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시선의 비밀
눈이 자꾸 간다는 의식은 있었다. 학과 모임에서, 강의실에서, 지나치다가 언뜻언뜻. 술자리에선 언제나 기묘한 무리를 조성해서 주의를 끌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야 연상한텐 세게 나가야지.”
“어떻게?”
“누나라는 호칭부터 버려. 이름 부르면 화내는 척해도 되게 좋아한다고.”
솔직히 우스웠다.
사방에 시커멓게 달아오른 놈들을 앉히고 한다는 소리가 대부분 저런 식이라, 게다가 딱 봐도 서툴러 보이는 놈들만 귀신같이 모아 놓고 그 중심에서 코치 노릇을 하고 있으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오, 역시 조인휘. 여자 졸라 잘 알아.”
“야 나도나도, 나 어젯밤에 썸녀랑 카톡한 건데 얘 나한테 쫌 맘 있어 보이지 않아?”
술을 먹어선지 아니면 흥분해서 떠들어 댄 탓인지 상기된 양 뺨을 하고서 일일이 상대해 주는 걸 쳐다 보다 말고 고갤 돌렸다.
“정원아, 잔 비었는데 안 따라?”
때마침 동기들만 모인 술자리에 눈치 없이 끼어든 선배 하나가 팔을 끌어당기며 눈에 보이는 수작을 한다. 이름이…… 무슨, 유나였던가. 봉긋한 앞가슴이 팔뚝에 닿아 눌리는 감촉과 더불어 싱그러운 플로럴 계열의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그 속에 희미하게 섞인 담배 잔향은 별개로 향기만큼은 꽤 좋아하는 부류의 것이었다.
“죄송해요.”
웃으며 빈 잔에 술을 기울였다.
“아.”
잔이 넘치도록 부은 건 고의였다. 대각선에 있는 티슈 케이스에 손을 뻗으며 문지르듯, 팔등으로 가슴을 스치고 간 것 또한 고의. 모르는 척 테이블을 정리하는데 새하얀 손이 겹쳐져 왔다.
“괜찮아, 내가 할게.”
의도된 몸짓을 주고받을 때 상대의 반응을 보며 여러 가지를 가늠해 본다. 이 선배는 아마도 섹스에 꽤나 익숙할 것이다. 의도적으로 한 터치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유혹이 더욱 대담해진 걸 보면 하고 싶을 때 몇 번 하고 마는, 깊이 생각할 것 없는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을 듯했다.
지갑에 콘돔이 남아 있었나, 생각하다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왁자한 소리에 시선이 따라갔다.
“인휘 쌤!”
와하하, 터지는 웃음소리의 중심에 격렬하게 껴안긴 채로 웃고 있는 얼굴 하나가 보였다. 취한 티가 역력했다. 흰 피부는 아까보다도 발긋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무리 중 한 놈의 얼굴에 뺨을 짓눌린 채로 비벼지고 있었다.
“…….”
웃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렇지만도 않다. 곤란하게 늘어뜨린 눈썹이나 일방적인 스킨십에 움츠린 어깨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취한 무리에게 억지로 추행이라도 당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묘한 방식으로 소란을 이어가기에 자연히 눈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들뜬 가게의 한구석. 특정 신호라도 받은 듯 그 주변에 앉아 있던 몇 명이 일제히 일어나 자리를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가림막을 만드는 것처럼, 헤실헤실 풀어져 있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몇 명이 둘러싸자, 그 중심부에 앉은 사람은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질 않게 된다.
“……어디 가?”
뭘 하는 건가 신경 쓰였다. 의식하고 보니 충동에 가까운 기세로 일어나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니까아 혀를, 혀를 잘 써야 된다고…… 키스는, 쪽쪽거린다고 다가 아니야…….”
“그니까 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면 되나요 선생님?”
“이렇……게, 이렇게, 부드럽게…….”
“이, 이렇게?”
“어어…… 잘하네…….”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 확인한 분위기는 강제성이나 심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채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을 관망하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도무지 뭐라고 정의 내리거나 새로 명명할 수도 없는 괴이하기 짝이 없는 상황 앞에서 기가 찼다. 갑작스럽게 자리까지 옮겨 가며 필요 이상으로 밀착하던 이유가 단지 이런 저급한 대화를 하기 위해서였다니.
“…….”
눈꺼풀이 반쯤 감길 만큼 잔뜩 취해선, 느슨하게 내민 혀를 보란 듯 움직여 대고 있는 중심부의 조인휘를 보아하니 곤란에 처해 있다기보단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그래도 부끄럽다는 자각은 남아 있는 건지, 한 사람을 중심으로 형성된 무리는 서로에게 얼굴을 맞댄 채 그런 식으로 음담을 이어 가고 있었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걸 넘어서 참담한 구경거리를 잠시 지켜보다 그대로 출입문을 향했다.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담뱃대의 끄트머리에 불이 붙자 익숙한 향이 피어올랐다. 연기를 한 번 내뱉기가 무섭게 인기척을 느꼈다.
“나도 한 대 주라.”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선배였다. 익숙하게 담배를 받아들고, 코앞으로 붙여 준 라이터 대신 굳이 내가 물고 있는 담배의 심지에서 불을 받아 가는 뻔한 행동에 나도 모르게 실소했다.
“같이 나갈래?”
그렇게 묻고 나서 담배를 빠는 입술이 노골적이다. 마치 어떤 행위를 연상시키듯.
별다른 이유 없이 흥이 식는 기분이었지만 굳이 마다할 정도로 내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거의 줄어들지 않은 담배는 천천히, 땅에 지져 버린 후 손을 뻗었다. 상대의 입술에 물려 있던 담배를 빼앗아들기 위함이었다.
립스틱 자국과 타액으로 축축해진 필터를 머금자 입술 위로 끈적함이 번졌다.
“……젖었네요.”
한 마디에 여자가 뜨거운 몸을 무너뜨려 왔다.
문득 웃음이 샜다. ‘키스하는 방법’ 따위를 가르쳐 주겠다며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던 우습기 그지없는 광경이 생각난 까닭이었다.
* * *
“쟤 쫌 웃기지 않아?”
수업을 준비하는 강의실에서였다. 막 도착해서 부산하게 부스럭거리던 동기 한 명이 앞자리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선 긴밀한 투로 말했다.
“누구?”
보통 험담에 어울리진 않는다. 하지만 눈길이 향한 곳을 확인하고 호기심이 생겼다.
“쟤, 조인휘.”
허연 목덜미가 다 드러나도록 고개를 숙이고 있는 조인휘의 옆에서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는 옆얼굴은 김강우였다. 귓속말하는 입술과 가만히 듣고 있는 귓바퀴가 닿을 듯 말 듯 하는 게 아슬아슬하게 신경을 집중시킨다.
“……왜?”
“아니, 연애 많이 해 봤다고 그러는데 하는 말마다 뭔가…… 내 주변에 경험 많은 척 지어내고 다니는 새끼랑 매우 비슷한 냄새가 난다.”
비식대며 어처구니없는 조소를 숨기지 않은 동기가 말을 이었다.
“얼굴은 솔직히 쟤 정도면 인정해 내가. 근데 하는 짓이 좀…….”
말끝을 흐리며 이쪽을 힐끔대는 걸 보니 동조를 구하는 눈치였다. 딱히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입을 다물자, 묘한 정적이 생겨난다.
“…….”
“……아 맞다, 너 봤어? 어제 올라온 대숲 과대 글?”
화두는 금세 전환되었다. 자극적이고 소모적인 이야기들 사이로, 대화의 숨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말을 섞으며 내 눈은 여전히 아까와 같은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상대의 말에 따라 끄덕이는 뒤통수. 살짝 각도가 바뀔 때마다 드러나는 눈꼬리, 뺨, 입술 따위를 의미 없이 쫓으면서. 이따금씩 포착되는 헐거운 웃음을 끈질기게 바라봤다.
아주, 헐겁다 못해 흐를 것처럼…… 야무진 성질과는 동떨어진 얼굴이란 생각과 함께,
“……뭘 그렇게,”
열심히 거짓말을 하나.
“어? 뭐라고 했어?”
“아니.”
궁금해졌다.
수업 하나가 휴강이 되면서 생각지 못한 공강이 생겼다. 식사 후였고, 무언가를 하기엔 애매한 텀이라 만만한 과방을 향했다.
오후부터 비가 추적거리기 시작해 캠퍼스 전체에 스산하고 녹녹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한 안개비. 구름 낀 무채색 하늘과 부옇게 흐린 풍경은 밴쿠버의 날씨를 생각나게 했다.
스쳐 갔던 무수한 말들 중 하나가 되살아난 것도 분명 날씨 탓이었다.
‘넌 진심이란 게 없나 봐.’
말한 사람이 누군지, 때가 언제고 어떤 상황이었는지 하는 것들이 잇따라 떠오른다.
여자친구였고,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 내 쪽에서 아버지의 일 관계로 온 가족이 예전에도 머문 적이 있던 캐나다로 잠시 떠나게 되면서 그 사정을 알리는 상황이었다.
지나치게 담담하게 헤어지자 말했던 게 발단이 되어 공원에서 여섯 시간 가까이 소모적인 다툼을 했다. 다툼이라기 보단 상대의 일방적인 분출에 가까웠지만.
