다. 부둥켜안은 몸속으로 성기를 추켜올렸다.

찰팍!

제법 큰 소리가 나면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다 정적이 찾아오면 다시 찧고, 다시 또 멈추고. 안은 몸뚱이를 들어 올렸다 내리기도 하면서 서로의 점막을 자극했다. 힘을 쓰느라 움푹 팬 허벅지가 돌아올 새가 없었다.

윤활제 없이도 온통 젖었다. 복부에 비벼지는 조인휘의 성기도 그렇고 엉덩이 속에 박힌 제 성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로 체액이 많은 편이었나 싶었다. 지저분할 정도로 분비된 나머지 이어진 엉덩이에서부터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후….”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이. 감각이.

“흐으음.”

조인휘가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매달렸다. 목에 감은 양팔에 힘을 주고, 고정원의 뒤통수를 매만졌다. 그럴 때마다 더 단단해질 수 없을 것 같던 고정원의 몸이 한층 단단해졌다.

둔부를 움켜쥔 상태에서 고정원은 불시에 사정했다. 먼저 다다르자 조인휘가 뒤따라 쏟아냈다. 사정감이 오래 지속되는지 연거푸 몸을 조였다. 그럴 때마다 고정원도 머릿속이 번득번득 점멸했다.

“음….”

입 맞추며 무릎을 꿇었다. 책상과 침대 사이 비좁은 공간으로 조인휘를 눕혔다.

“…….”

토막 난 창문으로 희미하게 빛이 스며들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조인휘의 성기가 내려다보였다. 한 차례 뱉어 내고 나서도 여전히 반질반질 달아올라 있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음모까지 척척하게 젖었지만 몸속은 아직 바짝 메말라 있었다.

번들거리는 성기를 엉덩이에 붙였다. 개폐를 반복하는 구멍 안으로 밀어 넣자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며 집어삼켜졌다. 뜨거워진 목구멍을 느끼며 상체를 밀착시켰다. 그 상태로 드나들기 시작했다.

“흐, 으….”

삽입 운동이 느리게 이어졌다. 빨라지지 않도록 속도를 제한하는 온몸으로 땀이 흘렀다. 참고 있는 건 조인휘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아랫입술을 꽉 물고, 움켜쥔 고정원의 팔을 놓지 못했다.

상체를 일으킨 고정원이 엉킨 허벅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맞물린 국부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

아래가 축축하고 지저분하게 뒤엉켜 있었다. 성기를 빼낼 때면 체액이 점액처럼 끈끈하게 늘어졌다. 벌게진 눈으로 관찰하며 뒤늦게 불을 켜지 못한 걸 후회했다.

부드러운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느린 움직임이 감질나는지 빼낼 때마다 눈앞의 성기가 움찔거렸다.

손을 뻗은 고정원이 그것을 감싸 쥐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맛있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조되어 문지르자 조인휘가 안을 조였다.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던 그때,

“…원아….”

작은 부름이 들렸다. 금세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릴 것 같은 속삭임이었다.

고정원은 등을 숙였다. 울고 있는 조인휘의 얼굴 가까이로 눈높이를 맞췄다. 왜 이렇게 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번에도 행위 중 울었던 걸로 봐서 흥분하면 나오는 습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인휘가 안아달라는 듯이 팔을 뻗었다. 곧장 반응한 고정원은 뒤통수에 손을 넣으며 입을 맞추어주었다. 부어오른 뺨에도 입술을 스치며 부드럽게 달랬다.

남은 손으로는 옆구리부터 허벅지를 매만졌다. 조인휘의 손도 고정원의 탄탄한 몸을 쓰다듬으며 애무를 쉬지 않았다.

“하….”

고환이 비벼지도록 박아 넣은 고정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얼굴을 파묻고 보들보들한 귓불을 빨아 당겼다. 입에서는 덥고 습한 숨이 쏟아졌다. 숨결을 섞으며 거칠게 박고 싶은 충동으로 어찔거리는 걸 느꼈다.

“응, 으응….”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린 허리짓에 금방 초조한 기색이 배어들었다. 비좁은 공간이나 소리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갑갑해서 돌아버릴 것 같으면서도 멈추어지지 않았다. 섹스하면서 이렇게 흥분한 적이 있었나. 젖은 목덜미를 빨면서 종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원아….”

조인휘가 한 번 더 사그라질 것처럼 불렀다. 고정원은 입을 맞추는 걸로 응답했다. 그리고 다시 몇 번이고 완전하게 수용되는 감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비좁은 천장을 본 순간 간밤의 일들이 머리를 스쳤다.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뒤늦게 저를 누르고 있는 무게를 느꼈다. 턱을 내리자 가슴팍에 뭉개진 조인휘의 뺨이 보였다. 벌거벗은 채 엉킨 몸들도.

“…….”

작은 창문으로부터 햇볕이 스미고 있었다. 시간을 가늠하던 고정원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조인휘는 피로가 상당했는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제 봤던 뺨의 상처는 하루가 지난 오늘 더욱 부어 있었다.

침대를 내려와 방 안의 전경을 살폈다. 이미 어젯밤 체감했던 바이지만 가장 먼저 좁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어떻게 이런 데서 섹스를 했나 싶을 정도로 공간은 최소한의 크기였다.

휴대폰으로 확인한 시간은 벌써 오후였다. 나른한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돌아선 고정원은 한 번 더 침대 위를 살폈다. 앙상한 팔다리가 이불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을 보며 보양식 위주의 점심 메뉴를 생각했다.

방에 딸린 욕실에서 씻고 나왔다. 수건을 찾아 몸을 닦은 뒤에는 늘어진 옷가지들을 주워 올렸다. 조인휘의 것은 정리해 두고, 자신의 것은 그 자리에서 걸치기 시작했다. 입으면서 보니 셔츠의 단추가 한두 개 사라져 있어 헛웃음이 나왔다.

“…어….”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눈을 뜨고 있는 조인휘가 보였다. 언제 일어났는지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있었다.

“…일어났네. 밥부터 먹을래?”

고정원은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목덜미의 빨아놓은 자국들을 보자 어쩐지 민망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열중해서 빨아대던 어제의 행동을 짧게 후회했다.

조인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정적이 이어진 끝에 이상함을 느낀 고정원이 눈을 들었다. 그리고 안면이 굳어졌다.

“…….”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 보였다. 도무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그야말로 혼란에 빠진 얼굴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되돌아보았다. 밥부터 먹겠냐는 질문의 어디가 문제였을지 되짚었지만 잘못된 부분은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인휘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이 갈수록 확연해졌다. 충격과 당황. 그리고 가장 알기 쉽게 드러나는 감정은 ‘실망’이었다.

눈을 내리깐 조인휘가 이불을 추슬러 올렸다. 실수하고 난 뒤의 낭패감 같은 것이 이어서 얼굴을 스쳤다.

“여기, 어떻게….”

“…어떻게?”

입술에서 마른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니, 안 알려줬는데…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서.”

고정원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 지경으로 섹스를 해댄 다음 날에야 어떻게 찾아왔느냐고 묻고 있었다. 상황이 우스웠다. 우스운데 웃음이 나지는 않고 다만 신경이 딱딱하게 굳는 걸 느꼈다.

“…왜. 난 여기 오면 안 되는 거였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잇지 못하는 말끝에서 혼란한 감정이 전해졌다.

“왜…? 왜… 날….”

손을 내리자 의문으로 빼곡한 눈이 보였다. 진심으로 네가 왜 날 찾아왔느냐고 의아해하고 있었다.

빤히 쳐다보던 고정원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손을 뻗어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던 홈웨어를 집어 들었다. 퇴원 후 오피스텔에서 봤던 옷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이 옷은 조인휘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컸다.

고정원은 울컥 치솟는 무언가를 삼켜 냈다. 그리고 이 좁아터진 곳에서 조인휘가 혼자 코를 파묻어 댔을 천자락에 제 코끝을 가져다 댔다. 냄새를 한 번 맡고는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많이 쌓인 것 같더라. 어제 보니까.”

“…….”

“실은 나도 좀 그랬거든 요새. 여자랑 해도 뭔가 전 같지 않아서.”

사고 이후로 여자와 관계를 가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몸정이란 게….”

말끝을 흐린 고정원은 눈앞의 벗은 몸을 천천히 훑었다.

“있긴 있나 봐.”

아니면 남자랑 더 맞는 건가.

중얼거리는 말에 조인휘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눈치챈 건 얼마쯤 뒤였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 중언부언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니야, 넌 정원이 아니야… 넌 아니야….”

조인휘는 몇 번이나 더 중얼거렸다. 말하면 정말 현실이 그렇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정이 됐는지, 그러고 나서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웅크렸다.

“…….”

등이 보이자 삼켰던 열기가 확 솟구쳤다. 강제로 이불에서 꺼내고 싶은 충동과 이대로 나가 버리고 싶은 충동이 격렬히 부딪쳤다.

‘정원아….’

불러대던 것과, 그때마다 입을 맞춰주던 자신이 떠올랐다. 이제야 그 완전하던 수용이 완벽하게 이해가 되었다. 일어난 순간부터 몸에 간지럽게 남아 있던 열기가 사라졌다. 누군가의 대역을 착실히 해냈다는 사실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고정원은 보폭 큰 걸음으로 방을 벗어났다. 쾅-! 소리와 함께 천장이 울리는 착각이 들 만큼 세게 문을 닫고 나왔다.

복도를 스치던 중이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걷다 말고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시야로는 방금 자신이 나온 방 바로 옆 호실에서 웬 남자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조인휘의 방에 목적이 있는 듯 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되돌아간 고정원이 남자의 등 뒤에서 물었다.

“볼일 있어요?”

낮은 물음에 남자가 돌아봤다. 그리고 멍청해 보일 만큼 놀란 얼굴을 했다.

“…아뇨.”

지켜보고 서 있자 거북했는지 남자는 다시 제 방을 향해 걸어갔다. 고정원이 그 뒤를 따랐다.

“옆방 두드리지 마요.”

안으로 들어가려는 남자에게 경고했다.

“…에?”

남자가 얼빠진 소리를 내며 돌아봤다.

