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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디데이 (2/30)

2. 디데이

잠을 설치고 일어났더니 등 전체가 뻐근했다. 창밖의 날씨도 흐리고, 습도가 높은지 살갗에 닿는 공기가 꿉꿉하기 그지없었다.

“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다시 침대 위를 굴렀다. 이대로 다시 한바탕 자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큰일을 앞둔 긴장감과 하기 싫은 숙제를 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기분은 흐린 하늘처럼 음울한 상태였다.

“어떡하냐고 진짜…….”

다시 한 번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냥 오늘 아프다고 하고 약속 취소할까. 순간 비겁한 유혹이 들었지만 어젯밤부터 확인하듯 몇 번이고 말을 걸어 오던 고정원의 메시지를 보니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모르겠다 나도…….”

스스로의 대책 없는 허세가 이렇게 감당하기 힘든 결과를 초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만을 철석 같이 믿고 있다는 고정원의 그 순진한 태도를 보고 있자면 거짓말로도 끝까지 책임을 져 줘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의무감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자꾸 무리를 하게 됐다.

사실 이제 와서 해결이고 뭐고 이미 늦어 버린 상태였다. 오늘은 고정원이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침 받기로 한 바로 당일.

디데이였다.

* * *

“안녕.”

멍하니 상영 중인 영화 목록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눅눅하던 바깥 공기와 달리 서늘한 에어컨 바람으로 쾌적한 영화관의 한구석에서 나도 모르게 늘어져 있다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일찍 왔네.”

웃고 있는 고정원이 보였다.

“어, 너도 일찍 왔네.”

괜히 민망해져서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돌렸다. 평소보다 신경 쓰고 나온 고정원을 보자, 오늘 만남의 의미라든가 목표 같은 게 뚜렷하게 상기되었기 때문이었다.

뭘 입어도 구려 보여서 결국 입던 대로 입고 나온 나와 달리, 고정원은 옷 자체는 캐주얼하고 편안했지만 일부러 안 꾸민 듯한 느낌으로 신경 쓴 티가 났다. 머리도 올렸는데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공들여 만진 느낌이었다.

여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나 나이든 어르신들도 한 번씩 쳐다보는 시선이 꽤나 노골적이기도 했다.

“오늘, 신경 좀 썼네?”

“……티 났어?”

고정원은 민망한 것처럼 눈을 피하며 웃었다. 그리고 내 등을 한 번 가볍게 쓰다듬어 내리면서, 흘리듯 말했다.

“데이트니까.”

데이트.

오늘의 행위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만드는 단어였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어 황급히 휴대폰에 시선을 박았다.

“그럼, 들어갈까?”

상영관을 향하여 발걸음을 뗀 순간 고정원의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아랫배부터 힘이 들어갔다. 만난 순간부터, 이런 식의 은근한 스킨십이 이어지고 있었다.

러닝 타임의 중반쯤부터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내내 지루하기만 한 탓이었다. 뻔한 설정과 전개부터 해서, 상영 첫째 날만 아니었다면 넘쳐나는 악평으로 눈여겨보지도 않았을 영화였다.

에어컨은 또 왜 이렇게 온도를 낮게 설정했는지, 사온 콜라를 입에 댈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추웠다. 요새 계속 잠을 설쳤기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은 영향도 있는 것 같았다.

아아 지루해 죽겠네.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얼마간 졸았는지. 꾸뻑, 떨어질 뻔한 고개가 다시 일으켜졌을 땐 한쪽 어깨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

어이가 없어서 비식,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고정원 또한 내 어깨에 머리를 댄 채,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곤한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얘도 이렇게 영화관에서 졸긴 하는구나.

평소 캐릭터를 생각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어지간히 신선한 느낌이었다. 자신을 평가해 달라며 가상 데이트를 명목으로 만난 놈이 영화관에서 기껏 한다는 행동이 숙면이라는 것도 우스웠다.

“음…….”

고정원이 커다란 몸을 뒤척이자, 낮은 신음이 영화관의 빵빵한 사운드에 묻혀 흘러나왔다. 그리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좀 더 깊숙하게 피부를 눌러 왔다.

“…….”

혼자 실소하다 말고 느닷없이 몸이 경직되며 긴장된 것도 그때였다. 나는 돌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마치 폭탄이 터지기라도 할 것처럼 전신이 뻣뻣해지고 말았다.

좋은 향기가 미미하게 코끝을 간질이는 게 느껴졌다. 차마 움직이진 못한 채 어색하게 눈동자만을 굴려 옆을 힐끔거린 순간, 중첩된 팔걸이에 올라온 고정원의 팔 위로 내 팔 또한 얹혀 있는 걸 발견했다. 아마 잠결에 올린 모양이었다.

눈으로 확인한 탓일까. 갑자기 상대의 체온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맞닿은 팔과 손바닥, 그리고 내 목덜미 근처에 있는 뺨 같은 게.

간지럽기도 하고 불편해서 그냥 몸을 일으켜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그럴 수가 없어서 최대한 거북함을 참으며 손끝만 꼼지락대고 있었다.

맞닿은 팔이라도 내리기 위해 천천히, 손끝부터 움직였다. 그런데 그게 어떤 자극이 되었는지 가만히 놓여 있던 고정원의 손이 움칠거리기 시작했다. 깼나 싶어서 움직임을 멈춘 순간, 부드럽게 파고든 힘에 의해 손이 붙들렸다.

나는 놀라서 어깨를 떨었다.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은 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너 깼어……?”

고정원은 묵묵부답이었다. 다만 팔걸이 위에서 마주 잡힌 손의 힘만이 완고했다.

“음…….”

잠꼬대처럼 신음한 고정원이 다시금 몸을 뒤척였다. 여전히 깍지마다 서로의 손가락이 엉킨 채였다.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고른 숨소리가 여전한 걸 보아 잠결에 한 행동이라고밖엔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

에어컨의 찬바람에 벌벌 떨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등줄기가 후끈해지며 땀이 배어 나왔다. 까마득한 구속감과 함께, 지나치게 밀착된 자세 덕에 상대의 냄새라든가 사소한 숨소리마저 의식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한숨조차도 마음대로 쉬기 힘들었다.

고정원은 그 상태에서 이따금씩 고개를 뒤척였고, 그럴 때마다 나는 숨을 참아야 했다. 연한 감촉의 입술이 목덜미에 짓눌리듯 닿았을 땐 나도 모르게 흔들어 깨울 뻔했으나 이내 떨어져 나가게 되면서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졸음은 진작에 달아나고 없었다.

마주 잡은 손은 잠시도 풀어지지 않은 채, 고문과도 같은 러닝 타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야. 고정원…… 일어나.”

극장 안에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 나가기 시작하자 그제야 나는 고정원을 흔들어 깨웠다.

“으음…….”

조금 흔든 정도론 잠이 깨지 않는 모양이라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콱 주어 꼬집었다.

“응…….”

무겁게 잠긴 목소리가 귓전에서 들렸다.

“일어나. 영화 끝났어.”

고정원은 겨우겨우 내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

그리곤 상황 파악을 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낮은 탄식을 흘렸다.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간 영화관을 한번 휘 둘러본 고정원의 시선이, 마지막엔 마주 잡고 있는 우리의 손에 머물렀다.

“어…….”

내가 먼저 붙든 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해져서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잽싸게 손을 뺐다.

“네가 자다가 잡은 거야.”

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변명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눈치가 보였다.

“미안.”

고정원은 조금 멍한 얼굴로 사과를 했다. 아직까지 팔걸이에 놓인 손등 위로는 아까 내가 깨우느라 만든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상황이 뻘쭘해서, 차라리 대화를 나눌 필요 없는 상영 중에 깨울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주, 숙면을 하던데?”

어색해서 일부러 농담을 던졌더니 고정원이 한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말했다.

“밤에 잠을 설쳤거든.”

“…….”

왜? 하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나처럼 오늘 만나는 게 긴장돼서 설친 건 아닐 것 같아서.

“코도 골더라 너.”

“거짓말하지 마.”

“진짠데?”

“하……. 억울해.”

고정원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아까까진 민망해 하는 것 같더니, 지금은 어째 이 상황이 즐거워 보였다.

“나 되게 조용하고 얌전하게 자.”

“네가 어떻게 알아? 잠들었으면서.”

억울한 듯이 ‘아……’ 하고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고정원은 아까까지 눈가를 가리던 손으로 이제는 본인의 가슴께를 매만지고 있었다. 단정한 손톱 끝을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는데 퍼뜩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우리 여행 갈래?”

“어?”

“일박으로. 코 안 곤다는 거 증명해야지 나 이대론 억울해서 밤에 잠도 못 자겠는데.”

“…….”

꼭 단둘이 가자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냥 지나가는 소리일 확률이 높았고, 우물쭈물하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나는 ‘뭐 그러든가’ 하고 흔쾌히 대답했다.

“……정말?”

마주한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어? ……어.”

자기가 가자고 해 놓고 놀라는 건 또 뭔가. 고개까지 끄덕여 대답했더니 고정원은 눈가를 누그러뜨리며 웃었다.

“여행, 좋아해?”

나는 영화관 바닥에 깔린 푹신한 카펫에 시선을 떨군 채 ‘뭐 항상 좋지 여행이야…….’ 하고 어물거렸다. 남자끼리 이런 식으로 빤히 쳐다보면서 막 간지럽게 웃고 그러는 게 아직도 잘 적응이 안 됐다.

“벌써부터 기대된다. 친구랑 여행 가 본 지 오래 돼서.”

“…….”

가볍게 수락한 건데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혹시 그럼 정말 단둘이 가자는 소린가?

“근데, 누구누구랑……?”

“응?”

“너랑…… 나랑만?”

그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고정원은 잠시간 뜸을 들였다.

“둘만 가면 더 좋고.”

농담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는 멘트인데,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나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슬슬 배고프지. 뭐 먹으러 가자.”

고정원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나면서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원래부터 자잘한 스킨십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좀…… 뭐랄까, 아무튼 느낌이 묘했다. 오늘 우리가 만난 목적이 평범치 않다 보니 사소한 스킨십도 평소의 배로 의식되는 것 같았다.

나는 뒤따라 일어나며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상영관은 휑하게 비어 우리 둘밖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고정원이 말했던 ‘처음부터 끝까지’의 ‘처음’이 일단 데이트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 사이와 ‘끝’에 대체 뭘 해야 할지, 어떤 타이밍에 할지는 미지수였기 때문에 나는 시시때때로 긴장을 하고 있었다. 내가 리드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중간중간 어드바이스 같은 걸 해 줘야 하는지. 대체 뭘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가르쳐 줘야 하는지.

영화관에서 카페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였다. 과하게 긴장하고 있었어서 피곤했는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뜬 나는 고정원이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와 있는 걸 보고 ‘그렇고 그런’ 타이밍이란 것을 눈치챘다. 실전으로 내게 키스를 해 볼 생각인 듯싶었다.

확실히 뜬금없고 급작스러운 데다, 여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일단 끝난 뒤에 알려 줄 생각이었다. 나름 생각이 있어서 하는 행동일 텐데 끊어 내고 면박을 주면 그렇잖아도 떨어져 있는 자신감이 더 하락할지도 모르니까.

갑작스러운 진도에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눈을 감았다. 모르긴 몰라도 연애를 많이 해 본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는 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눈을 감은 내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땐 ‘인휘야 도착했어.’ 하는 산뜻한 목소리와 함께 달칵 열리는 문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아…….

혼자 착각해서 앞서 나갔다는 걸 깨닫고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식은땀이 찔끔 밸 정도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계속 고정원이 뭘 할지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었더니 결국 이렇게 폭주하고 말았다.

쪽팔려 미치겠네.

아무렇지 않은 척 차에서 내려 고정원의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방금 막 생성한 흑역사를 잊어버리듯 두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식사 때도 나는 내내 이 이후에는 뭘 하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서 음식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상대가 하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 자꾸만 흘려들었고 그 때문에 고정원이 풀이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인휘야.”

“응?”

“내 얘기 재미없지?”

“아니? 완전 재밌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야.”

괜히 찔려서 강력하게 부정했지만 고정원은 이미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눈치채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했다.

“내가 이래서 차였나 봐.”

난데없는 자학이었다.

“아, 아니…….”

죄책감마저 느낀 나는 그때부터 고정원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서 진땀을 빼야 했다. 내가 이런저런 화제를 먼저 꺼내고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하자 그래도 조금씩 풀리는 기색이 보였다.

“원래 이렇게 잘 삐지진 않아, 나.”

식사가 거의 끝나고, 고정원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그렇게 말했다.

“속 좁아 보였지?”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건데 왜.”

“인휘는…… 정말 착하네.”

“…….”

착하네.

어렸을 땐 종종 듣던 소리였다. 드센 누나 밑에서 주눅이 들어 있다 보니 극적인 대비 효과로 남들 눈엔 충분히 그렇게 보일 만 했으리라고 스스로도 납득하는 바였다.

새삼스러운 말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별로 듣기 좋아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 이후로 오랜만에 듣는 그 말이 이상하게 전처럼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멋쩍을 뿐이었다. 객관적으로 난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니까.

“착한 사람이 내 이상형인데.”

스쳐 지나가듯 덧붙여진 말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 그래?”

방금 건, 굳이 덧붙일 필요 없는 말 아닌가.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아무렇게나 대꾸를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정원과 함께 있다 보면 종종 느끼게 되는 ‘흘리는 말과 행동’이 바로 저런 것이었다. 남자에게도 예외가 없는 걸 보아 별 다른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고 그저 성격인 걸 알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듣는 입장에선 그게 아니었다. 아니면 이것도 일종의 연습선상의 립서비스인 건가.

계산을 하려고 서둘러 지갑을 꺼낸 순간, 뒤따라와선 먼저 카드를 내민 고정원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방금 영화도 그렇고 식사까지 고정원에게 지불하게 한 게 미안했다. 눈치를 보며 현금을 주려고 했더니 ‘다음에 사 줘.’ 하는 말과 함께 거절당해 우물쭈물하며 도로 넣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기분을 회복했는지, 고정원은 전처럼 눈꼬리를 접어 가며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저, 우리, 이제 어디 가……?”

주차된 차를 향해 나란히 걸어가면서 물었다. 하늘은 아침보다도 어두웠고,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처럼 음산했다. 확실히 데이트를 하기에 좋은 날은 아니었다.

“아까 내가 밥 먹을 때 얘기 했는데. 역시 안 듣고 있었구나.”

“……미안.”

눈치가 보여서 사과했더니, 고정원은 살갑게 웃으며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건조한 손바닥이 뒷목을 쓸고 지나가자 장마철처럼 후텁지근한 기운이 느껴졌다.

