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연애의 비밀 (1)
점심에 겨우 일어났다. 밤새 몰아붙인 과제 탓이었다. 그것도 하루 기한이 지난.
“아, 피곤해…….”
세수만 하고 나와서 고정원을 찾았다.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작은방에서 온라인 강의를 듣고 있었다. 바빠 보이길래 일어났다는 것만 알리고 주방으로 갔다.
어제 끓였던 국으로 아침 겸 점심을 차렸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고정원이 나와서 즉석에서 계란 프라이를 해 줬다. 간단하게 샐러드도 만들어 주곤 같이 못 먹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디저트로 커피와 과자까지 챙겨 먹고 나서야 식사를 끝냈다. 곧장 가서 양치를 하고 나오자 고정원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안 피곤해? 피곤하면 더 자지.”
건조한 손이 눈가를 문질렀다.
“아냐, 자기엔 뭔가 아까워.”
“그래, 그럼. 나 방에 있을게.”
뒤통수로 손바닥이 닿았다. 둥그런 모양을 따라 내려가던 손바닥은 목덜미를 감싸면서 떨어졌다.
“응…….”
끝나서 온 줄 알았다.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가 버리니까 왠지 모를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침대 헤드에 기대고, 습관적으로 태블릿 PC에 손을 댔다. 게임을 할까 하다가 스트리밍 앱을 열었다. 방학 때 고정원이랑 한창 재밌게 보던 미드가 생각나서였다.
“……저 사람 저번에.”
입을 연 순간 몰입이 확 깨졌다. 당연히 옆에 고정원이 있을 줄 알고 손을 뻗었는데 아무도 없어서였다. 옆자리에는 베개가 덜렁 놓여 있을 뿐이었다.
잠이 덜 깼나. 머쓱하게 목을 쓸었다.
다시 화면에 집중해 보려 했지만, 그 뒤로는 잘 안 됐다. 역시 둘이 보던 걸 혼자 보면 재미가 반감되는 거 같았다. 기다렸다 같이 볼까 싶었다. 나는 고정원에게 강의가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 보기 위해 휴대폰을 열었다.
‘얼마나 남았어?’
전송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망설여져서 그냥 껐다. 아무리 넓다 해도 한 집에서 문자는 좀 웃긴 거 같기도 하고, 내용도 너무 쓸데없는 것 같아서.
“흠…….”
개강하고부터 지금처럼 떨어져 있는 일이 늘었다. 바빠지고 둘이 일정이 달라지니까 그랬다. 이사한 집은 방이 여러 개라 더욱 분리되는 느낌이 있었다. 예전에 좁아터진 자취방에서는 각자 할 일을 해도 개인 플레이라는 느낌은 없었는데.
학교에서는 일부러 떨어져 있는다 해도, 집에서까지 떨어져 있는 건 확실히 허전하기는 했다. 방학 내내 찰싹 붙어 있었기 때문인지 더 어색하고 적응이 안 됐다.
쩝, 입을 다시고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음료수라도 가져올 생각이었다. 거실을 향하던 중에는 문득 걸음이 멈췄다. 고정원이 있는 방이 힐끗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목을 빼서 기웃거리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
방 안에는 햇빛이 훤히 들고 있었다. 영상이 재생되는 소리가 들렸고 필기를 하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건드리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장면이었다. 괜한 심술이기도 하지만 집중하는 모습이 얄미울 만한 이유도 있었다. 항상 내가 뭐 할 때면 방해해서 정신 사납게 만들었으니까.
사실 이번 과제도 방해받지만 않았어도 기간에 맞출 수 있었다. 그저께 고정원이 추근거린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부러 떨어지려고 부엌 식탁까지 피신했다가 엄한 곳을 더럽히기만 했다. 늦게 제출하면서는 교수님께 변명과 아양의 말을 지어내느라 고생이었고. 뭐, 고정원이 찾아 준 자료 덕에 수월하게 한 건 맞지만 도움보다 손해가 컸다.
“…….”
곧은 자세의 등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나는 가렵지도 않은 팔을 긁적거렸다. 발바닥을 바닥에 문지르며 미적거리다가 슬쩍 안으로 들어섰다.
“쉬어 가면서 해. 스트레칭도 하고.”
앉아 있는 고정원의 등에 체중을 실으며 말했다.
“응. 이것만 듣고.”
돌아본 고정원이 나를 보며 웃었다. 누굴 꼬실 생각도 아닐 텐데 쓸데없이 매력적인 표정이었다.
“……어깨가 좀 뭉쳐 보이는데?”
말하며 나는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가득 잡히는 근육을 주물거렸다. 안마라기보다는 깔짝거림에 가까운 손놀림이었다.
고정원은 어째선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난 괜찮아. 가서 쉬고 있어.”
허술하게 만져 대는 내 손을 미련 없이 걷어 냈다.
“머리에 잘 들어와?”
고정원은 한쪽 눈썹을 치켜드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는 태도가 밉상이었다. 흠잡을 수 없이 잘생긴 옆모습을 보고 있으려니까 괜히 욱하고 오기가 치솟았다.
“어, 이 수업. 나도 듣고 싶었는데.”
책상과 고정원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허벅지 위로 턱 앉아 버리자 고정원이 말했다.
“안 보여.”
“이게 안 보여? 안경 써야 되는 거 아냐, 너?”
능청스럽게 대꾸하자마자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재밌다는 생각이 들면서 강의 영상을 2배속으로 올렸다.
“인휘야, 나 정말 미루고 미뤄서 할 일 하는 건데…….”
평소와는 정반대인 상황이었다. 늘 방해받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방해하는 입장이 되자 저릿할 정도로 흥분감이 밀려들었다.
“응, 알아. 같이 강의 듣는 건데 왜.”
웃음기가 묻어나서 입술을 물었다. 재밌지도 않은 강의를 신나서 듣는데 뒤에서부터 물음이 날아들었다.
“너 이래도 돼?”
불현듯 뜨거움이 느껴져 아래를 쳐다봤다. 두꺼운 손이 허벅지 위로 올라와 있었다.
“…….”
나는 닿은 등을 몇 센티 떨어뜨렸다.
“그저께까지 세 번 다 채운 건 알지?”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개강 이후 우리 사이에서 생긴 규칙이었다. 끝까지 하는 건 주 3회로 제한되어 있었다. 3회가 넘어가면 가벼운 스킨십은 해도 그 이상은 절대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한 달이 넘도록 꽤 제대로 지켜지고 있었다.
“유혹당했을 때는 별개 아닌가.”
유혹이라니. 당황스러워 목이 멨지만 곧바로 항변했다.
“나는 너한테 그런 거 한 적 없는데.”
“아닌 척 주무르고. 엉덩이로 성기 주변 문지르는 게 유혹이 아니야?”
“무…….”
입을 벌리고 돌아보았다. 예고 없이 쏟아진 직설적 표현에 등줄기가 후끈했다.
고정원이 안쪽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불편할 만큼 커진 그곳이 느껴졌다. 당황해서 일어나려는데 붙잡히는 바람에 실패했다. 오히려 부딪히면서 마찰을 일으키고 말았다.
“약속 깨기 싫어서…….”
손이 잇따라 옷 속을 침범했다. 갑자기 들어온 손바닥에 유두가 짓이겨졌다. 나는 하지 말라고 붙들어 말렸다.
“참고 있었는데.”
쪽, 쪽. 연달아 귓가에 입을 맞추며 고정원이 속삭였다.
체온이 오르는 걸 느끼며 벗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계속 들썩거리기만 했다. 결과적으로는 정말 일부러 자극시킨 꼴이었다.
“일부러 이래?”
고정원이 목을 울리며 웃었다. 나는 부르르 떨릴 것 같은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귓가에서 속살거리니까 소름이 멈추질 않았다.
“……귀에서 말하지 마. 야한 목소리도 내지 말고.”
경고하자 고정원이 후, 코웃음 쳤다.
“야한 목소리가 어떤 목소린데.”
녹일 것처럼 구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 척추가 떨렸다. 희한하게 허리가 무지근해지면서 힘이 빠져 버렸다.
“……몰라. 그냥, 다리 힘 빠지는 목소리.”
정확히는 허리였지만 대충 뭉뚱그려 말했다. 대답을 듣고 말이 없던 고정원은 얼굴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알고 하는 소리야, 그거?”
“무, 뭐가.”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고정원의 눈길을 피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이러다 나까지 설 것 같아서 그만 놔줬음 싶었다. 얌전히 듣게 내버려 둘 걸 그랬다고 후회가 되는 시점이었다.
“엉덩이 적셔 줄까.”
고정원이 몇 배로 음흉해진 음성으로 지껄였다.
미치겠네.
위험을 느낀 나는 순간적인 힘을 발휘해 뿌리치고 일어났다.
“야……!”
하지만 두 발짝 만에 붙들렸다. 팔을 붙잡혀 균형을 잃은 몸뚱이가 휘청 끌려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고정원은 한창 강의가 재생 중인 노트북을 닫아 버렸다. 사과 모양의 로고를 드러낸 기기는 귀퉁이로 밀려났다.
“너 지금 뭐 해!”
목제 테이블에 가슴팍이 닿자 차가움이 번졌다. 당황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도망치다 잡힌 범죄자처럼 한쪽 팔을 뒤로 꺾인 채 제압당하고 있었다.
최대치의 힘으로 버둥거렸다. 다른 한 손은 자유로운데도 불구하고 쓸 만한 힘이 나오질 않았다. 무식한 근육 덩어리에 짓눌린 상태에서 훌러덩 하의가 내려갔다. 속옷도 한꺼번에 벗겨지고 없었다. 서늘하게 달라붙는 공기를 느끼며 나는 근력 운동의 필요성을 사무치게 느꼈다.
“방해한 벌 받고 가.”
고정원은 무시무시한 말을 했다.
“야, 정원아……. 난 그냥 너랑 같이 들어 준 거였는데? 방해라고 느꼈으면 미안. 정말로 미안해. 이젠 진짜 안 할게.”
“…….”
“커피 완전 맛있게 타다 줄 수 있는데. 너 저거 빨리 들어야 되잖아.”
비굴해졌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싫어?”
솔직하게는 하기 싫은 게 아니라 엄두가 안 난다는 게 맞았다.
“나 가서 하던 거나 마저 할게. 너 방해 안 하…… 읏……!”
두툼한 엄지가 엉덩이를 벌렸다. 구멍 주변을 지그시 누르자 배에 흡 힘이 들어갔다.
“근데 왜 이렇게 기대를 해, 여긴.”
말하며 고정원은 구멍 주위를 덧그렸다.
긴장을 흡수한 그곳이 왕성하게 수축 이완하는 게 느껴졌다. 의지와 조금도 상관없었다.
“기대하는 게 아니라……!”
티셔츠가 올라갔다. 얼굴을 지나 벗겨진 티셔츠는 팔에 걸쳐지는가 싶더니 곧 손목을 결박시켰다. 이런 용도로 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눈치채고 반항하기도 전에 이미 견고한 매듭이 되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끼익, 의자를 끌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의자에 앉은 고정원이 얼굴을 가까이 대는 게 느껴졌다.
“아, 싫, 진짜, 지금은 싫어……!”
꼬리뼈에 입김이 스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날뛰었다. 양손이 묶였어도 발로 밀어내면서 못하게 하려고 애썼다. 거의 절차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빈번하게 받는 애무이긴 해도 부위가 그렇다 보니 매번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아!”
엉덩이가 양쪽으로 벌어지고 더운 입술이 닿았다.
그리고 그때부턴 정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 응! 으응!”
벌름거리는 구멍이 혀를 조이는 게 느껴졌다. 원인 모를 눈물이 급격하게 고였다.
문지르고 빨고 깊숙하게 쑤시고. 안쪽을 흠뻑 적셔 놓은 고정원은 볼기와 허벅지에도 입술을 찍었다.
“아흣, 흣…… 으읏……!”
나는 축축한 애무에 격하게 반응했다. 일일이 흐느낌이 샜다. 창문이 살짝 열려 있어 최대한 참는데도 그랬다. 대체 이렇게 화창한 대낮에 뭘 하는 건지 몰랐다. 고정원은 내 엉덩이에 얼굴을 파묻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좋아하면 어떡해. 벌받는 건데, 인휘야.”
좋아하지 않았다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따져 봤자 어떻게 될지 알아서 입술만 꾹 물었다.
“으…….”
결박된 자세가 불편했다. 부자유하고 조마조마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한편으로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갑갑함이 어째선지 성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묶이는 게 좋아?”
“안, 흐……!”
어느새 성기를 꺼낸 고정원이 뜨거운 살덩이를 문대기 시작했다. 묵직한 기둥이 엉덩이를 때렸다.
“응?”
탁, 탁, 정말로 몽둥이로 때리듯 하고 있었다.
“아……!”
벌어진 둔부 사이로 타격이 이어졌다. 뜨거워져 있는 입구를 성기로 힘껏 내리칠 때마다 허리가 불쑥불쑥 튀었다. 침으로 적셔진 부위가 모두 민감한 상태였다. 발끝으로 연신 힘이 쏠리면서 뒤꿈치까지 얼얼했다.
움푹움푹, 삽입이 됐다. 삽입 이후엔 눈물이 마구 쏟아질 만큼 과격한 허리 짓이 몰아쳤다. 나는 비싼 노트북이 떨어질까 봐 와중에 손을 뻗어서 그걸 붙잡고 있었다.
눈물이 떨어지며 테이블 위로 방울졌다. 아프기보다는 몸속에서 불이 날 거 같은 감각이 참기 힘들었다.
“정원, 아, 그, 만……. 힘드, 어…….”
간신히 멈추었을 때 숨을 몰아쉬며 부탁했다.
“너, 빠, 흐, 빨리, 들어야 하잖아……. 우리 그만 하고, 강의 듣자. 어?”
어느 순간 턱이 붙들렸다. 결박당한 채 키스가 이어졌다. 긴 호흡에 숨이 막혀 가슴팍이 한껏 튀어나왔다. 침이 입가로 새고, 신음이 목구멍에서 울렸다.
“하…….”
입술이 떨어지자 숨이 부족했던 머리가 몽롱해졌다.
“나 다시 강의 들어?”
내가 했던 부탁을 고정원이 들먹였다. 나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 끄덕였다. 정말 그만할 건지 반신반의하면서도 끄덕이는 게 최선이었다.
고정원은 삽입한 자세에서 팔을 뻗기만 했다. 닫혀 있던 노트북을 다시 열고, 강의 영상을 재생시키는 게 다였다.
“음량 더 키울까?”
“아…….”
억울해하고 있는데 고정원이 나를 끌어안았다. 의자에 함께 겹쳐 앉으면서 삽입이 깊어진 순간 ‘흐앗!’ 하는 우스운 탄성이 터졌다.
“흐…… 너무 깊…….”
말을 끝맺을 수도 없었다. 이런 체위는 깊이감 때문에 힘겨웠다. 일직선으로 꽂힌 무시무시한 크기와 부피가 느껴졌다.
“움직여 볼래?”
어중간하게 부푼 성기를 고정원이 감쌌다. 마른 손바닥에 축축한 기둥이 문질러지자 절로 고개가 젖혀졌다.
“앞뒤로만. 응, 그렇게……. 천천히 해도 돼.”
익숙함이 무섭기는 했다. 그렇게 버거웠는데 얕은 움직임을 반복하는 것만으로 쉽게 쾌감이 찾아왔다. 덩어리진 체액들이 투둑, 투둑, 소리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궤도에 오르자 흥분은 무섭도록 빠르게 고조돼 갔다.
“흐, 응! 앗! 아, 으……!”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뵈는 게 없었다. 그때부터 성기에서 물이 튀고 수치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손이 묶이지 않고 자유로웠으면 입이라도 틀어막았을 텐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
흥분에 젖어서 할 수 있는 한 힘껏 엉덩이를 찧었다. 그때마다 우리 둘 다 동시에 만족스러운 외마디를 터뜨렸다.
돌아보자 고정원은 의자 등받이에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상의를 벗었는지 맨몸이었다. 어깨, 가슴, 복부. 어딜 봐도 위압적인 근육이 보였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홀릴 수밖에 없는 남성성의 극치였다. 땀으로 젖은 완벽한 균형의 상반신에 잠시 눈이 팔렸다.
그러다 고개를 든 고정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나는 어찌 할 새도 없이 혼자 사정하고 말았다.
“……아…….”
튀어 오른 정액이 책상과 바닥에 묻었다. 나는 허리 짓을 멈추고는 덜덜 떨면서 들어 올렸다. 앞으로 몸이 쏠리자 뒤에서 거대한 살덩이가 쑥 빠졌다.
어쩔 줄 모르고 눈만 깜빡거렸다. 돌아본 뒤편에서 고정원은 번들거리는 중심을 매만지며 일어나고 있었다.
“……정말 혼나야겠네.”
낮은 한마디에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섹스는 침대에서 계속됐다. 여전히 팔이 뒤로 묶인 채로 위에 올라타야 했다. 고정원은 한손으로 내 허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은 앞뒤로 움직이느라 힘이 쏠린 허벅지에 올렸다.
가슴을 빨면서 고정원이 요구했다.
“가슴 더 내밀어.”
굳이 내밀라고 시킬 것도 없었다. 팔이 뒤로 꺾인 탓에 이미 가슴이 돌출된 자세였다. 하지만 순순히 더 내밀었다.
“응!”
끈질긴 입술이 가슴을 애무했다. 빨고, 혀로 뭉개고, 잇새로 짓씹었다. 솔직히 그건 지나치게 좋았다. 성기가 젖는 느낌이 났다. 언제부터 이렇게 가슴을 애무 받는 걸 좋아하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러고 싶어서 방해했지.”
갑자기 철썩, 엉덩이를 맞았다. 놀란 반동으로 뒤가 조여들었다.
“아니야?”
한 번 더 큰 소리를 내며 차진 마찰이 일었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아, 파……!”
“뭐가 아파, 인휘야. 그렇게 큰 자지 물고.”
가끔씩 고정원은 이렇게 하는 내내 저급한 단어만 사용했다.
“응? 네가 지금 이렇게 큰 걸 물었잖아.”
말하며 이어진 곳을 문질렀다. 나는 흐으, 흐느끼듯이 신음하며 고정원에게 기댔다. 벌어진 점막에 손이 닿는 것만으로 진저리가 났다.
철썩!
“아!”
철썩!
“흣……!”
살 오른 둔부에 손바닥을 통한 연타가 이어졌다.
“맞을 때마다 질질 흘리고 있는 거 알아?”
수긍하지 않으면 괴롭힐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어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고정원은 눈을 뜨고 보게 했다. 그냥 하는 소린 줄 알았는데, 정말로 맞을 때마다 흔들거리는 성기에서 탁한 액이 흐르고 있었다.
“흣!”
고정원은 때려 놓고 얼얼해진 부위를 움켜쥐거나 살살 문지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피부 위로는 야릇한 열감이 고조됐다. 때렸다가 움켜쥐었다가. 때렸다가 살살 문질렀다가. 도무지 때리고 싶은 건지 쓰다듬어 주고 싶은 건지 헷갈렸다.
나도 헷갈렸다. 맞는 게 싫은 건지 아니면 반대인 건지. 횟수가 거듭되면서 아프다기보다 다른 의미로 달아오르고 있단 걸 깨달았다.
“흐, 정원아. 나 팔 좀, 풀어 줘, 저려…….”
