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연애 중 (7/30)

7. 연애 중

왁자한 소리가 터져 나오는 술집 안이었다. 익숙한 장소, 익숙한 얼굴들, 익숙한 술맛에 유난히 기분이 들뜨는 걸 느꼈다.

“야 이 배신자 새끼야, 어떻게 방학 동안 연락 한 번을 안 하냐?”

앞에 앉은 김강우가 서비스 안주로 나온 강냉이 한 알을 집어던지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아 바빴다니까. 여행도 다니고 알바도 하고…… 아, 또 학원도 다니고.”

찔려서 그런가. 시선이 자꾸만 아래쪽을 배회했다. 이마에 맞고 떨어진 강냉이를 주워 아그작, 씹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학원은 개뿔. 근처에도 안 갔다. 실제로 방학 때 한 일이라곤 그냥 매일같이 고정원이랑 만나서 놀고, 먹고…… 또 같이 자고…….

“씨발 뭔가 수상해. 설마 연애한 건 아니겠지.”

“……뭔 헛소리야.”

막 삼킨 강냉이의 옥수수 껍질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깔깔했다.

“뭔가 분위기가 존나 이상해졌는데.”

“맞아 조인휘 확실히 얼굴도 그렇고 좀 변한 듯.”

옆에서 최재운까지 거들었다. 헛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심장이 덜컥했다. 설마 연애하고 맨날 그 짓만 해 대면 얼굴에 표가 나기라도 하는 건가 싶어서.

“아 뭐래 야, 나 모르냐? 구속당하는 거 싫어서 연애 안 해 절대. 미쳤어? 세상에 여자가 널렸는데 뭐가 아쉬워서. 할 만큼 해서 이젠 질렸다니까?”

너무 열심히 변명하다 보니 침이 튀겼다. 손등으로 입 주변을 닦으며 슬쩍 쳐다보니 김강우를 비롯해 다 같이 수상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큼,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술을 들이켰다. 쓸데없이 오버한 거 같아서 뒤늦게 뻘쭘해졌다.

“누가 알아, 존나 예쁘면 맘 바뀌어서 사귈지? 그리고 여친은 여친대로 두고 놀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이 새끼는 보면 순진한 척하는 건지 진짜 순진한 건지…….”

김강우가 답답하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희는 뭐 했는데. 어디 여행 안 갔어?”

화제를 돌리기 위해 뻔한 질문을 했다.

“난 여친 생김.”

최재운이 대뜸 옆에 앉은 김강우의 얼굴을 가리며 끼어들었다.

“헐 진짜? 우리 과?”

“아니, 여대 다녀. 소개팅함.”

아 나와 븅신아. 자랑하는 최재운을 밀쳐낸 김강우가 혀를 찼다.

“아까도 폰 붙잡고 애기 목소리로 잉잉대는데 진심 죽여 버릴 뻔.”

그리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치는지 몸서리를 쳤다.

“아 맞다! 우리 쟈기한테 도착하면 연락해 주기로 했는데. 까먹을 뻔했네?”

최재운이 어깨를 들썩이며 휴대폰을 집어 드는 옆에서 시기하는 눈초리들이 쏟아졌다.

“호구냐, 뭐 저렇게 잡혀 살어? 결혼한 것도 아니고. 아니 결혼을 했다 쳐도 남자 가오가 있지, 찌질하게.”

“…….”

그러고 보니…….

갑자기 재킷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도착하면 연락하라는 말이 생각난 탓이었다. 슬쩍, 테이블 밑으로 폰을 꺼내 화면을 열었다. 역시나. 짧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마시고 있어?]

다들 어수선한 틈을 타 잽싸게 답장을 입력했다.

[응 마시는 중 ㅋㅋ 한 시간만 놀게 ㅋㅋ 이따 보아]

보내자마자 곧장 아래로 회신이 떴다.

[알았어 조금만 마시고…… 나오기 전에 연락 주고^^]

[응응!]

“조인휘 뭐 해.”

고개를 앞으로 쑥 내민 김강우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어? 아니.”

“저 새끼 진짜 모지리 같지 않냐?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해 무슨. 지금 뭐하고 있다 어디로 이동 중이다 언제 연락 하겠다 이 지랄. 진짜, 무슨 교도관이랑 죄수도 아니고.”

“……어어 그러니까. 내가 그래서…… 연애를 안 한다니까.”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구겨 넣으며 어설프게 동조했다. 너무 익숙한 내용이라 순간 내 얘길 하나 했다.

“조인휘 진짜 너는 나 배신하지 마라.”

“……어. 당연하지.”

못 들은 척하려다 김강우의 시선이 워낙 협박처럼 강렬해서 대답해 버렸다.

“후…… 음. 아 이거 맛있네.”

한숨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딴 소리로 얼버무려 넘겼다. 아…… 여자 많이 만나 본 척도 버거웠는데 이젠 연애 안 하는 척까지 해야 하나. 벌써부터 피곤한 느낌이었다.

“근데 너 왜 이렇게 부리로 쪼듯이 홀짝거려?”

“어……. 이렇게 먹음 더 맛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몇 잔이고 벌컥벌컥 식도로 들이붓고 싶었다. 오랜만에 먹으니까 더 맛있고 시원하고. 근데 약속한 게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딱 한 잔 먹고 한 시간만 있겠다고 하고 놀러 나온 거라, 상대가 못 보는 데 있다 해도 약속은 지키고 싶었다.

남들이 보면 그런 걸 뭐 허락 맡고 그러냐고 경악할 수도 있는데, 이게 내가 간섭당하고 구속당한다거나 하는 건 정말로 아니었다. 단지 내가 자꾸 술 마시고 다음날 완전히 까먹는 일이 자주 있다 보니…… 그것 때문에 실제로 사귀기로 한 사실을 까먹어서 고정원한테 상처 준 적도 있고. 하여튼 여러모로 나를 위해 결정한 일이었다. 아니, 저번에 고정원이 젊은 사람들도 블랙아웃 증상이 계속되면 알콜성 치매 위험이 있다는 기사를 보여 줬는데 진심 무섭긴 하더라.

“야야, 잔 들어 건배 함 해.”

부추김에 이끌려 잔을 들고 짠, 묵직하게 부딪쳤다. 꿀꺽 꿀꺽, 딱 두 모금 시원하게 넘기고 내려놓았다. 아껴서 먹으니 더 맛있게 느껴지는 건지 ‘크으’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야 너희 그거 아냐? 김지인이랑 이형원이랑 사귀었다 깨진 거.”

“진짜로?”

과 애들에 관해 몰랐던 흥미진진한 얘기에 눈이 번쩍 뜨였다.

“몰래 사귀었다 헤어졌는데, 이형원이 바로 다른 과 애랑 만나니까 김지인이 빡쳐서 얘기하고 다닌다는데.”

“대박이네…….”

그 후로도 줄줄이 모르는 얘기들만 쏟아졌다. 그동안 얼마나 단절돼 살았는지 실감이 났다. 듣고 맞장구만 쳐도 시간이 후다닥 갈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어렸을 적 부모님 잠깐 외출하셨을 때 게임하던 것처럼 순간순간이 즐겁고 아까웠다. 고정원이랑 있는 게 물론 재밌고 좋고 하지만 솔직히 이런 게 좀 그립긴 했었다. 맨날 둘만 붙어 있다 보니 뭐 사람들 만날 시간도 없고 개인 시간도 없어서…….

“무슨 진동 소리 들리지 않냐?”

한창 웃고 떠들고 하던 중이었다. 누군가 한 말에 테이블에 앉은 전원의 고개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조인휘 네 거 아니야?’ 하는 소리에 그제야 급하게 재킷 안에 손을 넣었다. 그대로 발신자를 확인하고 나서, 차마 받진 못하고 마음만 부산해져서 주변에 물었다.

“야, 지금 몇 시지?”

“6시 38분.”

뭘 했다고 한 시간 반이나 지나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생각 없이 마시다 보니 어느새 맥주도 두 잔째였다.

“잠깐 나 통화 좀.”

이렇게 전화를 받으러 나가면 좀 수상하게 여길 거란 생각은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게를 빠져나가, 최대한 구석진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인휘야. 아직 마시고 있어?

“응, 좀 늦어졌어. 이제 막 가려던 참!”

-그래? 잘됐다. 데리러 갈게.

“어……? 너 오늘 캐나다에서 온 친구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응, 만났어. 다른 데 가 볼 데가 있다고 해서 생각보다 일찍 헤어지고, 다시 학교로 가는 중이야.

“어…… 학교에 뭐 볼일 남았어?”

-볼일, 너 데리러가는 거?

“안 그래도 되는데 굳이…….”

-사실 벌써 근처에 다 왔어.

“어, 어딘데 지금?”

괜한 불안감에 고개를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길목의 끄트머리에서 걸어오고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인다 인휘.

“…….”

설마 이렇게까지 가까이에 있었을 줄이야. 통화를 종료시키고 어색하게 걸어 나갔다. 고정원은 성큼성큼 뛰듯이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그냥 걷고 있을 뿐인데 주변 사람들이 힐끔 뒤돌아보는 풍경이 이젠 자연스럽게 보였다.

“나 애들한테 인사만 하고 나올게. 기다려.”

“응.”

웃으며 고갤 끄덕인 고정원은 안 그래도 되는데 굳이 내 뒷목을 한 번 쓰다듬었다. 단단하면서 따뜻한 감촉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스쳐 지나간 애정 표현이 평소보다 긴장감 있게 느껴진 건 오늘 했던 거짓말 때문이었다. 아무도 안 사귄다 해 놓고, 바로 문밖에선 쟤네들이 알고 있는 고정원이랑 이러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찔렸다.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서며 복잡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좋기도 한데 괜히 아쉬워서. 오늘은 간만에 집에 혼자 있는 건가 싶어 좀 기대했었다. 집안일이 있거나 특별한 사정이 생겨도, 심지어 왕복 8시간이 넘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을 때도 하루쯤은 건너뛰어서 봐도 되는데 꼭 우리 집으로 오는 고정원이 좋고 고마우면서도 가끔은 부담스럽기도 했다.

* * *

골목길을 나란히 걸으며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거리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안 보는 틈에 고정원은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냄새가 많이 안 났는지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했다.

“많이 안 마셨네?”

“응 한 잔만 마시기로 했으니까…….”

조금만 더 가면 집에 도착하는데. 그새를 못 참고 이렇게 껴안아 대는 게 민망해서 가슴팍을 밀어내며 대꾸했다. 스르륵, 풀린 팔이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고 떨어졌다.

“예쁘다.”

칭찬하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팔다리가 뻣뻣해졌다. 무슨 별말이라고, 귀까지 화끈거렸다. 둘만 있을 때도 ‘예쁘다’는 식의 칭찬은 뭔가 부끄러운데 그것도 밖에서 들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예쁜 건 네가 더 예쁘지.”

“……내가 예쁘다고?”

당황스러워서 그냥 아무 말이나 내뱉은 거였다. 고정원도 그런 말은 생전 처음 듣는다는 듯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어, 얼굴. 예쁘잖아 너.”

누가 봐도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라 우기기밖에는 되지 않았다.

“내가?”

“응.”

“진심이야?”

“어어.”

놀리는 것처럼 귀찮게 되묻던 고정원이 ‘몰랐네’ 하며 어깨에 팔을 둘러 왔다. 그러자 몸과 몸 사이가 바짝 달라붙었다.

“…….”

……어깨동무 정돈 친구들끼리도 하니까. 혼자 변명하듯 생각하며 나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근데 인휘야 안 더워? 내가 사준 옷 벌써 입었네.”

얇은 재킷이긴 해도 날씨가 초여름 수준이라 솔직히 덥긴 더웠다. 그래도 개강 첫날부터 개시하고 싶어서 무리를 했다. 스쳐 지나가듯 예쁘다고 말한 걸 기억하고 생일선물로 사 준 거라 더 고맙고 마음에 들었다.

“그냥. 괜찮아.”

“인휘는…… 더위를 잘 안 타는 건가.”

고정원이 내 옆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제도, 땀 거의 안 흘리던데.”

‘어제’라고 하는 소리에 괜히 등줄기가 홧홧해졌다. 어제도 어김없이 우리는 섹스를 했으니까. 일부러 음담패설을 하는 건가 싶어서 슬쩍 올려다보니 고정원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그 덤덤함을 보니 내가 지레짐작한 건가 싶어 절로 얼굴이 수그러들었다. 이런 식으로 요즘엔 자꾸 뭘 들어도, 뭘 봐도 야한 쪽으로만 생각이 귀결되는 게 문제였다. 건전한 생각을 해야 하는데 매일같이 몸을 맞대는 게 일상이다 보니 아무래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제만 해도, 오랜만에 모텔에 가서인지 고정원이 평소보다 흥분하는 바람에 전에 해 보지 않았던 새로운 체위를 두 가지나 도전했다. 공중에 매달리듯 달라붙어서도 하고, 바닥에서 양다리를 꼿꼿이 세운 채 엎드려서도 했는데…….

“아, 먹을 것 좀 사 갈까?”

“어, 어?”

생각에 잠겨 있다 퍼뜩 놀라 눈을 들었다. 자리에서 멈춰 선 고정원이 한번 더 물었다.

“간식 좀 사가는 거 어때?”

“아…….”

음란하게 펼쳐지는 회상을 단절시킨 나는 후끈한 뒷목을 쓸며 대답했다.

“응. 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

“나는 괜찮은데……, 네가 계속 살이 빠지는 거 같아서.”

“…….”

“왜 자꾸 빠지지.”

걱정스러운 눈을 하며 고정원이 내 어깨를 주물렀다. 아니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이냐고, 이유가 뭐일 것 같으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허구한 날 그렇게 한계까지 체력을 몰아붙이는데 살이 안 빠지는 게 더 이상한 거였다.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거 아닐까.”

에둘러서 답안을 알려 주자 고정원은 그래도 못 알아듣고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얼굴을 했다.

“요새 뭐 해?”

그 이상 대답을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곧 ‘아.’ 하는 짧은 감탄사에 이어 마주한 얼굴에 진한 웃음이 배어났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고정원은 능글능글 야한 눈으로 웃으며 내 귓불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내 잘못이구나.”

“어……. 이제 알았냐.”

더운 손이 귓불에서 내려와 목덜미를 감쌌다. 문지르는 움직임이 녹녹했다. 기분이 좋아서 제지하지 않고 있다가 팟,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옷의 네크라인으로 얕게 손가락이 들어와서이기도 하지만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 한 명을 발견한 탓이었다. 밖에선 과도하게 밀착하거나 스킨십을 하는 걸 늘 경계하는 편인데 지금은 왜 이렇게 긴장이 풀려 있었는지 모르겠다.

“…….”

길목에 나타난 사람이 지나쳐 가기까지 나는 굳어져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금 뒤, 다시 둘만 남게 되고 나서도 어딘가 겸연쩍은 거리감은 해제되기 어려웠다.

데면데면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고정원 쪽에서 먼저 제안을 해 왔다.

“공원 들렀다 갈까?”

집 근처에 공원은 몇 개쯤 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공원을 말하는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방학 때, 한밤중에 둘이 안 가던 쪽으로 산책을 하다 발견한 공원이 하나 있었다. 시설도 깨끗하고 넓은데 위치가 외지고 주변에 공사 현장과 아직 아무도 입주하지 않은 신축 건물이 많다 보니 들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그곳은 우리가 밖에서 데이트 기분을 내고 싶을 때 찾아가게 되었다.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서는 뽀뽀도 몇 번 했었다.

“그래.”

밖에서 애정 행각을 들켜 쫄아 있는 나를 위한 고정원의 배려라는 걸 알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나무가 많아 특히나 선선한 공기를 음미하며 우리는 가장 구석진 벤치에 자리했다. 앉자마자 보호막이라도 생긴 것처럼 편안해지는 걸 느낀 우리는 몸을 딱 붙였다. 고정원은 내 어깨로 팔을 둘렀고, 나는 고정원의 허리로 팔을 둘렀다.

“약간 가을 냄새 난다.”

내가 말하자 고정원은 응, 하고 대답하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눈을 감고 감촉을 느끼던 나는 고개를 들어 고정원을 쳐다보았다. 몇 초 간 짧게 눈이 마주치는데, 왠지 여러 가지 감정들이 차올랐다. 그중에서도 아쉬운 감정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여름이 이렇게 가는 게 아쉬웠다. 올여름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고정원과 사귀게 되었다는 게 가장 대단한 일이었다.

“진짜 신기하지 않냐. 너랑 나랑 이렇게 사귀고 있는 게.”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아서 신기했다. 사람 일은 모른다는 게, 딱 이럴 때를 두고 쓰는 말 같았다.

어깨를 감쌌던 손을 내려 손끼리 깍지를 낀 고정원이 내 눈과 입술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신기해.”

나는 일시에 뜨거워진 가슴을 참지 못하고 쪽, 입을 맞추었다. 기습공격처럼 뽀뽀를 한 뒤엔 고개를 밑으로 숙이고 말을 이었다.

“저번에 누나한테 연락 왔던 거 있잖아.”

며칠 전, 누나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고정원 앞에서 망신을 당한 뒤로 연락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전화가 울렸을 땐 깜짝 놀랐다. 받아 보니 전화를 한 이유가 납득이 갔다. 지금 살고 있는 자취방이 층간 소음이 심한 데다 화장실에서 냄새까지 심한데, 내가 계약한 집이니 내가 해결을 보라는 명령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실제로 어쩔 수 없는 책임감을 느끼고 해결을 하러 가려 했지만 고정원이 단호하게 말렸다. 책임질 이유 같은 거 없고, 아무리 가족이라도 원치 않는 부탁을 받았을 땐 거절해도 된다고도 했다. 어려우면 자기가 도와줄 테니 무리하지 말라고.

“그거 안 간다고 했어. 아까 학교에서 엄마한테 또 연락 왔었는데, 안 갈 거라고 못 박았어.”

엄마나 누나의 부탁에 이렇게 딱 잘라서 거절해 본 건 처음이었다. 고정원이 그렇게 말해 줘서인지 무섭지도 않았고 가족들의 반응을 살피느라 떨지도 않았다.

“잘했어.”

칭찬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칭찬해 주니 기분이 좋아지는 건 사실이었다. 나는 품속으로 파고들며 나보다 크고 단단한 몸을 꼭 껴안았다. 옆에서 힘을 실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다. 가족보다 가까운 사람이 생긴다는 게 이렇게 벅차고 든든하고, 행복한 일이었다.

좋은 공간에서 좋은 사람이랑 좋은 시간을 보내는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너무 행복한 나머지 불안한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고정원의 마음이 식으면 어쩌나, 우리가 멀어지면 어쩌나 그런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혼자 이리저리 부정적인 단상들을 밀어내려 애쓰던 나는 급격히 자신감이 하락되면서 고정원은 왜 나 같은 애랑 사귀나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쳐 음울해졌다.

