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분실
밥도 먹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탄 지하철은 낯설고 불편했다. 원래부터 뚜벅이었던 주제에 자가용 생활 몇 달 해 봤다고 전부터 이용한 대중교통을 낯설다고 느끼다니. 나도 참 간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서 어떡하지.’
식당에 사람이 많아서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고정원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받는 내내 고정원의 표정이 심각하다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니 얼른 병원으로 오라는 긴급한 연락이라는 걸 알았을 땐 나까지 덩달아 심각해졌다.
헤어지기 직전까지도 고정원은 미안해했다. 괜찮다고, 얼른 가 보라고 말을 해도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더니 주차장에서 나를 꼭 껴안으며 연락하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떠났다. 우리야 매일 보는 사이고 할아버지가 위독하신 상황에서 밥 한 끼 약속 취소하는 것쯤 미안하고 안타까워할 일도 아닌데……. 고정원은 항상 보면 내게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다정한 감이 있었다.
운전 조심해서 잘 가고 있는 건가, 문득 걱정이 들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병문안이니 혹시 모를 조문이니, 어떡해야 되나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표면상으론 같은 과 동기일 뿐인데 그런 걸 챙겨도 되는지 모르겠기도 하고…… 선을 넘지 않는 예의와 사적인 마음 사이에서 갈등이었다.
그렇게 고프던 배도 지금은 잠잠했다. 고정원은 내게 먹고 가라고 몇 번이나 강력하게 권했지만 고정원도 굶게 됐는데 혼자 먹고 싶지가 않아서 거절했다. 대충 샌드위치라도 사서 집에서 때울 생각이었다.
환승해서 몇 정거장을 남겨 둔 때였다. 피로함을 느끼며 문가에 서 있는데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고정원인가 하고 후다닥 액정을 봤다.
[(사진)]
[(사진)]
[쪼이늬 어디냐?]
[뒤풀이 튀어 와라 ㅋ]
하지만 그건 최재운이었다.
기대했던 사람이 아니라 어깨에 힘이 빠졌다.
[미안 나 일 있어서……. 패스]
대강대강 답장을 보내 놓고, 별 생각 없이 전송된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술이 거나하게 오른 듯한 과 애들 몇 명이 얼굴을 들이댄 채 찍은, 그야말로 보는 것만으로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은 뒤풀이 사진이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그대로 꺼 버리려는 순간, 불시에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아.”
발신인은 당연히 최재운이었다. 받고 싶지 않아도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어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어, 왜?”
-야 빨리 와. 애들 다 너 왜 안 왔냐고 난리라고.
“아, 나 오늘은 못 가……. 너희 재밌게 놀아.”
-김강우가 너 보고 싶대.
내가 언제 병신 새끼야, 하는 김강우의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 왔다.
-안 오면 간만에 애들 데리고 2차 니네집 들이닥친다. 진짜 간다고 말했다 난?
학기 초에도 애들이 한꺼번에 몰려서 우리 집으로 쳐들어왔던 건 다 최재운이랑 김강우가 선동한 결과였다. 와서 난장판을 벌여 놓고 그 좁은 데서 겹쳐 자느라 어찌나 끔찍했던지.
“나 집에 없어.”
-괜찮아 올 때까지 기다리지 뭐.
냉정하게 밀어내도 안 통했다. 게다가 최재운은 끈질긴 데가 있어서 지금 하는 말도 다 허투루 하는 소리가 아닌 거 같았다. 아마 내가 김강우랑 저번부터 사이가 어색하니까 지 딴엔 중재한다고 이러는 거 같은데…….
나는 뻐근해져 오는 뒷목을 주무르며 마지못해 입을 뗐다.
“……어딘데.”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조인휘 왔다!’ 하는 고성이 터져 나왔다. 대번에 술집 안의 모든 시선이 내게로 집중됐다. 민망해진 나는 눈 마주친 선배들에게 대충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후딱 자리로 갔다.
“이렇게 올 거면서 꼭 튕겨요.”
빈 잔을 가져가 소맥을 말아 주며 최재운이 한소리를 했다.
“…….”
주변의 다른 애들과도 인사를 주고받고 나서 맞은편에서 뚱한 얼굴로 안주를 뒤적거리고 있는 김강우에게 슬쩍 눈길을 줬지만 고의적인 무시만 돌아왔다.
“김강우 아깐 조인휘 안 오냐고 묻더니 왜 갑자기 입 꾹 다물고 내외하냐.”
“지랄. 닥쳐.”
김강우는 씨근덕대며 술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오늘은 왜 절친이랑 안 붙어 다니고?’ 하며 비꼬았다.
“김강우 질투 애잔해서 어쩌냐. 조인휘가 그렇게 좋아? 그러니까 네가 여친을 못 사귀지 인마.”
요새 여자친구랑 잘 돼 가는지 얼굴에 좋아 죽겠다고 써 붙인 최재운이 김강우의 어깨를 툭툭 치며 놀렸다. 팍, 그 손길을 불쾌하다는 듯이 떨쳐낸 김강우가 말을 짓씹으며 내뱉었다.
“진짜 닥치라고 했다.”
여기서 더 들쑤시면 친구고 뭐고 주먹부터 나갈 놈이었다. 최재운도 그걸 알고 있어서인지 그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김강우가 혼자 열을 내든 말든, 나는 남은 닭갈비를 입안에 욱여넣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바빴다.
“인휘야, 왔네!”
등 언저리에 닿는 손길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오물거리는 입가를 닦으며, 황급히 일어나 인사했다. 살가운 눈웃음과 함께 다가온 건 아까 학교에서도 만났던 강유나 선배였다.
“정원이는?”
커다란 눈동자가 내 주변을 빙 둘렀다.
“일이 생겨서…….”
“아, 그렇구나.”
“……예.”
고정원이 안 온다는 걸 알게 된 선배는 머무르는 일 없이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가기 전에 나한테 볼 때마다 잘생겨진다느니, 맛있게 먹으라느니, 형식적인 말만 늘어놓고선.
“…….”
나는 급격하게 입맛이 떨어져서 한 입 베어 문 닭갈비를 젓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깨작거렸다.
고정원이 안 온다는 걸 알자마자 강유나 선배 표정에 확 드러난 감정은 누가 봐도 아쉬움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서운해 하지. 이해가 안 됐다. 꼭 고정원만 기다렸던 사람처럼.
“조인휘!”
누가 목을 확 낚아채서 켁, 마른기침이 터졌다.
“고정원 여친 생겼다며. 넌 누군지 알지? 우리 학교야?”
얼굴로 열이 몰리는 걸 느꼈다. 숨 막힌 것도 있지만 다짜고짜 묻는다는 게 고정원 얘기, 그것도 나랑 상관있는 얘기라서 동요하고 말았다.
“……그래? 난 몰랐는데.”
“엥 네가 모른다고? 진짜로?”
학기 초부터 붙어 다닌 걸로 완전히 고정원 소식통 취급이었다.
“고정원 여친 누구냐고 지금 애들 난리 났잖아.”
“…….”
새삼 다들 얼마나 고정원의 사사건건에 관심이 많은지 실감했다. 우리 과뿐만 아니라 캠퍼스 전체에서 유명하다 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도 했지만. 상관없는 남이었을 땐 나도 어울려서 같이 궁금해하고 생각 없이 입에 올리기도 했으면서 막상 사귀는 사이가 되고 나니 이게 별로 유쾌하지가 않았다.
“아니, 어제 내가 어쩌다 고정원 폰 배경에 웬 애기 사진이 있는 걸 본 거야.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거 너냐고 물어봤거든? 근데 애인이라 해서 뒤집어졌잖아.”
“아아. 그 사진 나도 봤는데. 모자 쓰고 빨간 옷 입은 애기 사진이지? 남자애처럼 보여서 당연히 고정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여친이었어? 대박이다 진짜.”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누구냐고 물어도 웃기만 하고 절대 안 알려 주던데.”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언제 내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한 거지? 거의 종일 붙어 있는데도 몰랐다.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교묘하다고 해야 할지, 뜬금없이 ‘고정원 여친’으로 얼굴을 팔리게 된 나만 안절부절못하게 생겼다.
“인휘 너도 여친 생긴 거 아니야?”
헉.
소리 없는 비명을 들이켰던 건, 마침 그 순간 테이블 아래로 내린 내 왼손에 끼어 있는 커플링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미쳤어. 이걸 왜 안 빼고 들어왔지? 오른손만 쓰느라 왼손은 그냥 무릎 위에 올려놔서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다.
황급히 테이블 아래서 반지를 빼고 나서 손안에 움켜쥐었다가,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바지의 사이드포켓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여친은 무슨…….”
말도 안 된다는 것처럼 말끝을 흘리며 안주를 씹었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야, 김의정, 네 친구 소개 시켜 주기로 한 거 어떻게 됐냐? 물어본다며.”
그때 잠자코 앉아 있던 김강우가 끼어들었다.
“걔 남친 생겼대.”
성의 없는 대꾸를 남긴 김의정이 자리를 뜨자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애들도 하나둘씩 테이블에서 멀어져갔다.
나와 최재운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김강우가 하도 메신저 프로필 사진을 보고 얘 누구냐, 소개시켜 달라, 남친 있어도 그냥 연락처만 달라, 피곤하게 굴어서 여자애들이 질려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하지 말라고 몇 번 말을 했는데도 오히려 말리는 사람한테 성을 내서 내버려두긴 했다만.
그래도 김강우 진상 짓이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덕분에 고정원에 대한 질문에서 벗어난 걸 안도하며 갈증 나는 목구멍에 술을 넘기는데,
“……관심 받으니까 좋냐?”
이죽거림이 시작됐다.
“……뭐?”
“여자애들이 살랑살랑 꼬리치니까 네가 대단해진 거 같지.”
하도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왔다.
“취했냐 너? 추태 그만 부려 새끼야.”
최재운이 끼어들어서 말리자 못 참겠는지 김강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래 안 간다 그거.”
그리고 저번부터 하던 악담 비슷한 말을 남기고 술집을 나가 버렸다.
“헐…… 또 혼자 발작했냐 김강우.”
“하여간 븅신이야 저거. 신경 쓰지 마.”
최재운을 비롯한 다른 애들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응, 신경 안 써.”
대꾸하고 나는 반쯤 남은 소맥을 원샷했다. 어차피 조금만 수틀리면 멋대로 가 버리는 걸 많이 봐서 익숙한 광경이었다. 냄비 근성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성격이라, 저래 놓고 몇 시간 만에 풀리기도 하고.
“…….”
하지만 그런 것들 다 떠나서 기분이 가라앉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름 가까운 동기로 지냈던 시간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적대적인 태도에 마음 한구석이 울적해질 수밖에 없었다.
“난 그만 갈게.”
2차로 옮기려는 듯 어수선한 타이밍이었다. 소란한 와중에 나는 간단한 인사를 하고 갈 준비를 했다. 몇몇만 주량을 넘겨 취해 있었고, 대부분 안색만 발그레했지 앞으로 얼마든 거뜬해 보였다. 어딜 가냐고 붙드는 애들도 있었지만 끈질기진 않아서 손을 크게 흔들어 인사하고 빠져나왔다.
어……. 취한 건가.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걸음이 휘청휘청 불안정했다. 요새 술을 멀리 했더니 취기가 빨리 도는 것 같기도 했다.
빠앙!
좁은 골목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 커다란 경적 소리에 놀라 등줄기를 떨었다. 뒤돌아보자 차의 눈이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아아. 헤드라이트가 바로 뒤에서 비쳐 길목이 훤한데도 차가 다가왔다고는 인지하지 못했다. 정말로 취한 모양이라고 판단을 내리며 길모퉁이로 몸을 붙였다.
“…….”
공간을 내어 주자 배기음과 함께 차가 멀어져 갔다.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다가 건물의 담벼락에 기대섰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약해졌네, 웅얼거리며 쭈그려 앉아 고개를 파묻었다.
고정원은 할아버지 돌아가실까 봐 심란할 텐데. 나는 뒤풀이 가서 술이나 퍼마시고. 진짜 나쁜 애인이다. 나쁜 애인. 나쁜…….
“……애, 인.”
김빠진, 싱거운 웃음이 샜다. 나쁘다고 자책하다 말고 ‘애인’이란 두 글자에 혼자 실실거리는 꼴이었다. 고정원이 내 애기 때 사진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 주며 ‘애인’이라고 소개했다는 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낯간지러워서. 근데 자꾸 웃음이 나는 걸 보니 좋긴 좋은 모양이고……. 암튼…… 이제 와서 붕 뜨는 기분이었다.
나도 고정원 치마 입은 사진 찍어 놨는데 그거 배경에 걸면 다들 여자앤 줄 알 거야. 킬킬대며 생각난 김에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또 한 번 구경했다.
“아 맞다 내 반지…… 얼른 다시 껴야지.”
그러다 중요한 사실이 생각났다. 오늘 받은 소중한 반지를 주머니에 넣어 놓고 깜빡할 뻔하다니.
나는 쭈그려 앉은 채로 바지를 뒤적거렸다.
“…….”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 놨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냐면 왼쪽 손에 있는 반지를 뺀 게 오른손이었고, 곧바로 집어넣으려면 그대로 오른쪽에 있는 주머니에 넣어야 하니까.
하지만 아무리 가장 깊숙한 곳의 절개선까지 더듬어 본들 걸리는 건 먼지 한 톨도 없었다. 서둘러 왼쪽 주머니까지 뒤졌으나 마찬가지로 나오는 건 없었다. 어, 어, 왜 없지, 불안하게 혼잣말하며 주머니 속을 아예 뒤집어 깠다. 탈탈 털며 제자리에서 뛰기까지 했다.
없다. 아무것도.
알콜이 들어간 머리는 상황파악이 더뎠다.
잃어버린 건가.
생각이 들자, 그때까지 진하게 감돌던 술기운이 말끔히 사라졌다. 손끝이 차갑게 굳어지며 몸 안에 어디 빈 공간이 생긴 것처럼 싸해진 걸 느꼈다.
“미쳤어.”
나는 부리나케 뛰어 술집으로 되돌아갔다.
헐떡이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기 전, 불현듯 생각나는 게 있었다. 술집 안에서는 한 번도 주머니를 건드린 적이 없었다는 점과, 다만 막판에 자리를 정리하면서 무심코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고, 나오면서 시간을 확인하느라 휴대폰을 꺼냈었다는 점이었다. 아마 반지가 떨어졌다면 그때가 유력했다.
생각을 마치고 입구 주변부터 샅샅이 살폈다. 휴대폰으로 손전등 기능을 켜 놓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제발 있어라 제발 있어라, 가슴을 졸였다. 사람들이 드나들며 이상한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불행하게도, 눈에 불을 켜고 찾았지만 입구 주변엔 오래돼서 납작해진 쓰레기밖에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누가 발로 차서 어디 굴러갔을 가능성도 있어서 범위를 넓혀서 수색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어서 옆 골목까지 진입했다. 쇠붙이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아 속이 타들어 가는데,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근데 조인휘 왜 이렇게 조용해졌냐?”
분명하게 들려온 이름에 일순 동작이 멈췄다.
“그러게, 다른 땐 끝까지 남아서 떨거지들이랑 염병하더니.”
……반지를 찾으러 왔을 뿐인데,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천천히, 휴대폰의 손전등을 껐다. 그리고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나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새 쪽으로 더 가까이 귀를 기울였다.
“김강우 없어서 그런 거 아냐?”
“김강우 그 새끼는 진짜…… 답이 없다. 모지리 아니냐? 조인휘가 여자를 잘 안대 병신 새끼.”
“내가 백퍼 장담하는데 조인휘 여자랑 뽀뽀도 못 해 봤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진짜 기술적으로 후리고 다니는 건 고정원이지.”
생각지 못하게 뒤따라온 세 글자의 이름에 숨 쉬는 것도 잊고 몸을 움츠렸다. 두근두근두근……. 박동이 불길할 만큼 이상 속도로 빨라지고 있었다.
“어우 고정원 진짜…… 우리 과에도 손 댄 애 있을 걸,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어 나 한 명 알아. 그 누구냐, 강유나 선배.”
목구멍에서 울컥,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거칠어지는 호흡을 막아 냈다.
“아 진짜? 미친, 왠지 그 누나가 고정원 존나게 찾더라.”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술 마시다 둘만 자리 비우더니 안 들어와. 좀 있다 들어왔는데 고정원은 멀쩡하고 그 선배만 몸 달아가지고 얼굴부터 질질 싸고 있고. 그리고 둘 다 핑계 대고 시간차로 나가는 거 존나 티 나서 웃었네.”
음습한 조소가 뒤따랐다.
“그 선배 내가 알기로 오래 사귄 남친 있거든? 고정원이랑 둘이 나간 거 살짝 떠보니까 다른 애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진짜 개 오버했음.”
차라리 뻔뻔하게 부정을 하든가, 난 또 소문내라는 줄.
듣고 있는 이들의 낄낄대는 소리가 중간중간 섞여 들었다.
“하여간 고정원 보면 존나 교묘해 애가, 뒷말 안 나오게 잘 골라.”
“여자애들 정신 못 차리고 멋있다고.”
“그니까. 이번에 걔 여친 생겼다는데 우리 학교 아니다 분명. 몰래 학교에서 지 맘에 드는 애들 따먹고 할 거 다 하면서 여친 앞에서만 매너 쩌는 척 순진남인 척 재미지게 사귈 듯?”
