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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Settle Down (25/30)

13. Settle Down

일상이 너무나 평화로운 나머지 자극을 주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그게 바로 요즘이었다.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될까 봐 넋 나가 지냈던 때가 고작 두 달 전인데. 방학 시즌이 시작되고부터는 더할 나위 없게 평온한 시기가 찾아왔다.

고정원이나 나나 예민할 일이 없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붙어 있다 보니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둘이서 멀리 놀러도 가고, 문화생활도 하고, 어떤 때는 며칠 내내 집에서만 노닥거리기도 했다.

피트니스 센터도 같이 다니고 있었다. 그건 내가 먼저 한 제안이었다. 고정원을 스토킹했던 남자는 더 이상 없다 해도 혼자 보내기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같이 다녀 보니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동반 스케줄이 생긴 것도 좋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게 된 것도 좋았다. 운동 기구 사용법은 고정원이 전부 가르쳐 줬다. 어찌나 전문적으로 세세히 가르쳐 주는지 PT를 받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잘생기고 다정한 트레이너는 세상에 없겠지, 뭐 그런 유치해빠진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튼 고정원은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었다. 자세를 잡아 줄 때 터치가 지나치게 많고 스스럼없어서 얼굴이 뜨거워질 때도 있었지만 열정적으로 지도하는 걸 뭐라 할 수는 없어서 나도 잠자코 열심히 응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속되자 확실히 근육도 붙고, 체력도 좋아지는 걸 느꼈다.

좋은 일이 또 하나 있었다. 학기 중에 부모님 이사 때문에 빌려드렸던 돈을 드디어 돌려받았다. 많지는 않지만 일정 금액을 더 보태 주시며 덕분에 잘 썼다는 인사도 한 번 더 하셨다. 역시 무리를 해서라도 빌려드리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하게 늘어져 있다가,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물었다.

“우리 오늘 오랜만에 술 마실까?”

우리는 마침 노트북으로 영화를 시청하고 있었다. 소파와 소파 테이블 사이의 바닥, 그 좁은 공간에 둘이서 겹쳐 앉은 자세였다.

“그래, 그럼.”

같이 술을 마신 지 오래돼서 그런가. 쉽게 승낙이 떨어졌다. ‘예!’ 하고 양손을 들어 올리며 애같이 소리지르자 고정원이 웃었다. 나는 간만에 좋은 데서 마시고 싶어서 휴대폰으로 검색에 들어갔다.

“굳이 나갈 거 없이 집에서 마시자. 내가 안주 만들어 줄게.”

“어? 그럼 그럴까.”

밖에서 마시는 것도 좋았지만 집도 나쁘지 않았다. 돈도 적게 들면서 편하게 많이 마실 수 있으니까.

“그럼 내가 지금 술 좀 사 올게. 기다려!”

마침 좋은 게 떠올랐다. 집을 나서는데 입가가 음흉하게 벌어졌다. 사실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고정원이 술버릇이 나올 정도로 만취한 모습을 한 번쯤 보고 싶다고. 왠지 잘하면 오늘 그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가서는 맥주, 소주, 과실주, 탄산음료를 종류별로 샀다. 살 때 또 신분증 검사를 당하는 바람에 기분이 약간 그랬지만, 뭐 요즘에는 겉모습 상관없이 무조건 검사하는 추세라고 듣기는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드디어 고정원의 술버릇을 알 수 있다니. 무거운 봉투를 들고 오는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지기도 전. 부엌 식탁에서 이른 술판이 벌어졌다. 단순하면서도 뭔가 있어 보이는 안주를 다섯 가지나 만들어 낸 고정원은 당연하게도 내 속내는 전혀 예상 못 하는 눈치였다. 첫 잔이니까 원샷하자는 말에 순순히 원샷을 했다. 더운 김에 벌컥벌컥 들이켜기 바라서 에어컨을 꺼 놨는데도 별 말이 없었다.

“베이컨 대박 맛있다. 먹어 봐 봐.”

포크로 찍어서 먹여 주었다. 고정원은 입 안의 베이컨을 우물거리며 내 뒷덜미를 쓰다듬었다. 티셔츠 네크라인 안쪽으로 들어온 손바닥이 문질문질 움직였다.

“갑자기 기분이 좋네.”

“나? 나야 뭐, 요새 맨날 좋지.”

너무 들떠 보였나.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올라갔던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내렸다.

“아, 맞다. 내가 진짜 맛있는 술 만들 수 있어. 너 해 줄게, 잠깐만.”

나는 딱히 술자리에서 폭탄주를 제조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고정원을 취하게 하려고 허풍을 떨었다. 만드는 법을 정확히 모르는 관계로 과실주와 소주, 탄산음료를 아무렇게나 적당 비율로 섞었다.

“마셔 봐. 원샷해야 맛있어.”

원샷! 원샷! 소심하게 박수를 치며 부추겼다. 고정원은 의심스러운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이내 시키는 대로 컵을 깔끔하게 비워 주었다. 나는 더 맛있는 제조법도 있다고 바람 잡으며 곧장 한 잔을 더 만들었다.

“아까부터 왜 나만 마시는 것 같지?”

