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재수 없는 하루(외전 1) (13/30)

1. 재수 없는 하루

“아, 미친.”

입에서 욕이 끊이질 않는다. 오늘 재수가 옴 붙었나 진짜. 사사건건 꼬여 대는데 이번엔 다른 게 아니라 담배 때문이었다. 한 시간 전에 산 담배가 사라졌다. 주머니에 넣어 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건만. 피우려고 보니 나오는 건 라이터 달랑 하나였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데다, 담배 생각이 간절해서 어쩔 수 없이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담배 이름을 말해 놓고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오, 씨’ 하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갔다. 지갑과 함께 두둑하게 잡히는 건 분명히 담배였다. 산 직후에 지갑이랑 겹쳐 넣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여길 찾을 생각을 왜 안 했는지.

“……”

알바생이 상황을 알아차리고 눈치를 살폈다. 담배에 바코드가 찍히기 직전이었다. 그냥 나갈까 하다가 신경질적으로 턱짓했다.

“줘요.”

밖으로 나오자 짜증스러운 탄식이 쏟아졌다. 등신인가. 안 그래도 주의가 산만한데 오늘은 극치를 찍은 느낌이었다.

입구 옆으로 비껴 서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한 개비 물어 불을 붙이고, 깊게 들이켰다가 한숨으로 내뱉었다. 여기서 두 갑 다 태우고 확 뒤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같아선 뭐 되는 일도 없고 살맛이 안 났다. 그 와중에 만나는 여자마다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방식으로 파투를 내는 게 제일 뭣 같은 일이었다.

이번 달 만난 여자만 여섯이 넘는다. 술집 헌팅, 클럽, 소개, 심지어 만남 앱까지. 차례차례 떨어져 나간 건 그렇다 치는데 마지막은 타격이 컸다. 그 여자랑은 순조롭게 잘되고 있었다. 데이트 두 번 만에 키스도 하고 연락도 종일 주고받았다. 갈수록 좀 뜸해지긴 했지만 아무튼 뭔가 될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근데 씨발…….

“뒤통수를 치냐고.”

혼잣말하면서 휴대폰 연락처를 쭉 내렸다. 이런 기분으로 집에 가기도 싫고, 술이나 실컷 퍼마시고 싶었다.

적당한 한 명을 골라 통화를 시도했다. 통화 연결음으로 나오는 걸 그룹 노래를 들으며 발끝을 까딱이는데 뚝 끊겼다. 쯧, 혀를 차고 다음 타자로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이은 결렬에 인상을 팍 구기며 끊었다. 혼자 마실까. 잠깐 그런 생각도 했지만 연말인 만큼 그건 싫었다. 하는 수 없이 제일 만만한 놈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럼 그렇지. 이번에는 신호가 채 세 번까지 울리기도 전에 재깍 연결됐다.

“야, 나와. 술 살게.”

여자랑 있을 땐 양껏 마시지 못하는 탓에 매번 아쉬움이 남았다. 오늘만큼은 코가 비뚤어지게 마셔 주겠다는, 오기 아닌 오기로 뱃속이 달아올랐다.

간만에 찾은 단골 술집은 조명이며 소품이며 쓸데없이 현란해져 있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고 자리에 앉았다. 역시나, 여기도 지겨운 캐럴이 나오는 건 매한가지였다.

“오늘 진짜 믿고 마셔도 되는 거지? 이래 놓고 계산할 때 지갑 없다 그러면 사람도 아니다?”

“못 믿겠음 먹지 마.”

“난 믿어. 잘 먹을게, 친구야.”

윤성오가 징그러운 애교를 부리며 기댔다. 얜 내가 부른 것도 아니었다. 임준규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부른 떨거지였다. 불렀음 혼자 기어 나올 것이지. 졸지에 두 명이나 사 주게 된 꼴이라 부아가 치밀었다.

“우동에 계란말이, 모둠꼬치 시킨다? 시켜도 돼?”

“그럼 난 짬뽕!”

“그래 씨, 거지 새끼들아. 다 처먹어라, 처먹어.”

뭉친 냅킨을 면상에 던져 주자 좋다고 낄낄대는 꼴이 가관이었다. 아, 그냥 청승이고 뭐고 혼자 마셨어야 하는 건데. 깨질 돈도 그렇고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 등을 뭉갰다.

“…….”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니 남녀 합석 테이블이 많았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라 그런가 들뜬 기운들이 장난 아니었다.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좆같아졌다. 누구는 그간 여자한테 날려 먹은 돈이랑 시간이 아까워 죽겠는데.

맞은편의 취향으로 생긴 여자를 곁눈질하는 사이 술이 나왔다. 기다렸던 만큼 그때부터는 위로 곧장 내다 꽂듯이 마셨다.

취기가 돌면서 흥이 나자 이런저런 얘기를 꺼냈다. 멍청한 놈들이 듣든 말든 상관없었다. 답답했던 만큼 아무한테나 푸념을 늘어놓고 싶을 뿐이었다. 앱으로 여자 만난 거랑 오늘 바람맞은 건 빼고 하고 싶은 말들만 쏟았다. 그래도 거의 여자 얘기였다.

“근데 너 김윤선한테도 걔 친구 소개받았다며. 잘 안 됐어?”

“아, 그거……. 걍 흐지부지? 별로 내 스타일도 아니고, 말도 잘 안 통하고.”

김윤선을 닦달해서 소개팅을 한 번 받긴 했다. 나쁘진 않았는데 마음에 차는 것도 아니라 한 번 보고 말았다.

“야, 강우야.”

국물을 후룹, 소리 내 떠먹은 임준규가 말했다.

“반 농담 반 진담으로 하는 말인데, 남자는 어때?”

옆에서 풋 하고 터지는 소리가 뒤따랐다.

