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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113화 (113/127)

113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입이 지껄인 대로 ‘마족’이 아니면서 마왕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특수했다. 칼리고는 어디에서 저런 힘을 얻을 수 있게 된 걸까.

‘영상에서는 뭔갈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혹여 스피나가 가진 증거가 더 있을지 그녀에게 부탁하기 위해 눈으로 찾았지만, 광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사람들은 꼭 언제 있었냐는 듯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오로지 변해버린 ‘마왕’ 칼리고와 리헤로스, 나뿐이었다.

칼리고는 제 몸을 내려다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이게 바로 힘… 진짜 힘이다! 인간이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힘이 넘쳐흐른다.”

“정말 미쳤군.”

아무런 대꾸하지 않는 리헤로스 대신 처형대에 묶여있는 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칼리고는 마침내 내 쪽을 돌아보았고, 말로 형용하지 못할 더러운 기분의 미소를 띠었다.

“아아, 맞다 아직 네놈이 있었지.”

“넌 아킬라와 같은 최후를 맞게 될 거야.”

“난 그런 반쪽짜리와 다르다.”

“카르말록스가 정말 너를 선택했다고 생각하나? 놈의 손에 놀아나는 체스 말일뿐인 걸 모르다니 애잔한데?”

“오오, 아크리스, 나의 신앙심이 너와 같다고 생각하는가? 제 처지도 모르고 불쌍하기도 하지.”

“네 도발은 이제 안 통해.”

“체스 말은 너지, 이 몸은 아니다. 신께선 네놈에게 몇 번씩이나 기회를 주었는데 말로 써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라.”

“기회?”

“소임을 다 할 기회. 그런데 고작 하찮은 인간과 시시덕거리느라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낸 것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네놈은 필요 없어진 게지. 카르말록스께서 나를 이 힘으로 인도했고 게헤나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어주셨다.”

“인도했다는 건 무슨 말이야.”

“궁금한가? 그야 내 곁을 맴도시며 아크리스를 잡으라 속삭이셨지.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는 붉은 달이 차오를 때, 네놈의 피를 마시면 난 비로소 완전해질 거라고 말씀하셨다.”

“말도 안 돼….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멍청한 놈. 너는 새로운 왕을 탄생시킬 제물에 지나지 않는다.”

새빨간 눈동자가 꼭 파충류처럼 어디를 보는지 모를 움직임으로 한 바퀴 돌았고, 다시금 내게 꽂혔다.

“신의 눈을 통해 보았지. 게헤나를 포기하고 떠나던 때부터 넌 아무것도 아니게 됐어.”

“…….”

“아마 몸으로는 느껴졌겠지, 카르말록스 님의 버림받은 자식이라는걸.”

그때란, 리헤로스와 최종 결전을 벌이고 그를 살리기 위해 라이오펠로 돌아왔을 때였다.

상태 창을 열자 스탯이 급격하게 줄었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부터였을까 신께서 새로운 지도자를 찾았지. 네가 버린 마족들은 저들끼리 싸우다 죽고, 전의를 상실했다. 그러니 게헤나에선 나만 한 재목을 찾지 못한 것이지. 아아, 다시 그들을 처음부터 일으켜 세우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어.”

“…….”

“허나 됐다. 인세에선 진창에 구르고, 피를 토해가며 노력을 해도 이룰 수 없던 정점에 오르게 되었으니. 고맙다고 해두지.”

“너 같은 새끼에게 고맙다는 말 듣고 싶지 않아.”

“크, 흐흐흐… 하하하하! 그런가? 난 너 같은 새끼들을 굴복시키는 걸 좋아해. 일이 마무리되고 생각이 바뀐다면 첩으로 써주도록 할까?”

“입 닥쳐…!”

“크크큭.”

교활한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이제 내겐 볼일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돌진해 온 리헤로스의 검을 가볍게 피했다.

“호오, 역시 저놈이 네 약점이군. 즐길 만큼 즐긴 후에 네 곁으로 보내주면 되나?”

“칼리고…!”

