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연애의 비밀 (5)
수많은 선택지가 머리를 스쳤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내놓을 답을 찾던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물에 젖은 개처럼 도리질 쳤다. 쿵쾅거리는 맥박 때문에 토할 것 같았다. 이상해 보였을까. 미친 듯이 초조해졌지만 최대한 멀쩡한 얼굴로 받아쳤다.
“미안하다고 해, 이희운이? 뭐지.”
“…….”
“아, 혹시 그게, 그거…… 그건가. 아아, 이제 뭔지 알겠다.”
이제야 생각난 척 입을 벙긋거렸다.
“그, 가게서 싸움 났을 때. 이희운도 같이 손님 말렸었거든. 그때…….”
뒤죽박죽이었다. 뭉쳤던 침이 넘어가며 부자연스레 말이 끊겼다. 앞뒤가 맞게 말하고 있는 건가. 안면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건가. 마치 관객 앞에서 처음 보는 대본으로 연기를 시작한 배우가 된 것 같았다.
“그때 어쩌다가, 내가 이희운 대신 한 대 맞았었어.”
스크린이 전환되며 밝은 빛이 쏟아졌다. 빛에 노출된 고정원의 동공이 작게 조이는 모습이 현미경으로 보듯 또렷했다.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내뱉은 말들이 하나하나 실수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아. 대신이 아닌가. 대신이라기보다는 그, 손님이 쟁반 같은 걸로 내려치려고 했었거든? 내가 반사 신경 좋잖아. 엉겁결에 확 막은 거야 그걸. 암튼 별것도 아니었는데 걔 입장에선 놀라고 되게 미안했나 봐. 나는 어떻게 하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막은 건데.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
누덕누덕 이어 붙인 설명은 조잡하게 끝맺어졌다.
“…….”
한마디 할 법도 한데 고정원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특별히 이희운을 도와준 게 아니라, 나는 정말로 걔가 아니라 누구라도 똑같이 했을 거고…….”
무언의 강박을 견디지 못하고 변명을 보태던 나는 금세 꼬리를 내렸다.
“……근데, 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 같아.”
미안해.
작게 사과를 덧붙이며 죄책감에 휩싸였다. ‘미안해야 할 건 안 미안하고, 왜 그런 게 미안할까’ 영화관에 들어오기 전에 들었던 지적이 속을 찔렀다.
“부어 있더라.”
가볍게 올라온 손이 턱을 잡았다. 손가락이 아랫입술을 눌렀다.
“여기도 맞은 거야?”
너무 놀라면 가만히 있어도 몸이 내려앉는 물리적 충격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까부터 벌써 몇 번이나 그런 충격을 느끼면서 나는 눈꺼풀을 껌뻑거렸다.
“무슨. 거길, 내가 왜 맞아.”
입술이 달라 보이는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아, 알러지 탓인가. 반찬이 안 맞았는지 거기서 먹고 나니까 가려워서, 비볐어, 계속.”
급조한 핑계 속에는 어느 정도 사실도 포함됐다. 강제로 입맞춤당한 감촉을 다른 감촉으로 덧입히고 싶어서 수시로 문질렀으니까. 잠깐의 마찰로 입술이 부푼 건 아닐 테니 그런 내 행동이 붓기의 원인일 거라 짐작했다.
“…….”
물속에 잠긴 것처럼 호흡이 부자유했다. 이런 거짓말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어.”
말하며 고정원은 내 입술을 쳐다봤다.
“키스를 안 해 주길래.”
“…….”
“혹시 다른 사람한테 말 못 할 짓이라도 당하고 온 건가.”
느리게 감은 필름 같았다. 지금 이 순간이. 보기 좋은 입술도, 단정한 속눈썹도 모두 지나치게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미친 생각을 하느라…….”
“…….”
“잠을 못 잤어.”
“…….”
우습지.
뒤따른 말에 나는 동조하지 못했다. 얼른 부정부터 해야 한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따라 간신히 굳은 혀를 움직였다.
“그런…… 왜, 그런 거 아냐. 정말, 절대 아니야.”
“그러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지긋하던 시선이 거둬졌다. 손을 잡으며 고정원이 말했다.
“네가 피하면 나는 불안해지거든.”
나는 조급하게 터지려는 호흡을 조절하며 부정했다.
“피한 거 아닌데.”
“그래?”
대꾸한 고정원이 코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근데 지금도 피하는 것처럼 느껴져, 난.”
눈썹의 촘촘한 결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고정원의 태도는 장난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그게 아니었다.
설마 떠보는 건가. 떠보는 거면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과부하에 걸려 있던 내가 대뜸 상체를 기울였다. 입술끼리 맞댔다. 최대한 조용한 접촉이었지만 소리가 났다. 촉, 점막이 떨어지는 마찰음이 영화 사운드 새로 민망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제 안 불안하지.”
공공장소에서 할 만한 행동이 아니긴 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풀 만한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
숨결은 닿아도 대답은 없었다. 쳐다보는 눈이 뭘 요구하는지는 적나라해져 있었다.
안 되는데.
이 이상 할 순 없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그래서도 안 됐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엄격한 마음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나는 홀린 것처럼 고정원에게 입술을 붙이고 있었다.
춥.
춥.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로 빨았다. 안쪽으로 혀를 넣어 문지르고, 치열을 건드렸다. 혀와 입술은 적당한 세기로 잡아당겼다 풀어 주길 반복했다. 더운 숨이 올랐다. 하는 입장에선 야릇한 기분이 드는데 상대의 반응은 어째 시큰둥했다.
“이제 안 불안하지.”
작게 헐떡이며 아까와 같이 물었다.
“……아직. 모르겠는데.”
내리깐 목소리는 억누르는 것처럼 들렸다. 덤덤한 척하는 건지 정말로 덤덤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만하자. 우리 영화 봐야 되잖아.”
싫다는 것처럼 고정원이 다가왔다. 내 아랫입술을 물어 당겼다. 아. 아프진 않았지만 엄살처럼 신음이 터졌다. 벌어진 입 속으로 혀가 들어왔다.
“하…….”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녹녹한 숨이 쏟아졌다. 불안했다. 주변을 살필 생각으로 눈을 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뜬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는 고정원이 보였다. 원래 이렇게 쳐다보면서 하는 타입이었나.
고정원은 아예 방향을 틀었다.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내가 앉은 좌석의 좌우 팔걸이를 각각 붙들었다. 입맞춤이 격렬해지면서 거의 내게 쏟아지듯이 무게를 싣고 있었다.
휩쓸려서 빨리고 빨아 댔다. 그러면서도 갈피를 못 잡았다. 고정원의 어깨를 붙잡다가 밀어냈다가, 변덕스럽게 굴었다. 받아 주고 싶으면서도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응…… 으음……!”
전기가 통한 것처럼 발끝이 자지러졌다. 그만해야 되는데. 이제 진짜 안 될 거 같은데. 생각하는데 옷 속에 손이 들어왔다. 늑골을 매만진 손바닥이 위를 향했다. 굵은 손가락이 튀어나온 유두에 걸리자 의지와 상관없이 비명이 터졌다.
벌떡 일어나며 밀어냈다. 손바닥과 어깨가 부딪치며 퍽, 하고 뭉툭한 소리가 났다.
“…….”
일어서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흠칫 어깨가 떨렸다. 객석 앞까지 소리가 들렸는지 몇 명이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나…… 화장실 좀.”
고정원의 얼굴을 살필 여유도 없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구부린 자세로 도망치듯 상영관을 빠져나갔다.
복도 끝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면 전체를 채운 대형 거울 앞에서 나는 어딘가 불편한 사람처럼 몸을 웅크렸다.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유두가 바짝 섰고 아래는 살짝 젖은 감이 느껴질 정도로 발기해 있었다. 얇은 면을 들추고 울룩불룩 튀어나온 모양새들이 거추장스러웠다.
뭐하고 있는 건가 자괴감이 들었다. 공공장소에서 선 넘는 행동을 한 것도 그렇지만 다른 의미로도 복잡한 심정이었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들이 질 나쁜 기만처럼 느껴졌다.
“아…….”
고개를 꺾으며 탄식을 터뜨렸다. 이 상황의 발단이 된 메시지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쥐었다가 다시 놨다가. 망설이던 끝에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미안해요 형]
짧은 문자를 보자 고정원이 했던 말이 오버랩됐다.
‘이희운이 너한테 왜 미안해?’
그 말을 들었으니 메시지 내용은 짐작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형. 실제로 보니 지나치게 간결해서 오히려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으…….”
현기증 때문에 주저앉았다. 이 모든 것들을 다 그만두고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고 매달려서 빌고 싶었다. 그런 충동에 강렬하게 휩싸였다.
헤어지게 될까 봐 무서워서 그랬다고, 내가 앞으로 더 잘하겠다고. 고치라는 대로 고칠 테니까 한 번만 봐줄 수 없겠느냐고. 구차하게 비는 말들이 머릿속에서 쏟아졌다. 지금이라면 당장 무릎을 꿇어서라도 용서를 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세 좋게 일어서자마자 발이 묶였다. 조금 전 상영관에서 극구 부정하던 내 말들이 생각나면서 어쩔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
미친 생각.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그렇게 표현하던 고정원의 말들도 떠올랐다.
“…….”
족쇄를 차고 있는 것 같았다. 들키면 끝장이야. 어디선가 들리는 위협적인 경고에 압도당해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어떡하지. 어떡해.”
중얼거리면서 뒷걸음쳤다. 텅 빈 화장실을 빙빙 배회했다. 산만한 배회가 어느 정도 끝난 뒤에는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했다. 손을 씻고 얼굴에도 물을 끼얹으며 정신을 되돌렸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도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슬슬 가 봐야 하는 시점이었다.
얼굴을 마구 닦아 내고 심호흡을 거듭했다. 똑바로 하면 된다. 나만 잘하면 된다. 혼내듯이 혹은 독려하듯이 중얼거리고 나서야 겨우 밖으로 나섰다.
“…….”
출입구를 나서다 말고 나는 우뚝 멈췄다. 화장실 옆으로 이어진 복도 한쪽에 사람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안에서 혼잣말하던 게 들렸을까. 심장이 졸아붙는 것 같았다. 고정원은 묻는 말에 대답이 없었다. 여기까지 따라와 놓고는 가만 쳐다보기만 하는 행동 때문에 더욱 속이 타들어 갔다.
“그냥 안에서 기다리지 왜…….”
탓하는 투로 말이 나갔다. 신경이 예민해지는 걸 느꼈다. 들키고 싶지 않은 게 있다 보니 작은 행동에도 곤두섰다.
“이희운하고 연락했어?”
고정원은 조금도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뭐? 아니.”
황당해서 얼굴이 풀어졌다. 벽에서 등을 뗀 고정원이 손을 내밀었다.
“내가 봐도 돼?”
손이 내 휴대폰을 향해 있었다. 직접 확인해 볼 수 있겠냐는 태도였다.
“…….”
얼떨결에 휴대폰을 내밀었다. 고정원은 그걸 받아 들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연락망을 하나씩 체크했다. 새로운 흔적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조용히 돌려주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앞서가는 고정원의 뒤를 따랐다.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왠지 모를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검사하는 고정원이나 순순히 보여 주는 나나.
“어, 우리 여긴데……!”
들어가야 할 상영관 앞이었다. 스쳐 지나는 바람에 불러세웠다.
“그만 보고 나가. 다른 짓만 하고 싶어지니까.”
덧붙인 고정원은 무심하게 앞서나갔다. 나도 속으로 그 말에 동의하며 그 뒤를 따랐다. 더는 밀폐된 장소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네마를 벗어난 고정원의 기분이 한층 저조해진 걸 눈치챘다.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이었다. 단순히 생각에 잠긴 건지 고의적인 건지 구분이 어려웠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실없는 농담을 건네도 형식적인 웃음조차 볼 수 없었다.
“커피 마시고 들어갈까?”
“아니.”
듣기 좋은 저음이 짧게 대꾸했다.
“그럼 뭐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내가 사 줄게.”
“그럴 필요 없어.”
심지어 이쪽을 보지도 않았다.
“…….”
어디서부터 문제였던 걸까. 짚이는 게 너무 많았다. 작은 것들이 하나씩 쌓여서 이렇게 된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고정원도 속으로는 나를 불신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행동이 수상했던 만큼 의구심을 품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당장 기분은 풀어 주고 싶었다. 나를 향해 웃지 않는 고정원을 보는 게 괴롭기도 했다.
아, 쿠폰.
돌연히 준비했던 이벤트가 떠올랐다. 고정원을 주려고 만들었던 쿠폰이 마침 수중에 있었다. 나중에 주려고 계획하고 있었지만 이런 때라면 분위기를 풀기 좋을 것 같았다. 어떻게 주면 깜짝 놀래켜 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이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고정원을 붙잡고서 말했다.
“잠깐만. 나 아무래도 커피 너무 먹고 싶어서. 잠깐만 들러도 돼?”
“그렇게 해.”
승낙을 받고 카페로 향했다. 둘이서 뒤편에 있는 카페 안으로 순조롭게 들어섰고, 나는 메뉴판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진짜 아무것도 안 먹어? 아, 에스프레소 마실래? 너 가끔씩 그거 마시잖아.”
“그냥 너 먹고 싶은 거 시켜, 인휘야.”
귀찮아하는 게 느껴졌다. 가슴이 싸해진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별거 아닌 행동에 상처를 입는 게 스스로도 황당했다. 이게 뭐 상처받을 일이라고. 안면 근육이 경직되는 느낌이 들어서 일부러 더 크게 웃으면서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주문한 커피는 금방 나왔다. 나는 몰래 가방에서 꺼내 놓은 쿠폰을 컵 홀더 위로 겹쳤다. 고정원은 연락이 왔는지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놀라게 해줄 계획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정원아, 이거 봐. 나 방금 여기서 엄청 좋은 쿠폰 받았어.”
“…….”
“완전 너 쓰라고 만들어진 거 같은데? 이거 봐 봐.”
앞으로 쿠폰을 내밀었다. 동시에 어디선가 진동음이 들려왔다.
“……잠시만.”
전화를 받으며 고정원이 양해 구하듯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하필이면 그 손바닥에 무턱대고 들이댄 쿠폰이 부딪히고 말았다. 열 장이나 되는 쿠폰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네, 말씀하세요’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멀어져 갔다. 나는 사방으로 흩어지는 쿠폰을 쫓아 허리를 숙였다.
“뭐야, 이거?”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에까지 종이가 날아간 듯했다. 안에 적힌 내용이 내용인 만큼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모른 척하고 나갈까. 충동이 들었지만 고개를 숙인 채로 가서 냉큼 주웠다.
“여기요.”
다 주운 줄 알았는데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다. 나는 벌게진 얼굴로 꾸벅 숙이며 건네받았다. 백지 부분이 위였으면 좋았으련만 ‘뭐든지 OK 쿠폰’이라고 손수 적은 글자가 보이고 있었다.
진땀 나는 시간이었다. 쏟아진 열 장을 모두 회수하고 나니 후끈 식은땀이 뱄다. 차가운 커피를 단숨에 비워 버리고 밖으로 나섰다.
“아까 뭐 주려고 한 거야?”
막 통화를 끝낸 고정원이 나를 보며 물었다.
“……아냐, 암것도.”
열기 스민 목덜미를 문지르며 어물쩍 넘겼다. 다시 꺼낼 엄두가 안 나 다음 기회에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
대꾸하는 고정원은 별로 관심 없는 느낌이었다. ‘내려갈까’ 말해 놓고 긴 다리로 훌쩍 앞서 가기에 나는 황급히 쫓아갔다.
