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연애의 비밀 (7)
언젠가 방문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했다. 그 기회가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괜찮다니까, 인휘야. 그런 거 안 사도.”
“그래도 사 갈래. 그냥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말리지 마.”
급하게 들어간 대형 마트 식품 코너였다. 선물용으로 좋아 보일 만한 과일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었다. 고정원은 몇 번이나 사지 않아도 된다고 말렸다. 나는 뭘 모르는 소리라고 생각해서 무시했다. 어른을 뵈면서 빈손은 예의가 아니었다.
물론 이게 정식 인사 같은 건 아니었다. 고정원이 필요한 걸 가지러 집에 가는 김에 겸사겸사 나까지 따라가는 사정이었다. 인사 목적이 아니긴 해도, 처음 뵙는 만큼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너희 어머니 어떤 과일 좋아하셔? 딸기 좋아하셔?”
“좋아하실 거야, 뭐든.”
표정을 보아하니 어머니가 좋아하는 과일이 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거랑 이거 사 갈까?”
“하나면 충분해. 이걸로 하자.”
고정원은 내 손에 든 청포도를 빼앗아 계산대로 향했다. 나는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딸기까지 챙겨서 뒤따랐다.
카운터 앞에서는 얼이 빠졌다. 황당하게도 고정원이 자기 카드로 계산을 해 버렸다. 내가 지갑에서 현금을 빼내고 있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눈 뜨고 코 베인 심정으로 허탈하게 지갑을 넣었다.
“네가 계산하면 어떡하냐. 내가 사야지 의미 있는 건데.”
주차된 차에 오르면서 따졌다. 이것만큼은 내 돈으로 내가 사서 드리고 싶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속상했다.
“누가 사면 어때. 우리가 남도 아닌데.”
“그러니까. 우리가 남도 아닌데 왜 너만 돈을 쓰냐고. 이거는 진짜 내가 사고 싶었는데. 내가 사서 선물처럼 드리고 싶었는데…….”
매번 이런 식이었다. 못마땅해서 중얼거리자 주차장을 빠져나가던 고정원이 내게 손을 뻗었다.
“인휘가 생각해서 산 선물 맞는데 왜.”
“…….”
“어머니한테도 직접 드려. 오다가 샀다고 말씀드리면서.”
왜 속상한 건지 전혀 이해 못 하는 눈치였다. 핸들을 돌리며 주변을 살피는 얼굴에는 기분 좋다는 듯 미소마저 머금어져 있었다.
“……당연히 내가 드릴 거긴 한데…….”
실제로 내 돈 주고 샀으면 훨씬 좋았을 거라는 얘기였다. 뭘 어떻게 해도 대화가 원점으로 돌아올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도착하자 어머니께서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어서 와요.”
“…….”
나는 차에서 내릴 때부터 긴장하고 있었다. 나도 알았다. 하지만 어디를 지나쳐 여기까지 당도한 건지 기억에 없을 만큼 긴장하게 된 건 예상 밖이었다. 하나 들어 주겠다는 고정원의 말을 무시하고 고집스레 양손에 든 과일이 발발발발 떨렸다.
“……안녕하세요! 조인휘입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반가워요. 정원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말씀하시는 목소리가 멀고 불확실하게 들렸다. 시야가 흔들리며 어지러웠다. 안 되겠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과일을 내밀었다.
“저기, 이거, 드세요. 어머님.”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님이 맞나. 어머니라고 했어야 하나. 고작 받침에 미음이 붙고 안 붙고 차인데 헷갈렸다. 뱉어놓고 나니 어머님은 결혼한 여자들이 시어머니를 부를 때 쓰는 호칭 같았다.
“아니, 어머, 어머니…….”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덧붙였다. 기분 탓인지 정적이 맴돌았다. ‘훗’ 하고 뒤에서부터 고정원이 나직하게 웃는 기척만 들렸다.
“뭘 이런 걸 다 샀어. 그냥 와도 되는데…….”
좋아하시려나. 걱정하며 열어 보시는 모습을 힐끔거렸다.
“고마워요. 요즘 젊은 사람 같지 않게 예의가 참 바르네, 얼굴도 잘생긴 친구가.”
“앗, 아뇨, 네, 아니, 감사합니다.”
‘잘생긴 친구’라는 과찬에 등이 확 뜨거워졌다. 고정원 옆에서 듣기에는 더더구나 민망했다.
“근데 괜찮아요?”
물으시기에 되물었다.
“네?”
내가 너무 얼굴이 붉어진 탓인가 했다. 볼을 문지르자 어머니께서 난처한 듯 웃으셨다.
“아니, 정원이랑 같이 살면 답답할 것 같아서. 애가 지나치게 말이 없잖아. 성격이 좀 정 없고 칼 같아도 이해해 줘요.”
“예?! 아니요, 그런 건 전혀…….”
나는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했다. 어머님께 송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우리 둘을 단순히 같이 자취하는 동기 사이로만 알고 계실 텐데. 저하고 있을 때는 말 많아요. 정도 넘치다 못해 돈까지 막 퍼 줘요. 솔직하게 토로하는 말은 가슴에만 담아 두었다.
“얘가 고집도 은근히 세서 피곤할 거야. 양보하는 척하면서 잘 안 하지 않아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했다. 때마침 지원 사격처럼 고정원이 끼어들었다.
“죄송해요.”
상냥한 말씨로 선을 그었다.
“저희 과제가 급해서요. 그만 올라가 봐도 돼요?”
“이거 봐. 얘가 이런다니까. 네 얘기 한다고 싫은 거지? 알았어, 올라가 봐. 친구는 만나서 반가웠어요.”
“아, 네. 저도요, 어머니.”
꾸벅 인사했다. 곧장 등을 보이는 건 예의가 없는 것 같아 계속 꾸벅꾸벅 묵례했다. 뒷걸음질치다 장식장에 부딪힌 게 유일한 실수였다.
“후우.”
계단을 올라 공간이 분리되자 해방감이 들었다. 두피가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오죽 긴장했으면 이러나 싶었다. 고정원은 내가 긴장한 게 웃긴지 이마의 땀을 닦아 주면서도 실실거리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나 웃겼어?”
“아니.”
“뭐 실수한 거 없지?”
“응.”
고정원네 어머니는 역시 좋은 분이었다.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지만, 아무튼 멋있는 분이라는 인상이 남았다. 유능한 사업가 같은 이미지셨다.
