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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애의 비밀 (2) (17/30)

5. 연애의 비밀 (2)

“새로 왔어요?”

능숙하게 보이려 애쓰며 고기를 굽던 중이었다. 느닷없는 질문을 받고 집중하던 신경이 무너졌다.

“예?”

“아니, 우리 요즘 주말마다 오는데 처음 보는 거 같아서.”

“아, 네. 새로 왔어요.”

남자 네 명이서 앉은 테이블이었다. 질문을 한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보다 서너 살쯤 더 많을까. 왠지 화장한 것처럼 눈매가 진했다.

“손이 예쁘시네.”

“예? 아, 예에.”

갑자기 손으로 신경이 몰렸다. 가뜩이나 어색하던 손놀림이 기름칠 안 된 기계처럼 삐거덕거리는 느낌이었다. 배운 방식대로 하고 있긴 했지만 첫날이라 태가 안 났다. 혹시 잘 못 굽는다는 걸 돌려서 지적한 건가. 소심한 생각이 들면서 손마디는 한층 뻣뻣해졌다.

“손 예쁜 사람이 구워 주니까 더 맛있겠다.”

어떻게 반응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남자끼리라 그냥 놀리는 건가. 떨떠름해 있자 주변에서 야유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존나 느끼해.”

“미친놈. 고기 먹으러 와서 끼 부리고 앉았다.”

“아 왜, 그냥 대화하는 거지.”

“…….”

나는 고기를 뒤집으며 어서 구워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몇 살이에요? 고등학생? 어려 보이는데.”

“……아뇨, 스물 넘었는데요.”

우물우물 대답하고 넘겼다. 그래도 이 정도 질문은 이제 익숙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의외로 사적인 질문을 받는 상황이 많았다.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어느 동네에 사는지. 구체적인 질문 때문에 곤란한 적도 있었다.

“피부도 좋고 진짜 잘생겼네. 여긴 고깃집이 무슨 얼굴 보고 뽑나? 여기 키 크고 잘생긴 알바 또 있잖아.”

“아, 저 사람.”

옆에 앉은 남자가 턱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마침 이희운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잘생겼단 소리 지겹게 듣겠다 그죠?”

“아, 아뇨…….”

눈빛이 노골적이라 불편했다. 어눌하게 대답해 놓고 고기만 보는데 상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귀엽네.”

그러더니 옆에 앉은 사람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조금 작아진 목소리였다.

“근데 거기는 안 귀여울 거 같아. 원래 이렇게 생긴 애들이 은근히 크다?”

“아 쫌, 주접 좀 그만 부려. 또라이야.”

친구가 밀어 내자 남자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아, 기분 나쁘신 거 아니죠? 칭찬인데.”

“…….”

뭐라고 대꾸가 안 됐다. 테이블에서는 자기들끼리 하는 성적인 농담과 은근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안 들리는 척 굽기에 집중했지만 가려진 등줄기까지 후끈후끈했다.

“하…….”

역시 쉬운 일은 하나도 없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쉽다고 생각하자마자 이런 손님을 만나니 기가 쭉 빨렸다. 지친 티가 났는지 어느새 다가온 이희운이 나를 끌어당겼다. 주방 근처에 천막으로 가려지는 곳이었다.

“저 테이블에서 뭐래요?”

“어? 아니…….”

내용이 남한테 말하기도 좀 그랬다.

“별거 아냐. 계속 말 시키는데 뭐라고 대답할지 모르겠어서.”

“이상한 소리 해요?”

“어, 그냥 칭찬? 이라고 해야 하나. 잘생겼다고…….”

“그리고요?”

대충 넘어가려 했는데 뭔가 눈치챈 낌새였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슬쩍 털어놓았다.

“그, 밑에, 클 거 같다고……?”

말을 꺼내자마자 이희운의 눈매가 험상궂게 변했다.

“씨발, 정신 나간 새끼들 진짜.”

홱 테이블 쪽을 돌아보기에 놀라서 붙잡았다.

“야, 왜 그래.”

붙든 팔이 딱딱해진 게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달려갈 듯한 기세라 조마조마했다.

“저번에도 와서 병신 짓거리들 하더니.”

“그랬어?”

화났을 때 기운이 범상치가 않아 괜히 내가 얼어붙었다. 마냥 귀여운 줄로만 알고 있던 후배의 전혀 다른 면모였다.

“아…….”

이희운은 삭이듯 한숨을 내쉬었다. 말리는 내 손을 떨어뜨려 놓더니 한풀 꺾인 톤으로 말했다.

“어차피 뭐라 하고 싶어도 못 해요. 알바 주제에 무슨.”

“……괜히 말했나 보다. 야, 나 괜찮아.”

이희운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런 애들 너무 신경 쓰지 마요, 형.”

“안 써, 나.”

말은 그렇게 해도 찝찝함이 남아 있기는 했다.

“저 술집에서 서빙했을 땐 성희롱 꽤 자주 당했거든요. 그냥 일반적인 술집이었어요 거기도. 평범하게 술 파는 가게에서 같은 남자한테 성희롱하는 거 의외로 비일비재하거든요. 만만하니까, 괜히 취한 김에 재미 삼아 시비 걸고.”

“그렇구나. 몰랐어. 나는 연회장 서빙만 해 봐서.”

아까 그게 성희롱이 맞긴 하구나. 확신이 들면서 기분이 배로 이상해졌다.

“저는 몇 센티냐는 소리도 들어 봤어요. 키 말고 아래요.”

쓰게 웃어 보인 이희운은 경험담을 더 늘어놓았다.

“일주일에 자위 몇 번 하냐는 둥, 포경했냐 안 했냐 뭐 이딴 질문도 받아 봤고. 진짜 성질 같아선 술병으로 머리 내리찧고 싶은 거 간신히 참아 가면서 다녔어요. 여기는 고깃집이라 그런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어딜 가나 병신들이 있네요.”

경악할 만한 얘기들이었다. 하지만 맞장구를 칠 겨를도 없었다.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각자 할 일을 하기 위해 흩어져야 했다.

눈코 뜰 새 없이 왔다갔다했다. 나르고, 굽고, 정리하고. 또 불판을 갈고, 바닥을 닦고, 쏟아지는 쓰레기를 처리했다. 몇 시간 이어지자 허리가 뻐근하고 발바닥이 뜨거웠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체력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고강도였다.

겨우 한숨 돌리게 된 타임이었다. 이희운이 조그만 초콜릿 하나를 건네줬다. 나는 고맙다 인사하고 입안으로 까서 넣었다.

“힘들죠. 배는 안 고파요?”

“밥 많이 먹어서 괜찮아. 그나저나 너도 바쁜데 나 계속 신경 쓰느라 힘들어서 어떡하냐. 이제부턴 진짜 안 도와줘도 돼. 많이 익숙해졌어, 나도.”

일터에서는 이희운이 나보다 선배였다. 내가 처음이라 일 처리가 느리니까 틈만 나면 자기 걸 끝내 놓고 와서 도와줬다. 거절하고 싶어도 시간에 쫓기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자꾸 신세 지게 되면서 미안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안 힘들어요. 형한테 선배 노릇 하는 거 재밌는데요, 왜.”

부담을 덜어 주려고 하는 말이라는 게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면목 없는 투로 말했다. 뭐가 웃긴 건진 모르겠지만 이희운은 그 한마디에 웃음이 빵 터졌다. 산처럼 커다란 등이 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인휘야, 나는 선배님 말고 형이 더 좋은데?”

웃고 나서 이희운이 능청을 떨었다. 박장대소를 한 탓인지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형. 희운이 형.”

이까짓 거야 뭐 순순히 불러 줄 수 있었다.

이희운은 기분이 좋은 것처럼 눈꼬리를 접었다. 어느새 손도 내 머리 위로 올리고 있었다. 가벼운 무게감으로 머리통을 문지르고는 스륵, 볼을 스쳐 떨어졌다.

“귀엽다, 진짜.”

그 순간 뚝 흐름이 끊기는 것 같았다. 마주한 눈동자가 일순 굳어지는 게 보였다. 나도 그렇지만 본인도 무심결에 한 행동에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이희운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내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자세까지 꼿꼿했다. 권위적인 선후배 문화에 익숙해서 그런가. 이렇게까지 정색할 일이 아닌데 과도하게 긴장하는 것 같았다.

사과할 거 없다고 말해 주려는 찰나였다. 손님 한 팀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이희운은 부리나케 주문을 받으러 떠났다. 나도 더는 한가하게 서 있을 시간이 없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손님을 따라 서둘러 계산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심한 시각이 돼서야 일이 끝났다. 할 때는 죽을 것 같더니 막상 끝나자 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정원이 챙겨 준 각종 영양제와 홍삼의 효력이 이제 나타나는지도 몰랐다.

“몸살 안 날 거 같아요?”

“어, 별로 안 힘드네. 내일 돼 봐야 알 거 같긴 한데. 생각보다 괜찮은데?”

“다행이다.”

아무튼 이희운이 도와준 덕이었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했으면 그만두고 싶어졌을 게 분명했다.

“담에 밥 맛있는 거 사 줄게. 언제든, 너 원하는 걸로.”

“와. 꼭 얻어먹어야겠네요.”

“어째 영혼이 없다. 밥은 너무 약해?”

“아뇨, 좋아요 진짜로.”

미소 짓는 이희운의 얼굴이 좀 지쳐 보였다. 피곤하구나 싶어 미안해진 나는 서둘러 걸음을 뗐다.

“가 볼게. 얼른 들어가 쉬어.”

“네, 쉬세요 형.”

“나 때문에 고생 많았어. 내일 봐.”

돌아서서 가려던 이희운이 다시 몸을 틀었다.

“고생 아니었어요 하나도. 같이 일하니까 재밌고 좋던데요. 아, 그리고…… 오늘 일, 그냥 잊어버려요. 미친 인간들 어디에나 있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는 입이 탁, 벌어졌다.

“……아아, 그거.”

들었을 땐 확실히 불쾌했지만 바빠서 잊어버렸다. 괜히 당사자인 나보다 신경 쓰게 만든 것 같아 미안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진짜로.”

말하는데 이희운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숙이기까지했다.

“오랜만이네, 희운아.”

익숙한 음성에 돌아보았다. 바로 등 뒤에 있던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길목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기다리다 가게 앞까지 온 모양이었다.

“네, 형.”

고정원에게 대꾸한 이희운은 내게 한 번 더 인사했다.

“저 그럼, 내일 뵐게요.”

“어어, 그래. 잘 들어가. 오늘 고마웠어.”

이희운은 갑자기 나타난 고정원을 보고 놀라긴 했어도 의문을 느끼는 기색은 아니었다. 별로 이상해 보이는 건 아닌가 보다 싶어 나도 안심하고 돌아섰다.

“무슨 일 있었어?”

발걸음을 떼자마자 고정원이 물었다.

“응?”

“아까 그런 말이 들리길래. 오늘 일 잊어버리라고.”

“아아.”

나는 관자놀이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오늘 진상 같은 손님이 있긴 했는데. 괜찮았어, 그 정도는. 원래 별별 사람 다 있으니까.”

자세히 얘기하면 걱정할 것 같아서 대충 넘어가게끔 얘기했다. 성희롱은 처음이라 나도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과하게 신경 쓸 것도 없었다. 만만하게 보고 화풀이하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짜증나는 소리 좀 한 거지 심하진 않았어. 걱정하지 마.”

일을 끝내서 기분이 좋았다. 걱정보다는 잘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고정원과 두런두런 얘기하다 집에 도착했다. 막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다가, 뜨거운 물에 씻고 나오자 엄청난 졸음이 쏟아졌다. 과로의 증상이 드디어 몰려오는 듯했다. 침대에 엎드리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의식이 끊겼다.

오밤중에 잠깐 의식이 돌아왔다. 사지의 극심한 근육통 때문이었다. 입에서 끙끙거리는 신음이 나오고 있었다. 몸살이 났는지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으로 전신이 무지근했다. 파스를 붙이고 잘 걸 그랬다고 흐릿한 의식으로 생각했다.

“으…….”

가느다란 신음이 샜다. 몸을 주무르는 손길을 느낀 때였다. 애타게 바라던 감각은 꿈이 아니라 실제였다. 목에서 등허리를 지나 발바닥까지, 만지고 주무르는 방식이 익숙했다. 반쯤 잠든 상태였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흐……!”

뭉친 근육을 푸는 손길은 시원하지만 아파서 자꾸 몸이 이리저리 뒤틀렸다. 특히 양쪽 허벅지에 무게를 실어 누르자 참기 힘들었다. 심줄들이 팽팽히 곤두서는 걸 느꼈다. 큰 손이 허벅지 안에서 바깥으로 문지르듯 마사지하고 있었다. 꾹 눌리면 튀어오를 것만 같아 파들파들 경련했다.

“……원아…….”

입가에서 비어진 침이 흥건했다. 이름을 부른 건 살살해 주길 부탁하는 의미였다. 하지만 잘못 알아들은 건지 고정원은 오히려 끈질기게, 조금의 변화 없이 같은 방식으로 자극했다.

“하…….”

마사지가 끝나자 위태롭던 긴장이 풀렸다. 식은땀이 배어나와 있었다. 상쾌하지만 동시에 몹시 지치는 느낌이었다. 사지의 통증은 상당 부분 나아져 있었다. 고정원도 힘들 텐데. 얼른 자야 할 텐데. 걱정이 드는 한편으로 끊어질 듯한 의식이 느껴졌다. 그 느낌대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수면 상태로 빠져들었다.

살짝 의식이 돌아왔을 때, 어쩐지 덥다는 느낌을 받았다. 약간씩 흔들린다는 느낌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근처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반복적인 마찰음, 사이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살짝 눈을 떴다. 무슨 이유에선지 내 옷매무새는 흐트러진 상태였다. 티셔츠가 왜 올라갔지. 생각하며 살피자 무언가가 보였다. 가슴팍부터 밑까지, 잘 때만 해도 없던 하얀 물기가 묻어 있었다.

“…….”

흔들림이 있었다. 열기, 체취도 느껴졌다. 머리가 또렷해지며 내가 고정원에게 안겨 있다는 걸 알았다. 닿아 있는 피부는 단단하고 뜨거웠다. 고정원은 옷을 다 벗고 있었다. 흔들림의 정체 또한 뭔지 인식했다. 완전하게 드러난 성기가 어둠 속에서 내려다보였다.

“후…….”

젖은 소리가 났다. 숨을 죽인 채 절제하는 호흡이었다. 고정원의 입술이 닿아 있는 두피가 뜨거워서 나도 숨결이 거칠어질 것 같았다.

뭐든 한껏 부풀어 있었다. 성기도, 그걸 잡는 손아귀도. 속도가 빨라지며 나도 같이 흔들렸다. 사정에 육박했을 때의 급박감이 전해졌다. 곧 목구멍을 긁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큿……!”

울컥울컥 정액이 쏟아지는 게 보였다. 양이 많았다. 지켜보는 내가 지칠 만큼 기나긴 사정 후, 더 이상 아무것도 나오지 않게 되자 고정원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짓이기듯 눈을 감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고정원은 잠시 나를 안고 있었다. 조금 뒤 몸을 일으키는 기척과 티슈를 뽑는 소리가 났다. 가슴팍에 묻어 있던 흔적이 닦이고, 말려 올라간 티셔츠도 내려갔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으며 증거가 인멸되는 듯했다.

머무르는 일 없이 고정원은 방을 나갔다. 시간대가 궁금해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커튼의 틈으로 희미하게 스며드는 빛이 보였다. 동튼 새벽녘쯤 되는 것 같았다.

“…….”

숨죽이던 중압감이 풀린 탓일까. 감당하기 힘든 졸음이 쏟아지면서 나는 까무룩 눈을 감았다.

개운해지도록 깊은 잠을 잤다. 일어나니 오전이었다. 나가서 둘러보자 과제를 하고 있는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잘 잤어?”

등에 매달려 인사 겸 뽀뽀를 했다. 고정원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멀끔한 옆모습에 평소보다 길게 눈이 머물렀다.

“왜 그렇게 봐?”

“어, 아니…….”

고정원은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빈틈없이 단정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동틀 무렵의 일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 뒤로 한 번 더 잤더니 흐릿한 게, 정말 꿈이었나 싶기도 했다.

“이리 와.”

의자를 돌린 고정원이 자기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사양 않고 앉으라는 곳에 앉았다.

“너 새벽에…….”

“응?”

뭐라고 물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우물쭈물했다. 내 옆에서 했어? 그렇게 묻는 건 좀 이상했다. 너 혼자서 하는 거…… 아니, 아니다. 어떻게 해도 질문이 이상해졌다. 굳이 확인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캐물으면 서로 민망해지기만 할 것 같아서 얼버무렸다.

“아냐. 잘 잤나 궁금해서.”

“왜, 다른 할 말 있는 거 아니야?”

“아냐.”

고정원은 내 얼굴을 감싸 마주 보게 했다.

“얼굴 보니까 아프진 않은 것 같네.”

“……너 나 잘 때 안마해 줬지.”

묻자 고정원이 희미하게 웃음 짓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그런 거 하지 말고 푹 자, 앞으로는. 나 때문에 잠 제대로 못 자면 속상하니까.”

“잘 못 잔 것처럼 보여?”

묻기에 나는 어깨를 주물거리며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피로한 증상 같은 건 나타나 있지 않았다. 혈색도 윤기 있게 건강하고, 걱정과 달리 모든 게 좋아 보였다.

“어? 이거 왜…….”

우연히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 이거.”

말하며 고정원이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약지에 자리한 반지는 우리의 예전 커플링이었다. 내가 잃어버리는 바람에 한 쌍이었다가 한 쪽이 되어 버린.

기다렸다는 듯 고정원이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서 꺼낸 건, 개강 이후 넣어서 보관하고 있던 우리의 새 커플링이었다.

고정원은 케이스에서 한 쪽만 꺼냈다. 오므린 내 왼손을 펼치고, 막 꺼낸 반지를 약지에 끼워 주었다.

“다른 디자인으로 끼고 다니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고정원의 손과 내 손이 살짝 겹쳐졌다. 예전 반지와 새로 맞춘 반지가 나란히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어…… 그러게. 그러면 되네?”

가슴이 찡하며 벅차올랐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감동했다.

“와, 진짜 그러네. 사 놓고 방학 중에만 끼는 거 아까웠는데……. 너 천잰가 봐.”

이따금씩 잃어버린 반지가 생각날 때면 속상했었다. 한 짝만 남은 게 쓸모 있어질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뒤늦게 보상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진즉 이럴걸.”

“…….”

시선이 빈틈없이 얽혀 들었다. 나는 고개를 꺾어 먼저 키스를 시작했다. 혀를 섞다가 입을 뗀 고정원이 주변을 애무해 왔다. 관자놀이 근처에도 입술이 닿았다. 몹시 낯익은 감촉에 얼굴로 훅 열이 올랐다. 다른 게 아니라 새벽에 고정원이 내 머리에 입술을 부비며 혼자 하던 게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 노트북에서부터 메신저의 알림 소리가 울렸다.

“확인 안 해도 돼?”

묻자 고정원이 힐끗 쳐다보곤 대꾸했다.

“응.”

할 일이 많아 보여서 떨어지려는데 고정원이 놔주질 않았다.

“뭐가 그렇게 급해.”

타박까지 하며 나를 끌어안았다. 체온 높은 피부가 목덜미에 닿자 무심코 부르르 떨렸다. 꼭 소변 보고 난 뒤 같았다. 민망해서 웅크렸더니 고정원은 몸을 더 밀착시켰다.

“추워?”

“어어, 약간.”

대충 둘러댔다. 뭔가 근질근질했다.

“마무리하고 갈게. 배고프면 뭐라도 먼저 먹고 있어.”

메신저 알림이 연속으로 울리면서 고정원은 나를 떼어 냈다.

“……응.”

못 가게 붙들길래 뭐라도 하게 될 줄 알았다. 잠깐이지만 기대했던 게 부끄러워서 후딱 방을 나왔다.

“…….”

그래 놓고 방문 앞에서 한 번 더 돌아보았다. 미적지근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넓은 등이 보이자 뜻 모를 한숨이 나왔다. 한 번만 더 껴안을까. 망설이다가 방해될 것 같아서 끝내는 실행하지 못했다.

주방으로 가 개수대에 나온 컵 몇 개를 씻었다. 물이 유독 시릴 만큼 차가웠다. 조금 전까지 따뜻한 품에 안겨 있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약간 우울한 기분을 느꼈다. 조금 있다가 밥 먹고 나면 바로 일하러 가서 밤까지 있어야 하는데. 같이 있을 시간이 없어도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시험 기간 내내 제대로 대화 나눌 기회조차 없었다. 고정원은 학교 일정으로 늦게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집에 같이 있다 하더라도 각자 할 일 때문에 다른 공간에 머물렀고, 잠을 잘 때도 내가 먼저 잠자리에 들 때가 많았다. 주말에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녹초가 되어 돌아오니 귀가하자마자 곯아떨어지는 게 일이었다.

종일 떨어져 생활하고, 떨어져 자는 게 생활이 되었다. 같이 정신없는 입장이라 시간은 훅훅 지나갔지만, 그 사이로 분명 지울 수 없는 허전함이 있었다.

“…….”