“……누구한테 온 전화였어?”
“아버지.”
“아…….”
자세히 물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왠지 아까보다도 안색이 나빴다.
“……아!”
느닷없이 어깨가 뒤로 밀리며 통증이 일었다. 누군가와 부딪친 걸 알고 연신 죄송하다 고개를 숙였다. 추스르고 다시 앞을 보니 고정원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
보호자를 놓친 애처럼 조바심 내며 쫓아갔다. 인파 속에서 따라오든 말든 나를 챙기지 않고 가는 고정원의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이런 적은 사귄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같이 가.”
가까스로 걸음을 맞춰 나란해졌다. 거리를 떨어뜨리고 싶지 않아서 나는 용기 내 고정원의 팔꿈치를 붙들었다. 쳐다보기라도 할 줄 알았던 고정원은 큰 보폭 그대로 걷기만 했다. 서운해서 슬쩍 팔짱으로 바꿔 봤다. 여전히 신경 쓰지 않길래 최종적으로는 대담하게 손을 잡았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남들만 우리 손을 신경 쓰고 정작 고정원은 자기 잡힌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맞잡은 손은 곧 떨어질 듯 헐거웠다.
끔찍한 초조함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한 게 좋다는 걸 알았다. 감정적으로 굴면 후회만 남고 어긋나기 쉬운 법이었다.
“……기분이 안 좋은 거야?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잡은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간질거리는 말투였다. 고정원은 그제야 나를 쳐다보았다. 내려다보고선, 잘 들리지 않는 크기로 대꾸를 했다.
“신경 쓸 거 없어.”
“…….”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자주 하던 말인데도 표정과 말투가 다르니 이렇게 선 긋는 것처럼 들릴 수가 있었다.
지하 주차장까지 몇 층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잠깐만’ 하고 충동적으로 고정원을 이끌었다. 향한 곳은 부출입구였다. 밖으로 나가자 지상으로 연결되는 계단과 함께 정원 같은 협소한 공간이 나왔다.
외진 곳에서 다짜고짜 고정원을 끌어안았다. 고정원을 바깥에 세우고 안쪽에 내가 들어선 구도였다. 체격 차이로 가려지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씩 밖에서 이런 식으로 스킨십을 했다.
“정원아.”
부르며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좋은 냄새를 들이키면서 등을 어루만졌다.
“너 왜 그래…….”
“…….”
무서워서 더는 아무렇지 않기가 힘들었다. 내가 저지른 잘못도 무서웠고 무엇보다 고정원이 평소와 다르게 구는 게 무서웠다. 가식이라도 좋으니까 다정하게 대해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기야.”
평소처럼 좋아해 주길 기대하며 낯뜨거움을 무릅쓰고 불렀다. 그런데 뱉어 놓고 보니 너무 무뚝뚝했다. 그 상태에서 얼굴을 들어 올려다봤다. 한 번 더 나직하게 속삭였다.
“응? 자기야…….”
감정이 담겨선지 부르는 것만으로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바투 붙인 몸에 체온이 오르며 근육들이 수축했다. 의도치 않게 몸을 비비적거린 것처럼 돼서 약간 민망했다.
“…….”
얼마간 반응이 오지 않았다. 조금씩 걱정이 스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하.”
고정원이 고개를 돌리며 헛웃음을 뱉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근육이 조였다. 나는 멍청하게 입 벌린 채 올려다봤다.
“너 지금…… 네가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지.”
“……어?”
닿는 시선이 형용할 수 없이 이상야릇했다. 이런 표정을, 이런 목소리를 나한테 왜 내는 건지 몰랐다. 발가벗기는 듯한 시선에 냉기와 소름이 번갈아 내달렸다.
“다른 남자 집에서 태연하게 자기야 불러 가며 안심시키고.”
“…….”
“밖에서 또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야, 몸 달은 것처럼 아양 떠는 거.”
“…….”
“솔직히 좀 낯선데.”
머리가 하얘졌다. 우발적으로 한 걸음 물러나자 무방비했던 팔뚝이 콱 붙들렸다.
“근데 기막힌 건 내가 그때마다 휘둘린다는 거야.”
“어…….”
신음처럼 목울음이 새어 나갔다.
“인휘야, 네가 그럴 때마다…….”
“…….”
“내가 정신을 못 차려.”
……아.
발이 어딘가로 움푹 빠질 것 같았다.
“어제 너 어디 있었는지 알아.”
쿵, 하고 귓가가 울리며 상체가 휘청였다. 심장이 떨어진 건지 내가 떨어진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덜덜거리며 몸 전체가 흉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뭐 했어?”
바람피운 거냐고 묻는 듯한 추궁에 머릿속이 무너졌다.
“내가 거기 왜 갔냐면…….”
횡설수설하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이희운이 내게 했던 배려와, 내가 도와줄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 어떤 흐름으로 이희운네 집까지 가게 됐는지, 이유를 들어 최대한 합리적으로 말하려 애썼다. 중간중간 사과도 했다.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면서 순서가 뒤엉키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있는 줄도 모르겠어서 그저 빌고 또 빌었다.
“그래서 키스했어?”
키스라는 단어에 발작하듯 터졌다.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왈칵 눈물이 터졌다. 원하는 대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애탔다.
“나는, 정말로 사고 때문에 갔다가…… 너한테 거짓말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거 알아?”
고정원은 끝까지 듣지 않고 끼어들었다.
“나는 네가 이희운 대신 다친 게 네가 당한 짓만큼이나 화가 나.”
“…….”
“둘이 왜 그렇게 애틋하지.”
“그런 거 아니야!”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크게 외쳤다. 여기가 밖이라는 걸 재차 인식하고 나서야 소리를 낮췄다.
“정말 아니야, 그런 거. 나는 이희운이 나를 따르고 그냥 친동생 같아서 챙긴 거지 애틋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정원이 너가 하라는 대로 다 피하다가 어제만 어쩌다……. 믿어주면 안 될까? 정말, 다 사고였어 그냥. 내 의지랑 상관없이 일어난 사고는 나도 어쩔 수가 없잖아.”
“확실해? 키스도 사고인 거?”
나는 턱이 빠져라 끄덕거렸다.
“내가 일어섰는데, 아니다, 바닥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얼마나.”
뭘 묻는 건지 알아듣지 못하다가 서둘러 답했다.
“그냥 몇 초간?”
“상상하면 돌 거 같으니까 네 입으로 설명해. 어디까지 어떻게 했는지.”
“이, 입술을 빨아 당겨서, 내가 바로 밀치고…….”
“옷 벗겼어?”
낮게 윽박지르며 고정원이 나를 가까이 끌었다. “그래?” 아프게 쥐어 오는 힘과 흥분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런 일 없었어 진짜로. 그냥 내가 밀어 내고 때려서, 때리고 나는 곧장 뛰쳐나와서…….”
말을 끝맺기도 전에 고정원이 움켰던 내 팔을 놓았다. 돌아서서 빠르게 걷는 뒷모습은 분노에 휩싸인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불안정한 걸음으로 뒤쫓았다.
“저, 정원아.”
맨날 나란하던 걸음이 오늘따라 너무 빨랐다.
“어디 가……!”
부르자 계단을 향하던 고정원이 휙 돌아보았다.
“너 지금 이러는 이유에 이희운도 포함되는 거면 확실하게 말해. 이희운한테 갈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맞게 이해했어?”
차분한 분노가 느껴졌다. 나는 넋이 나가서 올려다보았다.
“……그런 생각 한 적도 없어.”
이마에 불거진 핏대가 보였다. 한창 섹스 중에 튀어나오던 것보다 위협적으로 두드러져 있었다. 고정원이 제 큰 손으로 눈가를 가리자 터질 것 같던 혈관도 가려졌다. 한숨을 내쉬고 손을 떼어 냈을 땐 그새 눈자위가 충혈돼 있었다.
“집에 가서 기다려.”
“같……이, 같이 가 나도.”
닿을 듯 말 듯 슬며시 팔을 붙들고 부탁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화내도 좋으니까 같이 있고 싶었다.
“그냥 말 들어.”
고정원은 그런 내 손을 붙잡아 제자리에 돌려 놓았다. 나는 위축되면서도 지지 않고 거듭 고정원의 팔에 손을 올렸다. 제발, 하고 다그친 고정원이 완전히 지친 기색을 내비쳤다.
“이러다 정말 정신 나간 짓 할 거 같아.”
그러니까…….
“가, 인휘야.”
“…….”
거스를 수 없는 명령을 받고 제자리에 묶였다. 고정원이 계단을 올라 모습을 감출 때까지, 나는 저주에 걸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 *
벌을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내가 싸우면서 했던 나쁜 행동들을 이제 와서 돌려받는 것 같다는. 그런 불길하고도 서글픈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때는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터질 것 같은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거리를 두고 싶을 뿐이었다. 고작 며칠을 못 참아서 미행하고 강제적으로 약속을 어기고……. 고정원의 그런 행동들은 감정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싶을 뿐이라고 여겨졌다.
고정원은 그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렇게 미칠 것 같았을까. 이렇게 정신이고 몸이고 너덜하게 뜯겨 나가는 것 같은 심정이었을까.
“읏…….”
멀어지는 뒷모습을 쫓으며 애가 끓었다. 기절할 지경이었다. 속이 문드러진다는 말의 실제적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정말로 아프게 문드러지고 있었다.
아…….
사람들 사이로 조금만 가려져도 안타까웠다. 목을 한껏 뺐다. 한눈팔다 행방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집중했다. 남들보다 넓은 등은 찾기는 쉬웠지만 속도 차로 거리가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정원아……. 정원아…….”
혼자만 들릴 목소리로 쉼 없이 불렀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도를 외듯 중얼거리게 됐다.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을 때도 멈춰지지 않았다. 뭐야, 불쾌하게 내뱉는 사람을 보지도 않고 죄송하다 중얼거리며 고정원만 쫓았다. 이러다 아주 놓쳐 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차에 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고정원은 밖으로 나와 무턱대고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었다. 목적지가 있다기보다는 폭주하듯 닿는 대로 걷는 것처럼 보였다.
열심히 뒤따르던 중 사거리에서 발이 묶였다. 고정원은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차들이 연달아 지나치며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초조하게 발을 구르다 차들이 지나간 횡단보도를 무단으로 건넜다.
쫓으면서도 쫓기는 것처럼 불안했다. 사라졌을까 봐 무서웠는데 고정원은 다행히 보이는 곳에 머물러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횡단보도였다. 가만히 신호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며 바짝 목구멍이 조였다. 눈에 보이는데도 없어질 것처럼 불안해서였다. 겨우 따라잡았을 때는 헉헉거리며 숨이 찼다.
“……원아.”
개미 목소리로 불렀다. 부르고 나서 팔에 손을 올렸다.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취한 행동이었다.
“나 좀, 봐 줘.”
소맷자락을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우두커니 서 있던 고정원은 성가신 듯 손길을 걷었다. 매달려 있던 손이 초라하게 떨구어졌다.
다시 시도해도 결과는 같았다. 눈앞에 선 건장한 몸은 마치 거대한 벽 같았다. 그 자체로 거절을 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자극해 봤자 상황이 악화될 뿐이었다. 매달리기보다는 하라는 대로 떨어졌다가 가라앉은 뒤 대화든 사죄든 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몰랐다. 나로서도 그런 이성적인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머릿속엔 온통, 여기서 놓치면 큰일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좀만 더 쫓아가면. 좀만 더 용서를 빌면. 그러면 고정원이 마음을 풀고 나를 안아 줄 것 같은 희망도 있었다. 그런 간사한 마음이 드는 건 현실 부정이기도 했다. 나는 고정원이 이렇게 나를 외면하고 거절하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직접 보고 겪으면서도 잘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
손을 쳐다보다가 팔을 뻗었다. 이번에도 거절당할 걸 예상하고 한 행동이었다. 커다란 손에 내 손을 살짝 넣었다. 좁은 면적을 움켜쥔 손이 수전증처럼 떨렸다.
민망할 정도의 손 떨림 때문인지, 고정원은 가만히 있었다. 내치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거절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닿아 있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고정원은 긴 다리로 훌쩍 앞섰다. 내가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듯한 태도였다. 미약하게나마 부풀었던 희망이 우스울 정도로 쉽게 꺼졌다.
빠른 걸음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고정원이 여유 있게 몇 걸음 나아갈 때 나는 뛰다시피 해야 속도를 맞출 수 있었다.
“잠깐, 잠깐만. 나 할 말 있는데…….”
막 들어선 골목에서 입을 뗐다. 크게 부르지 않아도 들릴 만한 간격이었다. 주변에 소란한 방해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 말 있다고, 정원아.”
대담하지 못한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했다. 무시와 거절이 주는 타격을 몇 번이나 겪은 탓에 겁먹을 수밖에 없었다.
“…….”
안 들리는 건가 싶게 무반응이었다. 다가가서 냅다 손을 잡았다. 남들 앞에서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벌써 몇 번이나 하고 있었다.
“너 걸음 원래 이렇게 빨랐어? 진짜 쫓아가기 힘들…….”
끝까지 내뱉기도 전이었다. 손이 풀렸다. 걸음을 멈춘 고정원이 나를 내려다봤다.
“뭐 해, 너 지금.”
“…….”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힘준 입술에 경련만 일었다. 기습당한 것처럼 아무 말도 안 나와서 그냥 올려다봤다. 마주 보고 있는 몇 초가 박제된 것처럼 길었다.
“그만 따라와.”
짧은 경고를 남기고 고정원은 돌아섰다.
“…….”
따라가야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자리에 박혀 있었다. 더 차가운 눈초리를 받으면 어떡해야 할지. 이것보다 더 낯선 모습을 보게 되면 어떡할지. 생각하자 뒤따라 갈 기세가 단번에 꺾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뛰어갔다. 여기서 고정원을 놓치는 것보다 무서운 건 없다고 생각하니까 또 쫓아갈 힘이 났다.
그새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니겠지. 안달하며 내다보자 김빠질 정도로 쉽게 포착됐다. 고정원이 키가 커서 오늘 만큼 다행인 적이 없었다. 훌쩍 튀어나온 뒷모습을 지표 삼아 주저 없이 나아갔다.
제법 거리를 좁혔다. 가까워졌지만 애타는 마음은 여전했다. 어디까지 갈 생각인지 궁금했다. 내가 지금 따라가고 있는 건 알고 있는지. 아니면 알고 있어서 이러는 건지. 고정원의 생각은 가늠도 안 되고, 허덕이며 쫓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발목을 접질렸다.
“……으악!”
층계가 꽤 남은 계단에서 호되게 엎어지고 말았다. 고정원만 보며 부주의하게 걷던 게 사고 원인이었다. 화려하게 나동그라진 탓에 모두 이쪽을 주목했다. 계단을 오르던 사람들, 앞을 지나치던 사람들.
그 사이에서 고정원만 유유히 나아가며 돌아보지 않았다.
“…….”
추하게 넘어졌으니 차라리 안 본 게 낫다. 자위하듯 생각하며 엎어진 몸을 일으켰다. 시멘트 바닥에 쓸린 무릎이 쓰라려 끙, 앓는 소리가 났다.
손바닥도 무릎도 까진 상처로 피가 스몄다.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쏟아지는 시선과 관심이 느껴졌다. 창피했지만 먼지만 털어 내고 일어나 걸음을 재촉했다. 아파 죽겠는데 아파 할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 고정원을 놓치면 안 됐다.
절뚝거리다가 나중에는 멀쩡하게 걸었다. 대로를, 골목을, 횡단보도를, 공원을. 많은 곳을 지나쳐 갔다.