“크흐흐, 그래. 더 분노해. 증오해라!”

리헤로스의 움직임은 여태껏 봐왔던 것보다 더욱 빨랐다.

눈으로 좇은 곳엔 푸른 안광과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남기는 잔상만이 있었다. 칼리고는 반 박자 느리긴 했지만, 그의 위치를 곧잘 추적해냈다.

백금색의 검은 팔을 내려찍었지만, 붉은 스파크가 어지러이 튀기만 했을 뿐,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아직도 내가 무투대회에서 패배한 기사단장으로 보이나?”

“큿!”

“놀아주는 건 15분뿐이다. 그 이상은 지겨워서 말이야.”

─띠딩

[시스템]

마왕 데반레르 델 칼리고

- 광폭화까지 15분

시스템 알림음이 울리자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젠장! 고작 15분이라니.”

분했다.

칼리고는 도발하고자 역겨운 소리를 지껄인 것이 아니라, 정말 ‘약자’로 보고 있었다. 예전과 같은 힘이 없어졌다고 해도 당장 이 처형대를 벗어나 저놈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

리헤로스의 전력에 보탬이 되고, 덤으로 복수하기 위해 포박을 풀려고 했다.

─쿵!

두 사람의 경합은 굉장히 요란했다. 보랏빛에 가까운 검푸른 불꽃과 금빛 검기가 쉴 새 없이 맞붙었고 지각을 흔드는 진동을 자아냈다.

검고 단단한 손톱은 리헤로스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긋고 지나갔고, 검은 칼리고의 옆구리를 베며 지나갔다.

아직 심각하게 밀리고 있지 않으니 서둘러 합류해야 했다. 그런데─

─키기기긱

수상한 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가동이 가능한 범위까지 굴려보았다. 그것은 나와 아주 밀접한 곳에 있어 찾는 건 쉬웠다.

처형대의 날을 멈추게 해주었던 창이 진동으로 인해 비스듬하게 기울고 있었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도였다.

“윽…!”

재빨리 몸을 비틀자 날은 덜컹거리며 더 낮게 내려왔다.

목과 손목만 포박에서 빼낸다고 벗어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허리까지 묶여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분명 불길한 소음이자 경고를 무시한다면 산산이 분해된 과학 실험실의 곤충 같은 모습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드드득

이미 한계치만큼 기울어지자 꽂혀있던 창 날이 점점 느슨하게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나무판자를 긁어 나오는 창날은 이드랑제 가문의 자랑답게 예리한 모양이었다.

‘대체 어찌해야 하는 걸까.’

리헤로스는 칼리고와 대치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해 내 쪽은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어떻게든 홀로 빠져나와야만 했다. 입술을 지근지근 씹어대며 고민에 빠졌다.

한쪽 손만 움직여 창을 붙잡는다면, 아니다. 버벅대다가 미처 놓친다면 끝장이다.

아니면 감각이 무딘 왼쪽 팔로 내려오는 날을 막아볼까. 팔 하나 정도는 날아가도 지장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뼈 정돈 우습게 관통할 만큼 날을 잘 벼려놨다면 더 처참한 모습으로 분해될 것이다.

어떤 상상을 해도 ‘최선’의 방법이란 없었다.

모든 경우의 수가 ‘최악’이었다.

─끼이이이이

“젠장, 젠장! 젠장! 어떻게 해야 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손을 놓고 싶진 않았다.

필사적으로 처형대에 진동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였지만, 나뿐만 아니라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로 인한 진동 영향이 더욱 큰 듯했다. 바짝 내려온 처형대 날의 위치로 보아 아마 다음 진동이 마지막이 될 것이리라 확신했다.

칼리고가 바라는 바를 이뤄주게 되어서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보지 못한다는 현실이 불쑥 다가와서일까? 눈앞이 물기로 인해 흐릿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고군분투하는 리헤로스의 모습을 담으려 애썼다.

‘기적같이 살아난다면… 정말 후회 없이 살 거야.’

서슴없이 오만을 되뇌었다.

뒤늦은 참회를 들어줄 ‘신’은 없었다.

