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네?”
“…….”
“알아듣게 설명해 봐요. 난데없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일이면 죽는다고.”
녹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멈추더니 눈썹을 구겼다가 피는 것을 반복하며 내 낯의 변화를 샅샅이 살폈다. 장난을 치는 것인지 진담인지 의중을 캐내려는 듯한 모양새였다.
“장난치지 마세요. 하나도 재미없어요. 아침부터 찾아와선 뜬금없이.”
“진짜야.”
녹틸은 벌떡 일어나더니 테이블을 돌아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팔을 와락 잡아당겼다. 소매를 걷어버리고 엄지손가락으로 굵은 혈관을 꾹꾹 눌러댔다. 정말 장난이라면 한마디 했을 것 같던 그의 눈썹은 점점 팔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주 안타까운 사연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대체….”
“뭐가 느껴져…?”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예요? 마나의 흐름이 산산이 조각나 있잖아요.”
“얼마 전에 꽤 큰 전투에 참여하긴 했어. 그게 문제였을까? 나도 난감해. 어제 갑작스레 선고받은 거라.”
“하…? 하아….”
그는 아주 골치 아픈 일을 마주한 사람처럼 이마를 짚었다. 그저 소파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체면이라든지 소파에서 푹 뿜어져 나오는 먼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털썩 앉으며 다시금 입을 뗐다.
“제가 잠깐 손대면서 느껴봐도 심각해요. 지금 살아있는 게 용한 상태라고 해두죠.”
“그 정도야?”
“네. 몸과 정신을 잇는 에너지가 절단되어 있거든요. 아주아주 엉망진창이에요. 이 상태가 되면 손끝도 움직이지 못하는 게 보통이거든요.”
마나가 분리되었단 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지만, 관리자가 말했던 코마 상태라는 게 비로소 이해됐다. 현실로 따지면 식물인간이어야 하는 몸이 멀쩡히 걸어 다니고 있단 것 아닌가. 소박하게 남은 시간이 더욱 귀중해지는 발언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안 돼요. 아크리스.”
“뭐가?”
“이것을 고칠 수 있는 마법이나 의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니 저에게 부탁해봤자….”
“아니야. 그 얘기가 아니야.”
“그럼요?”
“…내가 가게 되면 리헤로스를 부탁할게.”
녹틸은 점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는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팍팍 내쉬었다. 제 눈가를 문지르며 헛웃음을 치기도 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쳐들어와서 하는 얘기가… 내일이면 죽는다더니, 이젠 리헤로스를 부탁한다는 거예요?”
“혹시라도 그가 나쁜 생각을 하면 안 되잖아. 그나마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너뿐이라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부탁하러 왔어.”
“염치없는 건 잘 아시네요.”
“…미안해.”
내 꼴이 오죽 답답했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더니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리헤로스에게 말은 한 거예요?”
“어떻게 말해. 분명 상처받을 거야.”
“…아크리스.”
“응.”
“몸이 아파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거 아녜요?”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럼 나한테 부탁할 시간에 가서 제대로 이야기를 해요.”
“내일 당장 죽는다고 했다가 이상한 마수에 손을 뻗으면 어떻게 해?”
“그렇다면 당신이 말없이 죽어버리면 수긍할 수 있을까요? 썩어빠지는 시체를 붙들고 생명 창조하지 않으면 다행일걸요? 퍽 아름다운 결말이 펼쳐지겠네요.”
“…….”
“잘 생각해봐요. 그러니까… 이럴 땐 역으로 리헤로스가 당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고 생각해보란 말이에요. 그가 당신에게 이야기해주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훌쩍 사라져 버리면요?”
“…말도 못 하게 속상하고, 상실감은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괴롭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결정됐네요. 그렇죠?”
“아아….”
그를 위한다는 핑계로 또다시 회피할 뻔했다. 역시 웬만해선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 걸까. 녹틸 말대로 몸이 아프니 뇌세포가 둔해졌는지도 모른다. 직설적으로 멍청함을 지적해 줄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다.
“반응이 왜 그래요? 진실의 약이라도 지어서 친히 먹여드릴까요?”