“전시회 보러 가자. 인휘 너 사진에 관심 많다고 한 거 생각나서 알아봤더니 마침 좋은 게 있어서.”

“아……. 기억하고 있었네.”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평범한’ 데이트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이후엔 뭘 하게 될지 혼자서 이리저리 상상하고 긴장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하…….”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도 모르고 랜선이 불날 정도로 몇날 며칠 검색하여 얻은 ‘그렇고 그런’ 지식들을 달달 외우던 자신이 한심하고 저급하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아, 근데 여긴 그냥 걸어가는 게 더 가깝겠다.”

모바일로 위치를 확인하던 고정원의 말을 따라, 우리는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뒤에서 차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발견한 고정원은 나를 끌어당겨 안쪽으로 걷게 했다. 나는 괜스레 휑한 목 주변을 손으로 쓸었다. 보호받는 느낌이 민망했지만 오늘의 역할은 ‘여자’로서 고정원을 평가해 주는 것이니 민망해 할 거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툭, 툭.

어깨에 닿는 차가운 감촉과 함께 땅을 적시기 시작한 빗줄기가 눈에 보인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비 온다.”

내리고 있다는 걸 인식하자마자 순식간에 굵어진 빗줄기가 후두두둑 떨어졌다. 정수리에 닿는 굵직한 차가움이 아프게 느껴질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다.

“으아……!”

하필이면 주변엔 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들어갈 만한 건물은 아직 한참을 더 걸어야 했고 길의 끝자락까지 이어진 담벼락들은 처마가 지나치게 짧아 그 밑에 있는다 한들 젖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인휘야, 가서 차 가져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알았어.”

그래도 다른 방도가 없어 최대한 담벼락의 구석으로 몸을 구기고 손차양을 만들어 비를 피했다. 이미 머리고 옷이고 흥건하게 젖어 버린 채였다.

미리 확인했던 일기예보에는 저녁에만 잠깐 내린다고 되어 있어서 일부러 우산도 챙겨 오지 않았는데 기세를 보아하니 아직 한참이나 더 쏟아질 것 같았다.

“…….”

사람들이 당황하며 이리저리 뛰어 비를 피하는 게 보였다. 몸 구석구석이 척척하게 젖어드는 찝찝함을 느끼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십 분쯤 기다리고 있자 눈에 익은 세단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반가움에 서둘러 뛰어가 차문을 열었다.

“금방 왔네.”

“이걸로 닦아.”

커다란 수건이 건네졌다. 젖은 얼굴과 머리를 대충 닦아 내고 상의의 물기도 수건으로 찍어 내고 나니 시트에 물이 튀어 있는 게 보여서 식겁했다. 이거 비싼 차일 텐데.

“시트 다 젖었어……. 미안해.”

“괜찮아. 나중에 닦으면 돼.”

고정원의 너그러운 대답에도 좌불안석이 되어 수건으로 연신 시트를 닦아 냈다. 그렇게 부산을 떠는 동안에도 차는 어딘가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 어느 정도 물기를 제거하고, 다시 한번 비가 쏟아지는 바깥을 확인한 나는 조심스럽게 고정원의 옆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어쩌지?”

악천후로 인해 일정이 틀어졌으니, 대체할 뭔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전시회는 물 건너갔고, 영화도 이미 보고 밥도 다 먹어 버렸다. 그렇다고 이대로 각자 집에 가자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글쎄.”

애매한 대답을 흘린 고정원은 말없이 차를 몰며 대시보드로 손을 뻗어 오디오를 틀었다. 달콤한 선율의 재즈음악이 흘러나왔다. 비 내리는 바깥 풍경과 어우러지면서, 나는 기분마저 다소 감상적으로 젖어 들어감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데이트하기엔 안 좋은 날씨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느긋하게 차안에서 경치를 바라보며 드라이브하는 기분을 내고 있자니 전투적인 빗소리도 감미로운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달리던 차가 골목으로 진입하고, 그 골목을 이룬 몇몇 건물의 커다란 간판을 확인한 순간. 내 몸은 뒤늦은 추위인지 뭔지 모를 감각으로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

시동이 꺼졌다. 느리고 달콤하게 흘러나오던 재즈 선율도 뒤이어 끊기고 나니, 차 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빗소리만 멀찍이서 들려올 뿐이었다.

어떡해.

나는 타올을 손끝으로 만지며 자꾸만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수없이 떠올렸다 지웠던 전개가 눈앞에 현실이 되어 혼란스러웠다.

뭐라고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움칠, 몸이 떨렸다. 예기치 못하게 다가온 손 때문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두터운 손가락에 감겨 느릿하게 쓸어 올려지는 느낌에, 드러난 팔뚝 위로 소름이 돋았다.

절인 것처럼 다감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감기 걸리겠다.”

라운지에서 룸까지 어떤 정신으로 올라왔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이 들고 나니 어느새 나는 고정원과 단둘이 방안에 들어와 있었다.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씻어도 돼.”

고정원이 빗물로 젖은 상의를 느긋하게 벗어 올리며 말했다. 순식간에 드러난 탄탄한 상체를 목도하고 놀란 나는 대꾸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뭐 해.”

나를 보고 고정원이 소리 없이 웃었다.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자, 웃통을 까고 흠잡을 데 없는 몸매를 자랑하는 잡지 속의 모델처럼 보였다. 고정원이 아직도 문가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게 다가올 동안 나는 머릿속으로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른.”

부드러운 힘에 의해 팔이 이끌려 안으로 들어섰다. 그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욕실의 문이 닫히고, 얼마간 경직돼 있던 나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느꼈다. 안 되겠다 싶어 세차게 고갤 흔들고 다소 거친 손길로 마른세수를 했다.

“후…….”

그만. 그만. 생각하지 말자. 뻗어 나가는 생각의 꼬리를 자르기 위해 무작정 옷부터 벗었다.

하지만 익숙한 행위도 낯선 공간에서 행해지면 덩달아 새롭게 느껴지는 듯, 옷을 벗는 것만으로 자꾸만 기분이 이상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화장실이란 본래 비좁고 냄새나는 곳인데 쓸데없이 드넓고 세련된, 그것도 달큰한 향이 가득한 욕실에서 씻으려 하니 보통 거북한 게 아니었다.

그러게 왜 쓸데없이 특실을 예약해선…….

그냥 일반실도 아니고 특실을 잡을 때부터 불안하긴 했다. 게다가 대실이 아닌 숙박으로 결제하기에 놀라서 물어보니 고정원은 여느 때처럼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촉박한 건 별로 안 좋아해서.

대실 세 시간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것 같았지만 혼자 좀 더 쉬고 가고 싶은 걸지도 모른단 생각에 고갤 끄덕이고 말았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쳐 주는 일만 끝나면 상관없이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리고 고정원이 아무리 나를 필요로 하고 의지해 와도, 더 이상 이런 식의 만남은 약속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오늘이 정말 정말 진짜 진짜 마지막.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잡생각은 여기까지 하고, 빨리 씻고 나가자 싶어 급하게 벗은 옷가지들을 대충 걸고 욕조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으!”

틀자마자 바로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도 모르게 소릴 냈다.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던 건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린 탓이었다.

아아. 순식간에 양쪽 귀가 뜨거워졌다.

욕실을 쓸데없이 넓게 만든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 널찍한 욕조에서 수많은 커플들이 서라운드로 크고 선명하게 울리는 서로의 신음 소리를 배경삼아 몇 배는 더 자극적인 섹스를 즐겼겠지.

“…….”

조금 울적해져서 물 묻은 손으로 벅벅, 얼굴을 문댔다. 언젠가 여자 친구가 생기면 되면 오게 될 줄 알았던 러브모텔을 이런 식으로 오게 되다니. 기가 막히고 씁쓸할 뿐이었다.

물이 따뜻하니 몸이 점점 느른해졌다. 나는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구석구석 몸을 씻었다. 샤워 볼로 듬뿍 낸 거품을 다리에서부터 문지르고 올라와 목 부근까지 꼼꼼하게 덧칠했다.

“아…… 돌아 버리겠다.”

깨끗이 하려고 씻어 내고 나서 한번 더 거품을 내던 중이었다. 묘한 느낌에 하반신을 확인한 나는 인상을 확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지금 왜 서지 이게. 아까부터 낌새가 심상치 않긴 했는데 때와 장소를 구분 못하고 모양을 바꾼 중심을 보니 골치가 아팠다.

가만 내버려 둔다고 가라앉을 기미가 아니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고민하던 나는 불가피하게 찬물을 틀었다.

“으.”

따뜻하게 데워졌던 몸 위로 쏟아지는 물이 얼음장 같이 차가워 몸을 잔뜩 움츠렸다.

“후…….”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찬물을 맞아도 수그러들기는커녕 각도만 보다 위를 향했다. 여기서 샤워 시간이 더 길어지는 것도 좀 그런데. 차라리 깔끔하게 한 발 빼 버리는 게 낫겠다 싶어서 나는 숨을 죽이고 중심부를 그러쥐었다.

제발. 빨리 나와라.

초조한 심정을 가지고 만져서 그런지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 빳빳하게 달아오르긴 했는데 사정감이 찾아올 만큼의 자극은 더해지지 못하고 있었다. 야한 생각을 하려고 영상을 통해 봤던 장면들을 되새겨 봤지만 한참 전에 본 것들이라 그런지 흐릿하기만 했다.

끙끙대며 자극이 될 만한 방법을 찾다가 가장 최근에 있었던 실제 경험을 되새기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유일무이하게 타인과 직접적인 접촉으로 얻었던 자극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입술끼리 빨리고 비벼질 때 느껴지는 아찔한 동시에 포근한 양극단의 감각, 묵직한 육체끼리 맞닿았을 때 피부로 직접적으로 고이는 열기, 단순히 입술뿐 아니라 주변 구석구석으로 옮겨지는 애무의 간지러움 등. 강렬하게 남아 있는 기억의 흔적들을 끈질기게 쫓았다. 점점 호흡이 짧아지고 몸이 뜨거워지며 사정에 가까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인휘야.”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게 틀어놓은 물줄기 사이로 나는 숨을 들이켰다.

“어, 어?”

당황해서 목소리가 평소보다 몇 톤이나 높게 나갔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적잖이 당황한 나는 사납게 뛰는 가슴을 느끼며 고조되어가던 움직임을 멈추었다.

“좀 늦길래. 걱정돼서.”

경황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그, 아직이야.’ 하고 우물우물 답했다.

“괜찮은 거야?”

묻는 목소리가 은근했던 탓일까. 때마침 아무런 자극도 더하지 않았음에도 부푼 귀두에서부터 탁한 액이 사출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긴장해 있던 허벅지에 잔뜩 힘을 준 나는 이런 순간에도 착실히 밀려드는 쾌감이 야속하여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미세한 떨림이 잦아들고 나자 아무도 보지 않는 걸 알면서도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인휘야.”

부르는 소리에 파드득 어깨를 떨며 답했다.

“아무 일 없어!”

살짝 떨린 목소리를 고정원이 눈치채지 못했길 바랄 뿐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느라 센 척을 하고 있지만 사실 지금 모든 게 다 버거운 상태였다.

그냥 집에서 뒹굴고, 드라마 보고, 그러다 낮잠이나 자고 싶은데. 애초에 괜한 허세로 입을 놀리는 일만 없었더라면 같은 남자인 고정원이랑 키스할 일도, 모텔에 올 일도, 이런 어색스럽고 쪽팔린 일들을 겪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해서 일이 커져 버렸다는 후회로 가슴이 무거웠다.

지금이라도 고백할까. 사실대로 털어놓을까. 유혹도 들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한다면 착한 고정원은 이해해 줄 것만 같았다.

……근데, 그러다 소문이라도 나면?

내가 모솔인 데다 여자랑 손 한 번 잡아 보지도 못한 불쌍한 남자라는 게 알려진다는 가정을 해 보다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져서 고갤 내저었다. 이건 아니다.

그동안 입 털었던 걸 생각하면 인간관계도 그렇고 망신으로는 안 끝낼 것 같았다. 휴학해야 될지도 모르고, 앞서 최악의 상황들을 모면하더라도 일단 학교를 다니는 내내 어떤 이미지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인지는 뻔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이번만 참고 넘어가면 다신 감당하기 힘든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걸 위로 삼아, 나는 다시 마음을 굳게 고쳐먹었다.

욕실에서 정리하고 나오자 후끈거리던 몸은 모락모락 김이라도 날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뭔가 달라진 것 같다 싶었는데 조명이 은은하게 바뀌어 있었다.

모른 척 거칠게 젖은 머리를 턴 나는 ‘아, 시원하다.’ 하고 혼잣말을 했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고정원이 시야의 아래쪽으로 보이자 등줄기가 꼿꼿해졌다.

“너도 얼른 씻어.”

말을 건네고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머리 위에 덮어 두었던 수건이 걷힌 바람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들렸다.

고정원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대로 천천히 다가온 손이, 온수로 달아오른 내 뺨을 감싸 쥐었다.

“훨씬 따뜻해졌네.”

여전히 이런 식의 스킨십은 익숙지 않았다. 나는 고갤 떨구며 대답했다.

“어어, 물 뜨거워서 좋더라.”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다행이다.’ 하고 다정한 대꾸를 해 온 고정원은 가져갔던 수건을 다시 내 머리 위에 올려 주었다. 수건과 함께 정수리에 얹어져 있던 손은 떨어져 나가며 무방비하게 노출된 귓불을 스쳤다.

“기다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정원은 욕실로 들어섰다.

혼자 남은 나는 어쩐지 조금 아연해져서 침대 위로 걸터앉았다. 손으로 귓전을 문지른 것은 처음엔 분명 미지근했던 감촉이 어느새 데인 것처럼 달궈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

욕실에서부터 물소리가 들렸다. 쓸데없이 청각이 곤두서 있는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와 마음이 수런거렸다.

아, 왜 이렇게 진정이 안 되지. 심호흡을 하던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상상하면서부터 급격히 심각해졌다. 여기서 대체 어떤 방식으로 가르쳐 줘야 하는 건지 내내 한편에 쌓아 두고 있던 걱정이 밀려들었다. 키스도 실전으로 가르쳐 줬으니 설마 ‘끝까지’ 알려 주는 것도 실전으로 해야 하는 건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이 오기 전까지, 한 주 내내 갖가지 상황들을 예상해 보고 있었지만, 아무리 머릿속으로 생각해 봤자 실전이 들이닥치기 전까진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법이었다.

침대 위,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오늘, 나 어땠어?”

씻고 나와 말간 피부에 머리를 내린 고정원은 어쩐지 소년 같은 인상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낯선 사람의 민낯을 대면한 것처럼 괜스레 오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영화 볼 때 졸고, 얘기도 재미없게 하고. 거기다가 비까지 맞게 했네. 완전 별로였지……?”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며 말하는 고정원의 표정이 갈수록 시무룩해지는 게 보였다.

