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깊어 가는
여름밤의 한강은 한낮처럼 활기찼다. 조명으로 밝혀진 다리와 길부터 강 건너편 일대에 펼쳐진 조망이 분위기 있는 야경을 연출했고, 다양하게 모여든 인파까지 더해지자 축제라도 열린 것 같았다.
바람 냄새, 풀 냄새, 들뜬 소음들. 여유롭게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선해진 바람과 함께 걸으니 종일 방안에 갇혀 있어 답답했던 기분도 금세 상쾌해지는 걸 느꼈다. 다른 커플들처럼 딱 달라붙어 걷지는 않더라도 이따금씩 옆으로 스치는 고정원의 팔이나 손등의 온기까지 완벽하게 기분 좋았다.
쭉 이어진 강변길을 따라 걷던 중이었다. 얼핏얼핏 내 옆모습을 쳐다보는 고정원의 시선을 느낀 나는 퉁퉁 부운 뺨을 긁적이며 물었다.
“나 얼굴 진짜 웃기지.”
무지막지하게 해 댄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차라리 다음날은 괜찮았는데 이틀째가 훨씬 더 흉하게 부을 건 뭔지. 임시방편으로 모자를 쓰고 오긴 했지만 완전히 가려진 건 아니었다.
“아니.”
귀여운데. 손등으로 볼 언저리를 살짝 어루만진 고정원의 말투가 쓸데없이 진지했다.
“…….”
쌍꺼풀은 사라진 데다 입술은 물에 불린 것처럼 퉁퉁해진 꼴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나온 길이었다. 빈말로라도 귀여워 보이는 수준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더 민망했다.
사실, 빵떡 같아진 얼굴로 어기적거리며 우스꽝스럽게 걷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도 했고. 여러모로 오늘은 만나지 않는 게 낫겠다 싶어 약속을 잡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고정원과 통화를 하며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만나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보고 싶어.’
‘지금 집으로 가도 돼?’
망설였더니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가겠다는 식이었다.
못 본 지는 고작 하루였다. 누나 방 알아봐 주고 온 날 밤에 만나, 다음날 밤까지 집에서 뒹굴며 계속 함께였으니. 다만 내가 오늘 하루를 통으로 잠만 자느라 방치하다시피 했던 게 잘못이었는지 다소 황당한 하소연까지 듣게 되었다.
‘다음부터 나 돌려보내지 마. 어차피 너 연락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못 했어 오늘.’
실은 어제까지도 고정원은 자기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몇날 며칠이고 있을 것처럼 눌러앉은 고정원에게 부모님이랑 같이 살면서 외박 이틀은 좀 그렇지 않냐, 너도 집에 가서 좀 쉬고 할 거 하라며 집으로 돌려보낸 건 나였다.
물론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내도록 같이 있다 보니 문제가 불거진 탓이었다. 첫 삽입이었고, 무리한 다음이니 내 몸을 챙겨 주는 건 고마운데……. 일일이 씻겨 주거나 걸을 수 있는데도 굳이 들어 올려 이동하거나 끼니 때 밥을 떠먹여 주는 등, 그 정도가 너무 과해서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사귀기 전에도 살뜰하다고 느꼈는데 그때의 행동들이 이제 와서 적당하고 담백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뿐 아니라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같이 있다 보면 자꾸 분위기를 타게 된다는 점이었다. 한 번 깊숙하게 몸을 맞춰 보고 나니 서로 숨결만 스쳐도 짜릿한 게 있었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 손끝만 닿아도, 눈만 마주쳐도, 피부가 확 달아오르며 하고 싶은 상태가 되었다.
결국 그렇게 해 대고 난 다음날인데도, 끝까지 가진 않았지만 유사 행위로 세 번이나 사정해 가며 질척하게 섹스를 하고 말았다. 키스는 말할 것도 없이 자주 했고. 나중에는 실신하듯이 뻗게 되면서 대체 보살펴 주려는 건지 괴롭히려는 건지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아, 오늘 더 부은 이유가 있었네…….”
회상하다가 바보처럼 뒤늦게 깨닫고 중얼거렸다. 이튿날인 오늘 왜 이렇게 심하게 부은 건가 했는데 그저께에 이어서 어제도 그렇게 빨고 쪽쪽댔으니 안 붓는 게 더 이상했다.
“응? 뭐라고 했어?”
“어, 아니, 별말 안 했어.”