“관리자 통해서든 뭐든, 저 방 상관하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

어설프게 끄덕거린 남자가 문을 닫으려 했다. 고정원은 대뜸 문틈으로 손을 넣고 닫지 못하도록 열어젖혔다.

“대답을 왜 똑바로 안 하지.”

튀어나온 반말에 남자의 표정이 달라졌다. 올려다보는 눈빛에서 피하고 싶은 기색이 읽혔다.

“…네. 안 그럴게요.”

문이 닫히고 나서도 고정원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삭이지 못한 무언가가 튀어나온 뒤였다.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과 한참을 씨름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복도를 벗어났다.

조인휘가 자취를 감추었다.

보이지 않은 지 3일째 되던 날, 의도된 증발이라는 걸 확신했다.

위치 추적 어플은 무용해졌다. 위치를 표시하는 상대방의 아이콘이 화면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통화를 시도할 때면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메시지가 흘러나왔고 그렇게 된 지는 이틀째였다.

“…….”

깊은 밤. 원룸촌 골목의 가로등 아래 서 있던 고정원은 담배를 발밑에 지져 껐다. 그리고 가까워진 발소리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휴대폰을 보며 걷던 상대가 고개를 듦과 동시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익, 씨발 깜짝야!”

“늦게 오네.”

휴대폰을 움켜쥔 김강우가 귀신 보듯 올려다보았다.

“뭐… 씨. 뭐야. 왜 여깄어 니가?”

“바쁜 것 같아서.”

찾아왔어.

작게 덧붙이고서 김강우를 직시했다. 고정원의 깊게 팬 두 눈이 탐색의 기운을 풍겼다.

“인휘는?”

“…조인휘, 뭐. 나한테 왜 찾는데.”

“어디 있는지 몰라?”

김강우가 고개를 틀며 입을 벌렸다. 허, 하고 뱉어 내더니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연락을 안 하는데 어찌 알어, 내가.”

“…….”

“암튼 난 전혀 모르고. 바빠서 들어간다.”

손사래 친 김강우는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뭐 하냐, 너.”

계단을 오르다 말고 김강우가 돌아보았다. 그 뒤를 따라서 오르던 고정원 또한 멈추어 서서 마주 보았다. 인상을 찌푸린 김강우가 눈을 피하더니 확연히 달라진 목소리로 변명했다.

“…진심 나 몰라 암것도. 그때 술집에서 그런 뒤로 조인휘 한 번도 안 만났어, 연락도 아예 안 했고. 아, 진짜로 맹세할 수 있다고.”

메마른 눈길이 안달하는 얼굴을 훑다가 이내 위를 향했다.

“몇 층이야?”

말문이 막힌 듯 김강우가 뻐끔거렸다. 머잖아 단순하기 그지없는 목적을 이해했는지 떨떠름한 기색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야. 나 들어가서 쉴 건데. 용건 남은 거냐?”

현관을 열기 전 김강우가 한 번 더 싫은 티를 냈다. 고정원이 대답 없이 서 있자 한숨을 내쉬고는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불이 켜지는 동시에 단칸방 구석구석으로 색출에 가까운 시선이 꽂혔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고정원은 입을 뗐다.

“혹시 연락 오면 알려줘.”

“…걔 이번에도 토낀 거냐?”

‘이번에도’라는 말이 거슬렸다. 빤히 쳐다보자 김강우가 허둥대며 덧붙였다.

“아니, 너 옛날에도 한 번 조인휘 존나 찾아다녔었잖아. 그때 생각나서 그러지.”

“고시원에서 나갔어.”

“…뭐? 무슨, 고시원?”

뜬금없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구겨지는 얼굴은 연기라고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갈 만한 곳 알아?”

“모르지 나야.”

“인휘네 본가 주소지는.”

연속된 추궁에 김강우의 안면이 벌게졌다.

“니가 모르는 걸 내가 어찌 알아, 내가! 진짜 모른다고.”

급기야 울 것처럼 눈가를 찌푸렸다.

“야… 상식적으로, 니네 둘이서만 그렇게 죽어라 붙어 다녀놓고 갑자기 왜 이러냐.”

“…….”

“조인휘랑 친한 사람 너 말고 아무도 없잖아.”

그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자취방을 나온 고정원은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차로 이동하지 않은 것은 운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최근 질 낮은 수면이 계속되었다. 그로 인해 신경은 예민해지고, 반대로 사고는 둔해졌다. 퇴화된 건가 싶을 정도로 한 가지 생각밖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느닷없이 멈추어 서서 통화를 시도하자, 이번에도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익숙한 기계음이 새어 나왔다.

어두운 골목,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습한 안광이 빛에 물들었다. 핏줄이 질기게 돋은 손이 기기를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고정원은 화면에 뜬 연락처의 목록을 하나씩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같은 학과 여러 명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성과는 일절 없었다. 머리가 무겁게 꺼지는 것을 느끼며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눈을 감고서 앞으로 뭘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했지만 머릿속은 진창에 빠진 다리처럼 더디게 움직일 뿐이었다.

귀가하기까지 평소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주차장과 이어진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버지와 조우했다.

“이제 들어오시나 봐요.”

사업하는 아버지와는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다. 스케줄 탓도 있지만 집 안에서도 생활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안색이 왜 그 모양이야?”

고정원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당겼다. 곧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면서 두 사람은 함께 올랐다. 신장이 비슷한 아버지는 옆으로 팔을 뻗어 고정원의 어깨를 주물렀다.

“…오래 있네. 금방 나갈 줄 알았더니.”

의외라는 듯한 어조에는 반기는 기색 또한 스며 있었다.

“그 친구하고는 이제 정리된 모양이지?”

고정원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누구요?”

쳐다보자 아버지의 시선이 전방을 향했다.

“난 너 계속 고집부릴 줄 알았어. 보통 미친 사람처럼 굴었어야지.”

노골적으로 안심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해해. 한창 그럴 나이였으니.”

“…….”

“아무튼 고맙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달했다. 어깨를 두드린 아버지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다시 문이 닫히면서 고정원은 홀로 남았다. 2층에서 멈추어 선 뒤에야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고, 익숙한 풍경을 거쳐 제 방으로 들어섰다.

씻는 동안에는 생각을 정리했다. 조금 전의 대화로 알게 된 사실들을 재차 나열해 보았다. 아버지가 자신이 남자와 사귀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 정확한 대상이 누군지 파악하고 계셨다는 것과, 그동안 자신은 ‘미친 사람’처럼 대응해 왔다는 것까지.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궁금해할 것도 없었다. 오피스텔 계약 건만으로도 충분히 짐작되는 바였다.

“…….”

아버지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던가. 돌아온 탕자 취급에 가까웠던 분위기를 떠올린 고정원이 실소를 흘렸다.

씻고 나와서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테라스가 비치는 창밖을 향해 앉아 흐르지 않고 정체된 것 같은 시간에 머물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 안의 정물처럼 앉아 있는 것. 이건 근래에 자리 잡은 기벽이기도 했다.

‘이해해. 한창 그럴 나이였으니.’

‘아무튼 고맙다.’

조인휘와의 관계는 사실혼과 같은 지저분한 흔적들로 난무했다. 내용이 어떻든 동성 관계라는 것 하나만으로 일반적이라고 볼 수 없었다. 사고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 생각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는 입장이었다.

정상적인 선택에 안도했을 아버지가 어렵지 않게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신경이 곤두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고맙다는 한마디가 그 어떤 과거의 흔적보다 불쾌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리모컨을 든 고정원은 조명을 일괄 소등시켰다. 침대로 걸어가 느슨하게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몽유병 환자처럼 침대를 오래도록 내려다보던 끝에 몸을 눕혔다. 불을 껐음에도 창밖에서부터 들어온 빛이 방 안 구석구석을 밝히고 있었다. 리모컨으로 전동 커튼을 닫자 그제야 암흑이 내렸다.

“…….”

정자세로 누운 상태에서 눈을 감았다. 조금 뒤, 팔을 뻗어 휴대폰을 가져왔다. 화면에는 최근 2년 동안 주고받은 통화 녹음 기록이 떴다. 초 단위로 짧은 것부터 몇 시간에 걸친 긴 통화까지 다양했다. 그중 하나를 재생시키자 불쑥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소 낮은 목소리에 고등학생처럼 어리숙한 어투였다. 녹음된 통화 기록 속에서 조인휘는 자질구레한 보고를 하고 있었다. 언제 일어나서 뭘 했고 뭘 먹었고 앞으로 뭘 할 건지 따위의 비생산적인 말들. 사이사이로 저들끼리만 아는 재미없는 농담도 섞여 있었다.

보고 이후에는 잡담이 늘어졌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며칠간 떨어져 있게 된 상황이라는 게 유추되었다.

때때로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통화를 끊는 일은 없었다. 각자 다른 할 일을 하면서 대화를 주고받다가 시간이 나면 같은 영상을 틀어놓고 함께 시청하기도 했다. 지겨울 정도로 서로 사생활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한 차례 끊어졌던 통화는 같은 날 녹음된 다음 파일로 넘어갔다. 밤이 되자 예정된 것처럼 폰섹스로 이어졌다.

‘영상으로 할래? 같이 보면서.’

‘…아니. 그냥 계속, 전화로 해….’

‘…못 참겠는데.’

은밀한 말들이 오갔다. 조인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살을 비비는 소리가 낱낱이 녹음돼 있었다. 추행과 다를 바 없는 집요한 질문 및 명령들이 쏟아졌다. 대답을 주저하는 소리, 울먹거리는 숨결까지 또렷했다.

‘정원아, 아, 정원아….’

습관인지 헐떡거릴 때 말끝이 늘어졌다. 낮은 신음이 점점 고조되었다. 그걸 들으며 누워 있던 고정원은 부푼 고간에 손을 올렸다. 주무르고, 문지르고, 뽑아낼 듯 마찰시켰다.

“하….”

아찔한 사정에 이르렀다. 뒤처리를 하고 난 뒤에도 녹음된 통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후희를 주고받는 것처럼 오가는 말속에 더운 기운이 녹아 있었다.

‘같이 씻을까.’

묻는 자신의 목소리를 끝으로 재생을 종료시켰다.

“…….”

