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비 온 후
눈을 뜨기 무섭게 컨디션이 저조했다. 당연하게도 수면 부족으로 인한 편두통이었다. 수업을 제끼고 싶다는 떨치기 힘든 충동이 있었지만 첫 수업이 필수전공인 데다 등록금 내고 걸핏하면 빠지려 드는 것도 죄책감이 들어 찰나의 충동으로만 그쳤다.
대충 씻고 학교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자 쨍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어지럼증 때문에 휘청거리고 나니 아찔했다. 빈혈 같은 건 아닐 테고 아무튼 요새 스트레스 때문에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건 맞았다. 나오기 전에 거울을 확인해 보니 눈 밑도 점점 어둡게 침착되고 있었다.
‘며칠째 잠 한숨도 안 와, 네가 헤어지자고 할까 봐.’
작동이 멈춘 것처럼 걷다 말고 아득해진 건 그렇게 말하던 고정원의 목소리가 생각나서였다.
한번 재생되자 쉴 새 없이 밀려드는 기억들 때문에 경황없이 걸었다. 골목에서 튀어나온 차와 부딪힐 뻔했을 때에야 비로소 넋이 나갔다는 자각이 들어서 모질게 생각들을 끊어 내고 정신을 차렸다. 학교에서 고정원과 마주치게 되더라도 이런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
하지만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맞닥뜨리게 된 고정원 앞에서 나는 정신을 차리자는 결심이 무색하게 멍청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이삼 초쯤 눈이 마주쳤으려나. 무심한 표정으로 곁을 스치며 고정원이 내 손에 쥐여 주고 간 건 캔 음료수였다. 도서관 옆에 있는 자판기에만 구비되어 있어서 종종 그 때문에 찾아갈 정도로 좋아하는 초콜릿 드링크.
“아, 고마……,”
인사를 하려고 돌아보았지만 이미 멀어지고 난 뒤였다.
힘없이 고개를 떨군 나는 구석의 아무 자리로 가 앉았다.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끼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방금 받은 음료수를 다시 집어 만지작거렸다. 수업에 들어오기 전에 나를 생각해서 굳이 강의동이랑 멀리 떨어져 있는 도서관까지 가서 음료수를 뽑아 왔을 고정원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사람이 대부분 빠질 때까지 기다린 나는 슬렁슬렁 강의실을 벗어났다. 딱 점심때였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나왔는데 때가 되니 아무래도 빈속이 티를 내기는 했다. 뭘 먹긴 먹어야 할 텐데. 학식으로 갈까 편의점에서 대강 때울까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우유부단한 성격이라 평소 식사 장소나 메뉴 선정은 대부분 고정원이 해 주었기 때문에 이런 고민 자체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우울해지려는 기분을 추스르며 학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 틈 속에서 소란스럽게 먹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지금은.
“야!”
배식판을 들고 빈자리로 가려는데 누군가 불러 세웠다.
“너갱이 나가서 어디 가냐. 여기 앉아.”
손짓을 하며 앞자리를 가리키는 건 최재운이었다. 나는 어설프게 끄덕이며 앉으라는 대로 맞은편에 식판을 내려놓고 엉덩이를 붙였다. 최재운의 주위로 앉은 과 동기 두어 명과도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아 오늘 갑자기 학식 제육이 개 땡기는 거야. 별 맛도 아닌데.”
최재운은 양념된 제육볶음을 입안에 넣어 우물거리며 떠들어 댔다. 내 얼굴을 보더니 잠을 못 잤냐며 걱정 어린 소리를 하다가 이내 과대가 단체 대화방에 올린 소식으로 화제를 옮겼고, 최종적으로는 본인의 여자친구 자랑으로 정착했다.
나는 돈가스를 해체시켜 놓고 몇 점 먹지도 않고 깨작거렸다. 비어 있는 위에 소량의 음식을 밀어 넣은 것만으로 허기는 금세 가라앉아서 식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먹진 않고 썰어 대고만 있었다. 문득, 일전에 고정원이랑 돈가스집에 가서 서로 먹여 주던 게 떠올라 희미한 웃음이 번지기도 했다.
묘하게 주위가 조용해졌다 싶었는데. 자른 돈가스 조각을 입안에 넣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씹는 것도 잊고 얼떨떨해졌다.
“아, 역시 유명인.”
마찬가지로 무언가 달라진 걸 느꼈는지 뒤돌아 본 최재운이 한마디 했다.
주변이 조용하게 소란해졌다.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지만 정말로 그랬다. 제각기 소곤대는 작은 움직임들이 일제히 일어나며 웅성거리는 분위기가 조성되어도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으니 조용했던 것이다. 아예 떠들던 입을 다물고 쳐다보고만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난 쟤 학식 먹는 거 왜 첨 보는 거 같냐.”
건너편의 테이블에 자리한 고정원과 눈이 마주친 나는 황망하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렇게까지 당황할 필요는 없는데, 스스로도 지나치게 허둥거렸다는 자책이 들었다.
“근데 넌 왜 쌩까? 친하면서.”
“어? 쌩깐 거 아니야 눈인사 했는데.”
무뚝뚝하게 얼버무린 나는 급격한 허기를 느낀 사람처럼 먹는 데에 집중했다. 빨리 자리를 뜰 생각으로 잘 넘어가지도 않는 걸 대충 씹어가며 삼키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짧게 진동이 울렸다.
먹으면서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안 쳐다볼 테니까]
어?
생소한 글자를 마주한 느낌으로 나는 가만히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그 사이 지잉, 울리며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했다.
[천천히 먹어]
“…….”
완성된 하나의 문장을 확인하고 나자 입안의 음식물이 제멋대로 꿀꺽, 넘어갔다.
목구멍이 아릿했다.
까끌한 튀김옷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킨 탓이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의식하지 않으려 애쓴다는 건 상당한 에너지 소모였다. 세 개의 수업을 모두 끝내고 나자 전신이 녹초 같이 흐느적거렸다. 정확히는 체력이 힘들다기보다 정신적으로 고단해져 있었다. 캠퍼스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힘겹고 귀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
천천히 교정을 빠져나가며 의미 없이 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멈춰 서서 한숨을 쉬거나 갑자기 고개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도리질치기도 했다.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면 왜 저러느냐고 손가락질을 했을지도 모르는 광경이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적이 있었나. 이렇게, 내 마음인데 내가 알 수 없게 복잡해졌던 적도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생각을 정리한다고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정리가 되고 감정이 되돌아오고 우리 관계가 전처럼 회복될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잡념의 반복으로 힘이 빠진 나는 교정을 빠져나가다 말고 근처 아무데나 벤치에 눌러앉았다. 기운도 없는데 마침 눈앞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탁자가 있어 이마를 맞대고 문질렀다. 그러다 발딱 몸을 세운 건 주머니 속 휴대폰이 길게 울리며 전화가 왔음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긴장하며 꺼냈다가 발신인이 김강우라는 걸 확인하고 도로 넣어 버렸다. 전화는 끈덕지게도 울리더니 끊겼다. 두 번째로 잇따라 전화를 해 오는 걸 보고는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받았다.
통화 내용은 별거 없었다. 어디냐고 묻더니 위치를 알려 주자 거기서 기다리라며 끊어 버렸던 것이다. 얘가 왜 이러나 싶어서 귀찮았지만 무시할 수도 없어서 엎어진 채로 김강우를 기다렸다.
“조인희!”
금방 찾아온 김강우는 앉아 있는 내 옆으로 털썩 주저앉으며 어깨동무를 걸쳤다.
“수업 남았어?”
“아니 왜.”
“너 오늘 나 좀 도와주면 안 되냐?”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했다. 얘기를 듣기도 전부터 성가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묻지도 않았는데 김강우는 줄줄 자기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중구난방인 말들을 종합해서 요약해 보자면 어렵게 소개받은 여자애를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데 내가 같이 가서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 달란 소리였다.
“야 네 소개받은 애를 나랑 왜 만나. 둘이 만나야지.”
이해가 안 돼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걔가 내 친구 한 명 소개시켜 달라잖아. 그래도 내가 동기들 중에서 제일 친한 건 넌데 너랑 가야지.”
가서 잠깐만 있다 가도 되니까 같이 가면 안 돼? 어? 어?
조르는데 머리가 아팠다. 전화 받지 말 걸. 후회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근데…… 보다시피 내가 오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과제도 밀렸고…….”
좋게 좋게 거절하려는 생각으로 밑밥을 깔자, 낌새를 눈치챈 김강우가 돌연 낯빛을 바꾸고 정색을 했다. 넌 진짜 의리도 없고 필요할 때 이용만 하는 새끼라느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고정원 피해 다닐 때 도와주지 말았어야 했다느니. 불평을 듣고 있자니 편두통까지 더해져서 이대로 확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진짜 딱 삼십 분만 있다가 간다……. 알았지?”
“어, 고맙다 친구.”
결국 닦달한 끝에 승낙을 얻어 낸 김강우는 웃음이 만면했다. 나는 한층 기운을 잃은 채 의지를 상실한 걸음으로 학교 근처의 약속 장소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 *
가까운 술집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김강우와 내가 앉아 있는 자리로 들어온 건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었다. 김강우가 소개 받은 여자애 한 명만 오는 줄 알고 있었던 나는 놀라서 김강우를 쳐다봤고, 김강우는 저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마주 앉은 남자 둘과 여자 둘. 딱 그런 분위기를 연상시킬 수밖에 없는 구도라 당황이 앞섰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친구랑 같이 왔어.”
말하는 여자애는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어딜 가나 눈에 띌 미인이었다. 옆에 앉은 친구도 그렇고 왠지 무용하는 애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김강우가 무용학부 어쩌구 하며 사진을 보여 줬던 거 같은데, 고정원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서 뭐 하나 제대로 캐치해서 들은 게 없었다.
다들 통성명 후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차마 무시할 수 없는 질문에만 애매한 대꾸로 때우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삼십 분이 왜 이렇게 안 가나. 시계를 체크할 때마다 고작 일 분씩만 경과해 있을 뿐이었다.
“혹시 어디 아프세요?”
맞은편에 앉은 여자애가 그렇게 묻는 말에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여자애들을 비롯해 김강우까지 자리에 앉은 세 명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쏠려 있었다.
“어……. 제가 잠을 좀…… 못 자서…….”
떠듬떠듬 대꾸하는데 갑자기 김강우가 끼어들어 조잡스러운 말들을 늘어놓았다.
“원래 분위기 잘 띄우는데 왜 이러지? 너무 예뻐서 긴장했지 너?”
“……뭐래.”
“얘 원래 장난 아니거든. 여자들한테도 인기 쩔어.”
내 어깨 위로 올라온 김강우의 손이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올렸다. 짜증스럽고 민망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여자랑 많이 사귀어본 척에 열심이던 전 같았으면 이런 자리에 끌려오게 된 이상 최선을 다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인기 많을 거 같긴 하다. 잘생겼어.”
“오, 희정이 취향?”
“아, 왜 몰아가. 잘생겼잖아 객관적으로.”
“근데 얼굴은 왜 빨개지지?”
김강우는 그새 오늘 처음 만난 여자애랑도 말을 트고 화기애애했다. 장난이 오가며 웃음도 터지고 분위기는 갈수록 좋아지는데 나는 혼자서만 고개를 푹 숙인 채 겉돌고 있었다. 고정원에 대한, 우리의 앞으로의 관계에 대한 생각만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이런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끌려와 앉아 있으려니 고역이 따로 없었다. 고정원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결국 삼십 분이 경과하자마자 예의고 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죄송한데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강우한테는 아까 말해 뒀는데……. 재밌게 노세요.”
김강우가 야, 하며 붙잡는 걸 무시하고 술집을 뛰쳐나갔다. 좀 더 자연스럽게 자리를 벗어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여유가 없어서 그렇게밖엔 행동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고난 뒤에 황당함으로 싸해질 분위기가 예상됐다. 김강우도 자길 난처하게 만들었다며 불 같이 화낼 게 분명했다. 그 여자애랑 잘 되고 싶어서 안달 난 상태인데 내가 도와주질 못할망정 초치는 행동을 했으니.
하지만 나도 난처한 건 마찬가지였다. 둘씩 짝지어 모이는 자리인 줄 알았으면 김강우랑 쌩까는 일이 있더라도 안 나갔을 거다. 내 뜻이 아니었다고는 해도 의도치 않게 나쁜 짓을 저지른 거 같아서 뒷맛이 썼다.
“후…….”
쫓기는 사람처럼 뛰다가 숨이 벅차면서부터 속도를 줄였다. 살짝 배어난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익숙한 골목으로 접어든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휴대폰 진동이 울려 대기 시작했다. 주머니 속에서 꺼내어 확인해 보자 발신자는 예상했던 대로 김강우였다. 지금 받으면 난리를 쳐 댈 게 뻔해서 무시하고 다시 집어넣었다. 끊기고 나면 울리고 조금 있다가 또 울리고, 그런 식으로 한 서너 번쯤 더 반복됐다.
수습이나 잘하지 나한테 전화를 하고 있어.
질리는 기분을 느끼며 걷다가 편의점 앞에서 발걸음이 멈추었다. 점심을 먹은 지 꽤 시간이 지나 속도 빈 데다 뛰었더니 갈증도 나는 차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으로 돌아가 봤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새삼 상기되면서 그냥 여기서 저녁을 때우고 가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그대로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대충 음료수와 삼각김밥을 하나씩 골랐다. 평소 식사량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지만 입맛도 없고 그저 빈속을 채울 정도면 충분했다.
간이 테이블 앞에 서서 김밥을 한 입 우물거리는데 또 휴대폰이 지잉 지잉, 짧은 진동을 더했다. 문자가 오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확인하진 않았다. 육두문자로 가득할 화면이 눈앞을 스쳤다. 만약 김강우가 차이게 되면 틀림없이 나한테 책임 전가를 하겠지. 모이는 자리마다 비아냥거릴 김강우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곤했다.
