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기억상실 IF 외전) (26/30)

1.

서두른다고 했는데 벌써 저녁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고정원은 신호를 응시하며 핸들을 두드렸다. 약속 시간에 늦지는 않겠지만, 홀로 세운 계획이 무산된 것이 아쉬웠다. 미리 말해둔 시간보다 두어 시간쯤 일찍 도착하여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조수석에는 조인휘에게 줄 선물과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지난달 이미 생일 선물 명목으로 둘이서 해외여행을 다녀온 바가 있기는 했다. 여행비를 전부 부담하는 조건으로 다른 선물은 챙기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그렇다고 생일 당일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말이 안 됐다. 어차피 제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어길 생각으로 한 약속이기도 했다.

도착하기 전에 꽃을 한 다발 더 살까.

문득 양팔이 벌어질 만큼 커다란 꽃다발을 든 조인휘가 보고 싶어졌다. 좋아할까, 아니면 당황할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는 사이 겨우 신호가 바뀌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이제 10분쯤 뒤면 집에 도착이었다. 얼굴을 볼 생각에 만족스러운 숨이 터졌다. 급한 마음처럼 고정원은 속도를 올려 쭉 직행하였다.

하지만 또 한 번의 정지 신호로 인해 주행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인내심을 시험당하는 기분을 느끼며 서서히 속력을 줄이던 때였다.

쾅!

뜬금없는 굉음과 함께 예기치 못한 충격이 후두부로 번졌다. 짧은 찰나에 손이 조수석으로 뻗어 나가며 고정원은 억세게 힘줄이 돋은 팔로 선물을 붙들었다.

뒤흔들렸던 차체가 가라앉은 순간 시야는 까맣게 암전되었다.

7시가 넘어가도록 고정원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이례적인 행동을 걱정하며 조인휘는 현관에서 서성거렸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15분 전쯤에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되지 못했다. 메시지도 남겨 놓았지만 답신은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

거실의 소파에 앉은 조인휘는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았다. 분을 알리는 숫자가 바뀔 때마다 초조한 기분이 강해짐을 느꼈다.

혹시 일부러인가. 생일 서프라이즈를 해주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늦는 것일지도 몰랐다. 선물을 준비하지 못하게 했으니 몰래카메라 같은 것을 준비하는 것인지도.

거기까지 상상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생일이라며 미역국까지 끓여주고 나간 사람이 새삼 그런 행동을 할 것 같지 않았다.

제발 제발, 아무 일도 없어라. 진심을 다해 빌면서 조인휘는 한 번 더 통화를 시도했다.

뚜르르르…. 연결음이 또다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기계음으로 연결될 거라고 짐작될 즈음 휴대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여보세요.

“…누구세요?”

낯선 목소리 너머로 혼잡한 소음이 겹쳤다.

-여기 서울성모병원인데요.

병원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이었다.

-휴대폰 주인분이랑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조인휘의 시야가 회전했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뛴 나머지 귀와 눈 주위로 압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 애… 아니, 동거인, 인데요.”

간신히 대답했다.

-보호자분 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환자분 교통사고로 지금 여기….

끝까지 듣기도 전에 혼비백산하여 뛰쳐나갔다.

“어어….”

괴상한 목울음을 내며 택시를 잡고, 기사님께 위치를 설명한 뒤에는 휴대폰을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포털 사이트에 ‘추돌’과 ‘교통사고’를 입력해 보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양손으로 움켜쥔 채 덜덜거리고 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어컨 많이 추워요?”

택시 기사의 물음에 조인휘는 횡설수설했다.

“예? 아뇨, 그게 아니라, 아뇨….”

반쯤 넋이 나가 떨었다.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우왕좌왕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병원의 접수처에 도달해 있었다.

병원 안에서 부들부들 떠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이상해 보일까 봐 화장실에서 간신히 진정을 한 뒤에 절차를 밟았다. 고정원의 보호자임을 밝히고, 안쪽에서 설명을 들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솔직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검사 결과는 심각하지 않다’는 것만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큰 내상이나 외상 없이 비교적 가벼운 찰과상에 그친 정도이며, 머리에 충격이 있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다는 설명이었다.

몇 시간 후면 깨어날 거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크고 작은 후유증은 있을 수 있고, 일정 기간 내원해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고정원은 병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든 것처럼 우아하게.

“…….”

얼굴을 보자 그제야 머리부터 발끝에서 힘이 빠졌다. 다리가 꺾이며 휘청, 흔들렸다. 주변의 누군가가 잡아주려고 다가왔고, 간신히 중심을 잡은 조인휘는 모르는 사람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렸다.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하게 젖은 제 얼굴을 닦으며 고정원에게 다가갔다.

옆에 앉아 간호랄 것도 없는 간호를 시작했다. 이불을 올려주고, 손을 잡아주고, 머리를 쓸어주거나 가슴팍을 토닥여 주기도 했다.

그렇게 코를 훌쩍거리며 고정원의 얼굴만 들여다보기를 한 시간쯤이었다.

“엇, 저… 정원아! 정원아!”

생각보다 일찍 의식이 돌아왔다.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크게 나갔다.

“너 정신 들어? 괜찮아? 어디, 아픈 덴 없어, 괜찮아?”

짙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인상을 찌푸린 고정원이 창백한 얼굴로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여기 어디야.”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조인휘는 울 것처럼 웃으며 답했다.

“여기, 여기, 병원. 너 집에 오다가 사고 나서….”

‘사고’라고 내뱉은 것만으로 손이 덜덜덜덜 고장 난 알람시계처럼 떨렸다. 손목을 마구 털어 떨림을 가라앉히고 나서는 서둘러 물을 따라주었다. 완전히 가라앉히지는 못한 탓에 컵을 건네주면서 흔들흔들 물을 쏟았다.

“…….”

반쯤 물이 줄어든 컵을 받아 들고서 고정원은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상하리만치 진지하게 주시하는 표정이었다. 심장이 철렁했다.

“왜…, 어디 아파? 머리가 아파?!”

눈빛이 꼭 생소한 걸 보는 사람 같아서 이상했다. 정말로, 너무나 이상했다. 상태를 묻는 호들갑에도 고정원은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게 응시할 뿐이었다. 어딘가 달라진 상태를 깨닫고 공포감에 휩싸인 조인휘가 너스콜을 눌렀다.

“선생님, 얘, 상태가 이상한 것 같아요. 뭔가, 머리 다친 것 때문인 거 같은데….”

간호사에게 설명하며 조인휘는 흔들거렸다. 양발이 서로 꼬이면서 휘청거리고 머리는 기절 직전처럼 어지러웠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최대한 설명하려고 애썼다. 이상 상태를 최대한 명확하게 설명해야 했다.

“잠깐만.”

내내 묘한 눈길로 지켜보던 고정원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말을 멈춘 조인휘가 고정원을 쳐다보았다. 병실의 모든 시선이 고정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너, 조인휘잖아.”

“…….”

쥐 죽은 듯 조용해진 병실로 조소와 비슷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목소리였다.

* * *

외상 후 일시적 기억 상실.

황당하게도 그게 자신의 진단 결과였다. 일반적으로 단기간에 회복되지만 다른 증상들이 동반될 시에는 내원하라는 설명이 덧붙었다.

퇴원을 결정한 고정원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조인휘와 함께 낯선 오피스텔로 향했다. 조인휘의 입에서 나온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남자와 사귀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같은 과 조인휘와 삼 년째 교제 중이며, 사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부터 동거를 하고 있었다고.

일어나 보니 갑자기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것도 모자라 그 세월을 메꾼 내용들이 비현실적이고 기가 막혔다.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불가해한 지점이 지나치게 많았다. 차라리 조인휘가 무언가를 노리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현실적이었다.

병원에서 눈을 뜨고부터 고정원은 모든 상황을 불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상냥한 태도를 취했다.

“…많이 당황스럽겠다.”

“어?”

먼저 들어서서 허둥지둥 안내하던 조인휘가 돌아보았다. 눈망울이 쏟아질 것처럼 눈꺼풀이 벌어져 있었다.

“뭐 나도 그렇지만, 인휘 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엄청 섭섭할 것 같은데.”

사귀는 사람이 기억을 다 잃었으니.

덧붙이자 딱딱해지는 듯하던 표정이 금방 다시 밝아졌다.

“야, 나는 너 큰 사고 안 난 것만으로 얼마나 다행인데. 너 최근 삼 년만 기억 안 나는 거잖아. 그 전은 다 나지, 그렇지?”

“…그렇지. 나는 지금 신입생인 걸로 기억하니까. 내가 기억하는 인휘 넌, 밝은 갈색 머리였는데.”

귀에 피어스도 있었고. 덧붙이며 귓불을 슬쩍 건드렸다. 놀란 것처럼 퍼뜩, 상체를 뒤로 뺀 조인휘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손끝이 닿았던 귓불은 그 부분만 물든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

고정원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오래 사귄 연인 사이라고 해 놓고, 고작 이 정도 스킨십으로 이런 반응이라니.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완전히 기억 다 잃어서 자기 자신이 누군지, 이름도 까먹고 그런 사람들도 나오잖아. 너 그거 아니어서 진짜 다행이야. 그런 경우에는 기억 안 돌아오면 완전 큰일일 거 같지 않아? 아님 뭐 계속 기억이 갱신 안 되고 매일 어느 날 이전으로만 머물러 있는 경우라든가. 영화긴 해도 그런 거 너무 무섭더라고.”

“…그러게.”

역시나 조인휘는 쓸데없는 말이 많았다. 벌써부터 느껴지는 피곤함에 적당한 대꾸를 일삼으며 집 안을 죽 둘러보았다.

“…….”

물건의 취향이 상당히 익숙했다. 정리법이나 인테리어 등, 자신이 머무르던 공간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사귀는 게 맞든 아니든, 같이 살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하면 더더욱 석연치 않은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얼른 밥부터 먹자.”

자신이 앉아 있는 동안 조인휘는 분주하게 밥을 차렸다. 식탁 위로는 미역국과 가짓수 많은 반찬들, 그리고 막 조리한 계란프라이가 올라왔다.

“다 네가 만든 거야?”

내려다보며 묻는 말에 조인휘가 어색한 기운을 풍겼다.

“반찬 몇 개는 니가 한 거고, 미역국도 정원이 너가 아침에 하고 나간 거.”

“…….”

소고기가 들어간 미역국이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고정원은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꼈다. 이걸 만든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기분, 그리고 집 안을 둘러보며 내내 부부의 살림집이라고밖엔 느껴지지 않는 흔적과 생활감을 목도한 영향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해서, 그래서 내가 의사 선생님한테….”

산만한 조인휘는 식사 내내 입을 쉬지 않았다. 영양가 없는 수다에 맞장구를 치는 것도 지겨워 종내에는 침묵을 택했다. 조인휘는 호응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떠들어댔다. 입맛이 떨어져 깨작대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단순한 사람들은 속 편해서 좋겠다는, 솔직한 조롱을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여기가 우리 같이 쓰는 방인데…. 당분간, 너 혼자 써.”

식사 후, 조인휘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그게 너한테 아무래도 편할 거 같아서. 어 암튼, 편하게 쉬어 네 집이니까. 너 마음대로 다 하고, 뭐 찾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보고. 불편한 거나, 뭐 혹시 아프다거나. 아니면 뭐 기억이 난다거나….”

…알았지?

올려다보며 묻는 상대가 성가셨다. 막말로 제 입장에선 호감 있던 사람도 친했던 사람도 아니었다. 생판 남이 보호자 행세를 하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럴게. 고마워.”

형식적으로 답한 고정원은 자리를 피했다. 씻은 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차단이 되자 전신으로 들러붙던 불쾌함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후….”

단절되었음에 만족감을 느끼며 담배를 찾았다. 하지만 방 안 어디를 뒤져봐도 보이지 않았고, 사 올까 했지만 귀찮아져서 침대로 누웠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나서 휴대폰을 꺼냈다.

“…….”

메시지 내역과 통화 내역을 쭉 훑어 내리자 애인으로 추정되는 저장명이 분명하게 보였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내용을 보니 상대는 조인휘가 확실했다.

인휘야, 애기야, 자기야. 유치한 호칭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통화는 기록을 보니 강박적으로 하루 대여섯 번이 기본인 모양인데, 그것 또한 자기가 추구하는 연애 스타일과는 정반대였다. 보면서도 다른 사람의 흔적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위화감이 들었다.

정말로 상대가 조인휘라는 것. 그리고 이런 식으로 무려 삼 년째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까지 모두 증거를 통해 확인하면서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사진첩을 열어 보았고, 예상대로 파악할 만한 단서랄 건 보이지 않았다. 클라우드는 패스워드가 맞지 않았다. 늘 사용하던 조합이 아니라는 게 의외였다. 새롭게 비밀번호를 설정하려다 말고 눈을 감았다.

