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 약속 (12/30)

외전 3. 약속

집에 돌아오자마자 간신히 유지하던 힘이 다 빠졌다. 욱신거리는 어깨와 화끈거리는 발바닥 통증을 느끼며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의 델 것처럼 최대한 뜨겁게 온도를 맞추고, 수압도 제일 강하게 해서 물을 틀었다. 훌훌 벗어던진 알몸으로 물줄기를 맞자 안마 받는 것처럼 싸한 시원함이 번졌다.

“아……. 진짜 못 해 먹겠다.”

삼 주째 이어지고 있는 서빙 알바는 괜히 높은 시급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이 죽을 만큼 힘들었다. 카페 알바도 쉬운 건 아닌데 그보다 몇 배로 고된 느낌이었다. 한가한 시간대가 있는 카페와 달리, 여기 서빙 알바는 그보다 짧은 시간이지만 훨씬 고되게 몰아붙여서 쉼 없이 일하다 보니 끝나면 정말 쓰러질 것 같았다.

빨리 눕고 싶어서 짧게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머리도 대충 수건으로만 털어 낸 뒤,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희미하게 시트에 남아 있는 익숙한 향기에 편안해진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맞다.”

꽉 잠겨서 걸걸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눈이 감기고 점차 머릿속이 흐릿해지는 도중, 불쑥 고정원한테 전화해야 한다는 게 떠올라서였다. 틈틈이 문자를 주고받기는 해도 일이 끝나거나 잠들기 직전에 꼭 통화를 하는 건 자주 떨어져 있게 된 요즘, 하루의 마무리와 같은 거였다.

나도 알바를 늘린 탓에 정신없기도 했지만 고정원도 요즘 들어 바쁘게 되었다. 정확한 사정은 듣지 못했지만 아무튼 집안에 친한 친척 사업 관련해서 도울 일이 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집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들어 보면 내 몸은 여전히 침대 위였다.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아니어서 답답했다. 그런 식으로 현실이 아닌 꿈속에서만 전화를 걸기 수차례, 결국 휴대폰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잠이 들어 버렸다.

자는 내내 팔다리를 비롯해 전신이 온통 무지근했다. 뜨겁고, 축축하고.

침대가 자꾸 끽끽 울어 대며 들썩거렸다.

뭐지……?

여러 가지 어수선함에 설핏 깨어났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익숙한 냄새와 감촉 덕분에 침대에 들어온 거대한 인영이 고정원임을 즉각적으로 알았지만 그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야…… 너 언제 왔어?”

무거운 머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고정원은 어느 틈에 내 티셔츠를 들추고, 젖꼭지를 빨고 있었다. 내가 묻기가 무섭게 고개를 들고는 다급하게 입을 맞춰 왔다. 뒤통수에서 뒷목까지 감싸 내려오는 손바닥의 온기에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러고 보니 고정원은 웃통까지 벗어젖힌 상태였다.

“머리 말리고 자라고 했잖아.”

안 그래도 저음인 목소리가 바닥에 긁히듯 유난히 낮게 들렸다.

“아……!”

젖꼭지를 아프게 꼬집은 손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대뜸 허리춤을 붙들었다. 팬티와 바지가 한꺼번에 젖혀지면서, 자느라 풀 죽어 있던 성기가 바깥으로 툭 노출됐다.

바지가 다 벗겨지지도 않고 종아리에 걸쳐져 움직임이 불편했다. 그 상태에서 엉덩이가 훤히 드러나도록 젖혀지자 나는 당황해서 고정원의 손목을 붙들었다.

“지금 하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딱 봐도 고정원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막 깨서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화난 이유를 짐작했다. 아마 내가 통화도 안 하고 그냥 자 버려서겠지. 그렇잖아도 최근 들어 제대로 붙어 있을 여유가 없어서 불만이 가득인데 이것마저 제대로 안 지켰으니. 게다가 이런 식으로 연락을 놓친 게 벌써 세 번째였다.

“응. 하고 싶어.”

하루 종일 하고 싶었어.

작은 중얼거림이 잇따랐다.

“…….”

지익, 하고 지퍼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굵직한 성기가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도 반들거리는 뭉툭한 살덩이가 벌어진 둔부 사이를 툭, 툭, 때리기 시작했다.

“코, 콘돔은……?”

한창 싸웠을 때의 위태롭던 기운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위축이 된 나는 소심하게 물었다. 분위기 상 웬만하면 그냥 하겠는데 시트를 어제 막 바꾼 참이라…….

“시트는 내가 알아서 치울게.”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걱정하고 있던 부분을 차단시킨 고정원은 끈적한 쿠퍼액으로 젖어든 끄트머리를 다물린 구멍에 문질렀다.

꾹꾹 짓이기며 침입하려는 살 기둥을 느끼며,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평소엔 눅진하게 애무하고 들어오던 것이 별다른 전희 없이 그대로 들어오려 하니 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과장을 보태 내 팔뚝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굵기였다. 긴장을 흡수한 주변이 움찔움찔 조여들고 팔다리는 서늘하게 저려 왔다.

“그, 내가, 빨아 줄까?”

묻는 말에 가만히 움직임을 멈춘 고정원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응.’ 하고 제안에 응한 입술에서는 요구가 이어졌다.

“여기로, 먹어 줘.”

“…….”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머뭇거리는 사이, 끝이 무딘 흉기가 안으로 푹, 파고들었다.

“아흑!”

단번에 온몸으로 힘이 들어가며 숨이 턱 막혔다. 연약한 속살이 쓸린 홧홧함에 머릿속까지 벌겋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통증을 견디느라 조인 힘을 풀지 못하고 있자 고정원도 버거웠는지 낮게 숨을 내쉬는 게 들렸다.

“아파…….”

나는 작고 새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좀처럼 상냥하지 못한 행위에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들려 했다.

잠시 부둥켜안고 가만히 서로가 서로에게 짓눌리는 압박감을 유지시키던 고정원은 느리게 움직임을 더했다. 그러나 그 속도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속을 가르던 굵직한 살덩이는 어느 한 부근만을 겨냥해서 찔러 올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들어와 마냥 아플 줄만 알았는데. 고통스럽게 참던 신음에 야릇한 음색이 스며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성기와 뱃속이 짜릿하게 울리면서 통증이 무뎌지는 지점. 너무 잘 알고 있는 쾌감이 시작되면서 감당하기 힘든, 극치를 찍는 감각들이 급격하게 마구잡이로 몰아쳤다.

“아으, 아……!”