꾸역꾸역 삼각김밥 하나를 해치우고 텁텁한 목구멍을 음료수로 축이고 나왔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한 건 집 앞에 거의 다다라서였다.
“……어.”
놀라서 화면을 눈앞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액정에 쌓인 김강우의 욕설 문자 사이로 고정원에게서 온 문자들이 간간이 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재중 전화도, 네 통 중 두 건은 고정원에게서 온 것이었다.
[바빠?]
[가져갈 게 있어서 문 좀 열어 줬으면 좋겠는데]
“…….”
간략한 메시지에 심장이 두근대며 크게 박동했다. 꿀꺽, 침이 넘어갔다. 지나친 긴장은 켕기는 기분에서 비롯된 것이 맞았다. 아까까지 있었던 자리를 들킨 것도 아닌데 위압감으로 몸이 움츠러드는 듯했다. 고정원은 나와 떨어져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하다 못해 못 견뎌한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내가, ‘생각 정리’를 핑계로 떨어져 놓고 그런 자리에 참석해 버렸으니.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고작 서너 번 울린 것만으로 기다렸다는 듯 통화가 연결되어 등줄기가 곧추섰다.
-여보세요.
원래도 저음이지만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순간 왜인지 모르게 낯설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전화를 받은 고정원의 첫말 때문이었다는 걸 한 발 늦게 깨달았다. 보통 내 전화를 받을 때 고정원은 ‘어 인휘야’하고 이름을 부르는 식이어서 ‘여보세요’같은 통상적인 말이 오히려 어색하게 들렸다.
“……어, 저기 미안. 연락한 거 지금 봤어…….”
그 때문이었는지, 나도 평소보다 좀 딱딱하게 말이 나갔다.
-…….
고정원의 대답을 기다리며 나는 밀려드는 울적함을 이기지 못했다. 사귀면서 한껏 허물어져 있던 서로의 경계를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된 게 씁쓸했다. 남들과 주고받는 평범한 언행들을 우리 사이로 가져오게 되니 이렇게 거리감이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나 지금 집에 거의 다 왔는데…….”
너 괜찮을 때 들러서 가져가라는 말을 덧붙이려던 참이었다. 집 앞에 서 있는 인영을 발견한 순간, 나는 길목에서 우두커니 멈춰 섰다.
-집 앞에 있을게.
그렇게 말한 고정원은 뚝 전화를 끊었다.
“…….”
나는 몸을 반쯤 돌려세우고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다가가기 전, 휴대폰의 까만 액정 화면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입가에 뭐가 묻어 있진 않은지 혹은 켕기는 속내가 표정으로 드러나 있진 않은지 따위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점검을 마친 나는 잽싼 걸음으로 다가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많이 기다렸……지…….”
그러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목에 힘이 풀리며 입술이 멍청히 헤벌어지고 말았다.
“……이제 와?”
기다란 손가락이 입술에 머금어진 것을 빼내 가는, 천천한 동작을 바라보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내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타고 있는 불씨. 코를 감싸는 탁한 향. 고개를 들자 진득하게 가라앉은 눈매가 나를 향해 있었다.
“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질문하며 앞서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 안 됐어.”
그렇지만 심장은 쿵쿵거리고 있었다. 손끝도 살짝 떨려서 열쇠를 꺼내며 힘주어 움켜쥐어야 했다. 이게 뭐가 놀랄 일이라고, 과민하게 반응하는 내가 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고정원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을 뿐이다. 사귀고부터 아예 피우질 않아서 처음 보는 모습이긴 하지만 흡연했었다는 사실은 사귀기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내가 챙겼어야 하는데 생각이 짧았네. 필요한 거 다 가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나는 쓸데없는 소리를 부연해 가며 긴장을 분산시켰다.
“왜, 이참에 아예 나갈까?”
“……뭐?”
돌아보자 자조하듯 웃는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농담이야. 하고 눈길을 돌린 고정원은 방의 한구석으로 다가가 본인의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
나는 곤혹스러움을 느끼며 남의 집에 온 것처럼 불편하게 서 있었다. 뒷목을 쓸거나 팔뚝을 쓸어 가며 괜한 몸짓으로 초조함을 달랬다.
질문 하나가 방안에 홀연히 울린 건 그 무렵이었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움직임을 멈춘 고정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냥…… 학교에 있다가……. 왜……?”
자신 없이 대답하며 손톱으로 여린 살을 꾹꾹 눌렀다. 고정원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에 불안함이 증폭됐다.
“누구랑 있었는데?”
“……보고해야 돼 꼭?”
피하고 싶어서 아무 말이나 주워섬긴 거였는데 그 말에 고정원의 등이 움칠 반응하는 게 보였다. 화라도 난 걸까. 굽힌 무릎을 세운 고정원은 뒤돌아 내 쪽으로 다가왔다. 눈앞으로 근접한 가슴팍이 압박감을 느끼게 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늘따라 고정원의 몸집이 금방이라도 나를 짓누를 것처럼 거대해 보였다.
“해.”
냉소적인 명령조가 내려앉았다.
“헤어진 적 없으니까.”
“…….”
나는 말없이 시야에 들어온 고정원의 큼지막한 손을 쳐다보았다. 힘을 준 것도 아닌데 손등부터 팔뚝까지 눈에 띄게 불거진 혈관이 성난 것처럼 보여서, 하지만 창백하기 그지없는 피부 때문에 열기와 동시에 냉기 또한 느껴지고 있어서 충돌되는 양극의 감각이 묘했다. 방안에는 그처럼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한 기운들이 감돌고 있었다.
“……그럼 넌 왜 보고 안 하는데.”
“궁금해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말해 봤자 아닌가.”
“…….”
할 말이 사라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떤 대답을 하든 이렇게 꼬투리를 잡고 제대로 된 대화로 이어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싶을 뿐이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데 고정원은 그걸 노력이라고 봐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가 떨어져 있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불안해하는 고정원이 이해되지 않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물건 챙겼으면 이만 가.”
힘없이 돌아섰다.
“내가 무슨 짓까지 하나 시험하는 거 같아 너.”
순간 눈살이 찌푸려질 만한 악력으로 팔을 붙들려 돌려 세워지는 바람에 아까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보게 되었다.
“이러지 마……. 이렇게, 이러는 거 싫다고……!”
가까워진 가슴팍을 밀어내며 고개를 떨구었다. 고정원의 피부에서 뿜어내는 열기에 맞닿는 것도, 흔들림 없이 강제적인 힘으로 붙들린 것도 모두 부담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일촉즉발의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거길 꼭 나가야 했어?”
“……뭐?”
나는 굳어져서 되물었다.
“아니, 그러려고 떨어져 있자고 한 건가. 별 미친 생각이 들어.”
집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던 고정원이 떠올랐다. 무섭도록 가라앉은 분위기의 이유를 알게 되자 죄책감으로 가슴이 저몄다. 오해라고 설명해야 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고갤 처든 의문이 너무도 강렬해서 변명보다 질문이 앞섰다.
“어떻게……?”
눈이 마주친 고정원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잠시 다른 곳을 바라봤다. 화를 삭이는 듯 보였다.
“궁금한 게 그거밖에 없지.”
혼란으로 눈앞이 잠시 흐려졌다. 한 가지 가설이 떠오르면서 기분이 몹시 이상해졌다.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으면서도 홀린 것처럼 의문을 입에 담았다.
“……혹시, 내 뒤…… 밟았어?”
고정원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꺼졌다.
“그럼 안 돼?”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고정원을 쳐다보았다.
“…….”
허탈감으로 기운이 빠졌다. 일주일에서 이틀로 떨어져 있는 시간을 멋대로 줄여 놓고 그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감시하고 있었다니.
“……이틀 시간 주겠다며. 약속 어겨 놓고, 그렇게 당당하냐 넌? 진짜……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떠밀며 나가라고 말했지만 고정원은 꿈쩍도 안 했다. 나가긴커녕 도리어 내 어깨를 끌어안아 감싸려고 했다.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평소 고정원의 몸에서는 나지 않는 낯선 향을 맡자 심지에 불을 붙인 것처럼 빠르게 열이 치달은 나는 ‘싫어!’ 소리치며 격하게 발버둥을 쳤다.
“그딴 델 왜 갔는지 변명이라도 해!”
내 양쪽 어깨를 잡아 흔든 고정원이 고함했다.
“나도 소개팅인 거 모르고 갔다고!”
눈시울이 뜨거워진 나는 바닥을 쳐다보며 똑같이 큰소리로 맞대응했다.
“모르고 가서 한 시간을 앉아 있어? 왜, 여자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생각 정리가 더 잘 되나 보지?”
정확히는 삼십 분을 앉아 있었고 편의점에 들렀다가 고정원에게 연락한 시간까지 합치면 한 시간이었다. 미행을 할 거면 좀 제대로 하지. 애초에 나와 김강우가 나눈 대화나 안에서 일어났던 일이나 정확한 사정은 알지도 못하면서 고압적으로 구는 고정원에게 화가 났다.
“그래, 여자 만나고 싶어서 갔다 왜!”
변명을 시켜 놓고 믿지도 않으니 열이 뻗쳐서 홧김에 진심도 아닌 막말이 나갔다.
……하. 낮은 탄식을 내뱉은 고정원은 그제야 붙들고 있던 내 어깨를 놓았다. 이마를 짚고 뒷목을 쓸어내리는 일련의 행동은 전부 끓어오르는 감정을 힘겹게 억누르기 위한 정제된 몸부림으로 보였다. 어쩔 줄 모르고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는 고정원을 보며 나는 뒤늦게 말실수의 여파를 느끼고 후회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고정원과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허리춤이 떨렸다.
“조인휘.”
심호흡이 거칠었다.
“똑바로 말해. 후회하지 말고.”
혀끝을 살짝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우선, 김강우가 내게 했던 부탁부터 차근차근 설명부터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조된 감정 때문에 나도 진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상대를 자극하지 않고 이해시킬 수 있을지 말을 고르는데, 그 틈을 참지 못한 고정원이 다시 내 어깨를 움켜쥐어 왔다.
열기 어린 채근에 쫓기듯 입술이 벌어졌다.
“……너도 만났는데 나는 왜 못 만나?”
“…….”
고정원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삽시에 동작들이 멈추고 숨도 멈췄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사가 튀어나간 건 머릿속에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충동질 때문이었다. 희미하게 풍기는 담배 향을 맡고 있자니 언젠가 강유나 선배가 담배를 피우며 고정원에게 권하던 장면이 생각났고, 강유나 선배를 떠올리자 제어할 새도 없이 울컥해서 해선 안 될 말을 터뜨려 버린 것이었다.
끼얹어진 침묵이 한참 동안 방안에 머물렀다.
“그걸 말이라고 해?”
“…….”
“……내가 어디까지 변명할까. 너 만날 줄 알았으면 여자랑은 말도 안 섞었을 거라고 같잖은 후회라도 할까 지금?”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매듭짓고 덮어야 할지. 모순이었다 모든 게. 그냥 내가 알고 있는 고정원을 그 선배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장이 문드러지고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괴로워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아!”
팔에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에 낮게 소리쳤다. 아까보다도 억세진 악력으로 내 팔을 붙든 고정원은 귓전 가까운 데서 윽박질렀다.
“여자를 만나?”
두터운 손가락이 얹어지며 입술이 짓눌렸다.
“다시 말해 봐. 누굴 만나?”
아랫입술을 짓누르던 그것이 턱 끝과 가슴팍을 지나쳐 복부를 일자로 그어 내려갔다. 성적인 자극을 동반한 기묘한 압박감에 몸이 뒤틀렸다. 단전까지 내려간 손가락이 단숨에 성기 전체를 감쌌을 땐 숨이 들이켜졌다.
“할 수나 있겠어?”
수치심과 함께 확 열이 치받았다. 눈가, 귓가, 뒷목, 목구멍까지.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라 입 구멍을 뻐끔거렸다. 다정한 귓속말이었지만 그래서 더 참을 수 없었다.
“……놔!”
흥분한 나는 날뛰며 팔을 휘둘러 댔다.
“내가 여자를 왜 못 만나? 오늘 만난 애도 나보고 잘생겼댔어 번호도 물어봤어! 내가 왜 여자를 못 만나? 나 좋다는 여자 널렸어!”
되는 대로 내뱉으며 유치하게 악다구니를 썼다. 남성성을 증명하지 못하니 하찮은 인기를 과시하며 자존심을 세우는 게 다라고 해도 듣고 있는 고정원의 눈은 점점 뜨겁게 일렁이는 게 보였다. 하등 무의미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가뜩이나 방어를 세우고 있던 부분에서 무시를 당한 탓에 터부를 건드려진 것처럼 날카롭게 곤두섰다.
기어이 화를 참지 못한 고정원이 나를 밀쳐 내 놓고 주방으로 갔다. 큼직한 걸음으로 집안을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분위기를 조성하더니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돌아와 우두커니 내 앞을 가로막았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반복하는 것이 보였다.
“……가둬 버리고 싶어. 아무도 못 만나게. 몇날며칠이고 섹스만 하면서. 나밖에 모르는 백치처럼 너…….”
말끝이 흐려지며 마주한 두 눈 또한 침잠되는 것처럼 흐려졌다.
“…….”
시야가 띵, 울리며 어지러웠다. 쿵쾅쿵쾅 북소리 같은 게 난다고 했는데 그게 내 심장 소리라는 걸 깨닫고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는 내가 들은 말들을 이해해 보려 애썼지만 그저 자꾸 숨이 차오르기만 했다.
“인휘야.”
실수했다는 자각이 든 걸까. 고정원은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나를 부르며 어깨에 손을 대려 했다.
