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느 겨울: 외출
오랜만에 차를 끌고 광화문까지 나왔다. 잠깐 서점에 들렀고, 조인휘가 좋아하는 칼국숫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조인휘는 굉장히 잘 먹었다. 평소에도 잘 먹는 편이긴 하지만 수육과 함께 국수 두 그릇을 비우는 걸 보고 내심 놀랐다. 안쓰러운 마음에 더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묻자 배가 터질 것 같다며 사양했다. 대신 좀 걷고 싶다기에 그대로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평일 낮의 광화문은 적당한 인파로 활기찬 분위기였다. 날이 화창해 길목 곳곳이 환했다. 조인휘는 외출 자체에 신이 나는지 특별한 일 없이도 내내 들떠 보였다. 풍경 사진을 찍고, 사소한 것에 감탄했다. 꼭 몇 년 만에 바깥 세상에 나온 사람처럼.
“그동안 외출을 너무 안 했나 봐.”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있던 조인휘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뭐라고 했어?”
“아니, 그냥. 우리 데이트하는 거 오랜만인 것 같아서.”
미국에 다녀오느라 떨어져 있던 며칠을 제외하면 최근에는 거의 칩거에 가까웠다. 외출이라고 해 봤자 가끔 근처로 생필품 및 식자재를 사러 가거나 외식을 하러 가는 게 전부였다. 어디에 있든 금방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놀고 집에서 데이트하고. 집 안 곳곳을 누비며 서로의 몸에만 열중하는 폐쇄적이고 방탕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최소한의 사회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의무감과 강제성마저 없었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상태가 심각했으리란 걸 알았다. 때때로 그 최소한의 것들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버리고 싶어졌다.
“솔직히……”
망설임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조인휘가 말을 이었다.
“우리 이사하고 나서 좀 심하게 집에만 있긴 했던 거 같아.”
과격한 섹스 후 지친 나머지 나가자고 애원했던 게 이틀 전이었다. 집에 있지 말자고 몇 번이나 강조했던 조인휘는 다음 날 열이 펄펄 끓었다. 때문에 하루가 지난 오늘에서야 나올 수 있었다.
“미안.”
“어?”
이마를 만졌다. 앞머리를 들추고 손바닥을 붙여 열감이 느껴지는지 확인했다.
“나 다 나았다니까.”
조인휘가 내 손을 끌어 내렸다. 달라붙어 손가락을 얽자 불분명한 웅얼거림과 함께 손을 빼냈다.
밖에서는 이러지 말자는 뜻이겠지.
“……요새 너무 갑갑했지. 나 때문에 아프고.”
“아니? 무슨……!”
정색을 한 목소리가 속사포처럼 터졌다.
“나 아팠던 거는 말했잖아, 너 미국 갔을 때부터 계속 감기 기운 있었다고. 그리고 하나도 안 갑갑했는데? 집이 그렇게 넓은데 어떻게 갑갑하냐.”
“…….”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나란히 걷고 있는 조인휘의 팔 근처에서 머뭇거렸다. 행동을 의식한 순간 팔을 내렸다. 대로변에서 끌어안을 만큼 사리 분간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이제 자주 나오자. 전시회도 보러 다니고, 여기저기 놀러도 가고.”
조인휘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근육통이 남은 듯한 걸음걸이를 보며 나는 낮춘 목소리로 물었다.
“걷는 건 이제 안 힘들어?”
“어어,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걷다 힘들면 업어 줄게.”
그 말에는 멈칫하고 묘한 표정을 보였다.
“됐으니까 그냥 가던 길 가세요, 형.”
반대편으로 고개를 휙 떨군 조인휘가 내 어깨를 밀어 냈다.
“……형?”
신선한 어감을 소리 내어 되풀이해 봤다. 장난이긴 해도 조인휘한테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챙겨 주는 게 연장자 같아서 한 소리인가.
“아.”
외마디를 뱉어 낸 조인휘가 분주히 말을 쏟아 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먼저 태어났으니까 내가 형이지? 와, 그러네. 진짜 내가 네 달이나 형이네. 너한테 형 소리 한 번…….”
“형.”
“…….”
“인휘 형.”
횡설수설하는 장단에 맞춰 주자 조인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존댓말도 써 드릴까요.”