“아니야. 네 말이 맞아. 직접 이야기할게…. 대신 내가 떠나고 나서 그가 나쁜 생각하지 못하도록 지켜봐 줘.”
“…….”
“당장 목숨이 붙어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것만 부탁할게.”
“후우우… 어쩌다가…. 누구보다 답답할 건 아크리스이니 말 줄일게요. 이후의 일은 걱정하지 말아요. 제 선에서 노력해볼 테니까.”
“그래. 고맙다. 덕분에 정신 차렸어.”
은밀한 거래가 끝나자마자 침묵이 흘렀다. 찻잔 속 거품이 퐁 터지는 소리가 이 공간에서 들리는 가장 큰 소음이었다. 녹틸의 표정은 애매했다. 내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인지 한심하다고 느끼는 것인지 모를 모호한 감정이 느껴졌다.
“무섭진 않아요?”
“글쎄, 두려움보다는 그냥 걱정스러울 뿐이야.”
“…….”
“동정하는 거야? 네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오히려 웃음이 나오려 그래.”
“…전 처음에 당신을 의심하고 경멸했지만, 이젠 아니에요.”
“갑자기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이곳에 처음 오던 날 기억해요?”
“그거야… 기억이 안 날 수 없지. 꽤 큰 사건이 있었잖아.”
“어째서 마족을 증오하던 제가 경계가 사그라들었는지 아세요?”
“몰라. 안 그래도 그 일이 종종 떠오를 때, 네가 왜 그랬을까… 궁금하긴 했어.”
“리헤로스가 당신을 아낀다는 이야길 듣곤 마족에게 속고 있는 불쌍한 남자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더더욱 둘을 떨어트려 놓으려고 했고요. 그런데….”
“…….”
“당신이 리헤로스를 볼 때, 어떤 표정인지 모르죠?”
“그야… 내 얼굴을 거울로 비춰보며 다니는 게 아니니까.”
“마족에게선 나오지 않는 순수함이 보였거든요.”
대체 어땠기에 방어 기제가 한 꺼풀 벗겨진 걸까. 스스로 상상해보려는 찰나, 녹틸이 쉬지 않고 그에 대한 답을 내어주었다.
“용사가 얼굴을 가까이하자 뺨을 붉히고, 칭찬에 어쩔 줄 몰라 하다니, 어이없었죠.”
“윽….”
“누가 들었을 때 고작 이 모습에 경계를 푼다는 건 미친 객기에 가깝죠. 그런데 누구든 간, 아니 당신도 제삼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봤다면 이해했을 거예요.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마족이 그렇게까지 다양한 표정을 짓는지 몰랐거든요.”
예상보다도 더욱 적나라한 말이었다. 순식간에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녹틸은 붉어진 내 꼴이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까지 강조하지 마…!”
“당연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제가 자극하고 싸우려고까지 했는데도 당신은 마법은커녕, 무기도 들지 않았죠. 아무리 제 마음에 들지 않을지언정 살기라든지 아주 조금이라도 적대하는 눈빛조차 띠지 않았어요. 오히려 리헤로스를 위해 자리를 피했던 것 같았으니까요.”
“…그게 틀린 말은 아니긴 해.”
“그 뒤로 생각해봤어요. 아무리 비열하고 더러운 마족이래도 인간 하나를 괴롭히자고 고행길을 자처한다? 마족 놈들은 단발적인 쾌락주의자니까 절대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게다가 흉내는 낼 수 있을지언정 이렇게까지 인간을 향해 깊은 유대를 느끼는 것도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러니 리헤로스를 믿어보겠다고 했죠. 고작 며칠 본 게 전부긴 했지만, 당신은 제가 경험해보았던 놈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죠.”
“…….”
“그래서 제가 겪었었던 일을 불쑥 꺼내 보았죠. 아니나 다를까 마족을 싫어하는 이유를 공감했잖아요. 믿을 수가 없었어요. 결국 리헤로스가 틀리지 않았고… 당신을 적으로 돌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여전히 직설적인 단어들로만 골라 툭툭 내뱉고 있지만, 그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고민하며 최대의 신뢰를 주었는지 이해되었다. 나를 진짜 ‘동료’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 아닌가. 코끝이 찡하게 아려왔다.