탁, 소리가 나게 손을 내친 나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가둬 버리고 싶어. 아무도 못 만나게. 몇날며칠이고 섹스만 하면서. 나밖에 모르는 백치처럼 너…….’
말뿐이었는데 실제로 그런 폭력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서러워져서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진 나는 눈두덩이를 아무렇게나 비비며 말했다.
“……헤어져 이럴 거면.”
“…….”
“내가 너한테 그런 안 좋은 맘 들게 만든다는 거잖아. 이럴 거면 헤어지는 게 나을 거 같다 우리…….”
정말로 헤어지고 싶어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는 고정원이 무섭고 안타깝고……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악순환이었다. 감정에 치우쳐 대화는 자꾸만 싸움으로 변질되고 그 속에서 서로의 몰랐던 모습을 확인하게 되고 결국 혼란과 실망 속에서 상처만 주다가 멀어지게 되는 그런.
조금도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만들어 둔 채 시간은 착실하게 흘렀다. 나는 가만히 한자리에 서서, 휘몰아치는 감정들에 분별없이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실언이야. 진심 아니었어.”
나직한 목소리에는 짙은 후회가 깔려 있어 방안을 더욱 무겁게 가라앉혔다.
“……그냥, 혼자 있게 해 주라…….”
기운이 빠져 버린 나는 중얼거리며 방한구석에 웅크려 앉았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시야를 차단해 버렸다.
그래도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긋난 감정들은 자꾸 부정적인 생각을 불러왔다. 너무 좋은데,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그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과 직면하게 되니 좌절의 연속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고정원은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후엔 정적이었다. 발소리가 들려오지 않아 문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
누가 짓이기는 것처럼 가슴도 아프고 배도 아팠다. 실체 없는 통증은 꽤 오래 지속됐다.
일이 벌어지고 나서 고작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하루하루가 너무 길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소진한 것처럼 지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시간을 보내야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건지 기약조차 없으니 무력해지기만 했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린 건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려와서였다. 작고 희미했지만 그쪽으로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지금 가는구나.
“…….”
아까까지 시근덕거리던 숨은 이제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꽤 긴 시간이었던 것 같다. 서서히 숨이 가라앉는 동안, 온갖 상념들이 오갔다. 내 행동에 대한 후회가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까는 내가 왜 그런 식으로밖에 반응할 수 없었나, 아무리 진심이 아니었어도 헤어지잔 말을 듣는 입장에선 진심처럼 느껴졌을 텐데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런 생각들이 맘 한구석을 내내 맴돌고 있었다.
급격히 몰려오는 쓸쓸함을 느끼며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내가 혼자 있고 싶다고 내쫓아 놓고 막상 혼자가 되니 쓸쓸함을 느끼는 게 어이없었다.
털썩, 기울어진 몸이 바닥에 그대로 부딪힌 순간이었다.
쏴아아아……. 난데없이 들려오는 빗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무슨 소나기인가 싶어서 창문으로 다가가 닫혀 있던 문을 옆으로 열어젖혔다.
“…….”
굵직한 빗줄기가 인정사정없이 퍼부어지는 길목을 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나는 허겁지겁 현관으로 나섰다.
우산 두 개를 챙겨 밖으로 나선 나는 하나를 펼쳐 받쳐 들고 골목의 한 방향으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찰박찰박, 시멘트 바닥에 얕게 고인 물기가 사방으로 튀며 슬리퍼를 신은 발바닥을 차갑게 적셨다.
“고정원!”
부르자 길목을 빠져나가던 뒷모습이 대번에 굳어졌다.
빗줄기는 그새 미세하게 가늘어져 있었지만 흠뻑 적시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이미 반쯤 젖어 버린 옷은 건장한 등에 엉겨 붙어 몸의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추울 거란 생각에 서둘러 우산을 펼쳐 다가가 씌워 주었다.
젖었으니 들어와서 씻고 갈아입으라고 말하려던 차였다.
고정원의 얼굴이 이쪽을 향하자, 나는 휘발되는 머릿속을 느꼈다.
“…….”
긴 속눈썹에 고여 있던 물방울과 함께 뺨을 타고 흐르는 투명한 물줄기가 꼭 눈물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울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철렁했다.
우산을 한껏 젖히고 있어서 빗줄기가 얼굴 위로 떨어졌다. 차가운 물기가 내 얼굴도 적셨다. 그 상태로 멍하니 서 있던 나는 골목을 지나가는 차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빵, 클랙슨이 울리면서 허리께로 받쳐진 손이 나를 힘껏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끌려가 바짝 몸을 붙인 나는 양손에 어정쩡하게 우산을 든 채 여전히 고정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희미한 물 냄새가 났다.
“……어져.”
우산과 지면을 때리는 빗소리로 인해 작은 소리는 혼탁하게 분산되었다.
“뭐……?”
되묻자 고정원은 내 허리에서 손을 뗐다.
나는 못 헤어져.
뒤늦게 빗소리 사이로 흩어졌던 말이 완전하게 조합됐다. 잠시간 내 얼굴을 바라보던 고정원은 내가 건네 준 우산을 받쳐 들었다. 젖은 손바닥이 손등을 스쳤다.
“집에 가서 옷…… 갈아입어…….”
말했지만 고정원은 듣지 못한 사람처럼 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홀연 등을 돌려 가던 길목으로 걸어 나갔다.
“…….”
쫓아가 붙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다만 고정원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침대 위로 쓰러지고 나서도, 빗물에 젖어 있던 고정원의 얼굴은 눈에 새겨지기라도 한 듯 내내 어른거리고 있었다.
* * *
간밤에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뜬눈으로 지새우고 일어나 학교에 올 때까지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후폭풍인지 수업이 시작되고부터 짙은 피로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같은 공간에 있는 한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힐끔, 앞쪽에 앉아 있는 고정원의 뒷모습을 한 번 쳐다본 나는 다시 시선을 떨궜다. 비에 다 젖었던 게 내내 신경 쓰였었는데…… 멀쩡해 보여서 그나마 안심이었다.
“…….”
강의에 집중하려고 정신을 다잡기 수차례, 머릿속은 또다시 어제의 기억들로 잠겨 들어갔다.
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고정원. 내 어깨를 붙들고 소리치던 고정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감정을 억누르던 고정원.
……빗속에서 꼭,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고정원.
간밤에도 그렇고 왜 이렇게 자꾸 되풀이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겹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쉼 없이 떠올랐다.
고개를 살짝 흔들고 나서 미간을 힘주어 눌렀다. 실제 겪는 것도 아니고 회상할 뿐이지만 에너지 소모가 상당했다. 강의 시간 내내 어제의 기억을 되새기다간 몸이 못 버틸 것 같았다.
“하…… 고정원…….”
한숨을 쉬며 나도 모르게 이름을 뱉어 놓고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앞에 앉은 사람이 뒤돌아보는 기색에 고개를 푹 수그렸다.
크게 들렸을까. 아무리 혼잣말이라고 해도 주위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들릴 크기였다. 강의실 안에는 높낮이가 두드러지지 않은 교수님의 평이한 목소리가 유독 조용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돌아보던 시선이 거둬지고 나서도 나는 금방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거리며 괴롭혔다. 방금 건 완전히 고정원 생각에 빠져 있다고 광고한 꼴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한 실수에 뺨이 화끈거렸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둘러서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미적거리다 혹시나 마주칠까 싶어서였다.
엘리베이터의 하강 버튼을 눌러놓고 서 있다가, 강의실을 빠져나온 사람들이 다가오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아니다 싶어서 계단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순간 엘리베이터가 띵, 하는 알림음과 함께 층에 도착하면서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그 무리에 휩쓸려 얼결에 안으로 들어선 나는 자리를 잡자마자 티 나지 않게 주위를 힐끗거렸다.
안이 반 이상 차고, 문이 거의 닫히려던 때였다.
다급하게 누군가 뛰어오는 기척에 가장자리에 서 있던 내가 반사적으로 열림 버튼을 눌렀다.
“감사합니다.”
어…….
낯익은 얼굴을 확인하고 흔들린 시선이 어색하게 반공중으로 떨어졌다. 평균을 웃도는 체격의 남자가 들어온 탓에 자리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은 여유롭게 서 있던 간격을 좁히고, 나도 가장자리로 더욱 붙었지만 부득이하게 어깨가 맞닿았다.
고정원은 잠시 나를 쳐다보는 듯했으나 눈길을 돌렸고 이내 본인의 발치만을 내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가 하강하는 동안 나는 늘어뜨렸던 팔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아 붙들었다. 옆에 선 고정원이 팔을 내리자 손등끼리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굳이 피하려고 한 건 아닌데 순간적으로 그렇게 행동했다.
어색함에 목을 가다듬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나 혼자 과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좀 무안해졌다.
1층에 도착하고, 늦게 들어와 바로 문 앞에 서 있던 고정원이 제일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갔다. 모든 인원이 밖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렸던 나는 마지막 사람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발을 내딛었다.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출구를 빠져나오는 와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휘야.”
양 다리가 뻣뻣하게 멈추었다.
“…….”
간 줄 알았는데 기다리고 있었구나.
불리고도 땅바닥에만 눈을 고정하고 있던 나는 시야에 들어온 고정원의 신발을 쳐다보다가 자꾸만 흐트러지려는 표정을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나서야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날씨가 흐렸다. 채도가 낮아진 풍경처럼 고정원의 피부는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 보였고, 그 사이 살이 빠졌는지 턱선이 날카롭게 두드러져 보였다. 아픈 걸까. 어제 비 맞고 감기라도 걸린 건 아닌가 걱정이 스쳤다.
“잠 못 잤어?”
다가온 손이 턱 언저리에 닿자 나는 움찔, 경련하듯 떨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조심스러운 말투와 몸짓이었는데도 이상스러울 정도의 거부반응에 고정원의 손이 허공에서 경직됐다.
“……그냥, 약간.”
단순히 싸워서 냉전 상태라서 스킨십을 하기 싫은 건 아니었다. 그건 아니었는데…….
당황스러운 기분 속에서, 나는 내가 어제 실은 생각보다 많이 놀랐고 아직까지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가둬서 섹스만 하고 나를 자기만 아는 백치로 만들고 싶다는 고정원의 말은 흘려 넘기기 어려울 만한, 곱씹을수록 충격적인 사고방식이긴 했다. 오죽 화가 났으면 그랬을까 싶으면서도……. 모르겠다. 나도 어제 했던 말들의 대부분이 홧김이라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넌 어제…… 차에서 잔 거야?”
“신경 쓰지 마 그런 건.”
“…….”
대면하고 있는 게 부담스러워질 만큼의 정적이 이어지는 동안 고정원은 나를 빤하게 응시하기도 했고, 목덜미를 쓸어내리거나 다른 곳을 내다보는 둥 의미 없는 몸짓으로 시간을 끌었다.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살짝 맞닿았던 눈길을 주변으로 배회시키며 물었다. 어설픈 시선처리나 이도저도 아닌 표정과 말투가 내가 봐도 영 어색했다. 단순히 어색한 게 문제가 아니라 간신히 진정된 감정들이 언제 울컥 솟구칠지 몰라 조심스러운 것도 있었다.
“……우산 차에 있어. 갖다 줄게.”
“아 괜찮아 그냥……”
다음에 달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말을 끝맺기도 전에 고정원이 성마르게 제안해 왔다.
“그럼 내일, 집으로 가져다 줘도 될까?”
“…….”
내일은 주말이었다. 딱 봐도 우산은 핑계일 뿐이고 얼굴을 보자는 뜻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이틀 안에 생각을 정리하겠다는 약속대로라면 내일쯤 우리는 다시 만나 대화를 하는 게 맞았다. 비록 고정원이 감시를 해서 싸우게 되고, 어쩌다 헤어지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악화돼 버렸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치달은 이상 생각을 정리하거나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뭘 어떻게 해도 똑같은 대립이 반복될 거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고정원은 상처를 주고받더라도 같이 있기를 원하고, 나는 힘들고 혼란스러워서 자꾸 밀어내려 하고. 그런 소모적인 다툼을 더는 그만할 때도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고정원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내가 내일 도착하기 전에 연락할게.”
한없이 부드러운 말투에 가슴이 찌릿, 하고 울렸다. 그러고 보니 전엔 이렇게 지겹도록 다정하게 속살거리는 목소리밖엔 몰랐는데. 괜스레 콧날이 시큰해진다.
“응.”
계속 마주하고 있다간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뚝뚝하게 대꾸하고 돌아섰다.
다행히 고정원은 불러 세우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가까운 계단으로 내려가지 않고 뒤쪽으로 빙 돌아서 고정원에게서 멀어져 갔다. 다정하게 좀 말해 줬다고 눈물이 날 것 같은 건 또 뭔지. 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 내려가면서 몇 번이고 애꿎은 귀만 얼얼하도록 잡아당겼다.
집에 돌아와서부터는 아무것도 안 했다. 과제도 해야 하고 빨래나 청소 같은 살림도 밀려 있는데 죄 내팽개치고 그저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으로 영화만 봤다.
처음에는 코미디나 SF물 같은 걸 켰다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 종료시키고 무조건 자극적인 것으로 골랐다. 잔인한 장면이 끊이질 않는 스릴러 영화를 한 편 보고, 연이어서 포스터부터 불쾌함을 유발하는 고어틱한 공포물을 골라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했다.
두 편의 영화만으로 대여섯 시간이 순식간에 지났다. 나는 누워서 쭉 기지개를 켜고 귀에 꽂혔던 이어폰을 빼냈다. 하아. 하품이 터졌다. 불도 다 끈 채 눈이 뻑뻑해질 만큼 집중해서 봤는데 묘하게도 전부 다 보고 나니 제대로 기억나는 내용은 없었다. 충격적인 몇몇 장면만이 상이 맺힌 듯 남아 있을 뿐.