“……아니, 됐어.”
네가 하니까 이상해.
금세 피하듯 고개를 숙인 조인휘가 웅얼웅얼했다.
장난삼아 호칭을 바꾸고 존댓말 좀 쓴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눈도 못 맞추고 부끄러워하는지 모르겠어서 웃음이 났다. 과민한 반응을 부추기듯 지그시 밀착했다.
“형 소리가 좋은 거예요? 아니면 존댓말?”
“누가 좋아했다고.”
반응이 재밌어서 얼마간 더 놀렸다. ‘오늘 하루 종일 이렇게 해 볼까요’ 하고 의미가 뻔한 희롱을 속삭이자 조인휘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얼굴이 새빨갰다.
둘이서만 재밌는 유치한 장난을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한 바퀴를 돌고 있었다. 별다른 계획이 없던 차에 마침 카페가 보이기에 커피를 마시고 가기로 했다.
“톨 사이즈 아메리카노 하나랑……. 형은 뭐 드실래요?”
카운터 앞에서 한 번 더 들먹이자 조인휘가 주먹으로 복부를 때렸다. 나는 맞닿은 주먹을 붙들고 놔주지 않는 장난을 쳤다.
“얼른 골라.”
뒤로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시선을 의식한 듯 조인휘는 당황한 기색으로 외쳤다.
“전 카라멜 마키아또요! 그, 크고 뜨거운 걸로.”
“앞에 보시면 사이즈 안내되어 있는데 보시고 골라 주시겠어요?”
“아아아, 맞다. 그럼 그, 그란데로요.”
결제를 위해 카드를 내밀며 무심코 웃음이 터졌다.
“왜 웃어.”
“……아니.”
크고 뜨거운 거. 성적인 뉘앙스가 다분했다. 방금 한 실수를 들먹이며 농담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조인휘는 민망할 때의 습관대로 힘준 목을 한 번 으쓱 내밀었다. 그 별 것 아닌 행동에 꽂혀서 무심코 손을 가져다 댔다. 목뒤와 이어진 어깨를 만지작거리자 조인휘는 곁을 벗어나 도망가 버렸다.
“오늘 왜 이렇게 장난이 심하냐, 너.”
계산을 끝내고 오기 무섭게 핀잔이 날아들었다. 섭섭하다는 듯 토로하는 입술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알았어. 이제 안 할게.”
속삭이며 달랬다.
“진짜 안 할게, 응?”
불쌍한 척하자 조인휘는 금방 김빠지는 웃음을 흘렸다. 다소 애교스럽거나 가엾게 굴면 곧잘 풀어지는 까닭에 가끔씩 눈에 빤히 보이는 연기를 했다. 아무래도 내가 자기한테 아양을 떠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늘 그렇듯 구석으로 옮겨 갔다. 텀블러나 머그 같은 상품이 진열된 한쪽에서 쓸데없는 대화를 앞세운 스킨십을 했다.
“이 컵 괜찮다. 뚜껑도 있고.”
“그러네.”
머그를 들고 있는 조인휘의 손에 덩달아 손을 겹치며 동의했다. 조인휘는 잔을 만졌고 나는 조인휘의 손을 만졌다.
“이게 제일 좋아 보여.”
고른 잔은 조인휘가 좋아할 만한 디자인이었다. 용량이 크고, 심플한. 구경 끝에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덮개 있는 머그를 세트로 구매하기로 했다. 며칠 전 식탁을 뒤흔든 탓에 커플 머그의 손잡이를 깨뜨렸으니 타이밍이 좋았다.
음료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자 대부분 자리가 차 있었다. 평소 선호하는 외진 자리들은 모두 선점된 상태였다.
둘러보다 트레이를 한 곳에 내려놓았다. 창가의 1인석들 중에서 기둥을 옆에 두어 한 면이 가려지는 곳이었다. 공간이 넉넉한 2인석도 서너 군데 비어 있었지만 비좁고 나란한 편이 좋았다.
“여기 앉아.”
조인휘를 안으로 앉혔다. 들고 있는 가방은 벗겨서 내 앞으로 두었다. 제법 다양한 가방 속 내용물은 서점을 들르면서 생겨난 것들이었다. 조인휘가 고른 마블 코믹스의 원서 몇 권과 경제 관련 도서 한 권, 둘이서 고른 만년필, 그리고 내가 조인휘에게 강제로 선물한 분홍색 수면 양말 따위였다.