“어, 음, 아니,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거 같은데?”

왠지 짠한 마음이 들었던 나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위로해 주었다. 함께 있는 동안 즐거웠던 건 사실이었으니.

“정말?”

“어 뭐, 이 정도면 합격이지.”

“완전 빵점 데이트는 아니었나봐. 다행이다.”

고정원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웃어 보였다.

“…….”

이렇게 데이트 코치까지 받을 정도로 고군분투하는 걸 보니 고정원도 단단히 특이한 애를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그냥 평범한 애를 만나면 될 것 같은데. 

“네가 볼 땐, 내 문제점이 뭐인 것 같아?”

고정원은 진지하게 내게 물었다. 최종적으로 무언가 유용할 만한 충고를 해줘야 하는 타이밍인 듯했다.

“어…….”

머리를 굴려 생각을 더듬었다. 문제랄 만한 게 있었나? 너무 빤히 쳐다보는 거? 툭하면 스킨십하는 거? 매너가 과도한 거?

“아.”

때마침 드라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그, 선물? 여자들 소소한 선물 같은 거 좋아하는데. 아무것도 안 해 주니까 좀 심심한 감은 없잖아 있더라고.”

그럴싸한 어드바이스를 찾아낸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지나가다 같이 구경하면서 관심 보이는 거 사 줘도 좋고. 뭐, 인형 같은 거 사 주거나 뽑아 주거나 그런 것도 추억이 되니까. 데이트할 때 좋지.”

임기응변이었지만 꽤 그럴싸한 데다 실제로 제법 유용하기까지 한 것 같아 내심 의기양양해졌다.

“역시 인휘는 다르네. 난 생각도 못했는데.”

감동 받은 것 같은 고정원의 표정에 어깨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뭐, 이렇게 배우는 거지.”

“그러게……. 정말, 부탁하길 잘했네.”

어느새 턱에서부터 귓불 뒤까지 커다란 손이 감싸듯 올라와 있었다. 손가락으로 볼 언저리를 문질러 가며 다정스럽게 매만지는 감촉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

눈이 마주치고, 다가오는 기색에 나는 숨을 죽였다. 이번엔 착각할 수가 없이 분명한 사인이었다.

“그럼, 끝까지 가르쳐 줄 거지?”

입김이 스치자 배 속이 꽉 뭉치며 긴장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아마 엄청 서툴 거야. 이해해 줘.”

고정원은 살짝 긴장한 듯 눈을 내리깔며 그렇게 말했다. 보기 좋은 근육으로 다져진 몸에선 나와 같은 바디 워시 향이 풍겼다.

“……일단, 해 봐.”

역시 실전으로 가르쳐 줘야 하는 분위기였다.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만든 나는 가운을 느슨하게 풀며 침대 맡으로 몸을 기울였다. 입안이 약간 마를 정도로 긴장이 되긴 했지만 고정원이 씻을 동안 혼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며 마음을 다잡았더니 한결 나았다.

“혹시 긴장했어?”

“어? 아니? 전혀?”

고정원의 커다란 손이 내 가슴팍 위로 올라왔다.

“빨리 뛰는 거 같아서. 옷 위로도 느껴지네.”

“아 그거, 나 원래 심장이 좀 빨리 뛰어 어렸을 때부터 그랬는데. 하여튼, 전혀 긴장한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하긴. 인휘는 경험도 많은데.”

“그렇지. 아무래도. 익숙하지.”

바짝 마르는 느낌에 혀로 입술을 쓸었다. 침대에 올라온 뒤부터 고정원의 시선 처리가 너무 직선적인 탓에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근데, 조명 더 어두운 게 낫지 않을까? 그, 여자들은 원래 분위기 같은 거 중요하게 여기니까.”

“아…….”

아무리 은은하다고는 해도 침대 바로 위에 설치된 조명으로선 서로의 표정이나 몸이 지나치게 세세하게 보였다. 그게 부담스러워서 핑계를 대며 조도를 더 낮출 생각이었다.

“다음엔 배운 대로 할게. 그래도 지금은 우리밖에 없으니까, 켜도 되지?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그, 래.”

떨떠름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키스부터 할까?”

기분 탓인지 고정원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들린다.

“그러든가.”

입을 맞추는 건 벌써 세 번째인데, 장소가 너무 본격적이다 보니 또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거리가 가까워지며 코끝이 부딪혔다. 예상과는 달리 쪽, 하고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가벼운 뽀뽀를 하기에 고정원을 올려다보자 슬며시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심장이 울렁거렸다. 진득한 키스보다 이런 식의 단순한 애무가 더 간지럽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대체.

“제대로…….”

하라고 말하기도 전에 각도를 바꾼 입술이 맞물려 왔다. 곧장 뜨거운 숨결이 끼치며 입술이 부드럽게 빨렸다.

“하아…….”

몇 번의 접촉만으로 숨이 차올랐다. 천천히 입술이 떨어지고, 조금 전보다 달아오른 몸이 느껴졌다.

“섹스어필하려면…… 어떤 키스를 해야 돼?”

몇 번의 접촉만으로 안에서부터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고정원과 키스를 하고 나서도 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해 찼다는 그 대단한 우리 학교 여자애는 대체 누구일까, 자꾸만 궁금해졌다.

“혀, 내밀어 봐…….”

조금 대담하게 명령하자 잘생긴 입술 사이로 촉촉한 혀가 살짝 드러났다. 나는 눈을 감고, 마찬가지로 입을 벌린 채로 혀를 섞었다. 전보다 더 노골적으로, 갈구하듯이, 입안이 끈적하게 느껴질 정도로 휘저었다.

긴장한 와중에도 키스가 주는 흥분이 있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서로의 몸을 여기저기 더듬으면서 정신없이 입술을 부딪치고 빨아 댔다. 나는 잠시 내가 여기 왜 왔는지도 잊고 고정원의 머리칼 사이로 손을 넣어 끌어당기며 적극적으로 쾌감을 쫓았다. 그새 몇 번 해 봤다고, 머리보다 몸이 기억하는 감각이었다.

서로의 입술만을 쫓느라 자세가 흐트러진 줄도 몰랐다. 어느새 침대에 완전히 눕혀진 채 내 위로는 고정원의 상체가 짓누르듯 올라와 있었다.

서로의 거칠어진 숨이 겹치고, 눈이 마주쳤다.

“괜찮았어?”

“응…….”

솔직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 느꼈다. 키스만으로 뜨거워진 아래가 반쯤 일어나 있었다.

“다행이다. 인휘한테 배우고 나서 많이 는 거 같아.”

기분 좋은 무게감이었지만 계속해서 깔려 있는 것도 내키지 않아 고정원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면서 벌어진 가운 사이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중심이 드러날 뻔해 황급히 옷자락을 여몄다.

“…….”

그리고 깜짝 놀랐다. 여밀 수도 없이 우뚝 솟아 텐트를 친 고정원의 중심부를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너…….”

기억 속에도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취해서 화장실에서 봤을 땐 잘못 본 건가 했는데, 설마 진짜로 이 정도일 줄이야.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선 구경하듯이 그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섬뜩하게 컸다.

“왜 그렇게 봐.”

미약하게, 고정원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선 탓인지 흉흉하게 발기한 것이 꺼덕이기 시작한다. 나는 어버버 대꾸하며 얼굴을 붉혔다.

“쫌, 많이, 크네.”

“……하, 응. 사실 좀 콤플렉스야.”

복에 겨운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정말 외국 야동에 나오는 남자들 것처럼 거대했기 때문에 저런 걸 받아 낼 여자들 입장에선 확실히 무섭겠단 생각이 들었다.

“음…… 아프긴 하겠다…….”

자꾸 보는 것도 민망하여 시선 돌리며 말했다. 난데없이 고정원의 손이 벌어진 내 가운 사이로 파고든 것도 그때였다.

“야!”

놀라서 파고든 손 위로 내 손을 겹쳤다. 아랑곳하지 않고 가운을 들춘 손은 반쯤 일어선 내 것을 순식간에 감싸 쥐었다.

“왜 이래 너!”

“……왜, 너무 매너 없어?”

조금 강한 힘으로 주물러진 순간 숨을 들이켰다. 가까이 밀착해 온 고정원이 귓가에서 속삭였다.

“그럼 만지고 싶을 땐 어떡해야 돼?”

만져지는 대로 피가 몰리고 부피가 늘어나는 걸 느꼈다. 참기 힘든 감각이었다.

“아……. 야, 고정원, 손 좀, 손 좀 떼 봐 잠깐만.”

떼라는 말을 무시한 무례한 손이 연이어 강약을 조절해 가며 자극을 가했다. 혼자 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만져지는 데다, 내 손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커다란 면적으로 성기 전체가 감싸지자 몰랐던 쾌감이 연타처럼 몰려왔다.

“으…….”

“금방 젖네.”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귓전에 닿은 것만으로 찌릿, 등줄기가 울렸다.

“이거 봐.”

젖은 소리가 났다. 설마 했는데, 아래를 보니 부푼 귀두에서 프리컴이 끈적하게 늘어지고 있었다. 고정원의 손가락이 그것을 일부러 늘이듯이 비벼 댔다. 단정한 손가락의 움직임이 거리낌 없이 음란했다.

손이 더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자연스럽게 다리가 벌어졌다. 고정원의 남은 한 손은 내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자세가 영 어색스러웠다. 가랑이를 벌린 데다 질척질척한 소리까지 더해지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온몸이 뜨거워질 정도로 한계에 다다른 나는 주먹을 쥐어 고정원의 어깨를 때렸다.

“잠깐, 놔, 이제!”

몇 번 더 쳐 대자 집요하던 손길이 간신히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초조한 감각이 사라지고, 저릿저릿한 여운만이 남는다.

“내, 내 건 만질 필요 없어. 어차피, 여자랑 남자랑은 생긴 것도 달라서 연습용도 안 되고. 그냥, 이런 건 내가 설명해서 알려 줄게.”

하마터면 그대로 갈 뻔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허겁지겁 벌어진 옷깃을 추슬렀다.

“다르지 않아.”

“……어?”

고정원의 손이 다시 가운 속을 파고들었다. 부풀어 젖은 페니스의 선단 위로 손가락이 닿자 의지를 배반하고 움찔, 허리가 떨렸다. 그대로 아래로 미끄러진 손가락이 최하단, 엉덩이 사이의 촘촘하게 닫힌 주름 위로 덧그리듯 둥글려지자, 생전 처음 겪는 이상야릇한 감각에 발끝부터 안쪽까지 잔뜩 오므라들었다.

“여기는. 비슷한데.”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말하기도 민망한 부분을 지분대는 고정원의 손길에 의해 방금 한 말이 진심임을 알아차리곤 경악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야, 야아, 거긴 그만 해.”

비슷하다 해도 엄연히 용도가 다른 곳인데. 나는 꼼지락대며 다리를 오므렸다. 이건 핀트가 엇나가도 한참 엇나간 것 같았다.

“왜?”

“아니…… 좀, 이상하잖아 거긴.”

“그럼 인휘가 보여 줘.”

“……뭘?”

“손으로 어떻게 하는지, 직접 보여 주면 되잖아.”

여기로.

고정원의 얼굴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진지한 눈이 순수한 진담이라는 걸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여기로, 내 손으로 하는 걸, 내가 직접 보여 달란 소리야?”

설마 잘못 이해했나 싶어 다시 한 번 차근히 되짚어 가며 물었다. 제발 말도 안 되는 오해이길 바라면서.

“아무래도 말보단 실제로 하는 걸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아서. 그렇다고 내 손으로 하는 건 인휘도 별로 안 내키잖아. 아니면, 괜찮겠어……?”

고정원의 손길이 또다시 내 엉덩이 속의 연약한 부위에 접근해 왔다.

“내가! 내가 할게 내가!”

나는 그 소름 끼치는 감촉을 참지 못하고 소리쳐 버렸다. 아예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다급해지자 결국 주어진 선택지 중 한쪽을 선택해 버린 것이다. 내가 내 그곳을 쑤시는 것도 미친 짓이지만 남한테 당하는 모양새로 쑤셔지는 것만큼은 못 참을 것 같았다.

고정원은 잘 생각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말이 떨어지지가 무섭게 바로 협탁에 놓여 있던 것들을 침대 위로 가져와 늘어놓았다.

“여기. 편한 대로 써.”

콘돔과, 몇 가지 종류의 러브젤이었다. 하도 당혹스럽고 황망해서 차마 손을 대지도 못하고 그것들을 쳐다보고만 있는데, 이어서 덤덤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다리 좀 벌려 볼래?”

스스로 콘돔을 뜯어 손가락에 씌우는 기분은 이루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것이었다. 쪽팔리고, 청승맞고, 서글프고. 갖가지 감정들이 다 떠올랐는데, 그 위로 끈적한 젤을 덧바를 땐 이후로 한동안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힘들리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고작 시작이었다.

“……한다.”

“응.”

나는 고정원의 눈앞에서 깊숙이 자리한 그곳을 제대로 보여 주기 위해 내 인생 최대치의 남사스러운 자세를 취해야 했다.

초마다 현타가 몰려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왜 이렇게까지 돼 버렸나. 그러게 왜 고정원의 부탁을 그렇게 쉽게 수락했나. 아니 애초에 왜 내가 연애도 섹스도 잘하는 놈이라고 떠벌리고 다녔을까. 모솔에 경험 좀 없는 게 뭐 그리 창피한 일이라고.

이런 건 못하겠다 말하고 싶은 유혹이 강렬하게 몰아쳤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명목의 부탁을 수락한 순간 결국에 뭘 가르쳐 주어야 하는지는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이렇게까지 해야 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거지. 미리 했던 수많은 시뮬레이션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안 해?”

“어어…… 해야지.”

정말 미친 짓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먼저 풀어 줘야 해.”

가르쳐 준답시고 헛소리 먼저 지껄인 나는 비장한 각오로 입술을 사리물며 일단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천천히, 척척한 손가락이 내벽으로 밀려들어 오는 느낌이 기묘했다. 이물감과 수치심을 참아 내며 상대를 살펴보자 더없이 진지하게 쳐다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대체 얼마나 잘하고 싶으면 저럴까. 차라리 야동으로 공부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아…….”

손가락 하나만으로 빡빡했다.

“음…….”

안 되겠다 싶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손가락을 뺐다.

“그리고, 주변을 부드럽게 만져 줘야 되는 것도 알지?”