“하….”

긴 한숨이 깔렸다. 백번 양보하여 상대가 동성인 것까지는 어떻게든 납득할 수 있었다. 상대가 조인휘가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이다.

고정원은 얼마 전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조인휘의 모습을 떠올렸다. 물론 실제로는 얼마 전이 아니라 삼 년 몇 개월쯤 전이겠지만.

‘그러니까아 혀를, 혀를 잘 써야 된다고…. 키스는, 쪽쪽거린다고 다가 아니야….’

동기들끼리 모인 술자리였다. 떨거지들 사이에서 ‘강연’ 비슷한, 무어라 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추태를 부리던 것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지독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대체 삼 년 동안 어떤 대단한 사건과 대단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대체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쳤기에 상대에게 연애감정을 품게 된 것인지. 이쯤 되면 영영 알 수 있는 길이 막힌 불가사의에 가까워 차라리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하나 인정하자면 이전부터 조인휘에게 눈이 자주 갔던 건 사실이었다. 행동이 우스워서. 보고 싶지 않아도 눈에 띄니까. 그저 그뿐이었다.

“…….”

하지만,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는 곧장 알아보지 못했다. 머리의 색과 모양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라거나 단순히 그런 문제는 아니었다. 차림새나 꾸밈의 문제라기에는 차이의 간극이 매우 컸다. 다른 사람이라고 우기면 속을지도 모를 정도로 분위기와 인상이 달라져 있었다.

삼 년의 세월이라는 게 그렇게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건가.

생각하며 일어난 고정원은 거울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상당히 달라진 것 같기도,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

또다시 담배 생각이 간절해지면서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열었지만 후텁지근한 공기가 들어오기에 다시 닫았다. 에어컨의 온도를 몇 도쯤 낮추고, 신경질적으로 가운을 벗어 던졌다. 침대에 몸을 눕히며 협탁 위에 자리하고 있는 리모컨으로 불을 껐다.

암전된 방 안에서 고정원은 조인휘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조금 전, 식사를 함께하던 조인휘를.

애인이 몇 년간의 기억을 통째로 잃은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둘 사이의 일, 관계를 모조리 잊었다고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태연한 모습이었다. 쉼 없이 떠들고, 웃고, 잘 먹고. 그런 성격일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상황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무신경한 태도였다. 어찌 됐든 한없이 가볍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평과는 맞아떨어졌다.

코끝으로 웃은 고정원은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잠이 들 거라 생각했으나 몇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예민해진 신경으로 눈을 떴다.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도저히 이곳에서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원래 살던 집으로 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면서 하나씩 옷을 걸쳤다.

소리 없이 현관을 향해 걸어가던 중이었다. 묘한 소리가 들려오면서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무시하고 가려고 했지만 다시 귀를 파고들었고, 결국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워지자 보다 소리의 종류가 또렷해졌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은 숨죽인 울음소리였다. 어딘가에 얼굴을 처박고 내는 듯한 흐느낌은 녹음된 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끄윽, 윽….”

서럽게도 울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본래 있던 방으로 돌아온 것은 몇십 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아무렇지 않은 척이었나. 단순해 보이던 남자가 애써 밝은 척 가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기분이 이상했다.

“…….”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들어 올리자, 화면에는 클라우드의 로그인 화면이 떴다.

패스워드가 뭘까.

오늘 사고 난 자신의 차에 있던 물품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조수석에 선물과 케이크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자신이 만들고 나갔다던 음식은 미역국이라고 했다.

그것들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한 가지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고정원은 아이디 밑으로 패스워드를 입력했다. 늘 쓰는 특수문자와 영문의 조합 뒤에 오늘, 아니 자정이 넘었으니 어제가 된 날짜를 넣어 보았다.

너무도 쉽게 잠금이 해제되었다. 황당함은 열린 클라우드의 내용물을 확인하며 걷잡을 수 없는 크기로 불어났다.

둘이서 찍은 다정한 사진들이 있었다. 여러 종류의 사진이 있었지만 성행위 중에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심지어 행위 중에 찍은 영상은 많은 양이 저장되어 있었다.

“…하.”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증거들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사진을 하나씩 확대했다. 그리고 영상을 하나씩 재생시켰다. 그러는 동안 많은 것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조인휘가 왜 그렇게 다르게 보였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이런 짓을 삼 년간 내리 해대면 어떤 방향으로든 변하지 않는 것이 어렵겠다 싶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이런 비상식적인 기록을 마주하게 될 줄 몰랐다. 살림이라도 차린 것 같은 동거에, 노골적인 성행위 기록. 알면 알수록 기가 막힌 것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삼 년이었다.

삼 년의 시간이 한 사람과 그 생활을 이렇게 통째로 바꿔 놓을 만한 시간인 것인지. 진심으로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한 선택과 행보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란 영영 불가능할 듯했다.

…삼 년 동안 뭐에 씌었다가 사고로 제정신을 차린 게 아닌가.

지금으로서 가장 그럴싸하게 느껴지는 추측과 함께 고정원은 휴대폰을 내던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부터 내렸다. 천천히 마시며 30분쯤 지났을 때 눈을 비비며 나오는 조인휘와 마주쳤다.

“어, 일어났네. 좋은 아침.”

‘배시시’라는 표현이 어울릴 법한 웃음이었다. 행동과 표정이 유독 초등학생쯤 되는 어린아이처럼 보여 눈살이 찌푸려졌다. 사실 거슬릴 만한 부분도 아니지만 탐탁지 않은 사람을 상대로는 모든 걸 낮잡게 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고정원은 시선을 거두었다.

“진짜 신기하다.”

“…뭐가?”

“너 일어나면 커피부터 마시는 거, 습관 된 거는 한 일 년쯤 됐거든? 삼 년간 기억은 없어졌어도 습관은 남나 봐. 와, 진짜 엄청 신기해.”

신나서 떠들어대는 조인휘의 눈두덩이 부어 있었다. 침구 따위에 얼굴을 처박고 울었을 테니 붓지 않을 리가 없었다.

“…….”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조인휘를 응시했다. 말간 얼굴로 커피를 따르는 모습을 보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입을 놀렸다.

“삼 년이나 만나면… 안 지겨워?”

웃으며. 마치 남의 일을 묻듯.

“…어…?”

얼이 빠진 듯하던 조인휘는 곧 이마를 긁적이며 답했다.

“아… 사실, 삼 년이라고 연수를 말하니까 길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사귀는 동안 일 년이 진짜 매번 후딱후딱 가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삼 년이 돼버린 느낌이라, 지겹…다거나 그럴 새도 없었다고 할지….”

커피잔을 들고 조인휘가 식탁의 맞은편으로 앉았다.

“그렇구나….”

입으로만 살갑게 호응하며 고정원은 무심히 쳐다보았다.

“우리, 어떻게 사귀게 된 거야? 너랑 나 그다지 공통점이나 접점도 없었으니까 궁금했거든.”

“…아아, 뭐, 과제도 같이 하고…. 사실, 우리가 사귈 때는 되게 쉽게… 아니다, 쉽지도 않았구나. 암튼, 사귀고 나서 또 우리끼리 약간 다툼? 같은 게 있기는 했는데 그게….”

신나서 떠들기 시작한 조인휘의 말을 잘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는데.”

중얼거리면서 내뱉자 조인휘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뭐가 믿기지 않는다는 건지, 보태지 않아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고정원은 악의는 없었다는 듯이 변명했다.

“아니, 나는 그냥 신기해서. 인휘 여자들한테 굉장히 인기 많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니야?

태연하게 잔을 매만지며 물었다.

“별로… 그런 거 아닌데.”

조인휘가 정색하며 웅얼거렸다. 처음으로 완전하게 굳어진 표정이었다.

“…해보니까 여자 역할이 더 좋았어?”

저급한 질문은 물론 고의적이었다. 크게 벌어지는 눈이 보였다. 희게 질렸다가 금방 빨개지는 얼굴색의 변화를 낱낱이 지켜보다 말했다.

“농담이야.”

천천히 커피를 들이켜고 있자니 문득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조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끝까지 마시기도 전에 컵을 들고 일어났다.

“어, 어디 가?”

“집에 가 있으려고.”

“…집?”

“원래 살던 곳. 여기는 아무래도… 영 낯설어서.”

“불편했어?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하지. 거기 싫으면 내가 썼던 방으로 바꿔 줄까?”

붙잡으려고 하는 행동이 피곤했다. 애매하게 웃으며 두루뭉술하게 넘기던 고정원은 마지막으로 못을 박았다.

“원래 집에서 지내는 게 맞는 것 같아.”

“…….”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아니면 안 돌아올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조인휘의 낯빛이 하얗다 못해 푸르게 질렸다. ‘아니면 안 돌아올지.’ 하고 덧붙인 부분에서부터였다.

안색의 극단적인 변화를 코앞에서 목격한 고정원은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꼈다. 별것도 아닌 말로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감정의 낙차가 생기는지, 어떻게 이렇게 모조리 밖으로 드러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대신, 연락할게.”

“…어…?”

“…매일.”

“아… 어!”

매일, 연락해야 돼 꼭.

다짐이라도 받는 것처럼 조인휘가 되짚었다. 고정원은 결국 확답 없이 자리를 빠져나갔다. 달래듯 행동할 필요 따위 없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성가신 연락을 의무적으로 할 생각 또한 추호도 없었다.

밖으로 나와 습관적으로 차키를 눌렀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곧 수리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확실히 사고는 사고였는지, 컨디션이 평소 같지 않음을 느꼈다.

정처 없이 걸어 나가다 멈춘 곳에서 택시를 불렀다. 도착한 차에 몸을 실어 눈을 감은 순간 관자놀이를 관통하는 듯한 두통이 시작되었다.

기억이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 아무도 모르는 일.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현실감이 느껴졌다. 실제로 사고를 당한 입장은 자신이었고,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것이 당연했다. 현재로서는 돌아오는 쪽이 오히려 가능성 없게 느껴지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정말로 가능성이 없기를 바라야 했다.

뉴스를 체크하다 말고 고정원은 헛웃음을 지었다. 세상의 삼 년 치 변화를 요약본 넘기듯 훑는 상황이 우스웠기 때문이었지만, 그 어떤 상황도 조인휘와 교제 중이었다는 사실보단 우습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기는 가셨다.

그날 이후 벌써 일주일째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통화는 가끔, 문자는 매일 했다. 조인휘는 메시지로 안부나 뜬금없는 사진 같은 걸 보내왔다. 자신은 최소한의 단답으로만 대응할 뿐이었다.

지잉-. 때마침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들었다.

[여기 기억나?]

바닷가 사진과 웬 숙박업소 내부 사진이 보였다. 주로 이런 식이었다. 조인휘는 둘만의 추억이 있는 장소나 물건 따위의 사진을 보내며 기억을 자극하려 했다.

[모르겠어]

답장하자 금방 ‘오케이’ 제스처를 취하는 거북이 이모티콘이 대화창에 떴다. 실망했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다는 게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

고정원은 언제가 적절할지, 조인휘에게 이별을 고할 시기를 가늠했다.

삼 년을 극진하게 사귀고 있었다는 것. 그 사실 자체는 인정하지만 비가시적인 부분까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감정의 깊이라든가 둘만의 정서라든가,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관계를 지속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영상 기록 외에도 최근 이 년간 주고받은 메시지 및 통화 기록, 방범 어플과 커플용 위치 추적 어플 등. 평범하다기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성도 헤어짐이라는 결정을 부추기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럭저럭 납득할 만한 상대, 그럭저럭 일반적인 만남, 그럭저럭 길지 않은 연애기간이었다면 편리성 하나만으로 만남을 이어가다 헤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거부감을 느끼던 상대였다. 그에 더해 사회적인 편견이 따르는 관계라면 굳이 만남을 연장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판단이 지극히 합당했다.

지이이잉-.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상대가 조인휘라는 걸 확인하고 무시했다. 끊겼던 진동이 세 번째 이어지면서 그 끈질김에 마지못해 받았다.

-정원아, 바빠?

“조금. 무슨 일이야?”

-어, 무슨 일은 아니고…. 저녁 먹었어?

“지금 자정이 다 돼가.”

-아, 그치…. 나는 뭘 먹었나 궁금해서.

힘 빠지는 대화였다. 저도 모르게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이 났다.

“별거 없어. 그냥, 샐러드랑 로스트 치킨 정도.”

-오… 맛있었겠다. 나는 1차로 라면 먹고 2차로 케이크 한 판 전부 먹었는데 별로 배 안 부르네. 케이크는….

뭐라 뭐라 떠드는 소리가 이어졌다.

급격히 몰리는 피로감을 느낀 고정원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급작스럽지만 강력한 잠기운이 반갑게 느껴졌다. 사고의 후유증인지 최근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떠들어대든 말든 괘념치 않았다. 예의상 대꾸하거나 통화를 마무리 지을 생각도 없이 고정원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개강 이후 첫 주말이 되면서 조인휘와 약속을 잡았다. 더 미룰 것 없이 오늘 관계를 정리할 예정이었다.

