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연애의 비밀 (4)
집으로 가는 버스를 놓쳤다. 망연해진 나는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화면은 썰렁했다. 야심한 시각인 만큼 운행하는 버스가 거의 없었고, 아마 방금 놓친 차가 막차인 듯했다.
“…….”
왼쪽 어깨가 얼얼하게 아팠다. 오는 길,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다가 누군가와 부딪쳤었다. 몇 번이나 조아리며 사과한 뒤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황당하게도 전봇대가 있었다. 힘이 쭉 빠진 나는 허탈하게 웃을 기운도 없이 그대로 정류장까지 걸어왔다.
이제 어쩌지.
걸어가지 못할 건 아니지만 시간이 좀 걸리는 거리였다. 택시를 생각하고 차도를 보자 몇 대가 지나치고 있었다. 빈 차는 발견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두어 번 허무하게 손을 흔들다가 말았다.
꺼져 버린 휴대폰이 간절했다. 택시도 부르고, 무엇보다 기다리고 있을 고정원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후.”
내뱉으며 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가라앉은 줄 알았던 울렁거림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더니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단단하게 쥔 주먹으로 가슴팍을 때렸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아서 몇 차례 반복했다. 숙취에 시달리는 것 같은 신음이 터졌다. 억지로 헛구역질까지 했지만 나아지진 않았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일단 걷기로 마음먹고 일어섰다. 휘청거리던 다리는 다행히 힘이 많이 돌아와 있었다.
쭉 걸었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집 근처에 다다르고부터 속도를 냈다. 가까워질수록 조급증이 치솟아 아예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고정원이 불안해하고 있을 거란 예감이 들면서 천천히 걸을 수가 없었다.
헉, 헉…….
턱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전력을 다했는지 현기증이 일어 어찔했다. 다행히 더 달릴 필요 없이 오피스텔 앞 주차장이었다.
헐떡임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구부렸던 등을 펴자, 마주한 공동 현관의 스크린 도어에는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넋 빠진 사람처럼 이상한 얼굴. 그 얼굴을 끝까지 쳐다보지 못하고 눈길을 떨궜다.
……어떡하지.
수십 번을 반복한 혼잣말이 또 터져 나왔다. 잊고 있던 불안감이 거대해지며 숨통을 조였다. 이제 어떡해야 되지. 기세 좋게 뛰어와 놓고 현실감이 밀려들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들어가지도, 떠나지도 못했다. 몇 분간 지질하게 출입구 앞을 맴돌기만 했다. 귀가가 늦은 차 한 대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전조등 빛에 주변이 환해지고, 나는 고개 숙여 자리를 피했다.
수상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의심받기 전에 움직일까 고민했지만 조용히 구석에 머물렀다. 이어서 시동이 꺼지는 소리와 거칠게 차 문 닫히는 소리, 잠기는 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가까워지는 발소리는 성마른 느낌이었다. 별로 쳐다볼 생각은 없었는데 그 평범치 않은 낌새에 무심코 올려다보았다.
“…….”
그리고 얼어붙었다. 나는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절대 착각할 수 없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고정원이었다. 굳어진 표정으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설마 나 찾느라 돌아다닌 건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의심이 확신이 되면서 눈앞은 컴컴해졌다. 나는 그저 막연히 집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걱정하고 화내면서도 안에서 기다릴 줄 알았는데.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나는 어떤 말도 못하고 굳어져 있었다. 죄스러워 눈을 내리깔자 희게 질린 고정원의 손이 보였다. 초조했다. 그럴 리 없지만 고정원의 손안에 든 휴대폰이 악력에 부서질 것만 같았다.
“……어.”
“…….”
“아…….”
수도 없이 머릿속으로 연습했다. 너무 늦었지. 미안해. 여느 때처럼 말하며 껴안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발화 단계부터 불가능이었다. 아무리 입을 벌려 봤자 나오는 소리라고는 어물거리는 감탄사였다. 연속되는 실패에 눈앞이 아찔했다. 머릿속은 하얗게 비었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떻지.
의식이 미치자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튼 직후였다. 고정원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나는 가슴팍에 부딪히며 안겼다. 강력한 근육과 골격이 구속해 왔다.
익숙한 체온과 냄새가 풍겼다. 무언가 참을 수 없이 자극되는 걸 느꼈다. 안도되지만 안도할 수 없는 상황에 문득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손이 허리를 받치고, 마치 자기한테 흡수시키려는 것처럼 압박해 왔다.