고정원의 걸음은 처음보다 많이 느려져 있었다. 그래서 나도 조금이나마 더 수월하게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뒷모습이라도 기색을 살피며 걸을 수 있는 게 지금으로선 고마운 일이었다.
넘어질 때 다친 부위들이 욱신거렸다. 아마 지금 고정원은 이런 하찮은 상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프겠지 싶었다.
“……정원아.”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서 불렀다.
“고정원!”
크게 부르자 지나치던 사람들이 돌아봤다. 고정원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걸어갈 뿐이었다. 기죽을 만큼 완벽한 뒷모습을 보며 공기가 차단된 것 같았다. 아득하고, 막막했다.
오늘 따라 날씨가 유난히 좋았다. 공기는 맑고 하늘은 화창했다. 주말의 번화가는 채도 높은 풍경들 속에서 평화로운 소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일상적인 경치와 소리와 냄새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잠긴 목을 조용히 가다듬었다. 나는……. 뒷말이 잘 나오지 않아 똑같은 소리를 한 번 더 반복하게 됐다. 땀인지 눈물인지, 얼굴에 묻은 정체불명의 물기를 닦아 내며 다시 입을 벌렸다.
“나는 진짜 너 사랑해.”
주위에 누가 있건 말건. 혐오스럽게 보건 말건. 늘 신경 쓰던 타인의 시선 같은 게 처음으로 안중에도 안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정말로 하나도 상관이 없었다.
“……너무 많이 사랑해.”
속 타고 애처로운 기분이 들었다. 제대로 알려 주고 싶은데. 뻔한 말들과 볼품없는 표현들만 나와 힘없이 흩어졌다. 마음을 똑바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때 고정원이 우뚝 멈춰 섰다.
놀란 나도 멈춰 섰다. 전방만을 주시하며 뜨겁게 타는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감정을 삭이는 걸까. 등이 느리게 부풀었다 꺼지는 게 보였다. 나는 아주 미묘한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끌어모았다. 눈시울이 다 시큰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끓는 감정을 삼키며 속으로 부탁했다. 고정원은 아직 그 자리 그대로였다. 금방이라도 이 쪽을 돌아볼 것 같아서 울렁거렸다. 손을 꽉 쥐고 있다가 참지 못 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하지만 모든 건 간절함에서 비롯된 착각일 뿐이었다. 고정원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넓은 어깨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며 시야에서 가려졌다.
“…….”
땅에 붙들린 것 같았다. 아주 땅속으로 처박힌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고정원의 뒷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됐다. 그걸 지켜보면서도 나는 자리에 서 있었다.
계속 그렇게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의 방해물이 된다는 걸 깨닫고 구석을 향했다. 거기서도 가만히 서 있는 게 전부였다. 눈을 뜨고 있어도 시야에 맺히는 상은 사람도 풍경도 아니었다. 앞을 보고 있었지만 인상들이 흐릿했다. 아무것도 안 보고 있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아.
갑작스레 한기 같은 차분함이 찾아왔다. 고정원이 나한테 아주 많이 화났고, 어쩌면 이미 정떨어졌을 수도 있다는 현실이 조금씩 받아들여지는 듯했다.
쫓아가서 빌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정말로 딱 한 번만 더 거절당하면 그때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진심으로 죽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죽고 싶다니. 미쳤다고 생각하며 고개 저었다. 내가 얼마나 나약해져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고를 몰아갔다.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감정이 격해져서 그렇지 차차 풀어질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애써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니 숨 쉬는 게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서 있던 곳을 벗어났다. 왔던 쪽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 이제, 고정원이 했던 말대로 집으로 가서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가까운 역을 찾아보려 했다. 휴대폰을 켰는데 불현듯 어지러웠다. 기진맥진한 것처럼 팔다리에 힘이 없었다. 나는 본능에 이끌리듯 이어진 골목으로 터덜터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 데나 구석진 건물의 외곽에 걸터앉았다.
“후…….”
쉬다 일어날 생각으로 벽에 머리를 기댔다. 눅눅한 피로감이 몰려와 눈을 감았다. 무릎을 가슴에 붙여 옹송그렸다. 얼굴을 파묻자 왠지 안락하게 느껴졌다.
용서가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동안은 콩깍지가 씐 거고 이번 일로 벗겨지게 된 거면. 그래서 내가 싫어졌으면 어떡해야 하지.
밀려드는 생각만으로 끔찍했다. 나는 손안의 팔을 힘껏 쥐었다.
집에 가자. 얼른 가서 고정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그래서 고정원이 오면 문 앞에서 맞아주자.
의지를 다지면서도 몸은 자리에 그대로였다. 근육이 빠져나간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한동안 쭉 그러고 있었다. 무기력한 상태가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는지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다. 머릿속은 흐름이 끊긴 것 같았다. 움직이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버리는 쪽이 쉬웠다.
속절없이 시간들이 지나갔다. 어느덧 피부에 닿는 바람이 서늘해져 있었다. 웅크린 자세로 있었던 만큼 등이 뻐근해진 것도 느꼈다. 그 통증만으로 얼마나 오래 버티고 있었는지 짐작이 갔다. 고개를 들자 거리는 붉게 해가 저무는 중이었다. 정말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였다.
집에 가도 되는 건가.
가야겠다 했던 의지가 이제는 의구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
툭툭, 어깨를 두드리고 일어났다.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뻐근함을 달랬다. 갑자기 불안감이 가슴께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고정원이 집에 먼저 와 있으면 어쩌나, 걱정이 든 까닭이었다. 마음이 조급해지자마자 잽싸게 건물을 빠져나갔다.
골목에 진입한 후였다. 누군가와 부딪쳤고, 나는 죄송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 보려는데 팔이 아플 만큼 세게 붙잡혔다. 놀라서 돌아보자 기우뚱, 몸이 쏟아졌다.
엄청난 힘이었다. 어어어, 하며 부지불식간에 딸려 가고 있었다.
“…….”
잔뜩 굳어진 입매가 보였다. 그리고 날카로워진 눈매도. 나는 고정원을 허상 보듯이 봤다.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갔다가 되돌아온 건가. 설마 이 주변에 계속 있었던 건 아닐 텐데. 우연히 마주친 걸까. 여러 가정이 떠올랐지만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았다.
하늘은 노을로 물들었고, 우리는 왔던 거리를 되돌아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끌고 가듯 하던 고정원도 지금은 손을 붙들고 있었다.
“…….”
나는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장면이 굉장히 감격적으로 느껴졌다.
“타.”
붙잡힌 손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고정원이 명령했다. 앞을 보니 택시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고정원은 열린 문으로 나를 먼저 태웠다. 그리고 차에 올라 ‘A타워 앞으로 부탁드립니다’ 하고 행선지를 말했다.
푹신한 시트가 등에 닿자 어깨에 힘이 빠졌다. 왔을 때처럼 한참을 걸어서 되돌아갈 줄로만 알았다.
택시가 출발하고, 막힌 걸 감안해도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로 이동해 보니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다. 걸어서 쫓아갈 때는 정말로 먼 거리처럼 느껴졌었기 때문에 어쩐지 허무하기도 했다.
곧장 쇼핑센터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제야, 우리 차에 탈 수 있었다. 차에 오름과 동시에 익숙한 냄새들이 반겨 주었다. 가죽 시트 냄새, 차량용 방향제 냄새. 그 익숙함에 안심이 됐다.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실감이 났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오래 못 갔다.
차는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빠지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막힘없이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운전하는 옆모습을 살피듯 힐끔거렸다. 전방을 향한 무감한 눈과 아직까지도 굳게 당겨진 턱이 보였다. 차 내부는 낮은 주행음만 울렸다. 라디오나 음악 같은 소음이 없어 숨소리를 내는 것도 거북했다.
물어볼까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방금 막 이상함을 깨달은 척 능청스럽게 물었다.
“어, 왜 우리 여기로 왔지? 이쪽 집 가는 방향 아니지 않아?”
“…….”
몇 분을 기다려도 묵묵부답이었다. 더 물어서 보채 봤자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나도 입을 다물었다.
차 안은 고요했다. 주행하는 동안 고정원은 소리라는 걸 내지 않았다. 자동으로 운전되는 차 안에 혼자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서 숨도 안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흐리멍덩하게 창밖을 내다봤다. 무념무상이었다. 한계 지점을 넘어 탈진된 건지, 감정에 쏟을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멀뚱멀뚱 스치는 경치를 바라보았다.
울창한 산림이었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장면은. 잠든지도 몰랐다가 깜빡 눈을 뜨자 창밖 경관이 바뀌어 있었다. 언제 이렇게 구석까지 온 건지 몰랐다. 지나고 있는 곳은 전원 풍경의 좁은 도로였고, 바다가 가깝게 펼쳐져 있었다.
밤이 되어 어둑어둑했다. 밖을 살피다 말고 나는 밑이 아릿한 걸 느꼈다. 오줌이 꽉 찼다는 신호였다. 중간에 화장실 한 번 들르지 않았으니 마렵지 않을 리 없었다.
“…….”
고정원은 묵묵히 운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오줌보가 터질 것 같은 지경인데도 세워 달라 소리가 안 나왔다. 다리에 힘을 주고 발을 초조하게 문질렀다. 손바닥을 손톱으로 꾹꾹 누르며 참다가 정말 일 치르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저, 나, 화장실 좀…….”
한적한 시골길이라 차는 무리 없이 세워졌다. 나는 안전띠를 풀고 후다닥 내려갔다. 허겁지겁, 풀밭을 향해 서서 벨트에 손댔다.
팔부터 손가락까지 저릿했다. 잘 때 베고 잔 영향이었다. 둔해진 손끝이 말을 듣지 않아 잘 풀어지지 않았다. 이러다 지릴 것 같다고 생각한 때 고정원이 다가왔다. 손을 뻗은 고정원은 능숙하게 벨트와 버클을 푸르고, 내가 어찌할 바 모르는 사이 성기를 꺼냈다. 붙들어 조준까지 시켜 주었다.
더는 못 참았다. 방광에 가득 차 있던 소변이 우렁찬 소리로 터져 나왔다.
“……읏.”
입술을 말고 시선을 피했다. 차의 전조등 빛 때문에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너무 잘 보였다.
가뜩이나 많은 양은 오래도 나왔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배출되자 불가항력적으로 발끝까지 진저리 쳤다. 밀착한 온기가 한층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갈무리하고 옷을 정리시킨 고정원은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나는 고개를 떨군 채 소름 돋은 팔뚝을 문질렀다. 여러 가지가 혼합된 복합적인 감정이 스쳤다. 가끔, 고정원이 이런 식으로 배뇨 활동까지 간섭할 때마다 그랬다. 나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쩔 땐 짜증스럽기도 했다.
“…….”
근데 이번만큼은 낯 뜨겁긴 해도 싫지는 않았다. 무시받기만 하다가 다시 관심을 받은 게 기뻐서인지 심지어 약간 들뜨기도 했다. 오줌 뉘여 준 걸로 이렇게까지 기분 좋아지는 게 내가 봐도 한심하다 싶으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조금 기가 살아서 물었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
“운전…… 힘들 텐데. 괜찮은 거야? 힘들지는 않고?”
고정원은 차 문에 기대서 있었다. 연거푸 묻는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고, 조용히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걸 보는데 속이 급격히 나빠졌다. 왜 이러나 싶게 등줄기가 식고 땀이 났다.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이 심해지고 있었다. 차멀미를 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욱, 웩……!”
쭈그려앉아 구역질하자 시큼한 위액만 쏟아졌다. 차 문을 열고 나온 고정원이 옆으로 다가왔다. 몇 번 더 헛구역질을 하자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무것도 안 나올 때까지 내 등을 토닥거렸다.
“다 했어?”
묻는 말에 끄덕거렸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몸을 일으키는데 다리 힘이 풀렸다. 비틀거리는 나를 고정원이 붙들어 주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품 안에 파고들었다.
“미안해.”
감정을 억누르는 목구멍이 따끔따끔했다. 잠자코 있던 고정원은 감긴 내 팔을 떼어 내려 했다. 기척을 느낀 내가 힘주어 파고들었다. 단단한 가슴팍의 감촉이 애틋하고 아쉬웠다. 그래서 할 말을 정리할 새도 없이 비위 맞추듯 구차하게 굴었다.
“내가,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말만 해 주면 다 할 테니까, 할 수 없어도 할 테니까 그러니까…….”
“…….”
“헤어지자고만 하지 마.”
아.
말해 놓고 상기했다. 내가 예전에 고정원한테 헤어지자고 한 적 있다는 걸. 싸우는 와중에 한 말이라 진심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그런 말을 그리 쉽게 할 수 있었나 싶었다.
“제발……. 어?”
무서워서 요동치는 감정을 느꼈다.
“내가 잘할게. 한…… 번만, 한 번만 봐줘.”
북받쳐서 중간중간 끅끅거리는 소리가 섞였다. 말을 마치자 뺨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 나도 내가 우는 게 지겨워서 고정원도 그럴 거라 짐작이 갔다. 흐느낌을 멈추려고 코에 힘주어 숨을 참았다.
“내가 헤어지자고 할 것 같아?”
나지막한 물음이 파고들었다. 축축하게 잔상을 남기는 듯한 음성이었다. 스산해지는 공기를 느끼며 나는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고정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말해 봐, 인휘야. 내가 너를…….”
놔줄 것 같아?
고정원은 겨우 끌어 올리는 것처럼 말했다.
“…….”
말하는 방식도 그렇고, 예상을 벗어나는 대답 앞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대답 때문이 아니라 음산하게 도사린 기운 때문인지도 몰랐다. 습하고 침침한, 일상적이지 않은 기운.
“아직도 날 모르지, 너는.”
“…….”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너는 헤어질 수 있는 거야? 그래? 얼마간 힘들어하다가 또 다른 사람 만나고. 그 사람이랑 입 맞추고 살 맞추고, 할 수 있어, 너? 그게 가능해?”
화내고 있었다. 언성을 높이진 않았지만 차갑게 나를 힐난하고 있었다. 말하는 내용들이 귓속으로 파고들어 자리를 잡는 듯하다 우르르 와해됐다. 안심해야 하는 건지 불안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주하고 있자니 꽁꽁 얼어붙기만 했다.
“너는 나한테 헤어지자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못 해.”
그 말에는 기어이 무너지듯 가슴이 아팠다. 이미 헤어지자 홧김에 말한 전적이 있으니 죄스러웠다.
“아냐…… 왜 그렇게 말해. 나도 못 해. 예전에는 싸우다 그냥 홧김에…….”
변명 사이로 고정원이 말했다. 단호한 어투로.
“나한테 헤어지자 해도, 나는 너 안 놔.”
“…….”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너 안 놓을 자신 있어?”
컴컴한 사방에 스며들 것처럼 어두운 눈이 나를 꿰뚫었다. 나는 입술을 떨었다. 자신은 당연히 있었다. 절대로, 죽어도 놓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떨렸다. 목이 꽉 메서 말이 안 나갔다. 고정원이 화났을 때 특유의 분위기와 눈빛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대체 화나면 사람을 왜 이렇게 무섭게 몰아붙이는지 몰랐다. 조롱하듯이. 깔아뭉개듯이.
“……자신 있어.”
간신히 메인 목으로 답했다.
“글쎄. 확신이 안 드는데.”
고정원이 미약한 웃음을 흘렸다. 거기서 확 치솟는 열을 느꼈다.
“왜…… 그렇게 말하는데, 진짜.”