묶인 시간이 지속되면서 어깨와 팔이 저렸다. 불편한 와중에 온갖 자극을 받아 내느라 체력은 빠르게 고갈되고 있었다. 화끈거리는 엉덩이와 깊은 곳을 찔러 오는 둔통을 견디며 나는 고정원에게 풀어 주길 애원했다.
부탁이 통했는지 껴안은 자세로 손목이 풀렸다. 무시할 줄 알았는데 다행이었다. 아릿한 팔을 주물러 주던 고정원은, 그러나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 다시 내 손목을 묶어 놓았다.
이번엔 정면으로 묶는 결박이었다.
“…….”
기가 막혀 쳐다보자 바라지도 않은 입맞춤만 받았다. 처음부터 풀어 준다는 선택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리를 벌리는 손길을 따라 무릎을 천장을 향해 세웠다. 커다란 손이 묶인 내 손을 한꺼번에 감싸 쥐었다. 고정원은 천천히 침대 헤드 쪽으로 몸을 뉘였다. 지긋하게 주시하는 시선이 얼굴로 따라붙었다.
“보이게 벌려 볼래.”
시키는 대로 벌리자 접합된 부분이 잘 보였다. 직선적인 시선은 내 얼굴을 지나쳐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고정원도 흥분되는지, 빠듯한 둘레의 성기가 맥박 치는 게 또렷이 느껴졌다.
부끄러우면 부끄러울수록 민감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지금도 그랬다. 손이 묶인 채 이어진 부분을 죄다 드러내며 더욱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응……!”
엉덩이를 써서 성기를 삼켰다 뱉었다. 부끄러운 모습들을 낱낱이 드러내면서 조르듯 앞뒤로 문지르기도 했다.
사정감이 몹시 일찍 찾아왔다.
“흐아! 으! 아아!”
울부짖는 듯한 울음이 멋대로 터졌다. 쫓기듯 허리를 찧으며 나는 극렬한 감각에서 해방되기만을 바랐다.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느낀 그때. 고정원은 급작스레 몸을 일으켜 내게 입을 맞춰 왔다. 숨 막히게 거친 키스였다.
“하읍! 으, 음!”
뒤로 넘어가도록 나를 덮친 고정원은 세차게 들이받기까지 했다. 다 젖어서 처덕, 처덕, 추저분한 소리가 났다. 어찌나 온 힘으로 들이받는지 둔부는 물론이고 허벅지 전체가 묵직한 마찰을 못 이겨 경련하고 있었다.
“하으! 아으! 으……!”
절정에 달했다는 증거로 정액이 얼굴로 튀는데도 고정원은 들이받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만, 제발, 그만! 뒤흔들리며 속으로 외쳤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찔러지는 곳마다 신경이 튀어 오르며 사정감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길게 지속됐다.
그러고도 얼마간을 더 헤집어 놓은 성기가 겨우 빠져나갔다.
난폭했던 사정이 끝나고, 입맞춤은 후희처럼 길었다. 사이에 있는 게 거슬렸는지 고정원은 묶여 있는 내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놓고 입술을 빨았다.
그렇게 끝날 줄 알았는데…….
휴식 시간을 가지고 그 뒤로 이어졌다. 다행인 게 있다면 이번에는 묶였던 손을 풀어 줬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느꼈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사정할 무렵 고정원이 내 성기를 결박시키는 바람에 훨씬 더한 구속감을 느꼈다.
“아, 나올 것 같……! 손 좀, 아으, 놔 줘……!”
뚜껑같이 큰 손이 음경을 쥐고 귀두를 틀어막았다. 초조함이 솟구쳤다. 고정원의 신체 부위 중에서도 특히나 손을 좋아하지만 이번만큼은 꼬집고 할퀴고 싶었다. 당장 치워줬으면 싶고 머리 꼭대기까지 꽉 조였다.
“같이 쌀 때까지 참아 봐.”
그 말에 확 열이 올라 고정원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사정할 때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다 아는데.
“지금 화내는 거야?”
묻는 말에 나는 손을 놓았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일수록 부탁을 해야지. 예쁜 말로.”
“치, 치워 줘…… 응? 나 터, 터질 거 같아, 정원아…… 미안, ……아으, 흐, 미안해. 제발…….”
괴로워서 들썩이자 안쪽이 자극당해서 또 앞이 괴로워지고, 억울해서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고정원은 내 눈물을 입술로 머금으며 웃었다.
“야한 말로.”
울컥했다. 사람이 이렇게 부탁하는데 아주 나긋한 태도로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나는 조급해지려는 걸 참고 고정원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혀끝을 내밀어 귀를 핥고, 가능한 한 야하게 빨았다. 머릿속으로는 내가 했을 때 가장 반응이 열렬하게 돌아왔던 말을 찾고 있었다.
“……사랑해.”
움찔, 등 근육이 움직였다.
“사랑해, 정원아……. 응?”
정답이었는지 만족스러운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계속해.”
“사랑해. 너 사랑해, 정원아. 아, 미칠 거 같아…….”
“…….”
“좀 어떻게, 나 좀 어떻게, 해 줘. 정원아…… 자지로, 해 줘……. 어?”
부끄러운 얘기들을 두서없이 지껄여 댔다. 고정원의 뺨에 내 뺨을 비벼 가면서. 목을 쓰다듬고, 남은 손으로 뒤통수의 머리카락을 헤집어 가면서. 반쯤 이성이 날아간 행동을 했다.
여기서 더 하라 그러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귀두를 막고 있던 손을 풀어 준 고정원은 짧고 격렬하게 박아 댔다. 나는 오래 참았던 만큼 눈앞이 아득해지는 사출을 하며 허리를 젖혔다. 통증과 쾌감이 뒤범벅돼서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고정원도 내 안에서 사정하고 있었다. 흥분으로 뒤흔들리는 신음이 귓속을 파고들어 사정감을 극대화했다.
“하…… 하아…….”
완전히 탈진해서 널브러졌다. 몸속의 기운이란 기운은 쏙 빨린 느낌이었다. 기절하지 않은 게 용했다.
“한숨 자고 같이 씻을까?”
고정원이 축 늘어진 내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물었다.
“……먼저, 먼저 씻고 와. 나 좀만 쉬다 씻을게.”
힘겹게 대꾸했다. 보통은 씻김을 받지만 그러다가 또 다른 길로 새는 일이 많아서 내키지 않았다. 가능성도 차단해야 할 거 같아서 거절했다.
고정원은 티슈로 내 밑을 닦아 주고 나서도 도통 침대를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몇 번이나 요란하게 뽀뽀를 했다. 눈, 코, 입 번갈아 가며 한 곳당 적어도 다섯 번은 찍어 놓고 나서야 일어났다.
겨우 욕실로 들어가나 했더니. 몇 발자국 가지 않아 고정원은 ‘아’ 하는 외마디로 돌아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도 쳐다보았다.
“엉덩이, 괜찮아?”
“어……?”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했다. 하지만 이내 혼나야겠다며 힘껏 후려치던 손길이 떠올라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의식하지 않았던 엉덩이도 갑자기 화끈화끈해졌다.
“어어어.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가서 씻어.”
이런 건 그냥 좀 넘어가지. 딴청 부리며 시선을 모호하게 배회시키고 있는데 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웃긴가 싶어 고개를 들자 뺨에 쪽 입술이 닿았다.
“인휘야.”
“응?”
“오늘 진짜 좋았어.”
불붙는 것처럼 얼굴이 타올랐다. 끝나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건 또 처음인 거 같아서 당황하고 말았다.
“……그, 래? 다행…….”
떠듬떠듬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어 왔다.
“인휘는?”
허허, 하고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갔다.
“나도 뭐, 좋았지.”
뭉개진 발음으로 답하자 고정원이 야릇하게 웃었다.
“뭐가 좋았어. 엉덩이 때린 게? 아니면, 사정 지연시킨 게?”
“……어, 뭐.”
쩔쩔매고 있는 도중 입술이 닿았다. 상체를 한껏 숙인 불편한 자세로 몇 번이나 빨아 댄 고정원은 입술을 뗐다. 마지막으로 귓가에 나도 사랑한단 말을 속삭이기까지 했다. 눈이 마주치자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이 보였다.
고정원은 유유히 돌아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숨을 몰아쉬고 뜨끈한 귀를 문질렀다.
나도 사랑한단 말. 아까 사정 직전 해 댔던 고백 아닌 고백들에 이제야 대답한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그렇게 좋았던 건가. 사랑한다면서 해 달라고 졸랐던 게 생각나 식도까지 홧홧해졌다.
“으으.”
이상한 신음을 내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아까 내가 한 짓들이 자꾸 떠올라서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몇 번을 해도 민망한 건 민망한 거였다. 섹스할 때의 나는 원래 알고 있던 내가 아니었다. 너무…… 뭐라고 해야 되나. 아무튼 죽어도 고정원한테밖에는 못 보여 주는 모습이라는 건 확실했다.
지잉―.
끼어든 진동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보기만 할 뿐,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기운이 없어서 휴대폰까지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지고 있었다.
귀찮아서 꾸물거리다 다리 두 짝을 포갰다. 그러자 그거 하나 움직였다고 사이로 무언가가 꿀럭 비어져 나오는 느낌이 났다. 티슈로 뒤를 닦아 내 보니 하얀 크림 같은 체액이 듬뿍 묻어 나왔다.
“…….”
한증막에 들어온 것처럼 더워졌다. 혼자 있어도 낯뜨거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머리를 헝클었다. 방금 했던 섹스의 장면과 내용들이 자꾸 떠올라서였다. 열기가 쉽사리 가시지 않는 걸 느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왕 더럽힌 시트에서 한참을 빈둥거린 후에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확인해 보니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이희운이었다. 우리 과 새내기.
[어디 계세요?]
[형 보고 싶어요 ㅎㅎ]
[같이 밥 먹으면 안 되나요]
거기까지 읽은 나는 바로 답장을 입력해 보냈다.
[아 ㅠ]
[미안]
[형 오늘 공강이야]
[담에 같이 먹자 ㅎ]
이희운은 이번 후배들 중에서 특히나 나를 잘 따랐다. 왠지 보자마자 나를 편하게 생각하는 눈치라 나도 금방 친근해졌다. 애가 덩치는 고정원만큼이나 큰데 하는 짓은 강아지 같아서 챙겨 주는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잘 웃고 애교가 있어서 대하기 편했다.
밀린 단톡방의 메시지들을 쭉 확인했다. 고등학교 동창 방에도 뭔가 쌓여 있어서 확인하는 도중이었다. 목덜미에 차가운 물방울이 튀었다.
돌아보자 등 뒤로 뜨거운 체온이 감겨들었다.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씻고 나온 고정원은 드로즈 차림으로 내 맨몸을 껴안았다.
“나 지금 더러워.”
체액이 묻을까 봐 밀어 내도 고정원은 보란 듯이 가슴팍을 비벼 댔다.
“인기 많네.”
“많긴. 다 단톡인데 뭘. 나도 이제 씻어야겠다.”
메신저 창을 종료시키고 원래 있던 곳에 내려놓았다. 감긴 팔을 풀려고 하는데 그때였다. 휴대폰 진동이 재차 울렸다.
열어서 확인해 보자 이희운이었다. 쓰러져 우는 이모티콘이 종류별로 몇 개나 떠 있었다. 과장된 그림들을 보며 픽 웃음이 터졌다. 딱히 답장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여 그냥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나 씻고 올게.”
돌아서서 발꿈치를 들어 올려 고정원의 턱에 뽀뽀를 했다.
“응.”
고개를 숙인 고정원은 내 얼굴을 붙들었다.
“왜?”
이제 막 씻고 나와 살짝 젖어 있는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살짝 넋이 나가 있었는지 입술끼리 닿았을 때 깜짝 놀랐다.
이러면 계속 늦어지는데. 벗어나려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결국 얼마간 더 자질구레한 스킨십을 하며 노닥거렸다.
“씻는 거 도와줄까?”
“뭔 소리야. 이제 막 씻고 나온 사람이.”
“봉사할게.”
“아니…… 괜찮대도? 정원이 너 얼른 가서 다시 강의 들어.”
“이따 들으면 돼.”
“……못 살겠네 진짜.”
뭘 어떻게 해도 못 이길 것 같아서 웃으며 눈을 감았다. 나를 안아 든 고정원은 성큼성큼 욕실로 향했다.
* * *
수업이 거의 한 시간이나 일찍 끝났다. 애매한 시간이라 고민하다가, 나는 일단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정원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과제나 하면서 기다리면 될 것 같았다.
새 학기부터는 일부러 서로 얼마간 떨어져 있는 시간이 생기도록 시간표를 조정했다. 사실, 신청할 때만 해도 거의 동일하게 맞추긴 했다. 그런데 정정기간이 되어서 내 쪽에서 변경 가능한 수업을 모조리 바꿔버린 사정이었다.
싸우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렇게 결정한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거리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방학 끝 무렵, 고등학교 동창 한 명에게 연락을 받았다.
[조인휘]
[어제 광화문 갔었지]
[너 봤어 ㅋㅋ]
시작은 가볍게 나를 목격했다는 말이었다.
[옆에는 누구였어]
[????]
[엄청 튀던데]
[모델 일 하는 애야 혹시?]
[아 근데]
[나 진짜 존나 놀랐음]
[남자끼리 너무 끈적하게 붙어 있길래]
[진심 너 게이 된 줄]
[아니지? ㅎ]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숨길 생각도 없이 드러내는 궁금증 앞에서 나는 적잖은 충격과 타격을 받았다.
그날은 카페에서 고정원이 전에 사귀었던 사람과도 우연히 마주쳤던 날이었다. 세상은 좁고 아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다가 뒤늦게 당혹스러웠다.
‘남자끼리 너무 끈적하게 붙어 있길래’
대화 창에 뜬 말풍선의 내용이 낙인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조심한다고 조심했지만 그것조차 남들 눈엔 충분히 끈적하게 보일 수 있는 거였다. 새삼스러운 자각이 밀려들었다.
하긴 그날은 내가 먼저 고정원의 손을 붙잡고 밤거리를 걷기도 했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순 없으니 앞으로 더욱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문자로 인해 흐릿해지던 경각심을 높였다. 그러나 높인 경각심과 별개로 이후 우리의 태도에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머리로는 주의해야지, 생각했지만 막상 외출하면 그게 안 됐다. 나도 모르게 고정원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근한 스킨십을 하고 있었다.
변명하자면 습관이 된 것 같았다. 집에서 한 몸처럼 붙어 있다 보니 경계가 무너졌다. 나름대로 자제해서 행동한다고 하지만, 그게 타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객관화가 되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개강 첫 주, 기어이 학교에서 키스를 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수업을 들으면서 이따금씩 눈이 마주쳤을 뿐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고정원은 나를 인적이 끊긴 곳으로 이끌었다. 밀어 낼 틈도 없이 갑자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놀라서 거부했지만 진득하고 빠듯한 입맞춤을 받고 있자니 흥분이 되는 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한참이나 위험한 수위까지 농탕질을 치고 나왔던 그날. 만족스러운 기운을 풍기는 고정원이 얄궂은 배려처럼 뽑아 준 음료수 캔으로 뺨을 식히면서 나는 처음으로 우리의 자제력에 대한 심각성을 깨달았다.
한 명이라도 똑바로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하는데 둘 다 이 모양이었다. 이러다 학교에서 더한 일을 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아무리 상식적이고 이성적이어도 접촉이나 눈빛, 말 따위 앞에서 원칙적인 것들은 소용이 없었다. 수업 중에 눈만 마주쳐도 손끝이 찌릿해지는 주제에 뭘 중심을 잡는단 건지.
심각하게 경종이 울렸다. 이대로는 큰일 날 것 같아 잠도 못 자고 고민했다. 고민 끝에, 정정 기간에 시간표를 바꾼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는 강제적인 분리밖에는 해결책이 없었다.
고정원을 설득하고 변경을 진행하는 동안 불같은 화를 감당해야 했다. 처음엔 화를 내는지도 몰랐다. 겉으로는 납득한 것처럼 동의해 놓고, 밤이 되면 가차 없이 돌변해서 그제야 화났다는 걸 알았다.
얼마간 얼굴이며 아래며 퉁퉁 부어서 학교를 나가야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물리적 거리를 만든 건 적절한 처방이었다.
집 밖에선 과한 스킨십 금지.
섹스는 한 주에 세 번까지만.
바쁜 일정 속 조항들이 차례로 생겨났다. 지난번처럼 가끔 틀어지긴 해도 자리를 잡으면서 제대로 된 학교생활이 이어질 수 있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아쉽긴 하지만 견딜 만했다. 시시콜콜하게 주고받는 문자도 즐겁고 떨어져 있다가 만났을 때의 기쁨도 컸다.
“…….”
도서관 한구석에서 노트북을 열고 앉았다. 나는 생각난 김에 휴대폰을 꺼내, 고정원과 주고받았던 대화 창을 열었다. 쭉 화면을 올리며 훑어보다 어떤 호칭에 시선이 머물렀다.
[자기야]
요즘 고정원은 닭살스러운 호칭을 쓰는 데에 맛 들렸다. 자기야. 문자상으로도 똑바로 보기가 힘든데 실제로 듣기라도 하면 기절할 것처럼 창피했다. 게다가 자기가 쓰는 것만으로 만족 못 하고 나한테 시키기까지 했다. 물론 나도 몇 번 쓰니까 좀 적응되기는 했는데…….
“형.”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사람이 거의 없는 구석 자리였다. 후다닥 휴대폰을 잠그고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웃고 있었다.
내게로 바짝 상체를 기울인 이희운이 속삭였다.
“같이 밥 먹으러 가요.”
아까 어디냐고 묻기에 답을 보내긴 했었다. 설마 찾아올 줄은 몰랐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시계를 확인하자 고정원의 수업이 끝나기까지 대략 30분 정도가 더 남아 있었다.
“어, 그…… 기다려. 20분 뒤에 나가자.”
계속 밥 사 달라는 후배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같이 가서 고정원이랑 셋이서 먹으면 될 것 같았다.
“네?”
제대로 듣지 못한 이희운이 내게 얼굴을 붙이며 되물었다.
“이, 십, 분, 뒤, 에.”
나는 음절을 끊어서 한 번 더 속삭였다.
“……50분 뒤요?”
고개를 살짝 비튼 이희운이 그렇게 물었다. 나는 그만 헛웃음이 났다. 어떻게 귀에다 대고 말해 줘도 못 알아듣냐.
‘20분’
노트북의 메모장을 띄워서 글자로 보여 주었다. 그제야 ‘……네’ 하고 대답한 이희운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
그러고 보니 광대 부근이 살짝 붉어 보였다.
‘뛰어왔어?’
메모장에 입력한 질문을 본 이희운이 히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를 가져와 앉더니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금요일부터 형 보고 싶었다니까요.”
지난주 금요일 이희운이 내게 연락했었다. 같이 밥을 먹자는 연락이었다. 같이 못 먹게 되자 우는 이모티콘을 줄줄이 띄웠었던 게 생각나 비식 웃음이 샜다.
‘비싼 거 못 사 준다.’
타이핑해 보여 주자 이희운이 어깨를 주무르고 떨어졌다.
“저 형 안 벗겨 먹어요.”
주변이 워낙 조용해서 목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여기서 수다는 그만 떨어야겠다 싶어서 나는 리포트에 신경을 돌렸다.
한창 쓸 만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이었다. 어렴풋이 뒷머리를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살랑살랑, 간지러운 느낌에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어 돌아봤다. 왜, 하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놀란 것처럼 눈을 깜빡이던 이희운은 어정쩡하게 손을 뗐다.
“그냥, 좋아서요.”
