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밤새 날뛰는 호기심을 진정시키며 다스렸다. 세상을 뒤덮었던 어둠은 눈부신 금빛 햇살 커튼으로 가리어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이웃'의 실체가 드러났을까 호기심에 건너편을 들여다보았지만, 그늘 밖으로 빠져나온 흰 발목 위로는 아직 어두워서 볼 수가 없었다. 어느 각도에서든 빛이 잘 들지 않는 방인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전사의 발목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지, 아니야. 리헤로스가 날 과보호할 때 얼마나 짜증 났는지 기억해.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지금까지도 버리지 못한 고리타분한 선입견은 직접 겪어봤음에도 불현듯 툭 튀어나왔다. 역시 사람은 한순간에 변하지 않는가 보다. 더는 우리에게 대화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하늘 꼭대기에 걸릴 때 즈음 감시하던 기사는 내 앞에 멈춰 섰다. 곧이어 철장은 비명과 같은 굉음을 내며 열렸다.
“일어나라. 이제 끝을 봐야지.”
고압적인 말투의 기사는 벌레 보는듯한 경멸의 시선을 보내왔다. 하지만 화나지 않았다. 나약한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날 세웠던 알량한 자존심도 끝이다. 정말 모든 게 끝밖에 남지 않아 받아들였다. 나의 죽음이 이 세계를 평화로 이끌어준다면 기꺼이 희생할 생각으로 왔다. 어떤 거친 모욕과 폭력도 참작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나의 선함을 믿어준 사람과 대화한 게 더욱 침착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싶네.’
비록 이 순간에도 가슴속에 사무치게 보고 싶은 얼굴이 있었고, 그의 품에 안겨 위로받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으니까 더한 미련은 거두었다. 제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자 긴 포승줄이 연결되어 끌려 나왔다. 더럽고 퀴퀴한 감옥도 더는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애틋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잘 있어라. 안녕이다.’
발자취가 닿았던 모든 것에게 마음속 인사를 나누던 중, 감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크리스!”
‘이웃’이었다. 이미 나온 감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태여서 철장에 바짝 붙어있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고개만 살짝 돌려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당신은 꼭 살아남아요. 억울하게 잡혀 온 거라면 끝까지 자기변호라도 하고요.”
“아크리스….”
“잘 있어요.”
“절대로 끝까지 희망을 놓으면 안 돼요! 리헤로스… 리헤로스가!”
그의 이름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발끝에 무게가 실렸다. 나를 데려가기 위해 온 기사들 역시도 그 이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중 하나가 그녀가 들어있는 철창을 걷어찼다.
─콰앙!
“꺄악!”
“조용히 해! 이젠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무능한…!”
분에 찬 목소리로 그녀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어댄다. 나에게 무례한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그저 말을 한 것뿐인 그녀에게 너무한 처사였다. 순간 포승줄을 잡아당기고 그쪽으로 튀어 나갈 뻔했는데, 팽팽하게 당겨진 줄 끝에 선 기사를 보고선 그만두었다.
‘제기랄….’
정말 죄수 주제에 시끄럽게 구는 점이 짜증이 난 것인지 나와의 대화를 막으려 그런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끝내 그녀의 대답을 마저 듣지 못한 채 끌려가게 되었다.
‘리헤로스가 나를 탈출시킬 계획을 짜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는 측근이었나?’
어쩌면 이드랑제 가문의 심복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거라면 오히려 스피나가 리헤로스를 잘 묶어두고 있었으면 좋겠어. 휘말리지 않도록….’
현명한 스피나라면 그리 권했을 것이다. 비록 몇 번이고 다잡은 마음은 확고해졌지만, 곱씹을수록 착잡해졌다. 마치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중력이 다르게 적용되는 것처럼 무거웠다. 분명 마수에게 쫓길 땐 너무나도 길고 높게만 느껴지는 계단이었는데, 이번엔 아무리 발끝이 무겁던 들 어찌나 짧던지 아쉬울 지경이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느끼는 감상이 천지 차이였다.
지상의 뒷문으로 완전히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 하나가 내 머리에 천을 뒤집어씌웠다.
“처형장에 도착하기 전까진 드러내지 말고 조심히 이동해. 그전에 돌 맞아 죽을지도 모르니까.”
“예, 알겠습니다.”
“…….”
얼굴이 드러나면 제 손으로 해코지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긴 할 것이다. 그래서 뒷문으로 이동하였고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씌운 것이겠지. 배려 받았다고 해야 할까 귀한 산 제물이 된 기분이라고 할까 어느 쪽이든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기사 하나가 나를 부축하여 말 등 위에 태웠다. 쥘 수 있는 고삐는 없고 안장의 손잡이 부분을 꽉 쥐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불쾌한 승차감을 버텨냈다.
‘거의 다 왔나.’
점점 웅성거리는 인파의 소리가 가까워졌다. 자리를 잡겠다며 뛰어가는 아이들이나 너희들이 보면 안 되는 것이라며 호통치는 어른의 목소리, 역시 글라디우스 기사단은 대단하다며 추앙하는 목소리 따위가 섞여 어수선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곧이어 말발굽 소리는 완전히 멈추었다.
“자, 이제 내려.”
나를 이곳까지 보좌해준 기사는 앞으로 꽁꽁 묶인 팔을 잡아 부축해주었다. 워낙 높이가 있는 데다 시야가 완전히 가려져 있으므로 제대로 딛지 못해 바닥을 한차례 굴러버리긴 했으나, 큰 부상은 아니었다. 기사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주춤주춤 일어나는 내 팔을 잡아당기기만 했다.
“도착했군. 이제 나가지.”
“옙.”
