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포탈을 지나쳐 나오자 생각한 장소의 바로 앞에 도착했다. 푸른 불꽃이 되감듯 빠르게 사그라들자 흙과 잿가루가 섞인 바람이 일었다. 이 형상을 뒤늦게 발견한 기사들은 아연실색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 저거!”
"마족 놈이다!"
“다시 나타났다! 모두 전투태세를 취해!”
그들은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내 쪽으로 검과 창을 겨누었다. 가까이 다가오진 못했지만, 누구 하나의 방아쇠만 당겨져도 전투가 벌어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
조심스레 무릎을 하나씩 꿇었고, 양손을 천천히 들어 전투 의지가 없음을 표현했다.
"뭐야…?"
“뭐 하는 거지?”
“모두 경계 태세를 풀지 마! 기습할 수도 있다!”
“단장님을 모셔와!”
“너 이 새끼! 무슨 허튼수작이냐!”
그들은 어떠한 감정도 내비치지 않으려 노력하는듯했지만,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내게 소리를 지르는 기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뒤로 한 발자국 물렀고, 나는 그를 자극하지 않도록 낮고 느린 목소리로 답했다.
“투항하겠다.”
그리곤 곧바로 기사단 건물의 4층 언저리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칼리고! 나를 처형대에 올려라!”
“뭐야…? 처형당하러 온 거라고?”
“미친 거 아니야…?”
“X발! 무슨 속셈이냐고!”
“이게 네가 원하는 것 아닌가! 칼리고!”
더 이상 다른 기사들에게 답을 던져주지 않았다. 그저 칼리고를 통해 벌어진 모든 상황을 수습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머지않아 주시하고 있던 4층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꽤 멀리 있어 그 형체가 칼리고인지 아닌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안광으로 유추되는 붉은 빛이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
“…….”
기사들은 경계를 풀지 않은 시선을 고정한 채, 손목에서부터 팔까지 굵은 포승줄로 묶었다. 이깟 줄은 끊어내고자 한다면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엔딩’을 맞이하러 온 것이니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얌전히 포승줄을 잡고 앞장서는 기사를 따랐다.
칼리고는 나를 체포하기 위해 구태여 행차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때다 싶어 주먹질이라도 날아올 줄 알았건만 기사들 또한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폭풍 전야와 같은 고요함뿐이었다.
“호외요! 내일 고위 마족의 처형이 있대요! 광장에서 한다고요!”
지하 감옥으로 이동하는 순간에도 밖은 어찌나 소란스럽던지 창을 통해 들려오는 호외 소리를 통해 내 처형일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빠르게 소식이 전해질 줄 몰랐는데, 마족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래… 이게 순리에 맞는 거야.’
나를 이끄는 기사는 지하 감옥의 깊은 곳으로 가지도 않았다. 일반 죄수들이 갇히는 감옥 중 하나였다. 테네브와 함께 갇혔을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이를 지시한 칼리고도 내가 정말 투항할 생각으로 왔다는 것을 눈치챈 거겠지. 다행인 건 리헤로스가 스피나를 설득하기 전에 제시간에 도착한 것 같았다. 리헤로스가 마족인 나를 감싸기 위해 칼리고와 충돌하는 것만은 막고 싶어 서둘렀던 것이기에 만족했다.
‘그래도 여기는 뭐라도 보이니까 낫네.’
차가운 감옥 바닥에 주저앉았다. 꽁꽁 묶인 포승줄은 제멋대로 날뛰는 내 모든 것을 제어해주는 마지막 수단 같아서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현실에서 인생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 같았을 때, 막연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말 죽음을 경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태연한 척하고는 있지만, 겁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지.’
칼리고에 의해 생살이 찢어지고, 눈앞이 번쩍이는 고통은 처음 겪었었다. 현실에서 평범히 살아갔다면 느껴볼 리 없는 수준의 괴로움이지 않던가. 그것을 생각하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은 얼마나 생생할지 오금이 저려올 지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을 푸우우 뱉었다.
