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도덕적 안락함-76화 (76/100)

#76

계원이 턱뼈를 더욱 세게 쥔다. 백이서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출근하는 백이서를 보는 건 꽤 재미있었다. 출발 전에 꼭 백미러를 몇 번씩 확인한다거나, 주행 중 누가 끼어들면 콧잔등을 씰룩인다거나, 주차 후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10분 정도는 앉아 있다가 내리는 것 같은 습관들을 새로 발견했다. 집에서의 백이서는 무방비하면서도 늘 조금씩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차에서의 그는 완벽한 무방비 그 자체라 보는 재미가 더 쏠쏠했다.

넘어졌다는 둥 편의점에 줄이 길었다는 둥 하는 거짓말에 속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백이서는 거짓말을 하면 티가 많이 났고, 자신은 회사 주차장과 로비의 CCTV를 하루에 한 번씩은 돌려봤다.

앙큼하게 늘어놓는 거짓말을 들으면서, 뻑하면 제집 드나들듯 드나드는 이진강을 보면서, 언제 한 번 족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타이밍에 어떻게 써먹어야 효과적일까. 어떻게 해야 허튼짓은 생각조차 말아야 한다는 걸 그 작은 머릿속에 박아 넣을 수 있을까.

‘말했잖아, 나는 너 사랑한다고. 아닌 적 없었다고.’

그러나 그가 여유롭게 그리던 계획들은 오늘 아침에 박살이 났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순식간에 온몸이 차게 얼어붙었다. 난생처음 느끼는 더러운 감각이었다. 누군가가 내장을 꺼내 쥐어짜기라도 하는 양 속이 뒤틀리다 못해 쓰렸다. 오물을 억지로 입에 넣은 양 구역질이 나왔다.

사랑? 어떻게 그렇게 같잖고 거지 같은 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까. 장기가 뒤집히고 토기가 몰려왔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인간의 머리를 으깨 버릴 수 있었을 텐데.

맥도 못 추고 되지도 않는 소리를 듣고만 있는 백이서도 잘잘 쥐고 흔들고 싶었다. 누가 억지로 제 입을 벌리고 절절 끓는 용암을 속에 들이붓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전 애인이라서 말 못 했어요?”

차계원의 목소리에서 쇳소리 비슷한 것이 났다. 퍼석한 음성이 몹시도 낯설어, 이서의 입술이 당황으로 움찔거렸다. 김승주가 예전에 사귀던 사람이라는 게 지금 대화에서 중요한 요소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거랑은 상관없이…….”

“전 애인이 시키니까 쪼르르 와서 합병이라는 둥 옮기라는 둥 떠들어댄 거냐고요.”

그는 따지려거나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이서의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차계원의 가슴이 숨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였다. 얼굴도 꼭 어디가 안 좋은 사람처럼 한껏 찌푸려져 있었는데 그 찌푸림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턱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목 근처로 내려온다.

“악!”

서늘한 감촉에 지레 놀란 이서가 비명부터 내질렀다. 다시 목이 졸릴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바로 위에서 고르지 못한 숨소리만 들렸다.

“…….”

목에 닿아 있던 감촉이 떨어지고, 이서가 감고 있던 눈을 하나씩 떴다. 차계원은 이서의 목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괴로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으…….”

그 시선을 따라 이서가 자신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제 손인데도 순간 몸이 움찔거렸다. 떨어질 줄 모르고 닿아 있는 시선이 소름 끼치게 불편했다.

탁.

한참을 못 박힌 듯 서 있던 차계원이 휙 뒤돌아 방 밖으로 나갔다.

* * *

차계원이 나가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나간 후 자신도 방 밖으로 나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 집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기는 했으나 방문을 나서서 그를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몸 상태가 너무 좋지 못했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끼니를 걸러서인지 기운도 없었다. 빈속이 음식물을 게워낸 것처럼 쓰렸다.

“목말라…….”

입 안이 메말라서 쩍쩍 달라붙었다. 힘들게 몸을 일으켜 잔의 절반가량 남아 있던 물을 남김없이 마셨다.

“콜록, 콜록.”

이서가 손등으로 입을 막으며 계속해서 나오는 잔기침을 참기 위해 애썼다. 언제 차계원이 다시 들어올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이서가 방에 딸린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요의가 느껴졌다. 화장실까지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데도 자꾸만 걸음이 휘청거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볼일을 본 후 거울을 통해 확인한 상태는 생각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시퍼런 멍이 연하게 자리 잡혀 있기는 했으나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다만,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 있어 제가 봐도 환자 같았다.

‘신고해야 하나?’

상태가 덜 심각하다고 해서 차계원이 제 목을 조른 게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그를 신고하면 그 뒤는 어떻게 될까. ‘소속 연예인이 회사 대표의 목을 졸랐다.’ 몇 날 며칠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이다. 애초에 믿기나 할지가 의문이다.