‘감정이 없어? 며칠 돌보던 개도 헤어진다 하면 너보단 슬퍼하겠다, 정신이상자 같은 새끼야.’
흐느낌이 온갖 폭언과 욕설로 변해 갈 동안에도 달래 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신이상자란 소릴 들을 만큼 무심하게 군 것도 사실이었다. 탈진할 것처럼 울어 대는데도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 않아서 스스로도 진절머리 났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도 출국하기까지 밤낮으로 시달렸었다. 내가 뭐든지 자신의 처음이었다고 말했던 여자친구를 통해 ‘처음’에는 과장된 의미가 부여되기 쉽다는 걸 제대로 배웠다.
그 후로 연애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관계의 다방면으로 경험이 적거나, 혹은 적지는 않더라도 육체적인 걸 넘어 정서적인 교류까지 원하는 상대는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텅 빈 과방의 한쪽 벽면을 차지한 소파에 몸을 기대자마자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열어 보니 등록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부터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커피 사 주시기로 한 거 안 잊으셨죠?]
애교스런 몸짓으로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토끼 이모티콘을 보며 누구였더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며칠 전 만났던 여자를 떠올렸다.
현대음악의 이해 시간이었을 것이다. 교양 수업 중, 실수로 떨어뜨린 필기구가 너무 멀리 굴러간 바람에 줍지 못했던 일이 있었다. 끝나고 줍는다는 걸, 때마침 다른 일이 생각나면서 잊어버리고 강의실을 나설 뻔했는데 그때 대신 주워서 가져다준 게 이 여자였다.
‘고마우시면 커피 한번 사 주셔도 되는데.’
선물로 받았던 각인된 만년필이고 꽤나 마음에 들었던 물건이었다. 드러나는 의도와 상관없이 그러겠노라고 약속하고 상대의 요구에 따라 번호도 알려주었다. 이런 일들은 빈번했지만 웬만해선 거절하지 않는 편이기도 했다.
답장을 보내기 위해 빈 대화창을 응시했다.
이상하게 상대의 얼굴은 흐릿한데 번호를 받아갈 때 물들어 있던 안색이나 떨리던 손 같은 부수적인 것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그런 순진한 반응은 달갑지 않다는, 솔직한 감상이 뒤따른다.
[시간이 나지 않아 선물권으로 대신하는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지난번엔 감사했습니다.]
몇 번의 터치만으로 어렵지 않게 상대에게 음료권이 전달되었다. 몇 번은 마실 수 있는 충전카드였다.
그리고 나선 메시지의 알람을 일제히 끄고, 시계 어플을 열어 알람을 하나 설정했다.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느긋하게 다음 수업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소파의 한구석에 허리를 느슨하게 무너뜨리고 눈을 감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선잠에서 깨어난 건 대화 소리 때문이었다. 눈은 뜨지 않았지만 과방에 들어온 사람들이 누군지 목소리로 알았다.
“조인휘 이리 와 봐. 사진 한번 찍게.”
“아 저 오늘 추해요. 안 찍을래.”
“야 나도 어제 라면 먹고 자서 부었어. 그냥 찍어.”
조인휘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렸고, 아마 김예영 선배로 추정되는 목소리는 건너편,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됐어 내가 간다. 되게 비싸게 구네.”
소파의 끄트머리가 푹 꺼지는 느낌과 동시에 선배의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이어서 찰칵거리는 카메라 기계음이 연달아 울렸다. 자기 얼굴이 커 보이니 앞으로 나오라느니 좀 가까이 붙어 보라느니 하는 시답잖은 주문과, 난처해하면서 일일이 대응하는 소리도 들렸다.
“야 너 긴장했어? 왜 이렇게 몸에 힘이 들어갔어, 완전 웃겨.”
“운동해서 근육이 돌 같은 거예요.”
폭소하는 소리에 그나마 있던 잠기운도 달아나면서, 무거웠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꽉 움켜쥐고 있는 주먹이었다.
“운동했다기엔 너무 말랐는데. 나보다 허리 가는 거 아니야 너?”
“와, 남자 몸 그렇게 막 만지는 거 아니에요 선배.”
필사적으로 여유로운 척하려는 게 전해져 왔다. 하지만 그런 노력들이 무색하게 경계 태세로 떨리는 목소리는 숨겨지지 않았다.
“…….”
마냥 우습다기엔 애처로운 구석이 있었다. 이성에게 저 정도로 서툰 주제에 그렇게 경험이 많은 척 허세를 부렸다니.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때, 일부러 기척을 낼 필요도 없이 주머니 속 휴대폰이 알람을 울렸다. 그제야 잠이 깬 척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자, 정면으로 확인한 상황은 생각보다 가관이었다.
“어, 정원아 일어났네?”
조인휘는 거의 안기다시피 한 자세였다. 터질 듯이 붉은 귀와 사방으로 흔들리는 동공이 보였다.
“근데 넌 언제부터 자고 있었던 거야?”
“……휴강이 떠서요. 한 시간쯤 잔 것 같아요.”
“들어왔는데 둘이 딱 붙어 자고 있어서 누나가 흐뭇했잖아.”
소파는 하나고, 내가 잠든 이후로 조인휘도 옆에서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는 이제 슬슬 수업 들어가야겠네요.”
가방을 챙기며 나가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이때다 싶은 목소리가 뒤따랐다.
“아, 저도. 수업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선배.”
득달같이 따라 나오는 얼굴에서 살았다고 안도하는 속내가 투명하게 읽혔다.
함께가 아니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기라도 한 것처럼 온기가 등 뒤로 바투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잠시 돌아보면서 눈이 마주쳤지만 모른 척 곧장 시선을 떨어뜨리며 앞서 나갔다. 눈치 보는 게 습관인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를 향해서도 올려다보는 눈은 어쩐지 기가 눌려 있었다.
빗줄기는 전보다 본격적으로 쏟아지는 중이었다. 창밖을 응시하다 돌아보자 조인휘는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지르고 있었다. 나는 그게 손안에 고였던 땀을 닦아 내는 행동이란 걸 눈치챘다. 머리카락 사이로도 무언가 반짝인다 싶었는데, 이마에 옅게 배어난 땀이었다.
“…….”
생각이나 의도는 없었다. 그냥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이 뻗어 나갔다. 행동에 대한 자각이 들었을 땐 이미 조인휘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고 이마에 맺혀 있는 땀을 손바닥으로 훔쳐 낸 뒤였다.
깜짝 놀라 동그랗게 커진 눈이 나를 향했다.
종잡을 수도 없는 묘한 정적이 흐르는 동안에도 나는 물끄러미 서 있을 뿐이었다. 스스로도 뭐라고 해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방금 내가 훑고 간 이마를 굳어진 표정으로 문지른 조인휘가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아…… 비 아까보다 많이 오네. 우산 없는데.”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고, 친한 사이라 해도 땀을 닦아 주다니 어떻게 해석해도 이상했다. 그것에 대해 딱히 언급하거나 추궁하지 않는 조인휘의 반응이 오히려 현 상황의 이상한 기류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드는 듯했다.
손바닥에 묻어난 물기와, 홀린 것처럼 모호한 기분을 느끼며 물었다.
“……인휘 넌 어디로 가?”
“아, 나 서관.”
“그럼 같이 써 우산. 나도 그쪽이라.”
“그래? 그럼 나야 고맙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조인휘가 뒷목을 슥슥 문지르며 걸어 나갔다. 나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풀며, 크게 한 걸음을 떼었다.
남자 두 명이 쓰기엔 확실히 다소 비좁은 우산이었다. 어깨끼리 닿도록 붙어 걸었지만 비죽 튀어나온 반대편 어깨로 이따금씩 물이 튀었다. 축축하게 젖은 나무 냄새를 맡으며 걷는 교정은 빗소리 외엔 적막했다. 혼자 걸을 때보다 걸음은 현저히 느려져 있었고, 굳이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기에 느릿한 침묵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침묵을 먼저 부순 건 조인휘였다.
“시장경제 갑자기 휴강 떠서 방황했네. 과방 갔는데 네가 먼저 자리 잡고 있더라고.”
고리처럼 만든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으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 그 수업도 같이 듣는구나 싶었다.
“어제 잠 거의 못 자서 과방에서 쪽잠이라도 자려고 했는데, 피곤해 죽겠다.”
입을 쩌억 벌린 조인휘의 입에서 하품이 터졌다.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방금 전까지 과방에서 선배에게 보이던 모습과는 상반되는 태도였다.
“예영 선배랑 친해 보이던데.”
“……아아, 친하긴 친하지. 내가 원래 누나들한테 인기가 많아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의 나이브한 태도와 허풍들을 미뤄 보면, 어쩌면 있는 경험을 부풀린 게 아니라 아예 전무한 걸지도 몰랐다. 가만 보면 외모 자체도 앳되고 무구한 분위기를 풍기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 인상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화려한 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피어싱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플한 피어싱이 박힌 귓불, 밝은 갈색 머리카락으로 덮인 뒷목을 곁눈질하던 나는 우산의 끄트머리로 삐져나온 어깨를 발견하고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젖겠다.”
“……어어.”
말라서 골격이 두드러진, 딱딱한 어깨였다. 나는 곧 감쌌던 팔을 내려 원위치시켰다.
