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그래도 되는 사이 (5/30)

5. 그래도 되는 사이

누나가 방을 구하는 곳은 내가 자취하는 곳에서 지하철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역의 출구로 나오자, 약속 시간으로부터 오 분 정도 지난 시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도 시간 개념이 희박한 건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미리 잡혀 있던 약속까지 취소하고 온 터라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한 삼십 분쯤 더 기다렸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 멀뚱하게 서 있던 무렵, 길의 끝에서 느긋하게 통화를 하며 걸어오는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이내 거리가 좁혀지자 누나는 통화를 하면서도 내 목을 낚아채 헤드락을 걸었다. 스커트에 힐 차림. 방 보러 돌아다니려면 어지간히 발이 아플 텐데 아랑곳없이 저런 신발을 신고 온 걸 보니 여전하구나 싶었다.

“야, 살 만하냐? 얼굴 좋다?”

통화를 끝낸 누나가 전신을 훑어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기세에 기가 눌린 나는 ‘그냥 뭐…….’ 어중간하게 대꾸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여자친구 생겼지?”

뻔하다는 투였다. 민망하기도 하고, 괜한 반발심이 들어서 ‘……아니.’ 하고 소심하게 부정했다.

“아니라고?”

입꼬리 한쪽을 비틀어 올리며 노려보는 태도에 순간 긴장이 됐다. 누나에게 거짓말을 해서 걸리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그간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에 망설여졌다. 여기서 계속 부정을 한다면 누나는 내 핸드폰을 뒤져서 증거를 찾아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맞아.”

쌍욕을 하는 것도 아니고 때리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겁을 먹게 되는지. 부정할 때와 마찬가지로 소심하게 인정하자 그럼 그렇지, 하는 뉘앙스로 픽 웃어 보인다.

“너 누구 사귀는 거 처음 아니야?”

“…….”

“이뻐? 사진 보여 줘 봐.”

평범한 여자친구였어도 누나에겐 별로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마당에 같은 남자인 상황이라 얘기가 나오는 것부터가 불편했다.

“없어. 안 찍었어.”

거짓말하는 가슴이 조마조마한 기색으로 뛰었지만 다행히 누나는 ‘그래?’ 하고 시큰둥하게 넘겼다. 나는 화제를 바꾸기 위해 일부러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근데 혼자 사는 거 안 무섭겠어?”

“무서울 게 뭐 있어. 아, 청소하고 빨래하고 이런 게 좀 무섭긴 하다.”

“왜, 살림도 하다 보면 느는데.”

“몰라 하기 싫어. 어떻게든 되겠지.”

확실히 같이 살 땐 손에 물 한번 묻히는 법이 없던 누나였다. 내가 나가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부모님도 집안일에 대해선 손가락 하나 까딱 않는 누나를 나무라신 적이 없었다. 다만 내가 집안일을 돕지 않을 때면 짜증 섞인 꾸중을 듣곤 했기 때문에, 게으른 누나와는 다르게 금방금방 치우고 닦는 습관이 들 수밖에 없었다.

다른 집은 보통 누나들이 해 준다는데. 어렸을 땐 어찌나 서러웠던지.

“…….”

멍하니 딴 길로 샌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나가 눈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 잠깐 폰 좀 빌려줘. 통화 좀 했다고 배터리 다 나갔네.”

아무 생각 없이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유독 화창하게 내리쬐는 태양빛에 잠시 눈을 찌푸리다, 아차 싶어서 쳐다봤을 땐 이미 사진첩이 열려 있었다.

“올. 야, 여기 둘 중에서 누구야?”

액정을 가득 채운 사진은 바로 얼마 전 바다 여행을 갔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바닷길을 배경으로, 고정원과 나 그리고 여자애들이 다 같이 찍은 네 명의 셀카샷. 누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여자애들 위로, 고정원에게 시선이 고정된 채로 찍힌 멍청한 내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벌거벗겨진 기분이 들어 황급히 손을 뻗었다.

“어 잠깐만. 와, 미친, 와……. 야 얘 뭐야, 모델? 여기 너 옆에 얘, 누구야? 너 친구야?”

누나가 누굴 보고 이렇게 흥분하는지는 뻔했다. 내게 휴대폰을 뺏기지 않으려고 도망가면서 화면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눈을 떼지 않는 누나의 행동이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연인이 남자라서 들키고 싶지 않은 문제가 아니었다. 누나가 고정원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 자체가 싫었다.

“나 얘 소개시켜 줘!”

역시나 누나는 한눈에 고정원에게 꽂혀서 막무가내로 주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랑 사귀는 사람이라고,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고 잔뜩 초조해져서 휴대폰을 뺏어들었다.

“왜 남의 걸 함부로 봐.”

“우리가 남이야 가족이지? 아 됐고, 얼른 저 존잘남 번호 좀 줘 봐.”

누나는 있는 대로 들떠 보였다. 웃으면서 코에 주름이 잡히게 웃는 걸 보니 진짜 신이 난 모양이었다. 진심으로 즐거울 때만 저런 표정을 짓는데 나는 보통 그런 표정을 보면 오히려 움츠러들곤 했다. 어렸을 때 나한테 치마를 입혀서 억지로 밖에 데리고 나가거나, 내가 몰래 감춰 둔 20점짜리 시험지를 일부러 식탁에 꺼내 놓고 부모님이 발견하시게 하는 등, 나를 곤란하게 만들면서 짓던 표정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들 누나가 미인이라고 했지만, 동의할 수 없었던 배경에는 예의 그 짓궂은 표정의 영향이 가장 컸다.

“번호 몰라……. 안 친한 애라서.”

“안 친한데 같이 여행을 갔다고? 장난해?”

“진짜, 잘 모르는 애야. 여자애들이랑 아는 애라서 같이 간 거야.”

끝장을 보는 성격이란 걸 알고 있어서 불안감이 짙어졌다. 어떻게 누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지 좋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거짓말도 위축되니 서툴러지기 마련이었다. 의심스런 눈초리 앞에서 시선이 부자연스럽게 방황했다.

“그럼 네 여친한테 지금 번호 물어보면 되잖아.”

“여친 아니야 얘네. 그냥 다 동기들인데…….”

“남자 이름은 뭔데. 너랑 같은 학교는 맞을 거 아냐.”

“……같은 학교 아니야. 이름도, 그날 대충 듣고 까먹어서…….”

우물거리며 손끝을 뜯었다. 계속해서 모른 척으로 일관하자 분위기가 싸늘해진 게 피부로 느껴졌다.

“나한테 소개시켜 주기 싫어서 그러지 너.”

정곡이었지만 긍정할 수가 없어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결국 말끝을 흩트리고 눈치를 보는데 누나가 말했다.

“됐어, 그냥 해 주지 마. 빈정 상하네 진짜.”

화를 내지 않고 도리어 웃으면서 말을 하니 살벌했다.

알아낼 때까지 끈덕지게 물어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포기가 빨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불길했다. 수습하기 힘든 분위기 속에서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 난데없이 멈춰 선 누나가 내 어깨를 치며 고갯짓을 했다.

“나 여기 앞에 카페 가 있을 테니까 일단 쭉 돌아보고 와. 계약할 만큼 괜찮으면 영통 걸어. 맘에 들면 직접 가서 볼게.”

돌아다닐 만한 신발이 아니다 싶었는데 다 내게 일임하고 본인은 느긋하게 쉴 계획이었나 보다. 아니면 소개 건 때문에 정말 빈정이 상해서 일부러 그러는 것일지도 몰랐다. 서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같이 다니느니 혼자 고생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할 것 같아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반발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뭘 시켜도 군소리 없이 따르는 게 어려서부터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근데 오늘은 내가 둘러보더라도 누나가 며칠 더 알아봐야 될 거야. 하루 만에 좋은 데 구하기도 어렵고, 더 좋은 방 나올 수도 있고.”

“나 급한데. 그냥 되도록이면 오늘 결정할 거야.”

이런 건 급하게 결정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누나 성격상 내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내 경우와는 또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애초에 구하는 방의 보증금과 월세 상한선부터가 현저히 차이 났다. 게다가 매달 벌어서 집세를 내야 하는 나와 달리 누나는 집에서 전부 내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통화하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땐 조금 충격이었지만 첫째를 최고로 대접해 주는 우리 집 분위기를 생각하면 당연한 지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 때는 혼자 일주일 정도 발품을 팔아서 겨우 조건에 맞게 구한 집이었다. 일단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월세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매기다 보니, 결국 반지하 같은 1층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누나가 카페에 들어가고, 나는 홀로 부동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

탁한 숨이 터져 나왔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더 울적해졌다. 지나치게 맑고 예뻤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고정원을 만나서 밥도 먹고, 한강에 가서 자전거도 타고 즐겁게 놀고 있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큰 만큼 기운이 빠졌다.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지친 느낌이었다.

누나에게 연락을 받고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어플을 통해 일대 원룸들의 시세를 알아봤었다. 부동산을 통해 소개받은 첫 번째 방은 보증금이나 월세가 어플을 통해 알아본 곳들보다 저렴했다. 하지만 북향이라 채광이 나쁘고, 2층이라는 것치곤 높이가 1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남향이나 동향이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하고 소개받은 두 번째 방은 채광만큼은 합격이었다. 그렇지만 골목이 좁고 입구가 외진 탓인지 한낮인데도 어딘가 음산하단 느낌이 들어서 여자 혼자 들락날락하기엔 위험할 듯싶었다.

다음으로 방문한 집은 가까운 곳에 편의점도 있고 유동인구가 많았다. 풀옵션에 신축이라 깨끗한 데다 시설도 신식이라 마음에 들었다. 안이 비좁고 월세가 상한선을 조금 웃도는 것 빼곤 나무랄 데가 없는 곳이었다.

“새 거라 깔끔하고, 좋지?”

중개사 아저씨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하셨다.

“네, 좋네요. 좀 좁긴 해도…….”

“혼자 살기엔 딱이지. 쓸데없이 넓으면 밤에 외롭기만 하고.”

아무 대답이 없자 아저씨가 눈을 은근하게 뜨면서 팔꿈치로 나를 쿡, 찔렀다.