“야, 근데 너희 어머니가 나랑 대화하고 싶어 하시는데 왜 끊었어. 섭섭해하시잖아.”
떨어지게 돼서 안도했으면서 괜히 핀잔했다.
“괜찮아. 안 섭섭해하셔.”
“근데, 네 방은 어디야……?”
나는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한 층만 올라갈 줄 알았는데 계속 계단을 밟고 있었다.
“4층에.”
집 구조나 인테리어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대리석처럼 보이는 계단은 발치가 어둡지 않게 조명이 켜지고 있었다. 벽에 조명등도 그렇고, 분위기가 가정집이라기보다는 전시회관 같았다.
그러고 보니 집이 층이 많다 싶었다. 아까 지하 주차장에서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2층이 보이기에 무심결에 2층은 다른 집인 줄 알았다. 건물 전체가 통으로 단독 주택이었을 줄이야. 2층까지만 엘리베이터로 올라올 수 있고, 그 위의 층수는 직접 올라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넓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 할 정도의 규모라니. 넓고 복잡한 구조에 층마다 눈이 돌아갔다. 여기에 와 보니 얼마 전에 갔던 펜션이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구경할래?”
“응.”
기웃거리는 나를 데리고 고정원이 안내했다. 화장실이 곳곳에 있고, 야외로 이어지는 정원도 있었다. 그랜드 피아노가 놓인 공간도 보였다. 방들은 하나같이 넓어서 월세를 내 줘도 되겠다 싶었다. 우리가 몰래 들어와 살아도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반쯤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와…….”
그리고 고정원의 방이 제일 멋있었다. 그 방은 방만으로 하나의 완성된 집이었다. 심지어 냉장고까지 따로 설치돼 있었다. 드레스 룸이며, 휴식 공간처럼 꾸며진 알파 룸이며. 가벽이 설치된 서재에, 뒤로는 탁 트인 테라스까지. 여기저기 다른 공간이 숨어 있어 끝도 없이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기가 찼다. 이런 방을 내버려 두고 예전에 내가 살던 그 허름한 원룸에서 어떻게 같이 지냈나 싶어서. 우리가 이사한 오피스텔도 좋긴 하지만 여기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우리 방 빼고 몰래 여기 들어와 살아도 되겠다.”
둘러보며 아까 했던 생각을 그대로 내뱉었다.
“그럴까, 그러면.”
고정원은 즐거운 듯이 맞장구쳤다.
“신혼부부가 살기엔 좀…… 스릴 넘칠 것 같긴 한데.”
신혼부부? 우리가? 묻기도 전에 고정원이 허리를 끌어당겼다. 손이 엉덩이로 내려왔다. 입술이 금방 달라붙을 것 같아서 목이 빳빳해졌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경기를 일으키듯 푸다닥 떨어졌다. 문 쪽을 힐끗거리며 침을 삼켰다. 고정원은 ‘거봐, 내 말이 맞지?’ 하는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네, 들어오세요.”
고정원이 대답했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곧 문이 열리고, 어머니께서 과일이 담긴 쟁반을 가지고 들어오셨다.
“저 주세요.”
나는 뛰어가서 쟁반을 대신 들었다.
“과일 정말 맛있더라. 먹으면서 쉬엄쉬엄 해요.”
쟁반 위에는 내가 드렸던 청포도와 딸기가 올라와 있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깍듯함이 지나쳤는지 어머니께서 돌아보시곤 웃으셨다. 탁, 문이 닫히자 꼿꼿하던 등줄기가 흐물해졌다.
“하…….”
고정원이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또 오실까 봐 불안했다. 문을 힐끔대자 고정원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원래 특별한 일 아니고는 잘 안 올라오셔. 주로 1, 2층만 사용하시거든.”
안심하고 경계 태세를 풀었다. 고정원의 허벅지에 앉아서 과일도 먹고, 두리번거리며 방 구경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재채기가 터졌다. 막을 틈도 없었다. 마주보고 있던 고정원의 얼굴에 스프레이처럼 튀어 있었다. 코앞에서 대놓고 침을 뱉은 거나 다름없었다.
“으앗, 미안.”
당황해서 얼굴을 닦아 주었다. 촘촘한 속눈썹이나 우뚝 솟은 콧대에도 튀어 있었다. 뻘뻘거리며 닦자 우스웠는지 고정원의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갑자기 옷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옆구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몹시 은근했다.
“야, 밖에 어머니 계시잖아. 오늘은 안 해, 절대.”
“나도 그럴 생각 없어, 오늘은.”
무덤덤한 대답이 나와 민망해졌다.
“뭐야. 빨리 손이나 빼.”
손끝이 능청스럽게 심장 주변을 덧그렸다. ‘엄청 긴장하네’ 놀리듯 중얼거린 고정원이 급작스럽게 젖꼭지를 꼬집어 비볐다. 나는 찌릿한 느낌을 못 참고 확 떨어졌다.
“야, 너 무슨 책 찾아야 한다며. 창고에서도 가져올 거 있고.”
할 일을 일깨워 주었다. 고정원은 마지못해 일어났다.
“갔다 올 테니까 방 구경하고 있어. 마음대로 다 뒤져 봐도 되니까.”
마음대로 뒤져도 된다니. 다소 위험한 멘트를 남기고 방 주인이 나갔다. 커다란 방 안에서 나는 혼자가 되었다.
“…….”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조금 들뜨는 걸 느끼며 우선 책장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이게 다인가?
같이 살면서도 느꼈지만 참 단조로운 걸 좋아했다. 이 사람은 관심사나 취향이 대체 뭔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미궁에 빠질 정도로 사적인 물건이 적었다. 아니, 있기는 꽤 있는데 범위가 협소하고 지나치게 딱딱한 느낌이랄지. 책장에는 각종 전문 지식을 다룬 책, 그리고 영문 원서들과 몇 권의 영문 시집 정도가 꽂혀 있었다. 책장 밑으로는 흑백의 추상화 액자가 놓여져 있었고, 눈에 띄거나 특징적인 건 없었다. 소설이나 만화 안 읽는 건 진짜였구나. 생각하며 나는 발길을 돌렸다.
향한 곳은 드레스 룸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우연히 고정원이 입었던 교복을 발견했다.
“엄청 크네.”
