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그는 눈꼬리를 구부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우리 통했나? 나도 전해 줄 얘기가 있는데.”
“응? 너도…? 먼저 해.”
“별 건 아니고, 좀 이따 재단사가 올 거래.”
“재단사가 왜?”
“바로 내일 축하연이 있잖아. 예복을 맞춰준다고 왕실에서 사람을 보내주셨어.”
“아… 내일이구나. 몰랐어.”
내일은 내 생의 마지막 날인데 연회가 열린다니, 결국엔 마왕의 죽음을 축하하는 꼴이 된 것 같아서 쓴웃음이 나왔다. 문을 짚고 있던 그의 손은 점점 내려오더니 허리를 끌어안아 당겼다. 아랫배가 맞닿는 감각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물게끔 했다.
“그러니까 준비하고 있으면 될 것 같아.”
“그래… 그래야지.”
“오늘따라 기운이 없네. 무슨 일 있어? 괜찮아?”
“으응, 아무 일도 없어. 잠을 조금 설쳐서 그런가 봐.”
“나 때문… 인 거지?”
“아…? 아하하!”
그의 소심한 자수로 인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남자가 짐승처럼 몰아붙이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는 멋쩍은 듯 화제를 돌리려는 것 같았다.
“그보다 네가 하려던….”
“바보.”
“…하려던 말이 ‘바보’야?”
“그건 아니긴 한데 왠지 얄미워서. 너 때문에 잠 못 잔 건 맞으니까.”
“미안하니까 바보 할게.”
어쩔 줄 모르겠다. 귀여운 걸 보면 벽을 세차게 내려치고 싶다는 기분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겠다. 차마 애써 만든 저택의 벽을 부술 순 없으니 그를 꽉 끌어안고 폭 기대었다.
“맞아, 너는 바보라서 나 없으면 안 될 텐데.”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까 괜찮아.”
“…….”
그의 말에 미뤄놓았던 책임감과 걱정이 산사태처럼 쓸려왔다.
“진짜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럴 일이 생긴다면?”
“딱히 생각하고 싶지 않아.”
“생물은 언젠간… 죽잖아.”
“…글쎄, 모르겠어. 이젠 너 없는 삶은 상상이 안 돼. 내 모든 걸 포기해서라도 널 지킬 거야.”
“그러지… 않길 바란다면?”
리헤로스는 딱 달라붙은 나를 떼어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았다.
“크리스?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아아… 아니, 그냥 그런 거 있잖아 괜히 나 없는 삶이 어떤 형태일지 궁금한 거.”
“…….”
“분위기 처지게 괜히 말했나.”
“정말 고민하는 일이 있다면 이야기해 줘. 이런 상상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있을 것 아니야.”
“알겠어. 걱정 끼쳐서 미안해.”
“아니야. 난 그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걸로 충분해.”
그는 떨어트려 놓았던 나를 다시금 꽉 안아주었다. 이 체취나 체온, 안아줄 때 기분 좋을 정도의 가벼운 압박감은 앞으론 절대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쉽지 않을 정도로 안겨야 할지, 아니면 혼자인 게 익숙해지도록 멀리해야 할지 딜레마에 빠졌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이곳의 삶에선 지나칠 정도로 결정하기 어려운 것뿐이라 막막했다.
─딱, 딱, 딱
속이 꽉 찬 목재를 일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도 희미해서 외부에서 나는 흔한 환경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재차 일정 간격으로 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1층 현관에서 들리는 도어노커 소리였다.
“재단사가 온 모양이네. 내려가 보자.”
“으응.”
그의 품에서 벗어나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근심에 빠져 뭉그적대는 나보다 보폭이 넓고 빠른 리헤로스가 먼저 현관문에 당도했다. 문을 열자마자 분주하게 들어올 재단사들을 예상하였으나, 리헤로스는 저답지 않게 방문객을 맞이하기는커녕 현관을 막아선 채 멀거니 서 있는 게 아닌가.
“가만히 서서 뭐해? 누구길래….”
영문을 모르는 나는 옆으로 고갤 빼꼼히 내밀었다. 햇빛을 등지고 있어 역광으로 인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점차 홍채가 빛과 그림자에 익숙해지자 방문객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니, 사실은 실루엣을 보자마자 대번 눈치챘다.
“…테네브. 여긴 어떻게 왔어?”
“…….”
두 남자는 서로를 마주한 채, 예의상 인사말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구금된 이후로 협력하던 관계에서 독단적인 행동으로 계획이 수포가 될 뻔했으며, 완벽한 연적으로 돌아서 버렸으니까. 내 등장으로 인해 그들의 시선은 조심스레 옮겨졌다. 나에게 이 상황을 마무리할 선택권이 주어졌다. 물론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저… 일단 나가서 이야기할까?”
“그러자.”
따라 나오려는 듯한 리헤로스를 향해 고갤 가볍게 저었다. 이곳에 남아 있으란 신호였다. 매우 걱정스러운 낯빛이었다.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불러줘.”
“그럴게. 너무 걱정하지 마.”
테네브의 선택들은 꽤 충동적이긴 했지만, 내게 위해를 가한다든지 허튼짓을 하지 않으리란 확신은 있었다. 리헤로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 토 달지 않고 홀로 나갈 수 있게끔 보내주었다. 뒤로 물러서는 테네브를 따라 현관문을 닫고 나왔다.
“…아키.”
“좀 걷자.”