“근데, 너는 나랑 왜 사귀는 거야?”

막상 뱉어 놓고 나니 후회가 들었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고 간극이 길어지자 잔뜩 의식한 등으로 진땀이 배어 나왔다.

“……좋아서.”

고정원은 간단히 대답한 뒤에도 그걸로 끝내지 않고 주르르 이어서 이유를 달았다.

“예뻐서.”

“귀여워서.”

“사랑스러워서.”

하나씩 비슷한 이유를 댈 때마다 겹친 손에 힘을 꾹꾹 실었다.

“이유가 됐어?”

“…….”

그리고 마지막엔 쪽, 하는 뽀뽀가 덤처럼 따라왔다. 불안해하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워진 나는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견과류, 과자, 과일, 라면, 빵 등 간식거리를 잔뜩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살을 찌워야 하니 틈틈이 챙겨먹으라는 고정원의 말 대로 바나나와 빵을 하나씩 먹고, 당장 급한 과제를 하기 위해 노트북부터 열었다.

“나 너 노트북 좀 쓸게.”

“허락 안 받아도 돼. 당분간 계속 쓰라니까.”

“응.”

어제부터 노트북이 고장 나면서 고정원의 것 중 하나를 빌려 쓰고 있었다. 고정원은 노트북이 총 세 개였는데 셋 다 우리 집에 있었다. 이젠 거의 무슨 같이 사는 것처럼 돼 버려서, 고정원의 간단한 생필품부터 시작해 옷, 시계, 신발, 가방, 전자 기기며 뭐며 값나가는 개인 물품들까지 두루 갖춰져 있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이러다 내 물건보다 더 많아질 기세였다.

내가 과제를 하는 동안 고정원은 침대에 등을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표지를 보니 얼마 전에 나랑 얘기하다 나온 만화책이었다. 유명한 스포츠 만화인데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하기에 내가 좀 호들갑스럽게 놀라긴 했었다. 외계인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고정원은 당장 그날로 전권 세트를 주문해서 다음날부터 읽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대중적 취향인 나에 비해 고정원은 굳이 따지자면 비주류에 속했다. 좀 고루하다고 할지, 문화 전반적으로 오래된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취향이 갈리지만 요즘 고정원은 내가 재밌다고 말하는 것만 골라 봤다. 책이건 영화건 뭐건, 전부 다.

“지금 네가 말했던 대사 나왔어. 왼손은 거들 뿐?”

“아 나왔어? 완전 멋있지.”

“응.”

추천해 준 걸 좋아하니 기분이 좋았다. 별거 아니긴 하지만 뭔가 하나하나 내 취향을 이해해 주려고 하는 것 같아서 흐뭇하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나도 요새는 주로 고정원이 듣는 음악을 들었고 책도 고정원이 추천한 걸로 틈틈이 읽고 있었다. 상대를 알아 가는 것도 그렇지만 점점 교집합이 늘어 가는 느낌이 드는 게 좋았다.

고정원의 플레이리스트를 켜 놓고 과제를 하던 나는 한 시간도 안 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워부터 할까 싶어서였다. 갈아입을 옷들을 꺼내고, 입고 있는 옷을 하나씩 벗고 있는데 그때였다.

“깜짝이야.”

언제 온 건지, 내 어깻죽지에 얼굴을 묻은 고정원이 배 아래쪽으로 팔을 휘감았다.

“왜, 나 이제 씻을 건데.”

말하며 팔을 떼어 내려 힘주었다. 아래는 속옷 한 장만 입고 있어서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까 재밌었어?”

뭘 말하는 건가 싶어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술 마시러 갔던 걸 얘기하는 거라고 알아차리고 고갤 끄덕였다.

“응 뭐…….”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는 없어서 성의 없이 어물거렸다. 간만에 애인 아닌 사람들이랑 수다도 떨고 술도 마시고. 자유를 만끽한 기분이었다는 게 양심 가책의 포인트였다.

“나 없으니까 재밌었구나?”

하마터면 들고 있던 바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무슨, 그냥 맨날 하던 소리나 하고 술이나 마시는 건데 뭐.”

말의 속도도 너무 빠르고 고저 없는 톤이 영 부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아닌 척이 쉽지 않았다.

“흠…… 정말?”

고정원이 뒤에서부터 고개를 내밀어 내 얼굴을 살폈다.

“정말이지 그럼 뭐 하러 내가 거짓말을 쳐.”

억지로 눈을 한번 마주치고 웃었다. 그러자 고정원의 입매가 깊어지며 미소가 진해졌다.

“나랑 노는 게 더 재밌어?”

감겨든 팔에 힘이 더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 당연한 걸 왜 자꾸 물……,”

어……. 말을 채 끝까지 뱉어 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뒤에서 닿는 발기한 감촉 때문이었다. 팍, 힘을 주어 품에서 벗어났다. 고정원의 아래를 한번 확인하고 후딱 화장실을 향해 돌아섰다.

“씻고 올게.”

“씻는 건 나중에 하고, 얘기 좀 하다 가.”

내 한쪽 팔을 감싸며 등으로 다가선 고정원은 나긋하게 무게를 실어 왔다.

“그, 너는 오늘 친구 만나서 무슨 얘기 했어?”

비좁은 방 가운데서 어정쩡하게 붙잡혀서 물었다. 할 일 다 하고 밤에 자기 전에 느긋하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대화를 재촉하니 하는 수 없이 지금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오랜만에 만나서 사는 얘기 하고, 밥 먹고 그랬어.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서, 사귀는 사람 있다고 했어.”

뒷목에 문지르는 입술의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몸의 움푹 팬 부분들이 성감대가 될 수 있다는 건 고정원 때문에 안 사실이었다.

“어어……, 잘했네.”

“인휘는, 다른 애들이 안 물어봤어 그런 거?”

“음…… 안 물어봤던 거 같은데?”

머릿속에선 술집에 있을 때 절대 연애 안 한다며 소리쳐 대던 게 맴돌았지만 절대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근데 나 일단 씻고 오면 안 될까?”

“안 돼.”

허벅지 위로 올라온 손이 진득하게 움직였다. 닿는 체온이 갑갑할 만큼 뜨거웠다.

“가서 만화 안 봐?”

손을 억지로 떼어 내며 외면했다.

“다 봤어.”

더운 입술이 뒷목을 스치고, 밀착한 몸이 노골적으로 맞물렸다. 더 이상 모른 척한다고 넘어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야아…… 작작 좀 해.”

그 말을 꺼내자마자 골반까지 타고 올라온 손길이 딱 멈추었다. 아. 작작하라는 건 표현이 좀 그랬나.

“아니이……, 어제도 우리 모텔까지 가서 그렇게 했……는데.”

말해놓고 조심스러워져서 살짝 뒤를 돌아보며 변명했다. 눈을 마주치진 못하고, 굳어 있는 입매만 힐끗거렸다.

“그니까……, 집에선 되도록 안 하기로 했잖아.”

옆집 사람한테 들리면 어떡하냐고……. 작게 중얼거리며 덧붙였다.

사건까진 아니지만 지난번,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귀가 중인 옆집 사람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전엔 그런 적 없다가 그날따라 유독 힐끔대는 시선을 느꼈는데 그게 두고두고 신경 쓰였다. 아직까지 우려할 만한 일은 없었다 해도 최대한 조심하고 싶었다.

“……그랬지.”

한숨처럼 말하며 고정원이 그제야 몸을 떼어 냈다. 안 물러나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잔뜩 긴장해서 굳어 있던 자세를 느슨하게 풀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기에 슬쩍 뒤돌아보았을 때 고정원은 아직도 그 자리였다.

“그러면, 난 소리 안 낼게.”

“……뭐?”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했다. 다시 간격을 좁힌 고정원이 내 가슴 위로 대담하게 손을 올렸다.

“천천히, 조심조심…….”

그렇게 말하면서, 굵은 엄지손가락이 느릿하게 가슴팍을 짓누르며 내려갔다.

“할 수 있어.”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내 얼굴을 쳐다보는 두 눈이 보였다.

“인휘는 자신 없어?”

천천히 해도 좋아서 울 거 같아?

마지막 말에 얼굴로 확 열이 번졌다. 할 때 여러 가지로 주체가 안 돼서 운 적이 많긴 한데 그걸 굳이 지적하니 부끄러웠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데 갑자기 앞부분이 찌릿, 울릴 정도로 세게 붙잡혔다.

“아…….”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소용없었다.

“벌써 왜 이렇게 젖었어.”

웃음기 배인 목소리가 들려와 수치심을 부추겼다. 밑을 내려다보니 어느새 부피가 늘어나선 끈적하게 젖은 드로즈가 보였다.

“…….”

거의 매일같이 몸을 맞대서 그런지, 고정원이 목소리 톤을 조금만 깔아도 자동으로 몸이 준비하는 것처럼 반응하는 게 미칠 노릇이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계속 밀착하고 있었으니 이렇게 안 되는 게 더 힘들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젖꼭지까지 서서.”

엄청 야해 너 지금.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니 피부 전체가 다 오싹했다.

“야…… 너 그런 말 좀 안 하면 안……!”

급하게 입술이 틀어 막혔다. 밀치기 위해 처든 손은 양쪽으로 어설프게 붙잡히고 말았다.

“으응…….”

맞붙은 건 급했지만 곧 익숙한 호흡으로 뒤엉켰다. 맞물린 입술이 각도를 바꿀 때마다 숨이 짧게 짧게 들이찼다. 양쪽 입가가 얼얼할 정도로 접합이 깊었다.

“으…….”

높은 곳에서 빠르게 떨어질 때처럼 다리 힘이 느슨해졌다. 산소가 모자라는지 온통 시야가 몽롱했다. 손의 구속이 풀어진 뒤에도 나는 어쩔 수 없이 고정원에게 매달렸다. 쉼 없이 쏟아지는 입속의 애무에 대응하느라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키스는 지겹게 했고 또 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할 때마다 숨이 차고 정신이 없어지는지 몰랐다. 정확히는 키스뿐 아니라 모든 게 다 그랬다. 고정원이랑 하는 건 매번 새롭고 벅차고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곧 세상이 뒤집히듯 빙글 돌았다. 입술이 축축한 여운을 가지고 살짝 떨어졌을 때, 등 뒤로는 침대 시트가 닿고 있었다.

“여기서부턴 천천히 해야겠다, 그치.”

즐거운 일을 앞둔 것처럼 고정원이 웃었다. 그리고 겹쳐져 있던 몸을 조금 떼어내더니 한 번에 티셔츠를 벗었다.

농후했던 키스 때문에 아직까지도 숨이 가쁘고 몽롱했다. 소리 안 내고 한다 했으니 참을 만하겠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꾸물꾸물, 덩달아 옷을 벗기 시작했다. 티를 벗고 나서 엉덩이를 들어 브리프를 내리는데 눈이 마주쳤다.

“알아서 벗네.”

벨트를 푸르고 버클을 내린 고정원이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를 드러내 놓고 말했다.

“……그럼 알아서 벗지 벗겨 주기 기다리냐.”

이젠 웃음기 하나 없이 내려다보는 시선이 숨 막혔다. 희롱하는 거 같기도 하고, 아깐 그렇게 못하게 하더니 알아서 벗는다고 놀리는 거 같기도 하고. 하여간 별 말도 아닌데 사람을 긴장시키는 재주 같은 게 있었다.

“…….”

완전히 알몸이 되자 둘 다 말이 없었다.

“이렇게 적셔 놓고 하기 싫은 척한 거야?”

내팽개친 내 브리프를 굳이 가져온 고정원이 앞섶에 묻은 프리컴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딱 봐도 평소보다 많이 젖어 있었다.

“…….”

그런 걸 왜 만지냔 말도 못하고 입만 뻥끗거렸다. 기다란 손끝에서 끈끈하게 늘어나는 체액이 보고 있기도 민망했다. 실은 아까 벗을 때도 투명한 실처럼 늘어지기에 낯 뜨거웠었다.

“……싫은 척이 아니라 옆집 때문이라고 몇 번을…….”

“그럼 속으론 엄청 하고 싶었단 거네.”

그렇다고 ‘엄청 하고 싶었다’는 표현에 긍정하자니 좀 그랬다. 하는 수 없이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어…….’ 하고 흘리듯 대답했다.

“내 것도, 빨고 싶었고.”

고정원이 성기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눈 한 번 깜빡인 사이 발기한 물건이 뺨 근처에서 묵직하게 꿈틀댔다. 형태도 냄새도 익숙하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기분이 들게 하는 크기였다.

“……너 이거 되게 좋아하더라.”

침대 바깥에 선 고정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도 고정원이 아래를 빨아 줄 때 무지 좋기 때문에 이해하면서도 놀리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해 본 소리였다. 나만큼은 아니어도 고정원이 조금이라도 민망함을 느꼈으면 해서.

“인휘가 맛있는 것처럼 빠니까. 나도 좋아.”

머리칼 사이를 부드럽게 헤집은 손이 두피에 닿았다. 순간 얼굴에 열이 몰렸다. 내가 그랬었나. 그냥 좋아하니까 해 준 것뿐인데 그렇게 보였던 건가.

“예쁘다며. 얼른 예뻐해 줘.”

아까 돌아오는 길에 민망해서 되받아치느라 했던 소리를 들먹이며 고정원이 내 귓바퀴를 문질렀다. 따지자면 진심으로 한 말도 아니고, 얼굴이 예쁘댔지 이게 예쁘다고 한 게 아닌데…… 하여간 뻔뻔했다.

“…….”

계속 우물쭈물하다간 끝이 안 날 거 같아 일단 입부터 벌렸다. 끄트머리에 체액이 맺혀 있는 걸 보며 한입에 머금었다.

속살끼리 완전하게 밀착된 순간 잡고 있는 허벅지가 딴딴해지며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다.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여 적실 때마다 근육이 꿈틀꿈틀했다.

석고 기둥처럼 단단하고 굵은 허벅지를 붙들고 있자니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숨 막히는 기분조차도 전희처럼 야릇하게만 느껴졌다. 회를 거듭할수록 서로의 몸에 익숙해지는 듯했다.

좋아하는 대로 음낭 아래쪽에 코를 박고 열심히 빨다가 기둥까지 혀로 쓸어 올려 끝을 머금어 주니 ‘하…….’ 듣기 좋은 신음이 나왔다.

“……좋아.”

흥분해서 살짝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집중하는 눈이 나한테 고정돼 있었다. 한시도 안 떼고 빤히 쳐다보는 게 부담이 되면서도 좋아하는 게 느껴지니까 입안이 얼얼할 만큼 열심히 하게 됐다.

목구멍 가까이 깊게 머금으면 움찔대며 흥분을 참는 느낌이기에 눈물이 살짝 맺힐 만큼 깊게 집어넣었다. 오래 하긴 힘들어서 넣었다 빼길 반복하는데, 갑자기 고정원의 손이 내 머리칼을 아프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입속에서 빠져나간 성기가 후드득 얼굴 위로 정액을 쏟았다.

“…….”

어느 때보다도 빠른 사정이었다. 뺨과 귓가로 뜨뜻미지근한 감각이 번졌다. 탁하고 끈적한 액이 목을 지나쳐 쇄골에 고이는 느낌이 생생했다.

“너무 좋아서…… 못 참았어.”

미안…….

얼굴에 받으니 막, 그런, 야한 영상에서 봤던 장면이 연상되기도 하고 딱히 좋은 기분이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쁠 것도 없었다. 저번에 가슴팍에 뿌린 다음 젖꼭지에 문지르던 것보단 덜 민망한 거 같기도 하고. 너무 좋아서 못 참았다는데, 미안해하는 걸 보니 ‘뭐 별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눈엔 안 들어갔어?”

“응.”

휴지로 닦으려 했는데 고정원이 먼저 손을 댔다. 다정한 손길이 뺨에 머물렀다가 귀로 옮겨 갔다. 닦아 주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끈적한 것이 넓게 퍼지는 느낌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도 예뻐해 줄래.”

어깨에 올라온 손을 따라 몸이 뒤로 밀렸다. 끼익, 스프링 소리와 함께 고정원이 침대로 올라왔다. 여전히 발기 상태였던 아래로 손이 내려오자 금방 열이 올랐다. 기대감에 맥박 치는 성기가 부끄러웠다.

“어…… 잠깐만…….”

고정원이 밑으로 내려가는 건 이해했는데 점점 자세가 생각과는 달라지고 있었다. 양 다리가 각각 어깨에 걸쳐지고, 그대로 쭉 끌어당겨졌다. 고정원이 숙였던 등을 세우자, 동시에 허리가 한껏 들리면서 엉덩이가 상대의 가슴팍에 닿게 됐다.

“잠깐, 자세가……!”

이건 좀 아닌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같이 누운 게 낫지, 혼자만 누워서 하반신을 처든 채로 내 걸 머금는 모습을 보는 건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팔에 힘을 주고 빠져나가려 했지만 실패했다. 성기 주변을 감싸는 열기를 느끼자마자 힘이 빠졌다. 고개를 파묻은 고정원이 보였다. 불편한 자세도 그렇고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적나라한 애무도 그렇고 여러모로 얼굴에 피가 쏠리는 상황이었다. 입천장에 귀두가 문질러지는 느낌에 멋대로 허리가 들썩였다.

“읏……!”

신음이 생각보다 커서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 못 참겠구나.”

젖은 성기가 입 밖으로 나왔다. 바깥 공기에 맞닿아 싸하게 식어가는 음경 주위로 입김이 닿았다.

“오늘은 이것도 느긋하게 해야겠네.”

당장 싸고 싶기도 하고. 뭔가 부족하기도 하고. 어쩔 줄 모르겠는 느낌에 팔을 들어 눈을 가려 버렸다. 느긋하게 하겠다는 말처럼, 혀가 회음 주변을 천천히 둥글리고 건드려 왔다. 의지와 상관없이 몰리는 피로 성기가 꺼덕대는 게 느껴졌다.

“으……!”

발끝까지 쥐가 날 듯이 힘이 들어갔다. 고정원의 얼굴을 양 허벅지로 감싸고 이따금씩 발뒤꿈치로 등을 툭툭 찼다. 때리려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그랬다. 혀가 음낭을 샅샅이 건드리거나 음경의 힘줄이 선 부근에 느릿하게 입술이 문질러질 때마다 미칠 거 같았다. 너무 많이 나와서 사정액 같은 쿠퍼액이 배에서 가슴팍까지 끈끈하게 더럽혔다.

“……나 이제 나, 와……!”

손을 뻗어 고정원의 얼굴을 밀어냈다. 사정감을 조절하려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조금도 참아 내거나 지체시키지 못하고 빠르게 분출해 버렸다.

투두둑, 소리가 난 것처럼 하얀 체액이 내 가슴팍 위로 떨어졌다.