“좋다.”
“뭐가 그렇게 좋아.”
앉아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조인휘가 들뜬 얼굴을 했다.
“그냥. 날씨도 좋고.”
커피를 들이켠 윗입술에는 크림이 조금 묻어났다. 그걸 손가락으로 문질러 주었다. 그제야 무언가 묻어 있었다는 걸 깨달은 조인휘는 혀끝으로 입술을 훑었다.
“…….”
가만 보면 은근히 잘 묻히는 편이었다. 특히 집에서 무언가를 보면서 먹을 때 얼굴 곳곳에 묻혔다. 지저분한 습관이 분명한데 더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한창 손이 많이 갈 시기의 애 같았다.
문득 며칠 전 생각이 났다.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조인휘는 정말로 애처럼 보였었다. 자꾸 입가에 크림이 묻어났다.
옆에서 지켜보다 무심결에 그걸 핥았다. 아이스크림은 생각보다 맛있었던 것 같다. 평소 그다지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 먹고 싶어질 만큼. 그래서 나눠 주겠다는 말을 거절하고 입술에 묻은 것만 뒤처리하듯 빨았다. 나중에는 아예 입 안에 든 걸 가져가기도 했다.
수작질 같은 행동은 아이스크림 한 통이 바닥날 때까지 이어졌다. 시시덕거리면서, 누가 봐도 같잖을 그런 짓거리를 했었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네.”
흘리듯 말하자 조인휘가 달가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웬일이야?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면서.”
곧장 지갑을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여기 파니까 가서 사 올게. 바닐라? 초코?”
의욕적으로 묻는 조인휘를 붙들어 앉혔다.
“그냥, 이따 집에 들어가면서 사 가면 돼.”
그리고 은근한 시선과 함께 단서를 흘렸다.
“저번에 같이 먹던 거. 맛있었어.”
달싹거리던 입술이 ‘아……’ 하고 힘없이 벌어졌다. 정확히 뭘 어떻게 먹고 싶다는 건지 그제야 알아차린 듯했다. 그 변화하는 반응에 웃음이 났다.
“왜 자꾸 고개를 돌려, 인휘야.”
불긋해진 귓불을 살짝 건드렸다. 조인휘가 인위적인 한숨을 쉬었고, 그것 때문에 또 웃음이 났다.
창가 자리라 강한 햇발이 쏟아졌다. 엷고 촘촘한 속눈썹의 뿌리까지 빛에 잠겨 있었다. 나는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기분 좋게 억눌렀다.
머리카락, 어깨, 팔꿈치, 손등. 쓰다듬는 스킨십이 몇 차례 반복되자 모른 척하던 조인휘는 끝내 안면 근육을 무너뜨렸다. 아무리 퉁명스럽게 굴려고 노력해 봤자 얼굴 곳곳에서 좋다는 감정이 숨겨지질 않았다. 그게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부분이었다.
“……어, 맞다!”
외친 조인휘가 휴대폰을 꺼냈다.
“왜?”
“아침에 온 문자, 아직도 답장 못 했는데.”
화면으로 촘촘한 글자 나열이 떠올랐다.
“아버지셔?”
“응. 갑자기 왜 이렇게 길게 보내셨는지 모르겠어. 아, 지금 보니까 집에 자주 오라고 두 번이나 써 있네. 저번 설 연휴 때 너무 얼굴만 비추고 가 버려서 섭섭하셨나.”
연휴에도 조인휘와 나는 반나절 정도만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 다음에 한번 같이 들를까? 인휘도 우리 집 오고.”
“……응?”
“그냥 부담 없이. 내 방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해했었잖아.”
조인휘는 섣불리 대답을 못 하고 고심하는가 싶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그럼 그럴까.”
대답하는 입에 사탕을 하나 넣어 줬다. 주머니에는 항상 조인휘를 위해 상비하는 간식이 몇 개쯤 들어 있었다.
“그런데 답장 빨리 보내 드려야 하지 않아?”
“아…… 죽겠네. 나 이런 거 진짜 못하는데.”
“왜, 편지 잘 쓰면서.”