아무튼 그런 상황을 겪고 나니 집 안에서 보는 건 좀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얼굴도 상태가 말이 아니다 보니, 어두운 밖에서 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아서 누나 방 구하는 심부름 때문에 피치 못하게 취소되었던 데이트 장소인 한강으로 약속을 잡게 된 자초지종이었다.
“…….”
“힘들면 좀 쉬었다 걸을까?”
침묵을 다른 의미로 생각했는지 고정원은 슬쩍 내 등허리를 감싸며 물어 왔다. 고개를 좌우로 휙휙 흔든 나는 보폭을 보다 크게 넓혔다.
“아니, 안 힘들어 그냥 가.”
평소와 같은 다정한 대우가 민망하고 멋쩍었다. 고정원이 내 상태를 살피며 조심할 때마다 우리가 뭘 했는지가 장면 장면 떠올라서 곤란했다.
“근데, 너도 모자 쓰고 왔네?”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하필이면 색도 흰색으로 똑같아서 꼭 커플 아이템처럼 된 모자를 올려다보자, 고정원은 말없이 웃으며 공연히 모자의 챙을 어루만졌다.
“안 어울려?”
……안 어울리긴 무슨, 연예인 같았다. 퉁퉁하게 부은 나와 달리 붓기 하나 없는 덕에 챙 밑으로 날렵한 턱 선도 두드러져 보였다. 뻔한 걸 물어본다 싶어서 심술이 났던 나는 예쁘네, 하고 듣기 좋은 대답을 해 준 뒤에 유치하게 덧붙였다.
“모자가.”
고개를 숙인 채 하하, 시원스럽게 웃던 고정원이 나를 끌어안았다. 가까워진 거리에 확, 익숙한 냄새가 풍기면서 갑자기 심장이 발작하듯 뛰었다.
예상 못한 스킨십에 주춤대는 사이, 고정원은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에서 벗어나 무성한 수풀 쪽으로 나를 끌었다. 어둑한 나무 밑에서 모자의 챙이 들어 올려지고 입이 맞춰졌을 땐 너무 놀라 눈이 크게 뜨였다.
몇 초간 닿았다 떨어질 뿐인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밖이고 사람이 많은 장소였기 때문에 간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미쳤어.”
탓하듯 속삭이며 웃고 있는 고정원의 배에 주먹을 가볍게 꽂았다. 고정원이 아픈 척을 하며 더 진하게 웃었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면서도 애꿎은 심장만 쿵쿵 뛰었다.
다시 되돌아가려 하는데 갑작스런 손길이 팔을 붙들어 당겼다. ‘잠깐만.’ 하고 불러 세워 놓곤, 거친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게 했다. 그리고 슬금슬금 모자를 벗기려 들었다.
“얼굴 좀 보여 줘. 계속 보고 싶었어.”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뭘. 나와 얼른.”
힘겨루기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끝내 나를 결박하고 모자를 벗겨 낸 고정원은, 우스꽝스럽게 부은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얼굴만 볼 것처럼 말을 해 놓고, 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선이 사라진 눈꺼풀에 입술을 묻고 지분대거나 부어서 반질반질해진 입술에 몇 차례 입을 맞추며 하며 집적대기까지 했다.
“빵떡 같은 게 취향이었냐 너.”
원래 이렇게 꼼꼼하고 집요하게 뽀뽀하는 타입이라는 걸 알지만 민망함을 견디느라 한 말이었다.
정말 내가 지금 밖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불과 얼마 전까지 장소도 신경 안 쓰고 남사스럽게 구는 커플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던 주제에, 지금은 그 사람들이 왜 거기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하고 납득하고 있었다.
“빵떡은 아니고, 귀엽기만 한데.”
낯 뜨거운 소리를 하는 고정원은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분위기가 조금 위험해지려는 걸 느끼고 어떡하나 싶어서 겁을 먹는데,
“그만 갈까?”
하는 말과 동시에 진득한 공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떨어져 나갔다.
“아, 어.”
여기서 뭘 어떻게 더 하길 바란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긴장했던 만큼 왠지 허무한 기분이 몰려들었다. 나는 후끈해진 뒷목을 쓰다듬으며 발걸음을 떼었다. 여전히 어기적어기적 어색스러운 걸음걸이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본격적인 캠핑 텐트들이 꽤나 많이 보였다. 돗자리를 깔고 누워 시원한 여름밤 공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편한 옷차림으로 동네 사람들처럼 보였고, 사진 찍는 걸 의식한 듯 차려입은 커플들도 눈에 띄었다. 친구들끼리 놀러 온 무리도 많아 떠들썩한 느낌이었다.