“바로 수업 가?”
“도서관 잠깐 들렀다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대화는 과제나 동기 이야기 등, 생각보다 일상적이고 평범했다. 아무리 공통 화제가 많은 관계라 해도 그동안 쌓여 왔던 편견 때문인지 솔직히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을 줄 알았다. 편견은 편견이었음을 인정했다.
“근데 어젠 뭐 하느라 잠을 못 잔 거야?”
틈틈이 하품을 하는 조인휘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과방에서도 같이 잠들어 있었다고 했는데 다른 자리가 비어 있었음에도 왜 하필 내 옆에서 잔 건지. 필시 대수롭지 않은 이유겠지만 궁금해졌다.
“아……,”
조인휘의 입이 벌어지고, 눈이 생각하듯 위쪽을 향했다.
“어제? 어제…… 어, 여자 만나느라. 뻔하지 뭐. 하하.”
“…….”
대화의 막은 생각보다 이르게 내려졌다. 나는 최소한의 맞장구조차 칠 생각이 들지 않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기어이 나온 ‘여자’소리에 편견은 다시금 더욱 견고하게 벽을 세우고, 얄팍하게나마 쌓이려던 호감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허세든 어리숙함이든,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면 거부감만 남기 마련이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는 뻔한 감상과 함께, 대체 뭘 위해서 이런 식으로 힘줄 필요 없는 순간에까지 기를 쓰나. 조소와 같은 의문만 남았다.
조용히 걷기만 하다가 어느 순간 시선이 느껴져 내려다보니 조인휘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래?”
기다리다 내 쪽에서 물었다. 어딘가 얼빠진 표정처럼 보였는데, 갑자기 혼자 놀라서는 바쁘게 눈을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으앗, 하고 큰소리를 낸다. 제자리에서 펄쩍 튀어 오른 조인휘는 멀찍이 떨어져 나갔고, 나는 뒤늦게 발밑에 고인 물웅덩이를 발견했다. 그리고 우산에서 벗어난 바람에 순식간에 젖어 버린 조인휘의 어깨를 끌어당겨 옆구리에 밀착시켰다.
“미안. 밑을 못 봤네.”
“아니 내가 못 본 건데…….”
고개를 푹 숙인 옆모습을 한번 곁눈질하고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어깨를 감싼 자세는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조인휘가 불편한 것처럼 붙잡힌 몸에 힘을 주며 떨어져 나가고 싶은 기색을 내비쳤다.
“불편해도 참아. 우산이 작아서 이 정도로는 붙어야 해.”
“아, 그런 게 아니고…….”
귓등이 살짝 붉었다. 불편해서 그런 게 아니었나? 불편한 게 아니라면 뭐 때문에 이러는 건지 의아해하다가, 설마 남자끼리 달라붙어 걷는 게 부끄러운 건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사람들 앞에서 여자니 키스니 하는 화젯거리는 일삼을 줄 알면서 고작 이 정도의 일로 민망해 하는 부조화라니. 뻔뻔했다가 순진했다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서관에 도착할 때까지 맞물리듯 붙은 자세는 그대로였다. 계단을 오르고 캐노피 아래로 들어서면서 겨우 자세를 풀어내고 우산을 접을 수 있었다.
조인휘의 어깨 부분 옷감이 팔뚝에 달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면이 젖어 있던 탓에, 그 위를 짓누른 손바닥의 면적 그대로 살갗에 짓눌려 있었다. 축축하고, 눅눅해 보이는 자국을 쳐다보고 있는데…….
“근데 너 도서관 가는 거 아니었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가라앉아 있던 시선이 들렸다.
“아…….”
멍청한 음절을 내뱉었다. 도서관은 서관에서 좀 더 걸어야 한다.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헤어지면 되는 걸 뭐 하러 안까지 들어왔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게.”
과방에서 나오고부터 자꾸 실수가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뭐야.”
내내 어색하게 굳어져 있던 조인휘가 그제야 풀어지듯 웃었다. 잠시 그 모습에 눈길이 머물렀던 건, 가늘어지는 눈에 매달린 속눈썹에 동그란 물기가 맺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산을 접을 때에 물이 튀었던 걸까.
“여튼, 고마워. 덕분에 비 안 맞고 왔네.”
“……뭘. 어차피 오는 길이었는데.”
오는 내내 맡았던 축축한 풀 냄새가 여기서도 났다.
“그럼 먼저 갈게, 잘 가.”
어정쩡하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조인휘에게 나 또한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이도저도 아닌 그 손짓을 마지막으로, 돌아선 뒷모습은 문 안쪽으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
조인휘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혼자 남게 되고 나서도 나는 목적도 이유도 없이 얼마간 그대로 더 서 있었다. 이번에도 부지불식간에 손을 들어 올려 남의 땀을 닦았던 때처럼, 뭐에 홀린 듯한 황당함 때문이었다. 왜 황당한 건지조차 명확한 이유가 없어서 황당함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두둑두둑두둑…….
캐노피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시끄러웠다. 가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정작 발길이 떨어지지를 않아 머뭇대는 기행의 연속. 좀이 쑤시는 것처럼 답답해지는 느낌이 익숙지 않아 성가신 한숨을 내쉬어 보았다.
“하…….”
하지만 답답증은 가시지 않고. 어째서인지 헤어지기 직전 봤던, 조인휘의 웃는 얼굴만 계속, 반복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 * *
오전의 교양 수업. 조금 이르게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이어폰을 꼽은 채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조인휘였다. 우측의 가장자리 한쪽에서 피로한 듯 고개를 떨구고 무심하게 화면 액정을 손끝으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여기 자리 있어?”
다가가 웃는 낯으로 묻자, 인기척을 느끼고 고갤 든 조인휘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어? 뭐라고?”
“……옆에, 앉아도 돼?”
“어?”
되묻는 얼굴이 갸우뚱하며 가까워졌다. 왜 눈치를 못 채나. 어지간히 우스웠던 탓에 면전에서 웃음기를 숨기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양쪽 귀를 틀어막은 이어폰을 조심스레 잡아당기자 조인휘의 어깨가 움찔 튀어올랐다.
“옆에 앉아도 돼?”
귓구멍에서 빠진 이어폰에서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운드가 강렬한 헤비메탈이었다. 이런 걸 이렇게 크게 틀어 놓고 있으니 안 들리지.
“아……, 응.”
그제야 귀를 틀어막은 채로 대화했다는 걸 깨달은 조인휘가 허둥지둥 음악을 종료시키고 이어폰을 둘둘 감았다. 귓바퀴가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그렇게 볼륨 크게 하면 귀에 안 좋을 텐데.”
“어……, 그러게. 별 생각 없이 크게 틀어 놨네.”
시선을 피한 조인휘는 우물쭈물 말하더니 또다시 휴대폰에 정신을 팔기 시작했다.
“메탈 음악 좋아해?”
“그냥 저냥…….”
대화를 시도해 보려 했지만 거절에 가까운 반응이 돌아왔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벽을 치는 느낌이었다. 같이 우산을 쓰고 친근하게 웃는 얼굴을 보였던 게 지난주인데, 도무지 맥락이 읽히지 않는 태도 변화였다.
“……뭐, 뭐야!”
“아, 미안. 머리카락이 삐져나왔길래.”
잠버릇 때문인지 종종 같은 부근에 튀어나오곤 하던 머리칼을 건드리자 상당히 과민하게 굴었다. 어깨를 움츠린 조인휘는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며 내가 만졌던 부분을 몇 번이고 짓눌렀다.
“…….”
안쓰러울 만큼 붉어진 귓바퀴를 보며 확실히 의식이 지나치단 생각을 했다. 이런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자였다면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보통 이럴 땐 성격상 남자를 대하는 게 서툴다거나……, 아니면 성적으로 의식한 상대 앞에서 긴장을 했다거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성적으로 의식한 상대라니. 말도 안 되는 가정에 쓸데없이 기분이 이상해질 거 같아 시선을 떨구고 휴대폰을 꺼냈다.
밀려 있는 문자들 중 몇 개에 답장을 하다 말고 문득, 주말에도 조인휘 생각이 났었다는 걸 상기했다. 운전을 하다가, 식사를 하다가, 담배를 피우다가. 뜬금없는 타이밍에 이유도 없이 몇 번이나 생각이 나서…… 별일이다 싶었는데.
“주말 잘 보냈어?”
힐끔, 쳐다보고 재차 말을 붙이자,
“어? 응, 그렇지 뭐…….”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 얼버무리는 태도가 사춘기 애들처럼 예의 없고 어설펐다.
“그래…….”
내리깐 눈꺼풀과, 초조한 듯 깨무는 아랫입술 같은 것들이 곁눈으로 들어왔다. 어수선하게 달달대며 떠는 허벅다리에서, 강의실 의자에 꼭 맞게 짓눌린 좁은 엉덩이까지 훑어 내리고 나서야 기묘한 위화감을 감지하고 눈을 뗐다. 스스로도 불필요하게 훑어본단 자각이었다.
수업이 시작되고도 한동안 껄끄러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조인휘는 유독 산만하게 굴었다. 쉬지 않고 꼼지락대는 하얀 손가락들을 그대로 움켜쥐어 멈추게 하고픈 충동에 시달리던 중,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눈이 마주쳤다.