아마 이곳은 처형인 대기실 같은 곳인 모양이었다. 양옆에서 내 팔을 붙든 기사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해서 힘을 들이지 않고 걸을 정도였다.
─끼이이익
“나왔다!”
“저놈이야!”
“세상에…!”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는 동시에 수많은 야유와 탄성이 쏟아졌다. 끼익 끼익 불안한 소음을 내는 어느 단상에 올라서자마자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던 복면이 벗겨졌다.
갑작스레 마주한 햇빛은 수백 개의 플래시가 눈앞에서 터지는 것 같았다. 빛에 익숙해지자 라이오펠의 넓은 광장을 빼곡히 채운 사람들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온몸에 닿는 따가운 감각은 작열하는 태양 때문인지, 군중들의 시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좋은 의미로 주목받은 것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쓴웃음이 나왔다. 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눈에 띌 그 사람이 있을지, 눈으로 좇았다. 하지만 그의 성향상, 사랑을 약속한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러 올 것 같진 않았다. 그래야만 했다. 만인에게 욕지거리를 들으며 짓밟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시선은 바로 앞에 놓인 처형대로 자연스레 옮겨졌다. 분명 단두대와 비슷했지만, 조금은 다르게 생겼다. 목과 손목만 끼워 넣는 형태가 아니라 허리까지 넣는 구조로 칼날은 T자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목과 손목도 잘리면서 척추도 완전히 부서지겠군.’
목만 잘라 유린하겠다는 의도보다는 제 기능을 할 수 없도록 산산조각 내겠다는 의도의 처형 도구임이 틀림없었다. 운 좋게 살아남는 것은 기대도 못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를 정도로 처형대를 이루고 있는 나무판자들은 원래의 색상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얼룩덜룩했으며, 콧대를 시리게 만드는 쇳내가 훅 풍겨왔다. 둔해졌던 현실감각은 완전히 돌아왔고 온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분명 인간은 경험을 통해 공포가 극대화되지 않던가, 경험해보지도 못한 죽음의 공포는 어째서 이리도 두려운 것일까.
‘겁내지 마. 네가 선택한 거잖아. 눈 한 번 딱 감으면 끝이야.’
애써 겁먹은 자신을 설득했다. 그때, 낯익은 얼굴이 단상에 오르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하더니 그의 손짓 하나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죄인은 마족이라는 신분을 숨긴 채 수많은 백성을 기만했고, 국가를 조롱하였다. 같잖은 위선을 떨며 정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국가의 치안을 어지럽힌 죄. 그것 하나만으로 처형의 명분은 명확하다.”
기사단장 칼리고였다. 그의 오만한 표정은 이상하리만치 오늘따라 유독 기괴하게 뒤틀린 것처럼 보였다.
“자! 마족, 아니… ‘마왕 아크리스’의 처형이다! 정의를 배반한 악의 처참한 종말을 똑똑히 보아라.”
“세상에…! 마왕이라니!”
“마왕을 어떻게 잡은 거야?”
“오길 잘했네. 언제 이런 구경을 해보겠어?”
“잘 됐다 더러운 마왕 놈!”
“어서 죽이자! 놈의 목을 처형대에 넣어!”
더 이상 사람들의 야유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직면한 공포는 다른 개념이었으니까. 분명 칼리고는 고위 마족이라는 것까지만 추측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내가 마왕인 사실까지 알아낸 것인가. 역시 진짜 선의의 역할엔 수많은 정보통과 지원이 존재하기 때문에 민감한 정보까지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편파적인 정보의 차이를 이해할 길이 없었다.
‘칼리고가 진정한 선이 맞는 걸까. 내가 역시 틀렸어.’
칼리고는 나의 목 뒷덜미를 붙잡고 처형대에 밀어 넣었다. 그저 그의 행위에 힘없이 따를 뿐이었다. 목과 손목, 허리의 잠금쇠를 모두 채우고 나서 그는 내 귓가에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게, 내 말에 순종했으면 좋았을 것 아닌가. 죽는 그 순간까지 상기해라. 넌 나를 거슬렀기 때문에 실패한 거다.”
그의 말이 맞았다. 순종해야 했다.
칼리고에 대한 선택지가 분명히 영향이 있었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나의 선택이 이렇게 큰 파장을 몰고 올 줄은 몰랐으니까. 누구도 아닌 리헤로스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다른 사람이 ‘아크리스’ 몸에 들어와야 했어. 그랬으면 모두 행복했을 거야.’
지독한 현실에 순응하기 위해 끝내 눈을 감았다.
“집행!”
칼리고의 호령이 끝나기가 무섭게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쇠 날이 아주 빠르고 날카롭게 마찰하며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캉!
고막이 찢어질 듯한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척추의 신경부터 끊어진 탓일까 몸의 어디든 아무런 절단 감이 들지 않았다.
죽음이 이리도 아무런 감각이 들지 않는 것이라면 왜 겁을 먹었을까, 싶던 찰나 손이고 발끝이고 움직이는 게 여전히 느껴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조심스레 눈꺼풀을 올린 후, 고갤 돌리니 분노에 찬 칼리고가 보였다.
늘 체면을 신경 쓰던 놈의 얼굴은 사방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고개를 살짝 위쪽으로 들어 올리자 미처 완전히 내려오지 못한 처형대의 칼날이 보였다.
날 사이에 끼인 금속 창으로 인해 저지당한 것으로 보였다.
“저 빌어먹을… 새끼가…!”
칼리고의 시선이 멈춘 곳, 군중이 경악을 금치 못한 채 바라보고 있는 곳을 황급히 쫓았다.
그 끝엔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서 있었다.
“리헤로스!”
“칼리고. 끝을 내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