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칼리고의 빈정거림에 아득해진 정신이 돌아왔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건 의미를 두지 않아야 한다. 당장 중요한 건 눈앞에 있다. 놈을 해치우지 못한다면 우리가 살아나가기는커녕 알리엔토 대륙 전체가 암흑기에 빠지게 될 테니까.
마음을 다시 잡기 위해 끝까지 리헤로스만은 살려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를 상기해냈다.
‘나도 널 지켜주고 싶어.’
‘네가 살아갈 이 세계도.’
가슴이 저렸다. 나를 위해 이리 다정한 말을 건네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내 목숨이 붙어있는 평생 이를 잊지 못할 것이리라. 심지어 그는 말뿐만이 아니었으며, 늘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행동으로 보여줬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그의 행복을 위해 그리하겠다고 맹세했었다.
“징그러운 놈들, 가장 고통스럽게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데보티오!”
조르고 있는 팔을 뜯어낼 기세였던 칼리고에게 최후의 스킬을 사용했다. 놈과 겹쳐있는 내 몸이 함께 꿰뚫렸다. 거대한 가시로 인해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크으윽…! 헛짓거리 해서 힘을 빼는 것인가? 고작 몇 초 더 살아보겠다고 발악하는 꼴이라니! 천박해.”
“크리스…!”
“오래는… 못 버텨. 그러니까 빨리…!”
“난…….”
격렬한 전투로 인해 부어오른 손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나에게도 검을 쥐여주고 리헤로스를 베라고 한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시간이 없다. 이 기회를 놓치면 정말 끝이다.
“리헤로스, 잘 들어!”
“…….”
“난.”
“…….”
“널 두고 죽지 않을 거야. 믿어줘.”
누가 보아도 확신할 수 없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어떤 두려움도, 후회도 없는 진실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마음이 통한 걸까, 방향키를 잃었던 그의 눈빛이 되돌아왔다.
“크리스, 난 너를 믿어.”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마침내 검을 단단히 쥐었고, 발끝에서부터 일렁이는 아우라는 이글대는 불꽃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너도 나를 믿어줘.”
곧이어 지각을 흔드는 폭발적인 힘이 분출되었다.
리헤로스는 거친 포효를 하며 달려들었다.
그가 지나쳐온 공간은 금빛, 아니 그것을 뛰어넘은 흰빛이 폭렬 하며 온 세상을 뒤덮었다.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쏟아져 내리는 빛에 의해 바로 앞의 상황조차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검은 갑옷 같던 껍데기가 산산이 조각나며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내 명치까지도 금속의 시린 감각이 닿았다.
박힌 검은 아주 힘겹게 위를 향해 뻗어나갔다.
빛과 상반되는 탁한 선혈은 하늘을 향해 미친 듯이 솟구쳤다.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하는 칼리고의 입에서는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도 안 돼….”
칼리고의 손은 허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절대자의 힘이 사라져… 저를 버리지 마시…….”
문장의 끝을 맺지조차 못하고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빛무리 속에서 한 줌의 재가되어 사라졌다. 새로운 별의 탄생을 알리는 폭발처럼 마을 전체를 흔드는 파장이 퍼져나가다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고요한 적막과 흩날리는 잿더미가 전투의 끝을 알렸다.
“헉… 헉….”
옷은 피로 흠뻑 젖어있었고 끝에 맺힌 방울이 지면에 떨어지며 붉은 별자리가 수 놓였다. 제 앞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자 저절로 앞으로 몸이 기울였다. 팔을 뻗어오는 리헤로스의 행동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나는 그저 품 안에 쓰러질 뿐이었다.
완전히 풀려버린 근육은 가동할 수 없었다. 몸에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자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는 미처 읽지 못했다.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알림음이 오늘따라 유독 청아하고 기분 좋게 들릴 뿐이었다.
─또롱
[시스템] [서버 최초]
용사 ‘리헤로스’가
히든 루트를 클리어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
“아크리스.”
“…….”
“아크리스. 눈을 떠.”
잔잔한 물결에 파문이 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난 자아도, 형체도 없는 ‘무의 존재’인 것 같았는데, 부름으로 인해 비로소 누구인지 깨달았으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생각났다.
“눈을 떠.”
