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이용해도 좋단 그 생각은 여전히 변치 않았어. 그냥… 언젠가 내게 다시 올 기회를 기다리기만 해도 기쁠 거야.”
“테네브….”
“리헤로스를 좋아하고 있는 건 알아. 그런데….”
그의 설득은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으니 괜한 시간 낭비와 말씨름은 하고 싶지 않았다. 긴장한 듯 맞잡고 있는 손 위에 가볍게 제 손을 올렸다. 화들짝 놀란 얼굴로 시선을 내게로 돌린다. 나는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을 덤덤한 목소리로 답을 내었다.
“테네브. 잘 들어.”
“…….”
“너처럼 좋은 사람에게 그런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데.”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야. 미안해.”
“…….”
소리 없이 흐르던 눈물은 결국 흐느끼는 울음으로 바뀌었다.
“리헤로스가 없다면… 날 바라봐줄까 생각하기도 했어. 그래서 나쁜 생각까지 했었지.”
“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원망의 화살이 내 쪽으로 오는 게 아니라 리헤로스를 해코지할 수도 있다는 건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그래서 본능적으로 우리가 걸어왔던 방향을 보았다. 나를 밖으로 빼낸 후에 사람을 시켜서 위해를 가하는 것인가 싶어 등줄기가 서늘했다.
“설마… 아니지?”
“……그래. 그렇게까진 차마 못 하겠더라. 눈엣가시를 제거한다고 해서 네 마음이 내게 향하지 않을 거란 건 아니까. 오히려 온 세상 사람을 불신하게 되고 스스로 고립되면 모를까.”
번번이 헛다리만 짚는다고 생각했던 테네브는 언제부터 나를 이렇게 잘 알게 되었을까.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왔단 사실을 알게 된 대목이었다.
“나와 관련된 모든 걸 잊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런 말 마.”
“어째서?”
“…너 없인 행복할 수 없어.”
“그럼… 나를 위해 행복해해 줄 수 있어?”
“…….”
“위하는 게 힘들다면 보란 듯이 행복해져서 널 놓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줘.”
“어떻게….”
“그건 할 수 있겠지?”
“…….”
기울어진 시선은 곧추세울 생각이 없어 보였고, 시야를 가린 앞머리만이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고개를 젓는 것인지 바람으로 인해 머리카락이 움직이는 것인지는 모호했다.
“그럼… 갈게.”
다정한 작별 인사를 나눌 분위기도 아닐뿐더러, 테네브는 이제 어떤 말에도 반박하거나 대꾸하지 않았다. 아마 생각할 것이 많을 것이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려다보이는 그의 어깨는 오늘따라 유독 작아 보였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동정, 우애 따위가 그 작은 남자를 향해 손을 뻗게 했다. 하지만 혼란을 가중할 몸짓은 금세 거두고, 말없이 발끝을 움직였다.
마을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보금자리를 향해 한참 걷다 무심코 돌아보았을 때, 테네브는 미동 없이 그 자리 그대로인 채였다.
‘어쩌면 테네브가 나을 수도 있어.’
차라리 미워하고, 증오하며 기억 속에 묻어두는 게 편할 것이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형체도 남지 않는 존재가 되니 오히려 큰 애착을 가진 리헤로스와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 곤란한 상황이었다.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은 이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분명히 예전에만 해도 일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 싶으면 바로 수습하고 처리했던 부분이 큰 장점이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가장 힘든 일을 최후에 하게 되었을까.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면서 그랬었지?’
현실의 직업이 전생에 겪었던 것처럼 좀처럼 기억나질 않았다. 분명 ‘진짜 아크리스’와 이야기할 때도 그랬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무언가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이 상태로 현실로 돌아갔을 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새로운 몸이 낯설까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그게 진짜 내 몸이 맞긴 한 건가.
‘어느 쪽이 진짜인 거지?’
불현듯 떠오른 자문에 내 존재와 성장 배경들이 이질적으로 여겨졌다. 혹여나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곳이 가상이고, 이곳이 현실인 건 아닐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돌아가기 위해 애쓰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걸까. 출처 모를 수수께끼로 인해 뜨거운 불길 같은 것이 등줄기를 따라 번지는 느낌이 들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잖아. 바보스러운 생각하지 마.”
얼마나 이 세계에 남고 싶기에 허황한 망상까지 하게 된 것인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덩굴처럼 엉겨 붙은 생각들을 떨쳐냈다. 혼자인 상태론 물음의 수렁에 빠지게 되니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굳어 있던 발을 끌어 움직였다. 잡생각이 스멀스멀 피어 올라올 때면 속도를 높였다. 집에 다다를 때쯤엔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뜀박질에 가까워졌다.
햇빛에 반사된 눈부신 하얀 저택은 새카매진 마음과 상념을 개운하게 만들어 주었다. 가쁜 숨을 고르며 천천히 문을 당겨 열었다. 몸이 기억하는 포근한 온기는 세상의 모든 두려움과 걱정을 떨치게 해주었다.
“나왔어.”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그에게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부스럭대는 잔 기척이 거실 쪽에서 들렸다. 천천히 코너를 돌아, 거실을 들여다보자 소파에 앉아있던 리헤로스는 따뜻한 미소로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왔어?”