달아올랐던 피부가 서서히 식었다. 한숨을 내쉰 고정원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덮었다. 그러나 얕고 산만한 생각을 배회한 끝에 다시 눈을 떴다. 뻗은 손으로 재생시킨 건 어제 들었던 녹음 파일이었다.

‘…그래서 대학 시절 나는 책략가라고 손가락질당하는 부당한 대접을 받기도 했는데…’ 1)

해당 파일에서 조인휘는 거의 혼자서 떠들었다.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책의 낭독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웨스트 에그 시내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지요?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그에게 길을 알려주고 계속 걸어가는데, 그때부터는 더 이상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지 않았다.’ 2)

읽어 내리는 목소리는 정직했다. 어색한 대화체나, 틀린 지문을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부분에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실낱같은 웃음이 터졌다.

‘…요컨대, 인생은 단지 하나의 창을 통해서만 보면 아주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내가…’ 3)

특징적인 몇몇 발음에 집중하는 사이 의식이 흐리게 잠겨 들었다.

조인휘의 휴학이 확실해졌다. 학과사무실에서 확인된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현재 학교 근처에 있을 가능성이 사라졌다. 본가에 있으리란 추측이 유력해지면서 고정원은 머릿속에 남아 있던 몇 가지 생각을 갈무리했다.

“무슨 생각하는데 그렇게 심각해?”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비스듬히 돌아보자 같은 과 선배가 다가와 있었다. 고정원은 형식적인 웃음을 보이며 얕게 묵례했다.

“진짜 오랜만에 보네. 나 작년에 휴학했던 건 알지?”

“그랬나요.”

마침 손에 든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고개 숙여 확인한 고정원의 안면이 굳어졌다. 메시지 안에 ‘조인휘’ 이름 석 자가 무엇보다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화면을 열어 전문을 확인한 순간 짧게 날숨이 터졌다.

[안녕하세요. join1221 조인휘 고객님! 고객님의 소멸 예정 마일리지 안내드립니다. 20…]

광고성 메시지는 온라인 쇼핑몰에서부터 온 것이었다. 실수든 사정이 있었든, 휴대폰 번호를 본인 게 아닌 고정원의 것으로 가입했음을 알게 되었다.

“야, 과 모임도 좀 나오고 해라. 여자애들이 맨날 니 얘기 하던데. 근데 조인휘는 어디 가고 혼자 다녀?”

“…….”

‘전원 꺼진 휴대폰 추적’

입력하던 검색창을 끄고 휴대폰을 내렸다. 아직까지 그 자리에 서 있는 남자 선배와 눈을 맞추었다.

“인휘요?”

“…어? 어.”

“인휘가 왜요?”

마주하고 있는 눈 한쪽이 어색하게 구겨졌다.

“아니, 니네 둘이 거의 사귀는 것처럼 붙어 다니지 않았냐. 안 보이니까 신기해서.”

“…….”

짙은 속눈썹이 드리워지도록 눈을 내리깔았던 고정원이 다시 눈동자를 정면에 띄웠다.

“…그러게요. 선배 아직 졸업 안 한 것도 그렇고.”

신기하네요.

뒷말을 들은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망설이는 모양새로 우물거리는 입가에서 비굴함이 묻어났다.

“야, 너도 살아 봐. 인생 뜻대로 되는 일 잘 없다.”

“…안 바빠요?”

“뭐?”

“취업준비 때문에 바쁠 것 같은데. 다행히 잘돼 가나 봐요.”

웃으며 쳐다보자 남자가 얼굴을 붉혔다.

“…하, 씨. 이제 후배들한테까지 잔소리 듣네.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취업준비 잘돼 가냔 소리 때문에 미치겠다, 아주. 씨.”

남자는 경련하는 입가를 숨기지 못한 채 고정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야, 간다. 열심히 해라, 나처럼 되지 말고.”

남자가 바쁜 모양새로 사라지고 나자 고정원은 다음 강의실로 향했다. 머리가 지끈거린 탓에 중간에 커피를 마시고 방해받았던 검색을 재개했다. 어느 정도 구체적인 정보를 파악한 뒤 강의실의 뒤편으로 자리했다.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도 이마를 감싼 손은 내려가지 못했다. 손등으로 혈관이 곤두서고 이따금씩 턱으로도 근육이 불끈 돋았다. 몇 시간 전 먹었던 약의 효과가 다했음을 느끼며 받치고 있던 손을 거뒀다.

책상에 올려둔 휴대폰의 화면이 켜졌다. 전화였다.

“…….”

저장되지 않은 번호를 내려다보며 문득 심장이 조이는 기분을 느꼈다. 없지 않은 가능성을 떠올린 고정원이 기기를 움켜쥐었다.

한창 수업이 진행 중인 강의실을 나섰다. 강의실 밖,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기도 전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정원아!

여자 목소리였다. 빳빳했던 목줄기가 풀어지고 손아귀가 느슨해졌다. 튀어 나갈 것처럼 힘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고정원은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누구세요.”

-뭐야, 너. 너 내 번호 저장도 안 했어?

“누구세요.”

동일한 물음에 상대방이 웃었다.

-아, 정말. 맞혀 봐. 목소리 들으면 딱 감 안 와?

통화를 종료시켰다. 그리고 번호를 차단했다.

“…….”

가만히 얼마 동안 화면을 내려다보던 고정원은 손끝으로 화면을 눌렀다. 발신 기록을 무수하게 메우고 있는 조인휘의 이름이었다. 귀에 가져다 댈 것도 없이,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익숙한 안내음이 들려왔다.

머리가 무지근했다. 컨디션이 최저라는 걸 느꼈다. 이렇게까지 생활에 지장받을 정도로 상태가 나빴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아니야, 넌 정원이 아니야… 넌 아니야….’

얼굴과 목소리가 떠오를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휴학을 하든 어디를 가든 상관없지만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섹스를 한 게 그렇게까지 충격받을 일인가. 그렇게까지 구분 짓고, 철저히 부정할 일인가.

두꺼운 목덜미가 한순간 붉게 상기됐다. 턱부터 관자놀이까지 혈관이 솟을 만큼 어금니를 짓씹은 고정원은 계단을 벗어났다.

연강이 끝나면서 강의실을 나섰다. 그러나 건물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모르는 사람에게 붙들리는 상황이 되었다.

오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애매한 화법으로 본론을 꺼내지 않는 상대를 무시하고 가려 하자 손에 쥐어진 것은 번호 적힌 종이였다. 근처의 쓰레기통에 버린 것으로는 낭비된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서 저희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게 이런 건데요….”

이번에는 어떠한 종류의 섭외를 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비슷하게 거듭되는 상황이 오늘따라 제 안에서 염증 반응을 일으켰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컨디션에 따라 그런 것도 아닌 듯, 붙들린 채 서서 혐오감과 비슷한 무언가를 억눌러야 했다.

“…네.”

표정의 온도가 점차 내려갔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기계적으로 대응했다.

“아무튼,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한데….”

반복적인 단어들이 귀를 스치며 주변의 소음이 필요 이상으로 크게 들렸다. 이성이 살얼음처럼 예민해진 신경을 지탱시키고 있었다.

“…….”

그때 고정원의 동공이 일시에 확장되었다. 시야에 한 사람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몇 초간 경직되었고, 시야에 잡힌 뒷모습을 놓칠세라 서둘러 다리를 뻗었다.

“저기요!”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내딛는 걸음에 점차 가속이 붙었다.

조인휘가 있었다. 분명히 조인휘가 그곳에 있었다. 체크 셔츠를 걸친 마른 등은 착각할 수 없는 본인이었다.

그렇게 찾았는데 학교 안에 있었을 줄이야. 피가 솟구치는 듯한 과격한 기분을 느끼며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고정원의 육중한 몸이 교정을 가로질러 목표지점을 향해 나아갔다.

“아! …씨.”

불만스러운 탄식이 귀를 스쳤다. 털퍽,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뒤따랐다.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쳤음을 자각했으나 살필 여유가 없었다. 조인휘가 경영관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서둘러 쫓아가려는데 어깨가 과격하게 돌려세워졌다.

“저기요. 이거 안 보여요? 사람 치고 음료수 떨궈놓고 지금….”

고정원은 상대를 쳐다보지 않았다. 조인휘의 행방을 살피느라 온 신경이 경영관으로 쏠려 있었다. 그사이 계단을 오른 뒷모습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가슴이 확 조여들었다. 무시하고 가려 하자 어깨가 한 번 더 거칠게 돌려졌다. 눈앞에는 인상을 쓴 남자와 불안한 표정의 여자가 서 있었다.

“오빠, 그냥 가요.”

“아니 예의가 없잖아.”

왜 아직 학교에 있는 거지. 의문을 이기지 못해 방향을 틀자 바로 저지하는 힘이 가해졌다. 울컥 치민 열기가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달했다.

“아악!”

손을 붙잡아 꺾자 듣기 싫은 소리가 터졌다. 그대로 방해물을 떨군 고정원은 곧장 경영관을 향했다.

뛰어 들어간 입구에서도 누군가와 부딪칠 뻔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들어선 내부에서 드넓게 펼쳐진 전방과 좌우를 살폈다. 그리고 다급하게 에스컬레이터로 뛰어들어 올랐다.

자리마다 살피는 동안 비슷한 사람조차 찾을 수 없었다. 도서관부터 토의실, 층을 내려가 라운지까지 구별 없이 뒤지기 시작했다. 서 있는 사람부터 앉아 있는 사람까지 하나씩 체크했지만 그중 어디에도 찾는 얼굴은 없었다.

한 바퀴 다시 돌아도 결과는 같았다. 화장실 안까지 살펴보고 나오는 길에는 기어이 이가 바득 갈렸다.

건물 안 카페에 들어섰을 때 비로소 눈에 익은 체크 셔츠를 발견했다. 보일 듯 말 듯, 경계로 비죽 튀어나온 그것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팽팽해진 팔이 뻗어 나가며 기습처럼 마른 몸을 끌어당겼다.

“으악.”

뚝.

이마에서 흐른 땀이 턱으로 떨어졌다. 언제 이렇게 땀이 났는지 몰랐다. 이마에서 내려온 물기가 속눈썹에 맺혀 시야를 흐렸다. 눈꺼풀을 깜빡이자 눈물처럼 뚝, 낙하했다. 다시 눈앞이 선명해졌을 때 고정원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누구세요?”