“아, 또!”
편지 소리에 조인휘가 귀를 틀어막았다. 그럴 만도 했다. 나는 벌써 여러 차례 지난 크리스마스에 받았던 편지에 대해 들먹이고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고, 진심으로 좋아서 툭하면 생각이 났던 탓이었다.
성탄절 당일 밤. 조인휘가 선물과 함께 손 편지를 주었다. 나중에 혼자 보라며 호들갑스럽게 구는 걸 무시하고 바로 눈앞에서 읽었다. 구구절절한 편지 말미에는 태어나 줘서 고맙다는 말과,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말이 서툴지만 정직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나 그때 정말 감동받았는데. 단어 하나하나.”
“그 편지 얘기 한 번만 더 하면 100번 채운다니까.”
“좋아서. 미국 갔을 때도 혼자 보고 그랬어.”
“엥? 편지를 거기까지 들고 갔었어?”
“사진 찍어 둔 걸로 봤어. 편지는 따로 보관해 뒀고.”
그 말에는 정말 놀랐는지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뭘 또 사진까지……! 지워, 그런 건. 다음에 더 제대로 써 줄게.”
손이 훅, 코트 안으로 파고들었다. 움직임이 무척이나 신속했다. 내 휴대폰을 꺼내간 조인휘는 잠금을 해제하고 갤러리를 열었다.
갤러리를 빠르게 훑던 손길이 멈추었다. 홱, 엎드린 조인휘가 사색이 돼서 나를 쳐다보았다. 잔뜩 낮춘 목소리에는 질겁한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야아, 너 미쳤…… 이거 왜 여태 안 지웠어!”
팔이 끌어당겨지면서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사방으로 가린 조인휘의 팔 안쪽으로 휴대폰 액정이 보였다. 동영상 섬네일은 몹시 익숙했다. 플레이 버튼 밑으로 드러난 살색과 뒤엉킨 자세의 단 한 장면만으로 아랫배가 묵직해질 만큼 자극적이기도 했다.
“…….”
몇 주 전 일이었다. 우리는 와인을 마시다 취기가 올라 섹스했고, 그걸 기록으로 남겼다. 한창 하던 중에 녹화 버튼을 눌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침대 옆에 고정시켜 놓고 20분가량을 찍었다.
길지 않은 영상은 일말의 거리낌 없이 과감하고 적나라했다. 조인휘의 우는 듯한 신음과 점도 높은 마찰음, 보란 듯이 바꿔 댄 여러 체위가 그대로 찍혔다. 흥분감에 치달아 서로에게 입 맞추는 행위는 걸핏하면 반복될 지경으로…… 사실 미국에 있을 때도 혼자 몇 번이고 돌려 봤다.
“지금 옮겨 둘게.”
안일하게 기기에 남겨 둔 걸 후회했다. 조인휘가 취하지 않았다면 절대 남겨지지 못했을 영상이었다.
“옮……! 바로 삭제해, 바보야.”
잠시 대답을 유보하다 입을 열었다.
“그럴게.”
나는 안심하는 표정을 짓는 조인휘에게 아쉬운 대로 조건을 걸었다.
“……대신, 오늘 밤에 한 번만 더 같이 보고.”
얼굴 전체에 물이 들기라도 한 것 같았다. 빈틈없이 발긋해진 조인휘와 눈이 마주쳤다. 촉촉하게 물기 밴 눈동자는 흔들흔들 지진을 일으켰다.
“그래도 돼?”
“…….”
마지못한 끄덕임으로나마 승낙이 돌아왔다. 눈을 내리깐 조인휘는 꿀꺽 목울대를 울렸다. 힘 빠진 듯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리고 여기, 나 잘 때 찍은 거도 지워.”
가리킨 손끝으로 다른 섬네일이 보였다. 그건 크리스마스 여행에서 돌아오던 날이었다. 지친 조인휘가 조수석에서 작게 코를 고는 영상.
“이건 그냥 두고 싶은데.”
“뭐?!”
“인휘 너도 나 몰래 많이 찍었잖아. 같이 하나씩 지울까, 그럼?”
조인휘는 받아치지 못하고 우물거리기만 했다. 탄식이 이어졌다.
“아, 모르겠다. 그냥, 너 마음대로 해.”
