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연애의 비밀 (3)(외전 2) (18/30)

6. 연애의 비밀 (3)

통로가 한 번 트이자 많은 것들이 기억났다. 나는 일하러 나와서도 수시로 생각에 잠겼다. 곱씹을수록 자세한 장면들까지 복구되는 듯했다.

“…….”

때마침 불쑥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정리하다 말고 나는 카페 한구석에 머리를 박았다. 왜 그랬을까. 고정원한테 창피한 짓을 했다. 울면서 매달린 행동, 여과 없이 뱉은 본심들이 떠오르자 괴로워서 눈이 꽉 감겼다.

‘나한테 돈 좀 그만 써, 제발…….’

‘뭐?’

‘헤어진다잖아, 사람들이……. 나중에 지쳐서 헤어진다고…….’

횡설수설하는 걸 고정원은 불평 한마디 없이 들어 주었다. 나는 짧게 끝내지 않고 안겨서 한참이나 더 불안을 토해 냈다. 김강우에게 들었던 설교나, 그날 후배들에게 들었던 연인 간 균형에 관한 이야기까지. 흘려듣는다고 한 게 사실은 쌓여 있었는지 멈춰지지 않았다. 고정원은 무시하지 않고 꼬박꼬박 반응해 주었다.

‘그런 생각 하는지 몰랐어. 우리가 겨우 그런 걸로 헤어질까 봐 무서워했어?’

나를 어르고 달랬다. 웃겨 주고 싶었던 건지 엉뚱한 소리도 했다.

‘차라리 다른 걱정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내가 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면 어떡할 건지. 거기서 너랑 나랑 단둘이서만 살자고 하면 어떡할 건지.’

‘내가 정말…… 너밖에 모르는 정신병자라면 어떡할 건지.’

‘그런 걱정을 해 봐, 인휘야.’

고정원이 다정할수록 서러운 감정만 깊어졌다.

‘몰라, 안아 줘…….’

건물 사이에서 칭얼댔다. 성인 남자가 어린애처럼 매달려 비벼 대는 꼴이라니. 만약 내가 목격했다면 경악하고 소름 끼쳤을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런 걸 생각할 겨를 없이 취해 있었다. 단순히 술뿐만 아니라 격해진 감정에도. 그리고 고정원은 언제나처럼 이목을 신경 쓰지 않았다. 질질 짜느라 더러워진 내 얼굴에 입을 맞추고 안도감이 들 때까지 안아 주었다.

회상을 끝내고 고개를 들었다. 카페 안은 딴짓을 해도 될 만큼 한가했다. 나는 카운터 근처의 스탭용 의자에 앉았다. 울컥거리는 건지 울렁거리는 건지 모를 가슴께를 문질렀다. 그리고 이내 구비된 종이에 무언가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동할 때 만들어야지, 아님 시도도 못 할 것 같아서.

“…….”

무턱대고 글자부터 써넣기로 했다. 뽀뽀 쿠폰이 제일 무난하겠지. 기본적인 것부터 해 놓고 나머지는 아이디어가 생길 때마다 만들면 될 것 같았다.

막상 만드는 사이 열심을 내게 됐다. 나는 어느새 메모지의 가장자리에 테두리까지 그려 넣고 있었다.

“……되게 어렵네.”

몇 번의 실패 끝에 쿠폰 몇 장이 완성됐다. 오그라드는 내용의 쿠폰은 손수 제작한 탓에 허접해 보이기까지 했다. 좋아할진 모르겠는데 보고 웃기는 할 것 같았다. 솔직히 웃어 주면 그걸로 성공이었다.

“…….”

실실거리다 말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불청객처럼 착잡함이 들이닥쳤다. 그날, 어쩌다 이희운이 등장해서 그런 대화를 나누게 된 건지는 아직 몰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억이 없으니 답답했다.

고정원은 이희운한테 선을 지키라고 했다. 볼 수 있게 해 줄 때 선을 지키라고. 무엇보다 그 말이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시력을 못 쓰게 한다니. 그렇게까지 폭력적인 말을 한 이유가 뭐였을까. 짐작도 안 됐다. 차라리 전부 왜곡된 기억이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어투까지 녹음된 것처럼 선명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남자끼리란 자각이 있으면 더 조심하는 게 맞지 않나요.’

이희운이 했던 말이었다. 우리 사이를 들켰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 말에서 미뤄 보면 우리가 사귀는 걸 알 만한 결정적 장면을 목격한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울면서 고정원한테 안겨 있었으니 가능성이 다분했다.

