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Afternoon Dream
꿈에 조인휘가 나왔다. 다 벗은 몸으로, 내 품에 안겨서 수다를 떨었다.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특유의 보들보들한 피부 결이 깨고 나서도 실제처럼 생생히 남아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휴대폰부터 찾았다. 당장 목소리가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화면에 뜬 시각이 새벽 5시 10분, 아직 한창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한 시간 반을 침대에서 뜬눈으로 기다리고 나서야 나는 전화를 걸었다.
―……응, 정원아. 잘 잤어?
정확히 다섯 번 신호음이 울린 뒤였다. 잔뜩 잠긴 조인휘의 아침 인사가 휴대폰을 타고 넘어왔다.
“미안. 너무 일찍 깨웠지.”
―아니, 괜찮아. 일찍 일어나면 나야 좋지.
기지개를 켜는지 ‘으으’ 하는 소리가 들려와 피식 웃었다.
“푹 잤어?”
―응…….
“어제는 내 옷 껴안고 안 잤어?”
묻는 말에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아, 언제적 얘기를 해.
그래 봤자 불과 한 달 전 얘기였다.
한 달 전. 이번처럼 불가피한 일정 때문에 하루 외박한 적이 있었다. 다음 날 늦은 밤 귀가했을 때 나는 진귀한 장면을 목격했다. 불 켜진 거실, 소파 한 구석에는 조인휘가 웅크린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내가 집에서 입는 옷을 꼭 끌어안은 채로.
물론 사진으로 남겼다. 피곤한 것도 잊고 몇 시간 내리 구경하는 미련한 짓도 했다.
―정원이 너는, 푹 잔 거야?
“그럭저럭.”
부정적인 의미의 그럭저럭이었다. 조인휘와 떨어져 있는 며칠 동안 질 좋은 수면을 취한 적이 없다. 꿈을 자주 꾸고, 느지막이 얕은 잠에 들어 새벽녘이면 눈이 뜨였다.
―내가 알려준 수면 어플 써 보라니까.
“그것보단 인휘가 책이라도 읽어 주는 게 더 효과 있을 것 같은데.”
―아, 그래? 진작 말하지. 오늘 밤부터 읽어 줄게. 근데 뭐 읽어 주냐, 잠깐만…….
우당탕 책장으로 달려가는 발소리가 났다. 나는 소리 없이 웃으며 눈을 감았다.
“…….”
떨어져 잔 날이 사흘을 넘어가고 있었다. 예정된 일정은 닷새로, 아직 하루가 남았다. 생각보다 신경질적인 컨디션이 이어지며 참을성이 빠르게 바닥나는 중이었다.
지루한 사교 모임과, 이전에는 참여하지 않아도 됐던 집안의 사업 관련한 일정들까지. 여기까지 오도록 붙잡아 둔 명분이 워낙 거스르기 힘들었던 까닭에 순응했으나 이 이상은 따를 필요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자 애초의 선택부터 후회가 됐다. 금전적인 압박이 들어와도 큰 문제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협박성 제안 같은 건 모르는 척 무시하고 조인휘와 어디서든 뒹구는 게 좋았을 뻔했다.
“오늘은 뭐 할 거야?”
읽어 줄 만한 책을 고르느라 정신 팔린 조인휘에게 물었다.
―어…… 오늘, 뭐 그냥 책 살 거 있어서 서점 갔다가 카페에서 공부 좀 하고 들어올까 생각 중이야.
“몇 시쯤?”
―음, 점심 밥 먹고, 여유 있게 나가려고.
“그래…….”
준비하고 움직이면 딱 맞춰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가운의 매듭을 풀며 말했다.
“알았어, 그럼 이따 또 연락해.”
―응, 이따가 연락할게. 빠이.
“빠이.”
똑같이 인사하자 조인휘가 키득거렸다. 내가 이런 식으로 유치한 말을 하는 게 아무튼 즐거운 모양이었다. 안 어울린다고 하면서, 어쩔 땐 일부러 시키기도 한다.
―그럼, 진짜 끊는다. 안녕.
“응, 안녕.”
―……응, 끊어.
“응, 먼저 끊어.”
―응…….
미련 넘치는 통화가 끝나고 나는 욕실로 향했다. 원치 않았던 일정의 마무리가 앞당겨진 상황에서 발이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씻고 난 뒤 거울 앞에 서서 상태를 체크했다. 그리고 전날보다 공들인 면도를 시작했다.
“…….”
몇 시간 뒤 만나게 될 거라고,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불시에 들이닥치면 이번에도 뜻하지 않게 좋은 장면을 보게 되지 않을까. 그런 계산적인 생각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놀라워하고, 예기치 못했던 만큼 더 반가워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감정을 숨기지 못할 조인휘가 보고 싶었다.
* * *
어느덧 벌써 두 시간이 경과해 있었다.
두 시간째, 나는 서점을 거니는 조인휘를 따라 간격을 두고 천천히 이동하기만 했다.
경제 경영 섹션에서 몇 가지 책을 빼내던 조인휘가 하나를 선택해 옆구리에 끼우는 게 보였다. 그러고는 시선을 휘휘 돌려 가며 자리를 옮겨 갔다.