“여자친구 있나 봐? 그럼 좁을수록 좋지 뭘.”

이런 식의 농담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아…… 저희 누나가 살 거라서요.’ 하고 어색하게 대답하며 딴청을 부렸다.

수압을 체크할 겸 물도 한 번씩 틀어 보고, 화장실, 창밖 풍경 등도 꼼꼼하게 둘러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현관에 걸쇠가 있는지 등, 내 방을 구할 땐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도 세심하게 신경 썼다. 아무래도 여자가 살 공간이다 보니 방범이 중요했다.

그 후로 부동산은 두 군데 정도 더 돌았다. 누나네 학교 근처에 나와 있는 방들로 서너 개씩 소개를 받아 돌아다녔다. 고만고만한 게 대부분이고 개중에 눈에 띄게 괜찮은 곳들은 보증금이나 월세가 확연히 비쌌다.

세 번째로 방문한 부동산에서 소개받은 방 중에 하나가 위치, 주변 환경, 내부 등 가장 합리적이란 생각이 들어 누나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보여 주었다. 화면상으로 화장실까지 구석구석 보여 주고 나니 ‘베란다 있는 데로 알아봐 주라.’ 하는 김빠지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건 진즉 말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울컥해서 따졌다. 속상해서 한 말인데 진즉 물어보지 그랬냐는 대답을 듣고 기분만 더 나빠졌다.

“배고파 죽겠네…….”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내리 몇 시간을 걷고 있었다. 위가 공복으로 조여 오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어도 부동산을 한 군데 정도 더 방문해 볼 예정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하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대충 삼각김밥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야 했다.

이 좋은 날 밥도 못 먹고 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간신히 한숨을 돌린 나는 편의점의 간이 테이블 한구석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돌아다니면서 틈틈이 주고받던 고정원과의 연락에 답장하기 위해서였다.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냐고 물으며 발 아파서 어떡하냐는 둥, 텍스트로만 봐도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메시지들을 보자 안면 근육이 멋대로 늘어졌다. 하트 이모티콘 하나 없이 이렇게 간지럽게 말하기도 힘들 텐데.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말도 예쁘게 하는 고정원.

다정한 고정원.

“보고 싶다…….”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중얼거리고 말았다. 테이블의 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들었는지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민망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테이블 위로 너저분하게 늘어진 쓰레기들을 모아 휴지통에 밀어 넣고, 후다닥 편의점을 나왔다.

결국 하루 만에 방을 정하고 가계약까지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부동산에서 소개받은 방이었다. 신축으로 깔끔한 내부는 꼼꼼히 살펴본 결과 문제 될 만한 부분이 없었다. 누나가 원하는 베란다가 있으며 주변 환경도 은행과 편의시설 등이 가까이 갖춰져 있었다. 주인집과 통화도 했다. 옆집과 윗집 모두 조용한 집이라 소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누나가 흔쾌히 결정을 내렸다.

보통 알아본 지 하루 만에 방을 계약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수상하리만치 낮은 가격도 아닌 데다 등기부등본 상에서의 문제도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알아본 대로, 가계약 전에 임대차 계약서도 먼저 썼다. 계약 만료가 되면서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은 특히 꼼꼼하게 확인했다.

이 정도면 하루 만에 결정한 거지만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싶었다.

가계약 후 대충 일단락이 되자 바로 고깃집으로 자릴 옮겼다. 귀찮은 일이 끝나서 기분이 좋았는지, 누나는 답지 않게 살갑게 굴었다. 고생 많았다며 고맙다는 말까지 했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통통한 고깃살을 입안으로 연신 퍼 나르니 하루치의 고생이 싹 씻기는 기분이었다. 쌈을 펼쳐 놓고 고기 두 점에 고슬고슬한 밥, 그 위로 마늘과 고추, 쌈장을 듬뿍 얹은 뒤 싸서 입안에 욱여넣고 힘껏 우물거렸다.

그렇게 한참 먹는 데에 집중하던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드드드드 하고 울렸다.

발신인을 보고 화들짝 놀라 휴대폰을 집어 든 나는 통화를 하고 오겠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고깃집 뒤편의 한적한 곳에 다다라서야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녁 먹고 있었어?

하루 종일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이었다. 서늘해진 밤공기와 함께,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만으로 가슴이 벅찼다. 만약 눈앞에 나타나기라도 했다면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끌어안아 버렸을지도 몰랐다.

“……응. 누나가 고생했다고 고기 사 줘서……. 저녁 먹었어?”

그런 감정들을 꾹꾹 누르며 일상적인 안부로 대신했다.

-아직. 이제 먹으려고.

“맛있는 걸로 잘 챙겨 먹어.”

-그럴게. 인휘도 고기 꼭꼭 씹어서, 맛있게 먹어.

……사소한 대꾸 하나에도 왜 이렇게 입이 찢어지게 좋은지. 자꾸만 실실거리며 헤픈 웃음이 샜다.

특별히 힘든 건 없었는지, 잘 마무리 된 건지 등 간단히 대화가 더 오갔다. 끊기가 아쉬워서 서로 미적거리고 있는데, 밖이다 보니 주변이 시끄러워지면서 고정원이 하는 말을 놓치기도 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니, 그냥 보고 싶다고 했어. 집에는, 언제쯤 들어가?

은근슬쩍 드러낸 고백에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서 잠시 목이 메었다. 실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시도 때도 없이 고정원이 보고 싶었다.

“음……. 두 시간, 아니면 세 시간 내로는 들어갈 거 같아.”

-집에 들어오면 연락 줄래?

“……응. 그럴게.”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고정원은 집에 있다고 했었다. 자기 방에 앉아 있나, 아니면 누워 있나. 고정원의 방은 어떻게 생겼나.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났다. 사소한 것까지 모조리 알고 싶어졌다.

“이제……, 끊을까?”

하지만 그런 욕구들을 모두 충족시키기엔 상황이 따라 주질 않았다. 통화가 길어질수록 자리로 돌아갈 때 민망할 게 뻔했기 때문에 아쉬워도 이만 끊어야 했다.

-그래……. 먼저 끊어.

“……네가 먼저 끊어.”

-…….

서로 먼저 끊으라고 떠넘기는 유치한 공방전, 혹은 기다림이 이어졌다.

-그럼, 같이 인사하고 끊을까?

그리고 해결책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정원이 제시한 방법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사이의 ‘인사’는 특정 행동으로 국한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키스라든가, 아니면 뽀뽀라든가.

“……너 그런 거 좋아하더라?”

참을 수 없이 근질거리는 기분으로 물었다. 아니, 인사를 하고 끊자니. 전화에 대고 쪽, 소리라도 내라는 건지. 그런 짓을 나더러 지금 밖에서 하라는 건지…….

-……인휘가 해 주는 건 다 좋아해.

좋아해, 하고 끝이 나른하게 흐트러지는 목소리가 섹시하게 들렸다. 목덜미로 야릇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손끝과 발끝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곰작거리며 움직였다. 이걸 어쩌나. 한숨이 깊게도 흘러나왔다. 내가 곤란해하는 게 다 들렸는지 고정원이 낮게 웃었다.

차라리 빨리 하고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직전까지도 망설였지만, 기어이 ‘쪽.’ 하는 민망한 소리를 만들어 내고 나자 눈가를 비롯해 얼굴 전체가 활활 타올랐다. 어떻게 보면 별 것도 아닌데. 어째 야한 짓을 할 때보다 더 민망한 거 같았다. 고정원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걸 차마 들을 수가 없어서 순식간에 종료버튼을 눌러 버렸다.

두 번은 못 할 짓이었다. 나는 괴상한 소리와 동시에 주저앉았다. 겨우 끝났다 싶어서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고 일어나려던 그때,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얘 왜 이래 진짜…….”

역시나 고정원이었다. 그냥 모른 척 좀 넘어가지.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왕좌왕이었다. 도저히 무시할 수는 없어서 하는 수 없이 휴대폰을 귓가에 대었다.

예고도 없이 쪽, 하는. 입술이 오므렸다 떨어지면서 나는 마찰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따 통화해.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겼다.

뚜뚜뚜……. 일방적으로 끊어진 통화에, 애간장이 온통 들끓었다. ‘허…….’ 불시의 공격을 받은 것처럼 어안이 막히기도 했다. 낯 뜨거운 뽀뽀 소리가 쉼 없이 귓전을 맴돌았고, 우습게도 나는 그 소리 하나에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아까는 두 번은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고정원이 해 주는 ‘인사’를 받아 보고 나니 몇 번이라도 먼저 할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야, 그냥 대놓고 해. 뭘 그렇게 감춰? 더 궁금하게.”

택시 안에서 고개를 바짝 숙인 채 액정 속 작은 자판을 두드리는 꼴이 우스웠나 보다. 누나가 같잖다는 듯 핀잔을 주었다.

“아니…….”

쭈뼛대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지금 들어가는 중이라고 보고를 마쳤으니 도착할 때까진 연락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왜, 보고 싶어 죽겠대? 아까도 뭔 통화를 그렇게 길게 해?”

식사 도중 나가서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변명할 말이 없었다. 식당 뒤편에서 휴대폰에 대고 쪽쪽거리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했다. 용케도 맨정신에 그런 짓을……. 만약 누나가 그걸 봤다면 두고두고 놀리고 욕했을 게 분명했다.

“너는 방학인데 뭐 학원도 안 다녀?”

“그러게, 정신이 없어서…….”

“연애에 미쳤구나 아주.”

보통 동기들은 해외여행이나 영어 공부, 자격증 공부 같은 걸 하는 시기였다. 나도 아르바이트랑 학원을 동시에 병행하려 했지만 어쩌다 보니 매일 고정원과 만날 스케줄밖에는 짜고 있지 않았다.

“근데, 희영 누나가 우리 학교로 편입한 줄은 몰랐네.”

선수를 쳐서 말을 돌렸다. 이대로 내 연애 얘기가 계속되면 잔소리만 거듭될 테고, 엄마는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아시냐느니, 뭐 그런 불편한 쪽으로 대화가 전개될까 봐 싫었다.

“그러게. 너도 몇 번 봤었지 예전에. 같이 만났다 갈래?”