오늘 아침. 옷을 갈아입을 때 정말 오랜만에 티셔츠에 닿는 가슴팍이 아프지 않았다. 고정원과 사귄 뒤로는 유두가 항상 얼마간 부풀어 있어서 닿을 때마다 조금씩 쓸리거나 따끔거렸는데……. 간만에 색도 크기도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불편하지 않으니 좋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렇지가 않았다. 그냥 우리가 계속 따로 자고 있구나 하는 자각만 들 뿐이었다.

“형, 뭐 해요?”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이희운이 쳐다보는 위치가 애매했다. 그 이유를 깨달은 나는 황급히 가슴팍에 올라가 있던 손을 거뒀다.

“거기 아파요?”

“……아아니.”

수상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속사포로 말했다.

“그나저나 너 오늘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비싼 것도 괜찮아. 무조건 사 줄 수 있으니까.”

오늘은 이희운에게 밥을 사 줄 예정이었다.

“……형은요?”

“어, 나?”

“뭐 먹고 싶어요?”

“딱히 없는 거 같은데. 그냥 네가 먹고 싶은 거 먹자.”

“음…….”

고심하는 것처럼 턱을 받친 이희운이 슬쩍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분식 좋아해요?”

“분식? 좋아하지, 당연히.”

그러고 보니 분식을 먹은 지 꽤 된 것 같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만만한 메뉴라 꽤 자주 먹었었는데.

“근데 그건 다음에 먹고, 오늘은 얻어먹는 거니까 비싼 거 먹어.”

“며칠 전부터 먹고 싶었어요. 저 땡기는 거 안 먹으면 두고두고 생각나서.”

“……그래?”

그 익숙한 맛이 그립기는 했다. 너무 싸구려 밥을 사 주는 건 아닌가 싶어 미안했지만 다음에 더 좋은 걸 사 주면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러자 그럼. 다음에는 형이 진짜 비싼 거 사 줄게.”

“괜찮은데. 감사해요, 형.”

“……뭘.”

스스로 형이라 지칭해 놓고 좀 민망해졌다. 이희운하고 있으면 가끔씩 연장자 기분으로 폼 잡게 되는 게 있었다.

“아, 그나저나 날씨 많이 더워졌네요.”

“어, 그러게. 오늘 좀 덥다.”

걷다 말고 이희운은 입고 있는 후드 티를 벗었다.

“와, 땀나.”

안에 반팔티를 입은 게 보였다. 끝자락이 후드에 말려 올라가면서 복부가 드러났다. 꽤 오래 공들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복근이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들이 슬쩍 흘겨보았다. 이희운은 누가 보든 말든 무신경하게 매무새를 정리했다.

“몸 좋다고 자랑이냐.”

주먹으로 툭, 등을 치며 말했다. 핀잔에는 약간의 시샘도 포함돼 있었다.

“……저 몸 좋아요?”

정말로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누가봐도 울끈불끈한 주제에 본인은 모른다는 식으로 말하는 게 황당했다. 좀 얄밉기도 했다. 누구는 배에 겨우 내천 자 새긴 걸로 몇 날 며칠 뿌듯해했구만.

“아, 좋은 건 아닌가. 그냥 뭐, 뱃살 없는 정도?”

심술 섞인 장난을 쳤다.

“……다시 보여 드려요?”

이희운이 금방이라도 옷을 들출 것 같은 포즈로 정색했다. 발끈하긴. 아닌 척해 놓고 막상 그저 그렇다는 말을 들으니 울컥한 모양이었다. 애들처럼 훤히 비치는 속내에 웃음이 비어졌다.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아니에요?”

의외로 끈질겼다. 이희운은 내 손을 끌어다 직접 배에 가져다 대기까지 했다.

“…….”

손바닥으로 복부의 긴장감이 전해졌다. 나는 멈춰 서서 이희운을 올려다봤다. 어째 장난이라고 하기엔 표정이 몹시 진지했다. 저번에 분명 살이 잘 찌는 체질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운동을 열심히 해야 된다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각별히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을 내가 농담이랍시고 무신경하게 건드린 것 같았다.

“……야, 너 몸 엄청 좋아. 진짜, 엄청.”

‘엄청’을 강조해서 말해 주자 그제야 팔목을 붙든 힘이 스르륵 풀렸다.

“…….”

이렇다 할 대꾸는 없었다. 그저 피하듯 고개를 꺾은 이희운은 멈췄던 걸음을 뗐다.

나란히 걸으면서도 굳어진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말수도 확 줄어들어 있었다. 이게 그렇게까지 민망할 일인가. 빨갛게 된 귀를 곁눈질한 나는 소리 죽여 웃었다. 아무튼 고작 한 살 차이지만 동생은 동생이구나 싶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희운을 따라 들어온 분식집은 분식집 같지 않았다. 예전에 학교 앞에서 드나들던 친근한 분위기를 생각하고 있다가 편견이 깨졌다. 흑백으로 정돈된 인테리어를 둘러보며 말했다.

“요즘 분식집은 이렇구나.”

촌스러운 줄 알면서도 두리번거렸다.

“형, 비싼 것만 먹고 다니는구나. 이런 분식집 생긴 지 꽤 됐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사실 그럴지도 몰랐다. 고정원이 데려가는 곳은 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비싼 곳들이었다.

“삼각김밥은 몰라도 그냥 김밥은 고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야.”

수저와 젓가락을 놔 주고 물까지 따라 준 이희운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성인 되고 첫 김밥 저랑 먹네요?”

“어, 그러게.”

고정원이랑은 그 흔한 김밥을 같이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근데 김밥을 좋아하긴 하나. 담백한 걸 좋아하는 입맛을 생각해 보면 기름져서 싫어할 것 같은데 야채가 들었다는 점에선 또 좋아할 것 같기도 했다.

“여기 김밥 맛있으면 포장해 가야겠다.”

“나중에 더 먹게요? 김밥 바로 안 먹으면 금방 상하는데.”

“아니, 고…….”

대답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고정원 사다 준다고 하면 이상해 보이겠지. 사다 줄 만한 핑계거리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

식탁에 정적이 깔린 순간이었다. 비어 있는 틈을 메우듯 다른 테이블에서부터 대화 소리가 넘어왔다.

“맞다, 나 오늘 경영대 그 잘생긴 사람 봤어.”

짠 것처럼 이희운과 나는 동작을 멈추고 서로를 봤다.

“인문관에 프린트하러 갔는데 거기 있더라?”

“아, 진짜?”

“근데 어떻게 그렇게 생겼지. 키도 진짜 컸어. 모델들 실제로 보면 그 정도 하겠던데. 올려다보는데 고개가 이렇게 꺾여.”

“잘생겼긴 해. 내가 연예인도 웬만해선 잘생겼다고 안 하는데 걘…….”

이름이 안 나왔어도 바로 눈치챘다. 과장을 보태자면, 이제는 학교 안팎으로 들려오는 ‘잘생겼다’는 소리가 다 고정원을 두고 하는 말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얼마 전에는 그와 관련해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수업 후 강의동을 나서는 길이었다. 뒤쪽에서 여자 몇 명이 잘생겼다며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당연한 듯이 고정원을 찾기 위해 돌아보았고, 금방 안면이 벌게져서는 고개를 떨궈야 했다. 여자들은 휴대폰으로 연예인 사진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야, 니트 입었는데 등이, 와……. 나 그렇게 등 넓은 남자 처음 봐.”

“나 아는 후배가 건너건너 아는 사인데 걔가 몸 관리를 집착 수준으로 열심히 한다던데. 근데 그런 애들 자아도취 장난 아니잖아.”

“그 얼굴에 그 몸이면 이해해. 나 원래 사람 빤히 안 보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 표정으로 넋 놓고 쳐다봤다니까.”

“걘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거 익숙할걸. 뭐, 배우 할 거라는 소문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랬어?”

“작년부터 그런 말 있었어. 근데 조용하게 학교 다니는 거 보면 헛소문인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준비하다 만 건가.”

고정원에 대해 말하던 사람들은 얼마 안 가 음식점을 나갔다. 이희운과 나는 그제야 편하게 떠들며 먹을 수 있었다.

“고정원 선배가 유명하긴 유명해요.”

금방 나온 김밥 하나를 집어 입에 넣은 이희운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배우 뭐 어쩌고, 당연히 헛소문이죠?”

“……아마도?”

“뭐예요, 아마도는.”

이희운이 웃었다.

“작년에도 학기 초에 잠깐 비슷한 소문 있었어. 과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델이었는데 다른 데선 배우인가 봐.”

“너무 잘생겨도 피곤하겠네요.”

“……그러니까.”

목소리에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쳐다보는 이희운의 시선을 느끼며 실수했다 싶었다. 나는 은연중에 드러낸 감정을 얼버무리려고 화제를 돌렸다.

“근데 이걸로 부족하지 않아? 라면도 시키자.”

“또요? 떡볶이 아직 나오지도 않았어요.”

“양도 적은데 뭘.”

“형 진짜 잘 먹는구나.”

그 뒤로 추가 주문까지 줄줄이 나오게 되면서 바쁘게 식사했다. 잡생각이 드는 게 싫어서 더 열심히 먹은 것도 있었다.

“너 벌써 다 먹은 거야?”

“1인분 이상은 먹었어요. 형 드세요.”

이희운은 덩치에 비해 의외로 잘 못 먹었다. 못 먹는다기보다는 안 먹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적당량만 먹고 구경하길래 나 혼자 남은 음식들을 깨끗하게 비웠다.

“되게, 마지막까지 야무지게 먹네요.”

“아깝잖아.”

“이제 보니까 형 토끼 닮았다.”

“……그래?”

고정원도 나한테 종종 했던 소리였다. 처음 고정원한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되게 간질거리고 쑥스러웠었는데. 후배한테 들으니 어째 좋은 말 같지가 않았다. 먹는 모습이 웃겼던 건가 싶어 머쓱하게 입 안을 헹궜다.

“나가자.”

“김밥 포장 안 해요?”

“……어. 다음에.”

구체적으로 계획을 잡아 볼수록 망설여져서 관뒀다. 김밥을 사 들고 가서 같이 공부한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시험 기간에 들어서고부터 고정원은 방해받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싶게 틈틈이 하던 애정 표현도 절제하고 있었다. 오히려 나만 옆에서 마음이 붕 뜬 채로 안절부절못하느라 시간 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아쉽긴 해도 보지 않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았다.

“열람실 지겨워지던 참이에요.”

식사 후, 근처에 자리한 카페였다. 어쩌다 보니 이희운하고 공부도 같이 하게 되었다.

“나도 오늘따라 갑갑해서.”

조용한 곳에서 최대치로 집중할 예정이었지만 막상 내키지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산만해진 탓에, 차라리 적당한 소음이 있는 곳이 나을 것 같아 카페를 택했다.

그런데 판단이 잘못됐던 것 같기도 하다. 한 단원을 훑기도 전부터 집중이 분산되고 있었다. 틈만 나면 휴대폰으로 눈이 갔다. 필기하다가도 자꾸 멈춰서 진척이 안 될 정도였다.

이럴 거면 아예 꺼 놓는 게 나았다. 끄기 전에 말해 놔야지 싶어 메신저를 열었다. 고정원과의 대화는 밥 먹기 전에 주고받은 곳에서 끊겨 있었다.

“…….”

메시지를 입력하던 손이 어물쩍어물쩍 느려졌다. 아까 분식집에서 들었던 대화 내용이 생각나서 그런 것 같았다.

니트를 입은 고정원에 대해 묘사하던 목소리가 맴돌았다. 나는 오늘 고정원이 니트를 입고 나간 줄도 몰랐다. 이른 아침 내가 자고 있을 때 인사만 하고 나가서 옷차림을 제대로 못 본 탓이었다.

가만히 메신저 창을 내렸다. 화면을 넘기다 실행시킨 건 위치 추적 어플이었다. 고정원의 현 위치를 가리키는 스폿에 가만히 시선이 꽂혔다.

……지금은 기념관 쪽이구나.

본다고 뭐가 더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다. 근데도 계속 보면 뭔가 더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물끄러미 아이콘을 구경하게 되었다.

“…….”

변함없는 화면을 몇 분간 주시하고 나서야 앱을 종료시켰다. 이상하게 염탐하고 난 것처럼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일일이 동선을 체크하려고 본 건 아니었다. 바쁠까 봐 직접 못 물어보겠어서 그런 거지. 그리고 왠지 안 보면 일이 손에 안 잡힐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학교에서 누군가 고정원을 보고 있을 텐데……. 나로서는 어디에 있는지라도 알고 싶었다.

힘 빠진 손으로 고정원에게 메시지를 입력했다. 카페에 와서 공부 중이고, 집중이 너무 안 돼서 폰은 두 시간 정도 꺼 놓겠다고, 나중에 집에서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전송까지 했다.

휴대폰이 꺼지자 간신히 집중이 되는 듯했다. 필기를 어느 정도 진행시키고, 어깨가 뻐근해서 멈추었다. 목을 젖혀 한 바퀴 돌렸다. 역시나 뭉쳐 있는 느낌이었다. 곧 있으면 또 알바 날인데. 고생해야 한다는 걸 몸이 아는지 날이 가까워질수록 천근만근이었다.

“하…….”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몰아쉬어도 얹힌 듯한 이물감은 나아지지 않았다. 양팔의 팔꿈치를 테이블에서 세웠다. 그리고 손바닥에 눈두덩을 푹 묻었다.

시야가 차단되며 검게 물들었다. 카페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재즈 선율이 또렷해졌다. 밝고 가벼운 피아노 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음. 그 사이에서 나는 겨울 방학 때를 생각 했다. 여유롭다 못해 나태했던 생활들이 유독 채도 높은 기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단둘이만 고립된 것만 같았던 일상이 미친듯이 그리워졌다. 그때는 버겁다고 느꼈던,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어지던 몸의 교류도.

두툼한 손의 감촉이 떠올랐다. 부드럽게 쓸다가 금방 강약을 바꿔 힘있게 쥐던 애무의 감촉이 의지와 상관없이 생생해졌다. 장소를 망각한 몸의 중심이 확 뜨거워졌다.

보고 싶다. 생각하자마자 가슴이 억눌린 것처럼 갑갑함을 호소했다. 나도 모르게 주먹으로 가슴을 퍽, 두드렸다.

“체했어요?”

“엇…….”

팔이 당겨지면서 고개가 들렸다. 나는 갑자기 자다 깬 것처럼 얼떨떨했다. 혼자만의 세계에 지나치게 몰두해 있었다. 이희운이랑 같이 있다는 것도 순간 잊을 정도로.

“내가 더 먹을걸. 혼자 너무 많이 먹게 했나 보다.”

걱정 어린 말이 들려왔다. 손으로도 주무르는 감촉이 닿았다. 시야가 빙글빙글, 너무 어지롭고 흐릿했다. 손바닥으로 눈을 너무 세게 짓누르고 있던 탓이었다.

“형,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니, 나…….”

아픈 게 아니라고 말해 주려는데 이희운이 일어났다.

“약 사 올게요.”

“아냐, 괜찮아, 아픈 거 아니야!”

붙잡아 말리자 이희운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서서히 맑아지는 시야로 진짠지 아닌지 가늠하는 표정이 보였다.

그때 가까운 데서 지잉― 진동이 울렸다. 두리번거리자 테이블 위에 놓인 이희운의 휴대폰이 보였다. 이희운은 그걸 바로 집어 들어 확인했다. 그러고는 아, 하는 싱거운 외마디를 뱉어냈다. 표정도 그렇고 잘은 모르지만 내키지 않는 연락처럼 보였다.

“형, 저 잠깐만 밖에 내려갔다 올게요. 뭐 받을 게 있어서.”

“아아, 응. 편하게 갔다 와.”

“약 정말 안 사 와도 되겠어요?”

“진짜 체한 거 아니야. 아까 그냥 근육통 때문에…….”

“알겠어요.”

이제야 좀 안심한 것처럼 희미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내가 본인이 남긴 것까지 다 먹어서 탈난 줄 착각한 듯했다. 보면 볼수록 은근히 마음이 여리고 착했다.

이희운이 나가고 나서도 나는 멍한 기운으로 앉아 있었다. 한숨을 내쉬고, 얼음이 녹은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정신을 좀 차려야 할 것 같았다.

삽질을 하고 나서인지 그 뒤로는 시간 낭비 없이 할 일에만 몰두했다. 강의를 들으며 필기를 하다가, 문득 시간이 경과한 것 같아 시계를 봤다. 자리를 비운 이희운이 늦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정이 생겼나 보다 생각하며 할 일에 신경을 되돌릴 즈음.

“어?!”

커다란 소리에 고개가 들렸다. 계단으로 이어지는 입구 쪽이었다. 상당히 낯익은 무리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어어…… 안녕.”

과 후배들로 보이는 여자애들 세 명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휘둥그레져서 멈췄다가 우다다 다가와 인사를 했다. 몇 걸음 뒤로는 저번에 같이 커피를 마셨던 후배 우민규가 보였다. 그리고 가장 뒤편에 곤란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지르는 이희운이 있었다.

“어, 뭐야. 인휘 형!”

나를 발견한 우민규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내 손을 턱, 맞잡더니 어깨끼리 부딪쳐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왜인지는 몰랐다. 테이블 주변으로 널린 소지품들을 한 번 내려다보고 나서 표정이 단숨에 묘해졌다.

“형, 혹시 이희운이랑 같이 계셨던 거예요?”

“어? 어.”

나는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줄 알았다. 그 한마디에 서 있던 후배들의 표정이 일제히 바뀌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거나, 입을 떡 벌리고 경악하는 듯한 모션을 취했다.

“와…… 이희운 이 새끼 진짜 응큼하네?”

돌아본 우민규가 이희운을 향해 추궁했다.

“야. 너 왜 니 혼자 있다고 거짓말했냐?”

“……형 공부하는 데 너네가 방해할까 봐 그러지. 지금처럼.”

“와, 웃기네 얘. 우리가 뭐 얼마나 방해한다고. 형, 얘 조심하세요 진짜 무서운 애예요. 지 혼자 형 독차지하려고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거짓말 치고, 완전 장난 아니에요.”

“맞아. 너 우리가 선배님이랑 친해질까 봐 겁나냐?”

주변에서 호들갑을 떨며 유치한 방향으로 몰아가자 이희운도 상기된 채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후배들은 의자를 가져와 주변으로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대번에 분위기가 왁자지껄해지고, 소란한 틈으로 이희운과 눈이 마주쳤다.

‘죄송해요.’

이희운은 입 모양으로 사과했다. 정말로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기분이 상당히 가라앉아 보이기도 했다. 그럴 일도 아닌데 마음 쓰는 듯해서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 보였다.

“시끄럽게 할 거면 그냥 가지?”

이희운은 굳이 한소리를 했다.

“죄송해요, 저희 진짜로 딱 30분만 있다 가면 안 될까요? 저희 선배님이랑 너무 얘기하고 싶었는데.”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잠깐 정도야 뭐 괜찮겠지 싶었다.

“난 상관없어, 마음대로 해.”

허락하는 한마디에 환호성이 터졌다. 얼마나 놀고 싶었던 건가 해서 웃음이 났다. 대학 들어와서 한창 사람 사귀고 놀고 싶을 때이긴 했다.

“저희 같이 사진 찍어요!”

누가 카메라를 켠 걸 시작으로 그때부터 셀카의 연속이었다. 다 같이 찍고 나자 후배 하나가 다가와 둘이서 찍어 줄 것을 요청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라 찍었는데, 그 뒤로도 한 명씩 돌아가며 찍게 됐다. 찍고 나서는 다들 자기 SNS에 올리느라 바빴다.

“선배님, 저 이렇게 올렸어요.”

맞은편에 있던 후배가 내 쪽으로 화면을 들이밀었다.

#우리과존잘선배님이랑 #매일뵙고싶은얼굴

사진 밑으로 달린 오버스러운 해시 태그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선배님, 아이디 좀…….”

“어? 나 아무것도 없어. 그냥 만들어만 둔 건데.”

“그거라도 알려 주심 안 돼요?”

가입만 해 두고 방치해 둔 계정이 있기는 했다. 창을 내밀며 그거라도 알려 달라기에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팔을 뻗었다.

“어, 형 너무 야해요.”

우민규가 내 옷 아래쪽을 보며 눈 가리는 시늉을 했다. 나는 뭔가 싶어 고개를 숙였다.

“아.”

야하다는 말을 바로 이해했다. 엎드린 자세에서 팔을 들었더니 옷이 훅 올라가면서 드로즈의 밴드 부분이 노출되고 있었다. 하필 밴드 아래로 살짝 드러난 속옷이 튀는 색이었다. 올라간 상의 밑단을 확 잡아 내리자 애들이 일제히 웃었다.

나는 민망해져서 괜히 여기서 그나마 제일 친한 이희운을 쳐다봤다. 이희운은 웃지도 않고 있었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마자 부자연스럽게 눈길을 돌렸다. 차라리 웃는 게 낫지, 못 본 척하니까 더 민망했다.

“오빠, 아이디 join…… 이거 다음에 뭐에요?”

입력하다가 만 아이디를 가리키며 후배가 물었다. 나는 옷을 움켜쥐고 손을 뻗어 나머지도 마저 입력해 주었다.

“이 얘기 하면 소름 끼치실 거 같은데.”

“어?”