‘왜?’
소리 없이 뻐끔대는 입. 오므렸다 펴지는 입술의 모양이 잠깐 선정적인 기분을 느끼게 해 그것을 감추듯 반사적으로 웃어 보였다.
‘아니야.’
마찬가지로 입모양으로 대답하면서, 상황이 더 이상 우습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인중으로 희미하게 면도한 자국이 남아 있는 입술을 빨아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정상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으…….”
교수가 20분 쉬는 시간을 주자마자 조인휘는 자리에 엎드렸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를 따라 내려앉게 되었다. 피부가 희다는 것 외엔 특별할 것도 없는 그것을 쳐다보다 반쯤 충동적으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 아래로 굳어지는 근육을 모르는 척, 친근하게 주무르며 말을 붙였다.
“많이 피곤해?”
“아…… 잠을 거의 못 자서.”
부스스 고갤 드는 조인휘의 얼굴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경직돼 있었다.
“주말에 뭘 했길래 잠을 못 자?”
“그게……, 어…… 클럽에서 놀았어.”
한참 뜸을 들이다 말하는 모양새가 사실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여자경험 많은 노는 남자’인 척 꾸며 내는 건지 쉽게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아……, 그래서 계속 졸려 보였구나.”
“어어.”
“늦게까지 놀 정도면 되게 재밌었나 봐. 난 클럽엔 한 번도 안 가 봐서……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긴 하네.”
“엥, 한 번도?”
“응.”
“음…… 별거 없어. 그냥 음악 틀어 놓고 노는 거지 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말에 놀란 표정을 짓던 조인휘는 이내 후배에게 으스대는 선배처럼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한번 가 봐. 재밌어.’ 하고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는 얼굴이 쓸데없이 의기양양해서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럼, 인휘도 가서 춤추고 그래?”
“어어어, 난 그냥 구석에서 적당히 흔드는데 그러고 있으면 알아서들 오더라고.”
“알아서 와……?”
“여자들이 막 알아서 온다고. 몇 명 찍고 지그시 쳐다보면 효과 직빵이던데?”
뒤에서 순간 ‘풋’하고 뿜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쉬는 시간 강의실이 유독 조용했다. 뒤에서 다들 귀를 세우고 이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 뜨거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주목받을 만한 발언을 내뱉은 당사자는 계속해서 거리낌 없이 떠들어 댔다.
“너 가면 인기 터질 걸? 춤 못 춘다고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그냥 적당히 리듬만 타도 반은 먹고 들어가니까. 그리고 솔직히 클럽을 춤추러 가냐. 여자들이랑 놀러 가는 거지.”
내 시선은 저속한 말들을 쏟아 내는 조인휘의 입가에 머물러 있었다. 뭘까 이게. 빨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입술은 다시 보니 그저 단정하게 생긴 남자의 입술일 뿐, 더 이상 은밀하고 야릇하게 음심을 충동질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
성의 없이 대답하고 나서,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고조되던 흥이 한순간에 식어 버리자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도 필요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수를 한 번에 들이켜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상하게 갈증이 심했다. 타는 듯한 갈증도 그렇고, 초조함도 가시질 않았다.
사실 수치스럽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까 강의실에서 조인휘와 나눴던 어쭙잖은 대화 때문이 아니었다.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을 법한 허술하고 허접한 거짓말들, 여자 만나러 클럽에 간다느니 하는 경박한 소리나 지껄이는 남자 동기한테 느꼈던 끊어질 듯 팽팽하던 긴장감을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서였다.
여자가 아닌 남자와도 섹슈얼한 관계를 맺고 싶어질 수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었다. 스스로에게 동성애적 취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건 놀랍긴 했지만 딱히 불쾌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그 상대가 조인휘라는 게 불가해한 미스테리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 * *
예정된 시간보다 수업이 일찍 끝나면서 어중간한 텀이 생겼다. 과방으로 가려다 방향을 돌린 건 혹시나 조인휘와 마주칠까 봐서였다. 며칠 전 교양 수업 이후로 부딪힐 가능성이 있는 장소들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같은 과 동기다 보니 필수 과목마다 같은 공간에 있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행여 마주치게 되더라도 가벼운 인사 이상으로 대화를 이어 가는 일은 없었다.
실외의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짧게 태우고 중앙도서관 안으로 발을 들였다. 5층 휴게실을 향하면서는 오늘 필수 교양 때 봤던 조인휘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누구랑 있었는지 따위가 불현듯 떠올랐다.
이런 식으로 요 며칠 내내 쓸모없는 정보들이 축적되고 있었다. 조인휘의 옷차림에서부터 행동반경은 물론이고 사소한 습관들까지. 볼 때마다 가방 끝으로 삐져나와 달랑거리는 이어폰처럼 소지품은 항상 대충 구겨 넣고 다닌다거나, 흘리기 일보 직전인 소지품과 마찬가지로 감정도 얼굴에 다 드러내놓고 흘린다거나 하는 것들. 여자들과 얘기할 때면 유난히 목의 핏대가 서고 쥐었다 폈다 손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습관 같은 건 차라리 모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인휘의 경우, 단순히 숫기가 없다기보단 무언가 억누르고 감추려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저번에 과방에서도 그렇고, 여자가 무서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장이 과도한 편이었다.
“…….”
생각이 생각을 불러와 곁가지를 치며 뻗어나가던 중. 문득 한 가지 가정이 튀어나와 머릿속을 점령했다. 황당하긴 하지만 아예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닌 그런.
어쩌면, 조인휘가 남자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가정.
여자를 무서워하는 게 남자를 좋아하는 것과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행동을 미루어 보아 아주 황당무계한 가정인 것만은 아닐 듯했다. 무엇보다 내 앞에서 보였던 몇 가지 행동, 특히 과도하게 의식하던 면면들이 가능성에 힘을 실었다.
생각에 골몰해 있다 문이 열리고 나서야 엘리베이터가 층에 도착한 걸 알았다. 짧은 한숨 후, 미간을 힘주어 누르고 나서 바깥으로 발을 내딛었다.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직 시간이 한참 여유로웠다.
“왜 이래 징그럽게.”
처음엔 잘못 들었나 했다. 몇 걸음 내딛지 않아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발걸음이 멈추며 온신경이 쏠렸다.
“아, 담배 냄새 난다고!”
소리를 따라 몇 걸음 더 들어가자 휴게실의 한구석, 자판기 주변에 놓인 테이블 중 하나에 남학생 둘이 장난치듯 겹쳐져 있는 게 시야에 잡혔다.
앉아 있는 사람을 뒤쪽에서 끌어안고 있는 건 분명 같은 과 김강우였다. 왁스로 지저분하게 만진 헤어스타일이나 둔탁한 실루엣으로 알 수 있었다.
“인희야……. 오빠 외롭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땐 예상했던 대로 조인휘의 옆모습이 보였고, 그 아래로 가슴팍에 달라붙은 김강우의 양손이 보였다.
“…….”
피했던 게 무색하게 타이밍이 오묘했다.
확인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시선이 잠시 그쪽으로 머물렀다. 얄팍한 가슴 위로 올라온 손이 마치 살 오른 여자의 젖가슴을 만지듯 힘 있게 움키고 문지르는 모습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튕기지 말고 오늘 오빠랑 달리자 어?”
목덜미를 타고 소름인지 짜증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각이 내달렸다. 같은 남자끼리 오빠라 지칭하는 것도, 성적인 추행으로밖엔 보이지 않는 스킨십도 거슬리고 불편했다.
저걸 왜 그냥 두지? 동성 간의 장난임을 감안해도 정도가 지나친데 정작 조인휘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빨리 대답 안 할래?”
어깨에 걸쳐진 턱이 움직이면서 김강우의 입술이 조인휘의 목 언저리에 금방이라도 닿을 듯 위태위태했다. 그때,
“인휘야.”
튀어나간 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조인휘의 눈이 약간 커지며 입술이 벌어지는 게 보였다.
“안녕.”
그대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아아…… 안녕…….”
어색하게 인사하는 조인휘의 뒤에서 김강우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굳어졌다. 눈이 마주치자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표정과 바로 고개를 돌리는 행동으로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김강우가 평소 내게 적대 의식을 갖고 있는 것도, 술 여자 섹스에 환장한 것처럼 구는 탓에 어딜 가나 기피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도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그 실태를 파악한 것처럼 기분이 불쾌해졌다.
“야 조, 이따 톡해. 먼저 간다.”
한마디를 남기고 김강우가 자리를 뜨자 띄엄띄엄 몇 사람이 있었을 뿐인 휴게실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조인휘는 어색하게 빈 음료수 캔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
숙인 자세로 인해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시선이 꽂혔다. 아까, 김강우의 입술이 닿을 뻔했던 자리에는 부드러운 솜털이 돋아나 있었다.
“……깜짝이야.”
퍼뜩 고갤 쳐든 조인휘가 뒷목을 감싼 채로 놀란 얼굴을 하더니 ‘왜, 왜?’ 하고 더듬었다.
“미안. 더러운 게 묻었길래.”
“아하…… 땡큐.”
목덜미를 쓸었던 손바닥으로 열기가 고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사람의 피부가 부드러운 건 당연한 일이지만 보이는 것 이상으로 매끄럽게 감겨드는 감촉은 의도치 않게 여러 가지 상상의 여지를 남겼다.
