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오늘 예정됐던 시사회는 언론, 배급 시사회였다. 언론 관계자와 배급 관계자를 주 대상으로 하는 시사회며, 언론매체에 최우선적으로 노출되는 시사회이기도 했다.
“다른 연락해 볼 만한 데는 없어요?”
[없어요. 아무 데도 없어요! 어떡해요.]
무대인사 시사회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오늘 진행되는 제작 관계자와 출연진의 인터뷰는 영화 홍보로도 쓰이고는 했다.
당장 내일은 유명 인사들을 초대해 진행하는 VIP 시사회 일정이 잡혀 있었다.
“친하게 지내는 연예인 동료나 그런 것도…….”
[없다고요. 계원이 친한 사람도 없어요.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에요? 벌써 기사 다 뜨기 시작했어요!]
김건은 이미 패닉이 온 상태 같았다. 이서가 자신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를 달랬다.
“일단 진정하고. 제가 연락해 볼게요. 연락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네네. 바로 연락 주세요. 아셨죠? 저는 일단 계원이 집 다시 가볼게요.]
김건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이서가 차계원의 번호를 눌렀다. 어제의 일이 떠올라 잠깐 멈칫했지만, 제 불편함이나 민망함을 먼저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뚜. 뚜. 뚜.
핸드폰은 꺼져 있지는 않았으나 신호음만 갈 뿐, 차계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급한 대로 문자를 남긴 이서가 포털 사이트에 먼저 들어갔다.
[속보] 배우 차계원 시사회 펑크 내
[속보] 근면 성실의 아이콘 차계원. 데뷔 이래 처음으로 펑크. 팬들 걱정이 커
[특종] 차계원 새로운 소속사와 불화설?
[단독보도] 영화배우 차계원 시사회 펑크. 소속사도 이유를 몰라? 원인은 소속사와의 불화?
차계원으로 도배된 기사가 실시간 검색어와 포털 사이트의 메인을 장악하고 있었다.
the beginning of an invisible shackle
톡톡 튀는 리듬의 재즈가 거실에 흐른다. 오후를 넘어가자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가루처럼 흩날리는 눈을 보며 차계원은 긴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발이 끊길 듯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다리가 원목으로 된 검은색 가죽 의자는 계원의 움직임에 따라 끼익. 끼익. 흔들렸다.
“흐음. 요즘 기자들은 제목 참 잘 뽑는 거 같아요.”
“계원아. 있잖아.”
그 옆으로 김건이 안절부절못하며 차계원의 근처를 빙빙 돌았다. 향긋한 커피 향이 은은하게 풍긴다.
“자극적이고. 신선하고. 인재야. 인재.”
차계원이 한 손으로 슥슥. 스크롤을 내린다. 스크롤은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었다. 건성건성 기사를 확인하는 그의 반대쪽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 잔이 들려 있다.
“이건 살짝 심하지 않을까?”
거실을 가로지르는 가벼운 선율과 반대로 김건의 마음은 무거웠다. 밤송이 같은 게 속 안에서 굴러다니는 것 같다.
“차 좀 마셔요. 다 식겠네.”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기는 했으나 물 한 모금 마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차계원이 여유롭게 굴수록 초조함이 배가 된다.
“기사는 이제 그만 내라고 할까? 몇 시간째 너 검색어 1위야.”
“글쎄.”
“글쎄라니. 그렇게 대충 대답하는 게 어디 있어. 네가 대충이라는 게 아니라. 아니. 아니. 그럼 언제 내릴 건지만 말해 주면 안 되냐? 응? 그것도 어려운 건 아니잖아.”
“계속 뭐 마려운 개새끼처럼 굴 거면 가세요.”
“안 굴게. 안 굴면 돼? 나 가만히 있으면 돼? 그럼 네가 기사 내리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들까?”
“글쎄요.”
시큰둥하게 대답한 차계원이 메시지 함을 들어간다. 시사회가 펑크 나고 여섯 시간이 지나는 동안 백이서는 아침에 전화 한 통, 그리고 단 두 통의 메시지를 보냈다.
[차계원 씨. 오늘 스케줄 못 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무슨 일 있으신 건가요?]
[연락이 안 되셔서 다시 메시지 보냅니다. 차계원 씨 여유 되실 때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메시지는 딱 백이서다웠다. 조곤조곤하고 담백한 느낌을 주는. 온점까지 찍혀 있는 문장. 백이서는 셔츠를 입을 때도 단추가 목 끝까지 채워져 있었다.
“대표님도 많이 놀란 것 같았어. 유약한 면이 있으시잖아.”
건이 아이를 달래듯 저자세로 계원에게 설명한다.
“유약?”
퍽이나. 계원이 코웃음을 친다. 제가 본 백이서는 유약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사에 크게 불만이 없고 둥글둥글한 사람. 그게 겉으로 보이는 백이서였다. 자신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순둥하거나 소심한 게 아니었다. 그저 관심이 없는 거였다.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든 크게 동요하는 법이 없었다. 뭐든 그러려니.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이었다. 자신을 대하는 걸 봐도 그렇다. 겁을 주면 당시에만 조금 무서워할 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유약하다고? 차라리 무신경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거다. 그런 주제에 입술 좀 부딪혔다고 경계하는 꼴이라니.