적당히 마실 걸 그랬다고 후회해 봤자였다. 나는 양손으로 눈두덩이를 짓눌렀다. 짙은 한숨이 나왔다. 이따 고깃집에서 만나면 뭐라고 설명을 하지. 이희운에게 마땅히 해야 할 해명이 떠오르지 않아 암담했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안 되게 해야지 싶어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무거운 책임감과 빽빽이 짙은 자기혐오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경직된 어깨가 내려간 건 식사 타임이 되어서였다. 이희운은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되자 내 맞은편으로 앉았고, 사람들과 잡담에 어울리면서 내게도 평범하게 말을 건네 왔다. 마주한 눈빛에서는 혐오감도 불쾌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로서는 일단 그게 안심이었다. 한숨 돌리고 식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오늘 얘 눈치를 봐요?”

“예?”

나는 떨떠름하게 반문했다. 질문한 사람은 옆에 앉은 형이었다.

“아니, 볼 때마다 계속 힐끔힐끔 눈치 살피고 있는 거 같아서.”

그렇게 알기 쉽게 굴었나 싶어 당황스러워지던 참이었다. 이희운이 대뜸 끼어들어 말했다.

“제가 얼마 전에 차였거든요.”

“어?”

“연애 문제로, 형한테 상담 좀 했었어요. 아무튼 제가 계속 다운돼 있으니까 신경 써 주시는 거 같은데, 형, 저 이제 괜찮아요.”

“아…… 으응, 그럼 다행이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사실도 아니었다. 내가 왜 그러는지 알면서 곤란해하지 않게끔 변명해 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배려하고 수습해야 하는 입장이 바뀐 것 같아 고마우면서도 면목 없었다.

다들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나는 혼자 생각이 많아져서 조용히 밥만 먹었다.

“아, 진짜로? 그 사람들 게이였어요?”

“난 들어올 때부터 딱 알겠던데.”

원치 않게 청각이 곤두섰다.

“분위기부터 달라. 그리고 걸음을 이러고 걷는데 어떻게 몰라.”

연장자인 사람이 희화화해서 흉내 내자 좌중에서 웃음이 터졌다.

“솔직히 역겹긴 하더라.”

“역겹죠, 당연히. 걔네 완전 더럽고 문란하고, 사회 암적인 존재들이잖아요.”

옛날이었으면 생각 없이 넘어갔을 발언이었다. 지금은 확고하게 불편함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이의를 제기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더럽다고 할 만한 사람들은 어느 집단에나 있죠.”

이희운이 한 말이었다. 담백한 투로 끼어든 한마디에 다들 젓가락질을 멈췄다.

“여자 친구나 와이프 있으면서 주기적으로 성매매하고. 틈만 나면 새로운 여자 만나서 성병 퍼뜨리고 다니고. 그런 남자들은 정말로 사회 암적인 존재들이니까.”

말한 당사자인 이희운은 표정부터 가벼웠다. 단지 주위 사람들만 굳어져 식사 자리는 어느새 냉기가 흘렀다.

“그렇다고 남자들이 다 그렇게 역겨운 건 아니잖아요. 아, 형 혹시 성매매 같은 거 해요?”

단순한 취향을 묻는 것처럼 스스럼없는 질문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신이 나서 떠들어 대던 사람이 안면을 확 굳히며 질색했다.

“미쳤냐. 난 더러워서 그런 데 안 가.”

다들 파고들긴 싫은 부분인 듯했다. 곧장 다른 이야깃거리가 등장하며 묘했던 분위기가 무마되었다. 나는 겨우 컵을 들어 깔깔하게 멘 목을 축였다. 컵을 내려놓을 때는 이쪽을 보고 있던 눈과 마주쳤다.

“…….”

이희운의 표정은 꼭 그랬다. 내가 괜찮은지 안색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멋쩍어진 내가 시선을 피하자 묵묵히 다시 밥을 먹었다.

나는 제대로 먹지 못했다. 여러가지 의미로 얹힐 것 같았다. 무엇보다 미안한 마음 때문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는 이희운이 어떤 애인지 겪어 봐서 알고 있었다. 그랬으면서 지레 겁먹고 나쁜 쪽으로 우려했던 게 미안했다.

식사 후에도 속 깊은 배려가 이어졌다. 인휘 형,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이희운이 나를 가게 뒤편으로 이끌었다.

“저기, 형이 왜 자꾸 제 눈치 보시는지 알겠는데…….”

낮춘 목소리는 겨우 들릴 정도의 크기였다. 이희운은 주저하듯 하면서도 확실하게 의사를 전했다.

“걱정 안 해도 돼요. 저 그런 사생활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 정도로 제정신 아닌 놈 아니에요. 그리고 어차피 전 무슨 일이 있든 형 편이고, 애초에 저도…….”

사이로 잠시 정적이 생겼다 사라졌다.

“다른 말을 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그것만 알아주셨으면 해서요.”