생판 모르는 얼굴이 서 있었다. 착시라고밖에는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다르게 생긴 남자가. 그나마 비슷한 거라고는 옷과 머리 모양, 체구 정도였다.

붙들었던 팔을 놓은 고정원은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착각했어요.”

사과를 끝으로 돌아섰다. 온몸에 힘이 들어간 채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짧은 이동 거리에도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달라붙었다.

심장은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겨우 잡았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흥분감이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손안에 붙들었을 때 느꼈던 감각이 여전히 실제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과 마주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번득거리는 안광은 유일하게 그 부분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빨리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찾지 않으면 곤란해지리라는 예감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들었다.

* * *

삭삭삭삭.

솔질 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졌다. 칫솔을 든 조인휘는 가스레인지 후드를 닦는 데 열중했다. 냉장고 정리, 설거지, 싱크대 찌든 때 청소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남은 일이었다.

“후….”

입에서 단내가 나는 듯했다. 솔질을 멈추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10시 50분이었다. 집중하느라 시간이 이렇게 된 줄도 몰랐다.

둘러보자 주방은 눈에 띄게 청결해져 있었다. 나머진 내일 해도 되니까…, 하고 아쉬움을 뒤로하며 대강 마무리했다.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주방을 벗어나는데 벌컥 문이 열리며 어깨가 소스라쳤다.

“뭘 그렇게 놀라. 아빠 약 드신다니까 미지근한 물 좀 가지고 와.”

“아… 네.”

대답한 조인휘는 주방으로 되돌아갔다. 찬장에서부터 컵을 꺼내 생수를 따르고, 전기 포트에 살짝 데운 물을 그 위에 따랐다. 미지근한 온도를 확인한 뒤 안방으로 가져갔다.

“여기요.”

물을 놓아 드리고 나가려는데 등 뒤로 부르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앉아 봐.”

“…네.”

아버지가 당뇨 약을 복용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조인휘는 울적한 기분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서. 언제까지 그러고 있겠다고?”

“아….”

바닥에 꿇고 있는 무릎을 매만졌다.

“곧, 나갈게요.”

대답해 놓고 입 안이 순식간에 깔깔해졌다. 이래서 집으로는 안 오려고 했는데.

“지금 나가는 게 문제냐? 생활비 없으니까 들어온 거 아냐, 너 지금.”

“…….”

아버지는 평소 말수가 없으셨지만, 쌓이면 누구보다 많은 말들을 쏟아 내셨다.

“사람은 성실한 게 제일 중요해. 성실함, 끈기. 나중에 회사는 어떻게 다닐 거야. 니가 쉬고 싶다고 쉬어져 회사가? 나중에 알겠지만 학생 신분으로 학교 다니고 공부하는 게 제일 쉽다. 그것도 못 하면 기본이 안 된 거야. 빨리 졸업해서 취직해도 모자랄 시간을….”

듣는 동안 부러진 듯 고개를 떨구었다. 잔소리는 점점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학비’, ‘나이 든 부모’, ‘책임’, ‘취업’, ‘미래’, ‘결혼’. 아버지가 하는 말들은 곧 거대한 부채감으로 쌓여갔다.

토를 달거나 자기변호를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멀쩡히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돌아와 지낼 곳도 없는 아들. 남자 애인을 사귀고, 그 애인과 평생을 함께할 생각밖에는 없는 아들. 그걸 생각하면 한 공간에서 부모님과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죄스러웠다.

“…죄송합니다.”

밖에서 좀 더 버틸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되돌아가도 결국 선택지는 부모님 댁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어디도 갈 곳이 없었고, 부모님 얼굴이 너무 보고 싶기도 했다.

고시원을 나온 첫날은 PC방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숙식이 해결되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전화를 걸기 무섭게 ‘시간 좀 보고 걸어라, 이 호로 새끼야’ 하는 욕설을 들은 이후 다른 곳에 연락을 넣지 못했다. 며칠 전 일 때문인지 삼사십 대의 남자 어른을 대하게 될 때면 위축감이 상당했다.

조인휘는 ‘그 사건’을 떠올렸다. 급하게 구한 서빙 아르바이트에서 손님의 구두에 술을 엎지른 일을.

‘아, 이런 병신 새끼, 이게 얼마짜린데!’

엎자마자 고개가 돌아가도록 뺨을 맞았다. 주먹이 아닌 손바닥이었는데도 ‘뻑’ 하는 묵직한 소리가 울렸던 것을 기억한다.

손이 매워서 순간 정신을 못 차렸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홀이 아수라장이었고, 손님에게 변상을 하는 대신 잘리게 되었다.

“…….”

당혹감, 낭패감, 수치심. 그리고 폭력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에 다시금 압도되는 듯했다. 생생해지는 기억을 떨치기 위해 머리를 좌우로 털었다.

“…듣기 싫으면 됐다. 그만 가.”

아버지로부터 차가운 일갈이 떨어졌다. 조인휘는 얼굴을 들었다. 머리를 흔든 제 행동이 오해받았음을 깨달았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돌아누웠다. 겉도는 공기 속에서 홀로 바쁘게 손사래 치던 행동을 멈추었다. 입술을 달싹거린 끝에 무릎을 세워 일어섰다.

“…안녕히 주무세요.”

“…….”

탁.

안방 문이 닫혔다.

고개를 들자 텅 빈 주방과 대면했다. 웅-, 냉장고의 팬 돌아가는 소리. 째깍째깍, 벽시계의 초침 소리. 조용한 소음들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 이내 옆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고 구석의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았다. 공간이 순식간에 좁다란 사각형의 상자처럼 느껴졌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왔어도 여전히 고시원에 있을 때처럼 느껴진다는 게.

“…….”

방 안이 조용했다. 그 때문인지 머릿속의 소리들은 선명했다.

‘아니라잖아, 거긴 내가 확인했대잖아! 야, 너 내가 병신으로 보여?’

시달렸던 상황이 상기되었다. 택배 도둑으로 몰렸던 일은 고시원에서 겪은 일들 중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하필 직전에 뺨을 맞고 와서였는지도 몰랐다.

손님에게 저지른 실수는 제가 한 일이지만, 고시원에서 발생한 도난은 아니었다. 이미 아니라고 밝혔음에도 전날에 이어 같은 내용으로 추궁당하고 있자니 정신이 이상해지는 듯했다. 해명도 듣지 않고, CCTV를 확인하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나중에는 그저 화풀이라는 걸 깨달았다. 욕받이가 된 것처럼 가만히 서서 이 과정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뒤에는….

고정원과의 일을 떠올리고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딱딱한 상판에 이마를 내리찧었다. 쿵, 쿵, 쿵. 자책하는 만큼 강도를 더하다 소리를 의식하고 멈추었다.

‘많이 쌓인 것 같더라. 어제 보니까.’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 없는 행동을 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변명을 하자면 자신은 그날, 문 앞에서 고정원을 보았을 때 모든 게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는지도 모른다. 무의식 한편으로는 돌아오지 않았음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사고 날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상상해 왔다. 고정원에게 안기는 상상으로 하루를 버텼다. 현실인지 착각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망상에 빠져 살게 되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뺨을 맞고 나서도, 도둑 취급을 당하고 나서도, 계속 고정원만 떠올렸다. 부르면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속으로 부르고 또 부르고….

그런데 정말로 눈앞에 본인이 서 있었던 것이다.

아침이 돼서야 적나라한 사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눈을 들지 못했던 것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닮은 사람에게 매달려 몸을 섞은 듯한 꺼림칙함을 느꼈다.

‘실은 나도 좀 그랬거든 요새. 여자랑 해도 뭔가 전 같지 않아서.’

고정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기도 했다. 눈앞의 남자는 엄연히 닮은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호흡이 힘겨웠다. 공격을 당한 것처럼 몸 안쪽부터 무너졌다. 속이 뻥 뚫리면서 그곳에서 내장과 피가 쏟아져 나가는 것 같았다. 허망하고 아픈 느낌이 끊이지 않았다.

공황에 가까운 상태를 이겨낼 수 없었다. 휴학계를 낸 것은 피치 못한 선택이었다. 그 뒤로는 상황이 이끄는 대로 이곳 일산까지 오게 되었다. 도망이라면 도망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제대로 된 생활을 되찾고,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고정원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것밖에는 머릿속에 없었다.

“…….”

고개를 든 조인휘는 꺼진 휴대폰을 들었다. 만지작거리다가 전원을 켰다. 부재중 연락들을 무시하고, 무작정 녹음 어플을 실행시켰다.

화면에는 녹음된 목록이 여러 개 떴다. 최근에는 하루에 한두 번씩 녹음을 하고 있었다. 고정원이 보고 싶을 때, 통화하듯이 음성 편지를 썼다. 하루 일과나 그 밖에 하고 싶은 말들로 채운 일상적이고 소소한 내용이었다. 저장해 두었다가 나중에 고정원이 돌아왔을 때 들려줄 기록이기도 했다.

“큼.”

목을 가다듬고 화면에 손을 올렸다. 빨간색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녹음 상태로 바뀌었다.

“정원아, 나. …어… 나 지금 방이야.”

녹음을 시작하면 통화할 때처럼 미약한 긴장감이 서렸다. 오늘도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끼며 뒷목을 문질렀다.

“근데 내 방은 아니야. 이사 오기 전에 집은 내 방 있었는데…. 여기는 훨씬 좁은 집이거든. 작년에 이사하셨잖아, 우리 부모님.”

말하며 입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때 너 같이 오고 싶어 했던 거 기억난다. 계속 인사드리고 싶다고 했었는데…. 어떻게 아직도 한 번을 못 드렸네.”

전부터 고정원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이상하게 때마다 상황과 일정이 어긋났다. 약속을 잡은 날 엄마가 다쳐서 병원에 가게 되었다거나, 그 밖에도 갑작스런 장례식 참석 등으로 틀어지기 일쑤였다. 자신이 고정원의 부모님께 여러 번 얼굴을 비치는 동안 고정원은 단 한 차례도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어… 너 기억 돌아오면, 부모님한테 인사부터 드릴까.”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 때나 같이 올걸 후회가 됐다.

