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솔직히 말할게.”
“응.”
“테네브가 날 감옥에서 꺼내주었을 때, 고통에서 벗어난 해방감은 아주 잠깐이었어. 놈들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끈질기게 쫓아올 거라는 공포가 있었고 이 때문에 하잘것없는 목숨이 그저 빨리 끝나길 바랐어.”
“…….”
“근데 테네브는 내게 살아남아달라고 애원했지… 난 그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 사실은 죽고 싶지 않았던 거지. 용기가 없으니까 남을 핑계로 대고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것뿐이야.”
“크리스….”
“탈옥하면 네가 무사하지 못할까 겁났는데, 다행히 스피나가 보호하고 있단 정보까진 테네브가 알고 있더라고. 안심했지. 아, 오히려 내가 나섰다간 네게 피해를 줄 수 있겠구나. 그녀는 나와 달리 사회적으로, 금전적으로, 물리적으로 너를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그는 어떤 추임새나 숨소리의 변화도 없이 내 쪽을 향해 고갤 돌린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래서 널 찾는 걸 포기했어. 이곳이라면…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은 채 조용히 지낼 수 있을까, 나에게도 새 출발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걸까, 수없이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어. 그런데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어.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끝엔 네가 있더라.”
“…….”
“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을까. 나만 너를 이렇게 그리워하나 원망도 했어.”
“난….”
“지금은 알아. 안 보이는 곳에서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지금의 난 원망하지 않는다고,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 다 과거일 뿐이야. 그때는 그랬었지, 미숙하게도.”
“…응.”
“좋아하는 크기가 있다면 내 쪽이 더 크다고 착각해서였을까? 자존심도 상하고, 서글프더라. 그래서 너를 잊고 살아갈까 생각도 했었어.”
“…….”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꼭 내게 마음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널 좋아하지 않을 수 없어. 대가를 바라고 좋아하게 된 게 아니라는 말이야.”
“크리스….”
“그 결과가 자수야. 나로 인해 곤란하지 않길 바라서… 네가 행복했으면 해서. 근데 지나고 보니 그것도 이기심이었더라. 내 마음 편해지자고 너와 스피나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 것 같았어.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지. 이게 전부야.”
어깨를 으쓱였다. 리헤로스의 반응은 대충 짐작이 되었다. 고생 많았다고 위로를 한다던가 미안해하리라. 그러나 내 예상을 깨는 반응이 튀어나왔다.
“넌 항상 스스로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어.”
“글쎄.”
“크리스는 누구보다도 다정한 사람이야. 저마다 본인의 숨겨진 장점을 모르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너는 유독 그래.”
“난 아닌데…. 그런 말 들으면 죄짓는 기분이야.”
“가장 오래, 곁에서 지켜본 내가 보장하는데도?”
“……진짜 다정한 게 누군데. 나는 속으로 음험한 생각 많이 한다니까? 질투하고, 원망하기도 했고 또….”
“결국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르고 행동하잖아. 그건 이기적인 게 아니야. 그저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엄격할 뿐이지.”
잘은 모르겠다. 모든 게 내 이기로 인해 크게 벌어진 것이라 여겨왔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해야 짊어진 고통이 덜 무겁게 느껴졌으니까.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그는 제자리에 우뚝 섰다. 예상치 못했기에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더 가서야 멈추었다. 잡고 있던 손은 떨어지지 않고 조금 당겨진 채였다.
“난 네 엄격함까지도 좋아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네가 힘들진 않았으면 좋겠어.”
“…….”
“그러니까… 내가 옆에서 계속 이야기해줄게. 이 모든 것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너는 대단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네게 듣고 싶은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해주는 걸까. 왜 이 섬세한 남자는 나를 좋아하는 걸까. 자신과 비슷한 사람과 안정적인 연애를 하면 좋을 텐데, 나에게 과분한 애정과 친절을 베풀어 주는 걸까. 이것만큼은 수도 없이 고민해보았지만 이렇다고 할만한 답이 등장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진심이야.”
“…….”