목소리가 지나치게 또렷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것처럼.
“……아. 머릿결이요.”
머릿결이 좋다고?
전에 밝은 갈색으로 물들인 적이 있었다. 금방 다시 검정으로 염색해서 지금은 평범한 검정 머리였다. 그냥 머리털이라 칭찬받을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모발이 가는 편이라서 그런가. 진지하게 궁금해지려는데 이희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슬슬 나갈까요. 20분 된 거 같은데.”
중얼중얼하는 목소리는 쓸데없이 붕 떠 있었다.
“야, 인마. 너 소리 좀 줄여.”
나는 짐을 챙겨 일어나면서 팔꿈치로 쿡 찔렀다.
나가면서는 고정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후배 이희운을 만나서 같이 먹어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확인한 고정원에게서 곧장 답신이 왔다. 지금 가겠다는 간결한 대답이 자주 쓰는 토끼 이모티콘과 함께 떠 있었다.
“정원이 지금 온다니까 같이 먹자.”
“아…… 네.”
급속도로 어두워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
“네? 아뇨, 그냥. 형이랑 둘만 먹고 싶었는데 서운해서?”
“뭐야. 진짜로?”
“우리 둘이서는 조만간 술을 먹는 걸로 해요, 그럼.”
손을 잡아끈 이희운이 강제로 손도장을 찍었다. 헛웃음이 났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데 그렇다고 얄밉지는 않았다.
“그런데 형, 고정원 선배님이 저 싫어하는 거 같지 않아요?”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가 휙 돌아갔다.
“무슨 소리야? 널 왜 싫어해.”
“뭔가, 벽이 느껴지는 거 같아서…….”
“아냐, 정원이 되게 남 잘 챙겨 주는 스타일이야. 엄청 자상하고.”
“그건 형이랑 친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어……? 뭐, 그런 것도 없잖아 있긴 하겠지만.”
뜨끔했다. 고정원에 대한 평가에서 혹시라도 사심 같은 게 묻어났을까 봐. 조심해야지, 너무 칭찬해도 이상해 보일지 몰랐다.
“암튼, 걔 별로 어려운 애는 아닌데. 오늘 한번 친해져 봐.”
“네. 그러면 좋을 텐데.”
이희운이 힘없이 웃어 보였다. 덩치는 다른 사람들 기죽일 만큼 커다란 주제에 알맹이는 나처럼 소심한 모양이었다.
“저 그 선배님 첨 봤을 때 진짜 깜짝 놀랐거든요. 너무 비현실적으로 잘생기셔서. 이런 말 하면 재수없지만 솔직히 저도 어디서 빠지는 편은 아니잖아요. 근데 그 형 앞에 서니까 진짜 고개가 절로 숙여지더라구요…….”
교묘하게 자기 자랑 했다는 자각이 있는지 이희운은 멋쩍게 웃었다.
“아무튼, 누구나 친하게 지내고 싶어지는? 그런 매력적인 분이고, 성격도 좋으시고 후배들한테도 예의 있게 대하시는 것도 알겠는데…… 전 왠지, 좀…….”
“좀?”
“무서워서요.”
이희운은 복잡한 표정으로 턱 언저리를 문질렀다.
“…….”
굉장히 의외였다. 선배들이 뭘 해도 기죽지 않길래 나는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과에서 몇 명, 후배들 상대로 군기 잡으려는 애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김강우도 그런 무리라 술자리에서 괜한 시비를 걸기도 했고. 그런데 정작 가만히 있는 고정원을 무서워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듬직한 등을 토닥이며 조언했다.
“그냥 나한테 하는 것처럼 해. 싹싹하게 하면 고정원도 좋아할걸.”
“형, 저 아무한테나 애교 부리는 그런 쉬운 애 아니거든요.”
이희운은 능글맞게 말하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섭섭하네.”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눈이 커진 이희운과 나는 거의 동시에 돌아봤다.
“나는 아무나인가 봐.”
얘기의 장본인이 바로 뒤에 있었다. 이희운은 크게 당황했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고정원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정색하며 변명했다.
“아, 선배님. 그게 아니라 농담…….”
“인휘는 형이고, 나는 선배님이야? 나한테도 편하게 해, 희운아. 들어서 알겠지만 나 정말 하나도 안 무서운데.”
“그게, 아, 네. 선배…… 아니, 형!”
이희운의 굳어진 안면 근육이 풀어질 줄 몰랐다. 딱 봐도 ‘실수했다’ 싶은 얼굴이었다.
“너 나한텐 보자마자 형이라 하더니. 예의 바른 척하냐.”
장난스럽게 주먹으로 쳤다.
“솔직히 인휘 형은 첨에 같은 새내긴 줄 알았어요. 정원 선배, 아니, 정원이 형은 뭔가 어른 남자 느낌이어 가지고…….”
“무슨, 내가 왜 새내기처럼 보여. 새내기 때도 새내기 취급 안 받았는데.”
요새 왜 그런지 미성년자로 오해받는 일이 많아졌다. 어리숙해 보인다는 뜻 같아서 영 달갑지 않았다. 일부러 화난 것처럼 목소리를 깔자 이희운이 살살 웃으며 엉겨들었다.
“죄송해요. 제가 거짓말은 잘 못해요.”
몸집에 걸맞은 육중한 무게를 밀어 냈다. 자식이 안 어울리게 향수를 쓰는지 은근슬쩍 고급스러운 향을 풍겼다. 하긴, 한참 들떠서 멋 부릴 때긴 했다. 나도 성인 되자마자 염색에 피어스에 난리를 쳤으니.
“희운아.”
“네?”
고작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 뻣뻣해졌다. 이희운은 내게서 떨어지며 자세를 바르게 세웠다. 새내기답지 않게 선배들 앞에서 유들유들하던 놈이, 군기에 관심도 없는 고정원 앞에서 왜 이렇게 긴장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뇨, 전 딱히.”
“일단 근처에 새로 생긴 이탈리안 먹으러 가려고 했었거든. 괜찮아?”
“네, 저는 다 좋아요.”
“아, 그리고 아직 번호를 모르네.”
“아아, 네. 여기 찍어 주세요, 형.”
나는 떨어진 곳에서 둘이 번호를 교환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문득 안정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둘 다 평균을 웃돌 만큼 신장이 커서 그런 듯했다. 같이 걸으니 균형이 맞아 보였다.
“…….”
저 사이에 내가 끼면 안 좋은 의미로 튀겠지. 중키에 나름 만족하고 살았지만 바로 옆에 큰 애가 두 명이나 되니 위축이 되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깔창을 한 번 사 볼까. 휩쓸리듯 생각하며 모바일로 검색어를 입력해 보던 차였다.
“으아!”
평지라고 생각하고 내디딘 곳으로 발이 움푹 꺼졌다. 무릎이 꺾여 고꾸라지기 직전, 가까스로 팔뚝이 붙잡혔다.
빠르게 잡아 준 고정원은 그대로 나를 일으켰다. 희미하게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걸을 때 휴대폰 보지 말랬지.”
“……미안.”
후배까지 있는데 자칫 정말 망신당할 뻔했다.
“안 다쳤어요?”
“어어, 괜찮아, 괜찮아. 앞을 제대로 못 봐서.”
“형 혼자 걷게 하면 안 되겠다.”
“오버하지 마, 실수 좀 한 거 가지고.”
“손잡고 걸을래요?”
놀릴 건수를 잡은 이희운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뼈대부터 커다란 손이 놀리듯이 까딱거리고 있었다.
“까분다.”
넘어질 뻔한 걸로 놀림받으며 이희운과 티격태격 걸었다. 자꾸 놀려 대는 걸 보면 어지간히 멍청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무심결에 몸에 밴 습관이 나왔다. 의식도 하지 못한 사이 나는 휴대폰을 열고 손끝으로 화면을 건드리고 있었다.
“어……!”
휴대폰을 빼앗겼다. 되돌려받으려고 손을 뻗자 더 높게 팔을 들어 닿을 수조차 없게 만든 고정원이 무심한 눈길로 화면을 훑었다. 하필 화면에는 ‘시크릿 키 높이’라고 문구가 박힌 섬네일이 떠 있었다.
“줘, 빨리.”
나는 최대한 작은 소리로 애원했다. 집이었으면 간지럼을 피우든가 약한 곳을 만지든가 해서 낚아챘을 건데, 밖이라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
고정원은 아랑곳않고 그저 내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서부터 왠지 거북한 정적이 흘렀다.
“…….”
상황이 민망하게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둘만 있었으면 이런 종류의 간섭은 아무렇지 않겠지만 후배가 같이 있으니 어떻게 보일지 신경이 쓰였다.
이희운 쪽을 힐끗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눈이 마주쳤다. 머쓱한 듯, 뭐라 형언할 수 없이 묘한 눈길이 따라붙었다.
“형이랑 정원이 형은, 대학에서 만나신 거죠?”
“누구. 얘랑 나? 어어, 대학 와서 처음 봤지, 당연. 얘는 서울 토박이고 나는 계속 일산 살았는데 어떻게 뭐, 만날 데가 여기밖에 더 있어. 근데 그건 왜?”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어서 머릿속이 뒤엉켰다. 갑작스레 직설적인 질문이 튀어나올까 봐 뱃속이 두근거렸다.
“아뇨. 엄청 친하신 거 같아서.”
“야, 당연 친하지. 동기니까.”
뜨끔한 속을 감추려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리고 옆에서 잠자코 있던 고정원이 갑자기 끼어들어 말을 보탰다.
“서로…….”
“…….”
“모르는 게 없긴 해.”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특히 해석의 여지가 많았다. 은밀한 쪽으로 생각이 뻗어나가면서 뜨거워진 얼굴을 홱 돌렸다. 때마침 목적지인 음식점이 눈앞에 보여서 나는 가타부타 할 것 없이 빠르게 앞서 들어갔다.
음식점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고 손님이 제법 차 있었다. 우리는 창가의 4인석으로 안내받았다. 들어온 순서대로 안쪽에 앉은 나는 대뜸 이희운을 불렀다.
“어! 야, 희운아. 너 여기 앉아.”
“……아, 네.”
이희운을 옆에 앉히자, 고정원은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왠지 고정원하고 붙어 앉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한 행동이었다. 고정원은 식사하는 내내 내게 먹여 주거나 과할 정도로 하나하나 챙겨 주는 걸 좋아했다. 옆에 붙어서 평소 하던 버릇이라도 나왔다간 이희운이 식겁할 게 분명했다.
“여기 인테리어 깔끔하게 잘해 놨네요.”
“그러게.”
설마 이런 걸로 기분 상하진 않았겠지. 갑자기 그런 걱정이 들어서 나는 조심스레 맞은편을 살폈다. 그리고 속으로 안도했다. 다행히 고정원의 표정엔 내가 걱정할 만한 어떠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식사가 이어지면서는 많은 대화가 오갔다. 주로 이희운과 고정원이 말을 나눴다. 도와줘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는데 괜한 오지랖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둘이 분위기도 좋고 원래부터 친했던 것처럼 굉장히 편해 보였다. 고정원이 워낙 부드럽게 대화를 주도해서 이희운도 마음을 놓는 것 같았다.
“근데 형, 운동 같은 거 뭐 하세요?”
“나? 피트니스 센터에 다니긴 하는데. 요샌 잘 못 가.”
“아, 어쩐지. 옷 위로 봐도 근육이 장난 아닌 게 느껴졌어요.”
“너도 몸 좋은데 뭘. 관리 열심히 하지?”
“아, 저 관리하는 것처럼 보여요? 다행이다. 저 사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운동부였거든요. 그만두고 공부하면서부터 살이 엄청 잘 붙는 체질로 바뀌어서……. 관리 안 하면 말도 못 하게 불어나요. 남들보다 빡세게 해야 돼요.”
얘기를 듣다가 궁금해져서 물었다.
“무슨 운동 했었는데?”
“태권도요.”
“오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희운은 첫인상부터 경영학부보다는 체육학부에 위화감 없이 섞일 것 같은 이미지였다.
“나름 유망주였어요. 전국 대회 나가서 상도 꽤 받았는데, 여러 가지 안 좋은 사건들 겹치면서 현타 맞고 그냥 그만뒀어요. 근데 뭐, 잘 관둔 거죠. 그런 생활 계속했으면 완전히 피폐해졌을 거 같아요. 정신이든 육체든.”
이희운은 코치와의 불화를 털어놓았다. 나는 처음에 가볍게 듣다가 들을수록 분노했다. 압축된 몇 부분만 전해 들어도 지나치게 폭력적인 사건이었다.
“그때 이후로 상하 관계 앞세워서 폭력 휘두르고 싶어하는 사람 보면 생리적으로 거부 반응 일어요. 뭐, 티는 안 내려고 노력하지만.”
덤덤하게 말하던 이희운은 생각이 가지를 치고 나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저 이상형도 착하고 귀여운 사람이거든요. 서열 같은 거 안 따지고, 사람 대 사람으로 배려할 줄 아는 사람하고 만나고 싶어요.”
고정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래도 다행이네. 여자들은 대부분 서열 같은 거 관심 없으니까.”
“아…… 네. 그건 그렇네요.”
대화는 얼마간 끊겼다가, 이희운에 의해서 재개되었다.
“형.”
“응?”
부르길래 쳐다보니 이희운은 약간 망설이는 것처럼 뜸을 들였다. 공연히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태도에서 뭔가 하기 힘든 말을 전하려 하는 의중이 읽혔다.
“그…… 얼마 전에 감사했어요.”
“갑자기? 뭐가?”
나는 이희운을 쳐다보며 물었다.
“술자리에서요. 강우 선배가 술 계속 강요해서 완전 고역이었거든요. 형이 나타나서 말려 줬잖아요. 그거 감사해서…… 두고두고 말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말하네요.”
“야, 뭘 그런 걸로 감사씩이나.”
“그날 되게 기분 다운됐던 날인데. 형 덕분에 살았어요.”
마주한 눈빛이 진심을 얘기하고 있었다. 쑥스러운 기분이 든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뭐, 그런 건 일도 아닌데. 앞으로도 누가 괴롭히면 나 불러.”
“아, 정말요?”
“어어. 김강우까지는 내가 어떻게든 해 줄 수 있어.”
그 말에는 이희운이 으하하, 유쾌하게 폭소했다. 나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후배들하고 그동안 접점이 없어서 몰랐는데 의지의 대상이 되는 건 흐뭇한 일이었다.
“인휘야.”
웃음소리 사이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고개를 든 나는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입.”
귀에 스쳤던 대로 ‘입?’ 하고 되묻자, 고정원이 은근하게 웃으며 기다란 손으로 본인의 입가를 가볍게 두드렸다.
“묻었어.”
“아.”
나는 서둘러 입가를 닦아 냈다.
“아니, 여기.”
뻗어 온 손이 입술을 건드리는 느낌에 멈칫 굳어졌다. 따뜻한 손가락이 아랫입술의 전체를 지그시 훑고 떨어졌다.
“…….”
눈이 마주쳤을 때 고정원은 예의 그 태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손수 내 입가를 닦아 주고 나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식사를 이어 갔다.
“내가 닦으면 되는데, 또 오버한다.”
당황스러워서 심장이 다 벌렁거렸다. 나는 억지로 웃으면서 고정원을 가리켰다.
“얘 원래 이렇게 챙겨 주는 거 좋아해. 웃기지.”
“정원이 형 완전 스윗하시네요.”
다행히도 이희운은 이상하게 보는 것 같진 않았다.
눈치를 보던 나는 고정원이 가져갔던 내 휴대폰을 슬쩍 되찾았다. 무방비하게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어서 타이밍이 좋았다.
“……근데 형, 저번 주 금요일 날 많이 바쁘셨어요?”
“금요일? 왜?”
나는 테이블 밑에서 몰래 고정원에게 문자를 입력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 있을 때는 안 닦아 줘도 된다는 말을 하며 우는 이모티콘을 붙였다.
“영화 같이 보자고 했을 때 답장을 안 주셔서.”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영화? 무슨 소리야?”
“공강이라고 하셔서, 제가 혹시 같이 영화 볼 생각 없냐고 물었던 거요. 답장 기다리다 결국 저 혼자 쓸쓸하게 봤어요.”
흑흑, 소리 내며 이희운이 우는 시늉을 했다.
처음 듣는 얘기라 어리둥절했다. 놓친 게 있었나 확인해 보기 위해 메신저의 대화 창을 열었다.
“…….”
몇 번이나 화면을 끌어당겨 확인해 봐도 같았다. 대화 창에는 아까 도서관에서 만나기 전에 나눴던 대화만 남아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제 내가 삭제를 했던가. 기억을 차례로 더듬어 봤다. 이희운에게 처음 문자가 왔을 때 나는 씻으러 가기 직전이었다. 공강이라는 답장을 보낸 다음, 고정원하고 장난을 치다 욕실로 갔다. 따라 들어왔던 고정원은 택배를 받으러 도중에 밖으로 나갔었고…….
다 씻고 나왔을 때, 나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하고 약간 당황했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고정원의 손에 내 휴대폰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
묻자, 고정원이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렇게 건네받은 휴대폰의 화면 속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방금 막 찍은 고정원의 셀카였다.
‘야…… 너무 야한 거 아니야?’
화면을 응시하는 사진은 여러모로 야했다. 탈의한 상태 그대로 찍은 탓에 잘빠진 근육질의 몸이 프레임 안에 아슬아슬하게 포착돼 있었다. 평소 셀카 같은 거 잘 찍지도 않으면서 웬일로 이렇게 대담한 사진을 찍었나 싶을 정도였다.
‘지울까?’
‘아니?’
솔직히 엄청 잘 나왔고 멋있었다. 두고두고 꺼내 보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사진이었다.
‘나도 네 폰으로 한번 찍어 볼까.’
거기서부터 셀카에 꽂혀서 우리는 얼마간 서로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놀았다. 중간에 고정원이 나한테 뭐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별거 아닌 내용이라 대충 흘려듣고 말았다.
‘사진 찍다 알림 하나 지운 것 같은데. 괜찮아?’
……맞다.
그때 흘려들었던 말이 기억나면서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정원이 잘못 만져서 어쩌다 지워진 모양이었다. 알림만 지웠는데 어째서 전부 사라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안. 실수로 안 읽고 지웠나 봐.”
“아아, 괜찮아요. 다음에 같이 보면 되죠 뭐. 형은 영화 어떤 거 좋아해요?”
기억 속 재밌게 본 영화들을 더듬다 입을 연 순간이었다. 내가 말머리를 떼기도 전에 고정원 쪽에서 먼저 질문을 꺼냈다.
“영화 같이 볼 사람이 없어? 희운이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저요? 아뇨, 없어요. 제가 무슨……. 형이야말로 우리 학교 연예인이시잖아요. 여자 친구분도 엄청 미인이시죠?”
다들 궁금해하는 그 이야기가 드디어 화두로 올랐다. 역시 이런 질문은 빠질 수 없는 거겠지. 나는 으레 느끼는 불편함 속에서 상관없는 사람처럼 식사에만 집중했다.
“응 예뻐. 착하고, 배려심 많고.”
가상 인물 묘사하듯 나랑은 어울리지도 않는 표현을 나열하던 고정원은 짧은 간격을 두고 덧붙였다.
“근데 또 귀여워.”
“…….”
때마침 삼킨 빵이 목구멍에 걸렸다. 켁, 하는 소리가 터져 나갔다.
“와, 형. 첫인상하고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데요. 웬 팔불출이에요.”
“그런가?”
“인휘 형, 우리 솔로들끼리 뭉쳐요. 진짜 서럽네.”