쏟아지는 말들에 머리가 아파 왔다.
바닥에서 뭔가 시커먼 게 떨리고 있었는데, 뒤늦게 그게 내 손의 그림자라는 걸 알았다.
“근데 요즘 왜 둘이 노냐?”
“누구?”
“고랑 조.”
“고정원이 갖고 노는 중 아냐?”
큐 싸인을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를 더 듣지 못하고 일어났다.
몇 시간 내리 그러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비명을 지르는 근육통을 무시하며 허겁지겁, 골목을 빠져나왔다.
허억,
허억,
허억,
그런 거친 숨소리가 나고 있었다.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진정시킬 생각도 못하고 걷고 또 걸었다.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걸었을 뿐인데 어느새 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아까, 취기에 잠시 머물렀던 그 담벼락.
이상했다. 떠날 때와 돌아올 때가 이렇게 다르다니. 여기서 쭈그려 앉아 혼자 애인 소리에 웃고 저장해 둔 사진을 감상했던 게 아주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 게 너무나 이상했다.
하하. 너털웃음이 났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짓궂은 장난처럼, 갈라진 시멘트 바닥 사이로 반짝이고 있는 링을 발견한 탓이었다.
“…….”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거기에 그렇게 서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그걸 줍지 못했다. 누군가 버리고 간 쓰레기처럼, 그저 무심히 지나쳐 갈 뿐이었다.
* * *
무슨 정신으로 걸었는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왔을 땐 몇날며칠 여행이라도 한 것처럼 모든 기력이 소진돼 있었다. 나는 씻지도 않고 침대에 널브러졌다.
몸을 웅크리고, 가슴과 허벅지가 맞닿을 만큼 등허리를 말았다. 눈을 감자 밭은 숨이 차올랐다. 하아, 하아. 가슴에서 응어리진 무언가가 자꾸만 불규칙한 신음으로 터져 나오는 게 꼭 병증 같았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시트에 배어 있는 익숙한 체향이 한 번 의식되기 시작하자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랜 맡는 것만으로 안정이 되는 냄새였는데.
“……아.”
머릿속에서는 방금 엿들었던 목소리들이 아직도 쉼 없이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귀를 틀어막고 질끈 눈을 감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알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집요하게 거듭 떠벌리며 나를 비웃어 댔다.
귀를 틀어막고 몸을 수그린 채 그 소리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힘껏 감았던 눈꺼풀이 지쳐 느슨해졌을 때쯤, 나는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의 아무 데나 누워 웅크렸다. 자자. 자자. 깊숙하게 자자. 오로지 잠에 관한 생각에만 사로잡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아까까지 날카롭게 깨어 있던 신경으로 수마가 서서하게 스미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언제까지고 잠만 잤으면. 간절하게 바라면서 몸에 힘을 뺐다.
하지만 잠에서 깬 건 새벽녘이었다.
한쪽 머리가 지끈 아파 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딱딱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텅 빈 방 안. 아직 그럴 날씨도 아닌데 스산함을 느꼈다. 바닥이 차가운 탓일 수도 있고 매일같이 맞대고 자던 체온이 없어서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침대로 올라가고 싶지는 않아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엣취.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잇따라 휴대폰의 진동이 지잉, 울리며 고요한 방안을 흔들었다.
“…….”
침대 위에 엎어져 있는 휴대폰 액정에서 빛이 점멸하는 게 보였다. 모른 척,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부르르 어깨가 떨리는 게 방바닥이 차갑긴 차가운 것 같았다. 온기를 더할 임시방편으로 방안에 굴러다니는 토끼 인형을 집어 품안에 끌어안았다. 끌어안기 무섭게 다시 내팽개친 이유는 인형의 출처가 떠올라서였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서 받은 건지 따위가.
그렇게 한동안 눈꺼풀을 떴다 감았다 떴다 감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었다. 애매한 시간을 버티다 결국에는 벌떡 일어나 침대 위의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새벽 1시 26분.
시간 밑으로 떠 있는 알림창엔 알림 사항들이 빼곡했다. 쌓여 있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들은 당연하게도 모두 한 사람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전화의 기록은 자정 전에 세 통, 자정을 넘겨 두 통이었다. 전화가 이렇게 올 때까지도 몰랐던 걸 보니 내가 꽤 깊게 잤구나 싶었다.
[전화 안 받네]
[인휘야 괜찮아?]
[어디 아픈 거야?]
읽지 않은 것부터 확인한 메시지는 아래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최하단,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메시지에서 나는 손끝을 멈추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
[삼일 후에나 갈 수 있을 것 같아]
[아무 때라도 상관없으니까 깨면 꼭 전화해 줘]
“…….”
명치께가 체한 것처럼 갑갑했다.
어떡하지. 정말 어떡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심란하기만 했다. 고정원이 몇 시간째 내 연락을 기다렸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통화 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통화해야 한단 생각만으로 손가락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손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축 늘어지려 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액정만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깼니?]
새로운 메시지가 아래로 떠오르자 부릅, 눈이 뜨였다.
“하…….”
먼저 도착한 메시지들은 이미 ‘읽음’처리로 바뀌었고, 방금 막 도착한 메시지로 인해 지금 이 순간 같이 메세지창을 열고 있다는 사실까지 서로 알게 된 셈이었다.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메신저의 수신확인 시스템이 원망스럽기는 처음이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피할 수는 없었다.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 할지 망설이며 한 자 한 자 입력하고 있는데,
지이이이잉, 지이잉.
손안의 휴대폰이 통화 모드로 바뀌며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떡해.”
쥐고 있는 게 무슨 폭탄이라도 된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진동이 길게 울릴 때마다 몸속까지 경련이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해.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다 확인해 놓고 전화를 씹는 건 확실히 수상해 보일 터였다.
나는 손바닥으로 가볍게 뺨을 때려 경황없는 정신을 다잡고, 목을 가다듬었다. 어 정원아. 받기 전에 소리 내어 목소리의 상태까지 점검하고 나서야 겨우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어 정원아.”
-인휘야.
“미안, 나 지금 자다 깨서…….”
어색하게 들리지 않길 바랐지만 내가 듣기에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뉘앙스였다.
-어디 아파? 일찍부터 잤네.
“감기 기운이 도는지…… 오자마자 기절해 버렸네. 진짜 미안.”
껄끄러운 정적 속에서,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셔서 어떡해…….”
빈껍데기 같은, 한낱 겉치레와 다를 바 없는 말. 가뜩이나 위로하는 일에 서툰데 다른 곳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어 더더욱 어색스럽게 느껴졌다.
-병원에 오래 계셔서……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야. 슬픈 건 당연하지만.
“……많이 힘들겠다.”
‘그 일’이 생기기 전이었다면 이쯤에서 조문이라도 가고 싶다고 얘길 꺼냈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행여나 조문에 가게 되어 고정원과 얼굴을 마주할 일이 생길까 봐 나는 지긋이 입을 다물었다.
-보고 싶어.
기꺼워야 할 말인데. 그렇지가 못했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간신히 대답했다.
“……나도.”
-장지가 꽤 먼 곳이라, 화요일이나 돼야 갈 수 있을 거야.
“응……. 피곤할 텐데, 밥 잘 챙겨 먹고 얼른 자.”
-연락……. 힘들더라도 꼬박꼬박 받아 줘.
“응…… 그럴게.”
슬슬 통화를 마치려는 순간이었다. 듣는 사람까지 고단하게 내려앉는 한숨 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지금 가서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휴대폰을 붙든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러지 마. 상중에 자리 비우고 그러면…… 안 좋잖아.”
목이 메었다. 고정원이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 같아서 불안했다. 한편으로는 마치 그러길 바라는 것처럼 기대되며 들뜨기도 했다. 불명확한 감정이 들끓었다가 가라앉고, 나 자신마저 속이려는 듯 혼란스럽게 굴었다.
-딱 한 시간만 보고 갈 테니까. 피곤하면 자고 있어도 돼.
“나 감기 기운이 심해서……. 미안.”
그 뒤로도 거절이 반복됐다. 거절하면 거절할수록 고정원은 어째서인지 예민해지는 심기를 숨기지 못했다. 이러다간 정말로 뛰어올 기세였다. 마지못해 나도 정말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그런 말들을 몇 번이고 속삭인 끝에야 가까스로 끝맺을 수 있었다. 받을 때 힘겨웠던 것처럼 끊을 때도 힘겨운 통화였다.
길어진 통화로 발열한 휴대폰을 내려놓자 한기가 느껴졌다. 고요한 어둠. 방 한편에 자리 잡힌 창문을 통해 골목의 가로등불이 희미하게 비쳐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멍하니 창문만 쳐다보고 있던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쫓기는 것도 아닌데 슬리퍼만 신고선 불붙은 속도로 현관을 뛰쳐나갔다.
“하아……, 하아…….”
호들갑스럽게 달려온 곳은 건물의 담벼락이 있는 골목이었다. 반지를 두고 온 그 길목. 나는 벗겨지기 일보 직전인 슬리퍼를 고쳐 신지도 않고 주저앉아 갈라진 틈새를 노려보고 손으로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
손끝이 헐 때까지 무식하게 주변을 더듬었던 거 같다. 안쪽을 하도 긁어서 손톱 끝이 새까매졌는데. 그러나 반지를 봤던 건 내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지저분하고 더럽기만 한 바닥일 뿐이었다. 빛나거나 귀하거나, 그런 것들은 여기에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듯한.
의미 없이 골목을 한 바퀴 돌아, 담벼락 앞으로 되돌아왔다. 이미 사라지고 없음을 인정하기까진 또 다시 얼마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다신 못 찾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져 왔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해 손등으로 거칠게 문질렀다.
뚝, 뚝,
뜨거운 것이 시멘트 바닥으로 떨어져 동그란 자국으로 번지고 있었다.
* * *
주말은 반 시체처럼 보냈다. 이틀 동안 먹은 거라고는 우유에 말은 시리얼과 컵라면 두 개 정도. 굶은 거나 다름없었다. 나머지 시간은 모조리 잠으로 채웠다. 일어날 때마다 틈틈이 고정원의 연락에 응하고…… 자느라 목소리가 잠긴 탓에 아프다는 핑계가 순순히 먹혀들었다.
잠이 잠을 불러오는지 이상하게 자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로했다. 월요일 오전, 몽롱한 머리를 힘겹게 들어 올리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씻고 학교로 나왔다.
“헐, 야…… 조인휘…….”
“어?”
전공 수업, 강의실 안에서 마주친 최재운의 표정이 나를 보자마자 일그러졌다.
“너 오늘 얼굴이…….”
“……얼굴이 왜.”
“아니, 오늘따라 몹시 새로운데……?”
“…….”
흉하게 부어 있다는 건 나도 알았다. 먹은 것도 없는데 잠만 자서 그런가. 아니면 의지와 상관없이 비어져 나오던 눈물이 원인일지도 몰랐다.
“구경하고 싶으면 돈 내.”
나는 무감하게 말하고 최대한 구석 자리에 앉았다. 아무하고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우습게도, 이제 와서 사람들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조금만 깊게 파고들어 생각하는 것만으로 구역감이 일었다.
강의가 시작된들 교수님이 하시는 말들이 귀에 들어올 리는 만무했다. 몸뚱이만 강의실에 있고 머릿속 세계를 떠돌고 있다고 봐야 했다.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같은 자리에서 빙빙 맴돌면서, 어느 것 하나 결단 내리지 못하고 지질하게 머뭇거렸다.
바보같이.
생각을 아무리 해 봐도,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정확히 밝혀진 건 아직 아무것도 없기도 하고……. 그러니까 우선 대화를 해야 했다.
알고는 있는데.
무서웠다. 만약 그게 전부 사실이라면 어떡할까. 그 선배랑 정말 잔 게 사실이라면. 여자와 사귀는 게 서툴지도 않고, 경험이 거의 없었다 말한 것도 거짓말이었다면.
처음부터 다 가짜였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했다. 그렇게 되면 종종 내가 고정원에게 느끼던 의구심들에 대한 해답이 너무도 명쾌해져서 괴로웠다. 고정원이 여자에게 인기가 없고 서툴다는 건, 사귀게 되면서 더 이해 가지 않았으니까.
자꾸만 최악의 상상이 펼쳐졌다. 주말 내 악몽에 시달렸다. 깨고 나선 축축이 짓무른 눈가를 비비며 고정원과 통화하거나 메시지를 주고받아야 했다.
‘고정원도 내가 잘 아는 척 연기한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까?’
무섭고 힘겹고 수치스럽고,
‘그 선배랑 정말…… 잤을까?’
무엇보다 질투심으로 죽을 거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벗어나려던 때였다. 난데없이 날카로운 통증이 복부를 스쳤다. 수그린 몸은 불가항력적으로 중심을 잃었고, 주저앉고 말았다. 누군가 가까이 다가와 시끄럽게 군다 했더니, 김강우였다.
“야 너 왜 이래, 어디 아파? 얼굴 존나 시퍼래.”
“……괜찮아.”
심각한 줄 알았는지 김강우는 야단법석을 떨면서 보건실에 가자고 내 팔을 지 어깨로 들쳤다. 누구야? 인휘? 인휘 어디 아파? 하는 목소리들이 군데군데서 들려왔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게 싫어서 고개를 수그렸다.
“야 됐어, 나 걸을 수 있어.”
“가만히 있어 새끼야. 너 얼굴 완전 병자 같아.”
“…….”
쌩 무시하다가도 아파 보이니까 이렇게 챙겨주는 게 김강우다웠다. 술 좋아하고 여자 밝히고 입 거칠고. 그런데 또 정은 많아서 같이 다니면서 편하고 즐겁긴 했었다.
“너 뭔 일 있냐? 아까 쉬는 시간에도 지나가다 봤는데 네 뭐에 홀린 것처럼 눈에 초점도 없고 무슨 호러 영환 줄. 사진 찍어서 보여 주려다 말았다.”
얼마나 넋이 나가 있는지는 스스로도 알고 있어서 할 말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말고…… 계단으로 내려가면 안 되냐?”
과 사람들이랑 마주치고 싶지가 않았다. 부축해 주던 김강우에게 넌지시 말하자 고개를 끄덕여 줘서 다행이었다.
“고정원은 어디 가고?”
“…….”
계단을 내려오는데 김강우가 기어이 듣고 싶지 않았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나는 부축해 주던 품에서 벗어나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싸웠냐? 싸웠지?”
김강우는 신이 난 기색이었다.
“하지 마.”
“뭐?”
“……듣기 싫으니까, 말하지 말라고.”
타이밍 좋게 손에 쥔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대충 눈짓으로 확인하니 역시나 고정원이었다. 시간표를 알고 있으니 마침 끝나는 시간에 맞춰 연락했겠지. 하지만 그런 사소한 구속 같은 것들이 갑자기 짜증스러워진 나는 충동적으로 휴대폰 전원을 꺼 버렸다.
“그러니까 형아가 그 새끼 가식이라고 했냐 안 했냐. 괜찮아, 다 인생 경험이지 뭐. 네가 여자는 잘 알아도 같은 남자 보는 눈은 없었던 거지. 알았어 알았어, 이제 더 말 안 할게.”
김강우가 손을 들어 그만하겠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제야 나는 흘기던 것을 멈추고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안 그래도 힘든데 옆에서 긁어 부스럼을 만드니 속이 상했다. 컨디션도 안 좋은데 수업도 남았고. 거기에 사람들 마주치는 것도 힘들어져서 모든 게 최악이었다. 그나마 오늘까지는 고정원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거, 그거 하나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우울한 기분을 느끼며 1층 출입구로 향하려던 찰나,
“……!”
별안간 기함을 한 나는 후다닥 돌아와 철제문의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뭐 하냐?’ 하며 대수롭지 않게 앞서가려 하는 김강우를 황급히 붙들어 나가지 못하게 했다.
“뭐야, 뭐 하는데?”
“쉿, 조용, 잠깐만 조용히 해 봐.”
초조하게 소곤거렸다.
“어.”
영문을 몰라 하던 김강우도 내가 본 광경을 발견했는지 표정이 바뀌었다.
좋지 않은 기색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김강우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숨을 죽였다.
“어, 안녕!”
과 여자애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어, 윤선아. 혹시 인휘 봤어?”
“인휘?”
나는 불안함을 못 참고 슬쩍 돌아가는 상황을 엿봤다.
“아까 수업할 때 본 거 같은데? 근데 넌 왜 지금 와?”
어떻게 봐도 입구에 선 장신의 남자는 외모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고정원이 맞았다. 긴 팔다리가 검은색 정장에 감싸여 있어 상을 치르고 있다는 것도 여실했다. 오늘 오후 늦게야 발인이 있는 걸로 아는데 도중에 온 건지 어떻게 된 건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인휘 아직도 강의실에 있어?”
“응? 그거까진 모르겠는데…… 연락해 보면 되지 않아?”
그 말에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올린 고정원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드는 게 보였다. 당황한 나는 손안의 휴대폰을 반사적으로 들어 올렸다가 바로 안도했다. 아까 꺼 둔 휴대폰은 새까만 암전이었다.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댄 고정원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을 듣고 있는 거겠지. 그때,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고정원이 몸을 트는 바람에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잽싸게 몸을 숨기고도 놀라서 다시 내다볼 엄두가 안 났다.
김강우는 내가 말리는데도 계속 고개를 빼꼼 내밀고 훔쳐보고 있었다.
“근데 너 웬 수트야? 잘 어울린다?”
