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데이트
남의 연애엔 이래라 저래라 참견도 잘 했는데, 막상 내 문제가 되니 객관적인 판단이 서지 않는 건 왜일까. 앞으로의 계획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오늘 입고 나갈 옷부터 결정하지 못하는 건 좀 심각한 것 같다.
“아…… 어떻게 제대로 된 옷이 없어.”
이건 너무 무난해서 싫고, 그렇다고 이건 또 과한 것 같아서 싫고. 딱 됐다 싶은 게 없어서 헤매다 보니 어느새 삼십 분이 넘는 시간을 거울 앞에서 소요해 버렸다. 보통 십 분이면 끝날 일을.
“하…….”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한 끝에 옷은 어떻게든 결정했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라고, 그쪽이 해결되니 이젠 얼굴이 신경 쓰였다. 어제 잠을 설쳐서 평소보다도 칙칙해 보이는 게 문제였다.
“나이가 들었나. 옛날엔 세수만 해도 뽀얘졌는데 말이야.”
일단 뭐라도 바르자 싶어서 화장품에 손을 뻗었다. 척척할 만큼 양손에 쏟아 낸 스킨을 흡수가 잘 되도록 착착 두드려 주고, 다음 단계인 로션까지 꼼꼼히 펴 발랐다.
조금 나아졌길 기대하고 거울을 들여다봤지만 역시나 뭔가 부족했다. 아무래도 플러스알파가 필요했다.
서랍을 열어 잠들어 있던 미개봉 선크림을 꺼내 손등에 소량을 덜어 냈다. 티가 나면 이상하니까 최대한 조금만 바를 생각이었다. 조심조심 펴 바른 뒤, 마무리로 립밤까지 바르니 한결 화사해 보이긴 했다.
“좀 그런가.”
지나치게 촉촉해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아……! 돌겠네 진짜.”
결국 입술은 손등으로 벅벅 문질러 닦았다. 어울리지도 않게 윤이 나는 핑크빛 입술을 보고 있자니 팔뚝에 소름이 돋아서 참을 수 없었다.
확실히 달랐다.
그러니까. 마음을 자각하기 전하고, 자각하고 난 지금이.
“왔어?”
도착하자마자 마주친 얼굴에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전엔 잘만 쳐다보던 얼굴인데 이상하게 똑바로 대하기가 힘들어서였다.
“늦어서 미안.”
사과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앞서 걸었다. 준비가 생각보다 길어지며 약속 시간에 늦은 바람에 뛰어오면서도 내내 초조하고 미안했었다. 근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하려던 말이 지워지면서 말도 무뚝뚝하게만 나갔다.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건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인휘야, 왜 혼자 가.”
“……어, 빨리 와.”
만만한 약속 장소 중에 하나인 대형 쇼핑센터 안이었다. 방금 전, 고정원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루한 듯이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그러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갤 들었고, 나를 발견한 순간 활짝 웃었다.
그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장면이 뇌리에 박힌 것처럼 떨쳐지질 않았다.
“아직 점심 전이지?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있어?”
“어어, 아무거나. 뭐가 있지 여기…….”
“일단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자.”
“응.”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려 했다. 보고 싶은 얼굴을 봐서 그런지, 떨리는 것과 별개로 기분이 좋았다. 종강 이후로 겨우 며칠밖에 안 지났는데. 한번 마음을 ‘좋아한다’의 형태로 인정하고 나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끊겼던 연락은 다행히 종강 모임 이후로 다시 활발해졌다. 고정원이 먼저 하기도 했고, 내가 먼저 톡을 보내거나 전화를 걸기도 했다. 특별한 일도 없이 수시로 그랬다. 어제는 서로 일어났다에서부터 시작해 밥 먹었다, 편의점 간다, 어쩐다, 한밤중이 되어선 잘 자란 인사까지, 거의 하루 종일을 시시콜콜한 얘기로 채웠다.
김강우를 비롯해 다른 애들이 왜 그렇게 나한테 연애 상담을 해 댔는지 뒤늦게 알 것 같았다. 얘도 아직 나한테 마음이 있나? 생각하다가도, 친구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주고받은 것뿐인가? 하는 생각이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느라 들뜨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했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다.”
“그러게.”
좋은 게 좋은 건 맞았다. 고정원과의 잦은 연락으로 자신감이 생긴 덕분에 오늘 아침 일어나서 먼저 데이트 신청을 했으니. 표면상으론 살 책이 있어서 근처로 나갈 건데 혹시 시간 되면 나오라는 식의 무심한 제안이었지만 어찌 됐든 성사된 순간부터 나한텐 데이트였다.
밥 먹고, 서점에 들르고, 얘기도 하고. 어떻게든 오늘 하루를 통째로 같이 보내고 싶은 생각이었다.
“여기 어때?”
“좋아.”
눈에 띄는 대로 인도 음식 전문점으로 들어섰다. 인도 현지분이 직접 카운터에 서 있었고, 블랙과 골드 톤을 주로 디자인된 외관과 내부는 분위기 있는 조명으로 어둑하게 연출된 곳이었다. 남자 둘이 오기엔 좀 그런가? 싶기도 한.
실제로 대기 없이 안으로 들어서니 테이블의 대부분이 남녀 커플이었다. 우리가 앉은 자리의 양쪽 옆도 그랬다.
쓸데없는 관찰을 하고 괜히 기분이 묘해져서 물티슈로 손을 닦는데 열중했다. 지금 눈이라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면 더 분위기가 어색해질 게 분명했다.