저녁 식사 후, 집 가는 방향이 다른 누나가 나와 같은 택시를 탄 건 내가 사는 자취방 근처에서 살고 있는 누나의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아서 하루 자고 갈 예정인 듯했다.

“어? 아니야 나는.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피곤해서……. 둘이 놀아.”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집에 가자마자 씻고, 고정원과 전화를 할 계획이었다. 지금 생각 같아선 자기 전까지 내내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집에 가자마자 여친한테 전화하려고 그러지. 다 티 난다 티 나.”

“무슨…… 정말 아니거든. 가자마자 잘 거야.”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태연한 척했다. 누나는 의심스러운 걸 넘어서 확신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피임 꼭 해라.”

차가 급정거를 한 것도 아닌데 가슴팍이 앞으로 훅, 당겨지며 삽시에 양 뺨이 달아올랐다. 아니 이 누나가 택시에서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운전하시는 기사님 눈치를 보며 뻐끔거리자, 누나가 손톱 끝으로 휴대폰 액정을 올리다 말고 한심하단 눈초리를 했다.

“넌 옛날부터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이 쫄보냐.”

앞좌석에서 기사님이 풉,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택시에서 내리자 코앞이 집이었다. 가난한 자취생에게 택시는 사치다 보니 평소 같았으면 꾸역꾸역 지하철을 탔겠지만, 누나가 택시비를 내겠다고 해서 망설임 없이 타고 올 수 있었다.

“아 여기 왜 이렇게 오르막이야.”

힐을 신고도 꼿꼿한 자세로 골목을 오르며 누나가 불평했다. 매일 이 길을 지나다니기에 딱히 할 말이 없었던 나는 대꾸 없이 나란히 걸었다.

누나의 동창, 희영 누나가 살고 있는 자취방이 내가 사는 데랑 생각보다 훨씬 가까웠기 때문에 기왕 온 김에 우리 집도 잠깐 들르기로 한 상태였다.

“희영이랑 너랑 한 번도 안 마주친 게 신기하다. 이렇게 가까운데.”

“그러게, 어떻게 한 번을 못 봤지?”

성의 없이 대꾸하며 밑으로는 휴대폰을 켜서 고정원으로부터 온 메시지의 답장을 쳤다.

[집에 다 온 거야?]

묻는 말에 [다 와 가] 하고 답신을 보냈다. 다 왔다고 하면 혹시라도 전화를 걸어올까 봐 씻고 나서 내가 전화하겠다는 말까지 전송한 뒤, 추가로 손을 흔들어 보이는 스티커와 꼭 껴안는 모양의 이모티콘 중에서 뭘 보낼까 고민 중이었다.

“너 집 어디야?”

묻는 누나의 말에 얼굴을 들어 집 쪽을 쳐다봤다. 육안으로 보일만한 위치라, 저기, 하고 고갯짓으로 알려 주려던 때였다.

어…….

느닷없이 자리에서 멈춰 선 나는 벙하니 입을 벌렸다. 빈말로라도 세련됐다고는 포장하기 힘든, 낡은 건물 앞에 서 있던 장신의 남자가 뒤돌아보자 사고가 일시 정지했다.

“왜 그래? 저기 어디?”

“어…… 그게…….”

고정원이 왜, 여기 있지.

너무 의외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눈만 깜빡이고 아무런 리액션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나를 발견한 고정원이 환하게 웃으며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옆에 서 있던 누나가 놀라서 굳어진 걸 알 수 있었다. 운동선수처럼 다부진 몸에 단정한 셔츠를 걸친 채, 근사한 웃음을 매달고 다가오는 고정원은 허름한 골목길을 배경으로 혼자 합성한 것처럼 이질감이 들었다.

“인휘야.”

상대의 귀를 녹일 의도를 갖기라도 한 것처럼 목소리는 달콤했다.

“아, 혹시 누나 분이셔? 안녕하세요.”

예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고정원을 보자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누나에게 남자친구를 소개시킨 것처럼 된 상황도 그렇고,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딱 잡아뗀 마당에 이렇게 떡하니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들켰으니 눈앞이 캄캄해서였다. 게다가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난 고정원이 오늘따라 너무 멋있고 잘나서, 기분이 더 싱숭생숭했다.

“아……, 안녕하세요.”

나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 톤으로 누나가 인사를 했다. 별 것도 아닌 행동에 가슴이 쿡, 하고 쑤셔왔다. 싫은 예감이었다.

“인휘 친구 분?”

누나가 나를 한 번 봤다가 다시 고정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집중하는 눈이 초롱초롱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 누나, 사진 봤잖아 그 여행 같이 갔을 때 만났다고 했던 친구. 같은 학교는 아니고.”

나는 고정원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촉박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과 전혀 다른 말을 하는 나를 고정원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변명은 나중에 하더라도 지금은 누나에게 들키지 않는 게 우선이었다.

“……네, 인휘랑은 여행 갔을 때 만났어요.”

다행히 어떤 낌새를 눈치챘는지, 짧은 정적 후 고정원도 내 거짓말에 맞추어 주었다.

“아…… 그래요?”

누나는 그제야 내가 했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믿는 듯했다. 사실 그런 건 다 상관없어 보이기도 했다. 눈앞의 고정원에게 완전히 정신이 팔려서,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온다고 한들 덥석 믿고 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사이비 종교의 포교활동에 잘생긴 남자를 쓴다더니 실제로 비슷한 광경을 목도하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빌린 거, 지나가는 김에 돌려주려고.”

고정원이 내게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뭐지? 얼떨떨하게 받으면서 내용물에 대해 짐작해 보았다. 뭘 빌려 주었는지 당장 생각나는 게 없었다.

“아아, 응. 고마워.”

일단 아는 척을 하면서 안을 들여다보려 했지만 봉투 한가운데가 스티커로 봉합되어 있어 조금도 보이질 않았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일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며 고정원이 뒤로 물러났다. 옆에 있던 누나에게도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응, 잘 가.”

집 앞에서 혼자 얼마나 기다렸던 걸까.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람을 그냥 선 채로 돌려보내는 게 몹시도 안타깝고 속이 상했다. 하지만 누나가 있는 지금으로선 한시라도 빨리 가 주는 게 기꺼웠으니 붙잡을 수도 없었다.

멀어져 가는 고정원을 아쉬운 눈으로 쫓고 있는데,

“아!”

별안간 팔뚝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에 미간이 절로 일그러졌다. 놀라서 옆을 쳐다보았다.

“야, 빨리 가서 잡아! 여기까지 찾아와 줬으면 집에 들여서 뭐라도 먹이고 돌려보내야지 멍청아.”

팔뚝을 꼬집은 누나는 등을 밀며 재촉하기까지 했다. 손님에 대한 예의를 지키라는 순수한 뜻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누나는 고정원을 돌려보내는 게 아쉬웠던 것이다. 뭐라도 접점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게 빤히 보였다.

“……일이 있다잖아.”

“아, 이 병신 답답이 진짜. 일단 가서 말이라도 해 보라고!”

성격이 급한 누나는 미간에 주름이 팰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어렸을 때도 종종, 내가 누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속도에 쫓아가지 못할 때면 이런 식으로 불같이 화를 내곤 했었다. 금방이라도 뒤집을 기세로 흥분하는 누나가 무서워서 나는 더 버벅거리고, 그 꼴을 참지 못한 누나가 폭발을 하고……. 그런 공포스러운 악순환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빨리 안 가?”

다그치는 목소리가 매서웠다. 힘없이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육체도 정신도 어렸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성장했는데, 어째서인지 어렸을 때와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면 꼼짝없이 시간의 역행 속에서 무력해지는 걸 느꼈다.

“…….”

어떡하지. 막막함이 밀려들었다. 저 멀리 눈앞으로는 멀어져가는 고정원의 등이 보였다. 그냥 달려가서 무작정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뛰라고 조인휘.”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발바닥이 쑤셔 오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득한 피로가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스를 수 없는 명령을 들은 두 다리가 점점 빠르게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기묘한 양가감정 속에서 내달렸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들었다.

“저기……!”

돌아본 고정원이 놀란 얼굴을 했다.

“무슨 일이야?”

“어, 그게…….”

불러 세우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잠깐 들렀다 가라고 하면 고정원은 순순히 응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싫었다. 누나랑 고정원이 같은 공간에 있게 되는 게 끔찍이도 싫었다.

“그냥…… 인사 제대로 못 한 거 같아서…….”

뒷목을 쓸면서 머뭇거렸다. 시야로 고정원의 길고 단단한 손이 보였다. 잡으면 전신이 녹는 것처럼 따뜻하고 안락하다는 걸 알고 있다. 붙잡고 싶은 생각이 충동처럼 번져서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

떨구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 뺨 근처로 다가온 고정원의 손을 피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서였다. 뒤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 누나에게 보일까 봐 순간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무슨 일 있어?”

어색하게 구는 나를 바라보는 고정원의 얼굴에서는 걱정이 묻어났다. 갈 길을 잃고 허공에 띄워져 있던 커다란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아니, 그런 거 아닌데…….”

대답하면서 자괴감이 들었다. 지금 상황을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누나의 명령이 무서워서 여기까지 쫓아왔다는 건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병신. 등살에 떠밀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한심한 나머지 욕지거리가 치밀었다.

“그냥, 미안해서 그래. 계속 기다렸을 텐데…….”

“내가 연락도 없이 찾아온 건데 뭘. 그리고 두 시간밖에 안 기다렸어.”

“……뭐? 그럼 나 밥 먹을 때부터?”

생각을 훌쩍 뛰어넘는 시간에 경악해서 고정원을 올려다보았다. 은근하게 웃고 있던 고정원이 이내 입가를 가리며 터지는 소리를 냈다.

“농담이야. 한 이삼십 분 정도?”

사람 속도 모르고 상쾌하게 웃어 보이더니 기어이 손을 뻗어서 눈가를 살살 건드렸다.

“울겠네. 장난도 못 치겠다.”

정말 그렇게 오래 기다렸나, 너무 놀라서 눈시울이 살짝 뜨거워져 있었다.

“나 잘 안 울거든. 태어났을 때도 한 세 번인가 소리치고 말았댔어 우리 엄마가.”