사람들과 좀 멀찍이 떨어져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트렁크에서 꺼내 온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앉을 때 은밀한 안쪽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나도 모르게 끙, 앓는 소리를 내자 고정원이 시선이 따라붙었다. 달아오른 귓등을 문지르며 ‘요새 관절이 안 좋아.’ 하고 덧붙였다.
시원한 맥주부터 쭉 들이켰다. 크으, 소리를 내며 캔을 내려놓는데 느닷없이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짧게 터진 플래시 빛에 얼떨떨해져 있던 나는 부리나케 옆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확 찌푸렸다. 휴대폰의 렌즈를 내게 들이댄 고정원이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뭐야 찍지 마.”
모자에 가려지긴 했지만 오늘 꼴이 유독 추레한지라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옆모습이 제대로 찍혔는지 화면을 바라보는 고정원의 표정이 몹시 즐거워 보였다. 뺏어서 확인하려고 하자 팔을 높이 뻗으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약이 올라 매달린 채로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삭제의 조건으로 새로 셀카를 찍어 주기로 타협했다.
“나 셀카 잘 안 찍는데. 너 때문에 찍어 주는 거다 진짜.”
생색을 내며 찰칵, 찰칵, 연달아 셔터 버튼을 눌렀다. 나름 잘생겨 보이는 각도와 표정으로 찍었는데, 최종 결과물은 비참했다. 어두운 조명에도 밋밋한 눈과 둔하게 부은 입술이 그대로 드러났다.
굴욕적인 사진을 마지못해 건네주니 고정원은 맘에 들었는지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설정해 놓았다. 하여튼 가만 보면 닭살스러운 짓을 아무렇지 않게 잘하는 편이었다, 고정원은. 나는 조만간 새로 찍어서 줘야겠다고 다짐하며 맥주를 홀짝였다.
살랑살랑 시원한 강변 바람과 여름밤의 분위기에 취해 술은 술술술 넘어갔다. 치킨 몇 조각을 해치우고 나른해지면서 아예 돗자리에 드러누웠다.
나를 따라 누운 고정원은 바짝 다가오는가 싶더니, 내 뒤통수 밑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단단하면서도 포근한 감촉이 후두부를 지탱하면서 자세가 한결 편해졌다.
“왠지 또 잠 온다.”
처음엔 남자 둘이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진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 구석진 자리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사람들 모두 각자의 즐거움에 빠진 이 분위기가 몹시도 편안하게 느껴졌다.
“한숨 자도 돼.”
고정원은 내 쪽을 향해 모로 누운 자세를 하고 있었다.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내가 불시에 옆으로 몸을 돌려세우자 마주 보는 형태로 눈이 마주쳤다.
깜빡, 깜빡, 마주한 눈이 거의 같은 속도로 감겼다 뜨이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눈을 맞추고 있던 나는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그 모자로, 우리 둘의 얼굴 한가운데를 덮었다. 어두워진 시야 속에서, 몇 번이고 입술끼리 부딪쳤다.
쪽쪽거리다 말고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집어든 건 갑자기 모자를 쓴 고정원이 찍고 싶어져서였다.
“여기 봐 봐.”
고정원은 카메라 앞에서 숫기가 없어지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뻔뻔하게 카메라를 쳐다보며 표정을 지어 주던 건 잠시뿐이고,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 바람에 얼굴이 제대로 나온 컷은 얼마 없었다. 몇 장은 플래시를 터뜨렸는데 굴욕 없이 미끈하고 훤칠하게 나와 찍어 놓고도 좀 놀랬다. 일부러 이런 식으로 콘셉트를 잡은 화보 같기도 했다.
“……잘생겼다 너.”
감탄을 숨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찍어 둔 사진들 중 한 장도 버릴 게 없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컷을 손가락을 벌려 확대해서 보고 있는데 한쪽 팔이 홱, 끌어당겨지며 몸의 중심이 쏠려갔다.
누워 있는 고정원의 가슴팍 위로 딸려 엎어지며 자세가 묘해졌다. 나를 보는 고정원의 표정도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거리가 서서히 좁혀지며 위험신호를 느꼈지만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느라 말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직전에 몸을 일으켜 거리를 떨어뜨린 건 내가 아니라 고정원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린 채 팔뚝을 쓸며 딴청을 부렸다.
“…….”
또였다.