집요하게 깨우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칭얼댔다. 겨우겨우 실눈을 떠보니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있었다. 이 공간은 이전에 본 무지갯빛이 일렁이는 공간과 눈에 띄게 다를 정도로 새하얬다. 그 누구도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안정감을 주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깊게 잠들 수 있던 게 아닐까.
“괜찮아?”
고갤 돌려 올려다보니 하얀 인영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하얬기에 이목구비는 명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예의상 했을 빈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렇겠지. 너무나도 견디기 힘든 일들을 겪어왔잖아.”
“…….”
“고생했어. 너는 강한 사람이야.”
맞다. 조금 전까지 리헤로스와 힘을 합하여 싸우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은 어떤 생각도 고민도 걱정도 없이 너무나도 편안했다. 이대로 잠들고만 싶었다. 이름 모르는 자의 무릎에 뺨을 기대어 다시 눈을 감았다.
“고생했으니까… 조금만 더 자면 안 될까?”
“여기에서 잠들면 안 돼.”
“조금만… 눈 감고 있을래.”
떼를 부리자 흰색의 인영은 작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내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아.”
‘아크리스’가 아닌 내 ‘진짜’ 이름이었다. 분명 자각은 하고 있지만, 정확히 내 이름이 뭐였는지 모르겠다. 나를 불렀다는 것만 인지할 수 있었다. 다시금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잖아.”
“맞아….”
현실 세계의 집은 어디에 내놓을 만큼 휘황찬란하거나 멋진 공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에 사무치게 그리웠다. 갑작스레 눈물이 흘렀다. 향수병이라도 걸린 걸까? 이상했다.
“이제 돌아갈 수 있어.”
“……정말?”
“그래. 정말 끝이야.”
“끝…이라니, 다행이다.”
“…….”
그는 흐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닦아주었다. 작은 행동에도 큰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눈물을 멈추고 다시금 따뜻한 적막을 즐겼다.
“이제 시간이 됐어.”
기다리는가 싶더니 그는 무릎에 올려있던 내 머리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더니 일어났다.
“어디…가?”
“고마워.”
“왜…?”
“…….”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되었어?”
“응.”
“어떻게…?”
마치 고민하는 것처럼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건 내가 바라는 결말이었거든.”
“어…?”
“고마워.”
“잠깐… 잠깐… 네가….”
애타는 부름에도 멈추지 않고 그저 지평선을 향해 걷기만 했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을 때와 달리 그를 붙잡으려고 애를 쓰니 몸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고개만 겨우 들어 올려 그의 뒷모습을 볼 뿐이었다.
말까지도 나오지 않아 입술을 뻐끔대기만 했다. 그리고 꼭 사라질 것만 같을 때 토해내듯 소리를 가까스로 내었다.
“네가… 진짜 아크리스 맞지?”
하얀 인영은 잠깐 멈춰 섰다. 내 쪽을 돌아보더니 대답 없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향해 미소 지은 것 같았다. 그리곤 흰 공간 안에 스며들듯 사라졌다.
이상하리만치 그가 사라지니 몸이 가벼워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내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착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꼭 천국에 온 것 같았으니 말이다.
“혹시… 나 죽은 걸까.”
“축하드립니다!”
아까완 확연히 다른 높은 톤의 목소리였다. 중앙의 흰 배경이 갈라지더니 커튼처럼 젖히듯 나오는 사람이 보였다. 폭죽이 펑 터지며 오색의 꽃가루가 흐늘흐늘 휘날렸다.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기만 하다가 겨우겨우 입을 열어 물어보았다.
“누구….”
“저는 이 게임의 관리자예요.”
프렉탈 소프트의 주축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가벼운 이미지였다. 분명 고군분투하던 때엔 개발자 중 누구 하나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분개했었는데, 마주한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무사히 엔딩을 보셨군요. 심지어 히든 루트로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 저희 모두 놀랐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세상에, 알리엔토의 마왕들은 꼭 용사랑 사랑에 빠지더라 너무 로맨틱하지 않아요? 얼마나 눈물 없인 못 보는 장면이 많았는지. 감동, 또 감동이에요. 특히 저는 두 분이 나란히 피아노 앞에 앉아있을 때….”
“아….”
그 말을 듣자 몽롱했던 정신은 뚜렷해지기 시작했고, 리헤로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감격에 젖은 감상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걱정스러웠다.
이곳 어딘가에 그가 있을까 주위를 다시금 둘러보았지만 오로지 그녀와 나, 둘뿐이었다.