“……오늘 술 마시게?”
대체 희롱은 누가 하고 있는 건지. 이럴 거면 여태 왜 피했는지. 평정을 가장해 물으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뭐…… 별일 없으면?”
툭하면 붉어지곤 하는 귓등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도 가면 안 돼?”
의식해서 눈꼬리를 접는, 만들어진 웃음을 짓자 조인휘가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음 어…… 그…… 아마 와도 될 걸?”
보통 남자에겐 이런 식으로 웃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나 할 법한, 의도적인 친절과 은근한 섹스어필이 내포된 웃음이었으니까.
“다행이다. 수업 끝나고 연락할게.”
“응…….”
나쁘지 않은 반응을 보며 어쩌면 조인휘가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그램쯤의, 미미하지만 확실한 무게를 더 얹기로 했다.
* * *
수업이 끝나고 바로 약속 장소로 갈 계획이었으나 한 시간 넘게 지연되고 말았다. 조교의 실수로 과제가 누락된 걸 뒤늦게 알게 돼 급하게 수습하느라 상당 시간을 할애해야 했고, 간신히 끝내고 나오던 중 모르는 여자 하나에게 붙들려 법대 캠퍼스의 위치를 알려주고 휴대폰 번호를 물어 오는 걸 거절하느라 한 번 더 지체되었다.
학교 근처의 술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분위기가 무르익어 거나하게 취한 조인휘가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어어……! 고정원 왔다……!”
옆자리에 앉자 미미하게 달큰한 냄새가 풍겨 왔다. 테이블 위에 몇 병이나 비워져 있는 복숭아 소주가 그 원인인 듯했다.
“조인휘 이 새끼는 쪽팔리게 과일 소주 먹고 취했어.”
자리엔 조인휘와 김강우를 비롯해 총 네 명이 모여 있었다. 평소 조인휘의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얼굴들이었다. 김강우는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작게 욕설을 내뱉는 등 대놓고 싫은 티를 비쳤고 나머지는 아닌 척해도 어색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야 여자들은! 요런 거 좋아해……. 요런, 달달한, 그니까 입맛을…… 미리미리 맞춰 놓고 해야…… 어?”
조인휘가 잔을 들고 내용물이 찰랑거리도록 흔들어 대며 주정했다. 소주가 흘러넘쳐 손을 적시고 있었기 때문에 잔을 빼앗아 들고 젖은 부위를 티슈로 닦아 주었다.
“찬물 좀 가져다줄까?”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뺨을 보며 물으니 조인휘는 취한 사람 특유의 늘어지는 웃음을 지으며 고갤 가로저었다. 이제까지 봤던 중에 가장 많이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일반 소주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낮은 도수와 단맛에 무턱대고 음료수처럼 들이켰을 게 뻔했다.
“근데 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냐? 우리끼리 모이는 델 다 오고?”
조인휘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김강우가 고개를 테이블 앞쪽으로 빼며 물어 왔다. 누가 들어도 호의적인 어감은 아니라 맞은편에 앉아 있던 둘이 긴장하며 눈치를 주는 게 보였다.
“뭐야…… 너 왜 그래? 내가 오라고 했어 내가……! 왜 그러냐 진짜 내가 오라 그런 건데…….”
조인휘는 취해서 자꾸만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인휘랑 얘기하다가 오늘 마신다고 하길래 끼워 달라고 했어. 강우 너랑도 이런 식으로 같이 마셔 본 적 없는 것 같고 해서.”
취한 조인휘의 몸이 자꾸만 김강우 쪽으로 기울었다. 등 뒤쪽으로 팔을 뻗어 허리를 받쳐 주니 간지럽다며 웃는 얼굴이 의외로 애교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제대로 취하면 이런 느낌인가 보지, 생각했다.
“맨날 주위에 여자들만 끼고 놀더니 웬일이래.”
“……그렇게 보였어? 생각지도 못한 오해네 그건.”
잔에 술을 따라 입가로 옮기며 무의식적으로 옆자리를 살폈다. 조인휘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혼자서 티슈를 갈기갈기 찢어 가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여자 좋아하는 게 부끄러운 것도 아닌데 뭘 빼고 그래, 빼니까 더 구리네.”
금방 끝나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김강우의 악의적인 시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취해서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간 줄 알았던 조인휘도 어느 순간 자리에 수북하게 쌓인 휴지 조각들을 밀치더니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아 왜 계속 시비야……. 김강우 넌 왜 이렇게 고정원을 싫어하냐……? 동기끼리 친하게 지내야지 인마……!”
조금의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는 어린애 같은 말투로 중재하려 들었다.
“사이좋게 지내라고 오늘부터…… 얼른, 둘이 손 잡고, 어?”
더듬더듬, 조인휘가 손을 붙들어 왔다. 열이 많이 나는지 제법 높은 체온으로, 내 손과 김강우의 손을 잡아 가운데로 끌어모으려 했다. 하지만 채 닿기도 전에 김강우 쪽에서 먼저 뿌리쳤다.
“야이…… 속 좁은 놈…….”
힘을 주고 있던 손아귀가 한순간 느슨해졌다. 헐렁하게 겹쳐진 손이 이내 완전하게 떨어지자 높은 체온이 남기고 간 잔열 또한 빠르게 식었다.
“…….”
잔을 집어 들어 반쯤 남아 있는 술을 마저 목구멍 안으로 넘겼다. 혀끝에서 맴도는 복숭아 향이 처음보다 훨씬 달짝지근하게 느껴졌다.
잇따라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 경직돼 있던 기운은 점차 허물어져 갔다. 김강우가 입을 다물고 조인휘가 나서서 헛소리를 지껄여 대자 나머지 둘도 함께 떠들어 대기 시작하면서 거북했던 분위기는 금세 술집의 여느 테이블과 다름없이 소란해졌다.
“아 어지러…….”
웃고 떠드는 조인휘는 이따금씩 무게중심을 잃고 몸을 기울여 왔다. 밀착해 앉은 상대의 성적 취향에 대해 의식하고 있기 때문인지 사소한 행동들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우습게도 필요 이상으로 긴장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가까이에 앉아 알콜로 와해된 긴장과 들뜬 공기 속에서 전엔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세세하게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뺨과 귀, 턱에서 목 언저리까지 이어지는 자그마한 점들까지 선명했다.
그렇게 한창 어수선한 와중이었다.
“저기요…….”
파고드는 가는 목소리에 테이블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 웬 낯선 여자가 다가와 머뭇거리고 있었다.
“번호 좀 알려주시면 안 돼요? 저 지금 가야 하는데…… 그쪽 너무 마음에 들어서요.”
눈앞으로 곧장 휴대폰이 내밀어지자 오오, 하고 야유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
많을 땐 하루에 몇 번씩이나 있을 정도로 빈번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유난히 귀찮다는 생각이 들면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옆에서 부산스럽게 몸을 흔들거나 안주를 집어먹는 것에 신경이 몰린 탓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끝내 사과하고 돌려보냈다. 우리 테이블 뿐 아니라 내부에서 은근하게 주목을 끈 탓에 웬만하면 번호를 주고 차단하는 쪽으로 원만하게 거절할 수도 있었으나 내키지 않아 다소 완고한 방법을 택했다.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진 여자가 돌아가고 나자 무슨 이유에선지 흐름이 끊긴 것처럼 술자리의 분위기 또한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와. 뭐 나 정도면 저런 애들은 바로 깔 수 있다 이건가.”
삐딱하게 술잔을 기울이던 김강우가 기어이 비아냥댔다.
“아아, 난 먼저 들어갈란다. 재밌게 좀 달릴랬더니 기분 확 잡치네. 내숭도 작작 떨어야지 씨발.”
그리곤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 가게를 나갔다.
“……왜 저래 쟤?”
김강우가 나간 방향을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던 조인휘가 다시금 술잔을 들었다.
“됐다 우리끼리 마심 되지……! 자, 너도 잔 채우고…….”
내 쪽을 챙기면서 술을 따라 주는데 자꾸 흔들려서 내용물이 주변으로 흘렀다.
“건배……!”
더 마시게 해도 되나 걱정이 돼서 음료수를 쥐여 주려 했지만 완강히 거부하는 탓에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쟤 내일 되면 우리끼리 마신 거 까먹을지도. 조인휘 술 마시면 기억상실 잘 걸리거든.”
계속해서 마시는 조인휘를 보며 동기 하나가 말했다.
“……자주 까먹나 봐?”
“술 마시면서도 까먹고 마시고 나서도 까먹고. 사고 안 치는 게 다행이지, 심해.”
“…….”
술자리에서 키스가 어떻다느니 혀를 어떻게 하라느니 하며 입을 헤벌리고 시범을 보여 주던 괴행동이 떠올랐다. 그런 건 사고의 범주에 치지 않는 건가. 하고도 잊어버린다니, 차라리 기억나는 편이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슬슬 끝 무렵이었다. 마시는 사이 시간은 금방 지나가 어느새 맞은편에 남아 있던 동기 둘 중 하나가 먼저 들어가고 셋만이 남게 됐다. 안주를 혼자 반 이상 먹어 치운 조인휘는 몸을 기대 오며 졸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머리칼과 홍조 띤 뺨을 하고서 잠든 꼴을 바라보며 비교적 정신이 말짱한 동기에게 물었다.