그러곤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듯 책을 꺼내 들었다. 아까 서점에서 샀던 원서 코믹스 중 하나였다. 비닐을 뜯고 있는 모습을 보자 픽 웃음이 났다.
“같이 봐.”
너저분한 앞을 치워 주었다. 책은 함께 볼 수 있도록 가운데에 놨다.
조인휘는 빠르게 집중했다. 언제 실랑이했냐는 듯, 그림에 푹 빠져들었다. 이게 그렇게 재밌나 싶어 내려다 봐도 나로서는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만화책일 뿐이었다. 재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나와 달리 조인휘는 마블 시리즈 전체를 좋아했고, 그 중에서 특히 스파이더 맨을 좋아했다. 평범한 남자가 히어로가 되는 게 좋다나. 예전에 물었을 때 아마 그런 식으로 답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넘길까?”
“응.”
나는 페이지 넘기는 역할을 자처했다. 집중한 조인휘는 읽는 내내 내 허벅지를 만졌다. 꾹 누르거나, 뭉툭한 손끝으로 긁거나. 단둘이 있을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어, 뭐였더라 이 단어. 갑자기 생각이 안 나.”
“참여하다.”
“아아, 맞다.”
인간 사전이 있으니까 편하네.
웃으며 중얼거리는 옆얼굴에 눈길이 머물렀다.
“고정원?”
그때 웬 여자의 목소리가 난입했다. 깜짝 놀란 조인휘가 몸을 떨어뜨렸다.
누군가 아는 사람이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성가신 감정을 느끼며 돌아보자 웬 여자가 서 있었다. 매우 낯익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여기서 만나.”
놀랍다는 표정을 마주하며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던 중, 특유의 말투를 곱씹어 보다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러게. 신기하네.”
고등학교 때 잠시 만났던 사이였다. 끝이 꽤나 좋지 않았던.
“몇 년 만이야.”
여자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조인휘는 혼자 허둥대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손을 밑으로 내리는 걸로 모자라 주머니 속으로 숨겼다. 방학이었던 까닭에 우리의 약지에는 커플링이 끼워져 있었다.
“……잘 지냈어?”
“잘 지냈지.”
굳어진 옆얼굴을 보며 답했다. 시선을 느낀 조인휘가 불안한 듯 내 쪽을 힐끔거렸다. 나는 다시 여자를 올려다보며 넌지시 물었다.
“약속 있나 봐.”
“응, 친구랑 만나기로 해서.”
여자는 조인휘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조인휘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래, 그럼. 너도 좋은 시간 보내.”
가 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최대한 예의 갖춰 표현했다. 하지만 여자는 못 알아들은 건지 할 말이 남은 티를 내며 자리를 지켰다.
“……너 한국 오면 연락은 해 줄 줄 알았는데.”
“…….”
“어떻게 한 번을 안 하더라.”
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피곤할 만큼 눈치가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무성의한 침묵이 이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가 찬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정말…… 말 없는 거 여전하다, 너.”
“미안.”
입술 끝을 살짝 올리며 사과했다. 왠지 이 상황이 실없는 웃음을 자아냈다.
“아냐. 내가 괜히 아는 척했다. 갈게, 방해해서 미안.”
여자가 돌아서고 나는 조인휘가 마시던 컵에 손을 댔다. 남아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넘기자 달착지근했다.
“고등학교 때…… 사귀던?”
“응.”
“그렇구나.”
더 물을 줄 알았던 조인휘는 그 이상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곧장 만화책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산만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지면 위를 성의 없이 훑고 있었다.
“사실 아까 처음 보고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어.”
심드렁하게 말하자 조인휘가 고개를 들었다.
“……어? 왜?”
“얼굴 잊어버려서. 목소리 듣고 알았어.”
“그럴…… 수가 있어?”
“시기가 애매한 때라 잘 만나지도 않았어서. 사귀었다고 하기도 좀 뭐해, 사실.”
놀라움을 드러내던 조인휘의 표정이 점차 흐려졌다. 이리저리 바쁘게 생각에 물드는 게 눈에 보였다.
“근데 너 고등학교 땐 말수가 없었어?”
“응?”
“아니, 아까 너 그 옛, 애, 여, 자 친…….”
“여자 친구라고, 안 해도 돼 굳이.”