“어라? 더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물론 기뻐… 그런데 여긴….”
“당신을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기 전의 공간이라고 설명하는 게 직관적이겠네요.”
“정말? 아니… 벌써?”
“음?”
그녀는 고갤 갸웃대면서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꾸준히 염원해오시던 거라 끝나자마자 급하게 준비했는걸요. 그래서 고작 폭죽 하나밖에 준비하지 못했는데. ‘아크리스’도 당신에게 축하 겸 감사 인사 전하러 왔잖아요.”
녀석은 주머니에서 풍선 피리를 꺼내더니 뿌뿌 불어댔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뭐, 그럴 수도 있죠. 사실 ‘아크리스’의 몸은 이미 코마 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에 빨리 오신 것이기도 해요. 여기를 떠나면 육체는 완전히 죽게 되는 거죠.”
“리헤로스는?”
“리헤로스 님은 무사하세요. 물론 저쪽 세계에서 치료는 받고 있지만요.”
“…….”
“무엇이 당신을 망설이게 하나요?”
어떤 분쟁도 고통스러운 전투도 없는 그리운 내 고향을 떠올리면 가슴 한편이 먹먹해진다. 하지만─
“죽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이고, 어떻게 양쪽이 똑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무슨… 말이야?”
“아니에요. 그럼 시간을 조금 드릴까요?”
“어…?”
“작별 인사할 시간이요.”
“…….”
고작 인사밖에 할 수 없는 것인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말의 희망을 품고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이곳에 남을 수는 없어?”
“네.”
“…….”
냉혹하면서도 단호한 대답은 설득해볼 여지도 없었다.
“그리 원망하지 마세요. 그래서 시간을 드리는 거니까요. 자아… 얼마가 좋을까.”
“일주일만….”
“안 돼요.”
“왜?”
“당신 몸의 데이터를 억지로 이어붙여 놓고 임시 보수 한 거니까요. 한계치를 넘기면 조각조각 나서 고통스러워질 거예요. 고통에 몸부림치는 당신이 ‘부정한 신’에게 빌어서 힘을 얻어버리면 또 그거대로 큰일이고요.”
“그러고 보니… 카르말록스는 어떻게 된 거야? ”
“그는 칼리고와 같은 강한 의지를 가진 악인을 만나지 않는 이상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순 없어요.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는 ‘엔딩’인 거죠. ‘카르말록스’는 우리가 설계했지만, 통제하기 어려운 데이터예요.”
“그렇구나.”
“그러니 나쁜 생각 할 생각일랑 말아요! 리헤로스를 더 괴롭히고 싶다면 그렇게 하던가요.”
그녀는 장난스레 호통쳤다. 그리고선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였다.
“삼 일. 딱 삼 일 드릴게요.”
“…….”
“그 안에 마무리하시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예요.”
“…….”
“이제 정말 끝이니까요. 돌아가셔야죠.”
“…알겠어.”
“좋아요. 그럼, 건투를 빌게요오. 아리스님.”
“어?”
말미에 말투가 묘하게 달라졌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그뿐만 아니라 저 호칭을 사용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는데, 그것이 누구였는지 기억을 되감기도 전에 그녀는 흰 커튼 속으로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
그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서버에서 강제로 킥 당한 것처럼 눈이 저절로 떠졌다.
아주 익숙한 공간이었다. 평화로이 지저귀는 산 새소리, 싱그러운 풀냄새, 리헤로스와 함께 골랐던 가구들… 모든 것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정말 숨 쉬고 있어….’
소리는 거칠지만, 들숨 날숨 할 때마다 오르내리는 가슴은 멀쩡했다. 얼마나 오래 잠들어 있던 것인지 뻑뻑해진 눈꺼풀을 비비고 싶었는데 왼팔이 너무 무거웠다. 원래 꾸준히 상처가 있었던 데다 직전의 전투로 더 가동이 어려워졌을 거란 생각은 했다. ‘관리자’도 내가 코마 상태에 빠져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번엔 얼마나 다쳤을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혹시 아예 못 쓰게 된 건가?’
그렇다고 해도 이해는 됐다. 그 여러 충격을 버티고 배기겠나. 심약한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레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저릿저릿한 손끝엔 지독한 상처나 끔찍한 몰골은 없었다.
단지 금발 머리의 남자가 내 손바닥 위에 뺨을 기대어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