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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 망겜에도 엔딩이 있나요-111화 (111/127)

111화

쇳가루가 눈앞에서 느릿느릿 나부꼈다. 초점은 멀어졌다 가까워지며 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금발을 포착해냈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던 그가 어떻게 온 걸까.

“용사! 무슨 짓입니까!”

“집행을 방해하지 말고 물러나십시오!”

기사들이 처형대 앞으로 뛰쳐나와 둘러싸더니 일제히 무기를 겨누었다. 그런 위협에도 리헤로스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오로지 칼리고만을 곧게 주시했다. 나의 끝을 지켜보기 위해 나온 수많은 인파는 점점 뒤로 물러났다. 마치 전투 공간을 확보해주는 몸짓에 가까웠다. 나를 두둔하는 용사 또한 적대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뭐 하는 거야…!’

의외의 등장에 놀라서였을까 평소와 같이 타박하는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때 리헤로스는 제 앞에 뻗쳐 있는 서슬 퍼런 날 끝에 닿을 만치 나섰다. 그의 저돌적인 모습에 당황한 기사들은 무기를 끌어당겼다.

“멈추라고 했습니다!”

“칼리고!”

지금의 리헤로스에겐 정말 칼리고만 보이는 듯했다. 나와의 거리는 꽤 멀었지만, 눈빛은 감히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전에 칼리고와 마찰했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악신 카르말록스를 섬기는 종교를 설파하고, 아크리스를 이용해 알리엔토 대륙을 파멸로 이끌 계획을 꾸미고 있는 네놈을 처단하러 왔다.”

“저게 뭔 소리야?”

“단장님이…?”

그가 내뱉은 문장에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나 역시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리헤로스의 가슴을 겨누고 있던 기사들의 무기는 점점 방향을 잃고 슬금슬금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문이 막힌 듯 서로를 마주 보며 술렁이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칼리고는 처형대의 끄트머리까지 나오더니 고개를 꺾지도 않고 장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멍청한 놈들. 그걸 믿는 건 아니겠지?”

“단장님…!”

“말 같지 않은 선동으로 형 집행을 막은 것은 참신하군. 네 객기에 박수를 보내마.”

광장에선 칼리고의 마른 박수 소리만이 퍼져나갔다. 그 외에는 마치 소리 내는 법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모두 짠 듯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그래…! 단장님에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맞아! 죽고 싶은 게냐! 썩 꺼져!”

“용사님! 이러면 당신에게까지도 죄를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을 변호한 이드랑제 백작께서 얼마나 곤란하시겠습니까!”

이드랑제의 이름이 나오자 리헤로스는 마침내 제 앞을 가로막은 기사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 말을 꺼냈던 기사는 자극이 잘 먹힌다고 생각했는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백작께선 알고 계십니까? 당신이 판결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는 사실을요!”

“그럼요. 그에게 창을 만들어 준 것은 바로 저니까요.”

“백작…?!”

인파를 뚫고 나온 여성의 목소리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주목했다. 리헤로스만이 예상했다는 듯 목소리의 주인이 있을 자리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말이다. 스피나의 분홍빛의 머리칼은 고급 비단처럼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비즈가 잔뜩 달린 화려한 드레스 대신 흰 승마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나 스피나 델 이드랑제는 리헤로스의 투쟁을 지지하고 있어요.”

모두 경악했다. 넋이 나간 소성, 탄식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에 반해 여유롭게 지팡이를 돌리며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엔 어떠한 망설임도 후회조차도 없었다. 자연스레 칼리고의 반응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놈의 낯짝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 말은 단장님 모함을 동조한다는 것입니까! 이게 얼마나 위험한 말씀이신…!”

“쉿.”

“…….”

“그야 완벽한 증거를 찾아냈으니까요.”

스피나의 손짓에 뒤를 지키고 있던 분홍색 휘장의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은빛 새장을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엔 빛나는 작은 새가 있었다. 가장 적극적으로 피력하던 글라디우스 기사는 급기야 스프링 달린 것처럼 튕기어 나왔다.

“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그만두십시오!”

“말로만 하면 믿지 못하는 거 아니었어요?”