“하…….”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밀어내기 위해 있는 힘껏 들었던 고개와 팔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탈력했다. 양쪽 다리를 고정원의 어깨에 걸친 채로 숨을 골랐다. 여운을 추스르려 노력하는데, 갑자기 생각지 못한 자극에 허리가 움찔 떨렸다.

아직까지 감각이 곤두서 있는 성기에 고정원의 입술이 스쳤다. 스친 입술이 점점 위로 올라오며 들려 있던 허리도 침대 시트에 닿을 만큼 내려갔다. 체액들로 뒤범벅된 배와 가슴팍을 지나칠 땐 혀가 나와 쓸어 갔다. 입술까지 도달하자 쪽, 뽀뽀를 하고 떨어졌다.

닿았던 입술에선 뭐라고 할 수 없이 낯선 맛이 났다.

“……맛이 이상해.”

“그래? 난 맛있던데.”

“…….”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고정원은 엉덩이 사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사정의 영향으로 부드러워진 입구를 지분대는 손길에 또다시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아으……!”

괴로운 신음과 함께 찔꺽, 하는 젖은 소리가 났다. 뒤를 가득 채운 이물감과 엉덩이가 짓눌리는 압박감으로 끝까지 들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고정원도 힘든 모양이었다.

등 뒤로 다부진 가슴팍이 겹쳐졌다. 머리 위로 시트를 부여잡고 있던 손 위에도 온기가 뒤덮였다.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귓불에는 입술이 닿고, 곧이어 세게 빨아 당겨졌다. 귓구멍 안쪽으로까지 혀가 들어오며 질척하게 젖었다. 꼭 이어폰으로 듣는 것처럼 척척한 소리 때문에 그다지 크지 않은 소리란 걸 아는데도 옆집에 들릴까 조마조마했다.

한 삼십 분쯤이나 지났을까. 체감상은 더 긴 것 같았지만 정확한 건 몰랐다. 이어져 있는 상태가 오래되다 보니 신경만 예민해지고 시간 감각은 더뎌졌다. 지나치게 느릿한 나머지 들어오는 데에 한참 진을 빼고, 나갈 때에도 지난하도록 진을 뺐다. 벌써 수십 번도 더 이런 식으로 드나들었는데, 도무지 끝날 기미가 없었다.

“자세 바꿀래?”

작게 묻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안쪽이 언제나처럼 격렬하게 건드려지지 못해 답답한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했고, 의식을 놓으면 허리가 더 큰 자극을 쫓아서 혼자 움직일 것 같았다.

“…….”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려 준 고정원의 손이 뺨과 목, 가슴을 지나쳐 배로 내려갔다. 곤두서 있던 가슴의 돌기에 손바닥이 스쳤을 때 반사적으로 몸이 수축했다. 의도치 않게 뒤를 메우고 있는 것을 꽉 물었고, 그 이어진 감각에 잠시 둘 다 굳어져 있었다.

들어오던 속도와 마찬가지로 느리게, 뱃속을 채운 고정원의 성기가 빠져나갔다. 그 기묘한 감각이 익숙해지지 않아 시트에 이마를 비볐다. 끙,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읏……!”

거의 빠져나가 있던 성기가 순간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놀라서 눈이 번쩍 뜨이고 목소리가 터졌다. 뒤늦게 고정원의 손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연이어, 쾅, 쾅, 치받아 대는 격한 자극이 뒤를 관통했다.

비명을 질러 대는 것처럼 약한 간이침대의 스프링이 끼긱대며 울었다. 나도 거의 비명처럼 소리쳤지만 고정원의 손안에서 울릴 뿐이었다. 움직임이 멈추고 나서도 번개라도 맞은 것 같이 극심한 쾌감에 벌벌 떨었다. 막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입에서 침이 떨어졌다. 눈가엔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하지, 마……. 소리…… 소리 나……!”

울먹거리면서 부탁했다. 말하는데도 힘이 들어간 탓에 뒤가 조여들어 찌릿찌릿했다.

“……미안. 힘 조절이 안 됐어.”

고정원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귓가에 입술을 문지르면서 어깨를 쓰다듬는 사소한 애무에 소름이 돋았다. 앞이 축축해지지도 않았는데 사정하고 난 것처럼 곳곳이 예민해져 있었다.

“자꾸 조르니까.”

내 탓이라는 것처럼 덧붙이는 말이 좀 억울했다. 의도치 않게 힘이 들어가거나 간지러움에 엉덩이를 미세하게 들썩인 게 다인데. 조른 적 없다고 하려다 힘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어떡하지, 못 갈 거 같은데.”

희미한 한숨을 내쉰 고정원이 걱정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드나들고서도 못 갈 것 같다니. 진심으로 막막해져서 고갤 돌렸다.

“……어떡해 그러면…….”

서러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지금껏 한 걸로 진이 다 빠져 버렸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 되는 건가 걱정되고 불안해서……. 그만하고 차라리 내가 입으로 해 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내가 입으로 할까? 하고 제안해 보려는데 갑자기 키스가 시작됐다.

“응…….”

커다란 손이 턱을 감싸 고정시키고, 고개는 뒤쪽으로 최대한 꺾였다. 그 상태에서 한참 동안 이어졌다. 행위가 하도 길고 집요해서 남아 있는 기력마저 빼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음……, 응…….”

달콤하게 혀를 섞는데도 좋아서가 아니라 힘들어서 자꾸만 앓는 소리가 났다.

“인휘야.”

고정원이 입술을 어깨에 옮겨 찍으며 뭉개진 발음으로 불렀다. 약간의 움직임만으로 뒤를 메우고 있는 각도가 달라져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

“나 좋아?”

“당연하지…….”

침대에 얼굴을 파묻으며 대답하자 목소리가 웅웅대며 흐트러졌다. 시트와 내 얼굴 사이로 손을 비집어 넣어 다시 제자리로 고개를 돌려놓은 고정원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말해 봐. 좋다고.”

아……. 결국 고정원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될 걸 알지만 쑥스러워서 얼마간 뜸을 들을 들였다.

“……좋아해.”

대답하자마자 슬슬, 안을 채운 성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좋아.”

“……되게, 많이.”

참기 위해 숨을 들이켜고 시트를 움켜쥐었다.

“이런 짓 하고 있을 만큼?”

조금 빠져나갔던 성기가 다시 치달으며 부딪힌 엉덩이가 찰싹, 소리를 냈다.

“……읏!”

“내 좆 물고 있으니까 어때?”

“…….”

대답을 못하고 있자 고정원의 성기가 짓이기듯 눌러 왔다.

“……응?”

“좋아.”

“계속 말해 줘.”

“좋, 아…….”

과격하진 않지만 빨라진 움직임이 느껴졌다. 조금만 참으면 끝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악착같이 신음을 참았다.

그리고 그 뒤로 계속해서 좋다는 말, 좋아한다는 말들을 몇 번이고 헤프게 내뱉었다. 고정원은 그거로도 만족하지 못하는지 더한 걸 시켰고, 나는 정신없이 흔들리면서 얼결에 사랑한다는 말까지 했다. 마지막엔 침대가 주저앉을 것처럼 박아 댔었다.

고정원이 빠져나가고 나자 흐물흐물 쓰러졌다. 버거운 사정감에 눈물이 줄줄 나고 있었다. 거칠게 눈가를 비벼도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샘솟았다.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가는 감각은 매번 적응이 안 됐다.

“소리…… 끅, 안 낸, 다며…….”

끝났는데도 떨리는 몸 구석구석에 입을 맞추고 있는 고정원에게 따졌다. 자꾸 끅끅거리는 소리가 났다. 창피하게. 왜 이렇게 감정이 북받치는지 나도 이해가 안 갔다.

“많이 힘들었어?”

지저분해진 얼굴을 쓸어 주고 껴안아 주는 다정함에 따지던 것도 잊고 품에 안겼다. 따뜻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그치려 노력했다.

커다란 손이 등을 쓸고 토닥였다. 편안해지는 몸짓이었다. 더 깊숙이 파고들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말없이 안고 있을 뿐인데, 그러면서 점점 진정이 되어 가는 게 신기했다.

“……배고프다.”

술집에서 안주를 꽤 많이 먹었고, 집에 와서도 바나나랑 빵까지 먹었는데 그새 배가 다 꺼져 있었다. 허기를 느끼고 중얼거리자 고정원이 즉각 대꾸했다.

“뭐 시켜 줄까?”

잔뜩 사온 간식들도 생각났지만 좀 더 열량이 높은 게 먹고 싶었다.

“……치킨.”

말하자, 고정원은 안고 있던 팔을 풀고 곧장 주문하러 나갈 태세였다. 허리를 꽉 붙들어 매고 흘리듯 말했다.

“……좀만 더 있다가 해.”

어차피 씻지도 않았고……. 좀 더 느긋하게 있다가 먹어도 될 것 같았다.

일어나려다 말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고정원이 얼핏 웃는 기색이었다. 이대로 껴안고 있자고 어리광을 부리기라도 한 거 같아서 민망했지만, 이상하게 잠깐이라도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그럴게.”

따스한 품이 아까보다 강한 힘으로 안아 오자 만족감이 퍼져 나갔다.

* * *

아침에 일어나니 뻐근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몸을 뒤덮은 근육들이 땡땡하게 부은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틀 연속 생전 안 하던 폼을 취했던 게 여러모로 무리가 간 것 같았다.

씻고 나와 전신 거울 앞에 서서 한번 더 비춰 보았다. 야식까지 먹고 잤는데 다행히도 얼굴은 부어 있지 않았다.

“잘 잤어?”

잠기운이 묻은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굳이 돌아볼 필요도 없이, 등 뒤에 선 커다란 실루엣이 거울에 비쳐 보였다.

거울로 자기 모습을 대충 확인한 고정원은 ‘음……’ 하고 졸린 듯한 신음을 내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쪽, 하고 뽀뽀를 하며 느긋하게 내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었다.

“야…… 간지러워.”

단단한 손바닥에 젖꼭지가 쓸리자 소름이 돋았다.

“좀 부었어.”

“그래? 난 모르겠던데.”

똑같아 보였는데. 고정원이 보기엔 부어 보이나 싶어 다시 한 번 거울을 쳐다봤다.

“아니, 얼굴 말고 여기.”

“…….”

손가락이 가슴의 튀어나온 부분을 꾹 힘 있게 눌렀다. 절로 배에 힘이 들어가며 숨이 멈추었다.

“어…….”

무슨 흐름인지 티셔츠가 가슴팍 위로 젖혀지고, 어느새 거울엔 울긋불긋한 상체가 한눈에 비치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네.”

고정원의 두꺼운 손가락이 목, 가슴, 배의 자국을 따라 짚어 내려갔다. 티셔츠를 젖히고 있는 손을 끌어내리려 했지만 애초에 힘이 역부족이었다.

“뭘 또 들춰 봐…….”

얇은 살갗이 빨아 당겨질 때의 오묘한 느낌이 다시금 떠올라서 기분이 이상해지려 했다.

“……오늘 날씨 정말 좋다.”

말하는 고정원의 시선이 거울 속 내 몸에 고정돼 있었다. 부담스러웠다. 창문으로 햇빛이 가득 들어와서 몸 구석구석이 쓸데없이 훤히 내다보이는 게……. 말마따나 젖꼭지도 확실히 부어 있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드러난 배를 긁적였다. 거울 앞에서 이런 식으로 같이 붙어 있는 모습을 처음 봐서 그런가,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데 아무튼 보지 말아야 할 걸 봐 버린 것처럼 괜히 가슴이 덜컥하고 이상야릇했다. 등 뒤로 우뚝 솟은 키 차이도 그렇고, 고정원의 손 하나에 내 가슴팍이 거의 다 가려질 만큼 덩치 차이도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나서 놀랐다.

“배고프네, 뭐라도 먹자.”

밀어내며 몸을 비틀었다. 이대로 있으면 왠지 어제의 연장선상으로 이어지게 될 것 같았다.

“아……!”

하지만 벗어나려다 말고 기어이 비명이 터졌다. 놔 주지 않고 끌어당긴 고정원에게 힘 있게 안기면서 근육에 통증이 일은 탓이었다.

“어디 아파?”

진지하게 걱정을 받기엔 경미한 증세였기 때문에 소심하게 뺨을 긁었다.

“……아니, 근육이 당겨서.”

“다른 덴? 아픈 데 없고?”

말없이 고개를 한 번 크게 과장해서 끄덕였더니 어째서인지 고정원이 웃었다. 아, 귀여운 척한 거 아닌데 그렇게 보였으려나. 변명하는 것도 구차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등이 떠밀렸다.

“누워 봐. 주물러 줄게.”

“어? 아냐 됐어, 파스 남은 거 있어서 그거 붙임 돼.”

“그럼 잠깐만 앉아. 아플까 봐 그래?”

“그런 게 아니라…….”

고정원은 계속해서 내 팔을 이끌어 침대에 앉히려 했다. 하도 해 주고 싶다며 끈질기게 권유하기에 ‘뭐 내가 힘드냐, 네가 힘들지.’ 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깨와 허리의 자세를 바르게 잡아 준 손이 곧 부드럽게 정수리부터 눌러 오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등부터 두드릴 줄 알았더니. 그렇게 위에서부터 뒷목으로 부드럽게 지압해 내려온 손이 이번엔 어깨를 힘주어 주무르는데 기분 좋은 한숨이 났다. 강약 조절이 거의 환상이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입이 헤벌어지고 힘이 쭉 빠져나갔다.

“잠깐만, 나 좀 엎드릴게…….”

거절했던 게 무색하게 자리를 제대로 잡았다. 그냥 조금만 받고 말려고 했는데 이건 그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시원한 부위를 알려주지 않아도 마치 속을 읽은 것처럼 꾹꾹 눌러 주니 몸이 녹는 거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몇 분이나 지났는지 몰랐다.

“손님. 주무시면 안 돼요.”

웃음기 배인 목소리에 눈꺼풀이 무겁게 뜨였다.

“응……? 아…….”

시원하다는 감탄만 연발하다가 어느 틈엔가 졸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사지를 시켜 놓고 나만 편하게 늘어진 게 민망해서 웃으며 침대 시트를 발가락으로 문질렀다.

“……너무 잘하셔서.”

“좋아요?”

“……네.”

그리고 또 얼마간을 받았다. 뭉쳤던 근육이 노곤하게 풀리는 느낌에 또 다시 졸음이 밀려들 무렵…….

“……어, 야, 너 뭐…… 거긴 왜…….”

허벅지에서 시작되는 마사지에 화들짝 놀랐다.

“안마하는 거야. 이상한 생각하지 마.”

이상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는 상황 아닌가. 게다가 손가락이 반바지 속으로 자꾸 침범하고 있었다.

“……몰랐는데 변태 마사지사네.”

반쯤 돌아누워 고정원의 손을 붙들었다. 제지당하지 않은 남은 손이 바지 속으로 들어와 민감한 부위를 쓸고 매만지는 통에 앞섶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풀어만 줄게.”

중의적인 말이었다. 은근슬쩍 중심부로 옮겨 오는 손길에 다리가 오므라들었다.

“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지.”

고정원의 티셔츠를 늘어지게 잡아당기며 항의했다. 그러자 ‘음…….’ 고민하는 것처럼 뜸을 들이던 고정원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럴 생각은 늘 있지.”

당당하게 말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미소까지 산뜻했다.

“잘생기면 다냐.”

얄밉다가도 잘생긴 얼굴에 설레게 되니 괘씸해서 한 소리였다. 이렇게 잘났으니 세상만사 잘 풀리는 거 같아 부럽기도 하고. 근데 그런 애가 내 애인이라는 게 뿌듯한 걸 보니 나도 참 속 없고 답 없는 팔불출이었다.

“……나 그 말에 약한데.”

갑자기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진지해진 고정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 무슨 말?”

마주친 두 눈이 짧게 일렁이는 듯했다.

“잘생겼다는 말.”

……매일같이 지겹게 듣는 말일 텐데? 의문을 가진 순간 입술이 겹쳐졌다. 쪼는 듯한 가벼운 입맞춤이 금방 진한 딥키스로 번졌다. 입술이 떨어진 틈에 ‘네가 말하면 흥분돼.’ 속삭여지는 말에 이상하게 나도 흥분이 옮아서 뒤통수에 손을 넣고 힘껏 끌어당겼다. 침대 위로 어지럽게 서로의 몸이 겹쳐졌다. 오늘 하루 편하게 시작되기는 글렀단 생각을 하면서, 급하게 옷을 벗고 또 벗겼다.

첫 수업은 자체 휴강할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녹초였다. 흐느적하게 늘어져서는 고정원이 씻겨 주는 대로 씻고 입혀 주는 대로 입고. 같이 유튜브나 보면서 실컷 뒹굴다가 점심쯤에야 일어났다. 족발이랑 피자를 한꺼번에 시켰다. 이러다간 기력이 쇠해서 쓰러질지도 모른단 생각에 막판엔 꾸역꾸역하면서도 전부 먹어치웠다.

종일 잠이나 자고 싶은 맘을 억누르고 느지막이 학교에 나갔다. 나오기 직전까지도 고정원이 그냥 다 가지 말고 쉬자고 해서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다. 성실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놀자판이었다.

전 학기도 거의 겹치긴 했지만 이번 학기엔 같이 시간표를 짰으니 교양 하나 빼곤 전부 같은 수업이었다. 갑자기 세트로 붙어 다니면 이상해 보이려나 싶기도 했는데, 그런 걱정을 하느라 오버해서 의식할 필요도 없을 거 같았다. 남의 일이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겠지.

간단하게 캔 커피를 하나씩 들고 수업에 들어갔다. 오티만 하고 끝나리란 예상으로 참석했다가 속 편한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끝날 생각 없이 이어지는 수업에 점점 머리가 아파 왔다.

“미쳤다 첫날부터 무슨 풀강에 과제까지 내 줘.”

결국 수업이 끝나자마자 푹 고꾸라졌다. 말 못할 곳이 아릿하고 허리도 아프고 근육들도 쑤셔서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수업 시간에도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반 시체처럼 있었다.

“나오지 말자니까.”

“…….”

그러게 그냥 다 쨀 걸 그랬다. 뒤늦게 후회하며 고정원의 무릎을 베고 누우려다 장소를 자각하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람들 다 있는 데서 미친 건가.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거라고 생각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주변을 정리했다.

“야, 조!”

가방을 챙겨 나가려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김강우.”

아……. 안 그러려 해도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김강우의 경우 고정원을 대놓고 싫어하다 보니 같이 마주치면 껄끄러웠다.

“먼저 가, 연락할게.”

서서 기다리고 있는 고정원을 올려다보며 눈치 보냈다. 살짝 윙크를 하니 그제야 ‘전화해.’ 하고 뚝뚝하게 대답하며 돌아섰다. 왠지 심기가 불편해 보여서 신경 쓰이긴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여기서 김강우 무시하고 고정원을 따라가면 어울리는 애들끼리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괜한 말 나올 거 같아서…….

