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곧장 처형대로 달려가 아슬아슬하게 꽂혀있는 창을 뽑아냈다. 나무 부스러기를 털어내자 갓 담금질을 끝낸 쇳덩이처럼 형형한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군수산업을 주도하는 이드랑제 가에서 만든 창이어서 그런지 여러 충격에도 여전히 예리한 모양새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손안에서 한 바퀴 돌려보며 상태를 살폈다.
“좋아, 이거면 돼.”
전장으로 돌아가려는 사이 리헤로스는 내 도움 없이도 유효타를 만들려고 고군분투 중이었다.
칼리고는 다시금 한쪽 팔을 지면에 꽂아 넣었고, 바라보고 있는 방향대로 폭발이 일렬로 터져나갔다.
리헤로스는 옆으로 굴러 공격을 회피했고, 몸을 일으키기 전에 아직 스킬을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칼리고의 다리를 쳐내듯 걸어 넘어트렸다.
하나의 팔이 여전히 꽂힌 채 기울어진 칼리고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으려고 하자 자유로운 상태의 다른 팔로 막았다.
─캉!
강력한 두 힘이 마찰하자 반동 때문에 튕겼다.
안정적인 리헤로스 쪽이 더 빠르게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기에 곧바로 가슴에 X자의 검기를 선명하게 남겼다. 이번의 일격은 꽤 고통스러운 모양인지 미간이 눈에 띄게 구겨진 모습이었다.
“크리스, 육십 퍼센트!”
“잘했어!”
“무슨 작당을 하는 거냐.”
칼리고는 몸을 옆으로 돌리며 깊게 박혀있던 팔을 빼내었다.
거리를 벌리려는 속셈인가 싶더니 멈춰 서서는 양팔을 교차하며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을 발산하기 직전에 달려들었다.
‘뭐가 됐든 하나라도 무효화하는 게 좋으니까.’
교차한 팔 사이에 창을 걸자 철봉형 구속 구에 걸린 모양새가 되었다.
순식간에 놈의 행동을 제지하자 칼리고는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코웃음을 치며 팔을 펼치는 대신 더욱 굽히고 있었다.
─기기기긱
창이 얇은 알루미늄처럼 휘고 있어 황급히 빼내었다. 찾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무용지물이 될 뻔한 창을 살폈다. 구부러진 모양새는 화려한 외양에 어울리지 않게 볼품 없어졌다. 그렇다고 할지언정 아직까진 무기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으니 안심했다.
다행히도 그 사이에 리헤로스는 공격이 유효한 범위를 벗어나 전투 대기하고 있었다.
“창이 구부러진 보람이 있네.”
“놀랐는가? 이게 바로 강대한 힘이다. 버림받은 너는 갖지 못한 힘.”
“그딴 건 줘도 안 가져.”
“과연 그럴까? 분명 후회하게 될 텐데.”
칼리고는 팔을 뻗더니 손가락을 하나하나 구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곧이어 손날에서부터 팔까지 톱날 같은 것이 불쑥 솟아났다.
그것의 형태를 자세히 살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뛰어올라 내 쪽으로 착지하며 모은 양 팔꿈치를 내려찍는 동작을 취했다.
“이 정돈 피할 수 있어!”
“과연?”
힘껏 뛸 필요도 없이 사뿐히 뒤로 물러섰다.
톱날이 지나간 자리는 차원의 균열 같은 검보라빛 잔흔이 생겨났다.
그것이 꾸물꾸물 일렁이더니 갑자기 내 쪽을 향해 돌진했다. 깜짝 놀라 몸을 깊게 숙이며 회피했다.
“윽! 뭐야?”
등 뒤로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진 잔흔은 ‘머물러있다가 일정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검기’로 보였다. 입술을 기괴하게 비트는 칼리고의 입에선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엔 한 개뿐이었지만, 내가 네놈에게 여유를 주리라 생각하는가?”