“혼자서 뭐 했어? 낮잠이라도 잔 거야?”
“아니, 그냥 앉아있었어.”
“그랬구나.”
그도 상념에 곧잘 잠기는 스타일이었으니 대충 앉아서 어떤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위로 아닌 위로를 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걱정하지 않도록 잘 돌려보냈어.”
그 말에 리헤로스는 손을 뻗었고 가볍게 잡자 제 쪽으로 당겼다. 반동으로 인해 무릎 위로 앉아 버렸다.
“깜짝아.”
구체적으로 몸과 마음이 이어지고 난 후부터일까? 박력 넘치는 행동을 종종 튀어나오곤 하는데, 순하디순했던 과거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달랐기에 놀랄 일이 퍽 많았다.
“원래 이런가?”
“뭐가?”
“너는 그 사람과 아무 사이도 아니고, 아무렇지도 않은데 난 왜 이리 질투 나는 걸까.”
“그럴 필요가 있어? 어차피….”
“어차피?”
“…….”
“뒷말은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 같은데.”
“그럼, 말 안 할래.”
리헤로스는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고는 뺨을 느릿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크리스, 너로 인해 모르고 있던 새로운 감정을 알게 됐어.”
“좋은 거…맞지?”
“당연히 그렇지. 살면서 사용할 감정이라곤 몇 가지 없으리라 생각했었거든. ‘복합적인 감정’이 어떤 의미 인지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적당할까.”
“그래? 그게 어떤 건지 물어봐도 돼?”
“음… 글쎄, 좋아하면 마냥 퍼부어주고 싶은 줄만 알았지. 그런데 어쩔 땐 네가 옆에 있는 데도 불안한 적도 있고.”
그는 말을 잠시간 멈추더니 뺨을 쓰다듬던 엄지손가락은 아랫입술을 문지르며 지나갔다.
“가끔은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게 서운하기도 했어.”
뺨과 입술을 쓰다듬던 두꺼운 손위로 손을 겹쳤다. 단단한 손등뼈와 맥박이 느껴지는 핏줄이 만져졌다. 응석 부리는 말에 가까웠지만, 그의 눈에는 어떠한 원망과 시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맹목적으로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어?”
“당연하지만 네 잘못은 없어. 나 홀로 정리하지 못한 감정을 풀지 못한 거니까. 내가 왜 이러는지 수도 없이 곱씹게 되더라.
그저 귀엽기만 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깨달은 마물도 아니고.’
감싸고 있던 손을 떼고 리헤로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손가락은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나로 인해 네가 바뀐다는 게 좋아.”
“이상하지 않아? 어리숙해 보인다던가.”
“전혀. 그리고…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 역시도 많이 바뀐 것 같더라고. 네 부드러운 성품을 닮고 싶어서, 너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노력한 게 있었어.”
“정말?”
“티 안 났나 보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키득댔다. 기분 좋은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로 허리를 안아오는 팔, 같아지는 체온, 호흡하며 전해오는 가느다란 떨림 모두 잊고 있던 설렘을 일깨워주었다.
“크리스.”
“응.”
“아직도 내가 모르는 많은 것들이 있겠지.”
“그렇겠지?”
“그러니… 오래, 아주 오래 내 옆에 있어 주면 좋겠어.”
“어…?”
“프러포즈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하니까… 가볍게 받아들여 줄래? 그냥… 너랑 오래 함께이고 싶다는 이야기니까….”
“…….”
“프러포즈는… 더 오래, 잘 준비한 후에 할게.”
그 어떤 말보다 듣고 싶은 말이었다. 분명 아주 달콤한데도 내 형편과 처지가 다디단 물을 곧이곧대로 삼키지 못했다. ‘오래’, ‘함께’라는 말에 포근하기만 했던 기온은 외려 차갑게 식어갔고, 잔잔한 감정의 수면 위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차라리 나를 수많은 인연 중 스쳐 지나가는 사람 한 명쯤으로 생각해주면 좋으련만, 생각하는 마음조차도 감사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리헤로스, 미안해.”
명치께에 기대어있는 그를 떼어냈다. 사과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양인지 그의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시선엔 얼핏 공포까지도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 있어? 크리스?”
별일 아니라고 장난이라고, 말을 돌리고 싶었지만, 더 이상의 희망 고문은 그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오지 않을 거야.’
언제까지 현실을 회피할 생각인가. 내일 갑작스레 사라져버리는 연인에게 작별을 준비할 시간을 주어야 했다. 리헤로스와 함께했던 시간은 절대 짧지 않았고, 그런 만큼 빈자리는 크게 느껴질 테니 말이다. 이는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한참이고 목 안에서 중얼거리고 나서야 굳게 닫혀있던 입술을 떼어낼 수 있었다.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입꼬리를 올리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온 얼굴의 근육이 완전히 경직되어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떻게 설명해야 그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슬픔 없이 헤어질 수 있을까. 그에게 어떠한 작은 상처든 고통이든 주기 싫었다. 반면 좋은 변명거리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토록 사랑하는데 떠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사랑하니까 떠나준다는 말은 궁색한 변명이다.
“크리스….”
“이미 몸이 많이 망가져서 얼마 살지 못할 거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