손등으로 눈가를 쓱 비비며 말했다. 다소 과장이 섞여 있긴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누나에 비해 거의 울지 않아 키우기 쉬웠다는 말은 전부터 이따금씩 들었던 사실이었다.

“씩씩하네.”

고정원의 눈가가 가느스름하게 접혔다. 특유의 다정한 눈빛 앞에서 가슴이 사르르 떨렸다.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혹시나 누나가 이 표정을 볼까 봐 걱정스럽기도 했다. 나만 알고 싶은 표정이기도 했고, 타인에게 보인다면 우리가 연인 사이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표정이기도 했다. 단순히 표현하자면, 내가 숨 쉬는 것까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누나가 서 있는 쪽을 한 번 멀찍이 내다본 고정원이 다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상황인지 굳이 설명 안 해 줘도 돼. 오늘 돌아다니느라 힘들었을 텐데 일찍 자. 상황 되면 연락 주고.”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나는 눈길을 떨군 채로 끄덕였다. 더 이상 마주하고 있다간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할 거 같았다.

기다란 손끝이 무방비하게 벌어져 있던 입술을 스쳤다.

“비밀 연애 하는 거 같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작게 속삭인 고정원이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손가락을 얽었다가 떨어졌다. ‘아…… 비밀 연애 맞나?’ 하고 웃는 소리가 나지막하니 듣기 좋았다. 나도 그제야 짧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운전 조심해서 가. 연락할게.”

터지기 일보직전의 아쉬움을 끌어안고 작별 인사를 했다. 그렇게 뒤돌아서 멀리 떨어져서 기다리는 누나가 시야로 들어오고 나서야,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왜 너 혼자 와?”

가까워지자마자 히스테릭하게 구는 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살갑게 팔을 잡아끌었다.

“들어가자. 맛있는 거 시켜 줄게.”

“무슨 얘기를 그렇게 길게 했는데? 들어왔다 가란 말 한 거 맞아?”

붙든 팔을 쌀쌀맞게 내친 누나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응, 왔다 가라고 했지 당연히. 근데 선약이 있대서…….”

주눅이 들어서 뇌까리는 나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쉰 누나가 눈을 뾰족하게 뜨고 말했다.

“너 쟤 번호 있지? 집도 아는데 번호는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없어. 여행 끝나고 가면서 나 데려다주느라 네비에 집주소가 남아 있었나 봐. 연락처는 진짜 없어. 그러니까 집 앞에 있는지도 몰랐지.”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고정원의 번호를 절대 알려 주고 싶지 않다는 한 가지 생각만을 했다.

“아, 그럼 번호부터 알아 왔어야 될 거 아니야!”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머리통을 맞았다는 걸 깨닫자마자 가슴께가 서늘해졌다. 성인이 된 이후로 누나에게 맞은 게 처음이라 충격을 받았는지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잘게 떨려 오는 손끝을 안으로 억세게 말아 쥐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걔 사귀는 사람 있어…….”

“아 누가 쟤랑 사귀겠대?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번호 달라는 거잖아. 인맥 몰라?”

맞은 부위가 화끈거렸다.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도 물러서지 않는 누나에게 더 이상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어쩌면, 나랑 사귀는 사람이라고 밝힌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더 목을 매고 달려들지도 몰랐다. 어렸을 때,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을 빼앗아 가던 것처럼.

“…….”

침묵 속에서 옛 기억을 떨쳐 내려 노력했다. 그런 기억들이 생생해질 때면 누나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 사랑도, 내 주위 사람들 사랑까지 전부 독차지하는 누나. 그런 누나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애쓰는 나.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지독하게도 힘겨웠다.

“같이 여행 간 애들한테 물어서 번호 알아보는 게 그렇게 어려워?”

“…….”

“너 지금 쟤 번호 가지고 나한테 갑질하냐? 내가 뭘 해 바쳐야 알려 주는 거야? 완전 약았다 너.”

만약 고정원과 내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번호를 매매하듯 넘기고 그럴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멋대로 넘겨짚는 누나가 야속했다. 게다가 오늘처럼 누나의 일을 도와주고 온 날에 이런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울컥거리며 감정이 북받쳤다.

“누나는 왜…… 말을, 그런 식으로밖에 못해?”

긴 한숨을 내뱉은 뒤, 간신히 차분하게 말한다고 애썼는데 결국 울먹이는 소리가 새어나가고 말았다.

“헐……. 너 울어? 왜 울어 내가 뭘 했다고? 황당하네 진짜.”

손등으로 눈가를 짓이겼다. 창피함과 서러움, 분함,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머리가 지끈지끈 울렸다.

“네가 그러니까 답답하단 말을 듣는 거야. 걱정돼서 말해 주는 건데, 너 여자친구 앞에선 그렇게 모지리 같이 찌질하게 굴지 마. 남자가 그러면 정떨어져.”

정말 걱정해서 해 주는 말일까 의구심이 들었다. 차라리 쌍욕을 듣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누나가 하는 말들은 폭언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속으로 되뇌며 감정을 다스리고 있던 때였다.

“무슨 일이야?”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도 나도 짜 맞춘 모양새로 동시에 돌아보았다.

“아…….”

집 앞에 서서 말다툼을 하는 동안 인기척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간 줄로만 알고 있던 고정원이 바로 뒤편에 서있는 것을 보자 수치심이 와락 몰려들었다.

“언제부터 거기…….”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됐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누나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점검해 보려 했지만 굳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차갑게 식어 있는 눈이 나를 지나쳐 누나에게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보였다.

“저쪽에서 얼핏 무슨 말 하는지는 들었는데…….”

아스팔트 바닥을 내딛는 발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제 번호가 필요하신 거예요?”

무척이나 정중한 어조로, 고정원은 그렇게 물었다.

“아, 그게 아니라, 아뇨…….”

누나는 티 나게 당황하고 있었다.

“주세요 그거.”

고정원이 손을 내밀었다. 누나의 손에 들려 있는 휴대폰을 향해서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누나도 그런 기색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란스러운 티를 내더니 들고 있던 휴대폰을 고정원에게 내밀었다.

“…….”

누나의 휴대폰을 들고 한 자 한 자 번호를 찍는 기다란 손가락에서 두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애써 거짓말했던 게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힘들게 숨겼던 번호를, 이런 식으로 당사자가 직접 알려 주게 될 줄은 몰랐다.

울적한 기운이 가슴께를 물들였다. 내 누나이기 때문이겠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번호를 찍어 주는 고정원이 서운했다.

“저한테 직접 물어보시죠.”

번호를 다 찍은 고정원이 휴대폰을 다시 되돌려 주며 말했다. 미간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람처럼 깊게 패여 있었다.

“웬만해선 주거든요 그냥.”

내리깔았던 눈을 뜬 고정원이 누나를 응시했다. 빤히, 말 그대로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나로선 차단 목록 하나 늘어나는 거뿐이고……. 면전에서 감정 상할 일 만드는 것도 수고스러워서요. 굳이 거절 안 해요.”

“…….”

예상치 못한 말들이 쏟아지며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누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굳어져서 고정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근데,”

말과 말 사이에 한숨이 터졌다. 어이없을 때, 의도치 않게 터져 나오는 웃음 같기도 했다. 미끈한 입꼬리의 한쪽이 짧은 순간 올라간 것이 보였다.

“그런 일 같지도 않은 일 가지고 누구를 때리는 거예요?”

완전히 서늘해진 얼굴로 고정원이 그렇게 묻자 골목은 무섭도록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나는 돌연 수치심을 느꼈고,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방금 한 말로 인해 고정원이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장난친 건데…… 그냥 말만 그런 건데요…….”

누나는 중언부언했다. 어른에게 변명하는 아이 같은 태도로, 약간 겁에 질린 듯이 보이기도 했다. 처음 보는 낯선 모습이었다.

“아아.”

고정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리적인 폭력만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덜떨어진 사람들이 가끔 있더라구요. 오히려 입으로 사람 패는 건 더 쉽죠.”

악의적인 단어 선정이 느껴졌다. 더불어 불쾌함이 깃들었음을 투명하게 내비치는 냉랭한 말투였다.

“그러니까 조심해요. 손이든 입이든.”

“…….”

누나의 정돈된 손끝이 떨리는 게 보였다.

“인휘가 마음이 여려서, 아닌 척 괜찮은 척해도 속으론 그게 아니거든요.”

크고 따스한 손이 어깨를 감싸며 끌어당겼다. 나는 이끄는 대로 맥없이 딸려 가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닌 척 괜찮은 척.’ 그 말이 불시에 가슴을 파고들며 감정들을 헤집어 놓은 탓에 애꿎은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감싸진 어깨에서부터 번져 나간 온기가 눈가로 치밀었다.

“같이 갈래?”

아주 조용히, 고정원이 내게 물었다.

나는 짧게 망설였지만. 금방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누나는 말도 없이 떠나가 어느새 멀어지고 있었다.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뒷모습을 보며, 찰나의 걱정은 빠르게 잦아들었다.

둘만 남은 골목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긴 고정원이 축 늘어진 내 한쪽 손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

“가자.”

“…….”

몇 발자국 끌려가다 끄집어내듯이 손을 빼냈다. 골목의 끝에서부터 오토바이의 배기음이 점점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오토바이가 빠른 속도로 옆을 스쳐지나가고, 길의 끄트머리로 이어진 대로변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왜 그래?”

마주쳤던 눈을 금세 피하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수치심이 금방 떨쳐지질 않은 탓이었다. 누나와 그런 실랑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하필이면 고정원에게 보일 건 뭔지. 머리를 맞던 장면이 떠오르면서 또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무래도, 이런 상태로 같이 있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그냥, 오늘은 집에서 쉴게.”

그렇게 보고 싶던 마음도 자취를 감출 정도로 지금은 머릿속이 온통 복잡하기만 했다.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귀고 있는 사람에게 보여 주게 됐으니 타격이 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누나에게 나와 고정원이 사귄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도 은근히 상처가 되는 일이었다. 당당할 수 없고, 숨겨야 하고, 자칫하면 비난받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처음으로 현실적으로 와닿았다.

“미안. 연락할게.”