지금 입는 옷 사이즈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큼직한 교복을 쥐고서 거울 앞에서 몸에 대 봤다. 고정원의 풋풋한 학생 때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면서 시시덕거렸다.
“우와, 뭐가 이렇게 많지.”
드레스 룸 한가운데에는 비싸 보이는 시계로 가득했다. 명품에 어두운 나로서는 아는 브랜드가 고작 한두 개 정도였다.
구경을 마치고 나와서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피로감이 밀려오며 눕고 싶었다. 소파에 누울까. 일어섰다가 무심코 눈앞에 보이는 협탁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담배와 지포 라이터가 있었다. 나는 멀뚱멀뚱 담배갑을 집어 들었다. 그걸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회상에 빠져들었다. 예전에, 집 앞에서 봤던 고정원이 떠올랐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
언제 오나. 궁금해져서 시계를 올려다봤다. 나간 지 30분도 넘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늦어지는지 궁금했다. 같이 간다고 할 걸 그랬나.
10분을 더 기다렸다. 더는 안 되겠다 싶을 때쯤 방을 빠져나왔다.
“정원아, 고정원.”
소심하게 부를며 복도를 걸어나갔다. 방문이 다 열려 있어서 안을 확인해 보았다. 마지막 서재처럼 보이는 방에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4층 전체에 나밖에 없었다.
얌전히 들어가서 기다릴까. 발길을 돌렸다가 슬쩍 계단을 내려가보았다. 어머니께서 1, 2층만 사용하신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싶었다. 아래에 없으면 도로 올라올 생각이었다.
“엇.”
찾았다.
3층 복도에서 드디어 찾던 모습이 보였다. 복도의 중간에 있는 거대한 수납장 앞에서였다. 수납장 문이 다 열려 있었다. 안쪽으로는 고정원의 머리카락이 빼꼼 드러나 있었다.
“너 얼마나 찾았는지 알…….”
어…….
“…….”
등에 손을 대자마자 위화감을 감지했다. 그리고, 돌아선 고정원의 모습에 나는 얼이 빠지고 말았다. 정확히는 고정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고정원을 굉장히 닮은 모습이었다.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눈매가 엄청 비슷했다. 코도……. 고정원의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걸 광고하는 수준으로 닮아 있었다. 안경을 쓰고 계셨고, 쉽게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젊어 보이셨다. 자세히 보니 고정원과 닮기는 했는데 느낌이 달랐다. 뭐랄까. 훨씬 섬세하고 모범적인 분위기가 풍겨서…….
“정원이 친구?”
미쳤어.
인사하는 것도 잊고 정신이 팔려 있었다. 침묵을 깨뜨린 한마디 물음에 나는 고개를 털고 답했다.
“예, 저, 과제하러 왔다가…… 아, 죄송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개를 푹 담갔다. 첫인상이 너무 예의 없어 보였으려나. 걱정하며 안색을 살피자 눈이 마주쳤다.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꽂히고 있었다. 뭐 실수했나 싶어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내가 뭐라고 했더라. 방금 내뱉은 말인데 기억나지 않았다. 혼돈에 빠지며 온몸이 굳어지는 가운데 심장만 난리법석 쿵쾅댔다.
“난 두 번째인 것 같은데?”
“……예?”
얼빠진 대꾸였다.
“집에 한 번 놀러 간 적 있거든. 그땐 자고 있어서 인사를 못 하고 나왔어.”
“아…… 아아, 예에.”
그러고 보니 그랬다. 대면하지는 못했지만 나도 목소리만으로는 두 번째였다. 자는 척하느라 진땀을 뺐던 그날. 그날은 잔뜩 얼어붙었던 기억이 있다. 솔직히 무서운 분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뵙고 나니 막연히 상상했던 이미지와 달랐다. 얼굴은 물론, 키도 체구도 고정원과 비슷해서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끝!”
뭔가를 찾고 계셨던 듯했다. 군데군데에서 책 서너 권을 빼낸 고정원의 아버지께서는 수납장 문을 닫으셨다. 나는 뒤에 서서 황송한 태도로 절절매고 있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흠칫했다. 그냥 가실 줄 알았는데 나를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계셨다.
“아, 제 이름, 저…… 조…….”
“아아, 그래. 맞아, 조인휘.”
“네, 맞아요. 조인휘요.”
내 이름을 외우셨다니. 놀라서 주억거리자 잘생긴 얼굴에 잔주름이 접혔다. 근사한 미소였다.
“이렇게 또 보니 반갑네. 그래, 편하게 있다 가요.”
“아,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툭, 하고 어깨로 가벼운 터치가 닿았다. 스킨십을 하실 거란 생각은 못 했기 때문에 심장이 발치로 떨어질 뻔했다.
“…….”
혼자 남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와……. 와…….
환희에 가까운 감탄을 연발했다. 안심이 되면서 가슴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엄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인자하게 대해 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실실거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강렬했던 만남을 되새기고 있자, 얼마 안 있어 고정원이 돌아왔다. 벌떡 일어난 나는 참지 못하고 터뜨리듯 말했다.
“정원아, 너희 아버님 진짜 멋있으시다.”
“아버지가 집에 계셨어?”
챙겨 온 것들을 한쪽에 내려놓은 고정원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응. 아래층에 계시던데? 너 찾으러 나갔다가 마주쳤는데 와…… 진짜 멋지셨어.”
진짜로, 배우보다 잘생기셨더라.
여운에 잠겨 중얼거렸다.
“좋았나 보네.”
“어, 나한테 완전 잘해 주셨어. 저번에 왜 나 자고 있을 때 집에 오셨을 때는…….”
열변을 토하려는데 고정원이 지적했다.
“여기 빨개.”
광대 부근이 살짝 꼬집혔다.
“빨개? 긴장했어서 그런가.”
지적받은 부위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때 고정원이 뜬금없이 윗옷을 벗었다. 몸 자랑도 아니고. 나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서 쳐다보고 있었다. 거침없이 전라가 된 고정원은 심드렁하게 한마디 뱉었다.
“씻자.”
“아아, 너 먼저 씻어. 나 책 좀 읽고 있을게.”
여기까지 와서 같이 씻는 건 좀 그랬다. 피하려고 하자 고정원이 팔을 붙잡았다.
“같이 들어가.”
“…….”
또 이러네.