“우리 학교 사람 아닌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난.”
여자애들이 질문하는 게 들려왔다. 나는 대화가 길어지면 어쩌나 고정원이 계단 쪽으로 오면 어떡하나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우려와 달리 대화는 길어지긴커녕 성립되지도 못하고 뚝, 단절됐다.
“뭐야…….”
김샌 불만이 들려와 고개를 내밀었을 때 고정원은 벌써 건물을 빠져나가고 없었던 것이다.
“근데 왜 저렇게 심각해? 조인휘가 고정원 돈 떼먹은 거 아냐?”
여자애들 서넛의 웃음소리가 통로에 울려 퍼졌다. 엿듣고 있는 입장에선 차마 같이 웃을 수도 없었다. 고정원을 본 순간 사채 빚을 진 채무자라도 된 것처럼 허겁지겁 숨어들었던 걸 쟤네들이 봤다면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소문났을지도 몰랐다.
그 쾌활한 소리가 울림도 없이 일체 멎어들고 나서야 김강우와 나는 붙들려 있던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와, 표정 봤냐 아까? 고정원 저 새끼 본성 드러내기로 작정했네.”
김강우는 흥미진진하게 들떠서는 내 팔을 쿡쿡 찔러 댔다.
“근데 너 쟤 피해?”
“…….”
오늘까진 그래도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었는데.
지금은 피했다 해도 어차피 시간표를 알고 있으니 만일 고정원이 먼저 가서 기다린다면 다음 강의에서 어떻게든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아예 발인도 끝내고 돌아온 거라면 수업 끝나고 집 앞에서 보게 될 수도 있고. 자취방 열쇠를 하나 복사해 주려다가 어차피 늘 같이 있어서 필요 없을 것 같아 주지 않았던 게 지금에 와선 천만다행이었다.
보고 싶지 않다. 정말, 오늘 만큼은 안 보고 싶다.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린 나는 김강우에게 물었다.
“……너 오늘 강의 쨀 생각 없어?”
배의 통증은 잠잠해져 있었고, 오로지 학교나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바람만이 간절했다.
영화관, 찜질방, PC방. 오늘 하루 내가 간 곳들이었다. 차례로 방문하고 나니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장소마다 틈틈이 간식을 사 먹으며 요기한 덕에 배는 고프지 않았다. 몸 상태도 비교적 나아졌고, 휴대폰을 꺼 둬서 찝찝한 것만 빼면 기분도 많이 괜찮아져 있었다.
같이 있는 동안 김강우는 쉼 없이 떠들어 댔다. 고정원과의 일을 캐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내가 싫어하자 바로 화제를 돌렸다. 요즘 꼬시려고 공들이고 있는 여자에 대한 정보, 길 가다가 마음에 드는 여자한테 번호를 물었다가 까인 일화 등 온통 여자 얘기였다.
“후…….”
그래도 오늘 하루 같이 있어 준 게 고마웠다. 혼자였으면 생각이 많아서 터져 버렸을 것 같은데.
터덜터덜 걷다가 편의점에 들렀다. 물과 과자 몇 봉지만 간단하게 계산하고 나왔다. 그런 후에는 일부러 지름길 말고 빙 둘러서 집으로 향했다. 특정 장소를 지나치고 싶지 않기도 했고, 혹시나, 정말 혹시나 고정원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그걸 몰래 확인하기에 좋은 길로 들어서야 했기 때문이었다.
집 앞에 다다라 샛길 한쪽에 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빼서 집 앞을 기웃거렸다.
“…….”
짧지 않은 시간을 들어서는 길목, 놓치기 쉬운 틈새 여기저기를 꼼꼼하게 살펴본 끝에, 낡은 빌라의 입구엔 아무도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잽싼 걸음으로 입구를 지나쳐 현관에 도착했을 무렵. 시간이 시간이니 만큼 빌라의 층계엔 정적만 감돌고 있었다. 밝게 작동된 센서등의 조명 아래에서 원인 모를 초조함을 느낀 나는 성마르게 가방을 뒤적거려 열쇠를 꺼냈다.
바로 그때였다.
홱, 몸이 돌려지면서 열쇠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듣기 싫은 쨍한 금속성이 복도에 울려 퍼진 순간…….
탁!
눈앞으로 다가온 가슴팍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
눈을 들자 눈앞엔 낮에 학교서 봤던 슈트 차림의 고정원이 서 있었다.
그것도 무척, 지친 기색으로.
“……놀래켜서 미안.”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놀란 게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이미 돌려지는 순간부터 누군지 알아차렸으니까. 심지어 들어오기도 전부터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예상했는데, 그런 것과 상관없이 막상 그리 되니 격렬하고 낯선 거부감이 치밀면서 견딜 수가 없어서 밀쳐내 버렸다.
“어디 갔다 와?”
왜 휴대폰이 꺼졌으며 이렇게 장시간 연락이 안 된 건지, 당장은 묻지 않을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회적인 질문이 되레 거북하게 다가왔다. 어디에 갔었는지 알려 주고 싶진 않아서 미안, 하고 작게 사과의 말을 웅얼거렸다.
밀려났던 고정원이 한 발자국 다가온 것만으로 간격이랄 게 남아 있지 않았다. 어, 어, 하는 사이 눈앞으로 숙여지는 고개에 놀라 또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 마, 여기 밖이야.”
옆집에 들릴까봐 속삭거렸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고정원에게서 풍기는 음산한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걸 느꼈다.
입술로 다가올 줄 알았던 고개는, 그러나 보다 깊숙하게 목덜미에 안착했다. 약한 곳을 스치는 콧날에 주변의 근육들이 움츠러들었다. 뒤통수를 단단하게 고정한 손아귀의 힘에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곧 시야를 환하게 밝히던 센서등이 꺼졌다.
“누구야.”
푸른 어둠 속에서 고정원의 물음은 얼핏 상냥하게 들렸다. 뭐……? 흐릿하게 대꾸함과 동시에 뒤통수를 감싸고 있던 손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랑 같이 있었어?”
“아…….”
말을 하려는데 목구멍 근처로 고여 있던 침이 꼴딱 넘어가면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나는 괜히 헛기침으로 사이를 메우고 대답했다.
“……냄새 심해? 김강우가 옆에서 피우긴 했는데.”
헤어지기 직전에도 그렇고 틈틈이 옆에서 담배를 피워 댔었다. 냄새가 뱄다면 아무래도 그 영향이겠지.
“…….”
고정원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숨결이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 어두운 곳에서도 마주한 안광이 빛나고 있는 게 생생했다. 묘한 압박을 느낀 나는 시선을 회피해 버렸다.
“피곤하겠다. 들어가자.”
대치 상태와 같은 침묵을 깨뜨린 건 고정원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집어 드는 움직임에 센서등이 다시 작동되면서 또 한 번 환해졌다. 어정쩡하게 선 내 옆으로 고정원은 능숙하게 열쇠를 꽂아 돌렸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도 그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내게 달래듯이 말했다.
“들어가야지.”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걸 느꼈다. 망설임 끝에 나는 어렵사리 입을 달싹였다.
“그…… 너, 집에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이게 오래 기다린 사람한테 할 말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
보이지 않게 주먹을 움켜쥐고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런 확신도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모든 게 조마조마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래도 되는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이미 발인식 참석 못했어.”
툭, 내뱉어진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갤 쳐들었다.
“……뭐?”
“그러니까 좀 봐 줘 인휘야.”
힘없이 웃는 고정원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믿기지 않는 말을 곱씹으며 재차 확인하기까지 입안이 바짝 말랐다.
“……내 연락 기다리느라?”
“아니.”
따뜻하고 단단한 손가락이 내 아랫입술을 천천히 쓸고 갔다. 어쩌다 보니. 하고 덧붙이는 고정원의 눈길도 마찬가지로 손가락이 스쳐간 곳에 머물렀다.
휴대폰 전원을 꺼 버리고 종일 연락을 두절해 버린 데에 대한 죄책감이 한꺼번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예 끄진 말 걸. 다른 핑계를 대더라도 그런 식으로 연락을 끊진 말았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의 연속이었다.
“……이해하시겠지.”
손으로 눈가를 가리는 별 것 아닌 몸짓에서도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미안.”
나는 사과하고 나서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가슴이 수많은 추를 얹은 것처럼 무거워져서.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 똑같은 사과만 되풀이했다. 고정원은 가만히 나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끌어안고, 언제나처럼 내 뒷목에 손바닥을 얹어 느리게 문지르며 정수리 위로 입술을 묻었다.
“사고 안 났으면 됐어.”
“…….”
걱정 어린 말을 듣는 게 괴롭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감기 기운은 좀 괜찮은 거야?”
“……응.”
축 늘어져 있던 손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등허리에 두르고 고정원이 내게 하듯이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진심을 다해서 위로해 주고 싶은데 왜 이렇게 어려운지. 마음이 어디 차가운 방에 갇혀 버린 것 같았다.
“혹시 몰라서 사 왔어.”
고정원이 재킷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보여 주었다. 자그마한 상자가 감기약이라는 걸 알게 된 나는 어색하게 굳어졌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약은 또 언제 샀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지끈 쓰라렸다. 고마워…….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모기 소리만큼 줄어들었다.
“배터리 나갔던 거지?”
“……응. 보조 배터리를, 못 챙겨서……. 나는 네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오늘 발인식이라 바쁠 거 같기도 하고, 갔다 와서 연락하려다가…….”
“됐어, 괜찮아.”
토닥여 준 고정원은 내게서 몸을 떼고 재킷을 벗었다. 이미 느슨하게 풀어진 타이를 끌어당겨 빼고, 의자에 대충 걸친 뒤 팬츠의 벨트도 풀었다.
“우선 씻자. 응?”
“…….”
나는 쭈뼛거리며 공연히 옷에 손바닥만 비볐다.
아무래도 같이 씻게 되면 분위기에 휩쓸려 하게 될 테고…… 그게 문제였다. 이렇게 하나도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는 집중하지 못할 뿐더러 마음만 심란해질 거 같았다.
“할 기운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내 심중을 읽었는지 고정원이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담백하게 말했다.
“……어, 응.”
그러게. 그럴 기분도 아닐 텐데. 지레 앞서 나간 게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스스럼없이 전라가 된 고정원은 먼저 욕실로 들어서지 않고 나를 기다렸다. 발치에서 얼굴까지, 새삼스럽게 벗는 몸을 훑는 시선에 미약하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반지는?”
아.
소리 없는 탄성을 삼켰다. 우리 커플링을 찾고 있었던 거라고, 그제야 지그시 훑어보던 시선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게…….”
잃어버린 반지에 대해선 아무런 대책도 세워 두지 못했다.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비수처럼 질문이 꽂혔다.
“잃어버린 거야?”
고개가 푹 꺾여듦과 동시에 죄책감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서 뻐끔대다 무작정 사과부터 했다. 정말 미안해. 정말……. 그 이상 말을 잇지도 못하고 죄인처럼 서 있었다.
잃어버리게 된 정황을 캐묻는 일 없이 고정원은 내 팔을 이끌어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서도 여전히 나는 제대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면목 없이 움츠러든 나를 일일이 씻겨 주는 손길은 언제나처럼 다감했다. 피로한 하루였을 것이다. 씻겨 주느니 혼자 씻는 게 더 편할 텐데.
“…….”
기운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고도 했지만, 고정원의 아래는 욕실로 들어온 순간부터 강직돼 있었다. 갈수록 피가 몰리는 그것을 고정원이 무시하라고 해 봤자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세가 이리저리 바뀌면서 몸 곳곳에 끄덕거리는 살덩이가 닿을 때마다 근육이 일제히 곤두섰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있고, 여러모로 맘이 어수선할 것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서는 경우도 있으니. 그래도 빼고 나면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서, 나는 거절당할 각오를 하고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댔다.
닿는 그 즉시였다. 망설였던 게 무색했다. 뜨겁고 빽빽한 수증기보다도 숨 막히는 입맞춤이 시작되면서 타일 벽에 머리를 찧었다. 고정원은 이리저리 갈구하며 입술을 빨고 옭아맬 기세로 혀를 섞었다. 그리고 조급한 내 손길에도 연달아 사정했다.
“하아……. 하아…….”
무질서한 숨과 가파르게 들썩이는 가슴팍이 서로에게 맞닿아 부대꼈다. 휘몰아치듯 쏟아낸 후, 우리는 벅찬 호흡으로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오래도록 물 아래 서 있었다.
머리를 말려 주고, 물기를 닦아 낸 전신에 크림을 덧발라 주고. 씻고 나와서도 고정원의 수발은 이어졌다. 늘 있는 일이지만,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단할 게 빤한 사람한테 맡겨 두고 가만히 있으려니 편치가 못했다. 알아서 하겠다고 밀어낼 수도 없었다. 이유는 몰라도 이렇게 날 챙겨 주면서 흐트러진 심기를 추스르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다.
“먼저 누워 있어. 머리 마저 말리고 갈게.”
나는 끄덕이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오르기 전, 머리를 말리고 있는 고정원의 등 뒤로 굴러다니고 있는 폰을 슬쩍 집어 들었다.
위이이이잉.
시끄러운 헤어 드라이어 소리를 들으며 전원을 켜자, 일단 메신저앱의 알림이 누적된 게 눈에 띄었다.
[학교로 왔는데 없네]
[폰도 꺼져 있고]
[수업은 왜 빠진 거야?]
[인휘야]
[어딨어?]
걱정하는 고정원의 문자는 초반에 쌓여 있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뜸해져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쌓여 있지는 않았다. 대신, 캐치콜 부재중 전화 알림 서비스 문자가 백 통 이상 쌓여 있어서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최재운을 비롯한 몇몇 과 애들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고정원이 너랑 같이 있냐고 찾던데 뭔 일?]
가장 최근으로 김강우에게도.
[잘 드감?]
[근데 너 고자랑 대체 뭔 개싸움이 낫던거냐]
[궁금해디지겠냌ㅋㅋ]
[사실 아까 영화관에서부터 그새끼한테전화왔었다]
[네가 피하길래 씹고 일부러 말안했는데]
[알아두라고 ㅋㅋㅋ]
“…….”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렸을 줄은 몰랐다.
사고 안 났으면 됐다고 말하던 고정원의 차분한 어조가 스쳐 지나가면서, 얼마나 긴 시간을 걱정으로 가슴 졸였을지 생각하니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왜 그래?”
어느새 드라이를 마친 고정원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워낙 한숨을 크게 쉬었는지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아니 그냥……, 얼른 자자.”
배터리가 넉넉하게 남아 있는 걸 들킬세라 퍼뜩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서둘러 자리에 눕고, 옆으로 엉덩이를 옮겨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무언가 더 말하려나 싶었는데 별말 없이 탁, 불이 꺼졌다.
이불이 들춰지면서 비좁은 침대로 기다란 몸이 파고들어 왔다. 누그러지는 잠기운이 날아가지 않도록 나지막하게 인사했다.
“잘 자.”
“잘 자.”
자리에 누운 고정원이 눈을 감는 걸 보고 나서 나도 눈을 감았다.
고른 숨소리가 들려올 즈음, 나는 다시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이틀간 과다하게 잠만 잔 까닭인지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잠이 들지 않았다. 몰래 곁눈질하니 고정원은 깊게 눈을 감고 있었다.
방해되지 않게 살짝 벽 쪽으로 몸을 틀어 뒤척이는데, 별안간 뒤에서부터 바투 끌어당겨졌다.
“…….”
백허그를 당한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배에서부터 가슴까지 근육으로 두터운 팔이 차지하게 되자 무슨 장치에 짓눌린 것 같았다. 흐음……. 나른한 신음이 귓가로 습하게 번지며 근지러운 소름이 돋았다.
잠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잠결일 수도 있고. 나는 어설프게 꾸물대다가 감싼 팔위로 슬그머니 손을 얹었다. 그러자 구속의 힘이 보다 세지면서 등에 딱딱한 가슴팍이 완벽하게 밀착되었다.
뒤에선 반쯤 수면 중인 것처럼 변함없이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괜스레 부자유스러운 느낌이 들어서 들썩이지도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이러다 밤을 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눈꺼풀을 닫은 순간…….
아……!
목덜미를 움츠렸다. 뜨거운 기운을 머금은 코와 입술이 패인 곳을 파고드는 걸 느꼈다. 뒷목과 어깨 사이에 파묻혔던 코는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등줄기, 겨드랑이, 옆구리와 허리…… 얇은 한 겹의 옷 위로 짓눌리는 코끝의 감촉이 뚜렷했다.
냄새를 맡는 것 같기도 하고 애무를 하는 것 같기도 한, 기이한 행동은 발끝으로 내려갔다 다시 위로 거슬러 올라오기까지 계속됐다. 원래대로 끌어안긴 포즈가 되었을 때 치골에 닿은 중심부는 뻣뻣하게 부풀어 있었고 내 아래 사정 또한 별다를 바 없었다. 귀밑으로 입술을 묻은 고정원은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신 그런 식으로 잠적하지 마.”
오싹하게 끼쳐 오르는 무언가를 참아 내며 나는 기껏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번쩍 눈이 뜨였다.
“…….”
둑둑둑둑…… 뛰어 대는 심장의 고동을 맨 먼저 느꼈다.
아. 꿈이구나.