주문을 하고 나서도 마땅히 할 게 없어 딴청이 이어졌다. 무슨 얘기를 꺼낼까. 전엔 무슨 얘기를 했더라. 속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문득 낮은 목소리가 스쳐 갔다. 주변의 소음과 더불어 자리의 어색함 탓에 집중을 하지 못한 내가 한 박자 늦게 고갤 들어 되물었다.
“어, 뭐라고 했어?”
“아니, 오늘 인휘 너 분위기가 좀 달라 보인다고.”
들은 말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굳어졌다. 분위기가 달라 보일 일이 있었던가. 되짚다가, 나오기 전에 바르고 온 선크림과 립밤이 떠올랐다. 설마 티가 나나 싶어 서둘러 입술을 안으로 말아 비볐다.
“그래? 별 다른 거 없는데…….”
물기 배인 유리컵의 표면을 손톱으로 긁었다.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
“평소보다…….”
“응?”
말을 꺼내다 말고 입을 다무는 태도에 불안함을 느끼고 되묻자, 고정원은 아무 말도 아니라는 듯 갈무리했다.
“아니, 평소보다 좋아 보여서.”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곤란했기 때문에 배가 몹시 고팠던 것처럼 먹는 행동에 매달렸다. 한동안 대화는 단절이 됐고, 간신히 긴장이 멎었을 때쯤엔 이미 식사가 끝나 있었다.
“책 보러 갈까?”
“……그래.”
밥은 다 먹었고, 그렇다고 할 얘기는 없고. 해야 할 거나 후딱 해치우자는 식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에 조금 초조해졌다. 내가 생각했던 분위기는 이게 아닌데. 데이트고 뭐고 뭘 해 봤어야 알지. 연애 쪽으로 본의 아니게 담 쌓고 살았던 지난날들이 원망스러웠다.
“아, 잠깐만.”
계산을 하려고 일어난 순간이었다.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하고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쾌활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넘치는 에너지에 압도당해 휩쓸리듯 통화를 끝내고 나자 계산은 이미 마쳐진 상태였다.
“저기, 정원아.”
“응?”
“전에 나 소개 받기로 한 애랑…… 좀 친해졌는데. 걔가 여기서 가까운 데 있다고 잠깐 들르겠다네. 혹시 괜찮아?”
“응. 난 상관없어.”
소개 받기로 한 애는 얘길 나눠 보니 쿨한 성격이었다. 굳이 남자친구가 필요했던 게 아니었다는 걸 안 뒤로는 편하게 얘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다.
“약속 있어서, 금방 갈 거래.”
살짝 눈치를 보면서 말했지만 고정원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다행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책을 산 후 서점 안에서 기다리면서 메시지를 주고받는데 누가 등을 탁! 치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야!”
“어, 금방 왔네.”
뒤돌아보자 사진으로만 보던 애가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너 보고 가려고 빨리 왔지.”
붙임성이 좋은 듯, 첫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구는 태도 덕분에 원래 알고 지낸 사이 같았다. 사진보다 훨씬 시원시원하고 화려한 느낌이었다.
“어? 우리 학교 유명인!”
고정원을 보고는 삿대질까지 했다. 와 연예인이다, 신기하다, 이런 식의 반응엔 어지간히 익숙한지 고정원은 여유롭게 웃어넘기며 금방 대화를 나눴다.
카페로 들어서자 소개 받은 동기, 황서연은 말이 훨씬 많아졌다.
처음 만나는 거라 어색하면 어쩌나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는지 수다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본인 학과와 교수님에 대한 불평에서부터 주변의 친구들 이야기까지, 쏟아 내는 기세가 대단했다.
얼마 후엔 관심을 돌려 고정원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고정원은 묻는 말에 착실히 대답해 줬고 황서연은 별것 아닌 말에도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좋아했다.
“…….”
솔직히, 기분이 가라앉는 걸 숨기기 힘들었다.
둘이 꼭 소개팅처럼 얘기를 나누는 걸 보고 있으니 내가 끼어든 입장이 된 거 같았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면서 질투 비슷한, 불안한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황서연은 고정원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나를 보러 왔다고 했지만 정작 내게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아, 너 밴쿠버 살았었구나. 근데 내 친구 말 들어 보면 캐나다 애들은 고등학생 애들도 마리화나 하고 그런다던데 진짜야?”
“하는 애들이 있긴 했어.”
“그럼 너도 해 본 적 있겠네?”
“나는 안 했어. 대마초 냄새를 싫어해서. 딱히 흥미도 없고.”
나도 저런 식으로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내가 모르던 시절의 고정원은 어땠는지, 과거에 어떤 일들을 겪었었는지 알고 싶었다. 둘이 있을 땐 거의 주고받은 말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 한 명이 끼자 대화가 활기를 띠는 게 조금 씁쓸했다.
“…….”
때문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무 리액션 없이 그저 냅킨을 갖고 의미 없는 손장난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알아달라는 시위처럼 보일까 봐 걱정되기도 했지만 둘의 대화가 활기를 띨수록 침울해져서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순간 기다란 손가락이 쿡, 내 손등을 찔러왔다. 슬그머니 올려다보니, 고정원이 나를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모른 척 계속해서 냅킨을 뜯었다. 고정원의 손가락은 포기하지 않고 안쪽으로 파고들며 얽어 왔다. 내 손장난을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손끝이 스치고, 부딪히다가 고리처럼 서로에게 얽혔다. 빠져나오려고 해도 금방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간질거리기도 하고 어린애 같은 장난에 그만 푸, 하는 웃음이 터져 버렸다.