“뭐냐 너.”

김강우가 어깨동무를 하며 몸을 밀착해 왔다. 강한 스킨 냄새와 약간의 땀 냄새가 났다. 고정원 냄새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좀 역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

뭐라고 변명을 하기도 전에 김강우가 한 번 더 윽박지르듯 말했다.

“왜 쟤랑 붙어 다녀.”

딱 달라붙어 있길래 존나 어이없었네 진짜. 어지간히 황당했는지 계속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일단 따라와.’ 하고 아예 강의실을 빠져나가 다른 곳으로 끌고 나갔다.

“종강 전부터 묘하게 붙어 다닌다 싶더니 절친 먹었냐?”

김강우의 말투가 삐딱했다. 구석에 밀어 넣고 인상을 팍 쓰는 게, 흡사 협박하는 꼴이었다.

“……고정원 지내면 지낼수록 되게 괜찮은 애더라고. 너도 친해지면…….”

“아 변명은 됐고. 그래서 계속 쟤랑 다닌다고?”

“……너희랑도 다니고, 고정원이랑도 다니고.”

대답을 들은 김강우가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새끼 저거 다 가식이라고 딱 보면 모르냐? 하는 행동마다 구린데. 뒤통수 맞고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라.”

제대로 악의 가득한 말이었다.

“…….”

뭐라고 대꾸도 않고 서 있었더니 김강우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한숨을 내쉬고 뒤돌아 가 버렸다. 끌려와 한 것도 없이 몇 마디 주고받은 뒤에 계단 한구석에 홀로 남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상황이 워낙 유치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일단 주머니에서 휴대폰부터 꺼내 들었다. 고정원에게 전화해 주기 위해서였다. 연결 신호음을 들으며 밖을 나섰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연결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다 끝내 안내음으로 넘어갔다. 소리를 못 들었나. 부재중 기록이 뜰 테니 보면 연락해 오겠지 싶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게 이 이상 쓰면 비상시에 위험할 거 같았다.

“아 피곤해…….”

어디서 다리 쭉 뻗고 자고 싶었다. 마침 공강이기도 하고, 장소만 찾으면 될 것 같아서 생각에 잠겼다. 과방도 괜찮긴 한데 개강 첫 주라 어수선할 거 같아서…….

그러다 휴게실이 떠올랐다. 좋은 게, 우리 학교는 여학생 전용 휴게실과 남학생 전용 휴게실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몇 번 가 봤는데 엄청까진 아니어도 꽤 쾌적했었다.

가서 폰 충전도 하고 연락도 다시 해 봐야지. 마음먹고 무거운 몸을 휘적휘적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아 죽겠다.”

휴게실에 도착하자마자 무작정 이층 침대의 아래층에 몸을 구겨 넣었다. 그대로 잠에 빠지려다 말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역시나 연락은 없었다.

“맞다 충전.”

침대에서 기어 나와 충전기를 꺼내고 콘센트에 연결했다. 충전 마크가 뜨자마자 고정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지금 남학생 휴게실에 있음 ㅎㅎ 전화해 줘!]

할 일을 다 마쳤다는 생각에 기운이 쭉 빠지면서 졸음이 밀려왔다. 다시 푹신한 데로 기어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연락이 오면 바로 가서 받으면 되니, 그때까지 조금만 눈을 붙이고 있을 생각이었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몇 초 만에 잠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얼마나 잠이 들었었는지는 하나도 감이 오지 않았다. 눈이 뜨였을 때, 무겁던 몸이 전체적으로 가뿐해져 있었고 머리는 전보다 맑아져 있었다.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헉. 미치겠다.”

시간이 한 시간 반이나 흘러 있어 기겁했다. 게다가 부재중 전화 12건에 메시지도 몇 건이나 쌓여 있었다.

[인휘야]

[어디야]

[무슨 일 있어?]

[전화 못 받는 상황?]

[걱정돼]

등등……. 아니 휴게실에 있다고 했는데 왜 이러지? 혼란스러워서 눈을 비비고 보니 그제야 내 메시지가 전송 실패가 되어 맨 밑에 머물러 있는 걸 발견했다. 와이파이 혼선 때문인지 뭔지, 끝까지 체크 못한 내 잘못이었다. 이래서야 전화 한 통 띡 해 놓고 잠수 탄 거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푹 잤으면 벨소리도 못 듣고 잔 건가. 컨디션이 안 좋긴 했지만 어이가 없었다. 빨리 전화를 해 주려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다시 휴대폰이 울었다.

“여보세요? 정원아!”

-어디야?

목소리가 평소 같지 않고 싸했다. 엄청 화났구나 싶어 더럭 겁이 났다.

“아 진짜 미안해……. 내가 메시지 보낸 게 전송 실패된 줄 모르고…… 휴게실, 남자 휴게실인데 내가 휴게실이라고 메시지 보냈었거든? 그리고 너무 피곤해서 잠들었는데……. 일어나 보니까 실패됐다고 떠 있고…… 전화도 벨소리로 해 뒀는데도 못 들어가지고…….”

막 횡설수설하면서 변명했다.

-지금 갈 테니까 거기 있어.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아 미쳤어 나 진짜…….”

머리를 헤집으며 자책하는 사이 십 분도 안 돼서 고정원이 남자 휴게실에 등장했다. 숨이 약간 가쁜 걸 보니 뛰어온 기색이었다. 표정은 약간 굳어 보였다.

“정원아…….”

잘 하지도 않는 애교 섞인 말투로 부르며 다가가 끌어안았다.

“미안.”

문이 닫히고, 고정원의 팔이 내 등 뒤로 둘러졌다.

“걱정했어. 연락 안 돼서.”

“나는 문자가 당연히 전송된 줄 알았어. 그래 놓고 잠깐 눈만 붙인다는 게 너무 푹 자 버려서…….”

연락 안 되면 싫어하는 걸 알고 있어서 더 미안했다. 나는 연락이 안 되면 바쁜가 보다 하고 마는데 고정원은 되도록 상세하게 수시로 알리길 원하는 타입이라서.

“계속 같이 있었어?”

묻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계속 같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몰라서 눈만 깜빡대다 뒤늦게 아, 했다. 우리가 따로따로 갈라지게 된 계기가 생각났다. 김강우 때문이었지.

“아니, 계속 나 혼자 있었어.”

“언제까지 같이 있었는데?”

“…….”

왠지 모르게 추궁하는 느낌이 났다. 그냥 짧게 얘기하고 헤어진 게 전부인데 왜 이렇게 신경 쓰나 싶어서 의아했다.

“한 오 분? 정도 얘기한 게 단데…….”

그러고 보니 고정원도 김강우를 안 좋아하는 것 같긴 했다. 하긴 누가 자길 대놓고 싫어하는데 좋게 보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만.

“하…….”

대답이 시원찮기라도 한 건지, 고정원은 시선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며 한숨을 내쉬었다. 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는 눈만 이리저리 굴렸다. 무거운 무언가가 가슴을 누르는 듯했다.

“……몸은, 좀 괜찮아?”

고정원이 평소처럼 뒷목을 쓸며 물어 왔다. 몸짓은 상냥했지만 얼굴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응. 많이 가벼워진 거 같아, 잤더니.”

“……다행이네.”

바싹 마른 손이 뺨과 귀를 덮도록 휘감겼다. 익숙한 분위기가 감돌며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입술이 닿기 직전 나는 고개를 피했다.

“야아, 여기선 아니지.”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등줄기가 후끈해졌다.

“그러게.”

순순히 물러난 고정원이 고개를 숙인 채 아쉬운 투로 대꾸했다.

“나가자. 우리 수업 가야지.”

고정원의 팔을 붙들고 휴게실 밖으로 이끌었다. 여기 둘만 있다간 여러모로 아슬아슬한 상황이 벌어질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마침 교양 수업이 하나 남아 있었다.

“잠깐, 손은 왜…….”

나가자마자 예고도 없이 손이 붙들려서 당황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경 쓰여 한껏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고정원, 여기 학굔데……?”

“아무도 신경 안 써.”

그렇게 말한 고정원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잡고 태연히 걸었다. 모르는 건지 모른 척을 하는 건지. 아닌 게 아니라 지금만 해도 저기서 누가 쳐다보고 있는데…….

“아니, 실제로 사람들이 힐끔거리고 있다니까?”

아무리 알려줘 봤자 껍질처럼 단단한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움츠러들어서 걷는데 교정에서 하필 과 선배까지 만났다.

“니네 뭐해?”

왜 이렇게 사이 좋아? 하며 배를 잡고 웃어 대는 선배의 태도에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인휘야 부럽다. 나도 정원이랑 손 한 번 잡아 보고 싶네.”

“그럼 반대쪽은 누나가 잡으실래요?”

초조한 속내를 숨기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 정말? 정원아 나 잡아도 돼?”

고정원은 내 손을 힘 있게 잡았고, 그 상태로 계속 선배와 얘기를 나눴다. 긴장해서 손에 습기가 차는데도 뺄 생각을 안 했다.

애써 딴청을 부리다 겨우 둘만 남게 되었을 땐 하도 빼려고 힘을 줬던 까닭에 마주 잡은 손이 얼얼했다.

“……너 화났어?”

아까부터 왠지 화내고 있는 거 같단 생각은 했는데, 이젠 확신이 들었다.

“왜?”

“아니…….”

그렇다고 왜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손도 이렇게 세게 쥐고 가고, 내 말도 하나도 안 들어주고, 눈도 제대로 안 마주치고……. 이런 식으로 대답하기엔 무언가가 구차했다.

“화난 거 아니야. 그냥, 기분이 좀 그렇네.”

대답하는 고정원의 옆모습이 차갑게 느껴졌다.

“……나 때문이야?”

“신경 쓰지 마. 연락 안 되는 동안 계속 곤두서 있었더니 그런가봐.”

웃어 보이는데도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리고 대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 탓이라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나 때문 맞네.”

어설프게나마 어려 있던 미소가 응고되듯 서서히 굳어지는 게 보였다.

“……글쎄. 정확하게는 나 때문이겠지.”

“뭐?”

강의실에 다다르자 붙잡혀 있던 손이 풀렸다. 의미가 모호한 말을 곱씹으며 자리에 앉자, 계속 붙잡은 손에 신경 쓰느라 놓치고 있던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 근데 너 이 수업 아니잖아!”

수강 신청에 실패해서 시간표 중 유일하게 따로 듣는 교양 수업이었다.

“정정 기간에 이걸로 바꿀 거야.”

“아……, 응.”

거의 올클에 가깝게 맞췄으니 하나 정도 다른 건 그냥 두기로 했는데 그새 마음이 바뀐 모양이었다.

“…….”

가슴이 답답했다. 한숨을 내쉬고 싶은데 여기서 한숨을 쉬면 뭔가 불만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참았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엄청 분위기 좋았는데…….

슬쩍 곁눈질을 했지만 눈이 마주치진 않았다. 표정 없이 내리깐 눈이 서늘한 나머지 도무지 말을 붙일 만한 용기가 안 났다. 다정한 원래 성격이랑 대조돼서 저기압일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더 어려운 거 같았다. 가끔 있는 일이라서 적응도 안 되고, 눈치만 보게 되고.

그냥 아까 휴게실에서 뽀뽀하려는 거 받아 줄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하며 살며시 책상 아래로 손을 뻗었다. 손톱을 세워 장난스럽게 허벅지를 긁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후…….”

참았던 한숨이 살짝 비어져 나왔다. 수업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 * *

냉랭한 기류는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수업이 일찍 끝난 뒤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우리는 무슨 기숙사 룸메이트처럼 각자 할 일만 할 뿐, 다른 때처럼 딱 붙어서 뒹굴거나 얘기를 나누는 일은 없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계속 풀어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말을 걸어도 길게 이어지지 않는 데다 눈도 잘 마주치지 않으니 기가 죽어서 딴청만 피우게 됐다. 말투가 아무리 평상시처럼 다정해도 거기에 깃든 분위기나 표정 같은 게 싸늘해지면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정원아 배 안 고파?”

“난 괜찮아.”

먹고 싶으면 먼저 먹어. 하고 말하는 고정원은 심지어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휴대폰에 시선을 박은 채였다.

“…….”

갑자기 섭섭함이 솟구치려 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등 뒤에 딱 달라붙어서 화장실까지 따라오려고 했을 거면서…….

전화 한 통 달랑 해 놓고 의도치 않게 두 시간 가까이 연락두절이 돼 버린 건 나도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그런데 정말 사고 같은 거였고,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였으니 금방 이해해 줄 줄 알았다. 그리고 확실히 내 잘못이지만 고정원이 너무 연락에 민감하니까 별일 아닌 거에도 화가 난 거 아닌가? 하는 약간의 반발심 비슷한 것도 없잖아 있었다.

‘……글쎄. 정확하게는 나 때문이겠지.’

순간, 교양 수업을 듣기 전에 고정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기분이 안 좋은 게 나 때문이 아니라 본인 때문이라고 했었다.

그게 그런 의미로 한 말이었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 아래쪽에 등을 보이고 기대 있는 고정원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연락이 잠시만 안 돼도 신경이 쓰여서 초조해지고 곤두서는 기분이 정확히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나도 고정원이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면 걱정되고 일이 손에 잘 안 잡힐 거 같긴 했다. 고정원은 그게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심할 뿐인 거겠지.

“하…….”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내쉬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곧 쓸데없는 눈칫밥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정원은 돌아볼 기미도 없이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다가 이내 노트북을 가져와 헤드폰까지 끼고 화면에 집중했다.

“……아예 차단 먹이냐.”

중얼거리며 서운한 마음을 토로했다.

아, 차라리 대놓고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솔직하게 말을 하면 편할 텐데. 냉전 같은 분위기만 조성해 놓고 아무런 액션이 없으니 움츠러들어서 뭘 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화가 났다면 아마 집에 같이 들어오지도 않았을 텐데 또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기분이 많이 가라앉아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

잘생긴 옆모습과, 두툼한 뒷목에서 이어지는 넓은 어깨 라인을 한눈에 훑었다. 웃긴 게 매일같이 보는 모습인데도 닿지를 못하니 그림의 떡처럼 아쉽게 느껴지는 게…… 지금이라도 당장 저 끌어안고 매달리고 싶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뱃속이 근질거리고 있었다. 관심 가져 달라는 듯이 한참 시선을 보낸 끝에 포기하고, 먼저 슬금슬금 침대를 기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어깨에 손을 얹으려고 몇 번이나 접근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답답함에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뒷모습부터 벽이 세워진 느낌에 기가 팍 죽었다.

이럴 땐 어떡해야 하나. 막막해서 머리카락만 잡아당기며 냉기가 도는 뒷모습을 곁눈질했다. 살짝 터치하거나 장난을 걸어 보는 건 학교에서부터 했던 거라 더 해봤자 소용도 없을 것 같았다. 원래도 애교가 없는 성격인데 아까 나름 큰맘 먹고 애교랍시고 한 게 안 먹히니까 사기가 꺾였다 해야 할지. 또 변명을 하자면 집에서도 이쁨 못 받는 천덕꾸러기 같은 막내였고, 여태 연애도 못 해 보고 지금이 모든 게 처음이다 보니 살가움이나 애교의 기술 같은 게 한참 빈곤했다.

그 후,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는 웹툰을 보다가 어느새 본능적으로 검색창에 글자를 입력하고 있었다.

‘남자친구 화났을 때’

애인 때문에 골머리 앓는 사람들이 많은지 유사한 제목의 고민들이 넘쳐나서 놀랐다. 정확도 순으로 정렬된 글을 위에서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

좋아하는 거 해 주기, 맛있는 거 사 주기, 데리고 나가서 데이트…… ㅅㅅ? 시옷시옷은 또 뭐지.

애교, 볼 잡고 뽀뽀해 주기, 안아 주기…… 가슴 만지게 해 주기? 미친…….

대단한 팁까진 아니어도 나름 유용한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결과는 기대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이런 게 먹힌다고? 여기 답변 단 놈들 전부 나 같이 모쏠이면서 박식한 척 거짓말 치는 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들었다.

돌겠네 정말…….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기엔 아는 게 쥐뿔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답안을 참고해서 다시 검색해 보기로 했다. 애교, 뭐 이런 건 잘못하면 역효과 날 수도 있을 거 같고 밖으로 나가서 같이 놀고 기분 전환하는 건 나쁘지 않을 듯했다.

‘데이트 장소 추천’을 입력해 넣자 밑도 끝도 없이 방대한 양의 정보가 서칭됐다. Top10을 모아 두었다는 블로그 게시물 하나를 열어서 쭉 훑어보았다. 그중엔 방학 때 디자인과 여자애들이랑 다 같이 갔던, 우리가 사귀는 계기가 된 의미 있는 추억의 장소도 들어 있어 새삼스런 기분에 젖었다.

“…….”

그러고 보니 우리가 데이트라고 할 만한 데이트를 해 봤었나.

외식도 자주 하고 심야 영화 같은 것도 종종 보긴 했는데. 소소하게는 몰라도 여기 인터넷에서 나오는 것처럼 제대로 데이트 느낌 내며 정석적인 코스대로 놀아 본 적은 딱히 없는 것 같았다.

사귄 이후로 둘만 여행을 갔던 건 딱 한 번, 고정원이 서핑을 가르쳐 주겠다고 해서 멀리 나간 적이 있긴 했다. 다만 내가 주변 사람들 시선을 너무 의식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딱딱해져서 제대로 놀진 못했다. 사귀기 전엔 안 그랬는데 사귀고 나니까 사람들이 우리가 어떤 사인지 알아볼까 봐 불안해져서 작은 스킨십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여하튼 총체적으로 어색하게 굴고 말았다. 고정원도 그걸 눈치채고 그 후에 어디 가잔 말을 잘 안 했고.

아, 나 왜 이렇게 찌질하냐.

갑자기 미안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오늘 연락 두절된 것도 그렇지만 사람들 앞에서 너무 몸 사리듯이 굴었던 것도 어쩌면 속상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밖에선 최대한 티 안 내고 싶은데 반대로 고정원은 사람들 생각보다 다들 남 일에 관심 없다면서 대놓고 스킨십을 하고 싶어 하니까…….

안 되겠다. 생각할수록 미안해서 마음을 굳게 먹고 한참 동안 검색으로 좋은 장소를 물색했다. 안 좋은 감정들이 싹 풀릴, 완전 기억에 남을 만한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마침내 다소 뻔하긴 하지만 기분 내기 딱이다 싶은 장소를 찾았을 때 나는 적극적으로 고정원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정원아, 정원아.”

헤드폰을 아래로 끌어내린 고정원이 뒤돌아봤다. 나는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급박해져서 말했다.

“나가자.”

이미 반나절 가까이 지나가긴 했지만 지금부터 신나게 놀기엔 충분할 거 같았다.

* * *

“어때?”