눈앞에 펼쳐져 있던 끔찍했던 광경이 현실이 아님을 자각했다. 그럴 리가 없지. 되뇌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러나 자각과는 상관없이 불쾌한 감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고, 지루하게 몇 분간을 뜬눈으로 흘려보낸 뒤엔 새롭게 잠들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나는 배 언저리에 감긴, 힘이 느슨해진 팔을 조심조심 들추어냈다. 더워서 그런가 아니면 방금 꾼 꿈 때문인가, 이마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손등으로 대강 훔쳐 내고 벽에 기대앉았다.
“……하아.”
방금 전 꿈에서 봤던 건 고정원이었다.
처음엔 혼자만 나왔던 거 같은데 어느 시점부터 여자와 함께였다. 나한테 하던 것처럼 농밀한 스킨십을 여자와 나누고는 잠자리까지 가졌다. 그 장면장면들이, 내 경험에서 각색된 탓인지 무척이나 리얼하고 자세해서 도무지 꿈 같지 않았다.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달콤하게 속삭이고 격렬하게 몰아붙이던 고정원이 움직임을 멈춘 순간, 단단한 몸에 감싸여진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강유나 선배임을 확인하자마자 쫓기듯 꿈에서 깼다.
개꿈이었다. 개꿈인데, 끈적하다고 느낄 정도로 생생했다. 실제 내가 가진 기억 속 정보와도 섞여들어 더욱 기분 나빴다. 종강총회 때, 술집의 뒤편에서 처음으로 강유나 선배와 고정원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봤었다. 그때는 고정원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기도 전이라 가까운 곳에서 본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흔히들 말하는 케미가 좋다느니 뭐 그렇게…….
꿈속에서도 난잡하게 엉켜드는 두 사람의 길쭉한 몸이 아주 외설적이었고, 강렬한 이미지가 돼서 뇌리를 떠나질 않고 있었다.
“후…….”
공기가 답답하다고 느낀 나는 조심조심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제는 숨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깊게 잠든 고정원을 내려다보다가 사뿐한 걸음으로 현관을 향했다. 딱 십 분만 바깥바람을 쐬고 싶었다.
새벽의 공원은 당연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야릇한 해방감에 인적이 끊긴 공터를 마구잡이로 내달렸다. 그렇게 몇 바퀴를 뛰다가 지쳐서 벤치에 털썩 주저앉자 속이 다 시원했다.
“으아……. 좋다.”
찬바람을 맞고 나니 머릿속이 한결 깨끗해지면서 감정적으로 치우쳤던 부분들이 많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그렇잖아도 싱숭생숭한 상황에서 꿈까지 그래서……. 하마터면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극한으로 치달을 뻔했다.
낮에 학교에서는 정말 심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는 않았다. 종일 고정원을 고의적으로 피했던 게 뜻하지 않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완벽하게 떨쳐 낸 건 아니지만, 미안한 감정이 커지니까 상대적으로 다른 감정들은 좀 사그라들기도 했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고를 전환해 볼 여유도 생겼다.
어쩌면 내가 과민하게 반응했을 수 있다는,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길 만한 일을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
이대로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면 안 되나, 하는 유혹이 슬그머니 들고 있었다. 들추고 진실을 알아서 좋을 게 뭐가 있냐고 자문해 봐도 답이 안 나오는 데다, 내가 한 거짓말도 마음 한구석에 걸렸다. 나도 떳떳하지 못한 상태에서 추궁을 한다는 것도 그렇고…….
처음의 격했던 감정들이 가라앉은 지금. 회피하고 싶다는 쪽으로 무게가 한없이 쏠려 갔다. 찌질한 겁쟁이라고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한심하구나.
한심해.
한심한 놈.
자학하며 울적해진 기분으로 벤치에서 일어났다. 아마 삼십 분은 족히 지난 것 같은데…… 휴대폰을 챙겨 오지 않았으니 정확치 않았다. 빨리 돌아가자 싶어서 입구로 발길을 돌렸다.
“……어.”
길목에서 뛰는 발소리 같은 게 난다 했는데, 그 소리가 어째 가까워져 왔다. 공원을 빙 둘러싼 나무 사이로 인영이 스치는 걸 포착했다. 이 시간에 대체 뭔가 하는 황당함과 무서움으로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마침내 시커먼 실루엣이 공원 입구까지 다다랐다. 피해 가야 하나 아니면 모른 척 지나가야 하나 짧은 틈에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집에서 곤히 자고 있다고 철썩 같이 믿었던 고정원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 정원, 아, 너 왜…….”
성큼성큼, 보폭 큰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속도에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뒷걸음쳐 버렸다.
“왜 여깄어 너.”
붙잡힌 한쪽 어깨가 마구 흔들렸다. 머리통까지 뒤흔들리며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힘에 놀라서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답답해서, 잠깐.”
마주한 눈이 무서웠다. 무섭다고 밖엔 표현이 안 되는, 감정이 배제된 혹은 넘치는 눈이었다.
“휴대폰도 집에 두고.”
낮게 뇌까리는 고정원의 남은 한 손에는 휴대폰이 쥐어져 있었다. 어찌나 세게 힘을 주었는지 움켜쥔 손은 혈관이 불거지고 하얗게 질려서…… 나는 마치 그 안에 움켜잡힌 물건이 된 기분으로, 힘겹게 사과의 말을 뱉었다.
“미……안……. 난 너 자는 줄 알고…… 그냥 잠깐 바람, 쐬고 들어가려고…….”
위축된 변명은 매끄럽지 못했다. 보통 화가 난 게 아니라는 느낌이 전해져 오면서 머릿속이 새하얘진 까닭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변명해야 화가 풀릴지.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지도. 제대로 된 판단이 되지 않았다.
고정원의 눈동자가 구슬처럼 투명해 보인다는, 그런 쓸모없는 감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너 찾아다니는 꿈 꾸다 깼는데…….”
꿈이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꿈. 나도 꿈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고정원도 악몽을 꾼 걸까.
“……정말로 없어서.”
한순간에 팔이 끌어당겨지며 입술과 입술이 맞물렸다.
헤벌어진 입 안으로 들어온 혀가 기교랄 것도 없이 성급하게 부딪혀 왔다.
“음……!”
짓뭉개진 입술에서 탁한 신음이 터졌다. 흡입, 이라고 밖엔 표현할 수 없는 절박한 입맞춤이었다. 고정원은 내게 숨 쉴 틈조차 주고 싶지 않은 것처럼, 송두리째 머금어서 어떻게 하고 싶은 것처럼 난폭하게 굴었다.
“하으……!”
틀어막던 입술이 잠깐 떨어지면 재빠르게 숨을 쉬었다. 턱에선 끈적한 침이 흘렀고 입술은 얼얼했으며 눈앞은 부옇게 흐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휘청대자 큼직한 손이 허리를 받쳐 왔다. 다시 시작된 키스는 여전히 광증처럼 집요했지만 숨도 못 쉴 만큼 몰아붙이는 건 아니었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고정원의 뜬 눈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
차근차근 밀려나던 나는 어느 틈엔가 구석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앉아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양 팔과 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오랫동안 쏟아지는 키스를 겨우겨우 받아 내고 있었다. 내 앉은키에 맞춰 고개를 수그린 고정원은 불편할 법도 한데 도무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친 건 나 하나뿐인 듯싶었다.
춥, 츱, 쭙.
젖은 소리가 접촉의 끝에 반드시 났다. 고정원은 요란하게 입술을 빨고 끈적하게 침이 늘어지도록 혀를 섞어 댔다. 보란 듯이,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더 난잡한 방법으로 했다.
고정원의 어둡게 가라앉은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싫다. 이상해. 이런 건 언젠가 눈살을 찌푸리며 봤던 음란 영상 속의 키스보다도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리 사이는 씨근덕대며 갑갑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상하고 무섭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이런 건지.
“…….”
얇은 바지의 한가운데를 들추기 시작한 성기가 거북스러워 다리 사이를 어색하게 꼬았다. 들키고 싶지 않아서 한 몸짓이 오히려 주의를 끌고 말았다는 걸 눈치챘을 땐 이미 기다란 손가락이 그 위를 감싼 뒤였다.
“아…… 싫, 잠깐, 고정원 너 왜 이래……!”
공원에서 난잡한 키스를 한 것만으로도 나에겐 한계를 넘어선 과부하였다. 아무리 인적이 끊겼다지만 공공연한 밖에서 이 이상은 상식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싫다고……!”
되는 대로 어깨를 밀치고 머리를 밀어내고 눈을 가리기까지 했으나 일절 통하지 않았다.
바지가 벗겨지고 속옷이 끌어내려졌다.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내 옷을 벗기는 고정원의 손길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인해 폭력이라기엔 정중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나는 처음으로 내 진심 어린 거부 의사가 통하지 않는 고정원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다리 사이가 강제로 벌어지고 반쯤 서 있는 것이 뜨거운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헉. 마른 비명을 삼키며 다리를 오므렸지만 한쪽 다리는 손아귀에 붙들려 꿈적도 안 했고 나머지 한쪽만 고정원의 단단한 몸에 부딪혀 덜렁거릴 뿐이었다.
“아…… 흐……!”
뿌리 끝까지 삼켜졌다 뱉어지자 완전하게 기립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이 상황이 말도 못하게 수치스러워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축축한 혀가 힘 받은 기둥을 건드리자 쿠퍼액이 질금질금 배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허벅지에 쥐가 날 것처럼 쟁쟁한 힘이 가득 찼다.
새벽녘의 가로등이 쓸데없이 밝았다. 더러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성기 주변으로 코를 박아가며 펠라티오에 열중하는 고정원의 단정한 얼굴이 가린 손바닥 밑으로 훤히 내려다보였다. 그렇지만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까슬까슬한, 입 주변으로 올라오기 시작한 수염이 민감한 부위에 비벼질 때마다 발가락이 아찔하게 오므라들었다.
“윽……!”
눈가를 감싼 손을 옮겨 입을 틀어막았다. 엉덩이가 들썩였다. 미끈한 입속으로 다시금 빨려 들어가면서 그 거부할 수 없는 황홀한 자극에 몸의 근육이란 근육들이 한꺼번에 조여들었다. 미칠 것 같았다.
땅바닥에 발을 두드려 가며 참아 내고 있는데 고정원이 물고 있던 성기를 뱉어 냈다. 그러더니 이번엔 불쑥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왔다. 읏, 하며 복부가 홀쭉해졌다. 빳빳하게 곤두서 있는 줄도 몰랐던 젖꼭지에 손끝이 긁히면서 알알한 통증이 번졌다. 티셔츠가 위로 말아 올려지고, 부어오른 가슴팍의 알갱이는 곧 입안으로 빨려 갔다.
아래를 빨던 것보다 느긋하게 젖꼭지를 감싸 혀로 굴리던 고정원은 귀찮다는 듯 내 티셔츠를 머리통 위로 벗겨내 버렸다. 9월의 밤공기는 조금 쌀쌀했지만 그런 걸 느낄 정신도 아니었다. 삽시에 알몸이 된 나는 두려움을 느끼며 가슴팍에 매달려 있는 고정원의 머리를 힘주어 눌렀다.
까득, 그런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아!”
젖꼭지가 잇새로 씹히는 소름끼치는 감각에 짧은 탄성이 터졌다. 곧 실수였던 것처럼 주위를 살금살금 둥글리며 가볍게 애무한 혀가 면적을 넓혀 널찍하게 핥아 주자 그 선명한 감각의 대비에 오금이 저릿저릿하면서 밭은 숨만 찼다.
젖꼭지고 가슴팍이고 닿는 곳마다 눅눅해졌다. 뜨건 숨결이 연신 퍼부어지고, 젖은 입술이 닿거나 혀에 뭉개지거나 이로 잘근잘근 씹히기도 하면서 공원의 딱딱한 벤치에 헐벗은 엉덩이를 비비적거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아 제발…… 정원아……!”
한동안 방치 당하던 성기가 다시 머금어지면서 나는 흉하게 울먹였다. 빨리 끝내 주기라도 했으면 싶었다. 이러다 누군가 우리를 발견하게 될까봐 너무 무서웠다. 이렇게 불안한데 아래는 상관없이 흥분하고 쌀 준비를 하는 게 모순일 지경이었다. 나는 끙끙대며 고정원의 머리칼을 붙들었다.
“나와……! 비켜, 나와, 나……!”
급박해져서 칭얼거렸다. 초조했다. 이제 나올 거 같은데. 고정원의 입안엔 뿌려 놓기가 싫어서 있는 힘을 다해 참고는 있었지만 언제 터질지 몰랐다.
그러다 고정원이 파들파들 떨리는 내 허벅지를 아프도록 꽉, 움켜쥔 순간이었다.
“아…….”
턱이 치켜 들리며 나른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그 짧은 순간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원해 마지않았던 해방에 생각과 감각이 몽땅 물크러졌다.
꿀꺽. 목구멍으로 무언가를 삼켜 넘기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팽팽해졌던 몸이 이완되어 가는 걸 느꼈다. 참았던 만큼 전신에 도사린 사정의 여운은 진하고 길었다. 나는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여운으로 잘게 떨리는 성기며 그 주변을 꼼꼼히 핥아 주는 후희까지 받고 있었다.
텅 빈 머릿속.
엉덩이가 아프고 등도 쓰라렸다. 극적인 감각들을 참아 내느라 의자의 나뭇결에 문지르고 찧어 대면서 피부가 벗겨졌으리라 예측할 수 있었다.
고정원이 몸을 일으켜 나를 끌어안았다. 지나친 힘 때문에 안긴 몸이 짜부라지며 엉덩이가 벤치에서 붕 떴다. 맨 피부에 맞닿은 옷의 감촉을 느끼자, 나는 내가 혼자만 발가벗고 있다는 자각과 동시에 맹렬히 부끄러워졌다.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치며 눈물이 터졌다.
모멸감이었다. 실망감이고, 허무함이기도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과정을 이해해 보려 해도 그저 공원 벤치에서 헐벗고 있는 내 꼴밖엔 명확히 이해되는 게 없었다.
“나와.”
낮은 목소리로 말한 것만으로 고정원은 의외로 쉽게 나를 품안에서 놓았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발치에 떨어진 옷가지를 집어 올렸다.
먼지도 털지 않은 드로즈의 구멍에 한쪽 다리를 끼워 넣은 때였다. 눈물로 눈앞이 흐려진데다 팔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 몸이 기울었다. 우스꽝스럽게 삐끗대긴 했으나 넘어지진 않았다. 뒤에서부터 고정원이 받쳐 주었기 때문이었다.
“……도와줄게.”
내 손에서 속옷을 가져간 고정원이 무릎을 꿇었다. 드로즈의 다리 구멍을 넣기 쉽게 벌리며 끼우라는 시늉을 했다.
“…….”
진이 빠져서 서 있기도 힘든 걸 알았는지 내 손을 가져가 자기 어깨에 짚게 만들었다. 나는 하는 수가 없어서, 그대로 벌어진 구멍에 다리를 한 짝씩 끼워 넣었다.
도움을 받아 바지와 티셔츠를 완벽히 입고 나서도 나는 지긋지긋한 그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발바닥부터 쥐가 난 탓이었다.
아픔을 참으며 의자에 주저앉은 내 앞으로 고정원이 한쪽 무릎을 굽혀 앉으며 등을 내보였다.
“업혀.”
“…….”
말없이 넓은 등을 지켜보던 나는 일어나서 억지로 걷기 시작했다. 절뚝 절뚝, 불편한 걸음으로 나아갔다.
뒤따라온 고정원이 내 얼굴을 살피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인휘야. 초조함을 숨기지 못한 부름을 무시하며 그저 앞만 바라보고 걸었다.
그러다 발밑의 턱을 발견하지 못하고 걸려서 넘어질 뻔했다. 사소한 실수를 놓치지 않은 고정원은 그대로 나를 들어 올려 안았다. 어른이 아이를 들 듯이.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우스울 정도로 너무도 쉽고 가볍게.
“다치면 안 되니까.”
말하는 고정원의 얼굴은 더 이상 무섭진 않았지만 음울해 보였다. 나는 하나도 안 고마우니 내려놓으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가만히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문득 몸서리가 쳐졌다. 조금 전, 움직일 수조차 없게 꽁꽁 붙들어 나를 장악하던 힘이 생각나서였다. 강압적인 고정원의 표정 없는 얼굴. 이제껏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던.
부르르, 떠는 게 추위 때문이라고 착각했는지 고정원은 나를 더 깊게 끌어안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집안은 나올 때와 다르게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씻지도 않고 이부자리에 엎드려 버렸다. 베개에 코가 짓뭉개지도록 얼굴을 박고 가만히 있자 등 뒤로 고정원이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
얼마 후 불이 꺼졌다. 고정원이 내 옆에 눕는 기척을 느낀 나는 벽 쪽으로 몸을 붙이며 거리를 떨어뜨렸다. 고정원은 다가오지 않았다. 뒤척이는 소리도, 숨 쉬는 소리도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아서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다.
왜.
왜.
의문이 솟구쳐 올라 시트를 움켜쥐었다. 나는 고정원이 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연락이 두절되고 나서, 집 앞에서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사고 안 났으면 됐다며 따뜻한 말로 나를 용서해 줬었다. 그 소중한 반지를 잃어버렸다고 털어놨을 때도 추궁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가식이고 거짓말이었던 걸까. 이런 식으로 화풀이하고 싶은 걸 참는 대신 다정하게 안아 주고 씻겨 주고 살뜰히 챙겨 줬던 걸까. 혼란스러웠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 위로 고정원의 손이 올라왔다. 뿌리치자 이번에는 닿기만 하지 않고 움켜쥐어 왔다. 싫었다. 나를 언제든 마음대로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거 같아서.