세 잔째 말던 중이었다. 고정원이 하는 말에 하는 수 없이 나도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너 마실 때 나도 계속 마셨는데?’ 하고 우물거리다가 아예 새로운 제안을 했다.

“그럼 게임해서 마시자.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마시기.”

“…….”

고정원은 대꾸가 없었다. 시시한 게임이라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게 그나마 이길 수 있는 게임이었다. 끈질기게 구슬린 끝에야 겨우 수락을 받아 냈다.

“가위바위, 보! 오, 이겼다.”

첫 판부터 이겼다. 솔직히 상황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미묘한 속도로 한 발 늦게 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얍삽한 수법이긴 해도 뭐 어떤가 싶었다. 애인 사이에 장난치는 건데.

연달아 진 고정원은 연달아 마셨다. 그렇게 다섯 잔째였다. 컵을 든 고정원이 마시기 직전 멈추고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이기고 싶어?”

“……뭐가. 졌잖아, 얼른 마셔.”

모르는 줄 알았는데 뜨끔했다. 너무 연속으로 이긴 게 문제였던 듯했다.

티나게 굴 수 없어서 다음 판부터는 제대로 했다. 그래도 벌주의 비율은 고정원이 월등히 높았다. 나는 기를 쓰고 이기려 하는 반면, 고정원은 성의 없이 주먹만 낸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상대가 이러면 흥이 깨질 법도 한데 목적의식이 워낙 강력해서 상관없었다. 술을 먹일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오로지 술을 위한 게임이 진행되고부터 얼마 뒤. 고정원의 눈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얼굴빛은 똑같은데 표정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식탁으로 조금 기운 몸도 그렇고,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취기 돌아?”

물으며 나는 일부러 의자를 가까이 붙였다.

“음…… 좀, 어지럽긴 하네.”

대답한 고정원은 무거운 고개를 내게 기댔다. 스르르 기운 머리가 어깨로 안착한 순간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웃는 것도 똑똑히 들었다.

“…….”

얘도 취하면 잘 웃고 애교스러워지는, 설마 그런 유형인 건가.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뛰었다. 여태 와인 몇 잔 마시고 조금 기분 좋아지는 정도는 봤지만 이런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나 좀 봐 봐.”

취하기를 기다렸던 만큼 흥분이 일었다.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신나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흥미진진한 나머지 숨이 다 가빠지는 걸 느꼈다.

“응? 일어나 봐, 정원아.”

나는 고정원의 얼굴을 붙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왜.”

별것 아닌 한마디에도 왠지 모를 애교가 묻어났다.

“…….”

시원한 입매를 그리는 입술이 젖어서 촉촉해진 게 보였다. 힘 풀린 눈꺼풀 아래 안광도 예쁘게 번들거렸다. 힘빠진 고개를 살짝 젖힌 탓에 선이 뚜렷한 턱과, 그 아래 툭 불거진 결후에도 눈이 갔다. 잘생긴 사람은 취하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가. 누가 들으면 비웃을 만한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

“뭐 해.”

갑자기 심각하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머릿속에만 찍어 두고 떠올리며 곱씹어야 한다는 게. 그래서 내일 당사자가 지워 달라 하면 지워 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있었다.

“그냥, 추억 남기는 거야.”

“찍지 마.”

밀어낸 고정원이 얼굴을 들이댔다. ‘뽀뽀해 줄 테니까 하지 마’ 하고 쪽쪽거리며 내 뺨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카메라를 치운 나는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명령했다.

“잠깐만, 그럼 애교, 애교 부리면 안 찍을게. 애교를 부려 봐, 나한테.”

흥분해서 ‘애교’란 말이 몇 번이나 나갔다. 나는 자제하기 위해 입술 안쪽을 깨물면서 고정원을 쳐다봤다. 벌써부터 기대감으로 손끝이 찌릿했다.

“……음.”

고정원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평소였으면 우위에 서서 능글맞게 굴었을 텐데 드물게 순진한 반응이었다.

“어려운데……. 좀 봐주면 안 돼?”

고정원이 자기 얼굴을 쓸어내리며 토로했다. 눈을 감고는 곤란한 듯 웃는 표정이 귀여워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정말로 좋아서 소름이 다 돋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취하게 해 볼걸. 진심으로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취했나 봐. ……가서 자야겠어.”

고정원이 덜컹거리며 커다란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걸 붙들어서 다시 앉혔다.

“왜, 가지 마. 취하니까 귀여운데, 너.”

“…….”

고정원이 나를 쳐다보고 나도 고정원을 쳐다봤다. 약간 부끄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슬슬 나한테도 취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너 이름이 뭐야.”

취조하듯 장난스럽게 질문했다. 어이없어서 웃을 법도 한데 고정원은 진지하게 답했다.

“……고정원.”

“너 누구랑 살아.”

“……인휘랑.”

“같이 사는 사람한테 뭐 고백할 거 없어?”

취중진담 같은 게 듣고 싶어서 슬쩍 떠보았다.

“음…….”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하던 고정원이 나를 보며 말했다.

“사랑해.”