“떨고 있어요?”
가느다랗지만, 청아한 목소리가 감옥을 울렸다. 비현실적인 음색이었기에 이번에도 환청인가 싶었다. 그래서 대꾸하지 않았다.
“아크리스…. 들려요?”
“어…?”
“맞은편이에요. 여기.”
어둠 속에서 새하얀 손이 느릿느릿 흔들렸다. 감옥은 푸르스름한 안개가 낀 것처럼 어두워 제대로 된 색상을 인지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나에게 인사를 던진 사람의 모발 색이 옅은 색이라는 것만은 식별할 수 있었다.
“그들의 눈을 잘 피해 도망친 줄 알았는데 결국 갇히고 말았군요.”
“저를 아세요?”
“모를 리가 있나요? 백발에 호박색의 눈동자를 가진 뾰족귀의 남자. 아크리스. 라이오펠, 아니 이 알리엔토 대륙에선 이미 유명인이잖아요.”
“…….”
분명 좋은 의미로 유명해진 것은 아니었다. 돌려 말할 줄 모르는 직설적인 모습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귀족 영애와 다르다 보니 자연스레 스피나가 떠올랐다. 스피나는 그녀보다도 강단 있고 확신에 찬 목소리라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점이 있긴 했다.
생김새를 뚜렷하게 묘사하는 것을 보아하니 반대편에서는 내 쪽이 보이는 듯했다. 나도 상대의 인상착의와 실체가 궁금해졌기에 눈을 가늘게 구부려 보기 위해 애썼다. 그녀는 말을 더듬더듬했다.
“아앗,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닌데,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아닙니다. 여러모로 유명한 게 사실이니까요.”
기분이 나빠 눈을 흘긴 줄 아는 모양이다.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당신이 있어 다행이에요.”
“저도 늘 적의 가득한 공격적인 대화만 하다가 아닌 사람을 만나니 마음이 편하군요.”
리헤로스와 테네브를 제외하고는 나와 직접적으로 친한 인물은 없었으니 말이다. 두 사람 외의 인물들이라 하면 리헤로스가 없으면 끊어질 그런 관계였다. 나와 대화 한 번 나눠보지 않은 사람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편견으로 대한 모양이군요.”
“어쩔 수 없죠. 출신 성분이 명확하니.”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했다. 적어도 몇백 년은 마족과 싸워오던 인간들이 한순간에 마족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품기란 어려웠으니 말이다.
“아크리스, 저는 그들과 다르게 생각해요.”
“왜죠?”
“제가 듣고 느끼고 조사한 것을 전부 설명해주기엔 너무나도 긴 이야기가 될 거예요. 다만… 악이란 것은 쉬이 정의할 수 없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어요.”
“정의할 수 없다는 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악은 어느 것보다 정의하기 쉬운 관념 아닙니까?”
“당신은 분명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이고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악'이라 정의하기엔 모든 생물은 너무나도 입체적이죠. 당신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신의 출신과 존재만을 가지고 '악'이라 판별하겠지만요.”
“그럼 당신은 저를 '선'이라 믿습니까?”
“네, 저는 당신이 선하다고 믿어요.”
“…….”
나도 모르게 짧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제 어디를 보고 그리 확신하는 겁니까?”
“그야 제가 보고 들은 게 많으니….”
“아하하… 거짓말.”
“네?”
“고작 몇 번 보고 들은 것 가지고 착하다고 생각한다고? 내가 무서워서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닌가?”
“…….”
“심기를 거스르면 당장이라도 철장을 박살 내고 당신에게 해코지할 수 있다는 걸 알겠지.”
“아크리스….”