“우리 부모님 너 보시면 진짜… 놀라서 입 떡 벌어지실 거 같은데.”

마른 웃음이 터졌다. 잘생긴 배우들을 좋아하는 엄마가 고정원을 보고 놀랄 모습이 그려진 탓이었다. 조인휘는 손가락을 작게 꼼지락대며 말했다.

“나는 오늘은 인터넷으로 일자리 좀 알아보고 자려고. 아, 근데 내가 오늘 뭐 먹었는지 얘기 안 해줬구나.”

떨어져 있을 때면 통화로 서로 뭘 먹었는지 시시콜콜 알리곤 했다. 그래서 녹음을 할 때에도 매번 먹은 것에 대해 짧게라도 언급하게 되었다.

“나는 아침에 미역국에 밥 먹고….”

그러고 보니, 아침밥 외에 먹은 게 없었다. 입 안이 터져서 먹기 힘든 데다 애초에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학교 다닐 땐 억지로라도 챙겨 먹었지만 부모님 댁에 온 뒤로는 의무감이 사라지며 챙기지 않게 되었다.

“그냥… 계속 집밥만 먹었네.”

뺨을 쓰다듬는데 찌릿, 통증이 번졌다. 맞아서 다친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다친 자신보다 더 예민하게 굴 걸 알고 있었다.

비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갔다. 알바 하다가 실수로 벤 상처를 달고 왔을 때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파상풍 주사를 맞게 할 정도로 고정원은 유난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면역력이 약한 갓난아기 다루듯이….

불현듯 웃음이 멈추었다. 조인휘는 목구멍을 조이고 이를 악물었다. 붉어진 눈에 힘을 주며 빠르게 깜빡였다. 이상한 소리가 녹음되기라도 할까 봐 필사적으로 참았다.

“…아. 오늘 집 청소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가. 갑자기 엄청 졸리다.”

졸린 것처럼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거친 몸짓 끝에 울컥거림이 겨우 잦아들었다. 벌게진 얼굴에 어설픈 웃음이 떠올랐다.

“…잘 자, 정원아.”

몇 초의 침묵 뒤.

“많이 사랑해.”

나직한 고백을 끝으로 녹음을 마쳤다.

“…….”

말소리가 사라지자 정적이 도드라졌다. 회로가 끊어진 것처럼 조인휘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 그러다 갑자기 휴대폰을 들어 클라우드에 접속했다.

가장 처음으로 저장된 사진이 화면에 떠올랐다. 사귀고 초반에 찍었던 셀카는 어색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당시 일을 회상하는 얼굴로 느슨한 행복감이 번졌다. 삼 년에 걸쳐 찍은 사진은 백 장도 더 넘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을 보고 나서야 휴대폰을 손에서 놓았다.

잘 때가 되어 이부자리를 폈다. 장롱이 없어서 한쪽에 쌓아뒀던 이불을 하나씩 펼쳤다. 두꺼운 매트에 베개와 푹신한 이불을 얹는 것으로 잠자리를 만들었다.

암전된 사방에서 눈을 감았다. 의식은 금방 멀어지지 않았다. 뒤척이면 뒤척일수록 시간의 흐름이 초 단위로 느껴지는 듯했다. 오늘은 금방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역시나 태세를 갖추자마자 달아나 버렸다.

일어나서 불을 밝힌 조인휘는 방 한편을 차지한 책장으로 다가갔다. 책장에는 세월을 같이한 익숙한 책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이사 올 때 정리하고도 빼곡하게 남은 책들을 끝에서부터 하나씩 빼냈다. 빈 선반의 먼지들은 물티슈로 닦아 내고, 나름의 분류 기준을 정해 칸마다 새롭게 꽂았다.

‘엄마가 언제 청소시켰어? 휴학했다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괜찮은 일자리나 좀 구해 봐.’

낮에 청소할 때 들었던 말이 떠오르자 손이 머뭇거렸다. 곧 구할 거라고 대꾸는 했지만 솔직히 어떻게 될지 막막했다. 집에 계속 머무는 것은 아버지가 싫어하는 눈치라 숙식이 해결되는 일자리를 구해야 할 상황이었다.

지이이이잉-.

갑작스런 진동에 놀라서 뒷걸음쳤다. 조인휘는 책상에 올려둔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요즘 들어 소리에 민감해진 탓에 심장이 요란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데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잦아졌다.

다가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010’으로 시작되는 미저장 번호가 발신자로 떠 있었다. 화면의 상단으로는 자정을 넘어가는 현재 시각이 보였다.

야심한 시간에 모르는 번호. 불안한 생각이 스치며 받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방어 본능이 일었다. 재촉하듯 진동을 보내는 기계가 부담스럽게 느껴지며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후….”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대앉았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서 벌레처럼 웅크렸다. 째깍째깍, 빠른 초침 소리를 듣고 있어도 시간이 무거운 추를 달고 더디게 흐르는 느낌이었다. 밤마다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 몰랐다.

호흡이 힘들었다. 목을 감싸는 옷을 몇 겹이나 껴입은 것처럼 답답한 느낌과 함께 갈수록 숨구멍이 좁아졌다. 입을 한껏 벌리고 숨을 내쉬던 조인휘는 압박감을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바람막이 점퍼를 집어 들어 걸치며 방을 나섰다.

“하….”

현관을 열고 나오자 바깥 공기가 코로 스몄다. 호흡하기 한결 나아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탁, 탁, 탁…. 힘없는 걸음으로 내딛는 도중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뭐가 없을 줄 알았는데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이 손에 잡혔다. 편의점에 가서 맥주라도 마실까. 마시면 잠이 더 잘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이내 사라졌다. 앞으로의 생활을 생각하면 허투루 돈을 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입구에서 막 벗어났을 때였다. 조인휘는 맞은편에 넓은 면적으로 드리워진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다.

기다란 인영.

그리고 그 인영을 만들어 낸 커다란 체격의 남자.

보자마자 질겁하여 몸을 숨겼다. 입구의 벽면에 달라붙은 조인휘는 부풀어 오른 숨을 진정시켰다.

잘못 본 건가. 설마. 내가 잘못 본 거지.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방금 본 광경은 현실보다는 차라리 환상에 가까웠다.

자신이 착각했을 가능성이 컸지만 너무도 실제처럼 선명한 광경이었다. 두려운 기분이 커지며 확인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다리를 떨며 어수선하게 굴던 조인휘는 고개만 최소한으로 빼내 맞은편을 살폈다.

가슴께가 철렁 내려앉았다.

고정원이 확실했다. 가로등 아래 명암이 드리워진 얼굴은 가뜩이나 깊은 이목구비가 한층 짙어져 있었다.

혼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굴을 문질렀다. 여기 왜 온 거지.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위치 추적 어플도 탈퇴했는데 어떻게? 게다가 부모님 댁은 이사한 뒤로 아무한테도 알린 적이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알고서?

조금 전의 모르는 번호는 고정원이었음이 확실해졌다. 휴대폰 번호를 그새 바꾼 모양이었다. 무언가 용건이 있으니 연락도 하고 찾아온 것일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구태여 이곳까지 찾아올 만한 급박한 사정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너무 돌발적이었다.

…설마 기억이 돌아왔나.

강하게 현기증이 일었다. 흥분감이 번져 나간 손끝이 떨렸다. 이마를 짚은 조인휘는 침착하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벌벌 떨리며 흐트러지는 몸을 세우고, 벌어지는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가로등 밑으로 서 있는 고정원의 표정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 얼굴에서 어떤 단서든 찾아내려 애쓰며 손으로는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휴대폰이 켜진 뒤에는 허겁지겁 부재중 연락들을 확인해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제외하고 오직 고정원에게 와 있는 메시지들만을 샅샅이 살폈다. 기억이 돌아왔다면 메시지로 무언가 결정적인 말을 남겼을 게 분명했다.

“…….”

그러나 단어 하나하나 뜯어본 집착이 무색하게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남겨진 메시지들에는 기억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뉘앙스조차 없었다.

거세게 일었던 흥분과 떨림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이미 한 번 착각을 경험해 본 덕에 설레발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정말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내리깐 고정원은 이쪽을 보지 못했다. 그것을 또 하나의 다행으로 여기며 조인휘는 처음부터 보지 못한 사람처럼 뒤돌아 계단을 올라갔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방에 돌아왔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가 새우등으로 잠을 청했다. 밖에 누가 있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고 오로지 잠드는 데에만 신경을 기울였다.

지잉-.

진동 소리에 등이 떨리며 눈이 뜨였다. 한참을 버티다가 조용히 일어나 내용을 확인했다.

[집 앞에 와 있어]

“…….”

거세진 고동을 무시하며 조인휘는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동굴과 같은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뻑뻑한 두 눈을 질끈 짓이겨 감았다.

엉망진창, 묘한 꿈을 꾸다 잠에서 깨자 사방이 어두웠다.

조금 전까지 자신은 고정원을 만났다. 밖으로 내려가자마자 자신을 안아주기에 거기서 바로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 다음 정말로 만나러 내려갔지만 그것 또한 꿈이었다. 그런 식으로 꿈속의 꿈을 몇 번이나 꾸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뒤숭숭한 장난 같았다.

조인휘는 시커먼 방 안에 무기력하게 누워 창문을 보았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알 수 없었다. 방 안에는 시계가 없고, 휴대폰은 꺼놓은 상태였다. 창밖의 어둑한 밝기로 보아 길어봤자 몇 시간 정도가 지났으리라 예상되었다.

딱딱딱딱딱….

바깥에서부터 들려오는 규칙적인 소리에 신경이 쏠렸다. 어딘가 익숙한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열자 예상했던 대로 빗소리가 음량을 키웠다. 세상이 온통 척척하게 젖고 있었다. 소나기처럼 거세지는 않지만 부슬부슬 내리는 빗줄기가 꾸준했다.

“…….”

이제는 정말 가고 없겠다 싶었다. 비까지 왔으니 있을 리가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좀 마음이 좀 편해지는 듯했다. 찝찝한 걱정거리 하나를 떨친 기분으로 창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편하게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방 안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왔다 갔다 무의미한 에너지를 소비하다가 겨우 몸을 눕혔다.