이희운이 내 어깨로 머리를 기대며 한탄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목의 이물감 때문에 물을 들이켜기 바빴다.
“아, 희운이는 몰라?”
“네? 뭐가요?”
“인휘 솔로 아닌 거.”
고정원의 말에 이희운이 기댔던 몸을 바르게 했다. 그리고 물었다.
“형 연애 중이었어요?”
나는 최대한 고정원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연애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나는 자석이 붙는 것처럼 맞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짧게 눈길이 스쳤다.
“응. 나도 연애 중.”
별생각 없는 것처럼 대답하고는 눈을 깔았다. 대놓고 밝힌 것도 아닌데 ‘얘랑 나랑 연애 중~’ 하고 자랑한 느낌이라 미치도록 낯 뜨거웠다.
“…….”
감정이 피부 밖으로 새어 나올 것 같았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면을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
매콤한 향이 강해서 코끝이 살짝 아릿했다. 고소하고 담백하니 고정원이 좋아할 만한 맛이었다. 둘만 있었으면 나눠 줬을 텐데. 문득 맛보여 주지 못한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그럼 여기서 가 볼게요. 오늘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식사를 하고 나오자 이희운이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학교로 안 가? 커피도 사 주려고 했는데.”
밥값을 고정원이 계산해서 나는 커피라도 살 생각이었다.
“아니에요. 밥도 얻어먹었는데. 전 이제 수업은 없고…… 곧 약속 있어서 슬슬 이동하려구요.”
“그렇구나. 그래, 그럼.”
우리도 각각 수업이 남아서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희운아, 언제든 편하게 연락해. 같이 밥 먹자.”
고정원은 이희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정말 언제든 연락하고 싶어질 만큼 부드러운 말투였다.
“아…… 네, 형. 감사합니다.”
“나한테 연락하면 인휘도 같이 볼 수 있으니까. 셋이서 자주 만나면 되겠다.”
“……네.”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자 이희운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이유에선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럼, 연락드릴게요.”
“어어. 잘 가!”
하지만 이렇다 할 언급 없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한 뒤 이희운은 반대편을 향해 걸어갔다.
“…….”
낯빛이 안 좋았던 거 같은데 기분 탓이겠거니 했다.
“커피는 학교 안에서 마실까?”
나는 학교 쪽으로 발걸음을 떼며 고정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오늘은 왠지 아메리카노가 땡기…….”
말하다 생각 없이 올려다본 나는 뜻밖에 잠시 굳어지고 말았다.
“왜?”
시선을 느낀 고정원이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 아니. 너 피곤해 보여서.”
피곤해 보인다고 해야 할지. 별안간 얼굴이 지나치게 무표정해서 보는 쪽이 놀랐다.
“음. 좀 피곤한가. 모르겠네.”
“어디 아픈 거 아니야? 혹시 열나?”
걱정이 돼서 가까이 살펴보았다.
“안 나니까 걱정하지 마.”
식사할 때까지만 해도 잘 웃고 컨디션도 좋아 보였다. 설마 체한 건가. 손을 가져가 엄지와 검지 사이의 움푹한 곳을 눌러 보며 물었다.
“그럼 여기 아파?”
“아니.”
고정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웃기려고 한 건 아니지만 잘생긴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모습이 보기 좋아 나도 따라 웃었다.
“이희운이 너한테 연락 자주 하나 봐.”
“희운이? 어, 종종 해. 걔 성격이 유들유들해서 선배들한테도 애교 잘 부리더라고.”
“나는 무섭고?”
“아…….”
무섭다고 얘기하다가 걸렸던 게 생각났다. 뒷담까지는 아니더라도 뒤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게 호감 요인이 되지 않을 건 분명했다.
“그거 때문에 걔 별로 맘에 안 들었어?”
“……그렇게 보였어?”
“어? 아니, 그런 건 전혀 아닌데.”
“안 싫어. 인휘 후배잖아.”
“에이. 내 후배라기보단 우리 후배지.”
“널 따르니까.”
아. 혹시 이희운이 너무 나한테만 편하게 대해서 기분 나빴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들었다. 둘이 있는데 그중에서 한 명만 따르면 남은 입장에서는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었다.
“쟤 내가 만만해서 그래. 너 너무 멋있고 친해지고 싶은데 자기 싫어하는 것 같다면서 소심하게 고민하더라고.”
“그래?”
“응. 하여튼 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너 엄청 자상한 성격이라고 말해 줬지. 왜 혼자 겁먹었나 모르겠더라. 네가 인상이 차가워 보이나?”
“…….”
“왜…… 그렇게 웃어?”
언뜻 스쳤다. 눈을 내리깔며 지었던 냉소적인 표정은 분명 비웃음이었다. 그것도 뭐라 설명할 길 없이 묘한.
“내가 이상한 말 한 거야?”
고정원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 말 뿐이었다.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만 손을 뻗어서 뒤통수를 쓸어 주었다.
“아니.”
머리통을 감싼 손은 미끄러면서 내려갔다. 목, 그리고 등을 따라서 따스한 체온이 스몄다. 손바닥이 허리춤에 닿았을 때 움찔 어깨가 떨린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고정원의 손길이 가벼운 스킨십이라기보다는 무거운 애무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미안. 실수했다.”
만약 뒤에서 누군가 봤다면 100퍼센트 이상해 보였을 만한 행동이었다. 고정원도 해 놓고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돌리며 사과했다.
“…….”
근데 내가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럴 생각이 들지도 않는 게 기분이 워낙 안 좋아 보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고민하다 학교에 들어섰을 때였다. 나는 망설이는 와중에도 고정원을 붙들고 가까운 강의동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 없는 비상계단의 한구석에서 나는 고정원을 몰아붙였다. 양쪽 팔을 붙잡고서 확신하는 투로 물었다.
“기분 안 좋은 거지.”
“그거 물으려고 여기로 온 거야?”
이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온 고정원은 재밌다는 듯이 나를 봤다.
그래도 여전히 기분은 별로인 거 같았다. 한 몸도 아닌데 한 몸처럼 기분이 전해져 오는 까닭에 나도 같이 다운되는 느낌이었다.
“…….”
집 밖에서 애정 행각 같은 건 되도록 하지 않기로 정했지만 이건 특수한 상황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잠시만 규칙을 어기기로 마음먹은 나는 고정원의 손을 붙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꼼꼼히 만지면서, 머릿속으로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고정원은 나랑 단둘이 밥을 먹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가뜩이나 떨어져 있는 시간도 늘었는데 방해받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진즉 헤아리지 못한 게 미안해지면서 나는 낯부끄러운 걸 참고 물었다.
“뽀뽀해 줄까.”
“…….”
고정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 조금 웃고 있기만 했다. 유독 순해 보이는 느낌에 괜히 마음이 짠하고 싱숭생숭해졌다.
뒤꿈치를 들고 볼을 겨냥해 쪽, 입을 맞췄다. 다시 땅에 발을 딛자 코앞으로는 니트에 감싸인 두터운 가슴팍이 보였다. 뽀뽀하고 나서는 차마 눈을 맞출 수가 없어서,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
“이제 힘 났어?”
……자기야?
끝의 말은 작게 덧붙였는데 그래도 확실히 들릴 만한 음량이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더 수그렸다. 자기야는 뺄걸. 말투가 너무 부자연스러워서 웃겼다. 오그라들고 후회돼서 눈시울이 훅 뜨거워졌다.
“아!”
탄성이 터졌다. 예기치 못하게 등이 확 끌어당겨지면서 단단한 품 안에 안겼을 때였다. 익숙한 향수 냄새가 확 풍겼다. 귓가에는 낮은 속삭임이 내려앉았다.
“너무 나서 문젠데, 자기야.”
유난히 능숙하게 들리는 멘트였다. 얘가 쓰면 이렇게 자연스러운데…….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피하며 벗어나려 하자 고정원이 팔에 힘을 주었다. 짠하고 순했던 기운은 날아가고, 내가 알고 있는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야……!”
언제 누가 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나머지는 집에서 하자고 속삭이자 그때서야 고정원은 구속을 풀어 주며 말했다.
“그럼 보기만 할게.”
“……뭘?”
“너 보고만 있겠다고.”
말하고 고정원은 진짜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손을 잡고는 구경하는 것처럼 얼굴을 빤히 훑었다. 눈동자가 책을 읽듯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더 쑥스러울 수 있었다. 몇 분간 시선을 받아 내던 나는 후끈대는 낯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리고 고정원의 가슴팍에 이마를 붙인 채로 그만 나가자고 부탁했다.
고정원은 즐거워하면서 자꾸 내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나는 안 보여 주려고 숨기느라 가슴팍에 달라붙게 되었다. 결국 그런 식으로 짧지 않은 시간을 품 속에 안겨 있었다.
* * *
과제 폭탄으로 정신없는 한 주의 중반. 강의실에 노트북을 두고 오는 바람에 허겁지겁 뛰어갔다 오는 길이었다.
[지금 혼자야?]
“…….”
뜬금없는 문자를 받았다. 그것도 개강 이후 묘하게 피하는 것처럼 굴던 김강우로부터.
뭐지, 갑자기. 의도를 모르겠는 질문에 귀찮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내키지 않으면서도 답장을 했다. 보내고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
[밥 먹으러 ㄱ?]
[내가 살게]
[비싼 거]
끼니는 카페에서 과제하면서 대충 때우려고 했다. 개인 과제가 세 개나 밀린 데다 팀플, 발표 등 꽉 찬 일정을 소화하려면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야 했다. 게다가 안정적이었던 시간표를 닥치는 대로 바꾼 탓에 공강 시간이 너무 짧거나 너무 길거나 하는 식으로 써먹기가 애매했고 내일은 1교시 수업이 있어 더 이상 밤새우기도 빠듯했다.
그래도 밥은 먹고 할까.
문득 허기진 느낌이 들었다. 김강우가 이렇게 사겠다고 나서는 게 드문 일이긴 했다. 그리고 전에 과방에서 마주쳤을 때 눈에 띄게 당황하며 피했던 이유가 뭔지도 궁금했다. 나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승낙하는 답장을 보냈다.
김강우와 만나서 초밥집으로 이동했다. 내가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없다고 하자 김강우는 미리 생각해 뒀는지 곧장 이곳으로 데려왔다.
“한 점씩 음미하면서 먹어라.”
“어, 잘 먹을게.”
학교 주변에 있는 초밥집 중에서 가장 저렴한 곳이었다. 생색이다 싶었지만 내색 않고 인사했다. 김강우 씀씀이에 이 정도면 거하게 쏘는 축에 속했다.
“근데 웬일로 쏠플이냐? 보디가드 어디다 떨구고.”
광어 초밥 하나를 우적우적 씹으며 김강우가 말했다. 비아냥거리는 투로 들먹이는 보디가드가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는 분명했다.
“보디가드는 무슨.”
“그럼 뭐, 껌딱지? 아, 껌딱지 어울리네. 드럽게 끈질긴 게.”
김강우는 혼자 킬킬거렸다. 여전히 고정원과 관련해서는 뭐든 비꼬고 싶은 모양이었다.
“너 임지원 아직도 좋아하냐?”
내 말에 김강우가 커다란 목소리로 언제적 얘기냐며 과민하게 반응했다.
“임지원 때문도 아니면 왜 그렇게 고정원을 싫어해?”
“…….”
대놓고 묻자 본인도 할 말이 없는지 꾹 입을 다무는 모습이었다.
“야. 내가 걔랑 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고정원처럼 성격 좋은 애도 드물어. 니가 몰라서 그러는데…….”
“모르긴, 씨.”
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김강우는 인상을 확 구기고 고개를 돌렸다. 어금니 부분의 턱 근육이 실룩거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표정이 하도 험악해서 별생각 없이 말을 꺼냈다가 약간 놀랐다.
“아, 됐어 됐어, 그 새끼 얘긴. 그거 말고, 너 소개팅 생각 없냐? 항공과. 대박 예쁜데.”
“……뭐?”
김강우는 내가 연애 중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받아쳤다.
“너 나 사귀는 사람 있는 거 까먹었냐?”
“왜, 기분 전환 삼아 나갈 수도 있지. 괜찮으면 갈아탈 수도 있고.”
“……미친놈. 상종할 가치도 없네.”
원만하게 지내 보려고 하다가도 이런 식으로 나오면 없던 정까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좋냐?”
“이미 말하지 않았냐? 절대 안 헤어진다고.”
단호하게 뜻을 내비치자 김강우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남의 연애에 이렇게까지 신경 쓰나 싶을 만큼 표정이 심각했다. 그 일반적이지 않은 반응에 나는 또 한 번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최근 마주칠 때마다 서먹하게 굴던 것도 그렇고, 한번 물어봐야겠다 싶어서 입을 연 순간이었다. 김강우가 신경질적으로 젓가락을 테이블에 던졌다.
“그렇게 구속당하는 게 좋아? 진심? 와, 진짜 콩깍지 제대로 씌었네. 아니, 집착도 그 정도로 심하면 병이야 그거. 무슨 짓 당할 줄 알고. 무섭지도 않냐고.”
불길한 예감으로 술렁거렸다. 따지듯 퍼부어 대는 김강우의 태도가 꼭 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내가 고정원이랑 친하게 지내기 시작할 때의 반응과 비슷해서 더 그랬다.
하지만 금방 불길함을 거둬 냈다. 크리스마스 직전 술집에서 만났을 때도 이와 비슷한 대화를 했던 걸 떠올렸다. 그때도 김강우는 ‘집착 쩌는 여자’라는 둥 일부러 나쁘게 표현하며 심술부렸었다. 본인의 연애가 잘 풀리지 않으니까 시비를 거는 게 뻔했다.
“뭘 안다고 참견이야. 너나 잘해라, 자식아.”
시기하는 걸 받아 주는 것도 피곤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이미 기분은 상했고, 빨리 밥이나 먹고 가자 싶어 무작정 초밥을 밀어 넣었다.
“걔 돈 많지.”
씹을 틈도 안 주고 김강우가 물었다. 다 안다는 듯한 눈초리였다. 나는 뜻밖의 공격을 받은 것처럼 당혹감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너 지금 입은 옷도 걔가 사 준 거잖아. 한 장에 100만 원은 족히 넘는 니트를 자취하느라 돈 아끼던 놈이 사겠냐.”
“…….”
초밥에서 맛이 안 느껴졌다. 정신이 딴 데 팔리면서 저절로 입맛이 사라졌다.
가만히 내가 입고 있는 옷에 시선이 내려앉았다. 이게 그렇게 비싼 거였나. 유명한 브랜드인 줄은 알았어도 가격대가 거기까지 올라갈 줄은 짐작도 못 했다. 얼마 전에 고정원이 자기한테는 작다면서 준 니트였다. 실은 나도 받으면서 일부러 핑계를 붙여서 사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내가 너 생각해서 말하는 건데. 그거 너무 잘해 준다고 정신 빼진 마라. 돈 많은 애들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거야. 숨 쉬고 먹고 싸고 하는 것처럼 진짜 아―무 생각 없어, 걔넨.”
100만 원은 족히 넘는다니. 잃어버린 커플링의 가격을 알게 됐을 때처럼 충격에 빠져 있다가 겨우 정신이 들었다. 함부로 재단하고 판단하는 말들이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
“지금 연애 초라 죽고 못 사는 거는 알겠는데, 얼마나 갈 거 같냐 그거? 현실적으로 길어 봤자 이삼 년인데 지금 좋다고 해 주는 거 다 받고 누리고 익숙해지고, 그러다 헤어지면 너만 타격 입고 초라해져.”
“…….”
가슴으로 텁텁한 열기가 치밀었다. 다 납득할 수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현실적으로 길어 봤자 이삼 년’이라는 말이 가장 거슬렸다. 대학생 때부터, 아니, 더 어릴 때부터 만나서 결혼하고 평생 잘 사는 커플들도 많은 걸로 알고 있다.
불쾌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지만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나는 감정적으로 쏘아붙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찬물을 들이켰다. 입맛이 떨어져 젓가락 끝으로 염교를 건드리기만 하는 사이 김강우의 거들먹거림이 이어졌다.
“까놓고 말해서 경제적으로 한쪽만 너무 잘나가는 것부터가 서로 안 맞는 거야. 지금은 좋으니까 퍼 주지, 걔도 사람인데 나중 되면 여태까지 해 준 거 다 계산한다고. 어? 얘 봐라, 내가 해 준 게 얼만데, 이러면서 행동 하나하나 고까워한다, 분명? 그리고 원래 친구건 애인이건 경제 수준 차이 나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그런…….”
도중에 자리를 뜰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먼저 간다.”
더 들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야, 조인휘!”
음식점을 나오고부터는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걸었다. 여전히 머릿속에선 방금 들었던 부정적인 충고들이 맴돌고 있었다. 김강우가 말하는 것들은 딱히 영향력도 없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다만 경제적인 부분과 관련해선 나도 전부터 부담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예민해졌다.
“야!”
어깨 한쪽이 기울어지며 강제로 젖혀졌다. 횡단보도 앞이었다. 붙잡힌 팔 때문에 억지로 돌아보자 숨을 헐떡이는 김강우의 얼굴이 보였다.
“기분 나빴어?”
쫓아올 정도의 일이었나. 내가 먼저 일어난 걸로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다. 마주친 눈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미안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마음이 착잡해서 신경 쓰기도 싫었다.
“왜 따라오냐. 밥이나 마저 먹지.”
뿌리치고 돌아서는데 보다 강한 힘으로 돌려세워졌다.
“너 생각해서 한 말이라고.”
“…….”
감정이 불필요하게 과해진 듯 보였다. 시근덕대는 김강우의 눈에 전에 없이 진지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이상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의 연속에 지치는 기분이 들어 힘껏 밀어 냈다. 순순히 밀려 나는 것 같다가 또다시 붙들어 오기에 진력이 나서 주먹을 휘둘렀다. 욱하긴 했지만 얼굴을 때린 건 아니고 어깨에 타격을 주는 정도였다.
김강우의 조금 얼빠진 듯한 표정을 마지막으로 돌아섰다. 다행히 신호가 바뀌며 불편한 공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학교 안 카페에서 다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입맛은 없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끼니를 챙길 수 없는 까닭에 억지로 먹어야 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바로 조모임이 잡혀 있었다.
강의동을 들어서며 나는 고정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수업에 들어간다는 보고였다. 요 며칠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밤늦게나 돼서야 만날 수 있을 예정이었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여유가 없었다. 과제 때문에 밤샘하느라 따로 잔 지도 벌써 며칠째. 같이 살지 않았다면 얼굴도 보기 힘들 뻔했다.
메시지를 보내고 얼마 안 돼 손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고정원일 게 분명해서 서둘러 받았다.
“어? 너 통화할 수 있네?”
―여보세요?
예상했던 목소리가 아니라 화들짝 놀랐다.
“어어어어, 네, 엄마. 무슨 일이에요?”
얼굴로 확 열이 끼쳤다.
―누군 줄 알고 받았대? 여자 친구?
“어? 아니, 엄만 줄 알았는데? 왜요, 왜요.”
당황해서 목청이 커졌다. 처음 받았던 목소리는 확실히 부모님께는 절대 쓰지 않는 종류의 간지러운 톤이었다. 나는 벽에 기대며 후끈해진 목덜미를 쓸었다.
‘아니, 별건 아니고……’ 하고 운을 띄운 엄마는 개운치 못한 한숨을 내쉬셨다.
―어휴, 오늘 포장 이사 세 군데 견적 냈는데 하나같이 왜 이렇게 비싸니? 요즘 다 이렇게 받니?