또, 이틀 전날 밤 우리 사이를 오갔던 수많은 감각들, 감정들, 신호들이 일시에 불을 밝히고 몰려들고 있었다.
전신이 땀으로 젖어서 서로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얽어매던 기억. 이어진 곳에서부터 들이치는 감각을 이기지 못해 거의 까무러치던 기억. 사정의 순간 흐트러지던 고정원의 얼굴 같은 것들이, 사진을 찍은 것처럼 선명했다.
입을 틀어막아도 터져 나오던, 내 것이 아닌 듯한 음란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처음엔 그렇게 아프기만 하더니 난폭하게 안을 헤집어지고 짓찧어질수록 정수리까지 강타해 오는 쾌감에 정신을 못 차리고 고정원의 이름만 불러 댔었다. 제어되지 않는 게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울어도 멈춰 주지 못한다는 고정원의 말을 뒤늦게 이해하면서 끝 무렵에 가선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애처럼 울기만 했다.
사정 후, 여운을 추스르며 서로의 몸을 꼭 끌어안았을 때 꼭 하나의 조립처럼 맞물리던 감각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차로 갈래?”
묻는 고정원의 말이 단순히 돌아가자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응.”
대답하기 전부터 이미 달아오른 몸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 * *
문이 닫히자마자 입을 맞춘 고정원은 성급하게 내 바지부터 벗겼다.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아 사방이 컴컴했고 차창 또한 선팅되어 있어 희미하게 스며든 빛으로 윤곽을 식별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시야가 어둠에 익었다. 속옷이 벗겨지고 드러난 내 하반신을 본 고정원의 눈이 어떻게 흥분의 색을 띄는지 확인한 나는 꿀꺽, 목울대를 울렸다.
뒷좌석에 누워 한껏 벌린 다리 사이로 고정원의 얼굴이 파묻혔다. 입술을 깨문 나는 고정원의 머리를 감싸며 끙끙댔다. 음경을 머금었던 혀가 빠져나와 음낭을 훑고, 이틀 전 헤벌어진 탓에 잔뜩 부어 있는 구멍의 주변까지 내려왔을 땐 ‘읏!’ 하는 단발의 신음과 함께 허리가 들썩였다.
“아팠어?”
묻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구멍에 입술을 댄 채로 말하니 입김과 움직이는 감촉 때문에 소름이 끼쳤다. 성기를 애무해 줄 때와는 다른 이상야릇한 쾌감에 호흡이 묘하게 흐트러졌다.
양쪽 허벅지를 가슴팍까지 밀어붙여져 엉덩이가 훤히 드러난 자세로 농탕질이 이어졌다. 뜨겁고 축축한 혀가 뾰족하게 세워져 침입할 듯이 굴다가 이내 부어오른 부위를 느릿하게 핥아 주는 데엔 조바심 난 것처럼 허리가 떨려오고 눈시울이 달았다. 빨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고정원은 그 예민한 반응을 일일이 따라오며 확인하려 들었다.
“빨아 주는 거 좋아?”
치아로 주변을 살살 긁어 대니 발가락이 꽉 움츠러들었다. 부어오른 연약한 피부를 날 세워 건드리는 것에 재미를 붙였는지 자꾸만 주변을 아프지 않게 물어 당겼다가 긴장감이 극에 달했을 무렵 부드러운 혀로 핥아 주길 반복했다.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자극이었다.
“이제 그만…… 그만하고, 빨리 해 줘…….”
처음 삽입을 앞두고 안을 넓히던 엊그제처럼 오래도록 부끄러운 애무를 받고 있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우는 소리로 조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때는 엎드린 자세였지만 오늘은 다리를 한껏 벌린 낯부끄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어서 참기가 힘들었다.
“응 지금 하고 있잖아 여기에.”
이번에도 비좁은 구멍에 입술을 댄 채로 말한 고정원이 엉덩이 사이를 진득하게 빨아올렸다. 등줄기가 짜릿해지며 엉덩이가 조여들자 내려다보는 눈이 하고 있는 애무만큼이나 노골적인 색을 띄었다.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가까스로 끝났나 싶었는데, 바지 사이로 꺼내어진 흉흉한 성기를 본 순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군데군데 혈관이 곤두선 기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형태로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음경을 쓸어 올리는 손등 위로도 움푹 솟아 불거진 핏줄이 선연했다.
그때처럼 바로 입안으로 들어올 줄 알았던 성기가 티셔츠를 걷어 올리고 드러난 맨살 위로 올라오자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뭘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한 사이, 유륜에 맞닿은 그것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도드라진 유두에 밀착됐다.