다른 때는 그래도 차근차근 단계를 거치는 느낌인데 오늘은 그런 게 없었다. 다짜고짜 벼랑으로 내모는 것 같았다. 생각도 못하도록 자극점을 집중적으로 몰아붙이는 탓에 서러움이고 뭐고 느낄 새도 없이 턱을 한껏 젖힌 채 허덕였다.

끝까지 벗겨지지 않고 걸쳐진 속옷과 바지가 구속처럼 양다리를 부자유하게 묶어 두고 있었다.

“흣! 아흐! 아!”

옴짝달싹도 못하도록 고정된 채 쾅쾅 내벽을 찔러 오는 성기를 느끼며 몸부림쳤다.

금세 척척해진 안을 짓찧던 성기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예고 없이 푹, 빠져나가자 하체가 덜덜 떨리며 경련했다.

놀랄 만큼 빠르게 찾아온 사정으로 엉덩이에서부터 허벅지까지 파르르 전율했다. 성기가 자릿자릿했다. 고정원은 내 다리에 걸려 있던 속옷과 바지는 물론 윗옷까지 전부 벗겨 내고 활짝 벌린 다리 사이로 몸을 숙여 왔다.

"알바, 언제까지 하게?"

사정하면서 성기에서부터 튀어 오른 정액이 내 턱 언저리에 묻어 있었던 모양이다. 고정원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의 입안으로 빨아 없앴다. 그리고 은근하게 눈치 주듯, 지난번에도 했던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내뱉었다.

“나한테 빌리라니까 왜 고집을 부려.”

알바를 하나 더 늘린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고 다만 급전이 필요하다고만 핑계를 댔었다. 그 말을 들은 고정원은 흔쾌히 빌려주겠다면서 내 기준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큰 금액을 들먹여 사람을 당황스럽게 하더니, 거절한 뒤에도 언제 알바를 그만 둘 거냐, 왜 자기한테 빌리지 않느냐며 은근하게 나를 압박하는 중이었다.

애당초 내 돈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일관되게 모른 척하고 있었다.

“…….”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무반응으로 대꾸하자 고정원은 심기가 거슬렸는지 통째로 씹어 먹을 듯한 기세로 입을 맞춰왔다.

“흣.”

실제로 입술이 잘근거리며 씹히고, 마치 잡아당겨지는 것처럼 아프게 빨아 당겨졌다. 이러면 내일 흉한 꼴로 퉁퉁 붓는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심술부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키스가 아닌 괴롭힘처럼 입을 맞춰 대던 고정원은 과감하게 내 몸을 뒤집었다. 양쪽 골반을 휙, 들어 올리고 삽입하기 편하도록 자세를 잡고 있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올 기척을 느낀 나는 흐트러졌던 숨을 모았다.

“음……!”

시트를 입에 물고 손을 꽉 쥐었다. 원래라면 몸에 힘을 주지 않도록 노력했을 텐데 고정원이 거칠게 구니 나도 힘을 뺄 이유가 없었다. 완전히 들어오자, 이번에도 꽉 물고 물리는 내벽의 긴장으로 인해 서로의 입에서 말라붙은 숨이 터져 나왔다.

내 허리를 붙든 고정원은 안으로 힘차게 들이쳤다. 근육으로 딱딱한 하복부에 부딪힐 때마다 엉덩이에 붙은 살들이 엉망으로 뒤흔들렸다. 그야말로 살 떨리는 마찰이었다. 반사적으로 앞으로 도망가자, 손으로 복부를 받쳐 올리고는 들린 상태에서 무식하게 박아 댔다. 공중에 살짝 뜬 다리가 아찔한 감각을 더했다. 철썩거리며 맞부딪는 강도가 점점 거세어졌다.

“천천, 히 좀……!”

내 부탁은 무시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말살당했다. 고정원은 고장 나기 일보 직전인 침대가 엉망진창으로 덜컹거리거나 말거나, 내 몸이 납작하게 무너지도록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두꺼운 손이 내 입을 틀어막고 나서야 나는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너져 엎드린 내 뒤로 고정원은 자비 없이 들쑤셔 댔다. 괴성 같은 신음은 고정원의 손 안에 갇혀 울렸다.

‘퍽! 퍽!’ 살끼리의 부딪힘이 묵직했다. 무뎌지지 않는 각도로 정확히 한 부위만을 찍어 올리는 집요한 행위에 새까만 사방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눈앞이 번뜩였다. 두툼한 기둥이 속을 찍어 올릴 때뿐 아니라, 들어오고 나갈 때 민감하게 달아오른 내벽을 스치는 것만으로 극심한 자극이 되었다. 성기의 모든 움직임을 따라 하반신이 볼품없이 떨렸다.

“히으! 악! 아으……!”

앞뒤가 모두 흠씬 젖어 들었다. 입 주변도, 한껏 벌어진 뒤도. 어디 할 것 없이 진득하고 축축해진 게 느껴졌다. 나중엔 젖은 음모와 살덩이가 찰기 있게 마찰하며 츱, 츱,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렇게 한참을 지치게 만들고 난 후에야 과격하던 움직임은 보다 느슨하고 부드럽게 변했다.

“그만, 그만해…….”

쥐어 짜내어지는 듯한 사정을 맞고 나서도 여전히 뒤를 건드려지는 탓에 성기는 팽팽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만하고 싶었다.

“뭘 그만해. 이렇게 싸면서.”

시트에 문질러지고 있던 내 성기를 붙든 손아귀의 악력이 강했다. 나는 숨을 참고 허리를 뒤틀었다. 아픔인지 쾌감인지 모를 경계의 감각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격렬히 저었다.

그 순간 몸이 휙, 가볍게 들렸다.

나를 들어 올려 마주 안은 고정원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방안의 불을 밝히는 거였다. 걷는 걸음마다 뱃속의 성기가 꾹꾹 빠졌다 누르는 압력을 참아 내며 나는 힘껏 매달려 있었고, 발이 땅바닥이 닿고 보니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방 한구석의 전신 거울 앞이었다.

밝아서 눈이 잘 안 떠지는 가운데, 고정원은 내 몸을 천천히 앞으로 돌렸다. 이어져 있는 살덩이를 빼지도 않은 채 곡예라도 하듯 아슬아슬하게. 불편한 자세를 지탱한 나는 작게 헐떡이며 단단한 힘에 몸을 맡겼다.

“이래도 그만해?”

습하고 뜨거운 입술이 바싹 닿았다. 어둠에 잠겨 있다 밝기에 적응한 눈이 간신히 뜨였을 때, 나는 전신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생각을 뛰어넘는 가관이었다. 익은 것처럼 벌게진 피부야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비어져 나온 침으로 범벅된 입술은 힘이 빠져 벌어져 있었고, 초점 없이 흐트러진 눈은 똑바로 보기도 민망할 정도로 제정신 아닌 사람처럼 보였다.