눈을 감자 이번에는 커다란 빗소리가 신경을 거슬렀다. 아직까지 열려 있는 창문이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닫으러 간 창문 앞에서 고개를 한 번 빼내어 보았다. 저도 모르게 아래쪽을 기웃거리던 조인휘는 미간을 찌푸리며 창을 닫았다. 애매하게 구는 스스로가 짜증스러웠다. 하지만 창문을 닫고 나서는 한숨을 내쉬며 방문 앞으로 다가섰다. 문고리를 붙들었다 놓았다 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미적지근하게 굴었다.

지금으로서는 확인만 하고 싶을 뿐이었다.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그때는 정말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한 고민을 끝내고 집 밖을 나섰다. 우산 하나를 챙겨 들고서 조인휘는 낡은 건물의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시커먼 아스팔트 바닥은 빗물로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물이 고인 웅덩이에는 가로등의 노란 불빛이 비쳤다. 그것을 보다 고개를 들었을 때, 조인휘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담벼락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산을 들고 나간 골목에서 좌우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새벽의 주택가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고,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오감으로 느껴졌다. 안심이 되는 한편 가슴이 허무하게 가라앉았다. 어째서인지는 몰랐다.

코끝으로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풍겼다. 축축한 대기에 섞여 든 특유의 향. 그것을 깨닫고 홱, 돌아본 조인휘는 지척에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고정원은 기다렸다는 듯 담배를 껐다. 땅을 한 번 내려다봤다가, 다시 눈을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 짙어진 눈으로 조인휘를 응시했다. 무언가 요구하는 사람처럼.

“…왜….”

조인휘는 흔들리는 눈으로 상대를 자세히 살폈다. 고정원의 머리칼과 어깨가 빗물로 꽤 많이 젖어 있었다. 비를 피하지 않은 몰골을 보며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어졌다.

“…일단….”

침을 삼켰다.

“일단, 들어와.”

뜨거워진 가슴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냥 진즉 나와 볼걸 그랬다고, 입구로 돌아서며 뒤늦은 후회를 곱씹었다.

눈앞의 거대한 등을 올려다보았다. 방이 작다는 생각은 못 했는데 고정원이 들어서자 민망할 정도로 공간이 옹색해졌다. 얼마 전 고시원 생활을 해 봤기 때문인지 그래도 이 정도면 널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려.”

조인휘는 조심스럽게 나간 거실에서 타올을 챙겼다. 고정원을 데리고 들어올 때도 이렇게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도둑처럼 들어왔었다. 혹시나 부모님이 나오실까 봐 심장이 터질 뻔했는데 들키지 않고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욕실에서 가장 커다란 수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건넨 수건을 말없이 받아 든 고정원은 젖은 머리부터 닦았다.

밝은 데서 보자 젖은 정도가 심했다. 차마 그대로 둘 수 없는 몰골이라 서둘러 여벌의 옷을 찾아보았다. 한참을 뒤적거리던 조인휘의 표정이 굳어졌다. 괜찮은 것들은 세탁기에 있고, 줄 수 있는 커다란 사이즈의 옷은 지나치게 후줄근했다.

망설이던 손이 구석에 놓여 있던 택배 상자로 향했다. 내내 봉해져 있던 상자가 뜯기며 안에서 새 옷이 나왔다.

…돌아오면 주고 싶었는데.

잠시 쳐다보다가 포장지를 벗기고, 내용물만 꺼내어 상대에게 내밀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있던 고정원이 물끄러미 그것을 받아 들었다.

선물해 주려고 사둔 트레이닝복 세트였다. 작년에 사준 검정색 트레이닝복을 교복처럼 잘 입기에 똑같은 디자인에 회색으로 주문해 두었으나 배송이 늦어지는 바람에 사고 이후에 받게 된 것이었다.

고정원은 그 자리에서 바로 갈아입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던 조인휘는 상대가 착의를 마치자 한 번 힐끔 보았다. 많이들 입는 스포츠 브랜드의 흔한 후드 집업과 팬츠였다. 색도 흔해빠진 회색인데 흔하지 않고 오히려 특별해 보이는 듯했다. 골격 탓인지 남들과는 전혀 다른 옷을 입은 것처럼 느껴졌다.

“…….”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 직후 고개를 떨구었다. 갑자기 욱하고 치민 감정이 스스로도 황당했다. 직접 줘놓고 이제 와서 다른 사람한테 뺏긴 기분을 느낄 건 또 뭔지.

“…이거.”

“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내가 입어도 돼?”

“…어. 입으라고 줬잖아.”

탐탁지 않아 했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불편했다.

“읏취!”

서 있는데 참을 새도 없이 재채기가 터졌다. 꼴사납게 뿜고 나니 뻘쭘했다. 비를 맞고 젖어 있었던 고정원은 정작 멀쩡해 보였다.

“…아무 데나 앉아.”

“응.”

대답만 할 뿐 고정원은 그대로였다.

어정쩡하게 팔뚝을 문지르며 조인휘는 새삼스레 의식되는 것을 느꼈다. 현란한 꽃무늬 벽지, 결로로 인해 생긴 벽의 곰팡이, 오래된 느낌이 나는 누런 비닐 장판 등, 좋은 것과는 거리가 먼 방의 상태가 갑자기 신경 쓰였다.

인테리어 잡지에 나올 법한 고정원의 본가가 떠올랐다. 자신들이 살았던 최신식 오피스텔도 머리 한구석에 떠올랐다. 그러자 더욱 살림살이가 부끄러워졌다. 부끄러운 자신이 또 부끄러워서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왜?”

눈이 마주친 순간 딱딱하게 물었다. 고정원은 특유의 여운 있는 말투로 아니, 하고 답했다. 이어서 무언가 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테고, 비까지 맞아가며 기다린 행동에 대해 변명이라도 할 법한데 그에 대해서는 짧은 언급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도 불편하고 눈치를 보는 건 자신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부모님 7시에 일어나셔. 그 전에만 나가면 돼.”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고정원은 최소한의 대꾸도 없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 저러나 싶어 불편한 심기를 담아 마주 보았다.

“…….”

잡념이 섞이며 눈동자가 애매하게 흔들렸다. 이 상황에서조차 외모에 대해 감탄하게 되는 현실이 어처구니없었다. 공들여 심어진 듯 정갈한 눈썹과 그 밑으로 깊은 눈이 보였다. 어떤 정서적인 환기를 일으킬 만큼 사연 있어 보이는 눈이었다. 어두운 눈동자에서부터 바깥쪽으로 미세하게 연해지는 홍채가 분위기와 깊이감을 더했다.

흠 하나 없이 완벽한 외형. 그러나 그 외형이 말 그대로 그저 완벽하게만 보였다. 객관적으로 감탄은 하지만 다른 어떠한 감정도 생겨나는 일은 없었다. 다른 차원의 사람을 눈앞에 둔 것처럼 무감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면전으로 손이 다가오기에 정신을 차리고 뿌리쳤다.

“왜 이래.”

“…뺨.”

내뱉은 목소리가 축축하게 울렸다.

“괜찮은 거야?”

걱정하는 말을 듣자 목이 꽉 메었다. 듣기 싫어 돌아서려 하자 두꺼운 손이 잡아 세웠다.

“어디 봐.”

목덜미에 기분 나쁠 만큼 높은 체온이 닿았다. 팔뚝 또한 움직일 수 없게 붙들렸다. 뒷목에 잔뜩 힘을 준 조인휘는 가까워지지 않기 위해 버텼다. 밀착해서 얼굴을 살펴보는 상대의 행동이 곤란하기 짝이 없다.

좋지 않은 감정을 그대로 담아 직시한 순간이었다. 마주한 눈에 생각보다 알기 쉬운 감정이 떠올라 있어 눈이 크게 뜨였다. 너무도 익숙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빠져들었다.

아….

향수 섞인 체취가 끼치며 입술이 덮였다. 갈구하듯 쪼는 키스가 순식간에 깊어졌다. 큰 손이 목뒤부터 뒤통수를 감싸자 곳곳이 화끈거렸다. 닿은 곳도 입 속도 모두 열이 올랐다. 뜨거운 기운이 척추를 따라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조인휘는 감전된 것처럼 상대를 밀쳤다.

“…….”

눈이 마주치자 그날 아침 느꼈던 기분이 느껴졌다. 몹시 거북했다. 이런 식의 정체 모를 죄책감을 또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러지 마.”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싫어서 헤어져 놓고 느닷없이 찾아오고 관여하고, 어째서 연인들 사이에서나 하는 행동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불쾌했다.

불현듯 ‘몸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가슴이 덜컥했다. 섹스 때문이었나. 이 모든 행동이 그저 몸뿐인 관계를 맺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자 울렁거렸다. 어지럼증이 시야를 흐렸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넌더리 나게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너랑 이런 거 할 생각 없어.”

스스로 듣기에도 단호했다. 보다 확실하게 말하기 위해 조인휘는 재차 입을 열었다.

“키스든….”

섹스든.

행여 밖에 들릴까 작게 덧붙였다.

“그건 앞으로도 쭉 마찬가지고. 너 이러는 거 시간 낭비….”

말하는 도중 서로의 눈이 마주친 때였다. 쏘아붙이는 강한 시선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심장이 뛰는 바람에 시선을 피하고 침을 삼켰다.

“…오늘은, 오늘까지는 어쩔 수 없으니까 자고 가. 나는 마루에서 잘게.”

나가려는데 부지불식간에 붙들렸다. 고정원은 붙들었던 손을 금방 놓았다.

“여기서 자.”

“…….”

“그럴 생각으로 온 거 아니니까.”

반신반의하기도 했지만 표면적으로나마 안도되는 대답이었다. 나가서 자기도 사실 애매했기 때문에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자리에 못 박혔다.

난처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려던 조인휘는 입을 다물고 도로 삼켰다. 거북하게 뭉친 숨들이 명치께에 걸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동침은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방의 가운데에 매트가 놓여 있고, 양쪽으로는 여분의 공간이 그리 넓지 못한 상황이었다. 혼자 쓸 때는 몰랐는데 매트가 굉장히 작았다. 편하게 누우면 서로의 몸이 닿았기 때문에 그게 싫어서 떨어지자 등이 반쯤 바닥에 닿았다.