너무 아파서 차마 다시 넣을 생각은 못하고 주변만 매만지며 말했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심해진 손놀림으로 구멍 주변을 배회하듯 만지고 있는데 문득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거리가 가까워지는 걸 느낀 순간,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을 머금어 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함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상냥한 키스에 휩쓸려 그렇게 한참이나 입맞춤을 나누었다.

“……뭐야.”

따스한 조명을 받은 고정원의 잘생긴 얼굴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연습.”

고정원이 웃었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참 예쁘게, 자주 웃는다.

“힘들어?”

노고를 알아주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였다. 이제 그만하게 해 주려나 싶어서 반가움을 느낀 나는 득달같이 호소했다.

“어, 좀. 아무래도 내가 내 걸로 하려니까 안 되는 거 같은데, 차라리……”

“자세를 좀 바꿔 볼까?”

“…….”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어진 고정원의 제안에 말문이 막혔다.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단호한 두 눈을 보며 나는 어설프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훨씬 낫지?”

확실히 모로 누워 다리를 한쪽으로 포개 모은 자세는 등 뒤로 손이 닿기가 훨씬 수월했다.

“……응.”

울적하게 대답한 나는 손가락으로 또 다시 비좁은 곳을 지분대기 시작했다.

“젤을 더 많이 쓰는 게 좋을 것 같아.”

조언과 함께 고정원은 둔부 사이로 듬뿍 윤활제를 짜 주었다. 끈적한 감각이 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가락에도 엉겨드는 감각을 느끼며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다 갑자기 둔부의 한쪽이 벌어지자, 깜짝 놀라 고갤 쳐들었다.

“잘 안 보여서. 됐어 이제.”

고정원이 한 손으로 내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화끈거리며 느껴지는 열기로 인해 나는 지금 얼굴은 물론 목 주변까지 몽땅 빨개졌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빨리 해 인휘야.”

더 망설일 수도 없을 것 같아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책임이고 뭐고 대충 문대다 끝내고 싶었다.

“계속 문지르기만 하는 게 다야?”

지적받은 손이 움찔, 떨렸다. 고정원의 목소리가 다른 때와 다르게 딱딱하게 경직된 탓에 더 주눅이 들어 버렸다.

너무 별거 없어 보여서 실망한 건가 싶어 이해하고 넘어가려다가 갑자기 울컥, 치밀었다. 생각해 보니 열 받는 일이었다. 야매일지언정 내가 이런 짓까지 해 가며 가르쳐 주는데 상대방으로부터 감사는커녕 실망이란 소릴 들으면 억울할 거 같았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니까 잘 봐.”

조금 허세를 더해서 말하곤 대담하게 손가락 두 개를 한 번에 꾸욱, 밀어 넣었다. 주변을 하도 만져 댄 데다가 끈적거릴 정도로 처바른 윤활제 탓에 아까보다는 한결 수월했다.

“이렇……게, 위쪽을 좀 먼저 만져 주고…… 읏.”

속살이 젖어서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귀가 불이라도 날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리고?”

“부드럽게…… 넣었다 뺐다…….”

다행히 느린 왕복을 반복하는 사이 안이 넓어졌는지 통증이 희미해져 있었다. 계속해서 안을 더 넓혔다.

시간이 지나면서 움직임은 점점 탄력을 받았다. 분명 보여 주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빠듯한 이물감과 불쾌감 사이로 야트막하게 느껴지는 초조함 때문에 자꾸만 그것을 쫓듯 움직이게 됐다.

“좀 더, 빠르게…….”

질척이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방안을 울렸다.

“깊숙하게 넣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야릇한 초조함이 훨씬 강렬해져 있었다. 발가락이 오므라들고 입술이 벌어졌다. 한쪽 둔부를 움켜쥔 고정원의 손에 힘이 더해지는 걸 느꼈다.

“읏……!”

시범을 보여 주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잊고 몰입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안을 헤집다가, 정신이 들어 움직임을 멈췄을 땐 전신이 열기로 축축해진 상태였다.

미쳤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빼내자 물기 어린 곳에서부터 진득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고정원의 손길도 떨어져 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쯤 할까?”

견디기 힘든 민망함을 간신히 참고 물었으나 고정원으로부턴 대답이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손가락에서 콘돔을 빼내 버리고, 주섬주섬 가운을 여몄다. 차마 뒤돌아보진 못하고 큼, 목을 축인 뒤 침대를 벗어나며 다시 한 번 확인받듯 말했다.

“보여 줬으니까 대충 알겠지? 그럼, 여기까지 하는 거다?”

“……그래.”

고정원의 대답은 짧았다. 이어진 침묵이 불편해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셨다.

“쉬고 있어.”

짧은 말 뒤에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화장실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뒤돌아 주변을 둘러본 나는 혼자 남겨진 걸 확인하고 물병을 뺨과 목 주변에 가져다 대었다. 바짝 열이 오른 피부에 닿은 시원함에 그제야 한숨이 흘러나왔다.

“미쳤어 진짜…….”

주변에 놓인 아무 스톨에 걸터앉아 중얼거렸다. 대체 내가 뭔 짓을 한 건가 싶었다. 뒤가 아직까지 화끈거리고 욱신욱신했다. 아마 내일이면 엄청 부어오를지도 몰랐다.

“왜 이래 넌…….”

가운 사이로 소심하게 고갤 든 중심부를 향해 책망했다. 혼곤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가르쳐 주기 위해서 뒤를 건드린 것까진 어떻게든 괜찮았다. 문제는 그 행위로 인해 내가 흥분했다는 것이었다. 아니, 엉덩이를 아프게 괴롭힌 걸로 흥분할 수가 있나? 내가 변태인 건가? 혼란하고 울적해졌다.

고정원은 씻기라도 하는 모양인지 물소리가 들려오는 게 금방 나올 기세가 아니었다. 나는 몰려드는 피로함을 느끼고 침대로 푹 엎어졌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의 상황들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리플레이 된 탓에 양 다리로 침대 매트를 퍽퍽 때리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아 내야 했다.

미친놈아, 미친놈아…….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붓는 사이 억눌렀던 피로가 겹겹이 쌓여 왔다. 긴장이 빠져나가며 졸음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기진맥진이었다.

잠깐만 눈을 감고 있는다는 걸, 눈 떠 보니 어느새 아주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잠이 깨서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봤다. 언제 나왔는지, 고정원이 테이블에 앉아 와인 병을 기울이고 있는 게 보였다.

“뭣도 모르는 사람 가르치느라 힘들었지.”

“……어, 아니야.”

잔뜩 잠긴 목소리가 나갔다.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 고정원이 와인 병을 흔들며 말했다.

“이제 쉴까 우리?”

* * *

목이 아플 정도로 타는 느낌에 잠이 깼다. 본능대로 주변을 더듬다가, 몸을 뒤엎은 순간 눈이 부셔서 손을 들어 얼굴부터 가렸다.

“으…….”

아픈 머리를 감싸며 둘러본 주변이 너무도 익숙했다. 걸려 있는 옷가지 하며, 늘 있는 곳에 그대로 있는 가구나 생활용품들. 아무리 봐도 내 자취방이 맞았다.

일단 휴대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했다. 설마 월요일이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히 어제로부터 하루가 지난 일요일이었고, 시각은 오후 열두 시 삼십팔 분이었다. 어쩐지 해가 지나치게 강하다 싶더라니.

집으로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분명 어제 고정원이랑 마신 술이 지나쳤던 모양이다. 보통 필름이 끊길 때까지는 잘 마시지 않는데 어제는 너무 분위기를 타 버렸다.

메시지가 꽤나 쌓여 있어서 메시지 창부터 열었다. 대화방 몇 개로 인해 쌓인 숫자가 대부분이었고, 나머지는…….

[인휘야 일어났어?]

고정원이었다.

[어제 너무 무리했지]

[몸은 어때? 걱정된다]

[일어나면 연락 줘]

[아직도 자는 중?]

[혹시 어디 아픈 거야?]

그리고 부재중 전화가 일곱 건이었다. 물론 전부 고정원으로부터.

[인휘야]

가장 마지막 메시지는 그저 이름만을 부르고 있었다.

“…….”

이렇게 걱정되는 놈이 거기까지 시키냐…….

문득 어제 있었던 일들이 떠올라 한숨이 푹 나왔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아직까지도 어제의 내가 나인 것 같지 않았다.

일어났다고 알려주려다 통화하기엔 아직 정신이 덜 깬 상태기도 했고 우선 갈증부터 해결하기 위해 매트에서 몸을 일으켰다.

“읏……!”

그러자 몸 안쪽에서 번져 나가는 통증에 깜짝 놀라 눈살을 찌푸렸다. 엉덩이의 입구와 안쪽에서부터 처음 경험하는 아픔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 미쳐 진짜…….”

괴성을 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머리칼을 쥐어뜯다가, 간신히 심호흡을 하며 가라앉혔다. 다 끝났다. 다 끝났어. 스스로에게 되풀이하는 사이 안정을 되찾았다. 어쨌거나 어제가 마지막이었으니 그런 해괴한 짓거리도 더 이상은 없다는 걸로 평안을 얻은 것이다.

“내가 앞으로 입조심하고 산다 진짜…….”

바득바득 이를 갈며 다시 매트 위로 쓰러졌다.

“아…….”

어김없이 통증이 이어졌다. 상당히 부은 모양이었다. 열상처럼 화끈거리는 느낌에 얼얼함까지 더해졌다. 생전 만지지 않던 곳을 헤집어 놨으니 부을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정도가 심한 것 같았다.

핸드폰 카메라를 열어 셀카모드로 얼굴을 비춰 보았다. 화면이 열리면서 기다란 액정을 가득 채운 얼굴은 입술은 물론이고 눈두덩이까지 흉하게 부어 있었다.

“와 씨, 어디 사는 괴물이냐…….”

후다닥 카메라를 종료시키고 눈을 감았다. 해소되지 않은 피로 탓에 계속해서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근데 나 어제 집에 어떻게 왔지.

아무리 떠올리려고 애를 써 봐도 어제의 일부가 통째로 삭제된 것처럼 기억에 없었다. 원래 술을 마시면 기억이 끊겼다 돌아왔다 하는 편인데 이번엔 부분 부분 생각나는 것조차 없었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던 무렵은 기억을 하고 있다. 이제 다 끝났다는 후련함과, 미친 짓을 하고 난 뒤의 민망함으로 평소보다 배는 더 말을 많이 하며 술을 마셨던 것 같다.

혹시 실수한 건 아니겠지, 뒤늦게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고정원이 멀쩡히 연락을 해 오는 걸 보아 다행히 주사는 부리지 않은 듯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정신이 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달콤한 잠을 느끼며 매트 위에 구겨져 있는 여름용의 얇은 홑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얼마 동안 잔 건지 시끄럽게 이어지는 진동 소리에 눈을 떴을 땐 이미 사위가 어두웠다.

“아…….”

몸을 일으켰다. 칼칼한 목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감기 걸린 사람처럼 갈라져 있었다. 어둑한 주변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자 고정원의 이름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후에 확인했던 연락을 자느라 아직까지 답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여보세요……?”

목을 가다듬고 받았는데도 심하게 메마른 목소리가 나갔다.

-인휘야.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많이 나쁘게 들렸는지 고정원의 목소리가 자못 심각했다.

“어, 아니……. 계속, 잤어.”

-혹시 열 나?

“음……. 모르겠는데.”

-이마에 손 가져다 대 봐.

나는 무거운 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어 보았다. 좀 더운 것 같긴 한데, 손도 덥고 이마도 더우니 당최 열이 나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호흡이 좀 가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몸이 무겁긴 하네.”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 뭐 먹고 싶은 거나 필요한 거 있어?

“어……. 괜찮은데. 안 와도 돼.”

시간도 늦어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쪽으로 오겠다는 고정원의 말에 당황해서 만류했지만 이어진 대답은 역시나 단칼 같았다.

-삼십 분 내로 갈게.

뚝 전화가 끊기고 나는 얼떨떨해서 통화가 종료된 액정 화면을 쳐다보았다. 하여간, 지나치게 다정한 놈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어제 만났으니 내가 아픈 게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랐다.

뒤늦게 확인한 문자에는 시간대 별로 보내 온 고정원의 메시지들이 빼곡하게 밀려 있었다. 음, 얘도 여자친구 사귀면 꽤나 집착할 스타일이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다시 벌떡 일어나 화장실을 향했다. 세수도 안 하고 머리도 떡져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재빠르게 씻고 나와 머리를 다 말려갈 때 즈음 고정원이 도착했다. 양손 가득 바리바리 뭘 사온 걸 보고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헉 야,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사 온 것들을 상 위에 올려놓은 고정원은 내 얼굴부터 살폈다.

“괜찮은 거야?”

부드러운 손길이 이마 위로 올라왔다.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고정원의 표정을 보자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 정도로 오버할 일은 아닌데 싶기도 하고, 어렸을 때 이후로 부모님에게도 받아 본 적 없는 관심이라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열나네. 해열제부터 먹자.”

봉투 속에서 해열제와 물이 나왔다.

“자.”

병 뚜껑을 열고, 약은 껍질까지 벗겨 준다. 이렇게까지 병자는 아닌데 싶어 면구스러운 기분으로 고정원에게 받아 든 약을 삼켜 넘겼다.

입가로 조금 비어져 나온 물을 스스로 닦기도 전에 고정원이 먼저 손가락을 갖다 댔다. 물기를 닦아 주고, 남은 물은 가져가서 또 뚜껑을 닫아 준다. 완전히 보모 같은 행동이었다. 갑자기 다 큰 애기가 돼 버린 나는 적응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또 많이 부었네. 아파 보여.”

손가락이 살며시 부어오른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마치 자기가 아픈 것 같은 표정을 보자 왜인지 심장이 울렁거렸다.

“무리하게 해서 맘이 안 좋다. 미안해.”

“어어, 아니 괜찮은데…….”

눈앞이 뜨거웠다. 진짜 열이 나긴 나는 모양이었다.

“다음부턴 조심할게. 인휘 안 아프게.”

‘다음’이라는 말에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단순히 어제 일이 고정원이 보기에도 내가 무리한 거 같아 미안한 모양이라고, 다음부턴 그런 부탁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알아들었다.

“죽 사왔어. 같이 먹자.”

고정원이 여러 개의 봉투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디선가 풍겨 오던 고소한 냄새의 정체를 파악한 나는 순간 비어 있는 속을 느끼며 고갤 끄덕였다.

앉은뱅이 의자에 마주보고 앉아 죽과 반찬을 뜯었다. 용기를 보니 흔한 체인점에서 사 온 게 아닌 데다 열어 본 내용물은 무려 전복죽이었다. 어디서 사 왔나 싶어 물어보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마침 나를 쳐다보고 있는 고정원과 눈이 마주쳤다.

“힘들면 내가 먹여 줄까?”