“네가 이래.”

고정원의 한쪽 손은 내 다리 한쪽을 잡아 벌리고 있었다. 보란 듯이 좀 더 젖힌 탓에 삽입된 부분이 슬쩍 드러났다. 질퍽하게 고여 있던 정액이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걸 본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왜, 안 보고.”

일부러 귓전에서 말하는 고정원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피했다. 그러자 뜨거운 입술이 목 언저리와 귓불에 문질러졌다. 귓속을 파고드는 혀의 간지러움을 못 견디고 발버둥치자, 붙들고 있는 힘이 돌덩이처럼 견고해졌다.

“아!”

안을 가르는 자극에 눈이 번쩍 뜨였다. 살끼리 치대는 반동을 따라 휘어 오른 성기가 흔들리고, 높이를 맞추느라 뒤꿈치를 든 종아리는 쥐가 날 듯이 저렸다. 찧어 대던 움직임이 겨우 멈추자 힘이 쭉 빠지며 몸이 기울었다.

그러나 손이 위로 올라오면서, 흐느적하던 등줄기로 단번에 힘이 서렸다. 씹혀서 가뜩이나 얼얼해진 유두가 성가시게 구는 손길 때문에 더욱 화끈거렸다. 가슴팍을 한껏 내민 채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비트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나는 정면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몰랐어.”

가슴에 매달린 여린 돌기를 둥글리던 손이 밑으로 내려갔다.

“보면서 하는 걸 더 좋아할 줄.”

퉁, 하고 손끝으로 건드려진 성기에서부터 전류 같은 찌릿함이 번졌다. 체액으로 번들거리던 성기는 곧 건조한 손바닥에 감싸였다.

“내가 본 것 중에서 제일 커진 것 같은데.”

애써 외면하고 있는데 고정원은 자꾸 안 해도 될 말을 하며 나를 들쑤셨다. 확실히 아프게 당길 만큼 커져 있는 상태긴 했다. 게다가 그걸 또 부드럽게 감싸 흔들어 대니 원하지 않아도 액이 질금질금 비어져 나왔다.

또다시 뒤를 드나드는 왕복이 시작되자 눈이 질끈 감겼다. ‘하…….’ 등 뒤로 쏟아지는 긴 숨에선 만족감이 배어났다. 느릿하게 들어왔다가 똑같이 느리게 빠져나가는 살덩이는 유독 또렷한 궤적을 남기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찐득찐득한 게 가득 들어찬 거 같다. 배뿐만 아니라 머릿속도. 다 같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지친 신음과 함께 흔들리다 눈을 뜬 순간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몰랐다. 고정원은 흐트러진 와중에도 일견 매서워 보일 만큼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시선으로 내 얼굴에서 어깨까지, 입술을 쪼아 대며 천천히 애무해 내려갔다.

오밤중.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시각. 입술이 살에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 초조하게 뱉어지는 숨결의 흐릿한 소리조차 몇 배로 증폭되어 들렸다.

자잘한 애무는 때가 되면서 키스로 변했다. 꺾인 고개로 한참이나 입을 맞추었다. 젖은 점막끼리 양껏 섞어 댄 후, 고정원은 내 턱을 붙들어 정면을 향하게 했다.

“얼른 봐. 우리가 어떻게 섹스하는지.”

강요 같기도 하고 조언 같기도 한, 정체가 모호한 속삭임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네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봐.”

그리고 갑작스레 거칠게 쳐올려지는 자극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안이 충분히 벌어진 상태여서 아프진 않았지만 다른 의미로 충격이 거셌다. 푹푹 꽂혀드는 사나운 마찰은 그 격렬함에 맞먹는 극적인 사정감을 불러일으켰다. ‘아윽! 아! 흐아!’ 요란한 비명을 참지 못하고 흘리는 사이 매끈한 거울의 표면으로 묽은 체액이 튀어 올랐다.

“흐……!”

지지대처럼 흔들림 없이 나를 붙들고 있던 힘이 빠져나가면서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털썩 엎드려 떨리는 사지를 가누려 애쓰다 옆으로 쓰러졌다. 동시에 뱃속에서부터 고정원이 빠져나가며 내벽이 날카롭게 긁혔다. 허리랑 다리에 힘이라곤 남아 있지 않았고, 성기에선 묽은 체액이 줄줄 쏟아지는데 황당하게도 아직 사정을 했단 느낌이 들지를 않았다. 안쪽이 근지럽게 조여들면서 초조함으로 온 신경이 들끓었다.

“흣…….”

손이 절로 앞으로 옮겨졌다. 맘 같아선 뒤가 쑤셔졌으면 싶었지만 어쩔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쏟아 내고 싶었다.

하지만 탁, 하고 매섭게 손이 내쳐지면서 방해받았다. 뜨거운 손바닥이 내 발목을 그러쥐고는 쭉 잡아당겼다. ‘으응…….’ 나는 괴롭게 울면서 어느새 고정원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딱 한 번만, 망치질 당하듯 거칠게 박히고 싶었다. 그러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한 번이 아쉬워서 몸이 배배 꼬이고 숨이 헝클어졌다.

“넣어 줘…….”

부탁하는 말을 듣는 체도 하지 않고, 고정원은 내 허벅지를 잡아 벌리기만 했다. 안달 나서 뻐끔대고 있는 구멍에 손가락이 문질러지자 허리가 발작하는 것처럼 위아래로 덜컹거렸다.

“아, 빨리……, 빨리 해 줘 제발…….”

나는 다 뭉개진 발음으로 애원했다. 거의 빌듯이.

“해 주면?”

대체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건지 몰랐다. 뜬금없는 조건부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작게 앓으며 엉덩이만 들썩였다. 이를 꽉 물면서 참아 보려 했지만, 촘촘하게 주름진 입구에 변덕스럽게 입을 맞췄다 떼는 살덩이 때문에 조바심이 극에 달했다.

“빨리 바보야……!”

짜증 내며 힘없는 팔로 바닥을 탁, 쳤다.

조급해 보이긴 했는지 마침내 고정원의 입에서 알기 쉬운 형태의 요구가 떨어졌다.

“필요하다는 돈, 나한테 빌려.”

“……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요구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정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시선이 조금 더 가까워졌고, 엉덩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감각이 보다 확실해졌다.

“일은 그만두고.”

조금 들어온 것만으로 헉, 하고 가슴이 팽팽해졌다. 의지와 상관없이 허리가 들리면서 근육이 촘촘히 곤두섰다. 호흡도 제대로 못하고 고개를 꺾은 채 시근덕대고 있자, 옆구리를 붙든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배의 휘어진 곡선을 따라 쭉 훑어 내리는 엄지손가락의 감촉. 허벅지를 벌리고, 움푹 패도록 세게 움켜쥔 모든 손가락들의 감촉이 몹시도 뚜렷했다.