“아…….”
이번에도 비슷한 문제로 전화를 하신 듯했다. 최근 부모님은 이사를 앞두고 계셨다.
“얼마 내야 된대요?”
―전부 합쳐서 130 정도 든다네. 버릴 거 다 버리고 많이 추렸는데도 그래.
지금 살고 있는 집 주인이 보증금을 인상하려고 하면서 결정된 이사였다. 엄마는 나도 누나도 없어서 넓게 느껴지던 참이라 마침 잘됐다곤 하셨지만, 계약부터 옮길 준비까지 일일이 버거워하시는 중이었다. 금전적인 문제가 가장 컸다.
―이사 갈 집 도배도 해야 되고 장판도 새로 싹 갈아야 하는데…….
하소연은 몇 분간 더 이어졌다. 마지막엔 어렴풋이 예상했던 대로 ‘돈 좀 빌릴 수 있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오늘 중으로 100만 원을 송금해 드리기로 하고 통화는 겨우 끝이 났다.
“하…….”
눈치 보면서 말을 꺼내시는 게 안타까워 선뜻 빌려드리기는 했어도 솔직하게는 가슴이 쓰렸다. 여름방학에 고정원이랑 미국 갈 때 비행기 표값으로 보태려고 끌어모아 둔 돈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때까지 마땅한 금액이 채워지지 못해 여행이 미뤄질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고정원은 돈을 빌려줄 테니 가자고 말하겠지만…… 그러기엔 스케일이 너무 컸다.
생활 전반에서 고정원이 부담하는 비용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해 주려는 걸 거부하면 진심으로 기분 나빠해서 어쩔 수 없이 하나씩 수용한 결과였다. 여기서 더 부담을 보태는 건 몰염치였다.
“평일에도 알바를 해야 되나.”
머릿속으로 빠듯한 스케줄을 돌려 보았다. 아슬아슬하게 가능할 것도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학 때 쉬지 말걸. 방학 때는 돈을 하나도 못 벌었다. 고정원의 뜻을 따라 아르바이트도 잠시 관두고 새집에서 칩거하는 데에만 푹 빠져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뒤늦게 그 선택이 후회가 됐다. 여유 있는 입장도 아니면서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
무심코 손등을 세워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마디뼈의 주변이 조금 붉어진 게 보였다. 싸움을 해 본 적 없는 주먹은 고작 그 정도의 마찰에도 이 모양이었다.
김강우를 밀어 낼 때의 상황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좀 심했을까. 아무리 먼저 막말을 했어도 미안해서 쫓아 나오기까지 한 놈한테 너무 공격적으로 행동했던 것 같기도 하다.
‘까놓고 말해서 경제적으로 한쪽만 너무 잘나가는 것부터가 서로 안 맞는 거야. 지금은 좋으니까 퍼 주지, 걔도 사람인데 나중 되면 여태까지 해 준 거 다 계산한다고. 어? 얘 봐라, 내가 해 준 게 얼만데, 이러면서 행동 하나하나 고까워한다, 분명? 그리고 원래 친구건 애인이건 경제 수준 차이 나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그런……’
속으로 계산을 한다느니 고까워한다느니. 김강우가 앞서 했던 말들은 워낙 악의적이고 터무니없어서 무시가 가능했다. 근데 뒤로는 무시하기 힘든 객관적인 사실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말허리를 자르고 나와 버렸다.
애초에 나와 고정원은 소비에 대한 개념부터가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소비하는 습관과 규모 자체가 달랐다. 그냥 딱 잘라 사는 세계가 달랐다.
하지만 고정원과 함께 지내며 생활과 환경을 공유하다 보니 나도 덩달아 누리는 폭이 광범위해졌다. 실처럼 좁았던 시야가 갑자기 360도로 탁 트인 기분이었다. 부담스럽고 낯선 한편으로 편리함에는 빠르게 적응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득문득 불안감이 찾아들었다. 고정원이 주는 모든 안락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같고 가끔씩 내가 기생하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말, 고정원 하나만으로도 나한테는 버거울 만큼 과분한데.
“후…….”
입고 있는 니트가 무겁게 느껴졌다.
100만 원.
나도 그렇고 우리 집도 그렇고 쩔쩔매는 액수였다. 고작 내가 고정원에게 받은 옷 하나 값이라는 상황이 조금 씁쓸했다.
수업을 마치고 조모임 장소로 이동하기 전, 잠시 편의점에 들렀다. 몽롱한 정신을 카페인으로 각성시키기 위해서였다. 모임은 넉넉하게 두세 시간 소요될 걸로 가늠하고 있었다. 끝나면 고정원과 만나 저녁을 먹고, 들어가서 리포트 하나를 해치우면 무사히 하루가 끝날 듯했다.
계산한 음료는 선 자리에서 한 번에 비웠다. 빈 용기를 버리고 나서려는데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꺼내 보자 이번에야말로 틀림없는 고정원이었다.
“어, 정원아.”
―팀플 하러 가?
“응, 이제 슬슬 가려고. 쉬는 시간이야?”
―수업 좀 일찍 끝나서…… 잠깐 너 얼굴 보고 다시 들어가려고.
“어? 지금?”
―경영관 앞에서 기다려. 거의 다 왔으니까.
“어어, 알았어.”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어디쯤인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앱을 열었다. 아이콘을 터치하자 쉽게 거리가 확인됐다.
위치 추적 앱은 생각보다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고정원이 비상시에 괜찮을 것 같다며 추천해서 사용하게 된 게 얼마 전이었다. 비상시보다는 의외로 일상에서 쓰일 일이 많았다. 어디 있는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파악하고 움직일 수 있어서 편리하고 시간이 절약됐다.
조금 뒤, 키 큰 남자가 멀리서부터 시야에 들어왔다. 고정원인 줄 알고 반갑게 한 발자국 내디뎠다가 금세 뒤로 물러났다. 졸려서 시력이 떨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얼마간 딴짓을 하다 고개를 들었다. 크고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띄었다. 아까는 왜 착각했나 싶을 만큼 독보적인 외형에 새삼 설레는 기분을 느끼며 쳐다봤다. 인종이 다른 수준으로 구별되는 외모과 분위기로 고정원은 이목을 끌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
우리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인적이 드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너 시간 괜찮아?”
“여유 있어.”
잡지는 못하고 손끝만 살짝 스쳤다. 나는 닿았던 손끝을 오므렸다가 공연히 목덜미를 문질렀다.
“…….”
봄볕처럼 따뜻한 눈이 내 얼굴 곳곳을 쓸었다. 고정원 몸에서 무슨 신경 안정 물질이 나오는 것도 아닐 텐데, 가까이서 얼굴을 보자마자 짜증이 사라졌다. 여유 없는 일정과 여러 일들 때문에 지쳐 있던 신경이 느슨해지며 안도감으로 누그러졌다. 비유가 웃기지만 피부 위로 따뜻한 버터가 녹아 스미는 기분이었다.
현재로서 가장 민감한 돈 문제가 잠시 떠오르긴 했다. 침울해질 뻔했으나 그걸 방해하듯 고정원이 내 손을 붙잡았다.
“여긴 왜 그래.”
주먹질 때문에 생긴 손등의 자국을 말하는 듯했다.
“별거 아냐. 그냥, 벽에 부딪혀서.”
항상 보면 내 몸의 변화를 가장 먼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들까지 쉽게 발견했다. 고작 1, 2킬로의 몸무게 변화를 눈치채는 것도 그렇고 눈썰미가 대단했다.
“아파 보여.”
골격이 두드러진 손이 부어오른 내 손등을 섬세하게 어루만졌다.
“괜찮아.”
말하며 나는 손을 빼냈다. 눈치 보듯 올려다보다가, 고정원의 팔뚝을 꼭 붙들었다. 당장 껴안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온 생뚱맞은 행동이었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보이기에 어정쩡하게 손을 풀며 물러났다.
“……가야 되는데 가기 싫다.”
높다란 고정원의 정수리 뒤편으로 흐드러지는 벚꽃이 보였다. 봄은 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빠서 무감하게 스쳤던 풍경들이 새삼 너무나 예뻤다.
고정원이 말없이 나를 봤다. 나도 입술을 붙이고 고정원을 봤다. 시선이 교차하는데 성적인 느낌이 저릿하게 번졌다. 서로를 향한 눈길에서 말보다 선명한 감정이 오가는 듯했다.
“…….”
달콤하고 묵직한 공기 속에서 나는 황망하게 시선을 떨궜다. 입 안이 온통 달고 축축해져 있었다.
확 당겨졌던 긴장이 다소 누그러졌을 즈음. 더는 할 말도 없으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헤어지기 싫어서였다.
버티던 우리는 느릿하게 발걸음을 뗐다.
“이따 만나.”
“이따 만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인사말을 했다. 멀어지는데 배시시 웃음이 났다.
고정원은 먼저 가라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거리가 생긴 뒤에도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지켜봤다. 몇 번씩 돌아보던 나는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더 늦장 부리다가는 위험한 바람이 들 것 같았다.
교정을 스쳐 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뭔가 희한하게 보는 듯한 눈초리에 이상함을 느끼다 뒤늦게 자각했다. 손으로 입가를 덮어 꽉 눌렀다. 가린 손바닥 아래서도 헤실거리는 웃음은 얼마간 더 이어졌다.
* * *
모임은 그럭저럭 괜찮게 마무리됐다. 아예 불참한 사람도 있었고, 소통이 힘든 외국인 한 명과 중간에 사정이 있어서 간 사람도 둘이나 있긴 했지만 이 정도면 무탈했다. 조장을 맡은 고학번 선배가 원만하게 진행하는 능력이 있었다.
“경영이라고 하셨죠?”
“네? 아, 네.”
테이블 위의 잔해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같이 남아 있던 선배가 말을 붙여 왔다.
“경영에 되게 유명한 사람 있잖아요. 그 연예인.”
“……아.”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아차리고 멍청한 감탄사를 터뜨렸다.
“연예인은, 아닌데…….”
내 얘기도 아닌데 괜히 변명하듯 말이 나왔다.
“아니, 그 정도면 연예인으로 쳐도 돼요. 축제 때 누구 부를 거 없이 그분 섭외해도 될 거 같던데.”
나는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이렇게 고정원이 어디에서나 회자되는 인물이란 걸 확인할 때마다 질리지도 않고 매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쪽도 잘생겼어요. 아이돌 이아진 닮았어요.”
떨떠름하게 있었던 걸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을까. 내 외모까지 칭찬해 주었다.
“……아, 누군지 모르는데. 암튼…… 감사합니다.”
“수고했어요, 오늘. 끝나고 다같이 밥 한번 먹어요.”
“네. 고생하셨습니다.”
가볍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선배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
혼자가 되자 비로소 에너지가 소진된 걸 느꼈다. 일어나려다가 안 되겠어서 잠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수면 부족의 영향으로 두통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반나절만 푹 자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며 얼굴을 마구잡이로 문질렀다.
“…….”
지잉, 진동 소리에 벌떡 등을 일으켰다.
“아…….”
깜빡 졸았음을 깨닫고 눈꺼풀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휴대폰 화면에는 고정원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인휘야 나 앞에 있을게]
[천천히 나와]
그거 좀 졸았다고 손끝 감각이 둔해져 있었다. 지금 나간다는 답장을 몇 번의 오타 끝에 간신히 전송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통유리창 너머 바깥은 새까맸다. 배가 고파 오는 걸 느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레기를 분류하고, 트레이를 반납한 뒤 막 돌아선 때였다.
“엇.”
느닷없는 충돌감이 등 쪽에 번졌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뒤로 물러나면서 누군가와 부딪쳤음을 알았다.
휘청, 움직인 사람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탓에 느슨하게 쥐어져 있던 휴대폰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앗,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안 다쳤어요?”
여자는 얼굴을 부닥친 모양이었다. 그쪽도 당황했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만 했다. 체구가 작은 사람이었다. 더욱 미안해진 나는 혹시 코피라도 나는 건 아닌가 싶어 머리카락에 가려진 얼굴을 살펴보았다.
“괜찮,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마까지 빨갰다.
“코피 나시는 거 아니에요?”
걱정돼서 묻자 여자는 손을 내리며 아니라고 답했다. 드러난 얼굴은 붉어졌을 뿐, 다행히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였다.
“근데 저기, 휴대폰 떨어뜨리셨는데…….”
“억, 맞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휴대폰은 근처 테이블 밑에서 발견되었다. 불길하게도 화면이 바닥을 향한 채였다.
“으아…….”
나쁜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나는 안타까운 신음을 흘리며 화면을 살폈다. 강화 유리 필름은 물론이고 테두리까지 깨져 있었다. 딱 봐도 안의 액정까지 손상이 끼친 상태였다. 싱크홀처럼 군데군데 패여 있기도 했다.
“어떡해요.”
약정이 몇 개월 남아 있었다. 울고 싶은 와중에 나와 부딪친 사람도 많이 놀랐는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걱정해 주었다.
“괜찮아요, 잘 켜지니까 됐어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거 제가 수리비 보탤게요.”
“예? 아니에요, 제가 놓친 건데.”
피곤해서 정신을 못 차리니까 사고가 난 것 같았다. 부딪힌 사람은 미안해하며 자기가 보상하겠다고 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내가 부주의해서 생긴 일인데 책임을 물게 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고정원이 신경 쓰여 대충 마무리하고 카페를 벗어났다.
바깥 공기는 낮에 비해 많이 서늘해져 있었다. 나는 인파 속에서 고정원을 찾아 분주하게 두리번거렸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가벼운 경적이 울렸다. 소리가 난 곳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눈에 익은 검은 세단이 보였다.
“저기요!”
나아가다 말고 우뚝 걸음이 멈췄다.
“어…….”
설마 했는데 아까 부딪쳤던 사람이 맞았다. 뛰어나온 여자는 순식간에 코앞으로 왔다.
“아무래도 너무 죄송해서요.”
“아, 정말 괜찮은데……”
책임감을 느끼는 듯, 여자의 표정은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보기 드물게 예의 바르고 착한 사람인 것 같았다. 나 같으면 그냥 보냈을 텐데.
“무슨 일이야?”
때마침 차에서 내린 고정원이 다가오며 물었다.
“어? 아니, 그…….”
대답하기가 애매해서 더듬거리다가 다시 여자 쪽을 향해서 말했다.
“저기, 제가 한눈 팔다가 그런 거라 정말 괜찮아요.”
“그래도 저 잡아 주시느라 그런 건데……. 액정 다 깨졌던데요. 그냥 가시면 제가 마음이 안 편해서요.”
“……휴대폰 떨어뜨렸어?”
옆으로 선 고정원이 물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했다.
“일단 이거 제 연락처인데 연락 주시면…….”
여자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자그마한 포스트잇의 한가운데에 이름과 번호가 적혀 있었다.
“…….”
거절하기 조금 어려운 모양새가 돼 버렸다.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다.
“그냥 가 보셔도 될 것 같은데.”
나직한 목소리가 사이를 파고들었다.
“네?”
여자는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들어 보니까 쌍방 과실인 거 같고……. 휴대폰 하나 바꾸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정말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고정원은 차분하고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네…….”
상대방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끼어드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 같았다. 나도 고정원이 나서서 이럴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하던 차였지만 이렇게 되면 갑자기 나타난 보호자 뒤에 숨은 느낌이라 낯뜨거웠다.
“그럼.”
고정원은 짧게 고갯짓을 하고 내 어깨를 감쌌다. 팔에 이끌려 가면서 나는 여자를 향해 까딱 묵례를 했다.
탁, 차문이 닫혔다. 나를 먼저 조수석에 태운 고정원은 반 바퀴 돌아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그리고 올라타자마자 내게 안전벨트를 채웠다. 혼자 할 수 있는데 싶어 손을 뻗자 눈이 마주쳤다.
“…….”
오늘 하루 중 가장 가까운 거리감이었다. 정갈하게 돋은 속눈썹이 보였다. 공들여 닦은 것처럼 반들거리는 안광도.
고정원이 고개를 숙이면서 쪽, 소리가 났다. 예고 없는 행동에 놀란 나는 눈을 굴려 차창 밖을 살폈다. 아무리 어두운 차 안이라 해도 대로변이라 오가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둘만 있는데 어때.”
내 걱정을 알아차린 고정원이 은근한 웃음을 지었다. 둘만 있다니.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맞는 말도 아니었다.
“왜 나는 안 해 줘?”
나는 눈을 내리깔고 한숨 지었다. 이런 식으로 조르면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주변을 살핀 뒤 뺨에 스치듯 뽀뽀했다. 그걸 받고 나서야 고정원은 만족한 것처럼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밥 먹기 전에 휴대폰부터 사러 갈까?”
“……아. 아냐, 밥 먹으러 가. 그리고 이거 그냥 강화 유리만 바꿔 쓰면 되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아까 들어 보니까 심하게 깨졌다고 하던데. 어떤 상태야?”
숨길 수도 없어서 머뭇거리다 휴대폰을 꺼내 보였다.
“다 깨져서 바꿔야겠는데.”
“…….”
그럴 여윳돈이 없다는 말이 차마 안 나왔다. 그렇게 말하면 또 자기가 부담하려고 들 게 확실했다.
‘휴대폰 하나 바꾸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정말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아까 고정원이 했던 말이 생각나며 가슴께가 갑갑해졌다. 상대방이 부담을 가지지 않도록 한 소리였겠지만 정말 그런 처지인 나로서는 받아들여지는 의미가 달랐다.
“그냥 쓸래. 약정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때 바꾸지 뭐.”
교체는 고사하고 수리 비용도 버거운 판이었다.
“사지는 말고 구경만 해 보자.”
“……아냐.”
이건 고정원이 나한테 뭘 사 주려 할 때의 패턴이었다. 사지 않고 구경 삼는다는 구실로 가서는 꼭 돈을 썼다.
“화면 이 정도로 깨졌으면 불편할 텐데.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어디 고장 났을 수도 있고. 급할 때 제대로 작동 안 되면 그때 가서 곤란하지 않을까?”
“그건 그런데, 아무튼 다음 달에 생각해 볼게. 알바비 받으면.”
“나한테 미리 빌려 써도 돼.”
“급할 거 하나도 없어.”
“그럼 우리 통장에서 쓰는 건 어때? 이럴 때 쓰라고 만든 거잖아.”
“…….”
그건 고정원이 주식으로 직접 번 돈이었다. 부모님 돈인 것도 껄끄럽지만 고정원의 돈이라고 해도 함부로 쓸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거참, 아직 괜찮대도 정말?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응? 나 지금 배고파 죽을 거 같아.”
나는 재촉하듯 말하며 웃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고정원은 더 이상 권유하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오늘은 해산물 먹으러 갈까?”
“좋아.”
뭐든 배불리 먹고 푹 자고 싶었다. 벌써부터 체력이 간당간당했다. 집에 가서 끝내려고 생각해 뒀던 과제도 내일로 미루는 게 나을 듯했다.
“아, 맞다. 조모임 끝나고 너 얘기 나왔는데.”
“뭐?”
졸지 않으려고 혼자서 손바닥 지압을 하며 말을 꺼냈다.
“조장 맡은 선배가, 학교 축제 때 연예인 부를 거 없이 너 섭외하면 될 것 같다고. 너 정도로 유명하면 연예인이라는데?”
고정원이 별 실없는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실소했다. 나는 오늘 있었던 하잘것없는 에피소드들을 기억나는 대로 들려주었다.
지잉―.