“어머 뭐야? 니네 뭐하는 거야?”
황서연의 깜짝 놀란 목소리에 나는 덩달아 놀라서 손을 뺐다.
“헐……. 둘이 이러고 놀아? 장난 아니다.”
별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한 행동을 하다 들킨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귀는 건 아니지?”
아까까지 계속 말만 잘 하던 고정원은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웃기만 했다. 나는 당황해서 뭐라고 변명을 하려다가도 말문이 막혔다.
“웬일이야. 인휘야 너 지금 얼굴 진짜 빨개.”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니까 그렇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둘은 재밌다고 웃는데, 나는 하나도 재밌지가 않았다. 허둥댄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뱉은 게 후회가 됐다.
아, 나 오늘 왜 이렇게 머저리 같이 굴지.
고정원을 만난 시점부터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삐걱대는 느낌이었다. 좋아한다고 자각하고 나니 이런 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여자랑 단둘이 있는 것만 울렁증이 있는 줄 알았더니, 연애 울렁증도 포함돼야 할 것 같았다.
황서연은 앞서 말했던 대로 한 시간 정도만 머무르다 다음 약속 장소로 떠났다. 가기 전, 다음에는 자기 친구랑 넷이서 바다에 놀러가자며 갑작스레 제안하더니 금방 일정을 짜고 확답까지 받아 내서 떠났다. 인정할 만한 추진력이었다.
“우리도 그만 갈까?”
“……응.”
기가 쭉 빠진 것 같았다. 약속을 잡을 때까지만 해도 넘쳤던 기운이 바닥이 나고 녹초가 돼 있었다. 뭐 한 것도 없는데.
“데려다 줄게. 차 타고 가.”
집까지 몇 정거장 안 떨어진 거리였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돌아가면 됐지만 데려다 주겠다는 고정원의 한마디에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이면 좀 더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이 가득 찼다. 나란히 서 있던 고정원과 나는 마주 본 채로 밀착되어 겹쳐져야 했다.
와.
새삼스럽게 엄청 긴장이 됐다. 얘랑 내가 키스하고 더 나아가 이런저런 짓들을 했었다는 게 이제와 놀랍게 느껴질 만큼 바짝 붙은 것만으로 떨렸다.
아니, 이미 거기까지 해 봤기 때문에 더 떨리는 걸지도 몰랐다. 골목에서, 차에서, 모텔에서. 이렇게 가까이 몸이 맞붙었을 때는 전부 키스 할 때뿐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생각이 그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콧김이 세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느낌에 나는 아예 숨을 참아 버렸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밖까지 들리는 건 아닌지 걱정됐지만 심장까지 멈출 순 없으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꾹 감는 게 다였다.
엘리베이터가 층층이 자주 멈춰 서는 바람에 도무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다른 생각이 안 들게 숫자를 세자 싶어서 1부터 차례로 수를 늘려 가는데, 한 7까지 셌을 즈음이었다. 불현듯 귓바퀴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스쳤다.
깜짝 놀라 소스라치며 얼굴을 들었다.
“미안. 밀려서…….”
고정원이 내리깐 음성으로 말할 때마다 귓등으로 숨결이 퍼졌다. 부드럽고 미지근했던 촉감이 입술이라는 걸 확신하고 꿀꺽 목을 울렸다. 스쳤던 부위를 중심으로 아플 만큼 열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숨을 죽이고, 얼굴을 되는 한 반대편으로 한껏 돌렸다.
여기서 흥분하면 넌 사람도 아니다.
나 자신에게 엄포하듯 되뇌며 어서 지하에 도착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덥지.”
차에 오르자 에어컨 바람이 나오며 더운 공기를 식혔다. 나는 그제야 뜨거워진 몸을 의식하고 손부채를 부쳤다.
“괜찮아.”
들리지 않게끔 한숨을 내쉬며 조수석의 시트에 등을 푹 기댔다. 엘리베이터에서 온갖 것들을 참아내느라 기력 소모가 너무 컸다. 허둥대는 티가 나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며 아직까지 열이 고여 있는 귀를 문질렀다. 그리고 힐끔,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
곧장 시선을 회피한 건 생각지도 못하게 눈이 마주쳐서였다.
“피곤해?”
“아니, 그냥 약간?”
지친 게 티가 나가 싶어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너무 세게 누르면 충혈되는데.”
고정원은 타이르는 투로 말하며 내 손목을 감싸 내렸다. 간지러운 자상함에 입이 꾹 다물렸다. 전 같았으면 남자끼리 과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좋아하는 입장이 되고 나니 아무래도 신경 써 주는 하나하나가 싫을 수가 없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수줍어진 나는 뭐라 대꾸하진 못하고 그냥 창밖을 내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그때였다. 다가오는 기척과 함께 확 끼쳐든 좋은 냄새에 몸이 저절로 경직되었다. 단정한 헨리넥 티셔츠에 감싸인 목이 코앞에서 보이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찰칵, 안전벨트의 버클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슬그머니 눈이 뜨였다.
“서비스.”
고정원은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운전석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냥 벨트 매라고 말로 하지. 민망해진 나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이마를 긁적였다.
“너는…….”
“응?”
고정원이 곁눈으로 내 쪽을 보며 기어를 옮겼다.
“아니, 아니야.”
“말해도 돼.”
차가 매끄럽게 회전하며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나는 몸속의 피가 근질거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아니……. 자상한 게 몸에 밴 것 같다고.”
내 말에 고정원은 비율 좋은 입술을 시원스럽게 끌어올려 웃었다. 그리고는 언뜻 흘리는 모양새로 말했다.