“응?”

후끈한 숨결을 가져와 귓전을 빨아올리는 애무에 입이 벌어지면서 신음이 샜다. 나는 완전히 녹고 있었다. 달콤한 목소리가 안으로 흘렀다.

“원하는 대로 다 해 줄 테니까…….”

“…….”

“그냥, 고개만 끄덕여 봐.”

귓바퀴를 머금어 느릿하게 빨아 대는 통에 멀쩡하게 뭘 판단 내릴 수도 없었다. 그저 빨리 배가 꽉 차게 들어와 줬으면 하는 생각밖엔 드는 게 없었다. 늘 하던 대로 난폭하게 쑤셔 주기만을 바라면서 끙끙거리던 나는, 끝내 시키는 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는 거야?”

고정원이 굳이 내게 한 번 더 확인을 요했고, 나는 고정원의 뒷머리를 힘없이 움켜쥐며 ‘어어’ 하고 울먹이듯 대꾸했다.

“흐앗!”

쾅, 쾅!

그건 미적지근하던 애태움을 만회시키고도 남는 격렬한 치받음이었다.

“아! 아!”

꼭 세상이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뒤흔들리면서, 흉포하고 거대한 쾌감이 머리의 정점까지 짓찧어 댔다. 숨이 넘어갈 거 같았다. 잔뜩 힘준 몸 곳곳으로 뻗어 나간 혈관들이 죄다 터지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짧고 굵은 뒤흔듦이 지나가고 나서도 거센 여운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나는 파들파들 떨리는 피부와 뼈마디를 느끼며 고정원의 땀 배긴 등을 끌어안았다.

“읏…….”

“후…….”

사정을 마친 고정원이 빠져나가고, 허전함을 느낄 새도 없이 후희가 뒤따랐다. 전신은 계속해서 후들거리는 중이었다. 민감하게 진동하는 몸 곳곳에 입술을 문질러 주던 고정원은 내 중심을 입으로 한 번 빨아올리기까지 했다. 후희의 가벼움을 넘어선 애무에 긴장하던 그때, 물크러진 엉덩이 속으로 긴 손가락이 파고들어 왔다.

“으아……!”

울음이 터질 거 같았다. 굽어진 손가락이 특정 부위에 연속적으로 문질러지는 게 미치겠는 느낌이었다. 막 사정을 하고 나서 그냥 두기만 해도 점막끼리 들러붙는 느낌이 선연할 정도로 안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다 끝난 마당에 이런 식으로 헤집어지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자극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빼라고 외쳐도 듣지 않고, 오히려 힘껏 움직여 댔다. 빠른 진동. 아흐아흐아흐, 이상한 동물 같은 울음. 몸속이 물로 가득 차오르는 느낌과 함께 나는 연달아 사정을 맞았다. 차오르는 느낌이 착각이 아니었는지 정말 투명한 물 같은 게 쏟아졌다.

그 낯 뜨거운 광경을 빠짐없이 지켜보던 고정원은 잘게 흔들리는 내 무릎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창피함이고 뭐고 신경 쓸 정신머리도 없이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처럼 멍하니 헐떡이고 있었다. 앞으로 수백 번을 더 한다 하더라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

추스를 수도 없게 엉망이 돼 버린 내 얼굴을 면밀하게도 쳐다보는 시선에 쾌감에 묻혀 있던 자의식이 서서히 고개를 들 무렵이었다.

고정원은 나를 안아 올려 침대로 옮겼다. 그리고 젖은 입술을 맞추었다. 한참이나 기분 좋게 섞고 빨다가 입을 떼자 상냥한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 우리는 스펀지처럼 가볍게 서로에게 입술을 맞대고 뽀뽀를 했다. 몇 번이나.

고정원의 이마 한쪽에는 살짝 핏줄이 서 있었다. 할 때 보면 어떤 날엔 여기 혈관이 이렇게 불툭 서 있고 어떤 날엔 평상시와 같이 밋밋했다. 차이가 생기는 원인이 뭔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꽤 선명하게 불거져 있었다. 축 처진 팔을 힘겹게 들어 올린 나는 튀어나온 핏대를 살살 매만졌다. 느낌이 재밌기도 하고 그냥 그러고 싶어서 계속 만진 것뿐인데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고정원의 두 눈이 삽시에 깊고 습하게 물들었다.

“한 번만 더 할 수 있겠어?”

그새 부풀어 올라 뜨뜻하게 피부를 누르는 살 기둥을 느낀 나는 몸을 굳혔다. 힘준 목을 재빠르게 흔들며 말했다.

“죽을 것 같아 진짜로…….”

좀 비굴하게 엄살을 부렸다. 고정원은 아쉬운 것처럼 뜨거운 숨을 목덜미에 고이도록 내쉬더니 죄 없는 내 귓바퀴를 잇새로 약하게 씹어 대기 시작했다. ‘음…….’ 하는 느른한 소리를 내며 딱딱한 몸을 자꾸 치대는 게 심장을 펄떡이게 만들었다. 잔뜩 긴장한 내 허리와 엉덩이를 매만지는 폼이 그만 할지 어쩔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안 할 거야.”

불안해서 꼼지락대다가 고정원의 한마디에 버둥거림을 멈추었다. 내가 얌전해지자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킨 고정원은 내 팔을 끌어당겨 함께 일으켜 앉혔다. 벽과 내 등 사이에 쿠션을 넣어 기대게 만들고는 자기의 허벅지 위로 내 다리가 올라오도록 겹쳤다.

“그냥 보기만 해.”

뭘 보라는 건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울퉁불퉁 시근덕대는 성기가 커다란 손에 붙들리는 것에서부터 슬슬 주물러지며 크기를 키우고 흔들리는 것까지 빠짐없이 눈에 들어왔다. ‘후…….’ 낮은 한숨을 내쉬는 고정원이 남은 한 손으로 내 입술과 턱을 어루만졌다.

“…….”

와. 이건 좀 민망한데…….

나는 꼴딱꼴딱 넘어가는 숨과 침을 어떻게든 티 나지 않게 간수하며 벌게진 눈동자를 애매한 곳에 떨궜다. 전에도 사정하기 직전 빼내서 혼자 흔드는 모습 같은 건 봤는데 이렇게 본격적으로 자위하는 건 처음 봐서 그런지 뭔가 되게…… 설명은 잘 안 되는데 아무튼 느낌이 이상했다.

“봐 줘야 싸지.”

