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작
“왜 그래?”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스텝 룸에서 나온 점장님이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포타필터를 빼내 씻어 내며 내게 의아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할 일이 끝나긴 했지만 딴짓을 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라 자세를 고쳐 잡으며 머쓱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뭐라 대꾸하기가 애매해 웃어넘겼다. 사실 며칠 전부터 이런 상태였다. 손에 뭐가 잡히질 않고 정신이 자꾸 붕 뜨고 초조하고. 당장 집중하기 위해 뭐라도 하고 싶었지만 오늘따라 카페 내부는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 한숨이 막을 새도 없이 흘러나왔다. 필터를 씻고 뜨겁게 데워 놓은 점장님이 더 이상 할 게 없었는지 다시 내게로 관심을 돌렸다.
“뭐 있네. 여자야?”
“……아뇨.”
아니긴. 하며 어른스럽게 웃더니, 두툼한 팔을 내게 두르며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리곤 조언해 줄 테니 말해 보라며 은근하게 꼬시기 시작했다. 가슴이 갑갑하기도 하고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던 나로선 넘어가고 싶은 유혹이었다. 더구나 점장님은 연애 경험도 많아 보이고 한참 연상이니 제법 쓸 만한 충고를 해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나자고 하는데 자꾸 까여서요…….”
골머리 아픈 상황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뱉어 내고 나니 조금 민망스러웠다. 내 고민의 실체를 파악한 상대는 다행히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걔가 몇 번이나 깠는데?”
“……다섯 번요.”
우리 집에서 같이 자고 간 날 이후, 자질구레한 명목들로 고정원과 약속을 잡으려 시도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한 번도 성사되질 않고 있었다. 소소한 것까지 합치면 벌써 다섯 번째 거절이었다. 한숨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감으로 부풀었던 가슴이 점점 헛바람 빠지듯 쪼그라드는 걸 느꼈다. 일단 만나야 뭐라도 생기지, 아예 보질 못하니 진척이 될 리가 만무했다. 이런 식으로 방학이 다 가 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기로에 섰네.”
의미심장한 말에 무슨 뜻이냐고 쳐다보자 점장이 제법 심각한 눈으로 대응했다.
“거기서 네가 몇 번이고 만나달라고 졸라 봤자 달라지는 거 하나도 없어. 오히려 역효과지.”
“조른 건 아닌데요…….”
“그 여자애한텐 조른 거나 다름없지. 피하는데 자꾸 만나자 하니까.”
피한 거라니.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충격으로 다가왔다.
계속 거절해 와서 불안하긴 했지만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정말 바쁜 거겠지,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늘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으니 약속이 빽빽이 잡혀 있는 것도 당연했고, 우린 연인 사이가 아니라 단순히 이제 막 친해진 동기일 뿐이니 만남에 제한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부러 피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그럼 어떡해요?”
혼자 너무 들떠 있었던 거 같다. 앞으로는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새벽에 했던 도둑 키스를 계기로 그런 감정들은 더욱 고무되어 있었다. 아마 내가 지나치게 긍정적이었나 보다.
“보고 싶어. 딱 네 글자만 보내 봐. 반응 오면 맘 있는 거고, 아니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딴 사람 만나야지 뭘.”
생각지도 못한 방향을 제시해 준 점장님이 툭, 기운 내라는 듯 어깨를 치고 갔다.
‘보고 싶어.’ 내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 네 글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아니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딴 사람 만나야지’라는 부분에서 가슴이 철렁했다.
“아아…….”
아무 일도 없는데 난데없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이깟 걸로 눈물이 나는 건 아닐 테고, 그냥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상태가 중증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근데 같은 학교야? 엄청 예쁜가 봐? 그렇게 목매는 거 보면.”
멀어진 거리에서 커피 가루를 정리하던 점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목매는 것처럼 보였나 싶어서 뒷덜미가 순간 화끈해졌다.
“……되게, 다정해요.”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듯 대답하고 나자 누가 끌어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가 푹, 꼬꾸라졌다. 안 어울리게 수줍은 몰골로 달아오른 양 뺨을 느끼며 심호흡을 했다.
누굴 좋아한다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이런 게 일반적인 건지 아니면 지나친 건지 객관적인 판단이 들지를 않았다. 이래도 되는 건가. 이렇게까지 좋아져도 되는 건가.
생각하는 사이, 보고 싶은 마음이 아까보다 더 간절해져 있었다.
마감 시에 해야 할 리스트가 적힌 종이를 보며 일일이 카페 안을 체크하고, 꺼야 할 전원들은 실수가 없나 다시 한 번 확인한 뒤에 건물을 나섰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어깨가 여기저기 뭉쳐서 뻐근하게 조여 오는 걸 느꼈다.
뒤늦게 들어온 손님이 마감 다 되도록 좀처럼 나가질 않아서 고역이었다. 영업시간이 끝났다고 말을 하는데도 알겠다고 대답만 할 뿐 행동으로 옮기는 일 없이 줄담배를 피워 댔다. 쓸데없이 덩치가 우람한 남자 두 명이었다.
그 사이 손님이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주문을 받게 됐고 주문 상 의사전달 오류로 인해 개수가 덜 나가는 실수가 있었다. 가뜩이나 늦었는데 똑바로 하지 않는다며 화를 내는 여자에게 기가 죽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한 잔을 더 만들어 주면서 추가된 음료 값을 청구하는 걸 까먹고 말았다. 결국 내 돈으로 채워 넣고 기분은 있는 대로 망쳐 버렸다.
한 손으로 반대편 어깨를 주무르며 파스를 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전화였다.
“……여보세요? 어, 엄마.”
약 한 달 만에 듣는 엄마 목소리였다. 사실 진동이 울렸을 때 상대가 고정원이 아닐까 했는데, 기대가 빗나가서 일순 들떴던 기분이 다시 축 늘어져 버렸다. 목소리라도 들으면 좀 힘이 날 것 같았는데.
“아…… 엄마. 그런 건 누나한테 알아서 하라고 하면 안 될까? 그냥 부동산 가면 될 텐데. 그리고 요새 어플 잘 돼 있어서 뒤져 보면 힘들지도 않아요.”
안부를 물으려고 한 줄 알았던 전화의 목적이 다른 데 있었다는 걸 깨닫자 가슴에 시꺼먼 연기가 낀 것처럼 답답해졌다. 누나가 통학하면서 학교 다니기가 힘들다며 나처럼 자취를 하고 싶다고 했단다. 물정도 모르는 누나 대신 한번 해 본 내가 더 잘 알지 않겠느냐며 방 구하는 것 좀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구하는 것까지 나한테 하라고 하는 건 좀…… 그래. 내가 살 집도 아닌데. 거리도 많이 멀고……. 골라 놓고 어떠냐고 물어보는 거면 몰라.”
여자 혼자 사는 게 얼마나 불안하고 무섭겠냐며 이런 때 남동생이 도움 하나 못 주냐는 식으로 몰아가는 데에는 할 말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누나한테 이런 일 저런 일 당하면서 자란 나로선 누나가 딱히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느껴지진 않았지만, 요즘 같이 흉흉한 뉴스가 터져 나오는 세상에 여자 혼자 사는 건 걱정될 만한 일이긴 했다.
“……알았어요. 일단 같이 보러는 갈게.”
집 나오면서 누나 뒤치다꺼리도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래도 좋게 좋게 받아들이고 끝내려 했는데, 이어지는 엄마의 당부 앞에서 결국 단단하게 쌓고 있던 인내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너 살림도 잘하잖아. 반찬 하고 그러면 누나 좀 나눠 주고 그래. 가끔 가서 청소도 좀 해 주고, 응?
“…….”
한참을 말을 못하고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원치 않게 울컥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몇 번이고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다. 내가 귀 기울여서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엄마는 쉼 없이 누나를 챙겨 줄 것에 대한 당부를 내 칭찬인 것처럼 포장해서 말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모든 게 그런 식이었다. 너는 다 잘하니까. 네 누나는 철없고 뭘 몰라서 걱정이니까.
“……솔직히, 엄마 그러는 거 좀 서운해.”
간신히 뱉어 낸 말에 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감돌았다. 짧은 정적 후, 뭐가? 하고 되묻는 엄마의 목소리는 용기 낸 내 진심과는 한없이 동떨어져 메마르고 가벼웠다.
“내가 아무리 남자라도 혼자 사는 거 쉽지만은 않아. 엄마 바쁜 거 아니까, 먹을 것도 알아서 해 먹고, 용돈도 알아서 벌어서 쓰고. 방 구하는 것부터 이사할 때도 친구들이랑 혼자 다 했잖아 내가. 사실 자취하기 전에도 집에서 집안일 나만 했던 거 힘들었어. 근데 왜 누나는…….”
말끝이 떨리면서 흐려졌다. 이젠 포기하고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막상 꺼내고 보니 여전히 서운하고 힘들었음을 깨달았다.
어떤 물질적이거나 실질적인 요구를 원해서 말했다기보단,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딜 거 같아서 한 말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바란 것도 아니고 그냥 알아줬으면 해서. 나한테 계속해서 누나 뒤치다꺼리를 시키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엄마의 생각이 조금은 잘못됐다고 생각해 주길 바라서.
“알았……,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그만 해요.”
하지만 그것도 괜한 바람이었던 거 같다. 네가 괜찮다고 해 놓고 왜 갑자기 그러느냐는 말에서부터 시작해 너는 항상 혼자 잘하니까 고마워하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엄마는 누굴 의지해야 하냐, 엄마 기분은 어떻겠느냐 등,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흐르는 대화 속에서 허탈함과 더불어 오히려 내가 잘못한 것 같다는 죄책감만 남았다.
“……죄송해요. 네. 끊을게요. 주무세요.”
속이 상했다. 상하다 못해 곪고 있는 것 같았다. 부모님과 대화할 때면 종종 드는 기분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도 누나가 부러웠다. 어디서나 당당하게 굴고, 항상 철없이 행동해도 마치 태어날 때부터 부여된 자격처럼 부모님의 사랑을 받는 건 누나 몫이었으니까.
골목 한편에 기대 머리카락을 거칠게 흩트렸다. 낯선 장소에 홀로 남겨져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어린 애처럼 두서없고 방향 없는 외로움이 느껴졌다.
휴대폰 화면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몇 번 손가락을 두드리자 메시지 창 하나가 떴다.
[보고 싶어]
몇 시간 전, 미친 척하고 보냈던 메시지는 읽히기만 한 채 답장 없이 덩그러니 떠올라 있었다. 허탈하게 웃음이 터졌다. 붕 뜬 네 글자가 바보 같기도 하고, 그냥 이 상황이 문득 우습게 느껴졌다. 내 주제에 연애는 무슨, 하는 자조적인 생각과 다르게 맘 한 구석에선 계속해서 고정원이 생각나는 게 또 우스웠다.
청승은 집에 가서 떨자 싶어 마트에서 소주를 두 병 사 왔다. 오늘은 맥주 대신 소주만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집에 다다라서야 지끈거리는 어깨에 붙일 파스를 까먹었단 생각이 들었다. 아쉬웠지만 통증은 소주로 잊자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자취방에 가까워질수록 윤곽이 드러나는 인영을 발견한 나는, 가슴이 만취했을 때처럼 울렁이는 걸 느꼈다.
“안녕.”
고정원이었다.
“……어.”
아무리 봐도 고정원이 맞았다. 어둠 속에서 특유의 다정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놀랍기도 하면서 위화감이 들었다. 그렇게 보고 싶던 사람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꼭 헛것을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여기…… 어떻게…….”
말이 잘 나오질 않아서 더듬더듬하는데 긴 다리를 앞세워 성큼성큼 눈앞으로 다가온 고정원이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혹시 울었어?”
흔적을 찾듯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되짚는 행동에 깜짝 놀라 심장이 튀었다.
“아니?”
다정한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만져진 부근이 뜨거워졌다.
“아니면 다행이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밝아지는 듯했다.
“……근데 여기, 웬일이야?”
어색하게 뒷목을 쓸며 물었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간 날 이후로 처음 보는 거라 더욱 떨렸다.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어. 집에 없는 줄 몰랐네.”
“알바 마감조인 날이어서…….”
“아, 그랬구나. 어쩐지. 연락을 미리 할 걸 그랬다.”
언제부터 기다린 걸까. 묻고 싶었지만 참고 고정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들어왔다 가.”
“아니야. 바로 가 봐야 돼. 내일 집안 행사가 있어서 일찍부터 운전해야 하거든.”
“아…….”
아쉬운 만큼 커다란 탄식이 새어나왔다. 순식간에 우울해진 표정을 캐치했는지, 고정원은 별안간 이것저것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왜 자기가 바빴는지, 왜 약속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며 달래 주는 태도에 서운했던 감정들이 녹아드는 걸 느꼈다.
마지막엔 생각나서 사 왔다며 작은 봉투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안에는 저번에 고정원이 편의점에서 사 왔던 간식들 중 내가 유난히 잘 먹었던 과자 몇 개와 비타민 같은 영양제가 들어 있었다.
“……고마워.”
눈가가 시큰했다. 고맙고 아쉽고…… 또 이대로 헤어져야 하는 게 싫어서 가슴이 다 아팠다.
“일 많이 힘들었어?”
“아니…….”
“기분이 안 좋아?”
“어, 아닌데…….”
시선이 자꾸 땅바닥을 굴렀다. 헤어지기 싫은데 잡을 방법이 없어서 속상하고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졌다.
“근데 보고 싶었다면서 왜 안 봐.”
‘보고 싶어.’ 오늘 전송했던 짧은 메시지가 생각나면서 고개가 더 수그러들었다. 그거 보고 여기까지 온 거구나 싶어서 목이 메었다.
“흠…….”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조차도 간질간질해서 봉투를 쥔 손을 꽉 움켜쥐었다.
따스하고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은 다정했다. 그대로 내려온 손이 뺨을 덮고, 귓전까지 넉넉하게 감쌌다.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터치에 홀린 것처럼 올려다보자, 일렁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키스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금방 손이 떨어져 나가고 더운 기운만이 남았다. 그럴 리가 없지. 아쉬움에 마른침을 삼켜 넘긴 목울대만 허전하게 울렸다.
“다음 주에 우리 바다 가는 거 알아?”
무슨 말인가 싶어 생각해 보다가 지난번에 카페에서 황서연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친구 한 명을 껴서 우리랑 넷이서 바다를 가자고 했었다. 그게 벌써 다음 주라니.
“까먹고 있었는데…… 그러네.”
“나도 잊고 있다가, 그때 그…… 서연이한테 연락이 와서 생각났어.”
황서연과 연락을 주고받는 줄은 몰랐어서 기분이 묘해졌다.
“인휘 너랑 여행 간다니까 좋다.”
담백한 울림이었으나 듣는 입장에선 담담하기가 힘들었다. 멋대로 해석하고 싶은 말이었다. 다른 애들이랑 같이 간다는 부분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고정원과 바다를 갈 수 있다는 게, 가서 고정원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게 나도 좋았다.
“응.”
그런 마음을 단출한 대답으로 대신했다. 참을 새도 없이 배시시 웃음이 터져 나와서 너무 좋아하는 티가 날까 봐 입술을 꾹 다물었다.
“…….”
별다른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고정원의 두 눈이 내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한참을 쳐다보기에 헛기침을 하면서 다른 곳을 쳐다봤다. 싫지만은 않던 적막을 밀어낸 건 고정원의 목소리였다.
“……이제 바쁜 거 끝났으니까. 자주 만나자.”
“……그래.”
대답하며 발끝을 땅에 문질렀다.
가로등 아래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조차도 예뻐 보이는 밤이었다.
“전화할게.”
얼굴을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정원도 어느새 볼우물이 패이도록 환하게 웃고 있었다.
“조심히 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매일매일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욕심은 커져 가는데 고정원과 내 사이는 생각만큼 가까워지지 않아서 애가 탔다.
오늘 잠깐이라도 얼굴을 봐서 겨우 충족된 갈증을 위로 삼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당장에라도 뛰어가서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꾹 억누르며, 가까스로 집안에 들어섰다.
* * *
고속도로를 달리는 고정원의 차 안에서 황서연네 외삼촌이 리조트 사업을 하고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그곳이 이번에 우리가 머물게 될 숙소였으며, 도착하면 이미 말을 해 둔 덕에 갖가지 유료 서비스도 그냥 이용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황서연과 그 친구가 둘이서 짠 계획에 나와 고정원이 추가된 것뿐이라 숙소부터 여행 일정까지 전부 정해져 있었다. 바다까지 운전도 고정원이 하는 데다, 동행하는 여자애 둘 다 활달한 성격이라 차 안 분위기도 밝아 내가 나설 만한 일은 없었다.
“…….”
고정원의 옆자리, 조수석에는 황서연이 앉아 있었다. 출발할 땐 나와 고정원이 먼저 만났으니 옆에 내가 앉았었지만 중간에 휴게소를 한 번 들르면서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상하게 뒤에 타면 멀미가 난다며 앞으로 가 털썩 앉는 황서연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나중에 돌아온 고정원이 내게 왜 뒤로 갔냐고 물었을 때 ‘그냥 뒤가 편해서’ 하고 넘겨 버린 게 뒤늦게 속이 상하긴 했다.
쪼잔하게 왜 이런 게 다 신경 쓰이는지.
울적한 기분을 몰아내기 위해 머리를 긁적이면서 창밖을 내다봤다. 차안에선 황서연이 틀어 놓은 플레이리스트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가볍고 경쾌한 팝은 바다로 놀러 가는 들뜬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시원하게 스치는 풍광에 오래도록 눈이 팔려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오늘 처음 만나는 여자애에게 신경이 미친 건 또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이 차단된 것처럼 생각에 잠겨 있었다는 걸 깨닫고 미안해져서 말을 붙였다.
이름이 박선아라고 했다. 학교생활에 관한 공통적인 화제로 형식적으로나마 몇 마디를 나누자 분위기가 훨씬 유해졌다. 진즉 뭐라도 말을 꺼낼 걸 싶었다.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한 것으로 차안은 갈수록 소란한 활기를 더했다.