“아…….”
난데없이 위가 조이는 느낌에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집에 와서 대충 컵라면 하나를 급하게 먹었는데 그게 부대끼는 것 같았다. 스트레스성인지 학교에서도 내내 쿡쿡 찌르는 통증이 느껴지긴 했었다.
위장약을 찾아 한 알 삼키고 나서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생각 없이 양옆으로 뒹굴다가 속이 울렁거리는 바람에 끙, 웅크리고 앓았다.
“…….”
너무 조용하다.
음악이라도 들을까 싶어서 저장된 플레이 리스트를 재생시켰다. 노래가 깔리자 좀 낫다고 생각되던 것도 잠시. 결국 채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꺼 버렸다.
고정원이랑 같이 있을 때 자주 듣던 곡을 습관처럼 틀었던 게 실수였다는 걸 곧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작 몇 소절을 들은 것만으로 언젠가, 방에서 고정원이 내 발을 만지며 장난을 치던 아주 사소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그때 내 발이 잘생겼다느니 하며 실없는 소릴 했던 것도.
“하…….”
또 한 번의 무의식적인 한숨.
시큰둥하게 곡들을 뒤적이다가 대충 최신 팝 차트에 올라온 리스트를 한꺼번에 선택했다.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나는 휴대폰을 머리맡으로 밀어 놓고 이불을 뭉쳐 끌어안았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 눈도 감았다. 어제 못 잔 잠을 오늘은 잘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행히 의미를 대부분 알 수 없는 영어 가사와 생소한 멜로디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몇 곡이 연달아 흘러나오는 사이, 서서히 잠기운이 스며드는 걸 느꼈다.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등과 가슴팍이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악몽에 시달리다 눈을 뜨자 몇 초 동안 현실과 꿈이 구분가지 않아서 심장이 쿵쾅쿵쾅 불길하게 뛰었다.
“…….”
어린애도 아니고 영화에서 봤던 잔인한 장면들이 그대로 꿈에 나올 줄은 몰랐는데. 지나치게 기괴한 공포 영화는 보지 말 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땀이 식으면서 체온이 내려간 몸이 부르르, 떨렸다. 목도 칼칼하게 탔다. 눈만 깜빡이고 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심호흡과 함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복부를 난도질하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낀 건 물을 한 모금 들이키면서였다. 급박하게 치고 올라온 구역감에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갔다.
“우욱!”
저녁에 먹었던 라면을 몽땅 게워 내고 시큼한 위액이 나올 때까지 구역질을 계속했다. 나올 것도 없는데 얼마나 속이 뒤틀리던지, 간신히 구역감이 잦아들자 위가 말도 못하게 아팠다.
등을 똑바로 펴지도 못하고 침대로 엉거주춤 다가가 엎드렸다. 마치 속에 칼이라도 든 것처럼 아픈 게 식은땀이 줄줄 났다. 나는 앓는 신음과 함께 침대 시트에 이마를 문질렀다.
“으…….”
얼마 동안 그 상태가 지속됐다.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웅크려 있다가 조금 살 만해졌을 무렵, 나는 뜬금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른 게 아니고, 그냥 지금 이 순간 고정원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 가슴팍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그리워서였다.
왜 이렇게 못 참겠는지 몰랐다.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눈이나 감정을 담아 밀도 있게 쓰다듬는 손길 같은 걸 떠올릴수록 감정은 격해지고 이성은 흐려졌다. 아파서 웅크린 채, 우리가 주고받은 문자들을 돌이켜 보다가 기어코 충동적인 기운에 휩싸인 나는 통화를 시도했다. 어떻게든 되리라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신호가 다섯 번쯤 울렸을 쯤인가. 급작스럽게 솟구쳐 올랐던 기운은 또한 급작스럽게 사그라들었고, 불현듯 자정도 넘은 시간에,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내가 뭘 하는 건가 하는 자각이 들면서 황급히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아, 뭐 하냐 나 진짜.”
쓰러져 있던 몸을 일으키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순간 아픈 통증도 잊을 만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섯 번이나 신호가 갔으면 분명 부재중 기록이 찍혔을 텐데. 오밤중에 정말 미친 짓을 했구나 싶어서 자기혐오가 밀려들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지이이잉, 하고 휴대폰이 울리며 액정에 고정원의 저장명이 뜨자 나는 그야말로 어쩔 줄 모르겠는 상태가 돼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아프고 너무 보고 싶고 제정신 아닌 상태에서 걸어 버렸다고 할 순 없고. 어쩌다 실수로 눌렀다고 하는 게 가장 낫겠지만 갑자기 목소리를 듣는 것도 망설여졌다.
머리칼을 마구 흩뜨린 나는 신호가 끊기기 직전까지 버티다가 끝내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어, 미안 내가 잘못……”
-목소리가 왜 그래?
내 변명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걱정스럽게 끼어든 고정원의 물음에 목구멍이 일순 뜨거워졌다.
사소한 변화도 민감하게 알아채는 상대 앞에선 왜 이렇게 마음이 나약해지는지. 금방이라도 우는 소리가 튀어나갈 것 같아 잇새를 꽉 물었다.
“……목소리가 왜, 괜찮은데……?”
꽤 오랫동안 구토를 한 탓에 확실히 목 상태가 좋진 않았다. 잠기고 갈라져서 꼭 운 것 같기도 했다.
-……집이야?
“……응.”
-지금 갈게.
그 짧은 전언 이후엔 곧장 전화가 끊겼다.
“…….”
휴대폰을 붙들고 얼떨떨해진 나는 얼마간 더 그렇게 얼이 빠져 있었다. 내 몰골도 그렇고 집안이 엉망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고 나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탁, 불을 켜 보니 지저분한 게 보다 속속들이 보였다. 호들갑스럽게 방안을 한 바퀴 돌고는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들부터 집어 올렸다. 저녁에 먹고 그냥 내버려 둔 컵라면 용기도 냉큼 집어 버렸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후엔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 세수를 했다. 시트에 짓눌린 얼굴에 이불 자국이 남아 있어서 문질러 없앴다. 토한 게 신경 쓰인 까닭에 이도 한 번 더 닦고 있는데, 화장실 문 너머로 하도 쥐어뜯어 지저분하게 어질러진 침대 시트가 눈에 들어와 후다닥 나가서 정리했다.
일사불란하게 그 모든 것들을 해치우고 숨을 돌릴 무렵. 타이밍 좋게 현관문이 두드려졌다.
“어…… 잠시만!”
나직하지만 문밖에 들릴 만큼의 소리로 화답한 뒤 단숨에 나가 문을 열었다.
“…….”
찬 공기와 함께 고정원이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어쩐지 민망함에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가슴팍이나 발 같은 데에만 눈길을 주었다.
차키와 휴대폰을 식탁에 내려놓은 고정원은 말없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똑바로 마주 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태도로 힐끔거리던 내가 ‘금방 왔네……?’하고 운을 뗐다.
뭐라고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더니 무슨 이유에선지 대뜸 손부터 뻗어 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물러나며 눈을 파드득 깜빡였다. 아랫입술이 따뜻한 체온에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시야로 들어온 것은 기다란 손가락 끝에 묻어난 파란…… 무언가였다.
촘촘한 알갱이가 박혀 있는 젤.
“어디 아파?”
고정원이 물었지만 나는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입가를 벅벅 문질렀다. 치약을 묻히고 있었다니.
“안 아파.”
빨개진 얼굴을 숨기며 거짓말했다.
“속 안 좋은 거야?”
그건 또 어떻게 알았나 싶어 번뜩 고개를 들자 고정원이 싱크대 한쪽에서 약 상자를 들고 있는 게 보였다. 아. 아까 라면만 치워놓고 꺼내 먹은 약도 제자리에 넣는다는 걸 부랴부랴 수습하느라 놓치고 말았다.
“혹시 토했어?”
“……어떻게,”
“눈 밑이 빨개.”
말한 고정원이 방금 막 내려놓은 차키와 지갑을 다시 집어 드는 게 보였다.
“잠깐만 기다려.”
“어디 가?”
“약국.”
“그냥 여기……,”
여기 있는 약 먹으면 된다고 말하려 했다. 24시간 약국은 먼 데다 굳이 그렇게 애쓸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었으니까.
“빨리 갔다 올게.”
혼자 있기 싫어하는 것처럼 비친 건지 고정원은 내 어깨를 둥글게 쓰다듬고는 서두르는 걸음으로 나갔다.
그리고 되돌아 온 건 겨우 십오 분 정도가 경과한 시점이었다.
받아 온 몇 가지의 알약을 뜯어 내 손바닥에 올려 준 고정원의 호흡은 드물게 조금 벅찼다. 차에 타고 운전을 하고 약국에서 약을 받아서 되돌아오기까지, 일 분 일 초를 서두르는 모습이 그려져서 나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간지럽기도 하고 아릿하기도 한 묘한 느낌을 표현할 말을 찾기는 어려웠다.
“이제 푹 자. 옆에 있을 테니까.”
“…….”
불을 끄고 방 한구석에 자리한 간접 조명만을 밝힌 고정원은 내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 침대에 안착시켰다. 떠밀린 내가 옆으로 눕자 베개를 가까이 끌어 주고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기까지 했다.
“바닥 차가운데…… 그냥 너도 여기 누워.”
“신경 쓰지 마 나는.”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
“너 잠들면 몰래 누울 거야. 그러니까 얼른 자.”
두툼한 손이 이불에 덮인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정말 먼저 자야 하나 고민했지만, 눈을 감기도 전에 잠잠해졌던 위의 뒤틀림이 재발해 하는 수 없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왜, 아파?”
“……그냥 좀 부대껴 가지고.”
명치 부근을 문지르며 겸연쩍게 대꾸했다.
그 말에 바닥에서 버티던 고정원은 단숨에 침대 위로 올라와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등 언저리에 손을 올려 살살 쓰다듬고 척추를 따라 꾹꾹 눌러 왔다.
지압 자체는 굉장히 시원했다. 시원했는데…… 앓느라 땀을 한 바가지로 흘렸던 게 신경 쓰여서 나는 껄끄러운 몸짓으로 거부 의사를 표했다.
“땀 많이 흘려서…….”
등을 비틀고 기분 나쁘지 않게 살짝 밀어냈다. 싸우고 있는 중이라 앙금이 남아서가 아니라 정말 냄새가 날까 봐 그런 건데 혹시 오해할까 싶어서 힐끗 얼굴 표정을 살피기도 했다.
“내가 네 냄새 싫어한 적 있어?”
아주 새삼스럽다는 뉘앙스였다. 고정원은 아무렇지 않게 내 등에 재차 손을 올리고 덧붙였다.
“쓸데없는 거 신경 쓰지 마. 좋으면 좋았지 하나도 안 거슬리니까.”
좋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란 걸 알았다. 고정원이 땀이 난 내 몸을 어떤 식으로, 어떤 지경으로까지 집요하게 애무할 수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게 하반신에 언뜻 열기가 고여 들었다. 고정원의 냄새가 나고 고정원의 목소리가 들리고, 밀착된 자세에서 우리가 했던 섹스의 일부가 떠오르니 어쩔 수 없었다.
“손이 차네.”
차게 굳어진 내 손은 건조하고 체온이 높은 양 손바닥 사이에 끼워져 느릿하게 문질러졌다.
“미안, 생각이 짧았다. 아까 약 먹을 때 따뜻한 물을 줬어야 하는데.”
……정말, 별 걸 다 미안하다고 한다.
머리가 손질돼 있지 않은 걸 보니 고정원은 자고 있다가 내 전화 때문에 깬 게 분명했다. 잠시 떨어져 있자고 밀어내 놓고, 밤중에 이런 식으로 불러내게 됐으니 염치없고 미안한 건 오히려 나였다.
“……나도, 미안.”
툭, 뱉어내고 나자 이상하게 만감이 교차했다.
실은 어제 화를 못 이겨서 한 막말들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싫어할 만한 말만 골라서 한 것도 그렇고 이럴 거면 헤어지자느니 쉽게 내뱉었던 것도, 집에 못 들어가는 거 뻔히 아는데 내쫓은 것도 전부 미안했다.
“네가 왜 미안해.”
가려진 내 머리카락을 살며시 뒤로 넘겨 준 고정원은 나지막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가 미안하지’ 하고.
“…….”
이렇게 사소한 부분에서는 쉽게 주고받을 수 있으면서 정작 사과해야 할 땐 입도 뻥긋하기 힘든 게 참 아이러니였다.
그래도 아무튼 이런 식으로나마 미안하다고 들으니 마음이 다소…… 많이 누그러지기는 했다. 한쪽이 지고 들어오면 같이 져 줄 수밖에 없는데 먼저 내려놓기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누워 봐.”
일자로 누우면 속이 부대끼는 나를 위해 고정원은 본인이 등받이를 자처했다.
하라는 대로 품에 기대어 안기자, 맞댄 등에서부터 체온이 올라가는 걸 느꼈다. 같은 남잔데 품이 워낙 차이나다 보니 안으로 폭, 겹쳐지고도 남았다.
뒷목의 움푹 팬 부분과 고정원의 어깨가 조립한 것처럼 맞춰지고, 가슴팍과 복부의 단단한 굴곡은 안정감 있게 내 등에 맞물렸다. 따끈한 살들이 서로에게 맞닿아 눌리면서 익숙한 안락함이 찾아왔다.
고정원의 손은 아까부터 내 손을 주무르며 느릿하면서도 착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잡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붙들고,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껴 넣었다. 마침 귓가에서 목덜미로 떨어지는 숨결이 간지러워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손은 놓지 않았다. 되레 더 꽉 잡으면서 엄지손가락끼리 부드럽게 문질렀다.