“인휘 자취하는 데 어딘 줄 알아?”
“어? 어…… 후문 쪽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난 가 본 적이 없어서.”
“……그래.”
으음, 잠꼬대 같은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인 탓에 조인휘의 머리칼이 흐트러지며 얼굴을 가렸다. 아래로 쏟아진 앞머리를 쓸어 올린 뒤 입술에 묻은 부스러기까지 떼어 주고 고갤 들자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지 맞은편의 동기와 눈이 마주쳤다.
“왜?”
“……어어, 아니.”
자취방에 데려다주고, 그 김에 하룻밤 자고 가게 될지도 몰랐다. 마침 주말이고 하니 천천히 일어나서 같이 밥을 먹고, 별 다른 일정이 없다면 하루쯤은 그쪽에서 노닥거리며 시간을 함께 보내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조인휘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주점을 나와 후문 쪽으로 거의 안다시피 한 자세로 얼마간 걷다가 다리에 힘이 풀린 것 같기에 결국 등에 업었다.
가던 중 뜬금없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보채는 까닭에 편의점에 들러서 하나 물려 주었다. 편의점 앞에 구비된 간이 의자에 앉혀놓고 주소를 물으니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웅얼웅얼했다. 몇 번 되물은 끝에야 제대로 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고,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등에 업었다.
밤공기는 적당히 서늘했다. 등에 업은 무게는 끼니를 제대로 챙기는 건가 의문이 들 정도로 가벼운 편이었다. 마른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들어 보고 나니 체격차를 실감했다.
“응…….”
조인휘는 축 늘어져 있던 두 팔로 내 목을 껴안고는 금방 다시 느슨하게 풀기를 반복했다. 뜬금없이 어깨를 깨물다가 끙끙거리며 약하게 앓기도 했다.
골목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시멘트 바닥에 누군가 대충 버리고 간 꽁초들이 꽤 많이 보였다. 집까지 경사가 가파른 데다 가로등이 많지 않아 다소 으슥한 느낌도 있었다.
“인휘야, 열쇠 어딨어?”
현관 앞에 다다라서 묻자 대답 없이 곤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
일단 업고 있던 조인휘를 계단에 기대어 앉혔다.
“인휘야.”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하고 부르니 소리에 반응하듯 감은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센서 등 아래 비치는 피부는 여전히 분홍빛을 띠었다. 뺨의 한가운데로 몰려든 연한 색을 덧그리듯 손가락으로 훑어 내고 나서 되물었다.
“열쇠, 어딨어?”
눈을 무겁게 뜬 조인휘가 흐흐 하는 웃음소리를 내며 벽에 기댄 머리를 문질렀다.
“……안 알려줘.”
더 물어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백팩에 손을 댔다. 샅샅이 살펴볼 필요도 없이 바로 안쪽 수납 포켓에서 열쇠고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꺼내려던 순간, 한구석에서 늘어져 있던 조인휘가 무어라 중얼대기 시작했다.
“……다고, 내가…… 그랬는데…….”
실없는 주정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 눈높이를 맞추었다. 응? 하고 작게 물으니 힘없는 손을 들어 팔을 붙들어 왔다.
“……했는데에…….”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붙였다. 웅얼거리며 흐트러지는 말들을 재조합하기 위해 집중했으나 쉽지 않았다. 뭐? 소리 내어 다시 한 번 물었고, 곧이어 귀에 닿는 부드럽고 축축한 것을 느꼈다.
“…….”
몇 초 간의 정적이 흘렀다. 귓가에는 여전히 따뜻한 숨결이 번지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떼어 내고 표정을 확인하려 하자 조인휘가 어린애처럼 웃으며 가슴팍에 감겨들었다. 단순한 주정이라기엔 유혹의 색이 짙은 몸짓에 혼란을 느꼈다.
어깨를 감싸 쥐고 떨어뜨려 얼굴이 보이도록 했다. 무겁게 기우는 고개를 세우기 위해 턱을 받쳤다. 마주한 눈동자는 흐트러지다 못해 물크러진 것처럼 술기운에 절어 있었다.
“와아.”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내뱉는 입술이 헤벌어졌다. 물기 어린 입술 안, 축축하게 젖은 혀가 보였다.
“진짜…….”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차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평소의 몇 배나 어눌하고 느린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멈췄던 조인휘의 입술이, 다시 더디게 움직였다. 간신히 하나로 완성된 말은 말이라기보다 차라리 어떤 감탄에 가까웠다.
잘생겼다는 말. 하지만 흔하게 듣곤 하는 그 한마디에 차근차근 달아오르고 있던 몸이 지핀 것처럼 뜨거워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따끈하고 부드러운 뺨을 감싸 쥐자 그런 사소한 접촉만으로 성기가 힘 있게 조여들었다.
맞물리기 쉽도록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입술끼리 부딪히기 직전, 입술보다 먼저 더운 숨결이 닿았다. 조인휘가 느닷없는 웃음을 터뜨린 탓이었다.
“왜……?”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마주보고 웃으며 물었다. 이대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입술을 머금어 빨아 당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간지러운 전희처럼 애타는 순간이 싫지 않았다. 키스하기 직전 멈춰 세워진 적이 없는 만큼 신선하기도 했다.
“아 너무 가깝잖아…….”
그렇게 말한 조인휘가 고개를 옆으로 틀고 손을 밀어냈다. 아주 약한 힘이었음에도 미세하게 뒤로 밀려났다. 어째서 바로 키스로 이어가지 않는지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닿을 뻔했던 입술이 아쉬워 고개를 따라가 입 맞추려 하자 “후,” 한숨이 새어나왔다. 혹시 토하고 싶은 건가 싶어 안색을 살피는데,
“넌 좋겠다…….”
한마디가 툭, 던져졌다. 불명확하고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해되지 않을 수준은 아니었다.
“진짜…… 부럽다…….”
고개를 푹 숙인 조인휘가 중얼대며 말을 이어갔다. 아까까진 흐리멍덩하게만 들리던 말소리가 어째선지 훨씬 명확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동작이 멈추고, 장소도 잊을 만큼 팽팽하게 달아올라 있던 긴장감이 천천히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너느은…… 여자한테 인기도 터지게 많고…….”
“…….”
“연애 같은 건 그냥…… 껌이지…….”
“…….”
“나는, 씨…… 나도 여자랑 사귀고 싶다……. 빨리, 여자랑…….”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잔뜩 기울어진 몸이 옆으로 꼬꾸라졌다. 재빠르게 팔을 뻗었다. 계단 아래로 구르지 않도록 받쳐 놓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하…….”
짧은 헛웃음밖엔 나오는 게 없었다.
* * *
토요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가볍게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집으로 돌아와 간단히 식사하고 휴식을 가진 뒤엔 또 다시 헬스장으로 직행했다. 근육 단련 위주로 짠 루틴대로 두 시간 가까이 땀을 뺐다. 그래도 부족한 느낌이 들어, 러닝머신으로 유산소 운동을 추가하고 나자 한 시간이 금세 지났다.
체중을 쟀을 때 2키로 조금 넘게 줄어 있었다. 요 며칠 내내 이런 식이었으니 일이 키로쯤 빠지는 것도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가끔씩 혹사시키듯 진을 빼도 해소되지 않은 것처럼 몸 전체가 근질거리고 갑갑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요즘이 정확히 그런 시기였다.
씻고 나서는 평소보다 오래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피부 전신에 빈틈없이 보습을 하고 나서도 드러난 몸을 꼼꼼히 훑었다. 전보다 굴곡이 확연해진 복부나 상완 따위는 육안으로도 쉽게 단단해진 정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별다른 힘을 주지 않아도 긴장한 듯 바짝 두드러진 근육과 혈관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다소 메마르고 음험한 분위기를 풍긴단 감상이 뒤따랐다.
지잉, 지잉, 지잉.
휴대폰 진동이 울린 것은 로커를 열어 옷을 꺼낸 직후였다. 하의와 상의를 차례대로 꿰어 입는 짧은 틈에도 연속해서 울리는 걸 곁눈질하며 아마 교양 조별과제 때문에 만들어진 단체방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 외에 다른 대화방의 알람은 모두 꺼 둔데다 마침 오늘 조원들끼리 약속이 잡혀 있었다.
로커의 한구석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꺼내 대화방을 체크했다. 읽지 않은 곳부터 확인해 보니 개인 사정을 덧붙이며 얼마간 늦을 것 같다는 조원 하나의 말을 시작으로 다들 조금씩 늦을 것 같다는 변명 거리들이 뒤를 잇고 있는 흐름이었다. 그 속에서, 마지막으로 올라온 메시지 하나에 시선이 머물렀다.
[헉 오늘 12시가 아니라 2시였나요?]
혼자 전혀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조인휘였다.
약속 시간을 정할 때 유난히 산만하게 군다 싶긴 했는데 설마 착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게다가 단체방에 공지로도 시간이 게재되어 있었으니 다소 황당한 착오이기도 했다.
“…….”
시간을 확인하자 정오가 되기 십 분 전이었다. 약속 장소는 통학하는 몇 사람과 거리를 맞추기 위해 학교에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곳으로 잡았었다. 아마 열두 시로 알고 있었다면 학교 근처에서 움직여야 하는 조인휘로선 진즉 집에서 나왔을 것이라 예측 가능했다.