만나자마자 형식적인 저녁 식사를 마쳤다. 술자리로 이동하자는 말이 나왔고, 둘이서 가게를 나왔다.

주말 밤인 만큼 거리에는 사람이 많았다. 조인휘는 특유의 산만한 걸음걸이로 자꾸만 사람들과 부딪칠 뻔했다. 좁은 길목에서 팔짱을 낀 커플들을 배려하느라 뒤로 처지기도 했다. 보면서 거슬렸던 고정원이 팔뚝을 붙들고 걸었다.

“…고마워.”

보호 같은 게 아니라 성가셨을 뿐이었다. 붙들어 준 것을 호의라고 오해했는지 조인휘는 반색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울리지도 않게 수줍은 것처럼 입술을 비죽거렸다.

“…….”

구석진 곳으로 데려가 옷을 벗기고 함부로 만진다고 해도 같은 반응일 것만 같은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게 느껴진 고정원은 거리를 떨어뜨렸다.

들어선 라운지 바 안에서 깔루아밀크를 주문한 조인휘는 또 예의 그 ‘배시시’ 하는 웃음을 지으며 마주 보았다.

“바는 너랑만 다녔는데. 깔루아밀크도 네가 추천해 줘서 먹기 시작한 거거든.”

“…그래?”

조인휘는 생각보다 훨씬 순진해 보였다. 모든 행동이 김빠지게 물렁했다. 만만하게 본 누군가 파고들어 뒤흔들기 딱 좋아 보일 정도로.

어찌 되었든 그간 학교에서 보여주었던 언행들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소문대로 ‘놀 줄 아는 남자’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순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행동들은 대체 뭐였는지 묻고 싶어졌다. 시간에 걸쳐 바뀐 결과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허풍이었는지.

“…….”

음악에 맞춰 까딱까딱 리듬을 타며 조인휘는 이따금씩 깔루아밀크를 홀짝거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칠 때면 얼굴에 떠오른 감정이 숨겨지지 않았다. 온전하고 순전한, 당장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해도 순순히 따를 듯한 눈빛을 했다.

“근데 여기 춤도 출 수 있는 덴 줄 몰랐어. 그냥 밖에서 봤을 땐 술만 파는 덴 줄 알았는데.”

바는 3층으로 분리된 구조였다. 아래층은 클럽처럼 춤을 추는 스테이지였고, 위층은 착석 테이블이 있어 아래를 전부 내려다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시끄럽네, 좀만 있다가 가야겠다 그치?”

“…왜, 나쁘지 않은데.”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켜며 말하자 조인휘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진짜? 다행이다. 하긴, 너랑 나랑 이런 데 온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신선하기는 해.”

원래는 조용한 곳에서 대화할 생각이었다. 대화를 통해 자발적으로 헤어지는 결말을 내도록 유도할 생각이었지만….

“저기, 두 분이서 오셨음 저희랑 같이 마실래요?”

때마침 누군가가 접근했다. 다가온 여자 두 명을 본 조인휘의 표정이 굳어졌다. 경직된 표정을 살핀 고정원이 ‘그럴까요’ 하고 답했다.

“괜찮지?”

가벼운 투로 묻자 조인휘는 얼떨떨하게 끄덕였다.

합석한 테이블은 어수선한 대화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조인휘는 눈에 띄게 굳어져서 여자가 건네는 말에 버벅대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굳이 말로 깨닫게 하기보다 오히려 이렇게 비언어적으로 상황을 몰아가는 쪽이 확실한 경우도 있으니.

“…….”

여자가 건넨 담배를 무는데 문득 시선을 느꼈다. 불이 붙고, 고인 연기를 내뱉고, 손가락 사이에 끼울 때까지. 희게 질린 낯을 한 조인휘는 고정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선이 따라오는 걸 느끼며 고정원은 여자에게 귓속말을 했다. 별 얘기는 아니었다. 그냥 이런 자리에서 할 법한 시시한 농담이나 칭찬 따위. 여자가 웃고, 자신도 따라 웃으며 시시덕거린다고 보여질 법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여자가 비스듬히 기대어 왔다. 고정원의 팔뚝에서부터 올라가 어깨, 목을 쓰다듬었다. 키스를 원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고정원은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숙여 귓전을 스치듯 애무하는 것으로 끝냈다. 이 이상으로는 굳이 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내키지도 않았다.

맞은편을 살피자 조인휘는 이쪽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큰 눈에 눈물이 맺히는가 싶더니 ‘잠시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예 밑으로 내려가 버렸다.

연기를 머금고 내뱉기를 몇 차례. 몇 살이냐고 묻는 여자의 질문을 무시하며 고정원은 플로어를 내려다보았다. 스테이지의 한구석에 홀로 춤추지 않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생김새나 복장, 섞여 들지 못하고 뚱하게 서 있는 포즈까지. 영락없이 미성년자로 보이는 조인휘가 그곳에 있었다.

조금 뒤 조인휘는 바에서 시킨 병맥주로 나발을 불었다. 돌아서 있는 탓에 옆모습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곁에서 춤을 추던 웬 남자가 조인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

사고 이후 두통이 불시에 찾아들게 됐다. 불쾌하게 지끈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아래를 주시하던 고정원은 남자가 조인휘의 얼굴 근처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는 걸 목격한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큰 보폭으로 플로어의 목표 지점을 향해 걸어갔다. ‘왜 울어요? 네?’ 하는 목소리가 음악 사이로 들리고, 시야를 가린 남자를 몸으로 밀어 낸 고정원은 뻔뻔하고도 쉽게 원하던 자리를 차지했다.

그제야 겨우, 맥주병을 든 채 질질 짜고 있는 꾀죄죄한 얼굴이 보였다.

이러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관심을 끌지.

힘없는 손에서 맥주병을 빼앗아 한 모금 넘기며 내려다보았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젖은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거렸다.

“…….”

소란한 음악과 사람들 틈에서 둘 다 말이 없었다. 조인휘는 멀뚱히 서 있을 뿐이고, 고정원은 가림막처럼 그 주변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조인휘는 뒤늦게 젖은 얼굴을 닦고, 빨개진 코끝을 문질렀다. 손등으로 문지르고 또 문지르고…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손짓을 고정원이 붙들었다.

“화났어?”

“…안 들려.”

고개를 숙였다. 귓불에 입술이 스칠 만큼 밀착시켰다. ‘화나서 그래?’ 한 번 더 물었다. 조인휘는 일부러인지 안 들린다며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다. 더 이상 물을 것도 없이 팔을 붙들어 보다 조용한 구석으로 이끌었다.

“미안.”

사과하자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난 우리가 사귄다는 의식이 없어서… 생각 없이 행동한 것 같아.”

그 말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조인휘가 우물거렸다.

“…괜찮아….”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믿는 건가.

“속상했어? 이렇게 울 정도로?”

손을 들어 눈가를 건드렸다. 아니 별로…, 하고 흐릿하게 웅얼거리며 눈을 내리까는 모습이었다. 그 센 척이 가소롭게 느껴져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신경 쓰이게 티 내지나 말든가.

“…….”

시끄럽고 불결한 공간에서 얼마간 눈을 맞추고 있던 중, 고정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자리 옮길래?”

더워서인지 취기가 돌아서인지 양 뺨이 발그스름해진 조인휘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적당한 호프집으로 옮겨 술을 마셨다. 마시는 내내 빈 술잔에 술을 따라주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었다. 말을 들어주고, 뭐든 적당히 맞춰주었다. 그렇게 운 걸 보고 나서인지 당장 헤어지는 쪽으로 결론을 몰아가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 진짜 꼴 배기 싫다.”

조인휘는 취해서 술주정을 부렸다.

“담배 피우는 거, 진짜 꼴 배기 싫어. 고정원 너 그거 아냐? 모르지? 너 그거, 너, 담배 피울 때는 별로 안 멋있어 보여…. 아무리 내가 널 사랑해도, 그거는 진짜로 하나도, 진짜 하나도 안 멋있어.”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되풀이하기에 몇 잔 더 마시게 하자 말수가 줄어들고 조용해졌다.

“근데 어떻게 나를 까먹지?”

이따금씩 중얼거릴 뿐.

“…아니 어떻게… 정원이가 나를 까먹지….”

실실 웃기도 했다.

말수가 완전히 줄어드는가 싶을 즈음 다시 한바탕 이야기를 쏟아냈다. 두서없이 섞여 기승전결이 엉망이었다. 그러나 잠깐만 들어도 고정원이, 그러니까 과거의 자신이 조인휘에게 어느 정도로 끔찍했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정신 차려.”

한 시간 뒤쯤, 널브러진 조인휘를 들어 올렸다.

“응….”

제법 괜찮게 걸어 나가기에 굳이 부축하지 않았다. 그러나 계산을 하던 고정원은 잠시 뒤 콰당, 하는 큰 소리에 놀라서 돌아보았다.

화려하게 넘어진 조인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가가 엎어진 걸 일으키자 이마가 벌게져 있었다. 한숨과 함께 흐물거리는 몸을 들어 올려 그대로 가게를 빠져나갔다.

택시에 조인휘를 태우고 자신도 탔다. 오피스텔로 목적지를 말하고 나서 신음과 함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이런 일정을, 이런 상황을 예견한 것은 아니었다. 딱히 타인의 행동이나 결정에 휘둘리는 편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상황인 만큼 매 순간 휘둘렸음을 인정했다.

택시가 오피스텔 주차장에 도착했다. 조인휘를 들고 나온 고정원은 조인휘의 지갑에서 발견한 카드로 공동현관을 지나쳤다. 취해서 늘어진 몸을 한 팔로 대충 추슬러 올리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현관까지 당도했다.

“안 들어갈래.”

현관 앞에서 갑자기 주저앉은 조인휘가 억지를 썼다. 일으키려 하자 한쪽 다리를 꽉 붙들어 왔다.

“나 안 들어간다니까….”

고정원의 신발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자세였다. 다리에 얼굴을 기대고 양팔로 붙들어 힘을 주고 있었다. 그 성가신 태도에 미적지근한 열이 끼쳤다. 제 입장에서는 데려다 놓고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쉬고 싶을 뿐이었다.

우두커니 서 있자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면 나 또 혼자 자야 되잖아.”

어, 좀 술 깬다… 깨기 싫은데. 조인휘가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

여러 생각이 교차하며 고정원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역시나 몇 분 만에 조인휘는 곯아떨어졌다. 그제야 늘어진 몸뚱이를 집어 들어 현관문을 열었다.

내부는 불빛이 은은하게 들어와 있었다. 전체 조명을 한 번에 켤 수 있는 센서가 보였지만 건드리지 않고 들어갔다. 일전에 같이 쓴다고 했던 방으로 조인휘를 안고 들어섰다.

“나 물… 물, 좀….”

침대에 내려놓자마자 조인휘가 웅얼거렸다. 눈을 무겁게 뜨는 것을 보며 고정원은 대꾸 없이 방을 나갔다.

물을 건네기 무섭게 꿀꺽꿀꺽, 넘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컵에서 흐른 물이 턱으로 떨어지며 물줄기가 갈라졌다. 잔뜩 흘려가며 마신 조인휘는 남은 물을 내밀었다.

“너도… 마셔.”

남이 먹다 남긴 것에 드는 거부감과 별개로 굉장히 목이 마른 상태였다. 고정원은 잠자코 컵에 남은 물을 받아 끝까지 비웠다.

더 이상의 의무는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그만 가 보려던 차였다.

“…자고 가면 안 돼?”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조인휘가 불쑥, 자신을 끌어안았다.

“…….”

처음 보는 표정에 고정원의 시선이 뿌리째 박혀 들었다. 그것은 아주 성숙한 얼굴이었다. 애처럼 배시시거리며 웃던 얼굴과 동일인물이라고 차마 생각할 수 없는, 무언가를 ‘아는’ 얼굴.

불가피한 수순처럼 떠올랐다. 퇴원하고 돌아온 날 이 방에서 확인했던 사진들과 영상들이. 작은 엉덩이를 드나들던 살덩이와 서로 다른 몸이 한 몸처럼 엉켜드는 장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집중하던 행위 같은 것들이.

몸이 확 달아오른 것을 느꼈다. 굉장히 우스운데, 그것을 비웃을 수도 없을 만큼 강렬한 흥분감이었다.

고정원은 조인휘의 목덜미를 떼어 내며 고개를 숙였다. 젖어 있는 입술을 그대로 잡아 물었다. 축축한 살을 조심히 빨아 당기자 등줄기부터 정수리가 선득해졌다. 남자의 입술이란 게 느껴졌지만 눈앞이 짜릿하게 점멸했다.