콜록. 등허리부터 뒷덜미까지 짓누르며 올라오는 힘에 기침이 터졌다. 밀려나는 줄도 모르는 사이 등 뒤로 벽이 닿았다. 고정원은 그때부터 깊게 호흡했다. 들이켰다 내쉬었다 아주 천천하게 반복하며 관자놀이부근으로 콧날을 짓눌러왔다. 숨결이 뜨거웠다.
바짝 맞붙은 상체 탓에 커다란 흉곽이 부풀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압박감을 느꼈다. 어지러웠다. 그리고 애틋했다. 고정원이 나를 얼마나 걱정했었는지 피부로 전해지는 듯했다.
“……원아.”
힘겹게 불렀다. 응답하듯 고정원은 얼굴을 밀착했다. 가벼운 애무를 되풀이하듯 우리는 뺨을 조금씩 문지르며 맞댔다. 숨이 겹치는 걸 느끼며 눈을 들자 시선이 마주쳤다. 별안간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몸짓만큼이나 애틋할 거라 상상됐던 눈빛은 지나치게 서늘할 뿐이었다. 노골적인 관찰의 기색으로 깊어진 눈동자가 입술께로 내려갔다.
“…….”
서로 입술을 쳐다봤다. 숨결은 섞여도 입술은 닿을 듯 말 듯 애매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키스할 듯이 아슬한 거리를 유지하던 고정원은 이내 몸을 떨어뜨렸다.
“집에 가자.”
나지막한 한마디에 나는 홀린 것처럼 끄덕였다. 그리고 앞서는 고정원의 뒤를 엉거주춤 따랐다. 감싸고 있던 체온이 사라지자 썰렁했다. 팔뚝을 문지르며 공동 현관으로 들어섰다.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는 옆을 힐끔거렸다. 무표정한 옆모습을 올려다보다 괜한 기침을 하기도 했다.
어색한 침묵으로 엘리베이터를 거치고, 곧이어 무사히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
바닥으로 툭,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전에도 봤던 익숙한 풍경이 꼭 며칠 만에 돌아온 것처럼 굉장히 새삼스러운 느낌이었다.
“씻을래?”
고정원이 물었다. 음률처럼 부드러운 물음에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고정원은 외출복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아, 어.”
한 박자 늦게 머뭇거렸다. 행동이 하나하나 의식돼서 매끄럽지 못했다. 맞은편에서 웃통을 잡아 올려 벗는 고정원이 보였다. 이어서 하의까지 벗는가 싶더니 버클만 풀어 놓고 내게 다가왔다. 고정원은 내가 입은 옷가지들을 한 꺼풀씩 벗겨 주었다.
“…….”
바지가 내려가자 미처 확인 못했던 흔적이 드러났다. 허벅지에 시퍼런 멍이 몇 개나 들어 있었다. 머리만 맞아서 여기에 이런 게 생겼을 줄은 몰랐다.
“그, 가게에 일이 생겼다고 했잖아. 사실 그게 엄청 큰 사건이었어. 완전 가게 뒤집어지고 난리 났거든. 웬 진상 손님이 와서…….”
허둥지둥 설명했다. 왜 사고가 났고 어떻게 마무리 됐는지까지.
“……그래서 우리 다 경찰서 다녀오고, 사장님 화내시고…… 정신 하나도 없었어 정말로.”
산만하게 늘어놓은 설명 중 이희운에 관한 건 없었다. 이희운이 도와준 것도, 이희운 자취방에 간 것도……. 거기에서 일어났던 일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꺼낼 수 없었다.
“너한테 술을 따르라고 했어?”
나직한 물음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 아, 아니, 그냥 와서 술 마시라고…….”
“…….”
상하의 모두 벗겨지고 없었다. 어느새 하나 남은 속옷으로 긴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튀어나온 앞섶을 스치는 손길에 허리춤이 떨렸다.
“어디 만졌어?”
술을 마시라며 시비 걸었다는 말이 전부였다. 어디를 만졌다고 한 적도 없는데 고정원은 벌써 손님이 나를 만졌다는 가정하에 묻고 있었다. 팔이 끌어당겨졌던 건 사실이라 우물쭈물 털어놓았다.
“팔……을.”
왠지 내가 성추행이라도 당한 것처럼 상황이 돌아갔다.