가끔 가다 이럴 때가 있었다. 하자는 대로 안 하면 끝까지 고집부릴 것 같은 기운을 풍길 때가. 버티고 서서 가만히 쳐다보면 숨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막무가내로 나올 태도였다.
“……알았어.”
대답한 나는 티셔츠를 들어 올리며 팔부터 빼냈다.
들어간 욕실에서 나는 또 한 번 휘둥그레졌다. 좋은 내부도 그렇지만 다른 게 훨씬 놀라웠다. 투명한 부스 안, 나무로 제작된 건식 공간은 어딜 보나 사우나였다. 핀란드도 아니고 집에 사우나가 있다는 게 신기해서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다.
샤워 후 우리는 나란히 앉아 사우나를 했다. 안에서 한창 땀을 빼던 중, 나는 고정원의 아버지를 화제에 올렸다.
“근데 너희 아버지 말이야. 엄청 젊어 보이셨어. 어떻게 그렇게 젊으시지?”
마주쳤던 순간을 되새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약간, 외국 배우 누구 닮으셨는데…… 누구더라. 아, 이름이 기억 안 나네. 아무튼 진짜, 너무…… 진짜 너어무 잘생기셨어. 나 보자마자 굳어져 가지고 어버버했는데 나 웃기게 보셨으면 어떡하냐.”
“…….”
고정원이 왠지 말이 없었다. 가만히 내 얼굴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더워? 그만 나갈까?”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고정원은 그런 나를 봤다. 시선이 입술로 내려갔다가 다시 눈으로 올라왔다. 무표정하게 나를 살피고는 담담하게 내뱉었다.
“다른 남자 칭찬하지 마.”
단순하고도 직설적인 경고였다.
“나한테만 해. 그런 소린.”
“…….”
불순한 태도의 원인을 파악한 나는 기함할 뻔했다.
“……야, 너…….”
홧홧해진 뺨을 느끼며 더듬거렸다. 다른 남자라니.
“난 너희 아버지니까 당연…….”
더운 증기가 확 끼치는 것 같았다. 황당해서 어떻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자 고정원이 묘하게 서운한 투로 흘렸다.
“나는 요즘 거의 못 들은 것 같은데.”
너한테서 잘생겼다는 말.
“…….”
말하면 과하게 흥분하니까 솔직히 자제하는 편이었다. 그런 속내까지 말하려다 말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랑 거푸집처럼 닮으셨잖아. 그러니까 잘생겼다고 한 거지, 바보야.”
고정원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나는 이게 뭐라고 또 눈치를 살폈다. 목덜미를 문지르는 모습을 곁눈질했다. 아닌 척해도 고정원은 그 말이 싫지는 않았던 눈치였다. 미묘하게 표정이 풀린 게 보였다. 어느 순간 내게 손을 뻗었다. 가뜩이나 더운 밀실에서 습한 손끼리 얽혔다. 잠자코 있었더니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
얼굴을 쓸어내린 고정원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자기도 쑥스러운가. 표정을 보고 싶어서 얼굴을 들이밀자 웬일로 피하기까지 했다.
“왜 피해? 잘생긴 얼굴 구경하려는데.”
일부러 잘생겼다는 말을 강조했다. 힐끗 나를 내려다보는 고정원의 눈빛이 볼만했다. 새침한 것 같기도 하고, 불만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와…… 어떡하지? 땀에 젖으니까 더 섹시한데.”
희롱하듯 말하자 고정원이 비식 웃음을 터뜨렸다. 포식자처럼 여유롭게 나를 내려다보면서 ‘만져 봐도 되는데’ 하고 도발했다.
“……그냥, 감상만 할게.”
더 해 봤자 나만 곤란해질 게 뻔해서 놀리는 건 거기서 끝냈다.
씻고 나와서는 제대로 할 일을 했다. 같이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른들께 말씀드렸던 대로 각자 과제를 했다. 떨어진 곳에서 제각기 노트북을 두드리다가 한 번씩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과제하다가 침대에서 장난치고, 놀다가 과제하다가, 간식을 먹다가. 하다 보니 늦은 시간이 돼 있었다.
“피곤하지. 마사지 해 줄 테니까 여기 누워.”
고정원은 큰 수건을 깔고 침대로 나를 이끌었다. ‘괜찮아, 오늘은’ 하고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고정원은 ‘5분만 받아’ 하고 고집이었다.
“그럼 진짜 5분만.”
어른들 계시는 집이라 내키지 않은 거지 나도 내심 받고는 싶었다.
“힘 빼.”
굳은 내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고정원이 말했다.
“……응.”
전신에 힘이 빠지자 그때부터 손이 거침없었다. 안 그래도 사이즈가 헐렁거리는 가운을 벗겨 버리더니 등에 서늘한 점액을 쏟아 부었다. 향이 익숙했다. 집에서 고정원이 안마해 줄 때 쓰는 마사지 오일이었다.
“어, 뭐야. 이게 왜 여기 있어?”
고정원은 ‘가져왔어’ 하고 태평하게 답했다. 나는 그 음흉함에 기막힐 뿐이었다. 보통 오일 마사지는 마사지로 안 끝나고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오일은 시간이 느긋하고 해도 되는 날에만 쓰는 게 규칙처럼 굳어져 있었다.
“아, 싫어. 여기 어른들 계시는 집이잖아. 오늘 안 한다며.”
“응, 안 할 거야. 정말 마사지만 할 거니까 혼자 앞서가지 마.”
“그럼 그냥 하지 왜 오일까지 챙겨 와서 쓰냐고…….”
“네가 제일 좋아하니까.”
“…….”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게 제일 좋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굳이 꼭 그런 건…….”
웅얼거리다 이내 입술을 꾹 닫았다. 얌전해진 내 등을 커다란 손아귀가 정복해 갔다. 단단한 손이 눅진해진 피부를 힘주어 문지르자 신음이 났다. 근육들이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여기가 좋아?”
나는 터질 것 같은 소리를 참으며 끄덕거렸다.
“읏, 불 좀, 바꿔 주면 안 돼?”
나만 알몸인 게 부끄러워서 요청했다. 그러자 곧 리모컨의 버튼 소리와 함께 방 안 조명이 바뀌었다. 사이드만 연하게 붉은 빛이 들어오는 취침등 모드였다.
“엄마가 인휘 좋아하시더라.”