무거운 가슴팍이 들썩였다. 그만 일하러 가 보겠다고 말하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이희운은 지체 없이 홀로 돌아갔다. 나는 잠시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다 뒤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세팅하느라 그릇을 옮기는 중이었다. 손이 갑자기 수전증처럼 떨리길래 놀랐다. 최대한 침착하게 마무리하고 나자 어쩐 일인지 남은 힘마저 쭉 빠졌다. 진이 다 빠진 듯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긴장의 끈을 놓았다는 걸 깨달았다. 방금 있었던 이희운과의 대화 이후 완전하게 안심한 상태가 된 것 같았다.

솔직히 많이 무서웠다. 행여 소문이라도 날까 봐 노심초사했다. 고정원이 어떤 피해라도 입게 될까 봐. 그게 우리 관계에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봐.

생각지도 못했던 따뜻한 배려였다. 방어벽처럼 쌓아 두었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진 것 같았다. 안도를 넘어서서 위로를 받은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희운에게 잘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꼭 돕겠다고. 일을 하는 내내 속에 새겨 넣듯 몇 번이나 다짐을 반복했다.

휴식이 지나고부터는 몰아치듯 바빴다. 익숙해졌다곤 해도 손님이 연이어 몰려들자 처음 겪는 일처럼 우왕좌왕이었다. 순서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해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까다로운 요구가 끼어들게 되면 체력적 정신적 소모는 배가 되었다.

“우리 거기 말고 여기 앉고 싶은데.”

안내해 드린 손님이 다른 자리를 가리켰다. 막 손님들이 빠져나가 지저분한 테이블이었다.

“아, 네.”

대답한 나는 쫓아가 급하게 치웠다.

“아, 근데 여기 자리가 좁네. 그냥 저기로 앉을게, 괜찮지?”

치운 자리에 앉자마자 손님이 변덕 부렸다. 어쩔 수 없이 세팅된 식기들을 한 번 더 옮겼다. 급하게 옮기느라 물통이 넘어질 뻔하자 거슬렸는지 비꼬는 말이 날아들었다.

“뭐, 자리 바꿨다고 짜증 내나?”

“아뇨. ……죄송합니다.”

그 뒤로도 지나갈 때마다 나를 불렀다. 술을 더 가져다 달라거나 반찬을 더 가져다 달라거나. 사소한 주문이었다. 벨을 누르면 근처의 직원이 갔을 텐데 굳이 내게만 시켰다. 한 번은 정신없어서 응답하지 못하고 지나치자 큰 소리로 욕설을 섞기도 했다.

다른 손님들로부터도 불만이 많았다. 주문이 늦는데 언제 나오냐. 고기 양이 적어진 것 같다. 컵이 더러우니 바꿔 달라. 다소 유난한 불평과 요청 등이 한꺼번에 몰렸다. 겨우 한숨 돌릴 정도로 해치우자 어느덧 먹은 밥은 흔적도 없이 소화돼 있었다.

“와, 여기 장사 잘되네. 안 힘들어요?”

자리를 치우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붙였다. 돌아보자 웬 남자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익숙해서 누군가 했더니 그 손님이었다. 변덕스럽게 자리를 바꾸고, 꼬투리 잡아 언짢은 티를 내던 그 손님.

“밥은 먹고 해요?”

욕설을 섞던 험악함은 어디로 가고 친근하게 굴고 있었다. 손님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라 나는 조용하게 대꾸했다.

“예, 저희 중간에 밥 먹는 시간 따로 있어요.”

“아아……. 근데 몇 살? 너무 어려 봬서.”

남자가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었다. 취기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눈빛부터 어딘가 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저 20대예요. 성인 맞습니다.”

구체적인 나이를 알리고 싶지 않아 뭉뚱그렸다. 그 맞은편 앉아 있던 다른 남자가 실실거리며 물었다.

“우린 몇 살로 보여요?”

곤란하기만 했다. 잘 모르겠다고 말꼬리를 흐리고 돌아섰다. 바쁜 건 맞지만 보기보다 더 바쁜 척 동작을 빨리 했다. 너저분한 음식물 쓰레기와 그릇들을 서둘러서 날랐다.

더 이상 말을 붙여 오지 않는 것에 안심하며 자리를 뜨려던 순간이었다.

“……맛있게 생겼네. 남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했다.

“…….”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돌아보았다. 남자는 테이블 밖으로 내민 다리를 건들거리며 술을 기울이고 있었다. 시선은 이쪽을 향한 채였다. 팔부터 손목까지 이어지는 뱀 문신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독특한 느낌이었다. 헤어스타일도 옷차림도, 그 나이대 흔한 직장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와서 한잔 마시고 해요. 힘든데.”

“예? 아뇨, 안 돼요.”

황당한 제안에 손사래 쳤다.

“사장 무서워서 그래? 뭐라고 하면 내가 따져 줄게.”

불쑥 다가와 팔을 잡아끌었다. 끌려간 나는 엉덩이를 뒤로 빼며 사양했다. 내가 잡힌 팔에 힘을 주자, 남자도 똑같이 힘을 더했다. 여기서 잘못 움직였다가는 자칫 몸싸움이 될 것 같아 제대로 반항할 수도 없었다. 한 번도 처해보지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며 나는 쩔쩔맸다.