“서연이가 너 얘기 엄청 했었는데.”
“아, 정말?”
앞좌석에서 야 조용히 해라, 하는 황서연의 걸걸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했는데?”
“자기 스타일이라고. 색기 있게 생겼다고.”
비명 소리와 함께 앞좌석에 놓여 있던 갑 티슈가 날아들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지면서 삽시에 분위기가 왁자해졌고, 대화의 흐름은 연애나 이상형 쪽으로 기울었다.
“인휘 넌 어떤 스타일 좋아해?”
옆자리에 앉은 박선아가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운전석을 힐끔거리며 말을 골랐다.
사실, 원래부터 특별히 선호하는 유형의 사람은 없었다. 연애 많이 해 본 척 말하고 다녔을 땐 ‘그냥 끌리는 사람이 이상형’이라느니 하면서 구체적인 서술을 피했었다. 그렇게 말하면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 듯이 보일 것 같기도 하고, 없는 이상형을 지어내지 않아도 돼서 속편했으니까.
“난, 그냥…… 다정한?”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말했지만서도 어쩔 수 없이 바로 앞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남자를 겨냥한 게 표 나는 말에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얼굴이 벌게졌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관심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갔다.
“정원아 넌?”
“음.”
고민하듯 뜸을 들이던 고정원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색기 있는 사람?”
성적인 뉘앙스가 깃든 대답에 여자애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나 궁금해져서 고갤 들었을 때, 룸미러에 비친 고정원의 눈이 나를 향해 있는 걸 발견했다.
“…….”
놀라서 시선을 피했다.
설마 내 얘긴가. 자연스럽게 번져 가는 망상에 겨우 발동을 걸었다. 방금 전 색기 있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말을 들은 상황에서 고정원이 따라하듯 그리 말하니 의미 부여를 안 하기가 어려웠다.
오버하지 말자. 오버하지 말자……. 주문을 외우면서 눈을 감았다. 안 그러면 그렇잖아도 흘러넘치는 마음이 주체가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보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집 앞까지 고정원이 찾아왔던 그날 이후, 나는 거기서 감정이 더 커지는 게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받았던 소소한 간식과 비타민을 보는 것만으로 고정원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찾아가서, 당장에라도 고백하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한번 더 사귀어 달라고.
충동이 너무 구체적이고도 강렬해서 꿈자리까지 이어질 정도였다. 꿈속에서 나는 직접 찾아가 열렬하고 패기 있게 마음을 전했고, 고정원은 평소처럼 다정하게 웃으면서 나를 받아 주었다.
꿈은 달콤했지만, 그 영향으로 나는 오늘 아침 고정원과 만난 순간부터 금방이라도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감정들을 간신히 다스려야 했다. 때문에 차에 오르고부터 내내 경직되어 있었다.
꼭 말해야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털어놓은 후엔 저번처럼 취해서 하는 실수가 아니라고 어필하고, 남자답게 사귀어 달라고 말할 계획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돌아가자마자 실행에 옮기려고 벼르듯 단단히 맘먹고 있었다.
“하아…….”
그렇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 떨려서 한숨이 나왔다. 고정원이 마음을 정리했다고 말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데다, 이렇다 할 특별한 일도 없어서 내심 걱정이 되긴 했다. 좋아한다는 감정엔 확신이 있어도 지금이 고백해도 좋은 타이밍인지는 선뜻 확신이 들지 않았다.
“…….”
눈을 뜬 순간 운전석의 룸미러를 통해 또 다시 눈이 마주쳤다. 은근한 시선이, 고개를 돌린 후에도 따라붙는 것을 감지했다.
가만 돌이켜 보면 휴게소를 들린 이후 내가 뒷좌석으로 가면서부터 거울의 각도가 이쪽으로 맞춰졌던 것 같다. 원하는 방향으로 부풀려진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식의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나를 고백하게끔 부추기고 있는 건 확실했다. 고정원의 눈빛이라든가 행동이라든가, 같이 있을수록 느껴지는 묘한 기류들이 내게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나는 시선을 한껏 의식하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가에 팔을 괸 채, 무슨 일이 날 것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야 완전 예뻐!”
차에서 내린 후 펼쳐진 풍경에서부터 시작해 숙소에 도착하자 감탄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황서연도 리모델링 이후엔 처음 와 봤다며 신나는 기색으로 리조트 내부 이곳저곳을 살폈다.
“와…… 진짜 좋다.”
멀미 때문에 지쳐 있던 컨디션을 잠깐 잊어버릴 만큼 내부는 멋있었다. 울창한 열대 나무가 우거진 정원을 지나자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널찍한 야외 수영장이 나타났고, 그 주변을 둘러싼 데크 위로 선베드, 자쿠지 등 이국적인 휴양지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안은 어떤 느낌일까 기대감이 이어졌다.
마침 서연이의 삼촌이 자릴 비우고 계셔서 다른 직원 분께 키를 받아 배정된 방으로 올라갔다. 도착한 방문을 열자, 시야가 확 트였다. 벽 한 면 전체로 트인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새하얗게 마감된 방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유리처럼 투명하게 반사되는 바닥이 안을 더 넓어 보이게 연출해 주고 있었다.
야외 테라스를 구경해 보고 싶어서 바깥으로 나갔다. 광활한 전망에 입을 벌리고 내다보는데 돌연 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고정원도 함께 따라 나와 있었다.
“멋있다 그치?”
기분이 좋아져서 묻는 말에 고정원이 화답하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테라스 한쪽에 마련된 스파와, 야외와 이어져 투명한 창으로 경치를 내다볼 수 있게끔 만들어진 욕실을 발견했을 땐 멈칫거리기도 했다. 너무 커플용이라 여자애들하고 같이 쓰는 게 민망할 거 같았던 이유에서였다.
안쪽을 다 구경한 여자애들이 뒤따라 테라스로 나오자, 멀거니 서 있던 고정원이 대뜸 입을 열었다.
“우리는 방 따로 쓸게.”
밤새 놀 거라고 했기에 당연히 같이 쓰는 걸로 생각하고 있다가 놀라서 고정원을 쳐다봤다. 합의되지 않은 발언이었다. 여자애들도 놀랐는지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아…… 그럴래? 맨 첨에 삼촌한테 말씀드릴 땐 우리 둘이어서 방 하나만 잡은 거였거든. 근데 서비스는 여기로 다 넣어 주시는 거라, 그냥 같이 써도 되는데.”
“여기서 놀다가 잘 때 우리 방으로 가면 되니까, 하나 더 잡을게.”
“그래, 그럼.”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럼 한 삼십 분쯤 뒤에 만나서 밥 먹을까?”
고정원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하자 여자애들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나가는 고정원을 뒤따라가면서 눈치가 보였지만 나도 내심 혼숙하기엔 불편할 거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짝 안심이 됐다.
고정원은 그대로 프론트로 내려가 방을 하나 더 잡았다. 같이 밤새 놀자고 온 건데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하고. 아까 굳어지던 분위기를 떠올리면 걱정도 됐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단둘이 방을 쓴다고 하니 좋기는 좋았다.
열쇠를 받아 올라가면서 힐끔 고정원을 올려다봤다. 얘도 나랑 단둘이 방을 쓰는 게 좋은 건가 멋대로 추측했다.
“으아…… 좋다.”
안 친한 여자애들이랑 있다가 단둘이 되니 편해지면서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늘어졌다. 안락하고 경치 좋고, 이대로 한숨 자면 완벽할 것 같았다. 차안에서도 편히 있질 못하고 고백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룸미러로 비치는 고정원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잔뜩 피로해져 있었다.
“혹시 멀미했어?”
소파로 다가온 고정원이 옆에 앉으며 물었다.
“아…… 괜찮아. 너 계속 운전하느라 힘들었지?”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키며 대답하자 고정원이 그대로 누워 있으라는 듯 손바닥으로 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리곤 어색하게 다시 소파에 드러누운 내게 상냥한 톤으로 말했다.
“난 운전하는 거 좋아해서…… 안 피곤해. 걱정하지 말고 눈 좀 붙여. 시간 되면 깨워 줄게.”
“응…….”
아래서 올려다보는 이런 각도에서조차 빈틈없이 잘생긴 고정원이 신기해서. 그리고 걱정을 받는 기분이 붕 뜨는 것처럼 좋아서, 나는 순순하게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 곧이어 커튼 쳐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방안의 조도가 낮아지는 게 감은 눈으로 느껴졌다. 잠기운에 빠져들면서도 그런 소소한 배려에 행복감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번쩍 눈이 뜨인 순간,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정신이 맑아져 있는 걸 느꼈다. 가벼워진 눈꺼풀을 반복해서 깜빡였다. 잠들기 전의 기억과 다르게 누운 곳이 침대라는 점과, 눈앞에 고정원이 함께 자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나는 팔베개를 한 상태였다.
지잉, 지잉. 진동소리를 따라 뒤돌아보자 협탁 위로 내 핸드폰과 고정원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리고 있었다.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허겁지겁 일어나 집어 보니 시간은 입실한 때로부터 훌쩍 지나 있었고 발신자는 당연하게도 황서연이었다.
“여보세요! 어 서연아……! 진짜 미안! 우리 너무 피곤해서 잠들었다 이제 일어났어. 미안해 바로 내려갈게! 어? 아냐, 어 잘했어. 먹고 있어 바로 갈게.”
전화를 끊자마자 고정원의 팔을 흔들어 깨웠다.
“정원아, 빨리 일어나 우리 늦었어.”
다급해져서 뻗친 머리도 대충 정리하고 내려가려는데 아랫배에 구렁이처럼 굵은 팔이 감겨들었다.
“음……. 좀만 더 있다 나가면 안 되나.”
고정원은 잠겨서 낮게 쉰 목소리로 칭얼거리며 늘어졌다.
“야……, 지금 이럴 때 아니야, 서연이 목소리 장난 아니었어.”
삼십 분 뒤에 만나자고 해 놓고 한 시간 반 가까이 나타나지 않은 꼴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지 고정원이 웃으면서 매달려 왔다. 비몽사몽해서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아 이 와중에도 가슴이 눈치 없이 두근거렸다.
“얼른 일어나.”
금방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니 장시간 혼자 운전하느라 피곤이 쌓인 듯해 안쓰러웠다. 조금이나마 피로가 가시길 바라는 마음에 뒷목과 어깨를 주물러 주며 일어나기를 부추겼다. 어째 주물러 줄수록 근육이 딱딱해지는 것 같아 손에 힘만 들어가는데, 얼마 안 있어 커다란 손이 내 손 위로 겹쳐졌다.
부드럽게 손과 어깨가 격리되면서 고정원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잠이 확 깨네.”
그 말을 듣는 나도, 무슨 이유에선지 한 번 더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어떤 각성을 한 것처럼 배 안쪽 깊숙한 곳이 홧홧해져서 우물쭈물하는데 고정원이 먼저 침대를 벗어났다. 내 등에 하도 비벼 댄 탓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스치는 시야로 눈에 띄게 붉어진 귀가 보였다.
“내려가자.”
팔뚝을 쓰다듬고 간 건조한 손바닥은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온도가 높았다. 열이 나나. 막연한 의문을 품으며, 나야말로 열에 들뜨는 사람처럼 멍해져서 그 뒤를 따랐다.
여자애들이 찍어 준 위치대로 서둘러 식당을 찾아갔다. 인터넷에 맛집이라고 소개된 한정식집이라 찾기는 쉬웠다. 막 도착해서 죄인처럼 자리에 앉자, 다행히 생각했던 것보단 누그러진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라 몇 번이고 변명하며 사과를 했다.
고정원은 생각보다 뻔뻔한 데가 있는지 처음의 미안하단 말 이후론 풀어 줄 기색도 없이 내게 물을 따라 주거나 신중하게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추가 주문을 할 뿐이었다. 덕분에 내가 더 면구스러워져서 분위기를 띄우느라 쓸데없는 소릴 한참이나 지껄여야 했다.
“야, 밥 너희가 사. 커피도.”
우리가 밥값을 지불하는 걸로 일단락이 되고, 시킨 음식이 추가로 더 나오면서 다시 전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속 안 좋아?”
깨작대며 제대로 먹질 못하는 걸 눈치 챈 고정원이 작게 물어 왔다. 요 근래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고, 오늘 빈속에 멀미를 했더니 위가 약해진 상태였다.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로 고개를 내저었다. 혹여나 계속 신경 쓸까 봐 억지로라도 밥을 크게 떠먹으며 입맛을 되찾으려 애썼다.
얼마 후, ‘잠시만.’ 하는 말과 함께 느닷없이 고정원이 자릴 비웠다. 화장실에 간 줄 알았던 고정원이 돌아왔을 때, 손에는 웬 약이 들려 있었다.
“밥 먹고 나서 먹어.”
근처에 약국 찾기도 힘들었을 텐데 어디서 사 왔는지 혹은 얻어 왔는지, 소화제와 속이 불편할 때 먹는 위장약이었다.
“어, 인휘 어디 아퍼?”
“아……. 멀미를 했더니, 속이 좀 안 좋아서.”
여자애들이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시선이 민망해 고개를 푹 숙이고 밥을 우걱우걱 떠먹었다. 오죽 아팠으면 친구가 밥 먹다 말고 약을 사다주나, 하는 분위기란 건 알았지만 괜히 찔리면서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우리가, 정확히는 고정원이 너무 별스럽게 구는 거 같아서.
식사를 마친 다음엔 카페에서 음료를 하나씩 사 들고 바닷가를 산책했다. 여자애들은 수영복 입어야 되는데 배불러서 큰일이라며 우는 소리를 했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바닷가를 찍거나 셀카를 찍으며 둘이 한차례 놀다가 마지막엔 넷이 다 같이 사진을 찍자며 셀프모드 카메라를 들이댔다.
포토 프레임 안에 들어갈 친밀한 포즈를 위해 고정원이 내 어깨에 팔을 둘러 왔다. 다정하게 머리를 기대며 웃는 잘생긴 얼굴이 휴대폰 화면을 통해 나타났다. 나는 조금 멍해져서 그걸 쳐다보고 있었다. 찰칵, 소리가 나며 사진이 찍히고 나서야 사진용 표정을 지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뒤로 몇 번 더 찍었을 땐 떨리는 걸 감추고 최대한 밝게 웃어 보였다. 셀카가 들이밀어질 때마다 딱 붙어 오며 다정한 포즈를 짓는 고정원 때문에 자꾸만 수줍어지는 표정을 해체시키느라 고역이었다.
“와, 잘 나왔다! 단톡방 만들어서 올릴게.”
말을 하기가 무섭게 대화방 알람이 울렸다. 환한 날씨와 멋진 배경 덕에 사진은 높은 채도로 다들 화사하게 나와 있었다. 나는 멍한 얼굴로 찍힌 첫 사진을 제외하고는 다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뭘 그렇게 봐.”
하지만 고정원은 하필 그 사진이 가장 만족스러웠는지 걸으면서도 내내 뚫어져라 쳐다봤다. 민망해서 타박을 담아 말하자 고정원은 여전히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웃었다.
“너랑 찍은 거 처음이라서.”
……홱 얼굴을 돌렸다.
“아……. 어떻게 햇볕이 갈수록 뜨거워지네.”
빨갛게 상기된 건 다른 이유 때문인 것처럼, 필사적으로 변명하며 익은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 * *
해변에는 딱 놀기 좋은 정도의 인파가 몰려 있었다. 본격적인 성수기가 아니라 그런지 미어터지지 않고 적당히 활기찬 느낌이라 다행이었다.
여자애들을 기다리는 동안, 스웜 팬츠를 입고 와서 굳이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던 우리는 먼저 가서 간이용 텐트를 설치하고 짐들을 정리해 두었다.
희멀건 데다 남자다운 근육도 없는 몸이 자신 없었던 나는 준비해온 걸 들고 텐트로 들어갔다. 티셔츠를 벗은 다음, 그대로 나가지 않고 가져온 긴팔 래시가드를 걸쳤다. 표본처럼 완벽한 몸과 비교당할 것을 예방하는 차원에서였다.
“…….”
텐트로 나가자마자 흠칫, 놀랐다. 굵직한 근육으로 뒤덮인 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옷을 입고 있어도 태가 나는 몸이었지만 벗고 나니 그야말로 현실감 없이 이상적으로 훌륭했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면 되는 타이밍인데 괜히 주변을 맴돌며 다른 곳을 쳐다봤다. 이전엔 그저 잘났구나 싶어서 감탄 어려서 봤던 몸에 다른 감흥이 일어나는 게 문제였다. 왜 이렇게 자꾸 야한 생각이 드는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애들이 화려한 비키니를 입고 되돌아왔다. 수영을 잘 못 한다며 걱정하던 황서연은 튜브까지 끼고 나타나서 신이 난 기색으로 빨리 들어가자며 소리쳤다.
한 걸음씩 더할 때마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고정원의 잘빠진 몸을 보고 힐끔거렸던 사람들은 얼굴을 보고는 아예 얼이 빠진 듯 노골적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나도 다를 바 없었다. 고정원이 나를 보며 수영복이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하는 와중에도 정확히 여섯 개로 갈라진 복근이 너무 강렬해서 이끌리듯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수영복 입으려고 운동 좀 했어.”
손바닥으로 배를 한 번 쓸어내린 고정원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꼭 변명하는 투였다. 너무 쳐다봤나 싶어 민망해졌다. 열기를 식히기 위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잠수를 하려는데,
“으악!”
덮쳐 온 기척에 깜짝 놀랐다. 눌러 오는 힘을 인식하자마자 물속으로 잠수를 당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기겁하여 발버둥 쳤다. 누군지 몰라도 목을 감은 채 체중을 실어 온 바람에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푸하!”
괴롭게 물을 마시며 허우적대다 간신히 올라왔다. 먹은 물을 뱉어내고 나자 기침이 쏟아졌다. 코가 매워서 몇 번이고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황서연의 웃음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고, 뒤늦게 등 뒤로 봉긋한 부피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인휘야 놀랐니?”