대퇴부 전체를 꾹, 꾹, 힘주어 덧그리며 고정원이 말했다.
“……읏, 정말?”
“응. 아까 내려가다가 얘기했거든. 네가 예의 바르고 착하다고, 굉장히 좋아하시던데.”
뭐라도 사 오길 잘했다고, 뿌듯함에 젖어들려는 찰나였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생각나면서 찜찜해진 나는 단호한 투로 입을 열었다.
“과일값. 내가 낼래. 내일 현금으로 줄 테니까 받아. 알았지?”
마사지하는 손길이 허벅지 안쪽을 지그시 눌렀다. 시원하면서도 참기 힘든 느낌에 몸서리치자 고정원이 한 템포 늦은 대꾸를 내뱉었다.
“네가 냈잖아.”
“……무슨, 네가 냈잖아.”
“난 산 적 없어.”
“…….”
실랑이를 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말장난하듯 우길 줄은 몰랐다.
“너는 왜 매번, 나 돈 못 쓰게 하는데?”
“매번? 어제도 인휘가 집에 들어오면서 피자 사 왔잖아. 매번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거 말고. 의미 있는 거에, 진짜 돈 써야 될 때 쓰고 싶다는 건데…….”
“우리 식사도 의미 있는 건데?”
“…….”
고정원은 가볍게 말하고 있었다. 나만 진지해져서는 속상한 내색을 하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대화가 튕겨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자격지심이 있는 건가. 가끔씩 나를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애 취급을 하는 것 같아서 좀 그랬다.
“흣……!”
큰 손이 오일을 타고 미끄러졌다. 허벅지에서부터 엉덩이의 둔덕을 지나 등, 그리고 목뒤까지 올라오는 긴 움직임이 시작됐다. 단순히 뭉침이 풀어져서 시원한 것뿐 아니라 살이 짓눌릴 때 성감까지 자극되며 후끈거렸다. 얼빠진 신음과 함께 몸이 뒤틀리고 열이 모이는 걸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홱,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돌아보며 따졌다.
“넌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왜 그래?”
“…….”
“가끔씩 너 그럴 때면……. 아니다.”
철모르는 애 취급 당하는 것 같다고 하려다가 말았다.
“왜. 그럴 때면 뭔데, 응?”
팔을 살살 잡아당기는 걸 밀어 냈다.
“왜 이렇게 골이 났지. 내가 뭐 실수했어?”
고정원은 나를 달래려고 들었다. 일말의 진지함도 없이. 표정을 보아하니 끈적한 장난이나 치고 싶은 기색이었다. 이게 진지해질 만한 사안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티슈를 뽑아 미끌거리는 몸을 대충 닦아 냈다. 발치에 널브러진 가운을 대충 걸치고, 침대 가장자리에서 새우등을 말았다.
“그만 자자. 말해 봤자 어차피 안 통할 거 같은데.”
이렇게 되는 게 서로 언성 높이는 것보다 나쁜 것 같았다. 대화가 안 되니까.
“인휘야.”
“피곤해, 먼저 잘게.”
부르는 걸 무시했다. 몇 번인가 더 불렸지만 눈을 감은 채 잠만 청했다. 고정원이 침대에서 내려가는 기척을 느꼈다. 뭔가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났다. 어쩔 수 없이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여기 좀 봐 봐.”
침대로 되돌아온 고정원이 뒤에서 나를 안았다.
“뭐 가지고 왔는지 알아?”
“…….”
“나 쿠폰 쓸 건데.”
나는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더 만들어 달라는 둥, 아까워서 못 쓸 것 같다는 둥 난리도 아니었으면서. 평생 묵힐 것처럼 굴더니 얼마 전부터 슬슬 사용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내가 손수 만든 종이 쪼가리가 팔랑거렸다.
[무조건 용서 쿠폰]
“…….”
아, 이런 게 있었지. 쿠폰을 보며 후회했다. 뽀뽀 쿠폰이나 더 만들면 되는데 괜한 걸 만들었다 싶었다.
“해 줘. 얼른.”
굵은 엄지손가락이 쿠폰의 ‘용서’라고 적힌 글자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어쩐지 맥이 탁 풀리며 허탈한 웃음이 샜다. 나는 뒤돌아서 얼굴을 마주했다.
“쿠폰 통한 거야?”
“아니, 뭐. 쿠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그렇게 화난 것도 아니었는데.”
“……이거, 취소해도 돼?”
웃기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묻는 표정이었다. 쿠폰에 집착하는 게 귀여워서 픽 웃음이 났다. 쿠폰값은 해 줘야지 싶어서 나는 꽉 끌어안고, 목줄기에 소리 나게 뽀뽀했다.
“미안해, 내가 무신경했다면.”
“…….”
짧은 사과에 서운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아니. 내가 미안해.”
늘 받기만 하는 게 미안했다. 나는 미안하고, 고정원은 내가 미안해하는 걸 이해 못 하니까 이런 문제가 되풀이되기만 했다. 내 입장을 이해해 줬으면 싶지만 이것도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잘 자.”
“잘 자. 좋은 꿈 꾸고.”
뽀뽀를 동반한 인사를 했다. 곧 취침등이 꺼지고 방 안은 까맣게 암전되었다. 긴장 풀린 숨이 느른하게 새어 나갔다.
오늘은 긴장이 대단했다. 고정원네 집에 방문한다는 사실만으로 종일 그랬다. 부모님들을 만나 뵈면서 흥분 상태가 극에 달했고, 이제야 노곤해지면서 피로가 덮쳐왔다. 나는 모든 게 평화롭게 끝났음을 느끼며 수마에 빠져들었다.
옅게 잠들었을 즈음이었다. 뭔가 어수선한 기척이 느껴졌다. 가라앉아 있던 신경이 하나둘씩 깨어났다.
“…….”
반대편으로 돌아누운 자세였다. 이불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뭔가 뒤가 이상했다. 뒤척거리듯, 심상치 않은 숨소리도 들려왔다.
“인휘야.”
갑자기 귀에 낮게 꽂혀들었다. 놀라서 어깨를 떨었다. 열덩이 같은 몸이 밀착되어 문질러지지고 있었다.
“왜 이래, 갑자기.”
잠이 깬 나는 당황해서 속삭였다. 묵직하게 닿는 중심부가 느껴졌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상태였는지 짐작도 안 갔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숨이 거친 고정원이 장난기 없이 메마른 소리를 내뱉었다.