“아니, 근데 그게 뭐 이상하게 만지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끌어 내려진 드로즈가 발등으로 툭 떨어졌다.
“…….”
태도가 어딘가 냉랭하게 느껴지면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고여 있는 줄도 몰랐던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고정원은 천 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내 하반신을 묘한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거긴 어디였어.”
“……어디?”
“나한테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장소.”
당황하지 않으려 했는데 일순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어, 거기…… 거기가, 가게에 제일 나이 많은 형 있거든. 그 형이 자취하는 데.”
태연한 척 답하며 이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었던 일을 숨기는 걸로 모자라 구체적인 거짓말까지 해 버렸다. 이걸 들키면 나에 대한 고정원의 신뢰가 바닥날 게 분명했다.
후회하는 와중에도 나는 추가적으로 거짓말을 늘어놨다. 그 형에게 평소 도움을 많이 받았다느니. 오늘도 나 때문에 맞아서 미안한 마음에 들렀다 왔다느니. 의심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뵈는 게 없었다.
“…….”
고정원은 반응이 없었다. 가만 쳐다보기만 하는 태도에 주눅 들어 나도 입을 다물었다. 뭔가 알고 있는 걸까. 생각하자 목구멍이 바싹 말랐다. 우리가 쓰는 위치 추적 앱이 뒤늦게 떠올랐다. 전원이 꺼지기 전 마지막 위치는 남아 있을 텐데. 나는 차가워진 손끝으로 가렵지도 않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혹시…… 어플에 뜬 내 위치……. 거기까지, 찾으러 갔었어?”
침묵하던 고정원은 차분한 몸짓으로 시계를 풀었다.
“갔었어. 너무 늦길래.”
울고 싶었다.
“만……났어?”
빤히 쳐다보던 고정원의 눈이 이번에는 가느스름해졌다. 뜻을 파악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누구를?”
“어…….”
“아무도 없던데.”
“…….”
다행히 이희운과 마주치거나 하지는 않은 듯했다. 시야가 까매지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문질렀다. 안심하는 한편으로 여전히 불안감이 널뛰고 있었다. 하나를 숨기니까 그 하나 때문에 숨겨야 할 것들이 불어났다. 숨이 막혔다.
“왜. 거기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
그 말에 하나의 장면이 번갯불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니.”
대답하는 목소리는 짓눌려 있었다.
불행한 확정처럼, 지금부터 모든 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함께 씻고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눕기 전 고정원은 허벅지 멍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그런 다음 여느 때처럼 팔베개를 해 주었고, 나도 여느 때처럼 안겼다.
“잘 자.”
인사한 고정원이 내 이마로 입술을 눌렀다.
“잘…….”
호응하려던 나는 얼굴을 피했다. 이마를 스쳐 입술로 내려오던 고정원이 가만 동작을 멈추자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졸리다…….”
어설프게 수습했다. 자연스럽게 굴었어야 하는데 실수하고 말았다.
“……잘 자.”
다시 인사하고 팔을 둘렀다. 아직까지 고개를 들고 있는 고정원을 끌어당겼다. 목덜미에 입을 맞추자 그제야 고정원은 옆으로 누웠다. 나는 얼굴이 짓눌릴 정도로 품에 파고들었다.
습관처럼 고정원은 내 뒷목을 감쌌다. 두피까지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부어 있어.”
손이 올라오며 후두부를 감쌌다. 오늘 가격당했던 부위였다. 그 위를 쓰다듬는 손길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깨지기 쉬운 걸 만지듯이.
“…….”
코가 맵다 싶었다. 뜬금없이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눈을 꾹 누르고 주먹을 쥐어 비벼 봤지만 그칠 기미가 아니었다.
“쫌 아파서, 머리가.”
이쯤 되니 안 우는 척할 수도 없어서 변명했다.
“아, 창피하게.”
억지로 웃는데 입가가 경련했다. 진정되지 않아 돌아누운 나는 이불을 끌어올려 얼굴을 덮었다. 하지만 금세 고개가 돌아갔다.
“그냥 둬. 너 우는 거 익숙하니까.”
고정원은 조금 얄밉게 말했다.
“아픈 부위가 눌려서 그래.”
변명해 놓고 그 상태로 좀 울었다. 훌쩍거리는 창피한 소리가 이따금씩 방 안을 울렸다. 고정원은 가만히 내 턱을 붙잡고 있었다. 쓰다듬어 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내일…….”