“처맞고 싶지?”

“아니, 네가 자꾸 여자랑은 안 된다고 하니까 하는 소리지. 뭐 어때, 요즘 세상에. 나 아는 애 중에 레즈도 있고 게이도 있는데 존나 행복해 보이더라.”

“돌았냐? 차라리 돌싱을 만나면 만났지, 좆 달린 새끼를 만나게? 이걸로 대가리 깨지고 싶은 거 아니면 입 다물어라, 진짜.”

맥주잔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닥치고 듣기나 할 것이지 충고랍시고 되도 않는 말을 지껄여 대니 혈압이 오른다. 일부러 빡치게 하려는 속셈 같아서 무시하려고 술을 들이켰다.

차가운 생맥주가 달아오른 식도를 지났다. 턱, 테이블이 흔들릴 만큼 세게 잔을 내려놓은 뒤 계란말이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입에 닿기도 전에 내동댕이쳤다. 겨우 다스렸던 열이 역류한 순간 화기에 휩싸인 목구멍에서 씨발, 하고 욕지거리가 튀어 나갔다.

“남자는 무슨, 술맛 떨어지게. 야, 만나고 싶음 너나 처만나든가.”

“엥? 아니…….”

“아, 생각할수록 빡치네. 그딴 개소리 한 번만 더 지껄이면 동기고 뭐고 존나 재미없을 줄 알아라, 이 씹새끼야.”

“워 워, 왜 이렇게 흥분해.”

토닥이는 손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마실 마음이 싹 가셨다. 성질 돋우는 것들이랑 마셨더니 맘껏 취하지도 못하고 되레 기분만 잡쳤다. 누굴 탓하나, 나를 탓해야지. 잘못된 상대를 불러내 돈만 버린 내 실수를 탓하면서 의자를 걷어찼다.

“둘이서 오붓하게 마저 줏어 먹고 가라.”

뭐라고 지껄이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알았으니까 닥치란 의미로 손을 흔들어 보이며 입구로 향했다. 그냥 튈까 하다가 적선하는 셈 치고 계산은 했다.

근처 PC방에 들어가서 주구장창 게임만 했다. 쉬지도 않고 몇 시간을 내리 하고 나니 울화가 가시는 것 같기도 했다. 진정되고 나니까 아깐 좀 오버했다 싶기도 하고. 이 새끼들 또 뒷담 열나게 까대겠네 싶어서 약간 짜증이 났다. 맨날 욱해서 박차고 나간다고 김강욱이라느니 그딴 별명을 붙인 장본인 앞에서 또 그 꼴을 보였으니.

“…….”

아까 술자리에서 괜히 찔려서 예민하게 굴었던 건 맞다. 아무한테도 말 못 할 흑역사 같은 게 떠올라서 울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미쳤다 싶은데……. 솔직히 남자 상대로 꼴렸던 적이 한 번 있다. 걔랑 이것저것 해 보는 상상 하면서 빼기도 했고. 빼고 나니까 존나 자괴감 들고 기분 더러워서 정신 차리긴 했지만. 아무튼 얼마나 외로우면 남자, 것도 친하게 지내는 놈 상대로 이러나 싶어서 제대로 비참했었다.

“미쳤지.”

머리를 헝클고 등받이에 몸을 쭉 늘어뜨렸다. 한숨을 쉬고 있자니 눈길이 저절로 옆에 놓인 휴대폰으로 쏠렸다.

여러모로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는 지점이었다.

그니까, 조인휘 생각이.

휴대폰을 집어 들고 무작정 메신저를 켰다. 대화 창에 뭐 하냐고 메시지를 입력하면서도 심기가 불편했다. 씹힐 거란 걸 알아서.

이제는 제대로 연락이 오가는 경우가 드물었다. 며칠 전에도 진탕 마시고 하루 신세 질까 싶어 찾아갔다가 헛걸음쳤다. 어이없게도 이사를 가고 없는 통에 모르는 사람하고 마주쳤다. 간신히 연결된 통화에서는 사정이 생겨서 이사 갔다는 형식적인 말만 들었다. 서운해서 따지려는데 바쁘다고 끊더라. 개새끼.

거의 남 같은 상태가 쭉 이어지고 있었다. 조인휘가 고정원 그 새끼랑 다니고부터는 만날 일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보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가끔 마주칠 때면 징글맞은 허우대에 가려져서 머리카락도 제대로 안 보였다.

“이거 봐, 또 씹지.”

읽지 않았다는 표시가 사라지지를 않았다. 고작 10분 기다렸지만 더 볼 것도 없었다. 여기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지나 봤자 어차피 답장은 안 올 거란 확신이 들었다.

고정원으로 갈아탔으니까 안면몰수한다 이건가. 내가 그동안 지한테 한 게 얼만데.

어금니를 뿌득 갈며 전화를 걸었다. 예상했듯 신호만 가고 받지를 않았다. 한창 돌아가고 있는 게임을 꺼 버리고 아예 자세를 잡았다. 받을 때까지 걸어 준다는 오기로 시도하기를 다섯 번째. 겨우 통화가 연결됐다.

나는 준비해 둔 대사를 거들먹거리는 투로 날렸다.

“인희야, 나와라. 안 나오면 니 누드 과톡방에 돌린다.”

좁은 호프집에서 벽을 마주하고 홀짝이길 20여 분째였다. 등에 얼얼한 타격이 날아들었다. 오자마자 내 등에 과격하게 주먹질한 조인휘는 옆자리로 털썩 주저앉았다.

“나 빨리 가야 돼.”

뛰어왔는지 숨이 거칠었다. 겉옷을 벗으면서도 가야 된다는 소리부터 하고 있었다.

“얼굴 한번 뵙기 존나게 어렵네요.”