“참기 힘들어.”
헐렁한 가운을 들춘 손이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뭐……가?”
거기서 앞으로, 또 위로……. 미끄러지듯 올라와 삽시에 턱을 붙들었다.
“네가, 여기 있는 게.”
“……어?”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이었다. 다가온 입술이 접착되듯 맞물렸다.
“응……!”
그때부터 나는 휩쓸려서 신음을 터뜨렸다. 헐겁게 걸친 가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섹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읏. 흐읏……!”
서로의 몸을 이용한 전희가 이어졌다. 서로에게 짓누르고 비비면서 흥분감에 어쩔 줄 몰랐다. 중간중간 이성이 돌아올 때면 나는 문 쪽을 힐끔거렸다. ‘잠갔어’ 속삭이는 고정원의 말에도 불안해서 눈이 갔다.
음악이 틀어졌다. 그걸 계기로 고정원은 소리를 내며 빨아 댔다. 아슬아슬할 만큼 데시벨이 컸다. 식사할 땐 씹는 소리도 안 내면서. 입으로 애무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품위 없이 굴었다.
엉덩이를 쳐든 자세였다. 둔부 사이 골짜기가 축축했다. 끈덕지게 혀가 쑤시고 적신 결과였다.
“하고 싶은 대로 움직여 봐.”
고정원이 명령했다. 명령해 놓고, 얼굴을 볼깃살 틈으로 처박았다. 그러니까 자기 얼굴에 대고 문지르라는 소리였다.
“아흑, 읏…….”
민망함을 참으며 엉덩이를 내렸다 올렸다 했다. 단단한 코끝과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입술과 축축한 혀도. 춥……. 엉덩이가 올라갈 때마다 입술이 떨어지며 야릇하기 그지없는 소리가 났다.
지금쯤 우리가 밤새 과제하는 줄 아실 텐데. 고정원의 부모님을 향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어른들 계시는 집에서 무서운 줄도 모르고 이런 짓이나 하고……. 하지만 그런 죄책감은 반동처럼 흥분을 부추기기도 했다.
“흐으, 으, 으응…….”
오일이 새롭게 부어졌다. 고정원은 미끄럽게 만져 댔다. 손바닥이 스칠 때마다 흐느낌이 터졌다. 숨죽인 숨소리. 젖은 살 소리. 코끝을 자극하는 오일 향. 정신 없는 와중에 마주 보고 삽입했다. 전희로 애태워지다 겨우 이뤄진 삽입이었다. 성기가 들어오자마자 사정이 터졌다.
“……하.”
고정원이 팔을 뻗어 커튼을 젖혔다. 암전이었던 방에 빛이 스몄다. 어두워서 가려졌던 것들이 드러났다. 아래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살들이 어떤 형태로 짓눌려 있는지. 움직일 때마다 어떻게 전율하는지.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근육들이 낱낱이 보였다. 너저분하게 튄 정액도.
허벅지가 가슴팍에 붙을 정도로 젖혀졌다. 원래도 유연성이 나쁜 편은 아닌데 이제는 거의 연체 동물인가 싶게 유연해졌다. 어떤 자세를 해도 당기거나 아프지가 않았다. 그 상태로 얕은 드나듦이 이어졌다. 쏠리는 무게감이 좋았다.
엎드리는 자세로 바꾸면서 삽입이 깊어졌다. 나는 베개를 꽉 끌어안았다. 버거운 이물감이 옅어지기를 기다렸다. 묵직한 고환이 샅을 뭉개듯 눌러 왔다. 그런 깊숙한 결합이 이어졌다. 얼마 안 가 참기 힘든 쾌감이 밀려왔다. 살짝만 움직여도 내벽이 자극되는 게 느껴졌다.
“흐, 아……!”
고정원이 속도를 줄였다. 숨소리가 매우 거칠었다. 허리를 움직이면서도, 손으로는 엉덩이를 주물렀다. 안을 확인해 가며 드나들었다. 구멍이 드러나도록 볼기를 벌리는 행위는 집착적이었다.
“네가 봐야 돼, 이걸.”
고정원이 하는 말이 귓가에 웅웅거렸다. 청력도 이상해진 것 같았다. 목청껏 울고 싶은 걸 참으며 베개를 입에 물었다.
“얼마나 맛있게 먹고 있는지 알아?”
‘응? 인휘야’ 하며 엎드린 고정원이 대답하라는 듯 무게를 실어 왔다. 내벽을 채우고 꿈틀거리는 살덩이가 느껴졌다.
“얼마나 사람을…….”
“…….”
“씹질 생각만 하게 하는지.”
고개가 강제로 돌려졌다.
“알아야 돼, 넌.”
말하며 입술을 빨았다. 밑으로는 질척하게 움직였다. 찔꺽찔꺽찔꺽. 거칠게 박아 대도 안이 워낙 흐물해서 물소리가 났다. 마사지를 받다가 이어지는 섹스는 이렇게 눅진해지기 마련이었다.
“아흣, 흐읏, 우으……!”
몸은 고정원이 주는 자극을 일일이 흡수했다. 삽입부뿐만 아니라 끼워진 손깍지까지 짜릿했다. 스치는 피부는 오일로 끈끈하고 찐득했다. 머릿속이 점점 제어를 잃고 풀어졌다.
방이 얼마나 큰지 알았다. 밖이 얼마나 넓은지도 알고. 저 밑에까지는 들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겁났다. 살 소리, 숨소리, 속삭여 대는 음담, 침대 진동까지 전부 문밖으로 샐 것 같았다.
“으음, 흑, 흐음……!”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른 걸 느꼈다. 나는 허겁지겁, 고정원의 손을 입가로 끌어당겼다. 틀어막아 달란 의미였다. 솥뚜껑 같은 손이 얼굴의 절반을 덮었다. 코까지 틀어막히고 나서야 나는 안심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흐으, 읍, 으……!”
절정에 달했다. 진동 모터가 달린 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고정원이 손을 떼자 고였던 침이 주르륵 흘렀다. 정신 차리기 힘들었다. 파득파득, 잔쾌감이 지나가며 허리가 튀었다.