“더 자상할 수도 있는데.”
기회가 없네. 하는 뒷말은 더 작게.
“…….”
나는 잠자코 생각에 잠겨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더 자상할 수 있다는 게 나한테 하는 말인지, 기회가 없다는 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캐묻고 싶은 충동으로 목구멍이 간질간질했지만 도무지 자연스럽게 말을 꺼낼 수 없어 망설이다 타이밍을 놓쳤다.
고정원이 한 말을 몇 번이고 곱씹어보는 사이, 어느덧 차는 동네에 도착해 있었다.
벌써 왔네. 쇼핑센터에서부터 집 앞으로 올라오기까지 고작 십오 분쯤 지났을 뿐이었다. 짧은 드라이브를 끝으로 헤어지는 게 아쉬웠던 나는 바로 내리질 못하고 엉덩이를 뭉개고 있었다. 조금 더 같이 있을 순 없는 건가 생각하다가, 용기 내어 이름을 불렀다.
“야, 정원아.”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본심이 입안에 고여 튀어나올 듯 말 듯했다.
“저녁 먹고 갈래?”
아직까지도 운전대에 올라와 있는 커다란 손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얼굴을 올려다보자, 경청하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눈과 시선이 맞닿았다.
“좋아.”
눈이 반달이 되는 환한 웃음에 심장이 기우뚱 쓰러질 뻔했다.
* * *
확실히 나는 또래 남자애들에 비해서 청결하고 부지런한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맞벌이 하시는 부모님과 손가락 까딱하지 않는 누나 밑에서 갖은 살림을 도맡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에 습관만은 제대로 들어 있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자취하러 혼자 나왔을 땐 불편하기는커녕 네 사람 분의 노동이 하나로 줄어든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딱 내 것만 챙기고 내 할 일만 하면 되는데 뭐가 어려울까.
때문에 내 방은 언제 어느 때나 친구들이 들이닥쳐도 여유롭게 맞아 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들이 귀찮기는 했어도, 어질러진 것들을 치우느라 곤란했던 적은 없었다.
그랬었는데.
고정원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어…….”
가장 먼저 시야를 강탈한 건 바닥과 침대 위로 너절하게 늘어진 옷가지들이었다. 뒤집어진 티셔츠, 벗은 모양 그대로 다리 구멍이 훤히 드러난 바지들. 그것뿐이면 차라리 다행일 텐데 얇은 바지에 비칠까봐 갈아입었던 속옷까지 떡하니 나뒹굴고 있었다.
나오기 전에 입을 옷을 고민하느라 난리를 쳤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을 줄이야.
“자, 잠깐만, 나가서, 잠깐 5분만 밖에서 기다려.”
“뭐 어때. 별로 안 더러운데.”
웃음기 밴 목소리에 머리꼭대기까지 후끈해졌다.
“아, 들어오지 마. 잠깐만 나가 있어. 응?”
다급하게 몸을 떠밀며 부탁한 끝에 고정원은 못 이기는 척 나가 주었다.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서둘러 신발을 벗은 나는 바닥에서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속옷에서부터, 허물처럼 곳곳에 늘어진 옷가지들을 서랍 안으로 대충 접어 말아 넣었다.
“못살겠다…….”
거울 앞에 나와 있던 선크림 통이랑 립밤까지, 원위치 그대로 안 보이도록 집어넣었다. 평소 정리하고 나오는 습관이 있어서 깜빡하고 말았다. 오늘은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치장에 신경 쓰느라 뒷정리를 빼먹었다는 걸.
“됐어, 이제 들어와.”
땀이 배어난 등이 후텁지근했다.
“편하게 앉아.”
나는 막히지도 않은 목을 가다듬으며 선풍기를 틀어 주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선 고정원은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터지려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마 우스운 모양새로 뒹굴던 팬티를 본 모양이었다. 차라리 크게 웃기라도 하면 낫지, 시선을 피하며 참고 있으니 더 민망하기만 했다.
“……왜. 뭐.”
불만스럽게 질문 아닌 질문을 하자 고정원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작고, 낮게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역시나 웃음기를 감추지 못한 채였다.
“……아니. 귀여워서.”
귀여…….
들은 말을 곱씹다 말고 황급히 돌아서서 냉장고를 향했다.
“뭐 먹을래? 생각해 보니까 집에 뭐가 없네. 뭐 시켜 먹을까?”
불필요하게 큰소리로 외치며 솟구치려는 열을 억눌렀다.
“사실 배는 별로 안 고픈데. 인휘는?”
점심이랑 카페에 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라 사실 배가 고프진 않았다. 저녁을 먹기에 조금 이른 시간이기도 했다. 어차피 저녁은 구실이고, 같이 있고 싶었던 거뿐이니.
“어, 나도 그렇긴 하네…….”
“대충 때우자. 라면이라도 사 올게.”
“아, 컵라면 있어.”
결국 이른 저녁은 컵라면으로 해결하게 됐다. 밑반찬을 꺼내 소박하게 상을 차리고 앉아 라면을 뜯었다.
메뉴가 초라하긴 했지만 마음은 점심에 연인들 가득한 음식점에서 먹을 때보다 훨씬 여유로웠다. 내가 만든 반찬을 맛있다며 잘 먹는 고정원을 보고 있자니 괜히 뿌듯하기도 하고, 안 먹어도 배가 부른 느낌이 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짧고 간단한 식사가 끝나고 나자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해 둘 다 멀뚱해졌다. 이러다 그냥 간다고 하면 어떡하지. 불안해져서 뭐 할 게 없나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얼마 전에 노트북으로 다운받아 둔 영화들이었다.