“왔으니까 내 사진 지워, 빨리. 그걸 아직도 갖고 있었냐?”

“협박을 해야 만나 주시네, 섭섭하게.”

나는 낄낄대면서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그 사진이란 게 조인휘가 지 주량도 모르고 나대다가 만취한 사진이었다. 웃통 다 까고 널브러진, 말도 못 하게 창피한 몰골. 웃겨서 한 수십 장은 찍어 놨다. 닦달하는 통에 대부분 지우긴 했어도 아직 남아 있었다.

“오― 오랜만에 보니까 야한데.”

어두운 곳이라 터뜨린 플래시하며 각도까지 절묘했다. 취기 때문에 뺨은 불그스름한데 몸은 하얗고. 사진 속 나체를 구석구석 훑다가 무심코 젖꼭지를 확대시키자 조인휘가 욕하면서 뺏으려 들었다.

놀리고 장난 좀 치다가 인심 쓰는 척 삭제해 줬다. 어차피 한 장 더 남아 있으니까.

“근데 조인희 너 인간적으로 너무 쌩까는 거 아니냐, 배신자 새끼야? 톡도 맨날 씹어, 아까도 씹고.”

“청소하느라 바빴어, 아직 집 정리가 덜 돼서.”

“아, 맞다, 이사. 야반도주도 아니고 어떻게 옮겨 놓고 입 싹 닫고 있냐고.”

“사정이 있었다니까.”

조인휘는 나온 술을 한 모금 들이켜더니 그렇게만 변명했다. 축약시켜 넘어가려는 태도가 은근 빈정 상했다.

“니 그 대단한 사정, 고……”

고정원은 아냐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뭐…… 이름도 들먹이기 싫었다. 전 같았으면 뭐라고 뒷담이라도 깔 텐데 씨알도 안 먹힌단 걸 깨닫기도 했고. 둘이서 영혼의 단짝이라도 된 것처럼 구니까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

급격히 속이 뒤틀려서 맥주를 들이부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 난다. 니네 집에서 2차로 술 마시다가 양준영이 술판에 다 토해 놨던 거. 그나마 정신 멀쩡한 너랑 나랑 둘이서 그거 다 치우고 씹. 그때 개 짜증 났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웃기네.”

“맞다. 그랬었지.”

조인휘도 기억났는지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웃었다.

“…….”

좀 차분해진 건가?

가까이서 본 게 오랜만이라 그런가 느낌이 달랐다. 지겹게 봤던 이목구비가 어째 생소했다. 볼살이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왜 이렇게 묘하지 싶어서 조목조목 뜯어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뭘 그렇게 봐, 아까부터.”

순간적으로 고개를 피했다.

“반가워서 그런다, 반가워서.”

확 일어선 긴장감을 치대면서 얼버무렸다. 어깨동무로 끌어당기자 조인휘가 팔꿈치로 밀어 냈다. 난폭하게 몸 장난을 치는데 체취가 풍겼다. 남자 새끼들한테서 종종 맡는 쩐내가 아닌, 향긋하고 보들보들한 냄새였다.

문득 아까 봤던 사진이 떠올랐다. 사진 속에 담겨 있던 조인휘의 신체적 특징들이 눈에 선했다. 작달막한 유두나 흐릿한 겨드랑이 체모. 길게 선이 나 있기는 해도 남자답긴 한참 부족한 복근. 단전까지 이어지는 완만하고 부드러운 굴곡 같은 것들.

“큼.”

몸을 떨어뜨렸다. 목이 타서 맥주를 넘기고, 아무거나 집어 안주를 씹었다. 다리를 산만하게 떨면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초조함을 느꼈다.

아…… 씨발.

떡 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술 때문인지 진짜 존나 하고 싶어졌다. 이러다 여기서 흥분이라도 할 거 같아서 되는 대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얘기했던 신변잡기였다. 몇 시간 전 임준규랑 윤성오를 앉혀 두고 했던 말들을 그대로 읊었다. 말하면서 탄력을 받아 속사포로 쏟아 냈다. 다행히 얘기에 집중하면서 쓸데없는 긴장과 초조는 가라앉았다.

“씨…… 힘들다. 요즘 뭐 이렇게 안 풀리냐.”

긴장이 지나치게 풀렸다. 그 새끼들한테 못 했던 얘기들까지 전부 털어놔 버렸다. 만남 어플 써서 여자 만난 거랑 오늘 약속 잡았다가 까인 거 등.

하소연하자 조인휘는 늘 그랬듯 진중하게 들었다. 이런 약한 소리 하면 딴 놈들은 십중팔구 비웃는 데 반해 조인휘만큼은 놀리는 법이 없었다.

이래서 얘랑 노는 게 좋았었는데.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려니 새삼스러운 감회에 젖어 들었다. 조인휘는 솔직히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알면 알수록 좋았다. 은근 웃기고 순둥하고, 얼굴 되는 새끼들 특유의 자뻑 같은 게 없었다. 인맥 늘리는 스타일도 아니라 한때는 내가 제일 친하다는 우월감도 있었는데.

“2차는 니네 집으로 가자, 어?”

옆에 있는 몸뚱이를 끌어안았다. 정말 간만에 기분이 최고조로 업됐다. 그동안 조인휘랑 못 놀아서 다운됐었나 싶을 정도였다. 손바닥에 착 감기는 어깨를 잡고, 옷감 아래로 느껴지는 따끈한 피부를 매만졌다.

“나 이제 곧 가야 된다니까. 아, 좀 붙지 마.”

안 떨어지려고 버티다가 손가락이 니트에 걸렸다. 네크라인이 살짝 늘어난 순간, 흠칫 놀라 눈이 벌어졌다.

뭐야, 이거.