제대로 안 보고 있는 걸 눈치 챈 고정원이 내 입안으로 손가락을 넣으며 말했다.

“어, 보오 이는데…….”

발음이 웃기게 샜다. 혀 가장자리를 스친 엄지손가락이 무례하게 안을 매만진 탓이었다. 손가락이 나가지도 않고 혓바닥을 문질러댔다. 빨아달라는 신호라는 걸 눈치채고 나는 입을 모아 사탕 먹듯 고정원의 손가락을 빨았다.

옅지만 힘겨운 기색의 한숨이 들렸다.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은 묵직한 성기가 쉼 없이 흔들리면서 팔뚝과 손등 위로도 위협적인 힘줄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마주한 거리가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고정원이 그 단련된 팔로 무섭도록 힘차게 성기를 쳐올릴 때마다 침대 스프링을 비롯해 내 몸도 덩달아 들썩거렸다. 뒤로 넣어진 것도 아닌데 반사적으로 안쪽 깊숙한 곳이 조여들며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문제는 생겼다. 고정원이 나직한 신음과 함께 끝을 낼 쯤, 반대로 나는 발딱 서게 된 것이다. 어쩔 줄 모르고 아니라고 변명하다가 입술끼리 맞물리면서 그 뒤로는 아무 말도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정원의 위에 올라타 허리를 흔들고 있었고, 몇 번이나 체위를 바꾼 끝에 지독한 사정을 맞았다. 겨우 끝나고 나자 내 몸은 사람의 몸뚱이라기보단 텅 비고 푹 젖은 헝겊 인형에 가까웠다.

“오늘 약속한 거 잊으면 안 돼.”

배와 가슴팍에서 뒤섞인 체액을, 닦아 주긴커녕 도리어 손바닥으로 더 넓게 문지른 고정원이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대답할 기운은 물론 없었다. 약속이 뭐였더라, 더듬어 보던 나는 간신히 숨만 색색대다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여러 번 잠에서 깼던 것 같다. 처음 깼을 땐 몸이 붕 떠서 어딘가로 옮겨지는 걸 느꼈고, 두 번째로 깼을 땐 차가운 얼음 팩이 이마나 뺨을 번갈아 가며 누르고 있었다. 세 번째는 방 안이 밝았는데 옆에 누운 고정원이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더 자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번에 눈을 떴을 때는 다행히 잘 만큼 푹 잤다는 느낌이 들었다. 근처에서부터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풍겨 오는 고소한 냄새를 맡은 나는 힘주어 상체를 일으켰다.

“으…….”

온몸에 배긴 근육통을 참고 침대를 벗어나는데 문득 손에 잡힌 이불이 낯설어 보였다. 이런 게 있었나? 자세히 보니 커버 시트까지 전부 새로 바뀌어 있었는데, 전부 처음 보는 새 거였다.

딱 봐도 비싼 것처럼 보이는 시트를 들춰 보다가 하, 하고 작게 터뜨리듯 웃었다. 이번에 침대 스프링이 거의 망가져서 고정원이 새로 사겠다는 걸 말렸었는데 아마 새 침구로 대신한 모양이었다. 집 열쇠를 준 뒤로 고정원은 이렇게 내가 모르는 사이 새로운 물건들을 턱턱 들여 놓곤 했다. 엄청 큰 거 사면 내가 진심으로 거절하니까 이렇게 자기 나름 소소한 걸로.

“시트 언제 샀어?”

무언가 만들고 있는 고정원의 뒤로 가서 등을 껴안으며 물었다. 가스레인지의 환풍기 소리에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그제야 뒤를 돌아본 고정원은 웃으며 대꾸했다.

“어제. 몸은 좀 괜찮아?”

“……어.”

근육도 욱신거리고 엉덩이 안쪽도 아팠지만 솔직하게 말하기엔 고정원의 기분이 너무 좋아 보였다. 최근의 그 위태위태한 분위기가 사라져 있었고, 원래의 느긋하고 나긋한 태도라서 나도 좀 마음이 놓였다.

“열은 안 나?”

“응.”

진을 빼듯 하고 나면 꼭 열이 나니까 언제부턴가 고정원은 끝나고 나서 내 뒤처리를 해 주는 건 물론이고 아이스 팩으로 마사지까지 해 주곤 했다. 내가 힘들어서 곯아떨어진 동안 시트를 갈고 이것저것 내 수발을 들어 준 수고가 고마워서 나는 발꿈치를 들어 고정원의 턱 근처에 쪽, 뽀뽀를 했다.

요리하는 걸 방해할 생각은 전혀 아니었는데, 고정원은 그 뽀뽀 하나에 갑자기 꽂힌 것 같았다. 가려던 나를 붙잡고는 내가 해 준 것과 똑같은 자리에 쪽, 뽀뽀를 했다. 그걸 시작으로 귀찮을 정도로 이곳저곳에 뽀뽀를 해 대는데 간지러워서 안 웃을 수가 없었다.

“아, 간지러!”

우리는 서로 꼭 껴안은 채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찍고 장난치며 큭큭 웃었다. 나는 맨발로 고정원의 발등에 올라서서 목을 끌어안고는 잘생긴 코를 깨물기도 했다. 그러다 진짜로 고정원이 흥분해서 위험할 뻔했지만 다행히 내 빈 배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우리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같이 식사 준비를 했다.

조금 불어 버린 파스타를 배부르게 먹고 드러눕자 시간은 오후 세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먹고 나니까 또 잠이 몰려와서 보송한 시트에 뺨을 부비고 있었다. 설거지까지 마치고 온 고정원은 먹고 바로 누우면 안 된다는 잔소리를 하며 날 일으켜 세웠다. 억지로 팔을 잡고, 자기 맘대로 천장으로 쭉 펴게 만들며 강제 스트레칭을 시켰다.

“놔, 아파.”

전신 거울에 우리 둘의 모습이 비치면서 괜히 당황한 나는 팔을 떨치고 침대 안으로 몸을 숨겨 버렸다. 어제 거울 앞에서 했던 섹스가 생각나자 괜히 목이 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여간 고정원…….

“잠깐 일어나 볼래?”

웅크리고 누워 있는데 고정원이 가져온 건 홍삼이었다. 매일 먹기 쉽도록 스틱형으로 된. 사다 준 성의를 생각해서 먹고 있기는 한데 부모님도 안 챙겨 드시는 걸 내가 꼬박꼬박 먹자니 좀 민망하기는 했다.

“으…….”

손수 스틱의 끝에서부터 내용물을 밀어 입안에 넣어 준 고정원은 입가에 비어져 나온 액까지 슥 닦아 주었다.

“너는?”

“난 벌써 먹었어.”