“영화…… 다운받아 둔 거 있는데. 볼래?”
맥주도 마시면서.
옵션을 덧붙이며 어필했다. 나름의 유혹인 셈이었다. 집에 가지 말고 같이 있자는.
“응, 볼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노트북을 끌어왔다. 잽싸게 냉장고에서 맥주를 두 캔 꺼내와 하나는 고정원에게 건네며 취향을 물었다.
“장르 뭐가 좋아?”
“아무거나 다 좋아. 인휘가 골라 줘.”
전부 흥미 있는 영화들이긴 했지만 고정원하고 보기에 뭐가 가장 좋을까 고민이 됐다. 로맨스는 잘못하면 지루하고, 스릴러 정도가 적당할까. 하지만 결국 고른 것은 평점이 꽤 높았던 호러 영화였다. 공포물을 보고 무서워하는 고정원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영화야?”
“어, 공포물인데. 이거 되게 잘 만들었대. 너 무서운 거 괜찮아?”
“그냥, 못 보는 정돈 아니야. 잘 만들었다니까 보고 싶다.”
푸쉭, 캔 맥주를 따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하나도 안 무서워하고 잘 보면 재미없을 것 같은데. 나는 시커먼 속을 품은 채 바로 영화를 재생시켰다.
“본 건 아니지?”
“응. 안 봤어. 평소 공포물 잘 안 봐서.”
귀신이 튀어나오는 장면에서 깜짝 놀란 고정원이 나한테 안겨 드는, 유치하고 불순한 상상을 하면서 단정한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괜히 군침 같은 게 고여서 몇 번 목울대가 울리기도 했다.
막상 영화가 시작되니, 공포물 특유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분위기가 전반에 깔려 있어 맥주를 마시는 것도 잊고 말없이 집중했다. 놀랄 만한 장면이 초반부터 몇 번이나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둘 다 아무런 감탄사도 없이 덤덤하게 화면에 시선을 둔 채였다.
중반쯤으로 넘어가자 본격적으로 괴기스러운 장면들이 이어졌다. 한 번 본 것만으로 눈꺼풀에 새겨질 것처럼 강렬한 장면들과 더불어, 방안을 가득 채운 음산한 사운드로 인해 연달아 소름이 끼쳤다.
“……안 무서워?”
뒤늦게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슬쩍, 고정원을 쳐다봤다.
“무서워.”
아무런 표정도 없이, 눈 한 번 가리지 않고 묵묵하게 영화를 보고 있으면서 입으로만 무섭다고 하니 믿기지가 않았다. 나보다 잘 보는구만. 기대했다가 맥이 빠져서 툴툴거리는 투로 말했다.
“하나도 안 무서워 보여.”
그러자 고정원이 갑자기 내 손을 끌어당겨 제 손바닥에 대었다. 축축한, 땀이 진득하니 배어 있는 손바닥을 확인한 나는 그만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웃었다.
“여기도.”
팔이 더 깊숙이 이끌리며 몸이 기울었다. 두툼하고 따스한 감촉이 손바닥에 감겼다. 두근, 두근, 두근……. 빠르고 힘찬 맥박 소리가 피부를 타고 전해져 왔다.
단단한 가슴팍과 커다란 손 사이에 끼어서 모든 감각을 느낀 나는 돌연 뜨거워지는 뱃속을 느끼며 잡혔던 손을 빼내었다.
“우와…… 그러네.”
빠르게 뛰던 고동도, 두텁게 짜인 가슴의 근육도 모두 지나칠 정도로 생생했다. 아무리 자극적인 장면과 소리가 화면을 통해 흘러나와도 더 이상 집중이 안 될 만큼.
“무서우면, 손 잡아 줄까?”
사심대로 지르긴 했는데, 내가 말해 놓고도 웬 티 나는 수작인가 싶었다. 쌍팔년도도 아니고.
“……싫음 말고.”
싸한 정적을 참지 못해 소심하게 철회하는데, 이어진 고정원의 대답이 의외였다.
“그래 주면 고맙지.”
나는 화끈거리는 걸 참고 고정원의 손을 잡아 쥐었다. ‘자, 됐지?’ 마치 선심 쓰는 것처럼 말하자 고정원도 어이가 없었는지 작게 웃었다. 민망하고, 도망치고 싶고, 근데 너무 좋고. 또 설레고. 복합적인 감정 상태로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영화를 무성의하게 눈에 담았다.
단순하게 붙들었던 손은 고정원이 고쳐 쥐면서 마디마디 파고들어 깍지 낀 형태가 되었다. 딱딱하고 굵은 손가락들이 마디마다 버겁게 가득 찼다.
놀래키는 하이라이트 씬이 나올 때면 맞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꽉 움키는 힘은 때때로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강하기도 했다.
“…….”
높은 체온으로 인해 손바닥 안은 덥고, 축축했다. 손가락의 모든 면면까지 맞물리고, 미세한 변화도 바로 느껴질 만큼 밀착된 상태. 모든 신경 세포가 한곳으로 쏠린 듯했다.
세게 움켜쥐어질 때면 왜인지 뱃속도 꽉 쥐어지는 기분이었다. 상대는 그저 무서워서 붙드는 것뿐인데 과민하게 반응하는 몸 때문에 나중엔 맞잡은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혼자 몰래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죄악감마저 들었다.
“너 일부러 이런 거 골랐지.”
화들짝 놀라서 고정원을 쳐다봤다. 속마음을 들킨 건가 싶었다.