뭐 숨기거나 잘못한 게 없느냐는 의미의 고백이었다. 이런 고백을 할 줄은 몰랐어서 나도 좀 민망해졌다.

“……얼마나 사랑하는데?”

“……. 글쎄.”

“뭐야, 말해 봐. 얼만큼 사랑하는데.”

“……너 아니면, 살 이유 없을 만큼.”

“…….”

죽을 거 같았다. 온몸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느낌이 아니라 실제 증상이었는지 반팔 아래로 드러난 팔뚝부터 손등이 불그스름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이걸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이거 한 잔만 더 마시고 있어.”

소주를 한 잔 따라 주고 가려는데 몸이 기우뚱했다.

“어디 가.”

팔을 뻗은 고정원이 일어선 나를 잡아당겼다.

“아니, 어디 안 가. 잠깐 방에 좀 갖다 오려고. 1분, 아니, 2분만 기다려.”

곤란함을 숨기고 친절하게 말했다. 팔뚝을 감싼 손은 여전히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디 안 간다는 말을 그 상태에서 열 번은 했다. 취해서 말귀가 어두워진 고정원에게 몇 번이고 설명해주고 나서야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찾는 건 카메라였다. 고정원이 자기는 안 쓴다고 내게 넘겨준 DSLR. 대놓고 폰으로 찍으면 또 못 하게 할 것 같아서 좀 떨어진 곳에서 카메라로 몰래 찍을 생각이었다. 별짓을 다 한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추억인데 뭐 어때 싶기도 했다.

주방으로 가져온 카메라는 옷으로 가려 놓았다. 고정원의 얼굴을 향해 잘 설치해 두고는, 냉장고에 볼일이 있었던 척 생수를 빼 왔다. 고정원은 계속해서 혼자 술을 넘기고 있었다. 물론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기색이었다.

이번에는 뭘 물어볼까. 아니면 뭘 시켜 볼까. 침을 꼴깍 삼키며 머리를 분주하게 돌렸다.

“그만 마셔.”

과하게 마시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저지시켰다. 이대로 잠들어 버려도 큰일이었다. 나는 대신 찬물을 손에 쥐여 주었다. 가득 담긴 물을 긴 넘김으로 꿀꺽, 꿀꺽, 두 번 만에 해치운 고정원은 ‘후……’ 한숨을 뱉었다.

“괜찮아?”

걱정스럽게 묻자 조용한 시선이 닿았다.

“……우, 왜?”

눈빛이 아까까지와 대비될 만큼 달랐다. 설마 카메라로 찍고 있는 걸 들킨 건가.

“…….”

굳어 있자 고정원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나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졸려서 그런 거였구나.

“졸려? 들어가 잘래?”

“…….”

아무래도 계획은 실패한 것 같았다. 진심으로 찍어 두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었다. 주량이 넘어간 고정원은 이제 잠이 쏟아지는 듯했다. 눈을 감고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넓은 어깨를 구겨 식탁에 앉아 있는 게 불편해 보여서 일으켜 주려다가 주변부터 정리했다.

“일어나 봐.”

식탁을 말끔히 치우고 고정원의 어깨를 흔들었다.

“정원아, 잠들었어? 여기서 자면 안 돼.”

팔뚝을 끌어당겨 봤지만 일시적으로 꿈쩍할 뿐이었다. 겨드랑이에 얼굴을 넣고 일으켜 보려 했으나 이것도 역부족이었다. 현실적으로 의식 없는 고정원을 혼자 부축하는 건 불가능했다.

여기서 재워야 하나. 술을 깰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어깨를 꾹 눌렀다. 한 번만 더 깨워 보고 눈을 안 뜨면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

“안 일어나면 두고 간다?”

장난으로 티셔츠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때 허리가 휙, 끌어당겨지며 탄탄한 몸과 맞부딪혔다.

대뜸 바지가 내려가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은 속옷의 허리를 붙들고 나는 고정원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야, 너 왜 이래!”

지금까지 잠들어 있다가 어디서 이런 괴력이 솟는지 몰랐다. 밀치고 때리는데도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고정원은 돌처럼 딱딱한 손으로 내가 입은 드로즈를 막무가내 끌어 내렸다.

“아, 하지 마, 바보야. 너 취했어!”

그러더니 자기 옷도 훌렁 벗었다. 울퉁불퉁 각 잡힌 흉부 근육이 드러나자 반사적으로 몸이 뜨거워졌다.

“……놔.”

나는 고정원의 다리 사이에 갇혀 있었다. 무섭게 부풀어 오르는 성기가 내려다보였다.

“……야, 고정원. 너 이상해. 무서우니까 이제 그만해.”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고정원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뒷걸음질 칠 뻔했지만 허리에 팔이 둘러졌다.

맞붙은 고정원의 몸이 오늘따라 거구처럼 느껴졌다. 설마 아직도 키가 크는 건가. 멍하니 생각하는데 입술이 내려앉았다. 부리로 쪼는 것처럼 가볍에 부딪는 입맞춤이 반복됐다. 내리깐 고정원의 눈은 관찰하듯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불안감에 눈을 뜨고 입 맞췄다.