목소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너 신이야? 어떻게 내 마음을 아는데. 나를 그렇게 전부 다 알아? 내가 자신 있다는데 니가 뭔데. 너 나 못 믿네, 고정원. 그렇게 못 믿으면서 왜 사귀는데, 대체!”
볼품없이 사지를 떨면서도 퍼부어 댔다. 화가 나서 숨이 뜨거웠다. 서운해서 정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고정원은 가만히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눈에 힘을 주고 쏘아보았다.
“그러게. 나 너 왜 사귀지.”
“…….”
“지겹다, 너.”
방금 들은 충격적인 소리가 귓가에서 채 흩어지기도 전이었다. 고정원은 아픈 말을 차례로 보탰다.
“우유부단하고, 눈치 없고.”
“……”
“밑도 끝도 없이 사람 지치게 해.”
“……어.”
벙긋거리던 입에서 혼란한 외마디가 터졌다. 그동안 이렇게 느끼고 있었구나. 깨달음과 동시에 고정원이 뱉은 한마디 한마디가 생살에 박히는 듯했다. 유리 파편처럼 날카로운 조각이 연약한 장기를 찢어 놓는 것 같았다.
나는 발작처럼 고정원을 밀어 내고 뛰쳐나갔다. 추호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왜. 나는 너라면 다 좋은 줄 알았어?”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는데 금세 붙들렸다. 쫓아온 고정원은 나를 가슴께로 바짝 끌어당기고 낮은 음성으로 조롱했다.
“듣기 좋은 말만 해 줘야 하는데 아니라서 화나?”
마주한 얼굴을 팩 돌려 버렸다. 무서운 건지 서러운 건지, 턱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앞가림할 능력은 안 되면서 자존심은 세우고 싶고.”
“…….”
“하는 일마다 실속 못 챙기고 끌려다니기만 하면서 칭찬은 받고 싶고.”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무능력함을 지적당하는 게 괴로웠다. 발버둥치자 고정원은 내 양쪽 팔뚝을 붙들었다. 그걸로 모자라 거의 끌어안으려 했다.
“정신 빼놓고 있다 추행당하고 왔어도, 무조건 위로받고 싶고 그래?”
이런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뜨겁게 밀착하는 건가. 화가 났다. 나는 힘없는 주먹으로 가슴팍을 쳤다.
“위로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난 그냥 너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러게 하지 말라는 걸 왜 해서 그 꼴을 당해!”
고정원이 큰 소리 내자 가슴이 벌렁거렸다. 나도 눈을 질끈 감고 악다구니를 썼다.
“그럼 어떡하라고, 나한테!”
“…….”
“그렇다고 일을 안 할 수도 없는데! 나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데 어떡해. 나는, 우리한테도 최선을 다한 건데…….”
정말로 그랬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열심히 했다. 나는 고정원이 소중했고 우리가 소중했을 뿐이었다.
후두둑 눈물이 쏟아지자 고정원이 나를 끌어당겼다. 울컥해서 밀어 냈다. 밀리는 듯하다가도 고정원은 내게 달라붙었다. 입을 맞추려 들었다. 고개를 피했다. 하지 말라고 주먹 쥐어 때렸다. 힘껏 버티고 닿는 대로 투닥거렸다. 하지만 끈질기게 닿아 오는 입술을 피할 수는 없었다.
“흐음……!”
삼키려는 것 같았다. 머리통을 붙들고 허리를 감싸 자기한테 가뒀다. 나는 각도가 바뀔 때 일부러 입술을 깨물었다.
고정원은 물러나지 않았다. 광포한 흥분감이 번진 눈으로 쳐다보더니 다시 삼켰다. 반항하면 할수록 입맞춤만 깊어졌다. 입가가 아릴 정도로 파고들어 왔다. 밖이고 안이고 잔뜩 삼켜졌다.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반항을 포기했다. 발버둥을 멈추자, 파고든 입술이 겨우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음…….”
겹쳐진 두 몸뚱이가 모래사장을 뒤뚱거렸다. 아무 데도 기댈 곳이 없었다. 오로지 서로에게만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다. 그 구속감이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억지로 포개졌던 내 팔은 어느새 고정원의 허리에 감겨 있었다. 하아, 뭉쳤던 숨이 터뜨려졌다. 우리는 벅찬 호흡으로 입술을 빨아 댔다.
미워 죽겠는데도 좋아 죽을 것 같다. 부당한 모순을 느끼며 나는 음란하기 짝이 없는 행위에 동조했다. 뜨거운 입 구멍을 벌리고, 열에 달뜬 살덩이를 섞고, 솟아오르는 서로의 침을 빨았다.
진득한 미련을 남기며 떨어지자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흐린 숨을 내쉰 고정원은 귓가에서부터 뺨을 애무했다. 손이나 입술이 잠시도 떨어질 줄 몰랐다.
“……고집 세울 줄만 알지. 순진해 빠져서.”
누그러진 음성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걸 느꼈다. 입술이 젖어서는 관자놀이 부근에 달라붙었다. 갈라진 속삭임이 밤공기 중으로 흘러나왔다.
“나한테 얼마나, 어디까지 네 마음대로 해도 되는지.”
“…….”
“아직도 감이 안 와?”
취한 것처럼 달콤하면서도 혼란했다. 속도 상했다. 나는 왜 고정원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없는 걸까 자책감이 들었다. 내가 고정원을 위한다고 하는 일이 고정원은 못마땅하고 싫었다. 또 고정원이 나를 위한다고 하는 일이 나는 부담스럽고 미안했다.
알려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안 해 주고 옆에만 있어 줘도 나는 완벽하게 행복하다고. 그런 내 마음을 설명해 볼까 하다가 빈약한 어휘로 망칠 거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쏴아아, 파도 밀려오는 소리만 반복됐다. 사방의 어둠이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느껴졌다. 긴 침묵을 깨뜨린 건 이번에도 고정원이었다.
“나는 너한테 평생 이용당해도 아무런 불만 없는데.”
그게 이해하기 어려운가.
마지막은 정말로 의아해하는 중얼거림이었다.
“…….”
얼마간 숨을 죽였다. 평생이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한 무게감이 가라앉았다. 시골 밤의 어둠은 도심보다 깊었다. 낯선 장소가 주는 독특한 정취가 공기 중에 감돌았다. 우리는 한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빛에 습윤한 안광이 비쳤다. 나는 다급하게 고정원의 뺨을 더듬었다. 다행히 단단한 뺨은 물기 없이 말라 있었다.
망설이다 아주 작게 고백했다.
“……나는 너만 있으면 되는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정원은 재차 입술을 겹쳤다. 우리는 그렇게 밤바다에서 오래도록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 * *
차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낯선 곳이었다. 비스듬하게 기운 천장이 보였다. 시야가 또렷해지자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펜션으로 보이는 복층 건물이었다. 2층인 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기억이 없었다. 게다가 입고 있는 옷도 처음 보는 옷이었다. 얼마나 푹 잤는지, 옷이 갈아입혀지는 것도 몰랐다. 방에는 침대가 두 개였는데 나는 안쪽 침대에서 눈을 떴다.
고정원을 찾느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밖으로 이어진 테라스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자 거기에 누군가 있었다. 검은색 옷을 입고 있어서 얼핏 있는 줄도 모를 뻔했다.
“뭐 해?”
테라스로 들어가 물었다. 앉아 있던 고정원이 뒤돌아보았다. 다가가자 여전히 실핏줄이 터진 눈자위가 보였다.
“피곤해 보인다, 너. 운전도 고됐을 텐데 좀 자 두지.”
“나도 좀 잤어.”
고정원은 내 허리를 끌어 자기 허벅지에 앉혔다.
“근데 여기는 어디야?”
“…….”
묻는 말에 정적이 생겼다. 뭔가 또 잘못한 건가.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질문하면 고정원이 무시하는 상황이 오늘 겪었던 공포감을 상기시켰다.
“펜션.”
“…….”
“가족끼리 가끔 오는 곳인데. 조망 괜찮지?”
하마터면 쪽팔리게 울먹일 뻔했다.
“……밤이라 잘 안 보여, 바보야. 근데, 여긴 왜……?”
내 물음에 고정원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게’ 무의미하게 대꾸하며 내 팔뚝을 주무르고 있었다.
“같이 오려고 계획한 지는 꽤 됐는데. 어쩌다 보니 오늘 오게 됐네.”
같이 오려고 했다니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동안 내가 대화 중에 뭔가 놓친 게 있었나 생각하는데 고정원이 나를 일으켰다.
“배고프지. 밥 먹자.”
“어? 뭐 있어?”
고정원은 스테이크를 제안했다. 나는 좋다고 대답하고 같이 아래층을 향했다.
계단으로 내려가면서는 몇 번이나 감탄했다. 실내가 정갈하면서도 분위기 있게 디자인돼 있었다. 갖가지 다른 형태의 조명이 곳곳에 설치된 게 특히나 멋있었다. 한 면이 훤히 내다보이는 시원한 창의 구조도 마음에 들었다.
내부를 둘러보듯 구경하고 나서 식사를 했다. 식사 중 대화는 거의 없었지만 어색함이나 불편함은 없었다. 확실히 고정원은 평상시 같았다. 나도 그렇고 우리 둘 다, 휘몰아치던 감정이 거의 진정된 것 같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별 음침한 생각이 다 들었는데…….
기나긴 여정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기분과도 흡사했다. 다 지나고 나니 하루 간 벌어진 일들이 며칠에 걸친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럼 여기는 일박으로 빌린 거야?”
나는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음, 빌렸다기보다는 들른 거라고 해야 할 거 같은데. 소유지라서.”
“어? 아아.”
가족끼리 온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별장 같은 개념인 듯했다.
“그럼 여기 허락 안 받고 우리 맘대로 이렇게 써도 되는 거야?”
“늘 비어 있으니까 괜찮아.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구나.”
개인적인 휴식 공간이라는 걸 알게 되니 얼떨떨했다. 게다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면 이렇게 대단한 곳을 또 갖고 있다는 얘기였다.
“주변이 다 산인 거잖아. 공기 깨끗하겠다.”
“차로도 꽤 깊숙이 들어와야 하는 곳이라. 아무도 없어, 우리밖엔.”
“진짜?”
“어떻게 보면 고립된 느낌일 수도 있는데, 반대로 생각하면 자유로운 거니까. 계속 같이 오고 싶었어.”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자 왠지 정적으로 느껴졌다. 산중에 우리 둘만 있는 느낌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내일 월요일이네. 가기 싫다. 여기 완전 천국 같은데.”
“…….”
아쉬워서 말하자 고정원은 대꾸가 없었다.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넘기는 게 보였다. 내리깐 눈과 다물린 입이 좋지 못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과민한 탓인지 아니면 정말로 사실이 그런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나는 우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씹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흐물해진 고기를 전부 삼켜 낸 뒤에도 정신이 팔려서 새롭게 음식에 손을 못 댔다.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머뭇머뭇 이마를 문질렀다.
“저기 있잖아.”
고기를 썰던 고정원이 이쪽을 쳐다봤다. 나는 입 안에서만 맴돌던 말을 꺼냈다.
“우리 아예 며칠만 수업 제낄까?”
“…….”
“여기 너무 좋아서 그냥 가기 아쉬운데. 간만에 둘이서 느긋하게 보내도 좋을 거 같지 않아?”
지긋하게 보는 시선은 의외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심이야?”
“아, 학교 째는 건 좀 오번가.”
덥석 그러자고 할 줄 알았는데 나만의 생각이었던 듯했다. 고정원은 가만히 눈을 내리 깔았다.
“며칠간 여기서 뭐 하려고.”
“뭐…… 별거 없는데.”
무심하게 고기를 써는 모습을 보며 늘어놨다.
“평소대로 너랑 껴안고, 뒹굴고, 같이 놀고 밥도 해먹고…… 뭐 뽀뽀도 하고…….”
“……그리고?”
“……그거도 하고.”
“그거?”
“어, ……사, 랑, 나누는 거.”
그냥 섹스라고 할 걸 그랬나. 표현이 오글거리는 것 같아서 열이 올랐다. 고정원은 사람 민망하게 벌게진 얼굴을 계속 쳐다봤다. 고기도 썰다 말고, 양팔을 대기 상태처럼 테이블 위에 얹어 놓고 있었다. 재밌는 걸 구경하는 태도였다.
보기 좋은 입매가 휘었다.
“하루 종일?”
“어? ……어.”
종일.
짧고 작게 대꾸했다. 나이프를 쥔 고정원의 두꺼운 손끝이 살짝 꿈틀댔다. 완전히 생각에 잠긴 눈을 하고서, 고정원이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섹스하고……. 섹스보다 더한 것도 하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야릇해졌다.
“……너 마음대로.”
섹스보다 더한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뭐든 상관없었다.
“인휘 네 생각을 말해.”
“난, 좋아.”
불쑥 대답했다.
“내가 너한테 잘못했잖아. 뭐든 다 해 주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너랑 하는 건 무조건, 좋아. 솔직히.”
부끄러운 말을 해 놓고 올려다보았다. 깊은 눈매 속 눈동자가 보였다. 내게 틀어박혀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달그락.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는 소리가 어떤 신호탄 같았다. 냅킨을 집어든 고정원은 점잖은 몸짓으로 입가를 눌렀다. 그리고 일어나 반 바퀴를 돌아 내 옆으로 다가왔다.
“배 금방 꺼질 텐데. 더 먹어 두는 게 낫지 않겠어?”
“…….”
씰룩거리는 팔 근육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 걸로도 자극이 되는지, 덩달아 나도 허벅지가 움씰 조여들었다. 더 먹고 싶어도 이미 입맛이 사라진 걸 느꼈다.
“다 먹었어. 근데…….”
좀 씻고 오겠다고 말하려 했다. 고정원은 그새 내 입술을 빨아 당겼다. 혀가 들어와 입 안의 기름기를 쓸어 갔다. 성미 급한 손길은 팬티와 바지를 한꺼번에 벗겨 내리고 있었다.
* * *
섹스 후에는 침대에 늘어졌다. 나는 팔베개를 베고서 잠들었다가 깼다가를 반복했다. 무드등 하나만 켜져 있어 사위는 어두웠다. 고정원은 꽤 오랫동안 내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었다.
“너 왜 안 자?”
설핏 잠이 깬 나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미안. 계속 만져서 신경 쓰였어?”
손길이 떨어졌다.
“아니. 그냥 피곤할 텐데 왜 안 자나 해서.”
“이제 슬슬 자려고.”
말한 고정원은 빛을 전부 차단했다. 이내 잔잔하게 흐르던 음악까지 끄자 방 안은 순식간에 까맣고 조용해졌다.
“잘 자.”
인사한 고정원이 이마에 뽀뽀를 했다. 나는 굳이 끌어당겨 입술에 입맞췄다. 어제는 찔려서 차마 하지 못했던 굿나잇 키스였다. 흐음,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파고들었다. 다리 한 짝을 들어 턱 겹쳐 올리자 울림통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얼마 안 가 고른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들었다.
“…….”
번쩍, 눈이 뜨인 건 새벽녘이었다. 나는 명치에 걸린 숨을 깊게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하아……. 가파르게 차올라 헐떡거리고 있는 호흡이 느껴졌다. 울컥거리며 북받친 울음도.
“어디 아파?”
묻는 목소리에 놀라서 옆을 봤다. 곧 침대 옆의 등이 켜지며 시야가 환해졌다. 고정원의 걱정하는 얼굴이 밝은 빛에 드러났다. 어쩐지, 조금도 잠들지 않았던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직까지 안 잤던 거냐고 물어 보려다가 이마를 문질렀다.
“아니, 아픈 거 아니야…….”