일순 흥분이 치솟은 나는 아무렇게나 팔을 내둘렀다.
손을 펼쳐 휘두르다 끌어 안기게 되면서 부턴 주먹으로 가슴팍을 거세게 두드려 댔다. 분에 못 이겨 씩씩대면서, 이런 와중에도 절대 놔줄 생각을 않는 고정원의 집착에 질려 하면서, 나 좀 그냥 가만 두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웃에 피해가 될 거란 생각도 못했다.
한참을 그러다 ‘쾅, 쾅, 쾅!’하고 벽을 세 번 치는 타격음에 놀라 굳어졌다.
“…….”
품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팔에 힘이 다소 빠져나갔다. 우리는 그 소리를 기점으로 잠시 멈춰, 서로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가파른 들숨날숨으로 흐트러진 반면, 고정원은 조금 흥분된 기색일 뿐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소한 차이에서도 괜히 억울한 감정이 든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길을 피해 버렸다.
……정말, 미워서 죽을 것 같다.
다른 여자랑 잤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진짜일까 봐 무섭기만 했지 미운 적은 없었는데. 지금은 진심으로 미워서 때려 주고 싶고 당분간 보고 싶지도 않았다.
홱 등을 돌렸다.
고정원은 기다리지도 않고 또다시 강제로 내 어깨를 돌렸다. 얼굴이 마주 보였다. 나는 고정원의 끈질김에 학을 떼는 심정으로 낮게 소리쳤다.
“왜 이래……!”
“등 돌리지 마.”
황당한 요구에 벙찌고 있다가 되받아쳐 주었다.
“너나 명령하지 마.”
말한 나는 다시 등을 돌렸고, 고정원은 그런 내 등에 밀착해서 끌어안아 왔다. 지겨운 자식. 나는 처음으로 속으로 고정원에게 욕을 퍼부었다. 진절머리 날 거 같은 마음을 담아 몸부림을 치는데 그게 진짜로 몸싸움으로 번졌다. 좀 전보다도 정도가 심해져서, 나는 고정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세 번이나 뺨을 때렸다.
고정원은 이번에도 묵묵히 맞았다. 다만 끝까지 내가 등을 보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강제로 마주 보게 하고 강제로 구속하고, 마주 안게 했다. 가라앉아서 잠시간 안겨 있다가도 나는 갑자기 또 울컥해서 발버둥치고 때리고 그랬다. 발작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엎치락덮치락하다가 정신이 들었을 땐 무슨 영문에서인지 내가 고정원의 뒷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 있었다.
“하…….”
입술이 떨어지고, 신음을 내뱉는 고정원의 손힘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걸 느꼈다. 조금 놀란 것 같은 표정을 마주 보면서도 나도 내가 왜 이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성적인 흥분이 아니었는데 어째선지 아래가 단단하게 발기해 있었다.
단숨에 불이 붙어서 턱을 비틀며 키스해 오려는 걸 밀어내며 말했다.
“움직이지 마.”
……그냥, 가만히 있어.
한 번 더 강조하고 나니 고정원은 씨근대는 숨을 누르며 잠자코 물러났다. 그렇게 격렬하게 나를 구속하던 게 안 믿어질 만큼 순순한 태도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추었다. 조심스럽던 키스가 깊어지는 데엔 기다림이 필요치 않았다. 격해져 있던 감정들은 남김없이 성적인 흥분으로 옮았고, 예기치 않게 시작된 섹스는 동이 틀 때까지 이어졌다.
“하, 으……! 으……!”
이를 악물고 버텼다. 나가 버린 목에선 쇳소리가 났다. 탁, 탁, 성기가 안으로 들이치며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사정을 향해 왕복 운동을 했다. 입구는 헐다 못해 짓무른 느낌이 났다. 나는 멀겋게 쥐어 짜내고도 아직까지 남아 있는 쾌감에 항복하듯 고개를 도리질 쳤다.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채 누워 있는 내 위로 육중한 몸뚱이가 짓눌러 왔다. 고정원이 무게를 실을 때마다 젖은 살들이 끈적하게 비명을 질렀다.
사랑해.
응?
인휘야.
조인휘…….
사랑해.
귓가에선 그런 속삭임이 쉼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을 뜬 건 점심도 지난 늦은 오후였다. 쑤시는 근육통으로 무거운 몸을 일으켜 보니 입고 있던 옷이 싹 갈아입혀져 있어 놀랐다. 시트도 깨끗한 걸로 바뀌어 있었고, 이마에는 냉각 시트가 붙어 있었다.
“…….”
조용한 집안. 고정원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 쪽으로 귀를 기울여 봤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집안에는 나 혼자라는 게 분명해졌다.
……갔나?
홀로 남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 말도 없이 갔다고? 삭신에 울리는 통증을 무시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열었다. 문자도 없고, 전화도 없다.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걱정돼서 전화를 해 볼까 어쩔까 망설이는데,
철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났네.”
“…….”
조금 피곤해 보이는 고정원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손에는 웬 비닐이 들려서 눈이 거기로 따라붙었다.
“……어디 갔다 와?”
“마트.”
편의점은 가까운데 마트는 걸어서 이십 분 정도 걸렸다. 단순히 잠깐 자리를 비운 것뿐이라고 알게 되자 안심이 된 나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울을 보니 웬 호빵 같은 얼굴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고정원은 눈 밑에 그늘이 져서 피곤해 보이는 정도였는데 나는…… 완전히 보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이건 뭐 집안에서 마스크를 쓸 수도 없고. 궁여지책으로 거의 자라지 않았지만 면도도 하고 양치질도 하고, 찬물로 세수하며 한참이나 진정시키고 나서야 나는 화장실 문을 빼꼼 열었다.
“밥 먹자.”
“……어.”
그새 준비를 마쳤는지, 식탁 위로 뜨끈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흰밥에 계란말이, 샐러드, 집에 있는 밑반찬. 이렇게 뿐인데 먹음직스러웠다. 외식을 하거나 시켜 먹는 게 대부분이어도 가끔은 번갈아 가며 이런 간단한 요리를 해 먹기도 했다.
“잘 먹을게.”
“많이 먹어.”
식사 시간은 짧고 조용했다. 처음 한 입에 맛있다는 말과 고정원의 다행이라는 말. 그게 대화의 처음과 끝이었다.
평소보다 많이 어색했다. 싸움의 마지막에 섹스를 했다고 갈등이 해소되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고정원은 나를 이따금씩 살펴봤고 살갑게 행동하면서도 정작 웃지는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로 눈치를 봤고 때때로 멍하게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서로에게 민낯을 드러낸 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고정원도, 무언가 내게 숨기고 말하지 않은 게 있는 것 같다고. 그게 뭔지 걱정되기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서로한테 상처만 줄 수 있겠다는 불안함이 생겼다. 새벽녘의 사건이 변화의 계기였다.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피하려 했는데, 오히려 뒷걸음질 치다 수렁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어긋나기 전에 솔직히 대화를 해야 할 때였다.
“……정원아.”
설거지를 하고 있는 등을 껴안으며 이름을 불렀다. 고정원은 응? 대답하며 묵묵히 그릇을 씻었다.
“나 할 얘기 있는데…….”
제대로 말할 수나 있을는지. 고작 운을 띄우는 데도 가슴이 울렁거려 왔다.
“응, 해.”
“잠깐, 설거지는 내가 나중에 할 테니까…… 여기 앉아 봐.”
“얼마 안 남았어, 마저 끝내고. 커피 마실래?”
“…….”
눈도 마주치지 않고 비협조적인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다. 피하고 있다고밖엔 보이지 않아 긴장한 손끝이 차가워졌다.
“얼굴 좀 보고 얘기해.”
“설거지 중이잖아. 됐지?”
잠깐 눈을 마주치고 웃는 고정원의 표정이 작위적이다. 억지로 웃는 게 다 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몰랐겠지만, 사귀게 되고 특히 근래에 접어들면서 나는 고정원이 짓는 표정들의 진심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었다. 확실히 예전과 다르게 요즘이 훨씬 풍부하고 솔직하게 보였다.
“뭐가 불안해?”
묻자 고정원이 입가를 끌어올려 웃었다.
“새벽에 내가 죄 지었잖아 너한테.”
“……그거 말하려던 거 아니야.”
고정원의 손이 느릿하게 식기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럼?”
하고 묻는 고정원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나는 버석하게 마른 입을 벌렸다.
“나……. 사실 여자 한 번도 사귀어 본 적 없어.”
그 순간, 그릇이 깨지면서 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힘겹게 말을 꺼내고 나서 채 일 초나 지났을까 싶은, 아주 짧은 삽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
싱크대 안에서 두 동강 나 버린 식기를 내려다보며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깨진 것도 깨진 거지만 그릇의 절단된, 첨예한 단면이 고정원의 손가락을 스치면서 붉은 피가 넘쳐흘렀기 때문이었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따라 선홍색 피가 그릇들 사이로 번지는 광경에 심장이 선득히 얼어붙었다.
“……가만 식탁에 앉아 있어, 약 가져 올게!”
서랍에 보관해 두었던 구급 키트를 허겁지겁 꺼내 온 사이 고정원은 둘둘 만 휴지로 손가락을 지혈하고 있었다.
“이리 내 봐.”
피가 상당히 많이 났던 것 같아 불안했다.
“어떡해, 깊게 베인 거 같은데.”
속살이 벌어진 게 울컥울컥 올라오는 피 사이로 언뜻 보였다. 피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걸 보면 당연히 깊은 자상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괜찮아. 그렇게 안 아파.”
보는 것만으로 내 손가락이 아릿해져 왔다. 조심조심하면서 거즈로 지혈해 보려 했지만 금방 멎을 상처는 아닌 듯했다. 급하게 휴대폰을 켜서 지혈법을 검색했다.
나온 방법대로 소독 후 상처 부위를 젖은 수건으로 감싸 지그시 눌렀다.
“이삼십 분 정도 지혈해야 돼. 손은 심장 위로 들래.”
심각해져서 이것저것 코치하는데 고정원이 내 얼굴을 보며 피식 웃는 게 보였다.
“웃음이 나와?”
신경을 건드린 게 아닌가 걱정되고, 행여나 파상풍 염려도 되고. 이런저런 생각들로 심기가 곤두서고 머리가 복잡했다. 그런 와중에 여유롭게 웃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정색을 하고 쏘아붙였다.
“챙겨 주니까……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누가 들으면 내가 너 구박하는 줄 알겠다.”
사실 알뜰살뜰하게 챙기는 건 고정원 쪽이고 나는 대개 그것들을 누리는 입장이긴 했다. 고작 이 정도로 챙긴 걸 가지고 좋아하는 걸 보니 평소에 좀 무심했었나 싶기도 했다.
“아.”
낮게 내뱉는 소리에 혹시 아픈가 해서 멈칫하자 고정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아까 물소리 때문에 못 들었는데. 뭐라고 한 거야?”
“……아 그거.”
아예 못 들은 거였구나. 안심이 되기도 하고 기분이 묘했다. 다행인 건지, 아니면 또 한 번 고백을 해야 해서 불행인 건지 알 수 없었다.
“…….”
이렇게 된 마당에 다시 얘기를 꺼내기도 애매하고, 게다가 어렵사리 모은 용기는 피를 보고 혼비백산하느라 죄다 도로 흩어져 버린 상태였다. 조만간 다시 대화를 시도해야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일단 지금은 때가 아닌 듯했다.
“나중에 얘기할게.”
얼버무리고 베인 환부를 지혈하는 데에 집중했다. 고정원은 무슨 얘기를 할지 딱히 궁금했던 건 아닌지 거기서 파고들거나 하지 않아 대화는 중단되었다.
나는 쉽사리 피가 멎지 않는 환부를 꾹꾹 누르다가 아플까 싶어서 눈치를 봤다. 괜히 웃지 말라고 했나. 고정원은 대번에 기분이 다운돼 있었다. 빤히, 관찰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하도 심각해서 나한테 화나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통증이 올라오는 걸지도 몰랐다. 안 그래도 휴지와 거즈를 흠뻑 적시고도 계속 흘러나오는 피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가슴이 서늘해지던 차였다.
“……아파?”
압박하던 힘을 느슨하게 하며 물었다.
“아니.”
대답하는 게 어째 기운이 없다.
“지혈만 되면 병원 가자…… 알았지?”
안타까운 마음에 손등을 살살 쓸어 주었다. 나름의 위로였는데,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고정원은 느닷없이 얼굴을 들이밀며 내게 키스하려 들었다.
“장난하지 마.”
입술이 살짝 닿으려는 걸 피해 고개를 비틀었다. 간신히 시도한 대화가 결렬된 것도 그렇고 고정원이 다쳐서 피를 보고 있는 것도 그렇고, 영 싱숭생숭해서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파.”
“……어?”
“깊게 베였나 봐. 점점 아파.”
나는 허둥대며 지혈하고 있는 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금세 축축이 젖어 버린 수건의 방향을 바꿔 주며 그것 외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많이 아프냐고 물으며 기색을 살피는데, 고정원이 여상한 투로 말했다.
“키스해 주면 좀 괜찮아질 것 같아.”
“…….”
“정말로.”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니 진담인 거 같았다. 어이가 없긴 했지만 약간…… 뭐라고 해야 하나, 다쳤다고 어리광 부리는 애 같아서 헛웃음이 났다.
못 이기는 척 눈 감고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지혈하고 있는 환부에서는 손을 떼지 않고, 어정쩡하게 고개만 숙여 가만가만 어린애 달래는 폼으로 입을 맞췄다. 그런 애 취급을 눈치챘는지 어쨌는지 고정원이 머금은 입술을 진득하게 빨아 당기며 혀끝과 잇새를 농밀하게 쓸었다.
호흡이 흐트러지기 전에 얼른 입술을 뗐다. 하지만 젖은 입술이 한 김 식기도 전에 금방 다시 입술이 달라붙고, 빨아 당겨지고……. 호흡을 따라 응하다 보면 마찰하는 살소리가 요란한 적극적인 입맞춤이 되어 있었다.
식탁 아래 차갑게 식은 맨발에 고정원의 발이 겹쳐져 왔다. 나와는 다르게 체온이 높고 본인의 몸집과 같이 큼지막한 크기였다. 다가온 발은 입속의 혀와 마찬가지로 피부 위를 부드럽게 쓸고 다리 사이로 얽어대며 신체끼리의 일체감을 고조시켰다. 뜨거운 체온에 동화되는 것처럼, 발끝에서부터 열이 피어올랐다. 사타구니 말고도 몸 이곳저곳에서 작은 열 뭉치들이 회오리쳤다.
“……하루 종일 이러고만 있고 싶은데.”
누가 억지로 떨어뜨려 놓은 것처럼 힘겹게 떨어진 뒤에도 몇 번이나 입술을 가볍게 포개며 고정원이 말했다. 나는 흐물흐물 풀려서, 널따란 가슴팍으로 턱, 이마를 기대었다. 달콤한 설탕물 같은 침으로 범벅된 입술에서는 만족스런 숨이 터져 나왔다.
“…….”
끝까지 말하지 않길 잘했다.
생각하는 나 자신이 간사하다고도 느꼈지만 부정할 수 없이 평화롭고 달콤한 한때였다.
피가 간신히 멎고 나서 보니 상처는 깊기도 깊고 면적 또한 넓었다. 왼손 검지의 반 정도가 베여서 통증도 심할 거라 예상이 됐다. 커다란 방수 밴드를 밀착해서 세 개나 붙여 주고 나서도 피가 약간 비쳐서 조마조마했다.
대충 응급처치가 됐으니 병원에 가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고정원이 거부를 했다. 내가 보호자도 아니고 둘 다 성인이니 억지로 데려갈 수도 없었다.
“요 며칠 제대로 못 잤더니 피곤하다. 눈 좀 붙이면 안 될까?”
다른 때와 달리 눈 밑에 그늘도 있고 눈두덩이가 깊게 패여 있기는 했다. 피곤해 보이는데 더 조르는 것도 미안해서 결국 실랑이 끝에 내 편에서 백기를 들었다. 그래도 내일은 꼭 가기로 약속을 받아 내고 나서야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창백해졌어.”
모로 누운 고정원이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놀라서 그래.”
나는 응석 부리는 장단에 맞춰 주느라 졸리지도 않은데 나란히 마주 보고 누워 있었다.
“그렇게 놀랐어?”
“그럼 놀라지 안 놀라? 피 보고 진짜 철렁했어. 깨진 건 조심해서 만져야지 그렇게 덤벙대냐 넌.”
속상해서 한 말에 고정원은 곧이곧대로 미안하다고 사과해 왔다. 미안하다는 말 들으려고 타박한 것도 아닌데. 따지고 보면 요리에 설거지까지 시켜서 이 사달이 난 것 같아 나야말로 미안한 마음에 꾸물꾸물 품으로 파고들었다.
“한숨 푹 자.”
그나마 오늘 풀 공강인 게 다행이었다. 짧게 눈만 붙이고 일어나서 알바 갈 준비를 하면 될 것 같았다.
“……같이 자는 거야?”
명령형이 아닌 의문형이어도 알 수 있었다. 옆에 계속 같이 있으라는 소리였다. 엄살 부리기로 작정했나 싶어서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알았어.”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비좁은 게 익숙해진 침대에서 전신을 구기고 서로에게 밀착하는 자세는 언제나 불편함과 종이 한 장 차이로 지극한 안락함을 가져다주었다. 완전히 맞물리게끔 팔다리를 보다 깊숙이 집어넣자,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잠기운이 빠르게 밀려들었다.