“계원아……. 내일은 스케줄 갈 거지? 대표님이 네 걱정도 엄청 하시더라.”
“걱정? 뭐라는데.”
“그……. 너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막 그러시지.”
“아아.”
그럼 그렇지. 걱정은 무슨. 백이서가 퍽이나 제 걱정을 했겠다.
촬영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계원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바쁜 일주일 동안, 제 명치를 치고 꽁무니 빠지게 도망간 백이서는 제가 바쁠 걸 빤히 알면서 연락 한 통 없었다.
“한태미한테 보낸 밥 차가 열 번은 되나?”
차계원의 입에서 빈정대는 투가 절로 나간다.
“차? 밥 차? 아! 밥 차 보낼까? 너 이번 촬영은 끝났으니까 다음 촬영 때 보내라고 할게. 대표님도 아마 좋다고 하실 거야.”
김건이 차계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거실을 종종걸음으로 종횡하며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장난해요?”
“아니, 아니. 이거 아니구나. 아무튼. 기사 몇 개라도 내리자 어?”
김건은 이제 거의 빌다시피 했다. 처음 건이 이상하다고 느낀 건 과하게 쏟아져 나오는 기사들과 공격적인 타이틀을 봤을 때였다. 차계원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신문사는 방송 채널까지 딸린 덕에 그 힘이 센 편이었다.
“…….”
“대체 왜 그러는데!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데! 말이라도 해 줘라. 좀!”
건이 답답한지 제 가슴을 쾅쾅 내려친다.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본성이 개차반이면 어떻게든 새어 나가게 되어 있다. 심지어 차계원은 제 성격을 굳이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차계원은 그 긴 연예계 활동 기간 동안 이미지에 해가 될 만한 기사라고는 단 하나도 나지 않았었다.
그런 그에게 스케줄 펑크만으로 이렇게까지 공격적인 기사들이 나올 리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찾아보니 먼저 기사를 내기 시작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계원이 어머니네 신문사였다. 차계원에게 전화가 온 건 직접 물어보기 위해 집에 찾아갔을 무렵이었다.
“제대로 전한 거 맞아요?”
“전했다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놀라시지. 내가 하도 호들갑을 떨었더니, 대표님이 오히려 진정시켜 주실 정도였다니까.”
차계원이 김건에게 시킨 건 간단했다. 살 좀 붙여 이서에게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호들갑과 함께. 그렇게 김건은 차계원의 공범이 되었다.
“이상하네.”
차계원이 옆에 내려놓은 핸드폰을 빙그르르 돌린다. 핸드폰은 잠잠했다.
“계원아. 나 너무 양심에 찔려. 나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잖냐.”
“흐음.”
차계원이 의자에서 일어나 팔을 쭉 뻗는다. 스트레칭을 하듯 오른쪽 왼쪽 긴 팔을 꺾고, 어깨도 몇 번 돌린다.
“시사회 분위기 진짜 안 좋았어. 살얼음판이었다니까? 왜 그러냐. 진짜. 내일은 가는 거지?”
“…….”
“어떻게 하면 갈래? 응? 어떤 걸 원해. 대표님이랑 무슨 문제 있었던 거 맞지?”
“…….”
계원의 침묵에 몸 단 김건이 고민 끝에 입을 연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계원이 저러는 원인은 대표님 같았다. 대표님은 이유를 모르는 눈치였으니 차계원 혼자 무언가 심기가 틀어진 게 분명했다. 저놈이 심기가 뒤틀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계원아. 차라리 내가 대표님한테 말해 볼까?”
“뭐를.”
차계원의 목소리가 삽시간에 차가워진다. 건을 바라보는 두 눈이 꼭 산제물을 노려보는 것 같다.
“너랑 틀어진 거 있으면……. 먼저 사과해 주실 수 없겠느냐고…….”
“사과?”
“어. 사과. 왜 이러는지 말만 해 주면 내가 대표님한테 잘 말씀드려 볼게. 어때. 괜찮지.”
“안 되죠.”
차계원이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다.
“뭐든 사람이 마음에서 우러나오게 해야지. 안 그러면 강요밖에 더 되겠어요? 진심. 몰라요? 진심.”
차계원이 한심하다는 투로 덧붙인다. 김건이 차계원 몰래 한숨을 내쉰다. 계원이 이서에게 전달하라 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느꼈다. 그러나 차계원이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10년 넘게 봐 왔으나 계원은 가끔 의뭉스러울 때가 있었다.
징. 징.
핸드폰을 올려 둔 유리 테이블이 진동을 받아 울린다. 계원이 스트레칭하던 그 자세 그대로 눈동자만 살짝 돌려 화면을 확인한다.
[백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