왠지 거짓말 같았지만 굳이 추궁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고정원은 여기서 더 체력이 좋아지면 내가 큰일 날 거 같아서…….

홍삼을 받아먹고도 나는 누적된 피로를 못 이겨 축 늘어졌다. 한 숨 더 자야 하나. 이불을 끌어 덮는데 고정원의 손이 어깨 위로 올라왔다.

“하지 마, 너도 힘든데.”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정원은 내 등과 허리를 시원하게 풀어 주고는 두피까지 지압해 주었다. 너무 자주 받아서 미안하고 부담스러운데도 몸만은 염치없이 솔직해서 연신 황홀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안마가 끝난 뒤엔 나도 고정원의 어깨를 주물주물해 주었다. 힘이 없어서 그다지 안 시원할 건 알지만 그래도 고마워서. 고정원은 내내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었고 우리는 기분 좋은 오후의 화창함 속에서 마주 보고 누워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서로가 모르는 시간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시시콜콜하게 보고하는 시간이었다.

“오늘 얘기하는 게 낫지 않아?”

“응? 뭘?”

“일, 그만두는 거.”

그러다 갑작스럽게 진행된 뜻밖의 얘기에 나는 어……, 하고 경직되었다.

“그만……둬?”

“서빙 일 그만두기로 했잖아. 돈은 나한테 빌리고. 벌써 잊어버렸어?”

아……. 나는 그제야 고정원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였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마음껏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

구레나룻 근처의 머리카락을 슬슬 문지르다가 목덜미 부근으로 옮겨 간 고정원의 단단한 손이 갑자기 무겁고 갑갑하게 느껴졌다. 미치겠네 정말. 나는 왠지 무언의 압력처럼 느껴지는 고정원의 눈과 그 아래쪽 어딘가를 번갈아 힐끔대다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나 못 그만 둬…….”

주변을 부유하던 공기의 밀도가 빽빽해지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왜?”

“…….”

나는 똑바로 대답을 못 했고, 목 언저리에 얹혀 있던 손과 서로에게 얽혀 있던 다리는 단숨에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나한테 돈 빌리는 게 그렇게까지 싫은 거야?”

“아니 지금 왜 그런……!”

뭔가 오해하는 것 같아서 말이 빠르게 나갔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얹힌 듯한 탄식만 터져 나왔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 봐.”

상냥한 어조라 해도 표정이 냉랭해서 더 무섭기만 했다. 나는 우물거리면서 입만 달싹이다가 곤란한 감정이 도를 넘어가면서부터 눈을 굳세게 감았다.

“다른 사람 돈이면 몰라도, 네 돈은 안 되니까 그러지…….”

답답증에 떠밀리듯 작게 뇌까려 놓고 뒤늦게 아차 싶었다.

“무슨 뜻이야 그게?”

급격하게 심각해진 고정원의 목소리를 듣고는 더욱 후회했다. 그냥 아르바이트 사장님 핑계를 댈 걸.

“아니 내 말은……!”

뭐라고 변명을 만들어 낼수록 앞뒤가 모순되며 엉키기만 했다. 거짓말만 해 대는 게 너무 대놓고 티가 나게 되자 상황이 점점 험악해졌다.

급기야 고정원은 완전히 엉뚱한 쪽으로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나랑 헤어질 생각 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발상인지 알 수 없었다.

“뭐, 내가?!”

불안한 감정을 숨기며 해명하느라 진땀이 다 났다. 아무리 필사적으로 부정해 봤자 명확한 이유를 대지 못하니 고정원의 싸늘한 기세는 조금도 사그라들지 못했다. 나는 내가 감당하지 못할 실수를 했다는 걸 인지하고 결단을 내렸다.

벌떡 일어나 침대를 벗어나려 하자 턱하니 팔이 붙들렸다.

“어딜 가 지금.”

확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이 육안으로 보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만큼 무시무시한 열이 오른 티가 역력한 고정원이 단단하게 나를 붙들어 맸다. 본능적으로 몸에 힘을 주자 껴안아서 가두려고 들었다.

“놔 봐 바보야, 옷장 가는 거야!”

간신히 가슴팍을 밀어낸 나는 잽싸게 거울 옆에 있는 옷장을 향해 걸음을 뻗었다. 옷장 문을 열고,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었던 봉투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억울한 누명을 풀어 줄 증거물을 가져가는 것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손에 들린 작은 쇼핑백을 고정원에게 툭 내밀었다.

“…….”

묘한 표정의 고정원이 그걸 받아들고 천천히 포장지를 푸는 동안, 나는 전에 없는 긴장으로 어깨가 딱딱해졌다. 왜 이렇게 떨리고 심장이 쿵쾅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름 고심하고 또 고심해서 고른 건데. 이렇게 막상 눈앞에서 반응을 보려니 자신감이 팍 깎였다. 아무래도 전에 거에 비하면 한참 초라해 보이는 것 같아서.

“이게……, 뭐야?”

“……커플링이지 뭐야.”

뜻하지 않게 앞당겨진 다소 허무한 개봉식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주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화해한 뒤로 나는 잃어버린 반지가 마음에 줄곧 걸렸었다. 내가 신경 쓰지 않도록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는 고정원의 태도도 오히려 미안했고……. 끼고 있던 건 고작 몇 시간이긴 했어도 뿌듯하게 우리 둘 손에 자리했던 커플링이 사라지고 나니까 가끔 맨손을 볼 때면 마음이 허하고 쓰리기도 했다. 잃어버렸던 골목에서 반지를 되찾는 꿈도 몇 번 꿨었고.

처음에는 자연스레 똑같은 모델로 살 결심을 했었다. 고정원에게 반지를 받았던 날, 나눠 끼면서 차안의 콘솔 박스에 빈 케이스를 넣어 놨던 기억이 났던 나는 성공적으로 반지 케이스와 보증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남은 고정원의 반지도 그 안에 보관돼 있어서 호수도 따로 알아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거기까진 정말 좋았는데…….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백금?’

모델명을 검색해서 알아보니 우리 커플링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은이 아니라 무려 백금이었고, 미처 몰랐던 유명 브랜드인 데다 가격은 링 하나만 해도……. 나는 따라붙은 자릿수를 잘못 본 건가 싶어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세다가 두통까지 느꼈다. 예상을 웃돌다 못해 훨씬 뛰어넘어 버리는 금액에 나로선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미쳤어 고정원. 겨우 커플링에 이 돈을 쓴다고? 이 정도면 씀씀이가 거의 폭탄 수준이었다.

반지의 금전적 가치를 알고 나니 더 가슴이 아파서 한동안 속으로 끙끙 앓았다. 단순히 비싼 거라서 아깝다기보다 이렇게 큰돈을 썼을 고정원에게 너무 미안해서.