“더워…….”

에어컨을 꺼 놔서 몹시 더웠다. 나는 입술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손으로는 고정원의 가슴팍을 밀어 내면서.

“응.”

대답하며 고정원은 내 턱을 다시 자기한테로 당겼다. 그리고 가만히 입술을 빨아 댔다.

“덥다니까.”

고개를 홱 피하며 말했다. 귓전에 닿은 입술이 더운 숨과 함께 뭉개졌다.

“응.”

이상한 대답이었다. 정말로 취해서 정신이 나간 게 느껴졌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만으로 무서운 기분이 들면서 막막해졌다. 얼굴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애무가 다시 입술에 닿았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축축한 혀와 동시에 엉덩이 골을 파고드는 끈적한 손길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 아, 아…… 아……!”

미친듯이 흔들렸다. 덜컹덜컹덜컹, 무너질 것 같은 식탁 가장자리를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빠르게 드나들던 성기가 퍽, 하고 처박히면 비명이 터졌다. 고정원은 내 엉덩이 속으로 성기를 꼭 짓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튀어나온 볼기 살이 납작해지도록 밀어 넣고, 짓누르고. 그 안에서 둥글게 휘저으며 짓이겨 댔다.

“흐…….”

허리가 무너지고 다리가 꺾였다. 일으켜 세워 놓고 고정원은 다시 적나라한 율동을 반복했다. 이번에는 느렸다. 두껍고 길죽한 살덩이를 밀어 넣었다가, 천천히 뺐다. 얼얼한 이물감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만……!”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술취한 사람은 일체 반응하지 않고 뒤를 맞추는 일에만 열중이었다.

“흣.”

속도가 느려져도 성기를 짓이기는 행위는 똑같았다. 음모가 비벼지도록 박아 넣고는 거기서 뭉개고 또 뭉갰다. 그 큰 걸 뿌리까지 넣었음 됐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응, 으응……!”

괴로웠다. 근데 괴롭기만 한 건 또 아니었다. 드나듦이 깊게 이어지고 있었다. 입 속으로는 손가락이 들어왔다. 두 개의 손가락은 하반신처럼 넣었다 빼는 왕복 운동을 시작했다. 나는 자칫 깨물지 않기 위해 입술을 오므려 그걸 빨아야 했다.

움직임이 빠르게 변했다. 입 속의 손가락은 깊숙한 곳에 쑤셔 박혔다. 미치겠어서 울었다.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나도 허리를 같이 움직여 댔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아, 아……!”

어느새 같이 즐기고 있었다. 살끼리 찧어 대는 쾌감이 머리를 쾅쾅 때렸다. 전율이 내달린 등허리가 꺾였다. 고정원이 속도를 냈다. 등을 젖힌 나는 마구 뒤흔들리는 격렬함 속에서 고정원의 팔뚝을 붙들었다. 어디론가 넘어갈 지경이었다.

까무라치는 발작이 관통했다. 정수리 한가운데, 쾌감의 꼭지점이 자글자글 끓었다. 나는 고정원의 가슴팍에 뒤통수를 문지르며 꼿꼿해진 발끝을 떨었다.

고정원은 나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사정의 극점을 찍고 나서도 한동안 그렇게 틀어박혀 있었다. 입 속에 처박은 손가락도 그대로였다. 몇 번 더 박아 올리며 여운을 취하는 듯했다. 빠져나갈 때 고정원의 손가락에는 내 잇자국이 찍혀 있었다.

“하…….”

완전 녹초가 됐다. 땀으로 흥건하게 절여져 있었다. 더워서 이대로 얼음물에라도 뛰어들고 싶었다.

“……에어컨…….”

중얼거리자 몸이 휙 들렸다. 고정원이 나를 안아 들었다. 축 늘어져 안겨 있자 향한 곳은 욕실이었다. 그곳에서 한 장 입혀져 있던 티셔츠 마저 벗겨졌다. 샤워 부스 안까지 운반되어 겨우 바닥을 딛고 섰다.

“읏, 차거.”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졌다. 더운데도 섬칫하게 느껴질 만큼 차가웠다. 추워서 움츠린 채로 바짝 몸을 붙였다. 두터운 허리춤을 붙들자 갑자기 엉덩이가 꽉 붙잡혔다. 고정원은 그대로 내게 입을 맞췄다.

둘이서 찬물을 맞으며 키스를 했다. 땀이 씻겨져 내려가며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곳은 다 차가운데 입 속만 뜨거워지고 있었다. 이 정도로 차가운 물을 맞았으면 고정원도 슬슬 술이 깨지 않을까. 기대하며 입술을 빨았다.

춥, 하고 입술이 떨어졌다. 어깨에 올라온 손에 압력이 가해졌기 때문이었다. 서서히 누르는 힘을 따라 나는 무릎을 구부렸다.

타일 바닥에 양 무릎이 닿았다. 쏟아지던 물도 뚝 그쳤다. 샤워기의 레버를 조작한 손이 곧 아래를 향하는 게 보였다. 우뚝 선 성기를 몇 번 훑은 고정원은 내 얼굴 가까이로 그것을 붙였다. 그리고 내 머리통을 살짝 끌어당겼다.