“…응.”
흰 저택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무작정 걸었다. 어느 쪽도 쉬이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크게 심호흡을 하던 테네브가 운을 뗐다.
“날 보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찾아오기까지… 많이 망설였어.”
“보기 싫은 건 아니야.”
“그렇지만 미운 건 맞지?”
“…….”
당연히 밉고 속상했던 건 맞다. 리헤로스의 위기를 모르는 척, 무시한 채 도망치자고 권했으니까. 내가 알던 테네브는 글라디우스 기사단 안에서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었는데 리헤로스를 어찌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이야기했던 게 충격이긴 했었다.
무언은 일종의 긍정이란 것을 알아서일까 우린 라이오펠 교회당 뒤편의 공터로 향할 때까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가장 볕이 잘 드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마주 보고 이야기할 자신은 없기도 했다.
“그 후로 잘 지냈어?”
“아아… 당연히 잘 지냈지.”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테네브 너도.”
“빈말이래도 그렇게 말해주니 기뻐.”
처형대 위에서 몰아붙이던 테네브는 없었다. 그 이전처럼 딱딱한 문장 구조였지만, 다정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그는 초조한지 계속 제 손을 만지작댔다.
“그럼, 이제 세르뷔에 저택에 계속 머무르는 거야?”
“뭐… 그러지 않을까.”
테네브에게까지 시한부라는 사실을 숨길 필욘 없었으나, 리헤로스가 모르는 걸 테네브가 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숨기게 되었다.
“…국왕 폐하께서 영지를 주실 줄 알았는데.”
“그쪽은 잘 몰라. 리헤로스가 받게 되면 받는 거고, 거주지를 옮겨야 하면 함께 옮기게 되겠지.”
“그렇구나….”
여기까지의 대화는 테네브가 내게 행하는 일방적인 인터뷰였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점점 안쓰러울 만치 고개가 기울어지는 그를 향해 물었다.
“너는… 친척 집에서 계속 살 거야?”
“아 그게, 라이오펠로 돌아가서 검술 교습을 해보려고.”
“정말? 잘 됐네. 사실은… 칼리고 사망 이후로 네가 기사단 단장을 하면 잘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기사단이 완전히 해체되었다고 들었어.”
“맞아. 사건에 직접 간섭했던 단원은 사형을 당하는 대신 작위를 박탈당했거든. 공주님께선 나머지 인원으로 기사단을 유지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남아 있던 단원들은 회의를 느껴서 대부분이 나갔어. 존폐를 논할 시간도 없이 무너진 거지.”
“흐음, 자세한 경위는 그렇구나.”
“응. 그래서 일자리를 구하는 몇몇 단원들을 데리고 교습소를 차릴 거야.”
“좋은 생각이네.”
그는 마침내 고개를 들더니 미소를 띠었다. 내 말의 일희일비하는 모습이 여전히 안쓰러우면서도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성적으로 호감을 느낀다기보다는 동생 같은 모습에 흐뭇함을 느낀다는 쪽이 맞았다.
“…기사단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과거가 부끄럽기도 해. 네 덕분에 세상을 올바르게 볼 수 있게 된 것도 고맙고.”
“딱히 해준 것도 없는데 뭘.”
“아니야. 넌… 나에게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어. 내가 믿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과거가 바보 같았지.”
“…….”
“그러니까 아키, 널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나도 네가 좋아. 친구로서.”
밝게 떠 있던 미소는 점차 희미해졌다. 다시 땅으로 시선을 떨군 그는 목소리의 볼륨조차도 작아져 웅얼거림에 가까웠다.
“…네게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긴 했는데, 이런 뜻으로 듣고 싶던 건 아니었어.”
“…미안해.”
“……난 위성처럼 네 곁을 계속 맴돌게 되겠지. 언제 끝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오래.”
“그러지 마. 글라디우스 기사단을 벗어나 새 삶을 찾은 것처럼 날 잊고 새 출발 할 수 있을 거야.”
“기사단을 벗어날 수 있던 건 순전히 네 덕분이었는걸. 난 너 없이 시작할 수 없을….”
“테네브.”
“…….”
“절대 그렇지 않아. 네가 기사단이라는 작은 세계에 갇혀있어서 다른 세계를 똑바로 보지 못했던 것과 같아.”
“안 들을래.”
“다른 이를 만나보면 내가 얼마나 옹졸하고, 네 마음을 이용했던 나쁜 놈인지 알게 될 거야. 칼리고와 다를 바 없는 썩을 놈이야.”
“그럴 리 없어.”
“테네브…!”
“…….”
“할 수 있어. 지나고 보면 모두 철없던 시절이었구나, 웃어넘길 수 있을 거야.”
그는 다시금 고개를 푹 숙였다. 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주는 걸까 싶었는데 뺨에서부터 물방울이 투둑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난 너를 너무 사랑하게 됐어.”
“…….”
“마음이 이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는데… 억지로 머물 자리를 옮긴다고 해서 너를 잊을 수 있을까?”
“물론 처음엔 힘들 거야. 그렇지만… 언젠간 무뎌지리라 생각해. 원래 그런 거잖아. 그러니까….”
“다시 기회를 줄 순 없을까.”
애원하는 목소리는 가슴을 울렸지만, 그를 토닥이거나 안아줄 수 없었다. 내 작은 행동거지에서 그는 나에게 집착할 의미를 다시 찾을 수도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