얘기 도중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조잡하게 깨진 화면이 켜지며 메시지 도착을 알렸다. 발신이 엄마인 걸 보고 혹시나 했다. 또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하며 열어 보자 생각보다 긴 장문이 나타났다.
“…….”
눈이 다 뻑뻑해질 정도였다. 그중에서 ‘바가지’, ‘비용’, ‘초과’ 등, 몇몇 단어들이 형광펜 효과처럼 눈에 띄었다. 짧게 요약하자면 이사에 따른 문제들로 초과금이 발생하기 때문에 돈이 더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무슨 일이야?”
귀를 파고든 물음에 화면을 잽싸게 잠갔다.
“응, 별일 아니야.”
이렇게 되면 다음 달에도 돈을 보내 드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쪼개는 계산으로 머릿속이 뒤숭숭해졌다.
“누구한테 온 연락인데 그렇게 놀라.”
“아니, 엄마한테 온 거야. 별일 아니래도?”
“나한텐 말하기 싫은가 보네.”
“……싫은 게 아니라…….”
나는 불편한 감정을 숨기려 했다. 근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기력이 없어서 그런가. 웃는 얼굴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가 않았다.
“돈 문제야?”
귀신같이 파고드는 말에 입이 다물렸다. 화면을 곁눈으로 훔쳐보기라도 한 걸까. 어째선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힘껏 손을 쥐었다.
“있잖아, 솔직히 너 그러는 거 가끔씩 나 불편해.”
“……그러는 거?”
“지금도 이런, 우리 집 돈 문제 같은 거……. 대놓고 묻는 거는 나한텐 좀…… 그래.”
“…….”
말을 다 하고 나자 심장이 쿵, 쿵, 박동했다. 침묵 속에서 쳐다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
수긍한 고정원은 덧붙여 말했다.
“미안. 앞으로는 주의할게.”
손을 내밀기에 나도 고개는 반대를 향하면서도 마주잡았다.
미안하다는 말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감싸 오는 체온과 함께 죄책감이 스며들었다.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
그렇게 사과하려고 몇 번이나 입을 달싹거렸다. 그런데 번번이 실패했다. 피곤한 탓인지 별 것도 아닌 일로 눈시울이 시큰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일찍 자. 연속으로 밤새웠잖아.”
씻고 나오자 고정원이 뒤에서부터 나를 안아 왔다.
“어, 안 그래도 그러려고. 오늘은 좀 많이 피곤해서…….”
“안마 받고 잘래?”
묻는 질문에는 괜찮다고 답하며 돌아섰다.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고, 깊숙이 끌어안았다.
“…….”
결국 식당에서도 하지 못했다.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했다는 말을. 대화도 거의 하지 못했다. 머리로만 생각이 많고 말수가 줄어든 탓이었다. 차를 타고 오는 길에도 고정원이 입에 넣어 준 사탕만 빨고 있었다.
“내가 너 해 줄까, 안마?”
나는 품에서 벗어나 물었다. 뭐라도 해 주고픈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눈이 마주친 고정원이 느릿하게 웃었다.
“눈이 반쯤 감겼는데…….”
손가락이 내 눈두덩을 가볍게 건드렸다.
“안마를 어떻게 시켜, 불쌍해서.”
간질거림을 못 이기고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응석처럼 코끝이 짓눌리도록 파고들었다. 고정원이 하는 불쌍하다는 말은 왜 이리 애틋하고 기분 좋은지. 받아서 행복한 동정도 다 있었다.
등허리를 쓰다듬던 손이 어느새인가 멈췄다. 가슴을 크고 천천하게 부풀리는 고정원의 호흡을 느꼈다. 어딘지 모르게 긴박한 느낌이 든다고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아.”
몸을 떨어뜨렸다. 내려다보자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나도 어느 정도 발기하긴 했는데 고정원은 표시가 많이 났다. 팔뚝만 한 성기가 얇은 바지를 두드리듯 맥동하는 게 보였다. 둑, 둑, 그런 묵직한 박동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가끔 피곤하면 이래. 그치.”
나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실제로 너무나 피로한 상태였다. 발기한 것과 별개로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과제 폭탄을 맞고 나니 주 3회는 무슨,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주 1회도 버거웠다.
“다른 거 하지 말고 들어가서 일찍 자. 나는 좀 있다 갈게.”
고정원이 말했다.
“응…….”
이렇게 바빠지고부터는 고정원도 하자고 몰아붙이지 않게 됐다.
“…….”
가서 자면 되는데. 어쩌다 보니 나는 돌아서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손을 뻗고 있었다.
“왜?”
붙잡힌 고정원이 비스듬히 돌아서며 물었다.
“아니…….”
미적거리면서 말끝을 흐리던 나는 확 줄어든 음량으로 내뱉었다.
“내가 해 주고 싶어서.”
“…….”
“손…… 아니, 입으로.”
입으로 바꾼 건 지난 경험들 때문이었다. 손으로만 해 주면 숨넘어가게 진득한 키스도 같이 해야 했다. 침이 흐르고 산소 부족으로 몽롱해질 만큼 끈질긴 입맞춤. 그리고 살집이 있는 부위 어딘가를 꽉 움켜쥐는 애무를 동반해야 고정원은 겨우 사정했다. 끝나고 나면 나도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입으로 하는 건 입이 헐고 트는 단점이 있긴 해도 훨씬 깔끔하게 끝났다.
“…….”
즉각 승낙할 줄 알았던 고정원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하고 싶은 건 확실했다. 중심부가 면을 들추며 부피를 키우는 게 보였다.
나는 침을 삼키며 허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어서 들려온 건 한숨이었다.
“억지로 해 줄 필요 없어, 인휘야.”
“아니, 억지로 아닌데…….”
“너 나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거잖아.”
너무 속보이는 행동이었나. 내 생각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뭐라도 해 주고 싶으니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돼.”
기회를 주는 것 같았다. 나는 뜸을 들이다가 겨우 사과했다.
“……미안해. 그, 오늘 차 안에서 괜히 예민하게 굴었던 거.”
집세나 생활비도 계속 부담 줘서 미안하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돈 얘기는 되도록 꺼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예민하다고 생각 안 했어. 사실 미안할 필요도 없는데.”
“아냐, 미안한 거 맞아. 좀 더 배려해서 말했어야 되는데.”
“너무 사소한 것까지 배려할 거 없어.”
“……혹시, 내가 뭐 해 줄 거 없어?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사 줄 능력도 없었다. 그런 주제에 마음만 앞서서 말이 튀어나왔다. 알바를 늘리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대책 없는 생각이었다.
“…….”
고정원은 설핏 웃는 것 같았다. 천천히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너랑 있을 시간.”
예상했던 범주에도 들지 않는 답이었다. 시간이라니. 적어도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의 무언가를 얘기할 줄 알았다.
“근데 그건 누가 사 줄 수도 없는 거고……. 그거 말고 필요한 건 이미 다 있으니까 괜찮아.”
물건을 사 줄 생각을 했던 게 뒤늦게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이건 부탁하는 건데.”
“어?”
“좀 못되게 굴어, 나한테.”
“……어어?”
말귀가 어두운 사람처럼 같은 소리를 되풀이했다.
“신경질이든 뭐든 다 받아 줄 수 있는데 왜 눈치를 봐.”
“…….”
“내가 안 받아 줄까 봐?”
나는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사귀는 사이에…… 너무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하는 거, 의미 없는 거 같아.”
정곡을 찔린 듯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사실, 돈 얘기가 나왔을 때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어서 창피했다. 이 꼴 저 꼴 다 본 사이이긴 하지만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은 한편에 늘 있었다. 나한테 고정원은 가장 허물없는 상대인 동시에 가장 조심스러운 상대였다.
“그래도 정떨어질까 봐…….”
소심하게 걱정을 내비쳤다. 겹쳤던 몸을 떼어 낸 고정원이 나를 봤다.
“정말 왜 못 믿지.”
왜 모르냐는 투로 중얼거렸다. 사랑한다니까, 하고.
“더 말해 줄까.”
“……아니.”
무슨 말을 해도 사랑한다는 말로 되돌아올 게 뻔했다. 표정이 무너질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정원을 끌어안았다. 얼마나 세게 안았는지 고정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인휘야.”
“…….”
“나 좀 봐.”
벅찬 게 터져 나올까 봐 꾹꾹 눌렀다. 터뜨리면 안 될 것 같은데 어째야 될지 몰랐다. 하지만 결국 솟구치는 감정을 참지 못해 입부터 맞췄다.
“음……!”
안타까운 탄식이 터졌다. 조급한 몸짓과 키 차이 때문에 자꾸만 미끄러졌다. 힘껏 뒷목을 끌어당겨 열렬히 입을 맞추었다.
고정원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래도 빨아 당길 때마다 반응이 달라지는 걸 느꼈다. 조금 뒤에는 나와 같이 성마른 몸짓으로 몸 이곳저곳을 더듬어 왔다.
전신에 극진한 애무가 쏟아졌다. 예쁘다느니 좋다느니 하는 말도 유난스럽게 많았다. 심지어 고정원은 삽입도 하지 말자고 했다. 내일 피곤하면 안 되니까 허벅지로만 문지르자고 해서 나도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다리 오므려서……. 좋아.”
다정한 지시를 들으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곧 살 기둥이 허벅지 사이로 들어왔다. 뜨겁고 축축하고, 또 기분 좋았다.
성기가 엉덩이 사이로 바싹 밀착했다. 비좁은 곳에 쓸리기 시작했다. 움직이면서 야한 소리가 났다. 끝까지 들어올 때마다 탁, 탁, 몸끼리 부딪치는 게 짜릿했다.
나는 흥분해서 자꾸 키스를 졸랐다. 고정원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끌어당겨 혀를 섞었다.
좋았다. 오늘은 아픈 게 하나도 없었다. 밑에도 비벼지기만 할 뿐이고, 입술과 혀도 녹녹하게 얽혔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응석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부드럽게 해서 좋아?”
물으며 고정원이 끈적해진 내 성기를 만졌다.
“흐읏.”
진저리 내듯 비틀며 끄덕였다. 사정감이 일찍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 집 안에 인터폰이 울린 순간이었다. 이렇게 어이없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갑작스런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사정하고 말았다.
“읏…….”
밤중에 누구지.
덜덜 떨면서 고갤 돌리는데 입술이 겹쳤다. 고정원은 뜨거운 손으로 가슴팍을 더듬었다.
“읏, 으으.”
유두를 잡아당기며 허리를 박고 있었다.
“더, 세게 해도 돼.”
평소 어떻게 해야 사정하는지 알아서 한 소리였다. 흥분한 고정원은 나를 부둥켜안고 허리를 힘 있게 박았다. 찰팍대며 아래가 충돌할 때마다 발끝까지 찌릿한 진동이 번졌다. 그 와중에 인터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이쪽 봐.”
“누가 온…….”
온 것 같으니 확인하자고 말하려 했다. 몸이 앞으로 돌려지면서 입술로 틀어막혔다. 고정원은 두 손으로 엉덩이를 모두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리 사이로 펄펄 뛰는 살덩이를 재차 집어넣었다.
“흣, 읏!”
마주 본 채로 서로에게 찧었다. 나는 최대한 허벅지를 붙이고 서 있었다. 내 것도 고정원의 딱딱한 복부에 부딪혔다. 밑으로는 고환이 쓸리고 회음이 쓸렸다.
아찔한 자극에 입에서 소리가 터졌다. 힘겹게 신음하면서도 입은 맞추었다. 빨고, 혀를 섞고. 간신히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는 목덜미에 매달렸다. 짜부라뜨릴 것처럼 엉덩이를 잡고 드나드는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아……!”
탄식이 들렸다. 갑작스레 움직임이 멈추었다. 허벅지 사이에서 성기가 빠져나가고, 튀어오른 기둥이 이번에는 앞을 찔렀다.
“흐으.”
예민한 살덩이 두 개가 꽉 맞물렸다. 내 것과 고정원의 것이 겹쳐진 순간이었다. 고정원은 두 개의 성기를 잡아 짓이겼다. 끈적끈적, 오일을 잔뜩 부어 마찰하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
나는 그 광경을 내려다봤다. 새삼 크기 대비가 명확하단 생각이 들었다. 크기뿐 아니라 형태, 색, 돋아난 혈관 모양까지 어느 것 하나 비슷한 게 없었다. 달라붙어 있으니 꼭 고정원의 것이 압도적인 부피로 내 것을 짓뭉개고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하, 읏…….”
성기끼리 눌리고 비벼지고 흔들렸다. 나는 두꺼운 팔 근육이나 목덜미를 계속 쓰다듬어 댔다. 흥분감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 어, 어? 넣자고…….”
취한 것처럼 마구 뱉어 댔다. 고정원이 ‘뭐?’ 하고 물었다.
“해, 그냥…….”
엉덩이 안쪽이 근질거리는 게 참기 힘들었다.
“하자……. 괜찮으니까…….”
손길을 뿌리치고 뒤돌았다. 허리를 뒤로 쭉 뺐다. 갈라진 엉덩이 사이로 살덩이가 안착했다. 그것을 꾹 누르며 뭉갰다. 아닌 척 부추기는 행동이었다.
삭이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한발 물러난 고정원은 아무 말 없이 구멍에 손가락을 문질렀다. 축축한 것을 보니 입으로 한 번 적신 듯했다.
“음……!”
마디 굵은 손가락 두 개가 밀려들었다. 이물감을 반기며 나는 입을 벌렸다.
“됐, 으니까, 넣어, 빨리, 그냥…….”
이어졌으면 싶었다. 서로의 몸으로 서로를 조이고 싶었다. 빽빽하게, 숨이 멈출 만큼 꽉 맞물리는 긴장과 압박이 좋았다. 그것밖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게 좋았다.
“……하…….”
거친 숨결이 들렸다. 그리고 이내 뭉툭한 귀두가 파고들었다.
“으앗…….”
한 번에 주르르 밀려드는 압박감이 대단했다. 최대한 배에 힘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때였다.
현관 호출이 들려왔다. 이어서 문 두드리는 소리도.
탕탕탕탕!
놀란 뒤가 꽉 조여들었다. 큭, 하고 고정원이 긁는 신음을 삼켰다.
‘계세요?’
문 너머로 누군가가 말했다.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왠지 경비원 아저씨일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방에서 휴대폰 전화가 울리는 진동도 들려왔다.
당혹감으로 전신이 확 달아올랐다. 고정원도 곤란함이 느껴지는 신경질적인 숨을 뱉어 냈다. 진정되길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머무르다가 내 등을 문지르며 말했다.
“내가 나갈게.”
손길에 의해 볼기가 양쪽으로 벌어졌다. 그 사이로 천천히, 성기가 빠져나갔다. 벌어졌던 공간으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차는 느낌이 선득했다.
방으로 들어간 고정원은 전화부터 받았다.
“네. ……그런데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얼굴을 쓸어내린 고정원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내려갈게요.”
통화가 끊기자마자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사고가 났나 봐. 주차장에서.”
“뭐? 무슨 사고?”
“주차하면서 약간 추돌이 생긴 모양인데. 심각한 건 아닌 거 같아.”
“나도 같이 갈까?”
“아니야, 혼자 갈게.”
고정원은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던 옷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나는 생각 없이 눈으로 쫓았다.
“…….”
젖은 표피가 번들거렸다. 그래서 그런가. 알고 있던 발기 상태보다 커 보였다. 아니면 넣은 직후는 원래 더 커지는 건가. 쳐다보고 있는데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중심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눈길을 거뒀다.
“금방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응?”
대충 갖춰 입은 고정원은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굳이 시선을 맞추며 기다리란 말까지 했다. 돌아와서도 그대로 이어 하겠다는 확답이 받고 싶은 듯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끄덕끄덕하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어, 근데 너…….”
고정원은 그대로 현관을 향했다. 가려질 만한 겉옷을 입을 줄 알았던 고정원은 그대로 나서고 있었다. 나는 말리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곧장 콰당, 하고 현관문이 닫혔다.
드러나던 윤곽을 떠올리며 머쓱하게 팔뚝을 쓸었다. 저 상태로 나가면 사람들이 기겁할 것 같은데.
멍하니 현관 앞에 있다가 소파에 앉았다. 기다리면서 딱히 할 만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거실에 뿌렸던 체액을 말끔히 닦았다. 그리고 욕실에서 대형 타월 몇 개를 가져와 침대에 몇 겹으로 깔아 두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했지만 나중에 고생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엎드렸다. 얼른 왔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별일 없겠지 하면서도 슬슬 걱정이 됐다. 그냥 나도 같이 가 볼 걸 그랬다고 후회되기도 했다. 증식하듯 잔걱정이 불어났다. 오늘 이렇게 해 대면 내일 학교에서 버틸 수 있으려나 하는 우려도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눈이 감겼다.
“빨리 왔음 좋겠다…….”
전해지지도 않을 혼잣말을 하며 고정원의 귀가를 기다렸다.
* * *
같이 듣는 오전 전공 수업이었다. 고정원이 수업을 듣다 말고 지그시 미간을 누르는 모습에 눈길이 쏠렸다. 곁눈으로 지켜보던 나는 낮게 물었다.
“피곤해?”
“아니.”
아니라고 했지만 얼굴이 그게 아니었다. 오늘 따라 눈매가 깊고 연한 선이 생겨 있었다. 피곤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표정도 그렇고 어딘가 예민한 분위기를 풍겼다.
“수업 들어.”
너무 대놓고 쳐다봤는지 고정원이 내 볼을 부드럽게 밀어 냈다.
“…….”
면목 없는 기분을 느끼며 앞을 봤다. 아침부터 내내 이런 기분이었다. 어제, 고정원을 기다리다 깜빡 잠들어 버린 탓이었다.
사고는 원만히 보험 처리 했다는 결과를 들었다. 죄인처럼 눈치 보는 내게 고정원은 오히려 먼저 자길 잘했다고 말해 주었다. 피곤한데 무리하면 안 된다면서. 몇 번이나 사과하는 내게 한 번만 더 사과하면 정말로 화낼 거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더 미안하기만 했다. 하자고, 넣자고. 주도할 건 다 주도해 놓고 잠들어 버렸으니…….
“그만 봐.”
조심스럽게 힐끔거렸는데 티가 났나 보다. 작게 말한 고정원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
그 뒤로 우연하게 시선이 머무른 곳은 책상 밑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주의 깊게 내려다보았다. 실제로 주의 깊게 내려다볼 필요도 없었다. 너무나도 알기 쉽게, 고정원의 청바지 중심부에서부터 허벅지까지 기둥 같은 형태가 도드라져 있었다.
알아차린 고정원은 미약한 한숨을 쉬며 손등으로 내 시야를 차단했다. 표정도 그렇고 태도도 무덤덤했다. 괜히 나만 불안해져서 주변을 살폈다. 두리번거리고 나자 때마침 휴대폰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불이 깜빡였다.
[신경 쓰지 마]
고정원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망설이는 사이 하나가 더 도착했다.
[부끄러워]
“…….”
나는 고민하다가 ‘오케이’ 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리고 고정원이 불편하지 않도록 오로지 전방만을 주시했다.
수업은 아까보다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혼자서 안절부절못하겠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걸 느끼며 힐끔, 옆을 봤다. 고정원은 집중하는 눈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
나도 집중해야겠다 생각하며 이마를 올리고 눈에 힘을 줬다. 하지만 머릿속은 딴생각들로 산만했고, 예상대로 수업이 끝나자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안 나갈 거야?”
“음? 아, 어, 난 안 나가…….”