“…….”

무언으로 하는 지시였다. 말이 없어서 압박감이 몇 배로 느껴졌다. 그렇게 많이 마셨으니 금방 깰 리가 없나. 단념한 나는 어두운 샤워 부스 안에서 성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힘껏 빨았다. 빨리 사정했으면 싶어서 손까지 써 가며 열심을 냈다.

뭔가 불만족스러웠을까. 성기를 빼낸 고정원은 나를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들어올 때처럼 안아 들었다. 나는 커다란 타월로 감싸진 채 욕실을 나왔다. 성큼성큼 고정원의 걸음을 따라 안긴 몸이 흔들렸다. 대체 어디를 가나 했는데 멈춘 곳은 술판이 벌어졌던 주방이었다.

“엇…….”

고정원이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심장이 덜컹했다. 가리고 있는 옷을 들추고 기계를 집어 든 고정원은 그대로 침대 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완전히 식겁했다. 여태 녹화 중이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그거, 너 취한 거 찍으려고 갖다 둔 거야. 이상한 거 찍으려고 한 거 아니야.”

“…….”

“……너, 근데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

고정원은 묵묵부답으로 나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가져온 카메라는 협탁으로 올라갔다. 잔뜩 취해 있더니 카메라 설치해 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몰랐다. 문득 취한 게 맞냐고 묻고 싶어졌지만 입을 다물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멀쩡히 걷는다 해도 이건 어딜 봐도 평상시 모습이 아니었다.

“너 많이 취했어. 이제 그만하자.”

자세를 낮추고 다가오는 고정원이 부담스러웠다. 무언가 와락 시작될 것만 같았다. 눈빛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무섭다는 생각이 앞섰다.

“야, 고정원……!”

대뜸 고환을 움켜쥐는 손길에 놀랐다. 함부로 주무르고, 다리 사이의 감추어진 샅으로 내려갔다. 만지는 방식은 순수하게 본능적이었다. 잘해 주려는 내숭조차 없이 욕구를 따라 노골적이기만 했다. 나는 고정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읏, 야!”

축축한 구멍이 문질러졌다. 손가락을 넣었다 빼냈다, 지저분하게 만지고 있었다. 시선은 내게 고정이었다. 그 쳐다보는 눈빛 하나만으로 나는 이 상황이 곤란했다. 왜 이렇게 사람을 수치감 들게 관찰하는지 몰랐다.

“앗, 좀!”

안으로 손가락이 깊게 파고들자 발버둥쳤다. 투닥거리며 버둥대는 발에 고정원의 허벅지가 부딪혔다. 웅크린 채 마구잡이로 몸부림치다가 멈췄다. 발바닥에 턱, 하고 부딪힌 다른 무언가 때문이었다.

“미안. 괜찮아……?”

건드린 건 발기해 있는 성기였다. 나는 움츠렸던 몸을 펴고 조심스레 물었다.

“너 뭐……!”

발목이 붙들렸다. 그리고 아래로 끌려갔다. 뭐 하는 거냐고 물어도 고정원은 당연한 것처럼 답해 주지 않았다.

“아……”

발바닥이 묵직한 음경에 닿았다. 낮은 신음이 쏟아져 깜짝 놀란 순간 눈이 마주쳤다. 흥분한 얼굴로 고정원은 내 발을 자기 성기에 겹쳐 쥐었다.

하얀 발에 벌건 성기. 보고 있는 것만으로 낯이 뜨거워졌다. 고정원은 경직된 내 발을 가지고 시근덕거리는 성기에 문질렀다.

닿는 느낌이 손보다 생생했다. 빼내려고 발에 힘을 주자 신음은 보다 낮게 터졌다. 눌리면서 자극된 모양이었다. 손도 아니고 더러운 발인데, 뭐가 그리 좋은지 몰랐다.

베개를 끌어당겨 안았다. 이렇게 된 이상 빨리 끝내자 싶어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발끝으로 꾹꾹 누르다가, 발바닥으로 음경을 비볐다. 발가락과 발바닥 사이 굴곡진 틈새를 이용해 귀두까지 문질렀다.

“읏.”

흥분한 손아귀가 종아리를 거칠게 주물러서 아팠다. 고정원의 성기는 튀어나올 것처럼 펄떡거리고 있었다. 어찌나 무겁고 단단한지. 저걸 앞으로 쭉 잡아당겼다가 팩 놓으면 고정원은 돌덩이에 부딪친 것처럼 아플 것 같았다. 혼자 시덥잖은 상상을 하면서 나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고정원이 인상 쓰고 있었다. 곧 끝날 듯했다. 힘들어서 헐떡대면서도 거의 다 왔다는 생각으로 퉁퉁한 기둥을 열심히 비벼댔다.

그러는 사이 왈칵, 정액이 토해졌다.

“하…….”

겨우 끝났다 싶어 한숨이 나왔다. 허벅지부터 종아리가 얼얼했다. 평소 안 쓰던 근육을 마구 사용한 탓이었다. 눕고 싶어져서 푹신한 시트로 폭,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그때 무슨 의도인지 고정원의 머리가 내 발치로 향했다. 예감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읍!”