‘애인’이나 ‘여자 친구’라고 차마 내뱉지 못하는 걸 보고 알아차렸다. 그 호칭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싫다는 걸. 상당히 귀여운 질투였다.
“아, 어어. 근데 그럼…… 뭐라고 해?”
“그 사람?”
“……어, 그 사람이…… 너 말 없는 거 여전하다길래.”
생각해 보면 말수가 없다는 평은 꾸준했다. 누구를 상대로든 마찬가지였다. 딱히 대화를 즐기지 않았고 무의미하게 떠들거나 듣는 것에 피로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말 좀 하라고 듣긴 했어.”
“정말?”
조인휘와는 처음부터 많은 대화를 했다. 그것도 내 쪽에서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풀거나 끌어내거나 했으니 예외적이었다. 사귀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대화들을 보면 수다스럽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변했나 봐.”
“…….”
“너 만나고.”
조인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거나 하지 않았다. 표정만 봐도 기분이 편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코믹스 두 권을 끝까지 보고, 디저트까지 먹고 나서야 카페를 나왔다. 어느새 어두워진 대로변의 양쪽으로 가로등과 빌딩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기온이 떨어진 날씨는 한결 싸늘하게 느껴졌다.
“안 춥겠어?”
“차까지 금방인데, 뭐.”
어깨를 위아래로 한 번 쓸어 주고 손을 내렸다. 주차장까지는 10여 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아, 내 양말!”
조인휘가 걷다 말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타워 건물의 상가 길목으로 들어섰을 무렵이었다.
“없어졌어?”
“아까 책 꺼내다가 바닥에 흘렸나. 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외친 조인휘는 총알처럼 뛰어갔다. 가까운 거리인 만큼 나는 굳이 따라가지 않고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작게 웃음이 나왔다. 수면 양말을 사 주겠다고 할 땐 그렇게 싫어하더니 막상 없어지니까 그것도 싫은 모양이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8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씻고 저녁을 차려 먹으면 될 것 같았다. 냉장고 속의 재료들을 두고 잠시 고민했다. 요즘 조인휘는 항상 허기져 하니 고칼로리의 음식을 챙겨 먹일 필요가 있었다.
“저기요.”
누군가가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그다지 달갑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돌아보자 불쑥 명함이 내밀어졌다.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괜찮으시면 연락 주세요.”
떠안기다시피 한 여자는 웃어 보이고 돌아섰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때, 뛰어온 조인휘와 몇 미터 앞에서 눈이 마주쳤다.
“…….”
조인휘는 괜히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다가왔다. 양말은 찾았느냐고 묻는 말에는 가쁜 숨을 내쉬며 끄덕이기만 했다. 이쪽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하는 게 느껴졌다. 내 손에는 아까 여자가 떠넘기고 간 명함이 들려 있었다.
“쿠키 좀 사 갈까?”
쇼윈도를 가리키며 묻는 말에 조인휘는 시큰둥했다.
“난 상관없어. 너 마음대로 해.”
그럴 기분 아니라는 내색을 모르는 척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죄송한데 이것 좀 버려 주시겠어요?”
계산을 하면서는 명함의 처리를 부탁했다. 흐리멍덩 서 있던 조인휘는 버려지는 명함을 힐끔거리곤 먼저 밖으로 나갔다.
“자.”
쿠키 상자를 손에 들려 주었다. 무심한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받아들었다.
“역시, 인기인은 다르구만.”
“응?”
“잠깐 사이에 번호를 다 받고.”
장난스럽게 말해 봤자 울적한 감정은 숨겨지지 않았다. 이렇게 직격으로 목격하는 일은 드물다 보니 꽤 동요했으리란 걸 알았다.
“알고 보면 혼자 있을 땐 하루에 수십 번 받는 거 아니야? 그러면서 집에 와서는 시치미 뚝 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
“생각할수록 수상하네. 나 뛰어갔다 올 동안 사실 명함 여러 개 받은 거 아닌가 싶다.”
짓궂은 말투는 모가 나 있었다. 그래 봤자 귀엽게만 들릴 뿐이었다.
“글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뭘 그 정도는 아니긴. 맞으면서…….”
이런 식으로 조인휘가 질투를 못 숨기는 게 좋았다. 웃음이 나는 걸 참느라 턱 근육에 힘이 서렸다.