귀두의 선단이 알갱이 같은 젖꼭지를 툭 툭 건드리다 짓눌렀다. 마치 확인하듯 면밀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손가락을 쓰듯 발기한 성기의 머리로 문지르는 행위에 숨이 막혔다.
건드리던 가슴을 지나 쇄골, 목전까지 올라온 살덩이가 코와 뺨 사이에 문질러지며 팽팽하게 고갯짓을 했다. 야릇한 냄새와 열기에 이끌려 입술을 벌리자 빨려 들어오듯 기둥이 안으로 들어찼다. 입안도 뜨겁고 고정원의 것도 뜨거워서 김이라도 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고작 한 번 해 본 정도로 능숙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나은 솜씨로 입술을 오므려 빨기 시작했다. 입술 양 끝이 아플 정도로 크기가 컸기 때문에 반 조금 넘게 머금으면 목구멍까지 가득 들어차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
고정원이 쾌감을 참으며 내는 소리에 덩달아 아래가 저릿해졌다. 목 깊은 곳까지 치밀 때마다 괴로워서 눈물이 차올랐지만 한손으로 머리칼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는 고정원의 허릿짓은 멈추질 않았다. 평소 극진할 정도로 다정한 성격이 거짓말인 것처럼 이럴 때만큼은 자비가 없었다.
“큽, 쯥, 응…….”
목구멍 깊은 곳까지 찔렀다 올라오기를 되풀이하는 탓에 구역감이 들고 괴로웠다. 눈가와 입가가 비어진 액들로 엉망이 되고 나서야 입안을 메웠던 살덩이는 빠져나갔다. 다행히 한계까지 가기 전에 끝난 행위에 나는 밭은 한숨을 내쉬고 비어진 눈물을 닦아 냈다.
“……내일 또 입술 엉망이겠다.”
나를 앉혀 세우고 차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입술을 비추어 본 고정원이 손끝으로 부푼 아랫입술을 쓸며 그렇게 말했다. 아직까지도 두터운 것이 드나드는 듯한 착각과 아릿한 목을 느끼면서도 나는 곧장 고정원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빨리 그때처럼 이어지고 싶었다.
혀끝을 내어 어깨부터 목선까지 길게 핥아 올리는 감촉에 부르르, 떨리며 움츠러들었다. 만족스러운 눈으로 허벅지 위에 올라탄 나를 응시하던 고정원은 양쪽 엉덩이를 한껏 벌리고 금방이라도 찔러 넣을 태세로 발기한 중심을 비벼 댔다.
익숙한 체취를 풍기는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이어질 진입을 기다렸다. 기대감으로 비좁은 골이 수축하며 조였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데…….
“내가 어떻게 해 줄까.”
묻는 말에 밭은 숨이 터져 나오며 애타는 심정이 되었다. 끙, 앓는 신음을 흘리고 목을 더 꽉 붙들어 매자 엉덩이를 움켜쥔 커다란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때처럼…… 해 줘.”
“그때처럼, 어떻게?”
“넣어……서, 네 맘대로 해 그냥.”
초조해서 어깨를 꽉 움켜쥐며 짜증처럼 마무리된 말에 고정원은 등을 떨며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잠시간 울린 뒤, 비좁은 곳을 비집고 들어온 끄트머리를 느끼고 숨을 죽였다. 오늘도 역시나 윤활제도 콘돔도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타액으로 젖어 있던 성기는 어느새 말라 있었지만 부어서 눈에 띄게 녹녹해진 입구는 굵직한 뿌리를 어렵지 않게 삼켜 냈다.
“하…….”
천천한 진입에 긴장한 근육은 물론 오장육부까지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고정원의 몸 또한 딱딱하게 굳어서 세심하게 힘을 조절하고 있었다. 나는 경직된 어깨에 손을 얹고 바짝 올라선 엉덩이를 천천히 아래로 내리며 머금는 면적을 넓혀 갔다.
“으…….”
이물감으로 둔중해지는 뱃속을 참아 내며 입술을 짓씹고 눈을 감았다. 부어오른 입구와 내벽이 하도 홧홧하여 딸려 들어오는 성기가 불로 지진 돌덩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에어컨을 틀지 않은 차 내부로 열기가 고여 땀이 비죽 흘렀지만 덥고 불쾌하다는 생각보단 어서 끝까지 채워졌으면 싶었다. 힘주어 허리를 할 수 있는 데까지 내리자 얼얼하게 벌려진 뒤와 묵직하게 메워진 배가 느껴져 탄식이 터졌다.