순간 헛기침이 날 뻔했다. 장난기 하나 없이 진심인 표정이었다.

“야, 그 정도로 환자 아니거든!”

빽 소리치고 죽을 퍼먹었다. 아까부터 왜 이러는지, 평소에도 다정이 과한 편인데 오늘은 내가 아파서 그런 건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아, 그러고 보니 빈속에 약부터 먹었네.”

“괜찮아. 나 위 튼튼해서.”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고정원의 시선을 알 수 있었다.

“천천히 먹어.”

목소리에 꿀이라도 탄 것 같다. 오히려 목이 메는 기분에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아까부터 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고정원의 언행을 보고 있자면 마치 꼭, 우리가……, 그러니까 우리가…….

해당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조차 낯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결국 생각을 멈추고 정신없이 죽을 퍼먹었다.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오로지 죽만을 쳐다보며 죽과 나 자신밖에 없는 것처럼 먹었다.

후식으로 고정원이 사 온 과일까지 먹고 나니 열이 대부분 내려 있었다. 몸에 기운도 돌고, 안쪽의 통증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양치를 하고 돌아와 고정원의 권유를 따라 침대에 도로 누웠다. 금방 갈 줄 알았던 고정원은 떠날 기미가 아니었다. 낮은 간이침대의 옆에 앉아 내 이마의 열을 한 번 더 재 주었고, 이내 모바일로 음악까지 재생시켰다. 스탠드 조명으로 바뀐 방안은 침대 부근만이 불그스름하게 밝았다.

“나 자고 갈까?”

“어……. 너 맘대로 해…….”

느린 올드팝이 흘러나오는 배경으로, 조명을 받아 그늘진 고정원의 얼굴이 보였다. 어딘가 더없이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 건가?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때도 늘 웃고 있는 편이지만 오늘의 웃음은 헤프다는 말이 어울리는 수준이었다. 어쩌면, 좋아한다는 애랑 하룻밤 새에 잘 돼 가는 중인지도 몰랐다.

“손 주무르면 혈액순환 잘 돼.”

침대에 올라온 고정원의 손이 내 손을 부드럽게 건져 올렸다. 손바닥부터 꾹꾹, 눌러 오며 지압해 주는 손길로 인해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이것만큼은 도저히 못 참겠어서 슬쩍 손을 빼내며 물었다.

“근데…… 너 뭐 좋은 일 있어?”

고정원의 손이 이번엔 내 뺨에 닿았다. 천천히 쓰다듬어지자 자동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정원이 소름끼치게 좋은 목소리로 웃었다.

“모르는 척 할래?”

“……응? 뭘?”

다정한 손길이 서서히 올라와 내 머리칼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적응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데 고정원이 말했다.

“인휘도 있잖아. 좋은 일.”

“나? ……나 뭐 있지? 없는 거 같은데.”

당황스러워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가며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요즘 들어 곤혹스러운 일은 있었어도 좋았던 일은 딱히 없는 것 같았다.

“음, 섭섭해지려고 하네.”

“어? 뭐가……? 혹시 나 어제 뭐 실수했어?”

불안해져서 물었다. 어제 술 마시고 부터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불안하던 참이었다. 서서히 웃음기가 가시는 고정원의 표정변화를 보고 있자니 불안감이 증폭되어 갔다.

“장난하는 거면, 재미없는데.”

“……나 장난한 적 없는데. 무슨 장난?”

내 대답을 들은 고정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일변했다. 방금 전까지 따스한 물기를 머금던 두 눈이 서늘하게 경직되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왜 그래 갑자기……?”

고정원의 두 눈이 흔들리는 듯했다. 고개를 살짝 비튼 고정원은 그 상태로 굳어져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묘한 긴장감과, 끼어들기 힘든 침묵이 계속되었다.

“……인휘야.”

수 분 후, 생각을 마쳤는지 고정원이 입을 뗐다.

“혹시 어제, 어디까지 기억해?”

어제, 어제 뭘 했더라.

“우리 술 마시던 건 대충 기억나는데…….”

괜히 주눅이 들어서 작게 말했다. 내 말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지 고정원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술 마시고, 우리가 무슨 얘기 했는지 기억 안 나?”

아마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고정원의 표정이 이렇게 심각할 이유가 없었다.

“…….”

뭔가 쓰잘머리 없는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던 거 같은데 정확한 내용은 도통 떠오르질 않았다. 뭐라 대답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고만 있자 고정원이 재차 추궁해 왔다.

“너, 울었던 거 정말 기억 안 나?”

“……내가 울었어?”

우는 주사는 이제껏 없었는데, 믿기지 않아서 되물었다.

“그래.”

하……. 고정원은 기가 막힌 듯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이 빈말로라도 좋지 않았다.

“얘기하면서, 울었어 계속.”

“내가, 무슨 얘길 했는데?”

울기까지 했다니,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냥……. 어렸을 때 얘기. 누나 때문에 힘들었다고.”

‘누나’란 소리가 나오자마자 심장이 배까지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너한테 우리 누나 얘길 했다고?”

고정원이 대답 없이 나를 마주보았다. 어딘가 나를 책망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벌벌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가능한 침착하게 물었다.

“누나 얘기 말고 또 내가 뭐라고 했는데……?”

“…….”

불안하긴 했지만 만약 사실대로 밝혔다면 지금쯤 이렇게 친근하게 마주보고 있지도 못했을 테니 적어도 모솔이라는 얘기는 꺼내지 않은 것 같았다. 다만 무언가가 더 있는 건 분명했다.

이렇게 고정원이 뜸 들여 가며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할 만한 무언가가.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으면 제발 그냥 말해 줘. 응?”

고정원은 분명 ‘좋은 일’이 우리 둘에게 있다고 했고, 그건 고정원의 말로 미루어 보아 분명 어젯밤 우리가 술 마시며 했던 이야기 중에 생겨났다고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럼, 그 우리 둘한테 있다던 ‘좋은 일’이라는 게 뭔데?”

조금쯤 벌어져 있던 입술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고수하던 고정원은 갑자기 재생되고 있던 음악을 종료시켜 버렸다.

침묵이 배가 되었다.

“저기…… 나 집에는 네가 데려다준 거 맞지?”

아무리 캐물어도 대답할 분위기가 아니라 일단 차근차근 접근하잔 생각으로 다른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응. 몸이 좀 안 좋아 보여서 일찍 데려다줬어.”

역시나 이런 질문엔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이러한 고정원의 행동을 미루어 보아, ‘좋은 일’의 내용이 사건의 핵심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나는 불안을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채근했다.

“내가 뭐…… 허튼 소리 한 건 아니잖아 그치?”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마주한 안광은 평소보다 물기가 어려 촉촉해 보였다. 순간, 누가 할퀴고 가기라도 한 것처럼 한쪽 눈을 가느스름하게 찌푸렸다 뜬 고정원이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고 했어.”

……뭐?

“무슨 말이야, 그게?”

“인휘 네가 울면서, 날 좋아한다고 말했어.”

머릿속에 거대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통역되지 않은 외국어를 들은 것만 같았다. 혹은 선택지가 정해져 있는 객관식 문제가 갑자기 예측 불가능한 주관식으로 뒤바뀌어 황당무계한 정답을 확인한 것 같았다.

나는 멍하니 고정원의 입술과, 두 눈과, 눈썹, 그리고 전체적인 표정을 살펴보았다. 일말의 가능성을 찾아보는 나름의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나를 놀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같이 지내면서…… 내가 좋아졌다고. 나도 너무 뜻밖이라 놀라긴 했는데…….”

내가 고정원을 좋아한다니.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인정하기엔 도무지 쫓아갈 수 없는 감정이었고, 그렇다고 상대의 말이 거짓이라고 하기엔 그럴 만한 이유도 근거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고백 받고 나니 나도 마음이 동했어.”

네가 진심으로 보였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고정원은 가슴팍을 크게 들썩이며 안으로 삭인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얘기였다. 나는 혼란 속에서 상황을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잠깐만……. 내가 정리가 안 돼서 그러는데, 우리가 사귀기로 했다는 말이야 지금?”

우리 둘 다 남잔데? 고정원이랑 내가?

“응.”

확인사살을 당하자 맥이 쭉 빠졌다.

사실, 차근차근 되짚어 볼수록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사귀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고정원의 행동들이 이제야 납득이 되었다. 우리가 사귀기로 했다면, 만약 그게 취해서 얼렁뚱땅 벌어진 일이었다 치더라도 서로 내켜서 그렇게 성사가 되었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건 일단 맞는 말이었다.

“……말도 안 돼.”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 나갔다.

활짝 열어둔 창밖으로부터 근처에 주차를 마친 자동차의 시동 꺼지는 소리와 함께 여름밤의 낭랑한 풀벌레 소리가 넘어오고 있었다.

“……그냥, 취해서 한 말이었던 거지.”

명치께가 훅 막히는 기분이었다. 묻는 투도 아닌 고저 없는 고정원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기억에도 없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이 몰려들었다.

“……미안.”

기어들어 가듯 사과의 말을 꺼낸 나는 최소한의 변명을 덧붙였다.

“정말로, 내가 대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도 모르겠어…….”

차마 고개도 들 수가 없어 애꿎은 손가락만 뜯었다.

“괜찮아. 나야말로 기억 못하는 걸 괜히 말해서 불편하게 만든 것 같네.”

애당초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도 사과를 해 오니 더 불편하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

“어…….”

고정원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어어, 당황해서 같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올 땐 나를 위한 짐이 양손에 가득했는데 몸만 홀연히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지 말라고 잡을 수도 없어서 땅에 시선을 박은 채 우물쭈물 뒤따르고만 있었다.

현관 앞, 문을 나서기 직전 멈춰선 고정원은 평상시의 다정한 어투로 첨언했다.

“아. 다음부터 술은 너무 과하게 마시지 않는 게 좋겠다. 또 이런 오해 생기면, 큰일이잖아.”

“…….”

“가 볼게. 푹 쉬고, 학교에서 보자.”

쾅, 문 닫히는 소리가 스산했다.

* * *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생각이 무섭게 불어나서 도저히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확인한 얼굴엔 퀭한 다크 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후…….”

한숨이 절로 쏟아져 나왔다. 잠이 안 와서 그렇다고 시험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뭐에 홀린 사람처럼 고정원과, 고정원이 한 말과, 기억에 없는 그날 밤만을 되풀이해서 떠올리는 게 다였다.

‘아. 다음부터 술은 너무 과하게 마시지 않는 게 좋겠다. 또 이런 오해 생기면, 큰일이잖아.’

그건 분명 다정한 고정원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가시 박힌 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고정원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선잠에 들면서 내내 그 뒷모습이 꿈처럼 환영처럼 아른거렸었다.

씻고 대충 끼니를 때운 뒤 학교를 향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발걸음이 무거웠다. 1교시가 전필이라 고정원과 마주칠 가능성이 높았고, 어떤 얼굴을 하고 대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나로서는 일단 좀 더 대화를 해 보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같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을 받아 줄 정도면 고정원도 가볍고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일이 이런 식으로 마무리 돼서 많이 당황스러울 것 같았다.

시험이 시작될 때부터 고정원의 위치를 눈으로 확인해 두었다. 대충 나가는 시간을 맞추면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서술에 집중이 안 돼서 사투하는 동안 고정원은 먼저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가 버렸고, 나는 당황해서 나머지를 대충 메꾸고 따라나서야 했다.

“…….”

주변 어디에도 고정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따라 나온 건데, 허무하게 놓쳐 버렸다는 생각에 힘이 빠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성의 있게 쓰고 나올 것을. 너무 충동적으로 행동해 버린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기분이 울적해졌다. 사실 오늘이 아니어도 언제든 볼 수 있는 건데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굴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터덜터덜 건물을 빠져나오는 도중,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릴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건물 한쪽의 벤치에 앉아 통화 중인 남자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방금까지 그렇게 찾아 헤매던 고정원이었다.

나는 조금 멍해졌다.

고정원은 굉장히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양인지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통화를 하는 목소리도 밝고 즐거운 기색이 묻어났다. 어제 계속해서 굳어져 있던 얼굴이 기억 속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어서 그런지 환한 표정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얼마 안 있어 고정원은 다시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고정원은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아.”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고정원의 옆으로 기다란 눈이 조금 놀란 듯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내 다시 부드럽게 휘어졌다.

“인휘 안녕.”

“어……. 안녕.”

상대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멍청하게 인사를 하고, 보이지 않는 줄에 이끌리듯이 뒤돌아보았다. 고정원의 너른 등이 아직 가까운 상태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놓인 풍경이 꿈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뒷모습 어디에서도 어제와 같은 우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끊임없이 풍경을 밀어내며 뒷모습이 멀어져 갔다. 나는 형태가 흐릿해질 때까지 보고 있다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이 되돌아온 듯 비로소 한 걸음을 내딛었다.

* * *

평일 밤의 호프집은 왁자지껄했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소란이 소란을 묻으며 이어지는 분위기는 언제나처럼 쉽게 긴장을 이완시켰다.

“넌 술 마시러 나온 놈이 술맛 떨어지게 그러고 앉았냐.”

맞은편에 앉은 정재환이 탐탁지 않다는 듯이 인상을 쓰며 타박했다. 얼마 전에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하더니, 과연 오랜만에 만난 얼굴이 홀쭉하게 야위어 보였다.

“……나 당분간 술 한 잔 이상 안 마셔.”

나는 빈 맥주잔을 서먹하게 흔들며 변명했다.

“미친놈아. 그럼 여기 왜 왔어.”

“그냥, 잠이 안 와서 나온 건데.”

사실이 그랬다. 잠이 안 오니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진 만큼 잠기운이 달아나는 악순환을 요즘 매일 같이 겪고 있었다. 기다리던 종강을 앞둔 상황임에도 조금도 후련하지 않고 답답하기만 했다. 늘어난 거라곤 한숨과 혼잣말뿐.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칼을 움켜쥐고 끙끙 앓는 전에 없던 버릇까지 생겼다. 그런 와중에 친구놈한테서 나오란 연락이 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뿐이었다.

“어이고, 혼자 뻘짓하고 난리 났다. 야, 그냥 마셔.”

“아! 주지 말라니까……!”

뽈뽈뽈뽈, 맥주잔으로 흰 거품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갈수록 더워져서 입맛도 떨어졌는데 술맛은 더 없었다.

“뭔 일 있지 너.”

“아니.”

뜨끔했지만 감정의 동요를 숨기기 위해 마른안주를 입안에 털어 넣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으로는 취한 남녀가 잔뜩 몸을 밀착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뭔 일 나겠네.”

같은 곳을 보고 있었는지 정재환의 입에서 비릿한 야유가 흘러나왔다.

“……그러게.”

