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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연애의 비밀 (6) (21/30)

9. 연애의 비밀 (6)

일상으로 복귀하고 시간이 쏜살같았다. 풀빌라에서 여유롭게 바베큐 파티를 하던 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다.

현실은 아르바이트를 하나 관뒀어도 바쁜 게 나아지질 않았다. 과제하다가 수업 들어가고, 수업 끝나면 조모임 가고, 조모임 끝나면 다시 과제하고. 하루가 대개 그런 식이었다. 그래도 여행으로 충전하고 와서인지 전보다 하루하루가 피폐하지는 않았다. 여행지에서 단둘이 보냈던 여러 가지 추억들을 자양분 삼아 기분 좋은 날들이 지속되고 있었다.

학교는 어수선했다. 축제를 앞두고 있는 탓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작년에는 학생회도 아니면서 돕느라 분주했었다. 올해는 그럴 겨를도 없고, 축제라곤 해도 남의 일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인휘야]

[우리 점심 여기서 괜찮아?]

고정원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음식점 위치도 첨부돼 있었다. 바로 좋다는 답장을 보내고 강의동을 빠져나왔다. 시간은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근처에서 발표할 PPT만 다듬다가 가면 될 것 같았다.

“인휘 형!”

목청 큰 부름에 등이 흠칫 떨렸다. 돌아보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아아, 안녕.”

우민규였다.

“점심 먹으러 가세요? 같이 가실래요?”

말하며 우민규가 넉살 좋게 웃었다.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 약속이 있어서.”

“아, 아쉽네요…….”

금세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다음에 애들이랑 같이 먹자고 말하려던 차였다.

“형은 축제 준비하러 안 오세요?”

우민규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바빠서 시간이 잘…….”

“축제 때는 오시는 거 맞죠? 꼭 오셔야 돼요.”

이젠 거의 울상이었다. 못 간다고 말해 줘야 하나. 축제 기간에는 멀리 나가서 데이트를 할 예정이었다.

“요새 저 죽겠어요, 이러다. 동아리 부스 준비도 돕고 있는데 와…….”

망설이기 무섭게 푸념이 쏟아졌다. 축제 준비에 대한 푸념으로 시작해 사생활까지, 화제가 휙휙 바뀌었다. 얼마 전 소개팅 상대와 틀어진 이야기까지 술술이었다. 수다는 장장 20분을 넘기고 나서 끝났다.

“이거 먹을래?”

헤어지기 전에 과자 하나를 건넸다. 주머니를 뒤져 나온 에너지바였다. 주변에 당장 사 줄 만한 게 없길래 아쉬운 대로.

“헉, 감사해요……! 아껴 먹을게요.”

호들갑스럽게 좋아하니까 미안해졌다. 별것도 아닌데. 다음에는 꼭 밥 한 끼 사 줘야 할 것 같았다.

“맞다!”

큰 소리에 놀라 고개가 들렸다.

“형, 혹시 이희운 왜 그러는지 아세요?”

불쑥 튀어나온 이름에 한 번 더 놀랐다.

“어, 희운이가 왜?”

“아니, 걔 요새 지인짜 수상해요.”

우민규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도 제대로 안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얼굴은 누구랑 쌈질을 했는지 못 볼 꼴을 해 가지고, 뭐 휴학할 거라는 말도 있고……. 이래저래 골치 아픈 거 같던데 혹시 아세요?”

“……아니, 나도 잘 모르겠네 그건.”

“네에……. 형은 왠지 아실 거 같았는데.”

그 길로 헤어지고 바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뜻하지 않은 만남에 시간이 지체돼서 다른 걸 하지는 못했다.

“…….”

싱숭생숭했다. 얼굴이 못 볼꼴이라느니 휴학을 할 것 같다느니. 들었던 말들이 자꾸 맴돌았다. 그날 이후로 이희운과는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없었으니 당연히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지 못했다.

쭉 이렇게 불편하게 지내는 건 못할 짓이었다. 만약 휴학 얘기가 사실이라면 한 번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고정원에게 말하고, 셋이 다 같이 보는 방향이 좋겠지 싶었다.

약속 장소로 들어가기 전이었다. 나는 건물을 한 번 훑어봤다. 상호명과 건물 외관을 보고 나니 기억이 되살아났다. 분명히 전에 한 번 왔던 곳이었다. 전에, 이희운을 껴서 고정원과 다같이 밥을 먹었던 그곳이 맞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정원이 보였다. 창가의 맨 끝자리였다. 다른 사람과 동석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가 맞은편에 웬 남자가 앉아 있길래 의아했다. 누구지? 궁금해하며 뒷모습을 쳐다봤다. 코앞까지 다가가서야 나는 그게 이희운이라는 걸 알았다. 정말로 이희운이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얼룩덜룩 멍 자국을 달고서.

어서 와, 아는 체한 고정원이 의자를 끌어당겨 주었다.

“한 번은 보고 끝내야 할 것 같아서.”

“아, 어어, 잘했……어.”

떨떠름한 입가를 문지르며 자리에 앉았다.

“……오셨어요.”