설핏 잠이 들었었다. 아니 생각보다 깊게 잔 것 같기도 했다. 눈을 떴을 때 방안은 여전히 햇볕으로 밝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음을 직감했다. 막 잠을 청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마주보고 껴안고 있었는데 지금은 얼굴의 방향이 침대 바깥을 향하고 있었고 뒤에서부터 고정원의 팔이 감싸 안고 있었다.
몇 시지.
휴대폰을 체크하기 위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고정원이 깨지 않도록, 배에 둘러진 팔을 들어 침대에 살포시 내려놓고 땅에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어디 가?”
엉덩이를 떼려다 말고 화들짝 뒤돌아보았다.
“……어?”
자리에 누운 고정원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위화감을 느꼈던 건 그 얼굴에서 졸음기를 찾아볼 수 없어서였다. 피곤해 보이는 눈도 자다가 깨서 그런 게 아니라 한숨도 못 잤기 때문에 지친 것처럼 보였다. 목소리도 전혀 잠겨 있지 않았고.
“너 안 잤어 여태……?”
“뒤척이길래 깼어.”
“아…… 미안.”
조심한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냐, 화장실 가게?”
“어…… 슬슬 나가려고.”
대답하자 고정원은 그제야 ‘아, 오늘 알바 가는 날이지. 정신이 없네.’ 하고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단숨에 상체를 일으켜 내 이마에 가벼운 뽀뽀를 했다.
“준비하자.”
“……뭘?”
“카페. 나는 가서 과제하면 될 것 같아.”
방학 동안에도 내가 카페 알바하는 날이면 대개 안에 들어와 기다리곤 했다. 여의치 않을 땐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만나거나.
“아아…… 응.”
대답하는데 다친 고정원의 손이 눈에 띄었다.
“근데 그럼 어차피 나간 김에 너 병원부터 갔다 오면 안 돼? 난 먼저 가 있을 테니까.”
“……그럴게.”
마지못한 티가 역력한 대답이었다.
“말 잘 들으니까 좋네.”
한시름 놓은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머리에서부터 귓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
두어 번 쓰다듬다 말고 어정쩡하게 손길을 거둔 건 고정원의 표정 탓이었다. 그냥 장난 같은 스킨십일 뿐인데 뭐 별 짓을 했다고 눈매가 그새 탁해져 있었다. 가느스름하게, 어떤 생각에 잠식당한 것처럼.
익숙한 흐름을 끊기 위해 나는 호들갑스럽게 서두르며 침대를 벗어났다.
“나 먼저 씻는다.”
속옷을 챙겨 후딱 들어가려는데 욕실 앞에서 붙들리고 말았다.
“같이 씻어.”
고정원은 훌렁 상의를 벗어젖힌 것도 모자라 내 옷자락을 들치며 벗기려 들었다.
“야, 저 좁아터진 욕실에서 꼭 같이 씻어야 돼?”
“난 넓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좁다니까.”
들러붙는 몸과 옷을 들추는 손을 밀어내는데 갑자기 고정원이 ‘아’ 하고 단발의 신음을 내뱉어서 움찔 굳어졌다.
“다친 데 건드렸어?”
“괜찮아.”
괜찮다고는 해도 확실히 밴드에 스민 피가 좀 더 진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손가락을 다치면 혼자 씻는 것도 힘들 텐데. 물론 한손으로 씻을 순 있어도 시간도 오래 걸리고 불편할 게 뻔했다. 그리고 상처 부위에 물이라도 들어가면 큰일이니까.
“……꼼꼼하게는 못 씻겨 준다.”
무뚝뚝하게 말하자 고정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티셔츠를 벗겼다.
* * *
카페 알바는 순조롭게 쭉 이어 오고 있었다. 카페 사정에 따라, 개강 후 내 스케줄에 따라 근무 시간대는 몇 번 변경돼서 최근엔 주 2회, 늦은 오후부터 밤까지 딱 다섯 시간씩 일하고 있었다. 큰돈은 안 돼도 용돈벌이용으로는 제격인 데다 일도 손에 익어서 편했다.
“오늘은 그 잘생긴 친구 없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점장이 옆으로 다가와 은근하게 운을 띄웠다. 방학 때 고정원이 나를 기다렸다가 같이 나가는 걸 몇 번 본 이후로 종종 이렇게 관심을 보였다. 평범한 사이가 아니다 보니 약간 민망하기도 하고 뻘쭘하기도 하고 아무튼 부담스러워서 매번 대답이 궁했다.
“아…… 네.”
“그 친구 앉아 있으면 여자애들이 계속 안 나가고 버티더라.”
“하하…….”
“그런 애들은 보면 여친도 진짜 급 있는 애들만 만나던데. 막 다리가 여기부터 시작하는 애들. 하여간 그런 게 독식이야 딴 게 아니라.”
점장은 한참을 더 신나서 떠들어 대더니 마지막엔 내게 고정원의 여친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뇨.”
“걔 여친 없어?”
“있을…… 걸요.”
“사진 보여 달라 해 봐. 이왕이면 여친 친구도 한 명 소개 시켜 달라 하고. 아마 장난 아닐 걸? 내 주변에도 얼굴로 먹고 사는 놈 하나 있는데 만나는 여자 죄다 모델, 연예인, 승무원…… 쩐다 쩔어.”
“네…….”
“근데 걔는 키가 좀 작어. 네 친구는 한 팔십오 되냐? 몸도 좋아 뵈던데 밑은 어떤가 궁금해지네. 인간적으로 그렇게까지 생긴 애들은 좆이라도 작아야 공평한데 말이야.”
“…….”
“어, 너 얼굴 빨개졌다.”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데 얼굴색까지 지적당하자 정말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애꿎은 그릇만 물을 튀겨 대며 박박 문질렀다. ‘크기’에 대한 얘기를 듣자 이미 알고 있는 정보가 자동으로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손에 쥐어 본 데다 사귀고 난 뒤로는 내 것보다 자주 만지는 형편이니…….
무엇보다도 타인의 사적인 부분까지 흥미 위주로 들추는 태도에 짜증이 난 것도 있었다. 어떻게 자연스럽게 넘기기가 힘든 상황이었는데 때마침 유리문이 딸랑, 울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점장이 인사하는 소리를 들으며 장갑을 벗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빠르게 뒤돌아 본 순간, 카운터 앞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카드를 내밀고 진동 벨과 영수증을 받기까지 고정원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기분이 안 좋나? 생각한 건 표정이 어딘가 싸늘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 착각인가.
컵에 물과 얼음을 채워 넣고 에스프레소가 추출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점장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쟤 왠지 대물일 거 같다.’ 하고 기어이 저급한 소리를 하더니 내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팡, 두드렸다.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아, 네, 들어가세요.”
나는 어설프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점장이 나가고 나가는 걸 확인하고 돌아서자 어깨에 힘이 빠졌다. 힘은 빠졌는데 뻐근한 거 같아서 주먹으로 몇 번 두드리고 나서 고정원에게 줄 커피를 마저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진동 벨을 울리면 되지만 지금은 손님도 없고, 가서 얘기도 하고 싶어서 트레이에 음료를 담아 직접 테이블로 서빙했다. 고정원은 말했던 대로 과제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랩톱 옆에 홀더를 끼운 커피를 내려놓자 여전히 화면에 눈길을 둔 채로 질문해 왔다.
“……아까 무슨 얘기 했어?”
‘아까’가 언제를 얘기하는 건지 몰라서 잠시 생각하다가, 점장이 내게 귓속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
“아…… 별 말 안 했는데?”
대물이니 뭐니 있었던 대로 솔직하게 말하기가 뭐해서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별 말 아닌데…… 얼굴 붉힐 만한 얘기였나 봐.”
“그냥 좀 더워서. 근데 너 손은 어땠어? 치료 잘 된 거야?”
손 상태가 궁금하기도 해서 급히 화제를 돌리며 고정원의 손을 내려다봤다.
“괜찮대.”
지나치게 심플한 대답이었다. 이후로도 꿰맬 정도는 아니었는지, 신경은 괜찮은 건지 여러 가지로 물어보는데 대꾸들은 하나같이 성의 없이 무심했다.
“…….”
저기압인 고정원을 보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처지는 걸 느꼈다. 사실 기본적인 상태 자체가 ‘그 날’ 이후로 저조해져서, 조금만 방심하면 바닥을 파고들게 됐다. 아직 우리 사이에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고, 해결할 방법을 찾은 것도 아니었으니.
“너 카페 알바……,”
고정원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때였다. 고개를 듦과 동시에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손님을 발견한 나는 어서 오세요,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전히 자리를 뜨기 전, 이따 얘기하자고 작게 속삭이고 나서 카운터로 잽싸게 되돌아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정돈 아니었지만 꾸준히 손님이 들어와 고정원과 따로 얘기를 할 만한 짬은 주어지지 않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던 걸까. 궁금해서 문자로 물어보려다가 중요한 얘기라면 끝나고 하는 게 낫겠지 싶어 참았다.
이따금, 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시선이 마주쳤다. 고정원은 랩탑을 사이에 두고 나를 관찰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한테 눈을 못 떼는 게 부담스러워서 결국 청소하는 척 다가가 그만 좀 쳐다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뒤로는 한숨 소리가 간간이 터져 나왔고, 눈은 아주 가끔만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교대 시간이 거의 다가왔을 무렵에는 나름대로 과제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솔직히 신경이 쏠려 있는 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나도 일하면서 고정원이 서늘하게 구는 이유를 추측하느라 줄곧 산만했다. 설마 점장님이랑 딱 붙어서 귓속말한 것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일순 들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간 거 같아서……. 여하튼 업무에 집중이 안 돼서 자잘한 실수를 여러 번 저질렀다.
교대 시간이 다가와 뒷정리를 하던 중이었다. 가까이에 두었던 휴대폰이 지잉, 울렸다.
[뭐해??]
하고 말을 걸어온 건 김강우였다. ‘알바중’ 하고 칼답장을 보내 주자 빠른 속도로 대화창이 갱신됐다.
[카페?]
[언제끝남?]
“…….”
묻는 의도를 모르겠어서 망설이다 ‘한 10분 뒤면 끝나는데 왜?’ 하고 답장을 보냈다. 만나자는 거면 거절해야지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묵묵부답이 이어졌다. 읽음 표시가 돼 있는데도.
뭐야.
뜬금없이 나타났다 사라진 게 황당해서 뚱하게 화면을 쳐다보다가 종료시켰다. 그리고 교대하기 전에 해야 할 몇 가지의 남은 정리 업무에 돌입했다.
포터 필터를 씻고 있는데 유리문에 달린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와 기계적으로 목청을 높였다.
“어서 오세요.”
“그래 형님 오셨다.”
응?
힘껏 고개를 쳐들자 실실 웃는 김강우가 있어서 벙찌고 말았다.
“야 너 왜 여기…….”
나 혼자였다면 별 상관없었겠지만 고정원이랑 있어서 곤란했다. 김강우 얘는 나랑 고정원이 대판 싸운 줄로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또 붙어 있는 걸 보면 난리를 칠 것 같기도 하고. 거기에다 학교에서 같이 숨어서 도망 다녔던 공범이다 보니 고정원 앞에서 하면 안 될 말을 해 버릴 우려도 있었다.
“오랜만에 오네 여기.”
“잠깐, 나와 봐.”
두리번거리는 김강우가 고정원을 발견하기 전에 가게 밖으로 끌고나갔다.
“아 뭐야, 왜 이래.”
구석으로 밀어 넣고 잡아당겼던 팔을 그제야 놔주었다.
“아니…… 나 계속 안에만 있었더니 답답해서……. 근데 여기 웬일이야?”
불안하게 안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유리창 너머로 고정원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양준영 자취 시작한 거 알지? 오늘 걔네 집에서 마시려고. 가서 놀자.”
“아……, 난 오늘 피곤해서 그냥 집에서 쉬고 싶은데.”
“치사하게 굴래? 내가 너 놀아 주느라 강의 연달아 짼 거 까먹었냐?”
내가 거절 의사를 표시하자 빈정이 상한 티를 팍 냈다. 나도 가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김강우가 나랑 전처럼 사이를 회복하고 싶어 하는 속내는 눈치챘고 어느 정도는 응해 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미안.”
강력한 권유가 이어져도 여전히 내가 돌아설 기미가 없다는 걸 확인한 김강우는 노선을 바꿔서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아, 야아. 술 마시면 피곤한 것도 가실 텐데? 양준영이 집에서 돔페리뇽인가 뭔가 쌔벼 왔다는데 맛은 봐야지.”
내 허리통을 끌어안고 징그럽게 몸을 비비적대기까지 했다. ‘아 징그럽게 이래.’ 하며 어깨를 밀어내는데 순간 눈이 크게 뜨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고정원이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게 시야에 들어온 까닭이었다.
딸랑, 하는 유리문에 달린 자그마한 종소리가 난폭하게 들리긴 처음이었다. 문이 열리는 건 순식간이었고 내게 달라붙어 있던 김강우가 거칠게 떨어져 나간 것도 눈 깜짝할 사이였다.
“……강우구나.”
얼굴을 확인한 고정원의 입에서 무미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김강우의 얼굴이 단박에 구겨졌다. 뭐야 너. 당황해하며 붙잡힌 팔을 휘둘러 뿌리치려 했으나 고정원의 손이 꿈쩍도 않는 바람에 더욱 험상궂게 변했다. 나는 중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싸움으로 번질까 두려워 고정원을 흔들어 말렸다.
“야 왜 그래…….”
고정원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
추궁의 기색이 묻어나는 표정을 보고 그만 말문이 막혔다.
김강우랑 가까이 지내는 걸 그렇게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평소보다 감정의 폭이 격해 보였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눈만 껌뻑이고 있는 사이 고정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김강우가 붙잡혔던 팔을 불쾌한 기색으로 털며 내게 말했다.
“뭐야. 둘이 화해했냐?”
“아니…… 어…….”
곤란했다. 김강우가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 봐 조마조마해서 제대로 된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인휘가 나랑 싸웠다 그래?”
고정원의 한마디에 속으로 급박한 숨을 들이켰다. 어제 하루 종일 피한 게 의도적이었다는 걸 고정원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테지만 남의 입을 통해서 듣고 확실시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아니라고 끼어들려 했지만 김강우의 말이 한 발 빨랐다.
“한쪽에서 쌩까고 피하면 그게 싸운 거지 아니냐?”
“…….”
“근데 어제 너 진짜 살벌하게 찾더라. 옷까지 차려입고 그러니까 조폭 같아서 나까지 개 쫄았네. 얘 뭐 잘못했냐? 딴 애들도 조인휘가 돈 떼 간 거 아니냐고 졸라 수군댔는데.”
기어이 셋 사이에 싸한 침묵이 흘렀다.
식은땀이라도 날 거 같았다. 어떡하지. 유니폼 앞치마를 만지작대던 나는 어렵사리 수습에 나섰다.
“나 교대할 시간이라 자리 못 비워서…… 저기 김강우, 나 오늘은 진짜 힘들 거 같아. 담에 보자 미안.”
이쯤 되면 김강우도 분위기를 보고 물러날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들어가서 뒷정리를 마저 하고 다음 타임 사람과 교대를 마치고 나왔을 때도 김강우는 카페 앞에서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야, 고정원 너도 가자. 양준영네 갈 건데.”
김강우가 먼저 고정원에게 말을 걸다니 의외였다. 내가 고정원과 화해한 걸 알면 다시 전처럼 좀스럽게 굴거나 뭐냐고 배신당한 것처럼 난리칠 줄 알았는데. 단순히 나랑 왜 싸웠는지 궁금해서 캐묻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고정원은 묵묵부답이었다. 가만히 서서, 예의 그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괜히 보는 사람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잠깐만 갔다 올래?”
나는 조심스럽게 고정원에게 제안했다. 결국 학교에서 봐 놓고도 피한 게 까발려지게 됐으니 둘이 남겨지게 됐을 때의 무거운 공기가 예상돼서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날에 대한 추궁이 시작되면 탓하지 않고 넘어갔던 일들, 내 연락 때문에 할아버지의 발인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거라든가 잃어버린 반지에 대해서까지 화가 불거질 거 같아 두려웠다.
“가고 싶어?”
고정원이 내게 물었다. 나는 눈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웅얼거렸다.
“어…… 그냥, 양준영도 자취한다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작게 말해서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김강우가 끼어들었다.
“뭐야, 둘이 뭐 사귀냐? 조인휘 너 얘한테 다 허락받고 다녀? 무슨 구속당하는 여친도 아니고.”
날 서게 반응할 필요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두루뭉술 넘어가면 되는 걸,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정색해 버렸다.
“미친 소리 하지 마. 얘랑 나랑 왜 사귀어.”
“…….”
김강우는 농담인데 뭘 진지 빨고 그러냐고 웃으며 넘겼지만 나는 말실수를 했다는 걸 인지했기 때문에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냥 ‘뭐래’ 하고만 넘겨도 될 일을, 미친 소리라느니 얘랑 나랑 왜 사귀냐느니 굳이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여서 부정했으니. 되새겨 볼수록 언짢을 어휘 선택이었다.