“사실 저 선배님 팬클럽 회원이에요.”

무슨 말인가 싶어 한 번 더 어? 했다.

“유민정이라고 아세요? 걔 선배님이랑 같은 수업 듣는데. 눈 크고 머리 짧게 단발한. 암튼 걔가 선배님 팬클럽 창단해 가지고, 저랑 다른 애 두 명이랑 가입했어요.”

“아, 정말? 진짜?”

“네. 진짜 사실이에요.”

띄워 주는 말들이 쑥스러워 안면 근육이 삐걱거렸다. 어찌 됐든 고맙고 기분은 좋았다. 다들 착하기도 하고, 이런 장난을 치면서 노는구나 싶어서 귀여워 보였다.

“근데 선배님이라고 안 해도 되는데. 그냥 편하게 불러.”

“아…… 네. 오빠.”

다소 어색한 호칭이 따라붙었다. 난 아무 생각 없었는데 어떤 포인트가 있었는지 다들 뒤집어지며 박장대소했다.

“와, 소름 돋았어 지금. 나 얘 이렇게 수줍은 거 처음 봐.”

“너 방금 혼자 설렜지.”

그러던 중 누군가로부터 한마디 외침이 터졌다.

“어, 선배님 커플링!”

그 한마디로 돌연 내가 끼고 있는 반지로 관심들이 집중됐다.

“헉.”

“역시 있으셨구나 여친.”

여자애들 셋이서 고개를 흔들며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곤 있었지만 잘생긴 남자들은 다 짝이 있어.”

“그건 사실이야. 여기 있는 두 친구…….”

안내하듯 펼쳐진 손이 자신을 향하자 우민규가 ‘나 뭐!’ 하고 버럭 신경질 냈다.

“솔직히 이희운은 빼 주자. 얜 잘생겼어.”

그건 이희운의 옆에 앉아 있었던 여자애가 한 말이었다. 그 후배는 한쪽 손으로 이희운의 팔뚝을 붙들고 있었다.

“애가 좀 덜떨어져서 그렇지.”

“칭찬 고맙네.”

내내 말없던 이희운은 덤덤하게 받아쳤다. 혹시 이 둘이 몰래 썸 타는 사이 아닐까. 근거는 없지만 그런 지레짐작이 들었다. 잘 어울려서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눈앞의 후배들이 사귀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흥미진진했다.

“…….”

웃음이 멎은 건 이희운과 눈이 마주치면서였다. 왜 저러나, 의문이 들 만큼 표정이 안 좋았다. 근데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내 기분 탓이겠거니 했다.

“뭔데. 야, 나도 몸은 좋아. 키도 크고.”

“민규야, 솔직히 몸 부심 부리려면 고정원 선배님 정도는 돼야지.”

“야! 그 선배님은 진짜…… 감히 언급하기도 좀 그래. 같은 인간 아닌 거 같아.”

“놀란 게, 고정원 선배님 SNS도 안 하는데 다른 학교 사람들도 알고 있더라.”

이름이 한 번 거론되자 기다렸다는 듯 다들 몰려들었다. 고정원에 관한 말들은 곁가지를 치며 이어졌다. 출처가 정확치 않은 일부터 실제 있었던 일들까지, 마구 쏟아졌다. 화제가 화제니만큼 불편해진 나는 무관심하게 공부하는 시늉을 했다. 어디까지나 시늉이라서, 한 귀로 듣기는 다 들었다.

“홍보 모델 섭외도 여러 번 받으셨다면서.”

“학교 책자 모델이랑 또 대학매일 커버 모델이랑.”

“근데 그 잡지 표지 모델, 원래 연예인 아니면 그냥 일반 학생들한테 신청받아서 뽑는 거잖아. 연영과 이런 사람들이 잘 뽑히던데.”

“응. 근데 거기 관계자들이 우리 학교에 뭐 취재 왔다가 우연히 선배님 보고 꼭 연락 달라고 섭외했대.”

“그 선배 돌아다니면 가끔 외국인들이 같이 사진 찍자고 그런다잖아.”

“아, 진짜? 웃긴다. 연예인인 줄 아나?”

“근데 다른 학과 사람들이 은근 많이 들이대더라. 나는 눈도 못 마주치겠던데.”

“맞아 맞아. 못 다가갈 것 같으면서도 적극적인 애들은 또 장난 없게 들이대더라. 그, 인문대 신입생 중에 제일 예쁜 애가 들이댄다며. 여자 친구 있는 거 알면서도.”

“고정원 선배랑 교양 같이 듣잖아, 걔. 저번에 내가 말해줬지? 팔짱 끼면서 막 이렇게 스킨십을 하려고 하는 거야. 근데 고정원 선배가 무시하다가 짜증 났는지 불편하다고 대놓고 말해서 걔 막 표정 관리 안 되고. 근데 그 뒤로도 계속 친한 척하던데.”

나는 무성의하던 필기를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누가 들이댄다거나 그런 얘기는 고정원한테 한 번도 전해 듣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나 같아도 그런 일들은 굳이 말 안 할 것 같긴 한데…….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팔짱을 끼려 했다는 게 자꾸 상상되는 까닭이었다.

“나 같음 그 말 들은 순간 휴학 충동 들 거 같은데. 대단하다.”

“근데 그렇게까지 해서 들이대 보려는 것도 뭔지 알겠다. 앞으로 살면서 다신 못 만날 잘생김이잖아.”

처음으로 시간표 바꾼 걸 후회했다. 이제는 학교생활에 관해서만큼은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고정원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상황이었다.

“선배님, 선배님은 혹시 고정원 선배님 여자 친구 보셨어요?”

“……어? 아니.”

나는 멍하니 쥐고 있던 펜을 놓으며 대답했다.

“완전 예쁘고 유명한 사람이라고 소문났어요. 연상이라고 하던데.”

“…….”

뭘 몰랐을 땐 소문은 그래도 사실에 기반해서 퍼지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정원이랑 사귀고부터 소문이라는 게 정말 터무니없이 생기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너희 언제 가? 30분 훨씬 넘었어.”

한숨을 내쉰 이희운이 경직된 어조로 끼어들었다.

“헐, 벌써 지났어?”

“야야, 가자 그만. 선배님 공부하셔야 되는데. 우리도 할 거 많잖아.”

마침 눈이 마주친 후배가 급하게 일어서려 했다. 나는 무의식중에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변명처럼 말했다.

“아냐, 안 가도 돼, 진짜로. 공부는 어차피 오늘 밤새울 거라서……. 난 잠깐 졸려서 멍때리고 있었네.”

정색한 게 아니라는 걸 피력하는데 테이블이 조용했다. 이상한 건 그것뿐 아니었다. 사람들이 전부 내 눈이 아닌 한참 위쪽을 올려보고 있었다. 놀란 것처럼 입을 틀어막기도 했다.

“…….”

울렁, 가슴께가 요동침을 느꼈다. 나는 이끌리듯 고개를 돌렸다.

“나도 껴도 돼?”

듣기 좋은 목소리가 또렷한 잔상으로 울려 퍼졌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고개를 젖혔다. 매력적인 웃음을 지어 보인 고정원은 어느새 내가 앉은 의자 등받이에 손을 감고 있었다.

* * *

나랑 있을 때하곤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후배들은 카페 안의 주목을 끌만큼 한바탕 요란하게 인사하더니 그 후로는 서로 눈치만 봤다. 조용하다고는 해도 놀라움과 흥분이 여실히 느껴지는 안색들이었다.

“내가 방해한 것 같은 분위기네.”

고정원이 쑥스러운 듯 한마디 던지자 곳곳에서 손사래와 부정하는 말들이 터졌다.

“아니에요! 절대, 절대!”

“저희 너무 좋아서 그래요!”

우민규는 벌떡 일어나 악수까지 청했다.

“우민규입니다,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아아, 네가 민규구나.”

고정원이 아는 체하자 우민규가 자세를 바짝 낮췄다.

“절 아세요?”

“알지. 우리 과 후밴데.”

“헉, 영광이에요.”

우민규가 감격한 모양새로 입을 틀어막았다.

“선배님, 혹시 저희도……?”

여자애들이 기대를 가지고 끼어들었다.

“아…… 얼굴들은 낯익긴 한데. 미안. 사실 민규는 내가 인휘한테 따로 들은 거라 기억하고 있었어. 희운이랑 셋이서 카페 갔었다며.”

“아, 네네. 맞아요!”

우민규만 신나서 손뼉을 쳐 댔다. 나머지 애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씁쓸해졌다.

“인휘 형이랑 엄청 친하시구나.”

“응.”

고정원은 짧게 수긍했다.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가벼운 투로 덧붙였다.

“가족보다 친한데.”

나는 물론이고 자리에 있던 눈들이 일시에 커졌다.

“와, 가족보다 친하면 대체 얼마나 친하신 거예요?”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테이블 아래 손을 뻗었다. 괜한 소리는 하지 말자는 신호로 고정원의 허벅지를 긁었다. 그러자 고정원이 반응하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인휘야, 왜?”

“……어?”

아예 내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

“허벅지 만지길래.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

“아……. 아, 어어.”

남들 모르게 한 행동을 이렇게 까발릴 줄은 몰랐다. 두피에 빠른 속도로 열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물음표를 띄운 듯한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돼 있었다.

“그…… 너 이따가, 시간 좀 있어? 할 말 있어서.”

급조한 변명이었다. 손목시계 확인한 고정원은 진지한 답변을 들려주었다.

“팀플 모임이 있기는 한데, 그 전에 잠깐은 괜찮아.”

“선배님, 진짜 바쁘시네요. 저희랑 오래 계시면 좋은데.”

“그러게, 나도 그러면 좋은데. 10분 안에는 일어나야 할 것 같네. 시험 기간이라 다들 바쁘지?”

“아녜요. 저희야 뭐…….”

나는 간신히 숨을 돌렸다. 주목에서 벗어나자 약간 탈진한 느낌마저 들었다. 목이 타서 커피를 집어 들고 쭉 빨았다.

“형, 그거 제 거…….”

이희운이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말을 걸었다. 처음엔 뭔가 했는데, 곧 내가 들고 있는 잔이 이희운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 미안. 나 정신이 없네.”

허둥거리며 손에 든 컵을 내려놓았다.

“어떡하지, 이거…….”

돌려주려고 보니 빨대에 잇자국이 나 있었다. 무의식중에 씹은 탓이었다. 새로 가져오겠다 말하며 일어나려는 순간 이희운이 팔꿈치를 붙들어 왔다.

“괜찮아요.”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띄우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빨대가 불쑥 사라졌다. 언제 보고 있었는지, 끼어든 고정원이 빨대를 티슈로 감싸 트레이 위로 버렸다. 그러고는 내 허리를 붙들어 앉혔다.

“휴대폰은 왜 꺼 놨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

지금은 그 질문보다도 골반을 감싼 손이 신경 쓰였다. 태도도 목소리도, 고정원은 너무 사적으로 굴고 있었다. 사람들의 주의가 다시 이쪽으로 쏠리는 걸 느꼈다. 후배들의 눈초리가 의식되면서 호흡과 시선 처리가 어려웠다.

나는 상체를 슥 빼며 답했다.

“톡 보내 놨는데. 못 봤어?”

“봤어.”

쉽게 나온 대답에 얼빠진 표정으로 마주봤다. 알고 있으면서 왜 물은 건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러고 보니 바쁜 와중에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찾아온 건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어설프게 시선을 떨궜다. 주변이 조용했다. 고정원은 여전히 나를 추궁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어 무작정 휴대폰을 들고 전원을 켰다. 바쁜 척 휴대폰을 붙들고 있자 다행히 나 빼고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선배님, 제가 배영학 교수님 회계 원리 수업 듣고 있는데요. 혹시 선배님도 회계 원리 들으셨어요? 이거 어떻게 공부할지 너무 막막해서요. 문제집은 따로 사 놓긴 했는데.”

“님 자 붙이는 거 어색하다. 그냥 선배라고 부르면 돼.”

“네? 아아, 네……! 그럴게요, 선배.”

후배들의 시선이 열렬했다. 고정원의 말 한마디, 눈짓, 몸짓. 특별할 것 없는 언행에도 지나치게 황홀해하는 모습들이었다.

“나도 그 교수님 회계 원리 수업은 1학년 때 들었었는데, 문제 많이 푸는 것보다는 핵심적인 기본 개념들만 이해해 두면 돼. 예를 들면…….”

고정원은 도움될 만한 실질적인 조언들을 이해하기 쉽게 전해 주었다. 후배들은 경청하는 자세로 눈을 빛내며 들었다. 매료된 것처럼 다들 고정원의 얼굴에서 잠시도 눈을 못 떨어뜨렸다.

실상 나도 그랬다. 후배들의 연속적인 질문들에 차분히 답하는 옆얼굴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

정말 그러네.

분식집에서 들었던 대로 고정원은 오늘 니트를 입고 있었다. 적당히 달라붙는 핏의 깔끔한 니트였다. 두께가 얇은 옷감은 꼭 피부처럼 몸을 감싸고 있었다. 길게 뻗은 골격에 기초한 몸 선과, 균형 좋게 발달된 근육의 부피감이 드러났다.

……그렇게 등 넓은 남자는 처음 봤다고 했었나.

근사한 옷태를 보고 있자니 오늘 고정원을 목격한 사람이 했던 표현에 수긍이 갔다.

“왜 그렇게 봐, 인휘야. 뚫어지게.”

설명에 집중하느라 모를 줄 알았다. 시선을 느낀 고정원이 얘기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별로…… 아닌데.”

나는 서둘러 휴대폰을 들었다. 혼자 성적인 어필을 받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수치심이 들었다. 짧게 뱉어 내는 고정원의 웃음소리 때문에 더더욱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보고 싶었어, 그렇게?”

여자애들이 소리를 질렀다. 어째서인지 다들 웃고 좋아하는 와중에 나만 겉도는 것처럼 섞이지 못했다.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게 이건 놀리는 느낌이 아니었다. 실제 둘이 있을 때만 하던 걸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앞에서 공개하는 느낌이지.

“…….”

“요새 우리 거의 못 보거든.”

고정원이 후배들을 상대로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럼 여자 친구 만나실 시간도 없겠네요, 두 분 다.”

“그러게. 전 같았으면 어떻게든 만날 시간 냈을 텐데. 요즘에는 여유 없을 땐 그냥 거리 둬 보려고 하고 있어.”

그 말에는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정원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다. 물론 행동으로는 드러나고 있었지만 그게 의도적인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바빠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줄 알았는데. 마치 시험하듯 ‘거리를 둬 보려고 한다’는 표현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게 나아요. 저도 바쁠 때 남자 친구랑 무리해서 만나면 좋은 게 아니라 서로 짜증 나고 힘들어서 싸우기만 하더라고요.”

“……그래?”

잠깐 동안 말이 없던 고정원이 화살을 내게 돌렸다.

“어떻게 생각해?”

“어?”

고정원은 아무 말 없이 보기만 했다. 눈은 안 웃는데 입 끝만 올라가 있었다.

“…….”

질문 자체가 모호했다. 뭐라고 말을 되돌려 주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목을 가다듬은 나는 티슈를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뭐, 어쩔 수 없겠지, 바쁘면. 바쁜 시기 지나가고 많이 보면 되니까.”

“이성적이네.”

“……그런 거 아닌데.”

비꼬는 느낌이라 울컥했다. 내가 이성적인 사람이었다면 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그렇게 아프고 힘들진 않았겠지 싶었다.

“인휘 오빠 여자 친구 우리 학교 다니시는 거예요?”

경직돼 있는 사이 질문이 날아들었다.

“……내 여자 친구?”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고정원이 끼어들었다.

“비밀일걸. 인휘 애인 얘기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앗, 몰랐어요. 죄송해요.”

“아니, 안 좋아한다기보단…….”

고정원은 내 한쪽 허벅지를 잡아 눌렀다. 덜덜 떨어 대던 움직임이 멈추었다. 나는 내가 산만하게 흔들고 있는 줄도 몰랐다.

허벅지를 감싼 손은 잠시 그대로 있었다. 손바닥의 면적만큼 스며드는 체온이 느껴졌다. 찌릿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서 튕겨 오르듯 벌떡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 좀, 말해 놓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세면대에서 찬물로 얼굴을 때렸다. 옷에 묻을 줄 알면서 목덜미까지 냉수를 적셨다. 좀 차갑다 싶을 때쯤 고개를 들자 거울에 얼굴이 비쳤다. 촌스럽게 뺨이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닌데. 스스로에게 욕하며 젖은 얼굴을 문질렀다.

“하…….”

심기가 어지러웠다. 머릿속에는 발정이라는 단어가 둥둥 떠다녔다. 페이퍼 타월로 얼굴을 닦고 나서도 가만 자리에 서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기 무서워서였다. 사람들 많은 데서 발기라도 하게 된다면 어떡할지.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후회막심이었다. 자위 같은 거 하지 말걸. 실은 어젯밤 고정원이 돌아오지 않는 집에서 혼자 끙끙거리며 만졌다. 앞만 만진 게 아니라 뒤도 같이. 만질수록 애매하게 달아오르기만 해서 꽤나 곤란하고 힘들었었다. 별별 자세로 시도한 끝에, 아직까지 합의하에 남아 있는, 술김에 찍었던 그 영상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겨우 만족스럽게 끝낼 수 있었다. 나는 이어폰을 통해 고막으로 파고드는 고정원의 날것처럼 거친 신음을 들으며 허리가 뒤틀리도록 사정했다.

하고 나니까 너무 낯부끄러웠다. 발가벗고 있다 고정원이 들어오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는지. 나쁜 짓은 아닌데 아무렇지 않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새벽에 고정원이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면서도 자는 척을 했었다.

“……돌겠다.”

중얼거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거울에 아까 전까지만 해도 없던 인영이 비쳤다. 문가에 선 고정원이 무표정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 들어왔지. 거북함을 느낀 나는 빠르게 돌아 서서 출입구를 향했다.

“불편해?”

고정원이 통로를 비켜 주지도 않고 물었다.

“불편할 게 뭐 있어.”

“…….”

“화장실 가게? 갔다 와, 나는 먼저 가 있을게.”

비스듬히 지나치려 하자 저지당했다. 팔을 감싼 손아귀에는 금세 힘이 들어갔다.

“얼굴 보고 얘기해야지.”

타이르는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응.”

“나 여기 온 거 싫어?”

눈을 맞추자 고정원은 한결 부드러운 톤으로 말했다. 나는 주시해 오는 눈을 마주보며 우물거렸다.

“……아니.”

좋았다. 너무 좋아서 몸이 반응하니까 문제였다.

“…….”

등에 차가운 타일이 닿았다. 밀어붙인 고정원은 자기 몸도 내게로 가까이 붙였다. 당황해서 눈을 들었다. 눈앞으로 까만 홀같이 어두운 눈동자가 보였다. 초점이 맞춰지자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눈동자만 보였다.

뒤는 차갑고 앞은 뜨거웠다. 부르르, 상반신이 떨린 그때 출입문이 확 열렸다. 나는 팔로 고정원을 밀어 냈다.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뒤도 안 보고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목적지가 설정된 기계처럼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일행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가쁜 숨이 쏟아졌다.

키스할 뻔했다.

그게 착각인지 아닌지도 긴가민가했다. 방금 있었던 일인데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수선하게 숨을 몰아쉬는데 고정원이 금방 자리로 돌아왔다. 앉으면서 어깨가 스쳤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움직일 사람은 움직이자.”

고정원의 그 한마디로 슬슬 파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오늘 여기 카페에서 모인 사람들끼리 시험 끝나고 꼭 술 마셔요. 꼭이요, 꼭.”

카페 앞에서 후배들은 입을 모아 다음 모임을 확정 지었다. 고정원은 곤란한 듯 웃으면서도 술을 사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다들 기대로 부푼 얼굴들을 하고서 헤어졌다. 이희운한테는 따로 인사하려고 했더니 진즉 가고 없었다.

“오빠!”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아직 안 갔었는지 후배 하나가 서 있었다.

“저 오빠 팔로잉 했어요. a로 시작하는 아이디 저니까 꼭 받아 주셔야 돼요. 그럼 다음에 봬요!”

“아, 그래. 잘 가!”

오늘 내 SNS 계정을 물었던 여자애였다. 밝게 인사를 하고 가는 모습을 보며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인기 많네.”

지켜봤는지 고정원이 옆에서 굳이 한 소리 했다.

“……무슨. 자기가 훨씬 더 많으면서.”

비아냥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시선이란 시선은 죄다 끌어모으고 있는 주제에.

‘몰랐는데……’ 하고 뜸들이듯 입을 뗀 고정원은 다소 엉뚱한 소리를 했다.

“오빠라는 말, 별로인 것 같아.”

“뭐?”

“친족 아닌 타인한테 쓰기엔 좀 부적절한 것 같아서.”

농담인가 했는데 표정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냥. 해 본 소리.”

말한 고정원은 주변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래 놓고는 목덜미를 쓸고 또다시 내게로 눈길을 되돌렸다. 아까보다도 지긋하게 내리꽂히는 시선이었다.

“너…… 팀플 모임 얼마나 남았어……?”

나는 닭살 돋은 팔뚝을 문지르면서 물었다. 이번에도 질투한 건가. 생각하면 배 속이 쥐가 난 것처럼 저려 왔다.