김승주도 그 몰골을 하고서 자신을 찾아왔다. 이서는 그의 성격을 잘 안다. 정말 회사의 입장을 고려해서 내린 선택은 아니었을 거다. 신고했어도 아무도 믿지 않았기에 자신을 찾아왔을 테지.

“휘준이……!”

창밖이 어둑어둑하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휘준이 떠올랐다. 차계원의 계약 건들에 관한 의견을 상의하고, 서류를 전달하기 위해 오후 중에 회사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이런.”

이서가 급하게 차계원이 던졌던 핸드폰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휘준은 이서가 늦으면 올 때까지 기다릴 놈이다. 연락도 되지 않았으니 꽤나 걱정했을 게 눈에 선했다.

“왜 없어…….”

핸드폰이 침대 근처에 떨어졌던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베개와 이불을 다 들추고 바닥을 둘러본 후에야 침대 밑으로 굴러 들어간 걸 발견했다.

“후우.”

팔을 뻗어 바닥을 몇 번 더듬거린 끝에야 핸드폰을 쥘 수 있었다. 그런데 핸드폰의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배터리가 다 된 건지 던져지면서 고장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핸드폰은 왼쪽 모서리도 약간 나가 있었다.

일단 충전해 봐야 작동되는지 알 수 있을 텐데, 모든 게 단조로운 차계원의 방에는 충전기마저 없었다. 분명 일전에 협탁 위에 두고 배터리를 충전한 기억이 있는데, 현재 협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재…….”

방에 없다면 찾아볼 만한 곳은 서재밖에 없다. 이서가 핸드폰의 까진 모서리 끝을 더듬으며 고민했다. 차계원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여태 방에서 뭉그적거린 건데.

“미치겠네.”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거두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던 이서가,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문고리를 아주 살살 돌렸다. 휘준에게 연락을 주는 게 먼저였다. 혹시나 싶어 핸드폰은 등 뒤로 숨겼다. 문을 여는 데만 수 초가 걸렸다.

끼이익.

그러나 한껏 조심한 게 무색하게 문밖은 고요했다. 이서가 제 몸만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로 문을 열고 나왔다.

‘차계원은 나간 건가?’

집 안에는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빛이 약한 조명 하나만 켜져 있는 거실은 어두웠다. 생각해 보면 차계원은 한 번도 아무 말 없이 나간 적이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둑고양이처럼 발꿈치를 들고 걷는데도 발걸음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달칵.

조심스럽게 들어선 서재도 거실과 마찬가지로 깜깜했다. 차계원이 있기라도 할까 봐 우려되었으나, 다행히 서재 안은 휑하기만 했다. 이서가 불을 켠 후 책상의 서랍들을 하나씩 열어 안을 뒤졌다. 달그락 소리가 날 때마다 등 뒤가 오싹했다.

“찾았다.”

서랍 구석에 있는 충전기를 겨우 발견하고 책상 바로 옆에 달린 콘센트에 꽂았다. 몇 분 정도 지나자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저녁 조금 지난 시간이겠거니 했는데 핸드폰에 뜬 시각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징. 징.

화면이 켜지기 무섭게 문자 알림이 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휘준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문자 내용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전화 먼저 걸었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쫓기고 있는 것처럼 괜히 마음이 조급했다.

[선배?]

늦은 시간임에도 신호음이 가자마자 핸드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한 마음과 안심되는 마음이 같이 들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톰한 러그가 푹신했다.

“휘준아!”

[어떻게 되신 겁니까? 연락은 왜 계속 안 되셨고요.]

“미안해, 걱정했지. 많이 기다렸어?”

이서는 말하면서도 계속 서재의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쪽 손으로는 러그의 털을 몽땅 뽑을 듯이 쥐고 있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데스크 직원은 선배가 그냥 일찍 들어갔다는데 저한테는 일언반구 언급 없으셨고, 메시지 답장도 안 하셨잖습니까. 전화도 엄청 했습니다. 핸드폰까지 꺼 두시고는.]

밖에 있는 건지 휘준의 목소리 위로 자동차들이 달리는 소리가 겹쳐 들렸다. 빠르게 다그치는 그의 음성이 낯설었다.

“일이……. 일이 있었어.”

[안 좋은 일입니까? 무슨 일 생긴 겁니까?]

“아니, 아니야. 핸드폰은 배터리가 나가서. 미안해.”

[일이 있으셨으면 저한테 말을……. 하아. 됐습니다.]

휘준이 답답하다는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 빵빵거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가 크게 울렸다.

“혹시 나 때문에 밖인 거야?”

[……아닙니다. 저도 일 있어서 나와 있는 거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큰일 없으신 거면 다행입니다.]

이서가 러그를 쥐던 손으로 입술을 뜯었다. 휘준에게 와 달라고 할까. 자신 좀 도와 달라고, 데리러 와 달라고 할까. 휘준이라면 아무 말 없이 와 줄 텐데.

[서류는 각각 잘 전달했습니다.]

“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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