역시나였다. 서로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게 되었다. 비스듬히 누워 있자니 입술과 코로 딱딱한 살덩이가 퍽, 부딪혀왔다. 문지르는 살덩이를 꾸역꾸역 머금었다. 내 것도 뜨거운 점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몇 번 들락거린 것만으로 흥분한 고정원이 점점 위로 올라탔다. 나는 입을 헤벌린 채 성기를 받아 내느라 고역이었다. 말도 안 되는 크기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건 아니었지만 버거워서 계속 눈물이 났다.

“웁, 큭…… 컥……!”

이렇게 깊게 넣은 적은 없었는데. 나는 턱을 쳐들고 목구멍을 최대한 열어 두려 애썼다. 거대한 살덩이가 목구멍 안쪽까지 꽂히는 바람에 너무 괴로웠다. 쯔걱, 쯔걱, 담금질하는 소리가 났다. 지쳐서 겨우 끝나자 입 안에서는 침 섞인 체액이 늘어졌다.

고정원은 지친 나를 엎어지게 했다. 그리고 협탁에 뒀던 카메라의 위치를 바꿨다. 침대에 올리고, 각도는 밑에서 위를 향하도록. 때마침 성기가 뒤를 파고들며 다리 한쪽이 접혀 올라갔다.

“아, 싫, 아……!”

한쪽만 올려도 아래가 훤히 노출됐다. 카메라에 접합부가 찍히는 구도였다. 정확히 어떤 장면이 나오게 될지 예상이 갔다. 렌즈가 꼭 사람의 눈처럼 의식되면서 나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악, 아흑…… 아, 아아……!”

침대 스프링이 튀도록 쾅쾅 박아 댔다. 성기가 꽂힐 때마다 쾌감도 같이 꽂혔다. 움찔움찔 등줄기가 떨렸다. 가슴팍이 한껏 젖혀지자 확 뒷머리가 꺾였다. 내 머리를 잡아챈 고정원은 거침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상스럽게 해 댄 뒤에는 또 박았다. 빠르게 박다가 멈추었다. 고정원은 내 목덜미를 잘근거리면서 애무에 심취했다.

“아…….”

낮게 울리는 신음에 깜짝 놀랐다. 실제 짐승이 낼 것 같은 목울음이었다. 한숨을 내쉰 고정원은 느릿하게 삽입을 즐겼다. 길게 뺐다가 끝까지 넣고, 안을 벌려 눈으로 확인해 가며 넣기도 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집어 드는 소리가 또 났다. 아니나 다를까 엎어져 있던 몸이 돌려졌다.

“이제 꺼……. 꺼 달라고…….”

베개로 얼굴을 가리면서 부탁했다. 당연히 고정원은 대꾸가 없었다. 가리고 있던 베개를 치워 버리고 입을 맞추는 게 다였다. 힐끔 보니 카메라는 저 밑에서 아직도 우리를 찍고 있었다.

상체가 붕 떴다. 일으키는 대로 일어난 나는 고정원의 허벅지에 앉았다. 아직까지 벌어진 곳으로 고정원이 음경을 밀어 넣었다. 엉덩이를 쥔 손아귀와 밀려드는 뜨뜻한 살덩이가 느껴졌다. 목에 꽉 매달렸다. 삽입이 완전해지자 고정원은 움켜쥔 엉덩이를 들었다 내리길 되풀이했다. 처음에는 자기가 하더니 나중에는 나보고 하라는 식이었다. 허리를 치켜올렸다가 다시 내리면 잘했다는 듯이 커다란 손이 등줄기를 쓰다듬었다.

“야, 고정원…….”

“…….”

“읏, 흣…… 정원아.”

나는 입술을 빨면서 부탁했다.

“제발……. 말 좀 해. 어?”

아까부터 소곤거리는 목소리였다. 녹화 중인 걸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실시간으로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불안하고 신경 쓰였다.

“……나 저거 끄고 올래.”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허리를 멈췄다. 일어나서 카메라 쪽으로 기어갔다. 뻗은 손에 기기 본체가 닿았을 때였다. 얼굴이 시트로 처박혔다. 탄력 있고 부드러운 표면이지만 거센 힘이 가해진 충격에 놀랐다.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는 게 와닿는 몸짓이었다. 나를 처박은 고정원은 엎드린 내 뒤로 또 흉기를 밀어 넣었다.

“윽, 흐읏, 읏……!”

푹, 푹 찍어 넣었다. 찍어 넣으며 아주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몸의 움푹 들어간 곳은 다 고정원이 나를 짓누르는 데 쓰였다. 한 손은 목뒤를 누르고 한 손으로는 허리의 오목한 곳을 누르며 성기를 박아 댔다. 서러워서 눈물이 찔끔 났다. 안 그래도 체구 차이와 무게만으로 버거운데 제압까지 하니 숨이 막혔다.

“……빼, 바보야, 이제 빼!”