“30분 정도.”

충분하지 않을까. 당장 집에 가서 하면, 한 번쯤은……. 생각하며 점점 얼굴이 뜨거워져 고개를 숙였다. 귀까지 화끈거리는 걸 봐서 숨겨질 정도의 낯빛은 아니겠거니 싶었다.

“…….”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의미 없이 끊어 내는 호흡 같기도 했다. 많은 인파가 지나치며 고정원은 보다 귀퉁이로 나를 이끌었다.

“집으로 갈까. 아니면…… 가까운 데서 쉬었다 갈까.”

눈치챘구나 싶어 부끄러우면서도 안심이 됐다. 빙빙 돌리지 않고 대놓고 묻는 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집.”

굳이 숙박업소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나는 숨겨지지 않는 음란한 기대로 안면을 벌겋게 물들이고서 주먹을 꼭 쥐었다.

집에 가까워질수록 호흡이 힘들어지는 걸 느꼈다. 길에서보다 차 안에서, 차 안에서보다 주차장에서, 주차장에서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느린 속도로 상승하는 엘리베이터에서 고정원이 손을 잡아 왔다. 손바닥이 정말로 뜨거웠다. 어디 아픈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안색을 살피려 고개를 들었다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바지 앞섶을 발견하고 다시 떨궜다. 나도 흥분하긴 했지만 고정원은 서 있는 것조차 불편해 보일 지경이었다.

삐비비빅―.

문 앞에선 급하다 보니 자꾸 번호를 틀렸다. 뒤에서 밀착한 채 귓전을 애무하는 고정원 때문이기도 했다. 가져다 대면 자동으로 열리는 카드 키가 있긴 해도 그건 지갑 안이었다. 태연하게 찾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세 번이나 틀리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가방을 뒤졌다.

“잠……!”

그러는 사이를 못 참고 고정원이 키스를 시작했다.

“으음…….”

입술도 엘리베이터에서 만져 봤던 손만큼이나 뜨거웠다. 혀가 무례하다고 느껴질 만큼 저돌적으로 안을 파고들었다. 혀끼리 문지르다가 쪽, 빨아 당겨오자 힘 풀린 허리가 주저앉았다. 키스만으로 벌써 앞이 축축해진 게 느껴졌다.

띡…… 띡…… 띡…….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은 채로 고정원이 문 열기를 시도했다. 정신이 입맞춤에 팔려 있느라 키패드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있었다. 느리게 하나씩 터치음이 울렸다.

나는 빨리 고정원이 문을 열어 줬으면 싶으면서도 몸을 떨어뜨리고 싶지가 않았다. 안달이 나서 허리를 문지르기 무섭게 삐비비빅, 도어 록에서 경고음이 터졌다.

“누가, 나오면, 어떡, 해, 빨리…… 응?”

고정원은 쉬지 않고 입술을 쪼아 댔다. 나는 그걸 일일이 받아 주며 서둘러 주기를 부탁했다.

띠리링―.

두 번째의 시도만에 문이 열렸다.

“읏!”

떠밀린 걸음이 엉키며 주저앉을 뻔했다. 입을 맞추느라 겹쳐진 두 몸이 우당탕탕, 신발장에 부딪혔다. 아픈지도 몰랐다.

한 손으로 나를 지탱시킨 고정원은 남은 한 손은 나를 벗기는 데 썼다. 입술끼리 틈이 생기지 않도록 고개를 따라다니면서, 바쁜 손놀림으로 아래를 벗겼다.

신발이 먼저 벗겨졌다. 하의와 속옷은 한꺼번에 무릎까지 내려졌다.

간신히 입술을 뗀 고정원은 스스로 옷을 벗었다. 벗었다기보단 노출시켰다는 쪽이 가까웠다. 팬츠 지퍼를 내리고, 드로즈 위로 성기를 꺼냈다.

“…….”

바투 올라붙은 성기가 서로 마주했다. 나는 복도의 벽에 기대서서 무너질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씨근덕거리는 고정원의 성기 끄트머리에선 프리컴이 샜다. 그 모습이 꼭 칠칠치 못하게 침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급박감 속에서 나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눈빛이 잠기고 입술이 젖었을 뿐, 고정원은 단정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바로 아래는 이런 꼴이라는 게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극명한 차이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절대 아무도 모를, 나만 아는 모습이라는 데서 오는 흥분감과 고양감으로 발끝이 쩌릿쩌릿했다.

“읏.”

가만히 있기만 해도 신음이 터지려 해서 팔등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고정원은 내 팔을 치우게 하고 다시 키스했다. 감상은 끝나고, 다시 허겁지겁 서로를 느끼는 데 욕심냈다. 고정원이 난잡하게 입술을 빨아 가며 더듬었다. 열 오른 손이 엉덩이와 허벅지를 쓸었다. 나는 근육으로 조인 허리와 등 언저리를 매만지며 맨살갗에 닿고 싶어서 애가 탔다.

“……여기, 여기도……. 가슴도…… 해, 줘…….”

“뭐?”

간만의 접촉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의식할 새도 없이 고정원의 손을 옷 속으로 이끌었다. 가슴팍을 앞으로 내밀며 커다란 손으로 유두 주변을 문질렀다.

“전처럼…… 붓게…….”

너무 원하고 애틋해서, 흐느끼듯이 말했다. 나중에 분명 후회할 걸 아는데 이 순간만큼은 자제가 안 됐다.

“아……!”

인상을 쓴 고정원이 거칠게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손길이 투박하고 급했다. 상의가 팽개쳐지고 무릎에 걸쳐진 옷가지가 발끝으로 빠져나갔다. 엉망으로 벗겨진 탓에 속옷이 왼쪽 발목에 걸리고 양말도 반쯤 내려갔지만 정리할 틈이 없었다.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촉박하게 벗겨 낸 고정원은 본인도 전라가 되었다.

배꼽에서부터 혀가 올라왔다. 한쪽 무릎을 꿇은 고정원이 내 허리를 붙들었다. 너무 흥분이 되면 무섬증이 날 수도 있었다. 나는 갑자기 겁이 나서 고정원의 어깨를 밀어 냈다. 복부를 빨아당기는 힘에 놀라 반사적으로 뒷머리까지 움켜쥐었다.

고정원은 방해하는 내 양손을 등 뒤로 묶어 버렸다.

“헉…….”

고개가 쳐들렸다. 숨이 넘어가며 괴상한 비명이 목구멍을 긁었다. 넓게 내밀어진 혀가 빳빳한 젖꼭지를 쓸어올리는 감각에 진저리가 났다. 입이라도 막고 싶은데 움직일 수가 없어서 어깨만 바르작댔다.

“흣……! 으응……!”

삼켜질 것처럼 진득했다. 혀가 유륜을 둥글리고, 튀어나온 돌기를 힘껏 빨았다. 유두뿐 아니라 가슴팍에 붙은 살은 다 빨아당기는 통에 그 주위가 전부 저릿했다. 가슴이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갈빗대도, 겨드랑이도, 모두 한 번 이상은 머금어졌다. 그래도 가장 집요하게 괴롭혀지는 건 가슴이었다. 아프다 싶을 때 살살 빨리면 절로 울먹이는 신음이 터졌다.

입술을 빈틈없이 붙이고 맛있다는 듯 빠는 게 흐릿한 시야로 보였다. 머릿속이고 몸이고 흐물흐물했다. 게걸스러우리만치 달라붙는 게 좋았다. 가두듯이 응시하는 눈도 좋고. 그냥 고정원이 내 몸을 마음대로 하는 게 좋았다.

만족감으로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실제로 몸이 녹진 않아도 성기에서는 녹는 것처럼 끊임없이 물이 나왔다. 엉덩이가 자꾸 뒤로 빠지고, 하반신이 이리 튀고 저리 튀며 쾌감에 휘둘리다가 얼마 안 가 사정에 도달했다.

단단한 어깨에 매달린 채로 덜덜 떨었다. 쾌감으로 조여든 아래가 고정원의 몸에 바싹 달라붙었다.

“…….”

숨을 헐떡이다 눈을 뜨자, 어느새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눈앞에는 견본처럼 완벽한 형태의, 하지만 지나치게 커다란 성기가 밀착했다. 아까보다도 훨씬 젖어서 사정액처럼 탁한 체액이 흐르고 있었다.

툭. 툭.

뭉툭하고 끈적한 귀두가 볼과 입술을 건드렸다. 나는 흥분되는 냄새에 이끌려 입을 벌렸다.

“아…….”

끝을 머금고 입술을 모아 빨았다. 혀끝으로 귀두를 문질렀다. 혀를 빼내어 음경 전체를 쓸어 올리자 고정원의 허벅지가 경직되고 혈관이 꿈틀거렸다. 느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게 보였다.

퍽, 하고 성기가 튀었다. 조금 깊게 머금었다가 놓은 순간이었다. 피가 잔뜩 몰려 있어서 아래로 잡아당겼다 놓으면 반동으로 복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더 올렸다. 터질 것처럼 아파 보이는 성기에 다시 살살 혀를 가져다 댔다.

“후…….”

오랜만이라 그런지 턱이 아픈 것까지 좋았다. 냄새도, 맛도, 아까울 정도로 좋기만 했다. 샅샅이 빨아 대며 나도 게걸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정하기도 전에 끝이 났다. 내 귀를 만지작거리던 고정원은 입에서 성기를 빼냈다. 나를 일으키면서 또 숨 막히게 입술을 부딪쳐 왔다.

젖은 손가락이 엉덩이를 파고들었다. 손가락에 묻은 건 내 침이 섞인 고정원의 쿠퍼액이었다.

“으으…….”

안이 부드럽게 벌어졌다. 하나였던 게 금세 세 개로 늘어났다. 찔걱찔걱 속을 쑤시며 고정원이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뭔가를 알아차린 것처럼. 어젯밤 혼자 넣어서 만졌던 일이 생각난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야트막한 코웃음을 친 고정원은 내 귓불을 빨았다.

“뒤돌아, 인휘야.”

“…….”

……자지 먹게 해 줄 테니까.

뒤따라 속삭여지는 말이 음탕했다.

“으으…….”

뒤돌아 벽을 짚으면서 성기가 파고들어 왔다. 고정원은 안으로 살덩이를 밀며 나와 같이 손을 벽에 짚었다. 다른 손은 내 가슴팍으로 올라왔다. 양쪽 유두를 한 손으로 둥글려 댔다.

삽입이 그 어느 때보다 수월했다. 묵직한 음경이 한 번에 배 속 끝까지 들어왔다. 힘겨우면서도 벌써부터 안달이 났다.

“하으, 하으, 으으, 으…….”

몇 번 크게 드나들던 성기가 익숙한 부위를 반복적으로 문지르자 안이 흠뻑 젖었다. 내벽이 성기에 찐득하게 달라붙는 게 나도 느껴졌다.

고정원은 이따금씩 터뜨리듯 내 이름을 불렀다. 박는 힘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이 짓 하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어, 응?”

젖은 마찰음 사이로 낮게 목소리가 울렸다.

“너 거기 앉아 있는 동안 내내 나랑 이럴 생각만 했지. 아니야?”

틀린 말이 아니라 고개를 내젓지도 못했다.

“난 그랬는데.”

성기에 뚝, 뚝, 체액이 떨어졌다.

“너랑 이러고 싶어서. 화까지 나던데.”

벽에 몰아붙여지고 양손이 붙잡혀 올라갔다. 뒤에서부터 낀 깍지가 수갑 같았다. 손등에 자국이 날 것처럼 강한 악력으로 붙든 고정원은 미친듯이 허리를 찧어 올렸다.

“아, 아으, 흐……! 으, 으아, 앗, 앗……!”

부딪는 살 소리가 빠르고 묵직해졌다. 복도에서부터 거실을 온통 울렸다. 낮게 긁어내는 신음도 이따금씩 귓속에서 울렸다.

버티기 힘들어질 무렵 박는 행위가 멈췄다. 앞으로 돌려지며 몸이 반공중에 떴다. 나는 고정원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벽에 등을 기댔다. 박아 대면서 고정원은 입 속을 파고들었다. 엉덩이 구멍을 성기로 헤벌린 것처럼, 입술도 혀로 헤벌리고 다물지 못하게 했다. 호흡이 힘들어지면서 침이 턱 아래로 흘렀다.

“……아, 조, 아…….”

엉성한 발음으로 말했다. 힘든데 너무 좋았다. 텅 비어 있던 게 채워진 듯한 안도감이 들었다. 온종일 신경을 거스르던 잡생각들이 사라졌다.

“나도 좋아.”

입술을 뗀 고정원이 고백했다. 미칠 것 같다고 소곤거리는 탓에 몸에 열이 올랐다. 나는 엉덩이를 조이며 껴안았다. 평소라면 아예 안 할 소리까지 입에 담았다.

“해 줘, 자기야, 해 줘…….”

확, 뒷머리가 거칠게 잡히며 입술이 삼켜졌다.

“으응……!”

고정원은 시작할 때처럼 흥분을 주체 못 했다. 강약 없이 격정적이었다. 마구잡이로 박아 대는 힘을 감당 못 해 자세가 무너졌다. 나는 땅에 발을 딛고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줬다.

흔들리다 멈추자 팔다리가 흐느적거렸다. 고정원이 뭐라 하는 말도 흐릿하게 들렸다. 다시금 몸이 벽과 마주하게 돌려졌다.

“흑!”

성기가 뒤를 꿰뚫었다. 고정원은 집어넣은 성기를 천천히 움직이며 내 목덜미를 빨았다. 이를 세우기도 했다. 목덜미 주변으로 집착하는 게 맹수 같단 생각이 들었다. 널찍한 손바닥이 목을 감싸듯 잡고 있었다. 나는 흥분과 긴장감 속에서 양팔을 벽에 지탱시켰다.

편한 자세가 되면서 삽입이 거침없었다. 고정원은 마음껏 박아 대기 시작했다. 나는 현관 근처인 것도 잊고 큰 소리로 울었다. 사정감이 지독하게 찾아왔다. 감당하기 힘든, 뭔가 거대한 게 덮쳐 오는 느낌이었다.

롤러코스터의 정점에서 떨어지기 직전, 혹은 이미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소리를 내질렀다.

“흐으, 흐아……! 아아……!”

발작이라도 한 것처럼 경련이 일었다. 사정액이 비정상적으로 줄줄줄, 끝도 없이 흘렀다. 발등부터 바닥까지 흥건하고 끈끈해졌다. 그 와중에도 고정원은 내 입술을 삼키고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원을 그리듯 안을 크게 휘저어 가며 몇 번 더 강하게 박았다.

“큿, 윽……!”

고정원도 잇따라 사정했다. 이어져 있는 안이 한 번 더 꽉 조여들었다.

“하…….”

입술을 뗀 고정원은 젖은 머리칼에 코를 박았다. 껴안은 결박을 풀지도 않았다. 사정감이 긴지, 시간이 경과한 후에도 흥분에 휩싸인 것처럼 자잘한 키스를 이어 갔다. 눈물, 콧물, 침으로 더러워진 얼굴에 아랑곳 않고 입술을 문지르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사지가 늘어져 버렸다. 고정원은 나를 껴안은 채 바닥에 앉았다.

“흐…… 으…….”

입에서 한심한 소리가 샜다. 머리가 하얗게 지워진 것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다. 너무 간만에 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흐린 눈으로 돌아봤다. 현관은 벗어젖힌 옷가지,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친 신발들로 뒤엉켜 엉망이었다.

몇 시지. 늦었을까 걱정이 되면서 안겨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고정원은 팔을 뻗어 나를 못 가게 붙들었다. 그리고 내 발에 반쯤 걸쳐져 있던 양말을 휙 벗겼다. 등과 무릎 뒤로 팔을 넣고 안아 들기까지 했다.

씻으러 가는 줄 알았던 발걸음은 침대 방을 향했다.

“아, 안 돼, 바보야, 너 이제 가야…….”

초조해져서 말렸다.

“10분 남았어.”

고정원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땀에 젖어 흐트러져 있었고, 더 이상 단정하다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눈이 한 가지 목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

등에 침구가 닿았다.

막막하면서도 흥분으로 떨렸다. 돌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손이 뻗어 나갔다. 고정원의 이마에 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면서 나는 울적하게 확신했다. 절대, 10분으로 끝날 리가 없다고.

* * *

손님이 나간 빈 테이블을 치우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렀는지, 같이 일하는 형이 말을 붙여 왔다.

“좋은 일 있어요? 노래까지 부르고.”

“네? 아…… 그냥…… 그냥요.”

어색할 때 나오는 싱거운 웃음이 뒤따랐다. 너무 실없어 보였나 싶어 곧장 헛기침으로 표정을 고쳤다.

“여친이랑 좋은가 봐. 얼굴에 써 있어요. 너무 좋다고.”

“아뇨. 아닌데, 그런 거…….”

말끝을 흐리며 눈길을 떨궜다. 솔직히 정곡이라 할 말도 없었다. 더 노골적인 말이 날아들까 봐 나는 부랴부랴 하던 일에 집중했다. 소독용 알코올이 분사된 테이블을 닦고, 팬에 물을 채우는 걸로 마무리했다.

일을 끝내고는 슬그머니 가게 뒤편으로 향했다. 지적받은 내 표정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벽을 마주 보고서 주먹으로 턱을 아프도록 눌렀다. 입을 크게 아, 벌려 가며 근육도 풀었다. 확실히 오늘 좀 과하게 실실거리기는 했던 것 같다.

“형.”

부르는 소리를 못 듣고 서 있었다.

“인휘 형.”

그제야 귀에 소리가 꽂혀서 홱 돌아보았다.

“어!”

“밥 먹으러 오세요.”

“아, 응. 그래.”

벌써 그렇게 됐나, 놀라서 시계를 보자 정말 밥 먹는 타임이었다. 가게에서는 손님이 뜸해지는 10시쯤 일하는 사람들끼리 밥을 먹고 있었다.

“오늘 손님…….”

말을 건네려다가 뚝 끊겼다. 할 말만 전해놓고 이희운이 훌쩍 앞서가 버린 까닭이었다.

“…….”

못 들은 건가. 생각해 보려고 해도 표정부터 왠지 딱딱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이 시작되고부터 전달 사항 빼고는 대화도 없었다.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주방 보조분들까지 다섯이 모였다. 나는 이희운의 맞은편 빈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밥을 한 숟갈 뜨기 전, 앞을 쳐다봤다.

“야, 희운아.”

“네.”

이희운은 반찬을 집으며 대답했다. 이쪽으로는 눈길도 안 주고서.

“너 그때 카페에서 먼저 가고 없더라. 많이 바빴어?”

“공부하느라 먼저 갔어요.”

“아아. 그래도 말은 좀 하고 가지. 섭섭하게.”

밥과 고기를 입 안에 넣고 몇 번 우물거리다 삼켰다.

“혹시 너 어디 아파?”

이희운이 고개를 들었다.

“……아뇨.”

시선이 점점 내려가더니 입술 부근에서 머물렀다. 나는 소스가 묻었나 싶어 아랫입술을 훑었다.

“형.”

“어.”

“입술, 안 아파요?”

“아…….”

뭐가 묻은 게 아니라 부어서 쳐다본 거란 걸 깨달았다. 어제보다 많이 가라앉아서 내 눈엔 거의 정상이었는데 남들 눈엔 아니었나 보다.

“어제 매운 걸 먹고 잤더니 이렇더라고. 하나도 안 아파.”

너무 거짓말스러운가 싶었지만 적당한 대안이 없었다.

“에이, 여친이 쪽쪽 빨아 준 거 같은데.”

옆에서 일하는 형이 별안간 끼어들었다. 놀리는 말투가 느물느물했다. 나는 찔리는 마음에 강하게 부정하지 못하고 자신감 없이 대꾸했다.

“아녜요, 진짜로. 매운 거 먹은 건데…….”

아까도 그래서 그랬나. 얼굴에 좋다고 써 있다는 게 표정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내 입술 상태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몇 배로 불편해졌다. 벌게진 얼굴을 감추려고 최대한 고개를 숙인 채 먹었다.

이희운은 남들보다 빠르게 식사를 끝내고는 멀찍이 떨어졌다. 양치질을 하고 돌아와서는 휴대폰만 만지고 있었다. 검은색 유니폼에 가려진 가슴팍이 크게 들썩이며 한숨을 쉬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기는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우려했던 대로, 이희운은 식사 이후로 몇 번이나 실수를 저질렀다.

“야이, 씨발 진짜. 정신 좀 차리자, 정신 좀. 어? 가뜩이나 손님도 없는데. 좋게 말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포스기 입력을 잘못해서 계산 미스가 나거나, 테이블 번호를 착각해서 메뉴가 바꿔 나가거나 하는 식이었다. 손님이 적은 날이라 예민해져 있던 사장이 이희운에게 폭언에 가까운 신경질을 부렸다.

“죄송합니다.”

다행히 이희운은 기죽거나 속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운동부에 속했던 경험이 있는 만큼 윗사람이 하는 꾸중에는 단련돼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마음이 쓰였다. 이희운은 묵묵히 세척기에서 나온 컵의 물기를 제거하고 있었다. 나는 마른 수건을 하나 들고 가서 거들었다.

“너 뜨거운 거 잘 참는다.”