괜히 목이 메는 기분에 잔을 들어 맥주를 몇 모금 삼켰다. 가게 안에선 때마침 사랑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초점이 흐릿해진 줄도 의식하지 못한 채 바깥을 내다보고 있던 나는 문득 충동적으로 입술을 열었다.

“야. 내가 아는 친구 얘긴데…….”

삐딱한 자세로 다리를 떨며 휴대폰을 만지던 정재환이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어어, 대꾸를 한다.

“걔가, 어떤 애랑 단둘이서 술을 마셨는데…… 어? 듣고 있어?”

“어. 단둘이서 술 마셨다고. 얘기 해.”

슬쩍 눈을 한 번 들어 마주치더니 다시 휴대폰에만 관심을 두는 태도가 서운한 한편으로 오히려 지나친 관심보다는 나을 듯하여 말을 이었다.

“어……. 하여튼, 내 친구가 인사불성으로 취해 가지고, 같이 마신 사람한테 술김에 고백을 했대. 좋아하지도 않는데 완전 진지하게.”

“헐. 좆됐네. 그래서.”

“……그래서 걔한테 고백 받은 사람이, 다음날 취해서 한 소리인 거 알고 좀 상처를 받았나 봐.”

“당연하지. 기분 잡치지. 고백 받은 애가 여자지?”

차마 둘 다 남자라곤 말할 수 없어 대충 수긍해 보이자 정재환은 흥미가 생긴 모양인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문제가 또 있는 게, 고백하고 끝난 게 아니라 둘이 사귀기로 했었다는 거야.”

“여자 많이 별로냐? 못생겼어?”

“……아닐 걸 아마 엄청, 미인일……걸?”

“그럼 그냥 사귀면 되지, 뭘 또 취해서 한 소리였다고 솔직하게 말하냐 네 친구는. 병신이네.”

상대가 남자인 걸 밝히면 이 상황이 왜 문제인지가 훨씬 명확해질 테지만 차마 거기까지 말할 기분은 들지 않아 대충 말을 돌렸다.

“근데 이상한 게, 그…… 여자애는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했거든?”

“받아 준 여자애가 원래 좋아하는 사람 있었다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나는 별 관심 없는 척 뻥튀기 하나를 입안에 넣었다.

“그 여자애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는 잘 안 됐고?”

“어어. 그리고 그 여자애가 내 친구한테 좋아하는 사람이랑 잘 되게 이것저것 도와달라고 막…… 그랬었다는데.”

“그러다 맘 기울었나 보지. 네 친구한테.”

또 심장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체한 것도 아닌데 갑갑한 명치께를 느끼며 찬물을 한번에 들이켰다.

“아님, 여자애도 좋아하는 애랑 잘 안 되니까 외로워서 그냥 아무나 받아 준 거 아니냐?”

켈룩, 작게 사레가 들려 기침을 뱉어 낸 뒤 티슈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아무나는 아닌데. 걔 그렇게 가벼운 앤 아닌데. 눈도 높을 텐데 아마.”

조금 억울해졌다. 맘 같아선 고정원에 대해서 더 상세하게 알려 주고 싶었지만 친구 얘기라고 각색해 버린 시점에서 이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소극적인 변명밖엔 할 수 없었다.

“……혹시 이거 네 얘기냐?”

“무슨, 뭐래. 내 친구 얘기야. 내 얘기면 내 얘기라 하지.”

허를 찌르는 질문에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얼굴이 빨개진 것 같아 쓰고 온 야구모자의 챙을 잡아당겨 더 깊숙하게 눌렀다. 허, 하고 기가 차다는 듯 코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거저거 연애 고자 새끼. 네가 그러니까 여잘 못 사귀지.”

망할. 민망함을 견디느라 입술을 사리물고 딴청을 부렸다. 오래된 친구놈들하고 만나면 늘 이런 식으로 탈탈 털리니까 싫은 거였다. 내가 연애 경험이 전무한 것도 여자랑 썸조차 제대로 못 탄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쉽게 간파당하고 얕잡히곤 했다.

더 이상 무시당하기 싫어서 대학에선 허세 가득 담아 없는 경험을 부풀려 댔건만. 뒷감당이 이렇게 무섭고 버거운 것일 줄이야.

“지금이라도 다시 사귀자 하든가.”

“아, 내 얘기 아니라고.”

빨개진 얼굴로 부인해 봤자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정재환에게 그 이상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눈치는 빨라도 주변 사람 엿 먹이기 좋아하는 정재환은 한번 문 건수를 놓치지 않고 그 뒤로 시도 때도 없이 공격을 해 왔다. 설마 취해서 끝까지 갔느냐는 질문엔 그만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자기가 다 계산을 하겠다는 간곡한 부탁과 함께 만류당해 간신히 참았다.

“그래서, 인휘 친구 분 콘돔은 잘 챙기셨대? 아니 끼는 법은 아셨대?”

“……닥치고 술이나 마셔라.”

정신없이 치고 들어오는 질문 폭격에 지친 나는 어느새 물처럼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새벽녘, 나는 집에 돌아와 씻지도 않고 협소한 침대에서 몸을 웅크린 채 연신 혼잣말을 했다. 내내 속에 응어리져 있던 것이 술을 마시니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야, 고정원…… 나 억울하다. 내가 실수한 건 맞는데…… 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떡해……. 내가 요즘, 잠도 잘 못 자 너 때문에……. 어? 밥도 잘 안 넘어간다고. 아냐고……. 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더만, 나는, 후…….”

그날 이후로 생각의 연속이었다. 내가 정말 고정원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건지, 사실이라면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고정원과 친해지기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빠짐없이 되새김질하며 놓친 감정들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어떤 대화를, 어떤 눈빛을, 어떤 느낌들을 주고받았었는지. 그리고 그 많은 흐름들 속에 내가 고정원에게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순간이 정말 있었는지에 대해.

그런 생각의 작업들을 거치면서 스스로도 놀랐던 건, 짚이는 순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너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며……. 걔 때문에 나한테 배울 거 다 배우고…… 근데 왜, 나랑 그렇게 쉽게 사귀고, 엄청 막, 잘해 주고……. 넌 마음이 그렇게 쉽게 변하냐? 나는 이렇게 어려운데…… 넌 뭐가 그렇게 쉬운데.”

정말로 묻고 싶었다. 고정원의 진심이 알고 싶었다. 정재환이 했던 말대로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과 마음이 통하지 않으니 외로워서, 옆에서 키스도 하고 이것저것 같이 하던 내가 좋아한다 말하니 마음이 동했던 건지. 아니면, 정말로 좋아하던 사람이 아닌 나한테 더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던 건지.

우리가 동성이라는 사실을 문제 삼지 않을 정도로 나라는 사람과 진심으로 잘해 보고 싶었던 거라면. 고정원도 나처럼, 내가 고정원하고 있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처럼…… 보통의 동성친구에게는 느낄 수 없던 어떤 ‘다름’이나 ‘특별함’을 내게서 느꼈던 거라면.

그랬던 거라면, 이렇게는 끝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외로워서 그랬다곤 하지 마……. 그건, 진짜…….”

의식이 점점이 끊겨 나가는 게 느껴졌다. 잘 자 인휘야.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조금 의아함을 느끼며, 그리고 유난히 뜨거운 뺨을 느끼며 수렁처럼 깊은 수마로 빠져들어 갔다.

* * *

아침부터 숙취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럴까봐 쟁여 둔 꿀 음료수를 몇 병이나 마셔 가며 속을 달랬지만 컨디션이 영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종강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부어 마시자고 있는 날인데 여러모로 술이 넘어갈 만한 상황이 아니라 참석이 고민됐다. 아침에 일어나 확인한 통화 목록에 고정원의 이름이 찍혀 있었던 건 더욱이 강력한 불참 사유가 되었다.

그러니까 새벽녘에 혼잣말이라고 중얼거렸던 독백들이 사실은 전부 고정원에게 전화를 걸어 지껄여 댄 것이었다. 십여 분이 넘어가는 통화 기록을 확인했을 땐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뒤로 넘어갈 뻔했다.

이런 또라이야…… 진짜 왜 이러고 사냐.

아무리 지나간 시간을 탓한들 해결되는 건 없었다.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한참 동안 괴로워하던 나는, 차라리 잘 됐다고 자위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뒤로 얼마간 제자리를 빙빙 돌며 헛짓을 하다가 끝내 종강 모임에 참여하는 쪽으로 결정을 지었다. 그래야 고정원의 얼굴도 보고,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뭐라도 진전이 있을 것 같아서.

씻기 위해 옷가지를 챙겨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침대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지잉, 울렸다. 심장이 그 소리에 반응하여 진동했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 때문이었다. 천천히 다가가 핸드폰을 집어 올렸다. 액정에 뜬 발신자의 저장된 이름을 확인함과 동시에, 나지막한 한숨이 터졌다.

“여보세요.”

-조인희! 오늘 종강 파티 오지?

김강우였다.

“응. 가야지.”

-어 꼭 와라. 오늘 진짜 완전 재밌을 듯.

김강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뭐 재밌는 일 있어?”

-너 고정원 얘기 못 들었냐?

생각지도 못한, 동시에 계속 생각하고 있던 이름이 튀어나오자 놀라서 되물었다.

“무슨 얘기?”

-고정원 피아노과 애랑 소개팅하잖아. 매번 거절하더니 뭔 바람이 불었대. 지금 학교 여자애들 존나 침울하고 난리 남.

김강우는 우스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낄낄거렸다. 나는 멍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라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간단한 말조차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김강우가 의아한 목소리로 뭐 하냐고 물어 왔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소개팅한다는 말을 전해 들은 것뿐인데, 수심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사고와 행동이 느려지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선 방금 들은 말만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어……. 야, 강우야 나 급히 할 게 있어서 나중에 얘기하자.”

겨우 통화를 수습하고 나니 아무것도 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몸을 웅크렸다.

나는 어느샌가 또 다시 고정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마주치면 인사만 할 뿐인 고정원과 나는 마치 친하게 지내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개인적인 연락은 전혀 없고, 어떤 접점도 없다. 다만 나 혼자 일방적으로 고정원을 지켜본다는 게 전과는 달라진 점이었다.

왜 나만 이렇게 고정원을 신경 쓰고 지켜보고 있는 걸까.

서글픈 의아함을 느낀 나는 몸을 둥글게 말고 그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정말로 고정원을 짝사랑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하지만 울적한 기분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또 다른 감정으로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종강 파티고 뭐고 그냥 집에서 쉬어야겠단 생각이었다. 근데 막상 자려고 가만히 누워서 눈을 감는데, 이상하게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누군 잠도 잘 못 자고 밥맛도 떨어지고 하루 종일 뭐에 홀린 사람처럼 이러고 지내는데 누군 여자 만나 보겠다고 그새 소개팅 약속을 잡아?

참나.

벌떡 일어나 씻고 집을 나선 나는 머리부터 하러 갔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대외용으로 이미지를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내가 아주 즐겁게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보여 주기 위한.

‘얼굴형이 갸름하고 피부가 희니까 이런 스타일이 잘 어울리는 거예요. 정말, 내가 이 머리 해 준 사람들 중에 제일 예쁘시다.’

헤어디자이너에게 찬사에 가까운 칭찬을 듣고 거리로 나오자 왠지 지나치는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쇼윈도에 비치는 내 모습은 내가 봐도 눈이 갈 만큼 평소보다 몇 배로 환해 보였다.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면 적어도 몇날며칠 잠을 설쳐가며 미련을 떤 사람처럼 보이진 않을 듯했다.

“인휘야, 너 머리 까맣게 하니까 훨씬 이쁘다?”

다행히 혼자서만 느낀 감상은 아니었는지, 저녁이 되고 모임에 참석했을 때 보는 사람들마다 반응이 좋았다. 선배 누나 하나는 굳이 옆자리에 와서 뺨이며 어깨 등을 만져댔다.

“누나도 머리 새로 했네요? 어,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유리 선배 머리랑 똑같은데?”

“아 조인휘 혼날래! 완전 다르거든?”

지나친 밀착이 거북스럽긴 했지만 ‘여자 많이 만나 본 남자’인 척 떠벌리고 다녔던 주제에 이성과의 스킨십에 순진하게 반응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언제나처럼 장난을 주고받았다.

“유리 선배 사진 들고 가서 이렇게 해 달라고 했죠?”

“야, 아니라고!”

그러다 웃으면서 내 허벅다리를 쳐대는 누나의 손이 안쪽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다리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전부터 느꼈지만, 역시 이 선배는 좀 부담스럽다.

불편한 걸 꾹 참으며 안주를 입안에 욱여넣는 중이었다. 무슨 일에서인지, 일순 테이블의 이목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걸 느끼고 고갤 들었다.

“여기 자리 있어?”

“어, 고정원!”

키가 큰 미남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자 주변 일대가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감상과 다르게, 나는 방금 씹어 삼킨 음식물이 가슴팍에 콱 얹히는 기분이었다.

고정원의 등장을 알아채고 여기저기서 몰려들면서 구석에 놓여 있던 우리 테이블의 주변이 금세 시장통처럼 북적거렸다.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고정원이 입학한 뒤로 학과 행사의 참여율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고 하던데, 과연 사실인 듯했다. 어딜 가나 관심의 중심축이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그땐 그러려니 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 기분이 묘해질 건 또 뭔지.

“선배님. 저 자리 좀 양보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한바탕 사람들 사이에 휩싸여 있던 고정원이 다시금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한 말에 다들, 그중에서도 특히 나와 내 옆에 앉아 있던 선배 누나가 가장 당황하고 말았다.

“어?”

“인휘랑 할 얘기가 좀 있어서요. 죄송해요.”

“아아, 아니야! 둘이 얘기해!”

조금 뜬금없이 느껴질 법한 부탁을 받은 선배는 의외로 바로 자리를 양보하고 다른 테이블로 떠났다. 평소 성격 같았으면 뻔뻔하게 눌러앉을 것 같은데, 고정원 쪽에서 하도 딱딱하게 부탁을 하니 거절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나는 일부러 딴청을 했다. 그날 이후로 맨날 인사만 하고 가 버리고 먼저 연락하는 일도 일체 없었던 주제에 느닷없이 이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

고정원이 옆으로 앉자 소파의 쿠션이 더 깊숙이 내려앉았다. 동시에 익숙한 향수 냄새가 미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시원하면서 달콤한 향기를 맡은 것만으로 학습된 조건 반응처럼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해, 낭패감을 느낀 나는 눈앞에 놓인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속 괜찮아?”

자리가 좁아서 허벅지가 맞닿았다. 겹쳐진 부분으로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덥고, 갑갑했다. 애초에 고정원이 지나치게 안쪽으로 들어와 앉은 탓이었다.