“그러니 일부러 내가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거 아닌가? 내 존재가 무서우니까, 두려워서 비위를 맞추는 거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세웠고 그녀가 있을 만한 곳에 시선을 두고 눈을 치켜떴다. 위압감이 느껴지도록 살기를 담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대꾸가 없었다. 이로 인해 그녀도 다른 사람과 다를 것 없는 ‘편견’을 가지게 되겠지. 다행이었다. 괜히 나를 두둔하다가 죄나 가중되지 않길 바랐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굳이 좋은 이미지로 남고자 할 이유는 없었다.
“…들은 대로네요. 아크리스.”
“흐음?”
“당신은… 제게 굳이 그럴 생각도, 의도도 없는데 일부러 센 척하는 거죠?”
“뭇… 세, 센 척?”
“저는 살기가 뭔지 알아요. 억지로 쥐어 짜내듯 노려봐도 진짜 죽이고자 하는 살의와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답니다. 보기보다 수없이 죽다 살아난 몸인걸요. 참, 제 모습이 보이지 않죠?”
“…….”
“제 목소리가 가늘어서 편견으로 대하시는 것 같은데요? 아마 가녀린 귀족 영애를 떠올리고 계시겠죠.”
“…나 참.”
“푸후훗. 저는 누구보다도 저 자신을 믿어요. 그러니 제가 봐온 당신의 모습을 믿는 것이겠죠. 저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저도 아크리스를 믿지 못했을 거예요.”
“…우리 어디에서 봤습니까?”
“당신은 저를 못 봤을 거예요. 저는 멀리에서 지켜보고 있었지만요.”
“대체 누구십니까? 이름이라도 말씀을….”
철장 건너편의 이웃은 그저 소리를 내 웃기만 했다. 나의 마지막 물음엔 대답해줄 의향이 없다는 신호였다. 그리하여 앞으로 쏠려있던 몸이 한 겹 풀어져 다시금 벽에 기대게 되었다. 열띤 이야기 이후의 찾아오는 소강상태였다.
‘이렇게까지 맹목적으로 믿어주는 사람은 리헤로스와 테네브뿐이었는데.’
어쩌면 속도에 욕심을 내지 않고 차근차근 해결해 나갔다면 모든 인간의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평소처럼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이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나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으로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런 곳에 갇혀있다 보니까… 자꾸만 나쁜 생각이 들어요.”
유리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풍경이 산들바람에 부딪히는 듯한 청아한 목소리의 '이웃'이 꺼낸 말이었다.
“어떤 생각이죠?”
“…….”
“아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면 안 해도 됩니다. 캐물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모두 속고 있어요….”
“속고… 있다니요?”
“제가 말했던 '선'과 '악'.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죠. 눈으로 보이는 것과 실체가 다른 거요.”
“실체가 다르다…라… 누가 그러는 겁니까?”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그녀가 무어라 말하려고 하자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기사가 곤봉으로 철장을 세차게 두드렸다.
“쫑알쫑알 시끄럽다! 죄를 지었으면 조용히 뉘우치기나 해! 내일이면 처형당할 놈들이 뭔 말이 이리 많아?”
“…….”
우리의 대화를 막으려는 듯 기사는 나무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감시했다. 철장 건너의 이웃도 기사의 무례함에 저항할 힘이 없는 듯 조용히 하라는 지시를 따르게 되었다.
나만 처형당하는 게 아니라 '이웃'도 처형이 결정된 죄수였다. 나의 고루한 편견 때문일까, 그녀는 사형당할 만큼 잘못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는데, 어떤 억지 죄목으로 끌려온 게 아닐까 싶었다. 심란한 마음은 달랠 길이 없었다.
천장 끄트머리에 작게 난 세로 창살이 달린 창문엔 어느덧 땅거미가 지다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창살 건너편은 모포를 덮는 듯한 부스럭 소리만 났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그저 앉은 채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뒷이야기가 궁금하지만… 됐어. 내가 알아서 뭐해. 괜한 오지랖일 거야.’
더 이상 들쑤시지 않아야 한다. 내 역할은 완전히 끝났다. 남은 이야기는 주인공이 해결할 것이다. 그러니 그를 위해 얌전히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