“어?”
“병원부터 가.”
“……응.”
대답하고서 품 안에 안겨 눈을 감았다. 여전히 속이 갑갑했지만 일단은 아파서 우는 걸로 넘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 뒤로 어둠이 익숙해지도록 잠은 오지 않았다. 뒤척이는 것까지 의식해서 악순환이었다. 얼마나 더 그런 상태가 이어졌을까. 자세를 여러 번 바꾸며 고정원과 나는 분리되었다. 눈앞에는 고정원의 등이 있었다. 고르고 느리게 내쉬는 숨을 나는 가만히 구경했다. 흉부가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천천하면서도 크게 팽창하고 있었다. 그러나 꺼질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한숨이 짙게 깔렸다.
아직 잠든 게 아니었구나.
생각하자 더 이상 그 등을 구경할 수 없었다.
“…….”
모든 게 생경했다. 모든 게 그대로인데 전부 다 변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게 이상하고 서글펐다. 어서 밤이 끝났으면 싶었다. 동시에 이대로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싶기도 했다.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는 잠들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병원부터 갔다. 비용도 그렇고 내키지 않았는데 고정원의 주도하에 CT 촬영까지 하게 되었다. 검사 결과 두개골이나 뇌 쪽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단지 표피에 혈종이 잡혀 혹이 나 있다고 했다. 혹을 가라앉혀 주는 약을 처방받았고, 얼떨결에 고정원이 시키는 대로 상해 진단서까지 발급받았다.
“근데, 이거는 왜……?”
“혹시 필요할까 봐.”
고정원은 그렇게만 대답할 뿐이었다. 더 이상 묻기도 뭐해서 잠자코 있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알바 갈 시간 애매해서, 밥은 건너뛰어야겠다. 정원이 너는 점심 여기서 사 갈래? 여기 왜, 우리 저번에 먹었던 도시락 맛있는 데 있잖아.”
“갈 필요 없어.”
“……어?”
“너 다쳐서 못 나간다고 연락해 뒀어.”
“…….”
워낙 뜻밖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연락을 해 뒀다니. 자세히 묻자 이른 아침 내가 자고 있을 때 해결해 두었다고만 말했다. 지나치게 압축된 설명이었다. 마지막엔 통보처럼 덧붙였다.
“서빙 일은 그만두는 걸로 했으니까 앞으로도 나갈 필요 없고.”
“뭐? 갑자기 무슨…… 왜……?”
도착한 차 앞에서 나는 흐리멍덩하게 물었다. 진척되는 상황들이 감이 안 잡혔다.
“…….”
우리는 일시정지된 것처럼 멈춰 서 있었다. 차의 손잡이를 붙들었던 고정원은 등줄기를 세우는가 싶더니 반대로 내게 질문했다.
“계속 나갈 생각이었어?”
“…….”
“그래, 인휘야?”
부드럽게 물었다. 그게 어째서인지 내게는 위협이나 겁박처럼 느껴졌다. 나는 버벅거리듯 어설프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시선이 주변을 헤맸다. 혼나는 기분이었다. 내가 굳어진 걸 눈치챘는지 고정원이 굳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인휘야.”
“응.”
나는 눈도 잘 못 마주치고 대답했다. 짧게 숨을 내쉰 고정원은 달래듯 자상한 음색으로 말했다.
“……안아 주고 싶은데 밖이라 못하겠네.”
“…….”
“고생했어, 검사받느라.”
말하며 어깨를 한 번 주물러 주었다. 안는 걸 대신하듯. 그리고 문을 열어 나를 앉히고, 벨트까지 매 주고 나서야 제자리로 돌아갔다.
멈춰 있던 차는 곧 매끄러운 커브를 그리며 빠져나갔다.
“도시락 사 갈까? 집에서 같이 먹게.”
도로를 내달리기 시작하면서였다. 부정맥처럼 맥박이 뛰었다. 집으로 돌아가 밀폐된 공간에서 단둘이 있을 걸 생각하니까 그랬다. 최악의 상황들이 머릿속에서 멋대로 그려지고 있었다.
“여기 근처에 있는 A타워에서 먹으면 안 돼? 나온 김에 구경도 좀 하고…….”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정신이 팔리기 쉬운, 시끌벅적한 곳. 오락거리가 많은 곳으로 가면 심각한 상황 같은 건 벌어질 리 없었다.