“어.”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새벽녘에 전화를 걸어 주정 부렸던 게 생각나서 차마 쳐다보지 못했다는 게 맞았다.

실은 고정원이랑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거 자체가 엄청 오랜만이고 어색한 느낌이라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속으론 허둥지둥했다. 그동안 무시하다 신경 써 주는 척하는 태도에 괘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에겐 더 이상 별 다른 소리 없이 고정원은 맞은편의 애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피상적인 학교 얘기들을 흘려들으며 나는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마셔. 어제도 많이 마셨잖아.”

아무 생각 없이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가 저지당하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잔을 쥔 내 손 위로 고정원의 손이 겹쳐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아연해져서 얼굴을 뒤로 뺐다.

“엥? 어제 둘이 또 마셨었어? 요새 되게 친하다 너네?”

“…….”

정확히는 같이 있지도 않았고, 둘이 마신 게 아니라 나만 마셨던 거지만. 뭐라고 대답 할 말이 없어서 괜히 핸드폰을 만지며 대답을 얼버무리는데, 구석에서 내내 통화를 하고 있던 동기 하나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아 맞다 인휘야, 너 혹시 소개팅 할래?”

“어……?”

“디자인과에 아는 애가 너 사진 보고 맘에 든다고 계속 소개시켜 달라 했었는데.”

잠깐만, 사진 보여 줄게. 적극적으로 주선의 의지를 보이는 동기가 눈앞에 인스타그램 화면을 들이밀었다. 그 안에는 단정한 스타일의 여자애가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랑 동아리 같이 하는 애거든? 얘가 가끔가다 똘끼가 있어서 그렇지 다른 건 다 괜찮아. 몸매도 되게 좋다?”

같은 학교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서 봤었던가?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문득 기분이 묘해졌다. 고정원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소개팅 제의를 받은 상황이 새삼 의식된 까닭에서였다.

“예쁘네.”

사진을 들여다보며 관심 있는 시늉을 했다. 고정원의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떤 얼굴을 하고 이쪽을 보고 있는 건지 확인해 보고 싶은 걸 꾹 참고, 테이블 밑으로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나쁜 짓을 도모하는 것처럼 심장이 바쁘게 뛰었다.

“한번 만나 볼까.”

“어, 진짜? 대박. 너 소개팅 잘 안 한대서 기대는 하지 말라 했는데. 얘 되게 좋아하겠다. 그럼 일단 너 번호 알려 줄게.”

“어 그래.”

내키지도 않고 예정에 없던 일이라 걱정이 되긴 했다. 하지만 그보단 통쾌함이 더 컸다. 잠깐이지만 고정원의 소개팅 얘길 듣고 혼자 땅 파던 것을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려고 하는 통에 물을 마시는 척하며 표정을 숨겨야 했다.

그때 툭, 고정원의 어깨가 부딪혔다. 아까부터 원치 않게 발생하는 접촉이 몹시 거슬리기 시작해, 소파의 끄트머리에 바짝 몸을 당겨 앉았다. 그리고 틈이 생기도록 일부러 소파 시트에 한쪽 손을 짚었다. 닿는 게 싫다는 나름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굳이 쳐다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못내 궁금했기 때문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맞은편의 티슈를 집으며 살짝 올려다보았다.

곧장 눈이 마주쳤다.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묘한 표정의, 하지만 어떤 불쾌감을 숨기지 못한 낯빛을 확인한 순간 뱃속이 들끓었다.

“큼.”

목을 가다듬고 모른 체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들뜨는 것 같기도 하고 긴장되는 것 같기도 한.

“아예, 다음 주에 시간 괜찮냐고 물어봐!”

나도 모르게 한 술 더 떠서 구체적인 날짜까지 잡았다.

“오, 그럴까? 알았어 지금 톡해 볼게.”

소란스러운 틈 사이로 내 옆자리만이 소리 없이 고요했다. 나는 그 침묵의 의미에 대해서 유추하다가, 갑자기 손끝에 닿은 감촉에 놀라서 어깨를 떨었다.

“…….”

고정원의 기다란 손이 내 손등 위로 살짝 포개졌다. 실수로 닿은 줄 알았으나 테이블 아래서 겹쳐진 손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술을 마시고 있는 뻔뻔한 옆얼굴을 보니 그게 아닌 듯했다.

이건 또 무슨 짓인가 싶어 손을 빼서 허벅지에 올려 두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 줄 알았던 손장난은 묘하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고정원의 손은 악착같이 내 손을 쫓아와 붙들고, 옭아맸다.

“왜 그래?”

“아니. 암 것도.”

맞은편에 앉은 동기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억지로 웃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보이지 않는 테이블 아래는 상황이 달랐다.

양손까지 써 가며 얽힌 손에서 벗어나려 하는데 힘 차이가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자꾸만 뜨거워졌다. 남모르게 사귀는 커플들이나 할 만한 행동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스럽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고정원한테 이렇게 억지스럽고 막무가내적인 데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아 맞다, 정원이 너도 피아노과 애랑 소개팅한다며. 웬일이야 네가?”

서로의 힘이 동시에 느슨해졌다.

“그거…….”

고정원이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데 손을 빼고 벌떡 일어나 버렸다.

“나 잠깐 밖에 좀.”

얘기가 진행될세라 한마디만 남기고 황급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고정원 소개팅 얘기 따위는 전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한낮에 비하여 많이 서늘해진 공기가 느껴졌다. 무작정 자리를 피했지만 딱히 나와 봤자 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대충 시간을 때우다 들어갈 생각으로 인적이 드문 가게의 뒤편으로 향했다.

뭐하는 짓인지 정말.

하아, 한숨과 함께 주변에 대충 몸을 기댔다. 그러자 한 번도 피워본 적도 없고 피우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담배가 생각났다. 이렇게 할 게 없을 땐 담배나 피우면 시간 때우기에 딱일 것 같아서였다.

“…….”

언제 들어갈까 생각하며 시멘트 바닥에 쿡, 쿡 발끝을 밀어 넣고 있는데 그때였다.

눈앞에 그림자가 졌다.

“여기서 뭐 해.”

낮고 상냥한 목소리가 잇따라 들려오자 눈앞이 핑 돌며 일그러졌다. 뒤늦게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붕 뜨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며, 나는 애매하게 시선을 올렸다.

“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온다.

뭐 하고 있느냐고 물었던 것에 대한 대답을 똑바로 하지 못하자 고정원은 다시 한 번 채근해 왔다.

“응?”

여전히 아이 다루듯 사근사근한 어투였다.

“그냥……. 바람 쐬고 있었는데.”

어눌하게 대답하며 뒷목을 쓸었다. 나를 따라 나온 건가. 아닌가. 혼란스러움 속에서 기분까지 움츠러들었다.

“그래.”

눈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안에서도 어색했는데 이렇게 둘만 따로 있으니 숨 쉬는 게 다 의식될 정도였다.

“너는…… 왜, 나왔어?”

힐끔 쳐다보자 마찬가지로 어중간하게 시선을 놀리고 있던 고정원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좀 답답해서.”

“…….”

방금 전까지 테이블 아래서 그렇게 대담하게 내 손을 쥐어 대던 게 꼭 거짓말인 것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인 태도였다.

“아까…….”

아까 왜 그랬냐고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응? 하며 잘 안 들린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가까이 다가오는 고정원에게서 또다시 좋은 냄새가 풍겨 왔다. 나는 예기치 않게 가까워진 거리를 의식하며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내 고개가 아래를 파고들수록 고정원도 똑같이 얼굴을 가까이 붙여 왔고, 그 거리감을 참지 못한 나는 다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아까……! 왜, 그런 거야? 그, 테이블 밑에서.”

“……아.”

쓸데없는 긴장을 해야 할 만큼 가까웠던 거리는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대답을 기다리다가 살짝 올려다보자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한 장난이었던 걸까. 하지만 집요하게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옭아매던 힘은 장난이라기 보단 어떤 감정이 실린 것처럼 느껴졌었다.

아직도 얼얼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 괜스레 손을 주무르자 시선이 그 위로 내려앉았다.

“많이 아팠어?”

고정원은 가게 안에서는 그렇게 옭아매던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연약한 것을 다루는 듯한 손길에 참을 수 없는 민망함을 느끼고 후다닥 손을 뺐다.

“아니.”

콜록, 가렵지도 않은 목에 괜한 기침으로 자극을 주며 시멘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고정원이 만졌던 부분에서부터 번져 가는 묘한 느낌을 참느라 손톱을 세워 손바닥에 눌러 박았다.

“인휘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조심스럽다.

“……응?”

그 기운이 옮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조심스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소개팅, 하려고?”

“…….”

잘근잘근 누르던 손끝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또 다시 뱃속이 야릇하게 들끓는 것을 느꼈다.

“어……. 해 보게 한번.”

고정원이 내 소개팅을 신경 쓰고 있다. 그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기묘한 들뜸과 함께 목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너도, 소개팅 한다며. 잘 해 봐.”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쉽게 나왔다. 지금이라면 왠지 더한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짧은 정적이 흐른 뒤, 희미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한다고 한 적 없어.”

단호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갤 들자, 다소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해 보겠냐고 얘기만 나온 건데 와전된 거야. 한다고 확답한 적 없어.”

아…….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라 얼이 빠졌다.

“도움 많이 받은 선배라 거절하기 힘들어서 대답을 미뤘더니 그새 소문이 났네. 전혀 그럴 마음도 없었는데 황당하기도 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 거절할 걸 그랬어.”

답지 않게 정색을 하고 말하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꼭 내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처럼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나는 속으로 김강우를 탓했다. 확실치도 않은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 주범이 분명했다. 하여간 경솔한 자식. 덕분에 헛소문을 듣고 혼자서 삽질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그럼, 이만 들어갈까?”

소개팅 어떻게 거절하지. 홧김에 수락한 약속을 수습할 생각에 조금 심란해져서 발길을 뗐다. 하지만 채 한 걸음도 내딛기 전에 다시 걸음이 붙들렸다.

“인휘야.”

부르는 소리에 멈추고 올려다보니 고정원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다음 주에 시간 있어?”

“어……?”

다음 주? 갑작스런 물음의 의도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다음 주에 뭐가 있던가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가 자진해서 만든 다음 주에 있을 ‘약속’에 관해 떠올랐다.

아. 난데없이 웃음이 터질 거 같아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

“음……, 다음 주 언제?”

모르는 척 되물었다. 뭐라고 대답할까. 바쁜 척을 할까, 아니면 한 번은 만나 줄까. 고민하다가 올려다보았을 때, 마주한 고정원의 표정이 오묘하단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혹시 웃은 게 티가 났나 싶어서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

언제냐고 물었으면 대답이 돌아와야 하는데 고정원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시선이 하도 흔들림 없어서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조차 눈치가 보일 지경이었다.

“……왜, 그래?”

그리고도 고정원은 한참 동안 나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침묵. 또 침묵. 선선한 기운을 머금은 저녁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흩뜨렸다. 고정원은 그제야 고갤 돌렸다. 그리고 짧은 순간, 고정원의 두터운 목울대가 울리는 걸 보았다.

“……다음 주에 연락할게.”

“……어, 응.”

손끝이 저리고 입안이 바짝 말랐다.

혹시 고정원이 나한테 키스하려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말 정신 나간 착각이다.

“너희 여기서 뭐해?”

사이를 파고든 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아, 선배.”

“안 보인다 했더니 둘이 같이 있었네. 무슨 얘기 하고 있어?”

시원스런 웃음을 지으며 다가온 선배는 평소 접점이 별로 없는 고학년 선배였다. 이름이 강유나였던가. 개명을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몇몇 선배들은 아직까지도 개명 전의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그냥. 바깥바람 쐬러 나와 있었어요.”

나는 계속해서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작게 심호흡을 했다. 불순한 장면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싱숭했다.

“인휘야, 머리 잘랐네? 잘 어울린다.”

“아……. 감사합니다.”

꾸벅, 고갤 숙였다. 이 선배는 다른 선배들과 다르게 어른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같이 있는 것만으로 긴장이 되곤 했다.

“넌 어쩜 이렇게 피부가 좋니.”

화려한 손톱을 매단 손이 뺨을 스쳤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당황해서 눈을 내리깔자 이번엔 짧은 바지 아래로 드러난 매끈한 다리가 보였다. 어디에도 초점을 못 맞추고 방황하는 사이, 어느새 선배의 관심은 고정원에게로 옮겨 가 있었다.

“연락이 뜸해 요새?”

“그러게요. 시험 기간이었잖아요.”

둘은 듣는 수업이 꽤 겹치는 모양인지 친밀해 보였다. 주고받는 대화라든가, 강유나 선배의 스스럼없는 터치 같은 것들을 보고 있자면 썸 타는 남녀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일단 둘 다 길쭉길쭉하고 성숙한 느낌이라 외모부터가 잘 어울렸다.

“자.”

선배가 고정원에게 내민 것은 하얀 담배 끝이 튀어나온 케이스였다. 고정원이 손을 들어 거절하자 선배는 ‘끊었어?’ 불만스럽게 말하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내 쪽을 쳐다보며 피겠냐는 의사를 묻기에 급하게 고개를 저어 의사를 밝혔다.

“끊진 않았는데, 이제 줄이려구요.”

고정원은 무심하게 말했다.

“너 얼마 피지도 않잖아. 끊겠단 소리네.”

속으로 놀랐다. 담배 연기도 그렇고 냄새도 그렇고, 피우는 사람 특유의 냄새에도 예민한 편인데 고정원에게선 단 한번도 비슷한 냄새조차 맡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흡연을 하고 있다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담배를 피우는 고정원의 모습은 잘 상상가지 않을 뿐더러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너무나 의외였다. 그래도 이 선배랑은 전에도 종종 같이 피웠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알고 있는 거겠지.

둘이 생각보다 친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개팅한다는 소문은 뭐야? 진짜야?”

“아……. 아뇨. 안 해요. 그 소문 때문에 지금 죽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고정원은 나를 쳐다봤다. 눈빛이, 꼭 원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황급히 골목 끄트머리의 길가로 시선을 던졌다. 심장이 또 울렁거리고 있었다.

사이에 끼지도, 그렇다고 나오지도 못하고 뻘쭘하게 서 있는 동안 둘은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다. 고정원은 선배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건 정말 이상한 행동이었다.

“그럼, 저는…….”

결국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끼어든 고정원이 먼저 선수를 쳤다.

“선배, 그럼 저희 먼저 들어가 볼게요.”

손이 붙들려 이끌려 간 나는 가다 말고 뒤돌아서 꾸벅 인사를 했다. 선배가 손을 흔들어 주는 게 보였다. 마주 잡힌 손은 술집 문 앞에 다다라 문이 열리기 직전에야 원래대로 풀렸다.

