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대애앵
일순간 현기증이 돌아 눈앞이 휘청거렸다. 천지를 뒤흔드는 종소리는 몸통을 연결하는 뼈 마디마디를 진동케 했다.
“크리스!”
“모르겠어….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괜찮아. 침착해. 아주 오래전부터 불려왔던 이름이니까 분명히 떠올릴 수 있어.”
확신할 수 없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시도해보아야 하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까마득히 먼 과거부터 거슬러 올라갔다. 최초의 기억은 조각조각 기워져 있는 유년 시절이었다.
‘우리 아들.’
웃는 얼굴의 부모님은 곧 까만 리본이 달린 액자에 실리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부모가 떠난 이후, 원래 살고 있던 아파트를 팔고 원룸으로 이사했다. 특별할 것 없는 무난한 군 생활을 마치고 대학 생활을 마무리했다. 축하해줄 사람 하나 없는 졸업장을 책장 어딘가에 꽂아 넣고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취업 전선에 뛰어든다.
이때까진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불린 기억이 없다.
─대앵
‘■■아, 좋아해.’
마침내 뚜렷하게 이름을 불러준 사람은 첫 회사의 사수이자 연인이었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나를 마음에 두었다고, 거절해도 끈질기게 구애하는 바람에 받아들여 주었었다. 부모를 제외하곤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으니 변치 않으리라 굳게 믿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는데─
‘å※■아, 헤어지자.’
그는 믿음을 지켜주기는커녕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별을 통보했다.
‘헤어지자고.’
‘넌 나한테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X발… 짜증 나게 질척거려.’
이어서 비열한 협박과 웃음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나쁜 기억을 멈추지 못했다.
─대애앵
단서와 상관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기 직전, 종소리 덕분에 다음 장면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1100011110010000/;현씨, 집으로 돌아가야죠.’
여전히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지직대는 생체 데이터 사이로 떠오른 실루엣은 ‘관리자’였다.
“으큭…!”
“크리스?”
─삐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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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끌어올리려 할수록 머릿속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기괴한 에러 메시지가 눈앞을 가득 채웠는데, 그 문장에 박힌 활자가 빠르게 뒤섞이자 버티지 못한 동공이 탁 풀렸다.
─대앵
아…!”
손뿐만 아니라 팔부터 목, 얼굴까지도 푸른 빛의 균열이 쩌적 갈라졌다. 의지와 다르게 무릎이 굽혀졌다. 나풀대며 공중으로 사라지는 데이터 조각은 흡사 푸른 나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에러 메시지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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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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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를 임시로 이어붙였다더니, 수명이 다할 때가 되어가서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안 돼… 도저히…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반만 남은 손으로 그의 옷깃을 쥐었다. 리헤로스의 흔들리던 시선은 어느샌가 또렷해져 있었다. 그는 바스러지는 내 몸뚱이를 놓칠세라 꽉 붙잡았다.
─댕
“크리스, 그렇다면 잘 들어.”
“응….”
“내 이름을 기억해줘.”
“네 이름을…?”
“그래, ”
─대앵
“…전….”
소음에 파묻힌 목소리를 더욱 높이니 그의 목의 핏대는 부풀었다. 물 찬 듯이 먹먹한 고막에만 의존할 수 없었기에 풀린 초점에 힘을 주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발음, 입 모양으로 조합해본 결과를 천천히 입으로 되뇌었다.
“□… 정=□?”
“맞아.”
“그래, 그랬구나….”
“꼭 기억해줘…. 어디에서든 부르면 너를 찾으러 갈게.”
그럴 수 있을까.
네 이름을 부른다고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의 희망과 확신에 찬물을 끼얹고 싶진 않았기에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었다.
─대애앵
“그럴게….”
“그럼… 또 만나.”
마지막 종이 울리기 전에 대답을 들었다. 동시에 시야가 완전히 부스러져 내렸다. 하야면서도 파란 빛무리는 앞을 가로질렀다.
…
완전한 고통이 사라지고 나서야 내려다보니 몸의 형태라곤 남은 게 없다. 그저 영혼만 남은 듯이 공중에 부유한 채였다. '무'의 공간에서 아무런 고통도,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
“…….”
어떤 후회나 슬픔, 처한 상황에 대한 감상은 없었다.
무감각하기만 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일순간 거센 바람이 나를 치고 지나갔다.
기시감을 느낄 때 즈음,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내게 부딪히는 게 아니라, 내가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높이 감은 어림잡을 수 없을 만큼 아득해 보였다.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아래로─ 계속 아래로 떨어졌다.
현실이었다면 공포에 질려 기절했을 테지만, 온 신경이 둔감했다.
섬광이 터지듯 번쩍이는 빛을 지나쳐 칠흑 같은 공간이 드러났다. 워낙 빠르게 지나온 터라 땅이라는 자각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그대로 처박혔다.
...
“으그윽…!”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억눌린 신음을 앓으며 스프링처럼 몸이 튀어 올라왔다. 최면을 걸듯이 번쩍이던 빛의 잔상이 마침내 사라졌을 땐 지독한 어둠이 공기를 감쌌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몸을 더듬었다. 언제 바스러져 사라졌냐는 듯 주저앉은 몸뚱이가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가죽 바지라든지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부츠처럼 비현실적인 옷이 아닌,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와 흰 반팔 티를 입고 있는 상태였다.
“돌아… 온 거야?”