컵은 고열에 소독되어 아주 뜨거웠다. 오래 들고 있지도 못하겠는 컵을, 이희운은 멀쩡하게 들고서 닦아 냈다.

“……원래, 뭐든 잘 참아요.”

병날 때까지.

덤덤하게 말한 이희운이 입으로 씩 웃었다.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운동했어서 잘 참는 건가? 운동하는 사람들 대부분 인내력이랑 정신력이 장난 아니잖아.”

“전 그게 안 돼서 그만뒀죠.”

괜히 운동 얘기를 꺼냈나 싶기도 했다. 아닌 척해도 말하는 얼굴이 우울해 보였다. 방금 막 혼나기도 했고, 뭔가 북돋워 줄 만한 칭찬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아냐, 너 진짜 대단한 건데. 지금도 헬스 꾸준히 한다며. 그렇게 단련하는 것도 아무나 못 해. 나는 집에서 아령 드는 것도 몇 번 하다 말았다니까. 푸시업바랑 덤벨이랑 악력기랑 턱걸이랑 뭐 별거 별거 다 있는데도 한 번을 안 하게 되더라.”

“운동 안 하시는데 그런 기구들을 구비하신 거예요?”

“고정원 거…… 어, 고정원 거를 내가 빌렸는데. 이제 돌려주려고.”

또 거짓말을 해 버렸다. 그 무거운 운동 기구를 빌린다니 말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뱉어 버린 뒤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알리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동기끼리 같이 자취하는 경우는 흔한 일인데. 이제 와서 얘기하면 숨겼다가 밝히는 느낌이라 내키지 않았다.

컵 닦기를 끝낸 이희운은 대걸레로 바닥을 밀기 시작했다.

“내가 할게.”

어차피 사장님도 자리를 비우고 계셨다. 힘든 건 내가 해 주고 싶어서 대걸레의 봉을 겹쳐 잡으며 말했다.

“그냥, 저 알아서 할게요, 형.”

성가시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이희운은 내 어깨를 붙잡아 떨어뜨리면서 스치듯 인상썼다. 일부러 티를 낸 건 아닌 것 같은데, 여유가 없어 보이기는 했다.

“어, 그래.”

잡혔던 어깨가 약간 얼얼했다. 근육이 발달해선지 악력이 강했다. 아무튼 완강한 거부에 내 행동이 오지랖처럼 느껴지긴 했다. 좀 머쓱해져서 나도 다른 일을 찾아 바삐 움직였다.

그 후로 손님이 드문드문 들어왔다. 서빙 인원이 여럿 나와 있기엔 심히 한산했다. 때문에 다들 흩어져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큰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죄송합니다. 다시 가져다드릴게요.”

그새 또 일이 생긴 듯했다. 이희운이 사과하며 무언가를 치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테이블 위가 너저분했다. 손님이 자리를 피한 것도 그렇고 그릇이 엎어진 사고로 보였다.

“아, 뭐 서빙을 이따위로 해. 짜증 나게.”

불만을 내뱉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 판단이 끝난 나는 서둘러 음료 몇 병을 꺼냈다. 그걸 들고서 사고가 터진 테이블로 갔다.

“죄송합니다, 손님. 괜찮으세요? 혹시 젖으셨으면 이거 쓰세요.”

“……”

“이건 서비스로 드리는 거니까 계산 안 하셔도 되고요. 죄송합니다.”

연거푸 조아렸다. 서비스를 한 것도 효과가 있는 듯했다. 궁시렁거리던 손님은 괜찮다고 하며 풀린 표정을 지었다.

“또 사고 쳤어?”

사장이 문을 열고 나오기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로 그릇을 엎어서요. 죄송하다고 사과드려서 손님이 괜찮다고 하셨어요. 음료 서비스 나간 거 있는데 제 돈으로 계산해 두겠습니다.”

이번에도 이희운이 실수했다는 걸 알면 난리가 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해 두었다.

“으이그…… 야, 니네 오늘 돌아가면서 왜 이러냐. 암튼 알았어.”

홀을 한 번 둘러본 사장님은 더 이상 트집 잡는 일 없이 다시 안쪽으로 들어가셨다. 곤두서 보여서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죄송해요.”

이희운은 심각해져서 나한테 사과했다. 정작 실수한 손님한테는 무심하더니 화가 나지도 않은 나한테 사색이 돼서 죄송해하고 있었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뭘 또 죄송해.”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돌아섰다.

그 뒤로도 쭉 한가해서 주방 보조를 번갈아 가며 도왔다.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어져서 그런가. 힘이 나고 일도 잘됐다. 잘 웃게 되고, 주변 사람들을 챙기게 됐다. 가슴팍도 붓고 엉덩이도 부풀어 있어서 약간씩 불편하긴 했는데 확실히 안정감이 들었다.

일은 한 시간 가까이 일찍 끝났다. 막판엔 손님이 정말 없어서 일찍 닫게 되었다.

“내일은 실수 없이들 하자. 수고했어.”

사장님은 그새 좀 가라앉은 듯했다. 마지막에는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같이 일하는 형 말로는 창업하느라 빚이 있어서 손님이 조금만 떨어져도 예민해진다고 했다. 자영업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저, 형…….”

빨리 끝난 게 신나서 발걸음을 뗐다가 멈춰섰다. 돌아보니 이희운이 여전히 심각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저……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만…….”

눈까지 내리깔며 안절부절못해서 뜻밖이었다. 넉살 좋던 모습은 어디 가고 과하게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뭘 그렇게까지 어렵게 묻냐. 어디, 여기 근처 카페 들렀다 갈까?”

뭔가 상담하고 싶은 눈치였다. 일찍 끝나서 고정원을 볼 생각에 들떠 있었지만 마음을 너그럽게 고쳐먹었다. 따르는 동생이 낙담해 있는데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카페 말고 그냥…… 같이 걷는 건 싫으세요?”

“난 상관없어.”

흔쾌하게 수락하고 발걸음을 뗐다.

“오늘, 너무 폐 끼친 것 같아서요. ……저 대신 괜히 형 혼나게 만들고.”

걸으면서 이희운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내게 고마워하고 있고, 그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 하는 게 다 보였다.

“폐는 무슨.”

나는 쑥스러워서 등을 치는 걸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희운을 따라 걸었다.

걸어 나갈수록 집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걸은 지점에서, 커다란 도시공원이 나타났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는 건가 했더니 이희운은 미리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좋다. 여기도 이런 공원 있네.”

“저번에 우연히 발견했어요.”

말하는 이희운의 표정이 오늘 처음으로 밝았다.

“걸으니까 기분 좀 나아졌냐.”

“……네.”

“뭐, 가슴에 담아 두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조언은 못 해 줘도 그냥 들어 주는 건 형이 해 줄게.”

“……고마워요.”

크게 숨을 들이킨 이희운은 긴 호흡을 뱉었다.

“집안에 일이 좀 있어서요, 실은.”

“아, 그랬구나.”

이제야 어둡던 낯빛이 이해가 됐다.

“돈 문제가 참, 사람을 추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

이해했다. 집안의 돈 문제는 나도 늘 버거웠다. 다른 무엇보다 위태위태한 분위기 속에서 부모님이 싸우며 주고받는 막말들이 견디기 힘들었다.

“저는 평생 연애다운 연애는 못 할 거 같아요.”

갑자기 화제가 그리로 튀었다. 올려다보자 이희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을 보니까 왠지 이게 진짜 고민 같았다.

“왜. 돈 때문에 그래?”

“……그런 것도 없잖아 있구요. 그냥, 간절히 원할수록 뭐가 안 되더라구요. 운동도 그랬고, 연애도 계속 그렇구요.”

우민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분명 이희운이 차인 것 같다고 했었다. 어떻게 봐도 좋아하는 사람이랑 잘 안 되고 있는 건 분명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 얘긴데요.”

그렇게 운을 띄우며 시작된 얘기는 꽤 길었다. 요약해 보면 흔히 있을 법한 짝사랑 얘기였다. 이희운의 친구는 버스에서 만난 옆 학교 여자애를 좋아하게 돼서 오래도록 혼자 앓은 끝에 고백을 했고, 차이고 나서도 졸업할 때까지 못 잊었다고 했다.

“그땐 걔가 진짜 뭘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얼굴밖에 모르는데 그렇게 좋아지는 것도 이해 안 되고.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 자기도취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도 했고요.”

산책로를 따라 걷는 동안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었다.

“근데…… 요즘에서야 걔가 이해가 돼요.”

“…….”

“그냥 종종 얼굴 보고 대화 주고받고, 아는 건 겉으로 보이는 성격 정돈데……. 그 정도로, 누가 죽을 것같이 좋아질 수가 있더라구요.”

발이 멈췄길래 올려다보자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의도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얼핏 예의 없게 느껴질 정도로 시선이 빤했다.

“……저는 제가 이렇게 혼자 앞서가는 타입인 줄 몰랐어요.”

이희운은 픽, 웃더니 덧붙였다.

“왜?”

“어차피 고백도 못 할 건데…… 망상만 넘쳐요.”

코끝을 건드린 이희운이 민망한 듯 털어놓았다.

“한집에서 같이 살고 같이 늙는 것까지 상상되더라구요. 완전 소름 끼치죠.”

그 말에는 나도 웃음이 터졌다.

“그건 너 진짜 좋아하나 보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려서, 나는 웃다 말고 휴대폰을 꺼냈다.

[어디야?]

고정원이었다. 시간을 보니 어느덧 30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설마 일찍 나와서 기다린 건가. 어디냐고 묻는 걸 보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아차 싶어서 나는 서둘러 지금 위치를 답장으로 보냈다.

“희운아, 미안한데 나 급하게 좀 가 봐야겠다.”

마침 산책로가 끝나면서 반대편 입구가 보이고 있었다.

“여기서 찢어지자. 잘 들어가고, 내일 보자!”

“아, 저기, 형.”

뛰어가려고 하는데 손목이 붙잡혔다.

“어?”

“……진짜 고마웠어요, 오늘.”

이희운은 순하게 내려간 눈꼬리를 하고서 말했다. 나는 팔등을 탁탁, 쳐 주고 웃었다.

“됐어, 간지럽게. 간다.”

그리고 뛰어가려고 한 걸음을 크게 내딛자 돌연 전화가 울렸다.

“응.”

―바로 앞이야. 차 대 놨어.

“어? 여기?”

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하는 말에 놀랐다. 답장하고 1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고개를 쭉 빼어 둘러보자 정말로 익숙한 차가 공원과 인접한 길목에 멈춰 있었다.

반가워서 뛰어가려다가 걸리는 게 있어서 다시 돌아보았다. 혹시나 했더니 정말 이희운은 가지 않고 자리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근데 넌 어디로 가?”

“……이쪽이요.”

반대쪽을 가리키는 손짓에 안심했다.

“아아…… 그래, 그럼. 잘 들어가, 푹 쉬고!”

“네. 들어가세요.”

인사를 끝내고, 거기서부터는 한걸음에 내달렸다.

멈춰 선 차 문을 벌컥 열었다. 조수석에 올라탄 나는 다른 것보다 제일 먼저 고정원을 끌어안았다. 달려든 기세에 놀랐는지 고정원은 반응이 없었다. 나는 좋은 향이 나는 목덜미에 코를 비비고 만족한 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속닥거리며 뺨에 입술을 문지르자 고정원이 고개를 돌렸다. 숨결이 겹치고,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주거니 받거니 뽀뽀했다. 인중에도 턱에도 입술이 꼼꼼히 닿았다.

“왜 여기에 있었어?”

뒷덜미에서 등까지 내려가는 손길이 좋아 늘어져 있었다. 고정원의 질문이 질문이 금방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흐물해진 머릿속으로 곱씹다가 겨우 답했다.

“아…… 오늘 손님이 없어서 일찍 끝나서, 잠깐 이희운 상담 좀 해 줬어.”

“……상담?”

“걔가 안 좋은 일 있는 거 같더라고. 일할 때도 계속 실수하고.”

있었던 일들을 나열하듯 들려주었다. 내가 도와준 것 때문에 이희운이 고마워했고, 얘기를 들어 줬으면 하는 눈치라 이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또?”

반복되는 질문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나는 안겨 있던 몸을 떨어뜨렸다.

“…….”

얼굴을 마주하자 늘어져 있던 근육에 힘이 서렸다. 마주한 눈이 싸늘하게 화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위로는 잘 해 줬어?”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눈만 껌뻑거렸다. 어쩐지 ‘위로’의 어감이 묘했다.

“실수한 거 대신 감싸 주고. 같이 있어 주고.”

“…….”

“뭐든 다 해 주고 싶었나 보네.”

아무리 어조가 부드러워 봤자 비꼬는 말이었다. 가시 돋힌 말을 내뱉은 고정원은 짙고 단정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왜 그래…….”

“…….”

고정원은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차창을 내다보았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배 속으로 싸한 느낌이 번졌다.

‘나 요즘 엄청 질투하고 있어.’

저번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나랑 친한 사람들은 남자라도 질투난다고 했던.

그땐 반쯤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가볍게 넘길 만한 게 아닌 듯했다.

“남자끼리고, 걔가 날 친형처럼 따르니까 챙겨 준 거야. 정말 너가 걱정할 만한 일 죽었다 깨어나도 없는데…….”

작게 웃음을 터뜨린 고정원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끼리라 걱정할 필요 없는 거야?”

“당연하지…….”

“그래. 그럼 너랑 나는?”

“……야, 그거는…….”

우리는 특별한 케이스였다. 보통은 절대로 없는 일이라고 설명해주고 싶었다. 근데 우물우물 말문이 막혔다.

“우리, 꽤 초반부터 서로 의식하지 않았나. 성적으로도 그렇고.”

말하며 짙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훑었다. 아래로, 아래로…… 몸 전체를 시선으로 지그시 그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한동안 너 벗은 몸만 상상했어. 밤마다 같은 남자 성기가 어떻게 생겼을지, 어떤 냄새가 날지. 궁금해서 잠이 안 오던데.”

“…….”

“나만 그랬나 봐.”

“아…….”

복부부터 가슴께가 훅 뜨거워졌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몸이 뜨거워지는 게 나도 참 한심했다.

“……미안.”

그래도 미안한 건 진심으로 미안했다. 내가 둔해서 고정원을 속상하게 만든 것 같아서 나도 속이 상했다.

“앞으로는…… 너무 안 챙길게, 나도.”

손을 뻗어 허벅지 위로 얹었다.

“그러니까, 화는 내지 마…….”

부끄럼을 참고 살살 쓰다듬으며 밀착하자 고정원은 모른 척 눈을 떨궜다.

“……너 신경 쓰이게 안 할게. 어……?”

아양 같은 게 살짝 섞여 들었다. 나는 소름이 끼쳤지만, 고정원의 턱 근육이 긴장하는 게 보였다. 싫은 눈치가 아니었다.

“…….”

허벅지 안쪽으로 깊게 손을 넣다가 멈칫했다. 나를 쳐다보는 고정원의 표정 때문이었다. 깊은 눈매 속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원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감정이 아까까진 차갑게 느껴졌다면 이번에는 델 듯이 뜨겁게 느껴졌다.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하지만 손을 치우려고 하자 고정원 쪽에서 다시 붙들어 허벅지에 얹혔다.

아무 말도 않고서. 그저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계속 해 보라는 듯이.

“…….”

성기는 벌써 커져 있었다. 주변을 맴돌 것 없이 바로 둔덕을 만지자 가슴팍이 부풀었다. 새벽이고, 외진 곳이었다. 가끔 지나가는 차는 있어도 통행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더 대담하게 바지 버클을 풀고, 드로즈에서 발기한 성기를 꺼냈다.

시각적인 자극 때문인지 뜨끈한 기둥을 매만지는 사이 나도 발기했다. 바지에 갇힌 성기가 갑갑할 정도였다. 다음 단계로 어서 넘어가기 위해 더듬더듬, 콘솔 박스를 뒤져 콘돔을 찾아냈다.

“하…….”

고정원도 한숨을 쉬고 나도 밭은 숨을 뱉어 냈다. 콘돔이 잘 안 들어가서 애를 먹는 중이었다. 사이즈가 안 맞는지 빠듯한 데다 쿠퍼액으로 미끌거렸다. 꼬박 네 번째 시도만에 움찔거리며 맥박 치는 성기에 콘돔을 덮어씌울 수 있었다.

그 상태에서 입으로 몇 번 빨아 주었다. 입을 떼고 나선 다급하게 바지를 벗고, 나도 콘돔을 꼈다. 그리고 운전석으로 넘어갔다.

“으읏…….”

축축한 성기에 엉덩이를 내렸다. 빠듯하게 살덩이가 밀고 들어와 숨 쉬는 것도 잊었다. 반쯤 집어삼키고 나자 막혔던 호흡이 터졌다.

이물감도 잠시 뿐이었다. 완전한 삽입에 적응하려고 앞뒤로 비비고 문지르는 동안 쉽게 길이 들었다. 성기가 빳빳하게 서서 흔들흔들, 고정원의 비싼 티셔츠에 문질러졌다. 내 것에도 콘돔을 끼워 두길 다행이었다.

“으으…… 으으으…….”

힘을 준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문지르기만 하다가 엉덩이를 들어올려 짓이기자 안쪽의 자극이 견디기 힘들었다. 츱, 츱, 탁, 탁. 젖은 살 소리가 났다. 누가 조종하는 것처럼 허리가 쾌감을 쫓아 움직였다.

정신이 히뜩히뜩 나갔다. 너무 느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정원, 아……! 하…… 아으……!”

고정원은 쳐다만 보고 있었다. 내 가슴팍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삽입된 부위가 더 잘 보이도록 다리를 벌리게 했다.

안아 주지 않는 게 서운해질 즈음, 고정원이 자세를 고치며 나를 안아 올렸다. 나는 달갑게 고정원의 목을 끌어안고 가슴팍을 붙였다. 엉덩이를 움켜쥔 고정원이 신음처럼 짙은 한숨을 내쉬는 게 들렸다.

“읏, 으읏……!”

안이 근질거려서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엉성하게 들썩거리다가 허리를 써서 기둥을 감쌌다 뺐다 했다.

“흐아……!”

사정이 빨랐다. 안을 채운 성기도 요동치듯 꿈틀꿈틀했다. 그러나 한 번의 사정 후에도 흥분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감질나게 돋우기만 했다. 고정원도 마찬가지인지 내 상의를 벗기고 본인도 빠르게 탈의했다.

“하아…… 하…….”

몰아쉬는 숨소리가 차 안을 덥혔다. 둘 다 끊임없이 호흡이 가빴다. 안달 내면서 서로를 만지고, 키스하고, 달라붙었다.

최대치로 젖힌 시트에서 엎드리자 고정원이 자세를 고쳐 주었다. 꿇은 무릎을 더욱 벌리게 하고 상체를 들게 했다. 그 상태에서 성기를 밀어 넣었다. 가슴도 허벅지도 만져지기 좋은 자세였다. 고정원은 부푼 유두를 둥글리다 바짝 선 성기를 만지고, 허벅지 안쪽을 쓸었다. 나는 울먹이면서 계속 안을 조였다.

좁은 공간에서 몇 번이나 체위가 바뀌며 갈급하게 이어졌다. 콘돔은 언젠가부터 끼지도 않았다. 정상위로 확인해 보자 접합부가 크림을 듬뿍 묻힌 것처럼 지저분해져 있었다. 벌어진 구멍에선 음경이 드나들며 음식 먹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다리를 한껏 젖힌 긴장감이 팽팽했다. 나는 삽입부를 보면서 또 한 번 사정했다.

“흐…….”

신경을 지지는 것 같은 쾌감에 눈물이 쏟아졌다. 고정원은 낮게 신음하며 상체를 숙여왔다.

잔뜩 일그러졌을 텐데. 바짝 붙인 상태에서 내 얼굴을 지켜보는 게 부담스러웠다. 팔로 얼굴을 가리려 하자 저지당했다. 고정원은 얼굴에 묻은 눈물을 빨았다. 목젖도, 쇄골도 혀로 쓸었다. 덜덜 떨리는 몸 위로 후희가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잠이 들었을 줄은 몰랐다. 깨고 나니 우리 오피스텔 주차장이었다. 차 안은 원래대로 정리돼 있었고, 나도 옷을 입고 있었다. 잔잔한 음량으로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고정원은 팔을 괸 채 가만히 차창만 쳐다보고 있었다. 실내등이 켜 있어서 창문에 얼굴이 비치고 있는데…… 꼭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원아.”

부르는 목이 다 쉬어 있었다.

“깼어?”

고정원이 돌아보았다. 팔을 뻗어 자상하게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냥 깨우지.”

시계를 보니 깊은 새벽이었다. 적지 않은 시간을 잤고, 그동안 고정원이 가만히 기다려 주었음을 알았다.

“많이 피곤하지?”

묻는 투나 손길이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겁고 뻑적지근하게 가라앉은 몸을 느끼면서도 배시시 웃음부터 났다.

“인휘야.”

“응?”

부르기에 눈을 맞췄다. 머리카락과 귓가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조금 느려지는 걸 느꼈다. 할 말이 없는 건지, 아니면 꺼내기 힘든 말인지. 고정원은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을 잇지 않았다.

마냥 검게 보이던 눈동자가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때였다. 고정원이 닫혀 있던 입을 벌렸다.

“……이희운이랑 거리 둬.”

