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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112화 (112/127)

112화

이후로는 사진을 보듯 툭 툭 끊겼다.

아킬라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기사의 무덤을 파헤쳤다. 그의 가죽을 벗겨 뒤집어썼고, 일부러 단서를 흘려서 칼리고에게 잡힌다. 모든 사람의 접근이 쉬운 감옥에 가둬둔 뒤, 나와 리헤로스 그리고 테네브를 유인한 것으로 보였다.

‘마주쳤는데 그냥 풀어준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니.’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모든 게 놈이 짜놓은 판이었다. 우린 불나방처럼 뛰어들었고.

눈앞에 펼쳐진 흰 배경에 사선의 실선이 생기더니 점점 벌어졌다.

모든 증거를 봐서 끝난 건가 싶었는데 빛나는 새가 두 동강이 나서 사라지고 있었다.

새장을 들고 있던 기사의 목에서 선혈이 분출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멈춰있는 사이에 마법을 뚫고 공격해온 사람이란 단 한 명뿐이었다.

“칼리고!”

“백작님! 물러나십시오!”

붉게 물든 검은 스피나의 가슴 정중앙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몸을 뒤쪽으로 틀었지만, 칼리고가 훨씬 빨랐다.

─쩡!

두 사람이 교전하는 곳에서 일순간 섬광이 번쩍이고 붉은 스파크가 튀었다.

그 누구도 손을 쓰기엔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속도에 대응할 수 있는 리헤로스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만둬 칼리고!”

“호오, 얼간이 주제에 빠른데.”

칼리고는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고, 더러운 것이라도 묻었다는 듯 검을 현란하게 돌려 털어냈다. 죽음의 끝에서 간신히 건져 올려진 스피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얗게 질려있었다.

“무슨… 무슨 짓입니까? 칼리고 경!”

“그깟 걸 증거라고 가져온 건가? 감히 기사 단장을 모함하려는 역적을 즉결 심판하려고 했던 것뿐이다.”

“무례하군요! 이 마법이 어떤 것인 줄 모르는 게 아닐 텐데요.”

위협을 느낀 이드랑제 기사들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쌌다. 하지만, 스피나는 기사들 틈으로 몸을 빼내려 하며 언성을 높였다.

“당신이 다녀간 곳마다 흐릿하게 남아있던 기억의 잔영을 수집한 거예요. 잔영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웃기고 있군. 나는 잔영을 남기지 않아.”

“잔영은 모든 이가 자연스럽게 남기는 것인데, 증거 인멸했다는 소리군요?”

비아냥대는 웃음을 짓던 칼리고는 얼굴을 완전히 굳히더니 스피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래요. 저는 당신이 잔영을 남기지 않고 지우고 다니는 것이 가장 수상쩍었죠.”

“네놈들이 날 범죄자로 몰기 위해 억지로 만든 증거물일 수도 있는데 믿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증거를 믿지 않는 건 칼리고 당신뿐인 것 같은데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모두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당신이 철저하게 지우며 도망 다녔던 기억의 잔영… 내 훌륭한 기사들이 모두 복원해서 이 자리에 가져왔죠.”

“…….”

“복원 기술이라도 보여줘야 믿나요?”

“아하하하!”

궁지에 몰린 미친 사람처럼 큰 소리를 내며 웃더니 얼굴색을 삭 굳힌다.

“그래서?”

“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나는 놈에게 지시했을 뿐이고 그걸 따르든 안 따르든 아킬라의 몫이었다.”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가…! 그를 사지로 내몬 것을 부정하는 건가요?”

“사지로 내몰아? 내가? 그에게 칼을 겨누었나?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나? 난 그가 복귀할 기회를 주겠다고 한 것뿐이고 충분히 거절할 수 있었다. 그걸 왜 내 잘못이라 하는 거지?”

“그게 협박이 아니라고…!”

“이드랑제.”

“…….”

“돈 좀 몇 푼 만진다고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것인가? 지금 감히 누구에게 기어오르는 건지 사리 분별도 못 하게 되어버렸나? 시건방진 계집 같으니.”

“네 이놈…! 감히 백작님께 망발을!”

이드랑제의 기사들은 분개하며 더욱 스피나를 촘촘하게 에워쌌다. 그렇기에 분홍빛 머리칼은 더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백작이라… 크크큭….”

“…….”