해당 책꽂이에는 책등 몇 개가 빼꼼 튀어나와 있었다. 전부 조인휘가 보던 것들이었다. 나는 조용히 뒤따르면서 허술한 손길의 흔적마다 한 번 더 손길을 보탰다.
“…….”
원래대로라면 벌써 다가가 놀라게 해 줬어야 했다. 분명히 그럴 생각이었는데……. 서점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모습을 본 순간 작은 변덕이 생겼다.
며칠만에 본 애인이 조금은 낯설고 신선한 인상을 풍겼기 때문일까.
마른 몸집, 어려 보이는 뺨의 봉긋한 곡선 등. 작은 신체적 특징까지 속속들이 시선이 머물렀다. 책 읽는 조인휘의 지척에서 눈길을 던지며, 우연히 끌리는 상대를 발견해 뒤를 밟는 듯한 도착적인 기분마저 느꼈다.
지금도 거리가 상당히 가까웠다. 통로 한 면에 설치된 의자에 걸터앉은 조인휘는 방금 전 꺼내 온 책을 펼치고 있었다.
“…….”
코앞에 서 있는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책에 고개를 파묻고, 한 줄 한 줄 글자를 정직하게 따라가느라 바쁘다. 집중할 만한 내용이 있는지 순식간에 빠져든 듯했다.
자기 무릎을 긁는 손가락이 보였다. 손끝으로 어딘가를 문지르는 게 조인휘가 무언가에 몰두할 때의 습관이었다. 내 허벅지에 하던 걸, 내가 없으니 본인에게 하는 듯했다.
내가 없을 때는 이렇구나.
문득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워지는 묘한 만족감이 있었다. 나한테 이런 관음적인 욕구가 있었나 싶을 만큼, 내가 없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조인휘를 관찰하는 게 즐거웠다. 아주 사소하고도 새로운 면모를 연속적으로 발견했다.
“저기…….”
읽지도 않는 책 너머로 조인휘만 보고 있었다. 작게 부르는 음성이 들렸고, 돌아본 직후 나는 웬 낯선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뭘 하려는 건지 감이 왔다. 그대로 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 저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
책장을 가림막 삼아 피하자 여자가 통로로 따라 들어왔다.
“저 혹시, 여자 친구 없으시면 번호 좀 받고 싶은데.”
“…….”
뒤를 한 번 살펴보았다. 다행히 조인휘는 이쪽에 무슨 일이 있는지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저기, 앉아 있는 남자 보이세요?”
나는 여전히 책 삼매경인 모습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가리킨 방향에는 조인휘밖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지목한 인물을 한 번 쳐다본 여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네, 하고 대답했다.
“제 남자 친구예요.”
“……아…….”
사색이 되어 쳐다보는 표정만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여자는 말을 더하는 대신 고개를 까딱 숙이고 돌아섰다.
그사이, 조인휘는 자리를 벗어나 계산대를 향하고 있었다.
계산을 마치기 기다렸다가 따라나섰다. 통화 내용대로라면 이제 카페로 갈 차례였다.
출입구 밖 계단을 오르고, 걷다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조인휘가 밟는 자취를 그대로 따라 밟았다. 사람들 틈으로 거리는 멀어졌다가 좁아졌다가, 갑작스럽게 멈칫한 조인휘가 내게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카페 안이었다. 뒤로 서 있는 나에 대해 조금도 의식하지 못한 조인휘는 평범하게 주문했다.
한 번을 안 돌아보네.
뒤통수의 작은 가마를 내려다보며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둔한 걸 걱정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한눈팔지 않는다고 좋아해야 하는 건지.
커피를 들고서 조인휘는 창가로 앉았다. 나는 가운데 한 자리를 비우고 나란한 곳에 앉았다.
조금만 고개를 틀어도 얼굴이 보이는 거리. 설마 이래도 모를까 했는데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노트북과 필기도구를 꺼내고 바로 공부를 시작하는 얼굴에는 진지함이 묻어 있었다.
“…….”
컵을 만지작거리다가 팔을 뻗었다. 테이블 위, 조인휘와 나 사이의 비어 있는 공간 쪽으로.
툭, 툭, 툭.
손끝으로 두드리며 일부러 존재감을 과시했다. 힐끗 쳐다보는가 싶더니 조인휘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제 할 일에 집중했다.
내 손 좋아한다며.
웃음을 참으며 속으로 농담을 걸었다.
금방 딴 짓을 하리란 예상과 다르게 산만하지 않았다. 혼자 있으면 이렇게까지 할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조인휘는 집중력이 좋았다.
나는 아예 그쪽으로 몸을 틀고 있었다. 그래도 시선을 느끼지 못하기에 거리낌 없이 구경했다. 과연 언제쯤 알아차릴지 기대하는 것도 은근한 즐거움이었다.
야무진 폼으로 펜을 쥐고 있는 손을, 꽤 오래 들여다봤다. 슬슬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술한 조인휘는 카페 의자에 걸어 둔 자기의 옷이 떨어질락 말락 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커피잔이 노트북과 지나치게 가까워 자칫하다 쏟을 것 같기도 했다.