춥, 젖은 소리가 나며 붙었던 점막끼리 떨어졌다. 뜨거운 숨을 뱉어 내며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순순히 눈을 감고 기다리는 얼굴이 보였다.

다시 입술을 물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가 싶던 고정원은 그러나 뒤돌아 방을 빠져나왔다.

도망치는 것처럼 성큼성큼 현관을 향했다. 그리고 문 앞에 다다랐을 즈음 불현듯 멈추어 섰다. 혈액이 몰린 탓에 걷는 것조차 통증이 일게 되자 비로소 막혔던 웃음이 터졌다.

“하….”

한 번쯤은 해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렇게 골백번 해댄 거면. 마지막으로 한 번쯤은….

생각이 다 끝나기도 전에, 고정원은 방으로 돌아가 참았던 만큼 격렬하게 입을 맞추어대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취한 양질의 수면으로 가벼워진 몸을 느꼈다. 하지만 가뿐해진 컨디션과 상관없이 처한 상황은 조금도 개운치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체처럼 잠든 조인휘가 보였다. 그 옆으로 늘어진 체액과 얼룩, 콘돔 등 간밤의 충동적 행위가 남긴 흔적들이 적나라했다. 토사물과 다를 바 없는 광경을 식은 눈으로 내려다보던 고정원은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샤워 부스 안, 결벽에 가까운 샤워가 시작되었다. 단순히 청결이 아니라 소독이 목적인 사람처럼 체액부터 몸에 남은 찝찝한 감각까지 씻어내려는 행위가 지독하게 반복적이었다.

욕실 밖으로 나오자 조인휘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고정원은 물을 마시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소지품을 챙기기 위해 방에 들어갔다가 침대로 눈길이 머물렀다.

조인휘는 미약한 미동조차 없이 엎드려 있었다. 수면 중이라고 이해하기에는 축 늘어진 사지에서 호흡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았다.

지켜보던 고정원이 가까이 다가갔다. 목에 손을 대보자 다소 느리게 뛰고 있는 박동이 확인되었다.

“음….”

조인휘가 뒤척이면서 엎드려 있던 상반신이 드러났다. 도화지 같은 피부 위, 구강으로 애무한 자국들은 기묘한 문양처럼 시선을 끌었다. 보고 있자니 타인이 배설해 놓은 성욕의 마른 찌꺼기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불쾌감이 느껴졌다.

천천히 침대에 앉았다. 고정원은 잠든 이의 하반신을 얄팍하게 가리고 있는 홑이불을 느린 몸짓으로 끌어 내렸다. 완전하게 드러난 하반신부터 천천히 훑어 올라가던 중 가슴팍에 시선이 머물렀다. 유륜을 둘러싼 잇자국이 우스울 만큼 또렷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세게 흡착했는지 퉁퉁하게 부어 있기까지 했다.

‘앗! 아, 앗…!’

평상시의 낮은 톤이 상상되지 않을 만큼 높아지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여길 입으로 당길 때마다 달뜬 신음이 쏟아졌었다.

‘천박하네 생각보다.’

하도 기가 막혀 헛웃음처럼 나왔던 한마디였다. 놀란 표정을 짓는 조인휘에게 입맞춤으로 얼버무렸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동성의 몸에는 의외로 희미한 거부감조차 들지 않았다. 특수한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치민 성욕이었기 때문일까. 오히려 같은 남자의 밑에서 흥분하는 모습을 자세히 보고 싶을 뿐이었다.

다리를 벌리고 보려고 하자 조인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필사적으로 숨기려 들었다. 상대가 애인이 아닌 낯선 남자라는 자각이 그제야 든 것처럼.

그 외에도 조인휘는 몇몇 행위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익숙한 방식이 아닌 듯했지만 자신이 그걸 배려할 이유는 없었다. 중간중간 안기는 것을 내치지 않는 정도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

당시의 상황을 더듬듯 손가락이 자국을 더듬어 올라갔다. 오감에 저장된 것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성감대라 할 수 있는 부위들을 가볍게 훑어 오르다 목덜미까지 이르렀다.

목덜미와 귀에 흡착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정할 때 남긴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 반사적으로 손에 힘이 서렸다. 머리칼을 움켜쥐자 통증을 느꼈는지 조인휘의 입에서 갈라지는 신음이 샜다. 살짝 눈을 뜨려는 것을 보며 고정원이 말했다.

“…더 자.”

“으응….”

대답한 조인휘가 눈을 감았다. 움켜쥔 손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손을 붙인 상태에서 머리통을 느슨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숨소리가 다시 노곤해질 때까지.

원래 사정이 그 정도의 자극이었던가. 떠올린 고정원은 불필요한 의문에 잠겼다. 이전의 경험과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비정상적인 행위에 흥분하는 성향이 있으리라고는 스스로도 생각지 못했기에 찝찝한 기분은 다소 오래 지속되었다.

밖으로 나와 택시에 올랐다. 눈을 감자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깊은 한숨이 뒤따랐다. 돌아가는 모든 상황이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 조인휘의 연락을 피했다. 차단은 하지 않았지만 답을 하지는 않았다. 열댓 개 쌓인 메시지 중 단 하나도 확인하지 않은 채 주말이 지나갔다.

사고 이후 교체된 차를 이용해 학교에 갔다. 오후의 전공 수업, 시작된 지 30분쯤 지났을 때 한 남자가 강의실로 들어섰다.

웅크리며 앞자리에 앉은 남자는 조인휘였다. 늦잠을 잔 건지 부은 얼굴에 전체적으로 정돈되지 못해 산만한 느낌이었다.

수업이 끝나면서 고정원은 이동을 위해 일어났다. 머릿속으로는 겹치는 강의를 모두 드랍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정원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기피 대상이 서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절박한 표정이었다.

“잠깐, 시간 돼? 할 말도 있고, 잠깐, 얘기 좀….”

“얘기해.”

가만히 서서 말하자 조인휘가 주변 눈치를 살폈다.

“카페로 갈래? 우리 자주 가던….”

“그냥 여기서 해.”

함께 이동하거나 마주 앉아서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선을 긋는 태도에 조인휘는 콧등을 구기며 과장된 표정으로 곤란한 기색을 숨기려 들었다. 얼마간 지지부진하게 서 있던 조인휘는 강의실 밖을 가리켰다.

“…그럼, 나가면서….”

건물 밖으로 나가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서자 비로소 말을 꺼냈다.

“저… 몸은, 괜찮아?”

조심스럽게 묻는 말이 실소를 일으켰지만 고정원은 웃지 않았다.

“당연하지. 인휘 넌… 괜찮은 거야? 좀 부어 보이는데.”

“아 늦잠… 자서.”

조인휘는 변명하며 주먹으로 양 뺨을 문질렀다. 이제 와 붓기를 빼려는 모습이 미련해 보였다. 잘 보이고 싶기라도 한 건가.

“할 말은 그게 다야?”

“아, 아니, 그냥… 나는, 연락도 없고 걱정도 되고….”

횡설수설하던 조인휘는 본심을 흘렸다.

“우리, 그, 한 거….”

“…….”

“잤…던 거, 그거….”

잤다는 말을 똑바로 내뱉지 못하는 게 본인도 답답한지 얼굴을 마구 문질러댔다. 무엇을 알고 싶은 건지는 뻔히 보였다. 연인다운 행위를 했으니 그 뒤에 어떠한 변화가 있지는 않았을까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아.”

가벼운 감탄을 뱉어 내며 고정원은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한 개비를 입술에 물며 나직하게 칭찬했다.

“잘하더라. 인휘야.”

“…어?”

어벙한 얼굴을 마주하며 불을 붙였다.

“좋았다고 나는.”

“…아… 어….”

흰 피부가 순식간에 벌게지는 게 보였다.

“가끔 만나서 할까.”

담배 연기를 내뱉은 고정원이 열없는 웃음을 흘렸다.

“해보니까 확실히 알겠던데. 왜 그렇게 오래 만났는지.”

조인휘는 대꾸가 없었다. 충격으로 굳어진 얼굴을 향해 가볍게 덧붙였다. 싫으면 어쩔 수 없고.

“…….”

멍하니 입술로 꽂히는 시선을 느꼈다. 마주 보며 천천히 담배를 태웠다. 견고하게 굳어지는 침묵 위로 연기가 흩어지며 시간이 흘렀다. 태울 만큼 태운 뒤에는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 껐다.

“…할 말, 남았어?”

혼을 뺀 것처럼 창백하게 서 있던 조인휘가 눈을 들었다.

“…응.”

시간을 끄는 느낌이 성가시게 느껴져 고정원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때 조인휘의 휴대폰에서 진동 소리가 울렸다. 슬쩍 화면을 확인한 조인휘는 어쩐지 정서가 불안해 보였다. 어쩔 줄 몰라 했다가, 금방 다시 흥분했다.

“저기, 정원아. 김강우가 나 만나자는데….”

“…….”

“…만나면 안 되지? 너, 싫잖아. 그치?”

기대감으로 부푼 표정이었다. 그것만으로 고정원은 또 하나의 사실을 유추했다. 그동안 자신은 여자뿐 아니라 남자 관계까지 단속했던 모양이라고.

자신이 한 행동이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걸 넘어서 경멸을 느낄 지경이었다. 고정원은 비정상적인 구속에 완벽히 적응한 멍청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미성년자도 아니고.”

말하며 코웃음 지었다.

“누굴 만날지 안 만날지, 그 정도는 알아서 결정해야지.”

퍼뜩 양손을 든 조인휘가 변명했다.

“아니, 난 그런 거 아니라, 정원이 너가 김강우랑 만나는 거 싫어했으니까… 항상 만나지 말라고 했으니까 나는… 우리끼리 약속한 거라….”

고정원이 사람 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더 잘된 거 같은데.”

“…어?”

“간섭할 사람 이제 없으니까 자유롭게 만나. 평소 못 만났던 사람들 만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 되겠다.”

바빠지겠네.

굳어진 조인휘의 어깨를 토닥이며 덧붙였다.

“나도 이제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일정 있거든.”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실제로 아는 사람을 보기로 했다. 상대는 부모님들끼리 친해 어려서부터 알던 사이로, 연락이 왔기에 기분 전환 겸 만나자는 약속에 응했다. 삼 년 가까이 얼굴 한번 안 보여주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냐는 반응에는 저 역시도 기가 막힐 뿐이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 그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먼저 자리를 떠났다.

차 안에서 시동을 걸기 직전, 고정원은 길게 숨을 내쉬며 운전석에 등을 기댔다. 정신적인 피로가 쌓이는 것을 느꼈다. 한동안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일어나며 오디오를 켰다. 사연을 읊고 음악을 들려주는 라디오 채널이 흘러나왔다. 원래라면 듣지 않을 소란스런 소리가 머릿속으로 침투하는 게 나쁘지 않아 켜놓은 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

학교 근처에서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뺏겼다. 길목 한쪽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조인휘와 김강우였기 때문이었다. 김강우는 나란히 걷는 조인휘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안다시피 밀착한 자세로 소란을 떠는 모습이었다. 까맣고 뭉툭한 손이 조인휘의 허리까지 내려갔다가 머무르기도 했다.

지나치고 나서도 사이드미러를 살폈다. 학교 근처 술집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다. 해가 지기도 전부터 술집이라니. 어정쩡한 표정과 자세로 끌려가던 조인휘를 잠시 떠올렸다가 이내 지웠다.

달리다 말고 두 번째 막힌 신호였다. 연달아 막히는 게 탐탁지 않아 미간이 좁아졌다. 운전대에서 손을 뗀 고정원은 짙게 숨을 뱉어 냈다.

시끄럽게 느껴지는 라디오를 끄고, 두통약을 꺼냈다. 대충 물 없이 삼킨 뒤에는 에어컨 온도를 낮추었다. 곧이어 휴대폰이 울렸다. 출발했느냐고 묻는 지인의 메시지를 보며 손을 뻗은 고정원은 알림을 드래그하여 제거했다.

삼 년 만에 만난 지인과의 식사 자리였다. 그러나 고정원은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는 일은 없이 상대방의 말을 듣기만 했다. 본래 일신상의 일을 떠드는 편도 아닐뿐더러, 머리에 몇 년의 공백이 있는 만큼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상대는 개의치 않는 듯 그저 만남이 성사된 걸 기적에 가까운 이변으로 여겼다.

“너 갑자기 잠수 타서 별별 소문 다 났던 거 알아?”

장소를 옮기는 길에 여자는 고정원의 어깨를 가볍게 터치하며 말했다. 그랬어? 하는 고정원의 성의 없는 대꾸에도 즐거운 듯 웃었다.

“심지어 결혼했다는 소문도 있었잖아.”

반은 맞은 셈이었다. 상대가 동성이었을 뿐, 누가 봐도 혼전 동거와 같은 형태였다.