저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고갤 흔들어댔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은 더욱이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누가 보면 이드랑제 가만 고결한 귀족인 줄 알겠는걸. 칼리고 가도 엄연히 지위가 있는 귀족인데. 말이야.”

“그래봤자 남작 아닌가? 네놈이 함부로 말해도 되는 분이 아니다!”

“그깟 이름 뒤에 붙는 작위 따위는 ‘나’를 보호해주지 않아. 모두 힘 아래에서 평등하지.”

“물러서 칼리고!”

칼리고는 기사들이 발을 물린 만큼, 아니 그보다 더 가까이 다가섰다. 기사들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피나가 있을 기사들의 머리 사이를 뚫어져라 보았다.

“당장이라도 네 여린 살결에 내 검을 찔러 넣고 싶어. 살려달라 울부짖으며 애원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널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군.”

“입 닥치라고 했다!”

“크흐흐, 아주 충성스러운 부하를 뒀군. 이드랑제.”

“…….”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 작별 인사는 미리 해 두어라. 거짓으로 기사도를 모욕한 반역자.”

그 말을 끝으로 칼리고는 도약했다.

이드랑제 기사들은 고함을 지르며 스피나를 뒤로 빼내는 데에 급급해 전투태세를 갖출 수 없었다.

무방비한 상태로 뒤늦게 검을 뽑아 드는 그들의 모습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눈을 깜빡이지도 못한 채 그들의 최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의 희생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스피나만은 살아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칼리고!!”

─콰아아아앙!

칼리고의 검은 목표를 향해 부딪혔고, 일순간 굉음과 함께 거대한 충격파가 일었다.

흙빛 먼지와 하얀 섬광이 뒤엉켰다. 광장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고, 흙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저마다 콜록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굵은 입자의 흙이 후두두 떨어져 눈을 뜨기조차 어려웠지만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파악해야 했다.

“네놈….”

분한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는 짐승처럼 그르렁댔다.

뿌연 먼지가 사라지자 검 끝에 부딪힌 것이 백금색의 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단단히 쥐고 있는 손과 팔의 근육은 최대한으로 가동하는 듯 잔뜩 부풀어 있었다.

“잔챙이…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네 상대는 나라는 것을 잊었나.”

“내 물음에 답해.”

“답해줄 의무는 없어.”

“이 몸의 물음에! 대답하라 했다!”

칼리고의 어금니가 닳아 없어질 것처럼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일순간 리헤로스 쪽으로 살짝 기울었지만, 이내 리헤로스의 자세는 되돌아왔다.

“원한다면 답해주지.”

“그래, 어서 지껄여봐.”

“네가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 말인가?”

“하! 바른대로 이야기하라 했건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미쳐버린 건가?”

태연한 척했지만, 놈의 목소리는 스피나에게 거칠게 내뱉었던 것과 달리 확연히 음역의 높낮이가 생겼다. 그의 말에 동요하고 흥분했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두 검날은 어느 쪽으로도 밀리지 않고 드드득 거리는 기분 나쁜 소음만 남겼다.

“용사, 지키라는 세상은 지키지 않고 연애질만 하고 다니니 이제 눈까지 멀었나?”

“…….”

“소꿉장난은 이제 끝이다. 이 세계엔 용사 따윈 필요 없으니 말이지.”

재격돌의 신호탄이었다.

칼리고는 다시 한 발짝 물러났다. 그 몸짓이 후퇴가 아닌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검을 뒤로 돌리더니 왼발을 주축으로 반 바퀴 회전하며 전진했다. 무투대회에선 본 적 없는 몸놀림이었다.

그때도 초반엔 리헤로스 쪽이 밀리는 형국이었는데 새로이 그의 패턴을 학습해야 한다. 내 도움 없이도 먼 길을 홀로 여행해온 리헤로스였지만, 어째선지 그때보다 훨씬 위압감이 넘치는 전투였기에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내 근심을 알 리가 없는 리헤로스의 자세는 검을 맞받아치려는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갈 기다리는 것처럼 정면을 주시하기만 했다.

이렇게 넋 놓고 있다간 정말 리헤로스가 잘못될까 두려웠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리헤…!”

순간, 내 몸 위 전체에 무언가 덮어졌다. 깜짝 놀라 고갤 들어보았는데, 암막 커튼처럼 온 세상이 어두워졌다. 그냥 가벼운 모포가 아니라 무게감이 있는 섬유였다.