켜켜이 쌓인 피로에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빠르게 뒤돌아섰다.

문 앞에 다다랐을 무렵, 단단한 힘이 손을 붙들면서 걸음이 휘청였다. 돌아보자 양 미간이 좁혀들어 화난 듯 심각해진 얼굴이 보였다. 아까 누나와 있을 때 보여 줬던 냉기 어린 서늘한 얼굴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갑작스런 변화에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입을 뗐다.

“왜…….”

그러냐는 물음을 끝맺기도 전에 고정원의 입술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나한테 화났어?”

“뭐……?”

화가 난 건 내가 아니라 고정원이 아니었나?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를 향한 진지한 얼굴을 멀뚱멀뚱 올려다보았다.

“내가…… 너희 누나한테 그런 식으로 굴어서.”

눈치를 살피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게 너무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차갑고 무섭게 화를 내던 고정원이 내 행동 하나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게.

“……그런 거 아니야.”

전혀, 하고 덧붙이면서 어색스럽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화내 줘서, 오히려 고마웠는데…….”

빈말이 아니라, 나 때문에 진심으로 화를 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커다란 위로였다.

“그럼 왜 나 안 봐?”

“그냥, 창피하기도 하고……. 무슨 말 해야 될지 모르겠기도 하고…….”

그렇게 대답하며 손가락을 얽어 쥐었다. 누나의 행동, 그리고 누나 앞에서의 내 모습, 그런 것들을 고정원이 모조리 잊어 줬으면 싶었다.

“정말이야?”

목소리가 미약하게 누그러져 있었다. 평이한 어조 속에서 미묘한 변화를 감지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숨죽인 한숨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 보니, 고정원이 커다란 손으로 눈가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공중에서 눈이 마주친 순간, 말을 이으려는 듯 그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하지만 소리가 흘러나오는 일 없이 다물렸다.

나는 어정뜬 간격을 의식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골목이라 사람들이 지나갈 걸 염려하여 뺨에 머무른 손을 붙들어 아래로 끌어내렸다. 크고 무거운 손은 내게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손가락끼리 얽어매며 힘을 주었다.

“헤어지기 싫어.”

투정이라기보다 선언에 가까운 단호한 어조였다. 동시에 물처럼 축축하게 스며드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쏟아질 것 같은 눈으로 고정원이 속삭였다.

“위로해 주고 싶어.”

* * *

세상과 단절시키듯 둔중한 철문이 쾅, 닫히면서 고정원은 나를 끌어안았다.

나지막한 한숨 소리와 함께 뒤통수를 감싸는 손길이 연약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얇은 옷감을 사이에 두고 맞붙은 서로의 가슴팍에서부터 울리는 고동이 백색소음처럼 기분 좋았다.

정수리를 쓰다듬거나, 그 위로 입술을 대거나 하는 모든 몸짓들이 흡사 다친 곳을 입김으로 불어 주는 행위와도 닮아 있었다. 다정한 몸짓에 울컥한 나는 고정원의 옆구리를 붙들었다. 창피한데 좋고, 좋은데 창피하고. 가장 들키기 싫은 모습을 들켰는데 그래도 그 덕에 가장 아팠던 부분을 만져진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아파…….”

마주 안은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가슴이 조이고 갈빗대가 꽉 압박될 만큼 짓눌렸다. 숨이 막혀 본능적으로 옷자락을 붙들고 있는 손에 강한 힘을 주었다.

“말만 잘 하면서.”

“어?”

스르르, 힘이 풀려나가고 얼굴을 마주한 고정원이 미간을 살짝 주름 지으며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속상하다는 듯.

“화나면 화를 내. 네가 참으니까 내가 화나잖아.”

다정한 목소리가 나를 부추겼다.

“…….”

어, 왜 이러지. 당황스러움이 밀려들었다. 이제 다 지나가고 괜찮아졌는데, 그 말을 들으니 난데없이 눈물이 고였다. 시큰시큰한 눈가에서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면서 후다닥 벗어나 눈을 가렸다.

울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인지 더 자제가 힘들었다. 쏟아지는 눈물에 기어이 꼴사납게 어깨가 들썩였다. 고정원이 그런 나를 다시 품에 감싸고 토닥였다.

“아, 나 왜 이러지 쪽팔리게.”

억지로 참느라 딸꾹질이 다 났다. 가슴팍이 자꾸 경련하는 탓에 헛숨을 들이키며 훌쩍이자 큼지막한 손이 등을 문질러 왔다.

“울고 싶으면 울어.”

그런 허락의 말에 또 다시 눈물이 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쓸데없이 품은 왜 이렇게 넓고 파고들기 좋은지. 꾹꾹 참던 반동으로 울음이 크게 터져 버리고 난 뒤로는 가슴팍에 매달려 눈물로 옷을 완전히 적셔 놓았다.

끅끅, 소리 내어 울다가 잦아들었을 즈음엔 둘 다 지쳐서 바닥에 서로의 몸을 포갠 채 늘어져 있었다.

고정원이 이따금씩 부은 눈가에 입을 맞췄고, 나는 기운은 없었지만 속이 시원해진 걸 느꼈다. 묵은 체증이 가신 것처럼 편안했고, 무엇보다 고정원과 엄청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앞서서 추하고 부끄러운 꼴을 보이고 나니 앞으로 어떤 추태를 보여도 받아들여줄 거 같기도 하고. 허세를 한 꺼풀 벗겨 낸 것 같기도 했다.

“우리 누나가 태어났을 때…… 그때 우리 아빠 사업이 최고로 잘나가던 시기였대.”

그렇게 물렁하게 늘어져서 서로의 손가락을 얽으며 장난을 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거 얘기도 흘러나왔다.

“지금은 우리 집 그냥 평범한데…… 옛날엔 되게 잘 살았었나 봐. 외제차도 몇 대씩 몰고 막, 여기저기 건물도 갖고 있고.”

크면서 종종 엄마에게 듣곤 했던 우리 집의 지난 과거였다.

“엄마는 자식 하나만 가지고 싶어 하셨는데…… 어쩌다 내가 임신이 된 거야. 근데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집 사정이 점점 나빠졌거든. 그러다 내가 태어날 때 즈음엔 아빠 사업 완전히 부도나고…… 집에 사람들 쫓아오고, 막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난리도 아니었나 봐.”

“…….”

“그때가 엄마가 인생에서 제일 힘들고 비참했다고 하는데, 마침 그때 태어난 게 나라서 그런지 엄마는 나만 보면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올랐나 봐. 어렸을 때부터 항상 여유가 없으셨어. 크면서 좀 나아지긴 했지만.”

달래듯 눈을 마주친 고정원이 물기로 젖은 내 속눈썹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아빠랑도, 누나가 어렸을 땐 그래도 아빠가 육아도 참여하시고 했는데, 부도난 거 간신히 수습하느라 나 때는 집에 거의 들어오시질 않아서…… 일단 사이부터 서먹하고……. 그래서 나 유치원 운동회 때도 부모님 대신 삼촌이 오시고, 중학교 졸업식도 못 오셨었어……. 별거 아닌 걸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그런 게 제일 서운하더라고.”

다른 사람한텐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얘기들이었다. 물꼬가 트였는지 줄줄 나오기 시작해서 나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려니 하고 넘겼던 것들이 넘긴 게 아니라 쌓아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하면서 이따금씩 눈시울이 벌게졌다.

“아 너무 주절거렸네. 지겨웠지.”

한참을 얘기해 놓고 민망해져서 중얼거렸다.

“더 듣고 싶은데. 밤새서라도 들을 수 있어.”

고정원은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지한 자세로 내 얘기에 집중했다. 그래서 더 고삐 풀린 것처럼 털어놓게 됐다. 더 듣고 싶다고, 밤새서라도 들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이 전혀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제 더 없어.”

쑥스러워서 괜히 기대고 있던 가슴팍에 뺨을 밀착하며 말했다. 나도 그렇고 고정원도 그렇고, 더워서 열이 오른 피부가 따끈따끈했지만 어느 누구도 먼저 떨어져 앉거나 하다못해 선풍기를 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살짝 땀이 배어나 녹진하게 붙어 있는 감각이 싫지 않았다.

나는 부러 고정원의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맨살에 입술을 스쳤다. ……실은, 아까부터 계속 키스가 하고 싶었다. 간지럽게 열이 오르는 느낌에 팔다리를 꼼지락댔다. 이 정도로 티를 내면 해 줄 법도 한데 고정원은 눈치를 못 챈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전혀 반응을 해 오지 않고 있었다.

감질나는 욕구를 참지 못하고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두터운 뒷목을 끌어당겨 촉, 하고 입술을 부딪치자 시원한 입매가 휘어지면서 다시 촉, 하고 화답처럼 입맞춤이 돌아왔다. 그것만으로 몸이 달아서 허겁지겁 매달렸다.

“응…….”

혀가 살짝 스치자 등줄기가 떨리면서 의도치 않은 비음이 새 나갔다. 뭘 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몸의 스위치가 눌리면서 달아올라 버렸다.

“읏, 응……!”

이제까지와는 무언가가 달랐다. 고작 키스 하나에 좋아서 미칠 거 같았다. 혀끼리 야릇하게 섞여 들며 쪽, 쪽, 터져 나오는 소리에 완전히 흥분해서 눈이 감겨들었다.

“앗, 으응, 하…….”

목이 타지 않을 만큼만 조금씩 떨어지는 물을 마시는 것 같다. 민망한 신음이 새어 나가는 줄도 모르고 열렬하게 입맞춤에 빠져들었다. 커다란 손이 등허리를 누르자 자석처럼 달라붙어 몸을 비비게 됐다. 숨결이 어긋나는 게 아쉬워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입술을 빨아 당기고 깨물었다. 고백 후, 리조트에서. 고정원이 왜 그렇게 굶은 사람처럼 달려들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정원아 얼른…….”

나는 윗옷을 벗고 고정원의 상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떨리는 손이 멋대로 어긋났다.

“하자, 응? 하자.”

실오라기 하나 없이 맨살끼리 비벼지는 감각을 원했다. 서로의 몸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온전한 만족감에 빠져들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고정원은 달려들지 않고 무언가 망설이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안달 나는 느낌을 참지 못한 내가 끙, 신음하며 눈살을 찌푸리자…….