조금 뒤 다른 손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마지못해 술을 마셨을지도 몰랐다.

“손님, 취하셨는데요.”

난입한 목소리를 따라 모든 고개가 들렸다.

“알바생한테 술 권하시면 안 돼요. 조용히 드시다 가세요.”

저지한 사람은 이희운이었다. 싸늘해진 눈으로, 경고하듯 손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님이 붙잡고 있는 내 팔 위로 무겁게 손을 얹었다.

“…….”

소란하던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다만 한껏 치켜뜬 눈초리로 이희운을 노려보았다. 지켜보고 있자니 심장이 졸아들었다. 불량한 눈빛은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섬뜩했다. 내 팔을 붙든 남자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고, 그 위를 감싼 이희운의 손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일촉즉발의 아슬아슬한 대치에 두통마저 느껴지려 했다.

싱거운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미안하네, 우리가 취해 가지고.”

입꼬리만 부자연스럽게 끌어 올린 남자가 말했다.

“가서 일 봐.”

그 말을 끝으로 손아귀가 풀리자 나는 겨우 안심했다.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흉곽을 부풀렸다 꺼뜨렸다.

뻐근한 팔을 주무르고는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지저분한 테이블로 돌아가 치울 것들을 이동식 카트에 옮겨 담았다. 제가 할게요. 이희운이 서빙 카트의 손잡이 부분을 잡으며 말했다. 서로 하겠다고 시간을 끄는 것도 좀 그래서 순순히 양보했다.

주방에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불현듯 이상한 느낌을 받고 돌아섰을 때 나는 두 눈을 한껏 치떴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쟁반을 들고 쫓아오는 남자가 보였다. 가속을 붙여 이희운 쪽으로 달려오는 걸 보고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달려들었다.

탕!

둔중한 통증이 번졌다. 골 전체가 흔들리는 걸 느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손님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가게 안을 울렸다.

“형!”

아찔한 충격이 지나고 나자 눈이 뜨였다. 어질거리긴 했어도 별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눈앞에는 무척이나 놀라고 기겁한 얼굴이 보였다. 이희운은 나를 내려다보고, 나와 눈을 마주치고 나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야, 희운……!”

말릴 새도 없었다. 무거운 주먹을 휘두르는 이희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퍽, 퍽, 퍽……!

처참할 만큼 가격당하고 있었다. 붙들린 남자의 몸이 헝겊처럼 흔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일행이 가담했다. 셋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이희운을 가격하자 굳어져서 지켜보던 알바생들도 뛰어들어 말렸다. 욕설과 고함, 한데 섞여 부딪히는 소리, 식기가 쏟아지며 깨지는 소리들로 혼란해졌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남아 있던 손님들도 눈치 보며 자리를 떴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잡고 간신히 일어났다. 말리기 위해 휘청거리면서도 난장판에 끼어들었다. 그러는 사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몇 대를 더 맞았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다급하게 외치는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만취한 사람들을 상대로 상황을 정리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 *

정신 차려 보니 경찰서까지 다녀와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는지 몰랐다.

“제정신이야, 새끼들아?! 손님이 취했으면 그냥 고분고분 맞춰 주고 돌려보내야지 패싸움을 해? 하, 나…….”

이희운에게 맞은 손님은 부상 정도가 심했다. 문제가 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빠르게 쌍방 합의를 보고 나올 수 있었다. 이희운도 일행 셋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상처가 꽤 컸던 데다 상대 측 남자가 전과가 있는 사람이었다. 후방에서 했던 선공격에 싸움으로 번지기까지의 태도까지. 우리에게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릇 다 박살 난 거 어쩔래, 니네.”

문제는 사장님과 가게 상황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다 구경시키고, 홍보 대단들 해, 아주? 야, 이희운 넌 알바 주제에 앞뒤 분간 못 하고 어디서 성깔을 부려. 누구 장사 말아먹으려고. 가게 매출 떨어지면 네가 책임지고 메꿀 수 있어, 어?!”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씨발 죄송할 일을 왜 벌이냐고, 왜!”

열이 있는 대로 오른 사장이 이희운의 뺨을 연속으로 후렸다. 경악한 나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중재했다. 그렇잖아도 다치고 지친 애한테 손찌검까지 하는 건 아니었다.

“저기 사장님, 그렇다고 때리실 건…….”

항의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이희운이 가로막았다.

“사람 구해졌다고 들었는데, 내일부터 그만 나오겠습니다. 지금까지 일한 돈은 변상해 드리는 차원에서 안 받는 걸로 할게요.”

더러워서 못 받겠네요. 중얼거린 이희운이 핏물 밴 입술로 요구했다.