조인휘가 입고 있는 건 파임 없는 기본 니트였다. 아닌 척 다시 당겨 보자 그 아래 가려져 있던 자국이 드러났다. 오래돼 연해진 것부터 생긴 지 얼마 안 돼 진한 것까지. 퍼렇고 벌건 자국들이 목덜미와 어깨로 이어지는 교묘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목뒤에도 꽤 선명한 잇자국이 나 있었다. 왜 지금 알았나 싶을 정도로 눈에 띄었다.

“야, 너 여친 생겼어?”

어깨가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굳어져 있던 조인휘는 곧 나를 퍽 소리 나게 밀어 내고 몸을 뺐다. 티 나게 허둥대는 표정이 볼만했다. 우물우물 뜸들이던 조인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어, 하고 인정했다.

“하…… 전엔 아니라더니, 맞네, 씨. 연락 계속 씹고 수상하다 했다.”

“소문내지 마.”

“뭐야, 우리 학교야? 미친. 우리 과야?”

“아, 아니니까 관심 꺼, 그냥.”

“목은 그 꼬라지를 해 놓고……. 아니, 어떻게 하면 여기를 씹어 놔. 등에 올라타는 것도 아니고. 너 니 여친한테 깔리냐, 설마?”

목뒤의 자국을 건드리며 비아냥댔다. 조인휘는 급하게 손을 들어 정확히 내가 가리킨 데를 감쌌다. 웬일인지 귓바퀴부터 목 전체가 벌게졌다.

“너 거기 씹힌 자국 있는 거 몰랐냐?”

“어, 아니…….”

다 보이는 데에 자국이 있는 줄은 몰랐던 눈치였다. 다른 것보다 순진한 반응이 제일 기가 막혔다. 여자도 많이 만나 본 새끼가 이럴 정도면…….

“연애하니까 아주 좋아 미치겠나 봐?”

“……어. 뭐.”

태연한 척해 봤자 투명하게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아 씨, 괜히 물었어. 좆같네.”

왜 이렇게 달라 보였는지 이제 이해가 됐다. 간만에 들떴던 기분이 급추락하듯 더러워졌다. 허탈한 것 같기도 하고, 유난히 더 허무했다.

“사진 보여 줘 봐.”

“없어.”

“존나 숨겨, 수상하게. 못생겼지.”

“무슨, 너무 잘나서 피곤…….”

조인휘는 도중에 말을 멈췄다. 내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맘대로 생각하라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아 좀, 닳는 것도 아닌데 보여 주지?”

“…….”

“어차피 오래가지도 못할 거면서 뭘 그렇게 몸을 사려.”

맥주를 몇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다 굳어진 표정을 한 조인휘와 눈이 마주쳤다.

“뭐. 왜.”

표정이 없다 못해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이렇게 정색하는 건 처음 봐서 내심 놀랐다.

“……오래 사귈 거야. 아니, 절대 안 헤어질 건데.”

조인휘는 목소리까지 깔면서 심각하게 말했다. 상상만으로 기분이 나쁘다는 것처럼. 내리깐 눈으로 술을 넘기는 모습이 침울해 보일 지경이었다.

“…….”

그냥 하는 소리 가지고 왜 저래? 연애 해 볼 만큼 해 봤을 놈이 겨우 이깟 말에 정색을 하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아니, 진짜로 보고 있는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언젠 아무도 안 사귀고 자유롭게 놀 것처럼 굴더니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었다.

그때 조인휘의 휴대폰에서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여친?”

부리나케 고개 숙인 조인휘는 대꾸 없이 답장에만 몰두했다. 곧장 반응하는 꼬락서니가 완전 칼 군기 든 군인이었다. 이 새끼도 이제 그런 놈들 중 하나구나 싶었다. 연애하면 친구는 안중에도 없고 지 여친한테만 죽고 못 사는 그런 병신 같은 놈들.

“슬슬 가자.”

답장을 마친 조인휘는 일어나며 겉옷을 꿰입었다.

“뭐냐, 연락 한번 왔다고 쪼르르. 강아지네, 완전.”

“뭐래. 늦었어. 일어나, 인마.”

주기적으로 빨아 놓은 목덜미 자국이 쎄하긴 했다. 연락 한번 왔다고 발딱 일어나는 폼부터 그동안 두절 수준으로 끊겼던 연락까지. 대충 훑어만 봐도 어떤 여자를 만나고 있는지 알 만했다.

말해 줘 봤자 어차피 들리지도 않겠지만 한 소리 했다.

“야, 너 그렇게 집착 쩌는 여자 맞춰 주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

내 말에 조인휘가 피식 웃으며 계산대를 향했다. 그 꼴이 어지간히 멍청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허, 하고 웃음이 나왔다.

나도 데려가라고 했다가 까였다. 암만 봐도 여자 친구를 보러 가는 게 분명했다. 소개해 달라고 해도 오늘은 안 된다 하고, 이사한 집에 한 번은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져도 철벽이었다.

변한 건 분위기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고집도 더럽게 세져 있었다. 전 같았으면 끈질기게 세 번쯤 매달린 시점에서 승낙했을 텐데.

우기는 게 소용없다는 걸 알고 포기했다. 중얼중얼 욕설 섞인 불평을 하며 술집 앞에서 갈라졌다. 조인휘는 미안하다며 입에 발린 말을 하더니 정류장 쪽으로 향했다.

게임방 가서 새벽 내내 달릴까. 생각하며 발길을 옮기다가 불현듯 돌아섰다. 조인휘가 사라진 골목 쪽으로 부리나케 방향을 변경했다. 나는 실실 웃으면서 발소리를 죽였다. 어차피 근처로 이사했을 텐데, 뒤 좀 밟으면 재밌을 것 같았다.