관자놀이에 맞닿아 있는 숨이 이제는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숨이 조금씩 차오르는 걸 느꼈다. 고정원의 움직임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착실히 내 귓가, 뺨, 뒷목으로 입술을 옮기고 있었다.
뒤에서 조금씩 움직여 올 때마다 내 어깨나 엉덩이도 함께 들썩였다. 그런 식으로 수축과 이완이 간극 없이 몰아치는 사이, 끝끝내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하…….”
고개가 옆으로 꺾이면서 더운 숨결이 녹녹하게 부서졌다. 모래 알갱이 같은 자잘한 경련이 발끝에서부터 번져 오르고, 잡고 있는 손에는 긴장이 서렸다. 입술을 오므렸다 떼기 반복하며 연신 따스한 감촉을 확인했다.
확인하고 만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 나는 깍지 낀 손을 풀어 고정원의 뺨을 더듬고 머리칼에 손을 넣고 뒷목을 끌어당겼다.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더 애가 타는 것 같았다. 느릿하던 움직임에도 금세 속도가 붙었다. 조급하게 혀를 빨아 댈수록 어찌나 숨이 차는지, 턱 끝까지 맺힌 숨이 빈번히 입술 새로 터졌다. 호흡이 불안정한 건 고정원도 마찬가지였다. 귀에다 대고 불어넣는 것도 아닌데 젖은 마찰음과 뱉어 내는 숨소리들이 유독 시끄러웠다.
정도를 모르고 몰입하고 있었다.
달아오른 손이 티셔츠 속으로 들어와 가슴팍을 쓰다듬고 나서야 감겼던 눈이 퍼뜩, 뜨였다.
고정원의 어깨를 두어 번 깨우듯이 두드리고 밀어낸 나는 손등으로 축축해진 입술을 훔쳤다.
“아, 아까 나 토했는데.”
한 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새 또 다가와 입을 맞추려는 것을 피해 핑계를 댔다.
“치약 맛밖에 안 나.”
치약이란 말에 입가에 그걸 묻힌 채로 문을 열어 줬던 조금 전의 일이 생각나서 부끄러워졌다. 놀리는 건가 싶어서 얼굴을 쳐다본 순간, 놓치지 않고 고정원이 입술을 맞붙여 왔다.
“음…….”
탄성이 긴 여운을 가지고 흐트러졌다. 등허리에 손이 받쳐지면서 먼젓번보다도 결합이 깊었다. 고개를 꺾을 기세로 돌진해 오는 힘에 밀려나 팔로 침대 매트를 짚어야 했다.
나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고정원의 옷을 붙잡고 손아귀에 잔뜩 힘을 주었다. 한차례의 입맞춤으로 녹지근해진 입술끼리 부드럽게 포개 가며 혀를 섞으니 머리가 몽롱해지는 듯했다. 발열하는 것처럼 뜨겁고, 특히 은밀한 성감대가 온통 지끈거리고 있었다.
“잠깐…… 만……!”
어느새 뒤통수가 매트에 닿아 있기에 놀라서 목에 힘을 주었다. 크고 단단한 몸이 내 위를 짓누르고 있었다. 익숙한 무게감마저 달콤하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중요한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우리 아직…… 이러면 안 될 거 같은데…….”
분위기에 취해 끝까지 해 버리면 안 될 거 같았다. 해야 할 대화를 건너뛴 채 어영부영 화해해 버리면 나중에 또 문제가 될 거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해결하는 건 여러모로 좀 아닌 것 같아서…….
겨우겨우 이성을 되찾은 내가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자 고정원은 거친 호흡을 정리하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
피부를 한 겹 감싼 야릇한 열감이 가라앉는 동안, 사이에는 적막만이 덩그러니 가로놓여 있었다.
야심한 시각이었고, 우리는 데면데면해져 있었다. 할 만한 거라곤 그냥 자는 것뿐이었지만…… 사실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
고정원은 침대 한쪽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차분해진 얼굴로 이따금씩 내 쪽을 쳐다보기도 하고 가만히 땅바닥에만 눈길을 두기도 했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침대의 머리맡에서 다리를 웅크리고 앉아 삼켜도 삼켜도 계속해서 고이는 침을 소리 없이 넘기거나, 눈에 들어오는 대로 아무거나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내 시선은 고정원이 입고 있는 검정색의 긴팔 티셔츠에 잡혀 있는 주름에 머물렀다가 곧 소매 끝으로 나온 손등, 그리고 얼마 전 설거지를 하다가 다쳤던 손가락에 붙어 있는 밴드 따위에 차례로 머물렀다.
“그때 다친……,”
긴장을 했는지 우스꽝스럽게 잠긴 목소리가 나갔다. 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 나서 다시 물었다.
“다친 손가락, 좀 괜찮아? 약 잘 바르고 있는 거야?”
내 말에 고정원이 ‘아…….’ 하는 낮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손을 들었다.
“……낫고 있어.”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대답하는데 왠지 시원치가 않았다.
“붕대는 풀고 밴드만 해도 되는 거야?”
“심한 거 아니니까. 괜찮아.”
그러고 보니 아까 분위기에 휩쓸려서 키스하기 전에…… 내가 너무 손을 꽉 잡았던 것 같다. 그땐 진짜 감정이 앞서서 다친 부위가 보이지도 않았는데 흥분이 가라앉고 나니 괜히 아팠을 것 같고 혹시 그것 때문에 상처가 벌어졌으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다.
“잠깐만.”
침대에서 내려간 나는 부엌 근처의 서랍을 열어 구급 키트를 꺼냈다.
“한 번 봐봐…….”
옆구리에 키트를 끼고 옆자리에 걸터앉으며 말하자 고정원은 순순히 손을 내주었다.
“뗀다……?”
아플까봐 미리 언질을 해 주고 나서 살살, 밴드를 벗겨 냈다.
“으…….”
환부가 드러나자마자 나도 모르게 작게 소리 냈던 건 길게 찢어진 자상이 여전히 아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벌어지거나 덧나거나 하진 않은 상태였다. 안심한 나는 면봉에 연고를 듬뿍 짜내고, 상처 위로 조심스럽게 펴 발랐다.
“후…… 후…….”
꼼꼼하게 펴 바르고 나서는 입김을 불어넣어 주었다. 각도를 바꿔 가며 골고루 차가운 바람을 불어넣다 말고 멈칫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게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아픈가? 했다가 어색한 듯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고정원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이유를 깨달았다.
딱히 이제 막 다친 것도 아니고 아물어 가는 상처. 게다가 상대는 애도 아니고 같은 성인 남자인데……. 빨리 나았음 하는 마음에 습관처럼 한 행동이었지만 확실히 오버스러웠던 거 같다.
“…….”
의식되기 시작하면서 그때부터는 허둥대며 마무리를 지었다. 아니 마무리를 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실수를 연발했다. 새 밴드를 뜯다가 상처 부위에 붙이기도 전에 찢어먹고 나서 두 번째 시도에도 위치를 이상하게 붙이는 바람에 다시 떼어 내야 했다.
떼어내다 상처를 건들기까지 하면서 당황한 내가 수습하지 못하고 낑낑대자 끝내 고정원이 나서서 뒷마무리를 했다.
“……미안.”
처음부터 혼자 하게 둘 걸 그랬나. 깔끔하게 밴딩된 손가락을 보며 나는 머쓱해져서 사과했다.
내 손가락에는 어느새 연고가 번들번들 묻어 있었다. 닦아야겠다 싶어서 휴지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 느닷없이 손에 잡힌 건 휴지가 아닌 고정원의 손이었다.
“…….”
단단하고 넓은 손바닥 위로 포개어졌다. 뜬금없이 내 손을 낚아채 가 놓고 고정원은 쓸었다가, 주물렀다가…… 신중해 보일 정도로 진지하게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가만 지켜보다가 시선을 떨궜다. 연고가 묻었던 내 검지를 뿌리부터 선단까지 반복적으로 문지를 때는 간지러워서 참기 힘들었다. 손을 빼려고 했지만 고정원은 놓아주지 않았다. 미끈거리는 연고 탓에 손가락의 마디끼리 부드럽게 엉겨들고 있었다.
“아까 그거…….”
“……어?”
“입으로, 불어 주는 거.”
상처 부위에 호, 하고 입김을 불었던 걸 말하는 걸까. 살짝 눈을 들어 보니 고정원의 시선이 내 얼굴의 아래 부근에 머무른 게 보였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왜 하는지 알겠어.”
“…….”
“불어 주니까 훨씬, 덜 아프네.”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서 우물거리고 있자 길쭉한 손가락이 내 손등의 불거져 나온 뼈마디 사이의 움푹 패인 곳을 지그시 눌러 왔다.
“사실 많이 아팠는데……, 신기하게.”
다 나은 것 같아 지금은.
“…….”
눈이 마주쳤다. 내 시선은 이미 한참 전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눈길을 옆으로 돌리자 등과 목덜미로 훅 열이 오르며 순식간에 땀이 뱄다. 뭐지. 나 스스로도 이해 불가한 반응이었다. 무슨 이유로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리고 감정이 울컥하는 건지. 맹렬히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애달픈 것 같기도 하고. 눈시울까지 뜨거워져 있었다.
“불어 준다고…… 다 낫고 그런…… 게, 어딨…….”
냐……. 하는 끝말은 다가와 겹쳐진 입술 속으로 먹혔다. 으, 아, 하는 바보 같은 신음도 연이어 먹혀 들어갔다.
후텁지근한 열기가 입안을 에워쌌다. 나는 부담스럽게 밀착해 온 가슴팍에 손을 얹고 밀어냈다. 그러나 바윗돌처럼 단단한 가슴팍은 밀리지 않았고 오히려 밀어내던 손만 붙잡히고 말았다.
“응…….”
등도 얼굴도 눈시울도 다 뜨겁다고 생각했는데 겹쳐진 입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깐 분명 이렇게까지 뜨겁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새 입속의 열이 오르기라도 했는지 둥글리며 섞여드는 혀끝까지 정말 델 듯이 뜨거웠다.
“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벅찬 숨을 내뱉었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차게 느껴졌다. 그렇게 급박한 숨을 내쉬는 사이 열을 머금은 입술이 턱에 닿고, 아래로 떨어져 목덜미에 문질러졌다가 다시 올라와 입술에 겹쳐졌다.
익숙한 양감으로 맞물리는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빨아 대면서 나는 입안이 뜨거웠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고정원의 입술이 문질러졌던 턱과 목덜미로 마치 지진 것 같이 홧홧한 열감이 번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내가 뿜어내는 열이었다.
고개를 비틀어 몇 번이나 방향을 바꿔가며 격정적인 입맞춤에 응했다. 몸이 흔들리고 침대 스프링이 끼긱대며 시끄럽게 울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입술끼리 부딪히고 가슴팍끼리 부딪히고, 찌릿한 전기가 엉망으로 전신을 내달렸다. 정신이 든 건 그로부터 한참 후, 중심이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단단해지고 난 뒤였다.
“…….”
하아……, 하……, 가슴팍을 들썩이며 입술을 떨어뜨렸다. 숨은 차는데 머리는 띵하고, 눈꺼풀에 힘이 풀려서 잘 떠지지도 않았다. 눈가와 입술 모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멍멍하게 막혀 있던 코가 뚫리면서 희미한 연고 냄새가 풍겨 왔다.
춥.
고정원이 내 젖은 입술에 한 번 더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숨결이 스치고, 불필요하게 응집해 있던 온몸의 힘이 서서히 풀렸다. 붙들려 있던 왼손과 오른손이 각각 해방되면서 나는 엉덩이를 좀 더 안쪽으로 물리고 무릎을 세워 웅크려 앉았다. 피가 몰린 고간으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
그때 아주 낮은 한숨이 고정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억누르고 또 억누르고 있다는 게 그대로 전해지는 탄식이었다. 아슬아슬한 분위기에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또 얼마나 기다려야 가라앉으려나. 이번에는 조금 전의 키스보다 서로의 흥분이 더 노골적이었다. 어떻게 가라앉혀야 할지 막막할 정도로. 이렇게 달아오른 전초의 분위기에서는 망설일 것 없이 서로 원하는 만큼 뒤엉키고 지쳐서 기절할 때까지 해 대는 게 익숙했기 때문에 참기가 더 괴로웠다.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무릎에 고개를 파묻는데, 고정원은 기어이 내 뒷목에 손을 덮어 왔다. 그리고 상체를 기울였다.
“한 번만 더…….”
충혈된 눈이었다. 흥분해서, 끓고 있는 속을 숨기지도 못하는 눈은 꼭 애걸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장이 지끈거리고 허리에 힘이 풀렸다. 이번에 한 번 더 키스하면 정말 못 버틸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냥 끌리는 대로 몸부터 먼저 화해해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잠깐…….”
목에 걸린 공기를 삼켜 내고 마주한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진즉에 이랬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갔다 올래……?”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걸 해야 했다.
깊은 새벽의 거리는 한산했다. 일교차가 커지면서 밤공기는 눈에 띄게 차가워져 있었고, 집집마다 불이 꺼져 있어 일대가 몹시 어두웠다. 드문드문한 가로등. 외진 길목. 스산한 느낌도 없잖아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운치 있기도 했다.
“좋다. 조용해서.”
“그러네.”
무엇보다 좋은 건 손을 잡고 있어도 남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뭐, ‘아무도 없으니까 잡아야겠다’ 이렇게 마음먹었던 건 아니지만 골목의 어귀를 지나면서 우리는 어느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맞잡고 있었다. 여느 커플들처럼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나는 이어진 손의 매듭을 내려다보다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되돌렸다.
“춥진 않아?”
“응. 괜찮아.”
“속은?”
“안 아파.”