옆에 있는 고정원의 발치를 곁눈질하며 그냥 안 가겠다고 해야 하나 어째야 하나 고민으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던 와중,
“뭐 더 안 사가도 돼?”
하는 고정원의 말이 들려왔다.
“술이랑 안주는 많을수록 좋지 않겠냐?”
김강우는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가자며 들떠서 떠들어 댔다. 말하는 폼을 보아하니 자기 돈은 하나도 안 내고 다 고정원이 사게 할 기세였다. 고정원은 무표정했고 나는 조금 울적해졌다.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김강우가 앞서가는 방향을 따라 발길을 옮길 뿐이었다.
양준영이 자취하는 곳은 학교에서 버스로 두 정거장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투룸에다가 전체적으로 꽤나 넓어서, 고만고만한 자취방을 생각하고 있던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고 보니 직장에 다니는 친척 형이랑 같이 사는 거라고 했다. 원래 동거인이 있었는데 나가게 되고 대신 학교가 가까운 양준영이 들어오게 된 사정이라고. 조용하고 깨끗하게 쓰는 조건으로 들어오게 됐으니 이렇게 술판 벌이는 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우리에게 못 박았다.
“정아랑 유나 누나도 지금 온대.”
막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맥주 캔을 따던 나는 ‘유나’라는 이름이 들려온 순간 손이 굳었다. 강유나 선배가 여길 왜? 생각했다가, 곧 양준영이랑 그 선배가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게 생각났다.
“한정아도 와? 역시. 뭐라도 만들려고 안달이구만 이 새끼.”
“아 그런 거 아니라고.”
양준영이 한정아를 마음에 들어 해서 학기 초부터 주변을 맴돈 건 다들 공공연히 알고 있었다.
“지금 얘 완전 들떴잖아 한정아 남친이랑 헤어져서. 아, 강유나 선배도 방학 때 깨졌다는데?”
“…….”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에 미간이 팍 구겨졌다. 나는 맥주를 홀짝이며 내 옆에 바짝 붙어 있는 고정원을 쳐다보았다. 바로 눈이 마주쳤고, 또 바로 내 쪽에서 눈을 피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방이 좁긴 해도 다들 널찍하게 앉아 있는 것에 비해 고정원과 내 거리만이 유독 밀착돼 있었는데, 갑자기 닿아 있는 어깨와 무릎, 발끝 같은 것들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고 내려간 양준영이 곧 한정아와 이서현, 강유나 선배를 데리고 올라왔다. 크기에 비해 넘치는 인원으로 내부는 순식간에 바글바글해졌다.
“고정원도 있었네?”
“어, 정원아!”
여자애들이 고정원을 보고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특히 강유나 선배는 고정원 옆에 앉아 있던 김강우 사이로 대놓고 끼어들어 옆자리를 차지하기까지 했다. 나는 좁은 공간에 끼어든 강유나 선배의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얼결에 엉덩이를 들어 옆으로 옮겼다. 고정원도 함께 옮겨 오면서 포즈가 좀 이상해졌는데, 겨드랑이 사이에 내 어깨를 끼우고 끌어안다시피 한, 밀착을 넘어서서 아예 겹친 자세가 돼 버렸다.
“…….”
불편해서 몸을 한껏 움츠리자 고정원이 목소리를 낮게 하고 말했다.
“좀 좁네. 괜찮아?”
엉덩이에 손이 닿았다. 닿은 정도가 아니라 한쪽을 가볍게 쥐기까지 했다. 뭐하는 건가 싶었다.
“……어.”
어색하게 대답했다.
“편하게 앉아.”
둔부에서 티셔츠 속으로 들어온 손이 안심시키듯 허리 언저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나갔다. 아무리 뒤에 벽밖에 없고 안 보이는 상황이라지만 당황스러워서 훅 열이 올랐다.
“고정원 너 왜 내 연락 씹어.”
강유나 선배의 크지 않은 목소리가, 소란스런 와중에 귓속으로 선명히 들려왔다. 나는 힐끔 둘 사이의 거리를 곁눈으로 가늠했다. 어깨나 무릎이 닿진 않았는지 소심하게 체크하는 나 자신이 음침하단 생각이 들어서 금방 시선을 떨구었다.
“……연애하느라 바빠서요.”
고정원의 한마디에 갑자기 일동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렸다. 다들 각자 떠들어 대느라 바쁜 줄 알았는데 고정원의 말엔 또 다른 촉각을 곤두세워 두기라도 했는지 리액션들이 빨랐다.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너 여친 대체 누구야? 우리 학교야?”
흩어져 있던 화제가 고정원의 여친으로 통일됐다. 무슨 과인지, 몇 살인지, 사진 좀 보여 달라는 요청에서부터 어떻게 만나서 사귀게 된 건지까지 자세하게들 물어 댔다.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화살이 나한테 겨눠진 것처럼 주눅이 들어서 어물쩍 술만 마셔 댔다.
우회적인 대답으로 교묘하면서도 능숙하게 취조를 빠져나간 고정원이 귀엣말을 속삭여 왔다. 그만 마셔. 다정한 명령을 무시할 수가 없어 벌써 세 캔째인 맥주를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여친 예뻐?”
강유나 선배가 질문했다.
“많이 예쁘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많이 예쁘다’고 하는 말에 그만 쿨럭, 기침이 터졌다. 입안의 술을 다 삼켜 내고 나서 뒤늦게 걸린 사레에 거친 기침을 뱉어 내니 커다란 손이 등허리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가까이 하는 고정원을 밀어냈다. 이럴수록 당황해서 더 기침이 심해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둘만 있을 때처럼 하는 행동들 때문에 간이 수시로 떨렸다.
겨우 진정시키고 안주를 집어 드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서현이 물어 왔다.
“인휘야 넌 아직 여친 없지?”
“어? 어어.”
불과 얼마 전까지도 없다고 했으니 이제 와서 생겼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있다고 하면 김강우랑 최재운이 누구냐고 꼬치꼬치 심문하다 못해 질리도록 괴롭힐 게 분명했다. 고정원은 최소한 내가 누군가와 연애 중이라는 걸 티내기 원하는 눈치였지만…….
“조인휘 얘는 연애 절대 안 한댔어. 구속 극혐이라고.”
“우리 인희 구속당하는 거 싫어하는 상남자여.”
옆에서 거드는 말들이 달갑지 않았다. 아삭아삭, 과자를 입안에 넣어 씹어도 맛이 안 느껴졌다. 그냥 아무도 안 사귀고 있다고만 말할 걸. 이렇게 고정원 귀에 고스란히 들어갈 줄 알았다면 연애는 절대 안 할 거라느니 구속 싫다느니 하는 헛소리는 안 했을 것이다.
버석한 과자들을 술도 마시지 않고 욱여넣느라 목구멍이 깔깔해져 올 무렵이었다.
“구속이 싫어?”
하는 고정원의 물음이 붕 뜬 것처럼 단독적으로 귀를 파고들었다.
“어……?”
“왜?”
딱 붙은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우물거리던 입을 멈추고 덩어리진 과자를 꿀꺽 삼켜 냈다.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몰래 사귀는 중에 어쩔 수 없이 둘러댄 말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꼬투리 잡는 의도가 뭔지, 그것부터 알 수 없으니 대답의 방향을 잡기도 어려웠다.
끈질긴 눈길로 주시해 오던 고정원이 내가 온전한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덧붙였다.
“애초에 구속당할 행동을 안 하면 되지 않나.”
“…….”
오, 연애관 토론인가요? 하며 누군가 끼어들었다. 시선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나는 고개를 홱 돌리며 다시금 술을 집어 들었다.
“근데 너희 둘이 진짜 왜 싸웠었냐?”
한숨 돌리기도 전에 김강우가 꺼낸 말로 인해 화제의 흐름이 재차 이쪽으로 돌아왔다. 둘이 싸웠었어? 그러고 보니 어제 고정원 너 왜 그렇게 조인휘 찾아다녔던 거야? 등등, 다들 한마디씩 거드느라 왁자지껄해졌다.
“우리가 왜 싸웠더라?”
여유롭게 술을 한 모금 넘긴 고정원이 내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변명하는 역할을 떠넘기는 듯도 하고, 쓸데없이 의뭉스럽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흘려서 다른 애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한 태도이기도 했다.
“……내가, 얘 돈 빌렸는데 안 갚았거든.”
그게 진짜였냐고 경악하며 다들 자지러지게 웃었다. 안 믿는 눈치가 반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강 유쾌한 분위기로 넘길 수 있었다.
술이 들어갈수록 연애 이야기가 한층 무르익어 갔다. 모두들 양준영과 한정아를 엮어 주려고 이리저리 포석을 깔았고, 뻔한 진실게임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나는 언제쯤 빠지면 되나 시기를 헤아리고 있었다. 고정원의 옆에 강유나 선배가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 신경이 쓰여서 솔직히 오래 있고 싶지가 않았다.
다들 술기운도 그렇지만 커플을 탄생시킬 기대로 흥분해 있는 게 전해져 왔다. 너무 노골적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양준영이 한정아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여기저기서 티 내고 있었는데, 한정아도 싫지는 않은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가려고 했다가도 여기서 빠지면 분위기를 망칠 것 같아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몇 시간째 잠자코 눌러앉게 되었다. 그리고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나니 긴장이 풀려 느지막이 술기운이 도는 참이었다. 고정원과 닿아 있는 몸은 열이 올라 흐물했고 고개가 자꾸 기우뚱했는데 어느샌가 단단한 어깨에 기대어 축 늘어져 있었다. 고정원은 아까부터 등 뒤로 보이지 않게끔 내 손을 붙잡고 느른하게 주물러 댔다.
“여기서 사귀고 싶은 사람 있어요?”
으레 나오는 흔한 질문이었는데 멍한 귓가에 또렷이 들려왔던 건 질문이 존댓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을 받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있어.”
하는 대답에 몽롱하던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오오, 하는 야릇한 반응들이 들려왔고 나는 묵직하게 쿵, 뛰는 심장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
아니겠지, 생각하려고 해도 그게 아니었다. 방금 강유나 선배가 말한 ‘사귀고 싶은 사람’이 고정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고정원 외에는 짐작할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강유나 선배와 그나마 가까운 애들이라고 하면 두 명밖에 없는데 그중 하나는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하는 양준영이고, 남은 건 고정원뿐이었다.
나는 고정원에게 붙들린 손을 빼냈다. 하지만 빼내자마자 다시 붙들려서 보다 강한 힘으로 쥐어졌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닿고 싶지 않고 만져지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때조차 억지로 부대껴 오려는 고정원에게 짜증도 나고 반항심이 든 나는 손톱을 세워 살집을 꼬집었다. 힘으로는 이기지 못하니 나름 머리를 쓴 편법이었다. 제법 아팠을 텐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고정원은 괴물 같은 힘으로 내 손을 옴짝달싹 못하게 가두고 손가락마다 깍지를 꼈다. 아파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나 화장실.”
비굴하게 속삭이자, 그제야 고정원이 구속하던 손깍지를 놓아주었다. 얼얼하게 울리는 손마디를 주무르며 일어선 나는 술과 술안주, 사람들로 빼곡한 방안을 조심조심 벗어났다.
주방으로 나온 것만으로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가셔 시원했다. 뜨거워진 눈가를 손바닥으로 한 번 비비고 나서 문 옆에 있는 불을 탁, 켰다. 화장실 문을 열어젖힌 순간 이상하리만치 문이 세게 열린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설마 등 뒤로 고정원이 따라 들어왔기 때문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탁.
문이 닫히자 눈앞에는 거대하게 다가선 고정원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왜…….”
어찌나 놀랐는지 웅얼거리는 내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와하하하하……, 문밖에서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면서 뒷걸음질 쳤다. 눈앞이 새카매지면서, 더운 살덩이가 지그시 내 입술을 눌러 왔다. 조심스럽게 겹쳤다 떼는 행위가 이상하게 비현실적이었다.
미쳤어……!
소스라치며 달라붙은 몸을 떼어냈지만 구렁이처럼 허리를 감싸 오는 팔에 잡아당겨지며 다시 한 번 원치 않게 입술이 맞붙었다. 격렬하게 몸부림을 치다가, 선반을 건드리면서 뜯지 않은 칫솔 상자가 떨어졌다. 여기서 몸싸움이라도 하면 소리가 새어 나가리란 예상과 함께 흥분한 고정원을 말릴 수 없겠다고 판단한 나는 그때부터 반항을 멈추었다. 세면대의 물을 틀어 끈적한 소리들을 덮었고 만족할 때까지 입술을 벌려 주었다.
수 분간의 키스가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입술이 떨어지며 너저분한 숨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턱과 입가로 샌 침을 혀끝으로 쓸어 올려 주는 고정원의 눈에서는 다양한 감정들이 읽혔다. 초조함과 불안함. 그리고 다스리지 못한 흉포한 발정 같은 게.
……차마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
철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눈이 크게 떠지며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 누구 있나’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다음엔 똑똑,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잇따랐다.
심장이 무섭게 곤두박질쳤다.
“……어.”
하고 흔들리는 말문을 떼려는데 두터운 목소리가 겹쳐졌다.
“미안, 인휘가…… 지금 토하고 있어. 문 좀 닫아 달래서.”
말을 끝낸 고정원은 변기의 레버를 내렸다.
“헐. 어, 괜찮으니까 시원하게 해.”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자 긴장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면대의 물을 끈 고정원이 나를 일으켜 주려 했으나 울컥한 감정이 뻗친 나는 그 손길을 뿌리치고 대뜸 문을 열었다. 애들이 모여 떠들고 있는 방을 지나쳐, 현관으로 갔다. 어디로든 혼자가 될 수 있는 공간으로 가고 싶었다.
계단을 정신없이 내려와 바깥으로 나왔다. 서늘한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차도록 마셨다 내뱉었다. 울렁이는 가슴과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하며 머리를 짚는데 등 뒤로 철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정원이 뒤따라 왔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란 나는 무작정 옆집의 계단 밑으로 몸을 숨겼다.
“…….”
탁탁, 고작 두 걸음 만에 계단을 내려온 고정원이 골목의 양쪽을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 빠른 걸음으로 내려온 누군가가 고정원의 옆으로 가깝게 다가섰다.
웨이브진 머리카락과 길쭉한 실루엣으로 강유나 선배라는 걸 알고 가슴이 지끈 조여들었다.
“어디 가?”
묻는 말에 대답 하지 않은 고정원이 한쪽 골목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완연한 무시에 나도 놀라고, 강유나 선배도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자꾸 이렇게 무시할래?”
불쾌함이 서린 부름에 고정원이 돌아섰고, 갔던 걸음만큼 되돌아왔다.
“……선배.”
부르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한 투에 내가 그 앞에 선 것처럼 다리가 바짝 긴장했다.
“앞으로도 받아 드릴 생각 없으니까 연락이건 뭐건 안 하시는 게 좋아요.”
그건 단칼 같다는 표현도 부족했다. 사람을 짓밟고 무시한다고 보는 게 차라리 적합한 차가운 대우였다. 단순히 말만 받아 적는다면 느껴지지 않을, 뉘앙스에 속속들이 녹아 있는 무시였다.
“……너도 그때 나랑 잘 맞는다고 하지 않았어? 가끔 부담 없이 만나서 자는 것도…….”
“무슨 소리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강유나 선배의 말을 끊은 고정원은 그대로 돌아서서 가 버렸다. 선배는 그 자리에 서서 벗어나질 못하다가 ‘하’ 하는 짧은 탄식 후에 집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계속 그 비좁은 계단 사이에 서 있다가 비틀거리며 빠져나왔다.
밤하늘에 뜬 달에는 이제 보니 달무리가 끼어 있었다.
잠시간 그것을 올려다보던 나는 어느 기점으로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휴대폰이랑 지갑이랑 전부 양준영네 집에 두고 왔다는 걸 알았지만 상관없었다. 앞으로, 앞으로, 그냥 길이 뚫려 있는 대로 걸음을 더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닿는 대로 걸었는데 방향이 집 쪽이었는지 금세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턴 그냥 집을 향해 걸었다.
상당히 느릿하게 걸었다. 아직은 더 걸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생각보다 집에 빨리 도착하고 말았다. 어차피 열쇠가 없으니 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없었다. 휴대폰도 없고 돈도 없어서 다른 곳에 갈 수도 없었고.
낡은 빌라의 입구에 걸터앉아 고개를 파묻었다. 내 집임에도 불구하고 고정원이 열쇠를 가져와 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게 된 상황이 문득 우스웠다. 언제 오려나. 언젠간 오겠지. 빨리 왔으면 싶으면서도 얼굴은 보고 싶지 않은, 기묘한 양가감정을 느끼며 지루한 발장난을 쳤다.
그리고 짧게 졸았던 거 같다.
몸이 붕 뜨는 걸 느낀 순간, 반짝 눈이 뜨였다.
안정적으로 들쳐 업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닿은 몸의 맞물린 굴곡이나 단단한 감촉이 익숙했다. 금방 현관문이 열렸고, 곧 집안으로 들어섰다. 업힌 그대로 가만히 있자 저절로 신발이 벗겨졌다.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고정원은 나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나는 단 한 번도 눈을 뜬 적 없었던 것처럼 가만히 자는 척을 했다. 고정원이 내려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길에 일부러 뒤척이며 얼굴을 옆으로 파묻어 버렸다.
“…….”