생각과 다르게 조인휘가 멈춘 곳은 버스 정류장이었다. 버스를 왜 타지. 생각했다가 옆 동네로 이사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떨어진 거리에서 지켜보다 조인휘가 오르는 버스에 따라 올랐다. 조인휘는 내내 휴대폰 메시지를 주고받기에 여념 없었다. 숨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이 당당하게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앉기가 무섭게 조인휘는 통화를 시작했다.

“어, 나 버스 탔어.”

좋다고 쪼개는 옆얼굴이 차창에 그대로 비쳤다. 상대가 누군지는 뻔했다.

“벌써 도착했어?”

예상대로 집에서 만날 예정인 듯했다. 시시콜콜한 잡담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화 내용을 미뤄 봐선 거의 동거하는 사이나 다름없었다.

여우 같은 새끼. 나이가 몇이라고 벌써부터 동거질이냐.

“피곤하겠다. 가서 내가 어깨 주물러 줄게.”

좋아 죽는 대화를 듣고 있으려니까 근질거렸다. 말투도 그렇고 뭔가 생각보다 심하게 듣기 민망했다. 혀 짧은 소리 내는 놈들도 그냥 역겹기만 하고 말았지 이렇게까지 닭살 돋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나도라니까. 이따 볼 거면서 뭘…….”

끊자고 말만 하고 계속 시시덕대더니 어느 순간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뭔 일인가 궁금해져서 고개를 쭉 빼고 엿들었다.

뭐라 속삭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볼륨 작은 소리를 캐치하느라 인상이 찌푸려졌다. 잠자코 듣던 조인휘가 ‘아, 진짜’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곤란한 것처럼 손으로 눈을 가리는 게 보였다.

곧이어, 최저치로 낮춘 목소리가 버스 안 소음을 파고들었다.

“나도 사랑해.”

……와, 제대로 염병하네.

전화를 끊은 조인휘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문질러 댔다. 터질 것처럼 빨간 귀가 뒤에서 다 보였다. 주변에도 들렸는지 몇몇 사람이 조인휘 쪽을 힐끔거렸다.

눈에 뵈는 게 없나. 아주 공공장소에서 쪽팔린 줄도 모르고.

나는 하, 하고 몇 번째인지 모를 헛웃음을 내뱉었다.

학교서부터 몇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하차했다. 나름 조심해서 미행하는 내 수고가 무색하게 조인휘는 주변을 살피는 일이 없었다. 하여간 보면 은근히 둔했다.

따라가면서 둘러본 동네는 분위기가 학교 근처랑 천지 차였다. 조인휘가 그전에 살던 데는 으슥하고 주말 지나면 쓰레기며 토사물이며 아무튼 지저분한 동네였다. 여기는 뭐, 깨끗하기도 하고 일대 건물들 자체가 대부분 신축처럼 보였다. 이런 데 집을 구했다니. 집세도 그렇고, 차도 없으면서 굳이 여기로 이사 온 게 이해 불가였다.

의아함을 느끼며 뒤를 밟다가 걸음이 멈췄다. 조인휘가 어느 건물로 들어가면서 뒷모습이 사라진 탓이었다. 서둘러 속도를 내자 다행히 저만치 앞에서 포착됐다. 오피스텔의 공동 현관으로 들어서려는 모습이었다.

이때다 싶어 잽싸게 달려갔다. 잠복하다 덮치듯, 키패드를 누르고 있는 조인휘를 확 끌어당겼다.

“너 딱 걸렸어.”

헤드록을 걸어 구석으로 끌고 갔다. 식겁해서 버둥거리는 걸 무시하고 꽉 조이며 물었다.

“뭐냐, 너. 여기 산다고? 장난해?”

외관부터 그럴싸한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우리 같은 대학생이 살 만한 곳은 절대 아니었다. 사귀는 여자가 학생이 아니라 돈깨나 버는 직장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너 나 따라왔어?!”

“버스에서 통화하는 것도 다 들었다, 새끼야. 소름 돋아 죽는 줄 알았네.”

팔에서 간신히 빠져나간 조인휘가 얼빠진 얼굴로 기겁했다.

“뭐?”

나는 아까 버스에서 들었던 통화 내용을 되새기며 웃었다. 풋, 뿜어내고 다가가 바싹 끌어안았다.

“뭐, 사랑해애? 나도 사랑해애?”

귓가에 입술을 붙이다시피 하고 조인휘가 했던 말을 따라 했다. 버둥거리는 조인휘가 술 냄새 난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벗어나려고 하는 걸 안간힘을 써서 붙들고 있는데.

그때였다.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챘다. 돌아볼 틈도 없었다. 급작스러운 가운데 엄청난 힘에 의해 몸이 붕 떴다. 아찔하고 비현실적이었다. 딱딱한 벽에 어깨부터 등이 거칠게 부딪히며 묵직한 소리가 났다. 머리통과 뼈가 울릴 정도의 충격에 입에선 억 소리도 안 났다.

상황 파악도 하기 전에 공포감부터 닥쳤다. 본능적으로 움츠리고 팔로 얼굴을 보호했다. 웬 미친 취객한테 잘못 걸려서 구타당하는 게 아닐까 하는 찰나의 판단에서였다.

“…….”

하지만 잔뜩 웅크리고 있어도 아무런 린치가 가해지지 않았다. 몇 초쯤 지났나.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웬 거대한 남자가 보였다. 어찌나 큰지 시야를 들어 올리는 데도 얼굴이 바로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한껏 젖혀서야 겨우…….

……미친.

이 새끼가 왜 여깄어?

아는 얼굴을 마주하자 맥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나는 밀려드는 당혹감과 수치심을 억누르면서 주춤주춤 일어났다.

“뭐야, 씨발.”