“무슨… 무슨!”

말문이 막힌 글라디우스 기사를 제치고 이드랑제 가문의 기사는 새장의 문을 열었다. 갸웃거리던 새는 날개를 펼쳐 포르르 새장 밖을 빠져나오더니 섬광이 터트렸다. 저마다 짜증에 찬 신음과 비명이 들렸는데, 이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으로 인해 아무런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광경’이란, 빛 속에서 초췌한 아킬라가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시작됐다. 초췌하다고 해도 마지막으로 마주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멀끔했다.

‘어째서 저를 쫓아낸 겁니까. 저는 그 누구보다도 충성을 맹세한….’

‘멍청한 것. 나를 믿지 못하나?’

이 목소릴 알고 있다. 모를 수 없었다.

‘단장님….’

‘조만간 원래 자리로 복귀하게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게 정말입니까!’

‘대신 그전에 네가 할 일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단장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 되어있습니다!’

복귀할 수 있다는 말에 아킬라는 당장 배를 갈라 간이라도 내어줄 것 같았다. 그만큼 절박해 보였다.

‘용사에게 반감을 품은 사람을 모아서 그들에게 흑마법을 가르쳐라.’

‘예? 그건….’

‘하하하! 겁나나? 실망스러운데 아킬라. 그 각오, 포부는 어디 간 것이냐?’

‘그게… 아닙니다. 단지 이유가 궁금해서….’

‘네가 직접 배우라는 게 아니야. 너는 모아서 불씨를 던져주기만 해. 그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칼리고는 아킬라 앞에 책 하나를 던졌다.

그 책이 클로즈업되자 익숙한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본 적이 있었다. 어디에서 보았을까. 아득한 기억의 저편을 더듬어가며 건져낸 단어는 ‘오두막’이었다. 불타 남은 조각이 눈앞의 영상과 딱 맞아떨어졌다.

결국 칼리고의 제안에 수긍한 듯 책을 집어 든 아킬라의 눈빛은 비장했다.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끝난 줄 알았건만─

‘아니야.’

‘…….’

‘더 힘을 가지고 뭉치게 해야 한다. 지금 같은 얄팍한 결집력으론 내가 바라는 그림이 나오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킬라는 지쳐 보였다. 그는 시킨 것만 하고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타입이 아니란 걸 알았다. 충성심과 기사단 복귀에 대한 열망. 그것들은 그를 자연스럽게 움직였으리라.

‘네가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네?’

‘기껏 모아놓은 사람이 하는 시늉만 하니까 모인 자들이 깊게 빠져들지 않는 것이지.’

‘하지만 단장님 흑마법을 꼭 제가 해야 하는 겁니….’

‘왜, 기사단에 돌아오고 싶지 않아졌나? 미련이 사라져 내 명령을 귓등으로 듣는 건가?’

‘아닙니다!’

‘그러면 일을 제대로 마쳤으면 좋겠는데?’

‘……죄송합니다.’

칼리고는 비린 미소를 지으며 아킬라의 축 처진 어깨를 두드렸다.

‘네 자리는 아직 남아있어.’

‘…….’

‘그 누구도 드나들지 않는 공간이 되었지. 무슨 말인지 이해했나?’

‘그게….’

‘아킬라. 못 본 사이에 심각하게 아둔해졌군. 이래서 내 심복으로 다시 쓸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데.’

‘죄송합니다….’

‘그곳에 비밀 공간을 만들어놨다. 멀리 떨어져 있어 목표를 잊고 느슨해지는 것 같으니, 내 곁에서 진행하도록 해.’

‘단장님 곁에서… 말입니까?’

시무룩했던 아킬라의 안색은 확연히 밝아졌다. 칼리고와 점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 그에겐 큰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영상에 녹아 흐른 감정까지도 느껴졌다.

‘내일, 기사들을 데리고 감찰을 나갈 예정이다. 경비가 허술해질 때 들어오면 된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만날 땐 유의미한 결과가 눈에 보였으면 좋겠군.’

‘네, 저를 믿어주십시오.’

어느 순간부터 어둠의 종교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언데드 형태의 마족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분명히 이 대화는 아킬라가 적극적으로 종교를 이끌기 전의 상황으로 보였다.