깨기 직전 악몽을 꿨다. 꿈에서 나는 엄마를 쫓고 있었다. 혼잡한 거리에서, 불안하게 몇 번이고 엄마를 부르며 따라갔다. 잡힐 듯 말 듯해서 애가 탔다. 쫓아가느라 넘어졌지만 엄마는 돌아보지 않았다. 엄마의 옆에는, 손을 붙잡은 누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울부짖어도 통하지 않아서 얌전히 쫓아가고 또 쫓아가기만 했다. 깰 무렵에는 어쩐지 눈앞의 등이 고정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
절망스러운 느낌이 남아 있었다. 현실로 돌아왔는데도 꿈에서 느꼈던 서러움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아마 오늘 고정원을 쫓아다녔던 게 영향을 미친 듯했다.
“악몽 꿨어?”
묻는 말에 나는 순순히 그렇다고 답했다.
“……나 나왔어?”
그 질문에는 솔직해지지 못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엄마가 나온 거 같은데…….”
그리고 열없이 웃어 보였다.
“내가 불렀는데도 안 쳐다봤어. 어렸을 때 그런 적 있었거든. 사람 많은 장소에서 엄마 손 놓쳤는데, 그냥 가시더라고. 나 그날 처음으로 미아보호소 가 봤는데……. 그때 꿈 꿨나 봐.”
“…….”
괜히 말했나. 뱉어 놓고 나니 청승맞아서 뺨을 긁적였다.
“오늘 많이 힘들었지.”
진지하게 묻는 말에 반사적으로 웃음이 나왔다.
“무슨……. 너야말로 힘들었지, 나 땜에.”
말하면서 울적한 느낌이 들었다. 다 해결된 마당에 그럴 이유가 없어서 이해되지 않았다. 이미 몰아친 감정은 한바탕 휩쓸고 다 지나갔는데. 맛있는 저녁을 먹었고, 기분 좋게 섹스도 했고, 잠들기 전까지 분위기도 좋았는데.
출처 모를 우울감에 잠겨 나는 이불자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떡할지 모르겠어.”
고정원이 덤덤히 내뱉었다.
“후회돼.”
“……뭐가?”
“너 상처 준 거.”
오늘 했던 말과 행동들을 곱씹느라 잠을 이루지 못한 듯했다. 그래서 그랬구나. 이제야 어렴풋이 느껴지던 고정원의 가라앉은 기운이 이해됐다. 때린 놈은 다리 못 뻗고 잔다는 말처럼, 그럴 만한 상황이었지만 화내놓고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너도 나한테 상처받아서 그런 거잖아. 괜찮은데…….”
내가 중얼중얼 말을 보태자 고정원은 침묵했다. 나는 얇은 이불의 촘촘하게 짜인 조직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보는 걸로 모자라 손으로 만지며 붕 뜬 간격을 기다렸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주고 싶어.”
“…….”
“편하게 해 주고 싶은데…….”
아랫입술로 손가락이 올라왔다. 고개를 들면서 말랑한 살이 꾹 눌렸다. 나는 희미하게 불안감을 느꼈다. 혹시 지금도 이희운이 나한테 한 짓을 떠올리고 있는 건가 싶어서.
“어떡하지.”
말하는 음성이 정말 갈피를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왜?”
“네가 다른 사람한테 곁을 내주는 게 싫어.”
“……”
“누가 널 알고, 만지고, 그렇게…….”
어금니를 꽉 무는 것 같았다. 튀어나오는 턱 근육이 보였다.
“다른 건 다 참는데 그건 안 돼.”
마주한 눈이 흐려졌다.
“……너 여기 가두고 싶어져.”
목구멍 안에서 삭이듯, 소리가 울렸다. 단지 겉으로만 격정적이지 않을 뿐이었다. 감정적으로 완전히 휩쓸린 게 느껴졌다. 놀란 나는 엉덩이를 떼고 상체를 들었다.
“야…….”
혼란스럽게 부르며 고정원을 안았다.
“왜 그래 너…… 바보야, 너 진짜 왜 이래…….”
가슴팍에 끌어안고서 토닥토닥 타일렀다. 무서웠다. 무서운 생각에 사로잡힌 고정원이 무서웠다. 정말로 괴로워 보여서, 정말로 원하는 것처럼 보여서 무서웠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몰랐다.
“너 진짜, 과해, 너무. 정말, 내가 뭐라고…….”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예전에 싸우면서 들었던 비슷한 말도 생각났다. 감정이 격해지면 고정원은 이런 생각에 휩싸이는 모양이었다. 대체 내가 뭐라고 이런 생각을 갖는지 몰랐다. 고정원은 잠시 내 목덜미에 파묻혀 있었다. 언제나처럼 냄새를 맡는 것 같았다.
“나는 너만 중요해졌어.”
뱉어내는 숨결이 소름 돋게 뜨거웠다.
“네가 이렇게 만들었어.”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어떻게 좀 해 줘.”
체온 높은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자기 뺨에 얹었다. 뻔뻔스러우면서도 애절했다. 정말로 그랬다. 태연한데 또 조급했다. 나도 뜨거워져 있었다. 나를 원한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그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험악해진 숨결을 섞으며 옷을 벗었다. 부둥켜안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생각하면서도 나는 요구대로 성기를 만져 주었다. 가슴팍도 팔뚝도 목덜미도, 전부 쓰다듬었다. 고정원은 일일이 반응했다. 꿈틀거리고. 거칠게 신음하고. 나를 붙들었다.
“앗, 흐앗.”
아직 뒤가 촉촉했다. 성기를 왈칵 삼켰다. 안쪽 살들이 일제히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따뜻한 살덩이에 찰싹 붙어 꼭꼭 물어댔다. 그걸 느끼는지 고정원이 강하게 전율했다. 나를 끌어안고 쳐다봤다. 열에 들뜬 눈으로 관찰했다. 그리고 뜨거운 숨을 가져다 댔다. 아주 느리게 입을 맞췄다. 감촉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으응……!”
나는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앉아서 다리를 꽉 휘감고 있었다. 흣, 흣, 울어 대며 엉덩이도 조였다. 큰 움직임은 하나도 없었다. 그냥 서로 바싹 끌어안기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까무러칠 것 같았다.
“아, 좋아.”
탄탄한 상체를 끌어안았다. 좋다고 연거푸 말했다. 좋으니까 자꾸 나왔다. 흥분한 고정원이 내 살결을 쓰다듬었다. 절로 허리가 움직이며 앞뒤로 문질러 댔다. 큰 손이 머리를 감싸 왔다. 눌러서 더 꽉 끌어안게 만들었다. 고정원은 앉은 채로 움직였다. 거의 비비는 수준의 마찰이었다. 꽉 문 상태에서 진동만 주는. 하지만 우리는 그걸로 거의 동시에 사정했다.
“하…….”
쏟아 내고 난 뒤였다. 침대 맡에 등이 닿았다. 내려다보는 고정원이 보였다. 많이 흥분했었는지 울고 난 것처럼 눈이 발갰다. 언뜻 절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내가 좋을까.
이렇게 좋으면서 오늘 낮엔 어떻게 그렇게 무시했나 싶었다.
“…….”
나는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다. 마음이 몰랑몰랑했다. 아까 밥 먹다 말고 섹스했을 때랑은 또 달랐다. 지금이 훨씬 좋았다. 우리가 온전하게 통하는 것 같았다. 고정원도 그렇게 느끼는지 손끝 하나까지 애틋했다.
“근데. 솔직히 너 진짜 너무했어.”
“응?”
속말이 스스럼없이 튀어나왔다.
“낮에 너 내가 따라가다 넘어진 거 봤지. 어떻게 그걸 그냥 가냐. 완전히 떼구루루 뒤집어졌구만.”
투정 겸 농담 겸 뭐 그런 의미였다.
“미안해.”
고정원이 진지하게 사과했다. 상처가 난 손바닥에 입술을 갖다 대기도 했다. 누울 자리 봐 가며 발 뻗는다고 했다. 가볍게 꺼낸 말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괜히 울컥거렸다. 꾸역꾸역 억눌렀던 섭섭함이 형태를 갖추고 터져 나왔다.
“……나보고 지겹다고 하고.”
“……미안해.”
“눈치 없다 하고…….”
“미안. 잘못했어.”
죄스러운 표정으로 사과가 이어졌다. 기계적인 말이 아니었다. 진심이 스며 있었다. 고정원은 일부러 내 칭찬도 했다. 바닷가에서 했던 폭언을 덧씌우듯이. 사소한 것까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몇 개는 억지라 웃음이 터졌다. 아무튼 풀어 주려고 갖은 애를 쓰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방 안에 있는 욕조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서 몸을 겹쳤다. 욕조 주변으로 동그랗게 조명이 밝혀져 있어 무드를 즐기기에 딱 좋았다. 나는 분위기에 취해 들떴다. 젖어서 미끄러운 손을 잡았다가 뺐다가 장난을 쳤다. 고정원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를 꽉 끌어안고 치대는 응석까지 부렸다.
“……근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길고 굵은 손가락을 붙잡고서 물었다.
“그거보다 더한 게, 뭐야?”
“그거?”
머뭇거리다가 섹스, 하고 작게 덧붙였다. 고정원은 묻는 게 그거였냐는 듯이 아, 하고 싱거운 외마디를 뱉었다.
“그러게. 뭘까.”
“…….”
알아맞혀 보라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자기도 궁금하다는 투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돌아보았다.
“네가 하자며.”
따지자 고정원은 젖은 속눈썹을 밑으로 포갰다 떴다. 기다란 눈매 아래로 눈동자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흐려졌다.
“그냥 가끔 나 혼자 그런 생각해.”
너랑 섹스보다 더한 게 하고 싶다고.
말해 놓고 반응을 살피듯 내려다보던 고정원은 이내 내 귓등이 뭉개지도록 입술을 얹었다.
“…….”
나는 이제 와서 말의 함의를 되짚어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렇게, 사람을 쥐어 짜내고 삼킬 것처럼 해 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게 어찌 보면 기함할 일이었다. 날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거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따지려다 말았다. 손가락을 놓자 이번에는 고정원이 얽으며 붙들었다.
“같이 알아볼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내키지 않아.”
“왜?”
고정원이 웃으면서 물었다.
“평생 숙제 될 것 같아.”
일부러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인상 썼다. 고정원은 내 허벅지를 주물렀다. 야한 짓을 하며 집적거리고 싶은 듯했다. 나는 양쪽 무릎을 끌어안고 모르는 척했다.
밑으로 들어온 손이 성기에 닿았다. 화들짝 놀라서 으아, 소리쳤다. 들러붙는 몸을 밀어 내자 욕조 밖으로 물이 넘치며 튀었다. 움직임이 예상 가능한 뻔한 방어와 뻔한 공격이 시작됐다. 키득거리며 주고받는 장난은 씻는 내내 이어졌다.
* * *
통유리로 일광이 침투했다. 마치 자연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았다. 어디를 봐도 눈이 아프게 부실 정도로 밝았다. 거실 탁자 위로는 갓 만들어 따끈한 음식들이 올라와 있었다.
“푹 자지. 밥은 대충 해서 먹어도 되는데…….”
자는 동안 혼자 만들어 놓을 줄은 몰랐다. 가짓수도 너무 많아서 황송했다. 양식에서부터 한식까지, 넉넉한 양을 보며 한 끼에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다.
“이리와. 먹게.”
대단해서 앉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잡아당겨지고 나서야 나는 러그 깔린 바닥에 엉거주춤 자리 잡았다.
고정원은 나란히 앉아 있다가 한 번 더 자리를 옮겼다. 등 뒤로 바투 붙는 체온이 느껴지고, 탄탄한 몸이 겹치는 게 느껴졌다. 의도하지 않게 내가 안긴 것 같은 포즈가 되어 있었다. 서로 식사하기에는 불편한 자세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음식들은 하나같이 맛있었다. 게다가 손을 쓰지 않아도 자꾸만 입 안에 들어왔다. 나 한 입 먹이고, 본인 한 입 먹고. 고정원은 영락없이 아이 둔 부모처럼 굴고 있었다. 이러려고 거실의 낮은 탁자에 차린 건가 싶었다.
“야아, 내가 먹을게. 너 제대로 못 먹잖아.”
“잘 먹고 있어. 난 좋은데.”
더 맛있고.
“…….”
“인휘는 맛있어?”
갓난쟁이 다루는 투로 고정원이 물었다.
“……응. 맛있어, 눈물 나게.”
닿은 피부가 근질근질했다.
“아, 해 봐.”
눈앞에 무언가 내밀어졌다. 뭔가 했더니 육질이 연해 보이는 고기였다. 순순히 입을 벌려 받아먹고 나자 입가로 소스가 묻었다. 휴지를 찾을 필요도 없이, 고정원이 먼저 닦아 주었다.
“…….”
먹으면서 나는 또 한 번 생각했다. 고정원은 비위가 좋다고. 내가 먹고 수저에 남은 음식을 마저 먹는다거나. 내 입에 묻은 걸 그대로 먹는다거나.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했다. 사귀면서 익숙해진 부분이지만, 민망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엉덩이가 자꾸 꼼지락거리게 됐다. 고정원의 느린 심장 박동이 등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딱 붙은 거리감이 틈틈이 의식됐다. 벅찬 느낌이 들면서 좀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하아, 가쁜 한숨을 내쉬자 고정원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잘 못 먹네. 어디 안 좋은 거 아냐?”
“……아냐.”
그래도 식사는 계속 됐다. 먹다가 쪽, 먹다가 쪽. 틈틈이 뽀뽀를 하는 파렴치한 짓까지 해 가며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집 안에 풀장이 딸려있을 줄은 몰랐다. 어느 정도 소화가 되고 나자 고정원은 나를 밖으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뜻밖에 수영장을 만났다. 한쪽 면 전체가 폴딩도어로 되어 있었다. 다 젖혀서 완전히 야외수영장처럼 만들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풀장 건너편으로 먼 풍경이 내다보이고, 바깥으로 이어진 테라스에는 파라솔과 선베드가 마련돼 있어 안락해 보였다. 구경하는 것만으로 들뜨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여기.”
고정원은 내게 수영복을 건네주었다. 언제 내 것까지 구비해 놨는지 몰랐다. 빨리 물에 들어가고 싶어 우왕좌왕하자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안 보니까 여기서 갈아입어.”
사방이 뚫린 곳에서 고정원은 벌써 상의를 벗고 있었다. 뻘쭘하게 서 있다가 나도 구석에서 탈의를 했다.
“으악!”
스윔 팬츠를 입자마자 몸이 공중에 떴다. 힘이 뻗치는지, 고정원은 그새를 못 기다리고 나를 들고 갔다. 나는 떨어지거나 미끄러질까 봐 꽉 매달려 있었다.
물에 들어가자 청량감이 확 번졌다. 나를 안고서 고정원은 거침없이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수영장은 눈으로 보던 것보다 길이감도 있고 폭도 넓었다. 생각보다 깊이도 있는 것 같았다. 수심이 어느 정도냐는 물음에 고정원은 1.5미터 가량 된다고 답했다. 일반적인 풀 빌라들과 비교해 풀장이 크게 설계된 거라고도 했다.
혼자 마음껏 수영해 보고 싶었다. 천천히 몸을 떨어뜨리고 나아가는데 팔이 얽혔다.
“어디 가.”
“어디 가긴.”
수영장 안에서 갈 데가 어딨다고. 나는 헛웃음을 뱉으며 팔을 떼어 냈다.
쓸데없이 큰 체구가 방해물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어떻게 된 게 잠시도 안 떨어지려고 했다.