“그런 표정 지을 것 같아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아아, 미안해.”
“뭐가 미안합니까? 고작 이런 걸로 사과하지 마세요. 안 어울리니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거친 말투가 들리자 비로소 눈물 대신 미소가 그려졌다. 녹틸이 멋쩍은지 오히려 눈을 피하는 형국이었다. 낯간지러운 상황은 이만 마무리하고 행동에 들어가야 할 때였다.
“덕분에 평생의 궁금증이 해소됐어. 리헤로스 깼겠다. 이만 가볼게.”
“…그래요.”
“루카에겐… 인사 못 해서 미안하다고 해줘.”
“…….”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푸른 불꽃으로 이루어진 원이 공간을 가르며 그려지자 안으로 발을 하나 걸쳤는데, 그 순간 녹틸이 불러 세웠다.
“아크리스!”
“…응.”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요.”
“응, 나도 그러길 바라.”
대답에 마침표를 찍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온몸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을 뚫고 나오자 오늘 새벽까지 리헤로스와 함께했던 방 앞에 도착했다. 순식간에 공간을 이동시켜주는 포탈은 만남과 이별의 순간은 찰나와 같음을 깨닫게 해준다. 이미 발을 들여버린 시간 선에는 막으려야 막을 수 없는 흐름이 존재한다. 그러니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나아가야 하는 인생의 압축이라 말해도 적절하다.
‘그보다 어떻게 하지.’
조언을 듣고 나서 결심한 것치고는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깨어 있을까, 들어가자마자 바로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그의 실망하는 표정이라던가 슬퍼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까지 상상하니 매 맞기 싫은 어린아이처럼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다.
'그래, 딱 차 한 잔 마시고 깨우자.'
정말 한 잔만 마셔치우고 나서 깨울 것이다. 녹틸과 그랬던 것처럼 따뜻한 것으로 몸을 진정시키면 차분히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더 이상의 타협은 없다고 다짐하며 1층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어디 있었어?"
"악!"
몸을 돌린 순간, 방 안에 있을 줄 알았던 리헤로스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펄쩍 뛰어올랐고 문에 바짝 기대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있으니 그는 작게 소리 내 웃었다. 크고 굵은 양손이 문을 짚었고 나를 팔 안에 가두었다. 정돈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는 그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표현해주었다.
“깨, 깼어? 깨우지 않으려고 조용히 나온 건데.”
“그랬구나. 어젯밤에… 별로여서 도망간 줄 알았어.”
“아, 그….”
지난밤에 나눈 몸의 대화 말인가. 이번엔 깜짝 놀라서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럴… 그럴 리가 있겠어…?”
“다행이다.”
이제 볼 장 다 본 사이여서일까, 그는 자연스럽게 고갤 기울이며 입을 맞췄다. 입술만 빠는 부드럽고 가벼운 키스가 이어지자 그의 양 뺨을 잡아 제지했다.
“읏, 아침부터… 지나치게 건강한 거 아니야?”
“크리스만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돼.”
“진짜… 못 하는 말이 없어.”
그만두려고 했는데 저 말에 어찌 안 넘어갈 수 있을까. 밀어내지 못하고 다시금 당겨 입을 맞췄고 내 쪽에서 먼저 그의 입술을 벌려 들어갔다. 끈적하게 맞닿아 섞인 타액은 더욱 질척한 화음을 내고 있었다.
‘안 돼. 이러다 방 안으로 들어갈라.’
가쁜 호흡을 나누면서도 이성은 끊임없이 독촉해댔다. 다행인 건 본능에 잡아먹히기 전이었기에 아랫입술을 핥아 올리며 행위를 갈무리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선홍색의 살덩이와 몽롱한 시선은 버석해진 가슴을 눅눅하게 만들었다. 무언가 아쉬운 듯 리헤로스는 다시 고갤 기울였지만, 미룰 수 없는 숙제를 마치기 위해 그의 두꺼운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며 말을 꺼냈다.
“…리헤로스. 할 얘기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