눈앞이 새하얘지더니 다음 장면이 곧바로 이어졌다.

칼리고 앞에 웅크리고 있는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끄윽… 윽….’

‘…….’

‘저는 언제… 돌아갈 수 있습니까?’

‘…….’

‘제… 몸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후우우….’

포식자의 한숨 소리에 연약한 피식자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와 한쪽 눈동자의 홍채가 분열되었다가 합쳐졌다 하며 기괴한 모습을 자아냈다.

‘한심스럽군. 그깟 것 하나 못 버티는 정신력이라니.’

‘저는……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단장님을 위해…!’

‘…….’

‘그런데 어찌… 그렇게 말씀하실 수가….’

그 어떤 곳도 굽히지 않던 칼리고는 한쪽 무릎을 구부리더니 아킬라의 어깨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그래 안다. 너는 늘 그랬지. 내 말을 아주 잘 듣는 아이였어.’

제 마음을 헤아려주는 듯한 말에 아킬라는 콧등을 구기며 울컥울컥 치솟는 마음을 가까스로 참는 것 같았다. 아마 어떤 보상보다도 누군가의 위로가 가장 필요했으리라.

‘그래서 그 힘을 얻은 소감은 어떤가?’

‘예…?’

‘네가 원래 가진 것보다 몇 배, 몇십 배의 증폭된 능력을 얻게 된 게 아닌가?’

‘저, 잘….’

‘잘 모르겠다고? 아직 누구와도 싸워본 적이 없어서 그런 모양이군.’

‘저는… 싸우고 싶지….’

‘하하하, 그건 네 ’진짜 마음‘이 아니다. 아직 버리지 못한 나약한 마음이 널 흔드는 것뿐이다.’

‘…….’

‘너는 내게 인정받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어.’

‘…….’

‘그렇지?’

‘……네.’

‘그러니 우리의 새로운 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

어깨에 올라가 있던 손은 이내 그의 양 뺨을 감쌌다. 새빨간 눈동자에는 퀴퀴하고 역한 검은 연기가 일렁이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분이 답을 줄 것이다.’

겁에 질린 듯 눈썹을 구부리고 있던 아킬라는 떨리는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네, 네에… 알겠습니다.’

흔들리는 목소리는 애달프게 쏟아져 나왔고, 답을 도출해낸 칼리고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것이 부하를 향한 다정한 미소가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영상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길이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똑같이 보고 있을 것이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칼리고의 만행을 되돌려 보고 있다.

다음 영상은 아킬라의 집무실에 있는 비밀 공간에서 시작되었다. 온갖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로 벽이 빼곡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아킬라의 앞에 칼리고가 서 있는 모습이었다. 이전과 달리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어대고 있어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으윽… 그으윽…. 그만….’

‘아킬라.’

차갑디 차가운 붉은 안광엔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 따윈 없었다. 기계적으로 내려다본 채 제게 집중하지 않은 부하를 부를 뿐이었다.

‘우으윽… 큭… 흑….’

‘아킬라!’

‘단장… 님….’

‘내 조만간 너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길 것이다.’

‘임무… 임무라니요?’

‘너를 궁지로 내몰고 글라디우스 기사단의 명예를 더럽힌 용사를 끌어내릴 기회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뭡니까…!’

‘그놈들은 네가 설파한 종교의 실체를 찾기 위해 올 것이다.’

‘…….’

‘겁먹지 말아라. 다 생각이 있으니.’

‘부디 말씀해주세요.’

‘놈들이 너를 찾아내기 전에 내 손에 잡히는 것이다.’

‘네…?’

‘악랄한 그놈들이 추궁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내가 보호해주는 것이지. 그리고 너는 기다리면 된다.’

‘보호… 정말입니까?’

‘흐음, 기사단에 다시 돌아올 몸이니, 네 원래 모습은 숨기는 게 좋을 것 같군.’

‘네…! 네! 그래야죠… 그래야죠. 크흐흐… 윽….’

일그러진 얼굴에는 희로애락이 뒤엉켜 있었다.

‘그래. 그저 소리에 귀 기울이며,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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