“가까이 와. 그렇게 자면 불편하잖아.”

작게 권하는 말을 딱 잘랐다.

“됐어. 지금 편해.”

어두운 방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안 해. 의식할 거 없어.”

사람을 자의식과잉으로 몰아가는 발언이었다. 발끈해서 매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자 어깨와 다리가 일부 닿았다. 닿든지 말든지, 그저 살덩이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상관치 않았다.

맞닿은 부위에서 열기가 피었다. 둘 다 체온이 있는 만큼 어쩔 수 없었다. 숨소리마저 들릴 것 같아서 모로 눕자 벽을 마주하게 되어 그나마 좀 나았다.

잠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꾸준히 잡념이 반복되었다. 여러 종류의 생각이 지나간 끝에 비좁은 고시원에서 소리 죽여 하던 행위가 구체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잡념을 몰아내기 위해 의식적으로 슬픈 생각을 했다.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10월에도 방 안은 더웠다. 비가 내려 기온이 더욱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붙어 있으니 살갗이 후끈거렸다. 생각해 보면 고정원이랑 있을 때면 늘 이렇게 후끈후끈했다.

“…….”

눈을 깜빡대던 조인휘는 어둠을 뒤집어쓴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잠들지 못하고 있자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은밀한 목적이 하나 생겼고, 그 목적이 생긴 뒤로는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을 견디기가 한결 수월했다.

아주 오래 기다린 기분이었다. 동이 트기 시작하며 창문을 채운 짙푸른 색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기척을 내지 않으려 애쓰며 조인휘는 조심스럽게 등을 돌렸다.

바른 자세로 누워 잠들어 있는 고정원이 보였다. 어렴풋한 새벽어둠 속에서, 이제야 겨우 자신이 알고 있는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익숙하디익숙한 애인의 잠든 모습. 이것을 보려고 그 긴 시간을 기다렸다.

잠버릇이 없는 고정원은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했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정적인 모습이 익숙하여 코로 작게 웃음을 흘렸다. 오래도록 기다린 보람이 행복감과 함께 밀려들었다.

깊고 느린 숨이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코끝에 댄 조인휘는 숨결을 느끼고 뗐다. 별 게 다 좋아서 실없는 웃음이 났다. 홀린 듯 보고 또 보고… 그동안 모자랐던 걸 채우려는 것처럼 끈덕지게 보았다.

오래도록 얼굴에만 머물던 시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흉곽과 함께 조인휘의 눈이 강인해 보이는 손에 머물렀다.

공연히 빈 주먹을 움켜쥐었다. 보기만 하려 했는데 막상 보니까 잡고 싶은 충동이 솟구치고 있었다. 깨면 안 되니까 이걸로 만족하자 생각하면서도 입 안이 말랐다.

억지로 붙들고 있던 욕심이 끝내 터졌다. 간절하게 보고 있던 조인휘는 불가항력처럼 눈앞에 있는 손 밑으로 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바닥끼리 맞붙자 더욱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닿는 것으로 모자라 손가락을 오므려 붙들자 단단한 강도와 익숙한 형태가 손안에 가득 잡혔다. 꿈에서나, 상상 속에서나 붙들 수 있었던 그리운 애인의 손이었다.

조인휘는 자기도 모르게 불렀다.

“정원아.”

부르자 상대가 정말로 ‘정원이’가 된 것 같았다.

“정원아….”

계속 불렀다. 몇 번을 반복해 부르다가 얼굴이 온통 젖은 걸 느꼈다. 빼낸 손으로 서둘러 얼굴을 훔쳤다. 급하게 자리에 누우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일어났을 때 모든 게 돌아와 있으면 좋겠다. 아니, 아마 안 돌아오겠지만….

희망적인 생각과, 실망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생각이 뒤엉켰다. 터지려는 감정을 억지로 누르는 사이 늦은 잠기운이 몰려왔다.

* * *

“잘생겨도 너무 잘생겼다.”

칭찬을 들은 고정원이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뭐라고?”

“고정원입니다.”

“부모님이 아들 얼굴만 봐도 뿌듯하시겠어, 아주. 훤칠해서는… 나는 무슨 우리 집에 웬 배우가 있나 했어.”

이어지는 칭찬 세례에 하하, 웃음소리가 터졌다. 쑥스러운 듯 뒷목을 문지른 고정원은 옆에 선 조인휘를 쳐다보았다. 칭찬받는 당사자도 아니면서 야릇하게 빨개진 얼굴이 보였다. 그 위로 떠오른 감정은 명백한 거북함으로, 이 상황이 불편하다는 걸 너무나도 알기 쉽게 드러내고 있었다.

“왜 연예인 안 했대? 이렇게 잘난 얼굴 두고.”

어른에게 시선을 돌린 고정원이 눈을 휘어가며 웃었다.

“끼가 없어서요.”

“끼가 뭐 별거야. 얼굴이 끼지.”

“그런가요. 그럼 지금이라도 해볼까 봐요.”

천연덕스럽게 장단을 맞추었다. 살갑게 구는 태도에 어른의 입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넘치는 호감과 신뢰가 담긴 눈빛이 고정원을 향했다.

“그나저나 정원이한테 미안해서 어떡해? 오는 줄 알았으면 뭐 제대로 된 거라도 해놓고 가는 건데.”

“아뇨, 괜찮습니다. 밤늦게 찾아온 것만으로 죄송스러운데요. 자고 계실 때 온 거라… 제대로 인사 못 드려서 죄송해요.”

“그럴 수도 있지 뭘.”

“괜찮으시면 다음에 다시….”

말을 이어가는 도중 외침이 끼어들었다.

“엄마!”

한 발짝 다가온 조인휘가 사이를 가로막고서 말했다.

“얼른 나가셔야죠. 늦으면 안 되잖아.”

“그래, 국 끓여 놓은 거 있으니까 그거라도 둘이서 먹고 가. 정원아, 다음에 다시 또 놀러 오고. 그땐 진짜 맛있는 거 해줄게.”

“네, 어머니. 다음에 또 뵐게요.”

고정원이 배웅하듯 현관까지 다가갔다. 그 뒤로 조인휘가 금방이라도 중재할 것처럼 따라붙었다. 웃음이 만면해서 고정원을 토닥거리던 어머니가 나가시자 현관문이 쾅, 닫혔다.

침묵이 깔린 집 안에서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고 있던 중이었다.

“…너 얼른 가.”

눈을 내리깐 채로 조인휘가 말했다. 싸늘한 말투와 표정에 고정원이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가라고. 못 들었어?”

왜 이렇게 날이 섰나. 새벽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험악한 분위기는 분명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예민한 반응의 원인을 추측하던 고정원이 고개를 돌리며 작게 한숨을 뱉어 냈다. 어른과 인사를 나눌 때부터 이상했던 조인휘의 행동을 떠올리고는 곧장 상황을 납득했다.

삼 년간 사귀면서 조인휘는 분명 자신의 집에 드나들었다. 하지만 오늘 자신을 처음 보는 어른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그동안 자신은 조인휘의 집에 인사드린 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중요한 첫인사를 애인이 아닌 ‘남’에게 빼앗겨 화가 났다는 게 이제 눈에 보였다.

고정원은 곁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머니가 밥 먹고 가라고 하시던데.”

조인휘가 홱, 올려다보았다. 일그러진 눈에 비친 감정은 넘실대는 불길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7시 전에 나가라고 했잖아. 근데 왜…!”

화를 내는 듯하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말을 삼킨 조인휘는 침묵으로 간극을 만들어 놓고 제 눈가를 가렸다.

“재워줬으면 됐잖아. 그냥…, 그냥 나가. 나가주라 제발.”

언행에 속속들이 짜증이 스며 있었다. 억누르고 있는 감정들은 잘못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컥 범람할 듯했다.

“…….”

버티고 서서 고정원은 더운 숨을 내쉬었다. 지탱하는 양쪽 다리부터 복부, 가슴, 목줄기까지 돋아난 혈관이 튀어 오를 것처럼 씰룩거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옷은….”

얼굴에서 손을 치운 조인휘가 작게 말했다.

“…벗어놓고 가.”

볼이 조금 붉어진 것을 보며 고정원은 소리 나지 않게 헛웃음 쳤다. 알고 있었지만 이런 취급을 받으니 기가 막혔다. 그래 봤자 어차피 내가 입을 옷 아닌가? 목구멍까지 치민 한마디를 삼키고는 단숨에 상의 지퍼를 내렸다.

지익-.

눈앞에서 옷을 벗자 조인휘가 시선을 피했다. 보란 듯 벗어젖히고서 간밤에 머물렀던 방으로 향했다.

창고 같은 방은 한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왜 이런 데서 애를 재우나. 새벽녘에 했던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제 옷으로 갈아입은 고정원은 벗은 옷을 허물처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체온이 스민 옷을 굳이 상대의 품에 안겼다.

“미안.”

사과하자 조인휘가 당황 어린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눈길을 피하고 미간에 주름을 새기는 모습이었다. 어서 사라지라는 듯, 거부의 분위기를 전면으로 풍겼다.

“…….”

고정원은 깡마른 얼굴과 몸을 내려다봤다. 휴학은 왜 한 건지. 뺨은 누구한테 맞았던 건지.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데 그렇게 마른 건지. 얼굴을 본 순간부터 치밀어 오른 궁금증들을 목 안에서 눌렀다.

시선을 느끼고 있으면서 한 번을 마주 보지 않는다. 덤덤한 얼굴을 하고서 조인휘는 현관을 향해 앞서 걸었다. 철컥, 현관문을 열어젖히고는 묵묵히 고개를 떨구었다. 나가라는 뜻이 행동으로써 명백하게 전달되었다.

강력한 거부를 지탱하고 있는 건 완고한 의지였다. 고정원은 그 의지를 자극하는 일 없이 현관문을 나섰다. 밖으로 발을 내딛자 뒤에서부터 철문이 닫혔다.

축객하듯이 쾅, 큰 소리로 닫힌 현관을 잠시 바라보고 서 있었다. 돌아선 고정원은 층층이 먼지가 낀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갔고, 다 내려가고 나서야 뒤늦게 차키와 휴대폰을 챙겨 나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

되돌아가려던 고정원은 그러나 멈칫했다. 올라가지 않고 그대로 골목까지 걸어 나갔다. 건물의 옆으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자 어느 순간 요란하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정원!”