쪽팔리고 짜증스러워서 말이 곱게 안 나갔다. 충격이 가해졌던 몸에선 욱신거리는 통증이 번지고 있었다. 대체 이 음흉한 새끼가 어떻게 나타난 건지, 왜 이딴 짓을 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취한 사람이 행패 부리는 줄 알았는데.”

“…….”

“또 강우였구나.”

잘난 낯짝이 무표정했다. 눈알에 온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보는 것만으로 섬뜩했다. 기분 나쁜 새끼.

“뭐? 지랄, 무슨 행패?”

내가 취해서 조인휘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건가. 사람을 패대기쳐 놓고서는 한다는 말이 고작 이거였다. 사과는 일언반구 없이 착각했다고만 하는데 암만 봐도 거짓말이었다.

“정원아, 그, 장난치느라…….”

조인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끼어들었다. 무언가 변명하려는 걸 끊고 고정원이 말했다.

“먼저 들어갈래?”

“어?”

어정쩡하게 서 있던 조인휘의 몸이 고정원 쪽으로 기울었다. 팔뚝을 잡았다 놓는 더럽게 길쭉한 손이 보였다. 뭐야, 저건. 불필요해 보이는 스킨십에 절로 시선이 갔다.

“오는 길에 깜빡해서 나가서 사 왔어. 녹차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했잖아. 들어가서 먹고 있어. 나는 강우 배웅해 주고 들어갈게.”

고정원이 들고 있던 봉투가 조인휘의 손으로 옮겨 갔다.

“아, 어…….”

납득이 안 가는 상황이었다. 아이스크림? 조인휘가 먹고 싶어 했다고? 그걸 왜 저 새끼가 사서…… 가지고 들어가라니 어디로?

둘은 뭔가 엄청나게 익숙하고 당연해 보였다. 그럴수록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아니, 왜 이 둘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누가 설명 좀 해 줬음 싶었다.

“어…….”

조인휘가 내 눈치를 봤다. 불안한 눈초리로 이쪽을 번갈아 보더니 마지못한 것처럼 대꾸했다.

“알았어.”

들어가다 말고 뭔가 생각난 듯 돌아본 조인휘가 말했다.

“야, 김강우,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너…… 암튼 담에 보자.”

그 한마디를 남기고 들어가자 주차장에는 나랑 고정원만 남았다.

씨발. 상황이 이해가 안 되다 못해 머릿속이 진창으로 꼬였다. 둘이 같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정황들이 도무지 현실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는 한겨울에 달랑 니트 차림이었다. 집에 있다 막 나온 사람처럼. 와중에 배알 꼴렸던 건 내가 갖고 싶어도 가격 때문에 침만 흘렸던 브랜드 옷이라는 걸 알아봐서였다.

“뭐냐. 니네 둘이 살림이라도 차렸냐?”

비꼴 의도로 한 말이었다. 고정원은 긍정도 부정도 않고 가만히 날 봤다. 물끄러미 응시하는 눈이 지금까지와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아, 이 새끼 본성 나오네.

매번 눈빛이 거슬렸는데 지금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노골적인 적대시에 복부가 싸늘해졌다. 아닌 척해도 일단 주눅 들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 시큰대며 남아 있는 폭력의 영향이 컸다.

“강우야.”

친근한 척 부르는 이름이 주차장을 울렸다.

“…….”

기분 나쁜 소름이 돋았다. 육탄전 직전에 깔리는 팽팽한 긴장감이었다. 상대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느껴지는 폭력적 기운에 대항하느라 몸에 힘이 들어갔다. 쳐다보는 압박감이 짜증나서 소리쳤다.

“불렀음 말을 해, 새끼야!”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그렇다고 압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자기 목덜미를 쓸거나 땅을 내려다보거나. 그런 느릿하고 무의미한 동작들조차 보는 사람을 위축시켰다. 그사이 키가 더 큰 건가. 아님 근육을 불린 건가. 전엔 그저 멀대 같다고 느꼈는데 오늘따라 거북스러울 정도로 비대하고 위압적이었다.

끔찍하리만치 긴 기다림 끝에 고정원이 입을 뗐다.

“……너무 스스럼없이 구는 거.”

“…….”

“보기 좀 그렇네.”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혼란으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금 이게 무슨……. 대체 뭐가 보기 좀 그렇단 거야?

“너 지금 뭔 소리…….”

따지기도 전에 고정원이 끼어들었다. 다른 델 쳐다보던 눈이 다시 직선으로 박혀 들었다.

“인휘한테.”

“…….”

“그런 식으로 들러붙고, 만지고…….”

“…….”

“하지 말라는 소리야.”

만지느니 어쩌니 그런 소리가 지금 왜 나오는지 몰랐다. 갑작스러운 건 그렇다 쳐도 터무니없었다. 뉘앙스 자체도 이상하고 무슨 꼭…….

“뭐, 라고?”

마른입을 힘겹게 축이며 되물었다.

“많이 어려웠어, 내 말?”

되려 또 물어 오니 할 말이 없었다. 선득한 기운에 짓눌리며 벙쪘다. 숨 막히는 침묵의 끝에서 시선이 거둬졌다.

“춥네.”

하나도 안 추워 보이는 얼굴로 지껄이고 있었다.

“그만 갈까. 나도 인휘가 기다려서.”

말투가 가증스러웠다.

“취한 것 같은데 제대로 갈 수 있겠어?”

“야, 너.”

기가 막혀 따지려던 참이었다.

“택시 불러 줄 테니까 기다려.”

뭐라고 하기도 전에 멋대로 앱으로 호출하고 있었다. 독단적인 태도는 선의가 아니라 강요에 가까웠다.

“차 번호 6498. 3분쯤 걸릴 거야. 아, 현금 없으면 줄게.”