“어……?”
고정원의 크고 기다란 눈이 가느스름하게 접혔다.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나 집에 가기 무서우라고.”
“아…….”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눈을 깜빡이다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긴장이 풀려 맥없이 웃는 사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을 올리고 있었고, 스르륵, 붙잡던 손도 풀려났다. 틈틈이 먹은 맥주는 텅 비어서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밤에 혼자 운전하면 얼마나 무서운데.”
영화가 어지간히 무섭긴 했는지 고정원은 답지 않게 우는 소리를 냈다. 커다란 덩치로 엄살을 부리는 게 귀여워 보여서 자꾸만 웃음이 샜다.
“그냥 자고 가. 어차피 방학인데.”
“그러면…… 나야 좋은데.”
생각 없이 말해 놓고 갑자기 회로가 끊긴 것처럼 뚝, 움직임이 멈췄다.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밤까지 같이 보내는 건 계획에 없었는데. 뒤늦게 이런저런 생각들이 밀려들었다.
“그럼, 칫솔이랑 필요한 것들 좀 사 올게.”
“어? 아, 응…….”
생각이 많아진 나를 두고 고정원은 밖으로 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홀로 남겨지자, 뒤늦게 비좁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좁은데…… 여기서 같이 잘 수 있나?
멍하니 서 있다가, 아까까지 서로에게 엉켜 있던 한쪽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까지 습한 여운을 머금고 있는 그곳은, 답답하게 구속되던 느낌이 가시질 않고 있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릴 만큼 세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폈다. 하지만 여전히 설명하기 힘든 저릿함이 남아서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하아아…….”
염소 목소리처럼 떨리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고정원이 사 온 간식들을 먹으면서 예능 몇 편을 다운받아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영화부터 시작해 연달아 이것저것 본 탓에 눈은 잔뜩 피로했고, 더 이상 할 만한 게 남아 있지 않았다. 시끄러운 노트북을 종료시킴과 동시에 까마득한 정적이 찾아왔다. 이제 어떡하나. 멀뚱멀뚱 눈치를 보며 앉아 있다가 눈이 마주쳤다.
“……음, 이제 그만 잘까?”
“그래.”
먼저 씻으라고 말하자 고정원은 사온 세면도구를 챙겨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얼마 안 있어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혼자 남겨진 나는 얼굴을 감싸고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자고 가라고 쉽게 뱉어 놓고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신경 쓰이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손님용 이불도 없고, 좁기도 너무 좁고. 전에 몇 명씩 몰려와 잘 때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들이 지금은 문제가 됐다.
설마 나 코 안 골겠지? 아, 자다가 혹시라도 생리현상…… 안 되는데.
생각할수록 별 게 다 걱정이었다. 연인들은 대체 어떻게 그렇게 같이 먹고, 자고, 지내고 하는 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마음이 어수선해져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한참을 방황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뒤돌아보자 욕실에서 나오고 있던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막 씻어서 말간 얼굴에 물기가 남아 촉촉한 모습으로, 목 언저리엔 수건을 걸치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혹시 또 어디 아파?”
“……어, 아니?”
원래 입고 있던 옷이 아닌 다른 티셔츠로 갈아입은 상체가 보였다. 내 걸 빌려 입기엔 체격 차가 너무 나서 나갔을 때 새로 사온 모양이었다. 얇은 재질에 달라붙는 핏, 그리고 아무 무늬 없는 원단의 면 티였다. 발달된 어깨라든가 넓은 가슴팍, 등, 몸의 굴곡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얼굴이 빨간데? 열나는 거 아니야?”
역시 모델 같다.
“모델…… 아니, 뭐래, 청소 하느라 더워서 그래. 방 치웠더니.”
혼자 생각하던 헛소리가 입 밖으로 나간 탓에 얼굴이 불타기 시작했다. 의아해하는 고정원의 얼굴이 보였다.
“나도 씻고 올게.”
수습이 안 돼 결국 후다닥 욕실로 대피했다. 쾅, 문을 닫아 놓고 나서 문에 기대 심호흡을 했다.
미쳤나 진짜.
여자 몸도 이렇게 넋 놓고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찬물을 틀어 얼굴에 끼얹으면서 떨치려는데, 하필이면 전에 한 번 모텔에서 봤던 고정원의 벗은 상체가 떠오르면서 한 번 더 훅 달아올랐다.
자연스레 모텔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연달아 떠올랐고, 덕분에 화장실에서 빠져나온 건 한참 뒤에나 가능했다. 그 후엔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챙겨 와 평소보다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아직 한여름도 아닌데 찬물로 몸 구석구석을 식혔다. 또 이상한 말실수나 행동을 하게 될까 봐 잡생각들을 몰아낼 필요가 있었다.
시간이 꽤 흐른 뒤 진정이 되어 나가자, 방안에는 음악 소리가 잔잔하게 울리고 있었다. 벽에 기대 앉아 기다란 다리를 늘어뜨리고 있는 고정원이 보였다. 손에는 익숙한 책이 들려 있었는데, 내 방에 있던 책 중 하나였다.
“미안. 허락 없이 봤는데 괜찮아?”
“어. 아무렇게나 봐.”
집에 나오면서 들고 온 꽤 유명한 무협 소설 시리즈인 듯했다. 구석에 박아 놔 있는 줄도 잊고 있었는데 그걸 발견했을 줄이야.
간신히 변태스러운 열기를 식힌 나는 최대한 고정원의 몸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선풍기 앞에 앉았다. 바람을 맞으며 수건으로 머리를 털다가,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무협 소설 좋아해?”