“그럼… 애인이랑은 헤어진 거야?”

고정원은 가만히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은근하게 기대감 묻은 표정을 보자 연상되듯 조인휘가 떠올랐다. 너무나 알기 쉽게 기대감 가득하던 표정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글쎄.”

헤어질 테지만 그렇게 말해주진 않았다. 은근히 거리를 두는 걸 알았는지, 미적지근한 대답을 들은 상대의 표정이 야릇하게 굳었다.

“나 요새 음악회 못 다녔어 정신없어서. 표 생겨도 갈 시간 없어서 지인들 줄 때마다 서러워서 진짜….”

공연장으로 들어서자 여자가 활기를 띠었다.

“이 사람 요새 주목받는 피아니스트거든. 프로그램도 다 네가 좋아하는 곡들인 거야. 혹시나 해서 한번 연락해 봤는데. 안 했음 큰일 날 뻔했다 야.”

여자는 자신보다 두 살 연상으로 클래식 전공자였다. 티켓을 보내거나 동반 참석을 제안하는 일이 흔했다. 기분이 좋아진 여자와 다르게 고정원은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 상태에서 연주홀로 들어서고, 리사이틀이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연주는 섬세하게 귓속을 파고들지 못하고 신경을 거스르기만 했다.

연주회가 끝나고 리셉션으로 이어졌다. 여자는 지인들과 인사를 하겠다며 가려던 고정원을 이끌었다. 소규모의 리셉션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핑거푸드들이 차려진 뷔페 한편으로 고정원은 가만히 와인 잔을 들고 서 있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누군가 묻는 말이 들려왔다. 고개를 반쯤 돌리자 낯선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네?”

나직이 되물었다. 성가신 본심을 무심코 드러낸 것도 아닐 텐데, 말을 건 여자는 굉장히 어려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해 보이셔서.”

“…….”

그제야 고정원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의식했다.

깨질 듯 극심한 두통이 언제부터인가 지속되고 있었다.

리셉션 도중 차를 타러 갔다.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냐며 붙드는 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뛰쳐나와 목적지가 설정된 기계처럼 밤거리를 달렸다.

어느새 자신은 한 술집 앞에 서 있었다.

“…….”

볼일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었다. 또한 할 말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그런 모호한 상태였다.

고정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차를 타고 올 때만 하더라도 이유가 명확했던 것 같은데, 막상 코앞에 다다르자 모든 게 흐리멍덩했다.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술집의 문이 열리면서 여자 둘과 남자 둘이 나왔다. 취한 사람들이 시선을 보내고, 자신도 그들을 쳐다보았다. 취기가 도는 여자는 남자에게 기대어 걸어갔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옆구리 언저리를 감싸고 있었다.

시선이 떨어지며 고정원은 지체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술집을 한 바퀴 둘러보고 눈을 내리깔았다. 김강우와 조인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몇 시간이나 지난 시점이니 자리를 옮겼거나 각자 돌아갔거나 가능성은 둘 중 하나였다.

휴대폰을 꺼내 아직 깔려 있는 커플용 위치 추적 어플을 실행시켰다. 그곳에 뜬 정보에 의하면 조인휘는 오피스텔이 아닌, 이 근처 다른 술집에 있었다.

그리고 즉시 옮겨 간 술집에서 고정원은 너무도 쉽게 조인휘를 발견했다. 김강우와 나란히 앉아 늘어져 있는 몰골이 시야의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김강우가 조인휘의 어깨를 감싸고, 조인휘는 취하여 안기듯 기대어 있었다.

시선을 꽂은 채 조용히 다가갔다. 테이블 앞에 서자 흥겹게 떠들어대던 김강우가 얼굴을 들었다.

“…어.”

멍청한 표정이었다. 김강우는 팩, 밀어 내듯 조인휘에게서 떨어졌다.

“씨발, 놀래라. 뭔데. 갑자기.”

“…….”

“뭐…, 야, 너 오버하지 마 새끼야. 이 새끼 취해서 아까부터 질질 짜는 거 달래주느라 얼마나 피곤했는 줄 알어? 올 거면 진즉 좀 오든가.”

변명하는 얼굴이 시뻘겠다. 이쪽에서 말을 꺼내기 전부터 과민반응이었다. 파르르 떨며 궁시렁거리더니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튼 난 상관없으니까 알아서 챙겨 가라 그럼.”

고정원은 내빼려는 상대를 돌려세웠다. 팔을 당기자 홱, 거칠게 몸이 딸려 왔다. 인상이 험악해진 김강우가 가려고 하면 돌려세우고, 가려고 하면 또다시 돌려세웠다. 기싸움처럼 몇 번이나 되풀이되자 종내에는 김강우의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뭔데 씨발!”

싸우나 봐, 수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정원은 두통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다. 궁지에 몰린 것처럼 사색이 된 김강우를 꽉 움켜쥐자 기어이 울 것처럼 일그러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야, 그냥 보내 주라 좀, 어? 나 조인휘랑 첨부터 술 마시려고 부른 거 아니고 그냥 밥 한 끼 할려고 한 건데… 갑자기 얘가 술 마시고 싶다 해서… 그리고 내가 일부러 끌어안고 그런 거 아니라, 존나 질질 짜니까….”

중간중간 한숨을 쉬더니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했다. 그게 제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하는 줄도 모르고.

고정원은 또다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하게 되었다. 김강우가 조인휘와 자신의 사이를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만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자신이 김강우를 싫어했다는 것.

“…얘 만지지 마. 전에도 이런 소리 했을 것 같은데.”

기억은 없지만 비슷한 경고를 했을 게 분명하다.

“어… 알았어. 잠깐 까먹었어. 안 만질게. 취해서 실수했어, 진짜 미안하다고.”

비굴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김강우가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그때 직원이 다가와서 무슨 일 있느냐며 물었다. 소란을 일으키지 말아달라는 눈치를 알아차린 고정원은 그제야 김강우를 보냈다.

눈앞에는 잠든 조인휘가 남았다. 기다란 의자에 마른 몸뚱이가 늘어져 있었다. 일으키려고 보자 뺨에 마른 눈물 자국이 보였다. 입을 대면 짠기가 묻어날 듯한 둥근 뺨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고정원은 마침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일으켰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오피스텔 안이었다. 인사불성인 취객을 들고서 소파로 향했다. 잇따라 털퍽, 소리가 났다. 다소 거친 몸짓으로 내려놓은 결과였다. 아직 목에 감겨 있는 팔을 빼내자 힘 빠진 상체가 소파 위로 마저 쓰러졌다. 무게는 가벼웠지만 짊어지고 오는 내내 들러붙는 체온이 거추장스러웠다.

“…….”

왜소한 체구를 내려다보던 고정원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분산시켜 집 안을 죽 둘러보았다. 몇 번 왔다고 그새 눈에 익었는지 전보다 익숙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루 만에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관계가 정리되는 대로 짐이나 챙기러 오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마지막으로 나설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에취.’ 작은 재채기 소리에 돌아보자 옆구리에 팔을 붙이고 웅크린 조인휘가 등받이로 파고드는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 덮을 만한 걸 찾던 고정원은 낮게 숨을 뱉었다. 여기는 실내였고, 밤새 내버려 둬도 얼어 죽을 만한 날씨도 아니었다. 데려다 놓은 걸로 충분하다는 결론이 나면서 고개를 돌렸다.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었다. 문고리에 손을 댄 순간 그러나 움직임이 멈추었다. 지끈거리기 시작한 관자놀이가 느껴진 까닭이었다.

지금부터 운전해서 갈 생각을 하자 까마득해지며 무거운 피로가 목부터 어깨를 짓눌렀다. 사고의 후유증 탓인지, 지치는 경우가 없었던 체력이 고작 이런 일에 쉽게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고단함을 뿌리치지 못해 거실로 되돌아갔다. 소파로 다가간 고정원은 웅크리고 있는 취객을 안아 올려 침실로 들어섰다. 씻길 순 없으니 껍질이라도 벗길 생각으로 티셔츠와 바지, 양말을 차례로 몸뚱이와 분리시켰다. 속옷 차림이 된 조인휘를 침대에 눕히고, 이어서 자신도 벗었다.

전라 상태가 된 후에는 창가의 커튼을 쳤다. 그러곤 조인휘가 덮고 있는 이불을 들추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씻지도 않고 침대에 오르는 행위는 평소라면 용납되지 않지만 남의 집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데다 몹시도 피로했다.

“으음…….”

칭얼거린 조인휘가 달라붙으면서 흐느적한 팔이 복부와 옆구리로 감겼다. 붙잡아 떼어 내려다 말고 고정원은 멈칫했다. 순간 스치듯 떠오른 건 하나의 장면이었다. 술집 한구석에서 김강우에게 기대어 안겨 있던 모습. 그리고 그 뺨에 남아 있던 찝찔한 물기.

“…….”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꽤나 긴 시간을 만났으니, 정리에도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떼어 내려던 가느다란 손을 놓아 준 고정원은 가만히 팔을 들어 올렸다. 정리의 방법과 기한에 대해 되짚는 사이, 옆에서 곤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숨소리에 동화되듯 고정원의 숨 또한 이내 곤하게 잠겨 들었다.

다음 날 차로 함께 움직였다. 오후 수업을 함께 들었고, 그러는 동안 꾸준하게 시선이 이어졌다. 조인휘는 강의를 듣다가도 한 번씩 들뜨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차라리 대놓고 보는 게 나을 지경으로 빈번히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아침에도 이와 비슷한 사정이었다. 눈이 단번에 떠질 정도로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자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기색을 내비친 조인휘는 그제야 보지 않은 척을 했다. 지켜보고 있었던 게 굉장한 실례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이불이 내려가며 아무것도 입지 않은 하반신이 노출되자 더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었고, 그건 삼 년이나 사귄 연인 사이라기에는 어색한 반응이었다. 섹스를 해 보지 않았다면, 사진과 영상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오래 사귄 사이라는 것에 의구심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근데,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어?’

‘…….’

‘혹시, 집 비번 기억난 거야?’

이어지는 조인휘의 질문에 가소로운 기분은 더욱 짙어졌다. 얼토당토않은 착각이 다시 시작된 모양이라 간결하게 답했다.

‘네 키로 들어왔는데.’

조인휘는 아, 했다. 멍청하게 벌어지는 입술과 풀어지는 눈빛에서 실망감이 역력했다.

‘…나 어제 김강우랑 술 마시고 있었던 것 같은데… 너 어쩌다 여기서….’

어젯밤 데려온 이유에 대해서는 적당히 설명했다. 김강우가 자신에게 연락을 했고, 마침 근처라 데려다줬다는 성의 없는 변명에 조인휘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고맙고 미안하다는 몇 마디를 풀이 죽어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감정은 변화했다. 함께 아침밥을 먹고, 동승하고, 수업을 들으면서 표정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실망감은 사라지고 대신 억제하지 못한 흥분감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뒤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 힐끔거릴 때마다 고정원은 무시로 일관했다.

강의가 끝나자 조인휘의 입에서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있잖아, 혹시 시간 되면… 나랑 어디 좀, 갈래?”

“시간 돼.”

선선한 승낙에 표정과 몸짓이 일시에 분주해졌다. 상대가 무르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조인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 그럼…! 그러면 일단 지금부터 움직일까? 가서 밥부터 먹고, 내가 할 거 다 정해놨으니까 넌 그냥 따라오기만 하면 돼.”

수락할 필요 없는 제안을 굳이 수락한 것은 감정을 정리할 시간을 주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일방적인 단절이 아닌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어떻게 보면 순전히 변덕이기도 했다. 컨디션이 좋은 데다 날씨가 쾌청했고, 들뜬 조인휘의 산만함이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둘은 함께 차에 탔다.

“어디로 갈 거야?”

네비게이션 목적지를 설정하기 전 고정원이 조인휘를 향해 물었다.

“내가 할게.”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조인휘는 손을 뻗었다. 잠시 후 기계에 입력된 곳은 야경으로 유명한 데이트 명소였다.

고정원은 곧 이게 데이트라는 것을 알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과거에 했던 데이트의 복기였다. 그걸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빤한 눈치와 행동들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사진을 문자로 보내던 것처럼 기억 자극의 일환인 듯, 의도가 담긴 행동들이 계속되었다.

“내 거 맛있어. 먹어 봐.”

음식점 안, 조인휘는 치즈가 늘어지는 돈가스를 내밀었다. 입 안으로 넣어주려는 행동에 고정원은 입 끝만 끌어 올렸다.

“난 됐으니까 많이 먹어.”

“…응.”

씹고 삼키는 행위에만 집중한 식사가 끝난 후에도 조인휘는 공연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경치 짱이다 그치?”

타워로 올라가는 케이블카 안에서는 천연덕스럽게 손을 붙잡아 왔다. 승객들의 시선이 창밖으로 몰린 사이를 노린 행동이었다.