그때도 지금도 찢어지지 않은 게 용하다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이 크기는. 입구와 안쪽이 부어올라서 그런지 또 다른 느낌으로 빠듯하고 숨이 가빴다.
커다란 손이 척추를 따라 등허리를 쓰다듬다가 자세가 안정됨과 동시에 티셔츠를 벗겨 올렸다. 상의까지 벗겨지면서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벗은 몸이 됐다. 허리의 움푹 파인 곳에 손바닥을 받치고 가까이 당긴 고정원은 땀으로 축축해진 가슴팍을 한번 핥아 올리고 뾰족 솟은 유두를 입안에 머금었다.
가슴을 빨릴 때면 느껴지는 오묘한 감각에 허리가 들썩이면서 이어진 접합부가 저릿하고 아릿하게 몸속을 진동시켰다. 엉덩이가 멋대로 들썩이며 조여 왔다. 낮은 천장 때문에 잔뜩 수그린 상태였지만 조금만 더 격하게 들썩여도 머리를 박을 것 같아서 아슬아슬했다. 그런 불안을 눈치챘는지, 고정원이 이어진 채로 조심스럽게 움직여 나를 시트로 눕혔다.
땀으로 척척하게 젖은 등에 가죽 시트가 닿고, 내 위로 겹쳐진 고정원이 눈가와 입술에 번갈아 스치는 키스를 했다. 밀착한 상태로 내 얼굴을 확인한 고정원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탁, 탁, 음낭이 엉덩이 사이에 치받아지며 살소리가 났다. 깊이 이어진 채로 짧게 짧게 드나드는 성기의 움직임은 그 굵직한 둘레와 안쪽으로 들어찬 길이를 실감하게 했다.
“아…… 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움직이고 얼마 되지도 않아 고정원의 등을 움켜쥐며 말을 꺼냈다.
“응?”
“좀만, 쉬었다 하면 안 돼?”
엊그제 처음 넣었을 때는 이것보다 아프고 힘들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초반이 힘겹게 느껴졌다. 뚝, 움직임을 멈춘 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준 고정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전처럼 살살 구슬리면서 계속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순순히 말을 들어줘서 의외였다.
“아프면 더 빨아 줄까?”
그렇게 진절머리 나게 구멍을 핥고 빨고 혀를 넣고 해 댔으면서 또 해 주겠다는 말에 기겁하여 고개를 저었다.
“……됐어.”
동시에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빨아 주느냐느니 넣어 주느냐느니 그런 식으로 말하는 고정원은 아직 좀 낯설고 부끄럽고 그랬다.
“……왜, 좋아하면서.”
귓가에 닿는 입술이 축축하게 젖어서 간지러웠다. 속삭여진 목소리도 그만큼 축축한 느낌이었다. 귓불을 빨아 당기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귓속으로 들어온 혀에 깜짝 놀라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뜨거움이 본격적으로 파고들어 왔다. 춥, 하고 구멍의 주변까지 빨아올린 혀가 기어이 귓바퀴를 입안에 머금기까지 했다. 농탕질 치는 습한 소리가 여과 없이 스며들어 생각을 빼앗고 머릿속을 뜨겁게 채웠다. 자각 못한 커다란 신음을 내지르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래로는 성기가 드나들고 있었다.
육중한 몸이 규칙적인 삽입을 위해 추어올려질 때마다 똑같이 육중한 살덩이가 뱃속을 무겁게 때렸다. 그때마다 음낭에 부딪는 부어오른 입구도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아파…… 아파…….”
중얼거리며 어깨에 매달려 우는데도 움직임이 잦아들지도 않고 오히려 거세져 가는 걸 느꼈다.
“그냥 아프기만 해? 응?”
그냥 아프기만 하냐고 묻는 고정원의 목소리와 치닫는 허릿짓이 정신없이 휘몰아쳤다.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넓은 어깨에 꼭 매달려서 겨우겨우 쫓아가는데, 그 와중에도 흔들림에 맞춰 점점 고조돼 가는 야릇한 성감이 느껴졌다. 두드려 맞은 것처럼 엉망진창으로 통증이 느껴지는 뱃속과 상관없이 성기가 찌릿해지고 뜨거워지고 있었다.