“그래, 그러면.”
다행히 고정원은 내 의견에 따라 주었다.
차질 없이 몇 분 뒤, 우리는 복합 쇼핑센터에 도착했다. 식당가에서는 멕시코 음식집으로 들어갔다. 내가 선택한 곳이었다. 손님이 몰려 있었고, 무엇보다 테이블 간격이 좁은 게 마음에 들었다. 이런 곳이라면 사적인 대화가 나오기 힘들어 보였다.
“와, 이것도 맛있겠다.”
메뉴판을 펼치고 들뜬 기색을 비쳤다. 어제 구토를 해서인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의욕적으로 굴었다. 주문하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내내 떠들었다. 마땅한 화제를 찾지 못해 영양가 없는 잡음만 늘어놓는 식이기는 했다.
“멕시코 사람들 하루 다섯 끼 먹는다는데 진짤까?”
“…….”
고정원은 드물게 잘 호응하지 않았다. 희미하게 웃거나 눈을 내리깔기만 했다. 그런 반응을 보며 갈수록 수렁에 빠지듯 말이 꼬여서 나도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나직한 외마디를 내뱉은 건 고정원이었다.
“아.”
물을 홀짝이던 나는 뭔가 해서 쳐다봤다.
“준다는 걸 깜빡했네.”
코앞으로 쇼핑백 하나가 내밀어졌다. 상단부에 찍힌 상표가 눈에 띄었다. 굳이 쇼핑백을 열어보지 않아도 내용물을 단박에 알았다.
“…….”
내릴 때 뭔가 챙기는 것 같긴 했다. 그게 내 선물일 줄은 몰랐는데. 내용물의 값어치도 그렇고 나를 위해 준비했다는 사실에 도망이라도 치고 싶어졌다.
“열어 봐.”
차마 봉투에 손댈 수도 없었다. 난처했다. 난처하다 못해 서글프기까지 한 심정이었다. 상기되려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이마를 문지르며 물었다.
“이거, 휴대폰…… 아니야?”
“내 거랑 같은 모델로 샀어. 좋다고 했던 거 생각나서.”
당혹스러웠다. 디자인과 기능이 좋기에 부럽다는 식으로 말하기는 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지 사 달라고 했던 게 아니었다.
난감한 몇 분이 흘렀다. 어떻게 해야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거절할 수 있을지 고심 중이었다. 단어를 고르고 고르다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정말 미안한데, 나 이거 못 받을 거 같아, 정원아. 그때 내가 깨진 거 수리해서 쓰겠다고 했었는데……. 잊어버렸어?”
조심스레 거절의 의사를 비추자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굳이 수리 맡길 거 없어. 그 정도로 깨진 건 바꾸는 게 나아.”
고정원은 무심하게 말했다.
“……바꿔도 내가 바꾸려고 했지…….”
“어차피 환불 기간 지났어. 써.”
“…….”
언제 샀기에 환불 기간이 지났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거 언제 산 건데?”
“글쎄.”
눈길을 돌렸던 고정원이 다시 나를 봤다.
“깨졌던 다음 날인가.”
“…….”
조금 허무해지는 대답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비싼 건 나한테 상의라도…….”
“액정 깨진 뒤로 전원 자주 꺼지는 거 알아. 또 고장난 거 핑계로 연락 못 했다고 하지 말고 그냥 써.”
“…….”
억지로 식사하다 목이 메서 물을 마셨다. 맛이 안 난다 했더니 속 재료를 아무 것도 넣지 않고 빵 반죽만 먹고 있었다.
“일부러…… 아니, 아냐. 아무것도.”
하려던 말을 밍숭한 반죽과 함께 삼켰다. 일부러 고장 핑계로 연락을 안 했다는 식의 말이 억울했지만 사실 따질 입장도 아니었다. 뭐든 내 잘못이 맞았다.
삭막했던 식사를 마치고 나왔다. 불편한 위를 문지르다 고정원이 돌아보는 바람에 화들짝 손을 내렸다.
“집에 갈까.”
가자고 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제안이 튀어 나갔다.
“영화 보러 갈래? 이번에 마블 신작 나온 거. 진짜 재밌을 거 같던데.”
짧은 공백 후 좋은 대로 하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식사 때 분위기가 안 좋아 걱정했는데 화난 건 아닌 듯해서 다행이었다.