“야, 너희 어디 갔다 왔어?”

“하도 안 와서 둘이 어디로 나른 줄 알았네.”

자리로 돌아가니 다들 난리였다. 머쓱함에 어색하게 웃으며 고정원과는 이 앞에서 만난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어, 인휘, 너 얼굴……!”

풉, 하고 터지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뭐지? 뭐가 묻었나 의아해서 얼굴을 짚었다. 만져진 얼굴은 평소보다 뜨뜻했다.

“너 취했어? 볼이 무슨 갓난아기 뺨처럼…….”

“아하하, 인휘 완전 귀여워!”

손거울을 가져다준 동기 덕에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거울 속의 나는 볼터치를 바르기라도 한 것처럼 발그스름해진 양 뺨을 한 채 얼이 빠져 있었다.

“어……. 술기운 올랐나.”

언제부터 이런 상태였는지도 짐작가지 않았다. 설마 계속해서 이런 꼴이었나. 민망해서 더 열이 몰리는 걸 느꼈다. 거칠게 얼굴을 문지르고 차가운 것들을 뺨에 대었다.

쉽사리 내리지 않는 열감을 느끼며 초조해진 나는 옆에 앉은 이에게 쏘아붙이듯 말을 걸었다.

“고정원.”

“응?”

“……그만 좀 쳐다봐. 아까부터.”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웅얼대자, 감시자처럼 내게 고정되어 있던 눈이 그제야 다른 곳을 향했다.

술자리는 계속해서 이어질 기세였다. 집이 먼 몇몇을 제외하고 남은 대부분의 인원은 갈수록 흥이 오르는 분위기 속에서 2차 얘기를 꺼냈고, 이어서 옮길 장소를 물색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야 오늘 들어가지 말자! 다들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고정원은 줄곧 내 옆자리에서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별 다른 대화랄 것도 없이 그저 내가 잔을 들면 조금만 마시라고 참견을 하거나, 내 손이 자주 가는 안주를 굳이 가까이까지 끌어 주거나 하는 과잉 친절을 베풀 뿐이었다.

테이블 아래로 손을 만지는 짓궂은 장난도 처음 이후로는 치지 않았다. 감시하듯 따라붙던 시선 또한 더 이상 없었다.

“…….”

다만 시선은 다른 곳에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전부 여자 동기나 선배들이었다. 물론 나를 향한 것이 아닌 고정원을 향한 것이었고. 옆에 앉은 내가 느낄 만큼 빈번하고 노골적이었다.

나는 사이다를 홀짝 거리며 고정원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생각보다 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너무 익숙하거나.

이런 식으로 고정원의 인기를 체감할 때면 정작 당사자가 좋아한다는 애는 대체 누구일까, 궁금증만 더해 갔다. 대체 어떤 애길래 고정원을 매력 없다고 찬 건지, 우리 학교라고 하니 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라면 그냥 사귈 텐데.

아프다고 하니 약이며 죽이며 양손 가득 바리바리 챙겨 와서 간호해 주던 고정원이 생각났다. 애정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고, 하나부터 열까지 챙기려 들고, 닿는 손끝까지도 부드럽고 조심스럽던…….

퍼뜩 생각을 멈춘 나는 남은 사이다를 들이켰다. 새삼스러운 자각이 뒤따르면서 기분이 묘해지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고정원과 나는 사귄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주 잠깐이고 서로 착각해서 생긴 일이었지만, 사귀었던 건 사실이었으니.

“…….”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그런지 자리가 불편해졌다. 가슴께가 갑갑하고 근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 아파?”

낮은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와 깜짝 놀랐다. 퍼뜩 고갤 들자 진중하게 나를 살피고 있는 눈과 마주쳤다. 딸꾹질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고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열이 좀 있는 거 같은데.”

커다란 손이 이마를 덮어왔다. 메마르고 따스한 감촉이 닿은 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 얼굴을 확 옆으로 빼며 괜찮다고 말했다.

고정원은 계속해서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봤다.

“인휘야 나 좀 봐봐. 괜찮은 거야?”

당황해서 빨개지는 얼굴도 신경 쓰이고 밀착된 것도 불편해서 모른 척 좀 해 줬음 하는데 계속 눈치 없이 굴고 있었다. 단단한 손이 어깨를 감싸 오자 눈앞이 어지러웠다. 으, 알 수 없는 신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입가를 틀어막았다.

“혹시 토할 것 같아?”

“아니……!”

내가 숙취 때문에 구역감을 느끼고 있다고 멋대로 착각한 고정원이 내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됐다고 하는데도 꿈쩍도 하질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기대다시피 해서 끌려갔다. 주위에서 괜찮으냐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망해서 취한 척 고개를 떨구고만 있었다.

“차라리 토하는 게 속 편할 거야.”

칸 안에 나를 밀어 넣고 쭈그려 앉게 한 고정원이 등 언저리를 토닥여 주며 말했다. 걱정스런 표정을 보고 있자니 억지로라도 게워 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불편하면 나가 있을게. 언제든 불러.”

혼자 남겨진 나는 벌게진 얼굴로 변기 앞에서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멀쩡한 속에서 구토가 나올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짜로 토하는 척을 하는 것도 이상했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 대충 레버를 내리고 밖으로 나가자, 벽에 기대 서 있던 고정원이 여전히 걱정의 기색이 묻어난 얼굴로 물었다.

“왜, 안 나와? 두드려 줄까?”

“……아니. 그냥 갑자기 쑥 내려간 거 같아.”

다행이다, 말하며 살포시 웃는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세면대를 향했다.

찬물을 틀어 연거푸 세수를 하고,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 돌아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본인의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는 손길에 당황해서 괜찮다고 밀어내는데도 귓전에 묻은 물기는 물론 양손까지 깨끗하게 닦였다.

“…….”

아팠을 때 찾아와 간호해 주던 고정원이 또 다시 생각났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기려 들던 고정원. 아주 잠깐이지만, 나와 사귀고 있던 고정원.

누가 꽉, 아프도록 붙잡았다 놓은 것처럼 손가락 마디마다 저릿거렸다.

“나 애 아니야.”

낯간지러움을 참기가 어려워 고맙다는 말 대신 괜히 무뚝뚝하게 쏘아붙이고 돌아섰다.

화장실을 나오니 다들 자리를 옮기기 위해 일어나는 중이었다. 원래부터 2차까지 참여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이때다 싶어 소지품을 챙겨 들고 주위에 있던 동기들에게 말을 꺼냈다.

“먼저 들어가 볼게. 몸이 좀 안 좋아서.”

가기 싫어서 댄 핑계긴 했지만 실제로 탈진한 것처럼 힘이 없긴 했다. 옆에서 신경 쓰이게 구는 한 사람이 있으니 가만히 있기만 해도 혼자 열이 올랐다 내렸다 피곤한 탓이었다. 감정 소모가 체력 소모로 이어지는 줄은 몰랐다.

눈이 마주친 몇몇 선배들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누가 붙들세라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고정원은 무리에게 붙들려 인파 속에 묻힌 상태였다. 서둘러 걸으면서도 말없이 나왔다는 게 걸리긴 했지만 나중에 연락하면 될 것 같았다.

‘소개팅, 하려고?’

‘다음 주에 시간 있어?’

신호등에 걸려 발걸음이 멈추었다. 나는 계속해서 고정원이 내게 했던 말들이나 행동들을 되새겨 보고 있었다.

초조해 보였던 건 기분 탓일까. 내가 소개팅 제안을 받은 순간부터 고정원이 보여 줬던 행동들을 가만히 살펴보며 역시 그건 질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고정원에게 느꼈던 것도 질투……일 테고.

“후…….”

가슴을 문지르며 심호흡을 했다. 막 신호가 바뀐 것을 확인하고 발을 내딛는데, 순간 팔이 붙들리면서 몸이 기우뚱 흔들렸다.

“말도 없이 가면 어떡해.”

뛰어왔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는 고정원과 마주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 너 2차 안 갔어?”

“너 아팠잖아. 걱정돼서.”

내가 아픈 것과 고정원이 2차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걱정해줬다는 게 좋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곧이어 데려다주겠다고 말하며 고정원이 앞서 걸었다.

밤길이 위험한 입장이 아니니 보호받을 필요는 없었다. 아프긴 하지만 환자도 아니고, 집도 무척이나 가까웠다. 거절할 만한 이유는 차고 넘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 없이 뒤따라 걸었다.

어느새 나란히 발걸음이 맞춰지며 길목엔 교차되는 발소리만 울렸다.

꽤 느린 속도로 걸어왔지만 워낙 거리가 가깝다 보니 집 앞에 도착한 건 금방이었다. 들어왔다 가라 해야 하나. 아니면 아예 자고 가라고 해야 하나. 생각이 많아지려는데 순간 지잉,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어두운 길목에서 화면이 반짝였다. 메시지였다. 저장되지 않은 이름과 함께 확인한 상대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소개 받기로 한 디자인과 애라는 걸 알았다.

“누구야?”

“……어, 그 소개, 받기로 한 애.”

괜히 눈치가 보여서 바로 답장을 하지 않고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신경 쓰이나? 힐끔 쳐다보니, 예상과 다르게 고정원은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 언제 만나게?”

“……아직 정한 건 아닌데.”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눈치가 보였다.

“괜찮으면, 같이 볼래?”

“어?”

“둘이서 어색하면, 같이 봐도 재밌을 거 같아서.”

순간 말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몇 초간 멍해졌다. 머릿속으로 나와 고정원 그리고 낯선 여자애가 만나는 장면이 떠오르면서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미안. 괜히 눈치 없이 낀다고 했나 보네.”

“그런 건 아닌데…….”

고정원이 왜 같이 보자고 하는 건지 그 속마음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 때문인 건지, 아니면 그냥 별 이유 없이 심심해서인지.

그리고 궁금했다. 전에 좋아한다던 애를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지, 아니면 지금은 마음이 달라졌는지도.

“나는 인휘랑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어.”

고정원이 민망한 것처럼 목 언저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같이 놀러도 다니고, 얘기도 나누고. 어색해지기 싫어.”

인휘는? 하고 묻는 말에 작게, 나도……, 하고 대답하자 그제야 안심이 된 것처럼 웃어 보였다.

“종강하면 만날 일이 거의 없으니까. 걱정했거든.”

다음 주에 보자는 것도 만날 구실을 만들려는 것이었구나 깨달았다. 고정원의 그런 노력이 고마워지면서 기분이 사르르 풀어졌다.

“나는 고정원 네가 나 피하는 줄 알았어.”

인사만 하고 쌩하니 스쳐가던 고정원의 모습을 떠올리며 약간의 서운함을 드러냈다. 그땐 정말 대화도 못 하고 영영 멀어질까 봐 겁이 났었다.

무슨 생각으로 나를 받아 줬던 건지, 그동안 나한테 어떤 감정을 느꼈던 건지 내내 묻고 싶었다. 그리고 나도 내가 느낀 감정들을 알려주고 싶었다.

“피한 거 아니야. 그냥, 생각을 좀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지.”

“…….”

하지만 고정원의 대답에 잠시 주춤해졌다. ‘정리’란 단어가 유독 귓가에 꽂혀 든 이유에서였다. 묘하게 어긋나는 대화의 방향이 기분 탓이길 바라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정리?”

“……그날 있었던 일들. 나만 연연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인휘가 불편하지 않게, 감정이랑 생각들 정리하고 싶었어.”

고정원이 한 마디 한 마디 더할 때마다 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쪽은 겨우 받아들이고 시작해 보려는데, 상대는 하나씩 치우고 없애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허탈해졌다.

불편한 적 없는데. 나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있었는데. 머릿속으론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정작 튀어나간 말은 소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정리, 된 거야 이제……?”

“그래.”

아무 미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고정원의 대답은 담백했다.

“미안했어. 인휘 넌 기억도 못하는데, 많이 황당했었지.”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 그렇지 뭐.”

두드려 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더 이상 말을 이어 가지 못한 채 멍하니 돌아섰다. 손에 따스한 감촉이 스친 것도 그와 동시였다.

“챙겨 먹어. 속 아프면 안 되잖아.”

눈 깜짝할 사이 비닐 봉투 하나가 손안에 쥐어졌다. 안을 벌려서 확인해 보자 숙취 해소 음료와 약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까 같이 걸어오는 길에 갑자기 편의점에 들렀던 게 이걸 사기 위해서였나 보다.

“…….”

“그럼, 가 볼게.”

“……응. 잘 들어가.”

다정함이 야속하게도 느껴질 수 있구나, 생각하며 힘없이 잘 가란 인사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침대 위로 엎어졌다. 불도 켜지 않아서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지잉, 지잉, 지잉. 연달아 진동소리가 울리며 메시지가 왔음을 알렸다. 나는 기계적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눈앞으로 가져왔다.

[푹 쉬고]

[잘 자]

[연락할게]

“하…….”

누가 보면 애인인 줄 알겠네.

한참동안 화면을 쳐다보다가 답장도 하지 않고 종료시켰다. 괜한 심술이 들기도 했고 단답으로 답장할 기운이 없을 만큼 울적하기도 해서였다.

“바보 같다 나 진짜…….”

고정원이 내가 소개팅 하는 걸 신경 쓰고 질투한다고 착각했던 게 창피했다. 나만 쳐다보고 이상한 행동을 하고, 그러니 내게 마음이 있는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혼자 의식하고 북 치고 장구 치고. 뭘 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신경 쓰이는 건, 감정과 생각들을 ‘정리했다’는 말이었다.

“아…….”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베개를 얼굴에 짓이겼다. 뭐 때문에 이렇게 괴로운 건가 생각할수록 더 괴로웠다. 이 지경까지 오고 나니 알게 모르게 외면해 왔던 감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귀고 싶다. 고정원이랑. 같은 남잔데. 이제 얘는 나 친구로만 생각할 텐데.

명백한 아쉬움이었다. 후회였다.

‘그럼 그냥 사귀면 되지, 뭘 또 취해서 한 소리였다고 솔직하게 말하냐 네 친구는. 병신이네.’

술을 마시면서 정재환이 했던 말이 뒤늦게 가슴을 때렸다. 취해서 우리가 사귀기로 했다는 걸 알게 됐을 땐 너무 황당하고 이해가 가지 않아서 실수라고 솔직하게 말했는데 이제 와서 과거의 나를 말리고 싶었다.

늦은 거겠지. 다 정리했다는데, 다시 사귀자고 할 수도 없잖아.

힘없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 화면을 열었다. 그곳엔 고정원이 보내 온 다정한 말들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차례로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지. 자각하고 보니 키워 온 감정이 생각보다 단단하고 거대하게 느껴졌다.

방금 헤어졌는데,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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