고정원의 입안으로 조각난 돈가스가 한 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 물었다. 스테이크를 먹는 것처럼 고상하게 씹어 삼킨 고정원이 ‘맛있어.’ 말하자 안심이 되면서 나도 한 입 썰어 입에 넣었다.

“오, 내 것도 맛있다. 먹어 볼래?”

“응.”

먹기 좋게 잘라서 그릇에 놓아 주려던 때, 고정원이 고개를 숙여왔다. 따라가듯 자연스럽게 입안에 넣어 주고 나서야 좀 남사스러운 그림이 연출됐음을 자각했다.

기분이 좀 풀렸나……?

등줄기가 뜨끈해진 걸 느끼며 맞은편을 힐끔거렸다. 여전히 다른 때보다 잘 웃지도 않고 무뚝뚝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집에 있을 때보다 확실히 나아진 것 같기는 했다.

“먹어 볼래?”

내가 자꾸 쳐다보니까 먹고 싶은 줄 알았는지 고정원이 돈가스를 썰다 말고 내게 물었다. 아니, 하고 대답하려 했는데 보기 좋게 썰어진 고기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내밀어졌다. 거절하기도 그래서 잽싸게 입을 벌려 받아먹고 맛있단 의미로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으아……. 서빙중인 종업원이랑 눈이 마주쳐서 물을 들이켰다. 남자끼리 막 서로 입안에 넣어 주고 그러는 거 흔한 광경은 아니겠지.

아무래도 집을 나설 때의 결심과 다르게 자꾸 소심해지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앞으로 볼 사람들 아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들이다’ 주문을 외우며 마음을 다잡았다.

“원래 치즈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맛있다.”

고정원이 시킨 건 매운 거였고 내 건 치즈였다. 보면 고정원은 기름지고 느끼한 건 별로 안 좋아하는 입맛이었다.

“반씩 나눠 먹을까?”

“아냐, 그냥 한 입만 더 먹고 싶은데.”

그릇 째로 내밀려다가 한 입만 먹고 싶다는 말에 끄트머리만 썰었다. 설마 아까처럼 입에 넣어 달란 건가, 혼자 고민 아닌 고민을 하며 고개를 든 순간 쳐다보고 있는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

아깐 그냥 얼떨결에 입안에 넣어 준 거였다. 두 번은 못할 거 같은데…….

하지만 고정원이 상체를 숙여 오며 입을 벌리자 반사적으로 돈가스를 가져다 넣어 주고 있었다.

살짝 흘러내린 치즈가 입안으로 깔끔하게 들어가는 장면이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입안의 음식을 씹는 입가가 단정하고 점잖았다. 내리깐 눈의 가지런한 속눈썹까지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한 번 더 눈이 마주치면서 퍼뜩 시선을 떨궜다.

달그락 달그락, 소릴 내며 급하게 고기를 썰었다. 사귀는 사이기도 하고, 먹는 모습쯤이야 쳐다볼 수도 있는 건데 몰래 훔쳐보다 걸린 것처럼 당황하는 스스로가 촌스럽게 느껴졌다.

간신히 진정을 하고 고개를 들자 식사는 이미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너무 급하게 먹었나. 얘기를 나누면서 도란도란 먹으려고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서 당황스러웠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남은 계획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향한 곳은 화장실이 아니라 카운터였다. 이번만큼은 고정원이 계산하지 못하게 화장실에 갔다 오는 걸 핑계로 선수를 칠 예정이었다.

“……생각지 못하게 얻어먹었네. 맛있게 잘 먹었어.”

내가 미리 지불한 걸 알고 고정원은 처음엔 좀 당황하더니 곧 그렇게 인사해 왔다. 내가 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서 인사 받기도 면구스러운 수준이었다. 나는 ‘담엔 더 맛있는 걸로 사 줄게.’ 하고 멋쩍게 되받아쳤다.

식사를 하고 난 뒤에는 티켓을 끊어 케이블카에 탑승해 타워를 향했다. 놀이공원 관람차처럼 둘만 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들긴 해도, 여럿이 타니 들뜨고 북적북적한 게 싫진 않았다. 다들 바깥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살그머니 손을 잡았다 놓기도 했다.

“생각보다 빠르다 그치?”

“그러네.”

대답하면서도 고정원은 바깥이 아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입 끝엔 미미한 미소도 머금은 채였다. 많이 누그러져 보여서, 안심이 된 나는 그만 쓸데없는 소리를 내뱉어 버렸다.

“나한테 화난 거, 풀렸어 이제?”

“…….”

굳어지는 입매와 초점이 흐릿해지며 내가 아닌 야경 쪽으로 향하는 시선, 그리고 두어 번 깜빡이는 눈짓으로 나는 상대의 동요를 읽었다. 누그러져 있던 고정원의 표정은 지금까지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 듯 단숨에 굳어져 있었다.

눈앞의 널따란 가슴팍이 공기를 한껏 머금으며 부풀었다 꺼졌고, 음량을 최대치로 죽인 듯한 옅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풀리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

“너한테 화난 적 없어 인휘야.”

다시금 눈이 마주쳤다.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이전과는 달라서 나는 실언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어, 그렇구나…….”

대꾸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냥 유하게 넘어갈 분위기에 실없는 소릴 해 가지곤. 속으로 후회하며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풍광을 열심히 쫓았다.

기껏 부드러워진 공기가 다시금 빽빽하게 조여 오는 걸 느꼈다. 펼쳐진 풍경은 액자 속 사진처럼 무감하게 다가왔고, 빠르다고 생각했던 케이블카의 속도는 갑자기 느릿하게만 느껴졌다.

“사진 찍어 줄게.”

케이블카에 내려서는 배경이 예쁜 곳에 고정원을 세워 놓고 카메라를 들이댔다. 대단한 장관은 아니었지만 탁 트인 전망이나 사방에 우뚝 선 나무들, 한쪽으로 세워진 돌담이 자연스럽게 멋졌다.

“같이 찍어, 혼자 찍는 게 무슨 의미야.”

잘 찍어 주고 싶어서 붙드는 팔을 떨쳐 내고 멀찍이 떨어졌다.

“먼저 한 장만 찍어 줄게.”

전신이 나오도록 최대한 뒤로 가서 프레임을 조정했다. 화면의 가운데에 길쭉한 실루엣이 잡혔다. 역시나, 굳이 다리가 길게 나오게끔 이리저리 카메라를 틀 필요 없이 속편한 기럭지였다. 나만 감탄하는 게 아닌지, ‘저 사람 연예인 아니야?’ 하는 말소리가 등 뒤에서부터 얼핏 들려오기도 했다.

“…….”

같이 다닐 때 주목받는 느낌이 괜한 게 아니라니까…….

“같이 찍자 이제.”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찍어 달라고 하고 싶진 않아서 셀카 모드를 켰다.

키 차이를 맞추기 위해 고개를 숙인 고정원이 얼굴을 기대다시피 가까이 붙여 왔다. 거리감과 포즈 때문인지 연인 느낌이 풀풀 풍기는 사진 한 장이 찍혔다. 누가 볼까 황급히 저장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올라가자.”

“잠깐만.”

가려다 말고 어깨가 가볍게 끌어당겨졌다.

“이번엔 내 걸로 찍고 싶어서.”

위로 처든 고정원의 휴대폰 액정에 우리 둘의 투샷이 잡혔다. 찰칵, 찰칵, 소리가 나며 두어 장이 찍힌 뒤에도 몇 번이고 구도를 바꿔 가며 셔터가 눌렸다.

“가자.”

몇 장을 더 찍고서야 만족한 듯 고정원이 카메라를 내렸다.

“…….”

밖에서 둘이 이렇게 셀카를 많이 찍은 건 처음인 거 같았다. 다른 커플들이 왜 어딜 갈 때마다 그렇게 사진을 찍어 대는지 조금 알 거 같았다. 순간을 기록해 두고 싶기도 하고, 사진 찍으니까 데이트 느낌이 몇 배로 상승되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랬다.

“으앗!”

앞서 간 고정원을 따라가는데, 일순 어깨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몸이 뒤로 확 밀렸다. 깜짝 놀라 얼굴을 들자 옆을 스쳐 가는 한 커플이 보였다.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가는 남자 쪽과 어깨를 부딪친 듯했다.

다행히 넘어질 뻔한 걸 고정원이 붙잡아 줘서 모면하긴 했다. 똑같이 부딪쳐 놓고 나만 날아가듯 밀려났으니 아프고 불쾌한 것보다 민망함이 더 컸다. 잘잘못을 따질 일도 아니고, 그냥 가려던 찰나였다.

숨 한 번 고른 사이 앞서 나간 고정원이 남자의 어깨를 붙들어 돌려세우고 있었다.

“어, 야 고정원 너 왜……!”

말리려 목소릴 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뒤였다.

“에?”

거칠게 붙잡혀 돌아본 남자가 얼빠진 소릴 냈다.

“사람 치고 갔어요.”

정중하다면 정중한 어조였다. 하지만 보고 있는 나도 별안간 얼어붙을 만큼 위압적이어서 눈이 크게 뜨였다. 상대 쪽 여자도 놀랐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다.

“아…… 미안합니다.”

내 쪽을 힐끗 돌아본 남자가 고개를 어정쩡하게 숙여 왔다. 나도 모르게 맞인사하듯 어설프게 고개를 숙여 묵례했고, 남자가 잽싼 걸음으로 여자와 함께 황망히 떠난 걸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왜 그랬어, 괜찮은데.”

눈이 마주치자 공연히 탓하는 말이 나갔다. 좀 부끄러워서 그랬다. 고맙기도 하고.

“안 다쳤어?”

“응.”

고정원의 손이 내 어깨를 감싸면서 그대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스킨십이라기 보단 마치 보호해 주는 느낌이 강했다. 평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데이트 명소라 사람이 꽤 많았다. 방금처럼 인파에 또 치일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미안, 밖에서 이러는 거 싫어하지.”

얼마 안 가 감싸고 있던 온기가 떨어져 나갔다.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신경이 쓰이고 있었던 건 맞지만…….

허전함을 못 참고 한 걸음, 쭈뼛대며 다가갔다. 떨어져 걷는 고정원에게 바싹 몸을 붙였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매달리는 것처럼 무게를 실었다.

얇은 옷감을 사이로 맞닿는 피부가 느껴졌다. 팔뚝 부근에 있던 손을 내려서 손목을 붙들었다가, 다시 올라가서 팔꿈치 부분을 붙들었다가 했다. 장난치는 것처럼 몸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붙이기도 하면서 그렇게 계단의 정상까지 올랐다.

“나오니까 좋다. 그지?”

계단을 올라 타워 주변을 구경하면서 고정원에게 물었다. 솔직히 생각보다 볼 것도 별로 없는 거 같고, 여러모로 불안해서 떠본 거였다. 데이트 장소를 물색할 때 넘쳤던 의욕과 다르게 막상 나오니 자신감이 자꾸만 꺾이고 있었다.

“응 좋다, 경치도 예쁘고.”

다행히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면서 내가 스킨십을 하고 치댔던 게 좋았던 걸까? 표정도 눈에 띄게 부드럽고 평소 모습에 가까웠다.

“…….”

붙어서 걷다 보니 계속 어깨가 부딪히고 손등이 스쳤다. 함께 걸으면서도 나는 이따금씩 중간 점검하듯 고정원의 얼굴을 살폈다. 힐끔, 올려다 볼 때마다 눈이 마주쳤고, 그때마다 다정한 웃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너 이제 진짜 완전히 풀어진 거지?’ 하고 물으려다 말고 입을 합, 다물었다. 또 실수할 뻔 했네. 아까 케이블카 안에서도 쓸데없이 풀렸냐느니 어쨌냐느니 해서 괜히 분위기만 묘해졌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모른 척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렇게 넘겨야 할 거 같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느릿한 걸음으로 가장 구석진 자리까지 걸어가,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

“우……와, 멋있다.”

카메라 프레임 속에 야경이 멋지게 잡혔다. 각도를 다르게 몇 장이나 풍경을 찍고, 몰래 도촬도 했다.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분위기 있는 남자가 카메라 안에 들어오자 새삼 홀리듯이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고 옆모습을 찍자마자 화면 속 고정원이 입을 열었다.

“미안.”

“……응?”

“오늘 미안했어. 내가 신경 쓰이게 했잖아 계속.”

“…….”

마주 본 상태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일순 잘못 들은 건가 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과라서,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색하게 휴대폰만 만지작대며 눈을 굴렸다.

“인휘도 알다시피, 내가 연애에 서툴러 많이.”

자조하듯 웃으며 말하는 걸 보니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과는 받고 싶지도 않았던 데다…… 오늘은 정말 즐겁게만 해 주고 싶었어서 지금 이 상황이 뭔가 안타까웠다.

“하나도 안 서투른데 왜? 나야말로 처음……”

……이 아니라. 위로해 주려다 말실수할 뻔한 걸 넘기고 황급히 수습했다.

“그, 처……음 연애 했던 때 생각도 나고……. 뭐…… 원래 사귄다는 게, 할 때마다 어려운 거잖아…….”

시선을 떨군 채로 발끝을 땅에 문질렀다. 미약하게 부는 바람이 피부를 스쳤고, 등 뒤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별안간 고개가 들렸다. 고정원의 손이 내 뺨을 감싸 쥐고 올린 까닭이었다.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어.”

“……뭐?”

메마른 손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 드러난 목덜미를 감쌌다. 고개를 살짝 비틀어 보이지도 않는 등 뒤를 힐끗거렸다. 구석이긴 해도 뒤에서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을까 봐 불안해서였다.

“……방학이 좀 더 길었으면 좋았을 걸.”

아쉬움이 묻어난 목소리는 유독 낮았다. 나한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어서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가라앉은 두 눈이 내게 박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

“그렇게 되면 넌 갑갑했으려나.”

“……어?”

되묻자마자 고정원은 내게서 손을 뗐다. 그리고 별 말 안 했다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만 내려가자.”

“…….”

아…….

아직 하려고 계획해 둔 것들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데.

좀 더 즐겁고 제대로 추억이 될 만한 이벤트가 안 나온 거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흐름에 그저 말없이 뒤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교통 상황, 체감 날씨, 신청곡 기다릴게요!’

돌아가는 차 안엔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문자는 샵 1115, 짧은 건 50원 긴 건 100원! 모바일 메신저는 무료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정해진, 암묵적인 습관이었다.

나는 적막한 거보단 시끌벅적한 게 좋고 남의 사연 듣는 것도 좋아해서 이런 종류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몇 개 챙겨 듣는 편이었다. 그에 반해 고정원은 라디오에 관심이 없었다. 보통 클래식이나 잔잔한 올드팝만 듣는데, 최근 들어 이렇게 내 취향에 맞춰서 차에 타면 꼭 라디오를 틀고 있었다. 혼자 운전하면서도 종종 듣는지, 라디오에서 알게 된 웃긴 사연 같은 걸 나한테 말해 주기도 했다.

“한숨 자.”

운전하던 고정원이 이쪽으로 한번 시선을 주고 말했다.

“안 졸려 하나도.”

일부러 눈을 크게 뜨고 껌뻑대며 대답했다. 고정원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고, 싱거운 행동을 한 나도 곧 따라 웃었다.

“…….”

차는 막히지 않고 순조롭게 달렸다. 앞으로 밀리지만 않는다면 아마 삼십 분 안으로 집에 도착할 것 같았다.

이대로 그냥 돌아가는 건가.

왠지 모르게 허무했다. 초조한 감도 있고. 실은 타워에서 내려오기 직전에 들었던 말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를 않아서 찝찝한 상태였다.

‘……방학이 좀 더 길었으면 좋았을 걸.’

‘그렇게 되면 넌 갑갑했으려나.’

그 말이 알 듯 모를 듯했다.

나는 밖을 내다보는 척하면서 내내 차창에 비친 고정원을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궁금했다. 그 와중에 손을 잡고 싶은 욕구가 불쑥 생겨나기도 했다. 사람들 눈 신경 쓰느라 못했던 것들에 미련이 남아 있었다.

“있잖아…….”

조심스럽게 입을 떼자 ‘응?’ 하는 대답이 따라왔다.

“집에 들어가지 말까?”

말하고 나자 ‘하하하하하…….’ 라디오 광고에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끼어들었다.

“……왜?”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고정원이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거기 갈래? 그……”

모텔…….

모기만 한 소리로 제안했다. 먼저 가자고 말하는 건 처음이라서 좀 많이 쑥스러웠다. 고정원의 경우 ‘쉬러 가자’고 하고 모텔로 데려가곤 했는데. 나는 너무 무드 없이 대놓고 ‘모텔’이라 말한 건가 싶기도 했다.

“……그냥 집에 가자. 오늘 아침부터 힘들었잖아.”

짧은 침묵이 스쳐 지나간 뒤 돌아온 건, 의외로 거절이었다.

“안 힘들어. 괜찮은데 난?”

연달아 하니 체력이 바닥나서 학교에서 곯아떨어진 건 맞지만 지금은 쌩쌩했다.

“억지로 그럴 필요 없어.”

“억지로 아니야. 진짜, 내가 가고 싶어서 그래.”

다른 때 같았으면 피곤하다고 밀어내도 했을 거면서. 빙빙 돌려 거절하니 나도 울컥하게 됐다.

“맞춰 주려고 노력하는 거 고맙긴 한데…… 그럴 필요 없어 인휘야.”

딱딱하거나 차가운 말투는 아니었다. 배려가 깃든, 특유의 다정한 어조였다. 그런데도 속이 상했다. 진짜 아닌데. 맞춰 주려고 이러는 거 아닌데.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

정수리에 커다란 손이 한 번 얹었다 떨어졌다. 애정 표현이라기보다 여기서 그만하자는 제스처란 걸 알겠어서 확 빈정이 상했다. 방법이 부드럽다고 해서 거절당한 기분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니까.

왜 남의 진심을 맘대로 판단하는지 모를 일이라고, 억울한 맘을 억누르며 휴대폰을 꺼내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음량을 최대치로 키웠고, 그 탓에 라디오의 음악 소리와 함께 차안이 시끄럽게 울렸다.

한참 달리던 차가 서서히 느려진 건 신호 때문이었다. 미끄러지는 것처럼 스무스하게 차체가 정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임은 패배를 알리는 전자음을 내며 화면에 ‘YOU LOSE’라는 메시지를 띄웠다.

“…….”

집중을 하지 못하니 번번이 지고 리셋될 뿐이었다. 이어서 하려고 버튼에 손을 올렸지만, 끝내 종료시키고 말았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홧김에 손을 뻗은 곳은 운전석이었다.

“……진짜 하고 싶단 말이야. 내가 하고 싶다고.”

탄탄한 허벅지를 붙들고 손에 힘을 주었다. 또한 대담하게 밀어 넣어 중심부에 올렸다. 움켜쥐고, 살살 쓰다듬기까지 했다.

“…….”