대화방에선 조인휘가 착각한 약속 시간을 정정해 주는 메시지들이 연이어 올라오고 있었다. 혹시 벌써 나왔냐는 걱정 어린 말도 보였다.
대화방에 메시지를 입력하는 대신 서둘러 탈의실을 빠져나오며 통화 버튼부터 눌렀다. 걸음이 자연히 빨라졌다. 머릿속에선 자가용으로 약속 장소까지 얼마나 걸릴지, 최단 거리를 어림잡아 보고 있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린 끝에 ‘여보세요?’ 하는, 조금 주눅 든 기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 표정을 싣기라도 하듯, 사근사근한 웃음과 함께 반가운 톤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야? 나도 지금 밖인데.”
약 삼십 분 만에 역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을 때 이 층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하고 있는 조인휘의 뒷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다가가기 직전 카페의 한쪽 측면에 자리한 장식용 거울을 응시하여 상태를 짧게 살핀 뒤 분주한 모양새로 걸음을 재촉했다.
“생각보다 늦었네, 미안.”
어깨를 감싸며 자연스레 사방으로 비어 있는 자리 중 옆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든 조인휘가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어, 왔네.”
“많이 기다렸어?”
“아니 전혀!”
“바로 근처였는데, 주말이라 차가 좀 밀려서.”
“……아냐, 두 시간 기다릴 뻔했는데 너라도 와서 살았다 야.”
멋쩍은 표정으로 뒷목을 쓸어내리는 조인휘의 옆모습이 어딘가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머리 모양이 좀 다른가 아니면 그새 더 마른 건가. 옷 때문인가. 일반적으로 남자에게 어울릴 만한 표현은 아니지만 굳이 표현을 빌리자면 청순한 느낌에 가까웠다.
“하얀색 옷 잘 어울린다 인휘야.”
“아, 그래? 그냥 냄새 안 나는 걸로 암 거나 집어 입은 건데…… 하하.”
쑥스러워 하는 티가 역력했다. 가만 보면 칭찬에 대응하는 게 능숙하지 못하고 순진하다. 작정하고 띄워 주는 식의 말을 하면 어떻게 나올지 문득 궁금해졌다.
“점심은 먹었어?”
“응, 대충.”
“나는 아직 전이라…… 간단한 거 시킬 건데 같이 먹어 줄래? 혼자 먹기 민망해서.”
“나야 괜찮은데…… 밥 먹는 게 낫지 않겠어?”
말을 내뱉는 조인휘의 입술, 왼편으로 작게 난 점을 응시하고 있다 눈이 마주쳤다.
“아냐, 빵 종류 좋아해서. 그럼 주문하고 올게.”
일어나면서 한 번 더 어깨를 가볍게 터치했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노트북 화면을 힐끔 쳐다봤을 때 상단바에는 이번 과제 주제로 선정된 작품에 대한 포털 서칭 탭이 빼곡한 게 보였다.
“혹시 못 먹는 거 있어?”
자리를 완전히 벗어나기 전, 혹시나 싶어 멈춰 서서 물었다.
“아니. 다 잘 먹어.”
대답하며 조인휘가 웃었다. 내내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처음으로 부드럽게 풀어진 웃음이었다. 먹는 걸 좋아하는 건가. 그러고 보면 항상 어디서든 부지런하게 잘 먹는다는 인상이었다. 살은 잘 안 찌는 체질인지, 지난주 등에 업었던 무게는 여자들이랑 비슷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가벼웠던 걸로 기억한다.
“…….”
지난주, 기억 속에 있는 시간을 짧게 되새기는 것만으로 입 안이 썼다. 취해서 등 언저리에 축 감겨들던 무게, 달뜬 체온, 풀어진 분위기 속 착각을 불러일으키던 몸짓과 눈빛 같은 것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떠오를 때마다 차가운 조소를 동반하는,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은 뒷맛 나쁜 기억이었다. 조인휘가 그때의 일을 일말도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게 그나마의 위로일 정도로.
“응, 갔다 올게.”
계단을 내려가면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다른 사람들이 오기까지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주문한 것들을 트레이에 한가득 담아 왔을 때 뭘 이렇게 많이 시켰냐며 놀라던 조인휘는 그러나 말과 다르게 샌드위치부터 베이글, 케이크까지 쉼 없이 잘 먹었다.
“여기 다 맛있다. 근데 얼마 나왔어?”
“신경 쓰지 마. 내가 먹고 싶어서 시킨 거니까.”
“그래도…….”
말하는 입가에 크림이 조금 묻어 있었다. 닦아 줄 생각으로 손을 뻗었지만 가까워지기 바로 전 쏙 빠져나온 혀끝이 입 주변을 말끔하게 했다. 방향을 잃은 손이 어중간하게 물러났다.
“근데 좀 좁지 않아……?”
음식을 꼭꼭 씹으며 시선은 노트북 화면에 고정한 채로 조인휘가 물어 왔다. 조심스러운 말투와는 별개로 불편하다는 걸 나름 분명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음? 괜찮은데. 혹시 불편해?”
“……약간?”
일부러 부자연스러울 만큼 가까이 앉은 건 사실이었다. 의자끼리 간극이 거의 없는 탓에 지금도 팔의 한 면이 맞닿아 있었다.
“생각 없이 너무 바짝 붙어 앉았나 보다. 미안, 맞은편으로 옮길게.”
의자 간격을 조금만 벌리면 될 문제였지만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아예 떨어진 맞은편으로 옮겨 버렸다.
“아, 옮기란 소린 아니었는데…….”
조인휘가 당황하며 우물거렸다.
“아냐, 내가 너무 배려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네.”
“…….”
옮기고 나서부터는 쭉 말없이 자료 조사에만 몰두했다. 중간에 좀 먹으면서 하라고 권하는 말에 괜찮다고 대답한 게 전부였고, 이따금씩 느껴지는 시선은 무시로 일관했다.
유치한 건 알지만 그냥, 신경 쓰이게 만들고 싶어서.
잡담이나 노닥거리는 일 없이 착실히 서로 할 일만 하는 분위기가 계속됐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거의 기계적으로 서치를 하고 자료를 스크랩하고 있던 때, 눈에 띄게 소심해진 어투로 조인휘가 말을 걸어 왔다.
“저기, 이거 아까 알아보던 편집 기법 나와 있는 건데…… 방금 찾아서…….”
“아, 링크나 파일 메신저로 보내 줄래?”
노트북을 돌려 보여 주려 하기에 필요 없다는 듯이 잘라 말했다. 그러자 조인휘는 바로 파일을 보내오지 않고 주저하며 표정을 살필 뿐이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시선을 맞추지 않고 화면만 주시하던 중이었다.
“어…… 근데, 너 혹시 기분 안…… 좋아?”
살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눈을 맞췄다. 기가 죽은 것처럼 불안해하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응? 갑자기 왜?”
“아니…… 그냥, 약간, 화난 것처럼 보이는 거 같아서. 노트북만 보고 있고…….”
말하며 떨궈진 시선이 어색하게 테이블 위를 배회했다. 한쪽 손가락을 뜯어낼 듯이 잡아당기는 작은 손짓에서도 긴장이 느껴졌다.
“아냐, 화날 일이 뭐가 있어, 그런 거 아닌데. 내가 원래 뭐 하나에 빠지면 정신없이 집중하는 스타일이라……. 괜히 신경 쓰이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네.”
곤란해하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이자 굳어 있던 안색이 단숨에 풀어졌다.
“아아…… 난 또…….”
나름 숨긴다고 숨기는 것 같은데 감정은 투명한 물에 푼 물감처럼 알기 쉽게 드러났다.
그래서 더 건드리고 놀리고 싶어지는지도 모른다.
“아, 근데 정말 너무 집중해서 했나 봐. 머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열나는 거 아니야?”
“그러게.”
말하며 랩톱을 닫았다. 이마를 한 번 짚어 본 뒤 ‘잠깐만…….’ 양해를 구하는 말과 함께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곤 테이블 위로 올라온 조인휘의 한쪽 손을 낚아채 방금 짚었던 곳 위로 올렸다.
“어때?”
이마를 덮은 손이 어설프게 꾸물거렸다.
“……좀 나는 거 같아.”
얼마 머무르기도 전에 떨어지려는 손을 감싸 붙잡은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너 손 차다.”
“……그래?”
아까 음료수를 마시며 유리컵에 손을 댔던 탓인지 이마보다 훨씬 서늘한 온도였다.
“……좋다.”
눈을 감고 혼잣말하자 겹쳐진 손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한껏 시선을 회피한 채 어색함을 감추려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고마워.”
손을 제자리에 되돌려 주며 말했다. 그리고 곧장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끌어 왔다.
“나도 아까 찾아 둔 거 생각났는데, 이런 영상은 참고할 만한 것 같아서.”
모바일 화면을 열고, 머뭇거리고 있는 조인휘에게 이어폰 한쪽을 건넸다. 손으로 받으려는 걸 모른 척하고 귓가에 직접 가져다 대었다.
“아…… 잘 안 보이네…….”