모으고 있던 양팔을 떨어트리더니 허공에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생긴 잔흔부터 내 쪽으로 달려들었고, 점점 몰아치기 시작하자 온몸을 베어 나갔다.
“아…! 윽!!”
피하는 것에 한계가 생기자 창으로 쳐낼 생각으로 휘둘렀지만, 잔흔이 지나간 모양 그대로 창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날 붙이는 힘없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져 짤막한 막대만 쥐고 있을 뿐이었다.
충격으로 인해 멀거니 서 있던 내 옆으로 움직이는 잔흔을 뒤늦게 발견했다.
아슬아슬 고개를 돌렸지만, 이마 위가 찢겨 피는 점점 뺨을 타고 흘렀다.
“너무 재미가 없어서 큰일이군, 새로운 공격을 보이면 반격도 하지 못하고. 이래서 되겠나?”
그런 말을 씹어대는 것치곤 꽤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놈은 다른 던전 보스와 달리 겹치는 패턴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그때 행동을 예측하며 순발력을 요구하는 것뿐이었다. 리헤로스가 맞붙을 수 있는 공략 스타일이었지만, 교전 시간이 길어지면 어찌 될지 모른다.
다시 팔을 무자비하게 휘둘러대자 잔흔은 나를 토막 낼 요량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놈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포기하지 마!”
그때, 리헤로스가 내 앞으로 막아서더니 놈과 똑같이 검을 수없이 휘두르며 검기를 생성해냈다.
다행히도 잔흔과 검기가 충돌하자 큰 폭발을 일으키며 막을 수 있었다. 폭발의 여파로 칼리고의 시야가 가려졌을 때, 리헤로스는 먼지 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졌다.
─쾅!
뿌연 실루엣은 충돌했고, 그 사이에 금빛과 검보라빛 스파크가 뒤엉키며 더한 파장을 일으켰다. 마치 폭풍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이내 리헤로스의 파장이 더욱 거세지더니 먼지를 모두 걷어내는 바람이 일어 두 사람의 상태를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칼리고의 양팔에 돋아난 톱니는 리헤로스에 의해 베어져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곤 지체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 목표인 가슴을 그었다.
“칠십 퍼센트!”
“이… 빌어먹을… 새끼가악…!!”
울부짖음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주먹으로 리헤로스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와 동시에 잘게 피가 튀겼다.
정확히 목표의 중앙을 노려야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일격을 날릴 때 온 힘을 다해야 하므로 점차 섬세한 움직임을 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걱정한 대로였다.
칼리고는 한 대 친 것 가지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중심을 잃은 리헤로스를 붙잡으려 했다.
“안돼…!”
그를 온몸으로 밀쳐 내고는 대신 잡혔다. 그 힘이 어찌나 세던지, 두 걸음 정도 걷다가 넘어졌을 리헤로스가 칼리고 손에 잡힌 내 몸에 부딪히더니 주우욱 미끄러져 멀어졌다.
그를 대신해 기껏해야 얼굴 몇 대 맞으리라 생각했건만, 놈은 입을 벌리더니 혀에 돋아난 날카로운 가시들을 얼굴을 향해 뱉었다.
반사적으로 양팔을 들어서 막았다.
“아, 악…!”
그냥 가시가 아니었다. 맞은 부위는 타들어 가는 고통을 수반했다. 하지만 이렇게 근접할 기회는 매우 적었기 때문에 기회라고 생각했다.
“페르…체로!”
가시 투성이가 된 양손에 피어오른 불덩이를 그대로 칼리고의 가슴에 욱여넣듯 눌렀다.
─콰과가가가각!
작열하는 불꽃은 폭발적인 움직임을 보이더니 이내 사방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가슴 정중앙의 균열이 녹아내려 한 꺼풀 약해진 것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큭! 크큭!”
실성한 건지 아픈 것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모르나 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걸로 팔십 퍼센트…!”