“크리스? 괜찮아?”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그저 그의 몸통을 와락 끌어당겨 안았다. 그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받았는데, 난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예정된 이별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오늘의 해는 저물었고 남은 시간이 이틀뿐이라는 말을 해야 할까 망설여졌다.
‘부정한 신에게 빌어서 힘을 얻어버리면 또 그거대로 큰일이고요!’
그 순간, 관리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나 리헤로스가 먼저 나서서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다만, 카르말록스가 연인의 죽음에 상실감을 느끼는 남자에게 교활한 말을 속삭이며 유혹을 한다면 어떨까. 연약한 구석을 파고들어 부정한 염원을 하게 되면 어쩌나 싶었다. 관리자도 통제하기 어려운 데이터라고 했으니 어떤 짓을 벌여 악의 부활을 이끌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세상에 대적할 자가 없는 용사가 그리되는 것도 문제지만, 질서를 지키고 만인의 빛이 되어주던 그가 변절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나는 여전히 비겁했다. 그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칼날을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으응, 아니야. 그냥… 행복해서….”
“하하… 정말?”
“고마워 그리고… 많이 좋아해. 정말로.”
왜 말하지 못했을까. 기대에 찬 눈빛,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시선은 새빨간 거짓말을 정당화하게끔 했다. 우리는 서로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마치 곧 무너져내릴 절벽 끝에 선 연인처럼.
***
‘넌 돌아갈 수 없어.’
검은 그림자는 발끝부터 내 몸을 타고 올랐다. 꾸물꾸물 질퍽거리는 해양 생물처럼 역겨운 질감을 몸 위에 남겼다. 그것이 닿는 족족 전신이 마비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급기야는 얼굴의 근육까지도 움직이지 못해 눈 한 꺼풀조차 닫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랬기에 눈앞에 울렁이는 검은 그림자를 똑바로 볼 수밖에 없었다.
‘나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져야 해.’
그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붉은 안광을 뿜어냈다. 살기 어린 시선은 어디선가 본 적 있었다. 그러나 생각을 이을 새도 없이 몸통을 조여들었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리헤로스에게 했던 거짓말을 말하는 것인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항변을 채 내뱉지도 못했는데 그것은 나를 향해 비난하기 시작했다.
‘위선자!’
‘거짓말쟁이.’
‘왜 나를! 배신했어!’
‘네 육신은 곧 심연에 처박혀 굶주린 마수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먹힐지어다.’
‘살려줘!’
‘사기꾼.’
‘이 몸은 내 거야.’
누구인지 분간이 불가한 여러 높낮이의 목소리가 고막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귀를 막을 수도 없었으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몸이 앞으로 천천히 고꾸라지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마를 칠흑빛의 땅에 처박고 있자 점차 소란은 가라앉았다. 완전한 정적이 찾아온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눈앞엔 검은 인영이 여전히 선 채 입꼬리를 찢으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눈치채고 나서야 내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어느 순간 내 목엔 나무로 된 구속 구가 채워져 있었고 머리 위엔 검은 배경과 상반되는 처형대의 은색 칼날이 있었다.
‘죽어.’
─퍽!
목덜미를 따라 척추까지 신경이 탁탁 끊기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입에서는 검붉은 액체가 울컥 밀려 나왔고 분명 똑바로 서 있던 인영은 빙글빙글 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몸에서 분리된 내 머리가 구르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깨닫는 데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미 절단되어 버린 목의 근육을 움직여 안간힘을 썼다.
…
“아! 아으윽…! 아!!”
목구멍을 비틀어 여는듯한 쥐어짜는 신음과 함께 몸이 그대로 튕겨 올라왔다. 색색 숨을 몰아쉬며 목을 허겁지겁 더듬었다.
“부, 붙어있어…. 꾸, 꿈이었구나….”