“……음. 읽으면 재밌긴 해.”
딱히 좋아한다는 투는 아니었다. 무협을 좋아할 거 같은 취향은 아니라서 수긍이 갔다. 고전이면 모를까. 고정원의 취향에 대해 궁금해지면서 방안에 틀어 놓은 음악에 신경이 미쳤다.
“올드팝 좋아하나 봐.”
재생된 리스트는 가까운 90년대도 아니고 한 40, 50년대쯤 유행했던 곡들이었다.
“응.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자주 들으셔서. 영향받았나 봐.”
취향에 대한 대화들이 이어졌다. 고정원은 주로 옛것을 좋아했고, 나는 최신의 것일수록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
서로 다른 점에 재미를 느끼며 대화하는 사이 젖은 머리카락이 다 말랐다. 활짝 열어젖힌 창문에선 다행히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위에서 자. 나는 더워서 아래서 잘게.”
손님을 딱딱한 바닥에서 재울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통보 식으로 말하며 침대를 정리해 주었다. 아무리 허접한 침대라도 맨바닥보단 나을 터였다.
“인휘 네가 침대에서 자. 난 바닥이 더 편해.”
“아니, 더워서 그런다니까? 나 원래 요즘엔 여기서 자.”
하여간 매너 넘치는 고정원 아니랄까 봐 배려를 해 줘도 받아먹질 못했다. 이렇게 가다간 밤을 샐 것 같아서 그냥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고정원은 조금 곤란한 듯이 웃었다.
“그럼…… 침대 접고, 바닥에서 같이 자자.”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같이 자자는 말에 놀라 얼이 빠져서 있는데, 고정원은 일어나서 척척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침대 위의 요를 걷어내고 간이침대를 접어 세운 뒤, 마지막으로 넓어진 방바닥에 아까 걷어 냈던 이불을 깔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자기에 충분한 공간이 생겨났다.
그 위로 올라가 자릴 잡은 고정원이 모로 누우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리 와.”
툭툭, 커다란 손이 재촉하듯 이불을 두드렸다.
“……응.”
더 이상 내뺄 곳도 없다는 걸 느꼈다.
“불, 끄고 와. 여기 켜 둘 테니까.”
침대 언저리에 있던 스탠드 등이 켜졌다. 이리 와. 불 끄고 와. 별거 아닌 말들인데 듣는 입장에선 왜 이렇게 가슴이 덜컥거리는 건지. 우물쭈물하다가 더 버틸 수도 없을 때쯤, 불을 끄고 시트 위로 올라섰다.
“나는 책 좀 더 읽다 잘게.”
“……그래.”
무협 책이 생각보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는 일부러 시트가 깔리지 않은 끄트머리 쪽에 누웠다. 왜 거기 눕냐며 이쪽으로 오라는 말엔 바닥이 시원해서 그렇다는 변명을 했다. 곧이어 음악이 꺼지자 안에서 생겨나는 잡음들이 선명해졌다.
“음악. 켜도 되는데.”
“그럴까, 그럼?”
숨소리가 다 들릴 만큼의 조용함이 부담스러워서 한 말에 다시금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번엔 팝이 아닌 클래식이었다. 차분한 선율 사이로 조심스럽게 책장 넘기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눈을 감고 생각을 몰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기척도 그렇고 단둘이 누워 있다는 사실이 의식돼서 편안해지지가 않았다.
소리 나지 않게 몸을 돌려 누웠다.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뜨고,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 고정원을 시야에 담았다.
“잠이 안 와?”
시선을 느꼈는지 고정원이 책에서 눈을 떼고 물어 왔다.
“어……, 좀 그러네.”
조명을 꺼 주겠다는 말에 나는 불 때문이 아니라고 서둘러 답했다. 요새는 새벽에야 잠이 든다고 말하자 고정원이 어렴풋하게 웃으며 자기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혹시 뭐 할 말 있어?”
책을 아예 접어 내려놓은 고정원이 편편하게 누였던 몸을 내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려는데, 불현듯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내내 맘에 걸려서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기는 있었다.
“너…… 그 전에 좋아한다던 우리 학교 여자애는, 어떻게 되고 있어?”
아직도 좋아해? 하고 덧붙여 물었을 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나 버린 바람에 ‘그냥, 대답 안 해 줘도 되고’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로 얼버무렸다.
“아니. 식었어.”
되게 조심조심 물었는데 정작 대답은 허무할 만큼 간단했다.
“……식었다고?”
“응.”
식었다니. 기쁜 소식인 건 확실하지만 잘 믿기지가 않았다. 마음이 전보단 덜하더라도 아직 미련은 있을 줄 알았는데.
“이유, 물어봐도 돼?”
고정원의 시선이 잠시 다른 곳을 향했다.
“……중간에 다른 사람한테 마음이 가서.”
가슴이 또 한 번 덜컥거렸다. ‘다른 사람’이라고 말할 때 내게 돌아온 절묘한 시선의 타이밍 때문에 더 그랬다.
모른 척하고 물었다.
“그럼, 그…… 다른 사람은……?”
“……잘 안 돼서. 친구로 지내기로 했어.”
여기서 ‘다른 사람’은 나다. 확신이 듦과 동시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냥 외로워서 사귀기로 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나한테 마음이 생겼던 거구나. 뒤늦은 깨달음이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고 아무튼 이상했다.
“너무 재미없는 얘길 했네. 이제 진짜 불 끄고 자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날 두고 고정원이 뒷수습을 했다. 얼마 안 있어 머리맡을 밝히던 불그스름한 스탠드조명이 꺼지면서 방안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잘 자.”