─콰아앙!

두 사람이 다시금 충돌했고, 광장의 보도블록이 쩌저적 갈라지고 솟아날 정도로 큰 진동이 일었다.

─덜커덕

최종 신호가 왔다.

후회를 마치기도 전에 죽음이 성큼 다가온 거라면 두 눈을 뜨고 버틸 자신이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런데 아까 공포에 질렸던 것과 다를 바 없이 어떠한 고통도 없었다.

나에게 또 무슨 기이한 일이 벌어진 건지 확인해야 했다.

“아키…!”

오늘은 왜 이리 놀랄 일이 많을까.

애칭과 어울리지 않는 낮고 굵직한 목소리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테네브! 여긴 어떻게…!”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어. 자, 어서 나와.”

“아, 응!”

처형대의 날을 가장 위로 올려 고정해주자 스스로 로프를 끊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행히도 어느 하나 다친 곳 따윈 없었다. 도움이 되는 상태라는 점에서 기뻤다.

“고마워! 정말로!”

더 생각할 것 없이 전력에 보탬이 되기 위해 뛰쳐나가려고 했다.

테네브가 팔을 잡아당겨 제지하는 바람에 일 초 만에 물거품이 되었지만 말이다.

“도망가자.”

“뭐?”

“아키! 제발!”

“막지 마! 대체 왜 그러는데?”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네가 희생되라고 그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

“나는 이렇게 너를 위하고 있는데 너는…! 용사, 용사…! 용사뿐이잖아!”

테네브는 미간을 좁혔고 눈두덩이의 그늘이 평소보다 훨씬 더 어두웠다.

초조해 보였다. 짜증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너… 설마 이 상황에서까지 그를 견제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사지에 내모는 거야?”

“…이 상황에서 그 이야기는 맞지 않아.”

“그렇다면 막는 게 이상하잖아. 사람의 도리라는 게 그런 거 아니야?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게, 당연한 거잖아! 네가 나를 구출해준 것처럼, 나도 리헤로스를 돕겠다는데 왜 막는 건데!”

“여긴 용사에게 맡겨.”

“……뭐?”

“…말 그대로야.”

“우리가 힘을 보태면 금방 끝날 일인데, 왜?”

“그만!”

“테네… 브?”

“제발 억지 부리지 마!”

“…….”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에게 화를 낸 거냐며 노려보기만 했다. 그런데 내 표정을 기민하게 살피고 눈치 보던 테네브는 없었다. 그저 내게 말을 전달해야겠다는 의지만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나도 비겁하게 도망치고 싶지 않아. 그런데…… 지금의 너는 도움이 안 돼! 그러니까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이라 생각해.”

“어떻게….”

“용사도… 네가 무사하길 바랄 거야. 분명히.”

“…….”

“부탁해. 그렇게 해줘. 제발… 도망가자.”

내가 그렇게 도움이 안 됐었나?

테네브를 붙잡고 나 때문에 리헤로스가 곤경에 빠졌다고 혼란스러워했던 상황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리라 생각해서 콤플렉스를 서슴없이 보였었던 것인데, 그것을 무기 삼아 날 공격하고, 도망가자 종용하는 게 아닌가.

그가 보기에도 내가 도움이 되기는커녕 늘 짐처럼 보였던 걸까.

“…갈 거지?”

“…….”

“아키?”

직전의 대화가 상처로 다가온 까닭을 상기해보았다.

그에 대한 해답은 길지도 않고 간단명료했다.

내가 ‘리헤로스를 좋아하는 이유’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나를 과보호만 한 것이 아니었다. 말미엔 보호해주어야만 하는 연약한 존재라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강함을 의지했으며, 내가 자각하지 못했던 장점을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아키!”

“…아니.”

“왜…?”

“리헤로스였다면… 내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 말이 너에게 상처를 줬다면 미아…….”

“리헤로스였다면! 내게 등을 맡겨 줬을 거야.”

“아키….”

“그러니까…….”

“…….”

“난 죽는대도… 리헤로스 옆에서 죽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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