처음에는 물장구를 치며 도망갔다. 그러다 그게 놀이가 되고, 아슬아슬한 장난이 됐다. 언제나 그렇듯 내가 도망가는 역할이고 고정원이 나를 잡는 역할이었다. 잡히면 숨도 쉬기 힘들 만큼 꽉 끌어안겨 깨물림 당해야 했다. 잡히지 않으려고 스릴이 넘쳤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고함이 터지고 웃음이 터졌다.
“이제 잠수 대결할까?”
나는 젖은 머리를 털어 내고 물었다.
“이기면 뭐가 좋은 거야?”
“딱밤. 이긴 사람이 한 대 때릴 수 있어. 어때?”
“…….”
고정원은 대답이 없었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이도 저도 아닌 표정이었다.
“좋아.”
다소 김빠진 듯한 웃음과 함께 승낙이 떨어졌다. 자신 없어 하는 태도를 보니 왠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감이 생겼다. 하지만 막상 시작되고 나서는 승부가 한순간에 시들해졌다. 첫판부터 고정원이 이긴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이겨 놓고 딱밤을 약하게 때렸다는 점이었다. 정말, 시시할 만큼 살살 때렸다.
재미없으니까 제발 세게 때리라고 정색한 다음 판에서 다시 고정원이 이겼다. 정색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그때는 정말로 아프게 때렸다. 머리통 전체가 흔들리면서 눈앞에 별이 뜰 정도였다.
게임인 줄 알면서 순간 울컥했다. 그만하겠다고 하는 걸 우겨서 한 판 더했다. 마지막 판에서는 내가 이겼고, 조금도 신나지는 않았다. 신날 수 없었던 게 져 준 티가 너무 많이 났다. 고정원은 내가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지 한 대 더 때려도 된다며 쓸데없는 배려까지 했다. 혼자 열 올린 게 바보 같아져서 그냥 이마에 뽀뽀나 해 주고 끝냈다.
유치하게 놀 만큼 논 뒤에는 각자 수영을 했다. 나는 헤엄치는 걸 엄청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그냥 물에 들어간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서 나중에는 구경만 했다.
고정원은 수영 실력마저 완벽했다. 묵직한 몸이 물장구도 거의 일으키지 않고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인상 깊었다. 전문적으로 배운 건가 하는 감상이 들 만큼 절제된 균형미가 있었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기는 했다. 젖은 얼굴을 쓸어내리는 모습이라든가, 수영 선수보다 육감적으로 발달된 체형 같은 걸. 눈이 마주치자 나는 훔쳐보던 사람처럼 눈길을 피했다. 알아차린 고정원이 스르르 다가와 내게 몸을 붙였다.
“…….”
움직이기 힘들었다. 허리에는 굵은 팔이 감겨 있었다. 서로한테 짓눌리는 감촉이 의식되면서 허리춤이 자동으로 빳빳해졌다. 젖은 육체가 코팅된 것처럼 반짝거리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각진 몸 곳곳으로 송글송글 매달린 물방울도 보였다.
얼굴로 손이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아직도 좀 빨갛네.”
이마에 손이 스쳤다. 아까 게임하면서 맞았던 게 그제야 생각났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알겠냐.”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더워?”
“어, 뭐 조금.”
“가슴까지 빨개졌는데.”
놀림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은근한 어조만으로 능글거리는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벌게진 걸 보이고 싶지 않아서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고정원은 나를 안은 채로 다시 수영장의 수심 깊은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수영이나 장난 같은 건 아무것도 안 했다. 그냥 가만히 부둥켜안고만 있었다. 아무런 소음이 들려오지 않아서 기분이 묘했다. 정말 외딴 곳에 단둘만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
우리는 언젠가부터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물속에서 마주 안고, 하염없이 시선을 맞췄다. 쑥스러운 느낌은 더 이상 없었다. 감미롭게 감기는 물과 체온만 느껴졌다.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마주보면서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찬양에 가까운 칭찬은 입 밖에 내지 않고 몰래 속으로만 했다.
몸이 조금씩 뒤로 밀리며 등에 벽이 닿았다. 짓눌리며 더욱 밀착된 상태로 우리는 눈 맞추는 일을 계속했다.
“가끔 너 보면 이상한 기분 들어.”
습윤한 눈동자가 아래서 위로 움직였다.
“……이상한 기분?”
물어놓고 나야말로 기분 이상해졌다. 당장에라도 음담패설이 나올 것 같아서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잇따른 말은 의외로 추상적이었다.
“갑자기 추락하는 기분.”
“…….”
“뭔지 알아, 그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듯 모를 듯 했다. 나도 가끔씩 고정원을 볼 때 장기들이 덜컥 주저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거랑 비슷한 걸까.
아무튼 단순하게 내가 엄청 좋다는 말로 들렸다.
“응.”
대답한 나는 뜨거워진 입술을 가져다 댔다.
사방이 뚫려 있다는 게 어색했다. 고립된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이 나타날까 불안했다. 소리를 참으려고 입술을 물었다.
“읏……!”
훤한 대낮에 선들선들 불어오는 바람결이 피부로 느껴졌다. 선베드의 푹신한 쿠션에 엎드려 무릎을 지탱했다. 손잡이를 붙들자 라탄 소재의 건조하고 맨들거리는 감촉이 손바닥에 감겼다.
“흡…….”
긴장해서 그런가 압박감이 대단했다. 뒤를 벌리고 들어오는 게 살덩이가 아니라 쇠기둥 같았다.
“아파…….”
웬만해선 아프다고 하고 싶지 않았다. 아프다고 하면 뭘 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고정원은 밀어 넣었던 성기를 빼냈다. 빼내자마자 둔부를 양쪽으로 벌리고, 그 사이로 얼굴을 붙였다.
욱신거리는 뒷구멍에 축축한 혀가 밀려 들어왔다. 흣, 숨을 삼키며 입술을 물었다. 들러붙어 빠는 소리를 따라 찌르르한 느낌이 번지고 있었다.
혀가 안을 쑤시고 입술이 흡입력 있게 주변을 모아 삼켰다. 그때마다 구멍부터 갈라진 회음이 들썩거렸다. 그 박동을 즐기는 것처럼 뜨거운 한숨이 쏟아졌다. 나는 죽을 맛인데 고정원은 느긋하게 웃기까지 했다.
“이제 넣어, 빨리…….”
눈시울까지 뜨근해져 있었다.
“처음부터 해 줄걸. 미안.”
바라지도 않는 사과를 해 놓고 고정원은 자세를 잡았다. 성기의 두꺼운 머리가 다시 밀려 들어왔다. 두터운 부분이 지나면 더 두터운 부분이 밀고 들어오는 익숙한 감각을 느끼면서 나는 최대한 힘을 빼려 노력했다.
“흐.”
다 삼키니까 흐느낌이 샜다. 자리 잡은 성기는 안을 넓히듯 천천히 드나들었다.
“내가 앉을게.”
어느 정도 속이 벌려진 느낌이 났다. 자세를 바꾸겠다 예고한 고정원은 성기를 빼고 나를 들어 올렸다. 위치를 바꿔 아래로 내려간 고정원이 선베드에 기대앉았다. 나는 자리를 잡아 주는 대로 자연 경관이 보이는 바깥쪽을 향해 돌았다. 서서히 앉으며, 아직 다물리지 않은 구멍으로 살덩이를 밀어 넣었다.
“큿…….”
깊어질 수밖에 없는 체위였다. 내장이란 내장이 다 얼얼했다. 힘겨워서 앞쪽으로 풀썩 엎어졌다. 엉덩이를 들자 그나마 삽입이 얕아지는 것 같았다. 끙끙거리며 앞뒤로 움직였다. 허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성기를 뱉어 냈다 머금었다 했다.
시원찮은 움직임마저도 얼마 이어 가지 못했다. 고정원이 메마른 신음을 뱉으며 둔부 한쪽을 쥐어짜듯이 움켜잡았다. 못 참겠는 모양이었다.
“이리 와 기대.”
끌어당기는 대로 몸을 젖혔다. 배에 든 성기가 깊은 데를 찌르면서 얼굴이 찌푸려졌다. 나는 고정원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 완만하게 움직였다. 느리적느리적 앞뒤로 비벼 대는 게 고작이었다.
“음.”
넓은 손바닥이 가슴팍을 덮었다. 다른 손은 내 성기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별다른 애무는 없었다. 그저 내가 들썩이며 움직일 때마다 저절로 마찰될 뿐이었다. 꾸준하게 유두가 단단해지고 성기가 끈적해졌다. 애타는 느낌을 쫓아 몸 전체가 격렬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속의 민감한 지점이 좀 더 제대로 비벼지길 바라며 몸을 찧었다.
“아흣, 흣, 으읍…….”
터지는 신음을 참기 힘들었다. 입술을 한껏 말아 깨물었다.
“아무도 못 들어, 소리 내.”
고정원이 잔뜩 흥분해서 긁히는 음성으로 부추겼다. 나는 울먹이면서 목에 힘을 주었다. 주변에 누가 없다는 걸 알아도 뻥 트인 야외다 보니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었다.
성기를 가만 쥐고만 있던 손이 힘을 주어 움직여 댔다. 유두는 굴려지고 잡아당겨졌다. 눈이 질끈 감기고 허리가 뒤틀렸다. 벗어나려 하자 팔이 올라와 앞을 둘렀다. 고정대처럼 어깨 전체를 짓누르고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있는 대로 허리가 젖혀졌다. 쫓기는 듯한 쾌감이 사지를 그렇게 몰아가고 있었다.
좋아. 너무 좋아.
밖이고 뭐고 더는 뵈는 게 없었다.
“정워아, 아으, 아……!”
곧 튕겨져 나간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나를 붙드는 팔에도 꽈악 힘이 서렸다.
“흐아……!”
나는 돌덩이처럼 딱딱해진 팔을 붙들고 울었다. 의지를 벗어난 들썩거림이 갈수록 격렬해지는 중이었다.
급박한 긴장감이 몰아쳤다. 고정원이 양쪽 무릎을 세웠다. 받치고 있던 하반신이 폭발시키듯 속을 찍어 올려 댔다. 머리 꼭대기까지 거세게 뒤흔들렸다.
“앗, 윽, 아아, 아, 아……!”
물이 엄청나게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두 발이 허공에 끌려가듯 붕 뜨는 것도 같았다. 그 거대한 감각이 감당 안 돼 본능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때였다. 거꾸로 처박히는 듯한 충격과 동시에 귀두에서부터 물이 팍 쏟아져 나왔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야가 완전히 뒤집혔다.
“…….”
팔다리가 경련의 여운처럼 움찔거렸다. 감겼던 눈이 뜨이며 찬찬히 주위가 밝아졌다. 제대로 눈을 뜨고 나서야 나는 내가 짧게 기절했다는 걸 알았다. 나를 안은 고정원이 내 눈두덩을 벌려 가며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괜찮아?”
사정한 지 얼마 안 된 얼굴에는 흥분감이 남아 있었다. 씨근거리는 숨을 고르며 고정원은 내 안색을 살폈다. 나도 양 뺨과 전신으로 열감이 남아 있었다. 민망한 기분에 앞서 이게 다 뭔가 어리둥절했다.
“……괜찮아.”
대답하자 안심한 표정이 보였다. 이마를 짓누른 입술이 얼마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놀란 것 같았다. 이렇게 경련까지 하며 정신을 잃은 건 처음 있는 일이긴 했다.
“당분간 너 무리하면 안 되겠다.”
중얼거린 고정원은 일어나서 비치 타월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감싸 안아 펜션 안으로 향했다. 나는 다 쏟아 내고 난 뒤의 나른함을 이기지 못하고 늘어지듯 안겨만 있었다.
* * *
씻고 나오자 무기력했다. 세상만사 뒤로 하고 고정원한테 기대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소파에 늘어지는 것만으로 성이 찼다.
고정원이 뻗은 손으로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손길이 하도 부드러워 잠들 것만 같았다.
“졸려?”
끄덕이자 내려온 손이 가슴팍을 둥글게 문질렀다.
“좀 더 잘래?”
“아니.”
손을 겹치고 나는 어리광처럼 뺨을 문질렀다.
“……고마워.”
우러나온 진심을 중얼거렸다.
“뭐가.”
“그냥. 다.”
정말로 모든 게 감사했다. 벼랑까지 갔던 상황이 풀려서 그런 것도 있고, 행복감에 취해서 감상적이 된 감도 없잖아 있었다. 어쨌든 하나하나 고맙고 소중한 건 진심이었다.
“미안했어. 너한테 계속 거짓말 했던 거.”
속에 담겨 있던 말도 선선하게 나왔다.
“있는 대로 다 말해야 되는데, 무서우니까 말이 안 나와서…….”
“나도 알아.”
“근데 정말로 거짓말하는 거 힘들었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너한테는 못 하겠더라. 앞으로는 진짜, 그럴 일도 없겠지만 뭐 숨긴다거나 안 그럴게. 절대.”
겪어 봤으니 앞으로 두 번은 겪지 않을 것 같았다.
“나도 잘한 거 없어.”
고정원도 반성하는 것처럼 말했다.
“여유 없게 몰아붙였잖아.”
“…….”
“이번에 알았겠지만……. 인휘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 너그러운 성격 아니야.”
그 말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았지만 토를 다는 것도 뭐해서 잠자코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자제력 같은 건 보통 이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
“너한테 하는 거 보면 바닥 수준인 것 같아.”
고정원은 홧김에 한 언행들을 아직도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나로서는 홧김에 터뜨려 준 게 고마웠다. 감정적으로 한 번 터졌기 때문에 화가 가라앉았을 테니까.
“애인 일에 이성적이면 그게 더 이상한 거 같은데.”
말하며 주섬주섬 돌아앉았다.
“나도 네가 누구랑 단둘이 있다가 그런 일 당하고 들어왔다고 하면 그땐…….”
현실도 아닌데 말하면서 기분이 더러워졌다. 더 생각하기 싫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상상만으로 화를 내는 게 웃긴지 고정원이 웃었다. 웃으면서 등받이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댔다.
“…….”
그 모습을 보며 엉뚱하게도 가슴이 찡했다. 기댄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을 뿐인데.
“있잖아.”
나는 고정원의 커다란 손을 양손으로 붙들고 주물거렸다.
“앞으로는 둘 다 숨기는 일 없이 뭐든 말하자. 그게 맞는 거 같아. 나도 집에 돈 문제나, 뭐 그거 말고도 너 신경쓸까 봐 얘기 잘 안 하고 그런 거 있었는데…….”
“…….”
“오히려 거리감만 생기는 거 같아. 오해도 생기는 거 같고. 아무튼 자질구레할 정도로 터놓는 게 훨씬 좋다고 이번에 깨달았어, 나도.”
가만히 듣던 고정원이 시선을 깔았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어째 좀 묘하다 싶었는데 정말 뭐가 있는 것 같았다. 곤란한 듯이 짧게 구겨지는 이마가 보였다.
“……왜 그래?”
“말해야 하나 생각이 들어서.”
“뭐?”
“말 안 하고 넘어간 게 있거든.”
뭔가, 전에 없이 심상치 않은 느낌이었다.
“……뭔데 그게?”
고정원은 별일 아니라고 했다. 이미 해결된 일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런 안심시키려는 태도 때문에 나는 더 불안하기만 했다. 뭔데 그러냐고 안달 내자 고정원은 내키지 않는 것처럼 설명했다.