참견하고 싶어서 근질거려도 현재로서는 타인의 영역이었다.
만족스럽던 관찰이 슬슬 부족하게 느껴질 즈음.
다가온 누군가가 우리 사이에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려는 낌새가 보였다. 나는 매너가 아닌 줄 알면서 급작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내가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기자 다가오던 사람은 물러났다.
그리고 필기를 하던 조인휘가 드디어 이쪽을 쳐다봤다.
“…….”
시선을 뻔히 느끼면서 나는 모르는 척 앞만 봤다.
조용한 침묵이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걸 느꼈다.
곧, 터뜨려지는 웃음이 귓가에 울렸다.
“뭐야, 너!”
가슴에 와락 안겨드는 무게감을 느꼈다. 나도 놀라서 팔을 둘렀다. 이런 데서 끌어안다니, 예상을 뛰어넘는 환대였다. 놀라움이 지나쳐 튀어나온 행동이겠지만 뒷덜미까지 기분 좋게 오싹했다.
마주 안고서 고개를 숙였다. 이끌리는 대로 목덜미에 코를 박자, 조인휘가 홱 몸을 떼어 낸다. 쑥스러운 듯 내리깐 눈이 보였다. 이제야 주위 시선이 의식되는 모양이었다.
“열렬해서 좋은데.”
코앞에서 들릴 만큼만 나직하게 말했다.
“뭐야, 빨리 올 수 있는 거면 얘기 좀 해 주지. 내일 오는 것처럼 말해 놓고 진짜……. 난 뭐 이상한 사람이 옆에 앉은 줄 알고 자리 옮길 뻔했잖아.”
호흡이 벅찼다. 안색도 목소리도 모두 상기되어 있었다. 입으로는 투정하면서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보였다.
“너 놀래켜 주려고.”
“아,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고…….”
아이 같다. 감정을 못 숨기는 얼굴도, 솔직한 말투도.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아마 홍조 띤 뺨에 당장 입술을 가져다 대고 싶어서겠지.
“점심 잘 챙겨 먹었어? 배 안 고파?”
묻는 말에 갑작스러운 허기를 느꼈다. 며칠 만에 제대로 느껴지는 식욕다운 식욕이었다.
우리는 보다 너른 자리로 옮겼다. 나는 디저트 몇 개를 주문해 순식간에 해치우고 그 이후로 조인휘의 수다에 경청했다.
꿈에서처럼, 조인휘는 끊임없이 재잘댔다.
“아, 근데 너 그거 알아? 내가 아까 서점에서 책 읽다가 본 건데, 인간하고 바나나의 DNA가 50퍼센트나 일치한대. 완전 신기하지?”
“그래? 몰랐는데 재밌네.”
입으로는 맞장구를 쳐도 관심이 생기지는 않는다. 머릿속은 이미 다른 일로 바빴다. 눈앞의 마른 몸을 감싼 옷가지들을 벗기고, 그 아래 녹녹한 피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조인휘가 좋아할 방식으로, 혹은 전혀 상상도 못 할 방식으로.
“방금 한숨 쉰 거야?”
“응?”
“어디 안 좋아? 운전하는 거 힘들었어? 아니면 아까 먹은 게 속 불편한가?”
걱정하는 말들이 쏟아져도 할 말이 없었다. 너 두고 음란한 상상했어. 고백하는 대신 손가락을 뻗어 슥, 손등을 그었다.
“…….”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이 보였다. 사뿐 내려앉는 속눈썹과, 튀어나온 목울대가 미끄덩 요동치는 것도.
며칠만에 만나서인지 확실히 긴장의 정도가 달랐다.
아, 좋은데.
진심으로 좋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반응이라면 종종 며칠씩 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보고 싶었어.”
함축시킨 한마디에 담긴 감정을 조인휘가 알았으면 싶기도 하고 영영 몰랐으면 싶기도 했다.
“……나도.”
앳된 볼이 실룩거렸다. 좋아하는 감정을 애써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게 빤히 보였다.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네가 그렇게 숨길수록 나는 더 벗기고 헤집고 싶어진다고, 충고하고 싶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모조리 독차지하고 싶은 음험한 생각이 혈액처럼 몸을 타고 흘렀다.
이건 사랑이지만.
사랑이 아니어도 어쩔 수 없다. 사실 병이라고 생각될 때가 더 많았다. 사랑은 언젠가 식지만, 불치병은 낫지 않는다.
나는 커피잔을 건드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꿈에 누가 나왔는지 알아?”
내 질문을 받은 조인휘의 얼굴이 보기 좋은 색으로 물들었다. 이미 내가 할 말을 알고 있는 것처럼.
“몰라. 말하지 마.”
무뚝뚝한 대답이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인가 싶다.
“아아, 말하지 마?”
“어, 말 안 해도 돼.”
“…….”
서툰 너.
내 교활함에 익숙해지지 않는 너.
꿈보다도 꿈같은.
그런…….
나는 감상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입 안에 가득 고이는 단내를 느끼며,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햇살이 눈부시게 화창한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