위치가 뻔한 구멍 주위를 몇 번 스치고 비낀 끝에 귓바퀴를 살짝 쥔 채로 꽂아 주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 주고 나자 눈앞의 얼굴은 색이 바뀌어 있었다. 붉은 안색과, 목부터 어깨까지 딱딱하게 경직된 자세를 훑으며 물었다.
“어떤 거 같아?”
“……어.”
“……어. 그게 다야?”
화면에 고정된 눈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걸 보니 웃음이 났다.
“……좋은 듯?”
“편집 기법 분석할 때 참고하면 괜찮을 것 같아서. 그리고 잠시만…… 이건 감독에 대한 다큐멘터리인데, 이 부분……”
설명하다 말고 눈이 마주쳤다. 영상을 보는 게 아니라 사람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조인휘의 눈빛이 어딘가 흐리멍덩했다. ‘왜?’ 하고 묻자 한 발 늦게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회피하는 게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대놓고 드러내는 꼴이었다.
“……아니, 암 것도 아니야.”
“근데 인휘야, 너도 열나? 얼굴이 빨개.”
지적을 받아서인지 조금 더 붉어진 뺨을 감싼 조인휘가 얼버무리는 것처럼 중언부언했다.
“좀 더워서. 아 오늘 반팔을 입고 올 걸 그랬어. 날씨 더운 것 같아.”
“물 마실래?”
따라 놓았던 물을 건넸다.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든 조인휘는 막힘없이 쭉 들이키곤 탁, 소리 나게 컵을 내려놓았다.
“……근데 너는 왜 웃어?”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괜히 이쪽저쪽 시선을 옮기며 묻는 게 어딘가 불만스러운 느낌이었다.
“내가 웃었어?”
“지금도 웃고 있잖아.”
“……그래? 좋아서 그런가.”
“……뭐가?”
컵을 쥐고 있던 하얀 손이 이제는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는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쓸데없이 구겨 대는 게 보였다.
“그냥. 요새 우리 자주 보니까.”
우회적이고도 직접적인 대답이었다.
“…….”
대화는 그대로 잠시 끊겼고, 주저하는 듯한 정적이 머물렀다.
“너는 항상 말을 뭔가…… 나긋나긋하게 하는 것 같아.”
“그래?”
“어…….”
시간은 어느새 다른 조원들이 하나둘씩 합류할 때가 되어 있었다. 여럿이 있는 것보단 둘만 있는 게 낫지만 그래도 이대로 저녁까지 먹게 되면 반나절 넘게 함께 보내는 셈이었다.
테이블 가까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자 비좁은 테이블 아래로 꺾인 무릎끼리 부딪쳤다. 조인휘는 그 작은 부딪침마저 의식한 듯 의자를 뒤로 뺐다.
“…….”
그런 과민한 반응을 부추기는 것처럼 우연을 가장해 몇 번 더 부딪쳤고, 처음엔 움찔대던 조인휘도 결국 마찰이 반복됨에 따라 피하지 않고 내버려두게 되었다.
아직 에어컨이 가동될 만한 시기는 아니었다. 이런 애매한 날씨엔 내부가 한층 덥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맞닿아 있는 피부에 열이 오르는 것도 곧 익숙해졌다.
편안하게 서로의 다리를 얽고서, 나는 조인휘가 반쯤 남긴 케이크를 천천한 속도로 먹어치웠다.
집으로 돌아오자 밖에선 못 느꼈던 피로감이 뒷목에서부터 등허리 전체로 번졌다. 아무것도 아닌 일정에 미약하나마 피곤이 느껴지는 게 의아했다. 아무래도 아침에 기운을 과하게 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양팔을 쭉 뻗었다. 찌뿌듯한 게, 샤워로 끝낼 게 아니라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야 할 것 같았다.
씻고 나와 침대에 기대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전화해 볼까’였다. 집에 도착한 지 한참 지났을 테고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지도 모를 야심한 시각이었기 때문에 먼저 문자로 잘 들어갔냐는 형식적인 인사를 보내 두었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확인하지 않고 잠잠한 걸 보면서 불현듯 다른 생각이 들었다. 혹시 집이 아닌 건가. 헤어질 때 방향이 같았던 몇 사람과 유독 죽이 잘 맞아 들떠 있었는데, 행여 그 인원끼리 2차에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르자 연결음이 빠르게 이어지다 느닷없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으로 바뀌었다. 의도적으로 전화를 받지 않는 것 같아 더 시도하지 않고 그만두었다.
침대에서 벗어나 창문을 열고,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어 불을 붙였다. 담배는 많이 피울 땐 하루에 반 갑 정도 피우지만 아예 안 피우는 날도 더러 있었다. 오늘 같은 경우엔 의식적으로 피우지 않으려고 신경 쓴 반동으로 더 생각이 났었다.
채 반도 태우지 않았을 무렵. 지잉, 울리는 진동 소리에 자동적으로 침대 쪽을 바라보니 휴대폰에 전화가 오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집어 올렸다.
“어 인휘야.”
-고정원…… 너 전화 했었어?
잔뜩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혹시 자다 일어난 거야?”
담배 끝을 재떨이에 짓이겨 껐다. 그 사이 잠기운으로 눌린 목소리가 한 박자 늦게 ‘어어’ 하고 대답해 왔다.
“……어쩌지, 미안. 그런 줄도 모르고.”
-아냐 나도 원래 일찍 안 자는데 오늘 피곤해서…… 근데 무슨 일이야?
“아…… 별 일은 아니고……, 혹시 내일 시간 되나 해서.”
-내일?
“응. 우리 과제 때문에.”
미안한 듯한, 부탁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잊고 있었는데 다음 주에 다른 교양도 조별이 있어서 시간 맞추기가 빠듯할 것 같아. 인휘 너도 평일은 아르바이트 있으니까 우리 분량은 내일 몰아서 해 두면 편할 것 같은데…… 어때?”
큰 주제별로 분담하느라 세부적으로 팀이 나뉘었는데 조인휘와는 같은 과라는 이유로 함께 맡게 됐다. 공유 폴더도 생겼고 개인이 할 분량도 구분돼 있어 굳이 자주 만날 필요는 없었지만 지금으로선 이용하기 좋은 구실이었다.
-으음…… 내일…….
“선물 받은 뷔페 식사권 기한이 마침 내일까지인 것도 있고. 겸사겸사 과제하고 밥도 먹으면 딱일 것 같은데……. 많이 어려워?”
-어……, 동창들이랑 약속이 있긴 한데…… 아마 늦게 가도 될 거 같아.
“다행이다.”
침대 위로 무릎을 올리며 무게를 실었다. 천천히 기대앉으며,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반대편으로 가져다댔다.
“그럼 내일 몇 시쯤 볼까?”
-음…… 일찍 만나서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낫지 않아? 아침에 9시나 10시?
“그래, 그럼 9시까지 내가 학교 근처로 갈게. 편하게 나와.”
일찍 끝낼 생각은 없었다. 아침부터 만나 밤 늦게까지 붙잡아 놓을 만한 핑계 거리야 즉석에서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조인휘의 말꼬리가 축 처졌다. 금방이라도 다시 잠에 빠질 것 같았다.
-그럼……, 낼 봐……?
용건이 끝났으니 바로 통화를 끊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다. 잠을 깨운 것도 있고, 이어 가기엔 무리일 듯했다.
“……그래, 내일 봐. 깨워서 미안했어.”
-아냐, 잘 자…….
“응, 잘 자.”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뚝, 연결이 끊겼다.
“…….”
절단 내듯, 말을 내뱉자마자 조금의 여유도 없이 끊긴 통화에 공연히 기분이 묘해짐을 느꼈다. 1분 30초가 채 안 되는 통화 기록. 가만히 화면을 들여다보다 말고 휴대폰을 닫았다.
잘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어느 타이밍에 몸을 일으킨 건 문득 방안에 머문 매캐한 잔향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반쯤 열려 있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환기가 원활해지도록 닫힌 부분 없이 활짝 열어젖힌 후, 근처에 놓인 알콜 세정제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의 마디마디를 닦고, 필터에 직접 닿았던 부분은 여러 번 문질렀다. 마무리로 핸드크림을 바르고 나서야 일련의 제거 작업이 끝났다.
전에도 신경은 썼지만 요즘은 특히 담배를 피운 후의 냄새에 더욱 까다로워졌다. 유독 담배 냄새에 민감한 조인휘를 의식한 결과였다.
최근 들어 스스로의 행동이 우습다는 건 자각하고 있다. 목적이라고 할 만한 속내가 있으니 적어도 당분간은 지속할 예정이라고 해도…….
이상했다. 분명 연애 감정이 아닌데. 연애 감정처럼 휩쓸리는 게.
애초에 성적으로 끌리는 상대와 잠자리를 가진다는, 어려울 것 없던 행위에 처음으로 제약이 걸린 게 문제일지도 몰랐다. 그렇게까지 원하는 건 아닌데 자꾸만 혼동하게 됐다. 내가 조인휘에게 원하는 건 한 번의 잠자리일 뿐인데도.
하루의 너무 많은 시간을 조인휘의 생각으로 할애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그리고 하루의 마무리까지. 내가 생각해도 타인에 대한 생각의 지분이 이례적으로 과했다.
픽, 웃음이 터졌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한다면 사랑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가정이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