설명은 시종일관 대략적이고 압축적이었다. 하지만 하나하나가 충격적이었다.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지난 두 달 동안 고정원은 스토킹을 당했다. 새벽 늦게 전화를 걸거나, 메시지로 나체 사진과 함께 음란한 요구를 하거나. 가장 무서운 건 집으로 찾아와 차 사고를 일으킨 부분이었다. 경비실에서 연락 왔던 주차장 추돌 사고가 그 남자의 짓이었다. 나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소름 끼쳤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상대가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고정원이 다니는 피트니스 센터의 데스크에서 일하던 남자라고 했다. 이름과 휴대폰 번호 같은 개인 정보를 알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사는 곳은 미행으로 알았고, 연락을 받아 주지도, 만나 주지도 않아서 찾아와 사고를 일으켰다고 했다.
신고와 처벌이 수월했던 게 천만다행인 점이었다.
“……그 사람 나이는?”
“20대 중반쯤.”
“새, 생긴 건? 험악한 인상이야?”
“글쎄.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었던 것 같은데.”
“…….”
막연히 험상궂은 인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하니 섬뜩했다.
대체 고정원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걸까.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그 남자를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패든 가두든, 뭐라도 해서 두 번 다시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하고 싶었다. 폭력적인 생각을 하느라 신경의 다발이 일제히 조여들었다. 과격한 분노로 손이 떨리는 걸 고정원이 감쌌다.
“뭘 이렇게 떨어.”
“진작에 말하지. 이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냐. 너는 진짜…….”
감정이 격해지려 하자 고정원이 안아 주었다. 나는 열 오른 눈가를 어깨에 비볐다.
“응. 그래서 지금이라도 말하는 거야.”
“…….”
“실제로 금방 처리되기도 했고. 신경 쓰게 할 만한 가치 없었어.”
대시하는 건 당연하게 여자들이었다. 상대가 동성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이번 일은 어떻게 봐도 범죄였다. 잘못하다 해코지라도 당했으면 어떡할 뻔했나, 생각하는 것만으로 피가 식었다.
“괜히 말했나.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일 아니었는데, 정말.”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안 무서웠어?”
“바빠서 무서울 시간도 없던데.”
고정원은 능청을 떤 뒤에야 솔직하게 말했다.
“좀 피곤하긴 했어. 혹시 너한테 무슨 일 생길까 봐 신경 곤두섰던 것도 있고.”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품에서 벗어나 얼굴을 마주보고 말했다.
“앞으로는 신중하게 행동할게 나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네가 하지 말란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안 할 거야.”
“…….”
“아, 근데 알바는 어쩔 수 없으니까 빼고. 그래도 인간관계 같은 건 나도 이번에 느낀 게 있으니까…….”
허둥지둥하는데 의견이 끼어들었다.
“그럼 차라리 가이드라인 같은 걸 정할래. 구체적으로.”
가이드라인이라니 생소했다. 어떤 걸 말하는 건가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못 알아듣는 게 보였는지 고정원은 조목조목 언급을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응.”
“이성이든 동성이든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않기.”
“…….”
“사적인 대화 하지 않고, 사적인 정보 알려주지 않고.”
“…….”
“단둘이 만나지 않기.”
거기에는 부연이 잇따랐다.
“불가피하게 단둘이 만나야 할 상황에서는 나를 부르거나, 그게 안 되면 연락해두고 반드시 밀실은 피하는 걸로.”
이런 거였구나. 알아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킨십하지 않기. 하지 않기라기보다는 허용하지 않기라고 해야겠다 너한테는. 다른 사람이 만지게 내버려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 어깨에 팔 두르는 가벼운 스킨십도 포함해서.”
“알았어.”
내용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특별할 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연인 간에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일반적인 사항들이었다. 다만 그동안 이성에게만 적용되던 범위가 확장되어 동성을 상대로도 적용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이런 정도라면 나도 지킬 자신 있었다. 구체적인 기준이 생기니까 헷갈리지 않아 편할 것 같기도 했다. 종이든 휴대폰이든 입력해서 문서화해 두면 좋겠다 싶어 일어났다.
“아예 써 놓을게.”
엉덩이를 뗀 나를 고정원이 붙들어 앉혔다.
“기다려. 더 생각 중이야.”
끝난 줄 알았는데 조항이 남은 모양이었다.
“이것도 추가해. 이름 불러 주지 않기.”
고정원이 은근하게 요구했다.
“오빠나 형 호칭 허락하지 않기.”
“뭐야, 그게.”
나는 황당해서 가슴팍을 밀어 냈다. 그러자 고정원은 내 주먹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투닥거리며 장난을 치느라 소파에 먼지가 일었다. 서로 힘 조절이 안 되면서 엉킨 몸이 털썩 한쪽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덮치듯 위로 올라온 고정원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쳐다봐 주지 말고…….”
받치고 있던 팔이 위로 올라가며 고정원의 자세가 더욱 낮아졌다.
“웃어 주지 말기.”
장난인 줄 알면서도 헷갈렸다.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와…… 그건 너 진짜, 장난 아닌데?”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식으로 대꾸했다. 아무리 농담이 해도 나로선 못 할 발상이었다.
“응. 장난 아닌데.”
느긋하게 대꾸한 고정원이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목덜미부터 여기저기를 입술로 물기 시작했다. 웃음이 안 터질 수 없었다. 자지러지듯 몸뚱이를 틀자 손까지 올라왔다. 본격적인 간지럼이 시작되면서 쉬지 못하고 웃었다. 괴로워서 등이 휘고, 고개가 젖혀졌다.
“아, 흐, 그만……!”
고정원이 아래로 내려갔다. 티셔츠는 말려 올라갔다. 홀쭉하게 당겨진 배에 입술이 달라붙었다.
“으학!”
뜨거운 바람이 불어넣어졌다. 북, 소리가 났다. 완전히 어린 애들한테나 할 법한 장난이었다. 못 참고 밀어내자 뱃가죽이 잇새로 잡아당겨졌다. 얇은 살갗이 늘어나는 감촉이 아찔했다.
입술이 위로 올라오며 유두를 머금었다. 헉, 숨이 갈라졌다. 짓궂기만 하던 입술이 탐욕스러운 기세를 띠더니 가슴을 빨아 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홱, 몸을 일으켰다.
“…….”
행동이 저지된 고정원은 애매한 자세로 굳어 있었다. 성적 흥분으로 인해 어둡게 침잠한 눈이 보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놀라긴 했지만, 장난치다 그럴 분위기가 되는 건 원래 곧잘 있는 일이기는 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숨도 못 쉬고 웃어 댔기 때문인 것 같았다. 눈앞에는 젖어서 벌어진 입술이 보였다.
야릇한 고양감이 번지며 나는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아랫입술끼리 닿을 듯 말 듯 했다. 갑작스레 고정원이 몸을 뺐다.
“슬슬 배고프지 않아?”
“어……?”
“간단히 먹을 만한 것 좀 가져올게.”
뭐라 대꾸할 새도 없었다. 주방으로 향하는 뒷모습만 보였다.
“…….”
그럴 분위기인 거 아니었나? 뭐지? 갑자기 하기가 싫어졌나? 뜬금없는 태도에 별별 생각이 들었다. 얼떨떨하게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곧 변덕스럽게 구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나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주방으로 따라갔다.
“……언젠 종일 하자며.”
툭, 등을 건드렸다. 고정원은 식탁에서 음료수를 만들고 있었다. 아일랜드 식탁 위로는 패키지가 낯선 수입 과자들도 늘어져 있었다.
“너 혹시 아까 나 기절했던 것 때문에 그래?”
그렇다 아니다 말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하던 일만 했다.
“야, 그건, 너무 좋아서 그랬던 건데.”
“…….”
“나는 모자라. 더 하고 싶어, 솔직히.”
내 말을 듣고도 고정원은 덤덤한 표정으로 스툴에 앉았다. 아무것도 안 들리는 듯한 태도로 앉더니, 내게 먹을 걸 권했다.
“여기서 먹자.”
하지만 무심한 태도가 정말 무심해 보이지는 않았다. 귓바퀴가 상기돼 있기 때문이었다. 그걸 보며 나는 웃음을 참고 옆으로 앉았다. 음료수가 담긴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밑으로 슬쩍 손을 뻗었다. 당연히 유혹하는 의미였다. 미끄러지듯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자 근육이 솟았다. 갈라진 선이 움푹 패이는 게 느껴졌다.
고정원은 내 손을 떼어 내려 했다. 나는 교묘하게 피했다. 한가운데로 나아가 성기를 그러쥐기까지 했다. 주무를 때마다 살덩이가 삽시에 부풀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기가 찬 웃음이 샜다. 너무나도 쉬운 반응이 귀엽게 느껴졌다.
“장난감 같아.”
정말 어릴 때 갖고 놀던 장난감 생각이 났다. 일부러 아무렇게나 주물럭거리며 거칠게 취급했다. 중간에 고정원이 ‘하지 마’ 말하며 내 손목을 그러쥐었다. 성기는 쥐기 힘들 정도로 커져 있었다. 터질 것 같은 흥분감이 고스란했다. 일부러 ‘싫어?’ 묻자 ‘싫어’ 하고 거짓말인 게 뻔한 대답이 나왔다.
“……조인휘.”
부르는 걸 무시했다. 다리 사이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억지로 팬츠를 끌어내리고, 푹 솟은 성기를 올려다봤다. 또 한숨이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젖기 시작한 귀두를 머금었다. 깊숙이 빨아 주자 머리채를 붙들어 왔다. 처음에는 잡아당겨 빼려는 것 같더니 끙, 앓자마자 힘이 약해졌다.
손길은 의도가 갈수록 모호해졌다. 말리는 건지, 아니면 더 하라고 밀어 넣는 건지. 전혀 구분이 안 됐다. 허벅지 근육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꿈틀거렸다. 귀두에서부터 새어 나온 짠 맛이 혀를 적셨다.
“읏…….”
살덩이를 뱉어 내고 일어섰다. 열기가 식을세라 곧장 고정원에게 달라붙었다. 귀에 입술을 붙이고 손바닥으로는 귀두를 문질거렸다. 끈적끈적, 흥분한 증거를 보란듯이 늘어뜨리며 도발했다. 그것도 아주 놀리는 말투로.
“야, 너 이래 놓고 싫다고?”
“…….”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몇 초, 아니, 몇십 초. 생각보다 긴 시간이 흐르는 바람에 긴장했다. 나를 보는 눈빛이 아슬아슬했다. 좋지 않은 의미로 경계를 넘나드는 눈이었다. 어딘가 몹시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생각했던 반응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하…….”
다소 신경질적인 한숨이었다. 고정원은 과격해진 악력으로 내 어깨를 떼어 냈다. 손안에서 미끄덩한 살덩이가 튕겨나갔다.
“아니, 난 놀리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당황해서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알아.”
일축하며 고정원은 일어났다. 피로한 듯 얼굴을 감싸쥐었다. 손 위로는 험악하게 좁혀진 이마가 보였다. 새삼 꼴이 엉망이기도 했다. 내가 벗긴 바지는 허벅지쯤 걸쳐 있고, 속옷 사이로 성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꺼덕, 꺼덕. 벌겋다 못해 거무죽죽하게 달아오른 살 기둥이 혼자 음산한 리듬을 탔다. 근데 그게 야한 분위기가 아니라 싸한 분위기였다. 나는 졸지에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되었다.
“…….”
고정원의 목이 점점 붉어졌다. 귓바퀴도, 성기도. 확실히 아까보다 피가 몰려 있었다.
……화를 삭이는 게, 맞나?
의구심이 들었다. 어쩐지 고정원이 참고 있는 건 화가 아니라 다른 부분인 것 같았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확실했다. 이런 걸로 화낼 리 없다는 확신이 뒤늦게 들었다. 나는 고정원의 발등을 밟고 올라섰다. 얼굴을 감싼 손을 치우는 동시에 입술을 맞췄다.
쿵―!
후두부가 세게 부딪혔다. 얼얼하다고 느끼자마자 양손이 위로 묶였다.
“…….”
욕정에 잠식된 눈이 나를 봤다. 한 꺼풀 벗겨진 것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피부가 따끔하고, 긴장으로 조인 복부가 차오른 숨 때문에 들쑥날쑥했다. 눈앞의 넓은 가슴팍도 그랬다. 거친 호흡결이 느껴졌다.
턱 밑으로 입술이 닿으면서 어깨가 떨렸다. 고정원은 내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았다. 숨을 들이켰다가 뱉어 냈다가. 잘근거리기도 했다. 어떻게 할 바를 모르는 것처럼 들썩거렸다. 나직한 숨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렸다.
고정원은 성질 급하게 옷을 벗었다. 그리고 아래를 움켜쥐었다.
“큭……!”
굵은 살덩이가 굵은 손 안에 잡혀서 날뛰는 게 낱낱이 보였다. 성기는 계속해서 크기를 키웠다. 힘을 주체 못 하는 동물을 간신히 잡아 가둬 놓은 것 같았다.
“……읏.”
지켜볼 뿐인데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아…….”
물기 어린 살 소리와, 바닥에 깔리는 신음 소리가 겹쳐졌다. 고정원은 내 눈을, 내 입술을 쳐다보면서 꾸준히 성기를 매만졌다. 거칠게 마사지하던 손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정된 살덩이를 살살 달래는 듯했다.
지켜보면서 나는 입이 자꾸 벌어졌다. 숨이 차고, 탄식이 터졌다.
움직임은 끝으로 치달을수록 험악해졌고, 고정원은 묶어두었던 내 손을 가져다 성기에 얽었다. 그리고 뽑아낼 것처럼 흔들었다. 그 몸짓을 따라 팔부터 상반신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사납고 거친 몸짓에 휩쓸리는 내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큭……! 아……!”
얼마 안 가 성기가 울컥울컥, 토해 냈다. 끈끈한 정액이 우리의 손을 뒤덮었다. 놀랍도록 많은 양으로, 야릇한 냄새도 풍겼다.
잡혔던 손이 해방되면서 겨우 피가 돌았다. 고정원은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어 왔다. 그러고는 입 주변을 닦아 주었다.
“…….”
이제 보니 턱 아래까지 침으로 흥건했다. 흐르는 줄도 몰랐다. 내가 그렇게까지 집중했었다고?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누가 봐도 정신 빼놓고 구경한 꼴이었다. 바지 한가운데가 두둑해진 것도 민망했다. 무슨 변태도 아니고.
“그, 너…….”
쫓기듯 말을 뱉어냈다.
“전에도, 나 잘 때 옆에서 혼자 한 적 있지.”
“…….”
“나 그때 살짝 깨 있었었는데. 너 몰랐지?”
핫.
어색한 웃음으로 끝맺었다. 끝맺자마자 후회가 됐다. 민망함을 감추려고 아무 말이나 막 뱉고 말았다. 그때 일은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아.”
나지막한 감탄사였다. 흐릿한, 묘한 웃음도 잇따랐다.
“하루도 안 빼고 했었는데.”
이어진 말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뭐?”
반문하면서도 혼란했다. 잘못 들은 건가.
“너 씻지도 못하고 잠들면, 그런 날은…….”
나올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정원은 말끝을 흐리기만 했다. 뭘 했기에 똑바로 말을 맺지 못하는 건지, 도저히 뒷말을 예상할 수 없었다. 서빙 일을 끝내고 오면 종종 뻗어 버릴 때가 있었다. 씻지도 못하고 소파에서 잠들면 아침에는 늘 침대였다. 그러고 보면 늘 옷이 갈아입혀져 있었다.
“그런 날은, 뭐?”
재촉했다. 고정원은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나를 안고는 목에 스민 땀기를 핥았다. 젖은 손이 옷을 들추고, 두근거리는 가슴팍을 더듬어 왔다.