“…….”

밖을 내다보고 있지만 어딘가 어설프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자연스럽지 못한 옆얼굴로 고정원의 시선이 꽂혔다. 케이블카가 타워에 도착하자 손은 어쭙잖게 떨어졌다.

“여기서 사진 찍고 가자 우리.”

조인휘는 전망이 좋은 곳에서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이전에도 여기서 둘이 사진을 찍었으리라 쉽게 짐작되는 언행이었다. 지켜보면 볼수록 돌아가는 상황이 번거롭고 우스운 연극처럼 느껴졌다. 쓸모없는 짓거리에 동조하느라 시간이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만이 확고해졌다.

“너 너무 커서 화면에 안 잡혀. 고개 좀 숙여 봐, 정원아.”

굵은 팔뚝을 감싸 쥐며 달라붙은 조인휘가 휴대폰을 더욱 높게 들었다.

고개를 숙이는 대신 휴대폰을 가져가자 조인휘가 어버버 올려다보았다. 눈높이를 조금도 낮추지 않은 채 내려다보던 고정원은 조금 뒤 휴대폰을 돌려주고 말없이 앞서 나갔다.

“미안…. 사진 찍는 거 싫었지?”

한풀 꺾인 목소리가 바짝 뒤를 쫓았다.

“아니.”

끊어 내듯 답하자 조용해졌다. 걸음을 재촉한 조인휘가 옆으로 다가온 게 느껴졌다. 고정원은 굳어진 안면 근육을 구태여 풀지 않았다.

걷는 내내 어깨가 부딪치고 드러난 피부끼리 스쳤다. 과도한 밀착감에 신경이 쓰일 무렵, 조인휘가 전망대 쪽으로 고정원을 끌어당겼다.

“구경하고 가자.”

조인휘의 적극적인 주도하에 전망대의 안으로 들어섰다.

고정원은 가라앉은 눈으로 둘러보았다. 입장료까지 지불했으나 내부에는 흥미를 끌 만한 구경거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과 다르게 조인휘는 이곳저곳 관심을 두고 일일이 구경하려 들었다. 뻔하고 조잡한 기념품을 들어 올리며 ‘사줄까?’ 묻는 말에는 무심코 조소를 흘렸다.

“…하긴. 너 취향 아니다.”

어색하게 물건을 내려놓은 조인휘는 옆의 섹션으로 옮기면서 팔짱을 끼었다.

“…….”

제 표정이 묘해졌다는 것은 굳이 거울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정원은 자신의 팔에 감긴 조인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의도적인 건지 아니면 무심코 한 행동인지 가늠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구경하고 있는 모습을 내려다보자 눈이 마주쳤다. 팔을 내려다본 조인휘가 화들짝, 뒷걸음질 치며 팔짱을 풀었다. 고정원의 반듯하던 이마가 언뜻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변명했다.

“미안, 습관돼 가지고….”

“…….”

케이블카에서부터 지금까지였다. 내내 신경을 거스르는 불쾌함이 있었다. 그게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감이 잡혔다. 반사적으로 억누르려 했던 충동의 종류를 자각한 고정원이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갑자기 왜 그래? 아픈 거야? 열 있어?”

이마에 서늘한 손이 닿았다. 부드럽고, 그래서 간지러웠다.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움켜쥔 고정원이 마른 몸을 바싹 끌어당겼다.

“…그렇게 밖에서 하고 싶어?”

이상하게 화가 났다.

“…뭐?”

당황한 조인휘가 입술을 떨었다. 고정원이 짧게 웃었다.

“처음부터 말하지. 이런 식으로 은근하게 굴 필요 없었는데.”

“무슨, 그런 거 아냐, 나….”

억울한 듯 무너지는 눈썹이 보였다. 골격마저 무르게 느껴지는 손을 꽉 움켜쥔 채 고정원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자, 인휘야.”

“…….”

“해.”

나도 하고 싶어졌으니까.

갈라지는 목소리가 피 쏠린 귓바퀴 속을 파고들었다.

조인휘는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바쁘게 할짝거렸다. 뺨은 한겨울 칼바람에 노출된 것처럼 달아오른 채였다.

“…….”

핥고, 벌린 입술로 머금어 가며 정성스레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고정원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행위의 대가로 먹을 것을 사준 듯한 추저분한 기분을 느낀 까닭이었다.

긴 숨을 내쉬었다.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인 조인휘가 먹던 콘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너도 먹을래? 여기, 이 부분 아직 입 안 댔는데.”

달아빠진 색을 하고 있는 색소 덩어리는 핥은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좀, 더럽게 먹긴 했다.”

민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가져가려는 걸 고정원이 붙들었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지나친 단맛이 입 안으로 퍼지고 나서야 호의에 일일이 반응해 줄 필요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목을 놓았다.

“…….”

시선은 자연스레 상대에게 머물렀다. 그 시선이 불편한 것처럼 아이스크림을 핥는 데에만 집중하는 조인휘의 모습은 맥이 빠질 정도로 유치하고 꾀죄죄했다.

가만 보면 계산적인 상대보다 훨씬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계산이 없는 만큼 오히려 사람을 충동질하는 구석이 있었다.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자극한 끝에 마지막에는 결국 조종당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여기서 좀, 앉았다 갈까? 아님, 나가서 산책이라도….”

아이스크림 묻은 입술을 쳐다보던 고정원이 시선을 거뒀다.

“나가자 그만.”

사람이 모인 공간이 갑갑하고 덥게 느껴지던 차였다. 목덜미에는 아직 후텁지근한 열기가 남아 있었다. 목덜미뿐 아니라 빠르게 돌던 혈류의 영향으로 전신이 후끈거렸다.

“어어, 잠깐만. 미안한데 저거 한 번만 하고 가면 안 될까?”

나가려다 말고 조인휘가 목청을 높였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인형뽑기 기계들이 늘어서 있었다.

“잠깐 좀 들어줘. 너 다 먹어도 돼.”

아이스크림을 떠맡긴 조인휘는 홀린 듯이 기계로 다가갔다.

“아오, 씨. 아깝다.”

집게에서 인형이 빠져나가자 조인휘는 발을 굴렀다. 토끼 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캐릭터가 목적인지, 시작부터 그것 하나만 물고 늘어지는 모습이었다. 요령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미묘한 각도 차로 뽑힐 듯 뽑히지 않고 있었다.

기다림이 지루해진 고정원이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을 먹어 치우고 다가갔다.

두 번의 시도만으로 인형은 밖으로 나왔다. 제게는 쓸모없는 물건을 건네자 조인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고마워…. 웅얼거리는 인사를 못 들은 척 앞서 나갔다.

어느새 조인휘는 쪼르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인형만 뚫어지게 보면서 앞은 제대로 보지 않는다 싶더니 기어이 유리문 앞에서 부딪칠 뻔했다.

“앞에 보고 걸어.”

충고하자 조인휘가 올려다보았다.

“어, 그럴게.”

행복한 것처럼 환하게 접히는 웃음을 보자 고정원의 머릿속으로 전혀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사정 직전 붉게 일그러지던 얼굴. 그 위를 스치던 전율 같은 것들.

“…….”

불과 몇십 분 전 일이었다. 자신과 조인휘가 화장실의 비좁은 칸에서 유사성행위를 했던 게.

젖은 입술을 빨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었나.

화장실의 칸막이가 뒤흔들릴 정도로 거칠게 박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누르던 기억밖에는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장소의 본래 용도가 뭔지, 얼마나 더러운 곳인지. 상대가, 또 행위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화가 날 정도로 섹스가 하고 싶을 뿐이었다.

“너랑 나랑 전에 같이 뽑아 둔 인형 몇 개 있거든. 걔네랑 같이 둘려고.”

밖으로 나온 조인휘는 인형을 가슴팍에 붙이고 걸었다. 마치 키우는 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니가 볼 때… 나 무슨 동물 닮은 거 같아?”

수만 개의 자물쇠가 흉물처럼 걸린 철조망 앞에서 조인휘가 물었다.

“글쎄.”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고정원이 말끝을 흐렸다.

“앉아 여기.”

커플이 머물렀다 떠난 벤치에 조인휘가 앉았다. 앉으라는 듯 바로 옆자리를 두드리는 걸 무시하고 앞으로 섰다.

“우리 얘 이름이나 지어줄까?”

인형의 배를 양손으로 꾹 누르는 모습을 고정원은 무감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새하얀 인형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피부를 눈으로 훑다가 별안간 툭, 내뱉었다.

“토끼.”

“아, 그건 너무 성의 없잖아.”

웃음을 터뜨린 조인휘에게 다시 말했다.

“아니. 너 닮은 동물.”

“…아.”

기뻐하는 얼굴을 보며 정말,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연애놀음을 했었구나, 다시금 생각하였다.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고정원의 길고 굵은 손가락이 느긋한 움직임으로 조인휘의 머리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머리칼의 가닥을 만지작거리자 굳어지는 듯하던 조인휘가 뺨을 붉혔다. 황홀한 듯 풀어지는 안면근육을 지켜보던 고정원은 울렁거리는 속을 느꼈다.

정리할 시간을 주기로 한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한 순간이었다. 들이닥친 불쾌함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걸로 마무리할까.”

흐릿한 눈이 자신을 향했다.

“마지막 데이트치곤,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닌가.”

“그게 지금, 무슨….”

걸린 침을 어렵사리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이야?”

파르르 경련하는 눈꺼풀과, 뜻대로 되지 않는 듯 일그러지는 입매가 보였다. 이제는 더 이상 볼 일 없는 것들이었다.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

“우리 관계 정리하자는 말이야.”

하얀 손에 들려 있던 인형이 퉁, 튕기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체된 도로 위, 차는 시원하게 내달리지 못하고 멈춰 서길 반복했다. 꽉 막힌 차의 행렬을 앞에 둔 고정원은 차창 밑으로 팔을 괴었다. 느리고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오고, 어깨부터 목뒤까지 둔중한 근육통이 느껴졌다.

단둘이라는 걸 의식할 수밖에 없는 협소한 공간. 어쩐지 공기가 답답해지는 듯했다. 환기의 목적으로 차창을 내리자 외부의 소음과 공기가 섞여 들었다. 따라 하듯 옆자리에서도 지잉-, 차창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손에 잡힐 듯한 크기의 뒤통수를 곁눈질한 고정원은 대시보드 아래로 손을 뻗었다. 오디오가 켜지면서 조용하던 차 안으로 웃고 떠드는 소리가 침입했다.

차는 조금씩 나아가다 다시 멈추었다. 도로의 상황을 주시하는 눈동자는 중간중간 짧게 조수석을 스쳤다.

“…….”

다행히도 조인휘는 울지 않았다.

벌써 몇 번이나 우는 모습을 봐서인지 헤어지잔 소리에 눈물부터 터뜨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미약한 울음기조차 없이 멍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말을 꺼낸 직후에는 동요가 엿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예상보다 훨씬 침착한 모습이었다. 피곤한 일이 생기지 않아 시간을 절약한 것과 별개로 모든 과정은 의외로 소모적이었다. 막연히 후련하다고 하기에는 아직 불편한 과정을 밟는 중이었고, 예상을 엇나가는 상대의 태도에 안도를 느꼈지만 동시에 피로감 또한 느끼고 있었다.

간신히 교통체증이 풀리면서 달리던 차는 곧 오피스텔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양쪽의 차창이 지잉-, 올라가며 닫혔다. 차가 멈추고 오디오와 시동이 꺼지자 침묵이 빠르게 고였다.

조인휘는 손안의 인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닥에 굴러떨어졌던 것을 주운 걸 보면 버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토끼 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인형에 눈길을 둔 채 고정원이 말했다.

“들어가, 그럼.”

“…….”

분명히 들었을 게 분명한 조인휘는 굳어진 자세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말없이 자리를 지키는 모습과, 창 너머의 오피스텔을 겹쳐 보던 고정원은 그제야 현실적인 문제 하나를 떠올렸다.

“오피스텔은 정리 안 할 생각이야.”

한마디 말에 숙여졌던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무슨…, 하고 웅얼거리는 입술을 보며 한 번 더 발언했다.

“필요할 때까지 인휘 네가 쓰는 걸로 해.”

“…아….”

“그게 나도 마음 편하기도 하고.”

“…….”

“그냥,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이 그 상태로 계속 지내주면 고마울 것 같은데.”

‘위자료’라는 단어가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며 신물처럼 올라오려는 쓴웃음을 삼켰다.

입술을 달싹이던 조인휘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말을 뱉어 내지 못하고 안에서 되새기다 혼란에 빠진 모습이었다. 감정을 적당히 숨길 줄 모르는 미숙함을 지켜보기 거북했던 고정원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인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미적거리며 지연시킬 대로 지연시킨 시간은 대략 30여 분 정도였다. 석조상처럼 굳어진 상태를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차문을 열고 나갔다.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에야 고정원은 운전대를 잡았다. 하지만 시동을 걸지 않고 가만히 주차장의 공터를 주시했다.

