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알았어요. 안고만 있을게요, 안고만.”
계원은 이제 정말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듯 이서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 안고만 있는 게 문제였다. 옷 위로 느껴지는 차계원의 딱딱한 상체가 이상야릇한 기분을 들게 했다. 거기다 이서의 하의는 거의 다 벗겨져서, 그의 맨살을 그대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계원이 타오를 것처럼 붉어진 이서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하체를 뭉근하게 비볐다. 성난 성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윽…….”
이서가 작게 신음했다. 계원은 계속 제 하체를 문지르며, 이서의 턱뼈를 짓씹었다.
“하아, 애 하나 배 줄래요? 대표님 닮은 애로.”
“방, 나 다른 방…….”
백이서가 또 방 타령을 한다. 계원이 순식간에 얼굴을 구겼다. 원룸으로 이사라도 가든가 해야지.
“애 낳으면 줄게요. 원래 애 셋 낳기 전에는 뭐 내주는 거 아니에요.”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근사근 속삭이며. 이서 위로 올라탔다.
외전 2
회사 정문이 보이는 길 건너 카페에서 이서는 휘준을 만났다. 원래 회사에서 만날까 했으나, 휘준은 회사까지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얼음이 반쯤 녹아 있는 두 잔의 아메리카노를 보며 이서는 휘준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아니면 자신이 먼저 아무 말이라도 꺼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이제 원래 살던 데서 지내는 거지?”
고민 끝에 겨우 꺼낸 말이 그거였다. 당연한 질문을 하고 나서야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올라왔으니 당연히 본인 집에서 지내겠지.
차계원의 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던 날, 뒤에서 멀어지는 차를 보던 휘준의 표정이 어땠을지 모르겠다. 그날 이서는 애써 휘준을 외면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날 이후로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몇 번의 통화를 하고 상황 설명도 했지만, 얼굴을 마주하는 것과는 달랐다.
“아니요. 이제 서울 생활은 정리하려고 합니다.”
“아……. 어디에서 지내게?”
이서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휘준은 대학 입학 후부터 쭉 서울에서 지냈었다.
“고모님 댁에서 계속 지내려고요. 농사일도 돕고요. 요즘 일손이 모자라서 말입니다. 오늘은 선배 뵈려고 온 겁니다.”
이제 회사 일에서 손을 떼겠다는 뜻이었다. 이날 이때까지 있어 준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다. 다른 일을 찾아보라며, 몇 번이나 휘준을 내보내려 하기도 했었다.
그런 주제에 이서는 당연하게 휘준의 자리를 비워 놨었다. 이제라도 제자리를 찾아가니 다행인 건데, 담담하게 다른 일을 하겠다고 말하는 그가 낯설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때…….”
말을 하려던 이서가 목을 가다듬었다. 커피를 마셨는데도 목구멍 안이 버석했다.
“그렇게 와서 미안해. 네가 얼마나 노력해 줬는지 알아. 나를 위해서도, 회사를 위해서도.”
이서가 차분하게 말을 이으려 노력했다. 어제 잠들기 전, 휘준에게 해야 할 말을 번호까지 매겨 머릿속으로 정리해 놨었다. 애석하게도 그에게 해야 할 말 대부분이 사과와 감사였다.
“근데, 계속 그렇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 네 덕분에 많은 게 정리됐지만, 그만큼 불안했고.”
휘준의 고모님 집에서 지내며, 하루도 온전하게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쫓기듯 내려가 얹혀 지내던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었고, 앞으로의 계획이나 대책 또한 없었으니까.
모순적이게도, 지금은 최소 불안하지는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지금이 나아 보일 것이다. 회사는 승승장구하고 있고, 자신은 사회로 나온 뒤 처음으로 빚 없는 생활을 맛보고 있으니까.
“이해합니다. 전화로도 말씀드렸잖아요.”
“그치, 그랬었는데 혹시나 네가 걱정할까 봐. 나 때문에 여태 고생했으니 내가 미울 수도 있고…….”
오늘 카페로 오면서, 휘준이 자신을 원망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오로지 자신 때문에 같이 이 고생을 했으니까. 그런데도 자신은 마지막까지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렸으니까.
그러나 이서의 복잡한 마음과 달리 휘준의 얼굴은 개운해 보였다. 짐을 내려놓은 듯 가벼운 표정이었다.
“저, 선배 걱정 안 합니다. 잘됐다고 생각해요. 제일 합리적인 결정을 하셨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다. 난 네가 서운해할 줄 알았어.”
이서가 물기 가득한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휘준의 잔이 마음에 걸렸다.
“제가 선배한테 어떻게 서운해합니까.”