웃음기 밴 목소리는 선아의 것이었다. 목에 감겨 있던 팔이 풀려나며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이 느껴졌다.
물 묻은 얼굴을 반복해서 쓸어내리며 시야를 깨끗하게 했다.
어렵사리 눈을 떴을 땐, 아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보이던 고정원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쩐 일인지 나를 지켜보는 얼굴은 무섭게 굳어져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방금 전까지 신나게 터져 나오던 주변의 웃음소리가 뚝 끊겨 있었다.
“괜찮아?”
고정원의 말투는 경직돼서 얼핏 심각하게 들렸다. 뒤로 감겨 있던 선아의 체온이 스르륵, 떨어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
물먹은 목소리는 탁하게 나갔다. 코가 맵고 목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켁켁거리며 고통스러운 기침이 이어졌다. 도중에 사레가 들려서 더 힘들었다.
“……잠깐 나가서 쉬자.”
두터운 손이 어깨를 잡아끌었다. 엥? 나는 갑작스런 반응에 당황해서 고정원을 올려다보며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코가 빨개. 눈도 그렇고.”
그렇게 말하며 고정원은 내 눈가를 한 번 쓱, 어루만졌다. 나는 말을 못 잇고 눈만 껌뻑였다. 주변 여자애들이 벙 찐 얼굴을 하고 지켜보고 있는 게 곁눈으로 들어왔다.
물놀이를 하다 보면 있을 수 있는 흔한 장난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고정원은 내가 봐도 뜬금없었다. 하지만 정작 말을 꺼낸 당사자는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지, 혼자서 심각해져선 나를 당장이라도 데려갈 기세였다.
안 되겠다. 상황이 어색해지길 원치 않았던 나는 다짜고짜 고정원의 팔을 붙들어 아래로 끌어내린 뒤 덥석 등에 매달렸다. 아까 당했던 대로 체중을 실어 물속으로 가라앉히고, 나오지 못하도록 버텼다.
여자애들의 웃음소리가 그제야 터져 나왔다.
탄탄한 몸은 억누르기도 쉽지 않았다. 허리에 양다리를 감고 누르는 동안 힘 싸움에 밀려 자세가 흐트러졌다. 껴안고 있다는 자각도 없었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실수로 입술이 고정원의 관자놀이를 스치기도 했다. 결국 물에서 빠져나온 고정원에게 붙들렸고, 어깨에 매달려서 항복 선언을 했다.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린 고정원은 다행히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풀려나자마자 또 다시 기습적으로 물장구를 퍼부었다. 주변에 있던 여자애들에게도 튈 정도로 거센 물장구였다. 새된 비명이 터져 나오며, 그때부터 전쟁 같은 물놀이가 시작되었다.
“야, 이제 그만 하자 너무 힘들어!”
짧은 시간이 지난 것만으로 다들 흠뻑 젖은 꼴이 되었다. 편 가르기를 할 것도 없이 정신없이 서로에게 물을 쏘아 대느라 팔이 욱신거렸다.
“와 진짜 여자라고 안 봐주는구나.”
너무 자제 없이 장난을 쳤는지 확실히 고정원이나 나보단 여자애들 쪽의 몰골이 더 처참했다. 새삼 미안해져서 나름대로 애교스럽게 웃으며 다가가 괜찮으냐고 물었다.
“아니? 안 괜찮은데?”
거리가 가까워지자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선아가 내 팔을 붙들고 아까처럼 물 아래로 끌어내리려 했다. 이미 먹을 대로 먹은 물이 진절머리 나서 필사적으로 버티는데 체격차가 크지 않아서 버거웠다. 체중을 실어 오는 것을 못 견디고 가라앉기 시작하면서 질끈, 눈을 감았다.
영락없이 물에 빠질 거라고 생각한 그때, 등 뒤로 단단한 감촉이 포개지며 순식간에 압도적인 힘으로 들어 올려졌다.
“와, 치사하다. 고정원 인휘 보디가드야 뭐야?”
심장이 사납게 뛰어 댔다. 물에 빠질 뻔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등 뒤로 바투 붙은 체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서연아, 우리도 같이 공격하자.”
물에 젖어 달라붙은 수영복은 맞닿아 전해지는 느낌이 맨살만큼이나 또렷했다.
빈틈없이 밀착된 굴곡진 몸이 의식되기 시작하면서, 머리가 다 울릴 정도로 맥박이 커졌다.
벗어나려 하자 고정원이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배 아래로 팔을 감아 왔다. 스텝이 엉키면서 물속의 부력으로 인해 뒷걸음질을 쳤다. 고정원의 발을 밟고, 조금쯤 버둥거리다가 잠자코 움직임을 멈추었다.
미치겠네.
지나치게 밀착된 자세는 불필요한 부근끼리의 접촉과 마찰을 일으켜서 곤란했다. 서로 부딪히지 않게끔 조심하는 게 매너인데 다른 매너는 다 갖춘 놈이 왜 이런 건 무심한 건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꾸물거렸다.
“잠깐만…… 좀 놔 봐!”
샅끼리 맞닿아 뭉개지는 감각을 참지 못하고 고정원의 팔을 끌어내리며 말했다. 옭아매던 힘이 살짝 풀어졌다.
기회를 틈타 서둘러 빠져나오려 발을 내딛은 순간, 하지만 틈이 생기기가 무섭게 끌어당겨지며 이전보다 완전한 밀착이 이루어졌다. 흡, 하고 급박한 숨이 넘어갔다.
“인휘 내놔.”
눈앞으로 다가온 선아가 길쭉한 팔을 뻗자 고정원은 나를 껴안다시피 하여 뒤로 물러났다.
“싫어.”
나직한 웃음소리가 귓바퀴를 쓸고 갔다. 소름이 돋았다. 어깨가 움츠러들었고, 팔이 감긴 배와 피할 수 없이 밀착된 엉덩이 부분으로 힘이 잔뜩 들어갔다. 분명하게 좋지 않은 신호였다.
황서연까지 끼어 나를 가운데 두고 쟁탈전처럼 놀이가 이어졌다. 도대체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만 하고 가서 쉬자고 우는 소리를 해도, 통하긴커녕 다들 눈에 승부욕이 차서 어떻게든 나를 빼앗을 기회만을 노렸다.
실제로 울고 싶은 기분으로 고정원에게 붙들려 있던 나는 점점 여유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습한 밀착으로 옮아오는 체온과, 귓가에서 직격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가장 고역이었다.
“더 가까이 붙어야지.”
귓가로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 스쳤다. 그건 분명 입술이었다.
닿아오는 모든 감촉들이 생생하게 흡수되는 걸 느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발기했다는 걸 자각한 나는 거의 패닉 상태가 돼서 더욱 몸부림쳤다.
간신히 풀려나자마자 허둥대다 발바닥을 가르는 통증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쥐가 난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힘을 넣으려 할수록 아픔만 더해졌다.
“어, 인휘 왜 그래?”
쥐가 난 것뿐이라고, 괜찮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워낙 발바닥을 가로지르는 통증이 심하기도 했고 균형을 잃으면서 물속에 반쯤 잠겨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으억, 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등이 붕 뜨며 허공으로 끌어올려지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가까운 곳을 붙들었다. 기침을 내뱉자 입안에 머금고 있던 짜디짠 바닷물이 비어져 나왔다.
“…….”
고정원의 목에 양팔을 감고 매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때마침 강한 햇살이 눈을 시리게 공격했다. 힘겹게 뜬 시야로 빛을 등진 고정원의 얼굴이 보였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안긴 건 처음이었다. 설명할 수도 없이 생소한 기분 속에서, 중심부가 부자연스럽게 부풀어 있는 수영복 팬츠가 눈에 들어왔다. 고정원도 봤을까. 수치심에 온몸에 힘이 들어가며 전신이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듯 긴장했다.
“그냥 내려 줘, 빨리, 내려 줘…….”
“텐트 가서.”
악악, 있는 대로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다. 만져 보고 싶었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으면서도 좋다는 생각은 조금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이대로 증발하고 싶을 뿐.
“치료하고 바로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을래?”
텐트 안으로 들어서기 전, 고정원은 걱정돼서 따라온 여자애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모두 따라 들어오기에는 간이용 텐트가 비좁았고, 무엇보다 내 상태 때문에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감당하기 힘든 수치로 시뻘게진 내게 사정을 모르는 여자애들이 괜찮으냐고 물었다. 나는 고정원의 커다란 몸을 가림막 삼아 가능한 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괜찮으니 가서 놀고 있으라고 말해야 했다.
안으로 들어서는 고정원의 움직임은 신속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환자 다루듯 세심한 동작으로 바닥에 앉혀지고, 얼마 안 있어 다리 한쪽이 들렸다. 발바닥 부근을 조심스럽게 눌러오는 압력에 ‘아!’ 하고 내지르며 다리를 움츠렸다. 못 견디게 아프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만지지 말라는 표현이었다.
“그냥 쥐 난 거야,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으니까…… 너도 그만 가서 놀아.”
쪽팔려 미치겠으니까 제발 모른 척 나가 줬으면 싶었다.
하지만 고정원은 잠자코 내 발목을 끌어와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사람처럼 다시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빠져나오려 들썩거리는 움직임을 제압하고, 보다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쥐가 난 주위를 지압했다.
단호한 태도에 기가 눌린 나는 말없이 참아내며 어서 놀란 근육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손길은 망설이지 않고 발목을 지나쳐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아……. 땡땡하게 뭉쳐 있던 근육이 능숙한 완급으로 주물러지자 절로 안타까운 신음이 샜다.
텐트 밖의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안이 거북할 정도로 적막한 탓도 있었다. 고정원은 숨도 안 쉬는 것 같았다. 처음보다도 부피를 키운 중심부가 이렇게나 눈에 띄는데도 태연하게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걸 고맙다 해야 할지 눈치 없다 해야 할지 헷갈렸다.
어느새 허벅지까지 올라온 손이 엄지손가락에 힘을 실어 꾹, 눌러 왔다.
“아파……!”
살이 우묵하게 패일 때마다 허벅지 안쪽의 힘줄이 파들파들 떨렸다. 안 돼.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던 곳으로 빠듯하게 피가 몰리자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힘을 주느라 혈관이 불거진 고정원의 손등 위로 다급하게 손을 겹쳤다. 목소리가 볼품없이 기어 나왔다.
“이제…… 됐어. 다, 풀렸어.”
몇 초쯤 될까 싶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 흐른 뒤 허벅지를 움켜쥐고 있던 손이 떨어져나갔다. 순간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겹쳐져 있던 피부간의 온도는 높았다.
“쉬다 나올래?”
“어……?”
고개를 들고 나서야, 갈라진 가슴팍 사이로 흐르고 있는 땀방울이 보였다. 그렇잖아도 낮은 목소리는 듣기 힘들게 잠겨 있었다.
“……응.”
나는 끌어 모은 다리에 고개를 파묻으며 대답했다.
* * *
저녁이 되어 기다리던 바비큐를 구워 먹는데도 기분은 들뜨지 않고 축 처지기만 했다. 낮에 바다에서 장난치다 생겼던 일이 금방 떨쳐지지가 않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수영이 서툰 황서연이 고정원에게 지도를 부탁했었다. 의외로 고정원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고, 그러다 수심 깊은 곳까지 옮겨 갔을 때 겁을 먹은 황서연이 고정원에게 안긴 것을 내가 목격한 게 전부였다.
다만 근육으로 다져진 고정원의 남자다운 몸에 선이 가느다란 황서연의 몸이 밀착되어 있는 걸 본 순간 느꼈던 감정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놀라움 후, 허무한 탈력감. 그리고 왠지 모르게 초라해지는 것 같았다. 질투를 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복잡한 감정 변화를 단어 하나로 설명하기엔 어딘가 부족했다.
“아직도 속이 안 좋아?”
새로 구운 고기를 가져온 고정원이 물었다. 변함없이 상냥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가슴 한쪽이 울컥 치미는 느낌에 ‘아니’ 하는 무심한 대답이 튀어 나갔다.
이젠 티셔츠로 가려졌지만 충분히 탄탄함을 느낄 수 있는 가슴팍을 보자 낮에 봤던 황서연과 밀착되어 있던 광경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거의 벗은 것이나 다름없던 남녀의 잔상은 유독 외설적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
묵묵히 고기를 씹었다. 옆자리에 앉은 선아가 비어 가는 내 와인글라스에 술을 따라 주었다. 고갤 들어 고맙다고 말하자 선아는 내가 바다에서 놀다 다친 이후로 계속 아파 보인다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너 진짜 괜찮은 거야?”
“어……. 사실 내가 어제 잠을 설쳤거든. 그래서 그런가 봐.”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표정 관리가 안 됐다는 걸 깨닫고 미안해져서 그때부턴 억지로 웃기도 하고 장난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황서연의 눈길이 고정원에게 향해 있는 걸 발견했을 때, 눈치도 뭣도 없는 내가 그 눈길에서 읽을 수밖에 없던 어떤 감정 앞에선 도저히 꾸며 내서라도 웃을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말 걸 그랬다는, 공연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 매년 오고 싶다 진짜. 너무 좋아.”
선아가 행복한 표정으로 양팔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매년 오면 되지. 내년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인휘랑 정원이까지 고정 멤버 해서 겨울에 또 오자.”
이번에 온 것도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드는 마당에 겨울에 또 이 넷이서 오자는 건 솔직히 조금도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다. 고기를 우물우물하며 예의상이나마 그러자는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옆에서 고정원이 말했다.
“그럴까?”
부담 없이 가벼운 투였다.
밤바다가 내다보이는 훌륭한 전망에 느긋한 분위기와 여름밤의 선선한 날씨. 맛있는 음식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부족함 없는 순간이었지만…….
얹힌 듯 답답한 한숨이 나왔다.
“……인휘야, 어디 아파?”
화가 났다.
“인휘야.”
고정원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괜찮은 거야?”
무턱대고 입안으로 여러 개 욱여넣어서 씹기 힘든 무언가처럼 변해 버린 고깃덩어리를 꿀꺽 삼켜 내고 고갤 끄덕였다. ……그러게, 또 오면 좋겠다. 중얼거리듯이 한 말을 모두 들었는지 다시 분위기가 확 밝아졌다.
“근데 둘이는 왜 안 사귀어?”
도저히 음식이 더 들어가지 않아서 과일을 몇 개 집어 먹거나 와인으로 목만 축이던 중이었다. 황서연의 질문에 깜짝 놀라 고갤 들었다.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얼굴을 마주보면서 생각이 뒤죽박죽 엉켰다. 왜 안 사귀냐고 물은 건가 지금? 우리 사이를 눈치 챈 거야……?
“어, 어? 우리? 우리, 왜…….”
“여자친구 진짜 왜 안 사귀지, 인기 많을 텐데? 둘 다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니야?”
아…….
얼굴이 삽시에 뜨끈해졌다. ‘둘이는’과 ‘왜’ 사이에 생략된 말을 뒤늦게 알아듣곤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앞서간 스스로의 착각이 어처구니없어 머리통을 바닥에 박아 버리고 싶었다.
“근데 인휘는 얘기만 들었을 땐 나쁜 남자 막 이런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까 완전 귀여워. 아, 귀엽다는 말 싫어하나?”
연타를 맞은 것 같았다. 여자깨나 만나 보고 다닌 것처럼 입을 털고 다녔던 게 갑자기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면서 양심이 찔렸다. 차마 소문은 가짜고 이게 진짜라서 그렇다고 대답할 순 없어서,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애써 웃어 보였다.
“맞아. 난 얘 얼굴만 보고 되게 까칠하고 말 거침없이 하고 그런 성격인 줄 알았잖아. 근데 의외로 차분하고 말도 착하게 하고……. 정원아 인휘 원래 이래? 아니면 우리랑 안 친해서 내숭떠는 거야?”
올곧은 자세로 식사를 하고 있던 고정원이 포크를 내려놓더니 와인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원래 이래.”
그리곤 집중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차분해서 같이 있으면 편해. 배려심도 많고, 착하고…… 귀여운 것도 맞고.”
듣기 좋은 목소리는 침착했고 진지하기까지 했다. 그게 못 견디게 민망해 딴청을 부렸다.
“큼…….”
“푸하, 정원이 얘도 생긴 건 아닌데 너무 진지해서 깜짝깜짝 놀라잖아. 지금도 무슨 여자친구 자랑하는 거 같아. 미치겠다. 가끔 얘네 보고 있으면 커플 여행에 낀 거 같아서 기분 되게 이상해.”
웃음과 함께 터져 나온 선아의 말에 바베큐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나 커피 마실 건데 마실 사람?”
그때 적막해지려던 분위기를 깨고 황서연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
“아, 난 저녁에 마시면 잠 못 자서 패스.”
선아가 대답했고, 뒤이어 고정원과 나도 괜찮다는 대답을 했다.
나는 남아 있는 와인을 쭉 들이켰다. 방금 선아가 했던 말이 가볍게 지나쳐지지 않고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가끔 지나친 고정원의 행동이 이상해 보일 줄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적으로 전해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일반적인 친구의 행동이 아니라는 걸 새삼스럽게 확인받은 것 같아서.
“……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안쪽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비명에 놀라서 퍼뜩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다 같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심각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황서연이 보였다. 키친 테이블에 엎질러진 커피포트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있는 물, 그리고 싱크대의 흐르는 찬물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는 폼으로 미뤄 보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데었어. 멍청하게 엎질러 가지고.”
“헉. 많이 다쳤어? 병원 안 가도 돼?”
“그 정돈 아니고. 어디 약 없나?”
흐르는 물에 대고 있던 손을 빼낸 황서연이 물기를 털고 주변을 뒤지기 시작하자 고정원이 다가가 말렸다. 그리고 황서연의 손목을 붙들어 싱크대로 되돌아와 물을 틀었다.
“적어도 삼십 분은 흐르는 물에 대고 있어야 돼.”
희고 가느다란 손목을 가볍게 감싸 쥔 고정원의 커다란 손이 보였다. 싱크대 앞에서 고개를 숙인 둘 사이의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선아야, 프론트에 비치된 약 좀 빌려다 줄래?”