떠오르는 몇 개의 잡념을 억제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억누르려는 순간 역설적으로 증폭할 걸 알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차는 이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막히지 않는 도로를 타고 얼마 안 있어 집에 도착했다.

방으로 올라와 물부터 꺼내 든 고정원은 몇 번의 목 넘김으로 작은 생수병 하나를 비웠다. 옷을 벗고,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후텁한 기운을 느끼며 욕실로 향했다.

피부가 서늘해지도록 씻고 나온 뒤에는 에어컨을 가동시키며 TV를 켰다. 이전에 괜찮게 봤던 영화 하나를 찾아 틀어놓고 앉아 화면을 주시했다.

눈을 들면 시계는 30분이 지나 있고, 다시 보면 또 그만큼이 지나 있었다. 영화는 어떤 부분을 괜찮게 봤었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런 특색이 없었다. 차라리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낫겠다는 생각 끝에 영화를 종료시켰다.

가운의 허리끈을 풀어 헤친 때였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았기 때문에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네.”

들어오라는 싸인을 보내고 잠자코 서 있었다. 이 시간에 부모님이 올라오시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아마도 좋지 못한 이유로 오셨으리라 예감이 들었다.

대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척이 잠잠하자 눈초리가 기민해졌다. 무언가를 감지하고 빠르게 다가선 고정원은 근거 없는 확신으로 문을 열었다.

“…….”

불안정한 눈빛으로 서 있는 남자는 예상대로 조인휘였다. 파리한 낯빛까지 더해져 죄를 저지른 사람이 용서를 구하러 온 것처럼 보였다.

“들어와.”

본가를 알고 있는 게 의외였지만 삼 년이나 사귀었으니 몇 차례 들락날락했을 법도 했다. 문득 실소했던 건 이 방에서도 그 짓을 해댔겠지 싶어서였다.

“무슨 일이야.”

건조한 물음에 눈동자가 느슨하게 벌어진 가운 사이로 머물렀다. 아침엔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몸을 흐리멍덩한 눈으로 주시하던 조인휘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병원 가자, 정원아.”

“…….”

“내일, 나랑 같이 가보자.”

눈빛이 이상하게 반짝였다.

“너… 너, 병원 가야 돼 꼭.”

단호하게 뱉은 첫마디와 다르게 금세 말을 더듬으며 초조한 기운이 얼굴 곳곳으로 드러났다.

“의사 선생님이 기억 돌아온다고 하셨는데…, 진짜, 금방 돌아올 거라 하셨는데 너 지금 너무 안 돌아오고 있….”

잠자코 듣던 고정원이 말허리를 잘랐다.

“이미 다녀왔어 병원.”

“…어?”

얇게 쌍꺼풀진 눈이 놀라운 기색으로 벌어졌다.

“기억 돌아올 가능성, 없다던데.”

“…….”

넋 나간 듯 창백해진 얼굴로 조인휘가 바르르, 눈꺼풀을 떨었다. 시야가 흐려진 듯 인상을 구기고, 눈 주변을 거칠게 문질렀다. 거짓말이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못하는 반응이었다.

“다른… 다른 병원 가자. 그 방면으로 더 유명한 대학병원으로 가면 돼. 가서 제대로, 다시 검사 받아보자.”

“재검사 필요 없는 확실한 진단이었어. 안타까운 건 이해하는데….”

물기 어린 눈망울이 너울졌다. 함부로 문지른 탓에 충혈된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쩌겠어 인휘야.”

“…….”

“결과가 이런 걸.”

말해 놓고 고정원은 벽에 어깨를 기댔다. 곤란한 듯 목뒤를 주무르고, 피로한 표정을 내비쳤다.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깔자 눈이 마주쳤다.

꿀꺽, 목울대를 울린 조인휘가 절박해진 어조로 부탁했다.

“그럼… 좀만 더… 우리 좀만 더 만나면 안 될까. 헤어지지는 말고, 몇 달이라도 더 만나보는 건….”

“좋아.”

단조로운 대답에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가끔씩 만나서 섹스하고… 하고 싶을 때마다 편하게 연락하는 거 언제든 좋아 난.”

다음엔 셋이서 해볼래?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내뱉은 물음에 조인휘가 얼굴을 붉혔다.

“그런 게 아니라….”

혼란하게 중얼거리더니 팔뚝을 붙들어 왔다.

“제발… 어? 너 지금 아파서 그래. 다쳐서, 머리가 다쳐서… 정상이 아니라….”

정상이 아닌 건 지난 삼 년간의 자신이었고, 거기에 장단을 맞춘 조인휘였다. 하지만 굳이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정원아… 부탁할게. 우리 절대로 이렇게 헤어지면 안 돼 정말로.”

비장한 목소리로 말하는 조인휘가 가소로웠다. 네 연애는 뭐가 그렇게 특별하냐고 빈정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래? 왜?”

“…절대 안 헤어지기로 서로 약속했어. 니가 헤어지자 해도 나는, 내가 절대 안 놓기로 했고, 또 너도 그러기로 했고… 우리 몇 번이나 어려운 고비 같이 넘겼고….”

“…….”

“진짜, 쉽게 한 약속 아니었어 우리는. 그냥 하는 평범한 약속이 아니라 정말…. 아무튼, 우리 진지하게 결혼하기로도 했고….”

횡설수설은 둘째 치고 유치해서 듣기 힘든 말들이 쏟아졌다.

“이렇게 헤어지는 건 죽어도 안 돼…. 헤어지면 정원이가 나 용서 못 해.”

“…….”

“정원이 돌아오면 난리 날 거야 진짜로. 지금은 니가 잠깐 기억이 없어져서 그렇지, 나중에 다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헤어져 있으면 말도 못 하게 슬프고 당황스러울 거고…. 기억만 나면 다 해결될 텐데 이렇게 니가 마음대로 결정해 버리면 우리는….”

‘정원이’ ‘너’ ‘우리’.

말 속에서 지칭하는 대상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나 있는 거냐고 묻고 싶어졌다. 네가 말하는 ‘정원이’가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고. ‘너’라고 불리는 나는 그럼 누구인 거냐고.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사라져야 할 방해물 취급이 불쾌했지만 틀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인휘가 아무리 약속이니 뭐니 들먹여 봤자 자신으로서는 자기들 약속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하는 냉소밖에는 들지 않았다.

…정원이가 돌아오면?

“하….”

조이기 시작한 전신의 근육을 느꼈다. 고정원은 가만히 조인휘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정상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뭐?”

제 팔뚝에 감긴 손을 제자리로 돌려 주면서,

“이게 맞는 거고….”

똑똑히 말했다.

“이제 겨우 제자리로 돌아온 거야.”

그리고 고의적으로 난도질했다.

“누가 봐도… 우리가 연애하는 게 정상은 아니잖아.”

식은 눈으로 쳐다보자 마주한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마가 구겨진 걸 시작으로 참으려는 듯 괴상하게 일그러지는 안면이 보였다.

“끅….”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짓눌려 나왔다. 목에 힘줄을 세운 조인휘는 고개를 피했다.

굳세지 못한 턱이 쉼 없이 부들거렸다. 아랫입술을 몇 번이고 안으로 말아 무는 게 보였다. 기어이 두 눈동자가 무너지며 바닥으로 떨어진 순간, 조인휘는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

바닥에 떨어진 동그란 물 자국.

그것을 내려다보던 고정원은 이내 자리를 벗어났다. 가슴께가 찌릿한 착각이 들 만큼 처량하던 마지막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한창 수업이 진행 중인 강의실 안에서 시선이 앞사람에게 머물렀다. 앞쪽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는 곧은 등은 조인휘의 것이었다. 필기를 하며 성실하게 청강하는, 어제의 일에 영향을 받지 않은 듯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다소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조인휘는 볼캡을 눌러쓴 채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챙 밑의 얼굴을 반사적으로 확인했으나 그늘이 져 어둡게만 보였다.

계속 울었을까.

어제 방을 나서던 얼굴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타인이 눈앞에서 그렇게 서럽게 운 것은 처음인 듯했다. 아니, 캐나다에 가기 전 잠깐 만났던 여자애가 그렇게 울었던가. 벌써 희미해져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 지났을 뿐인 어제의 일은 또렷할 수밖에 없었다. 특정 장면은 조각조각 훨씬 더 또렷해져 있었다.

정리하자는 말에 ‘왜?’ 물으며 벌어지던 입술. ‘미안해. 나 뭐 잘못했어?’ 물으며 짓던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 눈꺼풀을 무겁게 깜빡인 뒤 ‘야경만이라도 같이 보고 가면 안 될까’ 비굴하게 부탁하던 목소리 같은 것들.

의문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만나고 헤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게 그렇게 감정적으로 무너질 일인지, 그렇게 악착같이 매달릴 일인지.

술집에서 취한 조인휘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타인의 입을 통해 묘사된 자신은 다정을 넘어서 극진하기까지 했다.

지나친 다정함. 그게 좋아서, 그래서 그렇게 헤어지기 싫은 건가.

신경질적인 한숨을 토한 고정원은 해야 할 일을 떠올려 보았다. 오피스텔은 계약된 곳이 두 곳이었던 까닭에 하나를 정리할 예정이었다. 노트북 파일을 정리하다 발견한 계약서를 통해 옆집까지 나란히 계약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오늘 아침 방문해 본 결과 명백한 공실임을 확인하였다.

같은 층에 나란히 붙은 두 집을 계약한 이유로 추측되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질리는 기분과 함께 자조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야 사고로나마 정신을 차렸다는 게 다행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앞일 생각하지 않고 너저분하게 벌려놓은 흔적들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정리하게 된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세 시간짜리 연강이 끝나자 빠른 움직임으로 가방을 챙긴 조인휘가 일어나는 게 보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구를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던 고정원은 천천히 물건을 챙겨 일어났다. 강의실을 가로질러 입구로 향하던 중에는 무심코 멈추어 섰다.

의자 밑으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우산 하나가 우연히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잠깐 비가 왔었다. 새벽부터 비가 내린 탓에 강의실은 약간의 불쾌함이 느껴질 만큼 습도가 높았다.

“…….”

조인휘가 강의실에 들어서며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이 파란색이었던가.

생각을 마침과 동시에 뚜벅뚜벅, 주인 잃은 물건을 향해 다가갔다.

* * *

수업이 없는 날, 고정원은 스포츠클럽에서 두 시간 가까이 스쿼시를 쳤다.

땀에 푹 젖어 룸을 나섰을 때 입구에서 웬 낯선 여자와 맞닥뜨렸다. 자신이 나올 때까지 계속 기다린 것으로 보이는 여자는 같이 밥을 먹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나쁠 거 없다는 생각에 고정원은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수락을 했다.

“저 진짜로 이런 적 한 번도 없는데….”

근처에서 가볍게 식사를 한 뒤였다. 술을 마시러 이동하는 차 안에서 여자는 몇 번이나 비슷한 소리를 했다.

“주변 사람들이 알면 기절할걸요. 제가 모르는 사람한테 먼저 같이 밥 먹자고 한 거 알면.”

“그래요?”

호응하면서도 고정원은 비릿한 웃음을 삼켰다. 여자의 표정과 몸짓이 지나치게 익숙했던 까닭이었다. 구석진 곳에 차를 세우고 손을 뻗으면 어떻게 될지 뻔히 예상되는 성적 긴장감이 고스란히 눈에 보이고 있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 뿐 카섹스를 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차에서 하는 비위생적인 행위에 대한 판타지는 없을뿐더러 현재로서는 어떠한 성적인 충동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제안에 응한 것은 단순히 시간을 때울 목적이었다. 정확히는 조금이라도 더 자극적인 일로 육신에 피로를 더한 끝에 숙면을 취하고 싶었다.

도착한 칵테일 바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취향 및 취미, 공통 화제로 주를 이루던 대화는 점점 사생활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앞서 자신의 나이와 함께 대학원에 재학 중임을 밝혔던 여자는 시시콜콜한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이사이 여자가 던지는 사적인 질문에 고정원은 적당히 응수했다. 표면적인 정보는 알려주지만 결정적인 것들은 적당히 얼버무리는 식으로.

대화가 지루해질 때쯤, 장소는 바에서 여자의 집으로 옮겨졌다.

“여기 들어와 있는 거 얼마나 기적적인 건 줄 알아요?”

고정원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음료를 건네며 여자는 으스대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전에 사귄 남자친구도 일 년 만에 데려왔었어요.”

“완전 특별대우네요.”

“내 말 안 믿죠, 지금?”

음료를 한 모금 넘긴 고정원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믿어요. 나도 보수적인 편이라.”

여자는 고정원의 말에 일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 여기 앉아도 돼요?”