어둠에 익숙해지자마자 주위를 돌아보았다. 노란색 장판, 집주인 취향대로 꾸며진 요란한 꽃무늬 벽지. 주홍색 불빛이 느리게 깜빡이는 모니터까지. 쓰러졌을 때 그대로였다.
“죽지 않았어… 살아있어.”
워낙에 오랜 시간 영혼이 떠나있어 육신은 썩어 문드러졌으리라 확신했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멍하니 어지러운 벽지를 바라보고만 있다가 백지 같던 머릿속이 뒤늦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유자현.”
가장 먼저 입으로 내뱉어보고 싶었던 것은 이름이었다. 안간힘을 써도 떠올리지 못하는 바람에 리헤로스에게 끝내 말해주지 못했단 사실이 안타까웠다. 옆에 나란히 누워있던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날짜도 시간도 쓰러졌던 날 그대로야. 꿈이었을까.'
그렇게 길고 생생한 꿈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겪은 일들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길은 하나였다.
리헤로스를 찾아 만나는 것.
그렇다면 현실 도피자의 망상이 아니고, 영양실조로 인한 환각이 아니란 걸 분명히 증명할 수 있으며, 세상에 둘도 없을 인연을 찾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말해줬던 이름, 뭐였지?’
저쪽 세계에 있을 땐 내 이름이 생각나지 않더니, 돌아오고 나니 그의 이름이 기억하지 못했다. 첩첩산중이 따로 없다.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종이와 촉에 검은색 잉크가 뭉쳐있는 펜을 집어 들었다.
‘리헤로스.’
저쪽 세계에서 사용했던 이름은 분명 기억난다. 쓰는 것까지 망설임 없이 죽죽 그어나갔다. 다만 ‘진짜’ 이름은 어렴풋이 ‘지읒’까지만 적을 수 있었고, 그 후로는 정말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곳으로 넘어오는 순간은 지극히 찰나였는데도 잊어버리다니, 주먹으로 머리를 몇 번이고 내려쳤다.
“젠장… 젠장….”
가장 중요한 걸 잊어버리다니. 멍청하다.
되돌려보내기 전에 관리자라도 만나서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다면 좋았을 텐데. 내 현 심정과 비슷하게 불안하리만치 느릿느릿 점멸하던 주홍빛 램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우스를 쥐고 흔들었다. 이내 깜빡임은 멈추더니 흰색으로 바뀌며 모니터가 켜졌다.
‘어라, 고장 난 줄 알았는데.’
분명 게임 속으로 끌려들어 갔을 땐 터지는 소리가 난 데다 화면이 울렁대는 등 이상 증세를 호소했으니 의아했다. 직사각형 액정엔 상아색 빛으로 가득 차더니 팝업 하나가 덩그러니 떠올랐다.
[알림]
오픈 베타가 종료되었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마우스 클릭도, 키보드 커맨드도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팝업에 있는 유일한 버튼으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닫기’ 버튼을 누르자 다른 프로그램과 다를 것 없이 평범하게 창이 닫혔다. 그리고서 아무런 조작도 하지 않았음에도 파일 삭제 프로그레스가 빠르게 떴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설마.”
알리엔토 사가 폴더를 열어보니 텅 비어있었다. 컨트롤 Z를 사용해서 되돌려보려고 해도 복구되지 않았다. 아무런 증거도 남지 않아 얼떨떨했다.
‘맞다. 공식 홈페이지가 있잖아.’
같은 경로로 빨려 들어왔을 테니 만일 리헤로스가 나를 찾는다면 그곳에서 찾으리라. 서둘러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니 기대와 달리 모든 게시판이 잠겨있었고, 접근이 불가하다는 알림 창만 뜰 뿐이었다.
‘광화문 광장에서 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막막했지만, 이대로 주저앉긴 싫었다. 어떻게든 찾을 방법을 떠올려야 했다.
키보드 대신 스마트폰을 집었다. 잠금을 풀자마자 지웠던 SNS를 재설치했고, 비활성화해두었던 계정을 깨웠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비활성화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기록을 일일이 지우기 번거로워서였고, 그 기록의 모든 것은 전 애인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란히 붙어있는 그림자, 커플링을 낀 채 맞잡은 손, 웃고 있는 전 애인의 모습은 안 그래도 서글픈 감정을 울렁이게 했다.
‘겨우 하나 있던 팔로워도 없어졌네.’
성격에도 맞지 않는 럽스타그램을 하겠다고 만들었던지라 팔로워라곤 전 애인 한 명뿐이었다. 그놈도 똑같이 계정을 비활성화했던지 탈퇴한 모양이지. 헤어지고 새로운 연인을 만나 결혼한다고 했으니, 용의주도한 성향을 보아서는 탈퇴했겠거니 싶었다.
이것을 활성화하기보단 가 계정을 파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테지만, 회피해왔던 과거를 내친김에 처분하지는 마음에 한 땀 한 땀 삭제하기 시작했다. 피드가 비워질수록 이상하리만치 침착해졌다.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다고 해야 맞는 말이었다.
마침내 호기롭게 글쓰기 버튼을 눌렀지만, 액정 위로 손을 한참 머뭇댔다. 뭐라고 써야 할까. 내가 아크리스라고? 그걸 검색해서 찾아올까? 사실상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다. 또 후회가 밀려왔다. 그의 이름을 제대로 알았다면 온갖 SNS를 동원해서 검색이 가능했을 텐데.
‘잠깐, 리헤로스가 먼저 올렸을 수도 있잖아?’
혹시 몰라 알리엔토 사가에서 썼던 내 이름, ‘아크리스’를 검색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