“도중에 못 멈춰.”

셔츠를 벗기려 노력하는 흐느적한 내 손을 붙든 고정원이 말했다. 그리고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내 손은 가만히 내려놓고, 한 손으로 능숙하게 단추를 풀어 내려갔다.

“울어도 안 멈출 거야. 그래도 괜찮아?”

왜 내가 울 거라고 생각하고 경고까지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수긍의 의미로 끄덕이며 삐걱이는 간이침대로 올라섰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게 보일 정도로 호흡이 씨근덕대고 있었다.

어느새 하의까지 벗은 고정원이 비좁은 침대 위로 무릎을 내려놓았다. 몰랐는데 고정원 또한 성기가 복부에 닿을 만큼 터질 듯이 흥분한 상태였다. 발가벗은 채 서로에게 몸을 비비고 문질러 가며 몇 번이나 사정했던 며칠 전의 섹스를 떠올리며 나는 기대감으로 목울대를 꿀꺽 울렸다.

“우리가 전에 했을 때랑은 많이 다를 거야.”

그렇게 말하며 고정원은 손가락 두 개로 내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열리듯 멍하니 입술이 벌어지자, 그것들은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혀를 둥글리는 두 개의 손가락이 어찌나 굵고 두툼한지 입안에 거북하도록 가득 찼다.

“내가……, 너한테 들어갈 거거든.”

젖은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의 뜻을 묻기도 전에, 바꿔 메우듯 부드러운 혀가 침범했다.

“응……!”

원했던 접촉에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탄탄한 등에 매달렸다. 쪽, 쪽, 요란하게 입을 맞추며 끌어당겨 누웠다. 흥분하여 성급한 입맞춤에도 일일이 반응해 주며 이곳저곳을 쓸어 주는 다정함에 안 그래도 달아올라 있던 몸이 참지 못하고 음란한 모양새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내가 흥분한 아래를 치댈 때마다 선이 뚜렷한 턱에 힘이 들어가며 조여지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눈으로 담았다. 그리고 고정원은, 그런 나를 눈에 담고 있었다.

“흐으…….”

자꾸만 몸속을 들쑤시는 충동질이 이어졌다. 어떻게 된 게 갈수록 갈급함이 더해져 가는 듯했다. 더, 더 완벽하게 밀착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괴로웠다.

“정원아아…….”

갈라져 울먹이는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한 몸처럼 흔들리던 움직임이 멈추자,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을 느끼며 나는 부푼 하반신을 조급하게 문질렀다. 아, 미칠 거 같아……. 나도 모르는 내 목소리가 한숨처럼 터져 나왔다.

하지만 초조함이 채워지긴커녕, 몸 전체를 감싸고 있던 체온이 한순간 떨어져 나갔다. 흔들림 없는 힘에 의해 몸이 뒤집어지고 시야가 반전되면서 끼익, 조악한 간이침대의 스프링이 울었다.

삽시에 양 무릎이 세워지고 엎드려졌다. 생각지도 못하게 엉덩이가 벌려지며 더운 숨결이 따라붙자 ‘헉’ 날카로운 숨이 넘어갔다.

차마 말 못할 곳에 퍼부어지는 감촉에 뒤채듯 발끝으로 시트를 밀어냈다. 머릿속이 까무룩 암전된 충격 속에서도 쾌감은 착실히 흡수되고 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움켜쥐어 가며 버티다 허리가 무너지자 억센 손이 허리를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아…… 읏……!”

음낭에서 항문으로 이어지는 숨겨진 굴곡까지 샅샅이 핥아 내는 혀의 움직임에 따라 낯 뜨거운 신음이 높아졌다. 성기를 처음 애무당했을 때보다도 아찔했다. 수치심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핥고 빠는 걸로 끝나지 않고 구멍 안으로 침범하는 혀를 느끼고 경악스러운 한편으로 아까 고정원이 내 입안에 손가락을 넣고 했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이곳을 써서 내 안에 들어오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나는 베개를 악물어 가며 참아 냈다.

끈기 있는 공들임이었다. 침으로 흥건해진 베개 커버와 더불어 비좁은 곳 또한 물크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젖었고, 그 후엔 손가락이 들어와 아주 느리고 집요하게 헤집기를 반복했다. 어찌나 안을 적셨는지 이물감보단 진득한 내벽의 열감만이 느껴졌다.

“흑……!”

손가락이 입구 주위를 둥글리는 게 느껴졌다. 마찰하며 생기는 처덕이는 소리 때문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언젠가 고정원에게 ‘방법’을 알려 준답시고 스스로 이곳을 벌리고 쑤셨던 기억이 떠오르며 더욱 수치에 박차를 가했다. 고정원이 내 안을 넓히는 감각은 그때 무식하게 쑤셔 대기만 하던 내 손길과는 비교도 안 되게 능란했다.

“잠깐, 잠깐만……!”

지나치게 능숙한 게 문제였던 걸까.

반복적으로 안을 드나드는 손길에 몸이 반응하는 걸 느끼고 당황하여 뒤로 손을 뻗었지만, 한손으로 제지되며 허리춤에 결박당했다. 엉덩이 속을 드나드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속도를 더하자, 생전 처음 겪는 자극이 튀어 올랐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넋을 놓았다. 젖은 내벽이 찔꺽거리는 소리가 뛰어 대는 심장 소리와 맞물려 귓가를 쉼 없이 때렸다.

“으앗, 앗, 앗……!”

충격으로 벌어진 입에서 줄이지 못한 소리가 터져 나가 방안을 울렸다. 벌벌 떨리는 몸을 느꼈을 땐 이미 균형을 잃은 몸이 무너지고 만지지도 않은 아래가 체액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경련하는 몸이 바로 눕혀진 뒤엔, 쉴 틈도 없이 커다란 몸이 올라왔다. 아직까지도 충격의 여운에서 벗어나질 못한 상태에서 나는 가슴팍 위를 점령한 고정원을 흐릿하게 올려다보았다.

양옆을 지탱하고 선 심줄이 불거진 두꺼운 허벅지와 경계가 뚜렷한 가슴팍, 양감이 확연한 복부가 위압적인 굴곡으로 올려다보였다. 그 아래로는 폭력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몽둥이처럼 굵고 커다란 성기가 꺼덕이고 있었다.

코끝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잠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적셔 줘.”

코와 입 주변 전체가 김이 서린 듯 축축했다. 시종일관 열기를 뿜어내는 우람한 살덩이가 코앞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손안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그것을 나는 입술을 모아 삼켰다.

언제부터 이런 자세가 되었는지는 정확치 않았다. 입안이 찢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큰 성기를 우물거리며 빠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고정원은 자세를 바꿨고, 어느새 각자 얼굴을 역방향으로 둔 채 서로의 것을 애무해 주고 있었다.

‘읏!’하는 촉박한 신음이 터지며 엉덩이가 치솟았다. 부드럽고 축축한 입술이 흡입력 있게 내 엉덩이 사이를 빨아 당겼기 때문에, 나는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아래를 부르르 떨었다. 물고 있는 상태가 힘겨웠지만 참고 더욱 깊숙이 빨았다.

하지만 요령이 없었던 탓에 또다시 얼마 안 가 금방 뱉어 내고 말았다. 숨이 벅찼다. 머금는 게 무리라는 판단이 들자 혀를 내밀어 허술하게 성기의 표피를 핥아 올렸다.

“흐으…….”

고정원은 한 번 한 걸로 모자라, 질척한 구강 애무로 내 뒤를 범벅으로 만들어 놓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피가 몰린 얼굴이 뜨거워졌다. 고개를 숙이고, 지금 붙들 수 있는 유일한 것인 고정원의 성기를 붙든 채 허리를 들썩거렸다.

“안 돼, 안 돼……!”

자극의 강도가 세지면서 급박한 사정감이 치달았다. 아래를 상대의 얼굴에 들이민 자세다 보니 마음대로 쏟아 낼 수도 없었다. 요의보다 강렬한 것을 참아 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두꺼운 팔이 내 양 허벅지를 내리누르고 있어 상체만 버둥거릴 뿐이었다.

꿈쩍도 않는 하반신 탓에 성기는 다시 고정원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격렬하게 반항하는 내 입에서 꼴사납게 울먹이는 소리가 나갔다. 머지않아 기어이 그 뜨겁고 축축한 점막 안에 정액을 방출하고 말았다.

잘게 떨리는 엉덩이 사이로 끈적이는 것이 발라졌다. 나는 그게 곧 내가 고정원의 입안에 뿜어낸 내 체액이라는 걸 알았다. 고정원은 그걸 주름진 구멍 주변으로 촘촘하게 펴 바르고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헉.”

들숨이 거칠었다. 질퍽이는 손가락 두 개가 한꺼번에 들어오자 약한 근육이 헤벌어지는 느낌이 무서웠던 까닭이다. 천천히 진입한 기다란 마디가 속살을 문지르고 넓혔다. 고작 손가락만으로 이렇게 아프고 불편한데 눈앞의 이 커다란 성기가 저곳으로 들어간다니 상상만으로 배가 아리게 조여 왔다.

“흐아…….”

하지만 손가락이 특정 부위를 건드리자 아까도 이미 경험했던 참을 수 없는 감각이 밀려와 나도 모르게 온몸을 뒤흔들고 있었다. 내 밑에 있던 고정원이 슬슬 몸을 일으키면서 내 몸도 앞으로 쏠렸다. 그런 끝에 침대 시트에 얼굴을 처박고, 엉덩이만 높게 처든 자세가 되었다.

“좋아? 허리 흔들고 있어.”

그 말대로 나는 드나드는 손가락의 감촉을 어엿하게 느끼며 엉덩이를 공중에 흔들어 대고 있었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후…….”

옆에서 긴 한숨을 내쉰 고정원이 성기를 매만지는 게 보였다. 성난 살덩이가 끈끈한 물을 토해 내는 것과, 뼈마디가 단단한 손이 그것을 달래듯 움직이는 생생한 모습이 낮아진 시야로 들어왔다.

“잠시만.”