“아, 그리고 저는 몰라도 인휘 형 급여 계산은 제대로 해 주세요. 혹시 이 일 핑계로 차감하거나 안 주시면 그땐 저희도 법적 대응 할 테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부탁드리겠습니다.”

“허, 이 새끼 말하는 거 완전 어이없네…….”

사장은 기가 찬 표정으로 헛숨을 뱉어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묵례한 이희운은 사물함에서 제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안절부절못하던 내가 표정을 살피자 인상을 찌푸린 사장에게서 나가라는 손짓이 돌아왔다. 나도 마찬가지로 꾸벅, 고개만 숙이고 짐을 챙겨 나왔다.

“이희운!”

앞서 가고 있는 이희운을 불러세웠다. 무시하고 몇 걸음 더 나아가던 이희운은 내키지 않는 것처럼 한숨을 내쉬고는 멈춰 섰다.

“너 왜…….”

타박하려던 입이 굳어졌다. 거리의 네온사인에 비친 이희운의 새삼스러운 몰골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성한 곳 없이 멍들고 찢기고 피딱지 생긴 얼굴은 현란한 동시에 몹시도 음울했다. 차마 괜찮냐고 물을 수도 없을 만큼.

“……응급실부터 가자.”

어깨를 붙들어 이끌자 이희운이 뿌리쳤다.

“됐어요, 오늘은. 다음에 제가 알아서 갈게요.”

“…….”

표정에서부터 피로감이 전해져 왔다. 노동만으로 버거웠을 텐데 싸움에, 경찰서에, 마지막엔 욕먹고 손찌검까지 당했으니 얼마나 고단할까 싶었다.

“그래도 일단 따라와. 약국은 가야 돼, 너.”

이번에도 뿌리칠까 봐 엄격하게 말했다.

“형 말 들어라.”

쐐기를 박고서 먼저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

따라오지 않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돌아보자 그래도 이희운은 얌전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휴대폰으로 검색을 했다. 약국을 찾는데 이 주변에는 늦게까지 영업하는 약국이 보이지를 않았다. 그냥 돌려보내는 민망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계속 찾아봤지만, 그나마 가까운 24시간 약국은 버스를 타고 적어도 몇십 분 가야 하는 거리였다.

방황하다가 차선책으로 택한 곳은 편의점이었다.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연고와 밴드를 고르고, 배를 채울 만한 것들도 몇 개씩 골랐다.

“너도 먹고 싶은 거 골라.”

말해도 이희운은 아무것도 고르지 않고 그저 멀뚱멀뚱 지켜보고만 있었다.

편의점을 나오자 이것저것 담긴 봉투가 묵직했다. 완전히 말수를 잃은 이희운은 사거리로 나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세요, 형.”

이대로 갈 생각은 아니었다. 같이 있으면서 좀 다독여 준 뒤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나를 도와주다가 온갖 고초를 겪은 후배에게 최소한 그 정도는 해 주고 싶었다.

“너 자취하는 데 어디야?”

묻는 말에 내내 잠겨 있던 이희운의 논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네?”

“이거, 같이 먹어야지.”

흔들어 보이자 시선이 내 손에 들린 봉투로 내려갔다. 어쩐지 멍해 보였다.

“그거…… 저랑 먹으려고 산 거예요?”

“어. 그래서 내가 먹고 싶은 거 고르라고 했잖아.”

입을 무겁게 닫고 있던 이희운은 곧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스스로 머리칼을 흩뜨리며 후회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방 더러운데……. 치우고 올걸.”

“잘 보일 사이도 아니고, 오버한다. 얼른 가자. 슬슬 배고파진다.”

재촉하자 이희운은 말없이 앞서나갔다.

자취방은 10분만에 도착했다. 그 앞에서 나는 10분을 추가로 더 기다려야 했다. 이희운은 청소를 해 놓고 나서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더럽든 말든 보통 남자들끼리 신경 안 쓰는데 이희운은 털털해 보이는 녀석이 의외로 이런 데서 민감했다.

들어가 본 방은 생각보다 굉장히 좋았다. 가구도 그렇고, 몇 번 가 봤던 동기들의 자취방보다 훨씬 꾸며 놓고 사는 느낌이 났다. 조급하게 살림살이를 맞추느라 너저분했던 내 자취방과도 수준 차가 상당했다.

전체적인 색감은 브라운으로 통일돼 있었다. 침대 근처로 조명을 밝혀 놔서 그런지 아늑했다. 책상, 거울, 수납장 등 각각 디자인이 기본적이고 군더더기 없었다. 낮은 침대 옆으로는 그물 형태의 철제 파티션이 설치돼 있어 잡다한 물건들이 소품처럼 걸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실용적이면서 깔끔했다.

“좋다.”

“……좋긴요. 아무데나 편한 데 앉아 계세요.”