뒷주머니를 뒤적인 고정원이 지갑을 꺼냈다. 쓸데없이 단위가 큰 지폐 한 장이 손안에 헐겁게 끼워졌다.

“조심히 가.”

어깨를 한 대 툭, 쳐 오자 그것은 곧 바닥을 나뒹굴었다. 더러운 불쾌감이 정수리까지 비죽 곤두섰다. 누가 봐도 아랫사람 하대하는 행동이었다.

돌아서는 뒷모습이 보였다. 몇 발자국쯤 멀어진 무렵. 별안간 목덜미가 오싹해지도록 끼쳐 오는 소름과 함께 덩어리진 숨이 터져 나왔다.

“허…….”

망치로 후두부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찰나에 가까운 짧은 순간에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아귀가 들어맞지 않고 있던 의문들이 제자리로 맞아떨어졌다.

왜 둘이 같이 살고 있는지. 왜 고정원이 갑자기 집 앞에서 나타나 나를 겁박했으며 왜 굳이 조인휘를 보내고 이딴 개소리를 지껄였는지. 둘이서 풍기던 야릇한 기운은 뭐였는지.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허망함 속에서 확 열이 뻗쳤다. 내내 경직돼 있던 몸이 그제야 풀리면서 머리끝까지 열기가 도사렸다. 근처에 떨어진 지폐를 주워 구기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씨발, 야!”

문 앞에 선 고정원은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손에 든 걸 확 던지자 그 발치로 뭉친 지폐가 떨어졌다.

“니가 나한테 명령할 입장이냐? 내가 이거 퍼뜨리면 어떻게 될지 감이 안 와?!”

분에 찬 숨이 올라와 어깨랑 가슴이 들썩거렸다. 당장이라도 이 새끼들이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 떠벌리고 싶어서 머리 꼭대기가 뜨거웠다.

고정원은 당연하게도 아무 말도 못 하고 멈춰 서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우월감에 젖었다.

몇 초 후.

평탄한 저음이 내가 뱉는 거친 숨 위로 깔렸다.

“그렇게 해, 강우야.”

“……뭐?”

“해. 너 하고 싶은 대로.”

돌아선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사이, 고정원은 그대로 카드를 찍고 제한된 공간으로 들어섰다.

정신 차리고 나니 눈앞엔 투명하고 두꺼운 유리문만 남아 있었다.

“…….”

가로막힌 문을 보는데 폭발적인 분노가 치솟았다. 견딜 수가 없어서 현관 옆 대리석을 발로 차며 분풀이했다.

“아오! 아오!”

수차례 걷어찬 걸 끝으로 모든 화풀이를 그만두었다. 더 이상 여기 머무르고 싶지도 않았다. 숨을 몰아쉬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나가기 직전, 잠시 뒷걸음질쳤다. 스치는 시야로 얼핏 눈에 익은 차가 들어온 탓이었다. 나는 고개를 꺾어 그쪽을 쳐다봤다.

고정원이 타고 다니는 차가 맞았다. 가격을 알아보니 예상을 뛰어넘는 고가였던 그 수입차. 얼마나 잘살길래 부모가 이런 걸 턱턱 사 주나 싶었던.

전부터 거슬렸었다. 쓸데없이 비싼 차 타고 다니면서 위화감 조성하는 거나. 돈 있는 티는 있는 대로 내면서 겉으로만 점잔 떠는 거나.

확 긁어 놓고 갈까. 유혹이 들었지만 덜미 잡힐 순 없어서 이를 갈며 참았다.

걷다 보니 어느새 정류장이었다. 씨발, 씨발, 씨발. 수백 번을 뱉어도 해소되지 않는 화기 때문에 돌아 버릴 거 같았다. 최근 어이 털리는 일 연속이었지만 이렇게까지 환장하겠는 적은 없었다.

의자에 걸터앉는데 다시 욕이 터졌다. 등줄기를 스치는 통증 때문이었다. 벽에 내동댕이쳐졌던 게 갈수록 심하게 욱신대고 있었다.

“하…….”

눈을 감고 이마를 찌푸렸다. 머릿속 전원도 끄고 싶은데 사고 회로는 끊어지질 않았다. 역겹게시리. 둘이 떡 치는 사이라고 생각하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거슬렸다. 고정원이랑 있으면 유독 산만하던 조인휘. 단순히 친분을 과시한다고 생각했던 둘 사이의 스킨십.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감이나 빤히 서로를 쳐다보는 묘한 행동같은 것.

그리고, 오늘 술 마실 때 봤던 목덜미의 자국들. 하얀 피부라 더 지저분하게 눈에 띄던 자국들이 떠오르자 가슴이 울컥했다.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더러운 새끼들.

생각할수록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당장에라도 돌아가서 소리치고 엎어 버리고 싶었다. 내가 뭘 했기에 만지지 말라느니 그딴 되먹지도 않는 견제를 하냐고. 왜 니들 수준으로 끌어내리냐고 길길이 날뛰고 싶었다. 온갖 욕을 다 퍼붓고 와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통탄스러워서 한숨이 터졌다. 남자 좆이나 빠는 주제에 누구한테 훈계할 입장이 되는 줄 아는 건가. 당황할 거 없이 그 자리에서 받아쳤어야 했다. 내가 조인휘한테 발정이라도 났냐고. 사람들이 다 니 새끼처럼 더러운 줄 아냐고.

“씨발. 다 까발려 준다, 내가.”

열기로 후끈해진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통화 목록에서 고른 건 남 얘기 퍼뜨리기 좋아하는 과 동기 중 하나였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연결이 됐고, 나는 기세 좋게 입을 열었다.

“야, 너 이 얘기 듣고 기절하지 마라.”