“아, 응.”

나는 마주쳤던 눈을 반사적이라고 할 만큼 잽싸게 돌렸다. 콜록, 헛기침을 해 놓고 왠지 갈증이 나서 물을 찾았다. 꿀꺽 꿀꺽 들이키고 나자 손끝으로 긴장이 스몄다.

왜 이러지.

메뉴판을 받고, 주문까지 모든 게 얼렁뚱땅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냅킨을 접고, 찢고, 오른쪽 다리를 떨어 댔다. 침착한 시늉도 힘든 와중에 억지로 끌어들일 만한 화제도 없었다. 기어이 예의가 아닌 줄 알면서 휴대폰만 쳐다봤다.

음식이 나오고 나서도 거북함은 여전했다. 결정적으로 셋 다 말이 없었다. 고정원이 일부러 배려해서 마련해 준 자리였다. 어떻게든 대화를 시작해서 잘 마무리 지어야 할 타이밍인데 현실은 눈을 맞추는 것부터 난감했다.

손님이 거의 없는 내부는 조용하기만 했다. 식사는 나만 하고, 고정원도 이희운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희운아.”

부르는 소리에 음식을 삼키던 목이 조였다.

“불편하면 먼저 일어나도 돼.”

“…….”

“할 말 있을 텐데, 하고 가.”

그 할 말의 내용이라는 게 뻔했다.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할 말은 분명 아니었다. 갑작스레 사과를 받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버겁게 조여 오는 공기만 느끼고 있었다.

“……죄송해요, 인휘 형.”

사과의 말이 들려왔다.

“어…….”

불쑥 고개 들자 일그러진 눈이 보였다.

“제대로 사과드리고 싶은데 그동안 못 했어요. 얼굴 보는 것도 불편하실 것 같아서.”

이제 보니 상당히 말라 보였다. 얼굴에 난 상처도 그때 내가 때려서 생긴 걸 텐데. 예상보다 훨씬 심해서 마음이 한없이 불편해졌다.

“어……. 사과 받을게. 나 이제 정말로 신경 안 쓰니까 너도…….”

“……네.”

“…….”

“감사해요. 안 받아 주실까 봐 걱정했는데.”

얼굴이 너무 안 좋아서 도리어 내가 잘못한 입장 같았다.

“야, 너 밥 좀 제대로 먹고 다녀라…….”

엉겁결에 내뱉은 소리에 이희운이 쓰게 웃었다. 그럴게요, 하고 작은 대꾸가 뒤따랐다.

“형도 너무 무리하지 마요.”

“…….”

“전부터 계속 말하고 싶었는데…….”

말끝을 늘이며 이희운이 내 눈을 봤다.

“누구한테든 억지로 맞춰 줄 거 없어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저 말하는 상대만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어떤 관계에서든, 저는 형 의사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싫으면 싫다고 말도…….”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나, 뚜렷한 의문을 가지기도 전이었다.

“할 말이 그렇게 많아?”

고정원이 끼어들었다.

“아니면 생각해 보니까 배가 고픈가. 밥 더 먹고 갈래?”

“…….”

묻는 말이었지만 그만 가 보라는 소리로 들렸다. 이희운도 그렇게 느꼈는지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인사 정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글쎄…….”

나직한 말꼬리에 희미한 조소가 스몄다.

“억지로 사람 붙들어 놓고 추행한 장본인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

“…….”

“…….”

찬물 뒤집어쓴 것처럼 조용해졌다. 이희운도 나도 ‘추행’이라는 단어 앞에서 똑같이 얼어붙었다. 내부는 지나치게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드문드문 손님이 자리한 테이블 간의 간격도 넓었다. 우리 주변만 스피커를 끈 것처럼 소음이 전멸했다.

이걸로 끝이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대로 나가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나는 당연히 이희운이 나갈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희운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삭이는 듯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가 할 말은 더 아닌 것 같은데요.”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는 건 인지했다. 말려야 하나, 눈치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말릴 새도 없이 기묘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진짜 범죄잖아요. 당신이 하는 짓은.”

“……야, 이희운.”

놀라서 말렸다. 범죄라니. 그런 과격한 단어를 쓸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나라면 그런 거 안 해요, 절대.”

“응.”

받아치긴커녕, 고정원은 담담하게 동조했다. 여유롭게 첨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거겠지. ……네가 아니라.”

포크 떨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이희운이 주먹으로 내리친 테이블이 쾅, 하고 울렸다.

“그딴 식으로 소유물처럼…….”

“말해도 되는 관계도 있어.”

나랑 조인휘처럼.

“…….”

이희운은 티 나게 얼굴을 붉혔다. 고정원을 쳐다보는 눈이 이보다 험악할 수 없었다. 눈에서 불길이 일었고,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주먹이 떨렸다. 격한 반응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벌렁거리게 했다.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이희운이 나를 봤다.

“언제든 도움 필요해지면, 나한테 연락 줘요 꼭. 이 사람 완전히 제정신 아닌 것 같으니까.”

나는 뻐끔대던 입을 다물었다.

“…….”