침 범벅 된 입으로 소리쳤다. 그러자 고정원이 박던 걸 멈추고 성기를 빼냈다. 귀 먹은 것처럼 굴더니 뜻밖이었다. 나는 훌쩍이면서 고정원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안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엇, 뭐, 아 싫어……!”

비어 있는 뒤로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한창 벌어져 있었기 때문에 몇 개나 한꺼번에 들어왔다. 느낌으로 봐선 네 개가 들어온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이 넣은 적이 없어서 나는 질겁했다.

도망가려고 몸을 빼는데 허리에 팔이 감겼다. 고정원은 납치하는 모양새로 옆구리에 내 몸뚱이를 끼웠다. 그대로 침대 사이드까지 끌고갔다. 끄트머리에 걸터앉고서는 내 하반신을 자기한테 올리게 했다. 거기서 손가락을 쑤셨다.

앗, 읏, 나는 소리를 내지르며 발버둥쳤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앞으로 넘어온 손이 못 움직이게 성기를 꽉 틀어쥐고 있었다.

“아, 싫, 앗……!”

퍽퍽퍽퍽, 젖은 안을 쑤셔 댔다. 얼마나 깊숙이 쑤시는지 손바닥까지 안으로 들어오는 걸 느꼈다. 이래도 되나 싶게 벌려 놓고 있었다.

참기 힘든 자극 때문에 미칠 거 같았다. 다리가 가만 있질 못했다. 살이고 근육이고 파들파들 떨렸다. 하지 말라고 손을 뒤로 했다가 시트를 쥐었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앞도 고통스러웠다. 몸부림치면 뿌리째 잡힌 성기에 꽉꽉 압박이 가해졌다. 애무가 아니라 말 그대로 못 움직이게 틀어쥐고 있었다.

“익, 으, 아읏!”

목소리가 뒤집혔다. 엉덩이가 들렸다. 어느 한 지점을 찧어 대는 자극에 무릎은 마구 경련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 느낌이 격하게 휘몰아치는 걸 느꼈다. 극적인 무언가가 몰려오고 차올라 폭발할 것만 같은 초조함.

심하게 저항하자 고정원은 손과 팔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성기가 따뜻한 점막에 감싸이는 걸 느꼈다.

“앗, 시, 아, 떼, 하지, 아으……!”

거기서 입 떼라고 소리쳤다. 말도 잘 안 나와서 이상한 신음의 형태였다. 곧 넘어갈 듯이 시야가 깜빡거렸다. 기어코 그 감각이 온몸을 덮쳐 왔다.

“아……!”

파악, 물이 터뜨려졌다. 그것도 고정원의 입 안에서. 묵직한 목 넘김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

차라리 기절하면 좋을 텐데. 경련하다 눈을 뜨자 고정원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술부터 턱까지 젖어 있었고, 손마디부터 팔뚝까지 축축했다. 뭐에 젖은지 아는 만큼 눈을 질끈 감았다.

……돌겠다, 정말. 어떡해.

감당이 안 됐다. 막막해서 울음이 터졌다.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다. 취기 때문에 의식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고정원을 깨우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의지할 데가 고정원밖에 없었다.

“흐으…….”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가리고 있는 내 손을 치운 고정원은 입술을 붙여 왔다. 눈가에 뜨거운 혀가 닿았다. 처음에는 위로해 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단순히 먹고 있을 뿐이었다. 몸에서 나오는 체액은 다 입에 넣을 것처럼 굴고 있었다. 미쳤단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고정원은 내 눈물을 빨면서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벌리고, 거대한 살덩이를 갖다붙였다.

“흠……! 흐, 읍, 흡…….”

덜렁덜렁 다리가 흔들렸다. 거대한 게 끝도 없이 드나들었다. 고정원은 말 없이 거친 숨만 내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게로 온통 쏠려 있는 눈빛과 감정이 한 꺼풀 노골적인 걸 느꼈다. 아마 취해서겠지.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를 때 고정원은 딱 이런 눈을 했다.

서럽게 울고 나니 눈물이 그쳤다. 그리고 좀 덤덤해져 있었다. 아무리 취했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면 화날 법도 한데. 진심으로 화나지는 않는 걸 보면 나도 참 쉬운 인간이다 싶었다.

“너, 내일 진짜, 엄청 화낼 거니까, 그렇게 알아, 진짜…….”

그래도 억울해서 말은 그렇게 했다. 고정원은 내게 입술을 내렸다. 키스가 시작되었고 그게 생각보다 많이 부드러웠다. 단순히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달콤한 걸 느끼면서 혀를 섞었다. 서로의 신체를 끊임없이 더듬으며 움직임도 녹녹해져갔다.

침대는 젖어서 축축했다. 땀인가. 생각했다가 아까 욕실에서 물을 뒤집어썼기 때문이라고 깨달았다. 몸속도 물기가 올랐다. 밖이건 속이건, 온통 물크러질 것 같았다. 나는 양다리를 허리에 감으며 조였다. 고정원의 뒷머리에 손을 박아 헤집기도 했다. 흥분으로 열이 솟구치고 뜨거웠다. 알아차린 건지 들어온 살덩이가 보다 눅진하게 움직여 댔다.

“아, 아, 아아, 아……!”