고정원이 말하며 고개를 든 순간 나는 쳐다보고 있던 시선을 급하게 돌렸다.
“아…… 내가 갈게.”
부탁을 가로채고 황망히 방을 나섰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불쾌하게 맥박 치는 걸 느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정신이 어디로 팔린 건지, 타고 나서도 층수를 누르는 걸 깜빡해 한동안 문만 보고 서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사소한 것 하나도 집중이 되지가 않았다. 낮에 바다에서 황서연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던 고정원을 봤을 때의 증상과 같았다.
구급 키트를 받아 방으로 되돌아오자 여전히 황서연은 흐르는 물에 손등을 대고 있었다. 고정원이 그 옆에 붙어 있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그러자 안도한 내 자신이 유치하기도 하고 다친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싫어서 염증이 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좀 괜찮아?”
“응. 고마워 인휘야.”
하지만 그런 기분도 금세 널을 뛰었다. 한손으로 치료하는 게 서툴러 보이는 황서연에게 다가간 건 고정원이었다. 특유의 다정한 손길로 다친 부위에 약을 바르고 그 위로 거즈를 조심스럽게 붙여 주는 모습에서 내 시선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쫌 설렐라 그런다?”
말하는 황서연의 눈이 고정원에게 머물렀다. 고정원은 별 대꾸 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고, 지켜보던 나는 ‘잠깐 나갔다 올게.’ 하는 말만 남기고 그대로 뒤돌아 방을 나왔다.
리조트를 빠져나와 산책로를 걸었다. 산책하기 좋게 가로등 불이 밝혀져 있어 멋진 풍경들이 어둠속에서도 드러났다. 그런 밤바다의 풍광들을 무감각하게 스치면서 나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도대체 뭐가 이렇게 충격인 걸까. 왜 이렇게 서럽고 아픈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문득, 내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인도 아닌데 애인이 받을 법한 충격을 받고 있다는 걸 자각하자 부끄럽고 슬펐다.
“후…….”
너무 오랜만에 가지는 연애감정에 지나치게 몰입해 버렸는지도 몰랐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다정함에 혼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렸던 걸지도.
정처 없이 걷다가 되돌아왔을 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방 앞에 도착해서 또 한참을 망설였다. 문고리를 붙들었다가,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웃음소리에 힘없이 떨어뜨렸다.
머뭇거리다 돌아섰다. 아무래도 아직 억지로 웃을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고정원과 내가 묵고 있는 방으로 올라온 나는 나란히 붙은 두 침대 중에 하나에 풀썩 쓰러져 얼굴을 파묻었다. 깨끗한 침구에서는 미미하게 향기가 났다. 이대로 자고 싶은 욕구가 밀려들었다. 다들 나 없으면 더 재밌지 않을까 하는 유치한 생각도 들었다.
연락은 해 줘야 할 텐데……. 걱정을 하면서도 현실을 잊고 싶은 몸과 마음이 자꾸만 잠을 불러오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는 걸 어렴풋이 감지했다.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를 얕게 깨어난 상태에서 들었다. 고정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잠기운이 사라지고 점차 머릿속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카펫에 스며들어 묵직하게 울렸다. 엎드린 내 머리칼 위로 손길이 스친 것만으로 가슴이 알은체를 하듯 작게 박동했다. 이런 식으로 다정하게 나를 만지는 건 딱 한 사람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찾았잖아.”
찾았었구나. 별안간 안도감이 들면서 시큰함이 눈 주위로 번졌다. 이게 무슨 청승인가 싶어 얼굴을 아예 베개에 파묻어 버렸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정이 격해진 것도 아닌데 이상했다.
“왜 우는 거야?”
“…….”
얼굴을 이렇게 숨기고 있는데도 티가 날 줄 몰랐다. 침묵만 이어졌다. 베개가 축축해지고 얼굴로 열이 몰렸다. 꼭 씨근덕대는 것처럼 호흡이 가빴다.
엎드린 내 어깨의 한쪽을 붙든 고정원의 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우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버텼지만 결국 힘을 당해 내지 못하고 돌려세워지고 말았다.
“응?”
눈이 마주치자마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축축한 눈물이 생각보다 많이 묻어나서 더 쪽팔렸다.
“운 거…… 아니야. 하품 많이 해서, 저절로 나왔어.”
억지스러운 변명을 하자 아직도 어깨를 붙들고 있는 고정원의 손에 힘이 실렸다.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으니 얼마 안 있어 한숨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 다들 기다리니까, 일단 내려가자.”
눈물로 습해져 있는 손을 고정원이 붙들어 끌어내렸다.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가 순식간에 축축이 젖어들었다. 몸이 일으켜 세워지고, 손을 빼려 하자 붙드는 힘이 강해지면서 손마디가 아팠다. 양손을 써 가며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기 위해 버텼다.
“그냥 너 혼자 가. 난 잔다고 말해 주고.”
손을 잡은 채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고정원이 다시 침대 위로 마주앉았다.
“그럼 나도 안 갈게.”
고정원은 계속해서 내 비위를 맞추는 것처럼 굴었다. 이마를 짚어 가며 열이 나는 건지 체크하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말만 하라며 연인 같은 배려를 했다. 순간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다친 황서연을 치료해 주던 자상한 손길이 생각난 탓이었다.
내가 받을 수 있는 다정함을, 누구나 똑같이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너는…….”
“응?”
“너는…… 모든 사람들한테 다정한 거 같아.”
감정에 휩쓸려 뱉어 놓고 바로 후회가 들었다. 투정하는 말투여서 더 그랬다. 뜬금없는 말을 들은 고정원은 조금 굳어져 있었다. 놀란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당황해서 수습할 말을 찾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온 고정원의 손이 내 뺨을 감쌌다.
“그래서…….”
엄지손가락이 볼 언저리에서 말라가는 눈물을 위로하듯 부드럽게 쓸었다.
“싫었어?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다정한 게.”
직설적으로 꽂혀 든 말에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힘없이 벌어진 입술이 굼뜨게 달싹거리고 얼굴도 부지불식간에 화끈거렸다.
“그런, 거 아니……야.”
부정하는 목소리가 볼륨을 줄인 것처럼 작아졌다.
“내가, 인휘한테만 다정했으면 좋겠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뱃속 어딘가를 굴렀다. 시야가 흐려지면서 일시에 할 말을 잃고 혼미해졌다. 그동안 숨겼던 진심을 다른 사람, 그것도 그 마음을 품게 만든 당사자의 입으로 확인받은 상황이 얼떨떨했다. 언제부터 내 속내가 이렇게 밖으로 새고 있었나 싶어 더럭 겁도 났다.
“……어?”
긍정도 부정도 못하고, 그저 간신히 끌어내듯 되물었을 때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뺨을 매만지는 손길만큼이나 진중하고 다정한 눈과 맞닿은 순간, 마치 모든 걸 해 주겠다는 사람처럼 보여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토기가 느껴질 정도로 울렁거렸기 때문에 더 마주칠 수가 없어 시선을 내리깔고 숨을 골랐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듯했다.
“그럼 그렇게 만들면 되잖아.”
고정원의 손가락이 다시 한 번 뺨 언저리를 둥글게 매만졌다.
“나도…… 한 사람한테만 잘하고 싶은데.”
꿈인가. 자다 깬 게 아니라 아직 자고 있는 중인가. 갑자기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말들이 연거푸 쏟아졌다. 덕분에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고 육체의 감각만 붕 떠서 어지럽혀지고 있었다.
“하아…….”
벅찬 가슴에서 밀려나온 한숨이 짧게 터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선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가까운 거리와 맞닿아 있는 살,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눈빛 같은 것들이 판단력을 흐렸다.
당장에라도 입술이 부딪치고 서로에게 엉켜들 것만 같은 위험한 공기를 느끼며 뺨을 감싼 고정원의 손을 억지로 끌어내렸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혼란스러워서 무작정 내뱉은 말이었지만 뱉고 나니 알 것 같았다. 나는 마음 한구석으로 고정원이 보다 확실하게 알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상황이 하도 꿈같다 보니 방금 한 말들 어디까지 진심인지 혹은 농담인지, 내 좋을 대로 멋대로 해석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그래……?”
끌어내리느라 붙들고 있던 고정원의 손이 시야로 들어왔다. 몸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듯한 그 손은 내 것과는 비교가 우스울 정도로 크고 길었다. 압도적인 차였다. 마치 어른과 아이처럼.
“정말 못 알아들은 거야?”
그래서일까. 여전히 자상했지만 냉랭함이 묻어난 어조에서 이상하게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혼이 난 것도 아닌데 겁을 먹은 나는 또 다시 대답을 찾기 위해 헤맸다.
“…….”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착실하게 식어 가는 분위기를 어렴풋이 느꼈다.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것도.
“알았어.”
별안간 손 아래 있던 온기가 쓱 빠져나가고,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침대를 벗어난 널찍한 등이 보였다.
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즉각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벙찐 표정으로 올려다보다 휴대폰을 집어 드는 모습을 보고 고정원이 방을 나가려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급해져서 침대에서 따라 내려왔다.
“어, 어디 가?”
방문을 나서기 직전에 고정원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하도 당황해서 간단한 말조차 더듬고 말았다.
“피곤하면 먼저 자고 있어. 밑에 여자애들 기다려서……. 난 좀 더 있다가 올게.”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옆으로 비낀 채 말을 잇는 고정원은 확실히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몽롱했던 분위기와 아슬아슬하던 친밀감이 모두 증발해 버리고 한순간에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에 초조한 기색이 번졌다.
“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망설이는 사이 고정원은 틈도 주지 않고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고, 사위가 한층 어두워졌다.
나는 도둑맞은 사람처럼 정신을 놓고 있다가 어느 순간 문을 열어젖히고 뛰쳐나갔다.
복도를 따라 뛰어나가자 다행히 아직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잠깐만, 정원아 잠깐만……!”
금방이라도 가 버릴까 봐 불안해서 대뜸 불러 젖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함께 기다리고 있던 낯선 커플 한 쌍이 소리에 반응하여 나를 쳐다봤지만 정작 고정원은 스치듯 눈길을 줄 뿐이었다.
“저기…….”
“무슨 할 말 남았어?”
심지어 가까워진 거리에서도 별다른 내색 없이 표정을 지우고 있었다.
“있는데……, 그게…….”
따라 나온 기세는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이렇게 쌩한 태도의 고정원은 처음 대하는 것 같았다. 고백이 실수였다는 걸 알았던 날에도 이렇게까지 냉정하진 않았던 걸 떠올리며 그때보다 더한 실수를 한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얼굴을 만지던 손을 떼어 낸 게 기분 나빴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둥 그런 소리는 하지 말 걸 그랬나. 했던 행동들을 되짚어 봐도 특별히 기분 상할 만한 점을 모르겠어서 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 사이 띵, 하는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층에 도착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차례로 올라탔다. 모르는 남녀와, 그리고 고정원이 뒤따랐다. 개폐 버튼에 손을 올린 고정원이 복도에 혼자 남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물었다.
“할 말, 없는 거야?”
“아……, 있는, 데…….”
함께 타고 있는 커플이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는 게 느껴졌다. 어떡하지. 고정원을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아서 손끝이 저릴 만큼 애가 탔다. 어떻게 해야 붙잡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내려가기 직전의 엘리베이터 앞에서 발이라도 구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 가면, 안 돼……?”
얼마나 간절한지가 다 티 나는 낯 뜨거운 어조였다. 애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고정원 앞에서도 그렇지만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속이 다 까발려진 게 민망해서 고개가 푹 꺼졌다.
“……왜? 가지 말아야 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손끝을 움켜쥐었다. 말 그대로 가지 말아야 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내가 싫으니까. 여자애들하고 같이 있는 걸 상상만 해도 속이 쓰라릴 만큼 고정원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그건 차마 이런 상황에서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었다.
가지 못하게 할 만한 거짓말조차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내가 지금 이 순간 고정원을 원하고 있다는 기가 막힌 사실만이 벼락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더 이상 질질 끌 수 없는 순간,
“좋아, 해…….”
다 갈라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말한 나조차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고 낮은. 알고 있던 내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초라하고 힘겹게 느껴지는 그런 소리였다.
괜히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힘주어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자동문이 닫혀 버린 찰나이기도 했다.
“…….”
왜 이렇게 된 거지.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혼자 찌질하게 울고 싶지 않아 입술을 깨물어가며 참았다. 상상했던 멋들어진 고백 대신 개미만한 목소리로 울면서 매달리듯이 마음을 전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더욱 허탈했다.
고백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고, 상황은 생각한 대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좋아해……. 그러니까……,”
안 갔으면 좋겠는데…….
눈앞에 없는 사람에겐 오히려 말이 편하게 나왔다. 이보다 단순할 수 없는 속마음을 뒤늦게 고백하며 복도의 카펫 위로 뚝, 뚝 떨어지고 있는 눈물을 황급히 문질러 닦았다.
그냥 타이밍 재지 말고 빨리 말할 걸 그랬다. 중요한 기회를 놓쳐 버린 거 같아서 속상했다.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니 그 전에 방에 같이 있었을 때 바로 고백했다면 지금쯤 이렇게 따로 떨어지게 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인기척을 느낀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계속 혼자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앞쪽에 누군가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걸 알았다. 정물처럼 움직임이 없어서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누구인지는 굳이 고갤 들어 보지 않아도 확실했기 때문에 나는 안도감과 더불어 타들어 가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뻣뻣하게 땅만 쳐다볼 뿐이었다.
간 줄 알았는데. 다시 내렸으면 기척이라도 해 주지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는 게 조금 얄미웠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좁은 시야의 귀퉁이로 고정원의 신발이 들어왔다. 안 가서 다행이긴 한데, 이제부터 어떡해야 하나. 조금 암담해져서 눈을 감았다.
“…….”
그리고 가까스로 용기내서 고갤 들었을 때, 마주한 얼굴에 깜짝 놀라서 숨을 죽였다.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완전히 집중해서 홀린 것처럼 나를 내려다보는 고정원이 낯설었던 탓이었다. 눈빛이 하도 강해서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 등이 굳고 긴장이 서렸다.
다가온 고정원의 손이 젖은 얼굴에 닿았다.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어깨를 떨어 놓고 고정원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을 닦아 내는 부드러운 손가락의 움직임을 느꼈고 흔들리는 목울대를 보았다. 간격이 조금씩 좁혀 들어갔다.
“아…….”
눈꺼풀과 뺨 언저리로 내려오는 감촉과 열기에 나지막하게 신음하고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저기, 고정원……, 잠깐만…….”
아무리 밀어내도 듣질 않았다. 양팔이 두터운 가슴팍 사이에 접힌 채로 끼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됐다.
고정원의 입술은 얼굴에 남아 있는 물기 어린 자국들을 차례로 덮어 갔다. 위로 같기도 하고 어떤 의식 같기도 한 입맞춤은 점점 아래로 내려왔고, 얼마 안 있어 기어이 입술끼리 맞부딪히며 더운 숨결을 느끼게 했다.
“저기, 잠……깐, 여기, 여기 복돈데…….”
말 사이사이에 입술과 입술이 접착했다 떨어지는 민망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는 언제 어디서 사람이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되는 한편으로 오래전부터 닿고 싶었던 감촉에 거대한 만족감이 밀려드는 걸 느꼈다. 그래서 자꾸만 안 된다고 하면서도 눈이 감기고 힘이 풀렸다.
“아……!”
조심스럽고 녹녹하게 시작된 입맞춤이 점점 격해지면서 몇 번인가 복도 벽이나 늘어선 방문에 몸이 부딪혔다. 등허리와 목 언저리로 나를 붙들어 고정시키는 고정원의 손 또한 갈수록 힘이 들어갔다.
“야, 기다, 려……!”
방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었고 그 사이에 우리는 서로에게 정신을 빼 놓기 쉬웠다. 그나마 내가 정신을 차리고 도착한 방문 고리를 붙잡아 당기는 사이에도 고정원은 쫓기듯이 내 이마와 귓가 여기저기에 키스를 해 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입구에서 빈틈없이 입술이 맞물렸다. 문에 밀어붙혀진 나는 고정원의 목을 끌어안아 당겼다. 온갖 각도로 맞물리고 빨리고 비벼지면서 갈급함이 채워져 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가르쳐 줘서 주고받던 키스와는 전혀 달랐다.
탁한 호흡이 터져 나왔다. 귓전에서부터 목 언저리까지 매만지던 큼지막한 손이 아래로 내려가며 허리와 허벅지를 쓸어내리자 나도 모르게 안달하여 신음했다. 더는 안 될 것 같았다. 복도에서부터 신호를 느꼈던 다리 사이가 열기를 띠며 단단해지는 감각에 순간 당황해서 고정원의 얼굴을 밀어냈다.
지잉, 지잉…….
때마침 울리는 진동소리에 안도했다. 온몸이 홧홧하고 금방이라도 허리 힘이 풀릴 듯하여 무서웠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가쁜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얼른 받아.”
고정원의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집중하고 있는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속된 말로 맛이 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얼굴이 야했다. 숨이 막혔다. 보는 것만으로 배가 조여 와서 참지 못하고 밀착돼 있던 몸을 떨어뜨렸다.
바람을 쐬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야외 테라스로 나갔다. 뒤에서는 끈덕지게 전화의 진동이 울려대고 있었다. 기다리다 지친 여자애들일 게 분명했다.
난간에 달달 떨리는 손으로 매달려 심호흡을 하면서 방금 전 벌어진 일들을 정리해 보려 노력했다. 고백 이후로 휘몰아치던 입맞춤까지 떠올리며 이제는 우리가 마음이 통했고, 사귀는 사이가 됐다는 감회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내가 아직 고정원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미안. 우리 못 가.”
테라스로 나오기 직전 열린 창문 앞에서 고정원은 성의 없이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아무데나 던져 버리고 밖으로 따라 나온 고정원은 여전히 성급하게 달아올라 있는 느낌이었다. 눈이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인휘야.”