힘들어서 납작하게 엎드렸다. 쉬려고 했는데 그새 뜨거운 게 뒤에 닿았다. 자세로 인해 좁아진 곳으로 성기가 퍽 꽂혔다. “아!” 소리쳤다. 순간 입술로 두터운 게 들어왔다. 고정원의 손가락이었다. 하마터면 그걸 씹을 뻔했다.
“아으, 앙, 아아……!”
손가락들 때문에 입이 다물리지 않았다. 미칠 노릇이었다. 침이 질질 샜다. 무엇보다 소리가 하나도 막아지지 못했다. 막아 주지도 못하는 데다 오히려 들쑤셨다. 손가락이 혀와 점막, 치아를 문지르는 게 성감대를 애무하는 것과 같았다.
“하, 아아……!”
“아……!”
극점을 찍었다. 연이은 사정은 머리를 희게 물들였다. 입 안을 메우던 게 빠져나가자 콜록콜록 기침이 터졌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내지른 소리가 너무 컸던 탓이었다. 들렸으면 어떡하지. 나뿐 아니라 고정원도 거칠게 내질렀다. 여태 냈던 것 중에 제일 큰 소리였다.
진짜 그만해야 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고정원은 대담하게 다른 체위를 시도했다.
“그, 만…….”
앉은 고정원 위에 내가 올라타는 자세였다. 고정원은 뒤로 상체를 눕혔다. 한쪽 손으로만 내 허리를 지탱했다. 나는 자발적으로 움직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고정원이 이어진 곳이 마찰되도록 허릴 빠르게 추스르는 것만으로 벅찼다. 두 번 연속 사정한 성기에서는 아직도 꾸덕한 체액이 흐르고 있었다.
이를 꽉 물었다. 맞물린 몸이 앞뒤로 흔들리며 지독하게 느낌이 왔다. 두 번이나 쌌는데 갈수록 예민해지기만 했다.
“아, 그, 만, 그만……!”
그만하라고 하자 고정원은 더 격정적으로 했다. 상체를 세우고 나를 끌어안았다. 엉덩이를 잡고 퍽퍽퍽퍽 박아 올렸다. 이성을 잃고 괴성을 내지를 것만 같았다. 그 강렬한 감각을 거부하느라 필사적이었다.
“젭, 아, 제발……! 천천히 좀, 천천히……!”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어깨를 퍽퍽 때려 가면서 애원했다. 윽박은 못 지르는 상황이라 울먹대며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눈물을 내비치자 그제야 고정원이 뚝 멈췄다. 역동적이던 동작이 그치면서 둘 다 입에서 뜨거운 숨이 터졌다.
“……천천히 하게 만들어 봐.”
혼자만 계속 가지 말고.
고정원이 속살거렸다. 바짝 선 내 성기를 건드리면서. 귀두에선 분비물이 나오고 있었다. 고정원의 복부엔 이미 그것들이 찐득하게 묻어 있었고. 쳐다보자 굳이 훑어서 보여 주기까지 했다. 나로서는 실수로 배설물이라도 묻힌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누군 들킬까 봐 심각한데. 이런 식으로 희롱만 하니까 서러워지려고 했다.
“진짜 심각하다고…….”
쇳소리로 중얼거리고 귓불을 씹었다. 아프든 말든 잇자국이 나도록 질근거렸다.
고정원은 금세 반응했다. 내 성기를 뿌리부터 꽉 틀어쥐었다. 나는 미치겠어서 들썩거렸다. 항의하는 뜻으로 고정원의 등을 할퀴었다.
“좋아 죽겠네.”
나 들으라는 듯 고정원이 혼잣말했다. 흥분감이 묻어난 얼굴은 정말로 기분 좋아 보였다. 내가 깨물거나 할퀴거나 하는 걸 성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암담해져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했다.
“나 배가 너무 아파.”
“천천히 해 달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조심조심 침대에 눕혀졌다.
“…….”
정말 살살 해 주려는 건지 고정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내 양쪽 팔을 들어 올리기만 했다. 드러난 팔뚝 안쪽부터 겨드랑이의 오목한 곳까지였다. 고정원이 부드럽게 핥았다.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났어.”
“……흐, 응.”
적시며 말하는 통에 입김이 간지러웠다.
“예전에 우리 통화했던 거 기억해?”
집중하려 애쓰며 눈을 맞추었다. ‘처음으로 같이 과제했을 때’ 하고 고정원이 부연했다. 아마 사귀기 전 얘기인 듯했다. 교양 수업에서 같이 조별 과제를 했던.
“이 침대에 누워서 너랑 통화했는데…….”
겨드랑이를 적시던 입술이 옮겨갔다. 가슴으로. 턱으로. 귀로. 간지러운 나머지 작게 앓았다.
“너는 빨리 끊고 싶어 하고, 난 계속 길게 하고 싶어 하고.”
“으응…….”
내가 그랬었나. 생각하면서도 앓아 대기 바빴다. 간지럽고 뜨거웠다.
“통화 끝나고 새벽까지 네 생각만 했어.”
그 말이 귓속에 파고들었을 땐 내벽이 확 조였다.
“…….”
나도 놀라고, 고정원도 놀란 것처럼 굳어졌다.
“……근데 오늘은 여기 같이 있네.”
지그시 주시하는 눈이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더듬어 보는 듯도 했다. 과거의 나와 현재 여기 있는 나를 교차해 보듯.
“…….”
그런 감회는 고정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나도 기억 속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나간 추억들이 일일이 스쳤다. 카페에서 어색하게 과제하고. 단둘이 된 술자리에서 마주 보며 취하고. 데이트처럼 영화를 보고 식사하고. 알 듯 말 듯 잡히지 않는 감정들에 휘둘려 하루에도 몇 번씩 들뜨고 가라앉고.
새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새롭게 감각들이 내리꽂혔다. 흥분이 치밀어 오른 나는 고정원을 끌어당겼다.
“음…… 흐…… 으음…….”
입술끼리 닿는 접촉이 황홀했다. 머릿속에서 폭죽 같은 게 터지는 것 같았다. 나는 감촉에만 집중하면서 저절로 이어진 곳을 자극했다.
“아흑, 흑……!”
엉덩이가 철퍽, 철퍽, 울렸다. 전신의 신경이 날카롭게 섰다가 성기가 들이닥칠 때마다 와르르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흐아으, 응……! 윽……!”
깊은 곳으로 들어오는 리듬에 맞춰 나도 같이 허리를 움직였다. 더욱 깊숙하게 받아들였다.