뭐야, 뭔데?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밝혀야 더 극적일까 머리를 굴렸다. 고정원이 사실 게이고 우리 과 애랑 사귄다고. 전했을 때 돌아올 반응을 상상하는데 돌연 목구멍이 막혔다.

‘해. 너 하고 싶은 대로.’

말하던 평온한 표정이 떠오르면서였다.

“어, 그게…….”

재촉이 들려왔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니, 보통 그런 걸 자기 입으로 밝히나.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해 보면 어떤 상황에서든 그런 건 절대 발설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같은 과 동기, 사이도 안 좋은 상대한테라면 더더욱.

꺼림칙했다. 아무리 내가 지 애인이랑 가까운 게 거슬렸다 하더라도 뜬금없이 그런 비밀을 밝혔다는 게.

뒤늦게 현실적인 문제들도 밟혔다.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증거 없인 쉽게 믿을 것 같지도 않고, 잘못되면 나만 우스운 꼴 되는 거였다. 행여 믿는다 하더라도 고정원이 엿 먹는 건 괜찮지만 조인휘한테 피해가 가는 건 왠지 좀 그랬다.

생각할수록 고정원 그 새끼가 음흉했다. 꼭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길 바라는 것처럼 흘려 놓고 막상 내가 말해서 퍼지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복수할 게 분명했다. 사이코패스 같은 눈빛을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았다.

“어…… 그러니까, 우리 과에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차마 입이 안 떨어졌다. 어떻게 수습할 수가 없어서, 이미 사귀는 걸로 알려진 우리 과 커플 얘기를 들먹였다. 그리고 횡설수설하다 끊었다.

“하, 씨 미친.”

통화 내내 제대로 병신 취급 당했다. 아주 다방면으로 환장할 것 같았다. 감정을 주체 못 해 욕을 중얼거리자 주변에서 힐끔거리며 피하는 게 보였다. 별수 없이 입을 꾹 다물고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아 진짜, 조인휘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사귈 사람이 없어서 그딴 정신병자랑…….

둘이 편짜서 여자 만나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정작 그 둘이 붙어먹고 있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싶다. 별명대로 고자가 아니고서야 임지원 같은 앨 까고 왜 아무도 안 사귀나 했더니. 실상을 알게 되니 웃기지도 않았다.

“……하…….”

생각해 보면 왜 몰랐나 싶기도 하다. 둘 다 심하게 티를 냈다. 그때 조인휘 그거, 고정원 피해 다니던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존나 치정 싸움이었다. 고정원 의처증 걸린 것처럼 눈 돌아가서 조인휘 행방 묻고 다닐 때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그걸 왜 눈치 못 깠을까. 둘 다 그렇게 붙어먹는 중이라고 염병 광고를 못 떨어서 안달이었는데.

“…….”

언제부터였을지 생각하다 뭐가 하나 떠올랐다. 학기 초, 수업 끝나고 흡연 구역에서 고정원을 본 적이 있다. 고정원은 내가 온 줄도 몰랐다. 그저 뭔가를 쳐다보면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주변은 신경도 안 쓰고 한곳만 뚫어지게 보길래 의아했었다. 저거 대체 뭘 저렇게까지 보나. 따라서 그쪽을 봤더니 조인휘가 보였다. 덜렁대다 엎었는지, 바닥에 흐트러진 인쇄물을 줍고 있었다.

왜 저러고 봐?

조인휘는 이내 엎은 걸 수습하고 중앙 도서관 쪽으로 향했다. 사라져 가는 뒷모습으로 고정원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고정원은 끝까지 보고 있었다. 느리게 담배를 피우면서, 눈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집중하면서.

“와……. 진짜.”

그거 존나 오싹했었는데. 회상하고 나자 실소가 나왔다. 그 수상한 광경을 조인휘한테 말해 준다는 걸, 지금껏 까먹고 있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버스에 오르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췄을 땐 밖에 서 있는 여자들을 보며 생각했다. 세상에 여자가 저렇게 많은데 뭐가 아쉬워서?

조인휘 오늘 하는 걸 봐선 푹 빠져 있었다. 헤어지는 건 꿈도 안 꿀 거 같았다. 한창 좋아서 죽고 못 사는 시기 같은데 어차피 지나면 시들해질 게 뻔했다.

통쾌하다면 통쾌하기도 했다. 남자끼리 불쌍하기도 하고, 둘이 눈 맞아서 여자한테 관심 없는 건 나한테 잘된 일이었다. 갑자기 우스워서 웃음이 터졌다. 지들끼리 눈 맞은 놈들을 두고 다들 잘생겼다느니 사귀고 싶다느니, 기가 막혔다. 그런 놈들하고 비교하면 나는 정상이고 제대로 된 남자였다.

깨닫고 나자 안도감이 들면서 휘몰아치던 분노가 가라앉는 듯했다. 대신 찝찝한 불쾌감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는 마음이 바빠져서 저장된 연락처들을 훑기 시작했다. 아무나 괜찮으니까 해가 바뀌기 전에 사귈 여자가 필요했다.

곧장 몇몇을 골라 메시지를 남겼다. 그걸로는 부족해서 한 명한테는 전화를 걸었다.

“어, 민……!”

받은 줄 알았더니 소리샘 안내음이 튀어나왔다. 신경질이 나서 끊고, 다음 여자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목소리 한번 내 보기도 전에 끊기는 게 몇 번이나 반복되자 성질이 났다.

“아오!”

오늘 일진으론 뭘 해도 안 됐다. 뭘 해 보려 노력할수록 기분만 잡치게 되리란 걸 예감하고 잠자코 눈을 붙였다.

죽겠네, 진짜.

누가 오늘 하루치 기억을 통째로 날려 준다고만 한다면 흔쾌히 돈이라도 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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