“뭐야…….”
말을 안 해 주니까 더 찝찝했다.
“읏……!”
갑작스레 얼굴이 가까워졌다. 고정원은 내 귀를 빨기 시작했다. 쪽쪽 쪼이면서도 나는 계속 궁금한 걸 물었다.
“근데 아까, 뭐였어? 그런 날은 뭐?”
안 씻어서 엄청 더러웠을 텐데. 그런 날은 냄새가 심해서 도저히 못 했다는 건가.
“그런 날은…….”
말하며 고정원은 몸을 떨어뜨렸다. 눈이 마주쳤다.
“뭐겠어, 바보야.”
뒤통수가 휙 끌어당겨졌다. 입술이 겹쳐지면서 눈이 감겼다. 솔직히 그런 날은 뭘 했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기도 했다. 고정원에게 팔을 둘러 감싸자 정성스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우리는 그 뒤로 지칠 때까지 애무를 했다. 삽입은 하지 않았다. 그저 빨고 다시 빨고……. 고정원은 내 발바닥까지 맛보듯이 혀로 굴렸다.
몇 번이고 절정까지 갔다. 나중엔 눈이 무거워지면서 애무를 받다 잠이 들었다. 연이은 사정은 졸도하듯 곯아떨어지기에 충분했다.
* * *
더위와 갑갑함 속에서 깼다. 일어나 보니 고정원의 품 안이었다. 한창 벗고 뒹굴다가 잠들어 버린 걸 기억해 냈다.
“응…….”
기지개를 켜고 이불을 들췄다. 맨살을 드러낸 고정원의 상체가 보였다. 정작 나는 후드티로 바꿔 입혀져 있었다. 이불을 덮고 안겨 있기까지 했으니 더워서 깨는 것도 당연했다.
고정원은 푹 잠든 것처럼 보였다. 꿈을 꾸는지 이따금씩 눈꺼풀 밑으로 안구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왠지 엄청 오랜만에 보는 듯했다. 이렇게 완전하게 긴장을 풀고 있는 걸. 나는 이마를 덮은 머리칼을 살금살금 넘겨 주었다. 속눈썹 밑으로 진 그늘과 가파른 콧대가 만들어 낸 음영이 내려다보였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크고 단단한 손을 만지작거리며 혼자 노닥거렸다. 통유리 너머로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보랏빛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 장대했다. 무심코 고정원을 쳐다봤다. 깨울까. 둘이 나가서 저녁 먹기 전까지 걷다 오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어깨에 손을 댔지만 깨우지는 못했다. 피로가 누적됐을 텐데 미안해서였다. 시계를 보자, 해가 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짧았다. 지금이 아니면 밤에 나가기도 애매할 것 같았다. 혼자라도 다녀오지 뭐. 생각하고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현관문을 열어젖히자 상쾌한 공기가 쏟아졌다. 나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언덕에서 밑으로 계단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와.”
둘러보며 나는 새삼 감탄했다. 넓게 펼쳐진 들판이 보였다.
“저기에도 뭐가 있었네.”
산책로를 향해 걸으며 혼잣말했다. 멀어지고 나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건물 아래쪽으로 작게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테이블, 벤치, 파라솔 딸린 선베드와 해먹 등. 또 다른 휴식 공간인 듯했다. 주변의 풀들은 전부 짧게 관리가 되어 깔끔했다. 정원 관리는 누가 해 주시나. 쓸데없는 궁금증도 스쳤다.
뒤로는 전부 산이었다. 앞으로는 곳곳에 나무가 있는 평지. 한참 내달려도 끝이 나오지 않을 만큼 크기가 널찍했다. 노을 덕인지 뭐든 근사해 보였다. 고정원도 같이 걸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내일은 산책부터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늑하게 뚫린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여기는 확실히 건물의 주변처럼 정돈된 느낌은 아니었다. 풀이 우거져 자연스러운 멋이 있었다. 멀리 내다보이는 산등성이들은 수채화 그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경치에 감탄하다가 이런저런 생각도 깊어졌다. 현실적으로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수업을 연달아 쨌으니 학점 관리도 더 빡세질 게 분명했다. 아르바이트는 하나 그만두게 됐지만, 제일 예민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희운은 어떻게 해야 될까.
생각하자 한숨이 났다. 입맞춤당한 직후에는 정말 패닉이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거부 반응이 일기도 했었고. 지금에 와선 이렇다 할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내 감정이 어떻다기보다는 이희운이 안타깝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었다. 집안일에, 그날 벌어진 사고에. 정신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을 거라 짐작됐다.
“후…….”
잘 마무리 짓고 싶은데 방법을 몰랐다. 솔직하게는 우리 관계만 신경 쓰고 싶었다. 고정원만 신경 쓰고, 고정원만 위하고. 근데 그럴 수는 없었다.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는 것처럼 지내는 건 불안했다. 정상적인 사람 구실을 못 하게 될 것 같았다. 막연하면서도 실제적인 불안감이었다. 그래서 자꾸 행동이 애매해졌다. 차라리 내가 고정원처럼 대담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도돌이표처럼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나아간다는 자각도 없이 나아가면서. 어느 순간 나는 하염없던 걸음이 멈추었다.
“…….”
주변은 더 이상 붉은 빛이 아니었다. 해 넘어간 사방이 어둑해져 있었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자 별장이 제법 멀어 보였다. 언제 이렇게 거리를 벌렸는지 몰랐다.
몇 시지?
확인하고 싶어도 휴대폰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고정원이 깼을지도 몰랐다. 짧게 갔다올 생각이라 메모도 써 두지 않았는데. 괜히 불안해진 나는 뒤돌아 걸음을 재촉했다.
“조인휘!”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조인휘!”
산책로의 초입. 부리나케 달려간 자리에서 나는 못박혔다. 계단을 내려와 있는 인영이 보인 순간이었다. 그 인영은, 고정원이 맞았다. 무슨 일인지 건물의 펜스 바깥쪽까지 살피고 있었다.
“…….”
근육질의 상체에 눈이 박혔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봤다. 아무리 봐도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던 모습 그대로였다. 급한 일이 생긴 건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는 반면 팔다리는 굳어졌다. 왜 저렇게 찾는 거지 싶었다. 단련된 육체는 아주 분주한 동시에 아주 차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섭도록 몰두하는 사람의 것처럼.
나를 찾는 게 아니었나.
일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를 찾는 거라면 저렇게 미친 듯이, 당장에라도 어떻게 할 것만 같은 기운을 풍길 리 없었다.
반대편 길목으로 뛰어가는 게 보였다. 침이 꾹 넘어갔다. 여기 있다고 알려 줘야 할 것 같은데. 뭐에 겁을 먹은 건지 가슴만 불안하게 뛰었다. 그러는 사이 고정원이 방향을 바꾸었다. 이쪽으로 빠르게 근접하는 게 보였다.
보폭이 큰 걸음은 곧 달리기로 변했다. 눈 깜짝할 사이 지척으로 거리를 좁혔다. 수풀 사이에 서 있던 나와 대번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쥐 죽은 듯 정적이 이어진 후였다.
“……어디 가.”
을씨년스러운 울림이 내려앉았다.
“…….”
나는 고정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기세로 주변을 뒤지고 여기까지 온 건지 알고 있었다. 쉽사리 입이 떨어질 리 없었다.
“어디 간 게 아니라, 난 그냥…… 그냥 여기 잠깐 산책 나온 건데.”
변명할 일이 아닌데 변명하고 있었다. 고정원이 왜 이렇게 심각한지를 모르니까 마냥 불안했다.
“같이 나오려고 했는데, 너 곤히 자길래 깨우기 싫어서…… 잠깐만 걷다 온다는 게 좀 늦어져서…….”
고정원은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혹은 무수한 생각에 압도된 것처럼. 무슨 일 있느냐고 묻기도 어려웠다. 상당히 황망해 보였다. 성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결국 가장 걱정되는 걸 먼저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
마른 입술을 축이며 달리 질문했다.
“너…… 화났어?”
“…….”
고정원은 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떠한 상상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침묵이었다. 무거운 정체 가운데 시간이 더디게 지나갔다. 영영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은 건조하게 벌어졌다.
“아니.”
“…….”
“화나지 않았어.”
경직된 하관이 다시 움직였다.
“화난 게 아니라 그냥…… 걱정돼서.”
그 말은 어딘가 어색하게만 들렸다. 늦은 타이밍 때문인지. 딱딱한 어투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지금까지 보여 준 행동과의 괴리감 탓인지 나도 몰랐다.
“들어가자.”
몇 발자국 다가온 고정원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어, 대꾸하며 힐끔 곁눈질을 했다. 고정원은 팔뚝부터 손등까지, 힘줄이며 근육들이 신경질적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 팽창의 흔적들이 뭘 뜻하는지 알 듯 모를 듯 했다.
아직 초저녁인데도 많이 어둑했다. 건물 주변으로만 조명이 설치돼 있어 컴컴해지면 여긴 위험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건가. 고정원이 왜 이렇게까지 과민하게 걱정했는지 혼자서 추측해보았다.
“…….”
걷다 말고, 나는 슬쩍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을 건드렸다. 가만가만 부드럽게 쓰다듬기도 했다. 받아주지 않을 것 같던 고정원도 조금 지나자 내 행동을 똑같이 따라했다. 쓸고, 꾹꾹 누르고. 장난을 되풀이해 주고받는 사이 긴장이 풀어졌다.
“저녁으로 바베큐 해 먹으면 어때?”
계단을 오르며 고정원이 부드러워진 톤으로 말했다.
“좋지.”
“네가 맛있다던 소시지 사 놨는데.”
“어, 그거 진짜 맛있었는데.”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서도 얼떨떨한 느낌은 남아 있었다. 잠시 어디 홀린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일단 별일은 아닌 듯해 다행이었다.
들어와서는 바로 저녁 준비를 했다. 냉장고에 있던 갖가지 재료들을 가지고 야외 바베큐장으로 향했다.
“먼저 가 있을래? 나도 옷 입고 갈게.”
“응, 알았어.”
이런 저런 준비를 하는 사이 고정원이 돌아왔다. 긴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맥주도 있는데 가져올까?”
뺨에 입을 맞추며 고정원이 물었다.
“괜찮아. 여기 있는 것부터 마시자.”
“그래, 그러면.”
돌아온 고정원은 웬일인지 수다스러워져 있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화제 삼아,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어릴 때 입이 짧아 뭘 안 먹었었다는 얘기. 가족 캠핑 중 옥수수를 먹고 호되게 체해서 지금도 싫어한다는 얘기. 어렸을 땐 친척끼리 캠핑이 꽤 자주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성실히 참여했었다는 얘기. 친척 동생들과 놀아 주기 귀찮아서 10분만에 아이들 재우는 법을 터득하게 된 얘기 등.
굳어졌던 시간을 상쇄하듯 우리는 내내 웃었다. 각자 먹기보다 먹여 줄 때가 더 많았고, 포크를 잡는 것보단 서로의 손을 잡는 때가 더 많았다. 음식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밤은 깊게 저물고 있었다.
“배 나왔네.”
밤공기가 좋았다. 식후에 발코니의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뒤에서부터 껴안은 고정원이 내 배에 손을 댔다.
“……너무 맛있었어, 소세지가.”
대답하자 고정원이 후, 코웃음 지었다. 손은 여전히 볼록한 부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떼어 내려 하자 훨씬 민감한 곳을 만지려 들었다. 하는 수 없이 원래 위치로 돌려 놓았다.
“겨울 되면 또 올까?”
나는 벌써부터 다음 일정을 기약했다. 너무 좋아서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 그러자.”
“산책로도 진짜 좋더라. 내일은 해 뜨자마자 산책부터 할래?”
“좋아.”
간결하게 답한 고정원이 한숨 쉬며 내게 기댔다. 내 어깨에 턱을 올리고 얼굴을 바짝 붙였다. 우리는 맞닿은 뺨을 문질렀다.
“……근데 있잖아…….”
“응?”
조심스레 운을 뗐다. 넘어가려고 했는데 생각할수록 뭔가 걸렸다. 담아 두고 찜찜해하기보다는 대놓고 묻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입을 뗐다.
“아까 밖에서 왜 그렇게 나 찾은 거였어?”
옷도 안 걸치고, 하는 뒷말은 안으로 삼켰다.
“아니, 말도 없이 사라져서 걱정한 건 알겠는데……. 네가 너무 과하게 걱정한 거 같아서, 왜 그랬나…….”
“…….”
찌르륵 풀벌레 우는 소리가 넘어왔다. 내 손마디를 주무르던 고정원이 툭 내뱉었다.
“가 버렸을까 봐.”
“뭐?”
농담을 하는 건가 했다. 돌아서서 마주 보고 물었다.
“진심이야?”
“…….”
“내가 왜? 너 여기 두고 내가 가 버린다고? 아니, 나 차도 없고 아무것도 안 가지고 나갔는데?”
자기도 말이 안 되는 걸 아는지 고정원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입버릇처럼 그러게, 말해 놓고 또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그냥 무시해. 내가 떳떳치 못해서 그런 거니까.”
갈수록 오리무중이었다. 떳떳치 못할 건 또 뭔지. 이유를 알면 납득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유를 듣고 나니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뭐가 떳떳치 못해? 너 뭐 유부남이냐.”
나름 웃기는 말이라고 했는데 고정원은 웃지 않았다. 가만히 내 뺨을 어루만지며 정적을 끌기만 했다. 그리고 스치는 바람처럼 조용히 내뱉었다.
“……내가 너무 솔직했었나. 걱정했어.”
“…….”
뭐가 너무 솔직했다는 건가. 짐작해 봐도 지금 이 상황에서 떠오르는 대화가 없었다. 내가 화나서 먼저 가버릴 만한 소리를 고정원이 했던가. 되짚어 봤지만 바닷가에서 싸울 때 약간 험하게 오갔던 것 빼고는 없었고, 그것마저도 다 풀고 지나간 일이었다.
“너 생각보다 이상한 걱정 많이 하는구나.”
머뭇머뭇 팔을 뻗었다. 묵직한 몸통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속으로는 무슨 말을 해 주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난 가끔씩 너랑 헤어지는 꿈 꾸는데.”
고심 끝에 나온 말은 부끄러워서 숨겼던 속 얘기였다.
“혼자 불안해져서 너 꽉 끌어안거든? 그러면 네가 자다가도 마주 안아 줘서, 엄청 마음 놓이던데…….”
나도 근거 없는 불안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위로받는 방식으로 나도 위로를 주고 싶었다. 그런 걱정은 내 꿈만큼이나 터무니없는 거라고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
한참을 껴안고 있다가 팔을 풀었다. 한 것도 없는데 민망해져서 목을 긁으며 딴청 피웠다. 고정원이 손끝으로 나를 만졌다. 뺨이며 귓불이며 계속 추근거렸다.
“아.”
손가락이 귓구멍이나 콧구멍을 짓궂게 파고들었다. 장난을 피하느라 고개를 기울이는데 눈앞에서 설핏 웃는 게 보였다.
“……사랑해.”
목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흐트러졌다.
“……어?”
나는 못 들은 척 되물었다.
“뭐라고 했어?”
속내를 아는지, 고정원은 순순히 반복해 주었다.
“사랑해.”
“…….”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고정원도 똑같을지, 알고 싶었다. 고정원도 나처럼 이렇게 소름이 끼칠지. 몸속이 간지러울지. 발끝까지 쥐난 것처럼 찌릿할지. 유치한 생각을 읽은 것처럼 고정원이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고백했다.
“사랑해.”
매 순간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