“…….”

“내가…….”

눈빛이 일변하고,

“정말로 못 참겠어서 그래.”

긴 시간 참아 낸 것처럼 억눌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

진심으로 괴로워 보여서 철렁했다. 충격에 가까운 통증이 몇 차례나 명치를 쓸고 지나갔다. 오장육부가 덜컥 한곳으로 쏠린 기분이었다.

생각과 감정이 와르르 몰려왔지만 도저히 뭐가 뭔지 구분해 낼 수 없었다. 그저 몰려왔다가 다시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을 뿐이었다.

“그럴게.”

침을 삼켜 내고 대답했다. 내가 잠든 동안 고정원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고뇌에 빠졌는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나는 고정원을 힘 있게 끌어안고 다짐하듯 한 번 더 반복했다.

“그럴게.”

질끈 눈을 감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나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 * *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니까 사소한 것부터 조심스러워졌다.

“왜 그렇게 봐?”

“아니…….”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받는 줄은 몰랐다. 그동안 내가 놓쳐 왔던 신호들이 얼마나 많았나 싶다.

“카페 알바 끝나고…… 잠깐이라도 만날 수 있어?”

옷 방에서 주위를 맴돌다 넌지시 물었다. 나는 이제 일하러 가야 했고, 고정원도 일정이 있어서 나갈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샤워 가운을 벗은 고정원이 이쪽을 곁눈질했다.

“좋아.”

어제 차 안에서 했던 대화를 고정원도 의식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대답하는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나는 바지를 입은 뒤 이제 막 상의를 집어 들고 있는 등 뒤로 다가갔다. 양팔로 꼭 껴안자 윗옷의 목을 벌리던 고정원이 움직임을 멈췄다.

“……좋다. 이따 잠깐이라도 볼 생각 하니까.”

느끼한 말을 했다. 평소 솔직한 표현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돌아선 고정원이 나를 마주 안았다.

“일부러 이래?”

마음도 없으면서 억지로 이러느냐는 말인가 싶었다. 나는 고정원의 목덜미에 짧게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었다.

“좋으니까 이러지.”

가만 눈을 맞추고 있던 고정원이 시선을 멀리 던지며 웃었다.

“……왜?”

느닷없이 광대가 쪽, 하고 입술로 쪼였다. 반사적으로 눈이 감기면서 이번에는 입술이 먹혔다.

“아…….”

탄식이 축축하게 울렸다. 고정원은 혀로 구석까지 파고들었다. 아랫입술 안쪽을 쓸고, 우둘투둘한 혀 밑을 쓸었다.

나는 간지러워서 입술을 벌렸다가 모았다가 했다. 뒤통수를 감싼 손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고정원은 맞물린 방향과 각도를 몇 번이나 바꿔 대며 가장 만족스러운 위치를 찾았다. 최대한으로 밀착하고 싶어 하는 성미 급한 욕구가 느껴졌다.

“으음…….”

젖은 숨과 타액이 안에서 섞였다. 호흡하기가 힘들었다. 고정원은 가끔씩만 입을 뗐다. 떨어져 봤자 약간 틈이 생겼을 뿐이지 여전히 혀가 엮이는 애무의 연장선이었다.

힘겨워서 상반신을 뒤틀 때마다 머릿속이 눅진해졌다. 빈틈없는 구강 애무는 산소 부족으로 가슴팍이 뻐근해질 때까지 이어졌다.

“뭐……야…… 갑자기.”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헐떡이며 고정원을 탓했다. 허리가 풀려서 손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휘청거릴 것 같았다.

“일부러 한 거야.”

뻔뻔한 언사로 지껄이며 고정원은 나를 껴안았다.

“나만 정신 못 차리면 억울하니까.”

말하며 머리통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이따 봐.”

그러고는 볼일은 다 봤다는 것처럼 떨어져 나갔다. 한 번에 상의까지 걸쳐 입고서, 미련 없이 드레스룸을 나가 버렸다.

“…….”

나는 따라 나가려다 말고 주저앉았다. 일어나려고 해도 허리에 힘이 똑바로 안 들어갔다. 두어 번 시도하다가 문고리를 부여잡은 채로 포기했다. 진하게 키스 좀 했다고 이럴 건 아닌 것 같은데. 창피함으로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 * *

날은 화창하고 카페 일은 한가했다. 한창 손님으로 바글거리다가 유유자적한 시간대였다. 나는 설거지를 끝내 놓고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각의 주제는 ‘고정원한테 뭘 해 주면 좋을까’였다.

뭔가 해 주고 싶었다. 기뻐하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어제 일을 이후로 늘 한구석에 있던 바람이 더 간절해졌다. 꼭 물질적인 게 아니더라도 기쁘게 만들 수 있는 선물이 있을 텐데. 아침부터 틈틈이 고민을 해도 딱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벤트 같은 걸 해 주면 좋아할까. 확실히 그런 종류의 선물은 정성도 훨씬 많이 들어가고 기억에 남는 추억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검색해 보고 막막한 기분만을 느꼈다. 동물 옷이나 교복 코스프레, 촛불 켜 놓고 노래 불러 주기 같은 건 내가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절대 좋아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썰렁한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서리가 일었다.

그러다 우연히, 손님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한 시간 안마권이라고 써 놓은 거 있지.”

“기특하다. 한 시간이면 얼마나 긴데. 우리 아들은 그냥 안마권, 띡 써 놨어. 그리고 한 다섯 번 주무르면 끝이야.”

“애들이라 한 시간이 얼마나 긴지 몰라. 뭐 안마권 말고도 설거지권, 빨래권, 심부름권에 무슨 뽀뽀권까지 적어 놨더라.”

“지원이는 엄마 업어 주기도 있어. 이거는 나중에 자기가 어른 되면 쓰래.”

훈훈한 웃음소리가 홀 안에 울렸다. 나도 살짝 따라 웃었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유치원생이나 초등생을 키우는 엄마들 모임인 듯했다.

“…….”

카페 메모지에 ‘쿠폰’ 두 글자를 적어 봤다. 효도 쿠폰에서 내용을 좀 변형시켜서 애인끼리 쓰는 쿠폰으로 만들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해 볼까.

생각이 들다가도 망설여졌다. 유치해도 너무 심하게 유치한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원래 연애가 유치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 정도면 거창하지도 않고 귀여운 이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다. 나 같이 다 큰 남자가 뽀뽀권 같은 거 적은 쿠폰 만들어서 쓰라고 내밀면 소름 끼칠 것 같은데…….

가만히 앉아 상상만 해도 후텁지근했다. 나는 열감이 느껴지는 이마를 문지르며 조용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 끝 무렵에는 잠깐 또 분주했다. 단체 손님 몇 팀이 몰리면서였다. 일곱 잔, 다섯 잔에 이어 음료 열 잔을 내보내고 나니 조리 테이블이 엉망이었다.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 고정원이 카페로 들어왔다. 텔레파시 같은 게 정말 있는지 딸랑, 하는 도어 벨 소리를 듣자마자 직감적으로 누군지 알았다.

발을 들였을 뿐인데.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길이 고정원에게로 집중됐다. 아무래도 폐쇄된 공간에서는 금방 시선을 끌기 마련이었다.

“차에서 기다려 주면 안 될까? 금방 갈게.”

나는 입가를 가리고 속삭였다. 고정원은 나를 보지도 않더니, 진열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샌드위치, 뭐가 맛있어요?”

아, 하고 얼빠진 소리를 뱉어 내고 나서야 나는 허둥거리며 답했다.

“여기, 치아바타 샌드위치 많이 나가는데요.”

“많이 나가는 거 말고, 본인이 맛있게 먹은 건 뭐예요?”

“어…… 그럼, 이거 BLT 샌드위치…… 하실래요?”

눈앞으로 카드가 내밀어졌다.

“그거랑, 음료수 어울리는 걸로 같이 부탁드려요.”

추천해 달라는 식으로 애매하게 주문하는 손님이 제일 어려웠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를 수 있었다. 고정원의 입맛에 맞을 만한 주스를 골라 함께 포장해 주었다.

“빨리 와.”

봉투를 건네는 도중 속삭임이 귀를 스쳤다. 고개를 들자 은근한 눈짓을 한 고정원이 출구를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 딸랑, 소리 내며 유리문이 닫혔다. 나는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도 그쪽을 보고 서 있었다. 흐뭇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다가 서둘러 교대를 준비했다.

차에 오르자마자 손에는 샌드위치가 들렸다.

“어? 이거 내 거야?”

“응.”

그래서 내 입에 맛있는 걸로 달라고 한 거였구나. 고정원이 먹으려고 산 줄 알았던 샌드위치는 처음부터 내 몫이었던 듯했다. 끼니는 대충 때우긴 했지만 얼마든 더 먹을 수 있었다. 크기도 크지 않아서 나는 주스와 함께 1분만에 먹어 치웠다.

“천천히 먹지. 배 많이 고팠어?”

“그냥…….”

같이 있을 시간 아끼려고 빨리 먹은 거였다. 우리는 그대로 고깃집으로 이동했다. 근처에 차를 대 놓고, 각자 자리에서 마주 보고 앉아 시간을 보냈다. 대화 없이 그냥 손만 잡고 있어도 좋았다.

“있잖아.”

“응?”

고정원이 다감하게 대꾸했다. 나는 손안에 있는 두툼한 엄지손가락을 문지르며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나 오늘부터 이희운하고 일 얘기 말고는 대화 안 하려고. 일 얘기도 전달 사항만 짧게 할 거고.”

“…….”

“혹시 뭐 상담하고 싶어 해도 바쁘다고 거절하려고, 앞으로는.”

“…….”

“아, 밥 먹을 때도 멀리 떨어져서 먹어야겠다.”

잠자코 보고만 있던 고정원이 다소 가라앉은 투로 물었다.

“피곤하지. 애인이 질투하니까.”

“아니? 뭐가 피곤해, 이까짓 게.”

고정원은 모호하던 표정을 얼굴에서 지워 버리고, 갈라질 것처럼 건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일하러 가. 계속 이러고 있으면 보내기 힘들어져.”

귓불에 닿던 손이 미끄러지듯 목덜미로 안착했다.

“……손을, 빼야 가지.”

파고드는 손을 지적하자 뭐가 재밌는지 고정원이 웃었다.

“손이 문제야. 그치.”

“…….”

“내 손이 인휘를 너무 좋아해.”

말도 안 되는 책임 전가 때문에 실소가 터졌다.

“사실 나도 니 손 좋은데.”

나는 잡고 있던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쪽쪽거렸다.

“……그래?”

“너보다 더 좋아.”

놀리느라 몇 번 더 반복했더니 고정원이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상체를 숙여 오는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웅크렸다. 맞잡은 손을 어거지로 끌어 내린 고정원은 입술을 붙여 왔다.

“병인가 봐.”

쪽, 쪽, 입술을 빨다가 귓구멍으로 혀를 옮기고는 둥글게 돌렸다. 참기 힘든 느낌에 허벅지가 부들거렸다.

“정말로 질투가 나네.”

고정원은 아예 옷을 들추고 늑골을 쓰다듬었다. 간지러워 으하학, 경박한 웃음이 터졌다. 나는 옆구리의 손을 빼내려고 기를 썼다. 그럴수록 손은 더욱 깊게 들어와 교묘하게 움직였다. 차체가 기우뚱거릴 정도로 격렬한 장난이 오갔다. 자지러지는 웃음이 끝도 없이 터져 나왔다.

알바는 5분이나 지각하고 말았다. 근무가 시작되고, 시간은 유독 더디게 흘렀다.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 것 같았다. 의식해서 거리를 둔다는 게 생각보다 난처한 일이었다. 악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의무적으로 피하려고 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형, 어제…….”

“아, 미안. 나 불 좀 갈고 올게.”

이희운이 대화를 걸어오는 낌새가 보이면 갑자기 다른 할 일을 찾는 걸로 차단했다. 손님이 많아서 망정이지 한산했다면 곤란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 형, 잠깐 할 얘기 있는데.”

“아……. 그거 나중에 하면 안 될까? 나 창고에 음료수 좀 채워야 돼서.”

일이 시작되고부터 벌써 다섯 번도 넘게 이런 식으로 회피하고 있었다. 거절할 때마다 이희운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처음 몇 번은 그냥 웃고 넘기는 모습이었는데 아까만 해도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지며 그늘진 인상을 풍겼다. 마음이 편치 못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창고 일을 마무리해 놓고 밖으로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꺼려져서 시간을 끌고 싶었다. 주변 정리를 좀 하고, 나온 김에 화장실이나 들렀다 가면 될 것 같았다.

입구에서 방향을 꺾던 나는 설핏 인상을 썼다. 어둑한 가게 옆으로 수상한 실루엣이 비쳤던 까닭이었다. 취객인가 싶어 슬그머니 고개를 빼고 보았다.

그러나 건물 벽에 기대서 있는 커다란 인영은 취객이 아니었다.

“…….”

담벼락에 선 사람은 이희운이었다. 한 손으로 비스듬히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들어가려던 발끝이 주춤거렸다. 한눈에 봐도 지치고 음울해 보였다. 괜찮느냐고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선뜻 그럴 수가 없었다. 함부로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였고 나도 거리를 둬야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갈팡질팡하다가 가게 안으로 돌아왔다. 심란할수록 고정원 생각만 했다. 이희운하고 거리를 두라고 말하던 표정과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때처럼 오장육부가 꽉 조였다. 고정원이 싫어하는 일, 갈등이 될 만한 일은 무턱대고라도 피하고 싶었다.

카페 일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단체 손님이 몰리게 되면서 잡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차라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게 나았다. 걱정했던 이희운도, 일할 때는 별다른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실수 없이 일을 하는 모습에서 아까 같은 음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바탕 손님들이 휩쓸고 가자 홀 안은 텅 비어 너저분했다.

“야, 죽겠다.”

“무슨 동호회에서 온 거 같죠?”

“그러게. 오늘은 회사 사람들도 많고.”

평소 홀에만 세 명이면 아무리 바빠도 어떻게든 할 만했다. 오늘은 사장님이 나와 거들어도 일손이 부족할 만큼 분주했다. 나는 쌓인 그릇을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거기서 의외의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헉, 야, 괜찮아?”

“괜찮아요.”

주방 한편에는 이희운이 서 있었다. 화상을 입었는지 흐르는 물에 벌게진 팔등을 대고 있었다. 미간을 잔뜩 좁힌 게 보였다. 심지어 눈도 충혈돼 있었다. 우는 건가 해서 들여다봤는데 다행스럽게도 우는 것 같진 않았다.

상처 부위는 정도가 약해도 덴 면적이 꽤 넓었다. 한동안 화끈거릴 만한 정도였다. 나는 멀뚱히 보고 서 있다가 주방을 벗어났다.

사장님께 간단하게 상황 설명을 하고 뛰쳐나가 향한 곳은 근처의 약국이었다. 화상 연고를 사자마자 곧장 뛰어서 돌아왔다.

“저기, 형. 이거 이희운 좀 주실래요? 쟤 화상 입어서.”

“왜요, 직접 안 주고?”

“아, 저 바닥 정리 좀 하려구요.”

“그래요, 그럼.”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했다.

가게 뒤편에서 대걸레를 빨고 있을 때였다. 마침 인기척이 들려왔지만 모른 척했다.

“약 고마워요.”

설마 했는데 정말로 이희운이었다.

“……어어, 치료 잘해.”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내가 사 준 거라고 전할 줄은 몰랐어서 난감했다. 나는 걸레를 대충 헹궈 놓고 뺐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도록 서둘러 빠져나가야 했다. 막 스쳐 지나가려고 하자 이희운은 낚아채듯 내 팔을 잡았다.

“형.”

“왜? 나 바쁜데…….”

내가 봐도 안절부절못하는 티가 났다. 곤란해서 고개를 돌리고 잡힌 팔을 떨궈냈다. 더는 둘러댈 말도 없어서 제발 이대로 보내 줬음 싶었다.

“저 형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엥, 아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말투가 연극 톤 같기는 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보니 이희운은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찌 할 줄 모르고 흔들리는 눈을 보니 양심이 찔리면서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

무작정 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는 없었을까. 이제 와서 문득 후회가 들었다. 인간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닌데, 너무 한 가지 목적에만 사로잡히다 보니 다짜고짜 끊어 내는 행동을 취해 버렸다. 우회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 게다가 이희운은 아르바이트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마주쳐야 하는 사이였다.

“야, 희운아.”

나는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꺼내놓았다.

“실은 내가, 설명은 자세히 못 해 주겠는데…… 지금 누구랑 친하게 지낼 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전처럼은 못 대해 줘도 그냥 그러려니 이해해. 요새 좀, 여유가 없다고 해야 할지…… 암튼 사정이 좀 그래. 미안하다. 선배가 돼 가지고…….”

이상해 보이겠지 싶으면서도 말 없이 피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잠시간 말이 없던 이희운이 가슴을 크게 들썩이고는 말을 꺼냈다.

“……제가 뭐든, 이해할 수는 있는데요. 근데 하나만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요.”

주변을 배회하던 눈동자가 진지하게 고정되었다.

“형 저한테 뭐 실망하시거나, 제가 싫어졌다거나. 그런 건 아닌 거네요, 그럼?”

본인이 뭔가 실수한 줄 알고 힘들었던 모양이다. 나도 여기서 굳이 거짓말까지 해 가며 나쁘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너 싫어할 일이 뭐가 있냐.”

솔직하게 답해 주자 이희운의 경직돼 있던 눈초리가 풀어졌다.

“그럼 됐어요.”

희미하고 기운 없긴 해도 한결 가벼워진 얼굴이었다. 그걸 보니 그나마 맘이 놓였다.

“뭐든 이해하니까, 저한테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먼저 가 볼게요.”

머뭇거리던 이희운은 속 깊은 말까지 남기고서 나갔다. 나는 짓눌린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져서 애꿎은 머리칼만 헝클다 느즈막이 나섰다.

정시에 일이 끝났다. 일하는 사람들과 대강 인사를 나누고 앞문으로 나왔다. 낮부터 고됐던 업무량에 팔다리는 물론이고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임시방편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찌뿌드드한 고개를 꺾었다.

“어?”

오늘은 안 나오는 줄 알았더니. 긴 다리로 성큼 다가오는 고정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생했어.”

크고 따뜻한 손이 뺨을 감쌌다. 반가워서 웃음이 주체가 안 됐다. 찢어질 것처럼 입이 벌어지니까 고정원이 터뜨리듯 웃었다. 그렇게 좋아? 물으며 손바닥을 목뒤로 감았다. 편안하게 주무르던 손길이 어깨까지 내려왔다.

“욕조에서 뜨겁게 담그자. 마사지해 줄게.”

뭉친 부위를 정확히 짚어 낸 손이 꾹꾹 눌러왔다. 아릿하고 시원한 나머지 소리가 터질 뻔한 걸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밖이라 껴안을 순 없고, 아쉽게 거리를 떨어뜨린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형.”

등 뒤에서부터 들려온 부름에 화들짝 놀랐다.

“어…….”

돌아보자 이희운이 서 있었다. 이제 막 가게에서 나온 듯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조마조마해져서 고정원을 올려다봤다.

“아, 희운이구나.”

평상시와 같은 반응에 안도했다. 내게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고정원이 감정적이거나 적대적으로 나올 리가 없는데. 쓸데없는 우려였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할 말 있어?”

가로등 아래 선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잠시 미적거리는 듯하던 이희운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아니라…… 동기 애들이 대신 물어봐 달라고 해서요. 얼마 전에 혹시 술 사 주기로 하셨던 거 기억나세요?”

고정원은 이제 생각났다는 듯 끄덕였다.

“기억하고 있어.”

“애들이 자꾸 선배님들이랑 마시고 싶다고 해서……. 바쁘시면 정말로 거절하셔도 돼요.”

소극적인 부탁에서 부담을 주기 싫어하는 게 느껴졌다. 고정원은 잠시 나를 내려다보는가 싶더니 맞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주중에 한 번 다 같이 보자.”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간결한 대답이었다. 안 될 거라 생각했었는지 이희운이 놀란 얼굴을 했다. 나도 뜻밖이라 올려다보았다. 이희운 때문에라도 같이 자리를 만드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럼, 정확히 언제로…….”

“다들 시간 맞는 날 있으면 우리가 비울게.”

어느 틈엔가 팔이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고정원은 말을 건넨 이희운이 아니라 나를 쳐다보며 눈을 맞췄다. 이유는 몰라도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간만에 너 취한 거 보고 싶다.”

흘리듯 말한 고정원의 눈매가 살짝 접혀 있었다.

“…….”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희운은 갑작스러운 인사를 하더니 떠났다. 거의 도망가듯이. 그 부자연스러움이 조금 우려됐지만 일이 끝난 직후라 피곤했겠지 싶었다.

가는 길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고정원은 다른 데에 정신이 가 있는 사람 같았다. 조금 전 즐거워 보이던 것과는 상반되는 분위기였다. 선뜻 말을 붙이기 어려워 나도 걷기만 했다.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내가 먼저 손을 잡았다. 인적 끊긴 골목이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고정원은 잡힌 손을 내려다보곤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손가락끼리 교차되도록 깍지를 꼈다.

한여름도 아닌데 붙든 손에서 열기가 배어났다. 덥냐고 물으니 고정원은 그러게, 애매한 대꾸를 하며 어렴풋한 웃음기만 비쳤다.