엉덩이를 들쑤시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잠시 침대를 벗어났던 고정원이 오래 지나지 않아 돌아왔을 때 손에는 로션 통이 들려 있었다.

탁, 뚜껑을 열고는 넓은 손바닥 안을 다 채우고도 흘러내릴 만큼 듬뿍 짜내는 모습에 나는 어떤 용도로 쓰려 하는지 예상했다.

“아……!”

차가운 로션이 엉덩이를 치덕거리자 나는 등허리를 보다 완고하게 경직시켰다. 베개를 움켜쥐고 생소한 감촉을 꾸역꾸역 참아 냈다.

“넣을게.”

뒤에 자리 잡은 고정원이 그렇게 속삭이며 준비된 성기를 맞대 왔다. 기묘한 흥분과 긴장감에 잠긴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손가락보다 미끄럽고, 뜨겁고, 그리고 훨씬 두껍다. 당연히 몇 배로 아팠다.

“아, 안 돼, 빼, 빼 줘!”

반쯤 들어왔으려나. 갑자기 뒤의 살덩이가 진입할수록 뱃속의 장기들이 짓눌려 밀리는 듯한 물리적 압박감에 급격히 무서워진 내가 안달하며 소리쳤다.

“모, 못 하겠어.”

겁을 먹고 빠져나가려 하자 고정원이 뒤에서부터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안았다.

“아팠어? 미안. 더 천천히 할게.”

“못 해……. 너무, 너무 커…….”

몸이 달아서 들이댔던 게 허무하게 나는 꼬리를 내린 상태였다. 고정원은 그런 내게 자잘한 입맞춤을 하며 ‘처음에만 조금 아파,’ 하고 속살거렸다. 그 와중에도 터질 듯이 팽팽하게 고갤 치든 성기가 허벅지를 짓눌러 대고 있었다.

“넣을 수 있을 만큼만, 혼자 넣어 볼래?”

그래도 못 할 것 같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그래도 자발적으로 하는 게 덜 무서울 것 같아서.

자세를 바꿔 고정원이 벽에 기대고 그 위로 내가 앉았다. 나는 무릎을 세우고, 우뚝 솟은 살덩이를 엉덩이의 사이로 조준했다.

“천천히 해.”

말하며 고정원이 내 이마를 쓸어 올려 주었다. 고작 쥐고 맞댄 것만으로 벌써부터 식은땀이 흠뻑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읏’ 터지는 신음을 삼키며 엉덩이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그렇게 조금 넣다가 빼내고, 또 조금 넣다가 빼내고. 처음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진척은 키스를 하거나 앞이 만져져도 별반 소용이 없었다. 나중엔 도무지 나와 같은 신체 기관이라고 볼 수 없는 몽둥이 같은 그것을 구멍 주변에 비비고만 있었다.

“앗!”

몸이 순식간에 붕 뜨면서 등 뒤로 푹신한 시트가 닿았다.

“안 돼, 안 돼! 이거 절대 안 들어가!”

입구를 벌리고 들어오려는 기세를 느끼고 나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여기까지만.”

더 안 넣을 거야. 하고 말한 고정원이 내 이마 위로 입술을 짓눌렀다.

말한 대로 끄트머리의 일부만 들어왔고, 그 이상 진입하지 않기 위해 단단히 힘을 주고 있었다. 그래도 무섬증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고정원의 팔을 힘껏 붙들고 목구멍까지 긴박하게 차오르는 숨을 애써 진정시켰다.

“오늘, 돌아다니느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치.”

앞머리가 흐트러지고, 이마의 잔털이 난 부분에 입술을 문지르며 고정원이 살갑게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누나 자취방 때문에 하루 종일 피곤했었는데. 일정을 상기시키는 한마디에 갑작스레 발바닥의 피로함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아, 어……. 진짜 많이 돌아다녔어. 5층인데 엘리베이터 없는 집도 있고.”

나는 이물감을 참느라 허덕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랑 같이 있는 것도 힘들었겠다.”

“아……. 아냐, 우리 누나는 카페서 기다리고. 나 혼자 돌아다녔어.”

말하고 나니 얼마나 호구 노릇을 했었는지 한층 실감이 났다.

“너무 착해서 걱정이네.”

고정원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어찌나 부드럽게 매만지는지 아픈 와중에도 스르륵 눈이 감길 것 같았다.

“……나 안 착한데 하나도.”

“나한텐 착해.”

솔직히 착하다기보다는 답답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성격이라는 건 나도 알지만. 굳이 끝까지 반론하지는 않았다. 콩깍지인지 뭘 해도 내 행동은 다 좋게 봐주는 고정원이 싫지 않아 우물우물 입을 다물었다.

“잘 먹으면서 돌아다니지.”

“그냥 삼각 김밥 먹었어.”

“왜 그것만 먹고 다녔어, 속상하게…….”

걱정 어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왠지 중독될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다니면서 별다른 일은 없었고?”

“음……. 아, 그냥 중개해 주시는 아저씨가 내가 살 집 구하는 줄 알고 좀 웃긴 소리 하시긴 했어.”

“무슨?”

“내가 방이 좀 좁다고 하니까, 넓어 봤자 밤에 외롭기만 하다면서.”

“…….”

“그리고 여친 있으면 좁을수록 좋은 거 아니냐고.”

“틀린 말은 아니네.”

“응. 지금 우리도 이렇게 좁은 데서 이러고 있잖아.”

마주보고 웃음이 터진 순간, 순간 명치 바로 아래가 쿡,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본 나는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아.”

분명 끄트머리만 조금 들어와 있었는데. 대화를 나누는 짧은 시간 동안 어느새 거의 완전하게 들어와 있는 접합부를 보자 놀라움으로 입이 벌어졌다. 정말 신기했다. 그렇게 아프지도 않고, 그냥 의식하고 나니 뒤랑 뱃속에 다소 얼얼한 둔통이 느껴질 뿐이었다.

“다 들어왔네.”

확인시켜 주듯 조금 힘을 실어 들어 올린 탓에 고정원의 음모가 내 엉덩이에 완전히 밀착되었다.

“……어.”

나는 우리가 이어진 부분을 빤히 쳐다보았다. 접혀진 허리도 아프고 들고 있는 목도 물론 뻐근했다. 그래도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던 살덩이가 완전하게 들어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 설마 이것 때문에 계속 이것저것 말을 시켰던 건가.

오늘 하루에 대해 물어보며 조곤조곤 호응해 주던 고정원의 행동을 되짚어 보며 나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꼭 병원에서 아이들 신경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켜 놓고 잽싸게 주사를 놓는 처세술 같았다.

고정원은 앓는 것처럼 나직한 신음을 흘리더니 한손으로 내 볼을 감쌌다.

“…….”

이제 보니 얼굴이고 몸이고 땀으로 온통 젖어 있는 게 보였다. 근육으로 두툼하게 각이 잡힌 가슴팍에도 송글송글 자잘한 땀방울들이 빛을 반사하며 맺혀 있었다.

조심히 들어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 수 있는 흔적들을 보며 가슴이 따끔거리다 못해 뜨겁게 지져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가슴의 통증은 뒤를 한가득 메운 성기의 압박감보다도 몇 배나 더했다.

무작정 상체를 들어 올린 나는 고정원의 뒷목을 끌어당겼다. 땀으로 촉촉한 눈가, 코, 입술 여기저기에 입술을 찍어 대며 진심으로 속삭였다.

“좋아해.”

이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해도 되는지 걱정될 정도로 마음이 무섭게 불어나고 있었다.

“네가 너무 좋아.”

속삭이며 몸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뱃속의 성기가 더욱 확연히 느껴졌다. 그게 묘했다. 이어져 있는 느낌, 내가 고정원의 일부를 품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아……! 아……!”

뱃속이 깊숙이 갈라질 때마다 팽팽한 발끝에 힘이 실리며 몸이 들썩였다. 팔을 등 뒤로 고정당하지 않았다면 들쑤셔지는 횟수가 채 다섯 번도 되기 전에 그 극심한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갔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한 번 쳐올려지는 순간의 긴장이 대단했다. 온몸의 신경이 아슬아슬 조이다 못해 팍, 하고 끊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나마 나를 배려하느라 느리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만약 속도까지 빨랐다면 졸도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하으……! 아, 파아…….”

퍽, 하고 둔부가 마찰하며 몸이 위로 떠밀렸다. 이제껏 중에서도 세게 들이받아지면서 정수리까지 찌릿한 통각이 열렸다. 가까스로 참고 있다가 그 한 번을 계기로 나는 아프단 말을 연달아 중얼거리며 울음기 섞인 목소리를 냈다.

“아파?”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고정원은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꾸었다. 모로 세워진 상태에서 이루어졌던 삽입이 이제는 일으켜 앉혀지면서 깊이가 단숨에 깊어졌다. 아프다는 말에 왜 한층 아픈 체위로 바꾼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뱃속을 일직선으로 가른 성기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며 고정원의 목에 위태롭게 매달렸다.

“후…….”

더운 숨을 내쉰 고정원은 뻗었던 양 다리의 무릎을 세워 중심을 잡았다.

“혀, 내밀어 봐.”

안고 있던 팔을 풀고 고정원과 얼굴을 마주했다. 힘겹게 헐떡이면서도 시키는 대로 혀를 꺼냈다. 그것을 감쳐물고 빨아 당기는 힘을 느끼며 으, 신음했다. 살살 빨아 당기는 애무는 혀뿐만 아니라 입술,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턱까지 내려갔다. 온갖 군데를 빨아 대는 행위에 얼굴이 척척하게 젖어들었다.

“하으으…….”

자기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해 보라는 듯 고정원이 혀를 내밀었고, 머릿속이 과다한 감각들로 물크러진 와중에도 나는 착실히 무언의 요구에 따랐다. 바쁘게 빨고 빨리고 있으니 과연 뒤의 통증이 조금 흐려진 듯싶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계속되는 요구에 따라 혀를 있는 대로 내밀고 허리를 앞뒤로 왔다갔다 움직이는 사이 내 중심은 고정원의 손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읏, 읏……!”