얇은 슬랙스 안쪽이 순식간에 거대하게 부풀어 깜짝 놀랐다. 물론 반응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거의 완전한 형태로 몸을 키우고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손바닥 아래서 맥박 치는 것까지 생생했다.

“하…….”

들려오는 한숨 소리는 나직하고 깊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초조해져서, 슬그머니 손을 떼어 놓았다.

“그래. 들어가지 말자.”

하는 음성이 어딘가 화난 것처럼 들렸다.

때마침 신호가 바뀌면서 차가 출발했다. 속력이 붙은 운전과 무섭게 팽창한 중심을 보며 괜한 짓을 한 건 아닌가 뒤늦은 생각이 들었다.

* * *

객실 문이 닫히고 키가 꽂히며 불이 밝혀지자마자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나는 고정원에게 밀려나고 또 밀려났다. 아무렇게나 벗은 신발이 현관을 뒹굴었고, 신이 제대로 벗겨지지도 않은 채로 급하게 뒷걸음질 치다 자칫 넘어질 뻔했다.

점점 침대 쪽으로 가까워질 때마다 옷이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껍질 벗기듯 내 옷을 벗겨낸 고정원은 본인의 옷도 하나씩 손쉽게 벗어던졌다. 티셔츠를 하나 벗고 나면 다시 입술이 부딪혔고 바지를 벗고 나면 또 다시, 그런 식으로 쉼 없이 키스가 이어졌다.

“……하아, 하…… 하…….”

거칠어진 숨소리가 어느 순간 귓가에 또렷하게 들려오면서 깜짝 놀랐다. 내가 이렇게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만큼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잠깐이라도 입술이 떨어지면 차오른 호흡을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어느덧 한데 엉켜 풀썩 침대로 떨어졌다. 몸이 겹쳐지자 육중한 몸이 한층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아까부터 귀 뒤쪽을 집요하게 빨아 대고 있는 고정원의 어깨를 탁, 탁, 내리쳤다.

“야, 잠, 깐…… 씻고…… 먼저 씻고……!”

애무라기 보단 꼭 먹어치우는 것처럼 게걸스럽게 빨아 대는 통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계속 돌아다녀서 땀 냄새가 날 텐데. 신경 쓰여서 초조해하는 나를 아랑곳하지도 않고 고정원은 전에 없이 이상한 행위에 집중하고 있었다.

“앗……!”

더운 입김이 관자놀이를 지나쳐 눈가로 다가와 이게 뭔가 싶었다. 뜨뜻하고 축축하게 둥글려지는 감촉이 낯설어 숨을 죽였다.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감기도 했다. 속눈썹이 젖어들고 뺨은 좀 더 느긋하고 오래 희롱당했다. 인중, 그리고 코까지 입술이 다가왔을 땐 긴장으로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했다.

“하……, 정워……아……!”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차례로 먹혔다. 각도를 바꿔 가며 입안에 넣고 빨고 혀로 음미하는 게 ‘먹혔다’고밖엔 표현이 되질 않았다. ‘혀 내밀어.’ 하고 바닥까지 갈라진 소리로 명령하면 생각할 새도 없이 혀가 내밀어졌다.

“으, 아……!”

힘들어서 입가로 침이 줄줄 새도록 질척한 키스가 끝나고 나자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고정원이 흐릿한 시야로 보였다.

“왜 벌써 울어.”

눈가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다정했다.

“몰라. 무서워.”

입맞춤이 하도 길어 숨이 막히면서 눈물이 고인 것뿐이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그렇게 말이 나갔고, 뒤늦게 무섬증이 자각되며 또 다시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하지 말자는 사람한테 떼써서 여기까지 와 놓고 막상 하게 되니 무섭다고 울먹이고 있는 내 자신이 나도 황당했다. 근데 고정원이 자꾸 낯설게 느껴져서……. 우리끼리 사랑을 나누면서도 가끔씩, 이런 건 도가 지나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긴 했지만 오늘은 시작부터 유난히 감당하기가 버거운 느낌이었다.

“집에 가고 싶어졌어?”

“…….”

……이대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 생각해 봐도 그런 건 아니라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보였다. 게다가 무섭다고 느끼는 것과 상관없이 이미 몸은 흥분해서 아래는 발기해 있었다. 그저 좀만 더 차분히…… 여유 있게 했으면 싶었다.

“천천히…… 하면 안 돼?”

어색해서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리고, 안 씻어서…… 신경 쓰이니까…….”

씻고 오면 안 되냐는 말을 하려고 했다.

“어…….”

양팔이 만세 하듯 위로 치켜 올라갔고, 팔과 옆구리를 잇는 깊숙한 곳으로 더운 열기가 끼쳤다. ‘으, 아……!’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뱉으며 허리를 틀었다. 젖은 혀가 움푹 팬, 예민한 부위를 천천히 훑어 올라가고 있었다. 마지막에 춥, 하는 척척한 소릴 내며 빨아 올려지자 눈가로 벌겋게 열이 번졌다.

“달콤한 냄새밖에 안 나.”

선이 미끈한 코가 팔 안쪽을 스치고 말할 때의 더운 입김이 연약한 곳으로 흩뿌려졌다. 축축하고 야릇했다. 눈이 다시금 굳세게 감겨서 떠질 줄을 몰랐다.

“……그런 데, 빨지 마.”

수치심을 참고 간신히 웅얼거렸다. 겨드랑이라니, 치부만큼이나 부끄럽다.

“왜,”

나는 좋아서 환장할 거 같은데.

지독하게 낮은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것조차도 더러운 곳을 파고드는 애무처럼 느껴져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며 반응했다.

“흐으……!”

아랫입술을 깨물어 가며 수치심과 사투를 벌였다. 양쪽 겨드랑이에서 한참 머물러 있던 고정원의 입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 배꼽과 체모의 주변, 그리고 다리 안쪽으로까지 옮겨 왔다. 살과 살이 접혀 땀과 체취가 고이기 쉬운 부분마다 끈질기게 빨아올리고 농락해 댔다.

보일 건 다 보이고 할 건 다 해 봤으니 부끄러운 건 이제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정원아, 정원아……!’ 부르며 몸을 뒤틀었다. 한참을 더 부르자 그제야 아래를 다 맛보고 올라온 고정원이 뜨겁게 타고 있는 내 귓가에 쪼듯이 입을 맞췄다.

목 뒤로 팔을 감고 다짜고짜 키스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꼭꼭 옭아매고 적극적으로 입술끼리 비볐다. 방금 천천히 하자고 내 입으로 말해 놓고 마음이 급해서 더듬더듬 아래로 손을 뻗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내버려 두느니 내 쪽에서 먼저 나서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속내 때문이었다.

“내가…… 내가 해 줄게…….”

입술이 떨어진 짧은 틈에 가까스로 의사를 표시했다. 싫지 않았는지, 묵직한 몸이 순순히 비켜나 준 덕에 아래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

다리 사이에 엎드리자 익숙한 체취가 보다 진하게 느껴졌다. 성기는 역시나 거대하게 기립해 있었다. 볼 때마다 더 커 보이는 건 대체 왜 그런 건가…… 짧게 고민이 스쳤다.

만져 주기 원하는 것처럼 음험하게 끄덕거리는 음경을 한손으로 붙잡았다. 좀 버겁기에 양손을 썼다. 그리고 내 걸 만질 때처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끝에서 나오는 체액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쪽, 입을 맞추자 배와 허벅지까지 일시에 근육이 꿈틀댔다. 성기는 어느새 배에 바싹 달라붙을 만큼 흥분해서 아파 보이기까지 했다.

“하…….”

인상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는 고정원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만져도 반응이 왔다. 탄탄한 가슴팍과 배가 연이어 솟았다 꺼지는 게 꼭 화난 사람 같았다. 나로선 평생 가질 수나 있겠나 싶은, 완벽한 근육으로 꽉 짜인 복부를 슬슬 쓰다듬으며 입술은 뜨거운 성기에 문질렀다.

한쪽 다리가 세워지며 근육들이 잔뜩 들썩거린다는 건 알았는데. 순간 느닷없이 몸을 일으켜 입을 맞춰 오려 하기에 고개를 피했다. 뭐에 꽂혔는지 흥분한 고정원을 밀어내며 ‘더 해 주고 싶단 말이야. 그냥 누워 있어.’ 하고 간신히 만류했다. 여기서 또 주도권을 뺏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

차라리 한 번 사정하고 나면 좀 가라앉지 않을까 싶었다. 두 번째부턴 그래도 진정이 되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눈물이 고이도록 깊숙이 머금어 가며 빨기를 수 분째였지만, 뭐가 잘못됐는지 고정원은 쉽게 사정하질 않고 있었다.

중심의 주변까지 꼼꼼하게 핥아 가며 유도했다. 음모에 입술이 닿았을 때 숨이 거칠어지기에 샅샅이 문질러 댔다. 체취가 진하게 풍겼다. 그게 싫긴커녕 뭔가 야릇하게 느껴져서…… 아까 고정원이 왜 그렇게 더러운 곳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코를 박아 댔는지 뒤늦게 이해가 갔다.

얼마 안 가 탁하고 끈끈한 정액이 터져 나왔다.

거친 숨을 내뱉던 고정원이 내 뒷목을 끌어당겼다. 키스하려는 시도를 눈치 채고 다급하게 가슴팍을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누. 누워 있어 그냥. 오늘은 내가 다 할게.”

아예 위로 올라타 무게를 실어 버렸다.

“…….”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고정원이 보였다. 한 번 가고 난 뒤라서 그런지 나른한 분위기까지 더해 있었다. 꿀꺽, 침을 삼키고 올라탄 채 앞뒤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엉덩이 사이로 닿은 것이 곧장 빠듯하게 부풀어 사이를 채워 왔다.

“으…….”

끈적한 것들끼리 비벼지며 날 법한 젖은 소리가 났다. 넣어야 하는데, 아직 엄두가 안 나서 비비고만 있는 중이었다. 감질나는 유사 접촉에 고정원이 내 엉덩이를 양쪽으로 한껏 벌리며 안달 난 티를 냈다.

가서 젤을 가져와야 할 텐데, 내가 주도하고 있는 흐름을 놓치고 싶지가 않아서 이대로 뜸만 들였다. 그냥 넣기엔 빡빡할 것 같고…… 망설이다가 입안에 손가락을 넣어 축축하게 만든 후에 뒤로 가져갔다. 쳐다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후끈한 열기가 올라오는 걸 느끼며 깊숙한 곳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이물감에 입가에 힘을 주었다. 두 개까지 밀어 넣고 원을 그리듯 움직여 보았다. 그래도 삼 일째 연달아 해서 그런지 녹녹하게 풀어져 있는 편이었다.

“넣을, 게…….”

축축하고 뜨거운 기둥을 잡고 입구에 끄트머리를 맞췄다. 이 자세로 넣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잘 감이 오지 않아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성마르게 달아오른 손이 허벅지를 연신 쓸면서 재촉하는 몸짓을 보였다.

힘겹게 끄트머리를 밀어 넣고 엎드려 고정원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댔다. 등을 쓰다듬어 주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엉덩이 한쪽을 벌렸고 힘이 들어가며 좀 더 연결이 깊숙해졌다.

“흐으…….”

우는 건 아닌데 우는 소리가 났다.

“내가 할까?”

쪽, 하고 귓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 고정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아니 내가, 할래…….”

머리까지 저어 가며 거절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뒤로 눌러 앉으며 안으로 조금씩 부담 없이 밀려들어 오게끔 만들었다.

“하…….”

완전히 들어오게 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느릿한 한숨이 터졌다. 이마 옆으로 땀이 비죽, 흘렀다. 이어진 것을 의식하며 조심조심, 고정원이 상체를 일으켰다. 등 뒤로 받쳐지는 손을 느끼며 나도 팔을 뻗어 옭아매듯 껴안았다.

“좋아…….”

만족감에 젖어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그러자 고정원이 조급하게 키스를 원해 와서 전부 받아 주었다. 입술이 떨어졌을 무렵엔 꽉 들어찬 뱃속이 한결 편안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코끝끼리 비비고, 장난치는 것처럼 입술을 조금씩 붙였다 떼길 되풀이하며 가벼운 애정 표현이 이어졌다. 끊임없이 휘몰아치다 겨우 찾아온 여유였다.

“좋아……?”

허리를 서서히 움직이며 물었다. 늘 받기만 하던 질문을 내가 하려니까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좋아.”

고정원의 밭은 숨에 흥분이 고스란했다. 좋다는 말이 이렇게 좋은 거였나. 살짝 찡그리고 있는 표정이나 벌어진 입술, 내게만 집중하고 있는 눈을 보며 움직일 때마다 어떻게 삭일 수도 없는 쾌감이 척추 끝까지 번져 나갔다.

“아……!”

앞뒤로 움직이는 걸로 부족해 들썩이며 자극을 더했다. 굵직한 것이 들어왔다 빠지면서 만들어 내는 쾌락이 끝이 없었다. 느껴지는 곳을 집중적으로 찧는 반복 행위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성기 또한 팽팽하게 솟아 젖어 들었다.

“아, 아……!”

눈앞이 새하얗게 변해 버릴 만큼 기분 좋은 곳이 건드려지면서 그 후로는 거의 정신을 놓고 엉덩이를 흔들어 댔다.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고 가장 강력한 자극에 도달하기 위해 앞뒤로 몸을 짓이겼다. 어쩔 줄 모르겠어서 고정원의 이름만 불러 대는 와중에, 발끝까지 힘이 꽉 들어차는 걸 느꼈다. 그리고 강렬한 해방감과 함께 그 힘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사정하고 나서도 안팎 곳곳에 충격이 남아 쉽게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흐느적하게 늘어져 안겨 있다가 침대에 눕혀졌다. 눈꼬리에 눈물이 고여 있었는지 옆으로 주르륵, 하고 흘러내렸다.

“읏.”

뒤를 메우던 것이 빠져나가는 느낌에 허리가 찌릿, 떨렸다. 빈 공간을 채우려는 것처럼 벌어진 뒤가 빠끔빠끔했다. 뜨겁고 차갑고 미지근하고. 갖가지 감각들이 동시에 느껴지고 있었다.

발바닥에 혀가 닿아 별안간 어깨를 움츠렸다. 발목, 종아리, 허벅지, 엉덩이를 따라 쓸어 올리는 혀는 느리고, 또 꼼꼼했다. 쪽, 쪽, 하고 입술이 맞춰지는 곳마다 저릿한 여운이 소름처럼 피어올랐다. 짧게 끝나지도 않았다. 엎드리게 해 놓고 여기저기 입을 가져다 대며 마치 방에 처음 막 들어왔을 때처럼 눅진하게 빨아 대는 애무의 연속이었다.

“흑……!”

그러다 예고도 없이 충격이 가해졌다. 흐물흐물해진 뒤로 단번에 성기가 꽂혀 들면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꾹 눌러오는 무게감을 따라 안으로 들어찬 성기가 더욱 묵직하게 느껴졌다.

헉, 하고 숨을 삼키며 시트를 말아 쥐었다. 박힌 성기가 빠져나왔다 들이치며 규칙적으로 운동하자 이젠 끝난 줄 알았던 쾌감이 새롭게 징징, 머리끝까지 울려 댔기 때문이었다. 폭력처럼 철썩거리며 부딪는 살끼리의 접촉마저도 끔찍한 쾌감으로 인식했다.

폭풍 한가운데처럼 중심을 잃고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울면서 몸부림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나마 사고라는 걸 할 수 있는 상태로 되돌아왔을 즈음엔 안을 만족할 만큼 쑤셔 놓은 고정원이 애처럼 울고 있는 나를 달래 주고 있었다.

“그만…… 끅, 그만 이제…….”

고작 한 마디가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너무 숨이 차고 벅차서, 울기까지 했으니 헐떡거림이 멎기 힘들었다. 고정원은 껴안고 토닥여 주기도 하고 입술로 눈물을 훔쳐 주며 부드럽게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흉물스런 성기가 줄곧 가라앉질 않아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 씻을래……. 화장실만, 데려다줘……. 어?”

이대로 한 번 더 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됐다. 씻는 걸 핑계로 따로 떨어져 있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리 힘 다 풀렸잖아, 혼자 어떻게 씻게.”

“괜찮아…….”

씻겨 주겠다는 걸 혼자 할 수 있다고 바득바득 우기고 나서야 욕실로 옮겨졌다. 욕조에 물을 받으며 고정원에게 나가 있으라고 말했다. 같이 들어오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냉정하게 무시하고 의사를 확고히 했다.

문이 닫히고 홀로 남겨지고 나서야 안도하며 욕조 안에서 다리를 뻗었다.

“하…….”

탄식이 절로 나왔다. 미쳤다고 내가 그런 짓을 했지. 하고 싶다고 떼쓰던 거나 운전하던 사람에게 손을 뻗쳤던 걸 떠올리며 또 한 번 후회로 탄식했다.

히끅, 히끅, 숨도 못 쉬고 울어 댄 영향으로 아직까지 딸꾹질이 났다. 피부 위로는 며칠간 누적된, 입으로 만든 게 빤한 흔적들이 시기별로 농도 다르게 남아 있었다.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몇 박으로 여행을 하다 온 것처럼 극심한 피로가 눈꺼풀과 어깨를 짓눌러 와 더 이상은 버티기가 어려웠다.

분명 튜브를 타고 있었던 것 같다. 드넓은, 말 그대로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무서워하지도 않고 한가롭게 누워서 떠도는 중이었다. 파도가 연신 부드럽게 쏟아지며 팔 언저리로 거품을 만들어 냈다. 물의 온도도 딱 좋았고, 햇살도 따사로웠다.

고정원은 어디 갔지……?

그런 생각이 든 찰나,

“……어?”

눈이 뜨였다.

여긴 어딘가. 낯설게 펼쳐진 풍경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아, 하고 깨달으며 등 뒤로 닿는 따뜻하고 묵직한 온도를 느꼈다. ‘일어났어?’ 하는 부드러운 음성이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자 후다닥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잠들었길래. 씻겨 주고 있었어.”

바깥에 있던 고정원이 대관절 언제 욕조 안으로 들어온 건지,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왜 등 뒤에서 끌어안긴 자세로 졸고 있었는지,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틀어 놨던 물은 잠겨 있었고, 꽤 널찍하다고 생각했던 욕조는 비좁게 변해 있었다. 양 팔에는 거품이 한 가득이었다.

“어…… 언제 들어왔어?”

어정쩡하게 거리를 떨어뜨리며 물었다.

“……얼마 안 됐어.”

대답하는 고정원은 거품 묻은 손으로 느른하게 내 뒷목을 주물러 왔다.

“이제 괜찮아, 나가도 돼. 내가 할 테니까…….”

미끄러지는 손이 어깨로 내려와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그냥 있어. 힘없잖아.”

어깨를 붙든 손에 고정되어 강제적으로 고개가 앞을 향했다.