“…쌍으로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짜증 나서 더는 못 들어주겠어.”
여전히 쥐고 있던 나를 들어 올려 그대로 땅에 내리꽂았다.
일시적인 충격에 일순간 입으로 내장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놈의 손과 단단한 지면 사이에 압박되어 숨쉬기가 어려웠다.
“으윽!”
고통에 몸부림을 치자 놓아주는가 싶더니 칼리고는 발을 들어 올려 내 머리를 짓밟아 뭉개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날카로운 검 모양의 아우라가 일제히 날아왔고, 과녁을 향해 정확히 꽂혔다.
“구십… 퍼센트…!”
멀리 떨어져 있던 리헤로스가 최후의 마나를 끌어모아 던진 검기인 듯했다.
‘한 번만 더 맞추면 되는데…!’
그러기엔 나와 그, 모두 한계치에 다다른 것 같았다.
칼리고는 나를 짓밟는 대신 리헤로스에게 다가갔고 가벼운 스텝을 밟으며 몸을 한 바퀴 돌려 찼다.
리헤로스는 검의 면으로 막아내려 했지만, 누적된 충격 때문일까 점점 반응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끝내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고 더욱더 먼 곳까지 밀려 넘어졌다.
“으, 큭…!”
“리헤로스…!”
자욱한 흙먼지 사이에서 여전히 빛을 발하는 검이 보였다.
검에 지탱한 채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지만, 직전의 공격이 꽤 큰 대미지를 준 모양인지 제 옆구리를 짚으며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 게 괴로웠다.
‘네가 할 수 있어.’
간절함 때문일까, 머릿속에서 의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하지만, 명확히 누구인지 떠올리기 힘들었다.
‘네 손으로 해야만 해.’
그 말에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시가 잔뜩 꽂혀있었고, 원래의 피부색이 무엇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만신창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절망의 끝에서 실마리를 얻었다.
“하아… 윽… 아….”
꽂힌 가시를 모두 뽑아내고 날만 덩그러니 남은 ‘창’이었던 것을 쥐었다.
천천히 등지고 있는 칼리고에게 다가갔다.
기척은 진작 느꼈을 터인데 내버려 두는 걸 보니 더는 적수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뒤에서 놈을 끌어안듯 팔을 감았다. 짧아진 창날을 칼리고의 빗장뼈 위의 틈새에 힘껏 내려찍었다. 그것을 지지대 삼아 팔로 목을 졸랐다.
“이건 무슨 발악이지?”
“네 오만이…! 죽음을 앞당겼다!”
“하! 이깟 걸로 죽을 것 같은가? 웃기군, 짧고 무딘 창날이라… 네 하찮은 이미지와 아주 잘 어울리지만 말이야.”
나는 체중을 뒤로 실어 놈의 흉통이 앞으로 내밀어지도록 만들었다.
“흐음!?”
“리헤로스! 붙잡고 있을 테니 베어!”
“크리스…! 안 돼!”
“어서!”
“어떻게…!”
“큭, 크하하하! 그런 속셈이었나?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너는 용사의 약점이라고! 저 유약한 남자가 함께 벨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한심스럽기도 하지, 멍청한 놈 같으니!”
리헤로스는 분한 듯 어금니를 꽉 물었지만, 표정과 달리 검을 똑바로 쥐지 못하고 느슨한 상태였다.
정말 나의 안위가 걱정되어 끝내 베지 못할까?
‘나는 어떤 마음이지?’
내가 죽지 않길 바라서 못하겠다고 포기했으면 하는가? 아니면 어떠한 죄책감도 없이 무참히 베어내고선 그가 나 없는 행복한 여생을 보냈으면 하는가?
‘모르겠어.’
그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결심한 나까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시스템]
마왕 데반레르 델 칼리고
- 광폭화까지 20초
“이제 놀이 시간은 끝이다. 네놈들의 약한 육체와 정신을 탓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