얼마간 그대로 앉아 있던 고정원이 몸을 일으켰다.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나는 벽을 보고 누워서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로 옷을 벗고 있음을 알았다. 잠시 후 문이 살짝 닫혔고, 수압이 약한 물소리가 들려와 샤워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짧은 샤워가 끝난 뒤. 고정원은 자고 있는 나 때문인지 드라이어를 켜는 일 없이 수건으로만 머리를 말린 채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물기가 느껴져서 혹시 찬물로 씻은 건가 했다. 조심스럽게 몸의 움직임을 제한하던 고정원은 내 배 위로 팔을 둘러 왔다. 또한 굉장히 신중한 몸짓이었지만 확고하게 힘을 더하며 끝내 나를 조여 왔다.
별안간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벌떡 일어난 나는 숨까지 헐떡이고 있었다.
“……미안, 깨웠어?”
불안하게 흔들리던 고정원의 눈빛이 생각났다. 끊임없이 갈구하려 들던 그 조급함이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러자 오랫동안 입속에 품고 있던 말이 툭, 하고 떨어져 나왔다.
“강유나 선배랑 잤어?”
완전히 분리된 말.
그 말이 우리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나는 제발 고정원이 부정하지 않기를 바랐다. 사실을 알게 되는 것보다 이제는 신뢰가 바닥을 치는 게 더 무서웠다.
등 뒤에서부터 대답이 들려온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너 좋아하기도 전에 일이야. 아무 생각도 없었고.”
가슴 한편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밤처럼 짙은 침묵이 어둡게 우리 사이에 깔려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벽만 보고 앉아 있었다.
그렇구나.
그러면…….
그런 건가.
그렇게 되면…….
그것도?
무수한 어림짐작들이 오가며 지난 추억들이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의미와 방향으로 새롭게 끼워 맞춰지던 중이었다.
“……조인휘!”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갤 들었다.
아. 그제야 흐릿하던 귓가가 선명해지면서 아까부터 계속해서 고정원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
여기 좀 봐. 하고 낮게 삭이는 듯한 부탁의 어조가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어두운 방안의 벽 한구석을 바라보면서 하찮은 고민에 빠졌다. 시키는 대로 돌아봐야 할지, 아니면 고집스럽게 한 방향을 지켜야 할지. 솔직하게는 고정원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이상하리만치 겁이 나서 그저 벽만 마주 보고 있어도 피로함을 느꼈다.
그 상태로 얼마간 더 어물쩍거린 끝에 기다림을 참지 못한 고정원이 내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절로 눈시울에 핏발이 설 만큼, 아주 억센 힘이었다.
“알았……어. 놔, 아프니까.”
나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소극적으로 말했다. 조금 나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기세등등한 악력으로 내 양쪽 어깨를 손아귀에 가둔 고정원은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했다.
“너 좋아하기도 전 일이야. 의미도 뭣도 없는 사고 같은.”
“……응.”
만에 하나 사귀던 중에 벌어진 일일까 봐 못내 우려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생겨나기 전에 스치듯 지나간 일이라는 건 진심으로 안도가 되는 부분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는 듯한 실망감과 불쾌한 위화감은 여전히 떨쳐지질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나는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개총 날 골목에서, 무리들이 떠들어 대던 고정원과 내가 알고 있는 고정원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키스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곤란한 듯 말하던 고정원. 그리고 뒷말이 안 나오도록 능숙하게 상대를 골라서 하룻밤을 자고 다니는 고정원. 너무 극과 극으로 달라서 내가 알고 있던 고정원이 가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비참해졌다.
믿고 싶은데.
소문 하나가 사실이었다고 확인된 순간 의심의 골은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만큼 깊어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어딘가 재촉 같은 느낌으로 고정원은 나를 흔들었다. 내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해서 불안한 것처럼.
그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힘없이 입술을 벌렸다.
“그럼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던 거야……?”
뭐? 하고 반문하는 고정원의 시선이 짧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첫 경험 이후로 한 번도 못 해봤다느니…… 여자랑 진도 같은 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느니 했던 거 다…….”
돌이켜 보면 때때로 군데군데 무언가가 빠진 것처럼 허술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조화 되지 않는, 어딘가 엉성하고 어설픈 ‘빈틈’이 우리의 시작에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건…….”
말문을 떼려는 고정원을 무시하고 허탈하게 덧붙였다.
“그러게 좀만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거였는데…… 왜 이제야 알았냐 난…….”
불투명하게 시야를 가리던 얇은 막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지난 기억의 허점들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랑 잘하고 싶어서, 남자한테 배우는 거…… 그것도 실제로 하기까지 하면서……. 완전 말도 안 되는데…….”
한심하기 그지없는 깨달음이었다.
“그것도 너 같은 애가…… 나처럼…….”
하…….
기가 차서인지 아니면 숨이 막혀서인지 모를 탄식을 뱉어 놓고 나니 얼굴 주변의 혈관으로 피가 빠듯하게 몰려들었다. 그저 우리 사이의 우스운 흑역사쯤으로 생각했던 지난 일들이 하나하나 지독한 조롱과 수치로 나를 들쑤시고 있었다.
“인휘야.”
고작 이름을 부르는데도 초조함이 묻어나 있다고 느끼는 건 내가 과민해진 탓일까.
“그 선배랑은 취해서 한 실수였어. 잊고, 다시 떠올린 적도 없어. 생각도 안 나는 걸 어떻게 얘기하겠어. 그래서 말 안 한 거뿐이야.”
변명의 말들은 힘없이 귓가를 스치기만 했다. 나는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을 땅에 박을 것처럼 푹 수그리고 성의 없이 대꾸했다.
“됐어 이제 그런 건…….”
“그러면 오해도 거기까지 해.”
“……오해?”
웃음이 소리 없이 났다.
“오해라기엔, 말이 안 되잖아 상식적으로. 주변에 말하면 다 미쳤다고 할 걸? 남자끼리 그렇게까지 하면서 배우고, 가르쳐 주고…….”
말하면서 자꾸만 속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푹, 푹, 몸 전체가 움푹한 아래로 끊임없이 빠지고 또 빠지는 듯한 기묘한 탈력감이었다.
고정원은 내 팔을 꽉 움키고 옥죄어 왔다.
“오해 맞아. 난 진심이었어.”
“……너도 나 여자 경험 없는 거 알고 있잖아.”
“……몰랐어.”
나는 고개를 들어 고정원과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진심으로 말해 봐. 진짜로, 진짜로 몰랐어?”
고정원에 대해서 잘 모르던 시절이라면 무슨 말을 하든 표면 그대로 받아들였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함께한 시간이 쌓이게 되면서 눈만 봐도 뭘 느끼고 뭘 원하는지 알게 됐다. 가장 밑바닥의 은밀한 부분까지 터놓고 공유한 사이쯤 되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해의 폭과 깊이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안 믿길 거야 너.”
고정원이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그 말 그대로, 나는 무슨 말을 들어도 이미 흔들리지 않는 지점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우리 처음 영화 보고, 모텔 갔던 날.”
툭, 뱉어진 문장 하나로 그날 일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데이트 코치를 명목으로 영화관에서 만나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전시회를 보러 가던 길에 비를 맞아서 어찌어찌 모텔까지 갔던 순간들이.
그날은 고정원과 나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어떤 중요한 기점이 된 날이었다.
그러니까…….
“술 취해서 내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는 것도…… 거짓말인 거지?”
안 됐다. 거짓말이게 되면.
“비약하는 거 그만 해. 왜 얘기가 거기로 튄지 모르겠다.”
붙들려 있던 어깨가 해방된 건 그 순간이었다. 고정원은 귀찮은 걸 떨쳐 내듯 내 어깨를 밀어내며 고개를 옆으로 비꼈다.
“그만, 머리 식히고 내일 얘기하자.”
“…….”
대놓고 피하는 고정원을 보며 부정적인 확신밖에는 들지 않았다. 이미 확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그때 나는 고정원에게 정말 다른 감정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대뜸 좋아한다는 고백을 했다는 게. 이성에게도 해 본 적 없는 고백을 남자 동기에게 했다니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취해서 미친 짓을 했나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라 실은 꾸며진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니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너……, 가.”
눈가와 코끝이 시큰해져 오는 걸 느끼며 냉정하게 명령했다.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던 고정원은 고개를 되돌리며 나지막하게 되물었다.
“……어디로?”
유치한 걸 알면서도 ‘너희 집’이라고 대꾸하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못 들어가.”
무슨 소린가 싶어서 쳐다보니 고정원의 입가에 처음 보는 비틀린 웃음이 걸렸다.
“발인식 불참한 거, 용납되는 분위기 아니거든. 특별한 이유도 없었으니까.”
나는 날카로운 것에 찔린 것처럼 움츠러들어서 눈을 내리깔았다. 학교에서 상복을 입고 여유 없이 나를 찾아다니던 고정원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대며 가슴을 조여 왔다. 고정원이 할아버지의 발인식에 참석하지 못한 일은 엄밀히 따지자면 내 탓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온전히 내 탓이기도 했다.
잠시간 침묵을 유지하던 고정원은 차에서 잘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손이 뻗어 나갔다.
“여기, 침대에서 자. 난 바닥에서 잘 테니까.”
침대 밑으로 내려가기 위해 엉덩이를 들었지만 길쭉한 손이 어깨를 지그시 눌러와 다시 주저앉았다.
“내가 아래에서 자.”
높낮이 없이 말한 고정원이 매트와 담요로 바닥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나는 침대에 눕지 못하고 멀뚱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
창을 통해 들어온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으로 어두운 방안은 비교적 식별이 뚜렷했다. 나는 바닥에 누워 있는 긴 실루엣에 시선을 주었다. 한쪽 팔을 벤 채 눈을 감고 있는 고정원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언제 눈을 떴는지 동공이 드러나는 깊은 눈매와 마주하게 된 순간 놀라서 침대에 엎드려 버렸다.
그렇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 이어졌다.
초반에만 잠깐 잠들기 위해 뒤척여 가며 노력했다가 결국 그만두고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었다. 음울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생각을 의식적으로 밝게 전환시켰다. 하지만 쉽진 않았다. 눈치 없고 단순하단 말을 종종 듣긴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긍정적이 될 만큼 무신경한 성격도 아닌 모양이었다. 차라리 진짜 바보였으면 속이라도 편할 텐데.
후…….
침대 맡에 놓인 휴대폰을 끌어와 시간을 확인해 보니 새벽이었다. 그것도 동이 트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하는 깊은 새벽. 앞으로 몇 시간 동안 이렇게 잠 못 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암담해진 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휴대폰을 쥔 채로 슬그머니 침대에서 빠져나와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잡음이 나지 않게 조심하며 슬리퍼에 발을 한쪽 구겨 넣었다.
어디 가, 하는 낮은 물음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바람 쐬러 요 앞에. 그냥 자.”
멈칫한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행선지를 알려주었다.
“이 시간에 왜.”
“…….”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고정원이 보내 주지 않고 끈덕지게 이유를 물었다. 왜라니. 할 말이 사라져서 발끝만 미적대고 있었다.
그러한 정적을 깨고 길고 거친 한숨이 들려오자 별안간 위협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가 딱딱히 굳어졌다.
“조인휘 너 정말 사람 환장하게 해.”
한마디 안에 꾹꾹 압축시킨 격렬한 감정이 고스란했다.
“내 입에서 무슨 소리가 듣고 싶어. 미안하다는 말? 전부 사실이라고? 네가 생각하는 게 맞다고? 그래서 뭐. 인정하면 어떻게 되는데. 헤어질 거야? 너 지금 그거 원해서 이래?”
별안간 흥분한 고정원이 나직하게 윽박지르는 말들이 하나씩 가슴에 박혀들었다.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추측하는 것조차 버거워서 할 수 없었다. 고정원이 나를 속였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한계치였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지 아니면 전부 인정하고 솔직하게 터놓길 원하는 건지 나야말로 나한테 따져 묻고 싶었다.
지금은 서러웠다. 자기도 잘못한 주제에 나를 몰아세우는 고정원이 미웠다.
“……거봐. 거짓말…… 맞잖아.”
울먹임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꾸역꾸역 말하자 ‘하…….’ 하는 허탈한 한숨이 들려왔다.
“넌 지금 보이는 게 그거밖에 없지.”
눈앞으로 확 열이 뻗쳤다. 주먹을 움켜쥐고 핏발 선 목울대에서 목청을 키웠다.
“그럼 지금 뭐가 중요한데? 다 거짓말이었다는 거잖아 어쨌든!”
감정의 기복을 따라 말끝의 음량이 높아졌다가 새벽이라는 시간이 상기되면서 힘껏 뻗어나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줄어들었다.
얼굴도 보기 싫어서 계속 앞만 보고 있었는데 팔이 낚아 채이면서 강제로 돌려세워진 것은 그 직후였다.
“내가 너 사랑하는 게 거짓말이야?”
바닥까지 억누른 목소리로, 고정원이 말했다.
“며칠째 잠 한숨도 안 와, 네가 헤어지자고 할까 봐. 이러다 진짜 돌아 버릴 거 같은데…….”
중간에 짧게 자조적인 비웃음이 스쳤다.
“나만 미쳤지. 나만 제정신 아니야 항상. 넌 빠져나갈 생각만 하고 아무것도 아닌 걸로 사람 피를 말려.”
“…….”
울음이 터질 거 같았다. 화내고 으르는 고정원의 눈빛이 너무도 간절해서 마치 내가 모든 사단을 낸 주범이 된 느낌이었다.
다 거짓말이야? 그래? 내가 한 말을 곱씹으며 고정원이 되물었다. 그렇지만 그건 질문이라기 보단 야유에 가까웠다. 차게 식은 웃음을 보인 고정원은 뜻밖에 상의를 벗어젖혔다. 나는 그것을 관망하듯 볼 수밖에 없었다. 곧 육중한 골격과 근육이 드러나게 되자 주위의 공기는 묘한 중압감을 더하며 무거워졌다. 이 시점에서 왜 옷을 벗는지 이해하지 못한 와중에 내게로 뻗어온 손길이 무례하게 티셔츠 속을 침범해 갈랐다.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싫……어!”
몸과 몸이 맞붙게 되면서는 손톱만큼도 밀어낼 수 없었다. 아까까지 나를 몰아세우던 입술은 목 언저리의 살결에 달라붙어 다른 방식으로 나를 괴롭게 했다. 몸부림치자 귓불이 아프게 물려 ‘윽!’ 하는 비명이 터졌다.
눈물이 흘렀고,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뜨거워졌는데 어느 순간 거칠던 손길은 움직임이 멎어 있었고 나는 고정원의 품에 안겨 작게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등을 토닥이는 손과, 허리 부근을 감싸 벗어나지 못하도록 단단히 고정한 손이 서로 상충되는 역할처럼 느껴져 우스웠다. 구속해 놓고 위로라니.
내 얼굴에 맞닿은 고정원의 가슴팍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체온 높은 맨살이 미지근한 눈물로 적셔지며 끈적해졌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나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가슴팍이 오르락거릴 때마다 서로에게 짓눌렸다. 때문에 서로 어떤 호흡으로 숨을 쉬는지가 세세하게 전해져 왔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고정원의 호흡은 느린 것과 별개로 거친 결이 남아 있었다. 아래로는 부푼 중심이 찔러 오고 있었다.
“너 이러는 거 진짜 지쳐.”
불쑥, 꺼낸 말에 맞닿아 있는 가슴팍이 경직되었다. 토닥이던 손길도 일시에 멈춘 걸 느끼며 나는 계속해서 쏟아 냈다.
“맨날 몸으로…… 이렇게 넘어가려 들고……. 억지로 하려 그러고……!”
그동안 휩쓸렸던 걸 생각하니 부끄럽고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힘의 차이로 매번 이렇게 굴복하게 되는 것도 화가 났다. 섹스할 때도 그렇고 일상 중에도 그렇고 고정원이 통제하고 싶어 하는 성향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애정이 넘칠 땐 아무렇지 않다 해도 지금처럼 감정이 틀어지고 싸우는 중에 그 힘을 발휘하려 들면 상처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씩씩대다가 간신히 진정한 나는 나름의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잠깐…… 떨어져 있는 게 나을 거 같다.”
그러자 붙어 있던 거리가 떨어지며 눈이 마주쳤다.
“무슨 뜻이야.”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응시해오던 고정원이 ‘헤어지잔 소리야?’ 하고 성급하게 달려들었다.
“……아냐. 헤어지잔 게 아니라……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나도, 잠시만 떨어져서 머리 정리하고 싶다고.”
나는 횡설수설하면서 심정을 전했다.
“너 정리하는 동안, 난. ……나는 너 기다리면서 피 마르고?”
감당하기 힘든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일주일만.’ 하고 부탁했다.
긴 정적이 사방을 에워싸며 새벽녘의 어둠을 한층 두텁게 했다. 침묵 외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고정원이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티셔츠를 집어든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이틀 안에 해.”
그 이상 기다리게 하면 나도 지칠 거 같다.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흐릿하고 낮은 음역이었다.
옷을 꿰어 입고 차키를 챙긴 고정원이 나를 지나쳤다. 머지않아 철컥 열렸다 닫히는 현관문의 서늘한 금속성이 방안을 울렸고, 멀어져 가는 희미한 발소리를 끝으로 방안에는 완전한 암묵이 찾아들었다.
“…….”
나는 울적함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눈을 감고 돌아다닐 만큼 익숙한 방 안. 거기 앉아서 내가 느낀 감정은 끝도 없이 펼쳐진 도로변에 홀로 남겨진 듯한 쓸쓸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