부르는 걸 모른 척하며 어둑하게 내려앉은 밤바다를 내다보았다. 뒤에서부터 달라붙은 고정원이 양팔로 배를 휘감아오며 어깨 위로 턱을 기댄 바람에 흥분해 있는 하반신 상태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 것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아래에 휘감긴 팔에 손을 얹은 나는 떨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너…… 아직 나한테 안 한 말 있지 않아?”
빤히 들여다보던 고정원이 이내 잘게 부스러지는 소릴 내며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귓가에 속삭여 준 한마디 말에 귀나 얼굴, 목부터 해서 몸속의 오장육부까지도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건 너무…… 오버고.”
가볍게 좋아해 정도를 바라고 한 말이었는데 예상 외로 너무 거창한 고백에 도리어 내가 쩔쩔맸다. 벌써부터 이렇게 닭살을 떨려고 들면 앞으로는 대체 어쩌려 그러나 싶어서 괜한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취해서 실수로 사귀기로 한 다음날 했던 행동들만 되새겨 봐도 사귀기 전부터 다정이 습관인 고정원이 사귀고 나면 어떻게까지 변할지는 훤했다. 그게 조금 무섭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하는, 이상한 심정이었다.
“……너 이제 누구한테만 잘해 줄 거야?”
태어나 첫 연애를 시작했답시고 나도 뻔뻔하게 이딴 말을 지껄였다. 다 받아 줄 사람이 있으니까 할 수 있는 헛소리였다.
“……너. 조인휘.”
유치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니. 연애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허리에 감겨든 따스한 온기에 손을 얹었다.
* * *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생각보다 훨씬 당혹스러웠다. 어젯밤 간신히 설득해서 따로 침대를 쓴 게 무색하게, 옆자리엔 고정원이 누워서 막 일어나서 붓고 꾀죄죄한,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내 몰골을 빤히도 쳐다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침대 위에서 벌어지는 애정이 뚝뚝 떨어지다 못해 질질 흐르는 듯한 스킨십이었다.
“야……. 간지러운데…….”
한 올 한 올 세기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길이 이젠 눈썹으로 내려와 간질거렸다. 뭐 그리 구경할 게 있다고 흐릿한 내 눈썹 산을 따라 손가락을 덧그리더니, 잘생긴 입가에 어렴풋한 웃음을 매달았다.
미간을 두드리고 코끝도 스치듯 건드리고, 무슨 소꿉장난하는 애처럼 만져 대니까 근질근질했다.
“아 고만하지 좀…….”
부담스러운데도 결국 허허 웃음이 터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만져 대는데 싫을 리는 없고 그저 지금 이런 상황이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하든가…….”
말도 없이 웃기만 하면서 관찰하니까 더 그랬다. 차광 커튼을 친 어둑한 방안에서 유난히 반들거리는 눈빛이 얼마나 재밌어하는지 드러나서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이게 뭐가 재밌어서? 그냥 두면 아주 온종일 만져 댈 것 같았다.
“…….”
결국 포기하고 고정원을 마주봤다. 그리고 조금 기가 죽었다. 아침부터 지나치게 잘난 얼굴이 눈앞에 있으니 비교가 안 될 수가 없어서였다. 혼자 세수를 하고 온 것 같지도 않고 머리카락까지 살짝 뻗쳐 있는데 고정원은 여전히 연출된 영화 속처럼 비현실적으로 근사한 구석이 있었다.
입가로 돋아난 수염도, 지저분해 보이기보다는 한번 만져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남자다운 느낌으로 어울렸다. 어느새 홀린 것처럼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고정원의 입가를 더듬고 있었다.
나는 수염이 굵게 나지 않는 타입이라 그런지 만질수록 새롭고 재밌어서 아, 얘가 이런 감각으로 날 그렇게 만져 댔나 싶었다. 동성지간이라 이미 충분히 익숙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흥미가 넘쳤다.
“…….”
마주한 채 모로 누운 고정원과 나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져 갔다. 입술이 겹쳐지면서 방금까지 손끝으로 느꼈던 고정원의 부드러움과 까실함이 입가로 느껴졌다.
“하…….”
숨이 벅차도록 서로의 입술을 느끼고 나서야 겨우 떨어지며 달아오른 숨이 쏟아졌다.
“빨개졌어.”
까칠한 수염을 일부러 비비듯이 얼굴 여기저기에 문질러 댔으니 안 빨개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뻔뻔하게 웃으며 내 입가를 매만지는 고정원의 손을 밀어낸 나는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봐봐.”
움직이지 못하게 손으로 내 턱을 붙든 고정원은 기어이 여기저기에 입술을 찍어 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발동이 걸렸는지 도통 끝낼 기미가 보이지 않다가 결국 마지막엔 품속에 넣어지다시피 해서 강하게 끌어안겼다.
“미친 것 같아.”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좋지.”
별 소릴 다 한다 싶고 부끄러워 죽겠는데 그 와중에 고정원 냄새가 진하게 났다. 끌어안긴 탓에 단단한 가슴팍도 느껴졌고 아래로 불편하게 두드러진 서로의 그곳도 당연히 느껴졌다. 아침인데 키스까지 해 댔으니 뻔했다.
“으…….”
고정원이 한쪽 다리를 내 다리 사이로 끼워 넣으며 어떻게 하면 더 빈틈없이 맞닿을 수 있을지 강구하는 사람처럼 몸을 밀착시켜 왔다. 딱딱해진 중심부끼리 뭉개지듯이 압박되는 느낌에 옅은 신음이 나갔다.
나는 고정원의 어깨를 한 번 꽉 꼬집고 가슴팍을 밀어냈다.
“일어나자 얼른.”
하지만 몸을 빼려다가 허리로 둘러 온 손에 의해 오히려 가까이 끌어당겨졌다. 시트에 퉁, 머리를 박고 어이가 없어서 고정원을 쳐다본 순간, 이제는 그 눈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읽혔다.
정확히는 뭘 원하고, 느끼고 있는지 같은……. 그러니까 고정원은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키스를 해 대던 어제처럼 한 가지에 집중해서 아무것도 안 뵈는 눈을 하고 있었다.
“…….”
몸이 굳었다. ‘하고 싶은’ 기분이 모락모락 들었다. 고정원에게 옮은 게 분명했다.
눈을 내리깔자 고정원이 다가와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그것만으로 얇은 바지속이 꿈틀거리면서 달고 뜨거운 기운이 치밀었다.
그대로 아랫입술이 쭉 늘어나며 빨아 당겨지는 적나라한 광경이 내리깐 시야로 들어왔다. 동시에 고정원의 딱딱한 아래가 내 것에 지그시 압박되는 느낌과 함께 쾌감이 척추를 타고 내달렸다.
고정원의 어깨에 얹은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티셔츠를 움켜쥐었다. 희롱하듯 혀를 쓰고 일부러 질척한 소리가 나게 빨아 대는 둥 어느새 입맞춤이 노골적으로 변해 있었다. 키스를 가르쳐 달라고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대체 언제 이렇게 달라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잠깐, 만…… 야, 고정, 원……!”
입을 벌린 채로 혀를 받아 내느라 발음이 엉망으로 샜다. 도무지 멈출 기세가 아니라 하는 수 없이 고정원의 뒷머리를 움켜쥐어 떨어뜨려냈다.
“응……?”
아팠는지 한쪽 눈을 찌푸리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로 물어 와서 조금 미안해졌다.
“그……, 여자애들한테 연락해 줘야 되지 않을까?”
변명이기도 했지만 어제부터 예의 없이 군 것 같아서 내내 미안하고 신경 쓰인 건 사실이었다.
“괜찮아. 이따 연락하면 돼.”
성의 없는 대답을 하며 고정원이 내 목 주변으로 얼굴을 묻어 왔다. 간지러워서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났다. 그러자 내가 좋아하는 줄 알았는지 고정원이 티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예민한 옆구리를 스치는 느낌에 극도의 간지러움을 느꼈다. 상체를 비틀어 가며 손을 끌어내리려 했지만 그럴수록 깊숙이 파고들었다.
“……으.”
순간 등허리가 말렸다. 신경이 몰려 있는 가슴의 돌기에 손가락이 스친 반사 작용이었다.
“간지러워?”
빠르게 끄덕였다. 간지럽고 이상하니까 얼른 손을 떼 줬으면 싶었다. 건조한 손바닥이 생전 만질 일이 없던 부위를 자극하면서 굴리기 시작했다.
“빼, 얼른……!”
가슴팍에 매달린 유두가 알갱이처럼 딱딱해진 게 느껴져서 식겁했다.
“읏……!”
난데없이 티셔츠를 올려붙인 고정원이 얼굴을 파묻어 왔다. 축축한 열기가 가슴팍의 국소 부위를 덮쳤다. 빨아올려지며 유륜 주변의 얇은 살갗이 딸려 올라가자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허리가 크게 뒤틀렸다.
삽시에 얼굴에 불이 났다. 내가 여자도 아닌데 이런 데를 애무하나 싶으면서도 엉덩이가 힘껏 들릴 정도로 흥분해서는 고정원의 얼굴을 감싸 안고 있었다. 좋으면서도 싫고, 싫으면서도 안달하는 알 수 없는 감각 속에서 끙끙댔다.
커다란 손이 반바지를 끌어내리고 프리컴으로 속옷까지 적신 내 성기를 꺼냈을 땐 호흡이 제대로 안 될 정도로 헐떡이고 있었다.
“아, 안 돼…… 윽, 잠깐…… 정원아, 아으…… 놔 줘, 놔 줘, 잠깐만…….”
느낌이 너무 왔다. 고정원의 손바닥 주름까지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냥 움켜쥐어졌을 뿐인데 사정감이 몰려와서 쪽팔리고 당황스럽고 거의 앞뒤 분간이 안 되는 상태가 돼선 놔달라고 울먹였다.
“아, 으……!”
그리고 그때였다.
방문이 똑똑똑, 연달아 두드려지는 소리에 둘 다 굳어지며 움직임이 멈추었다. 노크 소리가 한번 더 났고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여자애들이라는 걸 알았다.
곤란해져서 고정원을 쳐다보는데 마주 본 눈에는 전혀 당황스런 기색이 없었다. 다만 내 표정을 살피며 더 이어 가고 싶어 한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
발기한 내 것을 쥐고 있던 손이 기어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나는 놀라서 손을 그 위로 덮어 움직이지 말라는 뜻을 내비쳤다. 아직도 밖에선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상황도 상황인 데다가 밖에 서 있는 여자애들이 화가 나 있는 게 느껴져서 초조했다. 하지만 별개로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며 서서히 자극되자 허벅지가 긴장으로 팽팽해지면서 불끈거렸다.
“진짜 하지 마 너…….”
들리지 않게 소곤거리며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씹었다. 그러자 집요한 시선이 입술 위로 쏟아졌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얼마 안 있어 문밖의 인기척이 사라지자마자 입술끼리 부딪혔다. 정신없이 키스하며 교차된 다리를 틈 없이 얽은 고정원이 완전하게 발기한 성기를 꺼내 맞붙여 왔다. 그때부터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징징 울리는 쾌감이 비벼지는 성기에서부터 전신을 흔들어 댔다.
옆으로 누워 마주한 자세는 서로의 표정이나 겹쳐진 부위가 숨김없이 드러났다. 고정원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눈앞이 일그러졌다. 끈덕진 시선이 내 얼굴과 한손에 겹쳐진 우리 둘의 성기를 반복해서 훑었다.
“흑…….”
고정원의 허벅지 위로 포개 올린 다리가 쉼 없이 흔들렸다. 이미 한 차례 사정한 뒤였지만 계속되는 자극에 쉬지도 못하고 다시 부풀어 아직 한 번도 빼지 못한 고정원의 커다란 성기에 마주 비벼지고 있었다. 끈적한 액으로 뒤범벅된 아래는 표현하기 힘들 만큼 난잡한 상태였다.
고정원이 내 엉덩이를 끌어당기며 상체를 일으켰다. 짓누르다가 때리는 것처럼 치대는 자극에 요란한 마찰음이 났다.
“아, 아……!”
입술을 깨물었다. 죽겠다 진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싶게 자극이 너무 강하고 힘들었다.
“인휘야, 힘들어?”
그 와중에 움직임을 늦추고 내 얼굴을 살피는 다정함이 고맙지가 않고 부담스러웠다.
“그런 거 묻지 말고 그냥, 해…….”
눈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한 말에 고정원이 엉덩이를 아프게 움켜쥐었다. 또 다시 퍼붓듯 이어지는 키스는 고정원이 사정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하아…….”
이제 하루의 시작인데 온몸이 저리고 기운이 쭉 빠지는 걸 느끼며 고정원의 품에 안겼다. 우리 둘 다 땀으로 흥건했고 흐트러진 숨이 가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
마주한 채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는 고정원의 눈에는 만족감이 떠올랐다. 나는 고정원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어 코끝이 뭉개지도록 끌어안았다.
“야……근데 너 이런 거 잘 못 한다 하지 않았어……?”
“……본능 따라서 하다 보니 좀 알겠던데?”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걸 알고 픽 웃음이 나왔다. 처음이라 휘둘리기만 한 것 같아서 조금 민망했는데 어차피 고정원도 이쪽으론 잘 모르니까. 피장파장이었다. 다만 오늘은 갑작스럽게 휩쓸렸지만 다음번엔 미리 공부라도 해 둘까 싶었다.
“좀 더 자.”
끊어질 거 같던 긴장이 끝나니 나른함이 밀려들었다. 더 자면 안 되는데 싶으면서도 토닥여 오는 손길을 따라 눈이 감겼다.
잠에서 깼을 땐 어느덧 오후였다. 잠이 들어 있는 고정원을 깨우고, 대충 씻고 나와 여자애들에게 전화부터 했다.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연락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전화가 연결되자 예상했던 대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욕설만 안 섞였다 뿐이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가 전해져 와서 전화상인데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당장 내려오란 불호령을 듣고 고정원과 함께 내려가니 취조가 시작됐다. 왜 갑자기 사라져서 둘 다 안 나타난 거냐는 질문에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고정원이 밖에서 술 취한 무리랑 싸움이 났었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더 악화됐을 터였다.
“그렇다고 ‘미안, 못 가’ 딱 두 마디 하고 끊으면 우리는 어떻게 아는데?”
여자애들은 얼마간 화를 냈지만, 사정을 듣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해해 주고 넘어갔다. 그도 그럴 게 고정원이 하도 태연하게 디테일한 거짓말을 해서 사정을 알고 있는 나까지 그랬었나? 하고 헷갈릴 정도였다.
“…….”
생각보다 잘 넘어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고정원의 의외의 모습에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거짓말 같은 거 잘 못할 줄 알았는데.
“너 거짓말 잘한다.”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가기 위해 방을 나선 복도에서 나는 고정원을 올려다보며 속삭이듯 입을 뻥끗댔다. 순전히 멋쩍게 웃는 얼굴을 보려고 한 소리였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표정을 지운 고정원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눈을 맞추지도 않고 말했다.
“……필요할 때만.”
“아…… 응.”
이렇게 정색할 줄은 몰랐어서 얼떨떨해졌다. 거짓말쟁이 취급한 건 아니었지만 기분 나빴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나쁜 뜻으로 한 말 아닌데…….’ 하고 소심하게 덧붙였다.
그제야 굳어져 있단 자각이 들었는지 머리칼을 한 번 쓸어 올린 고정원이 멋쩍게 웃으며 내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알아.”
표정이 풀어진 걸 보고 몸에 힘이 풀리며 순간 내가 긴장했다는 걸 깨달았다. 고정원의 눈짓 몸짓 하나에 이렇게 온신경이 곤두서 있을 줄은 몰라서 조금 이상한 느낌이었다. 나만 이런 건가.
여자애들이 빤히 앞에서 걷고 있는데 고정원의 등 뒤 티셔츠를 꽉 움켜쥐었다.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걸 모른 척하며 힘주어 잡았다가 풀었다.
장난칠 마음은 아니었는데 고정원이 등 뒤로 손을 얽어 왔다.
“야, 빨리 좀 걸어 줄래?”
황서연이 뒤돌아보며 화를 냈다. 등 뒤로 잡은 거라 보이지도 않을 텐데 깜짝 놀라서 뿌리치고 후다닥 앞서 걸었다.
* * *
여행은 예정보다 일찍 끝이 났다. 원래라면 초저녁까지는 머무를 계획이었지만 점심을 먹자마자 이제 그만 가자고 말하는 여자애들에 의해 앞당겨서 돌아가게 되었다.
출발할 때와 상반되게 돌아가는 길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수다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아 조용한 가운데 오디오의 음악만 정적을 뒤덮고 있었다. 조수석엔 내가 앉아 있었고, 뒷자리의 여자애들은 휴대폰을 만지거나 자거나 하는 식이었다.
“피곤할 텐데 눈 좀 붙여.”
정체된 고속도로에서 고정원이 나를 보면서 말했다. 두 시간이 넘게 운전대를 잡고 있는 쪽이야말로 피곤할 텐데 싶어서 고개를 저었다.
교대로 운전하자고 제안해도 고정원은 고집스럽게 운전대를 잡았다. 잠깐잠깐 막혀서 멈춰 있을 때 피로가 뭉칠까 봐 어깨를 주물러 주기도 했는데 시원해한다기보단 불편해하는 기색이라 어설프게 그만두었다.
“아쉽네.”
운전을 하면서 고정원은 그렇게 말했다. 누구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흘리는 혼잣말에 가까운 것이었다. ‘뭐가?’ 하고 물으니 고정원이 들은 줄 몰랐다는 듯이 멋쩍게 웃었다.
“……너무 짧게 끝나서.”
“아…….”
금방 끝나 버린 여행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음엔 둘이 오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부끄러워진 나는 ‘……어.’ 하고 고갤 돌린 채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음악이 나오는 중이었고, 우리 둘 다 작은 목소리로 나눈 대화였지만 문득 신경이 쓰여서 슬며시 뒤돌아보았다. 다행히 여자애들은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
고정원이 한쪽 손을 뻗어와 허벅지 위에 올라와 있던 내 손을 붙들었다.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닌데. 하지 말라고 내쳐야 하나 아니면 모른 척 받아 줘야 하나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마디 사이로 손가락들이 저돌적으로 침범했다.