시네마 있는 층을 향해 몇 층 더 올라가야 했다.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동했다. 다섯 층은 더 올랐을까. 연결된 영화관 구역으로 막 들어선 직후였다. 내 팔을 잡아끈 고정원이 이해되지 않는 소리를 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받기 싫은 거야?”
“……뭐?”
“그렇게 시근덕거릴 만큼 내가 사 준 게 받기 싫은 건가 궁금해서.”
어찌나 당황스러운지 말문이 막힐 뻔했다. 그러나 늦지 않게 알아차렸다. 휴대폰 문제로 신경전을 하고 나와 눈시울을 붉혔으니 오해할 만도 했다.
내 행동이 문제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는 동안, 나는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고정원을 쳐다봤고, 고정원이 피곤하겠단 생각이 시초였다. 나 때문에 어젯밤부터 고생하고 오늘도 연이어 고생이구나. 내가 계속 지치게만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더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이를 악 물어 가며 참고 있었다.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
해명을 하려는데 시작도 전에 막혔다. 너한테 미안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고 털어놓기 어려웠다. 말문이 막힌 나는 우선 이목을 피해 구석진 곳으로 이끌었다.
“내가 표정을 좀, 굳히고 있었던 건 맞는데…….”
변명 거리를 찾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실 아까 갑자기 배가 아팠어서 그랬어. 급하게 먹었더니 잠깐 얹혔었나 봐. 진짜야. 그리고 휴대폰은…… 내가 받기 싫은 게 아니라, 너도 알잖아. 염치없고 미안해서 그러는 거.”
내 해명을 들은 고정원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미안해야 할 건 안 미안하고, 왜 그런 게 미안할까.”
“…….”
“모르겠는데 이번에도 내가 이해해야 돼?”
군더더기 없는 목소리와 어투에 경직되어 바라봤다.
“주면 그냥 받아, 인휘야. 뭐든. 내가 주는 건 그냥…….”
강압적으로 시작한 말은 중간에 한숨으로 한 번 누그러졌다.
“다 받아 줬으면 좋겠어. 어차피 우리 사이에 네 거 내 거, 그런 개념 난 모르니까.”
마지막은 부탁하는 듯한 어조로 끝맺어졌다.
“…….”
가슴에 날카로운 게 걸린 듯했다. 알겠다는 한마디만 끝나겠지만 그 한마디가 가장 힘들었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염치나 관계의 균형 문제만이 아니라……. 나는 이미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정원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 이상이 되면 내가 어떻게 변할지 짐작하는 것만으로 두려웠다.
아예 자기한테 종속되라는 소린가. 무책임하게 무조건 기대라고 하는 고정원이 야속했다.
“생각 없이 주는 대로 다 받고. 너한테 다 맡기고. 다 기대고. 그래서 내가 성인 구실 못 하고 너한테 의존만 하고 아무것도 못 하는 인간 돼 버리면, 그땐 어쩌려고. 너는 그러면 좋겠어?”
“좋아, 나는.”
대답이 너무 쉬워서 그만 당황했다.
“그, 그럼 균형이, 서로 균형이 안 맞잖아. 그럼 너도 나중엔 진짜로 지쳐서…….”
“그러니까 버틸 거 없이 한쪽으로 넘어오면 돼.”
균형 맞출 필요도 없게.
“…….”
말장난이나 다름없는 소리였지만 가슴이 덜컥했다. 볼이 확 달아오른 것도 느꼈다.
“이제 그만 가.”
우겨 대면 말이 통하지 않을 게 뻔했다.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는데 팔뚝이 잡혔다.
“얘기 안 끝났어.”
“……해, 그러면.”
돌려세워진 상태에서 눈길을 피했다. 나올 말을 기다리는데 고정원은 그 뒤로도 가만히 붙잡고만 있었다. 의아하게 올려다보자 눈이 마주쳤다.
“…….”
피로한 눈이 보였다. 지친 듯, 아니면 기가 찬 듯 고정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 아파? 왜 그래……?”
걱정하며 묻자 고정원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너랑 자고 싶어서.”
“…….”
자자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너랑 자고 싶어서 자기도 황당하다는 투였다. 습격처럼 던져진 말 앞에서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수면의 의미가 아니라 성적인 의미라는 게 확실해서 더 그랬다.
“그…….”
입을 열자마자 잡혔던 팔이 놓였다.
“가자, 그만.”