안달하거나 촉박할 게 하나도 없었다. 천천하다 못해 느릿한 걸음으로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실없는 말들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렇게 목적지 없이 걷던 우리가 발을 들인 곳은 근처의 공원이었다. 탁 트여 넓은 데다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어 우리가 자주 데이트하러 오곤 했던. 여기 곳곳에서 소소하게 쌓인 추억들이 있었다. 벤치에 앉고 나서는 잠시 생각에 잠겼는데…… 고정원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앉아 있는 내 몸을 돌려 가만히 끌어안았다.
“안 좋은 생각해?”
“……아니.”
여기는 우리가 얼마 전 싸웠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한밤중이었고. 다만 지금하고 다르게 여유가 하나도 없어서 머릿속이 터질 거 같았다. 자다가 내가 없어진 줄 알고 화가 난 고정원이 무력행사를 했었다. 그때 나는 바깥에서 발가벗게 되는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깨지고, 또 깨지고.
그런 충격의 연속이었던 거 같다. 일주일 내내.
“…….”
하지만 다행이었다.
낭떠러지까지 아찔하게 서로를 밀어붙이긴 했어도 거기까지 밀어붙여 보니 그래도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고정원의 어깨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켰다. 폐 깊숙한 곳까지 부족한 산소를 빨아들이듯이 크게. 그리고 다시 뱉어낼 때에는 한마디의 말과 함께였다.
“미안해.”
긁히고 쉬어 버린 목소리.
“내가…….”
“…….”
“못나서.”
겨우 세 마디 말을 내뱉은 걸로 속눈썹이 젖어들었다. 초라하게 쪼그라든 내장들은 쿡쿡 쑤셔왔다. 사실 미안하다고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입을 벌리니까 대뜸 그 말부터 튀어나왔다.
“…….”
맞붙어 있는 가슴팍이 부풀었다 꺼지며 지친 한숨이 흘러나왔다.
“……미안하다고 하지 마. 너는 그런 말 안 해도 돼.”
나는 고정원의 등에 손을 두르고 티셔츠를 꽉 움켜쥐었다. 코를 훌쩍이고 어깨에 젖은 눈가를 문질렀다.
못 헤어진다고 했던 건 고정원이지만 정작 헤어지게 되면 못 견딜 사람은 나였다. 그런 주제에 센 척하고 화내고 거부하고 했던 것들도 결국엔 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서였다. 내가 초라해지고 싶지 않아서.
‘……거 봐. 거짓말…… 맞잖아.’
‘넌 지금 보이는 게 그거밖에 없지.’
거짓말의 여부를 두고 따지는 내게 지금 그거밖에 보이는 게 없냐며 화를 내던 고정원이 당시엔 적반하장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고정원은 우리가 헤어지지 않는 걸 늘 최우선으로 생각했고, 나는 내 자존심이 먼저였다.
“진짜 어이없는 말인 거 아는데…….”
나는 이어서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이 하면 그냥 그러려니 참을 수 있는 것도…… 네가 하면 화가 나. 힘들고…… 슬퍼져.”
그러니까, 예를 들어 다른 누군가가 면전에서 욕설을 하고 무시하는 것보다 고정원이 잠시 동안 나한테 눈을 돌리는 그 작은 행동이 훨씬 섭섭한 거였다. 모순인데 정말로 그랬다. 한 사람을 상대로 자꾸만 속이 좁아지고 흉해졌다.
“……알아, 뭔지.”
고정원이 공감해 주며 등을 가만가만 토닥여 주자 눈물이 그치지를 않았다.
“아 씨…… 진짜, 추하다 나.”
언제까지고 꼴사납게 짜고 있을 수 없어서 품에서 벗어났다. 억지로라도 눈물을 밀어 넣으려 주먹으로 눈을 짓눌렀다.
“네가 왜 추해.”
고정원은 눈두덩이를 괴롭히는 내 손을 붙들어 내리고는 물기로 지저분해진 얼굴을 닦아 주었다.
“나만 탓해. 전부 내 잘못이니까…….”
언제나와 같은 말투였다. 살갗이 간지러울 정도로 자상한. 가끔씩 지나치다고 불평하듯 말하면서도, 나는 그런 넘치는 다정함을 내심으로는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고정원이 다정하게 대해 줄수록 가슴이 콱 얹힌 것처럼 갑갑해졌다. 힘들어하던 모습이 하나둘씩 떠오르면서, 어쩌면 문제가 불거지고 갈등이 이어지는 내내 나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고정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울어, 응?”
고정원은 나를 달래느라 끊임없이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우리 둘은 간격이랄 게 없을 만큼 밀착해 있어서 고정원의 상체가 금방이라도 내게로 쏟아질 듯했다.
“미안하다고 그만 해. 나도 미안하니까…….”
울음을 가까스로 그친 나는 눈가에 남은 물기를 훔쳐 내며 말했다. 또 울까 봐 걱정하는 건지, 고정원은 가까이서 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굴고 있었다. 나를 만지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깃든 불안과 염려와 애정이 피부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안달복달하나. 그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는 극진한 태도였다. 진짜 내가 뭐라고. 가족들한테도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할 만큼 변변찮은 사람인데, 고정원은 언제나 나 자신이 그런 하찮은 존재라는 걸 잊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
순간 북받치는 감정에 이끌린 나는 다시 팔을 벌려 고정원을 끌어안았다. 힘껏 끌어안고,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매달렸다.
양팔에 힘을 실으며 몸을 될 수 있는 대로 밀착시켰다. 놀란 듯 조금 굳어져 있던 고정원도 조금 후에는 내 허리에 손을 얹고 뒷목 언저리에 얼굴을 묻어 왔다. 따스한 훈기가 번졌고, 만족스러운 한숨이 각각 양쪽에서 터져 나왔다.
“정원아…….”
무슨 말을 하려고 부른 건 아니었다. 속에서부터 가득 찬 애틋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앓는 것처럼 이름부터 불러 버린 거였다.
그걸 알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불러 놓고 아무 말이 없어도 고정원은 되묻는 일 없이 그저 내 등허리를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손길은 늘 그렇듯 끈기 있었다. 등에서부터 천천히 뒷목을 감싸고, 더 위로 올라와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어 두피를 건드리는 차근한 움직임을 따라 기분 좋은 소름이 끼쳤다.
“나는…… 그래.”
고정원의 나직한 목소리가 딱 붙은 귓가에서 몸속으로 둥둥 울렸다.
“다 얘기했을 때, 네가 나한테 실망할까 봐.”
“…….”
“그게 무서웠던 거 같아.”
속이 찌르르 울렸다. 얘도 나처럼 무서웠구나 싶어서. 생각해 보면 내가 헤어지자고 할까 봐 한숨도 못 잤다고 할 정도로 초조해하던 걸 알고 있었는데 당시엔 내 감정이 앞서서 이해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실망 안 해 절대로…….”
목 언저리에 입술을 묻은 채 웅얼거리듯 뱉어 냈다. 눈을 감자 묘한 일체감이 들었다. 빈틈없이 붙어 있다 보니 고정원의 맥박이나 체온도 내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절대?”
안고 있던 자세를 풀며 고정원이 물었다.
“어. 절대.”
“…….”
똑바로 바라보며 나름 강조해서 말했는데도 고정원은 그다지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단단한 손가락으로 내 뺨과 입술을 조금씩 건드리기만 할 뿐 두 눈은 기운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야…… 나 진짜……, 진짜로 실망하거나 헤어지자고 안 그래. 못 믿겠어? 나 진짜 너 없으면 못 살고…… 너 정말 많이…….”
말끝을 흐리고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아, 자꾸 이러네. 한 번 울고 났더니 감정이 차분히 가라앉질 못하고 자꾸 울걱울걱했다.
“응. 믿어.”
진심이 전해졌는지 아니면 내가 또 울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된 건지 고정원은 한 발 늦게 수긍해 주었다. 엷은 웃음까지 매달고서.
“…….”
이번엔 내가 먼저 고정원의 손을 잡아 주었다. 불안하지 않게 굳세게 붙들어 주다가 조금 지나서는 조물조물 주물러 주었다.
“어……, 나는 네가 어떤 얘기를 해도 정말 다 받아들일 준비 돼 있으니까, 절대 부담 갖지 말고…… 언제든 너 편할 때 말해. 알았지?”
“…….”
나는 얼굴이 뜨뜻해졌는데, 고정원이 고개를 숙인 채 조금 웃었다.
“……웃어?”
한손으로 입가를 가린 고정원은 ‘좋아서.’ 하고 변명을 했다.
민망하긴 해도 편안한 분위기에서는 얘기가 좀 더 수월할 테니 잘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웃음은 끊어졌고, 고정원은 금방 다시 진지해져 있었다.
오랜 망설임이 있었다. 이야기가 시작되기까지는.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되고 나서도 고정원은 좀 더 알맞은 표현을 찾기 위해서인지 자주 말을 멈췄다. 우리는 그때마다 짧게 입을 맞추거나 손장난을 치는 둥 자질구레한 애정 표현을 하며 틈을 메꿨다.
들으면서 이따금씩 한숨이 나왔고 이따금씩 웃음이 터졌다. 민망해서 눈 둘 곳을 찾기 힘든 이야기도 있었다. 놀랍고 황당한 경우도 많아서 나는 중간중간 손끝으로 고정원의 가슴팍이나 배를 찌르며 탓하기도 했다.
새벽이 깊어 가고 있었고,
미안해.
미안.
내가 잘못했어.
고정원의 그런 속삭임들이 더 이상 아프게 느껴지지 않을 때쯤, 우리는 더욱 견고하게 서로를 붙들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 손을 잡고 공원을 한 바퀴 돌다가 걸음을 멈췄던 건 전에는 있는 줄 몰랐던 철봉이 눈에 띄어서였다.
“여기 철봉 있었나 원래?”
중학생 때는 축구하기 전에 몸 푼답시고 거의 날마다 했었다. 반갑기도 하고 오래간만에 몸이 근질거리기에 나는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뛰어가서 바로 점프했다.
탁.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땅바닥에 발이 닿았다. 우습게도 턱걸이 풀업을 고작 두 번 정도 하고 난 뒤였다.
“아…… 오랜만이라 잘 안 되네.”
좀 충격이었다. 예전엔 한 번에 열 개 가까이 했던 거 같은데. 고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놔서 그런가, 그것 좀 했다고 벌써부터 팔 힘이 죄 빠져 버린 느낌이었지만 지켜보고 있는 시선을 의식해서 한 번 더 매달렸다.
“윽!”
한 번 추가했다. 그 이상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떨어지는 것만은 피하려고 부들부들 매달려 있는데, 웃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고정원이 옆에 있는 철봉으로 휙 매달렸다.
“…….”
힘이 달려 땅으로 착지한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떻게 저러지. 고정원은 한 팔로 풀업을 하다가 두 손으로 잡고 아예 골반께까지 몸을 들어 올리는 머슬업을 하고 있었다.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능수능란하게 근육을 쓰더니 착지할 때도 가벼웠다.
“뭐야…… 너 나 몰래 여기서 철봉 연습했냐.”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것도 아니고. 괜히 나댔다 싶어서 나는 뺨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잘 되네.”
“와…… 은근 힘자랑.”
내 말에 고정원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능청스럽게 웃음이 그 위로 번졌다.
“은근이 아니라 대놓고 한 건데.”
“……헐.”
“힘자랑할 데가 인휘 너밖에 없잖아.”
웃음이 느끼했다. 어쩐지 성적인 뉘앙스로 들리는 걸 모른 척하며 딴청 부리자 고정원은 한 술 더 뜨기 시작했다.
“사실 요즘 운동을 못해서…… 어때? 근육 많이 빠지지 않았어?”
티셔츠를 가슴께까지 들어 올리고는 칼로 흠집 낸 것처럼 또렷한 복근을 보이며 그렇게 물었다.
“아, 몰라 관심 없어.”
누가 봐도 완벽한 형태의 근육을 두고 빠졌느니 어쩌느니 하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나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자 고정원은 내 팔을 붙들어 세웠다.
“왜, 좋아하잖아. 맨날 넋 놓고 쳐다보면서.”
귓등이 순식간에 후끈해졌다. 나는 입을 뻥끗대며 뭐라 되받아칠 말을 찾았다.
“……너 진짜, 뻔뻔함이 와…… 장난 아니다.”
솔직히 벗은 몸을 보게 될 때마다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서 홀린 듯이 구경한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설마 본인이 눈치채고 있었을 줄이야.
“그냥 눈앞에 있으니까 본 거지 뭘 또 넋 놓고 봤대…….”
민망해서 웅얼웅얼 핑계를 대고 손을 뿌리쳤다. 빠른 걸음으로 벗어나는데 억, 하고 몸이 쏠리면서 배에 힘이 들어갔다.
“진짜야? 섭섭한데.”
고정원은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유난히 간지러운 목소리를 냈다. 어깨에 얹어진 턱이나 배 위로 둘러진 손도 간질간질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간지러, 놔.”
벗어나려고 하니까 손가락을 세워 본격적으로 옆구리랑 배를 간지럽혀 왔다. 나는 자지러지면서 버티다가 고정원의 손등을 꼬집고 나서야 도망칠 수 있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새벽 운동을 하게 됐다. 몇 바퀴를 뺑뺑 돌다가 잡혀서 또 한참을 투닥투닥했다. 서로 옷을 늘어지도록 붙들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누웠다 별 짓을 다했다. 근본 없는 레슬링을 하느라 옷이 잔뜩 더럽혀졌다.
“죽겠다, 그만 하자!”
하도 웃어서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숨도 너무 차서 벤치까진 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앉아 겨우겨우 진정시켰다. 내가 맥을 못 추고 있으니까 고정원이 나를 들어 안고는 넓은 정자까지 데려갔다.