최종적으로 반지는 새로 사기로 결정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시작하는 뜻을 담아 새로운 걸 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아쉬운 스스로를 위로했다. 늘 받기만 하는 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걸 해 주는 게 반지라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좋은 걸로 해 주고 싶어서 좀 무리를 했다. 좀 많이. 우여곡절 끝에 반지는 마음에 드는 걸로 잘 샀지만, 당장 생활비부터 위험해지면서 부랴부랴 시급이 높은 알바를 늘릴 수밖에 없게 된 사정이었다.

“곧 있을 우리 200일 날 주려고 사 놨는데. 무드 없이 지금 주게 됐네.”

나는 멋쩍게 뒷목을 문지르며 말했다.

“하…….”

나란히 꽂힌 반지를 내려다보며 고정원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때문이었어?”

“그땐 네가 해 줬으니까 이번엔 내가 했지. ……표정이 왜 그래?”

나는 좀 더 눈에 띄게 좋아할 줄 알았는데 고정원이 제대로 고개도 안 드니까 괜히 불안해졌다.

“……미안하고.”

좋아서.

작게 중얼거린 고정원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웃음이 났다.

“진짜, 아까 당황해서 땀까지 났네.”

이때다 싶었던 나는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이며 고정원의 옆에 나란히 엉덩이를 붙였다.

“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냐. 뭐 헤어질 생각?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거 아니야?”

“……미안.”

사과하면서도 계속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있는 게 왠지 귀여워 보였다. 별 일이네 정말. 손가락 끝으로 괜히 고정원의 딴딴한 옆구리를 찔렀더니 그제야 가리던 손을 내리고 숙이고 있던 등을 세운 고정원이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반지 케이스는 살포시 옆에 내려놓은 채.

“네가 귀여워 보이는 날이 다 있다.”

내 말에 낮고 긴 한숨이 들려와서 더 웃겼다. 고정원의 행동 하나하나에 실실거리는 웃음이 샜다. 헤어질 생각 하냐느니 이상한 오해를 했던 고정원이 지금쯤 얼마나 후회스럽고 민망할지 생각하면 안 웃으려 해도 입꼬리가 벌어졌다.

“너 지금 되게 민망하지.”

“……그러게. 민망하네.”

안고 있던 팔을 푼 고정원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맞추었다.

“미안.”

“…….”

더운 숨결이 입술 위로 녹아들며 건조한 코끝끼리 스쳤다.

“나도, 진짜 미안……. 네가 사준 반지 잃어버려서…….”

말하는 사이사이로 말랑말랑한 입술이 닿았다.

“미안하단 말 하지 말랬는데.”

다정하기 그지없는 핀잔을 마지막으로, 겹칠 듯 말 듯 애태우던 입술이 비로소 완벽하게 밀착되었다.

반지는 서로의 손에 딱 맞았다. 전에 비해서 초라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디자인도 고정원의 손에 끼워지니 왠지 세련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게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내가 잘 고르긴 했네.

고정원은 드러나는 반응이 막 크진 않았지만 눈을 보면 지금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가 전해져 와서 나까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커플링을 나눠 낀 직후 키스를 했었는데, 그건 무슨 식장에서 하는 키스처럼 가볍고 정중했다. 예식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든 나는 공연히 혼자 쑥스럼을 타다가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다.

그 뒤로는 고정원의 가슴팍과 내 등이 닿도록 서로에게 포개어 앉아 손을 겹쳐 가며 노닥거렸다. 나란히 똑같은 반지가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게 예뻐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소원 들어주기로 했던 거 기억 나? 저번에, 카페에서.”

고정원은 내 손가락 사이로 속속들이 손가락을 끼우며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더듬어 보다가 떠올릴 수 있었다. 카페에서 고정원이 하도 귀찮게 해서 얌전히 과제를 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조건을 내걸었었다.

“아, 어! 기억 나.”

“그거 지금 들어줄 수 있어?”

집요하게 약속을 받아 내 놓고 그 뒤로 언급하지 않기에 장난인 줄 알았다. 가볍지 않은 낌새를 느낀 나는 ‘뭔데?’ 하고 물으며 뒤돌아 앉았다.

“이사 가서, 제대로 동거하자.”

벙 쪄서 대답을 못하고 있자 고정원의 설명이 잇따랐다. 한 정거장 떨어진 동네에 이미 계약까지 마친 상태라는 걸 들었을 땐 정말 깜짝 놀라서 ‘뭐?’ 하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고정원은 그동안 친척 사업을 돕는 것보다도 우리가 이사 갈 집을 알아보느라 바빴던 거였다.

“으아…….”

나는 우리 반지 때문에, 고정원은 우리가 살 집 때문에 그렇게 서로 동분서주했다는 게 기가 막혔다.

“그렇다고 계약까지 해 버리면 어떡해, 쉽게 결정할 문제도 아닌데…….”

걱정스러워서 타박처럼 한 말에 고정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다소 힘없이 내리깐 눈이 꾸중을 듣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이,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나랑 상의해야 할 부분이니깐…….”

나는 한쪽 허벅지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며 빠르게 덧붙였다. 그러자 고정원은 여전히 단정한 속눈썹을 내리깐 채 변명했다.

“마음이 급했어. 마침 우리한테 맞는 좋은 조건이었고……. 요새 계속 시간도 안 맞는데 더 끌고 싶진 않았어.”

“…….”

주저하는 듯한 눈이 나를 살폈다. 살피는 기색인 동시에, 단단하게 옭아매는 눈이기도 했다. 내 허리를 붙들어 끌어안은 고정원은 거친 날숨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랑 잠깐이라도 떨어져 있는 거 싫어…….”

애인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싶다.

사실 지금 사는 집이 여러 가지로 낡고 문제가 많은 데다 특히 방음 문제로 신경이 많이 쓰이긴 했었다. 그동안 이사 갈 처지가 아니라서 꾸역꾸역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고정원의 말이 반가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나는 팔을 들어 올려 고정원의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보증금 반은 내가 낼 거야.”

고정원은 반씩 지불하는 걸 싫어하고 본인이 다 내고서는 여유가 있어서 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못 박는 주의였다. 이번에도 그럴까 봐 걱정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럴 필요 없어.”

칼같이 거절했다. 계속 그러면 자기도 반지 못 받는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덧붙였다.

“아니 어떻게 그러냐 그래도……. 그럼 월세는 내가 다 낼게 꼭…….”

우물쭈물 말하면서도 이래도 되나 싶어서 가슴이 무거웠다.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수락을 하긴 했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계속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풀 죽어 있자 고정원은 내 목덜미에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웃었다. 받아 줘서 마음이 놓였는지 기분은 순식간에 호조를 띠는 것처럼 보였다.