“혹시 화났어?”
듣고 싶은 대답을 들려줄까 싶어 물었지만.
“…….”
조인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후로 대화 없이 우리는 계속 걷기만 했다. 가끔 눈이 마주치기도 했으나 그뿐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정적은 깨뜨리지 않았다.
풀어 주고 싶기도 하고 그냥 이대로 두고 싶기도 했다. 저울질하는 사이 보폭은 조인휘의 걸음에 맞춰 갈수록 느려졌다. 조인휘의 손에 들린 쿠키 상자는 우리의 사이에서 방해물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진입했을 때였다. 상자를 반대편 손으로 바꿔 드는 게 눈에 들어왔다. 간격이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꼈다.
확연히 가까워진 거리감을 의식했을 때는 손안에 부드러운 것이 들어와 있었다.
“…….”
다소 놀라서 내려다보았다. 슬쩍 손을 잡은 조인휘는 모른 척 다른 곳을 쳐다봤다. 그러면서도 손가락끼리는 깍지를 끼워 더욱 치밀하게 맞물었다.
맞은편에서 한 쌍의 남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조인휘를 배려해 이쯤에서 놓을까 생각하던 차였다. 나를 붙든 손은 사람이 가까이 스치는데도 풀기는커녕 도리어 꽉, 힘을 실어 붙들어왔다.
“…….”
정말로 흔치 않은 일이었다. 밖에서, 그것도 대담하게 먼저 이러는 건. 나는 하얀 옆얼굴을 내려다보며 얽힌 손을 매만졌다. 내 것에 비해 한참 작고 부드러운 손은 쓰다듬는 손길을 반기듯이 엉겨 왔다.
그리고 그게 결정적으로 불을 지폈다.
“어? 주차장 그쪽 아닌…….”
손을 붙잡고서 예고도 없이 방향을 틀었다. 골목 안쪽을 살피며 걸음을 재촉했다. 주차장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걸 알면서도 당장 사람 없는 곳을 찾는 데 혈안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비좁은 공간이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나는 조인휘를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상자가 툭 가벼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
속에서 탄식이 터졌다. 뭉쳐 있던 열이 만족감으로 뜨겁게 번지는 순간이었다. 계속 이걸 원했다. 들이켠 채 멈춰 있던 숨을 해방시키며 나는 조인휘의 벌어진 코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허리를 받치고, 할 수 있는 한 가깝게 끌어당겼다.
두 손이 등으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조인휘는 이러지 말라거나 그만 가자고 하는 대신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더 깊게, 보드라운 뺨과 숨결이 목덜미에 닿도록 밀착했다.
“정원아.”
정원아…….
기다렸다는 듯 연달아 부르는 걸 들으며 입술이 올라갔다. 바깥에 있었던 몇 시간 동안 참아야 했을 응석이었다.
“응.”
여러 의미가 내포된 짧은 답을 들려주며 허리를 쓸었다. 아까부터 해 주고 싶었던 말도 귓가에 소곤거려 주었다. 간지러웠는지 어깨를 움츠리는 게 느껴졌다. 조인휘는 입김을 뱉어 내며 내게 몇 마디 솔직한 답을 들려주었다. 거창하지 않아서 애틋한 말들이 오갔다.
차가운 공기 탓에 맞닿은 체온이 뜨겁게 느껴졌다. 우리는 살뜰하게 서로에게 얼굴을 파묻고, 서로의 피부를 느끼고 냄새를 맡았다.
그 상태로 계속 나가는 걸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짧게 입을 맞춘 뒤엔 지체 없이 빠져나왔다. 아쉽지만 충분한, 모순된 감각을 느끼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닿았던 조인휘의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었다. 비죽 솟은 부분을 만져 주는데 외침이 터졌다.
“맞다. 우리 쿠키!”
은근하던 여운이 깨질 만큼 커다란 목소리였다.
나는 황급히 돌아서는 조인휘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나오면서 챙겼던 빨간 상자를 눈앞에서 흔들어 주었다. 그제야 아, 하는 감탄으로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부드러운 무언가가 차곡차곡 쌓인 듯한 눈동자와 마주했다. 곧, 사랑하는 웃음이 골목으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