“……잘 자.”
인사를 하고 돌아누워 눈을 감았다.
당연하게도 잠이 올 기미는 없었다. 컴컴한 방 한구석을 응시하는데 이유 없이 익숙하던 것들이 전부 낯설게 느껴지고, 불안한 한편으로 기대감이 차오르는 기묘한 느낌이 있었다.
“인휘야.”
벽을 보고 있다가 부르는 목소리에 놀라 한쪽 다리가 흠칫, 떨렸다.
“그쪽으로 가도 돼?”
“어……?”
끝까지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뒤돌아보려는 순간, 강한 힘으로 끌어안겼다.
“왜, 왜……!”
심장이 몸 밖으로 도망갈 것처럼 뛰어 댔다. 배 부근에 둘린 고정원의 단단한 팔이 느껴졌고 등 전체에 밀착된 견고한 가슴팍과 복부 또한 느껴졌다. 희미한 살 냄새와, 스킨향도 풍겼다.
뭐지, 뭐지, 산만해지는 머릿속으로 최대한 이성적인 사고를 해 보려 노력했다.
혹시 아직 나한테 마음이 남았나? 다시 사귀자고 하려는 건가? 고백? 짧은 찰나의 순간에 여러 생각들이 스쳐 갔다.
“무서워서.”
“뭐?”
“아까 봤던 영화 생각났어.”
빠른 속도로 정수리까지 치솟았던 열기가, 순간 다른 의미로 거세게 불 지펴졌다. 고백은 무슨. 지나치게 앞서 나갔단 걸 자각하고 창피함에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사실 예전에 무서운 영화 보고 불 켜고 잔 적 있어.”
나 겁 많지. 부끄러운 듯이 말하며 고정원은 그 큰 몸을 더욱 가까이 밀착해 왔다.
영화 볼 때 고정원이 무서워하며 안겨드는 상상을 해 보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인휘 심장 빨리 뛴다더니 정말이네.”
복부에 감겨 있던 손이 점점 위로 올라오더니 가슴팍을 더듬어 댔다. 그렇잖아도 놀라기도 하고, 의식할 수밖에 없는 사람 탓에 바쁘게 뛰어 대고 있던 심장이 박동에 박차를 가했다.
“……더워.”
곤두서 있는 줄도 몰랐던 가슴팍의 돌기에 따스한 손바닥이 스치면서 의지와 상관없이 등줄기가 오그라들었다. 직격으로 뜨거워진 몸을 느낀 나는 다급하게 두터운 팔목을 붙들어 아래로 끌어내렸다.
“더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낮은 목소리에 숨결까지 더해지자 그 근처에서부터 찌릿한 소름이 내달렸다.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닿아 있는 모든 부분이 갑갑하고, 또 기분 좋게 달콤해서 자꾸만 한숨이 흘러나왔다.
“괜찮아. 이제.”
덥다고는 했지만 차마 떨어지라 말하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자연스럽게 굳은 자세로, 나는 여전히 고정원의 팔목을 붙들고 있었다. 고정원이 조금씩 뒤척일 때마다 손에는 빠듯한 힘이 들어갔다.
“불편하면 말해.”
“……응.”
대답하면서도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란 걸 알았다. 나는 어서 고정원이 먼저 잠들기만을 바라며 살포시 눈꺼풀을 내렸다.
밤이 길어지리란 예감과 다르게 얼핏 눈을 떠 보니 푸르스름하게 동이 트는 새벽녘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금방 흐른 것에 한 번 놀라고, 고정원에게 팔베개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
눈앞에 있는 고정원이 현실감이 없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새벽의 희끄무레한 빛이 내려앉은 얼굴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아주 천천히 팔을 들어 고정원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정신이 다 깨어나지 않은,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는 상태라서 할 수 있는 대담한 행동이었다.
뺨을 감싸고 그대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들릴 듯 말 듯한 깊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얘를 정말 많이 좋아하는구나. 낯 뜨거울 법한 자각이 새벽의 차분한 기운과 어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인식되었다.
나는 고정원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는데, 인정하고 난 순간부터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자각하기 전엔 몰라서 헤맸지만 이젠 아니까 더 고민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가볍게 고갤 들어, 뜨거운 입김을 쏟아내는 곳으로 가만히 다가갔다. 짧게 입술끼리 스쳤다. 아쉬움에 다시 한 번 더 길게,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뽀뽀도 키스도 아닌, 어중간한 무언가처럼.
“하아…….”
긴장이 되긴 했는지, 떨리는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에 가르쳐 준답시고 그렇게 대담한 키스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입을 맞출 수가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랬었다니.
우리가…… 그랬었다니.
다시 베기엔 고정원의 팔이 아플 것 같아서 바닥에 머리를 대고 뒤돌아 누웠다. 뒤늦게 잠든 사람에게 해선 안 되는 행동을 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뭐 어떤가 싶었다. 어차피 사귀게 될 텐데.
고정원이 감정을 정리했다고 해서 이젠 늦은 게 아닐까 하는 낙담도 했었다. 하지만 서로 타이밍이 엇나갔을 뿐이다. 앞으로 더 많이 노력할 생각이었다. 내게 마음이 갔었다는 얘길 곱씹어 볼수록 희망과 가능성을 느꼈다. 한 번 이어져 봤으니 두 번은 더 쉽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예감이었다.
눈을 감았다. 등 뒤의 온기와, 비좁았던 방이 더할 나위 없이 아늑하게 느껴지면서 입가가 헤실하게 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