고정원의 허리가 들리고 삽입의 각도가 달라지자 쾌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때도 이랬다. 배는 난타당하고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지독하게 아픈데 이따금씩 안을 헤집는 이물감 사이로 중심이 뜨거워질 만큼 짜릿한 성적 긴장이 있었다. 처음 했을 때보다도 훨씬 이르게 다가온 감각에, 안달 나는 기분을 느끼며 흔들리던 양 다리를 고정원의 허리에 힘 있게 감아 조였다.
입에선 더 이상 아프게 앓는 소리가 아닌 새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불쾌하던 통증까지 쾌감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변화는 이미 한번 겪어 본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아픈 것도 상관없이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고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버겁게 느껴지던 허릿짓이 몇 배는 더 거칠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정원, 아, 더 세게, 해 줘……!”
세게 해달라는 정신 나간 애원에 감싸 안은 등이 더욱 단단해지면서 폭발적으로 안을 쳐올리기 시작했다. 차체가 흔들렸다. 일제히 곤두선 근육들이 터지기 직전처럼 팽팽해지며 사정감이 한계치까지 차올라 자꾸만 허리가 들썩였다.
하지만 거의 도달했다고 느낀 순간, 불시에 흔들림이 멈추고 등 뒤로 불쑥 들어온 손에 의해 순식간에 상체가 일으켜 세워졌다.
“아……!”
접합부에 가해진 압력에 뱃속이 울렸다. 사정을 앞두고 민감해져 있던 감각들이 반응하며 엉덩이가 경련하듯 떨렸다. 입술이 부딪치고 부풀어 있던 성기를 커다란 손이 감싸서 흔들자 어떻게 할 새도 없이 하반신이 들썩이며 사정을 맞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주룩, 하고 방금 막 흘러내린 궤적을 따라 흐르는 게 느껴졌다.
품에 안겨 여운을 잠재우기도 전에 이어진 결합이 빠져나가며 체액이 끈적하게 늘어졌다. 벌어지고 채워진 게 그새 익숙해졌는지 밑이 허전했다. 유두를 매만진 뒤 허벅지를 쓸어내리는 짧은 애무 후, 고정원이 낮게 명령했다.
“엎드려.”
저번의 경험으로 이게 끝난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소리 없이 엎드려 자세를 잡았다. 사정의 여운으로 덜덜 떨리는 몸 뒤에서 고정원이 자리를 잡는 게 느껴졌다. 손바닥으로 내 등허리를 누르며 포복을 훨씬 낮게 만든 뒤, 흐물해진 입구에 젖은 끄트머리를 가져다 대고 있었다.
“흑……!”
엉덩이 살이 눌릴 정도로 푹, 하고 처박은 탓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어깨를 붙들고 이따금씩 꽂듯이 안으로 깊이 치대던 고정원은 아예 내 한쪽 팔을 뒤로 접어 고정시킨 뒤 철썩거리는 살 소리가 날 만큼 세게 박아 넣기 시작했다.
“아, 아…… 아!”
쳐든 엉덩이로 내리 꽂힐 때마다 척추를 타고 오르는 쾌감에 머릿속이 난장질당하는 것처럼 울렸다.
“너 만났을 때부터, 내내, 이러고 싶었어.”
뒤로 꺾인 팔이 찌릿하게 통증을 호소할 정도로 억세게 붙들린 채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힘으로 몰아붙여졌다. 울려 퍼지는 살 소리 사이사이로 고정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물과 땀으로 젖은 시야가 점멸하는 것처럼 흐릿했다. 감당하기 힘든 쾌감으로 흐물해지는 머릿속을 느끼면서, 만났을 때부터 내내 이러고 싶었다는 고정원의 말을 곱씹었다. 오늘을 얘기하는 거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꼭 우리가 사귀기 전, 나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러고 싶었다는 말처럼 들리는 게 묘했다.
환기를 시킨 후 에어컨이 도는 상쾌한 내부. 탈력감에 젖어 눈꺼풀마저 무거웠고, 기분 좋은 나른함과 세상만사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듯한 느긋함이 공기를 감싸고 있었다.
앞좌석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등받이를 한껏 젖힌 채 서로에게 겹쳐진 상태였다. 아귀가 딱 들어맞는 너른 품에 안겨 있자니 맞춤형으로 설계된 의자에 앉은 것처럼 편안했다. 비좁은 곳에서 평소에는 좀처럼 취하지 않는 자세를 구사하느라 몸 곳곳이 욱신거렸고, 굵직한 것이 드나들었던 뱃속 깊은 곳이 아직도 무언가를 물고 있는 것처럼 얼얼했지만 기분만은 더 할 바 없이 좋았다.