아…….
마주잡지도 뿌리치지도 못하고 창밖만 내다봤다.
“어디쯤이야?”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얽혀 있던 손이 급하게 떨어져 나갔다.
“……휴게소 다 왔어.”
평이한 목소리로 대답한 고정원의 말대로 휴게소가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잘됐다. 화장실 가고 싶었는데.”
선아의 목소리는 잠기운에 잠긴 채였다. 은밀한 짓을 하다가 들킨 심장이 쿵쿵쿵쿵 소리를 내며 뛰어 댔다. 설마 보였던 건 아니겠지, 걱정이 돼서 뒤돌아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 특별한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휴게소에 주차를 하고 여자애들이 먼저 내렸다. 시동도 꺼진 차 안은 조용했다. 나는 안전벨트를 풀려다 말고 옆자리를 쳐다봤다. 고정원이 내릴 생각도 않고 잠자코 나를 쳐다보는 게 의아해서였다.
“왜 그래? 안 나가?”
“……가야지.”
대답하는 고정원은 여전히 움직일 기미가 아니었다.
“왜, 너무 힘들어서 못 움직이겠어?”
“응.”
그냥 놀리듯이 한 말이었는데 덥석 수긍해서 놀랐다.
“헉 진짜? 그냥 내가 운전할 걸 그랬네. 배는 안 고파? 가서 뭐라도 좀 먹고 오자. 아님 사 올까?”
대답 않는 고정원은 걱정으로 물든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볼 뿐이었다. 그리고 기어이 한다는 소리가 예상을 한참 엇나간 것이었다.
“뽀뽀하면, 기운 날 거 같아.”
나는 금방 반응을 못하고 굳어져 있었다. 뽀뽀라느니 기운이 난다느니, 생각지도 못한 닭살스러운 행동 앞에서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잠깐 마주쳤던 고정원의 얼굴엔 장난기 대신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나중에 하자.”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는 걸 보니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괜히 심장이 불순하게 뛰었다.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려던 때에, 미련 섞인 고정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들다. 얼른 둘만 있고 싶은데.”
귓등이 후끈해졌다. 얘는 어떻게 이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지. 나는 처음이라 모든 게 어색하고 조심스러운데 고정원은 거침이 없는 거 같았다.
“야……, 너무 그렇게…… 다 드러내는 거 아니야.”
그래서 일부러 허세 부리듯이 말했다.
“응?”
“어느 정도 드러내는 건 좋긴 한데…… 큼, 적당히 숨길 줄도 알아야 긴장감도, 안 떨어지고, 어…… 그러는 거야.”
사귀는 마당에 밀당이니 뭐니, 사실 관심도 없고 마음에도 없는 소린데 충동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헛소리를 들은 고정원은 잠시간 조용하더니 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며 말했다.
“다 드러낸 것처럼 보였어?”
“어?”
“아닌데…….”
……정말, 많이 자제하고 있는 건데.
달콤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본전도 못 찾고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허세를 부려도 결국엔 숙맥인 티가 나는 게 문제였다. 연애 고수인 척했던 지난날들을 수습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 거 같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이 지나가지 않는 틈에 짧게 쪽, 입을 맞추었다.
얼마간 쉬었다가 차는 다시 서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뒷좌석의 애들은 또 다시 잠이 들었고 나는 고정원과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며 휴게소에서 샀던 과자를 먹거나 고정원의 입에 넣어 주거나 했다.
서울의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여자애들이 내리고, 차안에 겨우 둘만 있게 되었을 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넷이서 있었을 땐 의식해서 일부러 말수를 줄였다고 하지만 단둘이라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몇 시간 동안 운전한 고정원이 힘들 것 같아서 근처 역에서 내리려 했지만 만류당했다. 차는 기어이 집 코앞까지 와서 멈춰 섰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나서도 고정원은 금방 출발하지 않고 내 손을 붙들고 장난을 치면서 뭉그적댔다. 뜸을 들이고 있다는 걸 보란 듯이 티내고 있어서, 결국 먼저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잠깐, 쉬었다 갈래?”
“그래도 돼?”
계속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아닌 척 조심스럽게 되묻는 고정원을 보며 은근히 내숭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
근데 그게 또 귀여워 보여서 큰일이었다.
“되게 오랜만에 오는 것 같다.”
집안으로 들어선 고정원이 감회에 젖은 것처럼 둘러보며 말했다.
“그때 영화 재밌게 봤었는데.”
마지막으로 고정원이 놀러왔을 때, 우리는 같이 공포영화를 봤었다. 일부러 무서운 걸 틀어 놓고 손을 잡고 스킨십을 했었다.
“그러게…….”
그땐 내가 고정원을 좋아하고 있다는 자각을 한 상태였고, 고정원은 나에 대한 마음을 정리했다고 말한 상태였다. 서로 마음이 통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어쩌면 고정원이 정리했다 한 말이 액면 그대로 진실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 마음은 언제부터 눈치채고 있었을까. 휘몰아치듯 고백하고 정신없이 사귀게 되면서 생겨날 새가 없었던 궁금증들이 하나둘씩 고갤 들이밀었다.
“또 영화 볼까?”
“운전하느라 피곤하지 않아? 영화 보면 늦을 텐데.”
“뭐, 늦으면 내일 아침에 가도 되고…….”
고정원이 괜히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럼 그러든가.”
심드렁하게 대답해 놓고, 속으론 지난번에 고정원이 자고 갔던 때보다도 떨고 있었다.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됐는데 전보다 불편하고 긴장되는 게 이상했다. 연인 사이에, 좁은 방에서 단둘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뻔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의지와 상관없이 민망한 상상이 불쑥불쑥 눈앞을 가렸다. 이미 한번 키스 이상의 진도를 나간 적이 있어서 그런지 너무나 쉽게 상상할 수가 있었다.
“씻어도 돼?”
“어? 어…… 맘대로.”
“남는 옷 아무거나 하나만 빌려줄래?”
“아, 잠시만.”
후다닥 뛰어가 서랍을 열어 빨아 놓은 옷들을 살폈다. 유치한 프린트나 낡은 티셔츠를 제외하니 줄 만한 게 거의 없었다. 그나마 개중에 가장 큰 사이즈인 티셔츠를 뽑아 건네주자 고정원은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바닥을 때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딱히 할 게 없어진 나는 얼마간 멍하니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노트북을 찾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다운받을 만한 영화 목록을 훑어보던 중이었다. 별안간 물소리가 뚝 그친다 싶더니, 화장실 안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놀라서 문 앞까지 바짝 다가가 귀를 기울이며 물었다.
“물이 갑자기 안 나와서…….”
“진짜? 자, 잠깐만 들어갈게.”
겨울 동파도 아닌데 갑자기 웬 단수인가 싶어서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하필이면 왜 손님이 와 있을 때 이러나 싶기도 하고, 속상해서 안에 고정원이 전라로 있다는 부분은 잠시 잊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거품 묻은 나신을 본 순간 등줄기가 뜨끈해졌다. 좁은 화장실 안에서 유난히 거대해 보이는 몸집에 위압감이 들어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잠시만…….”
고개를 숙이고 고정원에게 샤워기를 건네받아 레버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뚝 끊겼다가 졸졸졸 힘없이 흐르는 모양새가 답답했다. 집주인한테 연락을 해야 하나 심란해서 샤워꼭지 부분을 유심하게 들여다보는데, 마침 타이밍 나쁘게 수압이 강해진 물줄기가 팍 터져 나왔다.
“큽!”
맞은 부위가 얼얼할 정도의 수압에 그만 샤워기를 놓치고 말았다. 땅을 한번 뒹굴면서 화장실 천장은 물론 내 옷까지 흠뻑 젖어 들었다.
“으악.”
살아 있는 생물처럼 욕실 바닥을 날뛰는 샤워기를 집어 들었을 땐 이미 난장판이었다.
“왜 따뜻한 물이 안 나오지…….”
물이 나오니 이제는 온수가 안 나오는 게 문제였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 데다 등 뒤로 벗고 있는 고정원이 신경 쓰여서 어서 해결하고 나가고 싶은데 도무지 상황이 안 좋았다.
“괜찮아. 찬물로 씻어도 돼.”
“그래도 너무 차가운데……. 감기 걸리면 어떡해.”
세면대에도 온수가 안 나오나 싶어서 틀어 보고 있는데 문득 화장실의 벽거울을 통해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다 젖었어 인휘야.”
고정원의 내리깐 눈이 젖은 내 옷을 훑고 있었다.
“응? 아…… 갈아입으면 돼.”
몸에 척척하게 달라붙은 옷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윤곽이 드러나도록 젖어서 착 휘감긴 탓에 영 남부끄러운 꼴이었다. 다시 눈을 들자, 거울 속 젖은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냥……, 같이 씻을래?”
눈앞이 띵했다. 거울을 통해서 마주친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황망하게 내리깔았다. 좁은 욕실 벽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 하며, 하얀 거품 포말이 떨어지고 있는 탄탄한 몸까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어? 아니이? 굳이 뭘……. 너 씻고 바로 씻으면 되는데.”
심장이 요란스럽게도 뛰어 댔다. 손바닥으로 물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데 긴장이 과도해진 나머지 이 물이 뜨거운지 아닌지조차 분간이 안 됐다.
“내가 주인집에 전화해서 한번 물어볼게. 잠시만 기다……!”
말이 끝까지 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고정원에게 한쪽 팔을 붙들렸기 때문이었다. 경기가 난 사람처럼 몸을 떨고 나서 올려다보니, 고정원의 표정이 다소 황당한 기색이었다.
“젖었잖아. 수건, 가져가야지.”
그제야 붙든 이유를 알아차린 나는 반사적으로 어금니를 짓씹었다. 유독 겁 많은 동물들이 아무것도 아닌 접촉에 자지러지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꼭 그 짝인 것 같았다.
“……고마워.”
수납장에서 수건을 꺼내 나가려는데 다시 한번 팔이 붙들렸다. 마찬가지로 긴장이 됐지만 다행히 경기는 일으키지 않고 침착하게 뒤돌아서 물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침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꿀꺽, 울렸다.
“왜……?”
눈길이 하나로 겹쳤다.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고정원의 이마로 잘 뻗은 눈썹이 완전하게 드러나 있었다. 뭔가 분위기가 달라 보인다 싶더니 그 탓인 것 같았다. ……이런 와중에도 상황을 잊고 깜빡 넋을 놓게 되는 얼굴이었다.
“안 되겠다.”
뒷목에 감겨드는 촉촉한 손바닥을 느꼈다. 입술이 짓눌리면서, 눈이 질끈 감겼다. 젖은 옷 위로 마주 닿는 단단하고 뜨거운 몸이 느껴졌다. 턱, 하고 등 뒤로 차가운 타일이 닿으며 앞뒤로 온도의 대비가 선명해졌다.
“읏, 흣, 으응…….”
여유 없이 쏟아지는 키스에 호흡이 힘들었다. 끊어지는 신음 소리를 내며 고정원의 어깨에 매달렸다. 잔뜩 몰아붙여지면서 덩치 차이로 인해 내 몸은 조금 들려 있었고 고정원의 발등을 딛고 올라서 있었다.
“아……!”
순식간에 젖은 티셔츠가 벗겨지고 바지가 끌어내려졌다.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고정원은 굶주린 것처럼 키스하는 경향이 있었다.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입술을 파고드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잠깐만, 진정해 봐 쫌……!”
겨우 떨어뜨리고 소리쳤다. 상의와 하의가 모두 벗겨지고 드로즈 한 장만 걸친 상태가 된 나는 바로 눈앞에 흉흉하게 팽창한 고정원의 중심을 보고 덜컥했다.
“야, 너…….”
고정원이 내 얼굴을 감싸며 다가왔다. 낌새를 눈치채고 고갤 돌리자 끝까지 따라와서 입을 맞췄다. 등 뒤가 벽이라 피할 곳도 없었다.
진득한 입맞춤에 어쩔 수 없이 반응하기 시작한 하반신을 느끼며 곤란해하던 중 가까스로 입술이 떨어졌다. 춥, 하는 민망한 소리와 함께 단단한 손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발정 났냐…….”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하자 고정원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좁은 욕실에서 울리면서, 새삼스레 화장실이 방음에 취약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옆집 말소리며 물 내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었다. 우리 말소리도 옆집에 새어나갔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같이 씻을까.”
유혹하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조용히 해. 여기 방음 잘 안 된단 말이야…….”
겁이 나서 속삭거리며 말하자 고정원이 또 한번 웃었다.
“하고 싶어.”
그리곤 들으라는 듯이 귀에 바짝 대고 입술을 붙여 왔다. 부드럽고 축축한 것이 스치니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혼자 해. 나 빼고.”
“……혼자 할 테니까 그럼 봐 줄래?”
“…….”
몸서리를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소름끼치게 낮은 목소리에 담긴 음담패설이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먼저 나갈게. 저녁 먹을 거 시켜 놓을 테니까 빨리 씻고 나와.”
고정원의 어깨를 힘껏 밀어내고 문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문고리를 채 붙들기도 전에 이번엔 백허그처럼 뒤에서 끌어안겼다.
팔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단단한 구속과 함께 뜨겁게 달아오른 체온이 느껴졌다.
“나만 너 만지고 싶나 봐.”
“…….”
“우리 처음으로 사귀기로 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너무 좋아서 뭐든지 같이 하고 싶고 잠깐도 안 떨어지고 싶은데.”
“…….”
“인휘는 아닌 거 같아.”
뜻밖의 속마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라서 깜짝 놀랐다.
“아니…… 나도 너랑 사귀게 돼서 진짜……, 안 믿길 정도로, 좋고…… 정말, 너무 좋아서 안 떨어지고 싶은데……. 같이 씻는 건, 그, 좀 민망하기도 하고…….”
그런 게 아닌데 오해하는 게 안타까워서 정리되지 않은 말이 주절주절 나왔다.
“어, 또…… 여기 진짜 방음 하나도 안 된단 말이야……. 옆집에 다 들리면 안 되잖아…….”
이해해 달라는 뜻에서 고정원의 팔에 손을 얹고 손가락 끝을 문질렀다. 안았던 팔 힘이 조금 느슨해지는 게 느껴졌다. 얼마간 서로 그렇게 끌어안은 채로 사소한 스킨십을 주고받았다.
“씻기만 할게. 다른 거 안 하고. 그래도 안 돼?”
내 어깨에 턱을 붙이고 말하는 고정원은 어딘가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같이 씻는 건 진짜 싫은데.
“응?”
하……. 긴 한숨이 터져 나오며,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씻고 나와서 옷을 입고 전화로 저녁을 주문했다. 얼마 후 배달 온 피자를 받고 노트북을 켜서 고정원에게 영화를 고르게 하기까지. 나는 시종일관 넋이 빠진 모양으로 멍한 상태였다.
“왜 그래, 입맛 없어?”
눈앞엔 좋아하는 치즈 피자가 있었지만 한 조각을 먹은 뒤론 영 손이 가지 않아 콜라만 홀짝거리며 노트북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아…… 응, 너 많이 먹어.”
머릿속이 멍해서 맛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고, 영화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냥 입속에 뭐가 들어오는구나, 눈앞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구나, 하는 정도의 수준 이상으로는 집중이 되질 않았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고정원의 손등이 이마에 닿았다. 아니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어서 손길을 떨쳐 내고 다짜고짜 콜라를 들이켰다.
“…….”
목구멍이 칼칼했다. 고정원이 손댄 순간 갑자기 정지 상태로 있던 신경들이 날뛰는 것 같았다.
“……왜?”
……아니야. 작게 대답하고 얼굴을 문질렀다. 내 몸이 생각대로 통제가 안 되고 붕 뜬 감각이라 이상했다.
“편안하게 기대서 봐.”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던 고정원이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뒤로 억지로 몸이 젖혀지면서 고정원의 팔이 침대와 등 사이에 안착했다. 자연스럽게 팔이 허리를 감쌌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집중이 안 됐다.
필사적으로 영화자막을 눈으로 쫓으며 내용을 따라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다 영화가 얼마 안 가 자막도 없이 원색적인 살빛으로 가득해지자, 노력할 필요도 없이 온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방 여기저기 부딪혀 가며 서로를 잡아먹을 태세로 키스를 하는 남녀는 또한 전투적으로 서로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
세상에 둘만 남겨진 것처럼 서로에게 집중하는 모습은 자연스럽게 어제의 기억을 연상시켰다. 리조트 복도에서 했던 고백 후, 고정원은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는 사람처럼 내게만 집중했었다.
척척하게 젖은 소리들이 노트북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가만히 방안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것뿐인데, 아찔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옆에 딱 달라붙어서 내 허리에 팔을 감고 있는 존재가 그런 기분을 더 부추기고 있었다.
“후…….”
무릎을 모아 그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뱃속 깊은 데서 끌어올린 한숨이 짙었다.
“야 고정원, 너 이제 집에 가…….”
고개를 파묻고 웅얼거렸다. 옆에서 고정원이 응? 하며 되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별안간 울컥했다. 아까 욕실에서, 고정원과 씻으며 있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거 안 하고 씻기만 한다더니, 씻기만 하기는 무슨.
아직도 고정원이 아래를 빨아 대던 감촉이 선명했다. 감촉만 선명한 게 아니라 가지런한 속눈썹과 매끄럽게 뻗은 콧대, 그리고 내 것을 머금느라 평소보다 색이 진해진 입술 같은 게 머리 한편에서 떠나질 않았다.
처음 겪는 지나친 자극에 참지 못하고 금방 끝이 났던 것도, 그리고 고정원의 입술 주위로 흩뿌려졌던 탁한 체액도…… 다 지나치게 선명한 한편으로 현실감이 없었다.
“인휘야, 진짜 어디 아파?”
게다가 그걸……. 고정원은 그걸…….
“너 왜 그랬어?”
순간 팍, 고개를 쳐들고 따지듯이 물었다. 걱정하던 고정원의 눈빛이 의아한 기색으로 바뀌는 게 보였다.
“응?”