휘준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슬쩍 웃었다. 백이서는 여전히 자신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계원은 여전히 싫습니다. 그 사람은 뼛속까지 이기적이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소송을 진행시키려 했다. 어떻게든 그와 백이서를 떨어트리고 싶었다. 그러나.
“제 뜻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면……. 아마 해결되는 건 없었겠죠. 빚은 더 늘었을 거고. 여력이 없는 저희는 회생 불가능한 상태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아니야. 또 모르지. 네 말대로 다시 시작했으면, 더 나은 길이 있었을지도 몰라. 내가 겁이 많고 못나서. 그래서 이런 선택을 한 거야.”
이서의 자신감 없는 목소리에 휘준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길은 없다. 있었다면 몇 년 동안 이렇게 고생만 하지는 않았을 거다.
“저희, 사업에는 영 소질이 없잖습니까. 얼떨결에 떠맡은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게 신기하죠.”
“…….”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는 백이서의 얼굴에는 죄책감과 미안함, 안타까움 같은 것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친지 하나 오지 않았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그는 저런 모습이었다. 제 어머니를 본 적도 없으면서.
“선배를 좋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백이서의 고개가 정면으로 향하며, 흔들리는 동공이 휘준을 바라본다. 그 위로 앳된 백이서가 겹쳐 보였다. 조금 더 활발하고 볼살이 올라 있던.
대학 생활을 떠올리면 백이서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군기 문화에도, 매일 부대끼며 생활하는 동기들에게도 적응하지 못했었다. 아마 이 사람이 없었다면 대학 졸업장을 무사히 따지는 못했겠지. 금방 포기하고, 미련 없이 다른 길로 빠졌을 거다.
“예전에요. 아주 예전에.”
휘준은 별일 아니라는 듯, 그저 아주 가벼운 농담을 했다는 듯 가볍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차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가 보겠습니다.”
“벌써……?”
이서는 조금 전 당황했던 것도 잊고 그를 따라 일어섰다. 이다음에는 한참 후에나 얼굴을 마주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회사 일손 부족하면 말씀하십시오. 도우러 오겠습니다.”
“그래.”
이서가 휘준을 따라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자신이 그를 먼저 부를 일은 없을 것이다. 휘준 역시 먼저 오지 않을 것이고.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완연한 봄이 왔다. 5월이 넘어서자 이제 낮 무렵에는 더웠다. 워낙 더위를 많이 타는 이서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회사 앞에 서 있었다.
“그, 제가 진짜 가 봐야 하는데요.”
이서가 퍽 곤란한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오늘 계원은 이서에게 2시에 퇴근하라고 했다. 10분 정도를 일찍 나온 이서는 주차장으로 바로 갈까 하다가 회사 앞의 찻집에서 새로운 찻잎을 사 가려고 나왔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잘됐네요. 데려다줄게요.”
차계원과 닮은 것 같으면서 다른 얼굴이 빙글빙글 웃는다. 이서는 양손을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곤란하다는 몸짓으로 눈앞의 남자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저도 차를 가지고 와서요. 그거 타고 가면 돼서…….”
“저 이서 씨 하나 보려고 한 시간 거리를 달려왔는데 이러기예요? 차계원보다 더한 분이셨네.”
서운함을 가득 담은 단정한 눈매가 이서를 응시했다.
“제, 제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요. 마음대로 오셨으면서. 저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데.”
지묵은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면서도 자신을 나무라는 백이서를 보며 문득, 차계원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웃으며 몇 번 권하면 못 이기는 척 타기 마련인데.
“맞아요. 제가 예의가 없었죠.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지묵이 예의 바른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마지못해 그를 맞잡은 이서가 떨떠름함을 지우지 못했다. 눈앞의 강지묵 때문은 아니었다. 바로 차계원 때문이었다.
차계원이 이서에게 당부하는 것들은 언제나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강지묵은 상대하지 말라.’였다. 그를 마주치면 대꾸도 하지 말고 무시하라고 차계원은 몇 번이나 강조했다. 자신이 밖에서 강지묵과 대화한 걸 알면 밤이 새도록 괴롭힐 게 뻔했다.
“근데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계원이는 전화도 안 받지 집에 찾아가면 열어 주기는커녕 아예 무시하지.”
차계원의 집에 찾아갔던 때를 떠올리며 지묵이 이를 빠득 갈았다. 차라리 문전 박대 하거나 없는 척을 하면 약이나 덜 오르지, 초인종 소리를 듣고 음악 볼륨을 높이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얼마나 크게 높였으면 그 드넓은 마당을 지나 대문 앞에 선 제 귀에까지 들렸다.
지묵과 같은 걸 떠올린 듯 미안한 기색을 보이는 이서를 보며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