“아, 학, 악, 아아……!”
“아, 아……!”
거의 정신 나간 채로 서로의 점막에 짓찧어 댔다. 살끼리 부딪는 마찰음이 층고 높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이렇게 격렬하고 난폭한데 서로에게 상처 하나 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가장 예민한 곳을 가장 거칠게 마찰했다. 죽을 것 같은 쾌감과 사랑만 느꼈다. 사정하고. 울부짖고. 다시 삽입하고. 점막이 다 녹을 것 같은 행위는 그 후로도 밤새도록 이어졌다.
* * *
똑똑똑.
노크 소리에 번쩍 눈이 뜨였다. 나는 용수철처럼 상체를 일으켰다. 휙휙 주변을 둘러고 나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부자리는 지저분한 흔적들로 엉망이었다. 누구든 그걸 보면 우리가 간밤에 뭘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정원아, 아직 안 나갔니?”
어머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나는 이불로 헐벗은 몸부터 가렸다. 그리고 고정원을 흔들어 깨웠다.
똑똑.
노크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부스스 상체를 일으킨 고정원이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네, 어머니. 저희 지금 일어났어요.”
문밖에서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가 봐야 하니까, 둘이 점심 잘 챙겨먹고 있을 만큼 있다 가.”
“네, 그럴게요. 감사해요.”
인사 안 해도 되는 걸까. 고민했지만 몰골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문밖은 금세 조용해졌다. 고정원이 커다란 등을 늘어뜨렸다.
“잘 잤어?”
“……벌써 1시네.”
정말로 오후였다. 간밤에 커튼을 걷어 낸 탓에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용케도 이렇게 밝은 데서 푹 잤네 싶었다.
근처에 널브러진 가운을 집들었다. 슥 걸치는데 피부가 유난히 매끈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다가 떠올렸다. 몇 번이나 덧발라지던 마사지 오일. 그걸 시작으로 주마등처럼 수많은 장면들이 스쳤다.
“…….”
죽겠네.
숙취도 아닌데 숙취처럼 괴로웠다. 아무리 넓은 집이라 해도 어른들 계신 곳에서 대체 뭘 한 건가 싶었다. 자괴감이 장난 아니었다. 아무것도 못 들으셨겠지. 못 들으셨어야 하는데. 걱정하며 까치집 된 머리를 매만지는데 재채기가 터졌다.
“에취!”
어제부터 이러더라니. 다 벗고 잔 탓에 감기 기운이 생긴 것 같았다.
“앗, 괜찮아.”
비죽 나온 콧물을 고정원이 닦아 주려 했다. 휴지가 아니라 맨손이길래 피했는데 소용없었다. 기어이 닦아 낸 고정원은 티슈가 있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잠시 티슈 놓인 협탁에 시선이 머물렀다. 협탁 서랍에 있던 담배와 라이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요즘엔, 담배 안 피워?”
“안 피워.”
짧게 답한 고정원은 쓴웃음 지으며 덧붙였다.
“끊고 몇 달만에 한 번 피우긴 했는데. 그땐 못 참겠더라.”
그때가 언제인지 단박에 알았다.
“……요즘에도 피우고 싶은 거 아니야?”
“아니. 누가 담배 냄새를 싫어해서.”
처음 들었다. 담배를 끊은 게 그런 이유라는 건.
“……누가?”
어머니 때문인가. 생각하며 묻자 고정원이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점점 웃음기가 진해지며 나를 보기 시작했다.
“……나?”
“싫어하잖아, 너. 애초에 끊은 이유가 너였는데.”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 때문에 끊은 거라니.
“담배 냄새 진짜 싫어하긴 싫어하는데…… 근데,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거 같은데……. 어떻게 알았어?”
궁금해하는 내게 고정원은 장난스럽게 답했다.
“쫓아다니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던데.”
아.
혹시 이런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김강우랑 붙어 다닐 때가 많았다. 김강우한테는 거의 항상 담배 냄새가 풍겼고, 그게 싫어서 뭐라고 자주 했었다. 아마 그걸 우연히 본 게 아닐까 하는.
“…….”
픽 웃음이 샜다. 괜히 간질거려서 귓등을 긁었다.
“왜 웃어?”
“아니.”
새삼 고정원이 애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한테 수작부리고 집적거리고. 그렇게 잘난 주제에 연애 못 하는 척까지 해 가면서. 그땐 왜 그렇게 심각했나 의아해질 정도로 거짓말에 얽힌 일들이 모두 추억이었다.
“피우고 싶어지면 말해.”
“응?”
“……담배. 너 끊었잖아. 혹시 피우고 싶어지면 말하라고, 나한테.”
고정원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말하면?”
다가간 나는 양쪽 얼굴을 붙들고 입을 맞췄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에 번갈아가며 규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뽀뽀했다.
“이렇게 해 주게.”
뻔뻔하게 해 놓고 나니 머쓱했다. 침대를 내려가려는데 고정원에게 잡혔다. 숨 막힐 만큼 묵직한 근육으로 짓눌렸다.
“지금 피우고 싶어.”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깟 뽀뽀가 뭐라고.
쪽쪽쪽쪽. 웃으면서 장난처럼 해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기어이 호흡이 가빠지는 키스로 이어졌다. 입술을 물고 빨고 하다가 내가 먼저 떼어 냈다.
“다음엔 우리 집 갈래?”
이걸 묻기 위해서였다.
“응.”
대답한 고정원이 덧붙였다.
“그땐 인휘가 사 줘. 어머님께 드릴 과일.”
어제 조금 다퉜던 게 효과가 있는 듯했다. 이번에는 양보해 줬다는 걸 알았다.
“내가 사 줘야지, 당연히.”
으스대면서 나는 고정원의 손을 만졌다.
“…….”
가만 마주 보던 중이었다.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랬다. 뭔가, 이해되는 기분이 들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된 것처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도 싸울지 모른다는 생각. 때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기고, 서로 지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노력해도 끝끝내는 서로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근데 너무나 확신이 들었다. 우리가 서로를 놓지 않을 거라는 확신. 내 인생의 모든 선택에는 고정원이 한가운데 있을 거라는 확신.
이렇게 생겼구나.
단단한 손을 붙들면서 나는 생각했다. 처음으로, 사랑의 생김새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