“…….”

옆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지나치게 단정해서 지나치게 무심해 보였다. 염려되는 마음에 대화를 시도하고 싶었지만 입 안에선 군침만 맴돌았다.

집에 도착하자 더운 것도 아닌데 갈증이 났다. 두 컵째 마시다가 가로막듯 선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마실래?’ 하고 입에서 뗀 컵을 내밀어 보았다. 순순히 받아 든 고정원이 남은 물을 마셨다.

“엇.”

씻으려고 가던 중이었다. 뒤에서 끌어당겨지자 맥없이 딸려갔다.

“씻게?”

묻는 말에 고개를 살짝 비틀어 대답했다.

“어. 같이 씻을래?”

등 뒤에서부터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티셔츠를 벗기고, 바지를 벗기고, 속옷과 양말을 벗겼다. 맨몸이 된 나도 뒤돌아서 똑같이 옷을 벗겨 주었다. 드로즈까지 내리자 자연스레 몸 전체로 눈길이 머물렀다.

“…….”

저번에도 이랬었나. 뭔가 달라 보였다. 근육으로 뒤덮인 몸은 오늘따라 최소한의 체지방도 없이 메말라 보였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무기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구경하는 나를 고정원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더 살펴볼 새도 없이 우리는 그대로 욕실로 직행했다.

한 시간 가까이 느긋하게 온욕을 했다. 나와서는 드라이를 하고 서로 보습제를 발라 주었다. 나는 넓은 몸 곳곳을 문지르며 확실한 변화를 느꼈다. 기름기 하나 없었다. 근육이 아니라 고체 덩어리에 가까운 게, 대회라도 준비하는 사람 같았다.

“근데 너 운동…….”

한마디 하려다 말문이 막혔다. 로션 바른 손이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볼기가 벌어지는 느낌에 눈이 꾹 감겼다. 아주 비좁은 곳까지 촉촉해지고 나서야 손길은 빠져나갔다.

“자자.”

불이 꺼졌다. 고정원은 내 등을 밀어 침대에 오르게 했다. 나는 속으로 안심했다. 하려는 줄 알고 긴장했는데 그럴 생각은 아닌 듯했다.

사위가 어두워지면서 피로만 남았다. 팔베개를 내어 준 고정원이 나를 안았고, 나도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안았다. 무서울 정도로 편안했다. 정리되지 못한 생각과 감정들이 부유했지만 금방 가라앉았다. 무거운 피로감에 끔뻑, 눈이 감겼다.

삐리리, 도어 록 잠기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꿈결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소리가 왜 나는 거지. 한 박자 늦은 의문에 휩싸였을 때 벌떡 상체가 튀어 올랐다. 돌아본 침대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나간 게 고정원인 게 확실해지자 나는 부리나케 현관으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열었다. 큰 소리로 이름도 외쳤다. 가 버렸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고정원은 보이는 곳에 서 있었다. 버튼이 눌린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무의식중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어깨가 축 가라앉았다.

“너, 대체 어디 가. 말도 없이…….”

뒤늦게 새벽 중임을 의식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미안, 조용히 나가려고 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띵, 소리가 났다. 엘리베이터가 층에 도착하며 문이 열렸다.

“잠이 안 와서.”

고정원은 약간 멋쩍은 것처럼 말했다.

“잠이 안 와?”

“운동하고 땀 빼면 좀 낫거든.”

“야, 그렇다고 이 시간에……”

새벽이라 걱정이 됐다. 24시간 피트니스 센터라고 해도 이 시간엔 이용하는 사람도 없을 텐데. 험한 사건들이 자주 터지는 세상이었다. 흉악 범죄 대상이라도 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고, 아무튼 불안했다. 평상시와 다른 고정원의 행동도 불안감을 조성했다.

“그럼…… 내가 재워 줄게.”

이대로 가 버릴까 봐 걱정됐다. 다짜고짜 손을 붙들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

“여기 누워 봐.”

얌전히 따라온 고정원에게 나는 침대에 누울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서랍을 뒤졌다. 언젠가 물건을 사면서 사은품으로 받았던 수면 안대를 찾기 위해서였다.

가까스로 찾아낸 안대를 씌워 주자 고정원이 미약하게 실소했다. 그러든 말든, 티셔츠와 바지까지 벗겨 주었다. 마무리로 수면을 유도하는 음악을 찾아 재생시켰다.

“깊게 호흡하면 잠이 더 잘 온대.”

옆자리에 누워서 말했다. 속삭거려서 놀랐는지 어깨가 조금 움찔거렸다.

“팔다리에 힘 쭉 빼고 전신을 이완시켜 봐.”

낮춘 목소리로 말하며 안아 주었다. 늘 하던 것처럼 가슴팍에 팔을 둘렀다. 힘을 빼라는 의미로 팔뚝도 주물러 주고, 가만가만 토닥여 주기도 했다. 기다리는 동안 눈꺼풀이 무너지며 졸음이 쏟아지는 걸 참았다.

체감상 2, 30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자?”

묻는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느리고 안정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까이서 지켜보며 완전히 잠들었음을 확인했다.

그제야 마음 놓고 나도 눈을 감았다. 전문적인 치료가 아니어도 되는구나. 이렇게 간단한 방법만으로 효과가 있는 걸 보니 괜히 더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진작 알았으면 처음부터 신경 써 줬을 텐데.

몸이 삭막하게 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바쁜 와중에 짬을 내서 운동에 쏟아부었다는 것도 짐작이 갔다. 스트레스가 불면증을 생기게 할 만큼 심한 건가. 심란하게 고민하는 사이 또다시 깊은 수마가 몰려들었다.

* * *

시험이 끝났어도 5월 첫 주는 분주했다. 과제가 이어지고, 약속들이 차례차례 잡혔다. 일단 오늘은 후배들과의 술자리 모임이 있었다. 고정원이 주중에 보자고 전한 뒤 일사천리로 진행돼 맨 먼저 정해진 약속이었다.

어젯밤. 이희운에게서 갑자기 못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유는 적혀 있지 않았다. 못 갈 것 같다며 죄송하다는 말만 창에 덩그러니 떠 있을 뿐이었다. 나와 고정원, 그리고 후배들이 포함된 단체 대화방이었다.

고정원도 오늘 오전 갑작스럽게 사정이 생겼다. 아버지 생신을 축하하는 식사 모임이 하루 앞당겨진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후배들과의 약속을 미룰 수는 없었다. 계획을 변경해 내가 먼저 가 있고 고정원은 늦게 합류하기로 했다.

“…….”

약속 시간 한 시간 전.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에 갑작스럽게 불참을 통보한 이희운이 신경 쓰인 탓이었다. 내가 대놓고 피했던 것 때문에 이러나, 생각하면 가슴께가 갑갑했다.

메시지 창을 열었다. 희운아, 까지 썼다가 지우고, 다시 무슨 일, 까지 썼다가 지웠다. 답답해서 꺼지듯 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것도 없는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종내는 그냥 집어넣었다. 어차피 거리를 둬야 하는 상대라면 상처를 받건 말건 신경을 끄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된 술집에는 이희운을 뺀 후배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고정원이 안 오는 줄 알고 살짝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가 나중에 합류할 거라는 소식을 전해 주자 급격히 되살아났다.

“짠 해요, 우리. 짠!”

기운차게 잔마다 술을 따르고 다섯 명이서 열댓 명 같은 목소리로 건배를 외쳤다.

“저희 진짜 오늘만 기다렸어요.”

“자랑하면 애들 따라붙을까 봐 입단속하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말뿐이 아닌 게, 정말 다들 눈들이 초롱초롱했다. 들뜬 게 나한테까지 느껴져 웃음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맥주를 마시며 둘러보는데 맞은편에 앉은 후배 하나가 나를 향해 말했다.

“근데 선배님 웃는 얼굴 진짜 예쁘시네요.”

그것도 감탄조였다.

“야, 너 벌써 취했냐?”

“아니, 너무 잘생기셨잖아.”

“그건 그래.”

아부성 칭찬에는 적응이 안 됐다. 이런 건 쑥스럽기만 했다. 재치있게 응수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애꿎은 냅킨만 만지작거렸다.

“오빠,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

이번엔 옆자리에서 물어 왔다. 저번에 내 SNS 아이디를 물어봤던 후배였다.

“요새 잘 안 먹어서 줄었을 텐데……. 전엔 보통 소주 두 병 정도?”

“오와, 센데요? 저는 반 병인데!”

대단하다는 듯 박수를 치는 후배의 옆으로 우민규가 튀어나왔다. 주먹을 내밀며, 형 저도 소주 두 병, 하고 우리가 주량이 같음을 어필했다. 나도 주먹을 쥐고 맞대 주었다.

“오늘은 무조건 달리셔야 되는 거 알죠?”

“어어, 그래야지.”

허락을 받았으니 오늘만큼은 마음껏 마셔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허락이 맞나? 순간 의구심이 들었지만 맞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취한 게 보고 싶다고 했으니 그때까지 양껏 마셔도 된다는 말이겠지.

“정원 선배는 주량 어찌 되세요?”

“정원이는…….”

자신있게 입 열었다가 멈칫했다.

“그러게. 나도 잘 모르네.”

고정원은 맥주, 특히 소주를 잘 안 마셨다. 술 자체를 자주 찾는 편이 아니었다. 마신다고 해 봐야 가끔 반주로 와인을 곁들이는 정도.

작년부터 같이 한 기억들을 곰곰이 더듬어 봐도 만취했다고 할 만한 모습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저번에 같이 와인을 마신 게 그나마 가까운데. 그땐 나도 취했어서 이렇다 할 술버릇 같은 걸 캐치하지 못했다. 다음엔 정말로 고정원만 취할 때까지 먹여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요새 좀 피곤해 보이지 않아요?”

“누구? 나?”

“아, 아뇨. 고정원 선배님이요.”

“그래?”

“오늘도 잠깐 학교서 뵀었는데 안색도 좀 창백하고. 눈가도 약간 피곤해 보이는 느낌이었어요.”

“…….”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는 걸 좀 버거워하긴 했다. 불면증은 나았을 텐데. 며칠째 내가 밤마다 재워 주면서 먼저 잠드는 것까지 확인하고 있었다.

“여자 친구 만나느라 바쁘신 거 아니야?”

우민규가 응큼하게 한마디 했다. 여자 친구 소리에, 걱정스럽던 대화의 흐름은 별안간 장난스럽게 변하며 활기를 띠었다. ‘그런가?’ 하고 다들 음흉한 얼굴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예견된 순서처럼 후배들의 관심은 내게로 옮겨왔다. 유도 심문 하듯 은근슬쩍 사귀는 사람에 대해 캐묻는 바람에 진땀이 다 났다. 술 게임까지 동원해서 알아내려 하는 의지들이 대단했다. 어물쩍 넘어가는 동안 서서히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이제는 다들 주변 사람들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걔 진짜 그 이상한 남자랑 왜 사귀는지 모르겠어.”

“채은이가 아깝지. 근데 보면 한 명이 심하게 아까운 커플 의외로 많아.”

후배들은 주변의 커플들에 대해 이런저런 평을 늘어놓았다. 나는 술을 홀짝이며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근데 나중에 나이 들면 한쪽만 아까운 커플은 잘 없고 끼리끼리 만난대.”

“그땐 결혼할 나이 되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지금은 학생이니까 멋모르고 아무나 대충 만나는 거고.”

“근데 끼리끼리 만나는 게 나아.”

“맞아. 경제 수준 너무 차이 나면 서로 힘들어서 오래 못 가.”

“채은이 걔도 나중에 지금 남친 흑역사될 걸. 콩깍지 빨리 벗겨져야 되는데.”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갑갑함을 느꼈다. 가슴께가 찌릿한 느낌까지 받다가 문득 어이가 없었다. 다른 사람 이야기에 뭘 이입하고 있는 건지.

빈 잔에 술을 채워 꿀꺽꿀꺽 들이켰다. 탁, 잔을 내려놓자 기분 좋은 현기증이 일었다. 술기운이 달가워 잇따라 소주를 들이켰다. 다들 뭐라고 시끄럽게 수다를 이어 가는데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주변이 점점 떠들썩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도 모처럼 양껏 들이킨 술로 인해 흥이 올랐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장단을 맞추느라 바빴다.

“어, 오셨다!”

누군가 외친 걸 시작으로 환호가 들끓었다. 어찌나 큰지 고막 안쪽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듦과 동시에 훅 좋은 냄새가 풍겼다. 누군가에게 밀려나면서 어깨가 벽 사이에서 짜부라졌다.

“어?”

옆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후배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고정원이 거기에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내 옆을 차지하고 앉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널널했던 자리는 순식간에 비좁아져 있었다. 체구 작은 여자애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고정원을 보니 거인이 따로 없었다.

“너 원래 이렇게 거인이었어?”

“진짜 취했네.”

고정원이 나를 보고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지었다. 취한 거 같기는 했다. 이런 데서 안고, 뽀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네가 보고 싶다며, 나 취한 거. 귀에 대고 말하자 닿은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정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사 빠진 실실거림이 새어 나왔다.

“재밌게들 놀았어?”

“네, 완전요. 저희 오늘 3차까지 가요!”

“인휘는 더 마시면 안 될 거 같은데.”

힘없이 기대 있던 나는 퍼뜩 상체를 일으켰다.

“뭔 소리야. 나 마실 수 있어.”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오늘을 그냥 보내면 언제 또 이렇게 진탕 취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러다 또 필름 끊길라.”

고정원은 이미 결정한 듯 완고해 보였다. 이러다 나만 집에 돌려보내는 게 아닌가 불안감마저 들 정도였다. 더 마시고 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허락해 줄지 모르겠어서 애가 탔다.

“좀만 더, 진짜 좀만 더 마시게 해 주면 안 돼?”

마시고 싶다는 생각으로 간절했다. 부탁한 뒤에는 끌어안았다. 잘 보여야겠다고 마음먹자 나온 행동이었다. 가슴이 맞닿도록 가깝게 몸을 붙였다.

즉각적인 반응이 없었다. 이걸로는 부족한가 싶어 목덜미에 입술을 찍었다. ‘좀만, 진짜 몇 잔만 더 마실게, 어?’ 하고 부탁을 되풀이했다. 간절해서인지 아니면 벌써 맛이 간 건지, 뱉어 낸 목소리가 낮게 쉬어 있었다.

고정원은 조용하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왠지 웃음기가 섞인 것도 같았다.

“…….”

원래 술집이 이렇게 조용한가. 깔린 정적에 위화감이 느껴질 즈음이었다. 온몸의 잔털이 삐죽 곤두섰다.

미친 것 같았다. 미친 게 확실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누구랑 있는지, 당연한 사실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는지 몰랐다. 방금 전 나는 후배들의 존재를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고정원과 단둘이 있는 줄 알고 이런 미친 짓을 하고 말았다.

확 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어수선하게 해명을 시작했다. 목이 잠긴 것처럼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내가 취하면 원래 이런다, 아무나 끌어안는다 어쩐다 하며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마무리가 안 돼서 안주를 한 입 가득 욱여넣는 걸로 끝냈다.

“……취하면 애교 장난 아니시구나.”

“오빠 여친분 불안하겠는데요……?”

슬쩍 보니 다들 안색이 벌겠다. 술 때문에 이미 불그스름했던 것 같기도 했다. 조명도 빨갛고 어두워서 나도 그렇게 보이겠거니 했다.

“미안한데 나 너무 취해서…… 슬슬 가야겠다.”

취했다고 이런 실수를 할 줄은 몰랐다. 더 마시고 자시고 간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취기 때문에 휘청거리자 고정원이 붙들어 주었다.

“있다가 같이 가.”

그리고 나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이럴 때 보면 고정원은 너무 눈치가 없었다. 내 속뜻도 모르고 하는 행동이 답답해서 콧김이 세게 나왔다.

“쉬든가, 한숨 자.”

고정원은 쭈뼛거리는 나를 억지로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래 놓고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후배들과 건배를 해 가며 술을 마셨다.

자리가 너무 비좁아서 더 떨어질 수도 없었다. 허리에는 묵직한 팔이 둘러져 있었다. 머리도 무겁고, 술기운이 좀 가실 때까지만 기대기로 했다.

“아, 어떡해. 두 분이서 커플 같은데요?”

발끝이 움찔 떨렸다. 애들도 웃고 고정원도 웃고, 나 혼자만 숨을 죽였다.

“우리 커플 같다는데?”

말하며 고정원은 나를 내려다봤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고개를 들어 피해 버리자 시끄럽던 후배들이 잠잠해졌다. 왠지 많은 의미가 담긴 침묵 같았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얼굴에 열이 몰렸다.

술이 깨야 했다. 그래야 움직여서 혼자라도 갈 수 있었다. 마침 물이 반쯤 남은 컵이 보였다. 단번에 들이켜자, 밍밍한 맛이 아닌 이상한 맛이 났다. 목구멍이 화끈거리며 기침도 났다. 물이 아니라 소주였다는 걸 깨닫고 시야가 핑 돌며 취기가 올랐다.

“헐, 이희운이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그 이름이 나올 리가 없는데. 처음엔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했다.

“야, 너 못 온다며!”

어질한 시야 때문에 도리질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정말로 이희운이 보였다. 뛰어왔는지 조금 헐떡이는 모습이었다.

“늦게라도 왔는데…… 괜찮죠?”

의식할 새도 없이 팔이 뻗어 나갔다.

“어어, 야, 당연하지……! 앉아, 얼른.”

반기듯 말해 놓고 아차 싶었다. 너무 친근하게 군 것 같아서. 취해서 행동이 자꾸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나왔다. 올렸던 팔을 내리며 나도 모르게 옆자리를 살폈다.

“……어서 와, 희운아.”

살갑게 말한 고정원의 두 눈이 보였다. 우려했던 대로, 차분히 가라앉아 나를 향해 있었다.

이희운이 오고 얼마 안 돼 자리가 한 번 옮겨졌다. 근처에 새로 생긴 3층짜리 복층 술집이었다. 후배들은 널찍한 좌식 테이블을 택했다. 나는 순순히 뒤따르면서도 어지럼증 때문에 신을 벗기가 힘들었다. 방턱에 걸터앉아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미적거렸다. 손가락을 끼워 넣은 채로 잠시 깜빡 졸았던 것 같다.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터졌고, 어느샌가 다가온 고정원이 내 신발을 벗겨 주었다.

“…….”

일부러 고정원의 옆자리는 피했다. 물론 이희운의 옆자리도 의식적으로 피했다. 아무도 거슬리지 않을 만한 곳을 물색하다 한 자리가 눈에 띄었다. 여자 후배 옆보다는 무난할 것 같아서 휘청거리다 안착했다.

“와, 형! 저랑 마시려고 오신 거예요?”

우민규가 호들갑스럽게 목청을 높였다. 과격하게 반기는 반응에 얼떨떨했다. 어쩌다 보니 하이파이브를 하고 서로 어깨동무를 걸치고 있었다.

“인휘 너 거기 있어도 돼?”

사이를 가른 건 고정원의 목소리였다. 나도 우민규도 맞은편 좌측을 쳐다봤다.

“……어?”

“술 마시면 잘 토하니까. 또 옆에 쏟을까 걱정돼서.”

그 말에 맞닿아 있는 몸이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형, 혹시 지금도 쏠려요?”

거리를 떨어뜨린 우민규가 꺼림칙한 듯 물었다. ‘아니, 지금, 아닌데……’ 하고 변명을 해도 불안으로 경직된 표정은 여전했다.

“민규 여기로 앉을래? 나는 인휘랑 자주 마시니까 보면 알거든. 토할 거 같으면 내가 화장실로 데려갈게.”

“엇, 감사합니다, 선배.”

기다렸던 것처럼 우민규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냉큼 자리를 옮겨 가자 비어 있는 옆으로 고정원이 다가왔다.

“야, 내가 언제 잘 토했다고…… 그런 적 거의 없는데…….”

나는 옆구리를 치며 작게 항변했다. 고정원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후배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여 주고 있었다. 다만 뒤에서는 알겠다는 듯 내 등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

그렇게 나랑 같이 앉고 싶나. 그게 아니면 구태여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있지도 않은 술버릇으로 오해받은 게 억울했다가 점점 입가가 근질거렸다. 잠시도 못 참고 붙어 있으려 하는 게 귀엽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지 싶었다. 대신 행동거지를 더 조심해야겠다고 재차 마음먹었다.

……하지만 술자리가 이어질수록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없었다. 왁자하게 떠드는 후배들 사이로 나는 고정원과 손을 잡고 있었다. 테이블 밑이었다. 워낙 은근하고 단계적으로 겹쳐진 까닭에 피할 생각을 못했다. 때늦게 빼려고 하니까 놔주지를 않았다.

술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신경이 온통 손에 쏠렸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에 쏠렸다 했다.

“희운아.”

고정원이 부른 건 이희운의 이름인데, 내가 긴장해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맞은편에서 이희운이 대답을 하며 고개를 앞으로 내민다.

“여자 친구 안 만나?”

“…….”

고정원의 난데없는 물음에 다들 시선이 이희운의 얼굴로 꽂혀들었다. 우민규는 안 해도 되는 말을 거들기까지 했다.