“혼수 같다.”

고정원의 발언에 놀란 내가 어깨를 화들짝 올리며 당치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혼수라니. 등 전체로 뜨끈한 열이 번졌다.

“아니 정말, 결혼하는 거 같아서.”

급격한 더위를 느끼며 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인휘는 아니야?”

분위기 상 차마 아니라고 답할 순 없었다. 게다가 나도 아까 비슷한 생각을 했었으니까.

“어……. 그러게.”

수긍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어떨 것 같아?”

“어?”

“우리 결혼하면.”

홀로 조여든 목에서 콜록, 하고 기침이 터졌다.

“어, 글쎄…… 지금이랑 뭐 비슷하지 않을까.”

어정뜬 대답에 고정원이 목 안으로 깊숙하게 웃으며 나를 끌어당겼다. 등허리에 양팔을 교차해 묶고는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집 계약해서 제대로 자취한다고 부모님께도 말씀드렸어. 이제 일주일에 한 번 안 가도 될 것 같아.”

고정원은 주 일 회 정도만 집에 들렀다. 짧은 시간 다녀오는 건데도 내키지 않아 해서 내가 다 걱정이었는데 이제 그마저도 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래도, 부모님께 얼굴은 비춰야 하지 않아?”

“알아서 할게. 걱정 안 해도 돼.”

잔소리를 차단시키듯 이를 세워 목의 얇은 살들을 잘근잘근 깨문다. 못하게 어깨를 밀어내 말린 나는 조금 묘해진 기분으로 내뱉었다.

“그럼 이제 내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라고 해야겠네. 아니, 고정원 너 집인가……. 너 막 나 눈치 주는 거 아냐?”

이미 같이 살고 있는 생활이었지만, 처음부터 동거를 목적으로 새로 구한 집에서 정식으로 함께 지낸다고 생각하니 느낌이 달랐다. 그리고 아무래도 집 구할 때 조금의 경제적인 부담도 지지 않은 내 입장에서는 얹혀살게 되는 느낌도 있어서 더 조심스러웠다.

“내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지. 그리고 내가 눈치를 왜 줘. 나는 인휘 네가 외박하는 것만 아니면 문제없는데.”

저번에 고등학교 동창들 만나느라 외박을 할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통화로 말하니 표면적으로는 알겠다고 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결국 늦게라도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왠지 지금도 그때를 겨냥해서 한 말 같았다. 설마 벌써부터 눈치 주는 건가?

“기분 좀 이상한데.”

“응?”

“너 전에 아무도 못 만나게 나 가둬 버리고 싶다 그랬잖아. 진짜 가두려고 집 계약한 거 아냐?”

전에 심하게 싸웠을 때 고정원이 울컥해서 했던 말을 들먹이며 농담했다. 너무 빡빡하게 나오지 말아 달라는 뜻에서 순전히 장난으로 한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그 말을 들었던 당시에는 엄청 충격이었는데 벌써 지나간 일이 되면서 이렇게 놀릴 수 있을 정도로 덤덤하게 되었다.

“…….”

곧장 부정할 줄 알았던 고정원은 그러나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생각에 빠진 듯 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진짜야 설마?”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치뜨며 물었다.

“……그런 거 아니야, 절대.”

그제야 웃는 얼굴로 부정하며 고정원은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티셔츠 속에 손을 넣어 갈빗대 부분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웃음이 터졌다. 쓰러져 이리저리 몸부림을 쳤지만 금방 끝나지 않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특히 어느 부근이 약한지 아니까 거기만 집중적으로 건드려 대서 나중엔 정말 눈물도 나고, 원치 않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나는 그만 좀 하라고 짜증을 냈다.

“하…….”

간지럼을 참느라 어찌나 몸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끝나자 진력이 다해 버렸다. 생리적으로 비어져 나온 눈물을 닦고 있자니 고정원이 팔베개를 해 주었다. 또 장난칠까 봐서 떨어져 나가려 했는데 다급하게 내 팔을 붙들어 왔다.

“침대, 같이 고르자. 새로 사야 하잖아.”

“어?”

“같이 쓸 건데. 상의해서 골라야지.”

“…….”

나는 급격히 숙연해져서 애꿎은 가슴만 쓸어 댔다. 고정원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가 미리 봐 둔 침대 몇 개를 모바일로 보여 주면서 직접 보러 가 볼까? 하고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가구나 벽지에 대한 얘기를 쭉 이어 하는가 싶더니, 결혼 얘기를 또 꺼냈다.

“신혼은 이런 느낌이구나.”

“……그만해.”

하하, 웃은 고정원은 1절로 안 끝내고 돌림노래 수준으로 이어갔다.

결혼식의 방법부터 장소, 신혼여행지까지 진심인지 장난인지 모를 질문들이 계속되면서 내 얼굴은 점점 붉다 못해 까맣게 익어 갔다. 고정원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상상만 해도 좋은데…….”

내 어깨에 기대어 있던 얼굴이 들리고,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진짜, 언젠가 해 볼래?”

지금까지와 다르게 장난기 없이 진지한 표정을 보자 가슴 한가운데가 쿵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 아……, 자꾸 말꼬리만 늘이며 어떤 말도 못한 채 일시정지 상태가 돼 버린 머릿속을 굴리려 노력했다. 프로포즈란 말이 지금 이 순간 떠오를 건 뭔지. 심장이 요란스럽게 쿵쿵대며 법석을 떨었다.

“…….”

우리 나이가 아직 어리기도 하고, 남자끼리라 어차피 법적인 혼인 관계를 맺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제안의 의미가 결코 가볍게 여겨지는 건 아니었다. 계속 함께하고 싶고 미래를 약속하고 싶다는 뜻이라는 건 같으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눈이 내 작은 머뭇거림들을 일일이 쫓고 있는 걸 느꼈다. 이리저리 떠돌던 시선을 정면으로 바로잡은 나는 진심을 다해 하고 싶은 말을 끌어올렸다.

“……좋아.”

너랑 하는 건 다.

진심을 담은 약속인 만큼 가볍지 않은 무게감으로 전해졌길 바랄 뿐이었다.

내 대답에 눈가를 이지러뜨리며 웃어 보인 고정원은 손으로 뺨을 감싸 왔다. 뺨에 닿는 손가락에 끼워진 금속의 느낌에 잔잔한 행복감이 번졌다. 눈을 감자 입술이 닿았고, 부드럽게 녹듯이 서로에게 얽혀 들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입 밖으로 낼 필요 없이 어디에나 넘쳐나고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