헐떡이던 숨은 누워 있으면서 금세 가라앉았다. 기운이 쭉 빠져서 탈력해 있는 내게 고정원이 팔베개를 해 주었다. 전혀 힘든 기색 없이 멀쩡한 얼굴을 보니 허탈한 웃음이 났다. 지금 이 상황이 웃기기도 하고.
“근데 우리 진짜로 어제, 아니 엊그제만 해도 되게 심각했었는데…….”
“……그러게.”
돌고 돌아서 힘들게 여기까지 온 느낌이었다.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들이 눈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고래고래 소리치고 밀치고 했던 것부터 시작해서 유독 생생한 건 고정원의 뺨을 연거푸 힘껏 때렸던 일.
새삼 황당했다. 어디 가서 큰소리 한 번 제대로 못 치는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어서. 가만히 맞고만 있던 고정원을 생각하면 이제 와 속이 상하기도 했다.
“야…… 너 나한테 그만 잘해 줘.”
내 머리칼을 만지고 있던 고정원이 손을 떼며 웃었다.
“뭐?”
“네가 너무 심하게 잘해 주니까…… 내가 자꾸 너한테 자꾸 막 대하게 되잖아.”
애들 생떼 쓰듯 고정원한테는 함부로 굴게 되는 게 있었다. 키워주신 부모님한테도 그렇게는 안 했는데.
“…….”
아니……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였나.
사실 우리 집에서 부모님한테 짜증내고 화내고 뭐 그런 식으로 생떼 부리는 건 누나가 하는 거였고 나는 매번 그걸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착하고 순하단 말을 참 많이 듣던 시절. 그때는 왜 그렇게 어린애답지 않게 말을 잘 들었는지 몰랐다.
나는 여태껏 내 성격 탓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닌 거 같았다.
화내도 되는지 모르겠으니까. 누나가 아닌 내가 화내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도 부모님이 받아 주실지, 확신이 안 들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한 번도 막 대한다고 생각한 적 없어.”
“…….”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난 그게 좋으니까.”
그 말을 듣고 나니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이 온통 울렁거리는 착각이 들어서 고개를 숙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한 표현지만 몸속의 장기들이 전부 물로 변해서 꿀렁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꾹 참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다.
창피하긴 하지만, 내가 이상한 허세를 부려서 고정원의 관심을 끌게 된 게 다행이었다. 멍청해서 아무 의심 없이 고정원이 했던 거짓말들에 속아 넘어가서 다행이고, 고정원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랑 사귀게 돼서 다행이었다. 내가 고정원을 좋아하게 돼서. 고정원도 나를 좋아하게 돼서.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사랑하게 돼서.
정말 다행이었다.
“고마워.”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소심하게 말했다. 뒤통수를 한차례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고정원이 웃음기 배인 목소리로 뭐가, 하고 물었다.
어리광부리는 모양새로 끌어안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벅차오르고 참기 힘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냥 다.”
공원에서부터 몹시 지친 상태로 집에 돌아온 우리는 씻고 잠자리에 누웠다. 비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운 고정원과 나는 그러나 눕자마자 각성한 상태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뜬눈으로 시간을 흘려보냈고, 한참이나 뒤척이고 나서야 잠들 수 없다는 걸 깨닫기라도 한 듯 서로에게 입술을 붙이고 몸을 비벼 대며 열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하…… 아…… 으응…….
거친 숨결 사이로 새어나오는 콧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낯 뜨거웠다. 하지만 순식간에 훌러덩 벗고 맨몸으로 비벼지는 자극적인 마찰에 몸이고 머릿속이고 죄 녹고 있는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의식할 새도 없이 신음이 터져 나오고, 팽팽하게 피가 몰려서 뱃가죽에 달라붙은 성기에서는 체액이 지저분하게 흘렀다.
“아……!”
두터운 손이 엉덩이를 보다 힘 있게 잡아당기자 뒷덜미가 오싹해졌다. 성기끼리 부딪히고 압착되면서 나는 어쩔 틈도 없이 사정해 버렸다.
“다리 감아.”
귀를 축축하게 빨며 고정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추스르지 못한 사정감으로 덜덜 떨면서 시키는 대로 허리에 다리 한쪽을 감자, 위로 올라타며 자세를 전복한 고정원은 내 엉덩이를 움키고는 거칠게 허리를 쳐올렸다.
탁, 탁! 이제 막 사정한 성기에 몽둥이 같이 단단한 살덩이가 부딪혀와 때릴 때마다 머릿속이 징징 울리고 입가에선 침이 샜다.
“아으, 아…… 아!”
소리를 참을 생각도 못했다. 그저 있는 힘껏 고정원의 등을 붙드느라 필사적이었다. 등 뒤로는 침대가 받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만 잘못 놓치면 낭떠러지로 추락할 것 같은 아찔함에 시달렸다.
침대가 덜컹덜컹 흔들리는 게 꼭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그런 굉음이 뇌 속까지 점령해서 휘몰아치고, 짜릿하다 못해 날카로운 쾌감이 가랑이에서부터 손끝 발끝까지 뻗쳐나가며 몇 번이나 전신을 관통한 끝에.
우리는 거의 동시에 서로의 배와 가슴팍에 진득한 것을 흩뿌렸다.
“……하아…….”
팔다리가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탈력해서 눈을 감자, 고정원은 내 목덜미로 입술을 묻어 왔다. 더운 숨결이 뺨과 귓전으로 느껴졌다. 사정 직후의 여운과 더불어 피부가 민감하게 달아오른 탓인지 맞닿은 가슴팍과 복부 따위가 솟았다 꺼지며 서로를 압박하는 무게감조차도 후희처럼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쪽, 쪽.
뽀뽀가 잦았다. 살짝 땀이 배어난 두피에 입을 맞춰 오던 고정원은 눈가와 뺨을 지나쳐 입술을 머금었다. 혀가 입안으로 들어와도 나는 입술을 벌리기만 하고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진 못했다. 두 번이나 연달아 사정하고 나니 그제야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졸려?”
묻는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여 보였다.
“…….”
고정원은 잠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는가 싶더니 금세 다시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는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격하고 집요하게 맞춰 댔다. 얼얼하도록 빨아 당기는 건 물론이고 온갖 각도로 입술을 뭉개며 침범에 가깝게 혀를 움직였다. 놀란 나는 입안으로 고이는 침을 겨우겨우 삼키며 더듬거리는 손으로 어깨를 붙들어야 했다.
“응……!”
다물릴 새 없이 입이 벌어진 탓에 호흡이 어려워지면서 코가 맹맹했다. 눈가에선 눈물이 흠씬 배어났다. 더 이상 받아 삼킬 수도 없어 턱으로 끈적한 침이 흘러내리게 되자 고정원은 길고 뜨거운 날숨과 함께 입술을 떼어 냈다.
침대 근처의 무드등에 불이 켜졌다. 주위가 환해지기 무섭게 나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과 침 등으로 엉망이 돼 있을 얼굴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고정원은 내 양 뺨을 감싸고 콧등과 인중에 가볍게 입을 맞춰 가며 번갈아 애무했다. 그리고 그러한 애무는 얼굴 뿐 아니라 가슴, 옆구리, 배…… 차근차근 아래로 내려갔다.
“으…… 앗……!”
신음이 튀어 올랐던 건 발기해 있던 성기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였다. 주변의 근육이 단숨에 조이며 허리가 공중으로 붕 떴다.
가지런히 눈을 감고는, 불그죽죽하게 번들거리는 내 성기를 빨아 대고 있는 고정원을 보자 목구멍이 뜨끈해졌다. 아무리 씻었다지만 보란 듯이 코를 박아 냄새를 맡거나 음모가 난 부위까지 축축하게 적시는 데는 수치심이 일었다.
“…….”
성기가 완전히 팽팽해지고부터는 애무가 멈췄고, 나는 애가 타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끙끙거렸다.
내 위에 자리 잡은 고정원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거대하게 발기한 성기가 가까이에서 느리게, 위압적으로 고갯짓을 하는 게 보였다. 두툼한 머리를 끄덕끄덕하면서, 선단에 고인 쿠퍼액을 흘리고 있었다. 침처럼 끈적하게. 무게감이랄 것도 없는데 그게 내 아랫배 위로 떨어진 순간 성기가 튀어 오를 듯이 움찔거렸다.
“……아직도 졸려?”
갈라지는 저음이 가슴팍을 내리누르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조건반사처럼. 나는 숨이 차지도 않는데 허덕이며,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다행이네.”
내리깐 눈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겨우 침이 마른 입술 위로 또 한 번 입술이 겹쳐지며 부드러운 살끼리 엉겼다. 혀가 섞이지 않는 담백한 입맞춤이었다. 마지막엔 서로에게 달라붙은 아랫입술이 분리되기 싫은 것처럼 힘겹게 떨어졌다.
……재울 생각 없었거든.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귀가 아닌 뱃속에서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고정원은 한차례 사정 후에도 빠져나가지 않고 끈질긴 애무를 이어갔다. 쇄골에서부터 귀까지. 젖은 혀가 쓸어 올릴 때마다 배가 꽉 조여들었다. 지겹게 반복했으니 무뎌질 만도 한데 이상하게 그 반대였다. 똑같은 부위를 빨아올려질수록 예민해져서 그 위로 살짝 입김만 닿아도 애가 탔다.
멀쩡했던 곳들이 온통 성감대로 변한 거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으음…….”
나는 귓바퀴를 덧그리는 혀의 감촉을 참아 내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꺾였다.
“귀 녹을 거 같아.”
진심을 담아 농담하자 고정원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벌써 반쯤 녹았다며 황당무계한 소리를 했다.
“아, 거기 만지지 마…….”
귓불에 쪽, 쪽, 뽀뽀를 하던 고정원이 손을 내려 갈빗대 부분을 더듬자 나는 어색하게 저지했다. 며칠 연속으로 잘 못 챙겨 먹었더니 뼈가 드러날 만큼 말라서 민망했다.
“움직여도 돼?”
사정한 뒤로 가만 넣고만 있었으니 이제 슬슬 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한 번으로는 절대 안 끝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
거의 끝까지 빠져나갔던 성기가 다시 좁아진 입구를 비집고 들어왔다. 안에 사정한 뒤라 훨씬 부드럽게 드나드는데도 워낙에 커서 이물감이 묵직했다.
내 다리 한쪽을 어깨에 걸쳐 멘 고정원은 결합부를 관찰하듯 내려다보며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성기의 움직임에 따라 뱃속에 남은 체액들이 찔꺽이는 소리가 났고, 굳이 보지 않아도 얼마나 노골적인 광경일지 상상이 갔다.
나는 젖혀진 아래를 보는 대신 가슴팍에서 복부로 이어지는 조밀한 근육이나 그 패인 골 사이로 땀이 흐르는 모습, 그게 아니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고정원의 얼굴을 훔쳐봤다. 완전하게 집중하고 있는 표정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 덩달아 기분이 고조되는 것 같았다.
“후…….”
이어져 있는 부위만 한참을 지켜보며 드나들던 고정원이 낮은 신음과 함께 고개를 숙여 왔다.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단 듯이 입술이 겹쳐졌고 자연스럽게 손깍지가 끼워졌다. 삽입하는 움직임에 맞춰 젖은 소리가 나며 비릿하면서도 달큼한 냄새가 퍼져 나갔다.
춥. 춥.
우리는 얼굴 곳곳에 유치한 뽀뽀를 주고받았다. 눈꺼풀, 광대뼈, 콧등, 턱. 간질간질한 감촉에 웃음이 안 날 수가 없었다.
“…….”
고정원의 눈이 아주 가까이에서 나를 담고 있었다. 마주한 눈동자를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너 되게…… 예쁘다.”
나도 모르게 나와 버린 진심이었다. 그러자 고정원의 눈동자가 말에 반응하듯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 미세한 흔들림까지도 예뻐 보여서 나는 한 번 더 말하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또?”
얼마간 뜸을 들이던 고정원의 짧은 대꾸에 나는 황당한 웃음이 터졌다.
“뭐가 또야?”
“더 해 봐.”
“……뭘 더 해.”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다 말해 봐.”
집요하게 구는 걸 못 당하겠어서 나는 시키는 대로 계속 낯 뜨거운 말들을 쏟아냈다. 어설픈 음담패설도 하고, 나중에는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울었었다고 솔직한 고백까지 해 버렸다. 고정원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맨 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말들을 취한 사람들처럼 주고받았다.
부끄러운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고정원은 흥분해서 꼭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굴었다. 볼을 깨물고 목덜미를 깨물고 손가락을 깨물고…… 진짜로 먹고 싶은 건지 제법 아프게 이를 세웠다.
섹스도 점점 거칠어졌다. 무릎으로만 서서 몸을 지탱한 내 뒤에서 양팔을 붙들고는 거세게, 때려 부술 듯이 치달았다. 숨 막히게 격렬한 삽입을 견디느라 나는 이상한 신음을 내지르며 울었고, 고정원은 낮다 못해 목울음 같은 신음을 내며 흥분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도 흥분이 됐다. 고정원이 내 안에서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지니까 나까지 못 참겠는 그런 기분이 되면서 눈앞이 핑핑 돌았다.
우리는 난잡하다고 표한해야 할 정도로 서로에게 얽혀 있었다. 침대에서, 바닥에서. 내가 위였다가, 고정원이 위였다가. 신음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흘리면서 젖은 입술을 비벼 댔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미쳐 있는지 모르지.
한창 하던 중에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았다. 안으로 들이치는 자극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던 데다 목소리가 너무 나지막했다.
사정으로 인한 쾌감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사라지고, 그 뒤로도 고정원은 몇 번이나 더 내 안에 쏟아냈다. 곧 쓰러질 것처럼 힘들었지만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꾸벅꾸벅 졸면서 입을 맞추고, 드문드문 날아가는 정신을 느끼면서도 밀려드는 열기를 받아 냈다.