바닥에 앉아 봉투에 든 음식들을 밖으로 꺼냈다. 그동안 이희운은 분주하게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며 어쩐지 산만했다.

나는 계속 신경 쓰였던 휴대폰을 열어 보았다. 다행히 고정원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도착해 있지 않았다. 연락 없을 시간이기는 했다. 경찰서를 다녀오는 난리까지 겪었지만 아직 아르바이트가 끝나기까지 한 시간 정도 이른 시각이었다.

남은 배터리 용량이 간당간당했다. 저번에 떨어뜨려서 액정이 망가진 뒤로 이상하게 배터리가 빨리 닳는 증상이 생겼다. 이러다 멋대로 꺼질 때도 있었다.

“희운아, 혹시 너 폰 어디 거 써?”

“저 S사 거요.”

“아, 알았어.”

안타깝게도 맞는 충전 단자는 못 구할 것 같았다. 원래 나도 가지고 다니는데 오늘은 아침에 바빠서 깜빡했다. 남은 배터리를 보며 나는 서둘러 메시지를 작성했다.

[오늘은 안 데리러 와도 될 거 같아 ㅠ]

[사실 가게에 좀 일이 생겨서 ㅠ]

[자세한 건 집에 가서 말해 줄게]

[배터리 때문에 연락 안 될 수도 있어]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서 하나 더 보냈다.

[이따 봐 자기]

큼직한 하트 이모티콘까지 덧붙이고 나자 기막힌 타이밍으로 휴대폰이 꺼졌다. 나는 까맣게 암전된 액정을 보며 불안감에 잠겼다. 하지만 충전을 해서 연락이 된다고 하더라도 불안한 건 마찬가지일 듯했다. 지금 상황 자체가 고정원이 싫어할 만한 상황이고, 이희운과 이렇게 있는 게 전에 했던 약속을 깨는 행동이라 실은 무척 초조했다. 정말 특수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래도 이해해 주겠지만…….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조금만 있다가 집으로 가면 되니까, 지금은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배고플 텐데 먼저 먹고 계시죠, 왜.”

주방에서부터 이희운이 컵을 가져왔다. 뒤쪽으로는 들어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없었던 웬 초 같은 게 켜 있었다. 부산스럽게 뭘 하나 했더니 저걸 켜느라 그런 모양이었다.

“뭐야, 저거?”

“그냥, 선물 받은 건데 저도 처음 켜 봐요. 공기 정화 해 준다고 하길래…….”

달달한 과일 향 같은 게 나는 것 같았다. 나는 킁킁거리다 말고 꺼내 두었던 연고와 밴드를 이희운에게 건넸다.

“약 발라, 얼른.”

“형은, 머리 괜찮은 거예요? 어디 봐요.”

이희운은 다가와 내 후두부를 살폈다. 처참한 얼굴을 하고선 남의 안 보이는 상처나 챙기는 꼴이었다.

“……혹 났네요. 형, 혹시 조금이라도 머리 아프거나 속 울렁거리거나 해요?”

“아니, 전혀.”

“아무튼 최대한 빨리 병원 진찰받아요. 머리 다치는 건 진짜 위험해요.”

걱정스럽게 말한 이희운이 속에서 치미는 숨을 내쉬었다.

“그 미친 새끼가 진짜 사람 머리를…….”

찌푸린 얼굴과 목으로 단숨에 핏기가 돌았다. 나는 그걸 보고 있다가 툭 내뱉었다.

“미안하다, 내가.”

“형이 뭐가요?”

“그냥…… 다.”

잘 따르는 동생이라 잘해 주고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정반대로만 흘러가는 상황들이 미안하고 아쉽기만 했다.

“…….”

이희운은 말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손을 뻗어 탁자 위의 과자 봉지를 부스럭거리며 벗겼다. 이희운은 과자 한 조각을 입 안에 넣더니 또 하나를 집어 이번에는 내 입에 넣었다. 나는 무심코 받아먹었다.

“제가 형한테 미안하죠. 손님 응대도 그렇고, 못 참고 죽어라 팼으니까.”

“야, 그건…….”

“더 정확하게는 미친놈 하나 때문에 우리가 피해 본 거고요.”

“……어.”

혹시 자책할까 봐 나는 한 번 더 강조했다.

“근데 너는, 하나도 잘못한 거 없으니까.”

알아요, 하고 희미하게 웃어 보인 이희운은 몸을 일으켰다.

“저 약 좀 바르고 올게요.”

“어어, 그래.”

혼자 남은 동안에는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 한 면에는 사진들이 꽤 많이 붙어 있어서, 헤매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쏠렸다.

친구들과 찍은 사진, 외국 거리를 배경으로 한 독사진, 직접 찍은 걸로 보이는 풍경 사진. 그중에 모퉁이에 있는 사진이 눈에 띄었다. 산 정상에서 찍은 단란한 가족사진이었다.