여자는 소파에 앉은 고정원의 바로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비켜주겠다는 고정원의 장난에 고개까지 숙여가며 웃던 여자는 결국 두꺼운 몸통을 껴안듯이 하여 옆자리를 차지했다. 집이라서인지 행동이 보다 적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연인 사이에 할 법한 스킨십을 서슴지 않았다.

고정원은 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적당히 스킨십을 받아주고, 하소연을 들어주고, 듣고 싶어 하는 말들을 들려주었다.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태도에 친밀감이 올라갔는지 여자는 말을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허벅지 위로 올라탔다.

“정원이 너도 말 놔. 편하게 해, 응?”

“…지금이 편해요. 내가 연하잖아.”

교묘하게 반말을 섞은 대꾸에 여자가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기댔다. 들썩여 가며 웃다가 다시 상반신을 일으켜 눈을 맞추었다.

“처음에 너 나이 듣고 의외였던 거 알아? 나보다 한두 살쯤 더 많을 줄 알았어. 어려 보이는 직장인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었거든, 사실.”

고정원은 건조한 웃음을 흘렸다. 처음에 나이를 묻는 여자에게 삼 년 전 제 나이를 말할 뻔했던 게 떠올랐던 것이다. 증발한 삼 년의 세월이 떠오르며 그 시간을 빼곡히 메꾼 인물 또한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근데 너 스쿼시룸 나오자마자 내가 말 걸어서 당황했겠다. 나 완전 수상했지?”

“예쁘던데요. 수상하진 않고.”

빈말이 기분 좋았는지 여자는 애교스러운 몸짓으로 파고들었다. 등허리에 손을 얹자 더욱 밀착해 왔다.

“목소리 왜 이렇게 좋아?”

속삭거리는 물음에는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듯한 기색이 배어 나왔다.

“발성부터 좀 남다른데. 깊이감 있고. 너 혹시 영어권 국가 살았어?”

“잠깐, 몇 년씩?”

자세히 묻는 여자에게 고정원은 미취학 시절부터 아버지의 사업차 옮겨 다녔던 도시들을 간략히 말했다.

“나 다음 달에 시애틀 여행 가는데. 너랑 같이 가면 재밌겠다.”

여자가 맞붙였던 상체를 띄우며 말했다. 뜬금없이 사귀는 사이처럼 굴고 있었다.

“…….”

외모도 사는 수준도 월등히 좋은 축에 속하는 여자였다. 아닌 척하면서 드러나는 자신감도 그렇고 대화를 통해 유추되는 성격 등을 미루어 보아 ‘이런 적 한 번도 없다’는 말이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 생각을 한 탓인지 닿은 체온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끈적한 스킨십 또한 재미가 아닌 성가심을 유발했다.

“아, 정말-.”

말끝을 늘어뜨리며 여자가 고정원의 뺨에 손을 가져다 붙였다.

“난 여태껏 내가 남자 얼굴 안 보는 줄 알았는데….”

뿜어내듯 짧게 웃은 여자는 다가와 뽀뽀를 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건지 끊임없이 웃고 있었다. 여자가 심취한 눈빛으로 고정원의 귀와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뻗어 나간 손길은 팔뚝을 지나쳐 이내 손을 파고들었다.

고정원은 겹쳐진 여자의 손과 제 손을 내려다봤다. 사이사이 엉겨드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붙들어 가슴께 위치로 들어 올리자 여자는 기꺼이 내맡겼다.

작고 얇은 뼈대를 더듬으며, 고정원은 뇌리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손을 떠올렸다.

“…….”

자신보다 한참 작다고 느꼈던 손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것과 비교해 보니 확연하게 크고 굵직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손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자신보다 작다고는 해도 엄연한 남성의 것이었다. 남성성에 어떠한 성적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이 어떻게 그렇게 오랜 기간 몸을 맞춘 건지 생각하면 할수록 미궁이었다.

“아….”

흥분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정원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몸에 가져다 댄 여자가 낸 소리였다. 여자는 제 손 아래 겹친 고정원의 손을 조종하듯 이끌어 옷을 끌어 내리게 만들었다.

속옷까지 벗은 여자는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눈망울이 흐려지며 젖어 드는 게 보였다. 전희에 들어가기 전부터 혼자 흥분에 치달아 우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고정원은 미지근한 숨을 뱉었다. 한 번 가라앉히는 게 낫겠다 싶어 밀착한 귓전에 속삭였다.

“씻고 와요.”

운동 후 씻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상태라는 건 피차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명백히 흐름을 깼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곧 별다른 이의 없이 몸을 떼어 내었다.

“…응.”

가볍게 입을 맞추며 멀어진 여자는 욕실로 향했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고정원은 고개를 젖혔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려 했지만 더는 그럴 필요도 없을 듯했다. 이대로 집으로 가서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한 걸 넘어서서 권태로웠고, 내내 몰입하지 못하고 관망하는 듯한 기분만을 느꼈다.

지이잉-.

진동에 고개를 든 고정원의 눈길이 유리 탁자로 쏠렸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자신의 휴대폰은 전화가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화면에 뜬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함과 동시에 동공이 흔들렸다.

발신인을 보고도 지켜만 보던 때였다. 어느새 타월로 몸을 가린 여자가 다가왔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 오늘 진짜 미쳤나 봐. 자꾸 안 하던 짓 하고 싶어.”

“…….”

“들어가서 같이 씻을래?”

진동이 연이어 울리며 급박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주시를 끝내고 손을 뻗었으나 순간 뜻하지 않게 휴대폰이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안 돼. 못 받아.”

휴대폰을 가져간 여자가 뒤로 숨기는 장난을 쳤다. 그리고 그사이 끈기도 없이 발신 요청이 끊어졌다.

고정원은 가만히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차갑게 응시하는 고정원의 눈을 본 여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소파에서 일어난 고정원은 여자의 손에서 제 휴대폰을 낚아챘다. 여자를 스쳐 자리를 벗어나는 동시에 빠른 손놀림으로 통화 내역을 확인했다.

[오후 8:53]

부재중에 찍힌 발신자명은 ‘조인휘’로, 그것은 이전의 유치한 저장명을 그대로 둘 수 없어 바꾸어 둔 것이었다.

현관 앞에 서서 경직된 자세로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쪽에서 다시 걸지 어떡할지, 짧은 갈등을 하는 사이 손안의 기기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바로 받으려던 고정원은 그러나 움직임을 멈추었다. 두어 번쯤 진동이 더 울리고 나서야 통화를 연결시켰다.

“…….”

-…여보세요?

공간을 분리시키듯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말해.”

긴장한 것처럼 목이 잠겼다. 휴대폰을 움켜쥔 고정원의 손등으로 혈관이 솟아올랐다.

-어, 아니, 그냥 별건 아니고…. 혹시 바빠?

두 번이나 전화해 놓고 한다는 말이 고작 이런 건지.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며 대꾸했다.

“아니.”

갑갑함에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쾅, 문이 닫히며 잠금장치가 실행되는 기계음이 뒤따랐다. 그러는 동안 내내 침묵하던 조인휘가 망설이듯 말을 이었다.

-…그… 좀 더 일찍, 나갔어야 하는데….

“…….”

-아무튼… 이제 나 나가니까, 여기, 오피스텔 정리해도 된다고 알려주려고…. 그거 때문에 전화했어.

귀에 박히는 말마다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말이라도 고마웠어. 계속, 졸업할 때까지 써도 된다고 배려해 주고…. 아무튼….

“…다른 데 살겠다고?”

-…어.

그곳에서 조인휘가 나간다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일주일 만의 연락이 이런 통보라는 게 황당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조인휘가 어떤 태도를 보였던가. 떠올려 봐도 생각나는 거라곤 모자를 쓴 채 강의실에 앉아 있다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벗어나는 모습뿐이었다.

“지금 어디야.”

묻자 휴대폰 너머로 숨소리만 넘어왔다. 그 적막에 참을성이 닳아갈 무렵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오피스텔이긴 한데… 한 시간 내로 다 정리 끝나니까….

“기다려.”

-어?

통화를 끝낸 고정원이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30분 만에 도착한 오피스텔의 현관 앞에 서서 흐트러진 숨결을 정리했다. 가지고 있던 키로 문을 열자 거실에서 짐을 정리하던 조인휘가 놀란 사람처럼 홱, 돌아보았다.

“아, 너 키… 갖고 있었지.”

조인휘의 말을 무시하고 고정원은 집 안부터 둘러보았다. 나간다기에 어느 정도 휑한 상태를 예상했으나 내부는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조인휘의 물건은 고작 박스 두 개로 단출하게 담겨 있을 뿐이었다.

“이게 다야?”

묻는 말에 조인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다 네 거였으니까 처음부터….”

고정원의 눈길이 박스 안 내용물로 머물렀다. 너저분한 안을 숨기듯 옷으로 덮어 버린 조인휘는 이내 방으로 향했다.

“…마침 잘됐다. 너 줄 것도 있었는데.”

함께 이동한 방 안에서 조인휘는 흰 봉투를 건넸다. 내용물을 꺼내어 보니 5만 원권 몇 장이 나왔다.

“이걸 나한테 왜 주는지 모르겠는데.”

“…월세야. 그동안, 정원이 네가 다 냈는데… 마지막이라도 내가 제대로 내는 게 맞다 싶어서….”

그동안 여러모로 신세 많이 졌어, 하고 주눅 든 것처럼 기어드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고정원은 손에 든 봉투를 다시 조인휘 쪽으로 내밀었다.

“가져가. 이거 없어서 아쉬운 입장도 아니고…. 받는다고 고마운 기분이 드는 것도 아니라서 사실.”

조인휘의 눈동자가 바닥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내가 미안하고 고맙지, 너한테 고마워하라고 주는 거는 절대 아니었고….”

뭘 망설이는지 뒷말을 잇지 못하던 조인휘가 목에 힘을 주며 내뱉었다.

“너는, 나한테 책임감 같은 거, 느낄 필요 없으니까.”

“…….”

“…나도 너한테는, 받을 이유 없고.”

선을 긋는 태도에 고정원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너는’ ‘너한테는’ 하는 식으로 강조하는 부정은 마치 특정 ‘누구한테는’ 허락된다는 소리로 들렸다.

가느다란 속눈썹에 힘이 서려 있는 게 보였다. 말이 오가지 않는 동안 자리에서 산만한 몸짓을 보이던 조인휘가 결심이 선 듯 봉투를 밀어 냈다.

“아무튼, 받아줘. 그게 내 마음이 편해서 그래.”

어쩔 수 없이 도로 받아 든 고정원이 상대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게 불편한 듯, 조인휘는 부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본인의 감정을 피력하고 있었다.

“갈 곳은 있어?”

질문을 받은 조인휘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있으니까 나가지.”

왜 없겠어 내가 갈 곳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정색하는 투로 중얼거렸다.

“근데,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서 여기 왔던 거 아니었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는 주제에 그런 게 궁금한 모양이었다.

“…….”

상대가 판을 깔아주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실상 여기까지 찾아올 만큼 급한 용건이랄 것은 없었다. 나가겠다는 통보를 듣자마자 얼굴을 봐야겠다고 생각한 게 행동의 기저에 깔린 전부였다. 황당함을 억누르지 못했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없으면 그럼….”

“…….”

“나는 이만 가볼게. 카드키는 현관에 뒀어.”

낮은 음성으로 차분하게 내뱉고 나서 조인휘는 거실로 나갔다. 해야 할 일을 빼앗긴 기분으로 서 있던 고정원이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조인휘는 큰 박스 두 개를 겹쳐서 들어 올리고 있었다. 빈말이라도 야무지다고 말해주기 힘든 허술한 폼이었다. 지켜보던 고정원이 다가가자 역시나 두 개의 상자를 한꺼번에 든 조인휘가 휘청, 중심을 잃었다.

쏟아질 뻔한 상자 앞으로 다가서서 밑단을 받쳐 들자 조인휘의 손이 함께 잡혔다.

“들어줄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얼굴이 가까이 내려다보였다. 상기된 낯빛과 고집스럽게 내리깐 눈이 거부 의사를 드러내고 있었다. 거절하는 사람에게 호의를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필요 이상으로 밀어내는 태도가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고정원의 손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것에 반응하듯 조인휘가 과민한 몸짓을 보였다. 겹쳐진 손을 떨쳐 내려는 것처럼 흔들고서는 홱, 힘겹게 돌아섰다. 뒤뚱거리면서도 서두르는 걸음으로 현관을 향해 나아갔다.

“너….”

그 등에 대고 고정원이 내뱉었다.

“…….”

강의실에 두고 간 우산에 대해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삼켜졌다.

이쪽으로 몸을 돌리지는 않았으나 기다리듯 서 있던 조인휘는 짐을 한 번 추스르고는 발길을 옮겼다.

콰당.

닫히는 마찰음을 끝으로, 집 안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