매순간 숨 가쁘게 부둥켜안는 동안 사위는 점차 밝아져 갔다. 조명 아래 붉은 빛을 띠던 우리의 피부 위로 어느새 푸르스름한 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막판에 가서는 무릎을 세울 힘조차 없어서 엎드려만 있는데 고정원은 지치지도 않고 내 안으로 자기를 밀어 넣고 또 밀어 넣었다. 젖은 살이 부딪히는 소리, 무어라 이따금씩 속삭이는 소리, 지친 숨소리 따위가 가물가물 들려왔다.
어두웠던 방 안에 아침 해가 가득해지고 나서도, 겹쳐진 손깍지는 언제까지고 마디 하나 풀리지 않았다.
* * *
“아이스 라떼, 샷 추가해 주시고 제일 큰 사이즈로요.”
주문을 하고 나서 카드를 내민 순간이었다. 종업원의 시선이 정확히 내 입술에서부터 목 근처까지 내려오는 게 보였다.
“…….”
흠, 하고 목을 가다듬은 나는 당황한 나머지 전혀 살 생각도 없었던 계산대 앞의 쿠키를 하나들어 ‘이것도요’ 하고 내밀었다.
이런저런 적립 혜택 카드에 대해 묻는 종업원의 시선이 또 부담이었던지라 아무것도 없다고 열심히 손을 내저었다. 어찌나 허둥댔는지 진동벨을 받고 자리로 돌아와 보니 지갑이 없어서 후다닥 되돌아가야 했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자마자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냥 실내여도 마스크를 쓸 걸 그랬나.
오늘 학교에서는 수업 시간 외에 마스크를 쓰고 다녔었다. 뭐냐고 묻는 사람들한테 감기라고 둘러대긴 했는데…… 사실 주말 내내 물고 빨고 하느라 입술이랑 목덜미 주변이 엉망이었다. 다른 곳들도 참담한 수준이었지만 그나마 옷으로 가릴 수 있었다면 얼굴이랑 목 부근은 겨울이 아니니 가리기도 애매하고 난감했다.
휴대폰의 카메라를 켜서 이리저리 비춰보다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어?
보여야 할 게 안 보였다. 단추를 끌러 답답하게 목을 가리던 셔츠 깃을 젖혀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밴드를 세 개쯤 붙여 놨었는데 남은 건 달랑 하나고, 턱 밑으로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다 드러나고 있었다. 희미하게 잇자국까지 보이는 거 같았다.
아, 그래서 그렇게…….
종업원이 왜 목 언저리를 그렇게 쳐다봤는지 이해가 됐다. 나는 밴드를 붙인 게 이상해서 보는 건 줄 알았지 설마 뻘건 자국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을 줄은 몰랐다. 입술도 여전히 뚱뚱한 소시지 같고. 아무튼 못 볼 꼴이었다.
제발 두드러기라고 생각해 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풀었던 셔츠의 단추를 꼭꼭 잠갔다. 곧 진동이 울리고, 음료를 픽업하러 가면서는 퉁퉁한 입술을 조금이라도 더 가리기 위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모자를 더 깊숙이 눌러썼다.
커피는 마시기도 전에 먼저 입술에 갖다 댔다. 아직까지도 열감이 느껴지는 표면에 얼음으로 차가운 일회용 컵이 닿자 말도 못하게 시원했다.
“…….”
컵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문지르는데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따지자면 겨우 세 달쯤 전이니 옛날은 아니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까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때. 고정원이랑 처음으로 키스하고 난 다음날에도 이렇게 입술이 흉하게 부었었는데.
술에 진탕 쩔어서 키스했던 게 웃겨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지금은 그때 고정원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아니까 더 웃겼다. 나도 어이없고 고정원도 어이없고, 진짜 둘이서 뭔 짓을 한 건가 싶다.
“혼자 뭐가 그렇게 재밌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휙 고갤 들었다. 상쾌한 스킨 향이 코끝을 스치고, 웃고 있는 고정원의 얼굴이 보였다.
“……그냥.”
“뭐가 그냥.”
‘냥’ 하는 발음에 힘을 주며 나를 과장되게 따라한 고정원은 맞은편에 앉아 허락도 없이 내 라떼를 한 입 빨았다. 눈빛도 그렇고 올라간 입꼬리도 그렇고 유독 기분이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침부터 이런 상태긴 했다.
“주문하고 올게.”
“아…… 응.”
금방 다시 혼자 남겨진 나는 뻘쭘하게 냅킨을 만지작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굳이 내 손을 한 번 주무르고 간 고정원 때문에 괜히 주변을 빙 둘러보며 눈치를 보기도 했다.
“…….”
기분 탓인가.
주변을 힐끔대다 보니 뭔가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쏠려 있는 걸 느꼈다. 처음엔 설마 했는데…… 설마가 아닌 것 같았다. 테이블에 앉은 여자들이 곁눈질이건 혹은 대놓고건 모두 한 사람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꺾어 줄에 서 있는 고정원을 쳐다봤다. 오늘은 볼캡에 운동복에 가까운 차림이라 눈에 덜 띈다고 생각했더니. 오히려 여러 가지 의미로 더 튀는 것 같기도 했다.
“봤어? 진짜 미친 척 번호 따고 싶다.”
때마침 옆자리에 누군가 앉으면서 들려온 대화 소리에 심장이 두근, 뛰었다.
“야…… 없겠냐. 완전 여신 소리 듣는 여친 있겠지.”
누구의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바로 알 수 있었다.
“…….”
‘여신’, ‘여친’이라는 말들이 귓가에 맴돌면서 겸연쩍은 기분이 든 나는 공연히 뒷목을 만지작대다가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인적사항에 대한 궁금증에서부터 여자가 안 끊길 상 어쩌구 하는 감상들이 이어지는 것도 듣고 있기가 좀 그래서 음악으로 소리를 차단했다.
조금 뒤 고정원이 돌아와 앉았다. 들고 온 트레이에는 커피뿐 아니라 케이크도 한 조각 놓여 있었다.
내 귀에서부터 이어폰을 손수 빼 준 고정원은 끝으로 손에 포크까지 들려 주었다. 나는 옆자리에서부터 은근하게 쏠리는 시선을 느끼며 케이크에 손을 뻗었다.
“……근데 어째 네가 더 잘 어울리는 거 같다.”
케이크를 한 입 먹고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고정원은 응? 하고 되물으며 나를 쳐다봤다.
“내 모자.”
“아…….”
눈을 내리깔며 웃는 얼굴이 또 멋있어서 나는 일부러 비꼬는 것처럼 유치하게 굴었다.
“진짜 잘났다…… 부럽다…….”
테이블 아래로 발끼리 툭, 부딪혔다. 실수가 아닌 듯, 긴 다리가 무릎 사이로 엉겨들어 왔다.
“부러워?”
“어, 매우.”
“뭐가 부러워 네 건데.”
“…….”
‘네 거’라니…….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모자 얘기가 아니라는 건 알 것 같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커피를 들이켰다. 확 더워지는 걸 보니 얼굴에도 열이 올랐을 거 같았다. 고정원이 나를 쳐다보며 능청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렇지. 내 모자…… 내 거지.”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한 말이었다. 왠지 수다를 떨던 옆 테이블이 급격히 조용해진 것 같아서 눈치를 보는데,
“…….”
앞에서는 아예 어깨까지 들썩여 가며 웃기 시작했다.
“왜 웃어?”
“아니…….”
간신히 고개를 든 고정원은 입가를 매만지더니 작게 목청을 다듬었다. 그리고는 포크를 들어 케이크를 건드리는 둥, 딴청을 부리면서도 똑똑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귀여워서.”
입가엔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
더 이상 어떻게 받아칠 수도 없었다. 나는 감당 되지 않는 표정을 최대한 아래로 감추며 ‘나 잠깐 화장실.’ 하고 자리를 피했다.
찬물로 얼굴을 식히고 돌아왔을 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옆 테이블의 사람들은 떠나고 없었다. 우리가 옆에서 하는 소릴 듣고 일찌감치 피해 버린 걸까 봐 괜한 걱정이 스치긴 했지만 모르는 사람들이니 그러려니 했다.
죽겠네 정말.
속으로 한숨지으며 자리에 앉자 이번엔 시비가 날아들었다.
“셔츠, 그렇게 끝까지 채우면 답답하지 않아?”
고정원은 맨투맨 티를 입고 있어서 가리는 게 없이 드러난 본인의 목을 톡톡 두드리며 내게 묻고 있었다.
나는 황당해서 눈만 깜빡였다. 아침에 내가 자국들 가리느라 생고생한 거 뻔히 알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국을 만든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았다.
“……장난하냐.”
무뚝뚝하게 대답한 나는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걱정돼서 그러지. 너 답답할까 봐.”
“…….”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걱정하는 척을 하니까 배로 얄미웠다.
“너 내가……, 다음에 이렇게 똑같이 만들어 준다 진짜.”
꼭 이렇게까지는 아니어도 어쨌든 가리기 애매한 곳에 커다란 자국을 내서 창피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다음에 언제?”
영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 되돌아와 기가 찼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고정원은 입가에 줄곧 매달고 있던 웃음을 지운 채 직선적인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별안간 등줄기가 긴장하면서 입안이 바짝 말랐다.
창피하지만, 주말의 후유증에서 아직 못 벗어난 거 같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벌거벗고 뒹굴기만 했으니. 실은 이렇게 사람들 많은 곳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주보고 있는 것도 뭐라고 해야 할지…… 좀 진정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수업 들을 땐 몰랐는데 카페에서부터 그랬다.
눈만 마주쳐도 주말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유독 질척이던 순간들, 주고받았던 애무나 속삭이던 야한 대화 같은 것들이.
“야……, 빨리 해. 과제.”
나는 손을 뻗어 고정원의 눈을 가려 버렸다.
거기서부터 손장난으로 투닥거림이 오가게 되면서 기어이 테이블 위에 커피를 쏟는 사고까지 쳤다. 나는 고정원의 비싼 노트북에 물기가 튀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이제 진짜 그만하자고 정색해서 말했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니 조용해졌지만 그것도 오래 못 갔다.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린 고정원은 집중이 안 된다며 발끝으로 나를 건드려 왔다. 옆으로 자리까지 옮겨서 내 머리카락이나 뒷목 같은 델 성가시게 만지작거렸다. 골치가 아팠다. 집에 가면 어떻게 될지 뻔해서 일부러 카페로 왔더니만…….
이러다 학고 먹는다고 현실적인 충고를 해도 안 듣고, 이럴 거면 같이 안 다닌다고 은근히 협박을 해도 안 듣고.
“하 진짜……, 뭐 어떻게 해 주면 얌전히 과제 할 거냐 너.”
“아. 말하면 들어주는 거야?”
“……뭘 원하는데.”
회유를 하니까 그나마 말이 좀 통했다.
고정원은 원하는 걸 바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게 들어준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확실하게 받아 내고는 만족해서 반대편으로 되돌아갔다. 중간에 이건 좀 장난하는 게 아닌 것 같아서 걱정됐는데 이미 뱉은 말이라서 물릴 수도 없었다.
“…….”
피차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뿐인데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니. 어처구니없는 한편으로 이런 소소한 장난이 즐겁지 않은 건 아니라서 바람 빠지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그 이후로는 과제 진도가 쭉쭉 나갔다.
중간에 단체 손님이 들어왔기에 자리를 비켜 주느라 밖에 있는 테라스석으로 옮긴 것 빼고는 흐름이 끊기는 일은 없었다.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쓸 만한 딴 짓을 안 하니 바깥이 오히려 집중하기에 좋았다.
“으아…….”
타이핑을 하다 말고 뻑적지근해서 기지개를 켰다.
몇 시나 됐나 싶어서 화면 상단의 시계를 확인했을 때는 놀랐다. 두 시간쯤 지났을 줄 알았는데 어느새 네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
눈앞의 고정원은 무언가 골몰해서 타자를 입력하고 있었다. 모자를 쓴 아래로 살짝 내리깐 눈과 잘 뻗은 코, 그리고 연한 색의 입술이 보였다. 잠시 홀린 것처럼 그 얼굴을 구경했던 건 뭔가 색다른 느낌이 들어서였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한 사위와, 노트북 화면의 푸른빛으로 물든 고정원의 얼굴. 지나치는 사람들의 소음과, 카페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
나무 테이블 위로 너저분하게 늘어진 물기 어린 컵과 접시들.
참 신기한 게,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는 익숙한 장소와 익숙한 사람이라도 새롭게 보일 때가 있었다. 어쩔 땐 너무 당연한 일상이었다가도, 어느 순간 어? 하는 의문이 들면서 신기하고 대단해 보이는 게.
그럴 때면 참을 수 없이 가슴이 설렜다.
“…….”
시선을 눈치챈 건지 고개를 든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습관처럼 지긋하게 쳐다보더니 입모양으로 ‘왜?’ 하고 물어 온다.
나는 무작정 웃음이 났다.
그냥…… 저런 애는 연애 때문에 고민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예전에 고정원에 대해서 혼자 생각했던 게 불현듯 떠오르면서였다.
하나가 떠오르고 나자 환기되듯 많은 것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고정원에 관한 아주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기억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장면들이었다. 빗속에서 울던 모습, 그리고 마지막에는 엊그제 밤 공원에서 내게 더듬더듬,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가며 고백하던 고정원이 떠올랐던 것 같다. 내가 실망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모습이.
전부 나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다.
“왜 웃어?”
나직한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에 묻혔다. 맞은편의 호프집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왁자하게 터졌고, ‘어……’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던 나는 목구멍에서 무언가 터지는 걸 느꼈다.
“사랑해서.”
스치는 바람이 부드러운 밤. 뜬금없는 고백에 놀란 듯 굳어졌던 눈이 더없이 환하게 접히고 있었다.
<비밀한 연애,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