“아 진짜…… 괜찮은데…….”

울상이 돼서 중얼중얼 불평했으나 예상대로 조금도 먹혀들지 않았다. 암만 사양한대도 나갈 기미는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거품이 가득한 손은 능숙하게 가슴팍을 문질러 오며 면적을 넓히기만 했다.

돌겠네 정말…….

물이 식었는데도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열기가 올라오는 게 생생히 느껴지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일 치르지 싶었다. 나중엔 목소리도 안 나올 만큼 지쳐서 간신히 눈만 뜬 지경까지 이르렀다. 욕실에서 짧게 하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로션을 발라 주다가 또 한 번 더 했다. 이번이 반드시 마지막이라는 약속을 하고서.

“이렇게 해 댈 거면서 안 한다고 말만.”

쉬어 버린 목소리로 탓했다. 아까까진 정말 병원에 가서 링거라도 맞아야 하나 심각하다가, 먹을거리로 바닥난 에너지를 충전하고 침대에 누워 고정원의 팔베개를 받고 있자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이렇게 할 거 아니까 안 하려고 한 거야.”

지나쳤다 생각은 하는지 확실히 미안한 표정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손으로는 내 머리칼을 살금살금 쓰는 게 어쩔 수 없이 귀여워 보이긴 했다.

“내가 그렇게 좋아?”

“……뭐?”

“어떡하냐 너. 나한테 그렇게 푹 빠져서.”

장난스럽게 뺨을 살짝 꼬집고 말했다. 얼굴이 우스운 거랑은 거리가 멀어서 그런가. 별로 잡히는 볼살도 없고, 웃겨 보이긴커녕 쓸데없이 완벽하게 정돈된 얼굴이란 감상만 남았다.

“…….”

헛웃음이라도 칠 거란 예상과 달리 고정원은 사람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런 장난은 바로바로 반응이 나와야 그나마 분위기 안 망하는 건데.

실패한 농담에 수습도 못하고 땅으로 파고들려는데,

“……그래 보여?”

예상 밖의 질문이 돌아왔다.

“……어?”

“내가 너한테, 푹 빠진 것처럼 보여?”

뭐지, 이 순진한 반응은.

“……어 완전. 엄청. 심하게.”

놀리려고 아무 말이나 막 내뱉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내 얼굴을 쳐다보며 눈동자를 굴리던 고정원이 ‘그래…….’ 하고 멍하니 수긍했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하며 혼잣말처럼 덧붙이는 데엔 기어이 폭소가 터지고 말았다.

“아 진짜 고정원, 너 가끔씩 의도치 않게 웃기는 거 알아?”

이상한 데서 진지하기도 하고 순진하기도 해서 가끔가다 이렇게 사람을 웃겼다. 외모는 지적이고 냉소적이면서 한 번씩 어수룩해질 때 그 갭이 너무 안 어울려서 빵 터졌다.

배가 당길 만큼 웃어젖히고 고갤 들자, 계속 쳐다보고 있던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따스한 웃음기가 배인 눈에는 내가 비치고 있었다.

건조한 손이 얼굴을 감싸 왔다.

“네가 웃을 때…….”

웃을 때……?

무슨 말을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아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벌어졌던 입이 점점 닫히는 게 보였다. 머뭇거리는 것처럼, 혹은 생각을 더듬는 것처럼.

“…….”

마주 보며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끝맺음이 나는 대신 변명이 따라왔다.

“잘 설명이 안 돼.”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다만…… 하고 싶은 말을 설명하거나 표현할 적합한 어휘를 찾지 못하는 그 답답함이 이해가 돼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고정원은 언제나 내 말과 입장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줘서…… 나도 따라서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아무리 사소한 거나, 설령 시시한 거라도.

그러는 사이 생각이 정리가 됐는지, 고정원은 다시 한번 입술을 달싹였다. ‘아마……’로 시작된 말은 이렇게 이어지고 끝맺어졌다.

“아마…… 사랑한단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아.”

“…….”

들으면서도 그 뜻이 전달되어 오지 않아 얼마간 멍해졌다. 한참 뒤에야, 말의 의미를 깨닫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숨기듯 품으로 파고들었다. 무언가 대꾸를 하려고 머릿속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방금 들은, 사랑한다는 말밖에는 남아 있는 게 없었다.

* * *

“인휘 어렸을 때 보고 싶다.”

모텔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난 아침, 세수를 하고 나온 내 얼굴에 로션을 발라 주며 고정원이 그렇게 말했다. 내 머리통을 감싸고도 남는 큼직한 손으로 크림을 발라 주는 모양새는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그냥 내가 하면 되는데……. 쑥스러운 나머지 얼굴 근육이 우스꽝스럽게 구겨졌다.

“어렸을 때? 어렸을 때 별거 없는데 뭘.”

“보고 싶어.”

크림이 스며들어 촉촉해진 볼에 ‘쪽, 쪽, 쪽’ 하는 노골적인 뽀뽀 세례가 한 차례 지나갔다.

“사진 가지고 있는 거 없어?”

“……없어, 누가 자기 어렸을 때 사진을 가지고 다니냐.”

종종 자기 어렸을 적 사진을 앨범에 저장해 다니거나 메신저 프로필용 사진으로 쓰는 사람을 보긴 했지만, 고정원이 계속 보여 달라고 조를까 봐 앞서 차단해 버렸다. 흑역사까진 아니어도 어렸을 때 사진이라 하면 누나한테 잔뜩 주눅 든 모습이나 꾀죄죄한 것들이 대부분이라 별로 보여 줄 만한 게 없기도 했다.

“아쉽네……. 내 사진이랑 교환하자고 하려 했는데.”

“……뭐야, 있으면 그냥 보여 줘.”

“나만?”

“……됐어 안 궁금해. 어차피 뭐 지금이랑 똑같겠지.”

솔직히 엄청 신경 쓰이고 궁금했다. 고정원 어렸을 땐 어떤 모습이었을지 아기 때부터 해서 초, 중, 고, 유학 시절까지 전부 알고 싶었다. 근데 그러려면 내 사진도 보여 줘야 해서 꾹 참기로 했다.

“나 어렸을 땐 여자애 같단 소리 많이 들었어. 키도 작은 편이었고.”

“…….”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정보라서 가운을 벗다 말고 멈칫했다. 어려서부터 테스토스테론 분비가 왕성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남자다운 고정원이 작고 여자애 같았다니.

“아, 치마 입은 사진도 있다.”

지금하고 생판 다른 모습으로 묘사될수록 몹시 궁금해졌다.

“다음에 집에 갈 때 갖고 올 테니까 보여 주면 안 돼?”

웃으면서 고정원의 허리를 붙잡고 얼굴을 들이댔다. 이런 식으로 치대면 좋아하는 걸 알고 있어서 은근히 계산적으로 한 스킨십이었다.

“……그때까지 못 기다리겠는데.”

옆으로 길게 패인 두 눈, 까만 눈동자가 아래쪽을 파고드는 게 보였다. 어딜 보는 거지? 했다가 풀어헤쳐진 가운 사이로 속살이 드러난 상태, 그것도 속옷도 입지 않은 맨몸이라는 걸 자각하고 어색하게 앞을 여몄다.

“먼저 보여 주면 뭐 큰일 나냐. 쪼잔하게…….”

이제 퇴실하는 참이고 여기서 더 할 수도 없다는 걸 아는데 아무래도 불순한 눈빛처럼 보여 몸을 사리게 됐다.

“……갈아입으려는 거 아니었어?”

네가 그렇게 쳐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여민 거잖아. 속으로 대꾸하며 태연한 척 침대 위로 엎어졌다.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좀 더 쉬게.”

아직까지 허리랑 다리에 잘 힘이 안 들어가기는 했다.

“아.”

하고 낮은 탄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조금 뒤 엎드려 있는 침대의 스프링이 한쪽으로 움푹, 기우는 게 느껴졌다.

“바디로션을 깜빡했네.”

등 뒤로 인기척이 났다. 딱, 하고 플라스틱 뚜껑을 여는 듯한 소리도 함께.

“야, 너…….”

어깨부터 벗겨진 가운이 스르륵 몸에서 분리되어 침대 밑으로 떨어지고 나자 어깨가 움찔, 떨렸다. 끈적한 보습크림이 묻은 손바닥이 등을 부드럽게 덧그렸다.

“우리 퇴실해야 되는 거 알지?”

불안해져서 물은 말에 고정원은 미끄러지듯 어깨의 선을 따라 쓰다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으.”

간지럽기도 하고 오묘하기도 했다. 차가웠던 크림은 문지르는 손바닥의 열기에 금세 데워졌고, 거리낄 것 없이 구석구석으로 보습제를 바르는 손길은 엉덩이 사이까지 스치고 지나갔다.

발톱까지 반질반질해지고 나자 벗길 때만큼이나 능숙하게 가운이 입혀졌다.

“……너무 애 취급하는 거 같은데.”

다행히 아래에 피가 몰리기 직전에 끝났지만 하마터면 고개도 못 들 뻔했다.

“애 취급은 아니고…… 애인 취급.”

“……헐.”

안 어울리게 아저씨 같은 말장난을 한 고정원이 입을 떡 벌리는 내 반응에 소리 없이 웃어 보였다.

“…….”

표정에 깃든 따스함이 좋아서 홀리듯 쳐다보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내가 비쳐 보여서 마치 그 안에 갇힌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 하는, 속에서부터 알 수 없는 감탄이 터져 나오며 몸이 굳어진 건 삽시간이었다.

뭘까 이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 고정원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생각지도 못했던…… 뜸 들이던 끝에 예고도 없이 뱉어진 사랑한단 말. 불현듯 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당시 느꼈던 모든 감각들이 사소한 것 하나까지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때 맡았던 희미한 공기의 냄새까지도.

갑자기 부정맥처럼 심장이 마구잡이로 두근거리기 시작해 얼굴을 베개에 파묻어 버렸다. 몸에 힘을 주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아슬아슬 힘겨운 감각을 내리누르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인휘야, 왜 그래?”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사랑한다고, 이전에 장난처럼 몇 번 들었을 땐 몰랐던 말의 파급력이 뒤늦게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아마 혼자 있을 때 떠올랐다면 지금쯤 뭔가를 쥐어뜯거나 소리를 지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북받치는 감정이 주체가 안 되고 숨이 턱턱 막혔다.

고정원이 나를 좋아한다.

진짜, 어마어마하게 좋아한다.

정말, 말도 안 되게,

나를…….

“나 좀 봐. 어디 아픈 거야?”

“…….”

내장이 다 녹아내리는 전율이었다.

나는 어제와 같은 모양새로, 아니 어제보다도 힘주어 고정원을 끌어안고는 물고기처럼 입만 뻐끔댔다.

“……울어?”

어느새 맞닿은 가슴팍이 축축이 젖어들었다. 창피해서 입술을 깨물며 도리질 쳤지만 한번 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잘 멎지 않았다. 슬픈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나서 신기하고 이상했다.

고정원이 너무 좋다고. 너무 좋아서 이제는 사랑하는 거 같다고. 허술한 고백을 혼자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면서 코를 훌쩍댈 수밖에 없었다.

* * *

“야…… 언제까지 보게?”

언제나처럼 찾은 단골 카페였다. 복층 구조에 홀이 넓고, 무엇보다 테이블 간의 간격이 촘촘하지 않아 구석 자리에 앉으면 거의 차단된 효과를 볼 수 있어서 최근 툭하면 찾아오고 있었다.

고정원은 내가 집에서 가져온 앨범을 펼쳐 놓고 거의 삼십 분 가까이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그다지 크지도 않은 앨범에 누나 사진까지 끼어 있어 내 사진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걸 보고 또 보고, 사진에 담긴 전후 사정도 속속들이 물어 가며 감상했다. 맘에 드는 건 꺼내서 휴대폰으로 찍기까지 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울보네.”

매끈하게 뻗은 손가락이 앨범 한곳을 가리켰다.

귀퉁이에 담긴 사진 속, 대여섯 살로 추정되는 나는 양 손을 어정쩡하게 오므린 채 고개를 쳐들고 엉엉 울고 있었다.

입모양에서부터 억울함이 전해져 와 사진에 담긴 일화를 알고 있는데도 웃음이 났다. 아마도 누나에게 장난감을 뺏겨서 울었을 것이다. 어린이날, 부모님이 기념으로 백화점에서 사 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누나는 본인 몫으로 주어진 공주 인형도 가지고 내 몫인 로보트 인형도 가지고 싶어 했다. 하고 싶지도 않은 가위바위보를 시킨 뒤에 강제로 빼앗아 가서 세상이 무너지도록 울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왜 이렇게 서럽게 울었어?”

“……누나가 내 장난감 가져가서 그랬을 걸?”

설명을 듣고 난 후에도 페이지는 넘어가질 않았다.

“왜 자꾸 그것만 봐.”

별로 잘 나오지도 못한 사진에 계속해서 관심이 쏟아지니 멋쩍어서 핀잔했다.

“그냥, 귀엽고 불쌍하고.”

사진에 눈을 떼지 못하고 가느스름하게 웃는데, 나는 홱 다른 곳을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가슴팍을 긁었다. 불쌍하다는 말이 간지럽게 느껴지긴 또 처음이었다.

“옛날 일인데 뭐가 불쌍해.”

“……아쉬워서. 껴안고 달래 주고 싶은데.”

“…….”

혈관 속의 피가 자글자글 끓는 것처럼 간질거렸다. 가물거릴 정도로 오래된 일이고 지금에 와선 물정 모르고 철없는 어린 날의 추억일 뿐이었다, 분명히. 그런데 진심으로 위로해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사라지고 없는 줄 알았던 서러움도 새록새록해지는 건 대체 왜인지…….

“이제 괜찮은데.”

네가 있어서.

평소라면 시켜도 못 할, 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소릴 툭, 얹듯이 내뱉어 놓고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해 애꿎은 빨대만 잇새로 씹었다. 심장이 목구멍에서 팔딱거리고 손바닥과 발바닥이 몽땅 뜨끈해졌다.

“응. 인휘는 내가 있으니까.”

고정원이 웃고 있다는 게 보지 않았는데도 확실하게 느껴졌다. 앨범에만 박혀 있던 눈길도 다시 내게로 돌아와 있었다.

손장난을 걸기에 받아 줬다. 손끝을 살포시 쥐어 오면 내가 도망가고, 그러다가 내 쪽에서 다시 손끝을 세워 살살 건드리고. 손가락 끝끼리 휘어질 만큼 밀기도 하고, 주르륵 내려와 손바닥을 긁어 가며 엎치락뒤치락, 시답잖은 장난질을 이어 갔다. 뭘 해도 재밌어서 웃음이 났다.

“너는…… 내 어디가 좋아……?”

그런 분위기였다. 어떤 소릴 해도 상대가 받아들여 줄 것 같고 나도 상대에게 맞춰 줄 수 있을 거 같은. 설레고 들뜨는. 그래서 부끄러움이고 뭐고 희미해지면서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마음속에 있던 말이 술술 나왔다. 이번에는 전에 물어봤던 ‘나랑 왜 사귀어?’하는 질문과는 달랐다. 자신감이 없어서 묻는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였다.

“……하나만 고르기 어려운데.”

이렇다 할 정형화된 대답을 꼭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때문에 고정원의 뭉뚱그리는 대답도 쉽게 수긍이 됐다.

손끝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이제는 아쉬운 모양새로 서로를 문지르고 있었다.

“인휘는 내 어디가 좋아?”

잘생기고, 다정하고. 그런 외적이거나 내적인 성향을 꼽아서 들 수도 있겠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게 진짜 내 마음인 것 같지도 않고.

고정원을 알기 전, 나름 연애라고 생각하고 규정지었던 것들이 얼마나 허황되고 실체 없는 것들이었는지 실감하게 되는 매일이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지 전혀 몰랐다. 누군가가 좋아서 눈물이 나는 경우가 있는 줄도 몰랐고. 그리고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한숨이 나는 것도 뭔지 몰랐을 것이다. 고정원이 아니면.

“……몰라. 그냥 다 좋아.”

애초에 주고받은 질문부터가 유치해서 그런지 답도 유치하게밖엔 나오지 않았다. 차가운 프라푸치노를 목구멍으로 쭉 빨아 넘기며 발끝으로 바닥을 툭, 툭, 두드렸다. 남들이 보면 정말 꼴값들 떨고 있다고 욕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지만.

대답하기 전 내가 한숨을 쉬었던 것처럼 고정원도 옅게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왜?”

묻자,

“……좋아서.”

하는 대답이 나왔다.

“…….”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며 다시금 의도치 않은 한숨이 쏟아졌다. 맞대응하듯, 고정원은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게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쉬었다. 들으라는 의도가 뻔한 과장된 한숨에 그만 코웃음이 터졌다. 그런 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한숨으로 장난을 치다가, 질리지도 않고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가…… 의미 없는 놀이를 이어 갔다.

하지만 나란한 라인의 테이블에 다른 손님들이 앉게 되면서 터치하는 장난도 끝이 났다. 멀찍이 떨어져 있다 해도 가림막이 있는 건 아니라서 조심해야 했다. 뽀뽀하고 싶은 걸 참고 손만 잡고 있었던 건데. 그마저도 못하게 됐다.

꼼지락 꼼지락, 트레이 위에 놓인 사각 티슈를 접으며 허전함을 대신했다. 이런 식으로 밖에서 할 수 있는 표현이 제한될 때가 사귀면서 유일하게 아쉽고 속상한 점이었다.

“……물 마실래?”

“어? 아, 어…….”

어느새 물 컵이 비어 있었다. 끄덕이자마자 덜컹거리며 고정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훅, 하고 익숙한 향이 끼쳤고 눈앞이 잠깐 어두워졌다. 반사적으로 질끈 감았다 떴을 땐 이미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스친 뒤였다.

놀랄 틈도 없이 후다닥 옆을 확인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던 테이블엔 한 사람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그 한 사람도 휴대폰에 고개를 박다시피 떨구고 있었다.

“…….”

다행이다.

테이블에 엎드리는데 얄팍한 소름이 뒷덜미로 쭈뼛 끼쳐드는 걸 느꼈다. 어깨에서부터 양 볼까지, 근지러운 감각으로 뒤덮였다.

뽀뽀하고 싶었던 걸 눈치챈 걸까. 아니면 단순히 마음이 통한 걸까.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가에 힘을 주고 차가운 테이블에 얼굴을 문질렀다. 기습 같은 입맞춤이 싫지 않았다.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닭살 떠는 게 싫지 않아서, 싫긴커녕 갈수록 좋아지는 게 큰일이었다.