“너 아까 왜…… 내, 그거…… 그, 정액, 핥았, 핥았어?”
시뻘게져서 묻자 고정원은 ‘아…….’ 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뜬금없는 질문에 굉장히 놀란 듯했다.
“내, 내가 솔직히 연애도 많이 해 보고, 여러 가지 경험도 많고, 이런 게 익숙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용기를 내기 위해 손을 꽉 움켜쥐었다.
“우리, 진도가 너무 빠른 거 같아.”
정적이 흘렀다. 노트북에서 남녀가 주고받는 격앙된 불어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정열적으로 사랑을 나누더니, 그새 싸우는 모양이었다.
“……미안.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앞서 갔나 봐. 힘없이 눈을 내리깐 고정원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
사과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순순히 인정하며 미안하단 말까지 듣고 나니 괜한 탓을 한 거 같아서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제부터는 다 맞출게.”
“……어?”
“앞으로 키스하고 싶을 때나, 스킨십하고 싶을 때…… 그때 직접 해 줘. 나는 다…… 하잔 대로 할게.”
다 맞춘다고, 내가 하자는 대로?
무턱대고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서 다소 당황스러웠다. 그저 조금만 천천히 가자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워서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앞으론, 나한테 맡겨…….”
어물어물 대답하자,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고정원이 등 뒤, 허리에 둘러져 있던 팔을 빼냈다. 그리곤 틈 없이 밀착돼 있던 몸을 훌쩍 떨어뜨렸다.
“편하게 봐.”
상냥하게 웃는 얼굴은 배려심이 묻어났다.
“……너도.”
순식간에 생긴 거리에 어리둥절해져서 대꾸했다. 빈자리를 인식해서인지, 여름인데도 서늘하고 휑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피할 필요는 없지 않나……. 드는 불평을 억누르며 식은 피자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속이 텅 비면서 허한 거 같았다.
힐끔, 옆을 쳐다보니 고정원은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차마 먼저 다가갈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나는 관심도 없는 영화의 장면들을 의욕 없는 눈으로 쫓았다.
“그럼, 이만 갈게 나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고정원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거의 눈꺼풀이 닫히기 일보직전이었던 순간 깜짝 놀라서 바닥에서 엉덩이를 뗐다.
“간다고? 지금?”
허둥지둥 시간을 봤다. 생각보다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고 갈 줄 알았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푹 쉬어.”
고정원의 손가락이 눈가를 쓸고 갔다. 무언가를 닦아 내는 듯한 행동이었다. 만져졌던 곳을 되짚어 보니, 하품하느라 흘렸던 눈물이 살짝 비어져 나와 있었다.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졸고 있던 게 들킨 거 같아서 민망해진 나는 서둘러 눈가를 훑어 내며 말했다.
“근데 자고 간다고 하지 않았어?”
“생각해 보니까 가서 할 일도 있고……. 인휘도 여행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혼자 편히 자.”
아까 내가 집에 가라고 했던 걸 신경 쓰는 걸지도 몰랐다. 그냥 너무 어색해서 한 말이지 진심은 아니었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고정원은 이미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연락할게.”
“……어, 조심히 가.”
대충 한 번 올려다보며 건성으로 배웅했다. 집에 가서 할 일이 있다는 건 진짤까. 왠지 핑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휘야.”
바로 나갈 줄 알았던 고정원이 내 이름을 불러 왔다. ‘어?’ 하고 대답만 하고 눈을 마주치진 않았다. 삐진 걸 티내려는 게 아니라 정말 내키지가 않아서였다. 피곤한 척 눈가를 비볐다.
고정원의 손이 내 팔목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비비면 충혈된다니까.”
습관 나쁜 애를 어르듯이 팔을 끌어당겨 내렸다.
“…….”
갑자기 울컥, 어떤 감정이 치밀어 올랐는데 그게 정확히 뭔지 스스로도 파악이 안 됐다. 좀 혼란스럽고, 고정원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잘 가란 인사 안 해 줘?”
팔목을 붙들고 있던 손이 내려오면서 부드럽게 손바닥을 스쳤다.
“어…… 아까 했는데. 조심히 가라고…….”
어설프게 눈을 맞췄다 피하면서 웅얼거렸다. 눈높이를 가깝게 낮춘 고정원이 내 얼굴을 살펴보려 하기에 고개를 피했다.
“뭐 해. 얼른 가.”
집요한 시선이 껄끄러워서 단단한 어깨를 밀어내며 말했다.
“……혹시 서운해? 나 가서?”
“…….”
얼굴이 조금 뜨뜻해진 것 같았다. 묘한 감정의 정체가 ‘서운함’이었다고 자각하자 쑥스러워졌다.
“아……니. 전혀.”
나도 혼자 할 일 많아. 덧붙인 변명이 어쩐지 궁색하게 느껴졌다.
“그럼 다행이고.”
고정원이 서서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금방 떠날 것처럼 굴면서 막상 돌아서서 나가질 않으니 초조하기까지 했다. 왜 안 가느냔 의미로 올려다보자, 웃고 있는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인사.”
분명 인사를 해 줬는데도 자꾸만 되풀이되는 상황에 의아함을 느끼는데,
“……아.”
고정원이 말하는 ‘인사’라는 게 뭔지, 그제야 감이 왔다.
“해 주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누가 싫대.”
아, 어색해.
진도가 빠른 거 같다고, 그딴 소리 왜 했을까 진짜. 너무 부담돼서 한 말이었는데 어째 부담이 배로 늘어나 버렸다. 앞으로 이런 쪽으론 다 내가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부담스럽고 멋쩍어서 뒷목을 쓸고 시간을 끌다가 고갤 들었을 때, 고정원은 키 높이를 맞춘 채 얌전하게 눈을 감고 기다리고 있었다.
“…….”
나는 잠시 멍해져서 넋을 놓았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드러나도록 눈을 감은 모습을 보자, 찰나의 순간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분홍빛의, 시원스러운 입매와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이 시선을 잡아끌고 놓아주질 않았다.
눈 감은 모습에 홀린 것처럼 다가갔다. 어떻게 각도를 해야 하나, 이리저리 고개를 비틀다 간신히 입술을 붙였다.
아랫입술을 감쳐물고, 살짝 빨아 당겼다. 고정원이 조금 움찔, 하는 정도의 반응을 보인 것만으로 일시에 몸의 온도가 몇 도쯤 올라간 느낌이었다.
혀끝끼리 섞이고 쪽, 쪽, 하는 입술끼리 접촉했다 떨어지는 소리가 몇 번이나 났다. 고정원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소극적이 됐다고 해야 할지. 내가 하는 대로 얌전히 따라오는 느낌이 오랜만인 것 같아서 또 신선했다.
“하…….”
차오른 숨과 함께, 젖은 입술이 아쉽게 떨어졌다. 단조로운 입맞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릿한 흥분감이 몰아치고 갔다.
훈훈한 정적이 우리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입술과 턱 주변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린 고정원이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냥, 뽀뽀만 해 달라는 뜻이었는데.”
고정원의 눈이 웃고 있었다. 더없이 즐거운 사람처럼 보였다.
“훨씬 좋네.”
아……. 얼굴이 불 지핀 것처럼 열기에 감싸였다.
“고마워.”
잘 자. 인사말 다음엔 뺨에 쪽, 하고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고정원이 해 달라고 했던 ‘인사’가 어떤 것인지 그 순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나는 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다. 어찌나 화끈거리던지 고정원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마자 침대로 몸을 내던져 버렸다.
“으으…….”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된 거 같았다. 사귀기로 하고 나서 귀찮을 정도로 들러붙고 별 짓을 다 하려고 들던 고정원이 ‘진도가 빠른 거 같다’는 한 마디로 이렇게 담백해질 줄은 몰랐다.
그렇게까지 안달 냈으면서…….
아침에 리조트에서도 그렇고, 아까 우리 집 욕실에서 내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던 시선은 뜨거움 그 자체였다.
겨드랑이나, 그 외에 생전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던 젖꼭지나 배꼽 같은 곳까지, 눈으로 사진이라도 찍는 것처럼 세세하게 관찰하는 탓에 숨이 막힐 정도로 부끄러웠었다.
너무 꼼꼼한 관찰이 부담되어 보지 말라고 하는데도 시선을 떼긴커녕, 핥고…… 입안에 머금어 빨아올리면서 결국 중심부까지 옮겨 가 생전 처음 겪는 오럴에 쪽팔리게 눈물까지 찔끔 흘렸었다.
나는 차마 똑같이 해 줄 수가 없어서 손으로 만져 줬는데, 서툴게나마 내가 혼자 할 때처럼 쓸어 올려 주니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고정원의 입술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나는 똑같이 가쁜 숨을 터뜨리며 몰입하고 있었다. 만져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만족시켜 주고 있다는 흥분감에 사로잡혀 방음이 안 되는 화장실인 것도 잊고 집중해서 애무했었다.
손안의 것이 뜨겁게 움찔거릴 때마다 거친 호흡이 쏟아지고, 울퉁불퉁한 복근이 성난 것처럼 솟아올라 오르락내리락하는데 고정원의 두 눈은 내게서 떨어지질 않고, 참지 못하고 입술이 간간이 부딪히면서 온 주변이 축축하고 여러모로 정신이 혼미해서…….
“하…….”
다시 생각한 것만으로 아래가 완전히 단단해지고 말았다. 끙, 불편한 소리를 내며 본능적으로 침대 시트에 하반신을 비볐다. 짜르르한 자극이 척추를 타고 후두부까지 올라가 절로 한숨이 터졌다.
고정원 생각을 하고 있어서 고정원 냄새가 나는 줄 알았는데, 침대 위로 고정원이 갈아입고 그냥 두고 가 버린 티셔츠가 올라와 있는 걸 발견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깨달았다.
일어나서 깔아뭉갠 티셔츠를 빼냈다. 얌전히 접어 둘 생각으로 털었는데 옷이 펄럭이면서 배어 있는 향수 냄새나 체취가 일순 강해졌다.
“…….”
어떡해.
만지지도 않았는데 부푼 중심이 조여들었다. 별안간 정말 변태스럽고, 은밀한 유혹이 찾아들었다. 갈팡질팡하던 나는 티셔츠를 쥔 채로 천천히 다시 침대에 누웠다.
“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티셔츠에 코를 박는 것만으로 저릿저릿해지는 아래가 가장 압도적인 감각이었다. 천천히 손을 내려 얇은 바지 사이로 집어넣었다. 속옷의 앞부분은 이미 축축해져 있었다.
여길, 빨아 댔었지…….
티셔츠 밑으로 손이 들어가고, 전엔 혼자 하면서 만져 본 적이 없는, 만질 생각조차 못 해 봤던 가슴팍의 솟아오른 돌기 부분에 손가락이 닿았다.
그리고 그때,
지이이잉…….
울리는 진동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몸이 튕겨 올랐다.
나는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닥을 뒹구는 핸드폰이 보이고,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다. 어, 어, 갈피를 못 잡던 나는 재촉하는 것처럼 울려 대는 진동소리에 결국 일어나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뭐하고 있었어?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가뜩이나 빠른 맥박이 난장판이 됐다.
“어, 뭐, 그냥 있지 뭐. 운전 중이야?”
-응. 목소리 듣고 싶어져서.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난 계속 너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또 나만 그랬나 보다.
“…….”
야. 나는 생각하다 못해……! 차마 있는 그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할 뿐이었다. 부풀었던 아래가 하도 놀라서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 어디에 있어? 침대?
또 한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순간 영상통화였나 놀라서 화면을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사소한 질문에도 펄떡펄떡 뛰었다.
“……그냥, 바닥인데. 그건 왜?”
-그냥. 어디서 뭐 하나, 궁금해서. 너무 집착하는 건가.
고정원이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티셔츠 그대로 입고 와 버렸어. 세탁해서 돌려줄게.
“아……괜찮아. 그거 안 입는 거라서, 귀찮으면, 가져도 되는데…….”
벗어 두고 간 티셔츠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기겁할 거 같았다. 발정은 누가 난 건지 대체.
-그럼 다음에, 다른 걸로 하나 사 갈게.
“아 됐어, 그러라고 한 말 아닌데……. 근데 너 운전하고 있다니까 신경 쓰여, 끊고 이따 도착해서 통화할래?”
빨리 끊고 싶었다. 통화 상으로 유독 낮아지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같이 씻으면서 귓가에서 속삭이던 말들이 생각나서 곤란스러웠다. 다리가 자꾸 긴장으로 팽팽해지면서 초조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그래……. 다시 전화할게 내가.
보이지도 않을 텐데 맹렬하게 고갤 끄덕이면서 그러라고 답했다. 고정원은 끊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지만 단호하게 전화를 마무리했다.
간신히 잠잠해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면서 침대 위로 쓰러졌다. 하지만 동시에 약간의 허전함이 느껴져서 그것도 좀 황당했다.
“후…….”
하지만 겨우 진정되기도 전에 또 다시 침대 위를 구르는 천 쪼가리의 냄새에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아래가 빠듯한 느낌이 들면서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몰라 애틋해졌다. 망설임과 자기혐오를 반복하면서도, 끝내 좋은 냄새가 밴 티셔츠를 코앞으로 끌어왔다.
고정원에게서 다시 연락이 오기 전까지, 빨리 열기를 꺼뜨려야 했다.
* * *
다음날, 여독의 영향이 남아 있던 우리는 각자 집에서 푹 쉬다가 느지막이 만났다. 저녁을 먹으러 가기 위해 데리러온 차에 올라타니 운전석에서 나를 반기는 고정원은 편안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표정도 차림새만큼이나 편안했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들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귀게 된 지 고작 며칠째니 들뜨지 않기가 힘들었다. 고정원의 사소한 행동이나 자잘한 표현들에서 우리가 사귀고 있음을 확인받을 때마다 누가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것처럼 웃음이 났다. 너무 웃는 거 같아서 자제하려고 했지만 눈이 마주치면 감정이 넘쳐나 번번이 실패였다.
식당에 먹으러 들어가서도 증상은 나이지질 않았다. 마주 보고 앉아 있으니 더 주체가 안 되는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어제보다 오늘이 더 사귄다는 실감이 났다.
“왜 자꾸 웃어.”
“너도 웃잖아.”
마주하는 눈빛에서도 애정이 느껴졌다.
“그만 쳐다봐. 밥 좀 먹자.”
웃으면서 지긋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쑥스럽고 의식돼서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가슴도 쓸데없이 벅차서 먹다가 얹힐 것 같았다.
고정원은 안 쳐다본다고 해 놓고 내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너는 형제가 어떻게 돼?”
차라리 얘기라도 나누는 게 덜 긴장될 것 같아 평소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외동이야.”
“아, 외동이었구나. 부모님이 엄청 아끼셨겠다.”
“음, 그래도 혼내실 땐 엄청 엄하셔서 어렸을 땐 부모님 많이 무서워했어. 인휘는 누나 있지?”
“아 응.”
가족 구성원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대화는 깊어졌다.
고정원이 가족에 대해 굉장히 구체적으로 알려 준 덕이었다. 집안 분위기, 부모님 두 분의 직업적 성격적 특징,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부모님이 어떻게 서로를 만나고 연애해서 결혼에 이르게 됐는지까지 상세하게도 풀어 주었다.
“결혼을 일찍 하셨네?”
“아버지가 한번 결정하면 완고한 데가 있으셔서. 어머니는 망설이셨는데, 몰아붙이신 거지.”
내가 아버지 그런 점을 좀, 닮았어.
고정원은 살짝 눈을 내리깔며 그렇게 말했다.
“얘기 들어 보니까 너 진짜 아버지 많이 닮은 거 같아.”
확실히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니 고정원에 대해 한결 이해하기 쉬웠다.
가족 얘기가 끝나고도 대화는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대부분 고정원이 이야기했고 나는 듣는 쪽이었다. 유학 시절에 있었던 일화들, 그때 교류했던 사람들에 대한 얘기에서 자연스럽게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화제가 이어졌다. 학교 졸업 후의 계획을 들었을 땐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같은 나이인데 나는 너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부끄러워졌다.
“나만 너무 많이 얘기한 것 같네.”
평소 수다스럽지 않은 고정원이 오늘따라 유난히 말이 많아진 건 나도 느끼는 바였다. 그 변화가 못내 흡족한 기분이 들던 차였다.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는 걸 또 한번 체감할 수 있었다.
“더 많이 얘기도 돼. 난 궁금하니까.”
아무도 모르는 고정원에 대해 죄 알고 싶었다. 속속들이 알고, 나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알려 주고. 그것들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우리 사이에만 숨겨 두고 싶은 그런 욕심이 들었다.
“말이 많아진다 이상하게.”
고정원은 익숙지 않은 것처럼 머쓱하게 목을 쓸었다.
“말 많이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내리깔았던 눈을 뜨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신기하네.”
“…….”
웃음기 없이 빤한 시선에 갑자기 안절부절못하겠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급히 물 컵을 들어 찬물을 쭉 들이켰다.
“이것도 먹어 봐.”
고정원은 자기의 앞쪽에 있던 반찬 몇 개를 내 앞으로 옮겨 주었다.
“고마워.”
나는 이렇게 긴장되는데 고정원은 왜 저렇게 여유로워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너무 서투른 건지, 아님 연애 초반엔 나 같은 게 정상인 건지. 어떻게 해야 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가라앉을지, 복에 겨운 고민을 하며 남은 식사를 마쳤다.
식사 후엔 바로 차에 타지 않고 소화 시킬 겸 주변을 한 바퀴 산책했다.
가끔 놀러 오는 동네였는데 번화가만 주로 돌아다니다가 이렇게 골목 안쪽으로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바깥에 비해 확실히 조용했고 단독 주택이 생각보다 많이 보였다. 공장처럼 생긴 카페나 주택을 개조해 만든 음식점 등 정형화되지 않은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한번 해 볼래?”
걷다 말고 멈춰 선 고정원이 손가락을 가리킨 곳은 인형 뽑기 기계였다.
“그래.”
워낙 오랜만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뭐가 좋아?”