비로소 주변의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도 어두웠지만, 꿈처럼 칠흑 같은 어두움은 아니었다. 감청색의 공기엔 흰 먼지가 사뿐사뿐 춤추듯 떠다니고 있었다. 익숙한 공간인데도 워낙 흉흉한 꿈을 꾸어서일까,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서늘했다. 여전히 심박이 진정되지 않아 따뜻한 온기가 필요했다.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려는 찰나, 바로 옆에 뭉클한 감각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물체는 날 공포에 떨게 만드는 ‘그것’이 아니었다.
“리헤로스….”
생각해보니 어젯밤, 리헤로스와 함께 집에 돌아왔었다. 밤새 어떤 대화도 없이 기나긴 밤을 보냈었다. 워낙에 피곤했기에 그런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애써 그렇게 생각해보려 했지만, 마음 한편의 어둠은 고개를 내밀었다.
‘정말 끝이 아니게 되면 어떡하지?’
꿈은 원래 무의식의 반영이라지만, 이곳에서 겪은 것들은 실제로 형상화되어 눈앞에 나타났었다. 그 때문에 불안은 좀처럼 진화되지 않았고 더더욱 크게 불어났다. 곁에서 지켜봐 줄 자가 없어진 이후에 리헤로스의 삶은 어찌 될지 걱정스럽기만 했다. 아닌 새벽에 몸부림을 친 나로 인해 맨살이 드러난 그에게 이불을 가지런히 덮어주었다. 도저히 잠들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를 주워 입으며 1층으로 내려갔다.
손톱을 이 끝으로 탁탁 튀기는 것도 모자라 부엌과 거실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정신 사납게 굴었다.
‘보험을 만들어놔야 해.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사람.’
스피나는 대부호인 만큼 후원인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리헤로스만을 집중적으로 관리해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제껏 직접 간섭하는 것도 사적인 이유였기 보다는 공적인 면에서 위협이 될 만한 것을 제거하기 위해 도왔으리라 생각했다. 조금 더 사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믿을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사람.
그때, 뇌리를 번쩍 스치고 지나간 이가 있었다. 어떠한 명분도, 대가도 없이 지지해주던 사람이었다.
"프린치피움 외곽으로 가자."
허공에 동그란 원형을 그리는 제스처를 취하자 곧바로 포탈이 나타났다. 지체할 것도 없었다. 곧바로 뛰어들자마자 어느 저택의 문이 코앞에 있었고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도어 노크를 세차게 내려찍었다.
“녹틸! 루카!”
한 오십 번 정도 두드렸을까. 문 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나의 조급함을 알 리 없는 집 주인은 아주 천천히 문을 열어젖혔다.
“녹틸,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너무 이른 시간에 온 거 아니에요? 꼭두새벽에 문을 부술 것처럼 소란을 피우는 이유가 대체 뭐예요….”
“나 부탁할 게 있어…!”
“참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제가 필요하면 다 내놓아야 하는 만물상이에요? 돈이라도 받으면 몰라….”
그는 느릿느릿 하품하며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 말이 정말 나에게 불만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란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내가 그의 농담을 받아줄 만큼 여유가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 표정을 빠르게 읽은 그는 비로소 비몽사몽 한 기운이 깨기 시작한 듯했다.
“…정말 무슨 일이 있나 보군요?”
“…….”
나는 호들갑 대신 조용히 고갤 끄덕였고 그는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몸을 비켜섰다.
“일단 들어와요.”
아직 그 누구도 활동하지 않은 새벽 저택은 한기가 감돌았다. 팔을 문지르며 접견실 안으로 들어섰다. 녹틸은 두 손가락으로 마찰하는 소리를 냈고, 난로의 불이 피워지는 동시에 컵과 뜨거운 물을 담은 주전자가 붕 날아와 우리 앞에 놓였다.
“차 마실 시간은 있죠? 진정하게 한잔하고 말해요. 당신 지금 안색이 매우 안 좋거든요.”
“…고마워.”
따뜻한 찻잔을 심장 가까이에 대며 세차게 날뛰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일분일초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으니까. 생각을 또박또박 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입을 뗐다.
“녹틸… 정말 미안한데 부탁이 있어.”
“그게 뭘까요.”
“나… 내일이면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