* * *

요 며칠, 확실히 웃음이 많아졌다. 고정원이랑 사귀고 나서 말도 많아지고 성격도 밝아진 건 맞지만 이 정도로 걸핏하면 웃진 않았는데. 눈만 마주치면 헤벌쭉 입이 벌어졌다. 몸으로도 말로도 밤낮을 안 가리는 애정표현에, 밖에서까지 남들 눈을 피해 남사스런 행각을 주거니 받거니. 온종일 웃어 대느라 안면 근육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학교서도 자제가 안 되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귓속말을 할 만한 내용도 아닌데 고정원은 툭하면 내 귀에 입술을 붙이길 좋아했다. 심지어 강의 시간에도. 무시하려 해도 간지럽다 보니 웃음부터 나고, 실없는 소리에 휩쓸려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같이 키득거리고 있기 다반사고. 아무튼 중고등학교 때도 이렇게 딴 짓으로 수업을 날려먹는다거나 한 적이 없었건만 아주 나쁜 습관이 들어 버렸다.

“오늘 거기 갈까? 그 고기말이 집. 저번에 가보고 싶다 했잖아.”

“아 진짜? 좋지.”

수업을 마치고 차에 오르자마자 행선지가 정해졌다. 자가용이 있으니 어디든 이동하기가 편해서 우리는 개강하고도 짬짬이 놀러 다니기 바빴다. 과제야 뭐…… 기한 안에만 하면 되니까. 맛있는 거 양껏 먹고 돌아와서 시시덕대며 뒹굴고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에 물들게 됐다.

어제도 샤브샤브를 배터지게 먹고 와서 내내 방안에만 누워 있었다. 둘이서 껴안고는 기록 세우는 것도 아닌데 한참이나 지치지도 않고 뽀뽀를 해 대다가, 내가 장난친답시고 고정원한테 헤드락을 걸었었다.

그걸 계기로 레슬링 같은 힘자랑으로 번져선 애들 싸우듯 전에 없이 격하게 놀았다. 고작 한 팔로 나를 막고 가두는 고정원을 이겨 보려고 별짓을 다하다가 결국 이기지도 못하고 오히려 옷만 발가벗겨져서…… 그 후론 다른 짓 하느라 바빠지고……. 하여간 그랬다.

“아, 맞다!”

안전벨트를 매고 등받이에 기댄 순간 중요한 사실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심각해져서 고정원을 쳐다보니 눈썹을 치켜뜨며 ‘왜?’ 하며 입모양을 만드는 게 보였다.

“나 오늘 교수님 면담 있는데 깜빡했어.”

한숨이 푹 났다. 당장 데이트 할 생각에 신나 있었더니.

“……일단 집에 가 있을래?”

습관처럼 고정원의 어깨를 살살 쓰다듬으며 물었다.

“음, 그냥 카페에서 기다릴게.”

“학생회관?”

“응 거기.”

“삼십 분에서 한 시간 걸릴 거 같은데……. 교수님이 각 잡고 오래 얘기해 보잔 식으로 말씀하셔서. 최대한 빨리 나올게, 기다려.”

벨트를 풀고 나가려던 때였다. 다급하게 팔이 붙잡혀,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놀라 움찔, 뒤로 물러났다.

……뭐지. 나올 말을 기다렸지만 고정원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면서 그냥 가만히만 있었다.

곧 영문 모를 행동의 의도를 눈치채고 웃음이 났다. 그놈의 뽀뽀. 오래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내가 잠깐씩이라도 자리를 비울라 치면 이렇게 뽀뽀를 요구하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하지만 나도 그냥 가긴 아쉬워서 촉박한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요구하는 대로 입술을 맞춰 주었다.

“여기도.”

가볍게 붙였다 떼기 무섭게 이번엔 볼을 들이대 온다. 덩치에 안 어울리게 하는 짓은 애 같아서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뺨부터 턱까지 쪼듯이 서너 번의 입맞춤을 해 주고 나서 갔다 올게, 인사했다.

“빨리 와.”

차문을 열고 나오는 등 뒤로 굳이 한 번 더 조르는 데엔 목덜미가 간지러워지기도 했다. 쟤는 목소리 하나쯤은 별로여도 될 텐데 너무 비현실적으로 다 가진 거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튀어오르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예 교수님, 그럼 가 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연구실을 나왔다. 면담하는 내내 무의식적으로 탁상에 놓인 시계를 힐끔거렸더니 교수님께서 눈치채신 건지 짧게 마치고 돌려보내 주셨다. 뒤늦게 허둥지둥하며 집중하는 척을 해도 교수님 본인도 출장 준비로 바쁘시다며 마무리하시기에 피차 잘된 건가 싶기도 했다.

“와, 십 분밖에 안 지났네.”

주제에 비해 지나치게 겉핥기식으로 끝난 면담이라 좀 찝찝하긴 해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고정원 얼굴 빨리 볼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빨리 가서 놀래켜 주고 싶어서 문자는 보내려다 말았다. 뒤에서 덥석 눈을 가려 볼까 아니면 또 헤드락을 걸어 볼까, 놀릴 계획을 짜며 뛰다시피 카페 쪽으로 향했다.

1층 카페에 가까워졌을 무렵 뛰던 걸음을 멈추고 살금살금 입구에 접근했다. 어디 앉아 있나 살피려고 유리창의 끄트머리에 붙어 기웃거렸다. 일단 창가 자리에는 앉지 않았는지 고정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문 밖에선 어둑한 카페 내부를 잘 들여다보기 힘들어 마침 들어가는 무리에 섞여 잽싸게 안으로 들어섰다.

신축 카페라 내부가 굉장히 넓은 편이었다. 탁 트인 홀을 지나며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필기하거나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 두셋씩 짝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한 명씩 앉아 있는 테이블을 살폈으나 고정원과 닮은 실루엣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보다 깊숙한 안쪽, 기둥과 칸막이로 가려진 구석 자리에 다다라서야 어, 하고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

당연히 혼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고정원의 앞에는 누군가 앉아 있었다. 웬 여자였다. 여자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친밀한 느낌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고정원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지만…… 얼핏 두 사람이 커플처럼 보여서 순간적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리에 못 박혔다.

여자가 무슨 말을 하자 고정원이 힐끗 시선만 올린 채 무어라 대답했다. 갑자기 여자의 손이 고정원의 손목을 부여잡는 게 보였다. 고정원이 곧장 손을 들어 떨구어 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심장이 불쾌하게 조여드는 감각을 느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는 고정원의 시선이, 비로소 이쪽을 향했다.

“인휘야.”

그리고 웨이브진 머리카락이 휙 젖혀지며 여자 또한 뒤돌아보았다.

“……어.”

아는 얼굴이었다.

“인휘 왔다!”

시원스런 입매로 활짝 웃는, 강유나 선배.

몸에 밴 습관처럼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인휘야, 너도 오늘 개총 못 와?”

바뀐 헤어스타일 때문인지 가까이서 본 선배는 종강 전에 봤을 당시보다 인상이 부드러웠다. 화장한 눈가와 입술은 반짝거려 화사했고 예쁘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예, 못 갈 거 같아요.”

억지로 웃어 보이려고 했는데 근육이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잘 움직여지질 않았다.

“아무도 안 반기는 나도 가는데 너희가 안 오면 어떡해.”

“…….”

2인용 테이블이라 내가 앉을 자리는 없었다. 어색하게 서서, 다른 한쪽 팔을 쓰다듬고 있었다.

“둘 다 시간 되면 늦게라도 꼭 와 알았지?”

“……네.”

강유나 선배는 머무르는 일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가기 직전, 고정원의 옆에 서서 고정원의 어깨를 만지고 간 게 신경에 거슬렸다. 그냥 만지고 간 것도 아니고 어깨에서 뒷목 부근으로 진하게 누르듯이 쓰다듬는 스킨십은 일반적인 선후배처럼 보이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친밀했다.

“친한 척이네.”

선배가 가고 나자 고정원이 일어나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그러게.”

뚱하게 동조하면서 바닥을 응시했다. 티를 내려고 그러는 건 아닌데,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 의지와는 별개로 조절이 안 됐다.

“일찍 끝난 거야?”

“어……, 교수님 바쁘셔서.”

“잘됐다. 얼른 가자.”

너 저 선배랑 친해? 저 선배가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야? 속에선 별별 질문들이 솟구쳐 올랐지만 입 밖으론 일절 꺼내지 못하고 이끄는 대로 카페를 나섰다.

주차된 차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 동안 명치께가 쿡쿡 찔리는 통증을 호소했다. 고작 다른 여자가 고정원에게 친근하게 스킨십을 한 것만으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다니. 감추기엔 거추장스럽고 그렇다고 드러내기엔 추잡한, 피곤하기 짝이 없는 질투심이었다.

“혹시 어디 아파?”

운전대를 잡은 고정원이 출발 직전 나를 보며 물었다. 웃지도 않고 심각해져 있으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거 아니라고, 얼른 가자고 억지로 밝게 대꾸했다.

차에 시동이 걸리며 주차장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갑갑함에 시트를 얼마간 뒤로 젖히고 나서 차창 쪽으로 얼굴을 기댔다. 어떻게 해야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자는 것밖엔 방법이 없는 것 같아서 오지도 않는 잠을 청했다.

“나 졸려서, 쫌만 눈 붙일게.”

“어, 그래. 피곤하면 자.”

“응…….”

하지만 눈을 감는다고 의식이 흐려지진 않았다. 도리어 잡생각만 많아져서 힘들었다.

그 선배랑 고정원이랑 같이 있으면 남들이 사귀는 줄 알겠지. 내가 봐도 잘 어울리던데. 그래도 고정원 표정, 나랑 있을 때랑 다르게 되게 쌀쌀맞아서 커플처럼은 안 보였을지도. 일부러 철벽 친 거겠지? 고정원 눈에도 그 선배가 예뻐 보이긴 했으려나. 나랑 안 사귀었으면 고정원도 여자들이 다가오는 거 좋아하지 않았을까?

등등…… 잡념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잇따랐다.

감정이 격해져서 지금이라면 누가 고정원을 터치하는 건 물론, 심지어 말을 걸거나 쳐다보는 것도 싫을 거 같았다. 다른 사람이 너 만지게 두지 마. 당장에라도 일어나서 운전 중인 고정원에게 그렇게 따지고 싶은 걸 꾹꾹 참으며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집착이 이 정도로 강하면 피곤하겠지. 자괴감이 들어서 나쁜 기운으로 뭉친 숨을 연신 몰아쉬었다.

차가 속도를 내서 달리지 않고 구불구불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긴 했는데, 어느덧 아예 멈춰 있었다. 시동까지 꺼지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을 떴다.

“……!”

입술에 뭐가 닿았다. 꾹 눌리더니 방심한 입술 사이로 미끈하게 혀가 침입했다. 몸을 일으키기도 전이었다. 상황 파악이 안 돼서 얘가 미쳤나 사람들 보면 어쩌려고 이러나, 어깨를 마구 밀어냈다.

창밖을 곁눈질해 보고 나서야 여기가 공터 주변의 으슥한 변두리라는 걸 알았다. 운전하다 말고 중간에 차를 세울 정도로 이렇게 흥분한 이유가 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급작스런 키스는 거칠기까지 했다.

입술이 떨어지자, 침이 실타래처럼 길게 이어졌다. 나는 벌게졌을 게 뻔한 얼굴을 아래로 꼬꾸라트리고 쪼그라든 가슴을 진정시켰다.

“뭐야…….”

작게 타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질투해?”

내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명확한 단어에 뜨끔 찔렸다.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래서 시치미를 뗐다.

누구 건지 모를 침으로 축축해진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슥, 쓸어 낸 고정원이 담담하게 지적했다.

“아까부터 질투하고 있잖아 계속.”

“…….”

“딴 사람이랑 있는 게 그렇게 싫었어?”

고개를 숙여 왔다. 젖은 입술끼리 닿을락 말락 했다. 고정원은 내 뒷목을 감싸 쥐고 숨결끼리 섞이도록 더욱 밀착하며 ‘응?’ 하고 대답을, 속내를 까발리기를 독촉했다.

“……그 선배가, 자꾸, 너, 만지니까…….”

말을 하는 건지 뽀뽀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말마디의 사이사이로 입술이 부딪혔다.

“난 인휘 건데, 그치.”

산소가 부족한 것처럼 몽롱했다. 말하는 것도 숨 쉬는 것도 방해될 수준으로 빈번한 입맞춤 때문이었다.

“아!”

목덜미가 얼얼했다. 티셔츠 위로 드러난 부분을 짓씹고 빨아올린 고정원이 보란 듯이 자기 셔츠의 맨 위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아프게 물어. 화난 만큼.”

하고 입술 근처로 가져다 댔다. 하라면 못 할 줄 아나.

“…….”

나는 좋은 냄새가 나는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잘근잘근 깨물었다. 두터운 목울대가 울렁이며 흥분하는 게 보였다.

한 입 물어 강한 힘으로 빨아올리고 체취가 배인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누워 봐.”

눈을 내리깔며 주문하자 고정원은 순순히 운전석의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나는 운전석으로 넘어가 자리를 잡았다. 단단한 몸 위에 올라타, 벌어진 셔츠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입술이 닿고 혀가 스칠 때마다 솟았다 꺼지는 복부의 리듬을 따라 흥분이 고조되어 갔다. 이곳저곳 빨아 당기고 씹어 대는 것만으로 초조했던 감정들이 풀리는 걸 느꼈다. 내 거라고 도장 찍는 유치하고도 뿌듯한 행위에 심취하느라 장소고 뭐고 뵈는 게 없었다.

지잉, 차창이 열리자 틈새로 바람이 들어왔다. 눅눅한 공기가 신선한 것으로 교체되는 사이 한계치로 젖혀 있던 시트가 원상 복구되고, 고정원은 물티슈와 마른 티슈로 젖은 곳들을 번갈아 닦아 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뒤치다꺼리를 마친 뒤에야, 고정원은 벌어졌던 본인의 셔츠 단추를 잠갔다. 나는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얼룩덜룩한 자국들이 옷 사이로 감추어져 가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 자국들이 문신처럼 영영 안 없어졌으면 좋겠다. 아니, 그보단 고정원 얼굴 어딘가에 ‘애인 있음’이라고 써 붙여져 있으면 좋겠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가 혼자서 피식 웃었다. 차라리 그럴 거면 무난하게 반지가 낫지.

“왜 웃어?”

“…….”

솔직하게 말하긴 좀 그래서 그냥……, 하고 얼버무렸다.

“그냥 뭐?”

뒷정리도 끝났구만 고정원은 출발하지 않고 내 얼굴만 지긋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니…… 갑자기 타투 같은 거 하면 재밌겠다 싶어서.”

빙 둘러 말했다.

“커플 타투?”

“……어, 근데 장난으로 한 소리야. 심각하게 받지 마.”

이러다 정말 차 몰고 타투샵으로 직행할까 봐 몇 번이나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원이 아무런 대꾸도 안 하고 쳐다보기만 해서 변명이 더 길어졌다. 진심이냐고, 하고 싶은데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고, 꼭 그런 표정이었다.

“오늘 밤에나 주려고 했는데.”

사람 진땀을 빼게 만들던 고정원이 손을 뻗은 곳은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콘솔 박스였다. 생각보다 참기 힘드네.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말과 함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고급스러운 네이비색 사각 케이스였다. 리본으로 묶인, 어떻게 봐도 선물처럼 보이는.

“이게…… 뭐야?”

“풀어 봐.”

머뭇머뭇 리본의 끝을 잡아당기면서도 머릿속이 소란스러웠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그런 심정으로 상자까지 열고 나자 마침내 예감이 현실로 변해 있었다.

두 개의 반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껌뻑껌뻑 하는 게 다였다. 예뻐서 손을 못 대겠기도 하고, 정말 서프라이즈 같은 선물이라서……. 약간 목도 메였다. 반응을 살피던 고정원은 답답했는지 반지를 꺼내서 내 약지에 끼워 주었다. 호수를 알려 준 적이 있던가? 완벽하게 들어맞아 거듭 감동했다.

“……마음에 들어?”

느리게 고갯짓을 했다. ……응. 너무, 진짜, 예쁘다. 얼마나 우리의 커플링이 예쁜지 마음에 드는지 더듬더듬 전하고 나서 남은 반지도 빼내서 고정원의 약지에 끼워 주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반지 낀 손을 나란히 붙이고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진짜로…… 고마워.”

대체 언제 준비했는지 짐작도 안 갔다. 비싸 보이는데. 반은 내가 부담해야 할 텐데 가격 물으면 알려주려나. 고정원은 선물 가격이나 데이트 비용이나, 내가 돈 얘기를 꺼내면 은근히 정색하고 싫어해서 제대로 물어보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그런 얘기를 하면 분위기도 깨질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받아 줘서 내가 더 고맙지.”

다정하게 속살거리는 입술이 이마와 눈가, 그리고 코에서 뺨까지 내려왔다. 나는 고정원의 목에 팔을 감고 힘껏 끌어안았다.

“다음엔 타투할까?”

묻는 말에 눈을 감고 있다가 실소가 터졌다.

“……아니. 반지면 됐어.”

부둥켜안은 채 양옆으로 왔다 갔다, 하나의 시계추처럼 움직였다. 약지에 채워진 반지의 단단한 느낌이 안정감을 주었다. 어떻게 이럴까 신기했다. 깊숙한 데서부터 차오르는 행복감이었다.

중간에 뜻하지 않은 지체로 예정보다 저녁 식사가 많이 미뤄졌다. 학교를 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배가 고프진 않았는데 지금은 허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행여 어지러울까 봐 차에 비치된 사탕 통을 열어 운전하는 고정원의 입에 하나 넣어 주고 나도 꺼내 먹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라 도착했을 때 달달한 알사탕은 입안에서 전부 녹고 없었다.

주차장에서부터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뒤따라 탄 고정원을 내려다보며 ‘히히’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기분이 업 돼서 들뜨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고정원의 입술에 쪽, 도둑 뽀뽀를 했다.

외꺼풀의 눈이 놀란 듯 치켜 뜨이는 게 보였다. 나는 사고를 쳐 놓고 한 발 늦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반대편 에스컬레이터에서 아빠 손을 잡은 어린 애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어서 머쓱하게 뒷목을 쓸었다.

“어, 빨개졌다.”

밖에서 대담한 짓을 해서 놀랐나? 드물게 고정원의 귓등이 빨갛게 물들어 있어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며 지적했다. 고정원은 나를 한 번 빤히 올려다보더니 금세 고개를 숙였다.

뭐지? 답지 않게 쑥스러워 해서 엄청 신선했다.

“왜 이렇게 부끄러워 해.”

재밌어서 쿡쿡 찌르고 얼굴을 확인하려 이리저리 들이밀었다. 고정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입은 꾹 다물고 있었다.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없는데 귓가만 불이 나선, 다른 델 쳐다보다가 내가 계속 건드리니 그제야 눈을 맞춰 주었다.

“오늘 되게 수줍다 너.”

나는 맨날 놀림만 받다가 입장이 바뀐 게 신이 나서 일 절로 끝내지 않고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까지 빨개진 귀를 놀려 댔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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