……왜.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신경질에 가까운 의문이 솟았다. 왜 고정원이 이런 평가를 들어야 하는지. 왜 이런 식으로, 우리 관계가 잘못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참견을 하는지. 어지러운 와중에 명치에서부터 아프게 치밀어 올랐다. 나는 흥분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도움 같은 거 필요 없어.”

목소리가 떨릴까 봐 성대에 힘을 줬다.

“그리고, 얘가 제정신 아니면…….”

“…….”

“내가 더 제정신 아닌 거니까.”

거기까지 말하고는 정면에서 직시했다.

“어차피 네가 상관할 일도 아니고.”

이희운의 표정이 어떻든, 더는 마음 쓰이지 않았다. 더 마주 보고 있을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나쁘게 대할 필요도 없지만, 좋게 끝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최대한 예의를 지킨 마지막 인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럼, 잘 가. 건강하게 잘 지내라.”

“…….”

테이블에서는 어떤 소음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희운은 한참 뒤에야 답했다.

“……잘 지내요, 형.”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났다. 발걸음이 너무나 조용해서 그저 희미한 기척으로 나갔음을 예상했다.

……다 끝났다.

긴장을 놓자마자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식은 음식을 뒤적거리다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만 먹을까.”

묻는 말에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나가서 주변을 무작정 걸었다. 주변에 있는 공원을 돌고, 한 바퀴를 다시 돌았다. 원래는 밥만 먹고 복귀하려고 했다가 예정에 없던 데이트였다.

걸으면서는 얘기를 많이 나눴다. 그 대화를 통해 나는 이희운의 얼굴에 든 멍 자국이 나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고정원은 며칠 전 이희운을 찾아갔었다.

“화나서 화냈어. 그럴 자격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서.”

맞아, 나 자격 있는 거?

확인을 구하듯 고정원이 물었다. 다른 사람 눈치 보는 성격도 아니면서, 내 눈치를 보는 게 의외였다. 아마 폭력을 썼다는 걸 내가 안 좋게 볼까 봐 우려하는 것 같았다. 정당성을 나한테 확인받고 싶어 했다.

“……당연하지.”

기분이 복잡해지면서 고정원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나는 좀 충격을 받은 상태이기도 했다. 아까 식사 자리에서 받은 충격이었다. 이희운과의 그 일이, 생각보다 내게 영향을 크게 끼쳤다는 걸 깨달았다.

만나면 정말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감정이 가라앉은 후라 이희운 얼굴을 봐도 전과 같은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막상 마주치니까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그때 그 집의 분위기, 그때 느꼈던 감정, 그때 내게 닿았던 감각들 같은 게 생생히 되살아나면서 회피하고만 싶었다.

나는 고정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고마워. 나 때문에 화내 줘서.”

나는 전부터 화내야 할 일도 적당히 넘어갈 때가 많았다. 그게 성격이라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단순히 방어적인 습관이었다. 화를 내도 되나. 내 봤자 아무 일 안 일어날 텐데. 사람만 잃게 될 텐데. 그런 걱정을 하느라 움츠러들기만 했었다. 나중에는 참았던 게 곪아서 속앓이하는 걸로 마무리되는 게 대부분이었다.

“너랑 만나고부턴 아플 일이 없는 거 같네.”

“…….”

“……네가 맨날 나 대신 아파 주니까.”

말해놓고 쑥스러워서 다른 곳을 쳐다봤다.

“응, 난 그러려고 있는 건데.”

고정원이 천연덕스럽게 받아넘겼다. 닭살스럽다 생각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주책없이 벌어지려는 입가에 힘을 주고서 말했다.

“나도 너 안 아프게 해 줄게.”

대신 아파 주겠다는 말이었다.

고정원은 느릿하게 걸으면서 웃었다. 가슴 떨리게 웃더니 덧붙였다.

“아니, 넌 아프지 마.”

“…….”

흘리듯 하는 말에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고정원처럼 능글능글하게 받아쳐 보려고는 했다. 근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 주변을 쓸고, 머리칼을 흩뜨리고, 시큰해진 눈에 힘만 줬다.

“……슬슬 가야겠다.”

돌아갈 때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오늘 날씨가 굉장히 좋다는 걸. 고개를 들어 본 길목마다 녹음이 짙푸른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말이 모두 소진된 것처럼 조용히 걸었다. 이따금씩 어깨가 스치고 손등이 스치고, 그런 좁은 간격을 유지하면서 학교로 향했다.

이따 봐.

방향이 달라지는 곳에서 손인사를 끝으로 갈라졌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 걸어갔다. 강의동으로 향하고, 도착한 강의실의 구석진 곳에 앉았다.

수업 중에는 창밖으로 자주 주의를 뺏겼다. 종이의 귀퉁이에 무의식적으로 낙서를 늘어놓기도 했다. 낙서 사이사이, 고정원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적었다가 선을 덧그어 감췄다. 공원에서 마주했던 표정들을 멍하니 곱씹어 보기도 했다.

어쩐지 그런 사소한 모든 일상이 스미듯 인상 깊은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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