고정원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
커다란 등이 보이자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나는 얼른 거리가 벌어지지 않게 뒤따랐다. 뒤따르면서, 잔열이 남은 팔과 손을 주무르듯 매만졌다.
영화는 원하는 걸 보기 어려웠다. 보려고 했던 것과 그다음으로 볼 만한 것도 매진이었다. 다음 회차도 매진인 데다, 그 이후로는 너무 오래 기다려야 했다. 꼭 특정 영화를 봐야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당장 관람 가능한 영화를 택했다.
상영관은 놀랄 만큼 텅텅 비어 있었다. 앞쪽, 그리고 중간에 두 사람씩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막 광고를 끝내고 오프닝이 시작되려 했다. 고정원과 나는 발권한 대로 맨 뒷자리에 착석했다. 잘 보이냐고 묻는 말에 나는 끄덕여 보였다. 내가 똑같이 잘 보이냐고 묻자 고정원은 어째선지 한참 뒤에야 좋아, 하고 답했다.
느린 호흡으로 시작된 오프닝이었다. 내내 잔잔한 느낌으로 흘러갔다. 배우들도 잘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솔직히 집중이 하나도 안 돼서 나는 계속 딴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생각은 대부분이 그런 것들이었다. 결정적인 실수의 순간과 그에 따르는 후회 같은 것들. 고정원 말을 좀 더 잘 들을걸, 좀 더 조심하고 경계심을 가질걸. 그런 이제 와서 쓸모도 없는 한탄으로 가슴이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사실대로 털어놔야 해.
불쑥 떠오른 생각은 ‘그랬다간 헤어질 수도 있어’ 하고 뒤따른 생각에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 영영 고정원을 못 보게 될 수도 있다는 아주 희미할지도 모르는 가능성만으로 나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건 안 됐다. 헤어지는 건 죽어도 안 됐다.
“추워?”
“……어?”
처음엔 왜 묻는지 몰랐다. 내려다보고 나서야 내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니, 어, 약간.”
몰랐는데 손이 차가워진 상태였다. 고정원은 무릎 위 널브러진 내 손을 사이에 있는 팔걸이로 올렸다. 그리고 꽉 맞잡아 깍지를 꼈다. 체온을 나눠 받은 손은 금방 떨림이 잦아들었지만 어쩐지 흉부가 옥죄듯이 불편해졌다.
“…….”
무감각하게 스크린을 쫓던 중이었다. 지잉―. 가방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무음으로 바꿀 생각으로 손을 뻗던 나는 불시에 동작을 멈췄다. 연락 온 사람이 이희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손끝이 굳어졌다.
“확인해 봐.”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괜찮아. 광고야.”
“보지도 않고?”
“안 봐도 돼, 굳이.”
이어져 있던 손이 풀어졌다. 붙잡고 있던 손을 쭉 뻗은 고정원은 이번엔 내 가방을 뒤졌다.
둑둑둑둑.
거센 고동이 가슴팍을 쳤다. 여기서 말리면 수상해 보일까. 아님 지금이라도 빨리 낚아채야 하나. 그런 갈등으로 초조하게 마르는 사이 휴대폰을 꺼내든 고정원이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곁눈으로조차 엿볼 수 없었다.
“…….”
휴대폰은 곧 가방 안으로 되돌아왔다. 별다른 기색 없이 되돌려 주는 걸로 봐서 정말로 광고거나 별거 아닌 메시지였던 듯했다.
헐떡헐떡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곧 무너질 것 같은 감정의 동요를 숨기며 나는 거의 필사적으로 앞만 봤다.
“재미있어?”
잔잔한 영화는 사운드가 화려하지 않았다. 옆자리의 나직한 목소리가 더 없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재미를 판단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집중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짓말을 했다. 재미없다고 하면 나가자고 할까 봐 이대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왜 나 안 봐.”
안 들리는 척 계속 스크린만 쳐다보며 ‘응?’ 하고 대꾸했다.
“보기 싫은가 봐.”
장난인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어서 얼굴을 마주했다.
“아니…… 영화 보고 있으니까 그러지. 너도 얼른 봐. 집중하면 재밌어.”
고정원이 웃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빤히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거짓말을 잘하지.”
“…….”
잘못 들은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인휘야.”
어둑한 시야의 프레임으로 싸늘하게 굳은 눈빛이 가득 찼다.
“이희운이 너한테 왜 미안해?”
“…….”
마침내였다.
그 안에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심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