쉬는 시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고정원이 어깨를 터치하며 물었다. 돌아본 나는 반사적으로 고정원의 하반신을 훑었다. 크게 두드러지는 윤곽이 발견되지 않아 안심한 직후, 귓가에 비난이 날아들었다.
“변태.”
뒷목을 주무르는 억센 손길을 느꼈다. 겁먹은 것처럼 움츠리자 그게 웃겼는지 고정원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유유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
망했다.
세 시간 연강인데 계속 이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울적해진 심정으로 책상에 이마를 기댔다.
점심시간이 되어서는 지친 몸을 이끌고 나갔다. 체력 보충도 할 겸 고정원과 고기를 먹고, 시간이 없어 커피는 못 마시고 헤어졌다.
맨 먼저 방대한 양의 인쇄물 출력부터 끝냈다. 그 다음에는 열람실로 가서 과제와 공부를 하고, 대기하다 시간에 맞춰 팀플 모임을 하러 나갔다. 빡빡한 일정이었다.
학교에서의 짧은 모임이 끝나자마자 고정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늦어지니까 집에서 만나자는 말이었다. 알겠다는 답장을 받고 나는 열람실로 복귀했다.
“아…….”
밑줄을 긋다가 눈이 뻑뻑해졌다. 책에 고개를 파묻었다. 한국말로 봐도 모를 설명을 외국어로 이해하려니까 머리에서 쥐가 나는 것 같았다.
배도 고픈 걸 느꼈다. 바로 여기서 시켜 먹을 수 있으면 편할 텐데. 미적거리다가 이대로는 진도가 안 나갈 게 뻔해서 몸을 일으켰다. 고정원한테 밥 먹으러 간다고 알린 뒤 근처의 라면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아는 얼굴들을 만났다.
“어? 형, 안녕하세요!”
“어.”
이희운과, 또 다른 같은 과 후배 한 명이었다.
“우와, 혼자 오신 거에요? 잘됐다, 여기서 같이 먹어요 형.”
“그래도 돼?”
반가운 마음에 바로 그쪽 테이블로 합석했다.
“신기하네. 어떻게 여기서 딱 만나냐.”
나는 맞은편에 앉은 이희운을 보며 웃었다. 상당히 오래간만에 보는 느낌이었다. 고정원이랑 셋이서 밥을 먹은 이후로 처음인가.
“여기 이희운이 거의 맨날 와요. 맛있다고.”
“아, 맞다. 여기 맛있다고 추천했던 게 너였지.”
누가 여기 라면이 맛있다고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게 이희운이었다는 게 이제 생각났다.
“……형 오랜만에 보네요, 뭔가.”
젓가락을 세팅해 주며 이희운이 말했다.
“그러게. 근데 혹시 너 어디 아파?”
“왜요?”
“아니, 왠지 기운 없어 보여서.”
“감기 때문에 며칠 좀 앓았어요.”
볼수록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무턱대고 밝은 느낌이었다면 오늘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아프느라 살이 빠졌는지 얼굴이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까 목소리도 좀 잠겼네. 이제 괜찮은 거야?”
“네. 형은 아픈 데 없구요?”
“응, 나야 뭐. 너 날씨 따뜻하다고 얇은 거 입지 말고 옷 잘 챙겨 입어.”
그럴게요, 대답하며 웃는 이희운은 어딘가 기운이 없어 보였다. 더 물어보려다가 왠지 참견하는 것 같아서 말았다.
이어서 라면이 나오고, 남자 셋이서 경쟁하듯 빠르게 식사를 끝났다. 우민규가 계속 떠들지 않으면 테이블이 고요해질 만큼 이희운은 말수가 없었다. 아직도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형, 카페 같이 가심 안 돼요?”
우민규라는 후배는 이희운만큼이나 넉살이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도 같이 있자고 조르기에 조금이라면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아 오케이했다.
가까운 카페로 들렀다. 커피를 들고 빈자리에 앉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밥은 맛있게 먹었냐는 고정원의 메시지였다.
[라면집에서 후배들 만나서 잠깐 카페 왔어 ㅎ]
답장을 보내자 몇 초만에 새로운 말풍선이 떴다.
[후배들?]
나는 이희운과 우민규의 이름을 입력했다. 읽음 표시는 사라졌지만 아무런 말이 없길래 멀뚱히 기다리다 닫았다.
“저 형이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너무 좋아요.”
맞은편의 우민규가 뜬금없이 일어나서 포옹했다. 얘도 체격이 큰 편이라 나는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옆에 앉아 있던 이희운이 우민규의 어깨를 잡아 떨어뜨려 주었다.
“아! 아프다고 근육 돼지 놈아. 갑자기 힘 쓰고 난리.”
우민규가 인상을 쓰며 불평했다.
“그러니까 왜 더러운 걸 들이대.”
“말하는 싸가지 봐. 지는.”
많이 친한지 둘이서 몸으로도 티격태격했다.
“실연당해서 예민한 거 맞네 뭘. 형, 얘 뭔가 여자한테 차인 거 같지 않아요?”
“응? 뭐가?”
커피를 한 모금 빨고 대꾸하자 우민규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희운이 옆에서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아니, 얼마 전에도 밤에 갑자기 술 먹자고…….”
“닥쳐, 좀. 민규야.”
이희운은 장난할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정색하는 반응에 입을 다문 우민규는 내 쪽을 쳐다보며 ‘맞죠’ 하고 익살스럽게 뻐끔거렸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헤실헤실 웃으면서 강아지처럼 굴던 게 익숙하다가 영 낯설었다.
“단 거 좀 시켜 줄까? 케이크 먹을래?”
나는 이희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괜찮아요, 형.”
이희운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어깨에 올라온 내 손을 끌어 내렸다.
“…….”
겹쳐진 손은 어째선지 떨어지지 않았다. 두꺼운 목제 테이블 밑. 이희운의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손이 내 손을 감싸고 있었다. 체온을 느끼며 의문스럽게 내려다보자 손은 곧 더운 기운만 남기고 슬그머니 떨어져 나갔다.
뭐지.
얼떨떨하고 있는데 옆에서 진동이 울렸다. 고정원으로부터 온 답장일 게 분명했다. 나는 최대한 가려지게 기울인 채 화면을 열었다.
[조원들이랑 밥 먹고 헤어졌어]
같이 저녁까지 먹은 모양이었다. 밑으로 사진이 하나 첨부됐다.
[젤라또 사러 왔는데]
[무슨 맛이 좋아?]
언젠가 같이 들렀던 곳이었다. 현지에 가서 먹는 맛이 이럴까 싶게 맛있었던. 나는 고정원이 찍어 준 진열장 사진에서 고르라는 대로 몇 가지 맛을 선택해서 답장했다.
“형도 여친이랑 꿀 떨어지는구나.”
지켜보고 있었는지 우민규가 은근하게 찔러 왔다. 나는 무색한 웃음을 흘렸다.
“형, 여자 친구랑 같이 찍은 사진 한 번만 보여 주시면 안 돼요?”
“아, 미안. 그런 건 없는데…….”
넘쳐 나는 게 같이 찍은 사진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네가 형 여친 사진 봐서 뭐 하게.”
“하긴 뭘 해.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왜 나만 꼽주냐, 넌.”
둘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대화방 알림이 연달아 울렸다.
[아직 카페야?]
묻는 말에 그렇다고 답신을 보냈다.
[빨리 와]
[같이 먹게]
토끼가 손짓하는 애교스러운 이모티콘에 피식 터졌다. 빨리 가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나는 슬슬 인사하고 가 볼 생각으로 주변을 살폈다.
“야, 너 그거 사람 부족하다고 주말에 또 풀타임으로 해 주면 다시 골병 날걸?”
“안 그래도 그만둔다고 말해 놨어. 다음 달까지만 할 거야.”
화제가 전환되었는지 둘은 아르바이트 얘기를 하고 있었다. 관심 있는 화제다 보니 나도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 뭐 알바해?”
“아. 그냥, 고깃집 서빙이요.”
“……근데 그만두게?”
“네. 다음 달까지만 하고 좀 더 편한 곳 찾아보려구요.”
서빙 알바는 나도 경험이 있었다. 커플링값에 보태느라 해 봤는데 힘들기는 엄청 힘들었다. 그래도 택배 상하차 같은 것보다는 내 체력 선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거기, 혹시 지금 사람 구해?”
“네? 뭐, 구하긴 하는데…….”
주말에는 이미 하고 있는 카페 알바가 있었다. 오전부터 시작해서 1시면 끝이 났다. 그 뒤로는 쭉 비니까 서빙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일하면 힘들겠지, 걱정이 들면서도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무리해서라도 돈을 벌고 싶었다.
“형, 뭐 하시게요?”
잠자코 지켜보던 우민규가 물었다.
“응, 나 알바 더 늘리고 싶어서. 희운아, 거기 시급은 어떻게 돼?”
물어보자 어쩐지 내키지 않는 것처럼 머뭇거리던 이희운은 그래도 하나둘씩 정보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페이는 물론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환경인지, 경험자만이 알 수 있는 사항들까지 알려 주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위치를 보니 우리 오피스텔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괜찮은데, 엄청! 나한테 연락처 알려 줄 수 있어? 당장 연락해 보게.”
“……잠시만요. 아마 주말이면 바로 들어오실 수 있을 거에요. 지금 그 타임에 자꾸 사람이 빠져서.”
“진짜? 잘됐다.”
일일 술술 풀리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오늘도 틈틈이 구인 글들을 살펴봤는데 마땅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잠시 고정원이 싫어할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차분히 설득해 볼 생각이었다. 갑작스러운 지출을 메꾸기 위해서는 단기간이라도 빠듯하게 일할 필요가 있었다. 알바비가 나오면 휴대폰도 수리하고 고정원 맛있는 것도 사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이희운에게 받은 번호를 고이 저장했다.
* * *
서빙 아르바이트는 바로 채용될 수 있었다. 이희운이 전화로 말을 전해 준 덕분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정말로 고마웠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집으로 돌아와 고정원한테 새 아르바이트를 구하게 된 걸 설명하자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이렇게까지 정색할 줄은 몰랐어서 난감했다. 이번 주말부터 나가기로 결정된 상황이어서 더 그랬다.
“일 더 늘리고 싶었으면 나한테 먼저 말을 하지 그랬어.”
“……미안.”
움츠러들었다. 올 때만 하더라도 설득하고 허락받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표정 없는 얼굴을 보니 입이 안 떨어졌다.
“내가 싫어할까 봐 말 못 했어?”
“……응.”
거실의 정중앙. 고정원은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아 있었다. 끌어당겨지면서 서 있던 나는 고정원의 다리 사이로 들어섰다. 혼나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어 고개는 여전히 바닥을 향한 채였다.
손을 잡은 고정원이 나를 보며 말했다.
“왜?”
뭘 묻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의아해서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정원을 쳐다봤다.
“싫어할 거 뻔히 알면서 왜 혼자 정했어. 응?”
“…….”
생각보다 더 많이 화가 난 것 같았다. 말투가 상냥할수록 억눌린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요즘에 돈 나갈 일이…… 엄마가, 급하게 빌려 달라고 하셔서…….”
하기 싫었던 말을 주춤거리며 꺼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밝힐걸. 어쭙잖게 감춰 보려고 했다가 본전도 못 찾게 된 상황이었다. 우리 집 얘기도 그렇고 내가 하는 꼴도 그렇고. 구차한 느낌이 들어 자꾸만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집에서 돈 필요하다고 하셨어?”
“어, 많이는 아니고, 이사하느라 비용이 초과돼서 잠깐 빌리신다고…….”
행여나 자식 돈 착취하는 부모처럼 비춰질까 봐 덧붙였다. 들으면서도 고정원은 가만히 내 손을 매만지고 있었다. 침묵이 고이는 듯했다.
“서빙 아르바이트는…….”
입을 뗀 고정원이 특유의 명료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못 한다고 말씀드려. 어차피 나한테 돈 빌릴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뭐든 정 해야겠다면 내가 새로 알아봐 줄 테니까.”
“…….”
나는 얼굴이 굳어졌다.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말하라니. 그런 예의 없는 행동을 할 자신이 없었다. 이희운을 통해서 여러 절차 생략되고 채용된 상황이라 더 조심스럽기도 했다.
“근데 내가 갑자기 안 하겠다 하면, 중간에서 이희운 입장이 곤란해지지 않을까……?”
“어차피 그쪽도 한 달 뒤에 그만둔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까지 신경 쓸 일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고정원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오히려 그게 명령보다 훨씬 고압적인 느낌이었다. 나는 말라붙은 목구멍으로 까슬한 침을 삼켰다.
“…….”
몇 분이나 그 상태 그대로였다. 흐르는 시간은 제한된 것처럼 압박적으로 느껴졌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슬픈 기분이 느껴졌다. 슬며시 머리를 들이미는 반발심도 있었다. 이게 그렇게까지 이해해 줄 수 없는 건가. 순전히 나만 위하려는 선택이 아니라서 더 속이 상했다.
교착 상태는 조금도 나아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버티고 있던 나는 하는 수 없이 ‘알았어’ 대답하고는 떨어져나왔다.
빨리 말하는 게 그나마 예의일 것 같아 곧장 통화를 시도했다. 고정원에게서 등을 지고 창가 쪽으로 갔다.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닫혀 있던 창문을 열었다. 낮에 비해 서늘한 밤공기가 뺨에 닿았다. 심호흡을 크게 해 봤지만 중간에 무언가 가로막힌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소리샘으로 넘어가도록 통화는 연결되지 못했다. 엉거주춤 돌아보자 고정원은 바짝 다가와 있었다. 나는 종료된 화면을 변명처럼 내밀었다.
“바쁘신가 전화를 안 받으셔서, 이따가 다시…….”
말하는 도중 고정원이 내 휴대폰을 가져갔다. 부드러운 손놀림이었다.
“미안.”
생각지도 못한 사과와 함께, 뻗어 온 팔이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어?”
“일, 하고 싶으면 해도 돼.”
절대 허락받지 못할 것 같던 상황이 급변한 게 믿기지 않았다.
“……갑자기 왜……?”
혼란해 하며 묻자 고정원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네 뜻 존중해 주고 싶어서.”
“…….”
존중이라는 말에 어깨가 스르르 풀어졌다. 나는 안심되는 살 냄새를 맡으며 고정원을 끌어안았다. 괜스레 눈시울이 뜨끈해져서 애먼 어금니를 힘껏 맞물었다.
“이희운한테…….”
“응?”
조금 떨어진 나는 고정원을 올려다보았다. 이희운의 이름을 꺼낸 고정원은 어쩐 일인지 말을 끝맺지 않았다.
“아니야. 아무것도.”
지분거리던 손길이 어느새 입술로 내려와 있었다. 고정원은 만지작거리면서도 내 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타이밍을 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역시나 점점 가까워졌다. 코 아래에서부터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체온 높은 손바닥이 목덜미부터 턱을 넉넉히 감쌌다. 피부끼리 밀착하는 감촉이 어찌나 진득한지 잔털이 곤두섰다. 시야로는 빨아당겨지며 쭉 늘어나는 아랫입술이 보였다. 늘어났던 입술은 춥, 소리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왔다.
“섹스할까.”
덥고 눅진한 숨결이 끼쳤다. 어째 목이 멨다. 시선도 그렇고 대놓고 묻는 말이 외설스러웠다.
“그 내일, 하면 안 될까…….”
안쪽이 창피할 만큼 지끈거리고 있었다. 불이 확 당겨진 느낌이었지만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내일은 공강인 만큼 여유가 좀 있어서 조심스럽게 미루기를 제안했다. 손으로는 어르듯이 단단한 팔뚝을 주물러 주었다.
“응.”
금방 수긍한 고정원은 볼에 입술을 찍었다. 아까 같은 성적인 느낌이 아닌, 가볍고 장난스러운 입맞춤이었다.
“그만 좀 깨물어.”
뽀뽀로 시작했던 게 갈수록 짓궂어져 웃음을 터뜨렸다. 고정원은 내가 피하는 대로 쫓아오며 얼굴을 깨물려고 들었다.
거실에서 도망다니다가 소파 위로 넘어졌다. 소파에서도 발버둥이 이어졌다. 교묘하게 힘을 조절하며 내가 반항할 수 있도록 틈을 주는 함정에 걸려들어 진이 빠지도록 장난을 치고 말았다. 온몸에 힘이 사라지고 나서야 자포자기하듯 반항을 멈췄다. 항상 있는 대로 흥분을 쏟아낸 뒤에 못 이긴다는 걸 깨닫는 게 우스웠다.
바람빠진 풍선처럼 늘어져 있자 뒤에서부터 옭아매듯 팔다리가 파고들었다.
“인휘야.”
낮은 음역대의 목소리가 간지러워 움츠렸다. 또 장난치려는 줄 알고 밀어내려는 내게 고정원이 말했다.
“나 요즘 엄청 질투하고 있어.”
예상치도 못한 발언에 놀라서 몸을 돌렸다.
“뭐?”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갔다. 근데 아무래도 진담인 것 같았다. 장난칠 때와 다르게 쳐다보는 눈빛이 차분하고 직설적이었다. 내 기분 탓이라면 좋겠지만 아슬아슬한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구를?”
“그냥. 너랑 친한 사람들.”
“내가 너 말고 친한 사람이 있다고?”
정말 모르겠어서 물었다. ‘글쎄……’ 하고 뜸을 들이던 고정원이 한마디를 흘렸다.
“나는 몇 아는데.”
손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감쌌다. 나는 당장 의문에 빠졌다. 고정원이 질투라는 말을 하는 거 보면 여자일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친하게 지내는 여자가 없었다.
“혹시 신연지 말하는 거야?”
며칠 전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하고 얘기를 나눴다. 혹시 그걸 보기라도 한 걸까.
“……걔랑 연락해?”
고정원의 눈이 의외라는 듯 가느스름해졌다.
“아니, 전혀? 그냥 어쩌다 마주쳐서 인사만 한 건데…….”
찔릴 것도 없는데 변명하는 것처럼 말이 나갔다.
“연락할 일 없는 거 알잖아, 너도. 친한 여자 없어. 진짜, 맹세코.”
오해했다면 풀어 줘야겠다고 생각해서 강조했다.
“친한 남자는 있다는 것처럼 들리네.”
“남자? 남자야 뭐…….”
대답하다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나랑 친한 사람들이 남자 말하는 거였어?”
고정원은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더욱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를 질투한다고?”
내가 남자한테 인기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내 주변 사람들이 게이처럼 보이기라도 하는 건가. 어느 쪽이든 말이 안 되고 비상식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고정원이 이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게 웃겨서 그만 웃음이 터졌다.
“너 은근 엉뚱하다.”
질투는 나만 많은 줄 알았더니. 남자까지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게 이렇게 뜻밖일 수가 없었다.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남자답게 튀어나온 눈썹 뼈를 매만지며, 자꾸만 벌어지려는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갑자기 고정원이 귀여워 보였다. 싫지 않은 의외성 때문에 자꾸만 실실 웃음이 났다.
“…….”
너무 웃었나.
“……왜, 그렇게 봐.”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어쩐지 묘했다. 화난 건 아닌데 화난 것 같은, 설명하려고 들면 모순이 생기는 그런 애매한 표정이었다.
“그냥.”
“그냥 아닌 거 같은데. 내가 웃어서 기분 나쁜 거잖아 너.”
고정원은 뱉어내듯 조용하게 웃었다. 어이가 없을 때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종류의 웃음처럼 보였다.
“어떡해야 될지 모르겠다.”