밴드를 붙이고 나오는 이희운을 보며 나는 사진을 가리켰다.

“부모님 사이 되게 좋아 보이신다.”

부모님이 양 볼을 맞대고 찍으셨기에 한 소리였다.

“……좋으셨어요, 그때는.”

무심한 대꾸에 나는 굳어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집안에 일이 있다고 했던 게 한 발 늦게 생각났다. 난처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이희운이 운을 띄웠다.

“저번에 왜 공원에서, 제가 집안 돈 문제 얘기 꺼냈었잖아요.”

“아, 응.”

이희운은 입꼬리 한쪽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최근에 저희 엄마가 삼촌한테 보증 서 준 게 문제가 돼서…….”

심각한 내용이었지만 덤덤하게 흘러나왔다. 듣고 있자니 우리 집 사정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급격하게 경제적 상황이 나빠진 것. 돈 때문에 부모님 사이가 틀어지신 것 등. 공감되는 사정이 많아서 나도 진지하게 들었다.

“아빠가 돈에 민감해졌어요. 내가 알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러다 보니까 돈이 뭔지, 가족이 뭔지. 되게 회의적으로 변하게 되더라고요.”

그걸로 물꼬가 트이면서 여러 이야기가 오가게 되었다. 주로 내가 들어 주고, 이희운이 말하는 쪽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세도 점점 편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먹다가, 얘기하다가, 편안한 분위기였다.

어느 정도 쏟아내자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이희운이 입을 다물었다. 안락한 침묵이 잔잔하게 깔려 있었다. 힐끗 살펴 본 얼굴은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 보였다.

“형은 사람을 되게 편하게 해 주는 거 같아요.”

“……내가?”

“얘기도 되게 귀 기울여서 잘 들어 주고.”

겪어보지 않은 이야기에 섣부르게 참견할 수 없었다. 말재주도 없어서 할 수 있는 건 호응하며 들어 주는 것뿐이었다. 재주도 능력도 아니지만 그래도 편함을 느꼈다니 다행이었다.

“형, 저 운동 그만둔 거…… 왜 그만뒀는지 기억하세요?”

이희운이 넌지시 물었다. 한 손으로는 후드 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 코치님이랑 안 좋은 일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이희운이 고개의 방향을 틀자 마주 보는 구도가 되었다.

“기억하시네요.”

“응.”

“저 그때…… 정말로 넌더리 나게 싫었거든요. 그런 강압적인 방식도 그렇고, 습관적인 폭력 같은 것들도 그렇고. 저희 아빠도 상당히 가부장적인 분이라 어려서부터 익숙하긴 했는데…… 그래서 더 넌더리 났을 수도 있고요.”

먼 곳을 바라보듯 생각에 잠긴 눈이 보였다.

“근데 아무튼, 사실 그만두기까지 그게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어요.”

“그럼?”

“……제일 결정타는 부상 때문에요.”

이희운은 크게 헛기침을 뱉었다. 그리고 운동을 그만두게 된 더 큰 이유에 대해 차근히 설명했다. 들어보니 안타까운 사연이 또 있었다. 잦은 부상으로 발목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릎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배경이었다.

“한동안은 ‘부상’이라는 단어만 봐도 힘들었어요. ‘발목’이나 ‘무릎’이나 뭐 그런 관련 있는 단어들만 봐도 속이 울렁거리고.”

“…….”

“사람들한테도 솔직하게 말이 안 나와서……. 언젠가부터 제가 싫어서 그만둔 것처럼 얘기하고 있더라고요. 저 나름 트라우마였던 거 같아요. 너무 하고 싶었고 너무 원했던 일이라, 못하게 됐을 때 충격 같은 게 컸겠죠, 아무래도.”

힘들었겠다, 하는 틀에 박힌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가 제일 허무해요. 멀쩡한 다리로 훈련도 받고, 대회도 나가고…… 그런 꿈꾸다가 깼을 때. 진짜, 하루 종일 이상해요 기분이.”

이희운은 초점이 사라진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 힘든 얘기를 꺼내면서도 내내 웃어 놓고 처음으로 웃지를 않았다.

마음이 안 좋았다. 그동안 애써 밝게 행동하려고 노력했구나 싶었다. 솔직히 나는 이희운의 좌절감이 뭔지 몰랐다. 살면서 그렇게 뭔가를 원해 본 적도, 하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잘 이해할 순 없지만서도……. 만약 ‘간절히 원하는 것’의 대상이 사람이 된다면 그 고통이 어떤 건지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손을 뻗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꼭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길래 나도 모르게 머리통도 쓰다듬어 줬다. 이희운은 위로받는다는 걸 아는지 고분고분 가만히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타이밍이 좀 애매했다. 시간이 벌써 한 시간가량 흐른 게 보였다. 서랍 위에 놓인 전자시계를 확인하자 잊었던 초조함이 살아났다. 슬슬 갈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레 머리에서 손을 떼어 냈다.