“…….”
축 늘어져 움직일 생각을 않던 나는 문득 코끝을 스치는 향을 캐치했다. 전부터 쭉 좋다고 생각한 향이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달달하게 밀착되어 코에 감기는 느낌이었다. 냄새 좋다, 중얼거리며 가슴팍 가까이 코를 붙였다.
“이거 무슨 향이야?”
향수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절로 기분이 안정될 만큼 좋은 향을 맡게 되자 궁금증이 생겼다.
“레이어링해서 쓴 건데, 마음에 들면 가져다줄까?”
“……아니. 같이 쓰자는 건 아니고…….”
어쩌면 그냥 고정원한테서 나는 냄새라 좋은 것 같았다. 땀 냄새라든지 심지어 은밀한 곳에서 풍기는 것까지 싫다고 느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른함에 뺨을 가슴팍에 문지르자, 대꾸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에 문질러지고 길쭉한 손마디가 허리춤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아까까지 그렇게 몰아붙였으면서 끝나고 나니 원래대로 한없이 자상해진 게 또 좋아서 실실 웃음이 샜다. 섹스할 때 다정하지 않은 고정원이 싫은 건 아니었다. 낯설긴 했지만 나에 대한 욕심이나 애정이 느껴져서 덩달아 흥분하게 됐고, 마음이 넘치다 보면 그런 식으로 조급해지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어서…… 조금도 싫을 수가 없었다.
“뭔가 속은 거 같다, 너한테.”
“……뭘?”
“너 하나도 안 다정하잖아. 평소에 하도 챙겨 주길래 되게 매너 있을 줄 알았지. 이렇게 난폭한 성격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흥분했을 때만큼은 다른 사람 같아지는 게 의외이기도 하고, 놀리고 싶어져서 해 본 실없는 소리였다.
“……응.”
멋쩍게 웃거나 변명하듯 대응할 줄 알았더니. 정작 돌아온 건 표정 없는 얼굴의 싱거운 단답이었다. 내가 너무 정색하고 말했나?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라 민망해진 나는 어색하게 눈꺼풀만 깜빡였다.
무슨 말을 더 하는 것도 아니었다. 상체를 일으킨 채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는 고정원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낄 때쯤, 의미심장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후회돼?”
“……어?”
티셔츠 위로 요추 부근을 쓰다듬던 손이 어느 틈엔가 뒷목을 지그시 감싸고 있었다.
“알았으니까, 도망이라도 가게?”
한 템포 늦게 이어지는 대화의 핀트가 대체 어디에서부터 어긋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그런 말이 왜 나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한편으로 멀뚱멀뚱 마주 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웃음이 터질 뻔했다. 농담을 못 알아듣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고, 혼자 엉뚱한 방향으로 앞서나가는 고정원의 이런 모습이 신선하고 재밌어서.
“어. 무섭고 억울해서 도망가야지.”
웃음을 꾹 참느라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한 순간이었다.
“……그,”
마주한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가슴이 잠깐 철렁한 기분이 들 만큼 무서운 얼굴이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장난……인데. 그냥 농담한 거, 알지?”
허겁지겁 변명을 하자, 고정원은 응시하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설마 화난 건가? 내가 그렇게 못할 말이라도 한 건가? 단순한 무표정이라기엔 상당히 감정이 깃든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불안했다. 착각인가 싶기도 했지만…… 편안하던 분위기가 일변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인휘야, 우리 규칙 정할까.”
안 그래도 당황하고 있는데 뜬금없는 말이 날아들어 어? 어? 하며 뭐가 뭔지 혼란스러웠다.
“무슨……?”
고정원의 가로로 긴 눈이 한결 가느스름해졌다.
“재미없는 농담하면 벌칙받기, 어때?”
“……뭐?”
재미없는. 농담. 벌칙. 굳어진 머릿속에서 분해된 세 어절이 두서없이 떠돌아다녔다. 나는 그것들을 몇 번이나 곱씹은 뒤에야 마침내 무슨 말을, 어떤 의도로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고정원도 나처럼 장난이었던 거라고 깨닫게 되면서 그제야 긴장이 풀어지고 허탈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 무슨 벌칙인데?”
눈에 힘을 풀고 얼마나 대단한 벌칙인가 보자는 식으로 쳐다봤다.
“이리 와 봐.”
안 봐도 뻔했다. 뒤통수에 손을 얹고 끌어당기며 가까워지는 얼굴에 결국 자지러지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