작게 중얼거린 고정원이 내게 얼굴을 파묻었다.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안으로 파고들며 냄새를 맡는 듯한 행동 때문에 허리가 뻣뻣해졌다. 오늘은 날도 따뜻하고, 뛰어다니다 보니 땀을 좀 흘렸었다. 좋지 않은 냄새가 날 게 뻔해서 나는 고정원의 어깨를 잡았다.
“야…….”
고정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티셔츠 안쪽까지 더운 숨결이 흘러들었다. 밀어 내려고 손에 힘을 줘도 소용없었다. 도리어 숙여 가며 체중을 이용해 무게를 실었다. 단단한 콧대가 겨드랑이 안쪽을 파고들어 와 퍼뜩 허리가 떨렸다.
“콧김 닿아.”
쌀쌀맞게 말하자 고정원은 나직하게 웃었다. 그때 닿는 숨결이 또 야릇했다. 한참 밀어 내고 경계를 쉬지 않은 끝에 겨우 엉켜들던 사지가 떨어져 나갔다.
“씻으러 갈게.”
“……응.”
아래가 불룩해져 있는 게 보였다. 그렇게 땀내를 맡아 놓고 비위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봐 놓고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
“…….”
고정원이 욕실로 들어가고, 혼자 남겨지고부터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까, 대화 중에 봤던 고정원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서였다.
곱씹어 본다고 뭘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생각해 봤자 머리만 아프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알바도 할 수 있게 됐고, 싸우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웃음이 났던 건 당연하게도 고정원 때문이었다. 질투라는 단어를 되새기자 발바닥이 간질간질했다.
* * *
부모님이 포장 이사를 마치신 다음 날이었다. 공강이라 쉬고 있다가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도와드리러 오게 됐다. 집은 전체적으로 정리가 돼 있었지만 자잘한 손볼 거리가 많았다. 나는 필요한 곳마다 드릴로 못을 박고, 방마다 와트 수를 높인 등으로 교체 작업을 진행했다.
“인휘야, 화장실 등은 여기 있다?”
“아, 응.”
한창 전등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엄마는 무언가 할 말이 있으신 듯했다.
“네 누나는 어제 다녀갔어.”
“그래?”
“근데 걔는 어떡하면 좋니. 밥도 안 챙겨 먹고 다녀서 큰일났어 하여간. 반찬 좀 챙겨 가라니까 사 먹는다고 가져가지도 않고. 왜 자꾸 배달 음식 같은 거나 시키는지 몰라. 혼자 사는 여자애가 겁도 없이. 넌 네가 밑반찬 같은 것도 잘만 만들어서 먹잖아. 둘이 바뀌면 좀 좋아?”
“……응.”
흉을 보는 것 같지만서도 들어 보면 애정 어린 걱정이었다.
“밥 다 돼 가니까 화장실까지만 하고 와.”
“네.”
일을 끝내고 나서 거실로 나오자 식탁에는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한쪽에 앉아 계신 아버지가 보였다.
“잘 먹겠습니다.”
엄마는 속이 안 좋다고 들어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단둘이서 마주보고 앉았다. 거실의 TV에서는 한창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식사는 내내 조용했다. 딱딱한 뉴스를 배경으로 식기 부딪치는 소리만 울리는 게 적막과도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살가움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공부는 잘되고?”
“아…… 네.”
대답을 하고 나자 또 대화가 끊겼다. 나는 어색하게 밥알을 씹었다.
불편한 와중에도 밥맛은 좋았다. 오랜만에 먹는 엄마의 장조림이 맛있었다. 맛있는 걸 먹으니 저절로 고정원 생각이 나서 혼자 아쉬워졌다. 고정원도 이거 맛보면 좋을 텐데. 싸달라고 해도 되려나 고민하고 있는데 이쪽을 본 아버지가 물으셨다.
“생각 없이 술이나 마시고 돌아다니는 건 아니지?”
작년이었다면 찔렸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고정원을 만나고부터는 술자리 모임에 거의 나가지도 못했고, 만취할 때까지 마실 일이 없었다.
“네, 저 안 그래요.”
떳떳하게 대답했다. 좋은 사람이랑 만나니까 좋은 영향을 받는 것 같아서 내심 뿌듯했다.
기분 좋게 국물을 떠서 입안에 넣은 직후였다.
“미친 것들.”
쯧, 혀 차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동성애하는 놈들 다 정신병자들이지 저거. 병원에 처넣어야 돼.”
맥락 없이 쏟아진 비난에 놀라 사레가 들렸다. 나는 입가를 닦으며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혐오감 짙은 시선이 향한 곳은 TV였다. 돌아보자 때마침 뉴스에서는 동성 결혼 관련 이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저거 보고 하신 말이었구나.
안도감을 느끼자마자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기분이 가라앉았다.
“니 주변엔 저런 정신 빠진 놈들 없지?”
“……네.”
한 번 사레가 들렸던 식도는 거북스럽게 따끔거렸다. 나는 수그린 채 식사에 전념했다. 빨리 먹으려고 두세 숟갈씩 한꺼번에 입 안에 넣었다. 꾸역꾸역 먹어서인지 잘 넘어가지도 않아서 곤욕이었다.
식사 이후 잡다한 마무리까지 마저 끝내 놓고 부모님 댁을 나서던 차였다. 현관에서 엄마가 반찬통을 건네주셨다.
“몇 가지 쌌어. 너 이제 친구랑 같이 산다며. 나눠 먹어.”
“……감사해요.”
고정원한테도 맛보여 주고 싶었던 장조림이 보였다.
“그래도 아들이 있어서 엄마가 든든하네.”
엄마가 내 어깨를 쓸어 주시며 말했다.
“무슨…….”
처음 들어보는 말에 똑바로 눈을 들지도 못했다.
“빌린 돈은 엄마가 다음 달에 바로 갚아 줄게.”
“……아, 됐어요 안 갚아도. 여유 있어서 빌려준 거야.”
말이 멋대로 튀어 나갔다. 아주 안 받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순간적으로 맞춰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공수표처럼 저지르고 말았다. 든든하다는 말을 들은 직후라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빌렸는데 줘야지 무슨 소리야.”
“…….”
“아무튼 미안하다. 네 아빠가 능력이 없어. 보태질 못할망정 자꾸 까먹으니 나도 속이 터지지.”
이사 때문인지 엄마의 얼굴에는 피로가 누적돼 있었다.
“진짜 그 돈 안 갚아도 돼. 나 지금 친구랑 같이 사는데, 그 친구가 여유가 있어서 집세랑 생활비 다 부담해 줘서…… 돈 들어갈 일 거의 없어.”
“네 친구는 뭐 금수저 그런 거야? 왜 그렇게 돈이 많대?”
“어, 뭐 아무튼, 부담 갖지 마요. 나 안 쪼들리고 사니까.”
부담을 덜어 드릴 만한 말들만 늘어놓고 돌아섰다.
버스를 타러 가면서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엄마 걱정이라기보다 부끄럽게도 돈 때문이었다. 빌려드린 돈을 안 갚아도 된다고 쿨하게 말했지만 실제 사정은 그게 아니었다.
깨져서 엉망인 휴대폰이 눈에 들어오자 힘이 쭉 빠졌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할 목록이 몇 가지 더 늘게 되었다. 대책 없는 내가 한심하고 고정원한테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가 도착하고 좌석에 앉자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인휘야, 오고 있어?
“응, 지금 가고 있어.”
―어쩌지. 난 잠시 집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집이란 말을 듣자 오전의 일이 생각났다. 고정원한테 전화가 왔었다. 집에서 걸려온 것 같았는데 무슨 일인지 대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내용을 알고 싶었지만 고정원이 별거 아니라고 하기에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넘어갔었다.
“어어, 알았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그냥 잠깐 얼굴 비추러 다녀오는 거야. 부모님은 잘 도와드렸어?
“아, 응. 집에서 반찬도 얻어 왔어.”
나는 손에 든 반찬통을 한 번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나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아쉽다.
“별로 할 것도 없었는데 뭐.”
고정원이 같이 온다고 하는 걸 한사코 말렸다. 왠지 고정원을 집에 데려가면 부모님이 놀라실 것 같고, 무엇보다 내가 자연스럽게 행동할 자신이 없었다. 혹시 누나랑 마주치게 될까 봐 지레 겁먹은 것도 없잖아 있었다.
―빨리 다녀올 테니까 집에서 쉬고 있어.
“응, 알았어.”
……빨리 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주위에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
고정원은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귀 기울이고 있다는 건 알았다.
“먼저 끊어.”
언제까지고 통화를 붙잡고 있게 될 것만 같아서 먼저 말했다.
―좀만 더 목소리 들려주면 안 돼?
짧게 웃음이 터졌다. 입가가 벌어지는 게 의식돼서 손으로 가렸다.
“버스라서…… 크게 못 말해.”
―응. 상관없어.
고정원의 목소리도 덩달아 은근해졌다.
소곤소곤 주고받는 통화는 결국 고정원이 부모님 댁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집에 도착한 건 한 시간쯤 뒤였다. 씻고 나오자 진이 빠졌다. 늘어지고 싶었지만 할 일이 눈에 보여서 그럴 순 없었다. 요새 바쁘다고 집안일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짬이 날 때 해 두어야 했다.
바닥 청소를 끝내고 설거지를 하려고 보니 할 게 없었다. 고정원이 손 빠르게 미리 해 놓은 모양이었다. 대신 빨래 널어 놓은 게 있어서 전부 걷어 왔다.
“에취!”
재채기가 나왔다. 나는 찬물로 씻고 나와 속옷만 입고 있었다. 환기 때문에 창문도 열어 놓아 바람이 들어오는 상태였다. 거실 바닥이 차갑게 느껴져 세탁물들을 침대로 가져갔다.
“이건 고정원 거, 이건 내 거, 이것도 내거, 이건 딱 봐도 고정원 거…….”
포근한 침대 위에 자리를 잡고 분리부터 했다. 대부분이 속옷이었다.
기계적으로 접다가 하품이 쏟아졌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한 탓에 정신을 놓으면 멍했다. 이제 시험 기간 되면 더 피곤할 텐데 걱정이었다. 내일부터는 서빙 알바까지 해야 했다. 빡센 일정을 반추하면서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고개도 시드는 것처럼 꺾이고 있었다.
머리가 기울자 상반신이 잇따라 침대로 무너졌다.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접힌 속옷들이 각을 잃고 흐트러졌다. 시트에서는 고정원이 쓰는 스킨 향과 빨래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향이 풍겼다. 좋은 냄새가 몸을 편안하게 이완시키는 것 같았다.
잠깐 눈 좀 붙였다가 할까. 안일한 생각 끝에 나는 눈을 감았다.
귀를 파고드는 건 두 개의 낮은 음성이었다. 한 목소리는 익숙했고, 다른 목소리는 다소 낯설었다. 들릴 듯 말 듯 오가는 대화에 신경이 기울면서 잠기운이 옅어져 갔다.
“……지키라는 부분은…….”
아마 거실에서 나는 소리인 것 같았다. 대화의 마디마디만 들려왔다.
“아버지가……. ……제가 말씀드리는 건 지금…….”
‘아버지’라는 호칭이 귀에 포착된 순간 확 눈이 뜨였다.
“…….”
완전히 잠이 달아났다. 의식이 맑아지며 갑자기 상황 파악이 됐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고정원의 아버지께서 와 계신 듯했다. 나는 눈만 뜬 채로 굳어져서 귀를 기울였다.
나가서 인사드려야 하나. 머릿속이 다급해지는데 보다 커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버지!”
낮게 윽박지른 쪽은 고정원이었다.
“같이 사는 친구 자고 있어요.”
바로 문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까워진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고정원의 아버지께서 이 방에 들어오려 하신다는 걸 알았다. 고정원이 막아 주려 하고 있다는 것도.
“친군데 뭐가 문제야.”
어떡하지. 심장이 뛰었다.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위압감이 몇 배는 더했다. 고정원이랑 언뜻 비슷한 느낌도 들고 생각보다 젊게 느껴졌다.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목소리만으로 존재감이 대단했다.
“여자 친구면 지금 인사시켜.”
“둘러보셨으면 아시잖아요. 이 집에 여자 없는 거.”
정중한 억양인데도 듣기에 아슬아슬했다. 들어오시게 해도 되는데 왜 저러나 싶었다. 나는 이러다가 고정원이 아버지랑 싸우기라도 할까 봐 초조했다.
침묵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조용한 대립이 조마조마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냥 일어나서 인사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난데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놀란 나는 깼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죽였다.
“…….”
그러고 보니 나는 드로즈만 입고 있었다. 이불이나 뭘 덮지도 않았다. 거기에 더해 엎드려서 한쪽 다리를 위로 접은 흉한 몰골이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과 시선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낯뜨거움으로 발끝에 힘이 들어가려던 찰나 이불이 덮였다.
“계속 보실 건가 봐요.”
“……. 이 친구는, 같은 과 동기? 이름은?”
무슨 생각인지 고정원은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한 웃음만 터뜨렸다. 그게 꼭 비웃음처럼 느껴지는 바람에 내가 다 눈치 보였다.
“이럴 때 보면 아버지도 참 별나세요.”
저렇게 말하면 너무 버릇없지 않나. 불안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 말리고 싶었다. 침묵이 견고해지며 분위기가 위태로워질 때쯤. 수습할 생각이 든 건지 고정원이 말을 이었다.
“나가서 말씀하세요. 대답해 드릴 테니까.”
호통이라도 치시면 어쩌나 간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고정원네 아버지께서는 말없이 고정원을 따라 나가셨다.
탁.
문소리가 나자 찔끔 한쪽 눈만 떴다. 아무도 없는 게 확인되면서 후으, 참던 숨이 터져 나갔다. 긴장으로 굳어진 자세는 그대로 풀지 않고 있었다.
“…….”
거실에서부터 대화가 이어지는 게 들렸다. 잘은 안 들려도 특정 단어들은 귓가에 박혔다. 여자 친구. 남자 둘이. 오해할 일. 돈. 오피스텔. 발음이 유난히 선명하게 들릴 때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내려앉았다.
고정원은 무어라 차분하게 대답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상황은 모르겠지만 어떤 대답을 마지막으로 현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말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나가셨음을 알았다. 얼어 있던 나는 우물쭈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
이불을 걷자마자 탄식이 터졌다. 이 꼴을 보였다니. 침대 위가 말도 못 하게 너저분했다. 접어 뒀던 세탁물을 자면서 건드렸는지 죄다 엉망이었다. 고정원 속옷이랑 내 속옷이랑 뒤섞여서 침대 위를 나뒹굴었다. 심지어 내 다리 위에도 팬티 하나가 걸쳐져 있었다.
신경질 섞인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보니까 고정원으로부터의 전화와 메시지가 몇 통이나 쌓여 있었다. 지금 아버지와 같이 가게 됐으니 신경 쓰지 말고 방에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얼굴을 마구 문지르고 일어났다. 티셔츠랑 바지를 입고 조심조심 거실로 나가자 창가에 선 고정원이 보였다. 생각에 골몰하느라 내가 나온 줄도 모르는 듯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등을 끌어안았다.
“……소리 때문에 깼구나. 미안.”
“사실 아까 깼는데, 일어나기 좀 그래서 인사 못 드려 버렸어. 괜찮을까.”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하자 돌아본 고정원이 마주 안았다.
“신경 쓸 거 없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자다가 많이 놀랐겠네.”
“아니야, 나야말로 자느라고 너 연락 온 거 못 봐서…….”
아직까지도 심장이 진정되지 못한 것처럼 뛰고 있었다. 나는 좋지 않은 예감을 애써 무시하며 물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신 거야? 혹시, 우리 여기서 사는 것 때문에 혼내신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전혀. 일 때문에, 요새 좀 예민하셔.”
부드러운 표정인데도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앞으로는 안 오실 거니까 걱정 마.”
“오시지 말라고 하게? 그러지 마, 섭섭해하셔. 난 진짜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경비실에 부탁드려서 출입 제한 하려고.
속삭이며 고정원은 내 갈빗대를 더듬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어서 맞장구를 치지 못했다.
더듬는 손길이 간지러워 피했다. 고정원은 나를 들어 올렸다. 반공중에 뜬 나는 꽉 매달린 채로 고정원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우리는 한 몸이 되어 침대 방으로 옮겨 갔다. 고정원이 픽, 소리를 내며 웃기에 왜 그러나 했더니 침대에 늘어진 속옷과 그밖에 세탁물들 때문이었다. 나는 눈가를 문지르며 해명했다.
“……하다가 너무 졸려서.”
“예쁘게 빨래 개고 있었네.”
고정원은 잘 접힌 팬티 하나를 들고 말했다.
“…….”
예쁘게 갠 건 아닌데. 뭔가 이런 걸로 칭찬받는 게 민망해서 입을 다물었다. 어질러진 빨래를 함께 개키고 침대가 깨끗해지자 우리는 마주 누웠다.
“충혈이 심해. 내일부터 일 어떻게 하려고.”
고정원이 내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막 일어나서 빨개진 거야.”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꾹 눌렀다. 만지지 못하도록 말린 고정원은 뜬금없이 말했다.
“나도 아르바이트 할까.”
“네가? 어떤 거?”
“거기서 같이 서빙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고정원이 서빙 알바라니. 잠깐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 혼잡한 장면들이 그려졌다.
“……손님 너무 많아질 거 같아서 싫은데.”
솔직하게 말했더니 고정원이 웃었다. 내 이마에 뽀뽀도 했다.
“해 보고 힘들면 당장 그만둬.”
“알았어.”
“끝나면 데리러 갈게.”
“……집에서 10분 거리인데 뭘.”
“10분이라도 일찍 보게.”
놀리거나 의도적으로 닭살을 떠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10분이라도 더 일찍 보고 싶은 것뿐이라는 걸 알았다.
“…….”
나는 가만히 손을 고정원의 가슴팍에 올렸다. 그리고 천천한 속도로 복부 쪽으로 쓸어내렸다. 미끄러진 손바닥이 성기 위로 안착했다. 하지만 이내 뭘 하기도 전에 저지되었다.
“토끼 눈을 하고서 뭘 하겠다고.”
내 손을 붙잡아 내린 고정원이 말했다.
“그냥 푹 쉬어. 아프면 안 되니까.”
“…….”
나는 미안해져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럼 뽀뽀는 더 해도 돼?”
묻는 말에 고정원이 먼저 입을 맞췄다. 우리는 서로의 연한 살을 쪼아 댔다. 더 깊게 하면 다른 게 하고 싶어지니까 얕고 가볍게, 말랑말랑한 애정을 주고받았다.
원 없이 하고 나서는 팔베개를 했다. 마주 보고 누워만 있었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그저 얼굴을 마주보는 것만으로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벌써 후회되네.”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고정원이 중얼거렸다. 손으로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뭐?”
멍하게 있다가 되물었다.
“아니.”
말한 고정원은 나를 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토닥토닥. 유난히 큰 손으로 토닥거림을 받자 속에서부터 온기가 차오르는 듯했다.
‘동성애 하는 놈들 다 정신병자들이지 저거.’
불현듯 오늘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부정적인 생각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고정원이 왜 그러냐고 물어서 그냥, 하고 얼버무렸다.
“……걱정하지 마.”
나는 고정원을 안고서 말했다. 뜬금없이 한 말이었는데, 내 불안을 눈치챈 것처럼 고정원도 똑같이 말해 주었다.
“응. 걱정하지 마.”
나는 종교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부터 속으로 기도를 되풀이했다.
고정원이 상처받는 일 없기를. 우리가 계속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기를. 누구든 들어줬으면 싶은 간절한 부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