중요한 순간에 누가 이런 장난을 치는 것인가 화나지 않을 수 없었다.

“뭐야! 대체 누구…!”

몸부림을 치며 빠져나오려고 하자─

─콰아아아아앙!

곧이어 찢어질 듯한 굉음이 땅을 흔들었고, 강한 바람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내가 덮고 있던 정체불명의 모포에선 타들어 가는 사그락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게가 점차 가벼워졌다. 그로 인해 가벼워진 모포는 내 몸에 걸려 나부끼다가 날아가 버렸고, 그제야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온전히 볼 수 있었다.

“크으윽…!”

칼리고의 팔이 눈에 띄었다. 피부가 잘게 갈라졌으며, 심지어는 검게 타들어 가버린 모습. 어디에서 많이 본 형태였다.

‘맞아, 분명해. 내가 풀뢰고르에 당했을 때와 같은 상처야.’

이상했다. 분명 기사단에서 보았을 땐, 칼리고는 풀뢰고르와 근접해 있어도 아무런 영향도 입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상처를 입게 된 것인가. 둔해진 머리는 생각을 포기하기 직전이었다.

“너 이… 개… 새끼가…!”

“껍데기가 신성력을 두 번이나 버티진 못하는군. 칼리고.”

“하…….”

“이제 죄를 인정해. 도망칠 곳은 없어.”

이 넓은 광장에 자리한 사람들은 침을 삼키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칼리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우리 눈앞에 보인 모든 것들이 그가 부정한 존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랬다.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이리라 추측했다.

숨 막히는 정적을 깨부순 것은 붉은 휘장을 단 글라디우스 기사 중 하나였다.

“단장… 님?”

부하의 애달픈 부름에 어떤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리헤로스를 노려볼 뿐이었고,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크크큭… 크흐흐흐….”

“…….”

“큭… 아아… 재수도 없지. 거의 다 끝났는데.”

“단장님? 이게 무슨….”

칼리고에게 가까이 다가간 기사는 우뚝 멈춰 섰다.

─후두둑

“단, 장… 니….”

이상하리만치 말이 느려진다고 생각했던 입에선 피거품이 부글부글 차올랐다.

칼리고의 검은 팔은 기사의 왼 가슴을 관통하고 있었다. 피가 놈의 팔로 흡수되는 것처럼 보였다. 점차 검게 그을린 팔은 새살이 채워졌고 완전한 형태를 이루고 나서야 기사를 집어 던졌다. 지켜보고 있던 백성들의 발치 앞에 선혈을 튀기며 고깃덩어리처럼 떨어졌고, 이제야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풀뢰고르를 어떻게 손에 넣은 건진 모르겠지만, 노력은 가상하다고 해주지.”

쥐고 있던 검을 바닥으로 떨어트리더니 발로 차서 멀리 보내버린다. 그리곤 회복된 손을 쥐락펴락하며 과시했다.

“칼리고! 멈춰! 이 이상 선을 넘지 마!”

“선? 나에게 지켜야 할 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

“원하는 걸 얻을 수만 있다면 크레아누스도 끌어내려 죽여버릴 테니까!”

칼리고의 입꼬리는 기괴하리만치 치켜 올라갔고 발끝에서부터 푸른 불꽃이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압도되는 살기, 기의 발산이었다.

공격적으로 타오르던 불꽃은 온몸을 감싸더니 그가 입고 있는 ‘껍데기’를 태워버렸다.

“저게 대체… 뭐야…!”

꼭 집게벌레 같은 뿔이 머리 위에 돋아났다. 턱은 곤충처럼 단단해 보였고 치아 전체가 송곳니가 된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온몸은 번들거리는 금속같이 생겼으며, 손톱 또한 인간의 것이라 칭하기 어려웠다.

대체 왜? 어떻게? 칼리고는 인간이지 않은가.

─띵

불쾌한 시스템 음이 들리는 동시에 눈앞엔 글자가 도르륵 떠올랐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문자의 조합은 다시금 시작된 지겨운 악몽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던전] 혼돈의 처형대: 마왕 데반레르 델 칼리고

“나 데반레르 델 칼리고는 선택받았다! 마족이라는 핏줄 없이도 게헤나를 군림할 수 있는 마왕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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