탁.

손이 붙잡히는 바람에 강제로 동작이 멈췄다. 일어나려다 말고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왜 이러나 싶어서 입을 떼려는데 이희운이 말했다.

“계속, 해 주세요.”

꺼풀이 벗겨진 듯한 목소리였다. 갈라진 음성과 삽시에 충혈된 눈을 본 나는 숨을 삼켰다. 이희운이 다가오며 거리를 좁혔다. 붙든 내 손을 자기 머리로 이끌면서.

“어…….”

나는 당황하면서도 더듬더듬 손을 움직였다. 이희운의 벌게진 눈시울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힘든 상태였나. 위로받을 데가 없었나 보다 하고 생각하자 장난스럽게 반응할 수도 없었다.

“…….”

서로가 상당히 불편한 자세였다. 내 쪽으로 다가온 이희운의 발치 밑으로는 작은 탁자가 놓여져 있었다. 그 탓에 이희운은 다리를 구부려야 했고, 내 팔 밑으로 들어오느라 넓은 어깨도 구부려야 했다.

나는 강아지 같단 생각이 들었다. 시골에 사시는 삼촌네 백구 생각이 났다. 사람을 좋아하는 그 개는 짧은 줄에 목이 걸려 켁켁거리면서도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고 갖은 애를 썼었다. 쓰다듬어 주면 언제까지고 손길을 받으려고 어떤 자세든 마다하지 않았다.

만져 주면 발라당 뒤집어져 좋아하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었는데. 잘 지내나 문득 궁금해졌다. 삼촌이 오지로 이사를 가신 뒤로는 근황을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의식이 퍼뜩 돌아왔다. 손 위로 겹쳐지는 체온을 느낀 직후였다. 내 손을 감싸 잡는 이희운의 마디 굵은 손이 보였다. 손끼리 한데 겹쳐지고, 그 모습이 이질적인 장면처럼 위화감을 조성했다.

그리고 이어지듯, 혹은 끊어지듯 시야가 어두워졌다.

“…….”

뭐지.

방금.

무언가가 입술을 짓눌렀다. 연고 냄새가 났던 것 같기도 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게 분명 내 입술에…….

사실을 제대로 자각하기도 전에 한 번 더 입술에 동일한 감촉이 닿았다.

주저하는 듯한 숨결이 느껴졌다. 묶어 놓듯 강렬하게 주시해 오는 시선도. 한참이나 참아 낸 것 같은 숨이 하아, 떨리며 쏟아졌다.

뭐야, 이게.

두터운 손이 허리를 감쌌다. 닿는 체온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입술이 당겨졌다. 아니, 빨렸다. 벌어진 줄도 몰랐던 안으로 부피를 가진 무언가가 진입한 순간이었다. 나는 꽁꽁 묶인 것처럼 움직일 수 없던 충격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퍽, 하고 힘껏 밀어낸 반동으로 상체가 튕겨져 나갔다.

“…….”

허억, 숨을 들이켰다. 눈앞엔 나를 보는 이희운이 있었다. 눈빛이, 나를 보는 두 눈의 기운이 너무 이상했다.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자 이희운도 나를 쫓아 일으켰다. 내 어깨를 붙잡고 다시 입술을 맞붙여 왔다.

퍽!

아까보다 묵직한 마찰음이 울렸다. 주먹으로는 얼얼한 통증이 번졌다. 고개가 돌아간 이희운이 보였다.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보며 나는 입만 뻐끔댔다.

왜 이런……. 어쩌다 이런…….

생각이 봉합되지 않았다. 뒤틀린 것처럼, 세상이 뒤틀어진 것처럼 어지러웠다.

“아.”

입에서부터 외마디가 툭 터졌다. 이제야 알겠어서였다. 이희운이 좋아한다던 사람이 누군지.

그걸 알게 되자 도저히 여기 머무를 수 없었다. 가방을 집어 들고 서둘러 자취방을 나섰다. 등 뒤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신을 신고 빠져나왔다.

제발 따라 나오지 않길 바랐다. 한참 걷다 돌아보자 길목에 어렴풋이 인영이 서 있었다. 그때부터는 힘껏 뛰었다. 방향은 생각 않고 무조건 나아갔다.

쫓기는 것처럼 전력으로 뛰던 중이었다. 치솟는 오심을 못 참고 주저앉아 토했다. 아까 먹었던 과자나 음료수들이 그대로 게워져 나왔다. 구토는 신물이 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욱…….”

열 오른 눈가를 문질렀다. 매서운 오한처럼 몸이 덜덜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쥐어짜내듯 심하게 게워 내서인지 누가 조르듯 목구멍도 아팠다.

“정원아.”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나는 명치에 날카롭게 걸린 숨을 느끼며 한 번 더 웅얼거렸다.

“정원아…….”

미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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