처음엔 엉덩이를 움켜쥔 손에 의해 삐걱삐걱 움직이던 허리도 횟수를 더할수록 제법 기름칠한 것처럼 유연해졌다. 처음보다 가파르게 변한 고정원의 숨소리를 감지하고부터는 흥분이 옮은 것처럼 더욱 속도를 냈다. 뒤로 한껏 밀어낼 때 무언가 뱃속이 찌릿, 조이는 느낌 때문에 그 정체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것도 있었다.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받쳐 주고 있었다. 안정되게 받쳐진 것을 느끼며 나는 짓누르듯 아래를 흔들었고, 얼마 가지 않아 고정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끌어안았다.

“후으…….”

겨우 끝났구나 싶어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마주 안고 있다가, 슬슬 흔들리는 움직임에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어깨를 힘 있게 붙들며 물었다.

“끝난 거 아니었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고정원은 섹시했지만 그런 걸 감상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

“아직.”

대답한 고정원은 뒤이어 내 귓속으로 갈라진 속삭임을 떨어뜨렸다.

“멀었어.”

* * *

“흐앗, 흐앗, 아읏……!”

나는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어 댔다. 몸이 연신 앞으로 쏠림에도 불구하고 엎어지지 않은 건 팔이 뒤로 붙들려 있기 때문이었다. 팔이 끊어질 듯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게 문제였다. 불과 몇 분쯤 전까지 아프기만 했던 결합에 완전히 다른 감각이 끼어들면서 이성적인 판단이라고는 조금도 할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이상해져 있었다. 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자꾸만 일그러지는 표정도, 꽉꽉 조이며 전율하는 몸속도 모두 이상하고 비현실적이었다.

반복되는 삽입 운동에 앞이 발기한 걸 들키고부터였다. 조심스럽게 안을 드나들던 고정원의 움직임은 꾸준히 과격해지기만 했다.

“그만, 아, 제발, 그만……!”

들썩임 때문에 말소리가 뚝뚝 끊겼다. 벌써 수십 수백 번은 더 빌었던 것 같은데. 고정원은 절대 멈추거나 강도를 낮추지 않았다. 울어도 멈추지 않을 거라고 못 박았던 대로, 끊임없이 안으로 들이칠 뿐이었다.

“으아! 아! 흐아……!”

나는 울면서 충격에 휩싸였다. 격렬해질수록 감각은 계속해서 극치를 새로 갱신했고 나는 그게 너무 버거워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차라리 아프기만 했으면 화를 내겠는데, 아픈 게 다가 아니라 꼴사납게 울음만 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어떻게 될 것 같아서 무서웠다. 울면서 찾을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는데, 그 한 사람이 나를 몰아붙이는 장본인이라는 게 서러웠다.

“정워, 아, 정원……, 흐으, 정원아아……!”

훌쩍이는 수준이 아니라 굵은 눈물을 뚝, 뚝 떨어지자 그제야 고정원은 허릿짓을 멈추고 나를 들어올렸다. 메우던 성기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에 이가 악물리며 고개가 꺾였다.

나는 가라앉지 않는 울음으로 창피하게 끅끅대며 고정원의 어깨에 얼굴을 문질렀다.

“울지 마.”

달래는 목소리와 함께 난폭한 몸짓과는 상반되는 다정한 토닥임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기세 흉흉한 성기가 빈 공간이 생겨 빠끔거리는 구멍 속으로 재차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간을 보듯 주변을 찌르는 살덩이에 겁먹은 허리가 꼼질대며 위로 피했다. 양쪽 볼기가 손아귀에 붙잡히고, 이어서 길고 굵은 것이 푹, 꽂혀 들자 나는 비명을 삼키기 위해 딱딱한 어깨를 물어야 했다.

“다시 천천히 할까?”

흐으, 하는 서러운 목울음이 샜다. 그런 와중에도 ‘천천히’라는 말이 들려와 이를 박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깊숙한 데까지 처박혔던 성기가 느리게 빠져나갔다가 다시 퍽, 하고 쳐올렸다. 나는 또다시 터지려는 울음을 참으며 고정원의 뒷목을 껴안았다. 그리고 좀 더 천천히 하라고 울먹였다.

고정원은 나를 안아 들고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갔다. 엎드리면서 시트에 내 등이 닿도록 눕히고, 눈물 때문에 엉망으로 뒤엉킨 내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눈가를 살살 건드렸다.

“자꾸 울음이 나?”

그새 짓무른 건지 눈가가 따끔거렸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너무 아팠어?”

“…….”

아팠던 건 초반에 그랬고, 지금은 솔직히 아픔을 뛰어넘는 극단적인 쾌감 때문에 괴로운 거였다. 하지만 그걸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하기도 왠지 꺼려졌기 때문에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파서 그렇게 야한 목소리로 울었어?”

“…….”

이렇게 흘리면서…….

체온 높은 손이 축축한 입가를 슥 훔치자 열이 옮은 듯 얼굴이 벌게졌다. 나를 내려다보는 고정원의 두 눈이 은근했다.

“계속 아프기만 할까 봐 걱정했는데…….”

말끝을 흐리더니 힘 있게 허리를 박아 올린다.

“다행이야.”

찰박, 하고 척척하게 젖은 살 부딪는 소리가 났다.

“생각보다 많이 좋아해서.”

별로 나를 탓하는 말도 아닌데 수치심으로 눈꺼풀이 떨렸다. 안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지금 스스로도 이렇게까지 엉망이 돼서 헐떡이는 게 적응되지가 않는데. 아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오늘 안 한다고 했을지도 몰랐다. 이건 보통 마음 준비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천천한 움직임이 재개되면서부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입을 틀어막아 가며 참아 봤지만 끝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천천히 하면 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감도가 완전히 달라지기라도 한 모양인지 어떤 세기의 자극에도 일단 안을 들쑤시기만 하면 머릿속이 들끓었다.

“아으, 음, 으응…….”

발기한 내 성기가 근육으로 짜인 복근에 규칙적으로 비벼지고 있었다. 맞닿은 복부가 점도 높은 체액으로 끈끈하게 젖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움직임이 멈췄고, 성기에서 물을 뚝뚝 흘려 가며 치받는 리듬을 따라 사정에 가까워 가던 나는 몸을 뒤틀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움에 못 이겨 홀로 들썩이며 엉덩이로 물고 있는 성기를 힘 있게 조였다. 고정원의 입에서도 더운 탄식이 터졌다.

“해 줘, 빨리, 해 줘…….”

조른 끝에 지저분한 키스가 이어졌다. 타액이 길게 이어지는 입술에 한 번 더 쪽, 하고 찍어 낸 고정원이 귓가에서 속삭였다.

“꽉 붙들 수 있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목 뒤로 둘러 힘주어 붙들었다. 코끝이 고정원의 목덜미에 짓눌려 뭉개졌다. 얼마 안 있어 무섭도록 빠른 진동이 들이닥치자, 치대는 살덩이가 불같은 열을 일으키며 피부가 온통 뜨거워졌다.

벼랑 끝까지 밀려가듯 필사적으로 고정원에게 매달린 나는 과열된 감각에 잡아먹힐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며 울부짖었다.

“앗, 아, 아……!”

미칠 것 같았다. 망가질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좋을 수가 있다니.

“저워, 으아, 정원, 아, 흐아, 아흐, 어떡, 아응, 으아……!”

나는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정원의 이름을 연발해 대고 있었다. 이름은 제대로 된 형태로 완성되지도 못하고 비명에 섞여 들었다.

퍽, 퍽, 퍽, 퍽!

때려 박힐 때마다 정수리 위에 보이지 않는 쾌감 벽에 부딪히는 것 같았다.

“아……!”

강력했던 마지막, 고개가 멋대로 젖혀지며 쾌감이 정점을 찍었다. 하얗게, 빨갛게, 까맣게. 세상이 색을 바꾸며 부예졌다가 일시에 초점을 찾고 선명하게 되돌아왔다.

고여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뜨뜻미지근한 느낌을 마지막으로, 나는 죽을힘을 다해 붙들고 있던 팔다리를 스르륵 풀었다.

내 안에서부터 서서히 빠져나간 고정원은 아직 시들지 않은 성기를 문질렀다. 남아 있던 정액이 내 배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하…….”

탄성을 내뱉는 고정원의 얼굴에 진한 만족감이 스치는 게 어룽진 시야로 들어왔다. 좀 더 제대로 보고 싶었는데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입맞춤이 시작됐다. 느릿하게 혀를 섞는 중에도 가라앉지 않은 몸이 혼자서 들썩들썩 움직였다.

추스르려 노력하는데 잘 되지 않음을 느끼며 나는 입술을 떼자마자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고정원이 내 턱을 붙들며 말했다.

“가리지 마.”

부드럽고 유혹적인 속삭임이었다. 고정원은 평소와 같았을지도 모르지만 더운 열기가 남아 있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야릇하게 들렸다.

“얼굴 보여 줘.”

“싫……어, 부끄, 러…….”

캄캄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부끄러운 거 보려고 이런 거 하는 건데.”

나한테만 보여 달라고.

귓가에 말하며 쪽, 하고 입술을 찍은 고정원은 계속해서 속살거리며 내가 얼굴을 드러내도록 꼬셨다. 보여 달라, 싫다의 대립으로 한참이나 간지러운 말싸움을 주고받았다. 유두가 쭉, 빨아 당겨진 것에 당황해 겨우 팔을 치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이 마주쳤다.

다 젖은 모습의 고정원이 눈앞에 있었다. 머리카락도, 눈도, 입술도. 정말 다 촉촉하게 젖은.

“내 앞에선 다 드러내도 돼.”

크고 포근한 손이 짓무른 뺨을 감쌌다.

“우리는 그래도 되는 사이니까.”

“…….”

더 깊숙하게 이어져 봤기 때문일까. 눈앞의 고정원이 신기할 정도로 긴밀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구도 쫓아올 수도, 끼어들 수도 없는 둘만의 공간 속에 놓여 있는 것처럼.

“응.”

대답하고 이번엔 내가 먼저 입을 맞추었다. 닿자마자, 맞댄 우리의 입꼬리는 짜 맞춘 듯 동시에 호를 그렸다. 가슴이 울렁울렁한, 달콤하기 그지없는 유대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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