기계 안에 더미로 쌓여 있는 귀여운 솜 인형을 내려다보며 고정원이 물었다. 익숙한 캐릭터들이 눈에 띄었다.
“음, 저 토끼?”
손끝으로 가리키자 고정원이 비식 웃었다. 왜 그러냐는 뜻으로 올려다보자 나랑 닮았다며 손끝으로 내 볼을 슬쩍 건드린다.
“하얗고 똘망똘망하잖아.”
“…….”
와.
간지러운 행동에 순간 닭살이 두두두 돋았다. 부끄러워진 나는 기계 속 근육질 거북이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거북이는 고정원 너 닮은 거 같지 않아? 얼굴 작고 몸 크고.”
솔직히 닮지 않았는데 놀리려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고정원은 마음에 든 건지 활짝 웃더니 ‘토끼와 거북이’라며 좋아했다.
결국 기계의 스틱을 잡은 고정원은 두 번 만에 토끼 인형 뽑기에 성공했고, 당연한 것처럼 내게 선물해 주었다. 그 인형을 받은 나는 왠지 세트로 거북이를 뽑아 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끼고 뒤따라 뽑기에 몰두했다. 하도 쉽게 뽑기에 만만하게 봤더니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는 않았다. 기계에 넣은 돈이 만 원을 넘어가면서부터 고정원이 괜찮다며 말렸지만, 할수록 오기가 생긴 데다 기념으로 꼭 하나 주고 싶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뽑았다.
고정원은 이런 거에 목매는 내가 웃겼는지 내내 싱글벙글이었다. 내가 힘겹게 뽑은 인형을 건넸을 때는 허리를 꺾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기어이 길거리 한구석에서 나를 껴안기까지 했다.
깊은 포옹을 하며 웃다가 ‘고마워.’하고 듣기 좋은 인사를 했다.
마침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느닷없긴 하지만 포옹을 하게 되니 내내 이러고 싶었음을 깨달은 나는 우물쭈물하다 껴안은 등으로 소심하게 손을 올렸다.
“맞다, 미안.”
막 손바닥이 닿으려던 때에 떨어져 나간 온기에 당황해서 눈을 끔뻑거렸다.
“우리 약속한 거 까먹었네.”
‘약속’이란 게 뭐였는지 순간 의아했다가, 불쑥 어젯밤 기억이 떠올랐다.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냐고 탓하며 고정원을 밀어냈던 순간이.
“먼저 만져서 미안,”
“어어……, 괜찮아.”
머쓱하게 팔을 쓸었다. 어차피 길거리라서 금방 떨어질 생각이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만 차로 갈까?”
“……어.”
옆으로 나란히 걸으며, 나는 이유 없이 손에 쥔 토끼의 배를 양손으로 꾹 눌렀다.
거리가 워낙 가까웠기 때문에 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시동이 꺼지자, 내부는 정적에 휘감겼다. 고정원의 차 앞에 장식된 거북이 인형과 내 손 안의 토끼 인형을 번갈아 보던 나는 오늘의 소소한 데이트를 떠올리며 벌써 헤어져야 하는 건가 싶어 울적해졌다.
어제 얼떨결에 스킨십 규칙 같은 걸 만든 이후 확실히 고정원은 한 발짝 물러서서 수동적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가야 하는데. 소심하다 보니 이것저것 재고 눈치만 보게 됐다.
“그럼, 여기서 헤어질까?”
고정원은 쉽게도 말했다.
“어, 응.”
할 말이 없어진 나는 퉁명스럽게 맞장구쳤다.
“인사해 줘 인휘야.”
그래 놓고 뽀뽀는 받고 싶었는지 또 ‘인사’를 들먹였다. 나도 그냥 내리기는 아쉬웠으니 가까이 들이밀어진 고정원의 얼굴에 결국 쪽, 하고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가.”
안전벨트를 푸르고 차문에 손을 얹었다. 그와 동시에 어깨가 붙들린 까닭에 나는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난 아직 못 해 줬는데. 인사.”
해도 되지? 물으며 고정원은 몸을 가까이 기울여 왔다. 뺨 한가운데에 내가 해 줬던 것처럼 소리 나게 입을 맞추고는, 한번 더 꾹 입술을 눌러 왔다. 그것도 입술 근처에.
“가면 또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달라붙은 몸을 떨어뜨릴 생각도 않고 미련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같이 들어왔다 가면 되잖아.’ 따지고 싶은 걸 참고 눈을 마주보았다.
“운전하면서 목소리라도 듣게, 들어가면 전화해 줘.”
기다란 손가락이 손등을 슬며시 쓸어내리고 떨어진다. 먼저 스킨십하지 않겠다고 했으면 제대로 지키기나 하지, 이런 식으로 슬쩍슬쩍 건드리니까 괜히 애타는 느낌만 더했다.
껴안고 싶다. 입 맞추고 싶다. 집에 들여서, 딱 달라붙어 있고 싶다.
창밖의 골목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쫓던 나는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어, 갈게.”
차문을 열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기 직전이었다. 나는 백기를 올리는 심정으로 뒤돌아보았다.
“근데 너 뭐 바쁜 일 있어?”
“아니, 없는데 왜?”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고정원을 보며 내숭인지 진짜 나를 배려한답시고 이러는 건지 헷갈렸다.
“……들어왔다 가면 안 되는 거야?”
“정말? 그래도 돼?”
꼭 내 눈치를 보느라 참고 있었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어, 당연하지.”
그러나 흔쾌히 나온 내 대답에도 고정원은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뭐가 문젠가 싶어 말해 보라는 뜻을 담아 빤히 주시했다.
“자고 가는 건…… 부담되겠지?”
“…….”
간신히 잠잠해져 있던 심장이 둑둑둑둑, 빠르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자고 간다는 게 꼭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만……. 아, 혹시 정말 그런 의미로 한 말인가?
나는 내가 놓치고 있는 사인이라도 있을까 하여 고정원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아무리 살펴봐도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어 머릿속이 엉켜들려는 찰나,
“농담이야. 차만 얻어 마시고 갈게.”
한 발 물러나는 태도에 놀라 ‘아냐!’하고 소리쳤다.
“자고 가.”
다급하게 허락하자, 고정원은 ‘나 때문에 무리할 필요는 없는데…….’ 하고 싱거운 겸양을 떨더니 바로 뒤이어 ‘고마워.’ 산뜻한 미소로 인사를 했다.
고정원을 집안으로 들이는 게 처음도 아닌데 꼭 처음 들였을 때처럼 떨렸다.
“뭐 마실래, 아이스커피? 탄산수?”
“응, 커피 마실게.”
선풍기를 틀어 주고 삐걱삐걱 부자연스럽게 돌아선 나는 부엌에서 아이스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컵에 커피믹스를 넣고, 물을 부어 섞고, 얼음을 띄우고. 손은 기계적으로 커피를 타면서도 머릿속은 다른 생각들로 복작복작 소란스러웠다.
집에 들인 이상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 같긴 한데. 대체 어느 타이밍에, 어떻게 진도를 빼야할지. 무드는 또 어떻게 잡을지. 어떻게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리드할 수 있을지. 고민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야, 스킨십이랑 진도 자연스럽게 빼려면 어떡하면 되냐?’
언젠가 동기 하나가 내게 상담했던 내용이 현 상황과 오버랩되며 허탈한 한숨이 나왔다.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안달하는 티 내지 마 절대. 남자가 어떻게 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거 보이면 완전 매력 없다. 스킨십을 하고 싶으면 장난치면서 자연스럽게 해야지. 뭐 손금 봐 주기 같은 것도 식상하긴 한데, 나쁘지 않고.’
지금 떠올려도 웃긴데 더 웃긴 건 며칠 후 그 동기가 손깍지와 어깨 감싸 안는 것까지 성공했다면서 내게 음료수를 쐈었다.
“…….”
나도 한 번 해 볼까. 손금 볼 줄 모르는데 검색해 봐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커피 속 얼음이 둥글게 녹고 있었다. 더 생각하다간 커피도 맛없어지고 머리만 터질 것 같아서 일단 잔 두 개를 들고 뒤돌아섰다.
혼자 남은 고정원은 침대의 사이드를 등받이 삼아 바닥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자기가 뽑아 줬던 내 토끼 인형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여기.”
“고마워.”
달그락, 얼음이 든 유리컵을 받아들어 그대로 꿀꺽꿀꺽 들이키는 모습에 시선이 머물렀다. 젖힌 고개로 인해 요동치는 목울대의 움직임이 뚜렷했다.
“맛있다.”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음을 자각하고 눈을 피했다.
“……한 잔 더 줄까?”
“아니, 괜찮아.”
등줄기가 뜨거워지는 바람에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컵을 든 채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자 등 뒤로는 침대, 팔뚝과 허벅지로는 고정원의 몸이 겹쳐 닿았다.
“…….”
사귀는 사이고, 집에 단둘이 있으니 붙어 있는 건 당연한데. 속으로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인지 영 어색하고 긴장됐다. 식당에서 밥 먹을 땐 떨리기는 해도 대화만큼은 매끄럽게 잘 했건만. 갑자기 대화 소재가 떠오르지도 않고 목구멍도 꽉 메여서는 마음 같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오늘따라 물어보지도 않은 얘기들까지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수다스럽던 고정원도 이제는 딱히 할 말이 없는지 나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렇다고 둘 다 이렇다 할 딴 짓을 하는 것도 아니라 침묵 속에서 이따금씩 커피 홀짝이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나는 고정원의 손목에 감싸인 시계 속 초침의 일정한 움직임을 곁눈질하다가, 최대한 자연스러운 톤으로 운을 띄웠다.
“안 심심해?”
내 물음에 고정원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더니 ‘아니 괜찮은데. 인휘는 심심해?’하고 역으로 물어왔다.
“아니 나도 별로…….”
대답하면서도 뭐라고 말을 이어 가야 하나 속이 시끄러웠다.
“근데 너 평소엔 뭐 해? 뭐, 취미 같은 거?”
그러고 보니 취미가 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도 않았다는 게 놀라웠다. 사귀는 사이인데.
“책도 읽고, 뭐 운동도 하고.”
“아 맞다 너 운동 열심히 하지.”
자연스럽게 눈길이 상체에 쏠렸다. 특히 벌어진 어깨와 꽉 끼이는 팔뚝을 훑어보던 나는 홀린 것처럼 칭찬했다.
“진짜 몸 좋긴 좋다. 옷 입어도 확 티가 나네.”
“……그래? 규칙적으로 한 보람이 있네.”
고정원은 쑥스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너는 얼굴도 잘생겼으면 하나만 하지 몸까지 좋냐.”
그 표정이 귀여워 보여서 한번 더 칭찬한 나는 아예 띄워 줄 작정으로 오버했다.
“와 두꺼운 거 봐. 너 지금 이거 힘 안 준 거야?”
대뜸 팔뚝을 붙든 내가 감탄하자 고정원은 손에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아, 응.’ 하고 왠지 모르게 순진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의도한 건 아닌데 스킨십이 몹시 자연스럽고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랑은 느낌이 완전 다르네. 너 체지방률 진짜 낮겠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복근도 대박이고.’ 하며 은근슬쩍 아래로 내려가 배를 쓰다듬자 힘이 들어가며 단단한 근육이 더욱 촘촘해지는 게 느껴졌다. 긴장하는 걸 달갑게 여기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면적을 넓혀 쓰다듬었다.
“이렇게 식스팩 만들려면 얼마나 걸려?”
“음, 나는 한 삼 개월 정도 걸렸던 것 같아.”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리며 힘주어 꾹꾹 누르기도 했다.
“간지러운데.”
하며 고정원이 내 손목을 붙들어 치우려 했지만 여기서 끝내기엔 아쉬웠다. 손을 치우는 척하다가 불쑥, 티셔츠 속으로 집어넣어 버렸다.
“오, 울퉁불퉁.”
일부러 티셔츠를 걷어 내고 가슴께까지 왕복으로 매만졌다. 옆구리도 슥슥 쓸고. 어쩔 줄 모르는 고정원을 구경하다가…….
“이 정도면 진짜 빨래판으, 로……, 어…….”
한순간 잘 나오던 말이 흐지부지 흐트러지면서 활발하던 팔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
얇은 천을 들추고 터질 것처럼 치솟은 하반신을 보고 놀라서 굳어진 탓이었다. 내가 눈 둘 곳을 모르고 어물어물 손을 치우자, 고정원은 그제야 올라간 옷매무새를 내려 고쳤다.
자연스럽게 장난치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키스하려고 한 건데, 겨우 이 정도 스킨십으로 발기까지 할 줄은 몰랐어서 당황하고 말았다.
“미안.”
그 사이 사과를 한 건 내가 아니라 고정원이었다.
“어? 아니, 네가 왜, 내가 미안하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분위기를 풀려고 한 장난이 의도와 다르게 오히려 경직시켜 버린 꼴이었다. 애매한 눈치 속에서 조금 멍하니 앉아 있던 고정원은 기어이 얼마 안 있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바람 좀 쐬고 올게.”
“아, 앉아 봐!”
다급히 터져 나간 내 명령에 고정원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순순히 다시 바닥에 앉았다.
“…….”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그렇고 그런’ 무드였다.
칼칼한 목으로 침을 꼴깍 삼키고, 일단 몸을 가까이 붙였다. 부푼 옷 위를 가볍게 쓰다듬자, 그것만으로 제법 뚜렷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낮은 신음과 더불어 성기가 옷 밑에서 노골적으로 움찔거렸다.
잘못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쫓기듯 빠르게 뛰었다. 입술에 잔뜩 힘을 준 나는 대담하게 지퍼를 내리고, 속옷 사이로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진 성기를 꺼냈다. 두꺼운 나머지 나무 기둥 같은 그것을 조금 빠듯하게 쥐고 흔들자 고정원은 내 이마에 툭, 자기의 이마를 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기 쉬운 흥분에 덩달아 몸이 달아올랐다. 어딜 쓰다듬고 주물러도 반응은 착실했고, 나는 내 것을 만질 때보다도 몰입되는 걸 느꼈다.
이마에 마주 닿은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도. 중첩되는 우리 둘의 흐트러진 숨결도 자극적이었다. 끈적해지는 공기 속에서 이따금씩 피부에 닿는 연약한 선풍기 바람이 우리가 얼마나 뜨거워져 있는지를 느끼게 했다.
“좋……아?”
젖기 시작한 손바닥으로 고환까지 둥글리며 물었다.
“너무.”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에 뒷덜미가 오싹해졌다.
자신감을 얻은 손짓은 갈수록 탄력을 받았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나는 입술이 칠칠치 못하게 벌어져 있는 것도 몰랐다. 당장 손안의 감촉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삼키는 걸 잊은 입안의 타액이 한데 고이고, 어느 순간 입가로 비어져 흐른 걸 깨달았을 땐 이미 흉흉하게 부푼 성기의 머리에 그것이 떨어진 뒤였다.
“…….”
투명하고 끈적한 액이 프리컴과 뒤섞여 아래로 흐르는 게 보였다. 흡, 하고 축축한 입 주변부터 닦아 낸 나는 허겁지겁 성기에 묻은 것까지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았다.
경황없이 허둥대다 고갤 들자,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고정원이 표정이 묘했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어이없는 것 같기도 하고.
산통이 다 깨졌다는 건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 하고 한숨처럼 터지는 웃음소리에 내 얼굴도 터질 것 같았다. 쥐고 있던 중심에서 후딱 손을 떼어낸 나는 쪽팔림을 이기지 못하고 뒤돌아 버렸다.
“인휘야.”
부르는 것도 무시하고 고개를 숙여 버리자 뒤에서 끌어안아 왔다.
고정원은 내 얼굴을 감싸 자기 쪽으로 돌리고는, 덮어 버리듯 입을 맞췄다. 입술과 혀뿌리가 얼얼하도록 이어진 입맞춤에 가슴팍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이렇게 적극적일 줄은 몰랐는데.”
맘껏 빨아 놓은 입술을 뗀 고정원이 웃는 낯으로 느물거렸다.
“안 닦아도 되는데 왜 닦았어.”
완전 놀리고 있었다. 등 뒤 엉덩이에는 발기한 성기가 짓눌렸다.
“아, 그만……해.”
두고두고 쪽팔릴 만한 일이라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고정원은 계속 나직하게 웃었고, 나는 진땀을 빼며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읏.”
투닥거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바지춤을 파고들어 온 손이 슬슬 쓰다듬으면서 중심으로 금세 열기가 모였기 때문이었다. 허벅지와 성기를 동시에 주무르는 애무에 등줄기가 짜릿짜릿했다. 키스도 숨 막힐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점점 힘이 빠져나가면서 자세가 흐트러지고, 우리는 바닥에 누워 몸을 겹치게 되었다.
“아. 이러면 진도가 너무 빠른가?”
옷을 벗고 벗기고, 나체가 되어 서로의 성기를 문지르기 직전. 고정원은 그렇게 말했다.
“…….”
기대하고 있던 쾌감 대신 애태우는 태도에 안달이 나면서, 나는 깨달았다. 고정원이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 이유를. 내가 진도가 빠르니 뭐니 눈치 없는 소리를 하니까 일부러 이렇게 얄밉게 구는 게 분명했다. 그냥 고정원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둘 걸, 왜 그딴 소리를 해서 이런 망신도 당하고 놀림도 받게 된 건지. 나는 뼛속 깊이 후회하면서 항복했다.
“그냥 네 맘대로 다 해.”
“응?”
팔로 얼굴을 가리고, 한 번 더 또박또박 말했다.
“진도 빨라도 되니까. 너 알아서 하라고.”
커다란 손이 교묘하게 움직이며 겹쳐진 성기를 한데 감싸 문질렀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밀려드는 야릇한 감각을 참아냈다.
“왜? 싫은 거 아니었어?”
아 진짜…….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좀 봐주지. 확 열이 받은 나는 상체를 들어 올려 고정원의 입술에 내 입술을 부딪쳤다. 앞니끼리 부딪히면서 약간의 얼얼함이 번졌고, 곧 부드럽게 혀가 얽혀 들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는 찌르르르 매미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