높고 달뜬, 부끄러운 신음이 새어 나갔다. 고정원도 점점 더 흥분하고 있었다. 침대맡까지 나를 몰아갔다. 침대 헤드를 부여잡고는 격렬하게 박아 대기 시작했다. 아픈 게 아니라 온몸의 신경이 야릇하게 곤두섰다. 나는 눈을 감았다. 덜컹덜컹 흔들리며, 곧 낭떠러지로 처박힐 충격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절했다가 눈을 떠 보니 오후였다.

“…….”

“…….”

고정원은 면목없는 얼굴로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몸은 보송보송했고, 옷도 깨끗하게 입혀져 있었다. 침대 시트도 새 걸로 바뀌어 쾌적한 상태였다. 모든 게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자극이라고 할 만한 건 하나도 없는, 평범해서 소중한 일상이었다.

“너 어제…… 어디까지 기억나냐.”

부어오른 목에선 쉰 목소리가 났다. 큼, 가다듬는데 고정원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휘 네가 잠깐 방에 갔다 온다고 했던 건 확실히 기억하는데. 그 이후로는 드문드문…….”

그럴 것 같았다. 그때까진 내가 봐도 평범한 주사에 가까웠다. 카메라 찾느라 자리를 비운 동안 혼자 너무 많이 마신 게 문제였다.

“……미안해. 무리시켰지.”

미안함이 지나쳐 무안함까지 느끼는 표정이었다. 심각하게 굳어져서는 눈치 보듯 나를 보는데 그게 또 잘생겨서 짜증이 났다. 귀엽고 잘생기니까 화내는 척하기도 힘들었다.

“됐어…….”

심드렁하게 말하며 목덜미를 쓸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어?”

다가온 고정원이 내 발을 부드럽게 주무르며 물었다.

“…….”

아픈 데야 많았다. 인후통에 근육통에, 말 못 할 데가 제일 화끈거렸다. 어제 했던 걸 떠올렸다. 목구멍 깊숙한 데까지 넣던 것. 뒤에 손을 거의 다 집어넣던 것. 체액이란 체액은 다 빨아 대던 것. 마지막에는 얼굴에 뿌려서 문지르기까지 하던데……. 평소에도 심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제와 비교하면 무난한 축에 속했다.

떠올릴수록 어제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거의 악몽에 가까운 꿈이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들었다. 취하면 본심이 나온다는데 설마 평소에도 그러고 싶은 걸 참았던 건 아니겠지 싶어서.

“너 앞으론 술…… 아니다.”

술 마시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계획적으로 만취할 때까지 먹인 사람이 할 소린 아니다 싶었다. 고정원이 원래부터 술을 즐기거나 많이 마시는 타입도 아니고, 어제처럼 내가 부추기지 않는 이상 또 그럴 일은 없었다. 아무튼 예전에 고정원이 나 술 마시지 못하게 했던 심정이 이해가 됐다. 나는 주사 부리고 블랙아웃까지 되는 타입이니 오죽했을까.

“배고프지. 식사 침대로 가져올 테니까 여기 있어.”

기다리고 있자 따끈따끈한 죽이 코앞에 대령됐다. 소고기죽이었다. 베드 트레이 위에 먹기 좋게 올려 준 고정원이 물었다.

“내가 먹여 줄까?”

“아아니, 됐어. 환자도 아닌데.”

후후 불어 한 입 떠 넣었다. 맛있다고 몇 번이나 말하는 내 옆에서 고정원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올려 주었다.

“나 띵띵 부었겠다.”

“귀여워.”

안 부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혼자 미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얄미워서 나는 고정원의 귓불을 살짝 잡아당겼다. 당겨진 고정원은 내 입술에 쪽,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미안.”

마지막은 사과였다. 사과하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는데. 선수 치듯 이렇게 나오니 구박하는 시늉도 못 하겠네 싶었다.

“…….”

눈을 내리깐 고정원을 보는데 생각났다. 어제 초반에 취했던 귀여운 주사들이. 애교스러워지는 그 술버릇은 정말 좋았다. 그런 것만 생각하면 또 같이 마시고 싶을 정도였다. 앞으로 못 보는 거면 너무 아깝고 아쉬운데. 다음에는 정말 딱 그때까지만 취하게 해 볼까. 진지하게 생각하는 나도 제대로 박힌 정신이 아니긴 했다.

에어컨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방. 고정원이 해 준 따뜻한 음식에, 포근하고 향긋한 침구에, 한가로운 일정까지. 더할 나위 없이 안락하고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뭉클한 기분이 든 나는 고정원을 불렀다.

“있잖아.”

“응?”

할까 말까, 망설이느라 이마를 긁적이다가 물었다.

“나 얼만큼 사랑해, 너?”

“…….”

잠시 민망한 정적이 흘렀다. 약간 웃는 듯하던 고정원은 잠시 다른 곳을 쳐다봤다가 나와 눈을 맞췄다. 그 사이 꽤나 진지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너 아니면, 살 이유 없을 만큼.”

웃길 줄 알았는데 웃음이 안 나왔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시큰해진 눈가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매일이 기적 같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비밀한 연애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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