“그러게. 야, 너 좀 만나. 아직도 그 차인 여자 못 잊었냐?”

“아…… 그런 일이 있었어?”

고정원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이희운을 봤다.

“희운이 볼수록 괜찮은데 왜 그러지. 눈이 너무 높은가?”

“누군지 알아야 조언을 해 주든가 말든가 하는데 얘 절대 말 안 해요. 저는 첨에 유부녀 좋아는 줄 알았어요, 진짜로.”

우민규가 까불거리며 끼어드는 말에 고정원이 한 톤 낮아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안타깝네.”

앉은 사람들이 일제히 고정원을 돌아봤다.

“아, 희운이 네가 그렇다는 건 아닌데. 가끔 봤거든. 미련하게 혼자서 열 올리는 사람.”

앞에 앉은 후배가 안쓰러워하는 듯한 내색과 더불어 공감을 표했다.

“맞아. 짝사랑만 몇 년씩 하는 사람들 꼭 있더라.”

대화의 흐름도 그렇고 불편했다. 나는 고정원을 올려다보았다. 왜 굳이 이런 말을 꺼내는지 이해가 안 됐다.

“…….”

예기치 않게 대각선의 이희운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 풀린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기에 취한 건가 싶었다.

“아르바이트 하는 건 어때. 인휘랑 같이 하는 거 할 만해?”

고정원은 또다시 이희운을 질문의 표적으로 삼았다. 내게로 이어져 있던 눈길은 고정원을 향했다.

“……네. 덕분에, 잘 하고 있어요.”

“다행이네. 근데 인휘는 아직 적응이 안 됐는지 많이 힘든 것 같던데. 끝나고 집에 오면 아무것도 못 해.”

“…….”

‘집’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침이 기도로 들어가며 기침이 터졌다. 여자 후배 하나가 몹시 의아하다는 투로 물어 왔다.

“어……? 두 분이서…… 같이 사세요?”

“응? 말 안 했었나, 우리 같이 사는 거.”

고정원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다. 옆에서 나는 맥주를 넘기며 허둥대는 기색을 간신히 억눌렀다. 잡고 있는 손바닥에 땀이 축축이 배어났다. 변명하려고 입을 떼며 잡힌 손도 억지로 빼냈다.

“어, 그게…….”

이제 막 같이 살게 된 것처럼 변명을 급조하려는 찰나였다. 고정원이 말을 가로막았다.

“작년 말부터 같이 살았어. 그러고 보니 시간 참 빠르다.”

아.

입이 꾹 다물렸다. 식은땀이 다 흐를 듯했다. 이희운이 왜 따로 사는 것처럼 얘기했었냐고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만한 상황이었다. 우려하며 반대편을 보자, 이희운은 별 기색 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아, 이제 알겠네.”

후배들이 고개를 끄덕여가며 얘기했다.

“두 분이서 진짜 너어무 친해 보여 가지고. 같이 산다니까 확 이해가 돼요.”

“…….”

“같이 살면 서로 비밀 같은 것도 많이 알게 될 거 같은데. 아, 그래서 인휘 선배가 정원 선배한테 쩔쩔매시나?”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적으로 들으니 입 안이 말랐다.

“음…… 그런가.”

고정원은 여지를 주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그 덕에 애들은 더 흥미진진해했고, 나는 덤덤한 척하느라 애를 먹었다. 취기라도 없었으면 표정 관리가 조금도 안 될 뻔했다.

하…….

한숨 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이희운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일어난 걸로 모자라 아예 밖으로 나가기까지 했다. 일언반구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지켜보고 있던 애들이 하나둘씩 말을 꺼냈다.

“쟤 왜 저렇게 무게 잡고 있어? 적응 안 돼.”

“저 새끼 계속 저래. 차인 거 회복 안 되는 듯. 그냥 냅둬.”

희미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본인에게 직접 들어서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다. 집안일도 그렇고, 좋아하는 상대도 그렇고. 특히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얼마나 진지한지 알고 있는 만큼 걱정이 됐다.

나라도 가서 위로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스치듯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찜찜해져서, 보이는 대로 소주를 따라 들이켰다.

“잠깐 나갔다 올게.”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응?’ 하고 고개를 돌렸다. 고정원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고 있었다.

“연락할 데가 있어서.”

고정원은 내 등을 토닥이며 한 번 더 당부했다.

“적당히 마시고 있어.”

후배들이 빨리 다녀오세요, 인사를 했고 고정원이 미미하게 웃어 보이자 그것만으로 다들 얼굴을 붉히며 좋아했다.

두 사람이 나간 자리에는 얼마간 정적이 감돌았다. 혼자 안주를 반 이상 해치우던 우민규는 술을 추가로 주문했다. 술이 잇따라 나오게 되면서 우민규의 주도 하에 술자리가 진행되었다.

“어떻게, 우리 다섯이서 게임 고고 할까요?”

“하자 하자. 선배, 해요.”

부추김에 이끌려 소란한 술 게임에 동참하게 되었다. 흥겨움이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엔 이미 몇 번이나 들이켠 벌주 탓에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왜 이렇게 안 오지.

고정원도 그렇고 먼저 나간 이희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흔들거리는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 있나 주변을 둘러보며 골목까지 갔다. 어지러워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더듬더듬, 전화를 꺼내 통화를 시도하던 중 연결이 됐다. 누군가와 부딪혔는데 놀랍게도 그게 고정원이었다. 반갑게 껴안은 걸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어졌다.

* * *

두통을 동반한 숙취로 잠을 깼다. 일어나자마자 고정원이 챙겨 준 숙취 해소제부터 마셨다.

식사하는 동안에는 증발된 기억 때문에 낭패감을 느꼈다. 필름 끊기는 것만큼은 피하려고 했는데 기어코 끊어지고 말았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느낌만 남아 있었다. 기억나는 건 골목에서 우연히 고정원과 마주쳤던 장면까지였다.

“커피 내려 줄게, 기다려.”

고정원은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나는 불안해서 가슴을 졸였다. 내가 뭐 실수한 거 있냐고 쉽사리 물어 볼 만큼 대담하지도 못했다.

조심스럽게 옆에서 설거지를 했다. 고정원도 다가와 거들었기 때문에 5분도 안 돼 끝이 났다.

“…….”

오늘은 장난 안 치네, 생각했다. 둘이서 설거지할 때면 몇 개 안 되는 그릇을 가지고 한 시간이나 이어 갈 만큼 장난을 쳤었다. 보면 설거지가 목적이 아니라 나를 만지는 게 목적인 것처럼 귀찮게 굴었었다.

……그랬었는데.

“읏, 뜨거!”

멍하니 있다가 입에서 화들짝 컵을 떼어 냈다. 건네받은 커피를 생각 없이 들이켜면서 혀를 덴 까닭이었다. 닿았던 입술까지 얼얼했다. 잔을 내려놓고 입을 벌리고 있자 고정원이 상체를 숙여 왔다.

“어디 봐.”

고정원은 내 턱을 붙잡고는 안을 살폈다.

“괜찮아, 그 정돈 아냐.”

“혀 내밀어 봐.”

정말 유난 떨며 보여 줄 만한 게 못 됐다. 하지만 의사라도 된 것처럼 진지해진 고정원의 기세에 어쩔 수 없이 내밀었다. 고정원은 몇 센티가량 앞으로 내민 혀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입 안쪽까지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

내뺀 혀의 끝에서부터 침이 고였다. 나는 이제 됐냐고 묻기 위해 눈치를 살폈다.

“……괜찮은 것 같은데. 혹시 아프면 말해.”

손이 떨어져 나가고 거리가 생겼다. 미약한 현기증과 함께 가슴팍에 숨이 차올랐다. 어찔거리는 증상은 숙취 탓인 듯했다. 몸의 이상 증세를 들키면 또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게 할까 봐 나는 입을 다물고 커피를 들이켰다.

묵묵히 마시다 보니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나와 달리 고정원의 머그에는 커피가 아직 반이나 남아 있었다.

“들어가서 쉬고 있어. 마저 마시고 갈게.”

“……응.”

기분 탓인지 태도가 쌀쌀맞았다. 왠지 먼저 다가오지 못하게 벽을 치는 느낌이었다. 싱숭생숭해져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정신을 빼고 누워 있었다. 잠시 시간을 죽이다가, 어느 순간 불안함을 못 참고 벌떡 일어났다.

거실에 나와 있는 고정원이 보였다.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있었다. 바깥 경치를 내다보는 듯했다.

내가 다가서자 기척을 느낀 고정원이 돌아보았다. 아까처럼 쌀쌀맞게 나올까 봐 걱정했는데 아니었다. 말없이 컵을 내려놓더니, 나를 끌어당기며 아는 체했다. 자기 허벅지 위로 앉히기까지 했다. 피부가 맞닿자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속이 느슨해졌다.

“불면증은, 좀 괜찮은 거 같아?”

나는 고정원의 목뒤를 주무르며 물었다.

“아침이면 피곤해 보이던데. 자다가 깨는 거 아니야?”

후배들이 피곤해 보인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정말로 그랬다. 창백한 안색은 햇빛에 물들어 있어도 음기를 띠는 것처럼 보였다.

“잘 자고 있어. 인휘가 재워 주잖아.”

달콤한 말을 내뱉는 입술이 메말라 있었다. 충동적으로 입을 맞춘 나는 건조한 입술의 표면을 핥고, 적당한 힘으로 빨았다. 따뜻하게 머금었다 빼내자 그제야 눈앞의 입술이 촉촉해지며 혈색을 띠었다.

더운 숨을 뱉어 내며 고정원의 어깨에 기댔다. 허리를 감싼 손이 복부 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고정원의 손등에 난 생채기를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이런 게 어제도 있었나?

상처 부위에 손을 대자 고정원이 짧게 설명했다.

“실수로.”

괜히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 어제 나 뭐 실수한 거 있어?”

필름이 끊긴 것 때문에 되도록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려 했다. 그런데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은, 확신 아닌 확신이 들었다.

“아니.”

정말? 하고 물은 나는 재차 확인했다.

“어제 우리 무슨 일 없었어?”

“응. 없었다니까.”

고정원이 목울대를 울리며 웃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나. 웃으며 말해 주니 깜빡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큰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정원은 내 이마를 가린 앞머리를 들추었다. 눈 주위를 건드리는 까닭에 찡그렸더니 재밌어하는 것처럼 반복했다.

“…….”

귀가 뜨거워졌다. 뭘 한 것도 아닌데. 고정원의 성기는 이미 부풀어 올라 있었다. 붙어 있으면 반드시까지는 아니지만 대부분 반응하는 편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매번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부분이니까 그러려니 무시할 때도 많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일어선 나는 고정원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다리 사이, 한가운데에 얼굴을 파묻었다. 둔덕에 입술을 문지르자 긴장한 허벅지가 떨렸다. 핏줄 선 복부를 슬슬 문지르며 벗기는데, 그때였다.

손길에 이끌려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났다. 일어선 나는 허리춤을 잡아당기는 힘에 이끌려 폭 안겼다. 양손이 얼떨결에 너른 어깨 위로 자리했다.

고정원은 나를 보고 있었다. 등허리에서부터 쓸어올린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믿을진 모르겠는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짐작도 안 갔다.

“나는 너랑 눈만 맞추고 있어도 좋아.”

진지한 눈이 내게 박혀 있었다.

“……숨이 막혀.”

“…….”

“너무 좋아서.”

생각지도 못한 고백이었다.

“알아, 인휘야?”

“…….”

잡아당기는 힘과, 애절한 목소리가 혼을 쏙 빼놓는 듯했다. 눈만 맞춰도 좋으니 이러고 있자는 말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닿아 있는 부분이 뜨거웠다. 온갖 맥들이 달구어져 초조하게 날뛰는 기분이었다.

“음……!”

거의 덤비는 기세로 입술을 덮쳐 물었다. 목구멍에선 앓는 소리가 났다.

“으…….”

옷을 벗으며 신음이 섞여 나왔다. 하도 급하게 바지를 벗어서 넘어질 뻔하자, 고정원은 나를 그대로 바닥에 눕혔다.

“빨리, 빨리 벗고……!”

벗을 생각은 안 하고 입술만 찍어 대서 안달이 났다. 나는 고정원의 티셔츠를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제풀에 허리가 들뜨고, 무릎이 솟았다 꺼지길 반복했다. 발바닥은 초조하게 바닥에 깔린 러그를 문질러 댔다.

“아……!”

급하게 알몸이 된 고정원이 묵직하게 마찰을 시도했다.

“아으……!”

머리가 마비되는 감각이었다. 고정원도 나도 거의 동시에 숨을 터뜨렸다. 무겁고 탄탄한 근육 아래 서로의 흥분이 짓눌렸다. 뜨겁고, 펄떡펄떡 뛰었다. 고정원이 그 큰 육체를 짓이기듯 내리누를 때마다 머리가 하얗게 번졌다.

아래가 미끌거렸다. 고정원은 무게를 실어 문지르다 말고 대뜸 허리를 띄웠다. 턱, 턱, 강하게 살끼리 치대자 절로 흐느낌이 터졌다.

“흑……!”

우리는 러그 위에 뒤엉켜 서로의 몸을 탐했다. 살갗을 쓰다듬고 성기를 만지고 바닥을 기었다. 헉헉거리는 가파르고 건조한 신음을 쏟았다. 발정기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한 냄새가 거실에 가득했다. 더럽히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러그 위는 이미 체액으로 젖어 손 쓸 수도 없었다.

“으으음…….”

욕구를 쫓다 보니 어느새 입 안에 성기가 들어와 있었다. 고정원과 나는 서로의 중심을 빨아 주기 가장 좋은 자세를 취했다. 보통 내가 고정원의 위로 올라가는데, 오늘은 모로 누워서 몸을 맞붙였다.

“응, 응, 으읏……!”

고정원의 거친 신음 사이로 내 목소리가 튀었다. 성기를 빨릴 땐 참을 만한데, 엉덩이는 도저히 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흡입하듯 빨다 혀로 주름진 주변을 둥글리는 감촉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웁……!”

흥분한 고정원이 깊게 성기를 밀었다. 그 사이 손가락이 두 개쯤 겹쳐져 엉덩이로 파고들었다. 들쑤신 뒤 벌어진 구멍으로 혀를 쑤시고 코를 박았다. 허리가 멋대로 뒤흔들렸다. 둔부 사이에 파묻은 얼굴이 움직이는 느낌이 아찔했다.

내벽을 비집던 혀가 빠져나가기까지 시간이 더뎠다. 빠져나가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엉덩이를 고정시켜 놓고 고정원은 느긋하게 굴곡을 핥았다.

“엎드려 봐.”

귓구멍에 젖은 키스를 하며 고정원이 속삭였다. 겨우 끝난 모양이었다. 나는 저릿거리는 엉덩이를 이끌고 러그 위로 엎드렸다. 앞이 하나도 안 보였다. 훌쩍 코를 들이켜고, 울어서 엉망이 된 시야를 팔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곧장 삽입으로 이어질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고정원은 엎드린 내 뒤로 몸을 겹치고는 입을 맞췄다. 키스가 생각보다 길었다. 고정원은 완전히 몰두해 있었다. 나도 빠져들었지만, 뒤가 근질거렸다.

눈치챘는지 이내 엉덩이가 꽉 붙잡혔다. 갈라진 틈으로 손이 미끄러졌다. 고정원은 구멍으로 이어지는 깊은 골을 문지르며 사람을 미치게 했다. 성기에서 애닳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으응……!”

비명이 나오지 못하고 속에서 울렸다. 입을 맞춘 상태에서 삽입이 시작됐다. 배 안이 삽시에 그득해졌다. 나는 버거워서 발등으로 바닥을 때렸다. 뒤에서 끌어안은 고정원은 얼마간 그대로 짓눌렀다. 나도 숨을 들이킨 채로 붙들었다. 덜덜거리며 떨리는 배 속 경련만으로 자극이 충분해서 이대로 움직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았다.

“아, 흐으……!”

안에서 휘저어졌다. 같은 움직임이 지속되자 터질 것 같던 귀두가 액을 토해 냈다. 사정이었다. 한숨을 쉰 고정원이 성기를 빼내고, 밑에서 엉덩이를 양쪽으로 벌렸다. 커져서 벌름거리는 구멍을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너무 밝기도 하고, 보이기 민망해 움츠리는데 거기서 혀가 들어왔다.

그렇게 한참을 또 빨아 대고 다시 삽입이 시작됐다. 이번엔 얼굴을 마주 보고서였다. 나는 흐느적거리는 팔다리를 고정원에게 감았다. 짧은 드나듦이 유지되면서 배 속은 녹은 것처럼 끈끈하고 눅눅해져 있었다.

“으읏, 아, 아으, 읏…….”

흔들리는 리듬에 맞춰 신음이 샜다. 미간이 자꾸만 일그러졌다. 밝은 햇살이 얼굴 위로 쏟아져 눈도 뜨기 힘들었다. 차라리 서로 안 보게끔 안아 줬으면 싶은데, 고정원은 어느 정도 유지한 거리를 더는 좁히지 않았다. 이따금씩 내 유두를 빨고, 성기를 주무르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이렇게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싶어서이거나.

……숨 막혀.

숨결처럼 작게 뱉은 말에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숨 쉬기 힘들어?”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물어 왔다. 내 안색을 살피는 고정원의 젖은 속눈썹이 찬찬히 내려갔다 올라가는 걸 보며 나도 눈을 끔뻑거렸다. 그런 거 아닌데. 나는 조금 멋쩍게 입술을 벙긋거렸다.

“……너 좋아서. 숨 막힌다고.”

“…….”

입술이 빨아당겨졌다. 입술뿐 아니라 얼굴을 하도 핥아 대서 눈도 제대로 못 뜰 지경이었다. 턱이 깨물리면서 따끔했다. 잡혀 있는 팔뚝도 얼얼했다. 깨무는 행동도, 지나치게 과한 힘으로 붙들어 오는 것도 어딘가 통제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읏, 정원아……!”

더 커진 건 아니겠지만 벌어진 부분이 아팠다. 흥분한 몸짓 때문인 것 같았다.

“엇.”

허리가 들리며 무게감이 실렸다. 긴장하고 있자 빠져나갔던 성기가 퍽, 치고 들어왔다. 완전하게 껴안은 고정원은 마음껏 힘껏 찧어 내리기 시작했다. 처덕, 처덕, 퍽, 퍽, 귀가 아프도록 살 소리가 울렸다. 비어진 체액이 마찰로 인해 거품을 일으킨 것 같았다. 묵직한 고환이 샅에 철퍽거리며 부딪혔다.

“아흑, 흑, 으, 아, 앗, 아으……!”

놀이 기구를 탄 것처럼 매달려 버텼다. 아프면서도 흥분되고, 버거우면서도 기분 좋은 행위는 거의 숨이 넘어가기까지 이어졌다. 나중엔 풀어진 입가에서 침이 흘렀다.

“아…….”

만족스러운 날숨이 귓전에 쏟아졌다. 고정원이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인휘야…….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 신음처럼 절로 나온 듯했다.

귓등이 잘근거리며 씹혔다. 고정원은 끈덕진 애무로 얼굴 주변을 괴롭혔다. 갈수록 파고들듯이 빨고 씹어 대는 과격함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다급해져서 애원조로 울먹였다.

“사, 살살, 살살 해 줘…….”

“응, 살살 할게. 살살…….”

속삭이며 고정원은 나와 손깍지를 꼈다. 하지만 삽입이 다시 시작되자 흥분한 기색을 못 감췄다. 거칠지만 않을 뿐이었다. 부어오른 구멍에 성기를 뿌리까지 넣었다가 선단까지 빼는 관통을 계속했다. 덜 급하다 뿐이지 행위의 밀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흑!”

이상한 일이었다. 엎드린 시야로 보이는 소파 밑. 그늘지고 좁은 곳을 응시하고 있었더니 어젯밤의 기억이 났다.

어두운 골목, 오가던 대화들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남자끼리란 자각이 있으면 더 조심하는 게 맞지 않나요.’

‘한 사람만 감당하고 끝날 일 아니잖아요. 적당히 끝날 일도 아니고요.’

……이게 무슨 기억이지.

이희운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다만 왜 이런 말을 하게 된 건지 전후 사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엉덩이를 쳐들고 쾌감으로 저며지는 와중에도 착실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조각난 대화문이 머릿속에서 선명해져 갔다.

‘글쎄…….’

‘생각을 한번 바꿔 봐.’

‘너는 감당 못 할 그 일들이, 누구한텐 정말 아무것도 아닐 수 있거든.’

분명 고정원이 한 말들인데, 실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술에 취한 내가 잘못 들은 건지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실랑이가 오갔나? 이희운이 뭐라고 큰 소리를 쳤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고정원은 계속 나를 안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아……!”

박혀 드는 성기가 짜부라뜨릴 것처럼 난폭했다. 허리가 자꾸 무너지자, 고정원은 두팔로 감아 내 어깨와 복부를 옭아맸다.

“아, 아, 아으, 으으으……!”

살끼리 격렬하게 치대는 마찰음에 맞춰 몸이 흔들렸다.

‘주제넘지 마, 희운아.’

끊어질 것 같은 머릿속에서는 경고가 울렸다.

‘선 지켜.’

‘볼 수 있게 해 줄 때.’

익숙한 듯, 전혀 낯선 음성이었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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