부름이 근접한 순간이었다. 앞을 스치려던 조인휘가 휘청거리며 멈추어 섰다. 자리에 서 있는 고정원을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 손에는 차키와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고마워.”

말한 고정원이 손을 뻗었다. 숨이 가빠 헉헉대는 조인휘에게서 차키와 휴대폰을 받아 들면서 손길이 부드럽게 스쳤다.

반공중에서 서로의 시선이 부딪쳤다. 비가 갠 하늘은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빛에 잠긴 조인휘의 눈은 홍채가 연해지며 안을 채운 문양까지 또렷했다. 까만 동공으로는 마주하고 있는 자신이 비칠 듯했다.

“…너 왜….”

조인휘의 눈이 흔들렸다. 마주 보면서 고정원 또한 입 안이 마르는 걸 느꼈다. 몸이 굳고, 원치 않는 초조함이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여기서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이 더없이 확고했다.

아찔한 현기증이 시야를 흐렸다. 휘청거린 고정원을 조인휘가 몸으로 잽싸게 받쳤다.

“야, 너 왜 이래?”

겁먹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중심을 무너뜨린 채로 고정원은 그 품에 파고들었다. 가느다란 등허리를 붙들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뭘 먹고 뭘 바르면 이런 냄새가 나나. 환장할 만큼 좋은 냄새가 코끝에서부터 뇌 속을 파고들었다.

참지 못하고 힘주어 끌어안자 팍, 하고 밀어 내는 충격과 함께 몸이 떠밀렸다.

“…….”

혐오를 담은 눈빛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심장이 둑, 둑, 뛰며 거세게 반응했다. 장기가 뒤틀리듯 조여 왔다.

“…아파.”

저도 모르게 말이 나갔다. 뱉어진 말에 조인휘의 표정이 달라졌다.

“뭐?”

뭘까 이게.

허탈한 느낌을 발치에 굴리며 고정원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가끔… 뭔가 생각날 것 같은데….”

“…….”

“그럴 때면 어지러워.”

마주한 조인휘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굳어졌다. 믿을 수 없는 것처럼 한참을 올려다보고는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기억이…, 기억이 날 것 같아? 뭔가, 뭐라도 생각나는 것 같은 거야?”

감정이 물씬 배어난 목소리였다. 강력한 염원으로 인해 전율마저 스며 있었다. 고정원은 한 번 더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그런 것 같아.”

무언가 기억이 났다거나 혹은 날 것 같다거나.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금 전의 현기증은 연이은 수면부족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은 상태에서 강력한 햇살을 받자 일시적으로 나타난 증상일 뿐이었다.

“벼, 병원에는? 혹시 가봤어?”

“아니.”

“그럼, 지금 가보자 나랑. 가서 검사받고 처방받아 보자 같이.”

말하며 조인휘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흥분한 모습을 내려다보는 고정원의 두 눈이 서서히 짙은 색으로 잠겼다.

“나는 그냥….”

“그냥, 뭐? 괜찮아, 뭐든 들어줄 테니까 다 말해봐.”

조인휘는 안달 난 것처럼 팔을 덥석 붙들었다. 방금까지 나가라고 내쫓던 것과는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고작 몇 마디 말로 한순간 바뀐 구도와 상대의 적극적인 태도가 조금도 기분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붙든 손을 내려다보며 고정원은 잠시 말을 보류했다.

“…너랑 있고 싶어.”

하루 종일.

욕구에 가까운 말이 툭 터져 나왔다.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멍한 얼굴이 보였다. 팔을 붙든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고정원은 마른 목을 축이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안 돼?”

잠시 망설이는 침묵이 지나갔다. ‘뭐든 들어주겠다’ 했던 말처럼, 머지않아 조인휘는 작은 턱을 끄덕거렸다.

아침 일찍 오픈한 음식점을 찾다 보니 선택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들어온 곳은 규모와 인테리어가 패밀리 레스토랑을 연상시키는 24시간 설렁탕집이었다. 주문한 갈비찜과 설렁탕 두 그릇이 오래지 않아 식탁 위로 올라왔다.

“먹자.”

하루 만에 제대로 된 첫 끼니였지만 내키지 않았다. 국물을 한 수저 뜨고 맞은편을 살피자 관찰하는 기색의 조인휘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대화를 시도하는 대신 갈비를 하나 집어 주었다.

“먹어 봐.”

조인휘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 들었다. 한 입 우물거리고는 금방 입부터 열었다.

“그…, 기억이, 뭐라도 조금이라도 스치듯이 뭐 난 게 있는 거야…? 정말, 사소한 거라도.”

이미 음식은 안중에 없었다. ‘기억’에 대해 말을 내뱉은 직후부터 몹시 상기돼 있었다. 그러잖아도 커다란 눈이 반들거리며 빛나자 존재감이 강했다.

“…….”

어린 소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정도 그렇지만 마른 몸 때문이었다. 목덜미나 팔다리가 가늘다 못해 부러질 것처럼 보였다. 지난번보다 마른 게, 뭐든 많이 섭취하고 살을 찌우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냥…. 순간순간 장면이 지나가는 게 다야. 그래도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해.”

식사를 하게 만들 생각으로 고정원은 애매하게 떠벌렸다.

“아….”

맞장구치는 감탄사가 흐렸다. 잠시 넋을 놓던 조인휘는 격렬할 정도로 끄덕거렸다.

“응, 맞아. 그거 엄청 긍정적인 반응이지 당연히! 아, 진짜…, 다행이다 진짜… 난 이럴 줄 알았어. 곧 돌아올 줄 알았어. 의사 선생님이 원래 금방 돌아온다고 하셨거든 보통.”

“그래. 아마 곧 돌아올 것 같으니까….”

눈물이 고인 것도 아닌데 망막이 반짝거렸다. 희망과 환희로 범벅된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일단 밥 좀 먹어.”

“아, 응.”

대답한 조인휘는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식사하기 시작했다. 기력을 되찾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퍼먹었다.

“천천히 먹어. 체할라.”

“…응.”

별말을 한 것도 아닌데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감정이 요동치는 듯했다. 음식을 입 안에 가득 품은 채 눈을 접어 웃기까지 했다.

음식물이 넘어가지 않아 수저를 내려놓은 고정원은 가만히 물을 들이켰다.

“근데….”

급하게 음식을 삼킨 조인휘가 말문을 열었다. 사레가 들렸는지 기침을 하다가 겨우 뒷말을 이었다.

“그… 정원이 너도 너 성격 달라진 거 느꼈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쳐다보았다.

“사고 후에 머리 다치면 종종 그런 일 있다더라고. 원래 너 그런 성격 아닌데, 약간… 예를 들면, 되게 점잖은 사람이 난폭해진다고 해야 하나?”

조인휘는 기다렸다는 듯 수다스럽게 떠들어댔다.

“원래 인간이 하는 행동이나 성격 같은 게 뇌 안에 무슨, 특정 부위들하고 밀접하게 연관 있어서 그렇다는데. 아무튼, 너 원래 안 그랬는데 갑자기 말하는 것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엄청 달라져서…. 너도 그런 케이스 같아서 걱정했었거든.”

“…….”

얼마나 좋은 면만 보이려 노력했을지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 노력을 삼 년이나 지속시킬 정도로 공을 들이고 있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사고로 성격이 변한 게 아니라 원래 성격이 드러났을 뿐이라는 짓궂은 대답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상처를 주거나 질리게 하거나, 그래서 그 후에 조인휘가 사라지게 되면 고스란히 피해를 입게 되는 게 누구인지 깨달은 탓이다.

“그리고 기억 돌아오면, 기억 잃었을 때 일이 아예 지워지는 경우도 있고 다 남는 경우도 있다던데. 너는 다 지워져 버렸으면 좋겠다, 제발. 그치.”

“…….”

왜. 네 눈앞에 나는 지워졌으면 좋겠어?

묻고 싶은 말을 한 글자로 짧게 압축시켰다.

“…왜?”

“아니… 좀, 그렇잖아….”

말하기 망설이는 상대에게 고정원이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제야 안심한 것처럼 조인휘는 나머지 말을 떠들어댔다.

“그냥 얼른, 너 기억 돌아와서 지금 이런 기억까지 다 사라졌음 좋겠어.”

“…….”

“근데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눈치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꿈에 부푼 얼굴을 했다. 지그시 쳐다보던 고정원이 시선을 거두었다. 수저로 탁한 국물을 저으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지금 나는 싫구나.”

으하하, 천진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아무래도 좀… 그럴 수밖에 없잖아. 솔직히, 다시는 보기 싫지 나는. 그러니까 얼른 기억 찾아 바보야.”

벌써부터 기억이 돌아온 것처럼 들떠 있었다. 고정원의 입술에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나는 고정원이 아니야?”

‘아니야, 넌 정원이 아니야… 넌 아니야….’ 주문처럼 중얼대던 말이 떠오르면서 표정이 멋대로 굳어졌다.

“…어?”

“기억 잃어도 네 애인인데?”

“아….”

갑자기 웃음기를 거둔 조인휘가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 지금은 그냥… 뭐라고 해야 되나, 별로 안 친했던 동기에 가까우니까.”

뒷덜미부터 등근육이 꽉 조이고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섹스도 했는데?”

고정원이 작게 덧붙였다. 두 번이나 진득하게 결합되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한데. 너한테는 그게 아무것도 아니야? 속으로 되물으며 뜨거운 감정을 다스렸다.

“…어…?”

경직된 공기가 느껴졌다. 곤란해하는 표정이 보였다. 고정원은 그제야 얼굴 근육을 최대한 느슨하게 무너뜨렸다. 어떻게 보일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농담이야.”

집어 든 반찬을 조인휘의 그릇으로 옮겨주었다. 그리고 애인처럼 다정하게 덧붙였다.

“얼른, 식기 전에 먹어.”

“아, 응.”

크게 한 입 떠서 우물거리며 조인휘가 물었다.

“너는 안 먹어?”

먹고 있다는 대답과 함께, 고정원은 역하게 느껴지는 음식물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불쾌한 두통과 이물감이 한꺼번에 느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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